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정심행선분
마음 집중의 수행으로 보리를 얻으라


淨心行善分 第二十三
復次 須菩提 是法平等 無有高下 是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卽非善法 是名善法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란 여래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한 법일 뿐이다.”

정심행선이란 깨끗한 마음이란 선을 행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의미다. 그러나 앞서 6분 정신희유분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선법이란 악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선한 법이 아니라 ‘지혜로운 주의’ 즉 ‘지혜로운 마음 집중’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심이란 깨끗한 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뜻하고 있다. 무상정등정각의 완전한 깨달음이야말로 깨끗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심행선은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마음 집중의 수행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이 더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이다. 그렇기에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이라 하는 것이다. 진리의 법에는 그 어떤 차별도 발 붙일 틈이 없다. 높고 낮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선하고 악하다거나, 크고 작다거나, 잘나고 못났다거나, 나고 죽는다거나, 나아가 어리석고 지혜롭다거나, 중생과 부처라거나, 생사와 열반이라는 개념조차 방편으로 이름 붙여진 개념일 뿐 진실한 법의 바탕에서는 그 모든 차별이 대 평등의 용광로 속에 녹아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을 보라. 모든 것이 차별과 나뉨이 세상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높고 낮은 구분을 두어 차별하고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수능시험을 보더라도 전국의 모든 수험생을 일등부터 꼴지까지 등수로써 높낮이를 매겨 차별하고, 기업도 대학들도 무슨 무슨 평가의 틀에 따라 등수를 매겨 세계에서 몇 위의 기업인지, 대학인지를 가늠하곤 한다. 그것이 이 사회의 차별된 어리석은 현실이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들 모두가 직장에서 서열에 의해 등수가 매겨지고, 점수화되어 관리되고, 나아가 먹거리들 또한 어떤 틀에 맞춰 몇 등급인지가 정해진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수많은 잣대와 기준을 정해놓고 그 틀에 따라 높고 낮은 차별을 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게 높고 낮은 틀을 정해두고 그 결정에 따라 사람들의 등수가 정해진다. 또 그 등수에 따라 사람들 서로간에 차별이 일어나고 불화와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그런 높고 낮은 차별이 이 사회를 좌지우지 흔들고 있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서로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투쟁하고 싸우고 심지어 국가간 인종간에는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제 이 사회는 사랑과 자비의 장이 아닌 무한 경쟁과 투쟁의 장이 되어버렸다.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면 곳 낮은 계층으로 떨어지고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야만 보다 높은 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회의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크기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 우위를 점할 것인가에 달려있고, 반대로 괴로움의 크기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 열등에 놓여있는가에 있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 상대적 박탈감이란 무엇인가. 바로 높고 낮음을 나누는 차별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어리석음에 기인하는 이 차별이 모든 세상의 괴로움을 몰고 왔고, 세상의 모든 사랑과 자비를 빼앗아갔다.

그러나 여기 부처님 말씀을 들어보자. 법이라는 것, 진리라는 것은 그렇듯 높고 낮음을 차별하는 거기에 있지 않고 대평등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높고 낮음을 차별하지 않는 만인, 만생명 대평등의 가르침 속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최상의 깨달음은 나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차별 뿐 아니라 사람과 동식물, 사람과 자연간의 높고 낮은 차별의 마음이 지금 이 세상을 극단적인 환경 악화로 인한 멸망 위기까지 몰고 왔다. 신과 인간도 차별되어선 안 되고, 인간과 동식물도, 인간과 자연도 차별되어선 안 된다.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이 세상은 완전한 하나의 생명이요, 온전한 법이고 불이고 신으로써 대평등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 평등의 가르침,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만이 이 세상을 완전한 평화의 땅으로 만들 수 있고, 우리를 완전한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데려가 줄 수 있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란 여래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한 법일 뿐이다.”

높고 낮은 차별이 없어 대 평등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온 존재가 차별이 생기는 것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그것은 바로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 ‘나’라는 상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상을 내세우기 때문에 너와의 차별이 생겨난다. 나와 너의 차별이 생겨남으로써 나아가 우리나라와 남의나라, 인간과 자연, 중생과 부처 등의 모든 부가적인 차별들이 연이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모든 차별의 원인은 바로 아상에 있다. 아상을 타파하면 나와 너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높고 낮은 차별도 생길 수 없다. 내가 있어야 나를 더 높이고 상대를 낮추고 싶으며, 내가 높아졌을 때 오는 기쁨도 누릴 수가 있는 것인데, 나라는 아상이 소멸되고 나면 내가 남보다 더 높아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와 남이란 차별이 없다면, 그래서 나와 남이 서로 둘이 아닌 한생명이란 자각이 있다면 나와 남 사이를 높고 낮게 나눌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높고 낮은 차별 없이 일체만유, 만생명이 대평등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일체의 선법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는 구마라집의 한역의 의미로 보자면 착한 법을 닦는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지만 이를 착한 법으로 본다면 이 또한 악한 법에 상대되고 차별되는 선한 법이기에 이 또한 높고 낮은 차별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산스크리트 원전의 본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법의 산스크리트 원전의 본래 의미는 ‘지혜로운 마음 주의집중의 가르침’ 즉 ‘마음 집중’의 수행을 말한다고 했다. 그러니 여기서 이 문장을 해석해 보면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이 일체의 마음 집중 수행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이해해 보면, 이 법 즉 진리의 가르침은 높고 낮음도 없이 대 평등이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높고 낮음 없는 대 평등의 가르침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타파에서 온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일체 상의 타파는 마음 집중의 수행을 통해 온다. 그러니 다시 돌려 말하면, 높고 낮음 없는 대평등의 진리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마음집중의 수행을 통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일목요연한 가르침이 바로 금강경이다. 왜 불교의 가르침이 무차별이요 무분별인지, 무아이며 무아상인지, 왜 대평등인지, 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해야 하는지, 그 실천방법이 무엇인지, 그 모든 것을 분명하게 정리해 보여주는 분이 바로 정심행선분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다시 부처님은 자비로운 우려의 말씀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났더니 ‘아! 그러면 마음 집중의 수행만 하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마음집중’의 수행에 집착하고 있을 중생들을 위해 선법 즉 마음집중의 수행 또한 그 이름이 마음집중의 수행일 뿐 거기에 집착할 어떤 고정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말은 마음집중의 수행, 구체적으로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이라는 수행을 실체화하거나, 절대화하여 그 어떤 정해진 ‘수행법’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도 이름 뿐인 것이지 거기에도 빠지면 안 된다. 요즘 위빠사나니 관수행이니 정념, 사띠, 알아차림, 비추어 봄, 깨어있음 등 마음 집중의 수행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칫 그 말에도 집착하여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짚어주고 있는 부분이다. 위빠사나라는 수행법을 공부하는 수행자들과 간화선을 공부하는 수행자 혹은 염불이나 진언, 독경이나 절 수행 등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는 수행자들이 요즘도 많이 있는데 때때로 어떤 수행법이 더 우수한가를 놓고 왈가왈부하면서 자신의 수행법이 더 우수함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된다. 이런 다툼도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대평등의 법을 거스르는, 높고 낮은 차별심에서 나왔으며, 나아가 어떤 한 수행법에 집착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런 우려를 위해 부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해 금강경에서 말하고 계신 것이다. 선법도 선법이 아니니 이름이 선법일 따름이다. 즉 마음집중이란 수행도 마음집중 수행이 아니니 다만 이름이 마음집중의 수행일 뿐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부처님 열반 후 2천 5백 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금강경의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이처럼 분명하고 자비롭다.

높고 낮은 일체의 차별심을 거두어 대평등으로 향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어찌 수행법의 높고 낮음을 논할 것인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모든 수행법은 다만 방편에 있어 서로 다를 뿐이지 그 본질은 높고 낮음이 없는 대평등의 마음 집중 수행법에 다름 아니다. 즉 위빠사나도 간화선도 염불도 참선도 진언도 독경도 절 수행도 그 모든 수행도 모두 그 중심은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에 있다. 염불하는 수행자가 마음을 염불에 모아 주의집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과 번뇌를 일으킨다면 그것이 어찌 염불수행일 수 있겠으며, 절 수행자가 몸과 마음에 마음을 주의 집중하지 않고 몸만 일어났다 앉았다 한다면 그것이 어찌 수행이 될 수 있겠는가. 절을 하면서 마음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 수행이 아니라 단순한 다리운동에 불과할 것이고, 염불하면서 마음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입 운동이고 소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간화선도 마찬가지다. 화두를 의심하며 그 의심에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분별하고 따지거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면 어찌 그 사람을 화두 수행자라 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모든 수행법의 본질이 바로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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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외로움과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철저한 고독과 마주한다는 것은,

한 편 바깥 세상에 대한
모든 기대와 관심을 다 놓아버리고
혼자서 걷는다는 말도 되지만,

또 한 편 그 내적인 의미는
내적인 고독, 내적인 침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는
수많은 생각과 기억, 고정관념, 편견, 판단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것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혼자서 가만히 있는다고
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예요.
다 혼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머릿 속에서 온갖 생각과 기억들이 춤을 춘다면
그 사람은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과거로부터 온 생각과 기억 판단들과
함께 있는 것이지요.

혼자 있는다는 것은,
내면적으로 완전히 침묵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적으로 침묵한다는 말은
과거로부터 배워왔거나 익혀왔거나 들어왔던
수많은 기억, 판단, 편견, 이미지, 사상, 고정관념, 생각들을
온전히 비워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생각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이미 과거의 일들입니다.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수많은 복잡한 것들에
얽매여 있다면
결코 침묵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말 없는 것이 침묵이 아니예요.
내적인 침묵이 참된 침묵입니다.

과거의 기억을 들추어 내지 말고,
그 어떤 가르침이나 사상, 이데올로기도 따르지 말고,
누군가에게 혹은 어디에선가 배워온 것을 쫒지 말고,
지금 이 순간
고요 속의 즉각적인 통찰만을 따르면 됩니다.
온전히 내가 되라는 말입니다.

지금의 나를 돌이켜 보면,
만들어진 나, 교육되어진 나, 훈습되어진 나일 뿐
지금 이대로의 텅 빈 나가 되지 못합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까지 가져오지 마세요.
그랬을 때 우리는 온전히 내가 될 수 있습니다.
내적으로 완전히 침묵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배운 것, 익혀온 것을 바탕으로
지금을 판단하지 말고
아무런 판단이나 기억도 일으키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완전한 내적 침묵 속을
거닐음도 없이 거닐고 있음입니다.
그것만이
내 안의 온갖 기억들을 비워낼 수 있는 길입니다.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지 말고,
깨달음을 찾아 나서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찾는다는 것은
이미 또다른 색안경이며 기억, 앎을 만드는 것일 뿐이고,
또다시 '교육되어진 나'를 만드는 일이 될 뿐입니다.

내 안에는 너무 많은 생각, 사상, 기억, 앎들이 있어요.
그로인해 우리는 침묵하지 못합니다.
그로인해 속 뜰의 나 자신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어요.

참나를 찾기 위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또다른 스승을 찾아 나서고,
또다른 성전을 찾아 나선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또다른 사상을 배우고자 하는 것일 뿐이고,
내 안에 또다른 관념을 주입시키는 것밖에 되지 못합니다.

불교는 쌓는 공부가 아니라 비우는 공부입니다.
다만 방편으로 비우기 위해 쌓는 것을 가르칠 뿐이예요.
그동안 제가 한 말이
'비우기 위해 쌓는 것'을 말했다면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비움'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온전한 비움을 위해
내적인 완전한 침묵을 위해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애써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아무런 분별도 없이,
아무런 판단도 없이,
과거를 떠올리거나 미래를 계획함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마음 모아 알아차리면 됩니다.

아무런 판단 분별 없이
'알아차림'만이 있을 수 있다면
바로 그 순간
알아차리는 나도 없고 알아차려지는 대상도 없습니다.

관하는 나가 없는 이유는
'나'라는 것은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이고,
그 과거의 기억으로 걸러진 판단 분별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관할 때 '관하는 나'도 없고, '관하여지는 대상'도 없습니다.

다른 것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생각이며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하되,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그 어떤 분별도 일으키지 말고,
다만 관하면서 그것과 하나되어 흐르기만 하세요.

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궁극의 수행이며,
수행 아닌 수행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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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흥국사 연못에 비친 종각]

선택하지 말라.
분별하고 차별하지 말라.
우리의 삶을 가만히 바라보면
끊임없는 선택과 분별의 연속이다.

단 한 순간도 선택을 멈춘 적이 없다.
선택하지 않으면 세상을 살 수 없을 것 같다.
바보가 될 것 같다.
매 순간 순간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선택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란 점은 좀처럼 생각지 못하고 있다.
선택이 우리를 괴롭히며,
선택이 우리를 어리석음으로 몰고간다.

우리는 생각한다.
보다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순간 순간 보다 올바로 선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며,
공부하고 자료를 찾으며 온갖 정보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 모든 배움들은 이제 다 놓아버릴 때가 되었다.
모든 분별과 차별, 그로인한 '선택'은 삶에 대한 근원적인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선택받지 못한다.
한 가지를 옳다고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그른 것이 되어 선택받지 못하고 만다.

그러면 우리 삶은 둘로 나뉜다.
옳고 그른 것, 맞고 틀린 것으로 나뉜다.
그렇게 둘로 나뉘면 반드시 그 중 하나는 좋고 하나는 싫어진다.
보통 사람들은 그 가운데 좋은 것은 선택하여 내 것으로 가지려 하고
싫은 것은 선택하지 않은 채 버려두거나 혐오하고 심지어 파괴시키고 죽이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좋고 싫은 것으로 나누는 것,
그것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본 진리의 관점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혼란과 분열, 시기와 질투 그리고 전쟁을 가져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은 더욱 더 좋고 싫은 것을 나누게 되고,
점점 더 사물을 비뚫어지게 보게 된다.
한 쪽으로 치우친 시선으로 보게 된다.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잃고 만다.

항상 우리의 답변은 둘 중 하나다.
좋거나 싫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그러나 어찌 항상 좋을 수만 있고, 옳을 수만 있는가.
어찌 항상 싫을 수만 있고, 그를 수만 있겠는가.

흔히 '저 사람 어때?' 하고 물으면 그 답변은 늘
'괜찮아' 혹은 '별로야'이거나,
'좋은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거나하는 둘 중 하나의 답변이 돌아오곤 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둘 중 하나의 견해로 규정지어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거나 하는
둘 중 하나로 나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판단 자체가 그 사람에 대한 온전치 못한 편견을 불러올 뿐이다.

'나쁜 사람이야', '성격이 별로야'란 평가를 들었다고 치자.
그러면 분명 우리 마음에는 그 사람에 대한 '나쁘다' '별로다'라는 편견이 자리한다.
그런 치우친 견해로 상대를 판단하게 된다.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나 자비를 베풀었더라도 마음 속에는
'혹시 무언가 또다른 나쁜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된다.
좀처럼 그 편견을 깨기란 쉽지 않다.

모든 나뉨과 판단과 분별 그리고 선택이란 것이 이와 같다.
좋게 보는 것도 본질적이지 않고
나쁘게 보는 것도 본질적이지 못하다.

어떤 한 가지를 좋고 보고 나면 그 모든 것이 좋아진다.
또 한 가지가 나빠지면 모든 것이 싫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면이 다 좋아보이지만,
한 번 미운 사람은 하는 행동이 다 미워보이지 않는가.

좋고 싫은 색안경이 있는 이상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우리 마음은 더욱 더 비뚫어지고 분열 될 뿐이다.

보다 본질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선택하지 않는 일이다.
판단하지 않는 일이다.
선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만 보기만 하라.
판단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그 어떤 해석도, 분별도, 선택도 하지 말라.
그랬을 때 치우침 없는 정견의 시야가 열린다.
좋고 나쁜 양변에 갇히지 않은 무분별의 맑은 견해가 생겨난다.

누가 나에게 욕을 했다고?
시험에 진급에 떨어졌다고?
아이의 성적이 나쁘다고?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원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고?
실패를 했다고?

그것이 뭐 어쨌단 말인가.
그 사실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그 사실, 그 상황에 대해
이런 저런 좋고 나쁜 분별을 갇다 붙인 것일 뿐이다.

대그룹 입사 시험에 떨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 사실은 항상 두 가지를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시험에 떨어져서 그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에 또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의 상황 가운데 우리는 보통 전자를 선택함으로써 괴로운 상황으로 몰고가곤 한다.
그러나 왜 그 선택만을 고집해야 하는가.
그 선택에만 갇혀 있어야 하는가.

보다 창조적이고 주체적이며 긍정적이고 영적인 사람이라면
시험에 떨어졌다는 그 사실에 아무런 판단이나 선택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둘 중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분명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었다.
다만 내 스스로 '반드시 이렇게 되야 한다'고,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고 고집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고집과 집착이 나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다.

어떤 한 가지 상황에 대해 이런 저런 판단과 해석을 가하지 말라.
판단하고 분별하고 차별함으로써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선택하지는 말라.
그 어떤 상황도 전적으로 좋은 것이라거나 전적으로 나쁜 것이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상황을 보고 내 마음이 좋은 것이라 선택하고,
나쁜 것이라 선택했을 뿐인 것이다.

실패가 왜 반드시 나쁜 것이기만 한 것인가.
그로인해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을 수도 있고,
그러한 몇 번의 실패로 인해 내적인 힘이 쌓였을 수도 있으며,
과거의 악업을 소멸시킬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의 때였을 수도 있고,
때때로 실패가 훗날 생각해 보면 더 큰 성공을 위한 정말 필요한 기초작업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어떤 판단도 버리라.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하지 말라.
선택 없이 그 상황 자체를 무분별로 받아들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라.
큰 틀에서 삶을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

그것이 바로 업을 뛰어넘는 길이다.
업에 얽매이지 않고 업에 구속되지 않는 길이다.
악업과 죄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다.

어떤 한 사람을 보고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하지 말라.
'능력있는 사람'이라거나 '능력없는 사람'이라거나 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습관을 버리라.
마찬가지로 어떤 한 상황을 보고 좋다거나 나쁘다고 판단치 말라.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고,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사람도, 상황도 그것 자체는 완전한 무분별이다.
완전 중립이다.
다만 그 사람에 대한, 그 상황에 대한 해석이
모든 문제를 가져올 뿐이다.

모든 분별을 버리라.
모든 차별과 선택을 버리라.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라.

선택없이 분별없이 다만 바라보기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을 대상으로 힘겨운 투쟁을 버리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 온갖 혼란과 분열을 가져오지 않아도 되며,
우리 삶을 괴롭히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다.

선택하지 말고 다만 바라보라.
분별하지 말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Posted by 법상



[문경 김용사]

분별하지 않으며
묵묵히 비추어 보십시요.

우리는 순간 순간
끊임없이 경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의 경계를 마주하는 것이지요.

경계를 마주하게 되면
우리 안에서는 자동적으로, 반사적으로
분별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보통 사람들일 경우
100가지 경계를 만나면 100가지 분별을 일으킵니다.

분별을 일으킬 때는
우선 앞선 나의 기억이나, 경험, 업식들을
하나 하나 샅샅이 뒤진 뒤에
지금 이 경계와 유사한 기억들을 끄집어 내게 되고,
그 색안경 같은 업식의 거울로
지금의 경계를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눈(안근)으로 장미꽃을 보면서(색경)
옛 애인에게 주었던 100송이의 장미꽃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것이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면
장미꽃 또한 기분 좋은 분별을 만들어 낼 것이고,
이후에 헤어진 애인이었다면
서글퍼 진다거나, 그립다거나, 원망스럽다거나
심지어는 격한 감정이 올라오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납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우리 마음 속에서는 충분히 그 사람을 분
별해 버립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어떤 사람인지 그것은 둘째 문제이지
그 사람의 본래 바탕에는 우선 관심이 없습니다.
우선 첫째는 내 안에서 분별부터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업식이 본래부터 텅 비어있다면
어찌 처음 보는 사람을,
처음 보는 풍경을
처음 행하는 일들에 대해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분별할 수도 없고 분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을 짓는 이유는 업 때문인 것이지요.

처음 보는 어떤 스님이 설법을 하십니다.
그 스님은 한 분이고 한 가지 설법을 하셨을 뿐이지만,
듣는 사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분의 스님을 분별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한 분이 아니라 듣는 사람 수 만큼의 스님이 되어 버립니다.

설법을 잘한다, 못한다,
말투는 어떻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쉽고 어렵고, 훌륭하고 그렇지 못하고,
내 안에서 업식이 비춰주는 한 끊임없는 분별이 이어집니다.

스님의 똑같은 말 한마디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해했고,
또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르게 이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업식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참 신기한 것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듣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저도 모르게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TV를 보면서도
연예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꼭 이런 저런 한마디를 거들고 끼어들어야 하고,
사소한 몸짓 하나, 몸매 하나를 보고도
꼭 시비를 걸고 욕을 하고 나무라고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
다.

그냥 가만히 보고 있지를 못하는 거지요.
TV를 보고 있지만무엇인가를 계속해서 궁시렁 궁시렁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은
결코 비추어 보지 못하고
매냥 남의 모습, 남의 말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거지요.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 보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말인 줄 잘 알기만 해도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아무 소득이 없음을 알고 있더라도
경계를 만나면 또다시 금새 궁시렁 거리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업식인 것이지요.

우리는 아무리 작은 경계를 만나더라도
업식에 비추어
입으로 몸으로 아니면 생각으로
끊임없이 분별과 그에 따른 행위를 이어갑니다.

이것이 모든 이들의 병통입니다.
이 분별이 바로 모든 업의 시작이기 때문이지요.
업에 비추어 모든 분별을 일으키고,
또 그 분별은 또다른 업의 씨앗이 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한도 끝도 없이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지독한 윤회의 수레바퀴 아니겠습니까.

수행이란
바로 이 분별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비우고 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새로운 업을 짓지 않도록 하고,
업의 그림자인
안에서 올라오는 경계며,
바깥에서 다가오는 경계를
그 자리에서 녹여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계와 맞닿은 순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분별을
잘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를 보고
싫다거나 좋다는 분별이 일어날 때,
바로 그 분별을 비추어 보고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일을 하면서
답답하다, 버겁다 하는 분별이 일어날 때
그 분별을 즉한 순간 비추어 보고 비워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을 때(눈)
또 무엇을 들었을 때(귀),
무슨 냄새를 맡았을 때(코),
무슨 음식을 먹고 맛을 볼 때(혀),
무슨 대상을 감촉하여 부딪기고 느낄 때(몸),
어떤 생각이 올라올 때(뜻),
그 여섯가지 경계와 맞닫는 순간
분명 분별은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올라오는 분별을 잘 단속해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분별이 올라올 때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대상을 보고 좋게 분별하여 집착과 애욕을 만들어 내고,
싫은 대상을 보고 싫게 분별하여 미움과 증오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선업과 악업의 씨앗이 되며
그로 인해 우리는 또다른 업을 짓게 되어
괴로운 삶을 스스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육근이 육경을 만날 때,
바로 그 때를 놓치지 말고
잘 비추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잘 비추어 보면 그대로 비워집니다.
관조(觀照)가 깊어지면 저절로 방하착이 됩니다.

모든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이란
분별을 여의는 일입니다.
분별을 여의기 위해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마세요.
그냥 담담해 지고 여여해 지세요.
이렇다 저렇다 취사 선택하지 말고,
잘잘못을 따지려 들지 마세요.
한 티끌도 분별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억지로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업이 있는 이상
저절로 분별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분별이 올라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잘 비추어 보아 관하라는 것이지요.

분별이 없으려며는
그냥 다 받아들이고,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아야 합니다.
다 인정하고 수용하며 섭수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묵묵히 비추면 됩니다.

그러면 조금씩 깨어있게 되고,
분별이 잦아들게 되어
어느 순간 무념(無念) 무심(無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
지금 분별 녹이는 연습을 자꾸 하고,
지금 관하는 연습을 자꾸 해야
그것이 성불인연 짓는 것이고,
그래야 나중에라도 성불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 생각도 그냥 놓아버리세요.
그것이 아닙니다.

나중이란 아무 필요도 없고
또 그런건 없어요.

지금 이 순간
비추어 보는 그 순간이
그대로 본래자리 자성부처님의 현현인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가 되야 하고,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무량수 무량광 부처 마음을 쓰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부처이며,
부처 마음으로 법계를 호령하며 산다는 것이,
이 꽉 찬 우주 법계를 자유롭게 꺼내 쓰고
자유자재 하게 굴리며 산다는 것이 말입니다.

치열하게 수행하고 정진하여
언젠가는 깨닫겠다, 부처 되겠다 그러면
공부 못합니다.

공부는 지금 이 순간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지금 이 순간의 일입니다.

다시한번 말하건데
애쓰지 마세요.
깨달으려 애쓰지 말고
성불하려 노력하지 마세요.

묵묵히 비추어 보고
온갖 분별을 여의기만 하면
바로 지금 이 자리가 자성불 본래자리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관자재보살 행심바라밀다시 조견



관자재(觀自在)


 불교를 잘 모르는 이들도 ‘관세음보살’이라는 명칭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불교를 믿지 않는 이들도, 어렵고 힘들 때면 의례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명호(名號)를 부르는 염불이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신앙이 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라는 명호의 의미는 ‘세간의 음성을 관하는 보살’이라는 뜻으로, 사바세계의 중생이 괴로움에 처해 있을 때,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일심으로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 곧 구제해 주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이 과연 어떤 분이기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부르고 신앙하고 있는 것일까요?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이 바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입니다. 이 두 이름 모두 범어 ‘아바로키테 스바라 보디사트바’를 번역한 것으로, 이것이 중국에 들어와 번역되면서, 처음에는 관세음보살로 불리었으나, 이후에 관자재보살로 바꿔 일컬어졌다고 합니다. 원어를 살펴보면, ‘아바’는 지킨다는 뜻이고, ‘로키테’는 본다, 관조한다는 의미로, 이는 ‘지켜본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스바라’는 ‘자재하다, 자유롭다’는 의미이므로 이름 그대로 뜻을 새기면 ‘자유 자재하게 지켜본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중생들의 온갖 괴로움과 액난에 대해 자유자재하게 지켜보고 살펴서 그들의 괴로움을 소멸시켜 주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린 관세음보살의 어원에 담긴 속뜻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간의 음성을 관한다(관세음)’는 의미는 나라는 주관과 객관계의 일체의 경계를 온전히 바로 관함을 말하며, ‘보살’이라고 함은 우리 내면의 본래자리, 깨달음의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관세음보살이라고 염불하는 의미는 나와 내 밖의 일체 경계를 관하여 본래면목 깨침의 자리에 온전히 방하착 하고, 경계를 닦아간다는 자기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 염불수행을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비롯한 일체 세간의 음성, 다시 말해 온갖 경계를 바로 관하고 그러한 모든 경계를 녹이고자 온전히 자기내면의 참나 본래자리에 놓을 수 있도록 하는 밝은 방편 수행인 것입니다. 세간의 음성, 즉 온전히 자신과 바깥 경계를 관하고 녹여 보살,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염불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염불(念佛)이라고 할 때, 염(念)이란, 우리네 마음속에서 경계 따라 일어나는 갖가지 생각, 마음의 조각들을 말하며 불(佛)이란, 우리네 마음속에 저마다 갖추고 있는 본래자리, 근본성품, 참나 주인공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염불은 우리마음 ‘염’과 부처님 마음 ‘불’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하는 밝은 수행인 것입니다.


보살(菩薩)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인데, 범어로 ‘보디사트바(Bodhisattva)’라고 합니다. ‘보디사트바’는 깨달음을 나타내는 ‘보리’와, 중생을 뜻하는 ‘사트바’를 합한 단어로서,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수행자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즉, 깨달음을 완성한 부처와 미혹한 중생의 두 가지 속성을 갖춘 자가 바로 보살인 것입니다.

 이는 보살의 서원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위로는 깨달음,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 교화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모든 보살의 한결같은 서원인 것입니다. 물론 아래다, 위다 하는 구분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선후(先後), 고하(高下)의 상대 개념이 아닌, 분별이 끊어진 개념입니다.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려는 적극적인 행이며, 보리를 구함이 바로 일체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는 대비원력의 궁극적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행을 흔히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를 이익 되게 함이 곧 타인, 이웃을 이익 되게 함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이후 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보고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났다’는 이것이야말로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뽑아놓은 부분입니다. 나머지 뒷부분은 이 사실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관세음보살의 주요 실천 덕목이 바로 ‘반야바라밀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야바라밀다를 실천함에 있어, 단순한 실천이 아니라 완벽하고도 치우침 없이, 그리고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 바로 ‘깊은’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대승보살의 주요한 수행 덕목인 ‘반야바라밀다’라는 것은 어떠한 수행을 말하는 것일까요? 반야바라밀이란, 말 그대로 해석한다면,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르는 깊고도 수승한 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공의 도리, 연기의 이치, 무아, 무자성, 중도의 이치를 올바로 조견(照見)할 수 있는 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진리를 밝게 깨칠 수 있는 지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 연기, 무아, 중도, 무자성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실천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공이고, 연기된 존재이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할 바가 없으므로 무집착(無執着)이며, 어떤 대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라고 하는 분별을 지을 필요가 없으므로 무분별(無分別)이고, 그러므로, 공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며, 무소유(無所有)의 가르침이 여실히 녹아 있음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삶은 ‘무집착, 무분별, 무소득, 무소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의 삶은 온갖 대상에 ‘집착’하고, 머리속으로 사량(思量)하고, ‘분별’하며, 보다 많이 얻으려는 ‘소유’의 관념에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바로 공의 이치, 연기의 도리를 모르는 데에서 오는 어리석음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공, 연기의 이치를 올바로 비추어 봄[조견]으로써, 우리는 확연한 지혜[반야]를 얻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생사가 없는 열반의 저 언덕에 오를 수 있게 되는 것[바라밀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입니다. 즉, 반야바라밀다 실천 수행의 핵심은, ‘무집착, 무분별, 무소득’인 것입니다.


조견(照見)


 조견(照見)이란 ‘비추어 본다’는 의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라고 하면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이나 어떤 상(相)을 짓지 않고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의 관찰이기도 합니다. 부처님도 바로 이 현실의 조견을 통해 확연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팔정도의 정견(正見)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세계라든가, 절대자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 아닙니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셨기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깨달음은 전적으로 현실에 대한 비춤, 즉 조견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나’에 대한 조견, ‘현실’에 대한 조견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자의 바른 길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 그리고 ‘현실’ 이외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나와 내 밖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봄[조견]으로써 나와 내 밖의 현실이 어떠한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떠한 법칙성을 가지고 돌아가고 있는지, 어떠한 성질,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대한 온전한 깨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불교 교설이라고 하는 연기법, 삼법인, 오온, 육근, 십이처, 십팔계, 업, 윤회, 사성제, 팔정도, 사념처 등 이 모든 교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고타마 싯다르타의, 현실[일체, 제법, 우주, 세계]에 대한 올바른 관찰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현실을 가만히 관찰해 봄으로써 연기법이라는 현실의 법칙을 조견할 수 있었고, 그 연기법을 통해 현실의 속성, 성질인 삼법인의 교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또한 현실의 구성방식을 가만히 비추어 보니, 우리의 신, 구, 의 3가지로 행한 행위가 업이 되어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돈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신 것입니다. 이렇게 현실의 법칙, 현실의 성질, 현실의 구성방식에 대하여 조견하시고는, 그렇다면 현실, 일체, 제법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비추어 보셨습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라는 교설이 바로 현실의 모습, 일체 제법, 다시 말해 불교의 우주관, 세계관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비추어 보신 결과, 오온이 모두 공함을 깨달으셨습니다. 즉 조견의 결과 오온개공(五蘊皆空)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무아(無我)의 교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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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체고액  (0) 2008.03.08
개공  (0) 2008.03.08
오온  (0) 2008.01.10
관자재보살 행심바라밀다시 조견  (0) 2008.01.09
바라밀다 심경  (0) 2007.12.11
마하 반야  (0) 2007.12.11
Posted by 법상



[두륜산 대둔사 부도탑]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깨달음이란 어떤 것일까?'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궁금해 하는 문제일 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한 일종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듯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러해야 한다'
'내가 알 수 없는 그 엄청난 무엇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더해 가고 있는 듯 합니다.

깨달음과 자기 자신과의 사이를
너무 멀리 잡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깨달음은 그 어떤 특정한 근기의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 말입니 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수행자라고 자부하는 이들마저도
'이번 생에는 복이나 짓고 그러다보면 다음 생 언젠가 깨칠 날이 있겠지'
하고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법회 때 한번은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 다.
'성불(成佛)하는 것이 이번 생의 원(願)이신 분?' 하고 말입니다.
어느 정도 생각은 하였지만 이 정도로 안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입으로는 '성불하세요' '성불합시다' 하면서
실은 성불보다는 눈앞에 닥친 욕망의 충족에 더 큰 마음을 쓰고 살아갑니 다.

성불, 깨달음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딴 세상의 일일거라는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10년 씩 장좌불와하는 스님들이나,
수십 년 세속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구하는 이들도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가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너무도 큽니다.

그러나 법우님, 생활수행자 도반님들!
깨달음에 대한 환상에서 이제 벗어나야 합니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서 바로 '나'의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깨달음 그 자체는 환상도 아니요,
신비주의적인 그 어떤 오묘한 형상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상상하고 있는 그런 모습은 깨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깨달음을 그렇게 어렵게 바라보고 있 는
그 시선이 나를 깨달음과 멀어지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깨달음은 대단하고 엄청난 것일 것이며,
하늘이 열리고 온 우주가 개벽을 하고
천지가 내 안에 와락 들어와 안기게 될 것이라는
그런 환상적인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깨달은 이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들의 분별 망상일 뿐입니다.

깨달음이란
가장 단순한 일이며,
가장 평범하고,
가장 우리와 가까운 일일 터입니다.

그 어떤 엄청난 노력과 집중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깨달음 그 자체가 우리를 진리에서 너무도 멀어지게 만들게 되는 것입니 다.

본래면목자리, 참나 주인공이란
멀리서,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닌 바로 내 안에서 언제나처럼
은은한 시선과 미소로 우리의 내면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일 것입니다.
너무 가까이 있기에 오히려 찾을 수 없는,
눈이 다른 모든 사물을 볼 수 있지만
늘 함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신(눈)을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깨달음이란
보여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닐 터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 다.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일체 법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正見)'
바로 그것이 깨달음일 것입니다.

매우 평범하고 단순하면서도 가까운 것 말입 니다.
오히려 그렇게 단순한 것이기에
우리들의 깨달음에 대한 환상적 고정관념이
깨달음에서 우리 스스로를 점점 멀어지게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자신의 잣대로 재고 분별하여 바라보는 이가 중생이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가 깨달은 이일 터입니다.

깨달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터입니다.

자신을 돌이켜 봅시다.
'나는 과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눈을 가졌는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들의 시야는 그러지 못합니 다.
천지 법계는 있는 그대로 언제나처럼 그렇게 여여한 모습으로 놓여있건만
우리의 시선은 온통 고정관념과 업식(業識)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 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는 숯한 편견과 색안경을 낀 채 '자기잣대'로 삐뚫어지게 세상을 바라 봅니다.

어느 한 대상을 바라봄에도
자기잣대 만큼만 바라보고 자기만큼만 판단합니다.
내 식대로의 바라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을 바라봄에도
수백, 수천명이 바라보는 그 '한 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여여히 그대로의 모습으로 한 사람이건만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 수대로 수백, 수천이 되어 버립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글쓴이에 대해
읽고 계시는 분들은 어느 한 분이라도
똑같은 모습으로서의 글쓴이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읽고 계시는 분들 모두는 '자기의 잣대만큼의 글쓴이'를 인지할 뿐입니 다.

이 말은 곧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글쓴이는 오직 하나이건만
바라보는 이는 '있는 그대로의 글쓴이'를 천차만별의 잣대로 인지합니 다.

그처럼 우리의 눈은 정견(正見)의 바라봄이 되지 못합니다.
온통 자기가 쌓아 온 만큼의 업식따라 제 멋대로 바라봅니다.
온갖 분별심을 투영하여 대상을 바라봅니다.

'과연 나는 분별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가'
하고 수행자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반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사람을 보더라도 생김새며 출신, 학벌 등과 상관없이
처음보는 그 사람을 여여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가 하는 등의 것들 말입 니다.

깨달음의 시선은
무분별(無分別), 무소유(無所有), 무소득(無所得), 무집착(無執着)의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편견 없는 맑은 시야입니다.

분별하지 않음이며,
소유하지 않음이며,
얻고자 하지 않음이고,
그렇기에 집착하지 않는 맑은 마음입니다.

대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분별하지 않 으며,
'내것이다, 네것이다' 소유의 관념을 짓지 않고,
아집 때문에 내것으로 얻고자 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무분별의 맑은 시야입니다.

그저 일체의 모든 대상은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분별 지을 수도 없고,
소유 할 수도 없으며, 집착 할 것도 없는
애써 말한다면 '그저 그런 것' 일 뿐입니다.
숭산스님의 말씀처럼 '오직 모를 뿐'입니다.

어떻게도 이름 지을수 없고 분별할 수 없기 에
'이것이 무엇인가(이뭣고)' '나는 누구인가' 했을 때
앞뒤가 꽉 막혀 버리고, 말을 꺼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두'인 것입니다.
오직 '의문'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이렇듯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깨달음을 추구하는 우리 생활수행자 밝은 도반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 연습을 해 나가는 일입니다.
그 연습은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연습이며, 부처님 마음 연습이 됩니 다.

그러한 편견 없는 '바라보기'는 일체 대상 을 대함에 있어
'무분별' '무소유' '무소득' '무집착'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空)의 실천이며,
방하착(放下着)의 생활수행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과 편견어린 시선을 버리고
분별하지 말고, 소유하려 들지 말고, 얻으려 들지 말고, 집착하지 않 음,
그래서 일체를 다 놓고 가는 방하착의 생활실천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