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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22 사성제와 십이연기(1)
  2. 2008.03.08 도일체고액

반야심경 강해 -10강-

사성제와 십이연기(1)

 

 

부정의 논리에 대하여

 

반야심경에서는, 앞서 근본불교의 중요한 교설인 오온과 십이처, 그리고 십팔계를 부정하여 공 사상을 천명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반야심경에서의, 부정을 통해 공을 드러내는 논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어 근본불교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교설을 차례로 모두 부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십이연기와 사성제를 부정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일체 현상계의 구조인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를 부정하고, 이어 현상계의 법칙인 연기법을 통해 현상계의 괴로움의 근본 원인을 차례로 섭렵하는 내용인 십이연기를 부정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근본불교의 모든 교설을 포섭하고 있는 가르침인 사성제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논리의 구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처님께서는 오직 현상계의 올바른 중도적 관찰[조견]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십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설은 모두가 현상계, 일체, 제법, 현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앞에서 ‘조견’을 설명할 때 살펴본 바를 참고하시면 될 것입니다. 이 반야심경에서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를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즉, 부처님께서 현상계 일체제법의 법칙[연기]과 속성[삼법인], 존재방식[업과 윤회], 그리고 이 모든 교설의 총설인 사성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당장 현상계, 일체, 제법이 무엇인가를 관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현실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아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토대로 하여, 그러한 구조로 이루어진 현상계에 대한 여타의 관찰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반야심경에서는 우선적으로 현상계의 구조인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먼저 부정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다른 모든 교설에 대해 각각을 부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십이연기, 사성제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십이연기를 먼저 다룬 것은 사성제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성제의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이며,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원인의 진리인 집성제를 알기 위해서는, 십이연기를 알아야 하기에 우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일체의 구조에 대한 관찰을 하고, 십이연기의 교설을 통해 기초 작업이 끝나면 본론격인 진리, 즉 사성제에 대한 부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관 고리를 염두에 두고,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부정을 통한 참 진리의 드러냄에 대하여 살펴보아야할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염두에 두고 지나갈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반야심경에 나온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며,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언급하신 교설로의 진정한 회귀를 위하여 방편상 부정의 논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임은 물론입니다.

그러면, 십이연기, 사성제가 부정되는 반야심경의 경구를 살펴보기에 앞서, 근본불교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십이연기, 사성제의 이치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성제와 십이연기

 

부처님의 교설을 체계화시키고, 그 실천법에 대하여 설해놓은 교설이 바로 사성제와 팔정도의 교설입니다. 경전에서는,

비구들아, 모든 동물의 발자국은 다 코끼리의 발자국 안에 들어온다. 그와 같이 모든 법은 다 네 가지 진리에 포섭된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괴로움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진리이다.

 

“마라가야,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때 이웃들은 급히 의사를 불러 왔다.

그런데, 그는, ‘나를 쏜 자는 누구일까? 나를 쏜 활은 어떤 활일까? 또 그 활은 어떤 모양일까?’

이런 것을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는 어떻게 되겠는가?

마라가야, 그는 알기도 전에 죽고 말 것이다.

마라가야,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다른가?

인간은 죽은 다음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인생의 괴로움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 괴로움을 소멸시켜야 한다.

마라가야, 내가 설하지 않은 것은 설하지 않은 대로, 설한 것은 설한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내가 설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괴로움이다’ 라고 나는 설했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라고 나는 설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라고 나는 설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라고 나는 설했다.

왜 나는 그것을 설했는가? 그것은 열반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성제와 팔정도의 교설은, 마치 코끼리의 발자국이 다른 모든 동물의 발자국을 포용하듯이, 불교의 다른 모든 가르침을 포괄하는 가르침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불교의 모든 교설은 이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에 포함되며, 이 가르침이야말로 부처님의 교설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 포괄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다섯 사람의 수행자에게 처음 가르침을 펴신 초전법륜(初傳法輪)에서 처음으로 설하신 진리가 바로 사성제와 팔정도의 교설입니다. 이 가르침은, 진리를 설함에 있어, 상당히 논리적이며, 실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성제의 구체적 내용은,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입니다.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연기(緣起)의 이치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중에도 십이연기의 가르침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와, 괴로움의 소멸인 멸성제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므로, 사성제는 곧 십이연기를 실천적으로 제조직한 교설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장에서 부터는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교설을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고성제 - 괴로움에 대한 진리

 

불교는 지극히 현실적인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총설이라고 할 수 있는 사성제(四聖諦) 교설의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현실, 현상 세계에 대한 관찰과, 그 관찰을 토대로 한 현실의 판단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가만히 관찰해 보고는, ‘괴롭다’ 라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렇게 현상의 세계를 ‘괴롭다’ 라고 하니, 혹자는, 불교는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고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로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인 고성제(苦聖諦)는,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관찰해서 얻어낸 결론인 것입니다.

다른 것은 제치고라도, 죽음의 고통을 봅시다. 우리는 마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들 모두는 반드시 죽게 마련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는, 나의 주위에서 겪어 보지 않고서는, 절실히 느끼기가 힘듭니다.

내 부모님, 자식, 친구, 친지의 죽음을 직접 겪어 본 사람은, 죽음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죽음은 당연히 괴로움이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을 가정해보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 괴로워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음을 당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시한부 인생들인 것입니다. 이렇듯, 죽음이라는 한가지 절대불변의 현실만을 관찰하더라도, 우리의 현실은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만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의 인생은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괴로움은 죽음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드는 것도 괴로움입니다. 좋아하는 대상을 마주하지 못하는 것,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야 하는 것, 구하고자 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 ‘나다’ 하는 상에서 오는 것, 즉, 오온이 치성한데서 오는 괴로움 등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을 사고팔고(四苦八苦)라고 합니다. 이러한 괴로움에 대해서는 이미 ‘도일체고액’을 살펴보면서 자세히 언급하였으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2) 집성제 -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십이연기의 유전문)

 

앞에서 집성제는,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가르침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현실에 대한 여실한 통찰을 통해, 현실을 괴롭다고 파악했으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해 보아야 한다는 당연한 순서입니다.

앞에서, 괴로움이란 연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항상하지 않고, 고정되지 않은 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서로 모이고 쌓여 일어나기에, 한 번 생겨난 것은 반드시 멸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처럼 연기하는 것은 괴로움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노병사의 괴로움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고요히 일체의 경계를 여실히 보시고는, 그 원인이 생(生)에 있음을 아셨습니다. 태어났기에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니,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의 생사 윤회하는 테두리인 유(有)로 말미암는 것임을 아셨고, 그 원인은 다시 어떤 대상에 집착하는 취(取)에 있음을 아셨고, 또 그 원인은 애(愛), 그리고 그 원인은 수(受) ……. 이렇게 하나 하나 그 원인을 고찰해 올라가다 보니, 결국에는 무명(無明)이 생로병사의 근본 원인임을 여실히 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이연기이며,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이라고 합니다.

집(集)이라는 말은 ‘집기(集起)’ 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모여서 일어난다’ 는 뜻으로,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입니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로써 괴로움의 원인을 하나 하나 고찰해 본 것입니다.

십이연기설에서는, 무명으로 인해서 노병사의 괴로움이 생함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노병사라는 근본 괴로움의 원인을 하나씩 고찰해 들어가 보니 결국 근본 원인은 무명이라고 깨달은 바를 ‘십이연기의 유전문’이라고 부르며 이런 유전문을 관하는 것을 일어나는 대로 순차적으로 관한다고 하여 순관(順觀)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십이연기의 유전문이란 사성제의 고성제에 대한 원인을 살펴본 교설로써 고성제에 대한 원인인 집성제를 살펴보는데 사용된 교설이라 할 것입니다. 다시말해 십이연기의 유전문이 바로 사성제의 집성제의 바탕이 되는 교설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십이연기의 유전문[순관]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십이연기의 해석 방법은, 근본불교의 전통적인 해석법이 있으며, 부파불교로 오면 이러한 근본불교의 해석 방법에 업과 윤회 사상을 대입하여 해석한 삼세양중인과의 업감연기를 통한 해석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우선 근본불교의 해석 방법을 경전을 토대로 하여 살펴보고, 그 뒤에 부파불교에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차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경의 설명을 보겠습니다.

그때, 세존은 우루벨라 마을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서 비로소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한 번 가부좌를 하신 채 7일 동안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고 계셨다.

그러던 중, 초저녁에 연기를, 일어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셨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 있고, 행으로 말미암아 식이 있고, 식으로 말미암아 명색이 있고, 명색으로 말미암아 육처가 있고, 육처로 말미암아 촉이 있고, 촉을 말미암아 수가 있고, 수로 말미암아 애가 있고, 애로 말미암아 취가 있고, 취로 말미암아 유가 있고, 유로 말미암아 생이 있고, 생으로 말미암아 노・사・우・비・고・뇌가 생긴다.

이리하여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무명부터 노병사에 이르기까지의 십이연기의 유전문, 즉 순관을 구체적으로 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법상
 

도일체고액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란 일체의 고액[고통과 액난, 괴로움]을 건너, 해탈, 열반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란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봄으로써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체의 고액이 과연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세 가지 괴로움, 그리고 사고(四苦)와 팔고(八苦)를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괴롭다는 말은, 그 성격상 고고(苦苦)・행고(行苦)・괴고(壞苦)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고고란 괴로움의 괴로움이란 의미로서, 인간의 감각적인 괴로움을 의미합니다. 즉, 육체적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맞아서 아프다던가, 병으로 아프다던가, 배고파서 겪는 괴로움, 그리고 추워서 느끼는 괴로움 등입니다.

 둘째로 행고란 행의 괴로움이란 의미로서, 변하기 때문에 겪는 괴로움입니다. 다시 말해, 삼법인 중 제행무상의 진리 때문에 오는 괴로움으로, 모든 것이 항상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의미합니다. 이 괴로움이 바로 불교의 고성제에서 말하는 괴로움과 가장 가까운 괴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며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괴로움이며, 늙고 병들어 예전처럼 한 십 년 정도 젊어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괴로움 등이 모두 행고에 속합니다. 또한 사랑하던 이와의 사랑이 늘 계속되길 바라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랑하는 감정이 사라짐에서 오는 괴로움, 돈이 항상 할 것 같고, 명예나 권력이며, 지위, 계급, 사랑이 항상 할 것 같지만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항상할 것 같지만 언젠가는 변화하게 마련이라는 데서 오는 괴로움 등이 모두 행고입니다. 우리가 흔히 괴로움이라고 말하는 생, 노, 병, 사의 인생 사고(四苦)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괴고(壞苦)는 부서짐의 괴로움이라는 의미로서, 항상하기를 바라지만 일체의 법은 항상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부서지게 되는, 인간으로 말하면 죽음의 괴로움입니다. 자연을 보면 성(成), 주(住), 괴(壞), 공(空)하여 반드시 변하여 부서지게 되고, 인간을 보더라도 생, 노, 병, 사하여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뿐 아니라, 현재에는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없어졌을 때 느끼는 괴로움도 괴고에 속하는데, 이는 우리가 재물, 지위, 혹은 명예 등을 상실했을 때 느끼는 괴로움입니다. 자세히 말해, 돈이나 나의 소유물 등이 인과 연이 다해 나에게서 멀어질 때 느끼는 괴로움도 바로 이 괴고에 속하는 것입니다.이러한 괴로움 등은 괴고이면서 동시에 행고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경전에서는 괴로움의 성격상 세 가지로 나누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불교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고가 바로 사고와 팔고의 교설입니다. 사고(四苦)란 생노병사로 생(生)은 태어나는 괴로움이며, 노(老)는 늙는 괴로움 병(病)은 병드는 괴로움, 사(死)는 죽는 괴로움을 말합니다. 여기에 다시 네 가지 괴로움을 더해 팔고(八苦)라 합니다. 그 네 가지란 원증회고(怨憎會苦)로 이는 미워하는 대상과 만나는 괴로움, 애별리고(愛別離苦)란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구부득고(求不得苦)는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고, 오음성고(五蔭盛苦)는 오음 즉 오온이 치성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다시 말해 오음성고란 ‘나다’라고 아상을 내세우는데서 오는 괴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좀 더 자세히 팔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사고팔고의 시발점은 생고(生苦)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머지 일곱 가지의 괴로움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생기는 부수적인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태어나는 것이 무슨 고인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팔고 중 가장 근본이 되는 괴로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인데 물론 이 세 가지는 누구나 괴로움이라고 인정하겠지만, 혹 어떤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 말고, 그와 반대의 개념, 즉, 젊고, 건강하고, 살아있다는 즐거움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불교가 그런 즐거움을 모두 없다라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삶의 어느 한 단면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닌, 인생 전체를 보면 우리는 결국에 가서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라는 궁극적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사고(四苦)에 네 가지를 더해 팔고(八苦)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그 첫째가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괴로움인 애별리고입니다. 한창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던 두 남녀가 언젠가 그 중 한 명이 죽는다던가, 다른 이성과 눈이 맞아 헤어지려 한다면 이 괴로움은 그야말로 죽는 괴로움보다 더 괴로울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부모, 형제, 친지, 친구들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하는 괴로움도 애별리고입니다. 또한, 사람뿐아니라, 물건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물건에 집착이 클수록 그것이 사라졌을 때 오는 괴로움은 큽니다.

 다음은, 그와 반대인 원증회고인데, 원망스럽고 싫은 것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을 말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 얼굴만 보아도 화가 나고 답답하고 혹은 두려운 사람들과 항상 만나야 한다면 그보다 괴로운 일이 있을까요? 특히나 군대에서 보기 싫고 두렵기 까지 한 선임병 때문에 너무 괴로운 나머지 자살까지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군에서 자살하는 경우를 보면 첫째가 사랑하는 이와 헤어짐에서 오는 괴로움 때문이고, 둘째가 미워하는 이와의 괴로움에서 오는 괴로움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니 이만하면 왜 생노병사라는 네 가지 괴로움 다음으로 애별리고, 원증회고를 언급하였을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구부득고는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이 세계의 생명 있는 중생들 중 과연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 이들이 있을까요? 그러나,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쉽게 마냥 얻을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은, 심지어 축생들조차, 많든 적든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구해지지 않으면 괴로워합니다. 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원하고, 수행하는 이들은 깨달음을 얻으려 하고, 사업가는 사업이 번창하기를 원하며, 정치가는 최고의 권좌에 오르길 원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바라는 마음이 끝이 없고, 그것이 모두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괴로워합니다.

 다음으로 오음성고(五陰盛苦)는, 오온이라는 인간의 구성요소에서 오는 괴로움으로,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이 치성하는 데서 비롯된 괴로움입니다. 다시 말해, 오온, 즉, ‘나다’ 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으로,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내 마음대로 한다’ 하는 상을 가지기 때문에 그만큼 괴로움이 오는 것입니다.  이 오음성고는 앞의 일곱 가지 괴로움을 포괄하고 있는 괴로움입니다. 오온, 즉 ‘나다’ 하는 데에서 모든 괴로움이 오는 것이지, ‘나다’ 하고 고정 지을 것이 없다면 괴로움이 붙을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의 주체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오음성고의 괴로움이 타파된다는 말은 아상이 타파되고, 그렇기에 괴로움을 여의고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오온이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공하다는 사실을 올바로 조견할 때 이 괴로움은 소멸되는 것입니다. 오음성고의 괴로움이 소멸되면 일체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입니다.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아상(我相), 아집(我執)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나다’ 라는 상이 없다면 우리는 괴로울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괴로움의 주체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괴로움의 주체가 사라진다면 어디에 괴로움이 붙을 자리가 있겠습니까? 내 것이라는 상 때문에, 내 것을 빼앗겼을 때 괴롭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니 괴롭고, ‘내가 옳다’ 라는 상 때문에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생로병사의 네 가지 괴로움 또한 이러한 아상, 오음성고의 괴로움이 근본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것이고,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상이 없다면, 일체가 ‘나’ 아님이 없기에 일체 대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한 대상에 대한 집착심으로의 사랑이나 증오의 감정이 있을 리 없으며, 그렇다면 애별리고나 원증회고가 있을 리 없는 것입니다. ‘나’ 라는 상이 없으니, 즉, 일체가 나 아님이 없으며 대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으니, 돈, 재물, 명예, 지위, 나아가 깨달음에 대한 집착심을 여의게 되고, 그러기에 구부득고의 괴로움도 있을 리 만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에서 말한 인생팔고는, 덮어놓고 무조건 ‘인생은 괴로움’이라고 결론짓는 것만은 아닙니다. 아상이 있는 우리네 중생들에게 있어 인생은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공부하는 수행자들에게 있어 인생은 고가 아닙니다. 일체의 경계는 인과 연이 화합하여 잠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항상하지 않는 경계일 뿐이지만, 우리네 중생들은 그것이 실재하는 줄로 착각을 하므로 그 경계에 집착하여 경계 따라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며 온갖 망상을 일으키는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괴로움은 여러 가지 실체가 없는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일어나는 것, 즉 연기하는 것입니다. 연기하는 것은 괴로움인 것입니다. 그 경계들이 연기로서 본래 공한 것임을 올바로 알아야 하고, 경계가 공하므로 나도 공한 것임을 올바로 알아, 모든 경계를 나온 자리에 놓고 생활한다면, 우리의 삶은 부처님의 삶에서처럼 향기가 묻어 날 것입니다. 거짓된 나를 붙들고, 거짓된 경계에 얽매여 괴롭게 살 것인가, 본래 공한 나의 본 성품을 올바로 믿고, 일체의 아집과 번뇌를 모두 놓고, 자연스럽고도 편안하게, 여여하게 살아갈 것인가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괴로움이 ‘성스러운 진리’ 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여실히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이 비실체적인 것임을 알아, 그것을 정면으로 부딪쳐 극복할 수 있기에 괴로움이 ‘성스러운 진리’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괴로움의 철저한 인식, 즉 인생이 괴로움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고의 철저한 인식이 바로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발심(發心)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살펴본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을 되짚어보면, ‘조견오온개공’을 실천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이는 반드시 ‘도일체고액’할 수 있다는 실천적 가르침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