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복지무비분
복과 지혜를 비교할 수 없다


福智無比分 第二十四
須菩提 若三千大千世界中 所有諸須彌山王 如是等七寶聚 有人持用布施 若人 以此般若波羅蜜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他人說 於前福德 百分 不及一 百千萬億分 乃至算數譬喩 所不能及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서 제일 큰 산인 수미산왕만한 칠보들을 가지고 널리 보시한다 하더라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이나 이 경의 네 글귀로 된 한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에 비하여 앞의 복덕은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의 일 또는 그 어떤 산술적 비교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복지무비란 복과 지혜를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복과 지혜는 함께 닦아가야 할 중요한 수행의 요소지만 세속적인 복을 짓는 일을 출세간의 지혜를 닦는 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의미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서 제일 큰 산인 수미산왕만한 칠보들을 가지고 널리 보시한다 하더라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이나 이 경의 네 글귀로 된 한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에 비하여 앞의 복덕은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의 일 또는 그 어떤 산술적 비교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네 글귀로 된 한 게송이란 금강경의 사구게를 말할 수도 있겠고 나아가 부처님 진리 말씀 가운데 진실로 어느 한 구절 만이라도 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것이 다 다른 듯 보이고, 경전도 수없이 많으며, 교리도 수없이 많고, 수행법도 복잡 다단하게 느껴지며, 스님들의 설법을 듣고 수많은 절에 다녀 보더라도 처음에는 다 다른 얘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어렵고 복잡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다 보니 불교를 배우려면 공부할 것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방편이 많은 것이지 그 근본은 복잡하지가 않다. 그 근본은 하나다. 그래서 불교 공부를 하다보면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어렵고 복잡해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정리도 안 되고 하다가 어느 순간 그 근본을 비춰보게 되면 일순간 그 모든 복잡하던 것들이 하나로 정리가 되고 귀일이 된다. 그 본질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구게라는 것의 상징적인 의미도 바로 그 근본, 본질을 꿰뚫고 있는 부처님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사구게, 즉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이 담긴 사구게를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 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사구게를 받아서 그 말만을 읽고 외우고 남에게 전달해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이해도 없이 깨달음도 없이 공허한 말만 골백번을 외우면서 남에게 전달해 준다면 그것이 어찌 큰 공덕이 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사구게를 받아 지닌다는 뜻은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사구게의 진리를 온전히 내 깊은 정신 안에서 깨달아 환히 체득이 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야 단순히 받는 것이 아닌 받아 내 존재 안에 지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온 존재로써 받아 지녀 깨달아 알고 입으로는 늘 읽고 외우며 남에게 그 깊은 의미를 온전히 전달해 줄 수 있다면 그 공덕이야말로 온 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공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내 존재 안에서 깊은 깨달음으로 받아 지닐 수 있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 온전히 전해 줄 수 있다. 내 스스로 사구게의 깊은 이해와 깨달음이 없다면 어찌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수 있겠는가. 이렇듯 내 스스로 깊이 깨닫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사구게의 본질적인 진리를 깨닫게 해 줄 수 있다면 이 공덕이야말로 한량 없이 크다. 크고 작은 분별을 넘어서서 대 평등으로 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삼천대천세계에서 가장 큰 산인 산중의 왕, 수미산왕 만큼 큰 칠보를 가지고 널리 보시한들, 그런 물질적인 보시가 어찌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사구게 법의 보시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 세계 1등 가는 기업 회장이 수천억의 물질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물질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시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이 얼마나 큰 보시이겠는가. 그로인해 수많은 사람들은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며, 물질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큰 공덕이란 말인가. 그러한 보시의 공덕으로 그 사람은 앞으로 있을 수많은 윤회의 기간 동안 끊임없이 부유하게 태어날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과보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유위의 공덕은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물질적으로 부유하면 그만큼 가난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삶의 의미들을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면 그만큼 스스로 우쭐해지거나 교만해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계속해서 대 그룹의 회장으로 윤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고통을 모두 소멸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많은 부자들을 보라. 그들이 돈이 많고 가진 것이 많을 지언정 가진 물질의 양만큼 마음도 풍요로운가. 오히려 물질이 많아지면 그 물질에 휘둘리는 일이 많아지고 되려 소유당하는 측면이 많아진다. 그 재산을 계속 유지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 재산에 이끌리면서 일평생을 재산을 지키는데 에너지를 써야 할 것인가. 가까운 우리의 재벌들을 보더라도 그들의 삶이 행복과 평화와 여유와 고요함이라는 본질적인 삶의 미덕과 그리 가까워 보이지 않는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수행을 한다거나, 기도를 한다거나, 홀로 고요한 시간을 가진다거나,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다거나, 집착과 욕망을 지켜보고 비운다거나 하는 그런 본질적인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을 것이다. 그 시간을 가진 재산을 지키는데 다 소비해야 할 지 모른다.

설령 백 번 양보 해 그렇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스스로 윤리와 정신을 잘 지켜나간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나고 죽고 병드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부자라도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니 어떠한가. 물질적인 부유함, 물질적인 보시의 과보는 이렇듯 유위의 복에 불과한 것이다. 물질적인 보시의 공덕이 우리를 생사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한다. 참다운 내면의 깨어있는 정신을 세워주지는 못한다. 물질적인 보시의 과보는 물질적인 풍요일 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앞서 말했듯이 물질적인 과보는 오히려 우리에게 정신의 풍요를 앗아가게 하는 빌미를 제공할지언정 물질적인 풍요가 정신적인 풍요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어떠한가. 아무리 칠보로써 삼천대천세계의 가장 큰 산인 수미산왕만큼을 보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깨달음으로 이끌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혜가 구족되어 있는 사구게를 온전히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연설해 주는 그 공덕은 나와 남을 깨달음으로 이끌고, 완전한 내적인 평화로 이끌어 줄 수 있다. 그러한 사구게의 깨달음은 물질적인 풍요보다도 더 큰 정신적인 풍요를 가져다 준다. 사구게의 깨달음과 정신적인 풍요는 곧 내 것과 네 것이라는 분별을 없애주기 때문에 ‘내 것’이 많아지는 물질적인 풍요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 삼천대천세계가 전부 나와 둘이 아니요, 전부 내 것일 수 있는 무한한 절대 풍요를 가져다 준다. 그 사람에게 물질적인 많고 적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고 죽는 것이며, 내 것을 늘리는 것이며, 세속의 그 모든 욕망과 집착 그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니 어찌 물질적인 보시를 사구게를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연설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Posted by 법상

금강경과 마음공부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법상 (무한,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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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무위복승분
무위의 복은 수승하다


無爲福勝分 第十一
須菩提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數 何況其沙 須菩提 我今 實言 告汝 若有善男子 善女人 以七寶 滿爾所恒河沙數 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 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佛告 須菩提 若善男子 善女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 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다면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 모든 항하의 모래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항하의 수만 하여도 셀 수 없이 많겠거늘 하물며 그 모래이겠습니까”
“수보리야,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너에게 이르노니,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칠보로써 저 항하강 모래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그가 얻는 복덕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이 앞에서 말한 복덕보다 더 뛰어나리라.”


무위복승분에서는 함이 없는 무위의 복이 유위의 복덕에 비해 얼마나 뛰어난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 하나만이라도 올바로 받아 지니도록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무위의 복덕은 그 어떤 세속적이거나 물질적인 복덕보다 더욱 뛰어남을 설하고 있다.

이 말의 뜻을 잘 알 수 있어야 한다. 무조건 금강경의 사구게 가운데 하나를 남에게 잘 설명해 주는 것만으로 무위의 복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만을 가지고 무위의 복이 수승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경전 사구게를 수도 없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줬다면 그것만으로 완전한 무위복을 성취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 받아 지니고 그것을 설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받아 지닌다는 것, 수지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수지하지 못하고 다만 남을 위해 알려주기만 한다고 그것이 그대로 무위의 복이 될 리는 없다.

그러면 금강경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사구게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며, 그 어떤 집착도 가져선 안 된다는 말이다. 일체 모든 상이 다 허망한 것임을 알아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금강경의 가르침을 수지한다는 것은 스스로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을 수지한 사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아상이 타파되어 있다. 이러한 금강경의 뜻을 수지한 사람이 어찌 남을 위해 설해 주고도 스스로 설했다는 상에 갇혀 있을 수 있겠는가. 어찌 스스로 남에게 설해 주었다는데 머무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이렇듯 금강경 사구게의 뜻을 스스로 잘 수지하여 일체의 상이 타파되고,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 수 있는 사람은 금강경의 게송을 남에게 설해주고도 설해주었다는 상이 남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구게의 게송을 남을 위해 설해 주는 행위 자체가 무위의 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수지하지도 못한 채, 스스로 온전히 깨달아 알지도 못한 채, 아무리 많은 경전이나 사구게를 남을 위해 연설해 준다고 한들 그것이 유위의 복이 되기는 할 지언정 무위의 수승한 복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금강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스스로 수지하여 남을 위해 연설해 주었을 때는 무위의 수승한 복덕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금강경의 사구게 자체가 무위의 행을 설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위의 머무는 바 없는 행을 찬탄하는 것이라 하겠다.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다면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 모든 항하의 모래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항하의 수만 하여도 셀 수 없이 많겠거늘 하물며 그 모래이겠습니까”
“수보리야,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너에게 이르노니,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칠보로써 저 항하강 모래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그가 얻는 복덕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이 앞에서 말한 복덕보다 더 뛰어나리라.”


이 분에서는 금강경의 사구게를 수지하고 위타인설하는 공덕은 일체의 물질적인 유위의 복덕에 비해 더욱 뛰어난 무위의 복이 된다고 말함으로써 법보시의 공덕이 얼마나 수승한 것인가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항하강은 인도의 갠지스강을 말한다. 항하사란 항하의 모래란 뜻이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수량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 갠지스강의 모래의 수가 얼마나 셀 수 없이 많은가를 설하면서 그렇게 많은 항하강의 모래 수만큼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가득채워 보시하는 무량한 물질적 보시보다도 금강경의 가르침을 스스로 수지하고 위타인설하는 복덕이 더욱 뛰어남을 비유를 통해 들어 보이고 계신다.

항하강의 모래 수만큼 셀 수 없이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가득 채운다면 그것이 얼마나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물질적 보시가 될 것인가. 도저히 우리들의 상상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양이며 복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많은 양으로 보시한다면 이는 분명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복이 될 것이며, 그 복덕의 결과는 엄청난 양으로써 우리에게 보상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것은 엄연한 인과의 법칙이다.

천원을 보시하면 천원 만큼의 복이 되며, 만원을 보시하면 만원 만큼의 복이 된다. 백만원, 천만원을 보시하면 분명 그만큼의 복이 쌓여 언젠가는 그 결과로써 복된 삶을 보장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복은 유위의 복이다. 스스로 백만원을 보시하고 ‘백만원의 보시’란 상이 남게 된다면 그것은 유위의 복이다. 유위의 복은 계산이 철저하다. 백만원의 보시를 했다면 백만원의 결과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위의 행이 되었을 때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행한 보시는 같은 백만원이지만 그 복덕의 결과는 무위인가 유위인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이 분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뜻은 두 가지로 나누어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무위와 유위의 복에 대한 이해이며, 둘째는 물질적인 복과 법보시의 차이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위와 유위복에 대한 이해이다. 그것을 이 분에서는 무위를 법보시로, 유위를 물질적인 칠보의 보시로 대변시켜 놓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왜 그러한가. 물질적인 보시를 하면서도 무위로써 행할 수 있고, 금강경 사구게를 들려주는 법보시를 하면서도 유위로써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시하느냐가 아니라 무위로써 했느냐 하는 점이다.

바로 그 점을 잘 새길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법보시 즉 금강경 사구게의 보시를 내세운 이유는 금강경 사구에 안에 담긴 의미가 바로 ‘무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강경 사구게를 남에게 설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수지하여 무위의 참뜻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다시말해 이 경의 깊은 속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지 겉으로만 이해해서는 그 참 뜻을 놓치기 쉽다는 말이다. 얼핏 들어서는 물질적인 수많은 보시보다 법보시가 더욱 중요하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질적 보시보다 금강경을 들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그러다보니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금강경이 배포되었다. 수많은 양의 금강경이 인쇄되고 사경되었으며 설법되어져 내려왔다. 물론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금강경의 배포와 위타인설은 물론 큰 복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유위의 복에 멈춰서서는 안 된다. 단순히 금강경을 많이 인쇄하여 배포하고 많은 이들에게 읽히도록 하는 일은 유위의 법보시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금강경의 한 구절만이라도 스스로 밝게 이해하여 함이 없이 위타인설할 수 있다면 그 공덕이 앞의 공덕보다 더욱 뛰어나다. 금강경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공덕보다 스스로 올바로 이해하고 수지하여 단 한 사람에게 그 뜻을 나누고 이해시키는 것이 더욱 큰 복덕이 된다는 말이다.

또한 이렇게 무위로써 금강경을 수지하고 위타인설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물질적인 보시를 하더라도 그대로 무위의 뛰어난 복덕이 될 수 있다. 그는 칠보가 아닌 그 어떤 것으로써 보시를 행하더라도 무위의 뛰어난 복덕을 성취한다. 문제는 물질적인 보시냐, 법보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칠보로써 삼천대천세계를 채워 보시하느냐, 게송 하나를 남에게 알려주느냐가 아니다. 그것이 무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이 무위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바로 ‘금강경의 게송’이다. 그렇기에 금강경의 게송 하나라도 일러주는 것이 뛰어난 복덕이 된다는 말이다.

사실 금강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깨달은 자는 따로이 보시를 할 것도 없다. 금강경의 뜻을 스스로 수지하여 무위의 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존재 자체가 무위의 뛰어난 보시가 된다. 그에게는 보시라는 말 자체도 성립되지 않는다. 보시라는 말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는 행위가 아닌가. 그러나 참된 보시는 ‘누가’도 없고, ‘누구에게’도 없으며, ‘무엇’도 없는 것이다. 무위의 보시는 바로 이러한 삼륜이 청정한 보시이며, 무주상의 보시이다.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는 보시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시에는 보시하는 ‘주체’도 사라지고, 보시를 받는 ‘대상’도 사라지며, 보시할 ‘것’도 사라진다. 이 세 가지가 사라진다면 ‘보시’라는 말 또한 필요 없는 군더더기가 될 뿐이다. 그는 다만 존재할 뿐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대로 보시를 대변하고 있으며, 지혜를 대변하고 있고, 깨달음을 대변하고 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머무름이 없는 무위의 함이 없는 행위이다. 그것이 참된 보시이다.

참된 보시는 이와 같이 바른 지혜가 바탕이 된다. 지혜가 구족되지 않은 보시는 무위의 보시가 아니고, 무위의 복덕이 아니다. 보시가 그대로 지혜이며, 지혜가 그대로 보시이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란 금강경의 가르침에 대한 온전한 이해이다. 즉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지혜이며, 범소유상 개시허망의 지혜이고, 아상 타파에 대한 지혜, 금강경 사구게의 지혜이다. 금강경의 가르침, 금강경의 사구게를 온전히 수지한 이는 그 존재 자체로써 완전한 지혜의 완성이며, 완전한 복덕의 구족이다.
이 분에서는 바로 이 점을 밝히고 있다. 금강경 사구게 하나만을 온전히 수지하여 위타인설할 수 있다면 그것이 그 어떤 유위의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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