완전히 행복해 지는 방법
  -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나와 부처와 신은 하나다

 

불성(佛性), 신성(神性)이 있다는 말은

곧 나와 부처, 나와 신이 하나란 뜻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가 신이요 붓다로써 하나란 뜻이다.

 

일체 모든 존재가 하나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

그것도 나약하고 어리석은 중생으로써 하나가 아니라

부처로써, 신으로써 완전한 하나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신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는,

내가 바로 부처라는

동체(同體)와 불이(不二)사상이야말로

인류의 오랜 성자, 현자, 선각자들과

모든 종교들의 공통된 가르침이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에

내가 상대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에게 행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도울 때 사실은 나 자신을 돕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도우면서도 도왔다는 상을 낼 필요가 없는 이유가

상대방과 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밥을 먹으며 내가 나에게 밥을 보시했다고 하지 않듯이

내가 상대방에게 보시한 것은

사실은 내가 나에게 한 것과 다르지 않다.

 

상 없이 보시하라, 무주상 보시하라,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

그것은 바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억지로 무주상보시를 해야만 한다는 윤리적인 지침이 아니라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다면

당연히 아무런 상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불성과 신성이란 것은

부처님의 성품, 신의 성품 그 자체라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이나 신은 불완전하거나, 부족한 존재가 아니다.

그야말로 꽉 차 있고, 완전하며, 온전한 분들이다.

그렇기에 사실은 불성과 신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라는 존재 또한 완전하고 완벽하다.

그렇기에 사실은 보시해도 한 것이 아니다.

 

너도 완전하고 나도 완전하며,

너도 풍요롭고 나도 풍요로운데

무엇을 주고 받을 것이 있는가!

주고 받았다 한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에너지의 이동일 뿐이지

그것이 좋고 나쁘거나,

주어서 대단하거나 주지 못해 아쉬울 것도 없는 것이다.

거기에 아무런 상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상을 내지 말고 보시하라는 말은

‘이렇게 하라’는 윤리 규정이거나, 명령이 아니라

그저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나온 가르침인 것이다.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불성이 있다, 신성이 있다는 말은

곧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했다.

아니 어떻게 부처가 신이 불완전할 수 있단 말인가.

 

완전하고 완벽하며 충분하고 충만하다.

그렇기에 불성과, 신성과 다르지 않은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써 더없이 완벽한 존재이다.

모두가 신이요 붓다로써 완전하다.

 

그것은 다른 말로, 이 세상 자체가 완전하다는 의미다.

이 세상의 본 바탕, 근원은 이러한 완전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완전성을 이루고 있는 힘이 바로

자비와 사랑의 에너지다.

즉, 이 세상은

완전한 사랑의 에너지,

둘이 아닌 완전한 자비, 동체대비 그 자체인 것이다.

 

추상적으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란 희망의 약속이 아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지금 여기에서의 생생한 현실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내가 완전한 부처란 말인가?

내가 어찌 신이란 말인가?

그건 너무 엄청난 이야기이며,

또한 너무 불경스러운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다.

진실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진실로 말씀해 주셨고,

인류의 수많은 성인들도 같은 말을 해 왔다.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보니

모두가 부처였다고 말씀하셨다.

구제해야 할 중생이 따로 없다고 하셨다.

 

 

 

 

삶의 완전성을 믿지 못하는 이유

 

그러한 진실된 말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믿지 못할까?

왜일까?

 

그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해

내 스스로 ‘나쁘다’고 판단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판단과 분별작용이

아무런 문제도 없는 무분별의 중립적인 현실에

끊임없이 판단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괴롭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는 것일 뿐이다.

 

본래는 완전한 자비의 불성이고,

완전한 사랑의 신 그 자체만 있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악마, 사탄, 마왕 파순이

우리를 꼬셔서 지옥으로 빠뜨린다고?

 

그렇지 않다.

악마도 사탄도 마왕도 없다.

사랑 밖에 없는 완전한 우주법계 어느 곳에

마왕이나 악마, 사탄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신과 사탄이 싸운다는 것은 순전한 상징일 뿐이고,

부처와 마왕 파순의 싸움 또한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상징한 것일 뿐이다.

 

사랑의 신이 세상을 창조한 근원이라면

어찌 사탄이나 악마를 창조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순전한 인간의 상상이거나,

상징이었을 뿐이다.

내 바깥에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악마나 사탄은 없다. 완전한 허구일 뿐이다.

 

그것은 다만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이며,

아상이고, 에고라는 허상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

즉 내면의 번뇌, 욕망, 집착, 화, 어리석음, 아상인 것이다.

 

악마는 바로 아상이며 에고다.

사탄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생각과 판단이다.

마왕은 바로 탐욕과 화와 번뇌이다.

 

즉 내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나, 상황이

우리를 괴로움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괴롭게 만들 수 있는

어떤 외부적인 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내 스스로 만들었다.

나의 판단과 해석이

그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을 가져왔을 뿐이다.

 

 

 

 

이미 행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남부러워하는 한 좋은 직장의 중역 간부가 찾아와 말한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조금 무리수를 두어야 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자니 진급을 못 할 것 같고,

진급을 하자니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한 일을 해야 하는데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다른 질문을 드렸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시냐고.

지금 자신의 삶이 대체적으로 행복한가 하고.

과거에 생각했던 행복을 지금 이루었는가 하고 여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시더니 하는 말씀이

그러고 보니 자신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다.

처음에 오르고자 했던 자리에 지금은 이미 와 있고,

벌고자 했던 정도의 경제력을 지금 누리고 있고,

아내도 하고 싶은 일 하며 행복해 하고,

자식들도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릴적 자신이 생각했던 바로 그 행복의 삶이

어느 샌가 벌써 실현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지금껏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몰랐다.

왜 몰랐을까?

여전히 돈도 더 벌어야 하고,

진급도 더 해야 하고,

자식들도 더 잘 뒷바라지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부족하고 더 필요하고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꿈이 이루어진 바로 그 순간에 조차

여전히 그 행복을 누리기는 커녕

더 높은, 더 많은, 더 큰 목적을 향해 내달리고자 하는

욕심과 집착 때문에

이미 찾아 온 행복을 스스로 걷어 차 버리곤 한다.

 

행복은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 추구는 죽을 때 까지 끝없이 계속되지만

누리고 만끽하는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다.

 

누릴 수 있는 것을 걷어 차면서

어떻게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가.

 

누리는 것을 더 많이 누릴 때

세상은 우리에게 보다 더 많이 누리도록 해 준다.

반대로 누리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바라기만 할 때

세상은 부족과 결핍을 가져다 준다.

 

진실이 이러할진대

어떻게 할 것인가?

누릴 것인가 아니면 추구할 것인가.

 

삶이란

추구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누리고 느끼며 만끽해야 할 무엇이다.

 

 

 

 

삶의 완전성을 삶에서 드러내는 법

 

주어진 삶을 누릴 때

비로소 삶의 완전성이 드러난다.

본래부터 완벽했고, 완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추구하고 빌고 욕망할 때

존재 본연의 완전성은 사라지고

결핍과 부족과 실패가 창조되고 만다.

 

사실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일 뿐이다.

사실은 무언가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필요하다고 욕망한 것일 뿐이다.

사실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복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행복은

어떤 완벽한 상황이 갖춰졌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행복을 누릴 때

바로 그 완벽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고,

어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왔던 것은

완전한 환상일 뿐이다.

 

지금 이대로 행복하다.

행복하기 위해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행복하기 위한 어떤 특정한 조건’이라는 것은 없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행복지수를 보라.

 

부처는 어떤 조건도 필요치 않는다.

신은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만약 무언가를 얻어야지만 그 때 가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성과 신성의, 우주법계의,

그리고 우리 자신의 완전성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부처도, 신도

우주 법계도 언제나 완전하다.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 또한 완전하고 완벽하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완전하다면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으며,

실패로 인한 괴로움도 없고, 실패 자체도 없다.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돈을 더 벌어야 하는 이유는

아직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

나 자신에 대해서

불완전하고 부족하며 어리석다고 판단하는

바로 그 생각이 모든 문제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아는가!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는

그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삶을 창조하는 토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러한 현실이 창조된다.

우리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마음 먹은 대로 현실이 창조된다는 화엄경의

준엄한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

그것이 바로 나다.

그리고 내가 바로 부처요 신이다.

또한 내가 바로 당신이고, 우주이며, 존재 자체이다.

 

그리면 그린대로 이루어진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무엇을 그릴지에 대한 토대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 토대의 생각을

‘나는 부족하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실패할 지도 모른다’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다’

‘나는 근기 낮은 수행자다’

라는 데 둘 것인가,

 

아니면

‘나는 완전하다’

‘나는 풍요롭다’

‘나는 행복 그 자체다’

‘내가 바로 부처요 신이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다’

‘실패라른 것은 없다. 삶은 언제나 성공적이다’

라는 데 둘 것인가.

 

전자의,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음의 토대 위에서는

언제나 ‘더 필요하고 성공해야 하고 싸워 이겨야 하고

더 많이 벌어야 하며,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현실을 그려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은 곧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더 필요하다는 생각의 본질에는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고,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 이면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면

오히려 두려워하는 그것이 창조된다.

사실은 바로 그 토대의 생각을 그려내는 것이다.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은 세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토대는 어떤가?

완전하고 풍요로우며 행복하고

삶의 모든 순간이 그대로 성공이며

나와 너가 모두 부처요 신이라면 어떨까?

 

완전한 존재는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더 벌 것도, 바랄 것도, 욕망할 것도 없다.

언제나 충만한 행복과 만족과 풍요로움과 평화가 넘쳐 흐른다.

넘쳐 흐르는 그 행복을 나누어 주는 것,

바로 그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 밖에는 할 것이 없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으며,

부처가 되어야 겠다는 환상도 없다.

그저 매 순간 순간 완전함을 누릴 뿐이다.

 

그러한 토대 위에서는

언제나 삶의 완전성이 창조된다.

 

아니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완전했으며 완벽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고,

바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존재 본연의 고향,

완전성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귀의, 귀향!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이 말은 상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거나,

뜬구름 잡는 말이거나,

비현실적인 이론적이기만 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완벽하게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완전하다고 외치라.

지금 이 자리에서 풍요와 행복을 누리라.

 

완전하고 풍요롭다면

내 돈이 아까워서 상대방을 돕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무한한 풍요로움이란

우주 전체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것이다.

내가 아까워하고, 축적하고, 적다고 생각하게 되면

바로 그런 궁핍과 결핍의 결과가 만들어질 뿐이다.

넉넉하고 풍요롭다는 마음으로

도울 수 있는 모든 이를 두려움 없이 도우라.

그 마음에 우주 근원의 에너지인

풍요와 완전성이 깃들게 될 것이다.

두려움 없이 풍요의 토대 위에서 돕게 된다면

도우면 도울수록 더 많은 풍요가 당신을 찾아 올 것이다.

 

완전히 행복하다면

무언가를 더 바랄 것이 없지 않은가.

미래에 오게 될 행복을 꿈꿀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완전무결한 행복이라고 외치라.

아무리 작고 사소한 기쁨이라도

그것이 바로 완전한 행복임을 알아차리라.

넘치는 행복 그 자체인 사람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행복을 흩뿌릴 수밖에 없다.

나처럼 타인도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 행복한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진다.

 

내 삶에 실패란 없다.

언제나 삶은 완전하며 성공적이다.

부정적으로 보이는 현실 또한 사실은 성공이고,

실패라고 보이는 상황 또한 더 깊은 차원에서 본다면

성공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실패라는 단어를 내 삶과 결부시키지 말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실패가 곧 성공이다.

내 삶은 언제나 성공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으라.

현실의 상황에 대해 성공 혹은 실패라고 해석하지 말라.

성공적인 삶을 사는 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두려운 현실을 창조하지 않는다.

언제나 성공만을 창조해 낸다.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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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사진 : 인도 맥그로드 간지에서 만난, 인도에서 만났던 가장 예쁜 소녀^^]



내보내는 것이 들어오는 것이다

돈으로 보시를 하면 내 돈이 나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리 많은 돈을 보시를 해도
언젠가 그 돈은 분명히 다시 들어오게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로 칭찬해 주고, 찬탄해 주어 보라.
무엇이 돌아오겠는가.
칭찬과 감사와 찬탄이 돌아온다.
칭찬해 주는데 욕이 돌아올 일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법칙도 이와 같다.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느냐에 따라
무엇이 다시 내게로 들어올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언제나 영적인 균형을 맞추는
대평등의 일들만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이 우주의 운행 법칙이다.

나에게서 나간 것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언제나 다시 내게로 들어온다.

내가 상대방을 괴롭히면
상대방과 나와의 에너지는 불평등하게 되고
우주는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상대방이 나를 괴롭힐 일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욕을 하면
욕을 얻어먹을 일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주의 조화로운 작용이다.

예를 들어 직장상사가 직원을 욕하고 괴롭혔다 치자.
그러면 우주적인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다.
상사는 화를 풀었지만 직원은 괴롭힘을 당했다.
상사는 +에너지가 되었지만 직원은 -에너지가 되었다.
둘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직원이 어떻게든 다시 상사를
욕하고 괴롭힐 일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불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설사 이번 생에 두 사람이 다시 못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에너지의 불균형은 남기 때문에
두 사람은 다음 생에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
에너지의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교적인 표현으로는 인연이고 업보인 것이다.
‘저 사람과는 악연인가봐’라고 할 때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다음 생에는 반대로 직원이 직장상사로 태어나고
상사가 부하직원으로 태어나게 된다.
상사는 에너지의 불균형을 균형 있게 맞춰야 하기 때문에
우주적인 작용으로써 이상하게 그 부하직원만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사가 부하직원을 괴롭히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만남과 상황을 주선하는 것이 바로 우주법계고,
아바타에서 말한 에이와고,
불교에서는 불성이라고, 기독교에서는 신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인디언들은 어머니 대지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무엇이라고 부르든 상관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주는 이와 같이
대 평등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을 언제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세상이 불평등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차원의 진리에서 보았을 때
이 우주는 지극히 평등하며
언제나 완전한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진행된다.

아주 쉽게 누군가에게 욕을 해 보라.
무엇이 되돌아오는지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사랑하고 칭찬하면
사랑받고 칭찬받을 일들이 생겨난다.

감사함을 느낄 때 더 많은 감사할 일이 찾아오고,
불만을 느낄 때 더 많은 불만스러운 일이 찾아오게 된다.
감사를 내보내면 감사가 들어오고,
화를 내보내면 화낼 일이 들어오며,
만족하면 만족할 일들이 생기고,
무시하면 무시 받을 일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우주의 평등하게 균형을 맞추는
영적인 작업인 것이다.
이처럼 우주의 에너지는 언제나 균형을 맞출 뿐이다.
그것은 우주의 작용, 혹은 법칙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작용을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함이 없이 그저 균형을 맞출 뿐이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면
자연은 균형을 맞추려고 기상이변 등을 일으켜
본래적인 자연의 상태로 되돌아 가려고,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사람도 몸을 함부로 다뤄 탁한 에너지가 몸 안에 쌓아면
감기몸살 같은 형태를 통해 내보내줌으로 인해
우리 몸의 자정작용, 균형작용을 돕는다.

이 우주 전체와 그 안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존재는
언제나 이와 같이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에너지가 흐른다.


삶의 균형을 맞출 뿐

일전에 보았던 아바타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제이크 설 리가
에이와에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을 때
여주인공 네이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에이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오직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지”

우주법계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오직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다.
진리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고, 안팎의 차별이 없다.
다만 균형을 맞출 뿐이다.
에너지의 불균형을 없애는 일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돈을 훔쳤다면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 것이다.
그 때 우주법계는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훔친자에게서는 앗아가고,
빼앗긴 자에게는 되돌려 주는 작용을 만들어 낸다.
욕을 했으면 욕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고,
사랑하면 사랑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 사이에는
이처럼 정확한 균형이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우주법계가 하는 일이며, 진리가 하는 일인 것이다.

한창 유행처럼 번지던 ‘시크릿’에서는
이러한 진실을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무엇이든 내가 내보내는 것이 끌어당겨 지는 것이다.
생각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나,
불교의 화엄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
혹은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서
마음먹은대로 세상에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다는 말이
모두 이러한 법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법칙,
즉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라는 것은
언제나 증명되고 있다.

우주는 이처럼 다만 우리가 내보내는 것을 들어오게 할 뿐이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는다.

우주의 본질에는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른 것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에서, 판단과 분별에서 옳고 그름이 생겨나는 것이지
우주법계에는 그런 차별이 본래부터 있지 않다.
다만 내보내는 것을 분별 없이 들여보낼 뿐이다.


내보내는 것에 중심을 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낼 생각보다는
더 많이 얻고 바라며 가지려고만 한다.
내보내야만 들어온다는 우주의 평등한 이치를 모른 채
내보내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나누고, 베풀고, 보시하며,
내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고, 얻고, 빼앗고, 성취하고,
쌓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우리가 이 우주를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내보내는 것에 있다.
진실은,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란 사실이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이 곧 나에게로 들어올 것이다.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는 곧 무엇을 받을 것인가와 같은 말이다.
무엇을 나누고 베풀 것인가가
곧 무엇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짓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들어오는 것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가,
내보내는 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로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보내는 것 뿐이다.
내보내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지만
들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우주법계의 의지일 뿐이다.

즉 우리가 우리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들어오는 것이 아닌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더 크게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엄밀이 말하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우리는 오직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내보낼까,
나눌까, 베풀까, 보시할까, 회향할까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을 뿐이다.

들어오는 것에는 아예 관심을 갖지 말라.
들어오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법계의 소관일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니!


내보내는 것과 업보(業報)

불교의 업(業)사상도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어떤 업을 지었느냐에 따라 어떤 과보를 받는지가 결정된다.
업에 따라 보(報)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업을 지었느냐가
곧 어떤 것을 내보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몸과 말과 생각으로
무엇을 이 세상에 내보냈느냐에 따라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업보의 법칙이라고 말해지는 이 법칙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사이의 법칙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육근이 바로 나 자신이고
육경이 외부의 대상을 말하는 것이니
나와 세상 사이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육근이 즉 내가 무엇을 육경으로 내보냈느냐에 따라
육경은 보를 보내주는 것이다.
그래서 육근은 업을 짓고 육경은 보를 받는다.

우리가 업을 지으면 그에 따른 보를 받는다는 이 업보의 이치가
바로 내보내는 것을 필연적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법칙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업보의 법칙이
바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우주의 이치인 것이다.
우주는 언제나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
업보라는 어떤 사상을 만들어내려고 애쓴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악행을 함으로써 악업을 지으면
둘 사이의 에너지는 불균형을 이루게 되고,
그 때 우주는 그 불균형을 균형과 조화로써 맞추기 위해
당연하게 과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업보니, 인과니 하는 것이 바로
이 우주법계의 대 평등성, 균형과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육근은, 즉 우리는 오직 업을 지을 뿐이지
어떤 ‘보’를 받는지까지를 결정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보’라는 것은 ‘다르게 익어간다’는 의미로,
육근이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우주법계에서는 어떤 과보를 받을지를
천편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온갖 정보, 업력, 인연 등을 총괄적으로 따져
‘보’를 최종적으로 보내주는 것이다.

우주법계는 총체적이고,
시공을 초월한 전체적인 관점에서 판단한 뒤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언제 받아야
그나마도 그 사람에게 영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즉 우주법계는 ‘보’를 받을 때
항상 자비와 사랑의 바탕에서
그러한 결정을 바로 그 때 내려주는 것이다.

이렇듯 우주 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위한,
우리를 돕기 위한 자비와 사랑의 관점에서
순리롭게 행하는 바 없이 무위(無爲)로써 일을 행한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업을 지었느냐에 따라
어떤 보를 받느냐가 결정된다는 큰 틀은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과보를 받는 것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법계에서 어떤 과보를 언제 받을지를 결정한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떤 과보를 받을까가 아니라,
어떤 복을 받을까가 아니라,
어떤 업을 지을까, 어떤 복을 지을까,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어떤 행위를 할까,
즉 어떤 것을 이 세상으로 내보낼까 하는데 있는 것이다.

‘나는 매 순간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기로 예정된 것이니
들어올 것에는 신경도 쓰지 말고,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놓아버리고
오직 내보내는 것에만 마음을 모으라.


책 ‘시크릿’과 영화 ‘아바타’와 불교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바타에서 말한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과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
그리고 불교의 업보, 인과응보의 법칙은
모두 같은 진리를 다르게 표현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나 자신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나를 중심으로 내가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다.
시크릿의 표현으로 하자면
내보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끌어당기는 것인 것이다.

아바타에서는 이것을 전체적인 이치로써 설명하고 있다.
즉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우주는, 에이와는,
불성은, 신성은 언제나 내보낸 것을 다시 받게 함으로써,
즉 내보낸 것을 끌어당기게 해 줌으로써
균형을 맞춰주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표현에 의하면
내가 업을 지음으로써 과보를 받게 될 수밖에 없다는
인과응보, 업인과보, 업보의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아바타에서 말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
업인과보의 법칙 등은 전체적인 진리를 표현한 말이고,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은
내보내는 것 보다는 ‘받는 것’에 중점을 둔 표현이며,
불교의 업사상은
받는 것 보다는 ‘내보내는 것’에 중점을 둔
실천적인 표현인 것이다.

우리가 시크릿에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사람들은 나에게서 나가는 것보다
나에게로 들어오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내가 짓는 업(業)보다는 받을 보(報)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시크릿에서는
돈도 끌어당길 수 있고, 인간관계도, 건강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끌어당길 수 있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설명되어지고 있다.
물론 무엇을 내보냈을 때 끌어당겨질 수 있는지도
설명되고는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점은
내 바깥에서 무엇이 들어올 것이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에 있다.

직접적으로 우리의 의지로써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놓고 보았을 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끌어당기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내보내느냐에 있다.

끌어당기느냐에 중점을 두면
끌어당겨질 것에 대해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기에
그 의도가 순수해 지기 어려운 점이 있다.

보시를 할 때나, 선을 행할 때도
바라는 바 없이 하라고 하지 않는가.
내가 보시를 하면 많은 돈이 끌어당겨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면
그 보시는 큰 결과로 이어질 수 없다.
그 보시의 행위 자체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가진 풍요를 누리고, 만족함으로써
부유함이 끌어당겨진다고 할 때라도
끌어당겨질 미래의 결과를 마음에 두고
풍요를 누리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며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끌어당김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의 중점은 끌어당겨질 것이 아니라
내보낼 것에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보다 ‘내보내는 법칙’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내보내는 것이 곧 끌어당겨지는 것이라는 법칙에.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끌어당김의 법칙을 말했을 때에 비해
당황스러워 한다.
우리는 내보내기는 싫고 끌어당기는 것은 좋아한다.
끌어당긴다는 표현이 우리의 욕심을 더 충족시켜주며,
우리를 달콤하게 유혹하기 쉽다.
그렇기에 ‘내보내는 법칙’에 대해 실망감이 들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내보내는 것이 곧 끌어당겨지는 것이다.
현재 속에 미래가 있다.
우리는 다만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만 생각하면 된다.

무엇이 끌어당겨 질 것이냐, 들어올 것이냐를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투명하게, 이타적으로, 사랑으로
다만 내보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주적인, 불성과 영성에서 보내주는,
에이와의 무한한 에너지, 힘이 거기에 붙게 될 것이다.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
바로 거기에 이 모든 법칙을
내가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운행시킬 수 있는
힘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오늘은 또 무엇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화와 증오와 미움과 욕설과 질투와 탐심과
집착으로 얼룩진 에너지를 세상으로 보내지는 않았는가?
그것은 곧 내가 내보낸 것이기에 곧 내가 받을 것이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 아내에게 자식에게 바라지 말라


아내에게 바라는 마음을 내보내지 말라.
자식에게 좋은 성적을 바라고, 좋은 성격을 바라지 말라.
그저 내가 먼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남편이 되어 줌으로써 좋은 남편의 모습을 내보내고,
좋은 아버지의 모습을 내보내 주라.
그러면 내가 내보낸 것과 일치하는
좋은 아내, 좋은 자식이 딸려 올 것이다.
내보내는 것이 들어오는 것이니.

아내에게 내조를 잘 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결국 아내가 내조를 못 한다는 것을 내보내는 것이 아닌가.
내조를 잘 하기를 바랄 때 우리는 우주를 향해
‘내조 못하는 아내’라는 메시지를 내보냄으로써,
결국 지금 보다 더 내조 못하는 아내를 과보로 받게 될 것이다.

자식에게 좋은 성적을 바란다는 것은 결국
자식의 나쁜 성적으로 인해
실망스럽다는 마음을 내보내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정확히 그것이 다시 들어 올 것이다.
자식의 성적이 더 나빠지기를
우주법계에 요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대로에 만족하고 감사해 하라.
만족과 감사를 내보내라.
아내의 부족한 부분을 보고 그 점을 지적함으로써
‘부족한 아내’라는 부정적 에너지를 내보내지 말고,
그래도 잘 하는 부분을 보고
그 점에 감사해 하고 만족하는 마음을 내보냄으로써
아내에게 감사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라.

정확히 바로 그 만족스러운 점, 감사한 점이
내보낸 만큼의 크기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아내가 달라지겠지 하는
끌어당겨질 것을 미리 마음에 두고 행해선 안 된다.
끌어당김의 법칙이 아닌 ‘내보내는 법칙’에 마음을 쏟을 때
그 힘은 더욱 투명해지고 순수해져 우주법계의 힘이 붙을 것이다.

자신의 월급에, 연봉에 불만이 있는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연봉에 대한 불만을 내보내지 말라.
돈에 대해 작다는 불평어린 마음을 내보내면
우주는 고스란히 적은 돈을 되돌려 줄 것이다.
그러나 작은 월급일지라도
그 돈으로 인해 행복해 하고, 감사해 하고,
풍요로운 마음을 내보낸다면
우주법계는 고스란히 그 돈으로 인한 풍요로움을
더 많이 만들어 보내 줄 것이다.

당신이 회사 사장이라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사원들에게 혹은 고객들에게
적은 이익을 되돌려 주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회사가 부자가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회사가 부자가 되는 것, 더 많은 돈을 버는 것,
그것은 정확히 끌어당기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끌어당겨질 것, 부자가 될 것에 대한 마음은 완전히 비워버리라.
그리고 내보내는 것에만 집중하라.
즉 사원들에게 회사가 번 이익을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어 주라.
안철수 연구소의 안철수 사장은 아무런 조건 없이 회사의 지분을
자녀들이 아닌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나.

또한 고객들에게 돈을 끌어당기려는 마음을 버리고,
다만 고객들에게 무엇을 나눌 수 있을지를 고민하라.
고객들에게 어떤 것을 베풀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라.
무언가를 얻을 생각 없이 다만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고,
내보내 줄 것에 마음을 집중할 때
바로 우주법계의, 에이와의, 불성이며 신성의
사랑과 자비의 한량없는 힘이 붙을 것이다.


먼저 자신에게서 시작하라

자신의 삶에 전적으로 만족하라.
전적으로 감사를 표명하라.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라.
그것은 곧 자신의 삶에 무한한 만족스러운 일들과
감사할 일들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전적인 사랑을 보내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감사를 느끼는 자에게
무엇이 흘러나오겠는가?
또한 반대로 자신을 억압하고, 미워하고, 자괴감을 느끼며,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서 무엇이 내보내지겠는가?

아름다운 것, 지혜로운 것, 사랑과 자비, 만족과 감사와 같은
진리의 덕목들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그것이 되어야 한다.
먼저 자신부터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며,
만족하고, 예뻐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끌어당겨질 것이 아닌
내보낼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끌어당겨질 것, 받을 것, 얻을 것에 집중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은 아직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부족하니 바깥에서 무언가를 끌어옴으로써
나를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언제나 완전하고 완벽하다.
삶은 언제나 풍요롭다.
지금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한다면
미래의 그 어떤 순간에도 만족은 없다.

반대로 나 자신이 꽉 차 있어서 흘러 넘친다면 어떻겠는가?
나 자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감사와
풍요로움과 만족이 넘친다면
애써 외부에서 무언가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내 안에 자가발전소가 있어서
무한히 생산할 수 있는 자력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엇을 바깥에서 바라겠는가?
그 사람은 바깥에서 무언가를 끌어오려고 하기 보다는
내 안에서 생산한 것을 바깥으로 나누어 주고, 내보내 주고,
베풀어 주는데 더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

매 순간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주의 깊게 살펴보지 못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주의 한 마음이 내보내는 것들로 인해
힘겨워할 일이 생길 것이다.

하루를 정리하며 매일 밤 ‘내보낸 일기’를 적어 보라.
오늘 하루 무엇을 내보냈는가를 돌이켜 보라.
물질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내보낸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마음으로 내보낸 것이 없는지도 주의 깊게 살피라.
신업과 구업이 중요하지만 의업이 더없이 중요한 것처럼
마음으로 무엇을 세상에 내보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야말로
‘내보내는 법칙’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무언가가 내게 끌어당겨지기를 바라지 말라.
무엇을 얻을까, 벌까, 가질까를 생각지 말라.
무엇을 내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라.

내가 태어나서 죽는 그 날까지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고 보시하며 나누었는가?
내가 내보낸 것들로 인해 세상은 얼마나 밝아졌는가?
세상이 밝아질 때 곧장 내가 밝아지는데 성공한 것이다.







Posted by 법상

 

  홀로그램과 우주, 수행

     - 우주의 생성원리와 본질적 수행

.

                  - '09. 6. 21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과학으로 본 시크릿, 과학으로 본 불교 

 

홀로그램의 이해

아마 여러분들께서 홀로그램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홀로그램이란 홀로그래피에 의해 생성된 어떤 대상 물체의 삼차원 입체상을 말하는데요, 아마도 때때로 현실의 대상과 똑같이 생긴 삼차원의 입체영상 같은 것들을 보았던 그런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물질과 똑같이 생겼는데 막상 가서 만져보면 그저 투영된 허상일 뿐인 홀로그램 입체상 말입니다. 이 홀로그램을 어떻게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생각해보다 아주 쉽게 나온 한 가지비유가 있어서 그걸 한번 설명해 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아주 큰 냄비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주 큰 동그란 냄비가 하나 있습니다. 물이 담겨 있는 냄비인데 거기에다가 세 개의 조약돌을 세 곳에 정삼각형으로 동시에 탁 떨어뜨립니다. 동시에 조약돌 세 개를 냄비에다 탁 떨어뜨리면 이게 풍덩 떨어지면서 파장을 형성하겠지요. 세 개가 나름대로 파장을 형성해 나간다 말입니다. 그 파장이 냄비 끝까지 나아가겠지요. 이것이 만약 호수였다면 그 파장은 어쨌든 호수 끝까지 퍼져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세 개의 파장이 서로 서로 간섭현상을 이루어낸다 말이지요. 그렇게 물의 표면에는 간섭현상의 무늬가 형성되는데, 우리가 간섭현상이 이루어 질 때의 그 냄비 물의 가장 위의 표면, 돌은 이미 떨어졌고 그 위 냄비의 표면을 얇게 급속으로 냉각을 시켜서 얼린다고 생각을 해 본단 말입니다.

급속으로 얼려서 냉각을 딱 시켰습니다. 냉각시킨 냄비의 물 표면만 얇게 잘라내 하나의 얼음판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결치는 간섭현상 무늬의 얼음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얼음판 하나뿐입니다. 조약돌이 어디에서 어떤 지점으로 몇 개가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가 없고 단지 그 얼음판 하나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얼음판의 한쪽 편에서 빛을 쏘아주면 반대편에서 빛을 바라볼 때 무엇이 나타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얼음 판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빛을 쏘아 주었을 때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나타나느냐하면 애초에 떨어뜨렸던 조약돌 세 개가 등장하게 됩니다. 어느 지점에, 어떻게 생긴 조약돌이, 정확히 세 개가 떨어졌다는 것까지의 모든 정보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약돌의 입체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빛을 쏘아 주었더니 분명히 조약돌은 없고 얼음판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조약돌의 입체상을 나타내 준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겉에 있는 얼음판이 단지 간섭무늬의 파장의 형태일 뿐이지만 그 조약돌 세 개가 떨어졌던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섭무늬는 어떤 정보의 형태로써 그 판에 기억되고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도 참 신기한 노릇인데 이제 이 얼음판을 팍삭 깨어 봅니다. 얼음판이 완전히 조각이 나 버렸어요. 조각이 나 버렸는데 그 조각난 얼음판 중 하나의 작은 조각을 들고서 동일하게 똑같이 한쪽에서 빛을 쏘아 줍니다.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보일까요? 아까 동그랬던 원판과 동일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원래의 둥그런 큰 원판을 볼 때와 똑같이 작은 하나의 조각만을 가지고 빛을 쏘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쪽에 보이는 것은 처음과 똑같이 정확히 세 개의 조약돌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져 보인단 말이지요.

 

우주가 하나의 홀로그램 허상

이게 바로 조금 쉽게 홀로그램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데요. 다시말해 어떤 간섭무늬의 파장은 정확하게 그 입체의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심지어 파장 전체가 아니라 그 파장의 일부분에 어떤 한 부분의 조각만 가지고도 그 전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것이 홀로그램을 이해할 수 있는 조금 쉬운 방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현대 과학에서는 이러한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 영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물질 우주가, 이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즉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영상이 실재인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재가 아닌 환영이요 허상이고 마야이듯이 이 세상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근본불교의 무아(無我)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과 일치하는 견해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겉으로 보기에는 실재하는 것 같고, 물질 우주가 실재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이며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 비실체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홀로그램에서 보자면 이 우주가, 나와 여러분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이 세상 모두가 형성된 것이 사실은 그것 자체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그램이라는 어떤 비실체적인 것의 투영이요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파동, 파장 속에 다양한 정보를 저장했다가 그 정보가 입력된 파장이 마치 실제 존재하는 현실의 모습인 것처럼 투영시켜 보여주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 몸도 쪼개고 쪼개어 들어가면 분자, 원자, 양성자, 중성자, 원자핵, 전자 해서 계속 쪼개어 들어 가 보면 결국 파동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물질 우주의 모든 존재는 파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파동은 홀로그램처럼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아까 파장을 담고 있는 얼음판 조각 하나에서 조약돌 3개의 입체상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조각과 파장 하나에서 전체를 볼 수 있듯이, 나라는 존재 속에서 이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그 어떤 물질이든, 사람이든, 생명이든, 공간이든 그 모든 것은 다양한 형식의 파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온 우주의 모든 전체 정보를 다 볼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모든 파장은 우주 끝까지 전해져 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의 파장 하나 조차 우주 끝까지 전해집니다. 그렇기에 우주는 그 모든 파장의 정보들을 한 조각 얼음이 그랬듯이 그 파장 안에 전체의 정보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우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우주가 시작하는 곳부터 끝나는 곳까지 다 쫒아 다니면서 낱낱이 조사하고 살펴보고 해석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자리에 앉아서 내 마음자리 하나 깨달았더니 우주 전체를 깨닫게 되었다고 그러잖아요,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볼 수 있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가 전체를 내포하고 있다는 홀로그램의 이치를 주위에서도 종종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몸이 아프다 그랬을 때, 손만 딱 보면 손바닥 안에 우리 몸의 오장육부가 다 들어 있고 연결 되어 있다 그러잖아요. 그래서 수지침을 할 때도 몸의 어느 곳이 아프든 손바닥과 손가락에 침을 놓으면 그 몸의 아픈 부분도 곧 회복이 됩니다. 어릴 적에 언치거나 소화가 잘 안된다 싶으면 어머님께서 손의 특정부분을 눌러 주심으로써 금방 치유되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손바닥 안에 우리 몸 전체가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신도님 중 한 분은 귀를 연구하는 분이 계신데요, 귀, 작은 귀 요거 하나에 우리 몸을 구성하는 머리, 몸통, 사지와 그 속에 들어 있는 각종 장기에 해당하는 혈자리가 분포되어 있고, 오장 육부가 다 담겨있기 때문에 귀만 보면 그 보살님은 어지간히 다 아신다는 겁니다. 귀의 모습은 어머니 자궁 내에 거꾸로 들어 있는 태아의 자세와 같아 인체의 축소판처럼 우리 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 보살님께서는 그 사람의 몸 상태가 어떤지,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체질은 어떤지, 정력은 어떤지, 심지어 성격이나 심성은 어떤지 여부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하시데요.

또 다른 예로 DNA라는 것도 보면 하나의 어떤 작은 DNA속에 나라는 존재 전체의 모든 정보가 다 담겨 있잖아요.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도 이론적으로 한다면 나라는 존재를 고스란히 다시 복재 해 낼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홀로그램에서는 이 세상이 고스란히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에게 보여지는 모든 물질 세계는 사실 실체적인 물질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파장, 파동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물질은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우주는 입자라는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항상 파동의 형태로만 있다가 우리가 그것을 관찰했을 때 관찰하면서 입자라는 것을 원하고 요구할 때 그때서야 비로서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고 얘기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항상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파동의 모습으로 존재하다가 우리가 관찰 했을 때 비로소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공간이나 모든 물질이나 일체 모든 것들 일체 만유는 파동의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이겁니다.

사실 조금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면 이 우주에 파동 아닌 것은 없습니다. 생각의 에너지도 하나의 파동이구요. 라디오 전파 같은 것도 하나의 파동이고 전파, 전자파, 전자기파, 마이크로파, 음파, 지진파, 중력파, 빛 등 모든 것이 파동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양한 파동 파장들이 이 우주를 형성시키는 모습인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물질도 딱딱한 물질이 아니라 파동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그것들이 다만 물질처럼 우리 눈에는 보일 뿐인 것이지요. 홀로그램의 입체상처럼 진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인 것입니다.

허상이면서 그 허상을 이루는 하나의 파동은 이 우주의 전체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 속에 우주 전체의 정보를 담고 있고, 한 티끌 속에도, 심지어 우리가 무정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속에도 우주의 모든 정보가 고스란히 그 속에 담겨 있다,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연기법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 사실과 실체가 없다는 무아, 공의 가르침, 일즉일체다즉일이나 일미진중함시방이라고 하는 화엄경의 가르침과도 일맥 상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국소성과 홀로그램, 그리고 연기법

이러한 우리가 우주 전체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는 연기적인 사실을 양자물리학의 비국소성, 비국지성이라는 말로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잠시 비국소성과 홀로그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몇몇의 실험과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전에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에서의 물의 결정 연구에서 걸프전쟁이 있었던 날 모든 물의 결정이 찌그러들었던 실험이나, 『식물의 정신세계』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학자가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교통사고가 날 뻔하던 바로 그 순간에 연구실에 있던 식물의 검류계 단추가 파르르 떨었던 실험을 되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실험에서 살펴보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 한 방울 조차 지구 반대편에서 있었던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식물 또한 자신에게 물을 주고 키워주던 주인이 교통사고가 나던 바로 그 순간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증명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을 살펴보지요. 물리학자 라즐로는 거짓말탐지 전문가인 백스터와 함께 한 실험에서 진주만 전쟁 당시 해군 포병으로 참가했던 피실험자들 입에서 백혈구 세포를 채취하여 몇 십, 혹은 몇 백 k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배양체에 거짓말 탐지기를 부착해 실험한 결과, 피실험자들에게 진주만 기습 TV 프로를 보여주자 마자 마치 피실험자에게 부착된 것처럼 세포들이 격렬하게 반응을 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 실험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와 입자들 하나 하나는 공간적인 이격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 주는 수많은 실험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실험에서 이러한 연기적인 연결성은 입증되었으며, 수많은 물리학자, 과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연결성을 밝혀내었습니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연결시키는 상호작용의 능력 혹은 특성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비국소성(non-locality)’, ‘비국지성’ 혹은 초공간성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국소성은 공간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시간적으로도 하나의 장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상의상관성이라는 연기법의 세계, 일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과학을 통해 증명해 보여주는 아주 작은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한 김에 조금 더 나아가 보지요. 이처럼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근본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을 영점장(zoro-point energy) 혹은 정보장(field of information)이라고 말합니다. 영점장이란 양자물리학의 주요개념으로 허공이 텅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국소성을 가능하게 하는 온갖 정보와 능력, 특성을 다 갖추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장일 뿐 아니라 시간 공간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이 영점장, 정보장을 불교식대로 표현하자면 연기법이라는 상의상관성, 업보, 인과응보가 펼쳐지는 장인 법계(法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법계 즉 영점장은 온 우주에 꽉 차 있으며 모든 물질, 정신, 세포, 원자, 유전자 등 일체 모든 세계와 존재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근원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이자 정보의 장인 셈입니다. 영점장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요. 또한 앞서 말했듯이 이 영점장에는 공간적으로 이 우주의 모든 정보가 가득 차 있으며, 시간적으로 이 우주 역사와 인간 개개인의 모든 역사적 정보가 고스란히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 어떤 물질이든, 세포든, 허공의 공간이든, 마음이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아주 작은 일부분 조차 이 우주의 시공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 업, 역사 등 그 모든 총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1982년 알렌 아스펙트(Alain Aspect)가 파리에서 행한 실험에서 쌍둥이 광자가 우주 끝에서 다른 끝까지 연결되어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머금고 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의 이치가 영점장과 비국소성의 원리를 통해 양자물리학에서 증명이 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비실체적 현실세계가 영점장이라는 바탕 위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본 모습이라고 양자물리학에서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물질현실은 서로 서로가 따로 따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파동 속에 우주 전체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구조를 띄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홀로그램 우주』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홀로그램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상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주의 모든 부분이 전체를 품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접근할 방법만 안다면 왼손 엄지손톱 속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처음 만나는 장면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원리상으로는 모든 과거와 미래를 시사하는 모든 내용들이 시공간의 미세한 영역 구석구석에도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낱낱의 세포들도 그 속에 우주를 품고 있다.’

 

업사상과 양자물리학

불교의 업사상을 보면 과거 전생에 지은 업을 이번 생에 받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 또한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해 우주적인 일체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근원적인 장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길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강풍이 불어 빌딩위에 메달려 있던 간판이 떨어졌고, 그 간판에 맞아 한 사람이 죽었다고 쳐 봅시다. 그것은 업입니까 아니면 우연입니까? 그 또한 업이라면 어떻게 그 사람이 지금 바로 그 순간 죽어야 할 업을 간판이 어떻게 알고 바로 그 순간에 정확히 그 사람을 맞출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필 바로 그 순간에 강풍이 불어 간판을 휘청이게 했으며, 또 어떻게 간판을 지탱하고 있던 쇠고리가 바로 그 순간 끊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두가 철저한 인과응보를 완전히 계산하고 있는 영점장의 일이요, 법계의 계획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영점장, 정보장의 개념에 의하면 사람 뿐 아니라, 모든 물질 세계의 모든 원자 하나 하나,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존재, 비존재의 일체 우주가 고스란히 영점장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홀로그램의 영점장, 정보장에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의 정보가 하나도 빠뜨림 없이 다 담겨 있습니다. 바로 그 안에는 인간 개개인의 과거 전생, 그 전생을 넘어 시간적인 모든 정보와 업과 행위들의 정보 즉 업장이 낱낱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간판도, 바람 한 점도, 간판을 지탱하는 쇠고리도 물질적, 정신적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우주의 모든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와 일체 모든 존재의 업과 행위와 개개인의 업장까지를 모두 다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이 목숨을 다해야 하는 그 업장에 의해 우주 법계는, 즉 영점장에서는 바로 그 순간 강풍이 몰아치게 했고, 그 간판 또한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자리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주적 영점장의 정보들의 정확한 운행 법칙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바로 그 순간 불어 온 강풍과 간판을 지탱하던 쇠고리와 간판,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정보인 파장의 형태로 담겨 있다가 바로 그 순간 법계의 인과응보적인 계획에 의해 모든 정보가 정확히 움직여 준 것입니다. 사람 개개인 뿐 아니라, 동식물과 심지어 돌과 건물 등의 물질적인 모든 것들 조차 전부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의 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 나라는 존재 안에는 이 우주 전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일체 모든 정보가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적 공간적인 일체 모든 정보들을 이 자리에 내가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분명히 보는 분을 우리가 부처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모든 정보를 완전히 자유자재로 꺼내어 쓸 수 있고, 꺼내 볼 수 있는 그 상태를 깨달음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파장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지요. 이 파장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박쥐가 있는데요. 박쥐는 음파 탐지기 같은 기능을 몸 속에 가지고 있어서 높은 진동의 소리를 밤에 계속 발산을 한다고 합니다. 그 진동의 파장을 방출하다가 박쥐의 먹이가 되는 곤충이 그 파동에 감지가 되면 그 소리 파장이 곤충에게 전해졌다가 되돌아오는 반작용의 파장을 박쥐가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아, 저기에 내가 먹을 거리가 있구나’, ‘내가 먹을 만한 것이 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벌레가 얼마나 큰지, 어느 정도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지, 지금 어디쯤 날아가고 있는지 등의 정보들을 그 되돌아오는 파장을 통해서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박쥐는 파장이 전달 되었다 다시 되돌아 오는 그 파에 의해서 그 벌레나 곤충이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맛이 없는 곤충인지 조차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파장만 가지고도 파장 안에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앞에서 얘기했는데요 박쥐 같은 경우는 일부분 그 파장 안에 담긴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볼 수가 있는 거지요.

아까 냄비의 얼음판이 파장속에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고 그랬고 이게 이차원인데 삼차원으로 본다면 우주의 모든 공간속에 온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인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역사, 모든 어떤 정보가 총체적으로 다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제가 업보 이야기를 했지요. 지나가던 간판이 갑자기 강풍이 몰아쳐서 간판을 달고 있던 쇠고리가 떨어졌고 갑자기 거기에 맞아 죽었다 했을 때, 그 모든 것이 그 간판을 메달고 있던 그 쇠고리나 강풍이나 간판이나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모든 물질속에는 시간적인 총체적인 모든 업의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이 우주 인류 모든 생명들이 지어왔던 업장, 업의 정보라는 총체를 우리 주위의 모든 물질세계나 생명, 공간, 바람, 꽃 한 송이나 나무 한 그루, 세포 하나와 원자, 전자 하나에 조차 그리고 저 하늘의 별 조차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 전체에 그 업이라는 것은 기록 되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뢰야식에만 기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업식이 이 우주 전체에 기록 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남들 몰래 혼자 저 깊은 산속에 가서 아무도 안 볼 때 죄를 지었다고 죄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우리의 오판이요, 판단 착오인 것입니다. 사실은 주변의 일체 우주법계가 그대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아무리 완벽한 완전 범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이 시공이 있고 법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물질세계를 창조한다

여기까지 잘 따라 왔나요? 그럼 다음 진도를 나가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파장이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들어 내는 근간이고 그 파장 속에 정보가 담겨 있다면 그러면 그 파장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겠는가 이것이 궁금해집니다. 그 파장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알면 우주의 어떤 원리를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양자물리학으로 넘어 가 봅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데 반해 양자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임이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원자보다 작은,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입자인 아원자들은 고정된 물질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가능성 즉 하나의 잠재적인 가능성으로써 존재하는 것으로 비춰졌습니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정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공(空)의 원리의 일부를 과학에서 밝혀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아원자를 단지 입자나 파동의 어느 한 쪽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보며, 그 양쪽에 속해 있는 단일범주의 어떤 것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양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일부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양자들은 관찰되고 있을 때는 입자로 보이지만, 관찰되지 않을 때는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즉 ‘양자가 입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경우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관찰자가 보고 있을 때는 물질이지만 보고 있지 않을 때는 에너지인 것이지요.

이것은 곧 관찰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양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과학자들이 어떤 특정 전자를 찾을 때마다 관찰자가 기대하던 바로 그 위치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관찰자가 어떤 의도와 생각을 일으키기만 해도 그 입자는 관찰자의 의도에 따라 반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질적인 대상은 그 자체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실험에서 물질적인 객관적 대상이 사실은 그 대상을 바로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변하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물질, 사물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그것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라는 주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사물을 보는 내가 바로 보이는 사물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주 충격적이고도 신선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이 세상의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우리의 의지, 의식,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의업, 한 생각이 물질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요인이더라는 겁니다. 다시말해 물질은 고정된 물질일 뿐이지 내 의지로 물질을 바꿀 수 있겠는가 싶겠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단순한 기계 조차 우리가 그 기계를 향해 욕을 하고 화를 내며 부정적인 에너지를 보낼 때와 자비로운 에너지, 감사와 사랑의 말을 보낼 때는 전혀 그 결과의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운전자가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릴 때와 긍정적이고도 밝은 에너지로 넘칠 때 자동차가 사고 날 확률, 자동차가 고장 날 확률은 전자가 훨씬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동차 엔진이 고장날지라도 집 앞에 다 도착해서 사고가 날 것이냐, 아니면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중에 고장이 날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따라, 의지와 마음 씀에 따라 달라진다는 과학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마음하나 일으켜서 물질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 과학에서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죽을 병에 걸렸거나, 큰 빚더미에 올라앉았거나, 큰 괴로움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더라도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없을 것이겠지요. 그 사람에게 보여지는 세계는 전혀 아름답지 않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와 비판적인 습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언제나 불평불만이 가득할 것이며,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와 불평 불만과 비판의 습관은 계속해서 그 사람 앞에 나타난 물질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 생각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였다면 비판적인 습관이 계속될수록 이제부터는 그 부정적인 마음이 세상을 어둡게 변화시키고, 이 우주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들임으로써 그 사람앞에 나타난 물질세계가 부정적이고 혼탁하며 온통 좌절과 고통스런 현실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불교의 연기법과 영점장, 홀로그램, 비국지성이라는 이론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 안에, 심지어 나의 모든 세포 하나 하나에도 이 우주적인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정보와 가능성과 힘이 고스란히 주어져 있으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으키는 의도적인 생각 하나 하나가 고스란히 내가 바라보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물질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했단 말입니다. 즉 내 마음 하나로 내 밖에 있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세상을 창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냈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일으키는 마음, 생각, 의도 하나 하나에 따라서 이 우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를 내가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우주는 영점장으로써, 연기법으로써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또 내 안에 영점장의 형태로 존재하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이 물질적인 세상은 원자로 만들어졌고, 그 원자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입자와 파동으로 바뀌며 그것은 물질이기도 하지만 에너지의 특성으로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능성의 장에서는 원자를 관찰하는 자의 주관성이 곧 그 원자와 물질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질과 에너지, 입자와 파동은 언제든 서로서로 변환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마음, 생각, 의도가 곧 현실의 물질세계화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심리학자 브루노 클로퍼의 보고에 따르면 도저히 살 가망성이 없는 림프절 말기 암이었던 라이트라는 환자에게 획기적인 신약을 시험 복용 시켰더니 라이트는 3일 만에 걸어다니더니 10일만에 퇴원을 했고 두 달 후에는 완전히 암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약이 사실 아무런 효능이 없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바로 병이 똑같이 재발이 되어 다시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사가 먼저번 것은 잘못된 약이었고, 이번에 고농축된 새로운 신약을 구입했으며 이것으로 치유가 가능하다고 확신을 심어 준 뒤 환자에게 약이 아닌 그저 증류수를 주사했습니다. 그런데 극적으로 종양 덩어리가 녹아내리고 가슴의 복수도 사라졌으며 두 달 간 아무런 증세도 보이지 않을 만큼 회복이 빨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이 약이 암 치료에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의사협회로부터 발표가 되자마자 암은 다시 발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마음에서 약을 먹었으니 나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 실제 약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믿음 때문에 낫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플라시보 효과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큰 작용을 하며 광범위한 거의 모든 병에 적용된다고 합니다.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고 믿는 생각과 이제 약을 먹었으니 분명히 나을 것이라는 생각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며, 후자 쪽으로 마음을 굳게 바꿈과 동시에 내 몸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 암 세포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치유의 작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포의 변환을 완벽하게 도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이 물질을 변화시키고, 마음이 우리 몸의 모든 세포를 기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원자나 물질적인 세상 또한 영점장이라는 근원적인 바탕의 장 위에 그려진 환영과도 같은 것입니다. 원자나 전자는 단순한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영점장의 근원 바탕에 펼쳐진 하나의 총체이자 정보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이루는 물질세계를 내 의지에 따라서, 내 마음으로써 움직일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창조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들을 내가 끌어당겨 쓸 수 있기도 하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그러면 이렇게 내 의식으로서, 내 의지로서, 내 생각으로서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는데 그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즉 의식으로써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을 때 그 파동, 그 파장에 담긴 에너지가 어느 정도가 될까요? 만약 의식으로 만들어내는 파동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힘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면 우리 마음, 우리 의식이 가진 창조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측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을 쪼개면 쪼갤수록 우리는 에너지가 더 작아지고, 덩치가 큰 것일수록 더 큰 에너지를 가지게 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입자가 작으면 작을수록, 더 미세하게 쪼개면 쪼갤수록 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그럽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을 쪼개서 기관, 기관을 쪼개서 세포, 세포가 분자가 되고 원자로 쪼개지고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로 쪼개지고 그리고 또 양자로 혹은 보존이니 중간자, 광자, 레톤 등 물리학에서는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부분까지 쪼개놓은 것을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무엇으로 붙이든 간에 쪼개고 쪼개서 단위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그 안에 든 에너지 힘의 양은 무한하게 커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자력 발전소니 원자탄이니 하는 것을 생각해봐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원자의 힘,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힘, 그 힘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어마어마 한지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그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원자력이나 원자탄, 이런 원자핵의 힘보다 더 작은 단계인 양자가 가진 힘을 살펴보면 그것에 비해 원자핵의 힘은 아주 미미하다 싶을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더 어마 어마하게 큰 힘을 그 양자는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물질은 쪼개고 쪼개면 쪼갤수록 작은 입자가 되고 작은 입자가 될수록 더욱더 어마 어마한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더라 이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완전히 쪼개서 입자나 파동으로 바꾸게 된다면 그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까지 어마 어마하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이 이만큼 어마 어마하다는 거지요.

이 힘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1cm³라는 작은 공간 안에 담겨 있는 파동의 힘이 1094erg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우주에 담겨있는 전체 힘 보다 다시말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우주 속의 모든 물질 에너지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 많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1cm³ 안에 들어 있는 파장의 힘이 우리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한 어마 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파장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움직인다 했습니다. 창조된다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생각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어떤 생각을 일으켰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파장이든 긍정적인 파장이든 내 안의 어떤 에너지이자 파장의 형태로 이 우주 끝까지 펴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 신기한 점은, 내가 화를 한번 버럭 냈을 때 그 부정적인 에너지의 파장이 우리가 아까 호수에서 돌을 던졌을 때 처럼 파장이 점점 넓게 퍼질 것 같잖아요. 그런데 내가 생각이라는 에너지를 탁 하나 일으켰을 때 사실은 지금 일으킴과 동시에 우주 끝까지 이미 퍼져나갔다고 말합니다. 파장이 일어남과 동시에 우주 끝에 이른다는 겁니다. 이 말은 조금 있다가 뒤쪽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처럼 내가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온 우주 전체에 그 생각의 파장은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내가 부정적이고 성내는 마음, 욕심, 화, 증오, 질투 이런 마음을 일으킬 때 그 파장은 1094erg의 힘으로서 이 우주에 알려진 물질 전체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의 더 큰 힘으로 시간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즉각 우주 끝까지 미쳐 나간다 이 소리입니다. 우리가 쉽게 쉽게 생각하지만, 쉽게 쉽게 화도 내고, 쉽게 쉽게 싸움도 하고, 쉽게 쉽게 어떤 사람을 생각으로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하거나, 쉽게 생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세상을 마구마구 창조해 내지만, 사실 우리가 그렇게 쉽게 쓰고 있는 생각이라는 그 에너지가 얼마나 큰 에너지이고 더욱이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 우주전체 끝까지 가 닿음으로써 그 에너지가 바로 내 삶을 창조해 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무의식인 생각으로 벌이고 있는 것입니까? 이 엄청난 일을 벌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을 조심해서 쓰지를 못해요. 대충 대충 생각하고, 쉽게 쉽게 생각하고, 너무 안이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관하고, 말을 관하고, 의지를 관찰하며,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난 왜 이렇게 가난하지, 난 왜 이렇게 부족하지, 난 왜 이렇게 불쌍하지"라고 한 생각 일으킨 것이 어머 어마한 파장으로 실제 물질 세계에 가난한 삶을 창조해 내고야 말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가난을 창조하느냐 하면 1094erg라는 무지막지한 힘으로서 내 삶을 급격하게 창조해 내는 거란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능력은 무한한 것입니다. 일체유심조, 일체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럴진데 마음 하나 바꾸어서 운명을 바꾸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업을 뛰어넘는 것이 왜 불가능해요?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 붓다가 되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같은 생각의 주파수를 공명시킨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 재미있는 공명의 법칙이라는 것을 소개 해 볼까 합니다. 이 우주는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같이 공감한다 그럽니다.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함께 공명을 한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바이올린 두 개나 기타가 두개가 있다고 했을 때 도, 래, 미 같은 어떤 하나의 음을 탁 튕겼을 때 이것이 바이올린 두 개가 같이 조율이 되어 있다면, 이쪽 하나의 음을 튕겼을 때 동일한 음이 저 쪽에서도 같이 움직이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공명한다고 그럽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면, 우리 벽에다가 자명종 시계를 이쪽 벽에 하나 저쪽 벽에 하나, 또 다른 벽에 하나 이런 식으로 벽면마다 시계 추가 움직이는 자명종 시계를 갖다 놓았다 말입니다. 그리고 전부 다 다르게 추를 움직이게 시켰어요. 어떤 건 왼쪽으로 가고 하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다르게 움직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들어와서 그것을 살펴보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그 자명종의 추는 모두가 다 정확히 같은 방향, 같은 움직임을 띄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같은 자명종이고 시계추의 무게라거나 길이 등이 동일한 같은 조건이라면 말이지요. 처음에는 다르게 시작했더라도 그 작은 떨림의 파장이 서로에게 전달이 되어 공명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도 그 공명이라는 것은 아주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그럽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활자가 개발된 시점을 보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에 활자가 계발되었다거나, 비슷한 발명품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거나, 또 다른 예로 세계사 차축의 시대라고 하는 부처님 당시의 시기에 붓다와 노자,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이 함께 정신사의 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 등도 그와 비슷한 역사 속의 공명현상이라고 말해 봄직하다. 그 또한 일종의 정신적인 공명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집에서 혼자 기도할 때 기도의 힘을 받는 에너지와 절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동일한 기도를 함으로써 동일한 주파수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그 기도의 힘이라는 것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 힘이 별로 없더라도 기도 열심히 하는 도량에 가서 힘 있는 도반들, 법력이 선 스승님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한다 그랬을 때, 그 에너지, 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 법이 선 자가 가까이 함께 있다면, 혹은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면 그 정신적인 공명의 힘을 우리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부처님 같은 큰 스승이 몇 분 계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지구라는 한국이라는 전체 땅 덩어리의 어떤 에너지의 힘이 전혀 다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하나 있는 그곳은 아주 수승한 파장, 깨달음의 파장과 서로 공명을 하기 쉽다 그래요. 시계추가 다르게 움직였지만 하나로 움직이듯이 하나로 결속해서 몰아가듯이 그 밝게 깨어있는 자의 파장이 있었을 때 그 주변은 그 파장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쉽게 말해서, 깨닫기가 쉽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격 나쁘고 아주 욕도 잘하고 화를 내기 좋아하고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닮아 가잖아요. 파장이 같아지는 겁니다. 파장의 주파수가 같아지는 거예요. 나는 그걸 배우고 싶지 않아도 욕을 그냥 맛깔나게 입에 딱 붙게 하는 사람 옆에 가서 며칠만 살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런 똑같은 욕이 툭툭 튀어 나오거든요.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 파장이 나한테 공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파장으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나은 도반과 함께 가라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내가 어떤 생각을 하나 일으키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한 가지 생각을 일으킬 때 그 생각은 우주 전체와 공명한다, 그 생각 하나는 우주 끝까지 일시에 전파 되어서 우주 전체에서 그 생각과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와 공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생각, 비슷한 주파수, 비슷한 파장을 가진 에너지를 끌어당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들은 서로 모인다고 유유상종이라 그러잖아요. 비슷한 것들 끼리 모이게 된다, 공명을 한다, 내가 기대를 하고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게 되었을 때, 그 강력한 에너지를 보내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이 주파수 이 에너지와 동일한 주파수대의 사람, 동일한 주파수대의 물질, 상황, 조건들이 나와 함께 공명을 하고 그것이 나에게 힘을 보태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기도를 하게 되면 내 주변에 있는, 내 지구상에 있는 기도하는 자의 주파수가 나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욕을 하게 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범죄를 저지를 자들의 주파수가 나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때때로 수행을 하다보면 어떤 경계를 경험하게 되거든요. 혹은 어떤 경우에는 어떤 존재, 어떤 정신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다양한 어떤 경계를 만나는데, 그건 어떤 파장이 일순간 맞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들어 사람이 돌아가신 영가를 볼 수 있습니까? 못 보는게 당연하지요. 사람의 주파수와 영가의 주파수는 다르니까요. 그런데 그 주파수대가 일순간 어떤 이유로 인해 달라지게 되면 또 다른 어떤 존재나 영가와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파수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 정진을 통해서 우리의 기운 주파수가 수승해지면 저 천상 세계의 아주 맑은 정신들과 어떤 공명을 가져올 수가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내가 생각하는 그 의업, 어떤 하나의 의업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이 우주 전체와 공명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힘을 주고 받기 때문에 에너지의 엄청난 힘으로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쉽게 쉽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짜증을 내고 욕심을 내고 이런 일들을 함부로 할 수가 있겠어요?

앞에서 입안의 혀 세포를 떼어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거짓말탐지기를 연결시켜 놓고 사람과 세포를 연구해 보았던 얘기를 했잖아요. 멀게는 약 500km까지 떨어진 곳에서도 배양된 세포와 사람의 손에 연결된 거짓말 탐지기가 정확히 같은 반응을 그것도 정확히 같은 시간에 보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빛의 속도로 간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먼저 반응을 보이고 연이어 먼 곳의 세포가 반응을 보여야 하잖아요. 그 곳에까지 가는 시간이 걸리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 둘의 반응 사이의 간격이 0초더라는 겁니다. 동일한 시간대에 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생각 하나 일으킨 것이 저 우주 끝까지 가는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화엄경을 축소시켜 놓은 법성게를 보면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량한 겁 이라는 어마 어마한 시간대가 바로 일념 가운에 있다, 한 생각 가운데 있다고 하거든요. 그것이 바로 이말입니다. 내가 일으킨 어떤 한 생각 하나의 파장이 우주 끝까지 전달 되는 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전달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그것이 영항을 미치는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직바로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들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안 좋은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 이것이 다 치유되었다’ 라고 스스로 그냥 믿고 ‘그래, 난 치유되었다’ ‘부처님께서 다 치유해 주셨다’ 라고 굳게 믿는 어떤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모든 내 주변의 물질 세계 전체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동시간대의 내 몸에 있는 암세포, 종양등 모든 세포, 내 몸에 있는 모든 물의 결정, 세포 하나 하나와 직접적으로 순간 연결이 되고 그뿐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달이 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그렇게 마음을 바꾸는 순간, ‘나는 죽으니까 내 인생이 끝이구나’ 라고 좌절하는 마음에서 한 생각 돌이켜서 밝은 마음을 일으킴과 동시에 갑자기 그날따라 외출했다 들어오는 남편이 평소와는 다르게 따뜻하게 대해 주거나, 공부도 안 하고 말도 안 듣던 자식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게 되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도 평소보다 더 관심을 보이며 잘 해주고, 우연히 TV를 틀었는데 불치병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거나, 마음을 비우고 이웃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뛰어난 대체의학자나 신의(神醫)라고 불릴 법한 사람과 인연이 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우주법계가 나를 도와주게 된단 말입니다. 죽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뀜에 따라 긍정적인 파동, 긍정적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되고, 그 긍정적인 치유의 주파수와 공명된 다양한 치유의 방법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와 연결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식, 마음, 생각, 의업이 가진 힘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우주를 만들어 낸다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의업이구요 이 의업이 나아가서 구업으로 말로 바뀌고 구업이 나아가서 몸으로 행동으로 바뀌고 신업으로 바뀝니다. 이 생각 하나가 말과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말과 행동,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 세상을 창조하는 겁니다. 나아가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이 우주를 창조 해 내는 겁니다. 그 창조의 힘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어마 어마하다 이 소리입니다.

 

마음 올바로 쓰는 법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를 알았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는 바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창조를 하는데 이 신구의 삼업이 생각도 파장이요 말도 파장이고 몸의 행위도 파장이다, 파장으로서 이 우주 끝까지 퍼져나간다, 더욱이 파장이 퍼져 나가는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퍼져 나갈 뿐더러 그 퍼져 나가는 그 힘, 그 힘이 1094erg로써 기존 알려진 모든 힘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도 더 큰 어마 어마한 힘으로써 시공을 초월해서 퍼져 나간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파장에 담긴 정보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우리의 업, 우리의 병, 치유방법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정보를 다 담고 있다고 하는 소식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세상입니까! 이 얼마나 엄청난 소식입니까!

어마 어마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엄청난 삶을 우리가 살고 있고 그러한 큰 힘으로서 마음을 쓰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내가, ‘나’라는 작은 나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던 내가, 내가 아는 나의 전부가 아닙니다. 나는 능력 없고, 나는 돈도 없고, 나는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무능력 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본질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나는 능력없어’, ‘나는 공부도 못하고 운동신경도 없고 가난하다’고 내 스스로 한정짓는 마음, 그 생각이 나의 능력을 한정짓게 하는 겁니다. 1094erg라는 그 어마 어마한 힘으로 말이지요.

그 내 생각이라는 파장이 주는 어마 어마한 힘으로 한편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으나 한편으로는 ‘나는 가난해’ 라는 그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겁니다. 그 엄청난 에너지로 자기의 힘을 꽃 피우는데 쓰지 않고 자기의 힘을 스스로 한정짓는데 쓰고 있다 이 말입니다. 내 스스로 내 능력을 한정짓고 있으니까 그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나의 능력을 제한하는데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잠재된 무한한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활짝 꽃 피우는데 쓰지 못하고.

‘부자가 되길 부처님께 비나이다’ 하고 아무리 빌어 봐야 그 비는 행위는 거지 마음을 연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자가 되고자 비는 마음은 사실 ‘나는 지금 가난합니다’ 라는 마음에 힘을 주는, 에너지를 주는 일이 됩니다. 지금 가난하니까 앞으로 올 미래에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 아니겠어요. 그러니 비는 마음은 사실 구걸하는 마음이고, 그렇기에 비는 마음은 비는 방향과는 달리 거꾸로 결과를 맺게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비는 기도를 하지 말고, 감사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지금 이대로 감사합니다’ 하는 거니까 더 이상 바랄게 없어요, 그냥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감사하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파장을 연습하는거냐 하면 부유함의 파장, 부자의 파장, 풍요로움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부자되게 해 주세요’는 구걸의 파장, 가난의 파장을 연습하는거고, 오히려 ‘나는 지금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습니다’하는 파장을 엄청난 에너지 주파수로 이 우주를 향해 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이 연봉에 대해 감사합니다’하는 것은 부유함과 풍요로움과 부자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이겠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허망한 일들을 벌여오고 있는지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마음 써야 하는지, 마음 쓰는 거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렇게 세상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중생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겁니다. 무명중생이라고 하는거예요. 똑똑하면 뭐 합니까. 지식만 늘였지 지혜는 바닥을 치는 헛똑똑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또 다른 예를 들어 드릴까요? 병이 난 사람이 어디 한 가지 몸이 안 좋단 말입니다. 심장이 안 좋아요. 그런 사람이 마음 속으로 ‘아, 이 심장을 어떡하지’ ‘심장이 더 나빠지면 어떡하지’ 하고 항상 고민한단 말입니다. 항상 근심하고 걱정하고 뭘 먹어도 이게 심장에 좋은가 안 좋은가 따지고, 계속 심장이 안 좋다라는 것에 마음이 붙잡혀 있게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는 ‘빨리 나아야 하는데’ ‘빨리 나아야 하는데’ 하고 바라겠지만 사실은 이 마음이 무엇을 연습시키냐 하면 ‘심장이 안 좋다’는 에너지, ‘심장이 나쁘다’는 주파수의 파장과 자꾸만 공명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장은 더 안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심장에 붙박혀 있는 그 노이로제 같은 마음에서 놓여나고, 그 마음을 비워버리면 되는데 오히려 더 나쁘게 마음을 연습한단 말입니다. 비우지 못하겠고 놓아버리지 못하겠다면 오히려 반대로 이 생각, 이 의업, 이 의지라는 것을 역이용하면 됩니다. 심장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혹은 ‘심장이 건강해지게 되어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감사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모든 밝고 건강하며 청정한 모든 파장과 공명하는 최고의 진언이기 때문입니다.

뚱뚱한 사람이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 하는 그 한 생각에 집착하고 ‘먹지 말아야 하는데’하는 그 한 생각에 붙잡히게 되면 그 생각 때문에 안 먹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각에 집착이 되어 음식에 대한 집착이 더 커지고 더 꾸역꾸역 먹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이런식으로 우리는 엄청난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힘을 가지고 거꾸로 쓰고 있는 겁니다.

 

성공과 부자, 그 너머의 이야기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막바지 결론에 다달았습니다. 이렇게 나의 생각, 말, 행동이라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이 우주를 창조해 내고 내 세상을 창조해 낸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요즘에 씨크릿 이란 책이 아주 유명하고요, 부자가 되는 길,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책들이 우우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 많은 것 들이 이야기하고 있는게 지금 제가 말씀드린 여기까지 입니다.

생각의 힘으로 마음의 힘으로 부자가 되라, 마음에 부자를 그리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의 힘은 엄청나기 때문에 마음의 힘으로 성공하려면 성공 할 수 있다, 그것을 마음에 그리면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하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도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힘을 부자가 되는 쪽 성공하는 쪽으로 자꾸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요즘 나온 수많은 책들의 한결같은 결론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그 마음 에너지를 써서 부자가 됐어요. 성공했어요. 큰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이 됐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 행복도 거기서 끝날까요? 부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곧 나의 행복을 의미하겠습니까?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샀다, 그것이 곧 나에게 완전한 만족을 가져다 주고,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 주고, 아주 자유로운 깨달음과 지혜를 가져다 줄까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해 왔습니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부자가 다가 아니고, 성공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이 소유하면 더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 마음은 더 혼탁해 집니다. 혼탁해 지기 쉽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할 수록 우리는 더 삿된 마음으로 치닫기 쉽습니다. 욕심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괴물과도 같은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장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집에 별 문제가 없잖아요. 서로 단결해서 어떻게 하면 밥이라도 한 끼 더 먹고 내 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내 동생 더 먹이려고 애쓴다 이말입니다. 가족 전체가 아내는 남편 걱정 하고 남편은 아내 걱정 하면서 산다 말이지요.

전에 이런 말씀 드렸잖습니까. 아프리카 어디에 네 살 정도 된 아기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더란 말입니다. 사진기사가 가서 사진을 찍고는 미안했는지 초코파이 같은 먹을 것을 하나 던져 주었더니 그걸 들고는 그 힘없는 몸으로 걸어가서는 허름한 집안에 있는 다 죽어 있는 한 살 정도 아기를, 죽어 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아기를 끌어 안고서는 그 먹을 것을 자기가 먹지 않고 아기에게 물려주고 자기 동생이 이미 죽은 동생이지만 동생이 먹지 않으니까 턱을 잡아 가지고는 막 억지로 먹는 시늉을 해 주더라고 했습니다. 그 사진 한 장을 찍고 그 사진작가는 무슨 상을 탔다고 해요.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되면서도 네 살짜리 아기가 한 살된 동생을 위해서 자기는 죽더라고 그것을 나눠 주거든요. 없을 때 이런 어떤 본질적인 사랑, 자비, 인간애 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지요. 평범한 행복한 집안에서 로또가 당첨됨과 동시에 집안이 파탄나고, 남편이 아내와 싸우고 이혼하고, 부모가 자살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진단 말입니다. 이뿐인가요?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세상이 어디 상상 속에서라도 가능한 이야기겠어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은 상상 밖의 이야기이고, 도저히 생각으로조차 해 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높은 권력이나 많은 경제력 앞에서는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아니 그런 권력 암투, 왕권을 둘러싼 죽고 죽이는 일들 같은 것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드라마 같은데서도 묘사되고 있잖아요.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권력의 암투가 일어나지 않지요. 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부모형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네팔에 갔을 때 보니까 왕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한 사람이 형제 자매, 부모, 친척들을 다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이게 다 많이 가진 자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부자나 성공이나 권력 같은 것을 많이 소유하는, 그런 소유만이 전부가 아니라는게 분명해 졌습니다. 아니 큰 소유는 오히려 정신을 타락시키고, 도저히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근원적인 실천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일까요? 어떤 것이 분명한 것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사실은 그 성공 이면에 실패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틀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법이 진리이지만, 불법이라는 진리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집착해서 그것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적으로 옳다라는 것은 전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너무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 증오를 항상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서 다른 남자에게 갔을 때 더 큰 괴로움과 좌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 성공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옳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극단적인 이면을 항상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근원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 의업, 생각이 만들어 낸 모든 작용들은 옳고 그르거나 맞고 틀리거나 성공과 실패, 좋다 나쁘다 하는 그 이면에 극단적인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근원적이지 못한 양 극단의 분별심, 차별심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창조해 낸 현실에서는 늘 긍정과 부정이 함께 공존합니다. 즐거운 일 끝에는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고, 풍요로움의 바탕에는 가난의 그늘이 존재합니다. 과도한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 대신에 과도한 가난 속에서 기아와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는 한 사람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맛보아야 합니다. 문명의 이기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주는 편리함 이면에는 기상이변이나 환경오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은 발전하고 아파트가 만들어지고 에어콘이 만들어지고 이 편리한 것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 좋은거 아닙니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 근원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도시화, 산업화 이런 것들이 이 지구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인위적인 어떤 에너지, 힘 그것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가능성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이 길을 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지구가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언제 지구가 기상이변으로서 나를 몰아칠지 모르는 두려움도 함께 껴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근원으로 가는 것이냐, 본질적인 삶, 근원적인 삶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냐, 그건 바로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하는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두 가지 양 극단의 선택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그 습관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2,500여 년 전 붓다는 중도(中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중도의 삶에서는 어느 것도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없고, 네 편과 내 편으로의 나뉨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도 없습니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도와주며 사랑해주는 관계로써 상의상관적으로 존재합니다. 연기와 자비의 정신이 고스란히 인간 존재의 삶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꿀벌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그런 상의상관적인 불이(不二)의 지혜만이 우리 모두를 한 가족으로, 한 생명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동체대비의 사랑, 둘이 아닌 자비의 실천으로 생활방식을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런 삶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분별심과 차별심을 놓아버릴 수 있을까요? 그게 바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라는 존재가 일으켜 내는 생각들, 움직임들, 행동들, 느낌들, 이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이 되어 나를 지켜보십시오. 지켜봄은 그 무엇도 둘로 나누지 않습니다. 지켜봄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도 않고, 어느 한 쪽을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觀)수행, 지관(止觀), 비우고 관찰하는 그 지관의 수행, 알아차림의 수행, 깨어있음의 수행, 그 수행이야말로 나라는 이기적인 마음,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근원에 있는 말하자면 불성, 자성불,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의 자리인 우주의 근원적인 힘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근원으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좋고 나쁜 쪽 가운데 좋은 쪽을 선택해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무분별의 근원적인 치유의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나를 이끌고 갑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생각으로 판단 했을 때는 언뜻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갔을 때는 항상 완전한 근원적인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면에 행복 이면에 불행, 사랑 이면에 증오 이런 것을 내포하지 않는, 다시말해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어떤 인연이 오더라도, 내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항상 여여(如如)할 수 있고, 항상 행복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중심이 잡힌 그런 어떤 힘으로 나를 이끌고 가고 내 삶을 이끌고 가고 이 지구를, 이 우주를, 인류를 이끌고 가는 힘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래면목이 나를 이끌고 가려 하는 삶,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 보겠다’ 라는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내 맡기는 삶 그리고 다만 지켜보는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다만 지켜보는 자로 남게 되었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삶의 모습들을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서 아주 새롭고 흥미진진하며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한 발짝 떨어진 여여한 마음으로 모든 일이 내 삶에 내 존재위에 삶이 그저 파도쳐 흘러갔다 흘러올 수 있도록 내버려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상으로 삶에 개입하지 않게 됩니다.

질병과 괴로움 속에 깊이 빠져서 그것에서 울고 웃게 하지 않게 되고 항상 흥미롭게 새롭게 아주 조화롭게 삶을 충분히 누릴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삶을 아주 흥겹게 완전히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리면서 아주 충분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랬을때 아주 자연스러운 껄끄럽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은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 내 삶 속에 저절로 등장을 하게 되면서 우리 삶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과 번뇌와 괴로움은 놓여지게 되는 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것이 어찌보면 우리 삶의 근원 그리고 이 현상세계의 본질과 근원세계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부분이예요. 이 부분을 조금 더 사유를 깊이 해 보시고 수행을 통해서 이 자리가 과연 어떤 자리인가를 스스로 직접 느끼고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법상
그만 기다리세요.
우리가 평생토록 해 왔던
기다림이 지겹지도 않으신가요?
이제 그만 기다림에 대한 환상을 놓아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기다리던 일이 완성되면 또 다른 것을 기다리고
그것이 완성되면 또 다른 기다림의 대상을 만들어
우리의 기다림은 끝이 없이 계속됩니다.

초등학생은 중학생이 되길 기다리고
고등학생은 대학생이 되길 기다리며,
대학생은 좋은 취직 자리를 기다리고,
학생은 좋은 성적 좋은 학교를 기다리며,
직장인은 좀 더 인정 받기를 기다리고 진급하기를 기다리며,
수행자는 깨닫기를 기다립니다.

한 가지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내 앞에 나타날 사랑을 기다리고,
빨리 졸업하기를 기다리며,
빨리 큰 돈을 벌기를, 큰 집, 좋은 차 사기를 기다리고,
더 나은 직장을, 지위를, 권력을 기다립니다.

출근하고 나면 빨리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평일에는 빨리 휴일이 오길 기다리고,
다음 휴가철을 기다리고,
수업시간에 쉬는 시간을 기다리고,
몇일 후에 있을 소풍이나 만남을 기다립니다.

뭔가 재미난 일을 기다리고,
가을엔 첫눈 오는 날을 기다리고,
겨울엔 만물의 태동을 기다리며,
봄엔 여름 휴가 때를
여름엔 가을 단풍구경 갈 때를 기다립니다.
물론 단풍이 떨어질 때 또다시 첫 눈을 기다리겠지요.

성공하기를, 부자 되기를, 행복하기를
깨달음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그렇게 끊임없이 평생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우리는 결국 한번도 기다리지도 않았던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달려가면서
한 순간도 기다림을 포기했던 적이 없었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온 것이라고는 한번도 기다리지 않았던
버림이고 죽음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삶 속에서 기다림의 결과로 얻어 낸
그 어떤 가치있는 것이라도
결국에 죽음 앞에서는 모두 다 무의미한 것일 뿐입니다.
모두 다 버리고 가야할 것들 뿐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 유일하게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살아오면서 우리가 별로 바라지 않았던
‘현재의 깨어있는 힘(지혜)’과 ‘사랑과 베품(자비)’입니다.

평생을 다음 순간만 바라고 살았지만,
더 낳은 순간만을 바라고 살았지만
죽고 나서 우리가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이
‘기다림의 결과’가 아닌 ‘기다림 없는 순간에 깨어있는 힘’이라는 것은
참으로 우리의 기다림을 허탈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다림’이 아닌
‘기다림의 놓음’입니다.
기다리지 않았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현존할 수 있습니다.
기다림을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기다림이란
지금 이 순간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이 아닌 다음 순간을 원한다는 말이고,
현재가 아닌 미래를 원한다는 말이며,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원한다는 말이고,
‘지금의 나 처럼’이 아닌 ‘다른 사람처럼’되길 원한다는 말이며,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닌 갖지 못한 것을 원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기대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그 갈등이 바로 괴로움의 실체로 다가옵니다.
기다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고되고 괴로울 뿐입니다.

이런 우리의 기다림은 습관적입니다.
항상 무엇인가를 기다리지 않으면 견디질 못합니다.
그 기다림을 좋은 말로 ‘희망’이라고도 하고 꿈이라도도 하겠지요.
또 ‘목적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그런 기다림을 당연하게 여기다 보니
이런 기다림을 ‘희망’이니, ‘꿈’이니, ‘목적의식’이니 하고
좋은 말처럼 꾸며 놓았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기다림은 우릴 피곤하게 만들 뿐입니다.
여전히 기다림은 온전한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을 방해하고,
삶의 근원적인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할 뿐입니다.

그런 습관적인 기다림에
이젠 지칠 때도 되지 않았는가요?
그동안 우리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까.
아니 어쩌면 우리 삶 전체를
이런 쓸모없는 기다림에 헛되이 소모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기다림이란 낭비이고 불필요한 것입니다.
공연히 내적인 에너지를 소모할 뿐입니다.
기다릴 시간에
저지르는 편이 더 현명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편이 더 궁극적입니다.

현실적인 돈, 명예, 권력, 학벌, 지위, 성공 등은
기다림을 통해 얻게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행복은
결코 기다림을 통해 얻을 수 없습니다.

현실적인 돈, 명예, 권력, 학벌, 성공이라는 것이
다 궁극적으로 행복을 위한 방편이 아니던가요?
그런 껍데기를 위한 기다림에 휘둘려서는 안됩니다.
바로 궁극적인 행복 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행복은 결코 기다린다고 오지 않습니다.
행복은 결코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돈, 명예, 권력, 지위, 학벌, 성공 속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행복은
다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음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완전한 자족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항상 행복은 이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늘 그렇게 있을 뿐이지요.
기다리는 마음은 이 자리에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 자리를 봐야 하는데
다른 자리를 찾고 기다리고 있으니 어떻게 볼 수 있겠어요.

기다림의 결과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 기다림을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그 때 언제나 있어왔던 행복을 볼 수 있을 뿐.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내가 누구이든 간에,
내가 무슨 일에 종사하든 간에,
나의 직위, 직장, 학벌, 재산, 세속적인 성공에 상관없이
다만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인정하며 사랑하고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그냥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이면 되지
한참을 기다린 후에나 얻을 수 있는
‘다른 그 무엇’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내 모습에,
내가 가지고 있는 만큼의 소유물에,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음에
감사하고 존중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또 다른 것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린 이 순간에 깨어있는 법을 터득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분명 머지 않아
맑은 행복과 평화로움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기다림을 놓아버리세요.
다음 순간을 기다리지 마시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이
기다림을 이룬 순간이 되도록 하세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 순간에 서 있으면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다림을 놓아버리고
바로 이 자리에 서 있으시길...

Posted by 법상





[문경 김용사]

그만 기다리세요.
우리가 평생토록 해 왔던
기다림이 지겹지도 않으신가요?
이제 그만 기다림에 대한 환상을 놓아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기다리던 일이 완성되면 또 다른 것을 기다리고
그것이 완성되면 또 다른 기다림의 대상을 만들어
우리의 기다림은 끝이 없이 계속됩니다.

초등학생은 중학생이 되길 기다리고
고등학생은 대학생이 되길 기다리며,
대학생은 좋은 취직 자리를 기다리고,
학생은 좋은 성적 좋은 학교를 기다리며,
직장인은 좀 더 인정 받기를 기다리고 진급하기를 기다리며,
수행자는 깨닫기를 기다립니다.

한 가지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내 앞에 나타날 사랑을 기다리고,
빨리 졸업하기를 기다리며,
빨리 큰 돈을 벌기를, 큰 집, 좋은 차 사기를 기다리고,
더 나은 직장을, 지위를, 권력을 기다립니다.

출근하고 나면 빨리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평일에는 빨리 휴일이 오길 기다리고,
다음 휴가철을 기다리고,
수업시간에 쉬는 시간을 기다리고,
몇일 후에 있을 소풍이나 만남을 기다립니다.

뭔가 재미난 일을 기다리고,
가을엔 첫눈 오는 날을 기다리고,
겨울엔 만물의 태동을 기다리며,
봄엔 여름 휴가 때를
여름엔 가을 단풍구경 갈 때를 기다립니다.
물론 단풍이 떨어질 때 또다시 첫 눈을 기다리겠지요.

성공하기를, 부자 되기를, 행복하기를
깨달음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그렇게 끊임없이 평생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우리는 결국 한번도 기다리지도 않았던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달려가면서
한 순간도 기다림을 포기했던 적이 없었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온 것이라고는 한번도 기다리지 않았던
버림이고 죽음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삶 속에서 기다림의 결과로 얻어 낸
그 어떤 가치있는 것이라도
결국에 죽음 앞에서는 모두 다 무의미한 것일 뿐입니다.
모두 다 버리고 가야할 것들 뿐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 유일하게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살아오면서 우리가 별로 바라지 않았던
‘현재의 깨어있는 힘(지혜)’과 ‘사랑과 베품(자비)’입니다.

평생을 다음 순간만 바라고 살았지만,
더 낳은 순간만을 바라고 살았지만
죽고 나서 우리가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이
‘기다림의 결과’가 아닌 ‘기다림 없는 순간에 깨어있는 힘’이라는 것은
참으로 우리의 기다림을 허탈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다림’이 아닌
‘기다림의 놓음’입니다.
기다리지 않았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현존할 수 있습니다.
기다림을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기다림이란
지금 이 순간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이 아닌 다음 순간을 원한다는 말이고,
현재가 아닌 미래를 원한다는 말이며,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원한다는 말이고,
‘지금의 나 처럼’이 아닌 ‘다른 사람처럼’되길 원한다는 말이며,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닌 갖지 못한 것을 원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기대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그 갈등이 바로 괴로움의 실체로 다가옵니다.
기다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고되고 괴로울 뿐입니다.

이런 우리의 기다림은 습관적입니다.
항상 무엇인가를 기다리지 않으면 견디질 못합니다.
그 기다림을 좋은 말로 ‘희망’이라고도 하고 꿈이라도도 하겠지요.
또 ‘목적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그런 기다림을 당연하게 여기다 보니
이런 기다림을 ‘희망’이니, ‘꿈’이니, ‘목적의식’이니 하고
좋은 말처럼 꾸며 놓았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기다림은 우릴 피곤하게 만들 뿐입니다.
여전히 기다림은 온전한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을 방해하고,
삶의 근원적인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할 뿐입니다.

그런 습관적인 기다림에
이젠 지칠 때도 되지 않았는가요?
그동안 우리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까.
아니 어쩌면 우리 삶 전체를
이런 쓸모없는 기다림에 헛되이 소모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기다림이란 낭비이고 불필요한 것입니다.
공연히 내적인 에너지를 소모할 뿐입니다.
기다릴 시간에
저지르는 편이 더 현명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편이 더 궁극적입니다.

현실적인 돈, 명예, 권력, 학벌, 지위, 성공 등은
기다림을 통해 얻게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행복은
결코 기다림을 통해 얻을 수 없습니다.

현실적인 돈, 명예, 권력, 학벌, 성공이라는 것이
다 궁극적으로 행복을 위한 방편이 아니던가요?
그런 껍데기를 위한 기다림에 휘둘려서는 안됩니다.
바로 궁극적인 행복 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행복은 결코 기다린다고 오지 않습니다.
행복은 결코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돈, 명예, 권력, 지위, 학벌, 성공 속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행복은
다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음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완전한 자족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항상 행복은 이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늘 그렇게 있을 뿐이지요.
기다리는 마음은 이 자리에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 자리를 봐야 하는데
다른 자리를 찾고 기다리고 있으니 어떻게 볼 수 있겠어요.

기다림의 결과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 기다림을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그 때 언제나 있어왔던 행복을 볼 수 있을 뿐.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내가 누구이든 간에,
내가 무슨 일에 종사하든 간에,
나의 직위, 직장, 학벌, 재산, 세속적인 성공에 상관없이
다만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인정하며 사랑하고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그냥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이면 되지
한참을 기다린 후에나 얻을 수 있는
‘다른 그 무엇’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내 모습에,
내가 가지고 있는 만큼의 소유물에,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음에
감사하고 존중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또 다른 것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린 이 순간에 깨어있는 법을 터득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분명 머지 않아
맑은 행복과 평화로움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기다림을 놓아버리세요.
다음 순간을 기다리지 마시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이
기다림을 이룬 순간이 되도록 하세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 순간에 서 있으면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다림을 놓아버리고
바로 이 자리에 서 있으시길...



Posted by 법상






[고양 흥국사 연못에 비친 종각]

선택하지 말라.
분별하고 차별하지 말라.
우리의 삶을 가만히 바라보면
끊임없는 선택과 분별의 연속이다.

단 한 순간도 선택을 멈춘 적이 없다.
선택하지 않으면 세상을 살 수 없을 것 같다.
바보가 될 것 같다.
매 순간 순간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선택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란 점은 좀처럼 생각지 못하고 있다.
선택이 우리를 괴롭히며,
선택이 우리를 어리석음으로 몰고간다.

우리는 생각한다.
보다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순간 순간 보다 올바로 선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며,
공부하고 자료를 찾으며 온갖 정보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 모든 배움들은 이제 다 놓아버릴 때가 되었다.
모든 분별과 차별, 그로인한 '선택'은 삶에 대한 근원적인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선택받지 못한다.
한 가지를 옳다고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그른 것이 되어 선택받지 못하고 만다.

그러면 우리 삶은 둘로 나뉜다.
옳고 그른 것, 맞고 틀린 것으로 나뉜다.
그렇게 둘로 나뉘면 반드시 그 중 하나는 좋고 하나는 싫어진다.
보통 사람들은 그 가운데 좋은 것은 선택하여 내 것으로 가지려 하고
싫은 것은 선택하지 않은 채 버려두거나 혐오하고 심지어 파괴시키고 죽이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좋고 싫은 것으로 나누는 것,
그것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본 진리의 관점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혼란과 분열, 시기와 질투 그리고 전쟁을 가져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은 더욱 더 좋고 싫은 것을 나누게 되고,
점점 더 사물을 비뚫어지게 보게 된다.
한 쪽으로 치우친 시선으로 보게 된다.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잃고 만다.

항상 우리의 답변은 둘 중 하나다.
좋거나 싫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그러나 어찌 항상 좋을 수만 있고, 옳을 수만 있는가.
어찌 항상 싫을 수만 있고, 그를 수만 있겠는가.

흔히 '저 사람 어때?' 하고 물으면 그 답변은 늘
'괜찮아' 혹은 '별로야'이거나,
'좋은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거나하는 둘 중 하나의 답변이 돌아오곤 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둘 중 하나의 견해로 규정지어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거나 하는
둘 중 하나로 나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판단 자체가 그 사람에 대한 온전치 못한 편견을 불러올 뿐이다.

'나쁜 사람이야', '성격이 별로야'란 평가를 들었다고 치자.
그러면 분명 우리 마음에는 그 사람에 대한 '나쁘다' '별로다'라는 편견이 자리한다.
그런 치우친 견해로 상대를 판단하게 된다.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나 자비를 베풀었더라도 마음 속에는
'혹시 무언가 또다른 나쁜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된다.
좀처럼 그 편견을 깨기란 쉽지 않다.

모든 나뉨과 판단과 분별 그리고 선택이란 것이 이와 같다.
좋게 보는 것도 본질적이지 않고
나쁘게 보는 것도 본질적이지 못하다.

어떤 한 가지를 좋고 보고 나면 그 모든 것이 좋아진다.
또 한 가지가 나빠지면 모든 것이 싫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면이 다 좋아보이지만,
한 번 미운 사람은 하는 행동이 다 미워보이지 않는가.

좋고 싫은 색안경이 있는 이상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우리 마음은 더욱 더 비뚫어지고 분열 될 뿐이다.

보다 본질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선택하지 않는 일이다.
판단하지 않는 일이다.
선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만 보기만 하라.
판단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그 어떤 해석도, 분별도, 선택도 하지 말라.
그랬을 때 치우침 없는 정견의 시야가 열린다.
좋고 나쁜 양변에 갇히지 않은 무분별의 맑은 견해가 생겨난다.

누가 나에게 욕을 했다고?
시험에 진급에 떨어졌다고?
아이의 성적이 나쁘다고?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원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고?
실패를 했다고?

그것이 뭐 어쨌단 말인가.
그 사실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그 사실, 그 상황에 대해
이런 저런 좋고 나쁜 분별을 갇다 붙인 것일 뿐이다.

대그룹 입사 시험에 떨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 사실은 항상 두 가지를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시험에 떨어져서 그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에 또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의 상황 가운데 우리는 보통 전자를 선택함으로써 괴로운 상황으로 몰고가곤 한다.
그러나 왜 그 선택만을 고집해야 하는가.
그 선택에만 갇혀 있어야 하는가.

보다 창조적이고 주체적이며 긍정적이고 영적인 사람이라면
시험에 떨어졌다는 그 사실에 아무런 판단이나 선택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둘 중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분명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었다.
다만 내 스스로 '반드시 이렇게 되야 한다'고,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고 고집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고집과 집착이 나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다.

어떤 한 가지 상황에 대해 이런 저런 판단과 해석을 가하지 말라.
판단하고 분별하고 차별함으로써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선택하지는 말라.
그 어떤 상황도 전적으로 좋은 것이라거나 전적으로 나쁜 것이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상황을 보고 내 마음이 좋은 것이라 선택하고,
나쁜 것이라 선택했을 뿐인 것이다.

실패가 왜 반드시 나쁜 것이기만 한 것인가.
그로인해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을 수도 있고,
그러한 몇 번의 실패로 인해 내적인 힘이 쌓였을 수도 있으며,
과거의 악업을 소멸시킬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의 때였을 수도 있고,
때때로 실패가 훗날 생각해 보면 더 큰 성공을 위한 정말 필요한 기초작업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어떤 판단도 버리라.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하지 말라.
선택 없이 그 상황 자체를 무분별로 받아들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라.
큰 틀에서 삶을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

그것이 바로 업을 뛰어넘는 길이다.
업에 얽매이지 않고 업에 구속되지 않는 길이다.
악업과 죄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다.

어떤 한 사람을 보고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하지 말라.
'능력있는 사람'이라거나 '능력없는 사람'이라거나 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습관을 버리라.
마찬가지로 어떤 한 상황을 보고 좋다거나 나쁘다고 판단치 말라.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고,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사람도, 상황도 그것 자체는 완전한 무분별이다.
완전 중립이다.
다만 그 사람에 대한, 그 상황에 대한 해석이
모든 문제를 가져올 뿐이다.

모든 분별을 버리라.
모든 차별과 선택을 버리라.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라.

선택없이 분별없이 다만 바라보기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을 대상으로 힘겨운 투쟁을 버리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 온갖 혼란과 분열을 가져오지 않아도 되며,
우리 삶을 괴롭히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다.

선택하지 말고 다만 바라보라.
분별하지 말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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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내 삶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늘 불안정하고, 불안하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삶은 아름답다.

삶이 안전하고 확실하게 정해져 있고,
안정적인 분명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생기를 잃고 말 것인가.
그런 삶은 언뜻 보기에는 안정되어 보이고 행복해 보이겠지만
그런 삶을 사는 자는 나약하고 속박되어 있으며 틀에 박혀 있고 생기가 없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그것도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면
거기에 나만의 자유의지를 펼칠 공간이 없다.
확실한 삶에 틀어박히고 구속된 채 자유를 잃고 해맬 수 밖에 없다.
그런 삶은 얼마나 희뿌옇고 재미가 없는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지, 한달 뒤, 일년 뒤, 십년 뒤 머언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면
그것처럼 따분하고 기계적인 밍숭맹숭한 삶이 또 있을까.
그것은 삶이 아니다. 그저 기계의 움직임일 뿐.

그것이 아무리 부유한 미래일지라도 그것은 구속이요 속박이다.
돈과 재물로 가득 찬 부유한 노후라고 할지라도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런 삶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삶에 지쳐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고, 노후를 준비하려 들지 말라.
내 삶의 미래며 노후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가장 분명하고 알찬 미래며 노후준비는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삶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일이다.
노후자금을 은행에 넣어두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삶으로써 시공의 법계에 무량한 공덕을 저축하는 일이다.

삶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정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단 한 순간의 미래도 보장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변하기 때문에 경이롭다.
우리는 그 불확실한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흐름에 나를 얹어 놓은 채 다만 따라 흐를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불확실하고 정해진 바가 없다면 불안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불안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 삶에서 때때로 마주하게 될 혼란과 위험을 거부하지 말라.

삶이라는 것은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좋은 일만 일어나는 곳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일만 일어나는 곳이 아니다.
원하는 대로 다 하며 살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삶도 없다.
좋은 일만 일어나며, 원하는 대로 다 하고 살 수 있는 인생이 있다면
그 인생처럼 따분하고 심심하며 불행한 삶은 없을 것이다.
그런 삶에는 생기가 없고 지혜가 없으며 자유가 없다.

삶은 누구에게나 때로는 힘겹고 때로는 눈물겹다.
삶의 모퉁이에서 역경을, 위험을, 좌절을 만나게 된다면
호흡을 가다듬고 반짝이는 눈으로 눈부시게 지켜보라.
혼란스런 삶도 깊이 바라보면 눈부시게 빛난다.
또 때로는 극단적인 좌절과 혼란이
도리어 저 반대편의 극적인 기쁨이 되는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 인생을 포기하려고 하던 사람들의
기도를 본 적이, 들은 적이 있는가.
인생의 최저의 나락에 빠져 있는 이들일수록
그것에서 빠져나오려는 에너지는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단번에 그 상황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극과 극은 언제나 가깝다.
그 둘은 서로 다른 극단이 아니라 다만 에너지의 다른 흐름일 뿐이다.
에너지의 흐름만 살짝 바꾸어 놓는 순간 그 삶은 경이로운 반전이 시작된다.
그렇기에 최악의 괴로운 삶은 곧 최고의 행복과 가깝다.
그 둘은 극단의 먼 발치가 아니라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길벗이다.
살짝 고개만 돌리면 언제나 눈빛을 나눌 수 있다.

사랑을 시작했다면 그 이면에 증오를 또한 시작하고 있는 것이며,
크게 성공할수록 크게 실패할 가능성도 안고 있는 것이고,
삶에 대한 욕구가 클수록 죽음에 대한 고통 또한 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놓아버릴 때 증오 또한 놓여지며,
성공에 대한 욕구를 놓아버릴 때 실패의 두려움도 사라지고,
삶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릴 때 죽음에 대한 괴로움도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처럼 극과 극은 언제나 함께 길을 걷고 있다.

인생이 자꾸만 꼬이고, 괴롭고, 답답하다고?
인생에서 지금이 최악의 순간이라고?
괴로운 일들이 몇 가지고 겹쳐서 나를 미치게 한다고?
잘 되었다. 지금이 바로 삶의 경이로운 반전이 시작될 시점이다.
내 생에 가장 큰 공부가 곧 시작될 것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의 깊게 삶을 지켜보라.

‘이럴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고민하지 말고
주의깊게 마음을 지켜보기만 하라.
지켜보는 관조가 예민해지고 깊어지는 순간
마음의 메시지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도를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절을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아니면 무언가를 저질러 볼까 하는 생각이 일어 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만 그것을 하라.
주의깊게 지켜보면서 다만 그것을 해 보라.
운이 좋다면 삶의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알아챌 수도 있다.

언제나 그렇듯 기적은 아주 사소하게 우리 삶에 등장한다.
진리도 그렇고, 변화도 그렇고, 깨달음도 그렇고,
언제나 정점을 지나는 일은 놀라울 만큼 조용하고 차분하고 미세하게 다가온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 삶에 엄청난 진리가, 부처가, 신이
봄 바람이 불듯 그렇게 살며시 왔다가 살며시 몇 번이고 우리 존재를 스쳤을 터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깊은 관찰로 삶을 지켜보아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삶의 역경과 혼란을 타고 진리는 온다.
삶이 비탈진 내리막에서 뒤집혀 막 내동댕이 쳐 지고 있을 때
도리어 삶의 획기적인 변화가 소리 없이 찾아온다.

이처럼 불안과 혼란과 위험과 역경은 모두
우리를 더욱 더 내면 깊은 곳에 뿌리내리게 하고,
존재의 깊은 심연에 이르게 해 주는 영적인 동반자요 도반 같은 것이다.
그것들이 없다면, 그래서 세상일들이 원하는 대로 순탄하게만 펼쳐진다면
그 때부터 우리의 삶은 중심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역경이 없고 순경만 있는 삶이란 그것이 곧 가장 큰 역경이다.

우리의 삶이 역경과 순경, 편안과 불안, 긴장과 이완이 반복된다는 것은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다. 또한 여간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삶의 속성이요, 진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좋고 싫게 받아들이고, 집착과 미움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다만 오면 오는대로, 가면 가는대로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지 않고 불안과 위험을 버리려 애쓰고,
행복과 편안과 순탄한 삶만을 바라기 위해 애쓴다면
그 때부터 삶은 그대를 외면하고 심지어 파멸시켜 버릴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삶을 온전하게 살아 낼 수가 없다.
온전한 삶이 그대를 비켜가기 때문이다.

삶을 조종하려 들지 말라.
삶을 내 방식대로 통제하려 들지 말라.
내가 원하는 삶만을 살고자 애쓰지 말라.
그런 삶은 없다.
그렇기에 그런 삶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삶은 컴컴한 어둠 속이다.

내 앞에 일어나는 삶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라.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전체적으로 통째로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감사하라.

삶을 조종하려는 자는 삶을 살 수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들만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자는
삶을 살 의지를 포기한 것일 뿐이다.
그런 자는 삶을 살아갈 아무 이유가 없다.

안정적이고 평탄한 삶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모든 화를 부른다.
순탄한 삶만을 바라는 생각이 도리어 순탄하지 못한 삶을 만들어 낸다.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고정적으로 정해놓은 생각이 많을수록
‘그런 삶’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그 모든 생각을 놓아버릴 때
삶은 저절로 삶 그 본연의 길을 걷게 된다.

편안함을 갈구할수록 더욱 불편해지고,
안정을 갈구할수록 삶은 더욱 불안해진다.
편안, 안정에 대한 욕구를 놓아버릴 때 삶은 순조롭다.

이 세상의 근본 이치는 언제나 변한다는 제행무상의 이치와
고정된 것, 확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제법무아의 이치를 따른다.
또한 그러므로 삶이란 언제나 불안전하고 불안정하며 괴로울 수 밖에 없다는
일체개고의 이치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이 삶의 기본 원칙이며 이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기초를 거스르려 애쓴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을 살면서,
안정적이고 확실하며 불변하는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는 꿈이고 환영이며 억지일 뿐,
그런 것은 없다.
없는 것을 찾아 나서봐야 찾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삶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라.
그랬을 때 삶은 아름답다.
아니 사실은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삶의 곳곳에 내재된 위험과 혼돈이 있기 때문에
삶은 경이롭고 찬연히 빛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삶의 복잡성과 혼란과
어느 때고 쉴 사이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위험과 근심과 역경들,
그것들이야말로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요소다.
그런 도전들이 없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피폐하고 나약해지고 말 것인가.

삶은 언뜻 보면 혼란스러워 보일 지 모르지만
본질적인 진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모든 혼돈은 혼돈이 아니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조화로운 인연의 화합이요, 진리의 드러남이다.
혼란스럽게 보이는 모든 삶에는,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분명한 신의 메시지, 붓다의 뜻이 담겨있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라.
느긋하게 삶의 혼란을 즐기라.
아수라장처럼, 난장판같이 튀어나오는 삶의 모든 위험들을
그저 한발자국 떨어져 가만히 지켜보라.
다가오는 삶을 전체적으로 느끼고 만끽하고 수용하라.
그리고 그 모든 삶에 감사하라.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으며,
이것이 될 수도 있고, 저것이 될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삶이란 얼마나 생기로우며 아름다운가.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