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나 구성요소로
네 가지를 꼽습니다.
지수화풍 사대(四大)라고 하는데,
이 사대에 맞춰 현재의 파괴의 문제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地)의 요소와 관련된 오염에는 토양 오염이 있습니다.
폐수나 농약 때문에 토양이 중금속으로 오염되고,
산림 벌채를 통해 대지에 침식작용이 이루어집니다.
과다 방목도 문제가 되는데,
땅을 딱딱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막화하고도 관련이 깊습니다.

그 다음에 수(水)의 요소와 관련해서는 수질오염이 있습니다.
산업폐수나 생활하수 때문에 수질이 악화되고,
전 지구적으로 물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풍(風)의 요소와 관련해 대기오염을 들 수 있는데,
스모그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자주 겪고 있고, 또 산성비도 있습니다.
화석 연료를 사용해서 나오게 되는 아황산가스가
산성비가 되어 내리게 되면,
그것이 석회암층을 용해시키기도 하고
건물을 부식시키고 호흡기에도 큰 지장을 줍니다.

그 다음으로 화(火)의 요소는 지구온난화라고 볼 수 있는데,
저는 이것이 가장 심각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전 지스템, 지구 전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온실효과가스라는 것이 있는데
이산화탄소 층이 지구를 온실처럼 감싸주고 있어서 지구가 따뜻해지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상에 생명이 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치느까 너무 더워져서,
빙산이 녹고 해수면의 높이가 높아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연안지역의 항구들이 잠기게 되는데,
예를 들어 4도씨 정도가 증가한다면
상해, 방콕, 카이로, 방글라데시는 다 잠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 지구적인 것이고 기후에도 심각한 변화를 줍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사대가 합쳐저서
색신(色身)을 이룬다고 보는데,
색신이라고 하는 하나의 몸 또는 생명체에도 문제가 됩니다.
생물종의 다양성이 크게 감소된다는 것이죠.
특히 생명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열대 우림 지역이
아주 급속도로 붕괴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지구상의 생물종 숫자가 엄청나게 감소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짚어 볼 수 있는
생태계 오염의 실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종욱 [불교생태철학] 중에서...

우리 몸도
나무며 풀 그리고 동물들의 몸도
일체 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 져 있습니다.

지구의 지수화풍 사대가 오염되면
곧 우리 몸의 지수화풍도 오염되고
지구의 사대가 깨끗해질 때
우리 몸도 모든 생명도 청명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이 지구의 지수화풍 사대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지수화풍을 인연따로 조합하여 살고 있는
우리 몸이 오염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옛날에 지구의 지수화풍 사대가 오염되지 않았을 때는
병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지구가 오염됨과 동시에
우리 몸 또한 얼마나 오염되고 있어요.

아토피 문제며, 성인병, 피부병, 먹거리 오염문제 등
이 모든 것들이 지구의 사대가 오염됨으로써
우리 몸 또한 오염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몸이 오염되면
곧 그 몸에 깃들어 있는 마음도 오염되고 만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근원인
이 지구상의 사대를
내 몸처럼 생각하고 내 마음처럼, 내 정신처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구를 오염시키는 것이
바로 내 몸과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미국 나그네 비둘기는 한 때
북미 대륙에서 가장 흔한 들새였다.
나그네 비둘기의 큰 떼가 지나가면 하늘이 어두워질 정도였으므로,
아무도 이 새가 멸종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미국 개척시대가 시작되면서
나그네 비둘기의 수난은 시작되었다.
이 새는 아주 고기 맛이 좋고
대평원에서 큰 무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부 개척자들의 식탁에서 아주 인기있는 메뉴가 되었다.

미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철도가 놓이면서
이 새는 철도 건설 노동자를 위한 식사 뿐만이 아니라,
상품화되어 이웃 여러 마을로 신속하게 공급되었다.

이 나그네 비둘기의 포획을 위해 수천의 전문 사냥꾼이 고용되어
기관총을 비롯한 여러 화기를 사용하여 남획하기 시작했다.
이 새는 큰 나무에 수십 또는 수백씩 무리를 지어
새끼를 치는 생태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더욱 남획하기 쉬웠다.

사냥꾼들은 어린 새나 늙은 새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포획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855년 뉴욕의 한 거래처에서
한 사람이 하루에 18,000마리의 비둘기를 매매한 사실이 있고,
1869년 한 해 동안 한 지역에서
750만 마리의 나그네 비둘기가 포획된 기록도 있다.

이러한 남획으로 인해서 나그네 비둘기의 수는 격감하여
19세기 후반에는 큰 번식 집단을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희귀한 종이 되어 버렸다.

1894년 마지막 둥지가 발견되었으며,
1914년 신시네티 동물원에서 최후의 한 마리가 죽음으로써
이 새는 멸종되었다.

[지속가능한 사회와 생태학] 중에서...

지구는 공룡을 포함해 식물과 동물 수천종이 절멸한 6천500만년 전
소행성 충돌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생물 종들을 잃어가고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전 세계 포유류의 약 4분의 1, 양서류의 3분의 1,
조류의 10분의 1 이상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기후변화 요인 한 가지만으로
앞으로 50년 안에 추가로 생물종 15-37%가
멸종 직전으로 몰릴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추산한다.

세계환경보존연맹은 지난 5월 멸종 위협에 처한 생물 종의 수가
1만6천119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백상아리는 지난 50년 동안 최대 95%까지 감소했다.
북극곰은 앞으로 45년 간 개체 수가 30%쯤 감소할 전망이다.

사하라사막 지대에서는 무분별한 사냥과 서식지 파괴로
다마가젤의 수가 80%나 줄었다.
아프리카 민물고기의 4분의 1도 인류의 활동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

과학자들은
"중대한 생물다양성 위기 상황으로 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물다양성은 여전히 저평가되고 있고,
민간과 공공정책 결정시 적절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며
"생물다양성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적인 조직을 창설함으로써
과학과 정책 사이 간격을 시급히 메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겨레 신문]

지금도 매일 70~150여 종의 생물이
소리없이 아무도 모르게 멸종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 년이나 한 달이 아니라
하루에 말이지요.

생물이 멸종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몸이 꺼져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요.

위에서 나그네 비둘기가 없어진
그런 방식으로, 혹은 그보다 더 잔혹하거나, 미묘한 방법으로
수많은 종의 생물들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뿐 아니지요.
이 글을 읽고 있는 오늘 하루,
2만 헥타르(약 6천5십만평)의 사막을 만들어내고,
8,600만 톤의 비옥한 땅을 침식시켜 파괴하고,
1억 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브라질 아마존강 유역의 열대우림은
우리가 좋아하는 햄버거 등의 패스트푸드용
쇠고기를 생산하기 위한 목초지를 만드느라
매년 미국의 테네시 주보다 더 넓은 삼림지역이
차례 차례 불태워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아랄해는 목화재배를 위한 관계용수로 인해
빠르게 사막화 현상을 보이고 있어
해안선이 하루가 다르게 멀어져 가고 있고,

뭐 이런 예를 말로 일일이 다 적으려면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고,
내 평생 해도 모자랄 판이니
가슴도 아프고 그만 적도록 합니다.

우리의 집착,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들의, 인간들의 집착과 욕심이
이 모든 무서운 일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훗날 우리가 받아야 할
공업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업이니까
나 혼자만 환경 보존하고, 절약하고, 아끼고,
자연을 사랑한다고 될 일이 아니니
그냥 대충 살겠다고 한다면
그 공업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지만,

나 먼저 아끼고 절약하고 나누고
보존하며 자연을, 생명을 내 몸 아끼듯 사랑하고
동체의 자비로써 대한다면
내 업은 내 업대로 청정함을 유지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기상 이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업이 청정한 사람은 그것을 빗겨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폭풍우가 몰아친다고
다 죽는 것은 아니고, 다 과보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업에 따라 죽기도 살기도 하고,
업에 따라 자연의 갚음을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업이란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자연과 나와의 업이 청정하면
내가 자연을 어쩌지 않은 것 처럼
자연도 나를 어쩌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자연을 더럽히고, 오염시키고, 펑펑 써대며,
개발과 발전을 이유로 파헤치고 꺾고 뚫고 해 버린다면
자연 또한 그 업을 기억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업을 청정히 한다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자연과의 업이 청정해 진다면
그것이 바로 청정한 자연, 청정하고 지속가능한 지구를 만드는데
더없이 중요한 실천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숫타니파타]의 게송이 떠오릅니다.

악마가 말했다.
"자식 있는 자는 자식 때문에 기쁘고,
소가 있는 자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인간이 소유하고 집착하는 것은 기쁨이다.
집착할 것이 없는 자는 기뻐할 것도 없다."

그러자 붓다가 대답했다.
"자식이 있는 자는 자식 때문에 근심하고,
소 있는 자는 소 때문에 근심한다.
실로 인간의 근심은 무엇인가에 집착하는데서 생겨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자는 근심할 것도 없다."


Posted by 법상




요즈음 들어
더욱 그런 생 각이 가슴을 칩니다.

사람이며 동식물
이 산하대지 자연 삼라 만상...
풀 한 포기며, 나무 한 그루
흙 한 줌에서 볼을 스치는 바람 에 이르기까지

이 추운 날 오후 따스한 햇살 한 줄기,
저녁 나절 절 앞마당으로 고개를 숙이는 산그림자며,
저 산 너머로 수 줍은 듯 붉게 그려지는 노을
절 앞마당에서 꼬리를 흔들며 뛰어노 는 심안이 또 마음이...

이 모든 내 주위의 식구들이
나와 한 가 족, 한 몸이구나 하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의 손길이 범접 하지 않은
그냥 가만히 내 버려 둔 것들이
가장 생기 발랄하게 살아 있구 나 느낍니다.

세상의 법칙 대로
있는 그대로 내버려 진 것들에게서
그 어떤 살아있는 스승 같은 그 무엇을 느끼게 됩니 다.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은
애쓰 지 않고, 억지 부리지 않고, 자기 생각 내세우지 않고
대 자연의 순 리에 모든 것을 맡기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 는 것일 겁니다.

그러고 보면
나를 포함한 우리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아주 여법하게 잘 살고 있는
우리의 많은 자연 식구 들을
너무 못살게 굴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사람의 손길이 타게 되면
함께 사람의 욕심도 타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러움의 맛을 잃게 될 것 같습니 다.
사람들이란
자연을 대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 고 바라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있는 그대로 충분히 본다는 것은
자연을 충분히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 순간 아무런 분별 없이 자연 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연을 바라볼 때
어떻게 써먹 을까 하는 궁리만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용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하는...

그런 것 이외에
그냥 자연을 바라볼 수 는 없을까요.
아무런 분별도 가지지 않고
아무런 판단이나 이용가치를 따지지 않 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말입니다.

가만히 발길을 멈추고
언제나처럼 사무 실 앞을 지키고 서 있는
한 그루 작은 나무를 바라본 적이 있으신가 요?
그 나무에 등을 기대고 가슴을 기대에 본 적이 있는지 요.

한 여름에 땀을 식히려고 그늘을 찾는다거 나,
내 편리에 의해 이용하려는 마음으로 찾는 것 말고
있는 그대 로의 자연을 평화로운 마음으로 만나 보셨는지를 말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자연과 진정으로 만날 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이기심이나 이용가치를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만나는 것 말입니다.

그랬을 때
우린 비로소 사람과 만나는 법도,
다른 모든 세상과 만나는 법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랬 을 때
아마도 우린 비로소
모든 것들과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 아 닐까요?

눈귀코혀몸뜻으로 만나는
모든 감각적 인 대상을 대할 때도
그저 있는 그대로
아무런 판단이나 분별 없 이 순수하게 바라봐 주세요.

그냥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냥 그 렇게 보는 것이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보는 대 상과 보는 이가 따로 따로가 아니게 됩니다.
둘은 따로 나뉘지 않는 순수한 하나가 되고
또한 순수한 사랑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 다.

'바라보기'
이것은 이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가 소박하게 그러나 진지하게 실천할 수 있는
아마도 가장 소 중한 수행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과 하나될 수 있고,
풀 한포기 작은 자연과도 하나될 수 있으며,
딱정벌레와도 하나될 수 있고,
또한 많은 사람들과 하나될 수 있고,
진리와 하나될 수 있는...
어쩌 면 유일할 지 모를 실천행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이 바쁜 세상 속에서
바쁨 속에 내몰려 이리 저리 쫒기지만 말고,
잠시 짬이라도 내어
텅 빈 맑은 시선으 로 세상을 바라보세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일 지 모릅니다.

바쁜 걸음 잠시 멈추세요.
들고 내는 숨 을 바라보고,
걷는 걸음 걸음을 바라보고,
하루 종일 조잘 거리는 입도 한 번 바라보고,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몸도 바라보고,
원숭이처럼 늘 날뛰기 만 하는 생각들도 바라보고,

예전부터 사무실 청소하시던 아주머님 도,
매일같이 출퇴근 시켜주시는 버스 기사 아저씨도,
출퇴근 길에 스치 던 이름모를 눈에 익은 많은 사람들도,
회사 앞에서, 혹은 아파트 앞에 서 항상 마주치는 경비 아저씨 하며,
이따금씩 들리는 미용실, 슈퍼 마켓 주인 아주머님 또한

어쩌면 사소하다고 생각하고
별 관심 없이 스쳐 지나쳐 온 수 많은 이웃들에 대해서...
오늘은 좀 더 마음 을 모아
따뜻한 사랑을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아 주시길...

보도블럭 사이로 힘겹게 솟아난 작은 야생 풀도 바라보고
입사 때부터 있어왔지만
한 번도 관심어린 사랑으로 보지 못했 던 나무 한 그루도 보아주고,
집 뜰 곳곳에 피어오른 소박한 풀들에 서부터
저벅 저벅 뒷산으로 올라 시선 가는 곳곳 마음으로 바라보 고,

때때로 새벽 청청한 공기를 맞으며
산 위로 떠오르는 첫 햇살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퇴근길 서산위로 붉게 물든 노을도 충분히 보아주고,
사무실 한 켠에 외로이 서 있는 화분에 물도 줘 보고,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들은
또 우리 가 마음을 모아 관심 가져 주어야 할 것들은
내 눈과 마음에 밟히는 생명 있고 없는 모든 것들입니다.
어쩌면 아주 사소한 것들이지만
그 사소함이 나 자신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바라봄을 통해 느낄 수 있을 것 입니다.

참으로 바라보았을 때,
바라보는 나도 없고, 바라보는 대상도 없으며
좋은 대상도 싫은 대상도 없고,
옳은 것 도 그른 것도 없고,
오직 순수한 동체대비의 사랑과 지혜로움이
우리들 뻑뻑한 속 뜰을 맑게 적셔 줄 것 같습니다.
Posted by 법상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기본 법칙을 다른 관점에서 조금 더 확장해 보자. 이 법칙은 나아가 큰 것이 있으므로 작은 것이 있고, 옳은 것이 있으므로 틀린 것이 있고, 남자가 있으므로 여자가 있고, 깨끗한 것이 있으므로 더러운 것이 있고, 이 생각이 있으므로 저 생각이 있고, 생이 있으므로 노사가 있고, 중생이 있으므로 부처가 있고, 생사가 있으므로 열반이 있고, 이런 식으로 우리가 분별하고 있는 일체의 이원론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즉 크다 작다는 분별은 사실 고정적으로 크고 작은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큰 것이 있으므로 그것과 견주어 비교되는 작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키가 큰지 작은지는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결정되어지는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무인도에서 홀로 자라났다면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사람이라는 분별도 없었을 것이며,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키가 큰지 작은지,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똑똑한지 어리석은지 라는 일체의 분별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일체의 분별이 있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무언가 비교되고 견주어지는 다른 인연이 있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남자 여자라는 분별이 있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안 되고, 나라는 남자와 비교될 여자라는 타인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키가 작다는 것도 나보다 키가 큰 타인‘을 말미암아’ 작다는 분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양 극단의 분별은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연기되어진 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크다 작다거나, 남자다 여자다거나, 잘생겼다 못생겼다거나, 똑똑하다 어리석다거나 하는 두 가지 극단의 분별은 절대적이거나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 의지할 때에만 연기적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실체적 관념이 아니므로 공(空)하다고 한다.

또한 이런 양 극단의 분별은 끊임없이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무상(無常)이고, 그러므로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고정적인 자아적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키가 큰 사람도 농구 선수들 앞에 가면 작게 느껴지고, 키 작은 사람들 앞에서 있을 때 크게 느껴지는 것이듯이 인연따라 상황따라 변하는 것(무상)이며 그렇기에 ‘큰 사람’이라고 고정적으로 말 할 수 없다(무아)는 뜻이다.

이와 같이 양 극단의 분별로써 고정지을 수 없기 때문에 중도(中道)라고 한다. 즉 연기된 모든 것은 무상하고 무아이며 공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극단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항상 중도적인 치우치지 않은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한 사람을 보고 크다거나, 잘났다거나, 옳다거나, 혹은 작다거나, 못났다거나, 그르다거나, 그 어떤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도 인연따라 크거나 작을 뿐이고, 인연따라 선하거나 악할 뿐이며, 인연 따라 변해 갈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사람들을 볼 때 중도적인 치우침 없는 시선으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뒤에서 다시 언급하게 될 팔정도의 정견(正見)이다. 연기적인 시선이 바로 정견이며, 중도이고, 공과 무아, 무상의 바라봄인 것이다.

이처럼 연기적인 시각에서는 일체 모든 사람이 완전히 평등하며, 차별이 없어 높은 사람이라거나 낮은 사람이라거나, 능력 있고 없다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고 되지 않다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연기적인 시선에서, 또 깨달음을 얻으신 큰스님들의 시선에서 우리 모든 중생들은 똑같이 평등하고, 똑같이 사랑스러우며, 똑같은 존재감으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연기적인 치우침 없는 대 평등의 시선이 가능한 것이다.

옳고 그르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기법의 세상에서는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절대적으로 틀렸다거나 할 것이 없다. 옳고 그르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며, 연기적인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옳은 견해가 다른 나라에서는 그르게 나타날 수도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선이 다른 나라에서는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여인이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결혼하게 되어있고 그것이 옳은 이성관이지만, 예를 들어 무슬림은 한 남자가 네 명의 부인을 얻을 수 있고, 아프리카의 마사이족, 바쿠족, 간다족 등도 여러 아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부다처제와는 반대로 일처다부제인 곳으로는 티베트가 있는데, 티베트는 한 여성이 한 집안의 장남과 결혼하면 그 집안의 다른 형제들과도 결혼할 수 있고, 나이지리아의 하우사족 또한 자가(Zaga)혼인이라고 하여 남편과의 이혼 없이도 다른 남자와의 결혼이 가능하다.

이처럼 시대와 나라가 다르면 그곳의 문화나 풍습도 다르고, 성적인 윤리의식도 다를 수 있다. 옳고 그르다는, 선과 악이라는 것이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어느 나라건 어느 시대건 상관없이 다 똑같아야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서 보는 선악의 시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상호의존적이고, 상호규정적이며, 상황따라 달라질 수 있고, 시대나 나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선악은 연기적인 것이며 상의상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분법적으로 딱 나누어 진 것이 아니라 선이 있으므로 악이 있고 악이 있으므로 선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의존적이고 연속적으로 연결된 하나이다. 절대적인 선악의 차별이 있다면 거기에는 선에 대해 악을 배제하고, 강압하며, 미워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동반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남게 되지만 연기된 것으로 볼 때 선악은 유연하고 자율적이며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포섭할 수 있는 화합과 평화적인 윤리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전쟁을 볼 때 그 두 나라가 보기에는 서로가 극단적인 적이며 악이기 때문에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라는 이분법에 젖어 있음을 본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팔레스타인이 적이고 악이며, 팔레스타인들이 볼 때는 유대인들이 악이다. 그러나 한 발 떨어져 바라본다면 유대인이 있으므로 팔레스타인이 있고, 팔레스타인이 있으므로 유대인이 있는 것이지, 그 어느 한 나라가 선이고 다른 나라는 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어느 한 쪽에서 자신을 선이라고 생각하니까 상대방이 악이 되는 것이지 본래 선악이 정해 져 있지는 않은 것이다. 조금 예민한 문제이긴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이어져 왔던 종교전쟁들을 보더라도 내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나라는 절대선이고 타종교를 믿는 사람과 나라는 절대악인 것 처럼 규정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곤 했지만, 사실 그러한 두 종교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 현대에 와서는 그 두 종교가 모두 올바른 종교로써, 이 세상을 대표하는 종교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과연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모호해진다.

이것을 보더라도 본래부터 어느 종교가 선이고 다른 종교는 악이라고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상의상관적이며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난 것에 불과하다. 내 종교를 선이라고 규정하면서부터 타종교는 악이라는 규정이 생긴 것이니 상호규정적인 것이다.

이처럼 선악이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혹은 어떤 특정한 상황과 믿음 속에서 연기되어 발생한 것이라면 선악은 구체적인 상황을 떠나서 고정되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악은 연기된 것이고, 공(空)한 것이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것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처럼 선악이라는 분별이 연기된 것이기에 공하고 무상하며 무아라면 선악이라는 양 극단을 나누어 놓고 서로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따질 것도 없고, 이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선악의 양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은 위험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연기된 것이기에 양 극단을 내세울 것이 없으므로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이다.

중도적인 실천에서 본다면 선악으로 나눌 것도 없고, 어느 한 쪽은 옳다거나 다른 쪽은 그르다거나 하고 극단적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상황 따라 연기되어진 것이므로 사실은 고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선이라고 혹은 악이라고 낙인찍어 놓고 선이 악을 없애기 위해 폭력을 저지르는 것 또한 발붙일 수 없게 된다. 연기와 중도적인 관점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네가 없으면 내가 없고, 네가 존재함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전체적이며 동체로써의 자비로운 통찰이 진흙 속에 연꽃이 피어나듯 피어오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는 부유함과 가난의 양 극단의 삶은 양쪽 모두에게 온갖 사회적인 문제를 가져다 주고 있다. 이 세상 어느 한 쪽에서는 기아와 가난과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허덕이며 하루에도 5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이 3만 5천 명씩 죽어가는 마당에 또 다른 곳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비만으로 고민하고, 넘쳐나는 음식물 쓰레기로 고민을 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남한에서는 한 해 음식물쓰레기가 14조원에 달하는데 그 정도면 북한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양이라고 한다. 부자 나라는 부유해서 괴롭고, 가난한 나라는 가난해서 괴롭다. 선진국들은 개발과 발전으로 인한 온갖 환경문제들 때문에 괴롭고, 후진국들은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어서 괴롭다. 양 극단은 언제나 고(苦)를 가져온다.

이러한 양 극단의 문제는 연기적인 자각과 중도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양 극단의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극단을 지양하고 중도적인 삶을 실천할 수 있다면 양 극단의 고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한 나라는 스스로 만족과 청빈과 소욕을 바탕으로 한 동체대비의 자비사상으로써 가난한 나라에 나눔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남아도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만도 연간 15조원이상이 든다고 하고, 그 쓰레기로 인한 악취며 처리시 환경문제 등 온갖 부수적인 문제들도 만만치 않은 것을 생각했을 때, 스스로 조금씩 적게 가지고 적게 먹으며 쓰레기로 해치울 것들을 미리 가난한 나라들과 나누어 쓸 수 있다면 부유함의 괴로움도 가난함의 괴로움도 모두 함께 소멸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의 자각과 깨달음 그리고 소욕과 나눔의 실천적인 정신에 달려 있다. 이러한 소욕과 나눔의 정신의 바탕이 바로 가난한 나라가 없으면 부자 나라도 없고, 굶주리는 아이를 살리지 않으면 나 또한 사라지고 만다는 연기적인 철저한 자각인 것이다. 연기 중도적인 시선에서는 그들과 우리는 서로 의존하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 그들이 살아나야만 우리도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춘천 청평사 오르는 길에...]

비가 옵니다.
방안 널찍한 창 문을 활짝 열고
빗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습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기가 참 힘든데
오늘은 아침부터
우울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거친 파도처럼 밀려오다 밀려가다 그럽니 다.

나무들이며 들풀, 야생화들도
오늘은 한참 정신이 없어 보입니다.
저 녀석들 지금이 야 한참 정신 없다 보니
하늘에서 내리는 거친 비를 원 망할 지 모르겠지만
이런 역경이 자신을 더욱 강인하 게 만들어 준다는 걸
아마도 지금은 모를 겁니다.
비 가 그치고 햇살 쨍 하고 내려 쬘 때
그 때 조금씩 느낄 수 있겠지요.

이른 아침
저 숲 위로, 나 무 위로, 들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차 한 잔 생각도 나고
감성이 더 여리고 새록해 집니다.

저렇게 떨어지는 비를
그대 로 맞고 있는 나무들은, 저 숲의 생명들은
참 의연도 합니다.

절 주위는 얕은 산이라
온 갖 나무들이며 들풀, 꽃들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잠시 도 쉬지 않고 너가 지면 또 내가 피어나고
핀 꽃이 지 면 또 다른 꽃이 피고 그럽니다.

풀들도 처음 여린 잎의 생김새 와
한참 물이 올라 피어오른 모습은 전혀 달라요.
처음 엔 작은 풀이거니 했는데
비 한 번 오고 시간 조금 지 나고 나면
꼭 나무 처럼 쑥쑥 자라 나를 당황케 하는 녀석들도 있고,

처음엔 예쁘고 귀엽던 것들이
얼마나 생명력이 강하고 번식력이 강한지
무서울 정도 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기도 합니다.

채소밭에 너무 큰 풀들은 뽑아 주는데
한참 풀들을 뽑아주다 보면
뿌리가 얼마나 길고 굵 은 지
세상 위로 올라온 것의 몇 배 이상은 됨직한 뿌리를 보 면
섬짓 이네들의 생명력에 놀라고 두려움 마저 일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뽑아 낸다는 것이
어떨 때는 참 미안하기도 하고
저 녀석들도 다 이유가 있 어 피어오르는 것이고,
저렇게 당당한 뿌리를 만들었을 것인 데 하고 생각하면
풀 뽑는 일도 잠시 머뭇거리게 됩니 다.

그래서 될 수 있다면
풀 도 그대로 함께 자랄 수 있도록 내 버려 둡니다.
너무 커 서 채소들 키를 웃자랄 때가 되면
그런 녀석들만 뽑아서 옆에 놓아둘 뿐
될 수 있다면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저 채소들에게도 살아남기 위한 경쟁력도 될 것이 고,
그 경쟁력이 더욱 채소들을 생명력 있게 가꿀 것이 며,
또한 함께 자라주는 따뜻한 이웃이고
도반이 될 수 도 안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기도 합니 다.

이렇게 여러 가지 풀들이 함 께 자라고
이웃 풀들과 함께 경쟁도 하고
또 함께 살아가려고 서로 서로 도와 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자라난 채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실하고 열매가 적을 지 몰라도
그 생명력은 더욱 강인하며
실제로 병해충으로부터의 예방 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채소도 생명인데
우리 사람 들하고 사는 것이 다를 리야 있겠어요?
사람도 마찬가 지 아닙니까.
늘상 온실 속에서 자란 채소들 처럼
온갖 시련과 힘 겨운 경계를 당해 보지 못하고
늘 행복하게만, 늘 풍족하게 만, 늘 보호 속에서만 자란다면
그 사람의 내적인 생 명력은 빛을 잃게 되고 맙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실패 도 맛보면서 주춤주춤 거리다가
그래도 딱 버티며 일어서기 를
몇 번이고 반복할 수록
우리들의 내적인 삶의 빛 은 더 생기를 띨 수 있는 법이지요.

본래부터 아무리 큰 시련이며 역경이라도
꼭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만큼만 오고
또 꼭 필 요한 바로 그 때 오지
내가 이겨내지 못할 일이
도저 히 이겨내지 못할 때
찾아오는 법은 없다고 그럽니 다.

채소도 키워 보니까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처음에 자랄 때 오이에 진딧물이 자꾸 붙길래
손으로 떼어주고 떼어주고 하다가
어디서 주워 들은 얘기를 듣 고 담뱃재 우린 물도 줘 보고
그래도 그래도 끊임없이 끊 임없이 진딘물이 생기데요.

그래서 그래 너도 먹고 살아야 지 싶어
그냥 내 버려 두었지요.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진딧 물도 양심은 있는지
전체 오이를 다 괴롭히는 건 아니고
그 중에 부실한 몇몇 오이에만 가서 붙어 있으니
그래 도 얼마나 고맙나 싶어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었지 요.

우리 사람들이야 어디 그럽니 까.
될 수 있으면 좋은 것, 많은 것 더 가지려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최대한 많은 양을 모아 축적하려고 안달이 지
양심이라는 것이 우리들 욕심 앞에 맥을 못 추지 않아요.
진딧물에게도 배울 점이 있는겁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보니까
진딧물이 많이 붙은 오이에만 개미들이 모여요.
아직도 긴가 민가 하지만
아마도 개미들이 진딧물을 잡아 먹는 가 봅니다.
그러더니 며칠 전 부터는
무당벌레들도 몇몇마리 나와 서는
진딧물 사냥에 나서 주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내가 할 일 을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잘 해 주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다가 진딧물 싫다고 농약 막 쳤어 봐요.
그 농약에 개미들 도 무당벌레도 다 죽었을 거 아닙니까.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지 요.
시련과 역경이, 힘겨운 일이 생기면
그거 이겨내려고 발버둥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그냥 주저 않아 버 리지만,
그 상황이 아무리 최악이다 싶더라도
대자연 부처 님의 숨결에 일체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 수 있다면
분명 대자연 우주 법계에서는 해답을 내려 줄 것입니 다.

아무리 관찰해 보아도
자연 은 참으로 신비롭고 또 정확하다는 걸 느낍니다.
정확하 게 그 일이 바로 그 때 정확하게 일어나고 있어요.
필요 한 일이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생겨나는 겁니 다.

우리들 인간들 머리로
그 위대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려고만 하지 않고,
자연 과 함께 그 이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다면
저 숲 속의 생기어린 생명력과 포근함을
우리 사람 들 내면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연의 이치에 모든 것을 내맡 기고 산다는 것은
흡사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로 알 고 산다는 말이고,
자성불 주인공 자리에 일체 모든 것 을 맡기고 산다는 말입니다.
대자연 우주가 그대로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화신이기 때문이지요.

이 대자연의 숨결에
일체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면,
그래서 내 일로 잡 고 살지 말고
대자연 법신 부처님의 일로 돌려 놓고 살 면
우리 사람들에게서도
저 대자연의, 저 청청한 숲의 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osted by 법상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 연기법 강의(3)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 연기법 강의(2)
2007/11/09 - [불교교리강좌] -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다 - 연기법 강의(1)
세계는 한 송이 꽃 - 우주가 나를 돕는다

『지구를 치료하는 법』이라는 책에 보면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예를 볼 수 있다. 책에 의하면 1950년대 보르네오 섬의 어떤 마을에 말라리아가 크게 유행했을 때 말라리아 모기를 없애기 위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DDT를 뿌렸다고 한다. 모기는 모두 죽고 말라리아는 사라졌다. 그런데 그 후 여러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민가의 지붕이 너덜너덜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민가의 지붕에 살던 말벌이 DDT로 인해 모두 죽고 굼벵이를 먹이로 하던 말벌이 사라지자 굼벵이가 크게 번식하여 갈대로 이엉을 엮은 지붕을 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양철판 지붕으로 바꾸었지만 열대지방의 맹렬한 소나기인 스콜이 양철지붕을 때리는 소리에 주민들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DDT로 인해 수많은 벌레가 죽고 죽은 벌레를 먹은 엄청난 양의 뱀 또한 죽었다.

그 뱀을 고양이가 먹었는데 먹이사슬이 올라갈 때마다 DDT 농도가 농축되어 고농도 DDT를 섭취한 고양이들도 잇따라 죽어갔다. 고양이가 사라지자 쥐들이 극성을 부렸고, 쥐가 증가하자 다른 전염병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곤경에 빠진 WHO에서는 그 해결책으로 14,000마리의 고양이를 낙하산에 매달아 하늘에서 뿌렸다는 다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먹이사슬 전체에 혼란이 일어났는데 그 근본원인을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 보다는 당장에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를 뿌렸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단편적인 견해이며, 일차원적인 접근이고,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일어나고 소멸된다는 연기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결과인가.

이처럼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의존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일어나면 그로인한 다양한 ‘저것’들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어 있고, 또 그 ‘저것’들은 또 다른 제2, 제3의 ‘저것’들을 무수히 만들어 낸다. 연기를 모르면 그 근본 원인이 ‘이것’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제3, 제4의 ‘저것’들에서만 문제를 밝혀내고자 애쓰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지구나 우리 생활 속의 모든 일은 여러 가지 다른 일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의 작은 한 가지 구성원이 사라지면 곧 그것과 연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수많은 존재들이 사라지거나 직간접적으로 위험에 놓이게 되며, 결국 그것은 사람의 목숨까지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정신적 물질적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존, 공생의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 자연과 자연, 개인과 전체가 서로 서로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로써 공생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연의 한 개체가 파괴된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자연의 한 부분을 오염시킨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몸을 오염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그 어떤 현상일지라도 A의 결과는 B라고 하는 단편적이고 직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접근하면 그 현상에 대한 온전한 통찰이 어렵다. 모든 존재며 현상들은 어느 것 하나 전체적이며 우주적이고 연기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어떤 한 가지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중층적이고 무량하게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그 한 가지 일에는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를 피우는 데에도 온 우주가 동참하고 있다. 한 겨울의 얼어붙은 땅을 뚫고 피어나는 봄 꽃 한 송이에도, 한여름 우거진 녹음이며 쏟아지는 장대비에도, 가을철 아름다운 단풍과 이어지는 첫 눈의 설레임에도 크고 작은 온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연기적인 대 화합의 오케스트라를 장엄하게 연주해 줌으로써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면서 내 발을 씻어주는 생생한 현실 속에도 달의 인력이며 수 억 광년 떨어진 별의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

꽃 한 송이는 그저 단순한 꽃 한 송이가 아니라, 연기적으로 온 우주가 함께 피워낸 꽃이요, 온 우주의 숨결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나도 단순히 내가 아니라 온 우주의 반영이며, 우주적인 진리가 나로써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하나, 행동 하나 하나가 낱낱이 온 우주로 퍼져나가고 있고, 온 우주와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공존 공생하고 있다. 온 우주가 더불어 나를 살려주고 있고, 나를 돕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너’를 돕고 있다. 이처럼 온 우주가 한 송이 연꽃이요 평화로운 한 가족이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만공스님의 일갈도 이 같은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나온 깨침의 언어인 것이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어리석은 자들은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인 줄을 모르고 있어.
그래서 나와 너를 구분하고,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다투고 빼앗고, 죽이고 있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라.
흙이 있어야 풀이 있고,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

남편이 있어야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부모가 있는 법.

남편이 편해야 아내가 편하고,
아내가 편해야 남편이 편한 법.
남편과 아내도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이요,
이웃과 이웃도 한 송이 꽃이요,
나라와 나라도 한 송이 꽃이거늘,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을 바로 지니면 세상은 편한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참 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중생심에서 보면 나와 너, 남편과 아내, 이웃과 이웃, 나라와 나라, 내 종교와 네 종교, 인간과 자연 등 수많은 분별이 작용하여 ‘나’, ‘내 것’ 이라는 이기와 아집을 형성하지만, 연기적으로 보면 너가, 이웃이, 타인이, 다른 나라가, 다른 종교가, 자연이, ‘나 아닌 것들’이 모두 ‘나’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나’‘내 것’‘내 종교’‘내 나라’ 때문에 온갖 시비와 분별, 욕심과 전쟁 등을 초래하지만 연기적 시각에서는 그 모든 것이 동체적인 모습으로 한 뿌리, 한 몸, 한 가족일 뿐이다. 거기에서 온 우주와 나를 다르게 보지 않는 동체대비의 자비가 싹튼다. 이기는 사라지고 참된 사랑이 움튼다.

이러한 연기법의 상호의존관계에서 볼 때, 그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 말을 잘 살펴보면 이 속에는 그 어떤 존재도 실체적인 자아가 있지 않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인간도 인간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도 자연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인간과 자연은 공존, 공생의 관계이며, 그 둘은 모두 인연에 의해 존재하므로 비실체적인 것이다. 즉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는 무아(無我)인 것이며, 공(空)인 것이다.

그렇듯 일체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뗄 수 없는 연기적 동체(同體)의 존재요, 서로가 독자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비실체적 공생의 존재이며, 그렇기에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일체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자기 몸처럼 아껴주고 도와주며 존중해주는 자비를 실천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연기적인 삶의 기본 원칙은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의상관의 연기법과 그렇기에 그 어떤 존재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실체적 자아를 내세워 이기심을 축적할 수 없다는 공과 무아와 아집의 소멸, 그리고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되는 필수불가결한 한생명이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한 가족과 같은 따뜻한 사랑과 자비로써 대해야 한다는 자비사상이 되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오후가 되더니
갑자기 하늘 이 맑게 어두워지고
이내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 진다.

마침
다실 문을 활짝 열고
차를 한 잔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이럴 때 갑자기 귀 속을 씻어주는 빗방울 소리는
이 얕은 산사에선 얼 마나 좋은 다반(茶伴)인지 모른다.

낮은 산 밑 작은 도량
이 6 월 청청한 산방에서
빈 속에 맑은 차 한 잔
그리고 갑 작스레 떨어지는 빗소리 좋은 도반...
생각이 되시는 가.

덕분에 어제 밤은
늦은 녘 까지 방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오랜만에 떨어지는 빗소리 를 보고 있자니
조촐한 도량의 풍경하며
이 산사 를 은은히 비추고 있는 외로운 가로등 하며
가슴 속 깊 이 파고드는 그 어떤 떨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빗방울이 좋고,
그 떨어지 는 빗방울에
묵은 때 벗어내는 이 자연이 좋 다.

우리들 또한 이 속에서 함께 숨쉬는
대자연의 숨결 그대로였을 터인데...
비가오면 비를 맞 고
눈이오면 눈 속을 걸어야 하는
그런 나그네였을 것이 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나그 네 성품, 대자연의 성품을
많이 잊고 지내고 산 다.

내가 그렇고,
우리 모두가 그러하며,
이 세상이 이 법계와 하나이기를 거부하게 된 것은 아닌가.

이 어둠 속에
이 비를 느끼 면서
문득 미친 생각 하나 스쳤었다.
발가벗고 이 산 속 에서
나무들과 함께 비 흠뻑 맞으며
첨벙첨벙 뛰어 놀고 싶다 는 생각.
물론 실천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부디 자유롭 게 실천할 수 있기를 법계에 빌어 볼 뿐...

사실은 그렇게 살았어야 하는 우리일 터인데...

그러고 보면
우리도 그렇 고, 우리 아이들도 그렇고
참 딱한 처지다.

그 흔한 흙한 번 맨발로 밟아 보지 못하고,
떨어지는 빗속을 맨몸으로 흠뻑 맞아 볼 생각조차 하지 못 하고,
저 나무를 두 팔 벌려 껴안고는 그 숨결을 느껴보지 못하며,
풀벌레와 친구가 되지 못한다.

구두를 신고 딱딱한 아스팔트 를 밟아야 하고,
고급 우산으로 떨어지는 비를 막아야 하 며,
모처럼 방에 들어온 풀벌레를 홈키파로 죽여야 한 다.

하기야 요즈음의 시대가
빗 물을 맨 몸으로 맞을 수 없게 되었고,
풀벌레나 꽃가 루 같은 것들에게 조차
무슨 전염을 옮기고, 무슨 무 슨 알레르기를 조심해야 할 정도로
우리도 나약해 졌고, 자연 도 오염을 시켜 버렸으니 어쩔 도리는 없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 대 자연과 하나가 됨을 의미하고,
우주 법계의 큰 흐름 에 온전히 나를 맡기고
그것과 함께 흘러 가는 것을 의미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그리 거창하거나 요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대자연의 섭리 는 그대로 우리의 삶이요 진리인 것이다.

그저 이 우주 법계 대자연의 순일한 흐름처럼
아무런 분별 없이
턱 맡기고 흐 르면 그만이다.
그것이 수행이고 그것이 부처의 삶인 것이다.

요즈음 들어
사람들과 함 께 하고 싶은 마음 보다
이네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 이 더 간절하다.

이 맑은 법신 부처님의 숨결 과...

비가 오니 자연도 씻길 때가 되었나 보다.
자연도 이제 목이 말랐는가.

Posted by 법상




[가평 현등사와
봉화 청량사의 텃밭]

요즘 환경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실정인데요,
그럴수록 더욱 부처님 가르침이
이 오염된 세상에 큰 가르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구 환경을 살릴 수 있는
정신적 대안은 오직 부처님 가르침에 입각한
연기적 삶이요, 자비적인 삶이라는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생태 불교를 공부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불교환경연대에서
백남석 법사님을 초청하여
'부처님 가르침과 생태운동'이라는
강의를 들었다고 하는데요,
다음은 그 강의 내용입니다.


'부처님 가르침과 생태운동'

사람들은 저마다 남들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소비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이루게 되면 행복해 하지만, 욕망을 이루지 못하거나 가진 것을 잃게 되면 괴로워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거나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 하나 영원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 것이라 집착하면서 근심걱정이 태산과 같다.
행복감은 재물로부터 오지 않으며, 온다 하더라도 일시적일 따름이다. 행복은 기대와 욕망의 충족으로 오기 때문에 밖으로 끝없는 욕망를 충족하기보다는 오히려 욕망를 일으키지 않거나 적게 갖을 때 보다 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제가 발전하지 않은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과 같은 나라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사람들의 이러한 끝없는 욕망은 생산력 증대로 이어졌다. 특히 산업사회의 발달과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보다 폭넓고, 치명적인 환경영향을 야기했다. 공업의 발달은 인구의 도시집중을 가속화시켰고, 생산성의 증대와 이동수단의 발달은 원자재와 에너지의 수요를 크게 증가시켜 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만큼의 무한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한정된 환경 자원을 오염시키고 파괴함으로써 모든 생명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황금에 눈먼 인류’라고 표현할 만큼, 사람들은 금을 갖고 싶어한다. 그런데 무수한 금광이 쏟아내고 있는 여러 가지 배설물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네바다주에서 금 1온스(31.1035 그람)는 485,000원 하는데, 이 금을 얻기 위해 100톤 이상의 흙을 깎아 내며 30톤 이상의 암석을 채굴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하루에 50만 톤의 흙과 암석을 파낸다고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금을 분리하는데 수은과 시안화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은을 사용하는 아말감법과 암석가루를 시안화물 용액에 잠그는 시안법이 이용되고 있다. 이로 인해 식수가 오염되고, 광산주변은 사막화되어 가고 있다.

이미 지구는 심각한 환경 문제에 직면해 있음이 밝혀진 지 오래다. 한 번 배출된 이산화탄소는 대기 중에 100년 간 잔류할 수 있다고 한다. 계속 축적된 이산화탄소 층은 지구를 온실화 하여 해수면을 상승시켰고, 이로 인해 대형 홍수 등 기상이변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대기 중 오염 물질은 이미 남한의 300배 이상 되는 넓이의 오존층을 파괴하였고, 이로 인해 자연 생태계뿐만 아니라 질병에 대한 면역력까지 떨어지고 있다. 이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대기 오염에서 비롯된 기관지, 피부 등의 질환을 앓고 있다.

그리고 산성비와 화학비료로 인하여 비옥한 토양이 사막화되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계획적이고 무차별적인 삼림훼손으로 많은 동식물이 멸종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생태위기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 않고, 난 개발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모든 것은 인연의 그물로 연결되어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고, 당장 눈으로 확인되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결과가 없으면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인 듯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환경 문제는 전 인류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며, 사고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풀 수 없는 문제가 되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북극의 빙하는 1만 1천년 동안 녹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작년(2005년) 미국빙설자료센터(NSIDC)가 밝힌 자료를 보면, 최근 5년 동안에 북극빙하의 25%가 사라졌다고 하며, 앞으로 반세기 안에 빙하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로 인해 동토(凍土) 대에 묻혀 있는 메탄가스가 대기로 증발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메탄가스는 이산화탄소보다 20배나 강한 온실가스인데, 동토 대에는 전 세계 메탄 매장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7백억 톤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메탄의 증발은 지구의 온난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이는 다시 더 많은 메탄을 방출하게 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급격한 온난화에 따른 기상재해의 피해액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날 것으로 추산된다.

수조 달러로 추산되는 북극의 자원을 노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앞다투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녹아 내리는 북극은 인류에게 주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은 대재앙을 안길 수 있다.

이로 인해 러시아 북극권에 자리한 비코프스키라는 작은 어촌마을의 이벤크족 주민들은 최근 해마다 5-6m씩 마을 쪽으로 다가오는 해안선을 속수무책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이 다음 대에는 바다에 잠길 것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러시아에는 이런 마을이 457개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북극권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페초라 탄전의 13만 명의 보르쿠타시 주민들도 요즈음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영구 동토층 위에 건설된 도시 건물의 80%가 지반이 녹으면서 붕괴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북극의 온난화가 가속화되면서 4백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북극권 8개국의 삶의 터전이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빙하가 녹기 시작하자 이를 걱정하며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전 세계 석유 및 가스의 4분의 1 이상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에너지 자원의 보고인 북극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불꽃을 튀기고 있다. 노르웨이 북쪽 해안에서만 시추기지가 50여 개나 건설되었다. 작년(2005년) 북해에서 바렌츠 해를 거쳐 유조선으로 운반된 석유는 1억 4천 6백만 배럴이다

유엔은 2001년 보고서를 통해 북극 지역의 15%만 개발권에 있으나 2050년에는 80%로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생태계 파괴를 견디다 못해 얼음과 사냥만을 알던 에스키모족들은 지난해 변호사를 고용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에스키모 마을 하나를 옮기는 데는 1억 달러(약 1천 55억 원) 이상이 든다고 한다.

북극처럼 아프리카의 호수도 문제가 심각하다. 677개에 달하는 아프리카 호수 대부분이 수자원을 부분별 하게 남용하고 있으며, 가뭄 등 기후 변화와 부적절한 댐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차드, 카메룬, 나이지리아, 니제르 4개국에 걸쳐있는 차드호는 현재 수량이 1960년대의 5% 정도에 불과하다고 추정되고 있다.

중국의 문제 한 가지를 살펴보면, 2004년 한해 동안 45억 개의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나무젓가락을 만들이 위해서는 잘 자란 나무 2천 5백만 그루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교적인 세계관을 바르게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생태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만 한다.


1. 선형인과율과 상호인과율

부처님 당시 바라문교도나 사문들은 ‘원인은 결과를 낳지만, 결과는 원인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선형적 단일 방향의 인과율을 주장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는 제일 원인이 무엇이냐가 매우 중요하다.

바라문교에서는 제일 원인이 창조주인 브라흐만이라 주장했고, 사문들은 다양한 요소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바라문교에서는 세계가 브라흐만의 전변이라 했고(轉變說), 사문들은 다양한 요소들의 집합이라고 했다(積聚說).
이들의 주장처럼 세계가 불변의 자기 동일성을 지닌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두 가지 주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바라문교도와 사문들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이들이 주장한 행위의 주체인 자아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 이유는 인지하거나 행위 하는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조건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라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선형적인 인과율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모든 것들은 상호의존관계에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를 일컬어 ‘연기법’이라고 한다.

연기법이라는 상호인과율에서는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 등을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화된 별개의 실체로 보지 않고 행위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본다.

칼루파하나 박사가 지은 <싯다르타의 길>(재연스님 역)에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은 다양한 조건에 의지하여 발생된다. 새싹은 종자의 번식력과 유효한 습기, 흙의 정기에 의존하여 발생한다.
종자에서 움이 텄을 때, 우리는 새싹을 발생시킨 배경을 살펴보고 이러이러한 조건들이 싹을 틔웠다고 말한다. 만일 싹이 틔워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러이러한 조건이 결핍되었으며, 따라서 싹이 띄지 않았다고 단정한다. 이것이 바로 의존적 발생의 원리, 즉 연기의 법칙이다.
이것이 존재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소멸함으로써 저것이 소멸된다. 이것이 바로 사물의 본성이 생성되는 방식이다.”


2. 인드라망의 생태계

부처님의 말씀처럼 생명의 본질은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에 있다. 따라서 이 세계는 인드라망(因陀羅網), 즉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여러 조건의 연쇄적인 그물 망으로 표상 된다.
인드라망이란 제석천이 머물고 있는 궁전을 장엄하고 있는 망(網)을 가리키는데, 이 망(網)의 각각의 코에 달려 있는 보주(寶珠)들은 저마다 다른 모든 보주의 그림자를 비쳐 무한히 교차 반영된다.

이처럼 생태계는 생명의 그물(web of life)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관계들의 연결망(network) 속에서 상호관련 되어 있다. 따라서 어떠한 생명이든 원래부터 타고난 자기 고유의 불변적인 어떤 것(본질, essence)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적 인연에 의한 잠정적인 어떤 것이다.

린 마굴리스와 도리언 세이건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란 책을 통해,

“생물은 자기 완결적이고 자율적인 개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생물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공동체이다. 우리는 숨 쉴 때마다 느리기는 하지만 역시 호흡하는 생물권의 나머지 생물들과 연결된다”고 했다.

여기 한 알의 콩이 있다고 가정할 때, 이 콩은 종자인가? 아니면 열매인가? 결론을 말하면 이 콩은 종자이자 열매인 것이다.

의상스님은 <법성게>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3. 나와 우주는 한 몸

모든 생명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를 사대(四大)라 한 다. 사대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을 말하는데, 이는 곧 견성(堅性), 습성(濕性), 난성(煖性), 동성(動性)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곧 사대의 요소가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음을 가리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중함만 알고 사대의 소중함은 모르고 있다. 자신이 곧 사대임을 깨닫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우선 사대 가운데 물에 관해 살펴보자. 물은 생명체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단세포 생물부터 약 10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된 인간까지 예외가 없다. 35억 년 전 원시바다에 있던 호기성 원핵생물도 물과 이산화탄소로 광합성의 재료를 얻었다. 호기성 원핵생물은 현재 생명체의 모든 세포 속에 존재하는 미토콘드리아의 조상 격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물이 없으면 생물이 생겨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물의 여러 가지 특성을 살펴보면 물은 생명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생명체가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은 암모니아 다음으로 비열이 큰 물질이다. 물의 온도를 올리는 데는 높은 열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외부 온도가 변하더라도 물은 쉽게 온도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물이 주성분인 생물체도 외부 온도가 올라가거나 내려가도 그것의 영향을 덜 받고 일정한 체온을 유지 한다.

생명유지의 기본은 ‘항상성(恒常性)’이다. 외부 환경의 변화가 있을지라도 체내 조건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체의 체온 조절에도 물이 중요하다. 물 1그람을 수증기로 바꾸는 데는 약 500칼로리의 기화열이 필요한데, 더울 때 적은 땀이 증발하면서 많은 열을 빼앗아 가므로 체온을 쉽게 내릴 수 있다.

물의 비중이 섭씨 4도에서 가장 무거운 것도 의미가 크다. 대부분의 물질은 온도가 내려갈수록 무거워지지만 물은 4도에서 가장 무거워졌다가 온도가 떨어지면 도리어 가벼워진다. 그래서 물이 0도에서 얼어 얼음이 되면 가벼워지면서 물 위로 떠오르게 된다.
물이 표면부터 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얼음이 물보다 무거웠다면 호수나 강바닥이 죄다 얼어붙을 뻔했다.

물은 다른 어느 액체보다 점도가 낮다. 물이 끈적끈적하고 걸쭉했다면 피가 모세혈관 속을 흐르지 못했을 것이다. 건강하려면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한다. 그것은 피의 점도를 낮춰 잘 흐르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어느 용매(溶媒)보다 소금을 잘 녹이는 것도 생명체에 중요하다. 소금은 세포막의 대사에서부터 신경에서 일어나는 흥분 전달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지구에 있는 물 가운데 민물(담수)은 고작 2.5%(나머지는 바닷물)에 지나지 않고, 그것도 빙하나 지하수로 묶여 있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물은 0.0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유엔은 2006년 3월 16일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개막된 제4차 물 포럼을 앞두고 ‘물-공유된 책임’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584족의 방대한 이 보고서에는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물 부족, 수질오염, 홍수피해 등 다양한 물문제가 담겨 있다.
이보고서는 특히 “21세기 들어 물 분쟁이 에너지 분쟁보다 많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2030년이면 전 세계 30억 명이 물 부족을 겪을 것이다. 현재도 세계 인구의 20%인 11억 명이 더러운 물을 마시고 있다.”
“물 공급의 양극화도 심각해져 미국과 아프리카 잠비아의 1인당 물 소비량은 120배 이상 차이가 난다.”

‘세계 물의 날’인 3월 22일까지 계속된 이번 포럼에는 세계 각국의 정부 관리와 전문가, 비정부기구 관계자 1만여 명이 참석해 물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유엔 보고서는 지난 세기 세계 인구는 2배 증가한 반면 물 사용량은 6배나 늘었다고 밝혔다. 인구 증가에 맞춰 2030년까지 세계 식량공급이 현재보다 55% 늘어나면 물 사용량은 더 급격히 증가해 30억 명이 물 부족을 겪을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11억 명(세계 인구의 20%)이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하며, 인구 대국인 중국과 인도의 물 위생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물 공급 양극화도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1인당 하루 500L의 물을 소비하지만 아프리카 잠비아는 4.5L, 말리는 8L에 불과하다. 유엔의 최소 권장량인 50L에 훨씬 못 미친다.
이와 함께 전 세계 도시 인구가 현재는 50%에 못 미치지만 2030년에는 75%가 넘을 것으로 보여 도시 빈민층에 대한 식수 공급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물은 또 식량 및 공업 생산과도 직결된다. 따라서 물을 확보하려는 국가 간, 지역 간 갈등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지구촌에서 갈등이 심각한 곳은 요르단 강과 나일 강이 흐르는 지역이다.
1967년 제3차 증동전쟁의 한 원인은 시리아가 요르단 강 상류에 댐을 건설하려 한 데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집트 수단 등 아프리카 8개국의 나일 강 쟁탈 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터키와 시라아, 이라크는 유프라케스 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중국과 인도는 브라마푸트라 강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5만에서 30만 명의 희생자와 250만 명의 난민을 초래한 수단 다르푸르 대학살도 물 부족이 한 원인이다.
2개국 이상을 지나는 국제 하천은 50개국에 241개이고, 세계 인구의 40%가 인접국의 물에 의지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경쟁적으로 댐을 쌓아 물을 확보하려는 나라 간 경쟁으로 강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수자원이 급속히 고갈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물뿐만 아니라 우리가 낭비하고 있는 종이를 놓고 보더라도 그러하다. 따라서 한 장의 종이가 곧 우주임을 알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 까닭은 한 장의 종이가 만들어지려면 우주의 모든 것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모여 한 장의 종이로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다른 모든 것을 자신의 몸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다루어야만 한다.

<법구경> ‘올바름의 장’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사람은 결코 위대한 성자가 될 수 없다. 이 모든 존재에게 연민의 마음을 느끼는 사람, 그 분이야말로 위대한 성자가 아니겠는가”라 하셨다.


4. 생태계 위기의 극복 방안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목숨은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있다고 하셨다. 즉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사이에 목숨이 달려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호흡과 같은 어순으로 사용되는 말이 있는데, 곧 매매(賣買), 수수(授受), 거래(去來) 등이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 팔고 삼, 주고받음, 가고 옴이다.
이 말들의 공통적인 숨겨진 의미를 살펴보면 ‘받기 전에 먼저 주어야 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생각해 보자. 모두가 받기 전에는 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느 누가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두가 받기에 앞서 먼저 주려고 한다면 저절로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바로 깨달아 물과 공기와 토양을 이용하기에 앞서, 먼저 그 생명을 살리는 데 관심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중중무진으로 얽혀 있는 깊은 인연을 살펴 볼 때, 내가 살고자 하면 다른 생명들도 잘 살 수 있게 해야만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생태계를 파괴하거나 교란하지 말고 영구 보존해야만 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이치(不二)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생태계 문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은 생활형편이 어려우니 ‘좀더 풍족해지면 생태계문제에 신경 쓰겠다’ 거나, 남들이나 후손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편하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공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지금 보다 나은 생태환경을 물려줄 수 있도록 보존하고 아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최소한 지금 우리가 누리는 만큼이라도 누릴 수 있도록 유지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이 시대의 빈부간, 지역간, 국가간의 문제로만 보고 해법을 찾기보다는 미래세대와 세대간의 형평과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도 기우려 나가야만 한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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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발생에 대한 공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으며 공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자동차 한 대를 놓고 보면 차는 차로써의 이름이 있고, 차로써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은 차의 낱낱의 모든 부품들이 인연 따라 잘 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에 인연 따라 잘 조합되어 있지 못하고 바퀴 따로, 운전대 따로, 엔진 따로, 모든 것이 따로 따로 다른 공간에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을 보고 ‘자동차’라고 이름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한 공간에 그것도 반드시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낱낱의 부품들이 서로 서로를 의지하고 연하여 잘 모여 있을 때에만 자동차로써의 존재 가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자동차는 각각의 부품들이 서로 서로 의지하여 너트는 볼트에 의지하고, 볼트는 너트로 말미암아 함께 붙어 있게 되고 그런 수많은 상의상관적인 의존관계 속에서만 자동차는 이 한 공간에 조화롭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존재의 발생에 대한 공간적인 연기의 표현으로 본다면,‘볼트가 있으므로 너트가 있고’‘너트가 있으므로 볼트가 있으며’, ‘타이어가 있으므로 타이어휠이 있고’‘타이어휠이 있으므로 타이어가 있고’, ‘엔진이 있으므로 미션이 있고’‘미션이 있으므로 기어가 있고’,

이와 같은 자동차를 이루는 모든 부품들이 서로 서로 ‘~말미암아 일어나는’연기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동차의 모든 부품 하나 하나는 서로 떼어내려고 해도 떼어낼 수 없는 관계이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함으로써만이 한 공간에 자동차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동차는 자동차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부품 하나하나가 연기로써 모여 인연화합을 이루어야지만 자동차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형성이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연기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바른 관계성을 유지해야지만 존재되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 뿐 아니라 존재가 이루어내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 사람을 흉 보고 뒷담화를 하게 될 때 A라는 사람은 전혀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이 없는 줄 알고 화장실에 가서 험담을 했는데 알고 보니 화장실 안에서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면 A라는 사람은 몹시 기분이 상할 것이다. 똑같이 A라는 사람에게 욕을 했지만 그 공간이 어떤 공간이었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껄끄러운 인연관계가 될 수도 있고, 원수 같은 앙숙이 될 수도 있지만, 또 어떤 공간이었느냐에 따라서 그 험담이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 또 같은 험담이더라도 친한 친구끼리의 허물없는 자리에서 하는 것과 맞선을 보는 자리나, 사업적인 자리에서 하는 것과는 크게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상황도 공간적으로 어떤 조건과 원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교통사고가 나는 상황을 보더라도, 졸음운전으로 중앙선 침범을 했을 때 마침 그 공간에 상대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가 없었다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만약 그 순간에 그 공간에 상대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가 있었다면 큰 사고가 나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연기의 공간적 이해로 본다면 ‘졸음운전이 있으므로 중앙선 침범이 있고’‘중앙선 침범이 있으므로 사고가 있고’‘사고가 있으므로 죽음이 있다’그러나 상대 차선에서 오는 차가 없었다면 이 연기는 이런 비극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저홀로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함께 하고 있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법칙은 같은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존재방식이 상호의존적이며 상의상관적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숨을 쉬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만약에 공기가 없다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기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 공기는 숲과 나무가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숲과 나무가 없다면 머지않아 생명은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나무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숲이 있으므로 내가 있는 공간적인 연기법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뿐인가. 태양이 없어도 살 수 없으며, 물이 없어도, 흙이 없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태양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물과 흙이 있으므로 내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쌀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농부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논과 밭이, 과일과 채소가, 시내와 강이, 호수와 구름이, 정치인과 경제인이, 도매상인과 소매상인이, 옷과 집이, 옷 만드는 사람과 집 짓는 사람이, 나아가 이 우주의 일체 모든 것들이 있으므로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우주의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존재가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를 키워내며,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는 상호의존적인 연기의 법칙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자연이 긴밀한 상호의존과 상의상관 속에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인간들은 인간과 자연을 마치 서로 다른 존재인 것 처럼, 전혀 상관이 없는 것 처럼 자연에 대한 대대적인 훼손과 파괴를 자행해 왔다. 자연의 파괴와 훼손 위에 기초한 개발과 발전, 산업화와 도시화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인간이 자연을 파괴한 만큼 자연은 고스란히 인과응보를 인간에게 되돌려 주고 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오늘날의 전세계적인 환경오염 아니 환경재앙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것이 모두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자연이 있으므로 인간이 있다’는 연기의 법칙을 모르는 어리석음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유럽이며 선진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연환경은 그대로 두고 후진국의 자연을 파괴시켜 온 그 기초 위에서 자신들의 행복을 세우려고 했지만, 결국 환경재앙은 후진국만이 아닌 전세계적인 대재앙이 되고 있다. 자신들의 숲은 살려두고 저 브라질이나 아프리카의 밀림을 대규모로 파괴하고 있지만 결국 지구 전체의 살림부족으로 나타나 지구온난화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의 세계에서 본다면 전 세계는 모두가 한생명이며 공동운명이기 때문에, 아프리가의 밀림이 있어야 우리의 숲이 있고, 숲과 자연이 있어야 우리가 마실 공기가 있고, 맑은 환경이 있어야 우리의 생명의 터전이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서로 다른 남남이 아니고, 적이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키워주고 도움을 주고 받는 상호의존, 상의상관이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의 숲이 사라자고 사막이 늘어나는 일이 결코 중국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곧 황사로써 한국과 일본 그리고 많은 나라에 직접적인 피해를 가져오고 있다. 중국의 숲이 있어야 한국의 맑은 자연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밥을 먹을 수 있어야 내가 굶지 않을 수 있고, 중동에 평화가 있어야 우리나라에도, 내 안에도 평화가 깃들 수 있으며, 브라질의 아마존이 있어야 나에게 맑은 공기가 있고, 전 세계적인 자연환경의 보호가 있어야 우리의 아름다운 미래가 있을 수 있다.

연기법에서는 온 우주가 이와 같이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나비효과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우주의 어느 한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대로 다른 모든 이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둘째,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발생에 대한 시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으며 시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공간적인 자동차의 연관관계를 살펴보았는데, 시간적인 의존성과 관계성을 살펴본다면 자동차의 역사를 거슬러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자동차가 있고, 그 자동차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공간적인 부속들의 인연화합의 결합에 따라 자동차로써 존재하고 있지만, 사실 그 자동차가 이렇게 만들어지기까지는 단순한 공간적인 결합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자동차 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하여 지금의 자동차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누군가가 둥근 바퀴를 만들었을 것이고, 연이어 수레가 만들어 졌을 것이며, 처음에는 소나 말 등의 가축이 끌기도 했을 것이고, 이윽고 증기 자동차를 거쳐 가솔린 자동차 등의 단계별로 발전을 이루어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적인 연관관계를 볼 때, 지금의 자동차는 어느 날 갑자기 저홀로 생겨난 것이 아니며, 오랜 역사를 두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탈 것으로 발전해 결국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즉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연기의 법칙에 따라 둥근 바퀴가 생함으로 수레가 생했고, 수레가 생함으로 우마차가 생했고, 우마차가 생함으로 증기 자동차가, 증기자동차가 생함으로 가솔린 자동차가, 가솔린 자동차가 생함으로 오늘날과 같은 자동차가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가 발생하는데는 오랜 세월 그것이 발생하기까지의 수많은 다양한 노력과 조건과 원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듯이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시간적인 여러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시간적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나는 나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어머님과 아버님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부모님도 마찬가지로 당신들의 아버님과 어머님이 계셨기에 존재할 수 있었고, 또 그 부모님의 부모님, 그 부모님의 부모님까지 계속해서 거슬러 가다 보면 수없이 많은 조상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로부터 20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209만 명, 30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21억이 넘는 조상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니, 엄밀히 말하면 이 수많은 조상님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 빠진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사람도 그 사람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 때인가 저 위의 조상님들 대에서는 부부였을 수도 있고, 형제나 부자지간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한 뿌리요, 한 가족, 한 생명이 아닌가. 이렇게 보았을 때 역사의 모든 인물들은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씨줄 날줄로 서로 서로 얽혀 있을 것이고, 그 모든 이들의 삶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지금의 나란 존재는 시간을 거슬러 일체 모든 과거의 조상들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 부모님이 생함으로 내가 생했고, 할아버님이 생함으로 부모님이 생했고, 증조 고조 할아버지가 생함으로 할아버님이 생했으며, 나아가 수많은 조상님들이 생함으로 지금의 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현대 자연과학의 진화론에서 보면 수많은 포유류가 있지만 그들의 두개골을 이루는 뼈의 수나 기능과 구조 등이 모두 같으며, 목뼈를 놓고 보더라도 그 개수가 기린과 같이 목이 긴 동물이나 사람을 비롯한 목이 짧은 동물이나 모두 같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고래의 앞지느러미나 포유류의 앞발, 그리고 새의 날개 등도 지금은 서로 다른 기능과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그 기본형은 같다고 한다. 이것은 이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적응하며 살다보니 자신의 신체 구조와 기능이 바뀌었을 뿐이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모두 같은 조상에서 유래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상의상관적인 시간적 연관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존재들과 인간 사이에도 시간적인 연기의 관계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존재의 발생에 대한 시간적인 연기법의 측면에서 볼 때, ‘조상이 생함으로 내가 생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조상 안에는 온갖 동물들의 조상도 포함되며, 나아가 인간과 동물들의 조상이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조상이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결국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독자적으로 홀로 태어나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시간적으로 수많은 생명들의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환경문제라는 것도 과거의 수많은 개발과 발전으로 인한 자연의 파괴가 결국 오늘날의 환경재앙과 기상이변 등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산업혁명으로 인해 촉발된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각종의 개발과 발전이 생겨남으로 자연환경의 파괴가 생기고, 자연환경의 파괴가 생김으로 기상이변이며 지구온난화 등의 환경재앙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며 상황은 시간적으로 수많은 다른 존재와 상황들과의 상호작용과 연관관계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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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가을 하늘...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본다.

오랜만에 보는
가슴 탁 트 이는 하늘...
추위 쯤이야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 운 하늘이 머리위로 펼쳐진다.

이런 날은
그저 하늘만 바 라보고 있어도
이 마음 충분하고 충만하여
더 이 상 바랄 것이 없게 느껴진다.

날씨가 조금 춥긴 하지만
싸늘한 바람이 살결을 파고들긴 하지만
그런 추위가 더욱 이 높고 푸른 하늘이며
아련하게 두웅실 떠가는 뭉게 구름들을
한결 아름답게 해 주는 것 같다.

이런 날
이런 충만한 행복 감에 젖어들 때면,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있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내 주위에 이렇게 분명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나 와 함께 호흡하고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충만하 게 만드는
이 아름다운 자연이 내 옆에 있다는 사 실.

그 사실 하나가
내 마음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지 모른다.

요즈음은 그런 생각이 든 다.
나홀로 고요히 앉아 있더라도
소중한 친구와 함께 하 고 있다는 생각.

이 자연이라는 친구는
도무 지 질리지가 않고, 싫증나지 않으며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와
내 마음에 넘치는 생동감을 가져다 준다.

매일 매일 보는 하늘이지만
어쩌면 이렇게 매일같이 다를 수가 있는지,
늘상 곁 에 두고 보는 산이지만
어쩌면 이렇게 새로운 모습으 로 다가오는지,
항상 내 마음을 새롭게 만들어 준다.

바로 요즘
내가 새로 사 귄 정다운 친구다.

자연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내 속 뜰을 가만히 챙기고 있을 때 처럼
청명하고 명 징한 그 무언가가 있다.

그 명징한 무언가 가...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