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어떻게 벌것인가

                  - '10. 01. 31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1

오늘은, 오늘은요, 조금 색다르게 ‘돈 잘 버는 방법’, ‘돈 버는 방법’

이것을 좀 말씀드릴까 합니다. 아주 확실하고도 직접적인 돈 버는 방법입니다.

매번 법당에 오면 "비워라, 놓아라, 집착을 버려라, 욕심을 비워라" 이런 얘기만 한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많은 분들이

“너무 서운하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어째, 불교는 자꾸 이렇게 비워라, 놓아라. 이런 얘기만 하느냐?, 너무 서운하다.” 이리 얘기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돈 좀 버는 방법, 이것에 대해 말씀드릴까 싶은데요.

아~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들은 아마 그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 이거 너무 세속적이다. 너무 세속적이지 않느냐?”

“불교에서 어찌 그렇게 세속적인, 잡스러운, 돈 같은 그런 좀 추잡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돈이, 어떻습니까? 과연 그럴까요? 돈이 그렇게 추잡한 겁니까?

돈이 잡스럽고 세속적인 것인가?

진짜 그런지 아닌지 오늘 한 번 탐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는 ‘돈을 많이 벌어라,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해져라’ 이렇게 얘기하는 종교입니까?

아니면 ‘돈을 벌지 말고, 마음을 좀 비우고, 돈 없이도 가난하고 청빈하게 사는 걸로써도 만족하고 행복해라’하는 종교입니까?

불교는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하라’는 종교인가, 아니면 ‘돈이 없어도 행복해라’는 종교인가?

어떤 종교일까요?

불교는 돈이 많고 적은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말 그대로 ‘행복하라,’ 라고 말하는 것이지,

‘행복하라’고 얘기하는 그 주제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돈이 많고 적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돈이 많음으로써 행복할 것이냐, 아니면 돈이 적더라도 그 속에서 만족과 평화를 느끼면서 행복할 것이냐?

돈이 많고 적은 것은 상관이 없다. 단지 우리는 행복한 것, 그게 중요하다는 것이죠.

물론 그동안 부처님도 그렇고 많은 인류의 성인들이

가난의 정신, 자족과 만족의 정신, 또 청빈의 정신을 많이 얘기하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돈에 집착하고,

돈을 벌고 돈에 의해서 행복하게 되고자 하는 것에만 중점을 잡아왔고,

너무 욕심과 집착을 많이 부려왔기 때문에

그것을 좀 중도적으로 바로잡아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한 것이죠.

그러나 사실 돈이라는 것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돈이라는 것 자체가 어떻게 좋거나 나쁠 수 있겠어요? 돈이라는 자체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만약에 ‘돈을 좋은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돈은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한번 살펴보면요.

‘돈은 좋은 것이다’, ‘돈이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겠어요?

만약 돈이 좋은 것이라고 하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인해서 타락하겠습니까?

돈으로 인해서 타락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다.

아무리 훌륭했던 사람도 돈을 많이 벌게 되고, 돈을 너무 과도하게 축적하게 되면

점점 돈의 욕심에 막 휘둘리고 집착하고, 돈으로 인해서 타락하게 됩니다.

로또에 당첨되고 나면 잘 지내던 부부가 갑자기 이혼을 하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서로가 이제 돈을 놔두고 투쟁의 대상이 된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심지어 로또 당첨된 사람들을 보면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부가 서로를 죽이고….

이런 경우까지도 심지어는 있단 말입니다. 

돈이라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인데,

돈에 대한 집착이 너무 과도하게 됐을 때, 그로 인해서 우리는 타락해지기가 쉽다.

예전에 미국에서 한 650억원 이라는 로또 금액에 당첨됐던 부부가,

당첨되자마자 얼마 안 있어 이혼을 하고,

그리고 얼마 후 대저택에서 막 으리으리하게 살다가, 숨진 채로 발견됐다고 그러거든요.

우리나라도 이런 경우는 너무나도 많다.

이 ‘돈이다.’ 라고 하면 심지어 정말 막 가족도 죽이고 하는 그런 세상이 될 정도란 말입니다.

그럼 과연 돈이 좋은 것인가? 그런 걸 본다면 돈은 좋은 게 아니죠.

또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성인들이, 현자들이, 또 부처님께서

가난의 정신을 찬양하고, 청빈의 정신을 찬양했다. 무소유를 주장하곤 했단 말이죠.

이렇게 본다면 돈이라는 것은 나쁜 게 분명해 보입니다.

오히려 가난한 나라들이, 부탄이라든가 방글라데시나, 티베트, 미안마 같은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지수가 더 높단 말이에요.

그런 것을 보면 돈이 별 필요하지 않겠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돈. 필요하지도 않고 돈은 좀 나쁜 것 같아요. 돈은 나쁜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과연 그러면 ‘돈은 나쁜 것'인가?

이게 '나쁜 것'인가?라고 생각한다면 또 거기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돈이 나쁜 거라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인해서 행복해 할까?

여러분, 돈 있으면 행복하죠? 돈 있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없단 말이에요. 

그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하고, 돈으로 인해서 행복을 느끼고 누린단 말이에요. 

그리고 돈은 ‘나쁜 거’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돈을 잘 쓰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큰 행복과 평화로움과 부유함, 풍요로움을 이 세상에 가져다준다.

전 세계 제일가는 부자가 빌 게이츠라고 하는데, 2006년도에 빌 게이츠가

"자신의 일의 반만 하겠다.” 이렇게 말하다가 나중에는 거의 은퇴를 선언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그야말로 재산의 상당 부분을 자선재단에 자선하겠다, 보시하겠다.

그렇게 해서 베푸는 일에 뛰어들기로 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이 빌게이츠는 전부터

“자신의 전 재산의 99%를 사회에 기부하겠다. 그리고 자식에게는, 자녀에게는 천만 달러씩만을 상속하겠다.”

그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전 세계에서 최고가는 갑부지만 99%를 사회에 헌납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발표가 있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워렌 버핏이라고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부자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빌 게이츠가 만든 기부재단, 자선재단에

‘빌게이츠가 믿음이 가고 잘 할 것 같아서’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자신의 전 재산의 80%인 370억 달러를 기부했다고 합니다. 워렌 버핏이 기부했다.

그렇게 기부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아직도 어마어마한 부자죠.

돈이 만약 이렇게 쓰여 진다면, 이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을 뭔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다면,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고 베풀어 쓸 수 있다면,

과연 돈이 나쁘기만 한 것인가?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단 말이에요.

돈이라는 것 자체는 사실은 중립니다. 돈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어떤 부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부자 그 자체만을 가지곤 그 사람이 훌륭한가, 훌륭하지 않은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돈이 많다’라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결정적인 요건이 되지는 않는다.

돈 자체가 좋거나 나쁜 게 아니라, 돈에 대한 우리의 어떤 생각이나 판단이나 해석,

는  돈에 대한 욕심, 그것이 좋거나 나쁠 수가 있을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돈을 벌어야 됩니까, 벌지 말아야 됩니까?

가난의 정신을 위해서 돈을 포기해야 됩니까, 아니면 돈을 벌어야 됩니까? 

이 돈을 버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돈 벌지 않고 가난하지만 자족하면서 만족하면서 사는 게 나을까요?

2

이건 어느 게 옳다, 어느 게 그르다, 어느 게 더 맞다, 더 좋은 것이다, 더 나쁜 것이다, 라고

정지을 수 있는 부분은 사실은 아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하나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부자를 선택해도 좋고, 가난과 청빈의 정신을 선택해도 좋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가난하게 사는 것, 청빈하게 사는 것, 뭐 그런 것에 대해서 얘기를 좀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좀 식상하단 말입니다.

불교신자들이 “야, 이거 좀 가난한 것 말고, 좀 부자 되는 것 좀 가르쳐달라”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이번에는 돈을 좀 많이 벌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 이것을 좀 말씀드려보겠다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오늘처럼 ‘돈을 버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아주 중요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돈을 많이 버는 쪽을 선택하더라도 좋을만한 정신적인 바탕이 돼 있어야 된다.

정신과 지혜가 우뚝 서 있어야지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무너뜨리게 될 수도 있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돈은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돈을 나쁘게 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우리가 돈에 대해서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돈을 나 자신을 위해서, 나 개인을 위해서 쓸 때, 돈은 나빠진다는 것이죠.

돈이라는 것이 우리 아상과 이기심과 아집을 위해 사용될 경우에, 돈은 나빠진다.

아상을 강화하기 위한 용도로, 아집을 키우기 위한 용도로 쓰여 질 때, 돈은 나쁘단 말이죠.

그러나 돈을 좋게 하는 것은 그 돈이 우리 아상을 타파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 진다면, 돈은 좋단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타적으로 베풀고, 나누고, 보시하고, 타인을 돕는 용도로 사용된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럴 때 돈은 벌어도 좋다.

그러려면 어때요? 돈을 벌어서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정신이 바탕이 돼 있어야 합니다.

정신적인 토대가 자리 잡고 있어야 된다. 

이 돈을 ‘나 개인만을 위해 쓸 것이 아니라 이타적으로 남을 위해 쓰겠다.’라는

그 토대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돈을 버는 것으로써 행복한 그 상황도 좋은 상황이다. 

그러나 아상과 아집에, 이기심에 쌓여 있은 사람은 돈을 버는 것으로 인해서 행복한 상황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는 돈이 독이 될 수가 있다.


그래서 오늘 설법에 앞서서 돈에 대한 우리의 관점의 두 번째가,

돈으로 인해서 나눔과 베품을 실천할 수 있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고,

내 아상 타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써야 된다. 그것이 토대가 되어야 된단 얘깁니다.


그러면 이제, 돈을 버는 방법을 한 번 알아보겠다는 말이죠.

이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이 있습니다, 법칙이.

그 법칙이 뭐냐 하면 ‘업보(業報)의 법칙’이다.

우리가 ‘업’을 지으면 그 업에 따른 ‘과보'를 받는다는 법칙입니다.

업보라는 것은, 인간이 즉 나라는 존재가 업을 지으면 세상은 즉 이 우주법계는 보를 가져 온다, 이겁니다. 

나를 중심으로 내가 업을 바깥으로 내보내면, 보 즉 과보라는 것이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

이게 바로 업보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업을 지을 수 있는 것은 나고, 보는 세상으로부터 옵니다. 나에게.

그럼 여기서 업은 뭐냐? 업이라는 것은 행위입니다, 행위, 행위.

다시 말해 ‘어떤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서 어떤 결과가 온다.’ 이거거든요. 어떤 과보가 온다.

돈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어떤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서

돈이 들어올 것인가, 적게 들어올 것인가, 많이 올 것인가, 적게 들어올 것인가,

돈이 들어 올 것인가, 말 것인가가 결정된다는 소리입니다.

내 행위가 어떠냐에 따라서 돈이 들어오기도 하고 들어오지 않기도 한다. 이것은 업보의 법칙입니다. 

그러면 이 행위라는 게 뭐냐?

다시 말해서 이 업보의 관점에서 본다면 돈을 벌려면 돈을 벌만한 업을 지어야 된다.

그런데 그 근간이 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이 ‘의업(意業)이다’, 의업. 

업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고 해서 몸으로 짓는 업이 있고, 입으로 짓는 업이 있고, 생각으로 짓는 업이 있다.

그런데 이 생각으로 짓는 업은 가장 토대가 되고, 근본이 되고, 근원이 되고, 근간이 됩니다.

나무로 치면 뿌리가 된단 말이에요. 근원이 되는 의업(意業).

이 생각이라는 것이 어떤 생각을 내가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돈이 많이 들어올 것이냐, 돈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냐가 결정이 된단 말입니다.

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의 뿌리, 근본이 바로 의업(意業)이기 때문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 돈에 대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 돈에 대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돈이 많이 들어올 것인지, 말 것인지는 결정되는 것이다. 거기서 결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돈에 대한 나의 생각, 사고, 정신. 그것을 바꿔야지만 돈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요, 돈을 벌지 못하도록 하는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이 있고,

돈을 벌수 있도록 하는 사고방식, 의업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를테면

돈을 벌지 못하도록 하는 내 안에 있는 어떤 생각, 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내 안의 생각.

즉 다시 말해 업보의 관점으로 봤을 때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서 보가 결정되는데,

이 업이라는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게 의업이라고 했고, 의업, 즉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 과보로 돈이 들어올 것인지, 말 것인지는 결정된단 말이에요.

그럼 그 어떤 생각이 돈을 들어오게 하느냐, 어떤 생각이 돈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느냐, 나에게 돈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느냐,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돈이 안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안에 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특별한 독특한 생각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돈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생각에너지가 있다. 업이 있다.

그런 업을 짓고 있다. 생각에너지를. 


여러분, 돈이 나한테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대표적인 업이 뭐냐, 의업이 뭐냐, 생각이 뭐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나에게 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요.

그리고 그러기 때문에 부자가 되지 못하고 산다.

뭐냐 하면? 이를테면 첫째, 어떤 생각이 나에게 돈이 들어오는 것을 막느냐?

첫째는 뭐냐 하면, ‘나에게는 돈이 부족하다’라는 생각입니다. ‘나는 돈이 충분하지 않다’라는 생각이에요.

여러분, 자기가 충분히 쓸 만큼 돈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아직은 부족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더 필요하다’ 이리 생각해요.

‘아직 돈이 부족하다. 돈이 충분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 의업으로 내 생각으로 ‘나는 돈이 부족해, 나는 돈이 충분하지 않아’ 라는 것을

이 우주법계로 내보낸단 말입니다.

업을 ‘나는 돈이 없다, 부족하다.’ 이것을 우주법계로 내보낸다는 말입니다.

이런 업을 짓는단 말이에요. 부족과 결핍의 업을 짓는단 말입니다.

‘나는 없다. 나는 돈이 부족하다.’ 이 생각을 우주로 보내니까, 어때요?

우주법계는 어떤 보를 가져오겠어요?

내가 내보내는 게 부족하고 결핍돼 있는 걸 내보내니까, 우주는 똑같은 것을 반사시키는 겁니다.

이 우주법계는 ‘내 생각의 스캐너’ 입니다. 복사기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우주로 내보내면 그것이 그대로 나에게 다시 스캔되어져서 돌아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부족한 에너지를 내보내니까, 어때요?

부족한 것이 들어온다. 그러니 돈을 많이 벌수가 없다.

내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니까, 풍요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니까,

부족하다는 생각에너지, 부족하다는 의업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과보는? 부족한 과보가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받고 있는 월급이 ‘부족하다, 충분하지 않다’,

이리 생각하는 사람은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도 없고

더 많은 돈을 얻을 근원적인 의업 자체를 생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비슷한 얘기인데요.

‘돈이 부족하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을 더 많이 원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 돼', 하고 돈을 원해요.

'돈을 더 많이 벌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한단 말입니다. 빈단 말이에요. 빌고 원하고 기도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될 아주 특별한 것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3

‘원하고 빈다.’라는 것은, 빌게 됐을 때 ‘빈다’ 라는 것, ‘원하다’ 라는 것은

지금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뭔가를 원한다, 돈을 원한다, ‘더 많은 돈을 벌게 해 주십시오’라고 빌었어요.

그 말은 지금 ‘나는 지금 돈이 없습니다,’라는 소리를 내보내는 것이잖아요. 생각의 토대가 그렇다.

의업. 이 생각의 토대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은 ‘돈을 더 벌게 해주세요,’ 이 말인데, 

그 토대는 뭐냐 하면, ‘나는 돈이 없습니다.’ ‘나는 돈이 부족합니다.’ 이것을 내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원하는 마음, 이 마음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듭니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다.

‘돈 벌게 해주세요’ 하고 ‘돈을 더 많이 벌게 원합니다’ 라고 하는 마음이 우리를 가난하고 궁핍하게 만드는 생각에너지다. 의업이다. 

그러니까 돈을 더 벌게 해달라고 빌면 빌수록 우리는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 안에는요, 아까 처음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법당에서

“오늘은 돈 버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수행자 불자 내지는 조금 더 신성하고 청정하고 성스러운 어떤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어떤 생각을 하냐 하면,

“아니, 어떻게 스님이 저런 말씀을 할 수 있지? 법당에서 어찌 돈 버는 얘기를 할 수 있지?”

이런 생각을 가져요.  

그런 생각의 바탕에 뭐가 있습니까?

‘돈은 나쁘다’, ‘돈은 성스럽지 못하다’, ‘돈은 추잡스러운 것이다’ 이런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돈은 나쁘다는 생각, 돈은 좋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 세속적이고 추잡스럽고 성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우리 안에 깔려 있습니다. 근원에는. 

여러분의 생각의 사고에, 여러분의 의업에서, 여러분의 생각에서 ‘돈은 나쁘다’, 라는 생각이 있단 말이에요. ‘돈은 근원적이지 못하다. 돈이 없더라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지!’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단 말입니다.


네 번째는 그겁니다. 위의 두 가지 생각이 함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이 없더라도 행복해야 해.' '돈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때요? 한편으로는 돈을 요구하고 돈을 갈망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 한편으로는 돈을 더 벌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돈은 없어도 되는 거야', '돈은 좋은 게 아니야', '성스러운 게 아니야', 이런 에너지를 내보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주법계에서 봤을 때는 어때요?

이 우주법계는 그야말로 스캐너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주로 내보내는 생각을 고스란히 돌려준다.

그러나 우리는 돈이 나쁘다는 생각도 내보내고, 그런데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생각도 내보내고.

우리의 돈에 대한 관점이 이중적입니다. 일관성이 없어요. 오락가락 합니다.

그러니까 우주법계에서 나한테 돈을 가져다주려는 마음도 있고, 또 주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는 거예요.

이 우주법계도 우리에게 과보를 오락가락~ 하게 내보내주는 겁니다.

이런 생각들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다. 우리 안에 있는 생각들. 그 생각입니다.

이것은 좋고 나쁜 개념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얘기하는 거예요.

어느 게 더 좋다 나쁘다, 라는 개념이 아니고.


이를테면 또 어떤 생각이 있냐 하면 예를 들면 월급쟁이들은 이런단 말이에요.

“야, 돈이라는 게, 어떻게 내가 더 벌고 싶다고 더 벌어지냐?"

"나야 어차피 공무원이고 월급쟁이니까, 월급 받는 게 그게 다지”

“야, 땅을 파서 돈이 나오냐? 내가 생각하다고 돈이 더 나오냐?”

이런 생각을 가져요. 그런 생각을 가지면 어때요?

자기가 받는 월급 이상은 절대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나오지가 않아요.

그런데 사실은 어떻다? 내 안에서

“야, 나는 더 많은 돈을 벌수 없어. 나올 구멍이 없는데 어떻게 벌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내 머릿속에 돈이라는 것에 제한을 두는 것입니다.

내 월급 이상은 벌 수 없다고 딱 한정시키고 있어요. 그런 사람은 더 많은 돈을 벌 수 없습니다.

사실은요. 사실은. 땅을 파면 돈이 나옵니까?

땅을 파면 돈이 나올 수도 있다. 땅을 파면 돈이 나올 수도 있어요.

다시 말해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돈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나한테 있던 돈이 왕창 나가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내 안에서 ‘아, 요런 요런 틀 속에서만 돈을 벌 수 있어’라고 딱 고정지어 놓으면

그 틀 속 이외에는 돈을 벌 방향이 없어진다.

내 마음속에서 그것을 원했으니까, 그것을 딱 의업을 내보냈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다양한 어떤 생각들이, 이제 좀 핵심적으로 말하면 크게 두 가지 입니다.

돈에 대한 여러분의 편견, 이 돈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생각을 크게 말하면 두 가지다.  

첫째는, 나는 돈이 부족하다는 생각,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생각. 이게 부족과 결핍을 창조해요. 돈이 더 없는 현실을 창조합니다. 

두 번째는, 돈은 나쁘다는 생각, 돈은 성스럽지 못하다는 생각, 수행자가 어떻게 돈을 가질 것이냐, 수행하는 사람들이 어찌 돈에 연연할 것이냐? 이런 생각.

그게 나쁘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제가 그것이 나쁘다, 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 생각이 다만 우리에게 돈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뿐이다.


아까 앞에서 한 번 더 짚었지만, 다시 한 번 짚어야 될 생각은 뭐냐 하면

돈은, 돈 그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돈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돈을 쓰는 사람이 문제죠. 돈을 잘 쓰는 사람에게 돈은 좋은 겁니다.

돈을 잘 쓰는 사람은 오히려 돈을 많이 벌수록 이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돈이 없는 게 좋아요. 없을수록 좋아요.

돈이 없으면 그나마 나쁜 짓도 덜 하잖아요. 돈이 많으면 나쁜 짓도 더 대규모로 합니다.

그러니까 지혜롭지 못한 사람에게 돈이 없는 게 더 나을 수가 있다.

근데 오히려 지혜로운 사람에겐 돈이 많은 게 나을 수가 있다.

아까 그 토대, 이타적인 토대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생각, 의업.

돈에 대한 나의 생각 때문에 내가 돈을 벌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돈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의업을 바꾸면 돼요.

업을 바꾸면 현실, 과보가 바뀔 수밖에 없는 게 이 우주법계의 이치입니다. 

내가 생각의 에너지, 의업을 바꾸면 현실이 바뀐다.

가난한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이 의업, 돈에 대한 내 생각,

‘생각이 가난하기 때문에 현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는 그런 생각을 바꾸면, 현실이 바뀐다는 거예요.


그러면 답이 나왔죠? 그죠?  

생각만 바꾸면 여러분은 부자가 될 수 있단 말이에요.

부자가 될 수 있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면, 여러분은 부자가 될 수 있다. 간단하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이 그다지 시원~한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뭔가 아주 막 희망에 차서 ‘야, 나도 이제 돈을 벌 수 있구나.’ 이런 신이 난 표정이 아니에요. 왜 그럴까요? 

“아니, 생각을 바꿔야지 현실이 바뀐다는 것 정도는, 사실은 저도 압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아니, 생각을 바꿔야지만 된다는 얘기는 저도 알지요”

“생각을 바꾸는 게 그게 힘든 거지. 어떻게 하면 생각을 바꿀 수 있는지, 그것을 가르쳐 줘야지, 생각을 바꿔라, 라는 얘기는 누가 못하겠습니까?” 이렇게 얘기 한다 말이에요.

맞죠? 생각을 바꿔야 된다는 것은 압니다.

돈에 대한 우리 생각을 바꾸면 현실도 바뀐다, 라는 건 알아요.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점은 뭐냐 하면 그 생각을 바꾸기가 어려워요.

여러분이 지난 여러분의 생애 동안 가져왔던 생각인데, 딱 못 박혀진 놓은 생각인데,

그 생각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뀌느냐? 바뀌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게 답답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면 생각이 바뀌겠느냐? 의업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구체적인 방법을, 쉽게 말해서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방법을 말씀을 드린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먼저 우리가 알아야 될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관한 거예요.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서 어떤 과보가 나에게 온단 말입니다.

그럼 업은 어떤 종류가 있느냐를 먼저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업은 세 가지로 나뉜다고 했어요. 신구의(身口意) 삼업.  

이 신구의 삼업 가운데 의업(意業)이 가장 토대가 되는 근원이 되고, 근간이 되고, 뿌리가 되는 에너지라고 했습니다.

의업이 딱 바뀌게 되면, 의업이라는 토대 위에 즉 그 뿌리 위에 신업과 구업이 바뀌게 됩니다.

그럼 내 운명이 바뀌고 내 삶이 바뀔 수밖에 없게 근원적으로 바뀌게 되는 거예요.   

본질이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젤 중요한 것은 의업을 바꾸는 겁니다.

4

그런데 이 의업이 근원적이긴 하지만, 보다 직접적이고 실질적이지는 못할 수도 있어요.

뭐보다? 신업이나 구업보다.

의업보다는 좀 더 직접적이고 좀 더 현실감각 있게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구업입니다. 의업보다는 구업. 

의업은 생각에너지예요. 사고에너지, 정신에너지입니다. 그러니 아직 정신의 에너지 일 뿐이에요.

그런데 구업(口業), 즉 입으로 말로 함과 동시에 소리에너지로 바뀌어요.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던 에너지가 소리의 파장으로 바뀝니다.

소리의 파장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에, 이 소리의 파장인 말보다 더 강력하고 직접적인, 더 빠른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신업(身業)이다. 신업. 몸으로 직접 행동하는 거다. 

마음속으로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보다 그것을 말로 하는 게 더 빨리 실천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말로만 하는 것보다, 몸으로 직접 가서 행동하는 게 더 직접적인 것이잖아요? 

그러나 근원적으로 생각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말도 나오지 않고, 행동도 나오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아까 다시 주제로 넘어가서요.

의업을 바꿔야 된다고 그랬어요. 생각을 바꿔야 된다, 생각을 바꿔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안 바뀌어요. 생각을 바꾸고 싶은데, 생각은 바뀌지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생각은 근원적이기 때문에 잘 안 바뀌어요. 근원적인 것은 뒤흔들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지 않습니까? 

그럼 근원적인 것 말고, 뿌리 말고, 뿌리에. 뿌리에 양분을 주려면 시간이 걸리잖아요?

그런데 줄기나 가지나 열매를 맨들맨들하게 바꾸려면 어때요?

바로 눈에 보이니까, 바로 그냥 물을 뿌려서 씻든가 할 수 있단 말이죠. 눈에 보이니까.

그러니까 의업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느냐?

의업은 근원적인 것이기 때문에 의업을 바꾸면, 이건 모든 게 끝난 겁니다. 

그런데 의업이 안 바뀐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신업과 구업을 먼저 바꾸면 된다.

왜냐면 신업은 직접적이고, 구업도 직접적이기 때문에.(그렇다.)

구업은 직접적이고, 신업은 더욱더 직접적이고 강력하기 때문에 그렇다.

신업을 바꾸면 즉, 행동을 바꾸고 말을 바꾸면 생각은 따라오게 된단 말입니다. 이건 중요한 얘깁니다. 

생각을 먼저 바꿔야 되는데, 생각이 잘 안 바뀐단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생각을 바꿀 수 있느냐?

행동을 먼저 바꿔라, 말을 먼저 바꿔라.

그러면 그것에 따른 생각이 토대로 정립이 되게 돼 있습니다.

신업과 구업을 먼저 행하면, 의업도 거기에 따르게 돼 있다.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긴다, 이런단 말이에요.

먼저 웃어야 된다. 먼저 행동해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행동한다.


예를 들어, 이제 돈에 대한 얘기를 했단 말이에요. 비유를 들어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느냐?

돈에 대한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아니라 풍요롭다는 생각, 돈은 나쁜 것이 아니라 돈은 좋은 것이다 라는 생각.

돈을 아름답게 썼을 때 돈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 이렇게 바꾸면 되는데,

“아니 나는 지금 가난해 죽겠는데, 나는 지금 가난한데, 어떻게 내가 풍요로운 생각으로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가난한데요.' 이런 의업 때문에 현실이 가난하게 됐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에요.

여러분이 지금 가난합니다. 가난하지만 내가 부자가 되고 싶어요.

그럼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생각을 바꿔야 된다. 부자가 될 수 있도록 생각을 바꿔야 한다.

‘나는 풍요롭다’는 것을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이 가난하니까, 풍요롭다 라고 의업을 바꿀 수가 없어요. 생각을 바꿀 수가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한다? 신업과 구업, 즉 먼저 행동하고 먼저 말한다.

그러면 그 토대인 생각이 바뀝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여러분이 만약에 부자라고 생각한다면, 풍요롭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부족합니다, 결핍되어 있습니다.’, 라고 생각하지 않고 풍요롭다고 여길 수 있다면, 어때요?

어떤 행동이 나오겠어요? 부자들은 어떤 행동을 하겠어요?

아까 제가 먼저 토대를 얘기했어요.

이타적인 쪽으로 돈을 쓰게 됐을 때 돈은 좋은 것이라고 했어요. 나만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이타적이고 나만을 위해 쓰지 않고, 사랑과 자비의 토대에서 돈이 많습니다.

이타적인 토대 위에 돈이 많아요. 그럼 여러분은 그 돈으로 뭐를 하겠습니까?

어떤 행동이 나오고, 어떤 말이 나오겠어요? 

베푸는 행동이 나옵니다. 돈이 많다면.

지극히 이타적인 사람이 돈이 많아요. 그럼 그 돈을 가지고 뭐를 하겠습니까?

베푼다. 베푸는 행동을 직접적으로 합니다. 

그리고 어디 가서도 “베풀어야 된다, 베풀어야 된다.”, 고 말하고.

어디 가서도 “제가 베풀겠습니다.”라고 말 한단 말이에요.

말하고 나면 어때요? 그러고 나면 돈이 따라 오는 겁니다.

제일 직접적인 게 뭐냐? 행동이다.

예를 들어 여러분, 어디에 힘든 분들이 계세요. 아이티 참사가 일어났다.

‘야, 내가 도와야겠다.’ 생각에서 몇날 며칠을 ‘도와야겠다, 도와야겠다.’, 생각합니다.  

생각에너지는 근원적이긴 하지만, 현실적이고 직접적이지는 못해요.

‘야, 내가 아이티 참사에 1,000만원을 보시해야겠다. 내가 100만원을 보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에너지는 바로 현실이 되는 에너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만 계속 ‘100만원, 100만원, 100만원’ 돌고 있어요.

그런데 이것을 좀 더 구체적인 현실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먼저 말하면 된다. 먼저 공표를 하는 겁니다. 약속을 하고, 약정을 하는 거예요. 

“제가 100만원 내겠습니다.” 먼저 말해놓으면 어때요?

말하고 난 다음에 따라가는 것은, 뭡니까?

말했으니까, 말에 책임을 져야 되니까, 입금한단 말이에요. 행동이 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행동이 뒤따르는 거예요.

그런데 말하고 났지만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때때로 있어요.

그런데 행동은 어때요? 신업은 어때요? 말보다 더 직접적입니다.

‘100만원 보시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해서 하는 것보다 말하는 게 더 나은데,  

말보다 더 빠른 것은 행동이다.

생각나자마자 바로 그냥 100만원 탁 갖다 주면, 그건 바로 행동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신업이 제일 직접적인 거예요. 

우리가 보통 ‘100만원 보시해야지’, 라고 생각하면,

의업의 에너지가 100만원 보시해야겠다, 고 생각해 놓고

그 다음날 어떤 생각이드냐 하면, 이 생각은 아상과 아집이 계속 우리를 끌어내립니다.

‘100만원 보시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날 100만원 보시하려고 생각하면 머릿속에서 막 아상이 소리칩니다. 

‘야, 100만원이 얼마나 큰돈인데, 네가 거기다 그걸 갖다 주냐?'

'야, 한 50만원만 하자.’ 이런단 말이에요.

‘아, 맞아. 한 50만원만 하자.’ 이 생각이 들었다가 

조금 있다가 돈 입금하려고 은행에 걸어가면서 ‘한 30만원만 할까?’

은행 문 앞에 가서, ‘아, 한 20만원만 해야지’

하다가 은행 창고 앞에 가서 10만원을 꺼내 든단 말입니다. 

그래놓고선 정작 그 직원한테 얘기 할 때는 “한 5만원만 거기로 보내주세요”그런단 말이에요.

처음에 100만원을 생각했으나 계속 우리 머릿속의 생각은,

머릿속의 생각이라는 녀석은 계속 나 위주로 흐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상을 충족시키는 위주로 흐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먼저 행동하고 말할 수 있어야 된다.

뭔가 보시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바로 먼저 행동부터 해야 한다. 아님 말부터 하던가.

행동부터 하는 게 제일 좋고, 그게 안 되면 말부터 한다.


그래서, 이제 결론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 그러면 생각을 바꿔야 해요.

‘나는 가난하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된다. 풍요롭다고 생각해야 돼요.

난 이대로도 충분하다. 풍요롭다. 즉 부족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이 생각의 의업을 바꿔야 된다. '풍요롭다', 라는 생각으로 바꿔야 된다. 

그런데 이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단 말입니다. 이 의업을 바꾸기가 쉽지 않아요.

의업을 바꾸기가 쉽지 않으니까, 어떻게 하면 의업이 바뀌어 지느냐?

먼저 신업과 구업을 바꾸고 나면 의업은 따라서 점점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먼저 행동해야 된다.

불교에서는 이 신구의(身口意) 삼업이라는 게, 순서가 중요합니다. 

신업(身業)이 제일 직접적이라 맨 먼저 나왔어요. 구업(口業)이 그 다음으로 직접적이고, 의업(意業)은 그 근본적인 토대가 됩니다.

우리가 뭔가 업을 바꾸려면 신업부터 바꿔야 합니다. 이게 순서예요.

신업 바꾸고, 구업 바꾸고, 의업이 점점 따라 오는 거예요.  

의업은 토대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럽니다. “저질러라. 표현이 성불의 지름길이다” 먼저 저질러라 이럽니다.

누군가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먼저 저질러라.

‘오늘 법당 갈까 말까, 갈까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저질러서 신발신고 나와야 돼요.

머릿속에서 ‘가야지, 가야지, 오늘 좀 쉴까? 가지 말까?’

이렇게 머릿속에서 돌게 되면, 일단 못 간다.

일단 먼저 신업, 먼저 행동해야 된다.

그러고 구업으로 “야, 나 오늘 간다. 저 다음 주 가겠습니다.”

말이라도 해야 된다. 그러면 더 실천할 수 있는 확률이 커져요. 

생각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물론 생각의 토대가 있어야 돼요. ‘법당을 가는 것이 좋다’는 그 토대가 의업으로서 있어야 된다.

 

5

마찬가집니다. 

돈을 많이 벌겠다. 그러면 돈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돈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된다.

돈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된다. 

돈이 좋게 쓰이면 좋은 것인데, 왜 나쁜 것입니까?

그러려면, 그 의업을 바꾸려면 신업과 구업이 먼저 바뀌어야 된다.

그래서 먼저 풍요롭다고 생각하고 신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내보내야만 들어오니까,

내가 다만 100원이 있으면 100원을 나누고, 먹을 게 있으면 먹을 걸 나누고, 책이 있으면 책도 나누고.

뭐든지 몸으로 그냥 저질러서 나눠야 된다. 이웃과 나눠야 된다.

나눈다는 행위 자체는 뭡니까? 내가 풍요롭다는 의지, 에너지를 이 우주법계에 내보내는 거예요.

풍요로워야 나눠질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나눈다’, 라는 행위 자체는,

나는 풍요롭다는 것을 이 우주로 내보내는, 강력한 우주로 메시지를 내보내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신업과 구업이 바탕이 되면 점차 이제 생각도 따라갑니다.


여러분, 돈이라는 건요. 돈이라는 것은,

그렇게 여러분이 쩔쩔매야 될 그렇게 엄청난 게 아닙니다.

돈 때문에, 돈 10원 한 장, 20원 한 장 때문에 막 그냥 쪼잔하게 쩔쩔매야 될 그런 것이 아니다.

내 생각 속에서 ‘돈을 벌기에는 너무 힘들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으면, 그 사람은 돈 벌기 힘들어져요. 

그런데 생각 속에서, 쉽게 말해 돈을 좀 우습게 보란 말이에요. 같잖게 보란 말이에요.

‘돈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이렇게 말입니다)

돈이라는 것은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그렇게 생각에너지를 바꾸면 돈이라는 물질에너지는 딸려 오는 겁니다.

100만원 벌기는 좀 쉽지만, 천만원, 일억 버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에요. 우리 생각일 뿐이다.

천만원을 버는 거든, 일억을 버는 거든, 10억을 버는 거든, 100억을 버는 거든, 사실은 다르지 않다. 

내 생각이 바뀌면 현실은 바뀐다.


음,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있어요.

돈에 대해서 그렇게 막~ 막~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돈이라는 것은요, 내가 이타적으로 쓸 수 있고 분명히 지혜롭게 쓸 수 있다면,

돈은 언제든지 이 우주법계에서 끌어다 쓸 수 있는 겁니다. 언제든 우주법계에서 끌어 쓸 수 있다.

이게 바로 무량대복(無量大福)입니다.

우리 생각이, 복된 생각을 하게 되면 복된 신업, 의업, 구업을 가지고 있게 되면 현실은요, 무량대복이 생겨납니다.

무량대복이 뭐냐? 큰~ 복인데, 어떤 큰 복? 무량한 복.

돈이 백원, 이백원, 삼백원, 천원, 이천원, 만원, 백만원, 천만원이 아니고,

무량한 돈, 무량한 물질, 무량한 복을 끌어다 쓸 수 있는 복덕과 복력이 있단 말입니다.

이타적이고 뭔가 지혜로운 그 에너지, 그런 생각, 그것이 있는 사람에게는, 돈이라는 것은 이 우주법계에서 그냥 자연스럽게 끌어다 쓸 수 있는 부분입니다. 

내가 너무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아집과 아상에 얽매여 있게 되면 절대 끌어 쓸 수가 없죠.

내가 복을 지은 만큼만 받는 거죠.

그러나 그 아상을 넘어서면, 아집을 넘어서게 되면, 내가 우주법계의 그릇이 되기 때문에.

내가 개인적인 그릇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 전체의 그릇이 되기 때문에, 나라는 상을 타파하면 우주 전체의 그릇이 되기 때문에, 우주법계의 복을 고스란히 갖다 쓸 수가 있다. 

이게 하나의 물질에 대한, 복에 대한, 우리의 관념, 생각이 그렇게 바뀌어야 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바뀌면 법계의 복덕을 우리가 가져다 쓸 수가 있게 된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돈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 나는 가난하다는 생각, 더 벌어야 된다고 빌고, 기도하고, 원하는 마음,

이 부족과 결핍을 연습하는 마음, 이것을 놔버려야 된다.

그리고 먼저 신업과 구업으로써 먼저 저질러야 된다. 먼저 베풀어야 된다.

먼저 베풀지 않고 어떻게 부자가 되겠습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거든요.

“내가 돈 많이 벌면, 그때 가서 베풀게요.”

부처님께 기도합니다.

‘부처님, 저 10억 벌게 해주세요. 10억 벌고 나면 제가 부처님께 보시하겠습니다.’

‘제가 얼마 보시할 테니까, 보시 많이 할 테니까, 돈 좀 많이 벌게 해주십시오.’ 

이건 완전 잘못된, 거꾸로다, 거꾸로. 

지금 나는 천만원 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처님께,

‘내가 10억 벌게 해주면 내가 부처님께 보시하겠습니다.’ 이게 아니다.

내가 천만원 있으면, 먼저 백만원이든, 이백만원이든 먼저 보시하고 나면, 저절로 벌리는 거예요. 

왜? 먼저 보시한다는 게 뭐냐? 신업이 먼저 움직이는 겁니다.  

업이 움직여야 보가 따라오는 거예요. 업보가 그거 아니겠습니까?

업이 움직이지 않고 어떻게 보가 따라옵니까?

업도 짓지 않고, 부처님께 업을 거꾸로 준단 말이에요.

‘부처님, 저한테 10억을 벌게 해주십시오.’

이래 놓고 “왜 10억 안 벌리느냐,” 고 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법사님,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 했다는데, 마음먹으면 현실로 이뤄진다고 했다는데,

나는 10억을 벌기로 마음먹었는데, 왜 10억이 안 벌려집니까?”

그 일체유심조라는 게, 마음으로 짓는다는 게 업을 얘기합니다. 의업. 업. 

어떤 방식으로 업을 짓느냐? 이것을 제대로 모르는 거예요.

비는 방법, 빌음으로써 반대로 지은 겁니다. 반대로.

그래놓고 내가 창조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체유심조가 아니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먼저 저질러서 신업을 짓지 않고, 구업을 짓지 않고, 의업을 짓지 않고 보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거예요?


제가 지금 한 말은, 여러분이 듣기에 어찌 보면 좀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상당히 구체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데, 제가 했던 얘기들을 어떻게 받아드릴 것이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또 ‘이게 막 나쁘다는 생각’, 거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너무 세속적인 사람은 어때요? 돈을 막 벌어야 된다는 데 너무 집착하고,

또, 너무 성스러운 사람은 어때요? 반대로 너무 돈은 나쁜 것인 거처럼, 돈은 무슨 독사인 것처럼, 돈 자체가 무슨 사탄이고 마귀인 것처럼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올바로 쓸 수 있다면, 그 힘이 있다면, 그 지혜가 있다면, 왜 돈이 나쁜 거냐?

아까, 처음에 얘기했던 토대를 잘 생각하세요. 이타적인 토대 위에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이기적인 생각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으로, 지금 이것을 적용했다가는 이것은 오히려 독이 된다.

부자가 되란 말입니다. 먼저 부자가 되어라.

먼저 풍요로워져라. 나란 존재 자체가 먼저 풍요로워져야 된다. 

그리고 먼저 업을 지어라. 먼저 행위를 해라.

먼저 몸으로 베풀고, 말로 베풀고, 생각으로 베풀고, 생각으로 부유하고 풍요롭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그 업의 토대 위에서 과보가 생겨난다.

부처님 가르쳐준 ‘업보라는 법칙’이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부자가 되시고, 개인적이고 아주 이기적인 부자가 되지 말고,

이타적이고 나누고 실천하고 베풀고, 이웃과 함께 할 수 있는 부자가 되어서,

여러분들이 많은 돈을 버셔서, 그 많은 돈으로 나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남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기 위한 부자가 되라.

이웃에게 나누고 실천할 수 있는 부자가 되시라는 소리입니다.









Posted by 법상

 

 

월급을 받으면
내 여건에 맞게
얼마 만큼의 돈을 떼어 놓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베푸는 데에만 쓰는 것입니다.

특별한 날만 베푸는 것이 아니지요.
특정한 사람에게만
베푸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책들을
다량으로 구입하여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꼭 좋아하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특별한 날에만이 아니라
그냥 그~냥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도
얼마든지 줄 수 있는 마음이라면
얼마나 여유롭겠나 싶습니다.

혹은 염주라든가, 또다른 선물도 좋지요.
좋은 것을 구입하여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한 달 열심히 일해 받은 보수를
이렇게 밝은 곳에 쓸 수 있다면
우리 마음이 얼마나 밝아지겠어요.

수행자는
누구를 만나든
늘상 '뭐 줄꺼 없나' 하고
베풀 것을 찾아 나설 일입니다.

나를 스쳐가는 모든 이에게
작은 것이라도 나누어 보는 것입니다.
칭찬 한마디며,
따뜻한 미소를 나눔도
아주 훌륭한 무외시가 된다 했습니다.

나의 월급에서
온전히 베푸는 데 쓰여질
작은 사랑을 떼어 놓으시길 바랍니다.

베풀어야 부자됩니다.
부~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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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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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부쩍 가난과 청빈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며 또 돌아보게 된다.
가난한 삶, 청빈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있어 아니 나에게 있어 가난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가난이란
모든 수행자들의 삶에 있어,
아니 모든 근원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가난한 삶이란
곧 근원적인 삶을 의미하며,
‘나’ 자신과 소탈하고 순수하게 대면할 수 있는
직접적이고 가장 체험적인 수행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가난이야 말로
삶을 보다 윤기있고 지혜로우며
향기롭게 또 맑게 가꾸어 갈 수 있도록 하는
소중한 체험이자 요소인 것.

가난해야 그 속에서 맑음과 청정이
또 참된 지혜가 움튼다.
부유한 사람이 수행하기 보다
가난한 사람이 수행하기 훨씬 더 쉽고,
부유한 사람이 지혜롭기 보다
가난한 사람의 속 뜰에서 더 충만한 지혜가 움트는 법.

가난해야 수행하지
부유하면 수행은 벌써 멀어지고 만다.
가난과 수행
이것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가난했을 때
그 안에서 법계를 체험할 수 있고,
이 대자연의 경이로움이며
참 진리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다.

가난 속에서
또 저 대자연에 기댄 맑은 의식 속에서
지혜가 움트고 사랑이 움트지
저 빌딩 숲 속에서
거대한 부유함 속에서
참되고 맑은 지혜와 사랑은 그 생명력을 잃고 만다.

인류의 모든 성인들은 다 가난했다.
어쩔 수 없는 가난이기 보다는
극복해야 할 과제로서의 가난이기 보다는
그들의 삶의 지혜의 근원으로서의 가난이었다.

가난을 가까이 하고 살수록
우리 안의 지혜와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가난하게 살자.
가난하게 살고 있는지 비추어 보고 살자.

그렇다고 가난한 삶이란
단지 외적인 모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돈’ 없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돈이나 경제력 같은 단어가
‘가난’이라는 단어를 좌지우지 할 만큼
그렇게 영향력 있는 요소가 못 된다.

가난은 돈이나 경제력과 상관없다.
많이 소유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가난해질 수 있다.
아무리 적게 소유하더라도
그 속에서 부유할 수 있는 것 처럼...

어쩌면 작은 의미에서 물질적 가난이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도 나도 물질적 가난을
구하려고 애써 좋은 조건의 직장을 그만둘 필요는 없다.

물론 물질적 가난은 모든 이들에게 있어
맑고 지혜로운 삶을 누리도록 해 주는
참 좋은 요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모르긴 해도 우리에게 있어
‘가난한 삶’은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설사 물질적 풍요와 부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린 그 속에 살면서 가난해 질 수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은 어렵지만 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많이 소유하고 있더라도
그 소유에, 그 부와 풍요에 집착하지 않는 것.

다시말해 삶 그 자체가 가난해야 참된 가난이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만이 참된 가난인 것은 아니라는 말.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마음 속에 욕심과 욕망을, 또 물질적인 부를 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

그러나 비록 많이 소유해도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생각이 가난할 수 있다면
그는 실로 가난한 것이다.

삶의 모습에 있어 가난이란
말하자면 청빈 같은 것인데,
마음에는 바라는 것이 없이 자족할 수 있어야 가난이고,
행동에 있어 절약하고 절제하며
최소한의 소비로 살아갈 수 있어야 참된 가난이라 할 수 있다.

많이 소유해도 소박하게 살 수 있다.
배고플 때 인연따라 내게 온 공양을 먹으면 되는데
욕심이 시키는 대로 밥이 있는대로 불구하고
더 맛있고, 더 많고, 더 비싼,
더 좋은 음식, 더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소박하게 사는 것도, 가난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칫솔질을 할 때라도
한 컵으로 할 수 있는데
수돗물을 콸콸 쏟아 붓는다면
이 사람은 가난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추우면 있는 옷 챙겨 입으면 되는데
더 비싸고, 더 좋고, 더 예쁜 옷을
그것도 몇 벌씩,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계절이 다가올 때마다
새로 사 입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언젠가 어릴적 아버님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슨 기업의 회장이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을 마시고는
남은 소주를 호주머니에 넣고 가더라는 말씀.

이런 사람이 요즘에는 있는가 싶은 마음이 들지만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참으로 부유하면서도 가난한 사람
맑은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아끼고 절약할 줄 아는 마음 그리고 실천,
보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
욕심과 욕망 보다는
정말 필요한 작은 소유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
언제든지 누구에게라도 베풀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맑은 가난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수백억을 가지고 있더라도
가난에서 오는 참된 지혜와 미덕을
그대로 안으로 움트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유한 물질들은
그 사람 것이 아니라
법계의 것이고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늘 가난을 꿈꾼다.
내가 늘 부유하게 살지만, 그래서 항상 부끄럽지만
내 안에서는 늘 맑은 가난을 꿈꾸고 있다.

우리들 모두가,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맑은 가난을 꿈꾸며 실천할 수 있을 때
바로 그곳이 극락이고 천상이 아니겠나.

그랬을 때
이 세상은 항상 충만한 곳이고,
넘치는 곳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가난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은 부지기수다.

‘최소한의 필요’의 영역을 정하고
그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다 베풀어 주는 것도 가난의 실천이며,
무엇보다 삶이 절약과 절제되어 있어야 가난이고,
마음에 바라는 것 없이 만족할 때 참된 가난이라 할 수 있다.

꼭 필요한 곳이라면
전 제산이라도 다 베풀어 줄 수 있어야 하겠고,
꼭 필요하지 않은 곳이라면
물 한방울 낭비하는 것에도 부끄러워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 가을...
가난에 대해 생각해 보고
내 안의 가난에 대해 돌이켜 본다.

또 우리 모두가
가난에 대해
내 삶의 가난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비추어볼 수 있었음 하고 바란다.










Posted by 법상




[선암사에서...
원광스님과 수녀님...]

요즈음 들어
가난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거추장스러움도 많이 느끼게 되고,
소유에 오히려 걸리는 일들 또한 가만히 바라보게 됩니다.

과연 내게는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충분하게 갖추어져 있는가
스스로 비추어 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하게 산다는 건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내가 충분히 지혜롭고
또 그 지혜로움을 실천할 용기가 있는가
그것이 요즈음 화두처럼 제 삶 속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선택한 가난은
무한한 지혜로움의 원천이며,
영혼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산다는 건
소박하게 살고, 청빈하게 산다는 건,
우리 안의 창조적이고 자주적인 본연의 능력을
삶 속에서 마음껏 발휘하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지혜로움을 충분하게 실현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부유하게 살고
그래서 편리하게 살게 되면
우리는 본래의 능력을 자꾸만 잃어버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그만큼 축소되면서
몸과 마음의 능력도 함께 퇴화되고 맙니다.

그렇게 부유함에 길들여져 무능력해 지고 나면
그 때부터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게 되고,
반드시 물질적인 편리함이 뒷받침되어야지만 살 수 있는,
경제력이라는 경계에,
'소유'에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요즘같은 사회에서야
경제력이 그 사람의 능력을 가늠지을 수 있는 잣대인 듯
세상에서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지만,
그래서 너도 나도 돈 돈 하며 부자가 되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사실 그 내면적인 모습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부유할수록 자신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영역이 퇴화되고
모든 것을 기계가 대신해주며, 돈이 대신해주어야만 할 수 있는
그런 나약한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부유하고 돈이 많을수록
우리 손과 발은 할 일이 없어집니다.
대신에 머릿속에 집어 넣어야 하는 것들이 늘어나고,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계산하고 따지고 비교 분석하는 등의
온갖 번뇌와 혼란스러운 삶이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더욱 편리한 삶을 추구하게 되고,
더욱 손과 발을 놀리길 원하게 되며,
그러기 위해 더욱 더 부유해 지길 원하곤 합니다.
그 마음은 곧 욕심과 집착을 부추기고
욕심과 집착은 곧 모든 괴로움의 씨앗이 됩니다.

발로 걸을 것 차가 다 알아서 태워 주고,
농사 지어 먹거리 만들 것을 돈이 알아서 다 만들어 주며,
스스로 밥하고 반찬 할 것을 가정부가 다 해 주고,
스스로 집도 고치고, 시장도 보고, 밭도 갈고
그래야 할 일들을 돈이 알아서 다 해주게 되니까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자꾸만 줄어드는 것입니다.

물론 돈 많은 사람만 그런다는 게 아니예요.
요즘 사람들의 삶을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분야만 잘 하면 먹고 살 수 있게 변했습니다.

컴퓨터만 치면 되는 사람,
운전수만 하면 되는 사람,
기계 돌리는 사람,
그것도 기계의 어느 한 부분만, 똑같은 공정을
하루 종일, 아니 일년 365일을 똑같은 일만 해 먹고 사는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사람의 일이 분업화 되다 보니까
사람이 할 일이 없어졌어요.
그냥 한 가지 일만 잘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요즘이야 그런 분업이 좋은 것이라고 야단인데다
한 분야만 깊이 연구하고 공부하고 실습하면 전문가로 인정받는 세상이다 보니
당연하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는 있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도 한 번쯤 깊이 있는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한 가지 일만 하면 되다 보니까
다른 일에 대해서는 그냥 깜깜무소식이고 어둔 밤입니다.
요즘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형광등 하나 갈지 못하고
변기 하나 제대로 고치지 못한다고 하잖아요.

물론 할 필요가 없으니까 안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아주 단순해졌고
우리의 손과 발이, 우리 몸이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의 길이
딱 막혀 버린 겁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난했을 때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밭도 갈고, 농사도 짓고, 밥도 짓고,
두 발로 걷고, 두 손으로 일하고,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돈이 많아져 버리면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이 없어져요.
어쩌면 소소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
그러나 인간의 삶에 있어 아주 근간이 되고 근본이 되는
그런 기본적인 의식주와 관련된 일들이
그냥 돈의 몫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이 자꾸만 놀게 되고
돈으로 만들어진 온갖 가공되고 영양가 없는 것들이
판을 쳐서 우리 몸을 공격하고 맙니다.
몸으로 일하지 않으니까 우리 몸도 병약해 지는 겁니다.

이건 얼마나 불행인 건 지 몰라요.
몸이 해야 할 것을 돈이 다 알아서 해 주니까
몸의 많은 기능이 그냥 놀게 되고
퇴화되어 버리고
그러면서 온갖 병이 몸을 공격하는 겁니다.

사람이 두 발로 흙 위를 걸을 수 있어야
그래야 비로소 가장 기본적인 몸과 마음의 근본이 서게 되는데
걸을 일이 없다보니
몸이 병약해 지고, 생명력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무인도에서라도,
숲 속에서라도 자신의 창조적인 본연의 능력을 사용하면서
또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몸과 마음을 함께 움직이면서
비로소 대자연과 내 몸이, 내 마음이 하나될 수 있는데,
이제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 겁니다.

우리 몸은 자꾸 움직여 줘야 합니다.
내 발로 대지 위를 걸을 수 있어야 하고,
내 몸으로써 대자연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른 것이 대신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손과 발이 있는 이유는
손과 발로써 움직이고 일을 하며
살면서 필요한 모든 생활을 위해 필연적으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손발의 본래 목적을 방치하면서
그 일을 돈이 대신하고, 기계가 대신하도록 하면
그 때부터 우리는 손발 본연의 창의와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퇴화되며, 온갖 병이 만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돈이 없으면
당장에 농사를 지어야 하고,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온몸으로 흙속에 뛰어들어야 하고,
스스로 농사를 짓고 스스로 모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흙과 가까워질 수 있고,
대자연과 바람과 구름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몸으로써, 손발로써 늘 일을 하고 씨앗을 뿌리며 거둠으로써
몸도 건강해 지고 마음 또한 함께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거두어 먹으니 욕심이 줄어들고
마음은 이내 평온을 되찾게 됩니다.

더 많이 거두어 봐야 저장할 곳도 없고 상하기만 할 것이니
많은 것을 쌓아두려고 애쓸 일도 없어집니다.
그 때 그 때 필요한 것을 필요에 의해 만들어 쓸 수 있습니다.
남는 것은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모자란 것은 모자란대로 부족한 듯 아껴 쓸 수도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대자연의 조화에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고 그 흐름과 하나되어 삶으로써
나 또한 대자연의 일원으로 건강하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옛 선지식이나 현자들은
가난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는
가장 소중한 부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해 질 수 있고,
온갖 번뇌며 욕심에서 벗어나 호젓하게 살 수 있습니다.

가난했을 때
우리가 그동안 욕심과 집착 소유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게 되며,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물이 흘러가듯
아주 자연스럽고 고요하게
걸림없으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길 빌어서는 안됩니다.
부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부유하더라도
그 부유함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이 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소유한 것이 많더라도
그 소유의 달콤함에서 벗어나고
소유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가난하게 살며
아끼고 살며
나누고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가난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모두가 입을 모으고
부자를 칭송하는 때이지만,
눈밝은 지혜로운 이라면 지금 이 시대에서도
가난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에 쫒아갈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그 길로 간다고 나도 그리로 따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모든 경제인, 정치가, 위인들...
이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 길로 가더라도
지혜로운 이는 외롭지만 홀로 가는 밝은 길을 택할 것입니다.

가난한 삶이 주는
그 참된 지혜와 복덕을
가슴 깊이 사유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충분히 지혜롭다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할 것이고,
내게 충분히 용기가 있다면
스스로 지혜로운 가난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홀로그램과 우주, 수행

     - 우주의 생성원리와 본질적 수행

.

                  - '09. 6. 21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과학으로 본 시크릿, 과학으로 본 불교 

 

홀로그램의 이해

아마 여러분들께서 홀로그램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홀로그램이란 홀로그래피에 의해 생성된 어떤 대상 물체의 삼차원 입체상을 말하는데요, 아마도 때때로 현실의 대상과 똑같이 생긴 삼차원의 입체영상 같은 것들을 보았던 그런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물질과 똑같이 생겼는데 막상 가서 만져보면 그저 투영된 허상일 뿐인 홀로그램 입체상 말입니다. 이 홀로그램을 어떻게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생각해보다 아주 쉽게 나온 한 가지비유가 있어서 그걸 한번 설명해 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아주 큰 냄비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주 큰 동그란 냄비가 하나 있습니다. 물이 담겨 있는 냄비인데 거기에다가 세 개의 조약돌을 세 곳에 정삼각형으로 동시에 탁 떨어뜨립니다. 동시에 조약돌 세 개를 냄비에다 탁 떨어뜨리면 이게 풍덩 떨어지면서 파장을 형성하겠지요. 세 개가 나름대로 파장을 형성해 나간다 말입니다. 그 파장이 냄비 끝까지 나아가겠지요. 이것이 만약 호수였다면 그 파장은 어쨌든 호수 끝까지 퍼져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세 개의 파장이 서로 서로 간섭현상을 이루어낸다 말이지요. 그렇게 물의 표면에는 간섭현상의 무늬가 형성되는데, 우리가 간섭현상이 이루어 질 때의 그 냄비 물의 가장 위의 표면, 돌은 이미 떨어졌고 그 위 냄비의 표면을 얇게 급속으로 냉각을 시켜서 얼린다고 생각을 해 본단 말입니다.

급속으로 얼려서 냉각을 딱 시켰습니다. 냉각시킨 냄비의 물 표면만 얇게 잘라내 하나의 얼음판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결치는 간섭현상 무늬의 얼음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얼음판 하나뿐입니다. 조약돌이 어디에서 어떤 지점으로 몇 개가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가 없고 단지 그 얼음판 하나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얼음판의 한쪽 편에서 빛을 쏘아주면 반대편에서 빛을 바라볼 때 무엇이 나타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얼음 판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빛을 쏘아 주었을 때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나타나느냐하면 애초에 떨어뜨렸던 조약돌 세 개가 등장하게 됩니다. 어느 지점에, 어떻게 생긴 조약돌이, 정확히 세 개가 떨어졌다는 것까지의 모든 정보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약돌의 입체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빛을 쏘아 주었더니 분명히 조약돌은 없고 얼음판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조약돌의 입체상을 나타내 준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겉에 있는 얼음판이 단지 간섭무늬의 파장의 형태일 뿐이지만 그 조약돌 세 개가 떨어졌던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섭무늬는 어떤 정보의 형태로써 그 판에 기억되고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도 참 신기한 노릇인데 이제 이 얼음판을 팍삭 깨어 봅니다. 얼음판이 완전히 조각이 나 버렸어요. 조각이 나 버렸는데 그 조각난 얼음판 중 하나의 작은 조각을 들고서 동일하게 똑같이 한쪽에서 빛을 쏘아 줍니다.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보일까요? 아까 동그랬던 원판과 동일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원래의 둥그런 큰 원판을 볼 때와 똑같이 작은 하나의 조각만을 가지고 빛을 쏘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쪽에 보이는 것은 처음과 똑같이 정확히 세 개의 조약돌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져 보인단 말이지요.

 

우주가 하나의 홀로그램 허상

이게 바로 조금 쉽게 홀로그램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데요. 다시말해 어떤 간섭무늬의 파장은 정확하게 그 입체의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심지어 파장 전체가 아니라 그 파장의 일부분에 어떤 한 부분의 조각만 가지고도 그 전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것이 홀로그램을 이해할 수 있는 조금 쉬운 방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현대 과학에서는 이러한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 영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물질 우주가, 이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즉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영상이 실재인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재가 아닌 환영이요 허상이고 마야이듯이 이 세상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근본불교의 무아(無我)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과 일치하는 견해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겉으로 보기에는 실재하는 것 같고, 물질 우주가 실재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이며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 비실체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홀로그램에서 보자면 이 우주가, 나와 여러분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이 세상 모두가 형성된 것이 사실은 그것 자체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그램이라는 어떤 비실체적인 것의 투영이요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파동, 파장 속에 다양한 정보를 저장했다가 그 정보가 입력된 파장이 마치 실제 존재하는 현실의 모습인 것처럼 투영시켜 보여주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 몸도 쪼개고 쪼개어 들어가면 분자, 원자, 양성자, 중성자, 원자핵, 전자 해서 계속 쪼개어 들어 가 보면 결국 파동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물질 우주의 모든 존재는 파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파동은 홀로그램처럼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아까 파장을 담고 있는 얼음판 조각 하나에서 조약돌 3개의 입체상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조각과 파장 하나에서 전체를 볼 수 있듯이, 나라는 존재 속에서 이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그 어떤 물질이든, 사람이든, 생명이든, 공간이든 그 모든 것은 다양한 형식의 파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온 우주의 모든 전체 정보를 다 볼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모든 파장은 우주 끝까지 전해져 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의 파장 하나 조차 우주 끝까지 전해집니다. 그렇기에 우주는 그 모든 파장의 정보들을 한 조각 얼음이 그랬듯이 그 파장 안에 전체의 정보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우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우주가 시작하는 곳부터 끝나는 곳까지 다 쫒아 다니면서 낱낱이 조사하고 살펴보고 해석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자리에 앉아서 내 마음자리 하나 깨달았더니 우주 전체를 깨닫게 되었다고 그러잖아요,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볼 수 있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가 전체를 내포하고 있다는 홀로그램의 이치를 주위에서도 종종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몸이 아프다 그랬을 때, 손만 딱 보면 손바닥 안에 우리 몸의 오장육부가 다 들어 있고 연결 되어 있다 그러잖아요. 그래서 수지침을 할 때도 몸의 어느 곳이 아프든 손바닥과 손가락에 침을 놓으면 그 몸의 아픈 부분도 곧 회복이 됩니다. 어릴 적에 언치거나 소화가 잘 안된다 싶으면 어머님께서 손의 특정부분을 눌러 주심으로써 금방 치유되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손바닥 안에 우리 몸 전체가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신도님 중 한 분은 귀를 연구하는 분이 계신데요, 귀, 작은 귀 요거 하나에 우리 몸을 구성하는 머리, 몸통, 사지와 그 속에 들어 있는 각종 장기에 해당하는 혈자리가 분포되어 있고, 오장 육부가 다 담겨있기 때문에 귀만 보면 그 보살님은 어지간히 다 아신다는 겁니다. 귀의 모습은 어머니 자궁 내에 거꾸로 들어 있는 태아의 자세와 같아 인체의 축소판처럼 우리 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 보살님께서는 그 사람의 몸 상태가 어떤지,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체질은 어떤지, 정력은 어떤지, 심지어 성격이나 심성은 어떤지 여부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하시데요.

또 다른 예로 DNA라는 것도 보면 하나의 어떤 작은 DNA속에 나라는 존재 전체의 모든 정보가 다 담겨 있잖아요.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도 이론적으로 한다면 나라는 존재를 고스란히 다시 복재 해 낼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홀로그램에서는 이 세상이 고스란히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에게 보여지는 모든 물질 세계는 사실 실체적인 물질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파장, 파동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물질은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우주는 입자라는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항상 파동의 형태로만 있다가 우리가 그것을 관찰했을 때 관찰하면서 입자라는 것을 원하고 요구할 때 그때서야 비로서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고 얘기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항상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파동의 모습으로 존재하다가 우리가 관찰 했을 때 비로소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공간이나 모든 물질이나 일체 모든 것들 일체 만유는 파동의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이겁니다.

사실 조금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면 이 우주에 파동 아닌 것은 없습니다. 생각의 에너지도 하나의 파동이구요. 라디오 전파 같은 것도 하나의 파동이고 전파, 전자파, 전자기파, 마이크로파, 음파, 지진파, 중력파, 빛 등 모든 것이 파동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양한 파동 파장들이 이 우주를 형성시키는 모습인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물질도 딱딱한 물질이 아니라 파동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그것들이 다만 물질처럼 우리 눈에는 보일 뿐인 것이지요. 홀로그램의 입체상처럼 진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인 것입니다.

허상이면서 그 허상을 이루는 하나의 파동은 이 우주의 전체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 속에 우주 전체의 정보를 담고 있고, 한 티끌 속에도, 심지어 우리가 무정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속에도 우주의 모든 정보가 고스란히 그 속에 담겨 있다,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연기법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 사실과 실체가 없다는 무아, 공의 가르침, 일즉일체다즉일이나 일미진중함시방이라고 하는 화엄경의 가르침과도 일맥 상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국소성과 홀로그램, 그리고 연기법

이러한 우리가 우주 전체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는 연기적인 사실을 양자물리학의 비국소성, 비국지성이라는 말로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잠시 비국소성과 홀로그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몇몇의 실험과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전에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에서의 물의 결정 연구에서 걸프전쟁이 있었던 날 모든 물의 결정이 찌그러들었던 실험이나, 『식물의 정신세계』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학자가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교통사고가 날 뻔하던 바로 그 순간에 연구실에 있던 식물의 검류계 단추가 파르르 떨었던 실험을 되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실험에서 살펴보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 한 방울 조차 지구 반대편에서 있었던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식물 또한 자신에게 물을 주고 키워주던 주인이 교통사고가 나던 바로 그 순간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증명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을 살펴보지요. 물리학자 라즐로는 거짓말탐지 전문가인 백스터와 함께 한 실험에서 진주만 전쟁 당시 해군 포병으로 참가했던 피실험자들 입에서 백혈구 세포를 채취하여 몇 십, 혹은 몇 백 k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배양체에 거짓말 탐지기를 부착해 실험한 결과, 피실험자들에게 진주만 기습 TV 프로를 보여주자 마자 마치 피실험자에게 부착된 것처럼 세포들이 격렬하게 반응을 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 실험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와 입자들 하나 하나는 공간적인 이격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 주는 수많은 실험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실험에서 이러한 연기적인 연결성은 입증되었으며, 수많은 물리학자, 과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연결성을 밝혀내었습니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연결시키는 상호작용의 능력 혹은 특성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비국소성(non-locality)’, ‘비국지성’ 혹은 초공간성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국소성은 공간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시간적으로도 하나의 장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상의상관성이라는 연기법의 세계, 일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과학을 통해 증명해 보여주는 아주 작은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한 김에 조금 더 나아가 보지요. 이처럼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근본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을 영점장(zoro-point energy) 혹은 정보장(field of information)이라고 말합니다. 영점장이란 양자물리학의 주요개념으로 허공이 텅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국소성을 가능하게 하는 온갖 정보와 능력, 특성을 다 갖추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장일 뿐 아니라 시간 공간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이 영점장, 정보장을 불교식대로 표현하자면 연기법이라는 상의상관성, 업보, 인과응보가 펼쳐지는 장인 법계(法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법계 즉 영점장은 온 우주에 꽉 차 있으며 모든 물질, 정신, 세포, 원자, 유전자 등 일체 모든 세계와 존재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근원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이자 정보의 장인 셈입니다. 영점장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요. 또한 앞서 말했듯이 이 영점장에는 공간적으로 이 우주의 모든 정보가 가득 차 있으며, 시간적으로 이 우주 역사와 인간 개개인의 모든 역사적 정보가 고스란히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 어떤 물질이든, 세포든, 허공의 공간이든, 마음이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아주 작은 일부분 조차 이 우주의 시공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 업, 역사 등 그 모든 총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1982년 알렌 아스펙트(Alain Aspect)가 파리에서 행한 실험에서 쌍둥이 광자가 우주 끝에서 다른 끝까지 연결되어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머금고 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의 이치가 영점장과 비국소성의 원리를 통해 양자물리학에서 증명이 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비실체적 현실세계가 영점장이라는 바탕 위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본 모습이라고 양자물리학에서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물질현실은 서로 서로가 따로 따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파동 속에 우주 전체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구조를 띄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홀로그램 우주』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홀로그램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상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주의 모든 부분이 전체를 품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접근할 방법만 안다면 왼손 엄지손톱 속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처음 만나는 장면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원리상으로는 모든 과거와 미래를 시사하는 모든 내용들이 시공간의 미세한 영역 구석구석에도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낱낱의 세포들도 그 속에 우주를 품고 있다.’

 

업사상과 양자물리학

불교의 업사상을 보면 과거 전생에 지은 업을 이번 생에 받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 또한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해 우주적인 일체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근원적인 장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길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강풍이 불어 빌딩위에 메달려 있던 간판이 떨어졌고, 그 간판에 맞아 한 사람이 죽었다고 쳐 봅시다. 그것은 업입니까 아니면 우연입니까? 그 또한 업이라면 어떻게 그 사람이 지금 바로 그 순간 죽어야 할 업을 간판이 어떻게 알고 바로 그 순간에 정확히 그 사람을 맞출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필 바로 그 순간에 강풍이 불어 간판을 휘청이게 했으며, 또 어떻게 간판을 지탱하고 있던 쇠고리가 바로 그 순간 끊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두가 철저한 인과응보를 완전히 계산하고 있는 영점장의 일이요, 법계의 계획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영점장, 정보장의 개념에 의하면 사람 뿐 아니라, 모든 물질 세계의 모든 원자 하나 하나,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존재, 비존재의 일체 우주가 고스란히 영점장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홀로그램의 영점장, 정보장에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의 정보가 하나도 빠뜨림 없이 다 담겨 있습니다. 바로 그 안에는 인간 개개인의 과거 전생, 그 전생을 넘어 시간적인 모든 정보와 업과 행위들의 정보 즉 업장이 낱낱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간판도, 바람 한 점도, 간판을 지탱하는 쇠고리도 물질적, 정신적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우주의 모든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와 일체 모든 존재의 업과 행위와 개개인의 업장까지를 모두 다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이 목숨을 다해야 하는 그 업장에 의해 우주 법계는, 즉 영점장에서는 바로 그 순간 강풍이 몰아치게 했고, 그 간판 또한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자리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주적 영점장의 정보들의 정확한 운행 법칙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바로 그 순간 불어 온 강풍과 간판을 지탱하던 쇠고리와 간판,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정보인 파장의 형태로 담겨 있다가 바로 그 순간 법계의 인과응보적인 계획에 의해 모든 정보가 정확히 움직여 준 것입니다. 사람 개개인 뿐 아니라, 동식물과 심지어 돌과 건물 등의 물질적인 모든 것들 조차 전부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의 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 나라는 존재 안에는 이 우주 전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일체 모든 정보가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적 공간적인 일체 모든 정보들을 이 자리에 내가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분명히 보는 분을 우리가 부처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모든 정보를 완전히 자유자재로 꺼내어 쓸 수 있고, 꺼내 볼 수 있는 그 상태를 깨달음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파장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지요. 이 파장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박쥐가 있는데요. 박쥐는 음파 탐지기 같은 기능을 몸 속에 가지고 있어서 높은 진동의 소리를 밤에 계속 발산을 한다고 합니다. 그 진동의 파장을 방출하다가 박쥐의 먹이가 되는 곤충이 그 파동에 감지가 되면 그 소리 파장이 곤충에게 전해졌다가 되돌아오는 반작용의 파장을 박쥐가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아, 저기에 내가 먹을 거리가 있구나’, ‘내가 먹을 만한 것이 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벌레가 얼마나 큰지, 어느 정도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지, 지금 어디쯤 날아가고 있는지 등의 정보들을 그 되돌아오는 파장을 통해서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박쥐는 파장이 전달 되었다 다시 되돌아 오는 그 파에 의해서 그 벌레나 곤충이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맛이 없는 곤충인지 조차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파장만 가지고도 파장 안에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앞에서 얘기했는데요 박쥐 같은 경우는 일부분 그 파장 안에 담긴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볼 수가 있는 거지요.

아까 냄비의 얼음판이 파장속에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고 그랬고 이게 이차원인데 삼차원으로 본다면 우주의 모든 공간속에 온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인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역사, 모든 어떤 정보가 총체적으로 다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제가 업보 이야기를 했지요. 지나가던 간판이 갑자기 강풍이 몰아쳐서 간판을 달고 있던 쇠고리가 떨어졌고 갑자기 거기에 맞아 죽었다 했을 때, 그 모든 것이 그 간판을 메달고 있던 그 쇠고리나 강풍이나 간판이나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모든 물질속에는 시간적인 총체적인 모든 업의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이 우주 인류 모든 생명들이 지어왔던 업장, 업의 정보라는 총체를 우리 주위의 모든 물질세계나 생명, 공간, 바람, 꽃 한 송이나 나무 한 그루, 세포 하나와 원자, 전자 하나에 조차 그리고 저 하늘의 별 조차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 전체에 그 업이라는 것은 기록 되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뢰야식에만 기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업식이 이 우주 전체에 기록 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남들 몰래 혼자 저 깊은 산속에 가서 아무도 안 볼 때 죄를 지었다고 죄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우리의 오판이요, 판단 착오인 것입니다. 사실은 주변의 일체 우주법계가 그대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아무리 완벽한 완전 범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이 시공이 있고 법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물질세계를 창조한다

여기까지 잘 따라 왔나요? 그럼 다음 진도를 나가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파장이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들어 내는 근간이고 그 파장 속에 정보가 담겨 있다면 그러면 그 파장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겠는가 이것이 궁금해집니다. 그 파장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알면 우주의 어떤 원리를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양자물리학으로 넘어 가 봅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데 반해 양자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임이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원자보다 작은,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입자인 아원자들은 고정된 물질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가능성 즉 하나의 잠재적인 가능성으로써 존재하는 것으로 비춰졌습니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정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공(空)의 원리의 일부를 과학에서 밝혀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아원자를 단지 입자나 파동의 어느 한 쪽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보며, 그 양쪽에 속해 있는 단일범주의 어떤 것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양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일부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양자들은 관찰되고 있을 때는 입자로 보이지만, 관찰되지 않을 때는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즉 ‘양자가 입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경우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관찰자가 보고 있을 때는 물질이지만 보고 있지 않을 때는 에너지인 것이지요.

이것은 곧 관찰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양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과학자들이 어떤 특정 전자를 찾을 때마다 관찰자가 기대하던 바로 그 위치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관찰자가 어떤 의도와 생각을 일으키기만 해도 그 입자는 관찰자의 의도에 따라 반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질적인 대상은 그 자체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실험에서 물질적인 객관적 대상이 사실은 그 대상을 바로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변하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물질, 사물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그것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라는 주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사물을 보는 내가 바로 보이는 사물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주 충격적이고도 신선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이 세상의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우리의 의지, 의식,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의업, 한 생각이 물질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요인이더라는 겁니다. 다시말해 물질은 고정된 물질일 뿐이지 내 의지로 물질을 바꿀 수 있겠는가 싶겠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단순한 기계 조차 우리가 그 기계를 향해 욕을 하고 화를 내며 부정적인 에너지를 보낼 때와 자비로운 에너지, 감사와 사랑의 말을 보낼 때는 전혀 그 결과의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운전자가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릴 때와 긍정적이고도 밝은 에너지로 넘칠 때 자동차가 사고 날 확률, 자동차가 고장 날 확률은 전자가 훨씬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동차 엔진이 고장날지라도 집 앞에 다 도착해서 사고가 날 것이냐, 아니면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중에 고장이 날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따라, 의지와 마음 씀에 따라 달라진다는 과학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마음하나 일으켜서 물질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 과학에서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죽을 병에 걸렸거나, 큰 빚더미에 올라앉았거나, 큰 괴로움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더라도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없을 것이겠지요. 그 사람에게 보여지는 세계는 전혀 아름답지 않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와 비판적인 습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언제나 불평불만이 가득할 것이며,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와 불평 불만과 비판의 습관은 계속해서 그 사람 앞에 나타난 물질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 생각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였다면 비판적인 습관이 계속될수록 이제부터는 그 부정적인 마음이 세상을 어둡게 변화시키고, 이 우주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들임으로써 그 사람앞에 나타난 물질세계가 부정적이고 혼탁하며 온통 좌절과 고통스런 현실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불교의 연기법과 영점장, 홀로그램, 비국지성이라는 이론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 안에, 심지어 나의 모든 세포 하나 하나에도 이 우주적인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정보와 가능성과 힘이 고스란히 주어져 있으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으키는 의도적인 생각 하나 하나가 고스란히 내가 바라보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물질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했단 말입니다. 즉 내 마음 하나로 내 밖에 있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세상을 창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냈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일으키는 마음, 생각, 의도 하나 하나에 따라서 이 우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를 내가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우주는 영점장으로써, 연기법으로써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또 내 안에 영점장의 형태로 존재하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이 물질적인 세상은 원자로 만들어졌고, 그 원자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입자와 파동으로 바뀌며 그것은 물질이기도 하지만 에너지의 특성으로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능성의 장에서는 원자를 관찰하는 자의 주관성이 곧 그 원자와 물질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질과 에너지, 입자와 파동은 언제든 서로서로 변환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마음, 생각, 의도가 곧 현실의 물질세계화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심리학자 브루노 클로퍼의 보고에 따르면 도저히 살 가망성이 없는 림프절 말기 암이었던 라이트라는 환자에게 획기적인 신약을 시험 복용 시켰더니 라이트는 3일 만에 걸어다니더니 10일만에 퇴원을 했고 두 달 후에는 완전히 암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약이 사실 아무런 효능이 없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바로 병이 똑같이 재발이 되어 다시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사가 먼저번 것은 잘못된 약이었고, 이번에 고농축된 새로운 신약을 구입했으며 이것으로 치유가 가능하다고 확신을 심어 준 뒤 환자에게 약이 아닌 그저 증류수를 주사했습니다. 그런데 극적으로 종양 덩어리가 녹아내리고 가슴의 복수도 사라졌으며 두 달 간 아무런 증세도 보이지 않을 만큼 회복이 빨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이 약이 암 치료에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의사협회로부터 발표가 되자마자 암은 다시 발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마음에서 약을 먹었으니 나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 실제 약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믿음 때문에 낫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플라시보 효과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큰 작용을 하며 광범위한 거의 모든 병에 적용된다고 합니다.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고 믿는 생각과 이제 약을 먹었으니 분명히 나을 것이라는 생각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며, 후자 쪽으로 마음을 굳게 바꿈과 동시에 내 몸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 암 세포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치유의 작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포의 변환을 완벽하게 도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이 물질을 변화시키고, 마음이 우리 몸의 모든 세포를 기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원자나 물질적인 세상 또한 영점장이라는 근원적인 바탕의 장 위에 그려진 환영과도 같은 것입니다. 원자나 전자는 단순한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영점장의 근원 바탕에 펼쳐진 하나의 총체이자 정보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이루는 물질세계를 내 의지에 따라서, 내 마음으로써 움직일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창조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들을 내가 끌어당겨 쓸 수 있기도 하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그러면 이렇게 내 의식으로서, 내 의지로서, 내 생각으로서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는데 그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즉 의식으로써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을 때 그 파동, 그 파장에 담긴 에너지가 어느 정도가 될까요? 만약 의식으로 만들어내는 파동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힘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면 우리 마음, 우리 의식이 가진 창조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측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을 쪼개면 쪼갤수록 우리는 에너지가 더 작아지고, 덩치가 큰 것일수록 더 큰 에너지를 가지게 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입자가 작으면 작을수록, 더 미세하게 쪼개면 쪼갤수록 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그럽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을 쪼개서 기관, 기관을 쪼개서 세포, 세포가 분자가 되고 원자로 쪼개지고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로 쪼개지고 그리고 또 양자로 혹은 보존이니 중간자, 광자, 레톤 등 물리학에서는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부분까지 쪼개놓은 것을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무엇으로 붙이든 간에 쪼개고 쪼개서 단위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그 안에 든 에너지 힘의 양은 무한하게 커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자력 발전소니 원자탄이니 하는 것을 생각해봐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원자의 힘,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힘, 그 힘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어마어마 한지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그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원자력이나 원자탄, 이런 원자핵의 힘보다 더 작은 단계인 양자가 가진 힘을 살펴보면 그것에 비해 원자핵의 힘은 아주 미미하다 싶을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더 어마 어마하게 큰 힘을 그 양자는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물질은 쪼개고 쪼개면 쪼갤수록 작은 입자가 되고 작은 입자가 될수록 더욱더 어마 어마한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더라 이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완전히 쪼개서 입자나 파동으로 바꾸게 된다면 그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까지 어마 어마하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이 이만큼 어마 어마하다는 거지요.

이 힘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1cm³라는 작은 공간 안에 담겨 있는 파동의 힘이 1094erg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우주에 담겨있는 전체 힘 보다 다시말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우주 속의 모든 물질 에너지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 많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1cm³ 안에 들어 있는 파장의 힘이 우리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한 어마 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파장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움직인다 했습니다. 창조된다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생각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어떤 생각을 일으켰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파장이든 긍정적인 파장이든 내 안의 어떤 에너지이자 파장의 형태로 이 우주 끝까지 펴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 신기한 점은, 내가 화를 한번 버럭 냈을 때 그 부정적인 에너지의 파장이 우리가 아까 호수에서 돌을 던졌을 때 처럼 파장이 점점 넓게 퍼질 것 같잖아요. 그런데 내가 생각이라는 에너지를 탁 하나 일으켰을 때 사실은 지금 일으킴과 동시에 우주 끝까지 이미 퍼져나갔다고 말합니다. 파장이 일어남과 동시에 우주 끝에 이른다는 겁니다. 이 말은 조금 있다가 뒤쪽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처럼 내가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온 우주 전체에 그 생각의 파장은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내가 부정적이고 성내는 마음, 욕심, 화, 증오, 질투 이런 마음을 일으킬 때 그 파장은 1094erg의 힘으로서 이 우주에 알려진 물질 전체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의 더 큰 힘으로 시간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즉각 우주 끝까지 미쳐 나간다 이 소리입니다. 우리가 쉽게 쉽게 생각하지만, 쉽게 쉽게 화도 내고, 쉽게 쉽게 싸움도 하고, 쉽게 쉽게 어떤 사람을 생각으로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하거나, 쉽게 생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세상을 마구마구 창조해 내지만, 사실 우리가 그렇게 쉽게 쓰고 있는 생각이라는 그 에너지가 얼마나 큰 에너지이고 더욱이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 우주전체 끝까지 가 닿음으로써 그 에너지가 바로 내 삶을 창조해 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무의식인 생각으로 벌이고 있는 것입니까? 이 엄청난 일을 벌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을 조심해서 쓰지를 못해요. 대충 대충 생각하고, 쉽게 쉽게 생각하고, 너무 안이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관하고, 말을 관하고, 의지를 관찰하며,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난 왜 이렇게 가난하지, 난 왜 이렇게 부족하지, 난 왜 이렇게 불쌍하지"라고 한 생각 일으킨 것이 어머 어마한 파장으로 실제 물질 세계에 가난한 삶을 창조해 내고야 말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가난을 창조하느냐 하면 1094erg라는 무지막지한 힘으로서 내 삶을 급격하게 창조해 내는 거란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능력은 무한한 것입니다. 일체유심조, 일체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럴진데 마음 하나 바꾸어서 운명을 바꾸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업을 뛰어넘는 것이 왜 불가능해요?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 붓다가 되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같은 생각의 주파수를 공명시킨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 재미있는 공명의 법칙이라는 것을 소개 해 볼까 합니다. 이 우주는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같이 공감한다 그럽니다.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함께 공명을 한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바이올린 두 개나 기타가 두개가 있다고 했을 때 도, 래, 미 같은 어떤 하나의 음을 탁 튕겼을 때 이것이 바이올린 두 개가 같이 조율이 되어 있다면, 이쪽 하나의 음을 튕겼을 때 동일한 음이 저 쪽에서도 같이 움직이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공명한다고 그럽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면, 우리 벽에다가 자명종 시계를 이쪽 벽에 하나 저쪽 벽에 하나, 또 다른 벽에 하나 이런 식으로 벽면마다 시계 추가 움직이는 자명종 시계를 갖다 놓았다 말입니다. 그리고 전부 다 다르게 추를 움직이게 시켰어요. 어떤 건 왼쪽으로 가고 하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다르게 움직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들어와서 그것을 살펴보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그 자명종의 추는 모두가 다 정확히 같은 방향, 같은 움직임을 띄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같은 자명종이고 시계추의 무게라거나 길이 등이 동일한 같은 조건이라면 말이지요. 처음에는 다르게 시작했더라도 그 작은 떨림의 파장이 서로에게 전달이 되어 공명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도 그 공명이라는 것은 아주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그럽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활자가 개발된 시점을 보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에 활자가 계발되었다거나, 비슷한 발명품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거나, 또 다른 예로 세계사 차축의 시대라고 하는 부처님 당시의 시기에 붓다와 노자,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이 함께 정신사의 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 등도 그와 비슷한 역사 속의 공명현상이라고 말해 봄직하다. 그 또한 일종의 정신적인 공명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집에서 혼자 기도할 때 기도의 힘을 받는 에너지와 절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동일한 기도를 함으로써 동일한 주파수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그 기도의 힘이라는 것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 힘이 별로 없더라도 기도 열심히 하는 도량에 가서 힘 있는 도반들, 법력이 선 스승님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한다 그랬을 때, 그 에너지, 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 법이 선 자가 가까이 함께 있다면, 혹은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면 그 정신적인 공명의 힘을 우리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부처님 같은 큰 스승이 몇 분 계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지구라는 한국이라는 전체 땅 덩어리의 어떤 에너지의 힘이 전혀 다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하나 있는 그곳은 아주 수승한 파장, 깨달음의 파장과 서로 공명을 하기 쉽다 그래요. 시계추가 다르게 움직였지만 하나로 움직이듯이 하나로 결속해서 몰아가듯이 그 밝게 깨어있는 자의 파장이 있었을 때 그 주변은 그 파장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쉽게 말해서, 깨닫기가 쉽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격 나쁘고 아주 욕도 잘하고 화를 내기 좋아하고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닮아 가잖아요. 파장이 같아지는 겁니다. 파장의 주파수가 같아지는 거예요. 나는 그걸 배우고 싶지 않아도 욕을 그냥 맛깔나게 입에 딱 붙게 하는 사람 옆에 가서 며칠만 살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런 똑같은 욕이 툭툭 튀어 나오거든요.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 파장이 나한테 공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파장으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나은 도반과 함께 가라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내가 어떤 생각을 하나 일으키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한 가지 생각을 일으킬 때 그 생각은 우주 전체와 공명한다, 그 생각 하나는 우주 끝까지 일시에 전파 되어서 우주 전체에서 그 생각과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와 공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생각, 비슷한 주파수, 비슷한 파장을 가진 에너지를 끌어당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들은 서로 모인다고 유유상종이라 그러잖아요. 비슷한 것들 끼리 모이게 된다, 공명을 한다, 내가 기대를 하고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게 되었을 때, 그 강력한 에너지를 보내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이 주파수 이 에너지와 동일한 주파수대의 사람, 동일한 주파수대의 물질, 상황, 조건들이 나와 함께 공명을 하고 그것이 나에게 힘을 보태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기도를 하게 되면 내 주변에 있는, 내 지구상에 있는 기도하는 자의 주파수가 나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욕을 하게 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범죄를 저지를 자들의 주파수가 나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때때로 수행을 하다보면 어떤 경계를 경험하게 되거든요. 혹은 어떤 경우에는 어떤 존재, 어떤 정신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다양한 어떤 경계를 만나는데, 그건 어떤 파장이 일순간 맞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들어 사람이 돌아가신 영가를 볼 수 있습니까? 못 보는게 당연하지요. 사람의 주파수와 영가의 주파수는 다르니까요. 그런데 그 주파수대가 일순간 어떤 이유로 인해 달라지게 되면 또 다른 어떤 존재나 영가와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파수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 정진을 통해서 우리의 기운 주파수가 수승해지면 저 천상 세계의 아주 맑은 정신들과 어떤 공명을 가져올 수가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내가 생각하는 그 의업, 어떤 하나의 의업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이 우주 전체와 공명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힘을 주고 받기 때문에 에너지의 엄청난 힘으로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쉽게 쉽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짜증을 내고 욕심을 내고 이런 일들을 함부로 할 수가 있겠어요?

앞에서 입안의 혀 세포를 떼어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거짓말탐지기를 연결시켜 놓고 사람과 세포를 연구해 보았던 얘기를 했잖아요. 멀게는 약 500km까지 떨어진 곳에서도 배양된 세포와 사람의 손에 연결된 거짓말 탐지기가 정확히 같은 반응을 그것도 정확히 같은 시간에 보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빛의 속도로 간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먼저 반응을 보이고 연이어 먼 곳의 세포가 반응을 보여야 하잖아요. 그 곳에까지 가는 시간이 걸리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 둘의 반응 사이의 간격이 0초더라는 겁니다. 동일한 시간대에 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생각 하나 일으킨 것이 저 우주 끝까지 가는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화엄경을 축소시켜 놓은 법성게를 보면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량한 겁 이라는 어마 어마한 시간대가 바로 일념 가운에 있다, 한 생각 가운데 있다고 하거든요. 그것이 바로 이말입니다. 내가 일으킨 어떤 한 생각 하나의 파장이 우주 끝까지 전달 되는 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전달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그것이 영항을 미치는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직바로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들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안 좋은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 이것이 다 치유되었다’ 라고 스스로 그냥 믿고 ‘그래, 난 치유되었다’ ‘부처님께서 다 치유해 주셨다’ 라고 굳게 믿는 어떤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모든 내 주변의 물질 세계 전체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동시간대의 내 몸에 있는 암세포, 종양등 모든 세포, 내 몸에 있는 모든 물의 결정, 세포 하나 하나와 직접적으로 순간 연결이 되고 그뿐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달이 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그렇게 마음을 바꾸는 순간, ‘나는 죽으니까 내 인생이 끝이구나’ 라고 좌절하는 마음에서 한 생각 돌이켜서 밝은 마음을 일으킴과 동시에 갑자기 그날따라 외출했다 들어오는 남편이 평소와는 다르게 따뜻하게 대해 주거나, 공부도 안 하고 말도 안 듣던 자식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게 되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도 평소보다 더 관심을 보이며 잘 해주고, 우연히 TV를 틀었는데 불치병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거나, 마음을 비우고 이웃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뛰어난 대체의학자나 신의(神醫)라고 불릴 법한 사람과 인연이 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우주법계가 나를 도와주게 된단 말입니다. 죽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뀜에 따라 긍정적인 파동, 긍정적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되고, 그 긍정적인 치유의 주파수와 공명된 다양한 치유의 방법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와 연결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식, 마음, 생각, 의업이 가진 힘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우주를 만들어 낸다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의업이구요 이 의업이 나아가서 구업으로 말로 바뀌고 구업이 나아가서 몸으로 행동으로 바뀌고 신업으로 바뀝니다. 이 생각 하나가 말과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말과 행동,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 세상을 창조하는 겁니다. 나아가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이 우주를 창조 해 내는 겁니다. 그 창조의 힘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어마 어마하다 이 소리입니다.

 

마음 올바로 쓰는 법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를 알았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는 바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창조를 하는데 이 신구의 삼업이 생각도 파장이요 말도 파장이고 몸의 행위도 파장이다, 파장으로서 이 우주 끝까지 퍼져나간다, 더욱이 파장이 퍼져 나가는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퍼져 나갈 뿐더러 그 퍼져 나가는 그 힘, 그 힘이 1094erg로써 기존 알려진 모든 힘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도 더 큰 어마 어마한 힘으로써 시공을 초월해서 퍼져 나간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파장에 담긴 정보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우리의 업, 우리의 병, 치유방법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정보를 다 담고 있다고 하는 소식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세상입니까! 이 얼마나 엄청난 소식입니까!

어마 어마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엄청난 삶을 우리가 살고 있고 그러한 큰 힘으로서 마음을 쓰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내가, ‘나’라는 작은 나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던 내가, 내가 아는 나의 전부가 아닙니다. 나는 능력 없고, 나는 돈도 없고, 나는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무능력 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본질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나는 능력없어’, ‘나는 공부도 못하고 운동신경도 없고 가난하다’고 내 스스로 한정짓는 마음, 그 생각이 나의 능력을 한정짓게 하는 겁니다. 1094erg라는 그 어마 어마한 힘으로 말이지요.

그 내 생각이라는 파장이 주는 어마 어마한 힘으로 한편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으나 한편으로는 ‘나는 가난해’ 라는 그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겁니다. 그 엄청난 에너지로 자기의 힘을 꽃 피우는데 쓰지 않고 자기의 힘을 스스로 한정짓는데 쓰고 있다 이 말입니다. 내 스스로 내 능력을 한정짓고 있으니까 그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나의 능력을 제한하는데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잠재된 무한한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활짝 꽃 피우는데 쓰지 못하고.

‘부자가 되길 부처님께 비나이다’ 하고 아무리 빌어 봐야 그 비는 행위는 거지 마음을 연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자가 되고자 비는 마음은 사실 ‘나는 지금 가난합니다’ 라는 마음에 힘을 주는, 에너지를 주는 일이 됩니다. 지금 가난하니까 앞으로 올 미래에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 아니겠어요. 그러니 비는 마음은 사실 구걸하는 마음이고, 그렇기에 비는 마음은 비는 방향과는 달리 거꾸로 결과를 맺게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비는 기도를 하지 말고, 감사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지금 이대로 감사합니다’ 하는 거니까 더 이상 바랄게 없어요, 그냥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감사하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파장을 연습하는거냐 하면 부유함의 파장, 부자의 파장, 풍요로움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부자되게 해 주세요’는 구걸의 파장, 가난의 파장을 연습하는거고, 오히려 ‘나는 지금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습니다’하는 파장을 엄청난 에너지 주파수로 이 우주를 향해 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이 연봉에 대해 감사합니다’하는 것은 부유함과 풍요로움과 부자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이겠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허망한 일들을 벌여오고 있는지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마음 써야 하는지, 마음 쓰는 거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렇게 세상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중생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겁니다. 무명중생이라고 하는거예요. 똑똑하면 뭐 합니까. 지식만 늘였지 지혜는 바닥을 치는 헛똑똑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또 다른 예를 들어 드릴까요? 병이 난 사람이 어디 한 가지 몸이 안 좋단 말입니다. 심장이 안 좋아요. 그런 사람이 마음 속으로 ‘아, 이 심장을 어떡하지’ ‘심장이 더 나빠지면 어떡하지’ 하고 항상 고민한단 말입니다. 항상 근심하고 걱정하고 뭘 먹어도 이게 심장에 좋은가 안 좋은가 따지고, 계속 심장이 안 좋다라는 것에 마음이 붙잡혀 있게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는 ‘빨리 나아야 하는데’ ‘빨리 나아야 하는데’ 하고 바라겠지만 사실은 이 마음이 무엇을 연습시키냐 하면 ‘심장이 안 좋다’는 에너지, ‘심장이 나쁘다’는 주파수의 파장과 자꾸만 공명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장은 더 안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심장에 붙박혀 있는 그 노이로제 같은 마음에서 놓여나고, 그 마음을 비워버리면 되는데 오히려 더 나쁘게 마음을 연습한단 말입니다. 비우지 못하겠고 놓아버리지 못하겠다면 오히려 반대로 이 생각, 이 의업, 이 의지라는 것을 역이용하면 됩니다. 심장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혹은 ‘심장이 건강해지게 되어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감사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모든 밝고 건강하며 청정한 모든 파장과 공명하는 최고의 진언이기 때문입니다.

뚱뚱한 사람이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 하는 그 한 생각에 집착하고 ‘먹지 말아야 하는데’하는 그 한 생각에 붙잡히게 되면 그 생각 때문에 안 먹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각에 집착이 되어 음식에 대한 집착이 더 커지고 더 꾸역꾸역 먹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이런식으로 우리는 엄청난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힘을 가지고 거꾸로 쓰고 있는 겁니다.

 

성공과 부자, 그 너머의 이야기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막바지 결론에 다달았습니다. 이렇게 나의 생각, 말, 행동이라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이 우주를 창조해 내고 내 세상을 창조해 낸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요즘에 씨크릿 이란 책이 아주 유명하고요, 부자가 되는 길,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책들이 우우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 많은 것 들이 이야기하고 있는게 지금 제가 말씀드린 여기까지 입니다.

생각의 힘으로 마음의 힘으로 부자가 되라, 마음에 부자를 그리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의 힘은 엄청나기 때문에 마음의 힘으로 성공하려면 성공 할 수 있다, 그것을 마음에 그리면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하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도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힘을 부자가 되는 쪽 성공하는 쪽으로 자꾸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요즘 나온 수많은 책들의 한결같은 결론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그 마음 에너지를 써서 부자가 됐어요. 성공했어요. 큰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이 됐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 행복도 거기서 끝날까요? 부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곧 나의 행복을 의미하겠습니까?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샀다, 그것이 곧 나에게 완전한 만족을 가져다 주고,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 주고, 아주 자유로운 깨달음과 지혜를 가져다 줄까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해 왔습니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부자가 다가 아니고, 성공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이 소유하면 더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 마음은 더 혼탁해 집니다. 혼탁해 지기 쉽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할 수록 우리는 더 삿된 마음으로 치닫기 쉽습니다. 욕심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괴물과도 같은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장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집에 별 문제가 없잖아요. 서로 단결해서 어떻게 하면 밥이라도 한 끼 더 먹고 내 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내 동생 더 먹이려고 애쓴다 이말입니다. 가족 전체가 아내는 남편 걱정 하고 남편은 아내 걱정 하면서 산다 말이지요.

전에 이런 말씀 드렸잖습니까. 아프리카 어디에 네 살 정도 된 아기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더란 말입니다. 사진기사가 가서 사진을 찍고는 미안했는지 초코파이 같은 먹을 것을 하나 던져 주었더니 그걸 들고는 그 힘없는 몸으로 걸어가서는 허름한 집안에 있는 다 죽어 있는 한 살 정도 아기를, 죽어 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아기를 끌어 안고서는 그 먹을 것을 자기가 먹지 않고 아기에게 물려주고 자기 동생이 이미 죽은 동생이지만 동생이 먹지 않으니까 턱을 잡아 가지고는 막 억지로 먹는 시늉을 해 주더라고 했습니다. 그 사진 한 장을 찍고 그 사진작가는 무슨 상을 탔다고 해요.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되면서도 네 살짜리 아기가 한 살된 동생을 위해서 자기는 죽더라고 그것을 나눠 주거든요. 없을 때 이런 어떤 본질적인 사랑, 자비, 인간애 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지요. 평범한 행복한 집안에서 로또가 당첨됨과 동시에 집안이 파탄나고, 남편이 아내와 싸우고 이혼하고, 부모가 자살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진단 말입니다. 이뿐인가요?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세상이 어디 상상 속에서라도 가능한 이야기겠어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은 상상 밖의 이야기이고, 도저히 생각으로조차 해 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높은 권력이나 많은 경제력 앞에서는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아니 그런 권력 암투, 왕권을 둘러싼 죽고 죽이는 일들 같은 것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드라마 같은데서도 묘사되고 있잖아요.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권력의 암투가 일어나지 않지요. 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부모형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네팔에 갔을 때 보니까 왕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한 사람이 형제 자매, 부모, 친척들을 다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이게 다 많이 가진 자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부자나 성공이나 권력 같은 것을 많이 소유하는, 그런 소유만이 전부가 아니라는게 분명해 졌습니다. 아니 큰 소유는 오히려 정신을 타락시키고, 도저히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근원적인 실천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일까요? 어떤 것이 분명한 것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사실은 그 성공 이면에 실패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틀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법이 진리이지만, 불법이라는 진리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집착해서 그것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적으로 옳다라는 것은 전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너무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 증오를 항상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서 다른 남자에게 갔을 때 더 큰 괴로움과 좌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 성공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옳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극단적인 이면을 항상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근원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 의업, 생각이 만들어 낸 모든 작용들은 옳고 그르거나 맞고 틀리거나 성공과 실패, 좋다 나쁘다 하는 그 이면에 극단적인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근원적이지 못한 양 극단의 분별심, 차별심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창조해 낸 현실에서는 늘 긍정과 부정이 함께 공존합니다. 즐거운 일 끝에는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고, 풍요로움의 바탕에는 가난의 그늘이 존재합니다. 과도한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 대신에 과도한 가난 속에서 기아와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는 한 사람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맛보아야 합니다. 문명의 이기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주는 편리함 이면에는 기상이변이나 환경오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은 발전하고 아파트가 만들어지고 에어콘이 만들어지고 이 편리한 것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 좋은거 아닙니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 근원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도시화, 산업화 이런 것들이 이 지구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인위적인 어떤 에너지, 힘 그것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가능성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이 길을 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지구가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언제 지구가 기상이변으로서 나를 몰아칠지 모르는 두려움도 함께 껴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근원으로 가는 것이냐, 본질적인 삶, 근원적인 삶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냐, 그건 바로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하는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두 가지 양 극단의 선택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그 습관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2,500여 년 전 붓다는 중도(中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중도의 삶에서는 어느 것도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없고, 네 편과 내 편으로의 나뉨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도 없습니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도와주며 사랑해주는 관계로써 상의상관적으로 존재합니다. 연기와 자비의 정신이 고스란히 인간 존재의 삶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꿀벌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그런 상의상관적인 불이(不二)의 지혜만이 우리 모두를 한 가족으로, 한 생명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동체대비의 사랑, 둘이 아닌 자비의 실천으로 생활방식을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런 삶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분별심과 차별심을 놓아버릴 수 있을까요? 그게 바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라는 존재가 일으켜 내는 생각들, 움직임들, 행동들, 느낌들, 이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이 되어 나를 지켜보십시오. 지켜봄은 그 무엇도 둘로 나누지 않습니다. 지켜봄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도 않고, 어느 한 쪽을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觀)수행, 지관(止觀), 비우고 관찰하는 그 지관의 수행, 알아차림의 수행, 깨어있음의 수행, 그 수행이야말로 나라는 이기적인 마음,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근원에 있는 말하자면 불성, 자성불,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의 자리인 우주의 근원적인 힘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근원으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좋고 나쁜 쪽 가운데 좋은 쪽을 선택해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무분별의 근원적인 치유의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나를 이끌고 갑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생각으로 판단 했을 때는 언뜻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갔을 때는 항상 완전한 근원적인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면에 행복 이면에 불행, 사랑 이면에 증오 이런 것을 내포하지 않는, 다시말해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어떤 인연이 오더라도, 내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항상 여여(如如)할 수 있고, 항상 행복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중심이 잡힌 그런 어떤 힘으로 나를 이끌고 가고 내 삶을 이끌고 가고 이 지구를, 이 우주를, 인류를 이끌고 가는 힘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래면목이 나를 이끌고 가려 하는 삶,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 보겠다’ 라는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내 맡기는 삶 그리고 다만 지켜보는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다만 지켜보는 자로 남게 되었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삶의 모습들을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서 아주 새롭고 흥미진진하며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한 발짝 떨어진 여여한 마음으로 모든 일이 내 삶에 내 존재위에 삶이 그저 파도쳐 흘러갔다 흘러올 수 있도록 내버려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상으로 삶에 개입하지 않게 됩니다.

질병과 괴로움 속에 깊이 빠져서 그것에서 울고 웃게 하지 않게 되고 항상 흥미롭게 새롭게 아주 조화롭게 삶을 충분히 누릴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삶을 아주 흥겹게 완전히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리면서 아주 충분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랬을때 아주 자연스러운 껄끄럽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은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 내 삶 속에 저절로 등장을 하게 되면서 우리 삶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과 번뇌와 괴로움은 놓여지게 되는 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것이 어찌보면 우리 삶의 근원 그리고 이 현상세계의 본질과 근원세계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부분이예요. 이 부분을 조금 더 사유를 깊이 해 보시고 수행을 통해서 이 자리가 과연 어떤 자리인가를 스스로 직접 느끼고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법상
그만 기다리세요.
우리가 평생토록 해 왔던
기다림이 지겹지도 않으신가요?
이제 그만 기다림에 대한 환상을 놓아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기다리던 일이 완성되면 또 다른 것을 기다리고
그것이 완성되면 또 다른 기다림의 대상을 만들어
우리의 기다림은 끝이 없이 계속됩니다.

초등학생은 중학생이 되길 기다리고
고등학생은 대학생이 되길 기다리며,
대학생은 좋은 취직 자리를 기다리고,
학생은 좋은 성적 좋은 학교를 기다리며,
직장인은 좀 더 인정 받기를 기다리고 진급하기를 기다리며,
수행자는 깨닫기를 기다립니다.

한 가지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내 앞에 나타날 사랑을 기다리고,
빨리 졸업하기를 기다리며,
빨리 큰 돈을 벌기를, 큰 집, 좋은 차 사기를 기다리고,
더 나은 직장을, 지위를, 권력을 기다립니다.

출근하고 나면 빨리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평일에는 빨리 휴일이 오길 기다리고,
다음 휴가철을 기다리고,
수업시간에 쉬는 시간을 기다리고,
몇일 후에 있을 소풍이나 만남을 기다립니다.

뭔가 재미난 일을 기다리고,
가을엔 첫눈 오는 날을 기다리고,
겨울엔 만물의 태동을 기다리며,
봄엔 여름 휴가 때를
여름엔 가을 단풍구경 갈 때를 기다립니다.
물론 단풍이 떨어질 때 또다시 첫 눈을 기다리겠지요.

성공하기를, 부자 되기를, 행복하기를
깨달음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그렇게 끊임없이 평생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우리는 결국 한번도 기다리지도 않았던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달려가면서
한 순간도 기다림을 포기했던 적이 없었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온 것이라고는 한번도 기다리지 않았던
버림이고 죽음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삶 속에서 기다림의 결과로 얻어 낸
그 어떤 가치있는 것이라도
결국에 죽음 앞에서는 모두 다 무의미한 것일 뿐입니다.
모두 다 버리고 가야할 것들 뿐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 유일하게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살아오면서 우리가 별로 바라지 않았던
‘현재의 깨어있는 힘(지혜)’과 ‘사랑과 베품(자비)’입니다.

평생을 다음 순간만 바라고 살았지만,
더 낳은 순간만을 바라고 살았지만
죽고 나서 우리가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이
‘기다림의 결과’가 아닌 ‘기다림 없는 순간에 깨어있는 힘’이라는 것은
참으로 우리의 기다림을 허탈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다림’이 아닌
‘기다림의 놓음’입니다.
기다리지 않았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현존할 수 있습니다.
기다림을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기다림이란
지금 이 순간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이 아닌 다음 순간을 원한다는 말이고,
현재가 아닌 미래를 원한다는 말이며,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원한다는 말이고,
‘지금의 나 처럼’이 아닌 ‘다른 사람처럼’되길 원한다는 말이며,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닌 갖지 못한 것을 원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기대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그 갈등이 바로 괴로움의 실체로 다가옵니다.
기다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고되고 괴로울 뿐입니다.

이런 우리의 기다림은 습관적입니다.
항상 무엇인가를 기다리지 않으면 견디질 못합니다.
그 기다림을 좋은 말로 ‘희망’이라고도 하고 꿈이라도도 하겠지요.
또 ‘목적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그런 기다림을 당연하게 여기다 보니
이런 기다림을 ‘희망’이니, ‘꿈’이니, ‘목적의식’이니 하고
좋은 말처럼 꾸며 놓았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기다림은 우릴 피곤하게 만들 뿐입니다.
여전히 기다림은 온전한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을 방해하고,
삶의 근원적인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할 뿐입니다.

그런 습관적인 기다림에
이젠 지칠 때도 되지 않았는가요?
그동안 우리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까.
아니 어쩌면 우리 삶 전체를
이런 쓸모없는 기다림에 헛되이 소모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기다림이란 낭비이고 불필요한 것입니다.
공연히 내적인 에너지를 소모할 뿐입니다.
기다릴 시간에
저지르는 편이 더 현명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편이 더 궁극적입니다.

현실적인 돈, 명예, 권력, 학벌, 지위, 성공 등은
기다림을 통해 얻게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행복은
결코 기다림을 통해 얻을 수 없습니다.

현실적인 돈, 명예, 권력, 학벌, 성공이라는 것이
다 궁극적으로 행복을 위한 방편이 아니던가요?
그런 껍데기를 위한 기다림에 휘둘려서는 안됩니다.
바로 궁극적인 행복 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행복은 결코 기다린다고 오지 않습니다.
행복은 결코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돈, 명예, 권력, 지위, 학벌, 성공 속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행복은
다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음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완전한 자족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항상 행복은 이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늘 그렇게 있을 뿐이지요.
기다리는 마음은 이 자리에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 자리를 봐야 하는데
다른 자리를 찾고 기다리고 있으니 어떻게 볼 수 있겠어요.

기다림의 결과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 기다림을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그 때 언제나 있어왔던 행복을 볼 수 있을 뿐.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내가 누구이든 간에,
내가 무슨 일에 종사하든 간에,
나의 직위, 직장, 학벌, 재산, 세속적인 성공에 상관없이
다만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인정하며 사랑하고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그냥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이면 되지
한참을 기다린 후에나 얻을 수 있는
‘다른 그 무엇’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내 모습에,
내가 가지고 있는 만큼의 소유물에,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음에
감사하고 존중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또 다른 것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린 이 순간에 깨어있는 법을 터득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분명 머지 않아
맑은 행복과 평화로움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기다림을 놓아버리세요.
다음 순간을 기다리지 마시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이
기다림을 이룬 순간이 되도록 하세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 순간에 서 있으면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다림을 놓아버리고
바로 이 자리에 서 있으시길...

Posted by 법상




[봉화 축서사]

24.
누구든 마음을 모아 깨어있음을 실천하고
그 행동이 순수하고 진중하며
자신을 잘 다스려 법다운 생활을 하면
그의 이름은 빛나고 축복과 존경은 늘어갈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예와 권력과 지위를 탐하고, 자신에게 축복과 존경이 늘어가기를 원하고 있는가. 우린 누구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를 원하고, 축복스런 일들이 내게 많이 일어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노력하고 애쓴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노력하고 애를 쓰는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경받기 위해 우리는 더 나를 드러내야 하고, 더 돈을 많이 벌어야 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만한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높은 지위나 권력, 그리고 부와 명성은 그대로 우리를 실질적으로 높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준다고 착각하고 있다. 높은 자리가 곧 높은 인격과 높은 존경과 높은 축복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완전히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어떤 높은 자리가 그 사람을 높게 만드는 것이 아니며, 어떤 명성이 그 사람을 드높이는 것이 아니고, 많은 부귀영화가 그 사람을 축복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재산과 명성과 부와 권력을 쥐게 되면 그로인해 우리 마음은 더 많은 욕심과 우월감과 자기가 잘났다는 아상(我相)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그리고 그런 아상과 아집은 결국 내면의 정신적인 타락을 가져온다.

핵심은 외부적인 것에 있지 않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오름으로써 나 자신도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더 많은 욕구를 채우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그것이 나라는 존재 자체를 존귀하게 드높여 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겉모습은 그럴싸해 보인다. 남들도 나를 칭찬하며, 나에게 잘 보이고자 애를 쓰기도 한다. 점점 더 나라는 존재는 타인들과는 다른 월등한 높은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판단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진짜 자신의 본 모습과 겉에 드러난 모습 사이의 거리감이 생겨나고, 그 간격만큼 정신은 중심을 못 잡은 채 이리저리 휘둘리게 된다.

참된 존경과 축복은 그런 껍데기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존경 받을만한 자리에 올라가야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존경 받을만한 행동을 함으로써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존경은 그 행동에서 나오지,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축복 또한 축복받을 만한 위치에 올라갔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생활이 축복받을 만 할 때 따라온다. ]

누구든 그 행동이 순수하고 진중하며 자신을 잘 다스려 법다운 생활을 하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을만하다. 누구든 마음을 모아 깨어있음을 실천함으로써 매 순간순간의 행동이 법다워 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된 삶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동과 삶에 있지 어떤 자리나 위치나 상황에 있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에 의해 신하가 되고, 행위에 의해 왕이 된다. 현자는 이와 같이 행위를 있는 그대로 본다. 세상은 행위에 의해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에 의해서 존재한다. 수레바퀴가 축에 매여 있듯 세상 모든 것은 행위에 매여 있다.’고 하심으로써, 우리 삶에서 나를 규정짓는 것은 그 ‘자리’나 ‘지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라고 하셨다.

어떤 행위를 통해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펼쳐진다. 도둑질하는 행위와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은 곧 우리를 도둑으로 만들고, 수행자다운 행위와 생각은 곧 우리를 거룩한 수행자로 만든다. 몸과 말과 생각으로 한 행위야말로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인간으로써 행할 수 있는 가장 성스럽고 법다운 행위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깨어있는 행위다. 순간순간 몸과 마음을 관찰하고, 몸과 말과 뜻의 삼업이 어떤 행위를 이어가는지를 온전히 관찰하는 것만이 우리의 행을 축복되게 만든다. 깨어있는 행위에는 이처럼 축복이 깃들며, 세상 사람들의 존경이 뒤따른다. 마음을 모아 깨어있는 이의 행동은 가볍지 않아 진중하고, 이해타산과 높고 낮은 차별을 따지지 않아 순수하다. 깨어있는 마음 관찰로써 매 순간 자신을 잘 다스리는 법다운 생활이야말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성스러운 행위요 축복의 행위다. 우리의 평범한 행위가 비범해질 수 있고, 밥 한 끼 먹는 행위조차도 성스러워질 수 있고, 일상적인 말 한마디에도 축복과 진중함이 담기며, 삶 자체가 법다워질 수 있는 그 실천수행의 정점에 ‘깨어있는 마음관찰’이 있다.


부처님 당시 한번은 라자가하에 유행병이 퍼졌다. 한 은행가의 주인도 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하자 아들인 꿈바고사까에게 숨겨둔 모든 황금과 보석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고 아들을 먼 친척집으로 대피시켰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아들이 돌아와 황금과 보석을 찾았지만 갑자기 이것을 꺼내어 쓰면 사람들에게 의심도 받고 절도 혐의를 받을 것을 염려하여 우선 평범한 일꾼이 되어 성실히 일하기 시작했다. 물론 황금과 보석을 가져다가 자유롭게 쓰면서 풍족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그런 삶을 포기하고 평범하고 성실한 일꾼으로 살았으며,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깨어있는 삶을 살았다. 또한 그는 지혜로웠으며 순수했고, 행동에 있어서도 진중하여 자신을 잘 다스려 나갔다.

어느 날 평소처럼 꿈바고사까는 큰 소리로 일꾼들을 깨워 일을 나가려고 하는데, 그 소리를 빔비사라왕이 들었다. 빔비사라왕은 목소리를 듣고 그 주인공의 운명을 알아내는 재능이 있었는데, 그 목소리는 분명 대단한 재산가여야 하는데, 저런 일꾼이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 그의 신분을 조사케 한 결과 모든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결국 꿈바고사까도 모든 것을 고백했다. 이에 왕은 지혜가 빛나며 생각이 깊고 생활 속에서 늘 깨어있음을 실천하는 주의력에 감탄하여 그의 딸을 꿈바고사까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하고 부처님께 데리고 갔다.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을 설하시면서, 꿈바고사까는 많은 재산과 황금이 있었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고, 성실하고도 깨어있는 삶을 통해 지혜로운 삶을 살고 있음을 설하시면서, 그 황금과 보석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큰 집을 짓거나, 그 재산을 뽐내고 누리며 사는 삶이 축복되고 존경 받을 만한 것이 아니라 성실하고 법다우며 지혜로운 깨어있음의 삶이야말로 가장 존경받을 만하고 축복스런 삶이라고 설하셨다.

불교는 부유한 재산가 자체를 부정하는 종교는 아니다. 모두가 가난을 위해 재산을 내다 버릴 필요는 없다. 또한 명예와 권력을 죄다 버리고 은둔해 살기만을 바라는 종교도 아니다. 불교는 부자와 가난, 높고 낮음, 귀함과 천함 이 모든 두 가지 분별을 다 여의는 가르침이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부처님의 재가 재자들 가운데는 거지도 있었고, 불가촉천민도 있었으며, 왕도 있고, 재산가들도 많았다. 그들 모두에게 무소유를 주장함으로써 가진 재산과 권력을 다 포기하라고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겉에 드러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요, 마음이다.

참된 무소유는 물질적인 소유를 다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 얽매이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부자도 무소유를 실천할 수 있지만, 아무리 가난해서 소유한 것이 없는 사람도 무소유를 실천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가난한 자가 소유하지 못함을 부러워하고, 자신의 없음을 비통해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소유욕에 휘둘린 사람이다. 부유한 자가 자신의 재산에 집착하지 않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며 소유한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소유하면서도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꿈바고사까 처럼 재산을 많이 소유했더라도 그것에 의지해 자신을 재산의 노예로 만들지 않으며, 재산이 없는 것처럼 하루 하루를 성실함으로 살고, 모든 행위에 있어 깨어있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면 이런 사람에게는 우주의 축복과 사람들의 존경이 뒤따르는 것이다. 부자이되 아름다운 부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부자, 부자에 집착하지 않는 부자, 부자이지만 그 삶이 간소하고 청빈을 실천하는 부자, 이 부유함이 내것이 아니라 법계에서 잠시 빌려 온 것임을 알고 인연 따라 베풀 줄 아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부유한 재산을 내 것으로 쌓아두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우주적인 생명력이 정체되고 막히기 때문에 더 이상 재산이 쌓일 수가 없다. 그러나 나에게로 들어 온 재산을 꽉 붙잡아 정체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이웃에게로 회향하고 소통시키는 사람에게 이 우주의 모든 풍요로움은 찾아든다. 그런 사람에게 이 우주는 풍요로움을 세상 곳곳으로 균형 있게 나누어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 계속해서 풍요로운 것들을 보내주는 것이다.

나 자신을 돌이켜 보라. 나는 과연 세상의 모든 풍요로움을 소통시키고 나누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것’만을 소유욕으로 가둠으로써 우주적인 에너지를 정체시키고 있는가. 이 한 생을 살면서 부처님을 대신해, 신을 대신해 우주법계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이기와 아집으로 온통 꽉 막힌 소인배로 살 것인가.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