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분지에서 민박집 어르신이 일어주신 산마을 식당에 들러
울릉도에서 난 산채들로만 만들었다는 산채비빔밥을 시켰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산채들이 풍성하게 한 그릇 가득이다.

주인 아주머님 인심은 또 얼마나 좋은지,
밥이며 산채며 반찬들이 전통 한정식 저리가라 하고 많이 나오는데다
민박집 어르신 얘기를 했더니
이 곳의 자생인 천궁, 호박, 더덕 등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씨앗주라는 곡차도 한 사발 내어 주셨다.

늦은 점심을 먹고는 터벅터벅 바닷가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고갯길을 오르니 나리분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1시간 남짓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을 걷다보니
시원스런 바다와 거친 파도가 가슴을 뻥 뚫어준다.
그리고 바닷길 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산에서 바다 쪽을 향해 약간 기울어 진 듯 보이는
육중한 바위산 하나가 시선을 잡아끈다.
성인봉의 한줄기 산봉우리가
송곳처럼 뽀족하게 생겼다고 해서 송곳산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송곳산 때문에 이 인근 마을도 송곳산의 한자명인
‘송곤 추(錐), 메 산(山)’자를 써서 추산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높이가 430m라고 하니 육중한 바위산이라고 말했던 규모가 짐작이 가려나.

그리고 송곳산에서 바다 쪽으로 눈을 돌리면
일명 코끼리 바위라고 불리는 공암이 바다 위에 떠 있다.
바위 모양이 코끼리가 물 속에 코를 담그고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로 난 길을 따라 잠시 걸으니
저 멀리로 죽암이 보인다.



죽암과 삼선암을 들렀다가 서면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북면 쪽에서 너무 시간을 오래 끌다 보면
내일 떠나야 하는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겠나 싶어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여행을 다니며 구경을 하는 것도 아쉬운 듯 한 것이 좋고,
모조리 다 감상을 하겠다는 것 보다는 욕심을 좀 덜 내는 것이 좋다는 것을
몇 몇 만행길에서 터득한 바다.

바닷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인적은 드물다.
그래도 작은 어촌 마을인데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한 건가 싶을 정도로
여간해서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바람은 점점 거세진다.
때때로 파도의 잔영들이 뺨을 스치운다.
한참을 걷다보니 바닷길 위에까지 파도가 흩뿌려져 겉옷이 축축하다.

걷다가 걷다가 길가 간이 의자에 앉았다가 이내 드러누웠다.
가만히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을 보며 온 몸으로 간간이 뛰어드는 파도를 맞아가며
점점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의 찬기를 느끼면서
아무도 없는 외딴 섬 길 위에 버려진 듯 철저한 고독의 소리를 듣는다.

산 위에서 그랬듯이 길 위에도 인적은 없다.
이따금씩 지나치는 차량만이
이 땅이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뿐이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요즘, 늦가을부터 겨울까지는
거의 관광객들도 없고, 일들도 많이 줄어드는 시기라고 한다.
요즘 같으면 배가 들어왔어도 나가지 못하는 날이 더 많은 연유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차라리 한 몇 일 이 곳에 갇히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센 바닷가 한 켠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마음도 고정시켜 본다.
외로운 느낌을 가만히 살펴본다.
이럴 때, 외로운 느낌이 존재를 뒤덮으려 할 때,
바로 그 때가 수행자에게는 가장 좋은 구도의 때다.

가만히 그 느낌을 주시하고 있다보면
이내 느낌도 생각도 어느덧 사라지는 것을 본다.
다만 파도가 칠 뿐.



바다도 산처럼 사람의 생각을 잠재우고
감성을 일깨우는 그 어떤 힘을 가졌다.
이런 외딴 섬에서의 외로운 거센 파도는 내 삶에서도 드문 경우다.
더구나 이런 철저히 외딴 곳에서의 거친 풍경은 더욱 드문 일이다.
이런 생경한 경험들이 지진하던 내 속 뜰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바다와 하늘, 구름의 경계선이 사라진다.
온몸은 거센 바닷바람을 따라 춤을 춘다.
또 다시 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걷다가 지치면 멈추고 눕다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이렇게 조용하게 그 어떤 훼방 없이 걸을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처음이지 싶다.
길 위의 고요를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언제나 길은 시끄럽다.
차량이 줄을 잇고, 엔진의 소음이 그칠 줄 모른다.
차의 길은 차의 소음으로 시끄럽고
사람의 길은 사람들의 재잘거림으로 시끄럽다.
물론 벗과 함께 걷는 길에는 사람들의 소리들까지도 정겹지만
홀로 속 뜨락을 거닐을 때는 때때로 조용한 길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법이다.

이 곳 울릉도의 길이 바로 그런 길이다.
이 길은 차 만을 위한 길이 아니다.
길 위에서 사람도 자유롭게 걸을 수 있고
바다도 파도도 그리고 깊은 침묵 또한 길 위를 걷는다.

차량의 행렬이 멈춘 도로는 낯설다.
그 낯섬이 길을 걷는 여행자에게는 반가운 도반이다.

저 섬 반대편까지 가야 일몰을 볼 수 있으리란
민박집 어르신의 말씀이 문뜩 떠올라
지나치는 차를 향해 손을 들었다.

이곳의 차량은 언제나 사람을 태울 준비가 되어 있는 듯 하다.
차량 향해 손만 들으면 어떤 차도 어떤 사람을
당연히 태우고 갈 준비가 되어있지 싶다.
차도 섬을 닮아 가슴이 따뜻한가.

거의 반나절을 걷고 걸어 되돌아 보면 한 뼘이더니
이 섬의 차는 순식간에 내 수고를 덜어
훌쩍 섬 반대편 태하의 성하신당에서 나를 떨구어 주었다.

역시 차를 타고 오다보니 놓치는 것이 많다.
눈을 초롱 초롱 뜨고 산과 바다를 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것들을 향해
깊은 시선을 던지긴 했어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하나를 얻으면 역시 하나를 잃게 마련이다.

문명의 이기는 이렇듯 볼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기능도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놓치는 것이 많아진다.
차창 밖에 보여지는 사물들만 놓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 하나의 풍경들이 담고 있는 내 안의 의미도 놓치고
그들이 내게 던져주는 화두 같은 것도 놓치게 된다.

삶의 속도도 매한가지다.
인생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더 빨리 얻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이다.
삶의 참된 의미는
봄 꽃이 피어나는 듯 느린 가운데에서 꽃피어난다.

태하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도 완전히 태풍에 강타를 당했다.
물론 이 곳 또한 물길 작업이 한창이고,
바닷가 쪽은 방파제 작업으로 분주하다.
거대한 굉음과 장비들의 소음이
이 아름다운 풍경의 정서를 반감시키고 있다.

태양은 이제 저 바다 너머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어둑 어둑한 뭉개구름들 사이로 투명한 빛이 바다를 향해 쏟아진다.



빛의 향연. 아직 빛은 투명하다.
이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빛은 더욱 따뜻한 노을빛으로 바뀔 것이다.



저 건너편 풍경이 이채롭다.
늘상 바라는 바지만 저 언덕 위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조그만 텃밭을 일구며 매일같이 바닷가로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사는 것을 그려보게 된다.



시끄러운 소음과 정신없는 공사 때문에
이 곳에서 일몰을 맞으려던 생각을 바꾸었다.
태하 마을을 걸어 나오는데
울릉도 곳곳에서 자주 목격하던 오징어 말리는 풍경이 이젠 익숙하다.



아직 일몰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다.
또 한 번 차를 얻어 탔다.


통구미 거북바위 일출을 바라보며(통구미 도착, 16:00)

사자바위 쪽에서 일몰을 볼까 하다가
아무래도 도동 가까운 곳이 좋겠다 싶어 단숨에 통구미까지 내달렸다.
거북이가 마을을 향해 기어가는 듯한 모양을 보고
거북이가 들어가는 통과 같다고 하여 통구미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이 곳은 향나무 자생지로도 유명한데 천연기념물 48호로 지정된 곳이라 한다.
포구 앞의 바위는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거북바위라 부른다.

통구미와 거북바위의 일몰도 유명하다고 했는데
차에서 내리니 ‘잘못 온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바위 하나 달랑 있고
도로 곁에 그 흔한 슈퍼나 식당 조차 없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관광지의 유명 명소는
호텔과 휴양시설이며 온갖 식당가와 관광물품판매점에, 심지어 유흥업소까지
얼마나 정신 없는 시설들로 꽉 들어 차 있는가.
그런데 지금까지 울릉도를 걸으며 느낀 공통점이 바로
울릉도의 명소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곳에 통구미라는 지명까지 만들어졌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일몰을 구경 온 관광객도 없고,
관광객들을 위한 그 흔한 일몰 전망대 같은 것도 없다.
그냥 길가에 앉으면 그곳이 전망대도 되고 휴게실도 된다.

이렇게 개발되고 발전되지 않아 호젓한
이런 곳이 참으로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그 텅 빈 가운데 꽉 찬 무언가가 있다.
너저분한 것들이 없어야 정말 보아야 할 그 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법이다.

길을 벗어나 바다 쪽으로 바위가 하나 있어 그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양도 이제 많이 내려왔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저 수평선 바다가
저 위의 붉은 생명을 단숨에 품어 안을 것이다.



여러모로 이번 여행은 의미가 남다르다.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로 넘쳐나고,
문명의 이기로 넘쳐나는 그런 여행지 풍경 속에서는
나 자신에 집중하기도, 여행지 풍경에 집중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그러나 이 곳에선 호젓한 가운데, 아무런 걸림 없이, 아무런 방해 없이
두 눈의 시선은 오직 저 붉은 태양에 고정되고 있다.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의 살결도 찬연하지만
그 위에서 휴식을 취하듯 소박한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갈매기들의 모습에서도
더없는 평화로움과 삶의 여유를 읽을 수 있다.



노을이 내려앉은 바다 물결이 곱다.
용광로 같은 태양 아래
바위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갈매기가
빛을 받아 더욱 반짝인다.

잠잠히 앉아서 일몰을 기다리던 갈매기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루를 마감하는 일몰의 축제에 빠져든 듯
노을진 하늘을 배경으로 떼지어 날아올라 황홀경에 빠져들고 있다.



거북바위가 지는 태양의 곁에서 묵묵히 일몰을 지켜주고 있다보니
함께 곁에서 지켜보는 여행자의 가슴도 따뜻해진다.



시간과 함께
태양은 뜨거운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한 30분 남짓의 시간동안 서서히 아주 조금씩
태양과 바다의 간격이 좁혀지더니
이네 푸른 선과 붉은 원이 감격의 재회를 맞으며 하나 된다.



둘이 만남을 이루고 나면
태양은 빠른 속도로 바다 속을 파고들며 자신을 소멸시킨다.

이내 태양은 보이지 않고 수평선만 외로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태양이 사라져도 여운은 남는다.
아직도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은 태양의 여운으로 은은하다.



또 다시 바다 곁을 따라 난 길을 걸으며 녹록한 태양의 여흥을 느껴본다.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호올로 길 위를 걷는 느낌은 적막 혹은 적멸이다.
첫 느낌은 적막하기 그지없는 휑하고 허한 느낌이지만
그 느낌을 깊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휑한 적막감은 이내 깊은 고요와 평화를 간직한 적멸의 자리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걷다보면 길 위에서 적멸의 벗을 만나게 될 것도 같다.

한참을 걷다 또 한 차례 차를 얻어 타고 도동으로 내달렸다.
저녁 공양을 하고 잠시 도동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피곤이 몰려온다.


다음날 새벽, 행남등대와 해안산책로 일출(도동항 출발, 05:50)

애초 아침 일찍 독도를 다녀오려고 했는데
마침 오늘이 독도편 배가 출항하지 않는 날이라
독도를 다녀오는 계획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대신에 행남등대와 해안산책로를 돌아보기로 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도동항에서 해안산책로가 아닌
산길을 따라 행남등대까지 가는 길을 택했다.

아직 도동은 한밤중이다.
도동항 마을에서 가파른 계단을 따라 얕은 산 위로 올라가니
도동의 밤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손전등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탓에
어두운 산길을 두 눈 부릅뜨고 직감에 의지해 걸어야 한다.

어둠 속에서 낯선 산길을 걷는 건 또 다른 생경함이다.
어둠은 짙고 세상은 조용하다.
터벅 터벅 길이 난 곳만을 향해 계속해서 걷는다.
이른 새벽 숲 길의 청명함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방에서 나올 때만해도 바람이 차다고 느꼈는데
한참 걷다보니 안에서부터 땀이 주르륵 흘러 내린다.

금방 도착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밤길이라 그랬는지 1시간을 조금 넘게 걸은 것 같다.
오르락 내리락 하며
또 둘로 난 길에서는 그냥 대충 직감을 따라 길을 선택했다.
우측으로 가면 바다에 다다를 것이고
너무 좌측으로 가면 저동에 다다를 것 같고
중간 즈음의 길을 따라 계속 걷다보니 길 끝에 집이 한 채 보이고
갈라진 길 앞의 간이 이정표에 ‘행남등대’ ‘저동’이란 푯말이 보였다.

행남등대에 잠시 올랐다가 일출을 보기에는 바다쪽이 낫겠다 싶어
다시 해안산책로 쪽으로 내려왔다.
빠른 걸음으로 해안산책로에 다다르니 이제 막 일출이 시작되고 있다.



어제 새벽 저동의 일출과는 또 다른 느낌의 태양이 떠오른다.
뭐랄까 조금 더 부드럽고 따뜻하며 차분한 느낌.
어제의 일출이 강렬했다면 오늘의 일출은 포근하고 따스하다.

때때로 고기잡이 어선이 하나 둘씩 지나간다.



갈대 사이로 솟아오른 태양이 지극히 순박하다.

갈대도 태양을 향해
합장을 하듯 이 아침의 일광보살을 맞이한다.



산책로 사이로 피어난 왕해국이 대견하게 느껴진다.



바위틈 사이 그 척박한 곳에 왕해국 작은 꽃무지도
그 곳이 제 집이라고 뿌리를 박고 피어올랐다.



바위틈에서 자란 건 왕해국만이 아니다.
그 곁에서 산부추도 계절감을 잊고 바위틈에서
바닷바람을 피해가며 호젓하게 서 있다.



바위 위에 앉아 떠오르는 태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갈매기 한 마리가 내 외로움을 달래준다.



그 하늘 위로 뭉개구름 몇 송이 평화롭게 떠 다닌다.
한참동안 발을 떼지 못 하고 바다쪽을 향해 서 있다.



아! 이 뜨거운 하늘, 바다, 태양 그리고 섬...
이 한 편의 장면이 그대로 동화 속 풍경처럼 선명하게 그려진다.



예상했던 것 보다 해안산책로의 절경은 더없이 특별하다.
어제까지의 풍경들이 평범한 가운데 평화와 순박의 경이가 담겨있었다면
오늘 아침 해안산책로의 그것은 경희(驚喜) 그 자체다.



이런 풍경은 도무지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이런 풍경을 대할 때마다
대자연의 무위의 예술성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찌 이런 절경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기암괴석의 하늘신이 빗어놓은 듯한 천상의 산책로 위로
새벽 태양빛이 하늘에서 금싸라기를 흩어 뿌리는 듯 난연히 비춰주는
이 해안의 풍경은 도무지 언어로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 어떤 언어로 이 대자연의 하늘 연주를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깍아 지른 듯한 기암괴석 아래로
금새라도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스릴을 느끼면서 걷는다.



아! 지금 이 순간
내 영혼도 저 갈매기처럼
청량한 하늘 위를 날고 싶다.



내 안에서는 또 다시 침묵의 선율이 흐른다.
모든 티끌들이 말끔히 사라지고
청연청아한 텅 빈 공간이 내 안의 뜰에 맑은 비질을 한다.
이 선연한 하늘의 연주와 선율을 알아들었기라도 했다는 듯
하늘 위로 갈매기 떼의 발랄한 날개짓이 춤을 춘다.

천천히 경행하듯 옮긴 발걸음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어느덧 도동항에 다다랐다.
도동항 마을도 아침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인다.



해도 이제 제법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날씨가 좋아 배는 당연히 뜬다고 했다.
육지로, 일상으로 다시 되돌아 가는 배에 몸을 싣고 잠시 눈을 붙였다.
꿈결 속에서 울릉도를 다시 그려본다.



설레임 가득한 일탈의 만행을 만들어 준 울릉도,
언제 다시 오게 될 지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 안녕.







Posted by 법상


울릉도의 택시는 전부가 4륜구동의 승합차량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곳곳이 가파른 오르막이고
때때로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곳들도 많이 보인다.

택시를 타고 산 아래 안평전까지 가면서도
울릉도의 풍경, 바다위로 피어오르는 태양 빛,
그 빛에 반사되어 황홀경을 선사하는 산세며
어느 것 하나 내 눈을 사로잡지 않은 것이 없다.



울릉도는 섬이라 산세는 고만고만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내 생각은 그야말로 완전히 빗나갔다.
주봉 성인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펼쳐져 있는 봉우리들이
그야말로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높이고 있다.



한참을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울릉도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데
한동안 산 쪽 오솔길로 들어선다 했더니 벌써 안평전에 다다랐다.
성인봉 쉼터라고 쓰여 있는 바로 이 곳이
안평전에서 오르는 등산의 초입이다.



성인봉 오르는 길,
초입에 몇몇 채 소박한 집들이 늘어 서 있을 뿐
안평전의 풍경은 조용하고 차분하다.



마지막 소담한 농가에서 멀리 바다를 굽어보며
물을 한 잔 얻어 마시고는 이제 본격적인 입산에 들어간다.



저 멀리 바닷가 위로 떠오른 햇살이 아직 따스한 온기와 빛으로
성인봉 얕은 산봉우리들을 비춰주고 있다.

이런 풍경 하나 하나가 내 안에 자연 성품을 일깨우며
감미로운 뉴에이지 피아노 선율이 잔잔히 대지 위로 연주되는 듯
내 온 몸이 마음이 이 법계의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연주를 하지 않아도 연주되는 음악이 있다.
때때로 이런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호올로 느낄 때
하늘에서 대지에서 산과 바다에서
온 존재를 하나되게 만드는 음악이 연주되곤 한다.

산길을 걷는 내내 연주는 끊이지 않는다.
발걸음에 바스락 거리는 낙엽 소리도,
앙상한 가지 끝에서 돌아감을 순수히 기다리며 미처 떨어지지 않은 낙엽이
시린 바람과 함께 만들어 내는 소리도,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며 간간이 들려오는 꿩 소리도,
저 멀리서 들릴 듯 말 듯 간지럽혀 오는 파도 소리도,
또 산길을 오르며 거칠어지는 호흡 소리며,
내 안에서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까지
그 어떤 소리 하나 법계의 노랫소리 아닌 것이 없게 느껴진다.

인위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무위의 소리들이
그대로 진리인 양, 사자후인 양
흡사 가릉빈가의 연주처럼 성성하고도 적적한 감미로움을 자아낸다.

날씨는 더없이 화창하다.
산 아래는 아직 가을의 잔영이 남아있다.



육지에서는 벌써 단풍 구경 끝난 지가 오랜데
신기하게도 산 아래는 생의 마감에 미련이 남기라도 한 듯
푸석푸석한 막바지 단풍들이
아쉬운대로 두 계절의 즐거움을 선사해 주고 있다.



오르는 길에 나무로 만든 투박하지만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룬 계단들이 인상적이다.



여느 국립공원 산 같으면
인위적인 가공 계단들을 반듯 반듯하게 세워 놓거나,
또 어떤 곳은 철로 만든 계단을 만들어 놓아
산길을 걸으며 느낄 수 있는 흙과 낙엽 소리 대신에
철철거리는 철계단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곳도 있었을 터인데
이 곳의 계단들은 하나같이 그 산의 나무들로 이루어진
그것도 반듯하게 잘라서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기 보다는
부러지고 쓰러진 나무들을 엉성하게 모아 만들어 놓은 계단들이다.



이렇듯 계단 하나도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운치가 있고 정감이 가도록 만들 수 있는 법.

산을 오르며 곳곳에 오랜 세월을 버텨오다 버텨오다
인연이 다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꺾이고 쓰러진 고목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그런 쓰러진 나뭇가지들을 적당히 크기 맞게 잘라
이렇게 계단도 만들고 잠시 쉴 수 있는 의자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왠지 모르게 더없는 정겨움과 고향 같은 풋풋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 고즈넉한 산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니
산 중턱 곳곳까지도 고사리류와



섬바디,



섬노루귀 등이



초록의 빛깔을 잃지 않은 채
이 추위를 근근히 버텨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늦가을 겨울 초입의 날씨에 단풍에 초록의 식물들까지
참 대견하다 싶더니만 역시나 중턱을 넘어서면서부터
나무들은 가지 끝에 남은 단풍 한 떨기조차 다 떨구어 냈고
초록의 식물들도 사라진 채
한겨울을 초록으로 끝까지 나는 조릿대만 나무 아래 녹빛 흔적을 남겼다.



산 아래에서부터 중턱, 정상까지 오르며
조금씩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중턱을 넘어서니 하늘빛도 더욱 푸르고
잎을 다 떨구어 낸 나무들도 훨씬 홀가분하고 호젓하게 서 있다.



그렇다보니 건너편 산도,



나뭇 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도 그대로 시원하게 드러난다.



아무도 없는 산 길,
침묵만이 내 벗이 되어주는 이 길이
오늘따라 내 마음을 왜 이리도 설레게 만드는지.

대자연의 길벗들이,
이 숲의 나무와 바람, 흙과 풀들, 하늘과 청량한 내음들이
모두 내가 걷는 길을 축복해 주고 밝혀주는 것만 같다.
아주 오래 전부터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될 나와의 인연을
그토록 기다리며 마중하기라도 했다는 듯
전혀 낯설지 않은 포근한 숲의 도반들이 반가운 인사를 건네 오고 있다.

이런 때, 이런 날, 이런 곳!
난 이런 문득 스치는 낯선 자연의 인연을 미치도록 좋아한다.
내 삶에 가장 소중한 인연이자 도반이자 스승이 되어주는
이 대자연 법계의 소식들이 짠하게 내 품을 감싸주고 있다.

오랜 도반들, 내 삶의 길벗들! 안녕!
산과도 나무와도 바람과도 인사를 건낸다.
모든 숲의 생명들이 속 뜰의 예민한 감성과 따스한 교감을 나누고 있다.
공평하고 평등한 존재와 존재가
민감하게 서로를 살려주며 공명하고 있음을 느낀다.

느릿 느릿 한 시간 여를 올랐을까.
7시 50분 즈음에 안평전에서 출발했는데
시계를 보니 8시 40분이 막 지나고 있는 걸로 봐서
생각보다 걸음이 빨랐던 것 같다.

울창한 마가목 나무 원시림이
또 한번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계곡과 능선 사잇길을 따라 느릿한 걸음으로 한 시간여를 올랐을까
능선 위로 오르면서 원시림이 펼쳐지고 조금을 더 걸어올라가니
발 아래 울릉도 도동항과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잠시 숨을 돌리고 또 다시 울창한 숲 터널을 걷는다.
계곡 쪽에서 능선을 타고 오르니 비로소 따스한 햇살이 길 위로 내려앉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태양은 이 산위로, 바다 위로, 도동항 마을 위로, 숲 길 위로
자신의 따스한 햇살을 한없이 나누어주고 있다.



새벽 일출 때부터 지금 즈음까지의 햇살이
하루 중 가장 가볍고 상냥하며 따스한 느낌으로 세상을 비춘다.
그리고 낮 시간에는 정직하고 곧게 내려쬐며 대지를 덥히다가
또 다시 늦은 오후부터 일몰 직전까지는
아침보다 좀 더 짙고 차분하며 따뜻한 느낌으로 대지를 품에 안는다.

햇살도 가만히 관찰해보면 이렇듯
새벽과 아침 오후와 저녁 때가 예민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더라도 그 차이점이 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마다의 햇살이 제각기 독자적이고 완전한 자기의 삶을 대지 위로 꽃피워낸다.

햇살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대지 위의 모든 존재며 생명들이
모두가 저마다의 시공간 속에서 제각기 독창적이고 완전한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자신의 길을 온전히 걸음으로써
그 안 깊은 곳에 담겨진 진리를 고스란히 세상에 표현해 낸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그 모습 그대로의 모습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온전한 완성과 지복의 행복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울릉도도 울릉도만의 독자적인 모습으로써 존재함으로써
이렇듯 법계의 아름다움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많은 곳이 그러고 있듯이
이 울릉도도 머지 않아 개발과 발전의 논리가
섬 전체를 집어 삼킬 지 모르겠지만
그랬을 때는 더 이상 울릉도가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잃고 말 것이다.

쭉쭉 뻗은 빌딩숲이나 대형 콘도며 호텔들,
인공의 잔디가 광범위하게 깔린 골프장이며,
산을 뚫고 길을 내거나
저 성인봉 정상에까지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등
이 무위의 섬 울릉도에 문명의 이기와 인위적인 것들을 들여놓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울릉도는 더 이상 울릉도만의 성품을 잃고 말 것이다.

그것들이야 어디든 다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을 애써 울릉도까지 들어와서 또 봐야 할 것이 무언가.
하기야 이 울릉도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고,
전 세계가 이미 개발과 발전의 논리로 인해
저마다의 온전한 독자성과 독창적인 본성을 잃고 말았다.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세계적인 휴양지라는 곳은
죄다 똑같은 유럽식 호텔에, 똑같은 조경에, 똑같은 아스팔트 길이며
무엇 하나 그 나라만의 그 고장만의 독창적인 멋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을 찾아보기 어렵게 돼 버렸다.
그런 인위적인 것들은 생명의 기운을 떨어뜨리며
그 고장만의, 그 나라만의 독자적인 진리 성품을 사장시키고 말 뿐이다.

대자연은 항상 진리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무위로써 자연스럽게 살려지고 있다.
법신 부처님의 숨결대로, 아버지 하느님, 어머니 대지의 선택 대로
모든 것을 내맡기며 자연스레 자신만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 시키고
대자연의 진리에 모든 것을 내맡기면서 살려지도록 놓아두는 것만이
시름 시름 앓고 있고, 아름다운 생명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이 지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이 될 수 있다.

숲 터널을 따라 계속해서 오르니 어느새 인가
가을의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고 완연한 겨울로 옮겨왔다.



발 아래는 지난 주엔가 왔다는 눈이 완전히 녹지 않은 채 길 섶에 있고
때때로 마가목 빠알간 열매들만이 흑백의 명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성인봉 가까이에 조금 더 다가가니
발 아래로 어제 가 보려다 못 갔던 봉래폭포 쪽 계곡과
저동항의 풍경이 창창하게 펼쳐진다.



햇살이 많이 비치는 곳에는 눈이 거쳤는데
초록의 연한 이끼들이 햇살을 받아 곁의 눈을 녹여가며
겨울을 날 생명수로 흡수하고 있다.



조금 더 걸으니 안평전과 도동 대원사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성인봉 오르기 전 만나는 곳, 삼거리 쉼터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드디어 성인봉 정상.



바람은 차다.
성인봉 정상에 올라서니
그야말로 울릉도 섬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눈만 돌리면
산과 바다가 조화롭게 펼쳐진다.



올라오는 쪽 하늘은 구름이 별로 없어 화창했는데
성인봉에 올라 반대쪽을 보니 하나 둘씩 구름이 모여들고 있다.



성인봉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나리분지와
그 너머의 바다,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진 구름들이 한 폭의 그림같다.

구름이 오며 가며
나리 분지의 신비를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고 있다.




한참을 성인봉 위에 앉아 울릉도 중심에 서서
이 울릉의 법계를 다만 바라보고 있다.

아침에 민박집 어르신께서 성인봉의 산기운이 전국에서 제일이라며
꼭 정상에 오르면 정성스런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라고 했던
당부가 생각났다.
언뜻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당신께서도
불경 공부를 꾀나 많이 하셨고 요즘도 집안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기도 수행을 퍽이나 열심히 하시는 모양이었다.

어르신의 말씀도 말씀이려니와
이 생경한 신비감에 저절로 기도심이 북받쳐 올랐다.
“이 법계 두루 두루에 대자연 법신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이 경이로운 삶의 신비에 눈뜨지 못하고 여전히 아만과 욕심,
이기에 물든 모든 이들에게 지혜의 빛 찬연히 비추기를,
기아와 가난, 전쟁에 깊은 상처를 받고 죽어간 수많은 형제들께
본래 청정, 본래 원만 구족의 대 적멸이 깃들길,
이 세상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깨어있음의 연꽃 한 송이 피어오르길,
깨달음을 향한 적멸의 발원 이 생을 넘기지 않길,
성인봉 산신님께, 울릉도 이 대자연 법신불께,
아버지 하느님, 어머니 대지에 간절한 마음 모아 기도드렸다.”


둘째날, 성인봉에서 나리분지까지(성인봉출발, 10:00)

아이젠을 하지 않아 그런지
나리분지로 향하는 내리막길은 퍽이나 미끄럽다.



초록과 흰 눈, 그리고 나무와 하늘색의 조화가
마치 하늘 예술가가 내려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내 안의 특별한 정서를 일깨우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약수터 성인수에서
성인봉의 정기어린 시원한 생명의 감로수를
대자연 벗들에게 한 잔 대접받고 났더니 더없는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가는데
‘이곳이 성인봉 원시림이구나’ 싶은 생각이 번뜩 스칠 법한
그런 창연한 숲과 오랜 고목들을 만났다.



약 500여 년 된 섬피나무가 있다고 하니
얼마나 오랜 역사를 이 한 곳에서 살아내며
500번이나 반복되었을 계절의 변화와 생멸을
온몸으로 버텨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500번의 봄에 꽃을 피웠을 것이고,
또 500번의 여름을 짙은 초록으로 물들였을 것이며,
500번의 가을에 단풍을 만들어 잎을 떨구고
지난한 500번의 겨울을 시린 침묵에 잠겨왔을 것이다.

그러면서 잎은 흙이 되고 거름이 되어
다시 제 생명의 뿌리로 되돌아 가
또 다시 자신의 뿌리를 가지를 잎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윤회의 작업은 500여 년 동안 끊임없었을 터다.
겉모양을 바꾸며 몇 번이고 윤회에 윤회를 거듭하면서
저렇듯 육중하게 세월의 역사를 한 몸에 담아
지금의 원시림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것 같은 나무 한 그루도
그 존재 안에는 무시무종의 윤회와 숯한 업연이 담겨 있고
전 우주적인 소식을 내제하고 있으며
그 피어남을 위해 온 우주가 기꺼이 도왔을 터다.

그렇기에 나무 한 그루도, 풀 한 포기도, 하찮게 보이는 곤충 하나조차
전 우주 법계의 거룩한 신성이 불성이 담겨 있는 숭고한 존재다.
하물며 사람이랴.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이든,
가난에 찌들어 괴로운 사람이든,
하물며 큰 죄를 지은 죄수라 할지라도
어찌 그 존재가 하찮을 수 있겠는가.

오랜 세월이 담기고 역사가 담긴,
지난 세기를 묵묵하게 살아 낸 원시림 숲의 정령들과
나무와 대지에 깃든 생명신들,
대자연의 천사들과 청량한 선신들
어떻게든 이름 지어진 그 모든 인연 도반들께, 이웃들께
이렇게 숲 길을 걸을 수 있음에 대한 깊은 감사와 경외를 보냈다.

원시림 숲 속을 가로질러 내려오는데
저 아래 계곡이 크게 몸살을 앓고
살저름을 떼어내는 듯한 아픈 현장을 목격했다.



지난 태풍으로 인해 이 거대한 원시림 계곡이 무너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의 조화는 언제나 여여하고 법에 맞다.
여법한 일들, 꼭 필요한 일들만이, 꼭 필요한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대자연을, 이 우주 법계를 바라보는
가장 큰 ‘보는 관점’, 정견(正見)이 되어야 한다.

이 아름다운 숲이 왜 이렇게 훼손되고 있을까.
왜 태풍은 매년 이 아름다운 대지를 할퀴고 지나가는 것일까.
그것은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온 우주적인 문제이며, 전 지구적인 문제이며,
전 역사적인 복잡한 인과가 인다라망처럼 얽혀 있는 문제다.

어쨌든 그 이유들을 하나하나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 태풍 또한 이 세상에, 이 곳에
꼭 필요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여여하게 이렇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어쩌면 아직 더 많은 태풍이, 폭우가, 지진이, 해일이
이 세상을 뒤덮어 버릴 지 모른다.
지금까지 있어 온 기상이변들은 어쩌면 서막에 불과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에 전 세계적으로 거대하게 일어나는 기상이변은
대자연 존재계의 본질에서 보내는 지구를 위한 자비로운 힌트일 지 모른다.

여전히 신은, 붓다는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경고 혹은 힌트를 보내고 있다.
사람들이 대자연을 훼손하는 공업(共業)을 세계적으로 꾸준히 짓다보면
인과의 결과 이 지구는 결국 그 당사자인 인간들을 훼손시키고 말 것이다.
그것이 공평한 인과응보의 이치가 아닌가.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기상이면들은
바로 그것이 시작되고 있음을,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끊임없이 개발지상주의에 빠져 전 지구를 파헤치고 있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강력한 힌트를 존재계의 본질에서 꾸준히 보내주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 힌트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알아채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해 왔던
온갖 욕심충족과 만족을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심이 그 힌트를 무시하고 있다.

대자연이 보내는 자비로운 경고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수많은 기상이변이며 대형 태풍들이 불어닥칠 때
그 힌트를 알아채고 곧장 본질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본질은 무엇인가.
이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대자연을 훼손시키지 말고,
개발이란 이름으로 죽이지 말고,
사람의 생명과 대지의 생명이 둘이 아니란 자각으로써
조화로운 지구 공동체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조금 더 절약하고, 조금 더 만족하며,
욕심을 줄이고 집착을 버리며,
대자연의 시름 시름 앓고 있는 몸살을 동체대비로써 어루만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본질에 접근하기 보다는
지엽적인 것에만 매달려 어리석게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
태풍으로 계곡이 무너졌다고
콘크리트로 계곡을 반듯하게 바를 생각만 하고 있다.

지금 전국의 모든 하천들은 예전의 생명하천이 아니다.
모두가 반듯반듯하게 콘크리트 등으로 인위적으로 쌓아 놓아
작은 하천생명들이 더 이상 살아낼 수 없는 죽은 환경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바람대로 모든 하천은 깨끗해졌다.
흙도 별로 없고, 풀도 없고, 나무도 없으며
그 안에 깃든 하천 생명들도 사라져 버렸다.
오직 죽은 물이 흐르기만 하는 기능성 정비 하천이 되어 버렸다.
그래놓고 사람들은 그런 하천 풍경을 보며 개발되어 좋다고 말한다.
너도 나도 우리 동네 하천도
그렇게 포크레인과 거대 자본으로 개량해 주길 바란다.

모든 사람이 죽은 하천을 바란다.
그것을 깨끗하다고 여기며,
그것이 개발과 발전의 이기이며 축복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 인위적인 정비 하천을 보며 물도 맑아졌고
물길도 구불구불하던 것이 잘 펴졌으니
이만하면 환경 정비가 잘 되었다고 하겠지만 그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자연 하천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온전하다.
그래야만 사람도 살고 그 물에 물고기도 작은 생명체도 살아갈 수 있다.
이제 모든 개발 정책은 최우선에 생명을 두어야 한다.
하찮게 보이는 생명이 살아나야 인간 생명도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 곳 성인봉 아래 나리분지 가기 전의 무너져 가는 계곡도
그걸 살리겠다고 지금 곳곳에 포크레인과 대형 장비들이 들어 와
계곡에 새로 튼튼한 인위적인 벽을 쌓는 현대적 정비작업에 나섰다.



반듯하게 쌓아 올린 인공 계곡과 하천의 모습을 보니
더 깔끔해 지고 있다는 느낌 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무언가 산과 나무와 계곡의 조화가 깨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냥 내버려두면 자연은 저절로 진리에 걸맞는 꼭 필요한 만큼의
정비와 정화를 스스로 해 낼 것이다.
인간의 해석과 장비를 들이대니 그것이 병인 것 처럼 보이고,
인간이 개입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만히 놔두었을 때,
자연의 일은 자연 스스로에게 맡겨 두었을 때
자연은 정확하게 해야 할 일을 알고 스스로를 치유하기 시작한다.

물론 요즘의 현실이 애초부터 사람에 의해 발전되고 파괴되다보니
한 번 사람 손이 간 것들은 이제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에 길들여 져 복구가 되어야지만 되도록 해 놓아서
어쩔 수 없이 인위적인 손길이 필요한 곳들도 있지만,
그런 곳이라도 될 수 있다면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으로, 모든 생명을 살리는 방법으로
그 방법이 전면 제고되어야 할 것이다.

본래 자연에는 병이 없다.
자연 속에 깃든 모든 존재는 병으로 앓지 않는다.
유독 인간들만이 병으로 고생하고
인간에게 길들여진 애완동물들만이 인간의 병을 닮은 온갖 병들로 고생한다.

자연이 병들어 보이는 것도 사실은 그게 병이 아니다.
변화의 한 모습일 뿐.
그래서 자연은 파괴되는 듯 보이는 겉모습도
자연스런 삶의 과정으로 인식된다.
그러니 인간이 보기에 병들어 보이는 것도
가만 내버려 두면 스스로 알아서 치유된다.

저 성인봉 아래 하천을 정비하겠다는 모습만 보더라도
자연을 보호한다는 것이 도리어 흉측하게 바꿔 놓았다.
한 번 인위가 개입되면 그 때부터는
작은 상처에도 인간이 개입되야 하고, 온갖 기술과 장비,
돈과 인위적인 노력이 따라 들어와야 한다.
여러모로 번거롭고 어리석은 일들이 점차 우리 주위에는 늘어가고 있다.

이 늦가을, 하천 정비 공사장 곁에는
6, 7월에 피는 섬바디 하얀 꽃이 계절 감각을 잃고 피어올라 있다.

더 아래 나리분지 가까이에는 또 하나
한창 겨울에 피어야 할 동백꽃도 유독 한 나무에서만
빠알간 생명의 숨결을 틔워올리고 있다.



조금 더 걸어내려가니
울릉도 전통 가옥이라는 투막집 몇 채가 보이고



나리분지 쪽에는 너와집도 몇 채 보인다.



요즘 흙이나 통나무로 만든 전통 가옥에 대해 관심이 가던 터라
유심히 관찰하며 투막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그야말로 울릉도의 자연에서 나온 흙과 나무 그리고 볕집들이
조화롭고도 견고하게 짜여져 있다.



역시 옛 사람들의 자연스런 지혜는
인위적이기 보다는 무위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바탕으로 하는
선지자의 그것이다.
옛 것을 보라.
어느 것 하나 파괴되거나 조화를 깨는 것이 없다.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아 말할 것이고,
또 실제로도 실현 불가능하겠지만
이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정말 획기적이고도 혁명적인 방법은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요즘은 그런 옛 것의 우수성이 점차 알려지기도 하고
또 옛 것과 새 것을 잘 공유시킨 의식주 물품들이 유행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한 때의 유행이나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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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릉군 북면 나리 |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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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첫째날, 내수전 일출 전망대에 올라...


울릉도에 도착하자마자
복잡한 도동을 피해
언덕 하나 넘어 가까운 이웃 마을 저동에 여장을 풀었다.



소박하고도 호젓한 어촌 저동의 풍경을 뒤로
내수전 일출 전망대에 올랐다.

가슴이 탁 트이는 바다 풍경,



그리고 고개들어 바라보면
우뚝 솟은 높은 산의 신비로운 그림.
그 위로 떠가는 구름, 태양.



이제 해는 서산 너머로 떨어지고
바다는 조금씩 어두운 침묵 속으로 잠긴다.

조용하다. 고요하다. 적멸!
저동항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의자에 앉아 내 삶을 의지한다.



아랫마을 개짓는 소리,
일 끝나고 들어가는 농부의 경운기 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나직한 파도소리,
그리고 침묵, 침묵, 침묵!!!

세상도 침묵하고 내 마음도 깊은 침묵에 잠긴다.
이 거대한 산과 바다의 침묵,
선(禪)으로 이끄는 이 풍경들이 내 마음을 비워준다.

저 멀리서부터 스치우는 바람이 지나는 소리
들리고 듣는다.
저 멀리 저동항 불빛들이 하나 둘씩 켜지고
내 마음에도 고독의 불빛이 짠히 켜지고 있다.





산은 높다. 그리고 바다는 넓다.
높고 넓은 산과 바다, 그 한 가운데
그 둘을 잇는 그 속에 한 존재가 서 있다.
높고 드넓은 산과 바다의 마음이 되어.

바다 한 가운데 홀로 외로이 떠 있는 섬,
죽도, 죽도는 또 하나의 고독이다.



내 안의 외로움과
산과 바다의 깊은 침묵의 외로움,
그리고 저 바다 속 홀로 떠 있는 죽도의 외로움은
오롯이 한마음이다.



아!! 이 고요, 이 침묵, 이 고독이 좋다.
평온하고 깊다.

두 세 차례 몇몇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드문 드문 내 앞을 스치고 있다.
사람들은 오고 또 가고 시간은 흐르는데
나 홀로 시간이 멈춘 듯 그렇게 그렇게 앉아만 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짐작해 볼 뿐.
어둠이 내려앉고
산과 바다의 빛이 바뀜을 통해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



이 고요함이 좋다.
이 외로운 침묵이 좋다.

아니, 좋다기 보다 아주 미미한 감각.
좋되 좋지 않고, 외롭되 외롭지 않은 작은 떨림.
내가 좋은 것이 아니라
이 대지가 이 산이 이 바다가 좋다.
그 좋은 대자연의 영혼에 내 마음이 살짝 포개어지는 듯 하나되는 듯
그런, 그런 느낌...

어쩌면 내 전생은 외로움이었는가. 침묵이었는가!
내 온 곳은 외로움이고 침묵의 그 곳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도 외롭고 고요한 침묵의 그 곳!
그 곳은 일상에서는 잘 보여지지 않다가
이렇게 홀로 깊은 존재의 침묵을 마주할 때
그 때 힐긋 힐긋 그것도 아주 미세한 감각으로 보여질 뿐이다.

바다엔 침묵이 깊고 하늘엔 구름이 짙다.
저 산 위에 떠 있는 먹구름 사이로 간간이 햇살이 비치며 흐른다.



하늘 천신이 손전등으로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에
그림처럼 사는 사람들의 삶을 비춰보는 듯
햇살은 한 줌씩 산 허리를 스쳐가고 있다.



하늘의 구름도 노을이 선사하는 노랗고 붉은 빛의 옷을 갈아 입고
바다와 산과 들녘, 그리고 바람과 파도가 만들어내는
대자연의 오케스트라 연주에 막바지 혼을 다하고 있다.
산 너머로 지는 태양에 비친 구름 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다.



그렇듯 저 높은 산 바로 위에 앉아 짙은 구름 뒤에 숨은 채
잠깐 잠깐씩 보여주던 애잔한 햇살도
이제 완전히 서산 뒤로 넘어갔고 어둠은 더욱 짙게 깔렸다.
대자연의 어둠이 깊어지면서 사람들의 불빛은 더욱 늘었다.
이제 나도 저 사람들의 불빛 속 어딘가에 몸을 뉘여야지.

이제 어둠도 제법 깊어졌고 배도 출출해 온다.
저 아래 불빛들 속에 내 작은 거처로 발길을 돌린다.
터벅 터벅 내려오는 길, 어둠은 깊고 침묵은 무겁다.

바닷바람이 싸늘하게 불어 와 내 안 깊은 곳에까지 가 닿는다.
밤 바다를 스치운 찬 바람이 살갖을 적실 때
온 존재의 감각이 깨어나는 듯 몸까지 출렁이며 파도친다.
그래서 한여름보다 이렇듯 늦가을이나 겨울 문턱에서
대자연과 접촉하는 느낌은 ‘깨어있음’이란 청량한 존재감을 가져다 준다.

오래도록 느릿 느릿한 발걸음으로 바닷길을 걷는다.
방파제에서 바라 본 저동항의 불빛들이
내 안의 서정과 감성을 마구 뒤흔들며 일깨우고 있다.



이런 깨어있는 시린 외로움의 청안청락의 시간을
그냥 좁은 골방 안에서 가둬두기 싫어
늦은 밤까지 옷깃을 여미며 저동항 곳곳을 거닐었다.

동네 작은 분식점이 마침 문을 열고 있어 들어갔더니
중고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며,
공사 인부들이 소주 한 잔 기울이며 회한을 품어내는 소리가
이곳도 사람사는 곳이란 새삼스런 자각을 일깨워 주었다.

아! 그랬었구나.
이 외로운 섬 속에도 삶이 있고 고뇌가 있고
사람 사는 향기가 물씬 풍기는 그 누군가의 고향이구나.
모처럼 홀로 서정적이고도 선(禪)적인 섬 풍경에 깊이 빠져들다 보니
잠시 세상의 일을 잊고 말았는가.

식당에 들어 와 음식을 시키고 앉아 있자니
아침 10시 쯤에 포항에서 배를 타기 전 터미널 앞 식당에서
간단히 된장찌개를 먹고는 내내 빈 속이었음이 상기되었다.
그러고 보니 전망대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속이 출출했었는데
배고픔도 잠시 잊고 저동항의 밤풍경에 젖어 있었나 보다.



공양을 하고는 소화도 시킬 겸
조금 더 걸으며 어촌의 밤 풍경을 느끼다
늦은 밤이 되어 방 안에 들어 녹록한 몸을 뉘였다.


둘째날, 새벽 저동항의 일출(민박집 나섬, 06:40)

저동항의 불빛 속에서 잠을 청하고 새벽을 맞는다.
일찌감치 눈이 뜨여졌다.
창문 커튼을 열고 기지개를 쫘악 켜고 나니
새삼 내 몸이 머물고 있는 곳이
낯선 섬 어느 귀퉁이란 사실이 느껴지며
자유로움, 평화, 혹은 그 어떤 짠한 해방감 같은 것이 밀려온다.




이런 느낌을 가만히 느껴보는 것 또한
일상을 벗어난 여행이 내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저동항과 촛대바위의 깨어남을 창 밖으로 바라보며
아직 깨어나지 않은 어둠을, 그리고 낯선 섬에서의 설렘,
일상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될 수 있는 한
온 몸의 감각으로 깊이 충분히 느끼고 또 느꼈다.



이 울릉도가 준 또 하나의 선물은 사람이다.
하룻밤을 머문 허름한 민박집 주인 어르신의 인간미와 자상함은
도무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내가 태어나서 이런 깊고 진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고작해야 엊저녁에 도착하여 오늘 새벽에 떠날 사람이고
그것도 엊저녁에는 늦게까지 내수전 전망대에 올랐다가
저동항의 야경 속에서 거닐다 늦게 들어간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잠깐 스친 인연일진데
그 잠깐의 시간 안에서 인간의 깊은 향기를 듣는다는 건 참 어려운 일 아닌가.

아직도 그 짠한 사랑과 관심과 인간미는 내 안에 온기가 되어 남아 있다.
전혀 모르는 한 사람이 한 사람과 만나 이런 깊은 관계를
그것도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가질 수 있다는 건
세상이 얼마나 살아볼만한 곳인가를 깨닫게 해 주는 삶의 축복이요 선물이다.

누가 소개를 시켜주는 바람에 엊저녁을 이 민박집에서 묵었는데,
이 선택이야말로 울릉도라는 섬에서 보고 느낀 최고의 선물로 기억된다.
그래서 만행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전혀 다른 삶 속으로 뛰어들어 본다는 건 이렇듯 새로운 선물을 선사해 준다.

찬 물에 세수를 하고 정신을 일깨우며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주인 어르신께서 방 안으로 들어오시더니 지도를 펴서
오늘 하루 내 일정을 꼼꼼하게 체크해 주신다.

촛대바위에서의 새벽 일출, 아침 공양, 안평전까지의 차편,
성인봉 오르는 길, 등산후 나리분지에서의 점심 식당,
그 이후 바닷길 코스에서부터 통구미의 일몰까지
오늘 하루의 일정을 하나하나 지도를 짚어가면서 설명해 주셨다.

민박집을 나서면서 방값이 생각보다 너무 헐어
조금 더 드리겠다고 했더니
방도 좋지 않은데 뭘 더 주느냐고 한사코 마다하신다.
이런 분께는 그 배로 값을 치르더라도 아까운 생각이 없다.

은사스님께서는 항상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거나 거래를 하실 때
생각보다 더 많은 액수를 지불하곤 하셨다.
분명히 더 깎을 수도 있는데 깎기는 커녕
오히려 달라는 액수보다 더 많이 얹어 드리는 일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사람들과의 거래에서는 미리부터 조금 받고 많이 주겠노라는
그런 생각이 있으셨던 것 같다.

경주 남산 중턱에 도량을 지으실 때에도
그 시골 땅을 대구 시내 땅값을 쳐 주며 사셨고,
무언가 도움을 받으면 그 도움에 대한 몫보다 항상 더 많이 얹어 주셨다.
도량의 처사님이나 공양주 보살님께도
항상 월정 보시금 이외에 기도 때며 행사 때마다
당신과 똑같은 몫의 대중 보시를 나누곤 하셨다.

그런 마음으로 사시다 보니
사람들과의 거래에서 손해를 본다거나
흔히 있을 거래에서의 손실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일이 없다.
남들이 보기에는 손해이겠지만
당신의 거래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일상이셨다.

그런 은사스님의 가르침은 내내 내게도 넓은 마음을 심어주셨다.
은사스님 도량에서 하산하여 내 길을 처음 갈 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낯선 세상 물정을 거래할 때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바가지를 씌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는데
은사스님처럼 그래 주는 마음으로 손해보는 마음으로 살자 하고
턱 놓고 가니까 가는 곳곳에서 오히려
향기나는 사람, 풋풋한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설사 조금 손해를 보고 거래를 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로인해 손실을 보았다거나
어떻게 저렇게 장삿속을 드러내며 이익을 챙길 수 있느냐거나 하는
그런 진심과 분별이 생기지 않아 좋았다.

기어이 민박집 어르신께도 내가 받은 감사의 마음의 표시로
주머니 속에 얼마를 더 넣어드리고 나오는데
같이 가자시며 잠바를 걸쳐 입고 따라 나서신다.

한사코 춥다고 안 나오셔도 되니까 그냥 계시라고 해도
끝까지 따라 나오시면서 식당도 소개해 주시고
일출을 보고 택시를 잡아타는 것까지 끝가지 챙겨 주셨다.

든든히 아침 공양을 하고 나가니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다.



촛대 바위 너머 저 멀리 수평선 가까이부터 붉은 색감이
하늘로 하늘로 번져 오르기 시작한다.



어둑어둑하던 하늘과 구름들이
조금씩 조금씩 가장자리부터 붉은빛 물감을 풀어내고 있다.
그러더니 이내 그 옅은 먹구름 사이로
햇살 한 줄기 거짓말처럼 고개를 내민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덧 햇살이 찬연히 구름의 빛깔을 황홀하게 바꾸어 놓더니
이내 구름들이 조금씩 걷히고
붉은 태양 빛을 배경으로 파아란 하늘이 속살을 수줍은 듯 드러내고 있다.



아직 바람은 차다.
찬 바람이 계속 신경이 쓰인다.
여기 택시값이 여행자에게는 부풀려 지는 경우가 많다고
일출 보고 나서 정직한 택시 기사를 불러주시겠다며
끝까지 찬 바람 속에서 매일 아침 일상처럼 맞을 일출을
천진하게 함께 기꺼이 맞이해 주시는 어르신이
혹시나 감기나 걸리지 않으실까 걱정이 되었다.

들어가시라고 몇 번을 더 말씀드려도
막무가내로 손가락을 수평선 쪽을 가리키시며
딴 생각 말고 일출 놓치지 않게 눈을 떼지 말라시며
일출은 잠깐 사이에 불쑥 떠오른다고 조언을 해 주신다.



이 곳에서는 창만 열면 일출을 맞이 할 것 같지만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신다.
울릉도에서는 일 년에 3/1 정도 밖에
화창한 일출을 감상할 수 없다고 하시며
오늘이 바로 그 날인 것 같다고 어린애처럼 좋아하신다.

드디어 붉은 태양이 저 바다 위로 힘주어 떠오른다.



새벽부터 일 나간 어부의 작은 배를 뒤로
온 세상을 일깨우는 광명, 일광보살이 내 눈앞에 나투고 있다.





저동항도 함께 깨어난다.



붉은 빛을 받아 저동항 집집들이, 어선들이
선홍빛으로 단장을 하고 있다.



몇 몇 여행자들은 새벽 일출을 보겠다고
방파제로 등대로 뛰어 나왔고
바다 갈매기들도 일광보살의 설법에 날개짓으로 화답하고 있다.



아! 뜨겁다.
차고 시리지만 뜨겁다.



속 깊은 곳까지 붉어진다.



저동항 어선이 들어오고
어부들은 오징어를 분주하게 다루며 삶을 살아내고 있다.



어르신 말씀이 지금은 고작 이정도지만
옛날에는 이 곳 전체가 오징어 배들과 사람들
또 파닥거리는 오징어들로 가득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러고 있는데 할아버님께서 어느새 전화를 하셨는지
한 택시기사님께서 우리를 부르며 손짓하고 있다.
할아버님 처럼 믿음이 가고 든든한 또 순수해 보이는
30대 후반쯤의 청년 택시기사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