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존중정교분
바른 법을 존중하라


尊重正敎分 第十二
復次 須菩提 隨說是經 乃至四句偈等 當知此處 一切世間天人阿修羅 皆應供養 如佛塔廟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須菩提 當知是人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若是經典 所在之處 則爲有佛 若尊重弟子


“또한 수보리야, 이 경이나 내지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설한다면 마땅히 알라. 이 곳은 일체세간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그러한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이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나 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


  이 분 존중정교분에서는 금강경이라는 이 바른 법이 그대로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이 경전을 부처님과 바른 제자를 존중함과 똑같이 존중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이 삼보(三寶)이며, 삼귀의(三歸依)의 정신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제자, 불법승(佛法僧)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르지 않다. 부처님을 존중하듯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훌륭히 수지 독송하여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제자들 또한 마땅히 똑같은 무게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이 분에서는 이와 같이 이 경전의 바른 가르침이야말로 부처님과 존경받는 제자가 있는 것과 같음을 밝히면서, 이 경전을 수지 독송하게 되면 천인과 사람 아수라가 마땅히 부처님 탑묘와 같이 존중할 것이며, 결국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수보리야, 이 경이나 내지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설한다면 마땅히 알라. 이 곳은 일체세간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요즈음도 그렇지만 오래전부터 금강경 독송의 신행은 계속되어 왔다. 금강경 전체를 독송하거나, 혹은 사구게(四句偈) 하나만이라도 계속 반복하여 독송하는 수행의 방법은 많은 불자들에게 쉽고 친근하며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는 수행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유독 다른 경전에 비해서 금강경 독송을 더 많이 선호하며 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명확하게 금강경 독경이라는 수행법에 대해 말씀해 주고 계신다. 이 경이나 내지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면 일체 세간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 탑묘처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금강경 독송의 수행은 바로 이 분에서 이렇게 명확히 제시해 주고 계신 것이다.

탑묘(塔廟)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많은 중생들은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신앙하게 되었다. 그러한 그리움은 탑이라는 신행대상으로 나타나 부처님을 대신하여 탑을 세우고 탑 주위에서 기도하며 수행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갔다. 탑묘는 그대로 부처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탑묘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공양하고 찬탄하고 찬양하며 불탑을 중심으로 대승불교의 신행활동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런데 이 탑묘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양과 기도행렬이 계속되면서 탑묘는 대승불교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었고 이 곳을 중심으로 대승의 보살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탑묘는 일종의 상징이다. 탑이나 사리가 어찌 부처님일 수 있겠는가. 그것을 부처님과 동일시하고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도 하나의 상에 빠지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방편으로 하나의 상징으로써 탑묘를 숭배하고 신앙하게 된 것이다. 부처님을 법신으로써 본다면 탑묘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일체 모든 것들이 모두가 부처님의 몸이 될 것이다.

부처님의 계신 곳은 사람 뿐 아니라 온갖 불법을 옹호하는 선신들이 함께 하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천, 인, 아수라는 바로 그 호법선신들을 대변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육도를 윤회한다. 육도는 다시 지옥, 아귀, 축생이라는 삼악도(三惡道)와 천, 인, 아수라라는 삼선도(三善道)로 나뉜다. 지옥, 아귀, 축생의 중생들은 자신이 지은 전생의 악업을 받느라고 끊임없는 괴로움과 어리석음 속에서 산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공양한다거나 불법을 옹호하거나 기도하고 수행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천, 인, 아수라는 과거세 지은 선한 업의 결과를 받기 때문에 부처님 도량을 옹호하고 공양한다.

그러면 천, 인, 아수라가 불법을 옹호하기 위해 불탑만을 찾을 것인가. 불탑은 부처님에 대한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불탑이 부처님인 것은 그것이 법신이기 때문이지, 사리이거나 탑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그 곳이 부처님 가르침이 있는 곳이며, 가르침이 설하는 곳이기 때문에 공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르침이 있는 곳은 어디든 그곳이 불탑이다.
그렇기에 이 분에서는 사구게 하나만이라고 설한다면 그곳이 불탑이 되어 일체의 천, 인,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탑묘와도 같이 한다고 했다. 하물며 이 금강경 전체를 받아지니고 독송하는 공덕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산스크리트 경전의 원문에서는 금강경을 받아지니고 독송한다는 구마라집 역의 ‘수지독송’에 대해 좀 더 세심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물며 이 법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설명하여 줌에 있어서이겠는가.”

사실 구마라집 역의 금강경에 등장하는 ‘수지독송’이라는 번역은 이러한 표현의 짧은 번역이다. 수지독송의 참된 의미는 이처럼 이 가르침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남을 위해 설명해 주는 것 까지를 포함하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 금강경 수지독송의 공덕이 크다고 입으로만 외우고 만다면 그것은 참된 의미의 수지독송이 아니며, 위타인설의 공덕이 크다고 타인에게 경전을 유포하기만 한다면 그 또한 수지독송의 참된 의미는 아닌 것이다. 참된 수지독송이 되려면, 금강경의 가르침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겨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완전히 이해된 금강경을 끊임없이 독송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길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남에게 상세하게 설명하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수지독송의 뜻이 이와 같다고 하니 문득 의문이 들 것이다. 금강경 독송의 수행을 하고자 발심한 수행자들이 묻는 질문 중 한 가지는 ‘금강경의 뜻을 잘 모르는데 독송해도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여기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은 무작정 독송만 하기 보다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고 새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과연 금강경의 뜻을 모르는 초심자 입장에서 금강경 독경은 아무 공덕도 없는 것이며, 할 필요도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금강경 독경은 두 가지 수행 방편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는 금강경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인 지관(止觀), 정혜(定慧)에 이르는 것이다. 모든 수행의 핵심은 마음을 비우고 관하는 것이다. ‘지(止)’의 수행은 마음을 멈춘다는 것으로, 탐진치 삼독이며, 번뇌, 욕심, 집착, 상념 등 끊임없이 계속되는 마음의 번잡함들을 다 멈추고 그쳐 말끔하게 비우는 것이며, ‘관(觀)’의 수행은 그렇게 멈춰진 고요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이다. ‘멈추고 관한다’ ‘비우고 알아차린다’는 이 두 가지 수행이야말로 불교의 핵심 중에 핵심 수행법인 것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이란 표현도 관수행을 통해 ‘성성’의 지혜에 이르며, 지수행을 통해 ‘적적’의 고요함에 이른다는 뜻이다. 모든 수행의 방편, 즉, 이를테면 염불, 참선, 간경, 주력, 간화선, 절, 사경 등 이 모든 수행이 지관에 이르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마음을 비워라, 멈춰라 해도 잘 비워지지 않는다고 하고, 그 마음을 관하라, 깨어있으라 해도 잘 관해지지 않는다고 하니 ‘관세음 보살’ 염불이 되었든, ‘금강경’ 독경이 되었든, ‘옴 마니 반메홈’ 진언이 되었든, 절이 되었든, ‘화두’가 되었든 그 한 가지를 지관수행의 방편 삼아 붙잡고 정진해 나아가라는 것이다. 즉 잡념과 욕심과 번뇌를 다 버리기 힘들다고 하니 ‘금강경’이든, ‘관세음보살’이든, ‘화두’든 그 한 가지에 집중하고 관함으로써 다른 일체의 모든 잡념을 한꺼번에 끊고 깨어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금강경 독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첫 번째의 수행은 바로 지관, 정혜, 적적성성의 깨달음인 것이다. 이러한 지관의 수행을 위한 방편으로 금강경을 독경한다면 금강경은 그야말로 방편일 뿐이다. 금강경의 뜻을 굳이 모른다고 하더라도 금강경을 독경하면서 마음을 금강경에 집중함으로써 마음을 비우고 독경하는 순간 순간 올라오는 잡념 등을 관찰해 나갈 수 있다면 그 또한 훌륭한 수행의 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금강경 수행의 첫 번째 공덕은 독경수행을 통해 지관의 수행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반면에 두 번째의 공덕은 금강경이라는 부처님의 지혜가 담긴 가르침을 공부하고 완전히 갖추어 이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전공부의 공덕이다. 이 두 번째의 공부에 있어서는 금강경의 온전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의 네 가지 단계로써 깨달음에 이른다고 보는데, 그 첫째는 굳은 믿음[信]을 바탕으로 두 번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解]하고, 세 번째로 이해한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행[行]함으로써 네 번째로 결국 깨달음을 증득[證]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네 가지 신행의 단계, 경전 공부의 단계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해’ 즉, 바른 이해에 있다. 바른 사유를 통해 바로 이해해야지만 바로 실천할 수 있고 바로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직전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 하라고 하셨던 가르침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자등명은 자신 스스로를 법의 등불로 삼아 자기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자기 안에서 깨달음을 얻으란 의미로 자력의 지관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전자의 의미고, 법등명은 그렇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바로 비우고 봄으로써 법을 깨닫기 어렵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진리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후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금강경 수행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것이라 여겨 따로 따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즉, 금강경 독경 수행을 하면서도 금강경 공부를 통해 바른 이해와 실천이 함께해야 하고, 금강경 공부를 통해 이해와 실천을 함과 동시에 금강경 독경 수행을 통한 지관의 실천도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 공부하는 초심자가 금강경의 뜻을 모른다고 독경수행은 하지 않겠다거나, 금강경 뜻을 다 공부한 뒤에 독경 수행을 하겠다거나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또한 금강경 독경 수행을 통해 마음을 비우고 관하면 되는 것이지 금강경을 꼭 해석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냐고 한다면 그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바른 수행자라면 금강경 독경을 통해 지관을 닦고, 금강경 해석과 공부를 통해 바른 이해와 실천을 함께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불가에서 스님들이 처음 출가해 사미계를 받고 나면 비구계를 받기 전까지 5년 여 기간 동안 경전공부를 하는 강원이나, 지관의 참선공부를 하는 선원에서 공부를 필히 마쳐야 하는 것 또한 이 두 가지 수행이 그만큼 수레의 두 바퀴처럼 중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그러한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이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나 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

그렇게 금강경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남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단순히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설한다면 그곳이 일체 세간의 천인, 아수라가 부처님 탑묘처럼 공양할 것인데, 하물며 이와 같이 금강경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남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이 있는 곳은 그대로 부처님이나 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떠한가. 가르침이 있는 곳, 그 가르침을 수지독송하는 이가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부처님이 계신 곳이며, 부처님의 존중받는 제자들이 있는 곳과 다름이 없다. 조금 확대 해석한다면 금강경이 있는 곳이 그대로 법당이며, 금강경을 수지독송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부처님, 또 부처님의 존경받는 제자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금강경과 부처님, 부처님의 제자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 이 셋은 서로 다르지 않다. 불법승 삼보는 하나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이 그대로 부처님이 계신 곳이며 존경받는 제자가 있는 곳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꼭 절에 가야지만 부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집을 도량으로 만들고, 회사를 도량으로 만들며, 내 몸을 도량으로 만들려면 늘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法]이 있는 곳은 언제나 부처님[佛]이 함께 하시며, 부처님의 존경받는 제자[僧]들이 함께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승보(僧寶)라는 것이 스님들에 한정된 개념은 아니다. 불법승 삼보 가운데 승보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두 가지 보배를 바로 믿고 이해하며 실천하며 살아가는 바른 수행자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자에게는 승속의 제한이 없다. 깨달음에 어찌 승속이 별도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불교는 일체의 나눔과 차별, 분별을 모두 해체시켜 완전한 무차별로써 평등에 이르는 가르침이다. 사부대중이라는 것도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로 청정승가란 남녀스님과 남녀신도 사부대중을 아우르는 말인 것이다. 그러니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믿고 신행하며 실천하는 불자라면 그 사람이 바로 승보인 것이다. 결국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이가 바로 수행자요 승보이며 승보는 불보와 법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니, 내 안에 불법승 삼보가 모두 구족되어 있는 것이다.

용성스님께서는 이를 동체삼보(同體三寶)라 하셨다. 즉 ‘자성연각즉불보(自性緣覺卽佛寶)요, 자성적멸즉법보(自性寂滅卽法寶)며, 자성청정즉승보(自性淸淨卽僧寶)’라고 하여 ‘내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님이요, 내 마음이 고요하면 법이며, 내 마음이 청정하면 수행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내 마음 안에 불법승 삼보가 모두 구족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청정’한 마음으로 금강경 수지독송을 통해 ‘고요’한 마음에 이르르면 결국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은 이와 같이 한량이 없다. 그저 사구게 하나만을 설하기만 하더라도 그 공덕은 한량이 없는데, 스스로 이해하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해주는 공덕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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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경전을 아무리 많이 외우고 설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소만 세고 있는 목동일 뿐
참된 수행자라 할 수 없다.

20.
경전을 아무리 적게 외우고, 적게 설하더라도
행동에 옮겨 법을 실천하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바른 지혜와 평안을 얻고
생사를 비롯한 그 어떤 것에도 집착을 두지 않는 이는
참된 수행자라 할 수 있다.



불교의 지혜공부와 세상의 지식공부는 똑같이 배운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방향의 실천을 이끈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불교의 지혜는 비우도록 이끄는 가르침이고, 세상의 지식은 쌓도록 이끄는 가르침이다. 불교의 경전에 담긴 지혜의 가르침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 많이 비우고, 놓도록 이끎으로써 마음이 평화로와지지만, 세상의 수많은 지식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 많이 벌고 싶고, 욕심을 채우도록 이끎으로써 우리의 욕망을 더욱 커지게 만든다.
그렇기에 불교 경전에 담긴 지혜를 공부하는 이는 공부하면 할수록 더 욕심이 비워지고, 집착이 놓여지며, 그에 따라 삶이 고요해지고 평화로와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불교 공부를 세속의 지식 공부 하듯이 하는 이는 여전히 불교경전의 지혜를 통해 삶의 욕망을 도모하고자 할 뿐, 마음을 비우지는 못한다.

내가 아는 불교학과 교수님들 가운데 많은 분들은 불법을 공부함으로써 나날이 행복해지고, 마음이 평화로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몇몇 교수님들은 불법을 공부함으로써 좀 더 높은 교직에 오르고자 하거나, 더 유명한 교수가 되고자 하거나, 부업으로 경전의 가르침을 팔아 더 부유해지기를 원하기도 한다. 이것은 불교의 목적을 완전히 망각한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 후자의 교수님들, 후자의 수행자들, 후자의 불자들이 많이 있다. 비우는 가르침을 공부함으로써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한다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다.
또 많은 불자들은 어떠한가. 경전 공부 한 것을, 교리 공부 한 것을, 기도나 수행 한 것을 어떤 실적인 듯, 자기 과시인 듯, 자랑인 듯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경전을 많이 본들 그것이 현실의 삶 속에서 실천되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경전 공부도 했고, 백일기도도 했고, 절에도 열심히 다닌다는 사람의 현실의 삶이 남들 보기에 전혀 공부하지 않은 사람보다도 못하다면 그것은 오히려 불교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가르침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경전은 우리의 욕심과 집착과 헛된 야망을 놓아버리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우리 마음에 평안과 고요와 자비의 씨앗을 뿌린다. 우리가 경전을 대할 때는 오직 그 가르침에 나를 완전히 열어 놓고, 완전히 비우고 그것을 온전히 흡수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경전이 저절로 나를 이끌어 갈 것이다. 거기에 나를 완전히 비우고 맡기면 된다.

그러나 여기에 아상이 개입된다면, 경전을 공부하면서도 나를 드러내고야 만다. 경전 공부하는 것은 나를 비우기 위함인데, 경전을 얼마나 많이 공부했고 말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금강경도 공부했고, 반야심경도 공부했고, 지장경, 화엄경, 법화경까지 다 공부했으며, 어떤 스님 경전 강의는 재미있고, 또 다른 스님의 경전 강의는 너무 지루하고, 이런 판단과 분별이 앞서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경전공부를 통해 내 아상을 강화시키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왜 그 많은 경전을 다 보아야만 하는가. 단 하나의 짧은 경전을 보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평화로와질 수 있다. 백 권의 경전을 보고 그 많은 독서량에 스스로 흡족해 자랑하는 사람보다 차라리 한 줄의 부처님 가르침을 직접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더 근원적이다. 차라리 내 앞의 거지에게 내가 먹을 빵을 나누어 주는 것이 더 깊은 수행자다.

‘나는 경전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다’라는 아상이야말로 얼마나 대단해 보이는가. 얼마나 지혜로와 보이고, 얼마나 마음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아 보이며, 얼마나 비움과 평온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러나 왜 경전을 많이 보았다는 것이 우리의 실적이 되어야 하는가. 경전 공부의 실적은 얼마나 더 비워졌고, 고요해졌고, 놓여졌느냐에 있지, 얼마나 더 쌓았으며, 더 배웠고, 더 많이 아느냐에 있지 않다. 참된 경전은 글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는 것이요, 참된 수행은 경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여실하게 관찰하여 보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귀족 가문 출신의 절친한 두 친구가 함께 출가를 했다. 젊은 수행자는 경전을 통달해 강사스님이 되었으며 온갖 절의 책임을 맡아 사무를 돌보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반면 나이 많은 수행자는 오직 수행에 매진하여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는다. 아라한과를 증득한 것을 자랑하거나, 위대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수행의 실천 없이 경전만을 공부한 자에게 수많은 경전공부는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아주 좋은 아상이 된다. ‘나는 위대한 강사스님이다’ ‘나는 모든 경전에 통달했다’ ‘그로인해 나는 절의 높은 직위의 스님이 되었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자랑스럽고 스스로의 모습에 흡족하다. 이렇듯 아상이 커질수록 상대방에 대한 우월의식도 커지게 마련이다.

어느날 모처럼 함께 출가한 도반인 두 스님이 만나게 되었는데, 젊은 강사 스님이 도반이 아라한이 된 줄도 모르고 자신의 학문을 자랑하려고 했다. 아라한인 도반은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이를 알고 부처님께서 두 스님께 경전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던지신다. 젊은 스님은 대답을 하지 못하였으나, 늙은 아라한은 명확한 답변을 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위의 두 게송을 설하셨다.

단 하나의 가르침이라도 듣고 실천하는 것이, 백 가지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오래된 이 불가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아무리 법랍(法臘)이 높을지라도, 아무리 출가 년수가 오래 된 노승일지라도 갓 깨달음을 얻은 사미에게, 혹은 깨달음을 얻은 신도님께 가르침을 하심하는 마음으로 배워야 한다. 그렇기에 이 불법문중에서는 많이 배우고 적게 배웠다거나, 더 나이가 많고 적다거나 하는 일체의 차별이 없다. 오직 실천 행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Posted by 법상



새벽에 깨어나 꼿꼿이 앉아있으라.
다만 좌복을 펴고 앉아 묵묵히 지켜보라.

그것이 독경이 되어도 좋고,
염불이나, 다라니 독송이 되어도 좋으며,
108배를 해도 좋고,
아니면 다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기만 해도 좋다.

그 순간에 몰입하라.
하루 중 온전히 마음을 비우고
앉아 있는 시간을 가지라.
무언가를 이루어 보겠다거나,
이렇게 앉아 기도 수행을 하면 무언가 달라지겠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을 모두 비운 채 다만 바라보기 위해 앉으라.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불교를 접하고 신심이 생길 때는
3.7일 기도다, 100일 기도다, 금강경 독송이다, 108배다 해서
기도 수행도 자주 하게 되고,
아침 저녁으로 좌선도 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정진에 임한다.

그런데 한참을 그렇게 하다보면
물론 처음에는 ‘가피력을 입었다’거나,
‘기도를 하면 마음이 평화로와진다’거나,
‘기도를 하니까 삶이 달라진다’거나,
심지어는 ‘기도를 하면 뭐든지 다 이루어진다’거나 하면서
신심을 내고 환희심을 내다가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신심이 뚝 떨어지곤 한다.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하면
내가 생각했던 대로 다 이루어 져야 하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되는 듯 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는 그것이 마음대로 잘 안 되는데서 문제가 생긴다.

참선을 한다고
뭔가 눈에 보이게 마음이 평온해 지는 것도 아니고,
대비주 수행을 1만독, 10만독을 넘게 했는데
깨달음이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금강경 독송을 매일같이 7독씩 몇 년을 했는데도
내 삶에 그 어떤 획기적인 변화가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실망을 하고 좌절을 한다.
‘이렇게 해도 별 것 없구나’
‘하나 안 하나 별 차이 없이 똑같구나’



그러나 이 말을, 이런 생각을 한 번 돌이켜 보라.
거기에는 내 스스로 파 놓은 함정이 있다.
기도 수행을 하면 무언가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
바로 ‘바라는 마음’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말이다.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할 때 사람들은
무언가를 바라고, 어떻게 되어지기를 바라곤 한다.
하기야 사람들의 속성상 바라지 않는다면 무엇하러 그 힘든 수행을 하겠는가.
수행을 하면 무언가가 바뀌고 원하는 것을 이루어야
그것을 할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불법문중의 방식이 아니다.
이 문에 들어오면 세상의 방식과는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
세상에서야 우리의 모든 행위의 이유는
어떤 목적을 이루는 방향으로 행해지지만
출세간의 이 문으로 들어오면 목적없음이 바로 목적이 된다.

다만 앉아 있는 것이지,
다만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는 것이지,
거기에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침에 좌선을 하고 출근했더니
하루가 더 맑고 상쾌해 지는 것 같더라,
수행을 오래하다보니까
마음에 중심이 잡히고 그 어떤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는 것 같더라,
금강경을 오래 독송하다 보니까
온갖 마장들이 다 없어지고 마음 내는대로 다 이루어지더라,
하는 말들은 모두가 어리석은 욕망 밖에 되지 못한다.
그것은 참선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생각이 일어난다면 얼른 지켜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생각의 흐름에 끄달리지 않을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수행을 하고 참선을 하다보면
‘나는 저 사람들보다 더 깨어있는 사람이다’거나,
‘나는 저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다’라는 우월한 상이 생겨난다.
이 때 깜짝 놀아 얼른 지켜보지 않는다면 그 때부터 수행은 거꾸로 간다.
정진은 없고 퇴보와 후진만이 있게 된다.

새벽에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좌복 위에 앉으라.
다만 앉아서 묵묵히 지켜보라.
이러한 행위를 참선이라거나, 좌선이라거나, 수행이라고 이름짓지 말라.
이것이 잘 한 것이라고 뿌듯해 하지도 말라.
이렇게 하면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아예 지워버려라.

좌선을 하는 이유는
모든 목적과, 모든 바람과, 모든 기대와, 모든 생각을 놓아버리는 작업이다.
그야말로 모든 행을 멈추고 다만 바라보는 작업일 뿐이다.
모든 행을 멈추는 좌선을 하면서 무언가를 바라는 행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바람과 기대와 목적이 없는 참선이야말로 온전하다.
그랬을 때 참선에는 진척이 없고 진도가 없다.
참선이 잘 된다거나, 안 된다거나,
참선을 했더니 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참선을 했더니 마음이 고요해 진다거나,
참선을 했는데도 깨달음은 여전히 요원하다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이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참선이다.
이런 참선을 하는 자에게는 실망도 없고, 좌절도 없고, 포기도 없다.
다만 그저 묵묵히 할 뿐.



현대인들이 행하는 참선과 수행의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이 점이다.
현대인들은 목적을 정해 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데 익숙하다.
무언가 분명한 목적의식이나 바람을 가지지 않으면 좀처럼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조급한 목적의식이 참선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참선 수행을 시작한 사람들이 대부분 얼마 못 가 포기하고 만다.
해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이유다.
무언가 달라지기를 바라고, 무언가를 깨닫기를 바라고,
마음이 고요해지기를, 어떤 목적을 이루기를 바라는 참선을 하는 이상
그 참선의 수명은 짧을 수 밖에 없다.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의 수많은 조사스님들께서 드러내 보이신
이 가르침을 어찌 그렇게 쉽게 믿지 못하고 퇴전심을 내는가.
아무런 목적 없는 참선,
오직 묵묵히 무겁게 앉아 비춰보는 회광반조의 참선에는
모든 불보살님과 역대 선지식의 밝은 소식이 담겨 있다.

다만 그것을 믿고 묵묵히 나아가라.
비록 좌선하는 순간, 기도하는 순간
별로 깨달아지는 것이 없고, 느껴지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게 잘 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순간에 조차,
그것이 바로 최고의 수행이요 참선의 순간임을 의심치 말라.

참선수행이나 기도수행은
언제나 별로 깨달아지는 것도 없고 느껴지는 것도 없다.
수행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불평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이 수행의 핵심이다.

다른 외도의 수행이나, 돈 벌이에 급급한 명상방법을 보면
무언가를 이루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집단적으로 무언가를 느끼는 것을
수행의 진척으로 생각할 지 모르지만
이 문중의 가르침에서 그런 것들은 쓰레기통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일 뿐이다.

공부하는 수행자는
평범할 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어떤 특별한 경계를 만나거나, 크게 깨달아지는 것이 없을 때,
바로 그 평상심의 때가 가장 소중한 수행의 때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수행자는 다만 묵묵히 정진해 갈 뿐
포기하거나, 실망하거나, 진척 없음을 탓하지 않는다.

이 공부는 다만 순간 순간을 문제 삼는 것이지
노력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는 관심 밖이다.
수행의 결과에만 집착하는 사람들, 목적의 성취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 공부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한다.
결과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와 있음을, 이미 지금 이 순간이 과정이자 결과임을 깨닫고 누릴 뿐이다.

순간 순간의 깨어있음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바라던 궁극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제부터 우리의 삶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만족스러울 것이다.
삶의 모든 순간이 지족의 열반이 될 것이다.

수행에 대해, 깨달음에 대해, 부처에 대해
그 어떤 지식적인 논의나 토론, 고차원적인 이론도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그것이 아무리 최고의 현학적인 지식일지라도 이 공부에서는 무의미하다.
이 공부는 생각 너머에, 지식 너머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교 공부를 하나도 할 필요가 없다거나,
경전도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생각이나 분별을 버리고 묵묵히 있는 그대로 순수히 바라보는 것,
그저 좌복 위에 앉아 관조(觀照) 해 보는 것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선 수행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그렇게 근사하거나, 있어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속에 그 어떤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아주 사소하고 단순하며 평범한 것일지 모른다.

수행자는 다만 좌복 위에 앉아 있을 뿐이다.
혹은 걷고 안고 눕고 움직일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듯 하지만
그 모든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있다.
또한 고요함 속에 다시 움직임이 있다.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10년을 앉아 좌선을 했지만 아무런 깨달음도 없다고?
그래도 여전히 앉으라.
수행 중에 그 어떤 변화도, 경계도, 환희심도 없다고?
그것이야말로 이 수행이다.

공부하는 수행자에게는 잡초가 보물이 된다는 말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잡초라고 생각될 지 모르지만
수행자에게는 그 잡초가 바로 부처요 보물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언뜻 보기에 잡초같이 보잘 것 없는
모든 순간 순간이 그대로 보물처럼 소중한 순간임을 알 것이다.
안 된다고 느낄 때가 사실은 가장 잘 되고 있는 때임을 알 것이다.

매일같이 목적 없는 참선을 행하라.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생각 없이 다만 고요히 앉아 지켜보라.

잘 되고 안 되고를 여의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잘 되고 있는 때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 한 가지,
삶이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연장이다.



[설악산 신흥사]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