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8가지 방법

- '11. 01. 23

- 법상스님 설법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8가지 방법

1. 근원에 내맡기기[삼귀의, 멸성제]

- 불성, 주인공, 근원, 본질의 힘에 내맡기라

- 모든 병의 원인은 나를 성장시키고, 귀의(본질로 돌아가기)를 위한 방편이다.

- 병의 원인은 내면에 있으며, 그 치료방법도 내 안에 있다.

- 우리는 이미 건강과 완전성을 부여받았다!

- 내면의 불성이 나를 완전히 치유할 수 있도록 믿고 내맡기라.

2. 수용[고성제]

- 받아들임, 허용, 인정하기

- 병을 거부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라.

-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계속 지속된다.(업장)

- 그 병이 온 것은 풀려나고, 업장소멸되기 위함이니, 그것을 빨리 끝내라.

- 받아들임만이 병일 치유한다.

- 1년 걸릴 병이 거부하면 2~3년 이상으로도 늘어나지만, 받아들이면 1개월에도 끝남

3. 원인 탐색[집성제]

- 그 병(문제)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라.

- 부처님께 내맡겼기 때문에 불성의 근원자리에서 그 원인을 찾아 줄 것이다.

- 병(문제)이 있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업(기억, 경험,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 업은 세포 차원에서 기록(기억)되어, 계속 이어져 온다.

- 세포는 끊임없이 변하고 생성/소멸을 반복하지만 아픈 곳은 계속 아프지 않는가?

- 그 병을 가만히 느꼈을 때, 떠오르는 생각, 과거의 경험, 좋지 않았던 느낌을 떠올려라

- ‘그 병의 뒤에, 이면에,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가?’ ‘그 병의 원인은 무엇인가?’

- 그 병의 원인과 잠시 함께 있으라. 그것을 느끼고 수용하고 받아들이라.

- 그것을 풀어주고 놓아버리기 위해, 다음의 순서로 멸성제를 사용하라.

- 만약, 원인이 떠오르지 않거나, 전생의 업장인 것 같다면, 그냥 내버려두라.

-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해도 상관 없다. 다음의 단계로 넘어가라.

4. 참회[도성제]

- 부정을 소멸하는 단계

- 모든 문제는 내가 만들 뿐이다. 법계나 부처나 타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 나의 진정한 참회와 내려놓음이 있어야 한다.

- 원인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렇더라도 무엇인지 모를 그 원인에 대해 참회하라.

- 사참회 후 이참회하라 - 죄의식을 버려라. 두려움을 풀어주라.

5. 용서[도성제]

- 부정을 소멸하는 단계

- 진정한 참회는 용서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모든 병과 문제와 화해하라.

- 그 문제를 만들어 낸 ‘나 자신’을 먼저 용서하라.

- 그 문제와 연관된 ‘타인’ ‘상황’ 등을 완전히 용서해 주라.

- 원인이 떠오른다면, 그 원인의 상황(나와 남)을 완전히 용서해 주고 용서받으라.

- 근원의 차원, ‘나의 본질’이라는 내 불성의 차원에서 모든 것을 용서해주라.

- 원인이 떠오르지 않더라도, 이 문제(병)을 만들어낸 그 모든 이유를 용서해주라.

- 무언가 모를 어둡고, 탁하고, 막히고, 정체되며, 악한 그 행을 용서해주라.

6. 감사[도성제]

- 긍정을 확대하는 단계

- 그 문제로써 업장이 녹을 수 있음에 감사하라.

- 그 정도로만 나올 수 있었음에, 더 심하지 않음에 감사하라.

- 지금 나오지 않았으면, 훗날 더 큰 업장을 받았을 것임을 상기하며 감사하라.

- 이 문제 때문에 이렇게 마음공부하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라.

- 감사의 이유를 찾지 않더라도, 무조건적으로 감사를 느껴라.

- 이렇게 살아있음에 감사하라.

7. 사랑[도성제]

- 무조건적인 긍정과 본질적인 사랑,

- 지금 이 상황을 사랑하라. 이것이야말로 법계의 무한한 사랑임을 느끼라.

- 병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 그 문제를 사랑하라.

- 그 병을 미워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어떤 부분을 미워하는 것이다.

- 동체대비, 나와 병은 둘이 아니기에 그것을 사랑할 때, 병을 사랑하게 된다.

8. 관(觀)[도성제]

- 무위법의 근원적 치유

- 앞의 7단계는 유위법적인 치유방법이지만, 이 단계는 무위법의 함이 없는 치유

- 근원에 내맡기게 해 주고, 수용하게 해 주며, 참회와 용서, 감사와 사랑이 가능하게 함

- 다만 아픈 부분을 관찰하기만 하라.

- 분별하지 말고, 빨리 낫기를 바라지도 말고, 그저 다만 알아차리고 바라보라.

- 관 자체가 바로 사랑이며, 수용이고, 내맡김이며, 진정한 용서다.

- 심리치유, 심리학에서도 마인드풀니스라는 알아차림의 관수행을 주목하고 있다.

- 앞의 7단계의 치유를 몇 번 반복해 행한 뒤, 그 다음 부터는 오직 관하라.

Posted by 법상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풍요로우며, 긍정적이고, 감사할 일로 넘쳐나는,

무엇보다도 무한한 사랑이 꽃피어나는

생활 속에서 실천 가능한 명상법이 있어 화재다.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으로 연기법이라는 것이 있다.
연기법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연들이 화합함으로써
연하여 일어난다는 이 세상의 법칙을 말한다.

어떤 한 가지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장엄한 동참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른 봄에 피는 꽃 한 송이 조차
저홀로 피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가 참여하고 도운 것이다.

연기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 삶 위에 놓여 있는 일체 모든 존재며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하나도 예외없이 우주법계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얽히고설킨 인연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나무에 초록의 새순이 돋아나는 것조차
그 나무 혼자서 초록을 틔우는 것이 아니라
흙과 물과 바람과 햇살과
나아가 일체 모든 존재가 크고 작은 연관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렇게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먹는 쌀 한 톨 조차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유정 무정의 일체 모든 존재들이
도왔고 참여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물며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가?
내가 이렇게 먹고 자고 입고 살아가는 것,
그것 또한 내가 잘나서, 내가 돈 잘 벌어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또한 조금 깊이 연기적으로 사유해보면
일체 모든 사람들과 하늘 바람 구름 햇살을 비롯한
이 우주법계 전체가 어머님의 품처럼 나를 돌보며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가.
우리는 과연 그러한 법계의 도움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겠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그러한 우주법계의 크고 작은 도움들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해 오면서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주지 않는데 대해
탓하고 미워하며 원망만 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그 일체 모든 존재의 무량한 베풂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 살기 보다는
더 많이 주지 않음을 원망하며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법을 이해하는 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연기적인 우주의 도움을
매 순간 감사하며 고맙게 여기고 살아야 한다.
그러한 감사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우주의 은혜에, 법계의 도움에 보답하는 삶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에서 ‘감사’가 중요한 이유다.

이러한 연기적인 ‘감사’의 실천은
생각하고 따져봐서 감사할만한 이유가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조건적인 감사, 밑도 끝도 없이 대책 없는 감사를
온 우주에 펼쳐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이 우주의 드넓고도 깊은 차원의 전방위적인 도움을
도저히 다 헤아리고 알아차릴 수 없다.
어떻게 생각으로 그것을 다 보고 알 수 있겠는가.

그 우주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의 도움과 은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것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넓고 깊다.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영겁의 생과
전생에서의 업장과 인연들 전체를 아우르는,
시공을 초월하는 작용으로써 우리를 무한히 돕고 있으며,
우리를 살려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짚어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삶의 핵심 키워드가 있다.

 



이러한 무한히 살려주는 연기의 법칙이 우주 법계의 방식이라면
그 우주법계의 진리와 하나되는 길,
법계의 진리를 깨닫고, 우주의 힘을 끌어 쓸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바로
‘감사’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삶에 대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지금 나에게 갖추어진 상황과 조건에 대해,
완전히 받아들여 수용하고,
나아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방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우주의 크나큰 도움에 보답하고
작게나마 회향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더구나 우주법계에서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도와 줄 준비를 항상 마치고 있다.
언제든 우리가 그 도움을 요청하고,
그 은혜를 받아들일 준비만 되어 있다면
우주법계는 모든 것을 내어 준다.

그래서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돕는 일만 하며,
항상 우리를 돕고자 하는 자비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100%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우주법계의 도움을
마땅히 뿌리친다.
뿌리칠뿐더러 우주법계의 도움에 대해
여전히 부족하다고 아쉬워하고 원망하며
심지어 증오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그 우주법계의 도움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는가?
먼저 첫째는 나를 열어놓아야 한다.
우주법계의 도움이 아무런 걸림 없이 나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해야 한다.
마음을 닫아두면 들어 올 수가 없다.
마음을 활짝 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주법계의 자비롭고도 밝은 힘은
나에게 와 닿으며 나를 변화시키고
내 주위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여기 그 우주법계의 도움을
조금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법계를 감동시키고 움직여
나에게 더 많은 도움이 올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우주법계가 나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 사실에 대해 고마워한다는 뜻이다.
일체를 받아들이되 대 긍정으로 감사로써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대해
충분히 만족스러우며 충분히 감사하다는 뜻이다.
충분히 누리고 있으며, 충분히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이 우주법계로 인해
더 많은 감사와 더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오게 만드는 핵심적인 에너지이고,
마음 하나로 세상의 주인이 되는 방식이며,
이 우주법계와 하나 되는 진리의 방식이다.

만족과 감사는
그냥 단순한 도덕적인 덕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언어요, 참된 말 즉 진언(眞言)이다.

단순하다.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라.
만나는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느끼라.
그것이 어렵다면 그저 ‘감사’를 외치라.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라.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해
밑도 끝도 없는 무조건적인 감사를 외치라.

나 자신을 향해,
이 세상과 우주를 향해,
법신 부처님을 향해,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를 향해,
그리고 자동차와 집과 하늘과 구름과
읽고 있는 책과 신고 있는 신발과
버스 기사님, 청소부 아저씨,
심지어 미워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물건이나
원수처럼 증오하는 대상에게까지
무작정 대책 없는 ‘감사’를 외치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오랜 방식이며,
예수의 오랜 방식이기도 하고,
인류 모든 성인들의 방식이며,
호오포노포노를 비롯한 수많은 성인과 명상가와 영적인 교사들의
공통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은 절에 가거나 교회에 가면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진급하게 해 주세요’
‘좋은 성적 나오게 해 주세요’
하며 비는 기도를 하곤 한다.

그러나 비는 것은 진리의 방식이 아니다.
빌게 되면 사실은 거꾸로를 연습하게 된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은
돌아켜 보면 가난과 결핍을 연습하는 말이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비는 마음은 가만히 살펴보면
지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은 결국 내 안에 가난과 결핍과 부족을 연습하게 되고,
우주법계는 내가 마음에서 연습한 것을 고스란히 보내주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의 참된 의미는
‘감사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참된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다고 외치는 것이다.
부족과 결핍에 집중하는 마음에서
감사와 만족에 집중하는 마음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야말로 참된 기도다.

평소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상황을
당연하게 바라보지 말고 새롭게 감사한 상황으로 바꾸라.
모든 상황, 모든 사람, 모든 소유물, 모든 존재에게 감사하라.

내가 받고 있는 현재의 연봉과 월급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며 감사를 느끼라.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들에게 온전히 감사하라.
더 나은 조건의 직업, 더 나은 성적을 가져오는 자식,
더 나에게 잘 해주는 아내, 더 많은 돈을 벌어오는 남편을 바람으로써
결핍과 부족과 불만족에 에너지를 집중하지 말고
그 모든 상황이 내포하고 있는 긍정과 만족과 감사한 것들에 마음을 모으라.

우주는 항상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것을 100% 가져다 준다.
일체유심조, 우리의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
마음에서 그린 것은 분명히 현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우주의 창조원리다.

내 마음이 부족과 결핍에서 만족과 감사로 바뀌게 되면
내 마음의 그릇이 감사하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바뀌니까
우주법계는 내 마음의 요구를 100% 들어주게 된다.
전에는 부족과 결핍을 가져다 주다가 감사할 일들로 삶을 수놓게 된다.

진언을 외듯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루에 100번에서 1,000번 정도 반복해 외우라.
모든 상황에서 ‘감사합니다’라는 진언을
관세음보살 염불하듯, 아미타불 염불하듯 할 수 있는 모든 순간 외치라.
이 작은 외침이 우리 삶에 경이로운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순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모든 상황에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감사합니다’
심지어 나를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최악의 상황에 처하더라도 언제나 계산하거나 따지지 말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도저히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나
증오하고 미워하는 원수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우주법계는 항상 나를 돕기 위한 일만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법계의 본질적인 에너지는 언제나 넘치는 자비와 사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것이 괴로운 상황이고, 꼬이는 상황이며,
답답하고 힘겨운 상황일지라도
법계에서는 나의 업장을 소멸시켜주기 위해서,
혹은 나를 조금 더 성숙시켜 주기 위해서 그 일을 벌인 것이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모든 상황이, 모든 최악의 조건이
나를 위해 법계에서 준비한 최상의 자비로운 상황으로 바뀐다.

아무리 힘들고 괴롭고 답답한 상황일지라도
사실은 우주가 그것을 통해 나를 돕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인생의 오묘한 장치인 것임을 완전히 대긍정으로 받아들이라.
그러한 대긍정의 받아들임의 표현이 바로 ‘감사합니다’ 라는 외침이다.

‘감사합니다’라고 계산하고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적으로 외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우주의 근원적인 파장은 언제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나 얕은 의식에서는 감지하지 못할지라도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넘치는 사랑과 자비로 이끌어 주고 있다.
바로 그 사실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감사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또 하나의 배움이 있다.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사랑과 자비라는 바탕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모든 종교와 사상, 성자와 현자들의 가르침에서
사랑과 자비를 그 가르침의 근원적 원리로 이야기하지 않는 이들은 없다.
이 우주의 바탕, 깊은 차원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는
끊임없이 넘쳐흐르는 자비와 사랑의 에너지 파장에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와 이치와 합일을 이루려면,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자 한다면,
우주적인 삶의 방식과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 또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자비와 사랑이 넘쳐흐르는 삶,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깨닫게 하고, 신에 이르게 하며
근원적인 차원과 연결해 주는 유일한 삶의 목적이다.

불교에서도 수행을 통해 해탈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깨달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일체 중생을 자비로써 사랑으로써 구제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깨달음이 먼저가 아니라 중생구제라는 동체대비가 먼저 있다.

금강경에서도 ‘어떻게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다스려야 합니까?’ 하는 질문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구류중생들을 열반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마음을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일체 중생을 참된 행복과 평화인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수행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이유인 것이다.

결국 부처는 자비 그 자체이고, 신은 사랑 그 자체이다.
이 우주에는 오직 자비와 사랑 밖에 없는 것이다.
부처가 되고 싶다면, 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밖에 없다.
사랑을 연습하고, 자비심을 연습하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진리이다.

오랜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도
이러한 자비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자비심을 연습하는 수행법으로 자비관(慈悲觀)을 말하고 있다.

“수행자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쳐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어떤 생물일지라도, 강하거나 약하거나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나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남을 속여도 안 되고, 경멸해서도 안되며,
화를 내어 남에게 고통을 주어서도 안 된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지키듯이,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온 세계에 대해서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져라.”

이것이 바로 자비와 사랑을 연습하는 오랜 방법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해 행복하라 안락하라 평안하라 하고 외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모든 존재를 향해 자비심을 연습하는 것이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자비를 연습하는 것이다.
온 세계를 향해 무한한 자비를 행하며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이 오랜 자비관을 삶 속에서 연습하고 실천하는
아주 쉬운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라.
어머니가 외아들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온 우주를 향해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사랑을 외치라.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한 이 사랑의 외침을 실천하라.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는 것 처럼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면 된다.
모든 상황에, 모든 사람에게, 눈 뜨고 있는 모든 순간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쳐보라.

이 두 가지 단어야말로
이 우주의 진리를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당기는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참된 말, 진언(眞言)이다.

이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진리의 언어를
매일 매일 매 순간순간 염불하듯 독송해 나간다면
우리의 삶은 경이로운 변화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감사할 일들이 넘쳐나고,
세상은 사랑으로 물들 것이다.

우주의 법칙에서 중요한 것은
보내는 것대로 받는다는 점에 있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을 고스란히 받는 업보의 원리다.

돈을 베풀면 돈을 얻게 되고,
병든 사람을 간호하면 건강을 얻게 되며,
나이든 분들을 공경하면 장수를 얻게 된다.
인색함을 내보내면 들어오는 것도 인색해지고
성냄과 다툼을 내보내면 싸울 일들이 줄을 선다.

마찬가지로
감사를 내보내면 감사할 일들이 넘쳐나고,
사랑을 내보내면 사랑할 일들이 많아진다.
감사와 사랑이 한없이 나를 향해 파도쳐 들어오는 삶을 상상해 보라.
그런 삶이 바로 정토고 극락이며 천상세계가 아니겠는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의 에너지 파장을 담고 있는
핵심적인 언어인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조금 더 수행과 연결지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아름다운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호흡관’이다.
숨이 들어올 때 ‘감사합니다’ 하고 외치고,
숨이 나갈 때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이름하여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다.

호흡관이란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을 호흡에 모아 집중하고 관찰하는 오랜 수행방법이다.
호흡을 관찰하는 이 수행법은
불교에서뿐 아니라 모든 명상법에서도
필수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수행법으로 잘 알려져 왔다.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알아차림으로써
온갖 망상과 번뇌를 비우고, 탐진치 삼독을 비우고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재에 깨어있는 수행법이다.

호흡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의 일이며 과거나 미래의 일이 아니다.
호흡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과거나 미래로 끊임없이 끄달리는 마음을 다스려
지금 이 순간이라는 본질로 통하는 통로와 연결될 수 있다.

호흡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우리 삶과 연결되어 있다.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나 호흡과 함께 한다.
그렇듯 자연스럽게 삶과 연결되어 있는 호흡에
우리의 의식의 빛을 쏘아 줌으로써 의식적으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바로 이 수천년을 이어 온 수행의 전통인 호흡관에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연결시키는 수행법,
그것이 바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라고 짧게 말하고,
숨을 내쉬면서 ‘사랑’하고 짧게 말해도 좋다.

호흡이 들어올 때 ‘감사합니다’, 호흡이 나갈 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지금 이 순간의 호흡에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호흡에 집중할 때 우리는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한다.
과거나 미래로 혹은 생각이나 망상에 끄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과 함께 연결된 호흡에 깨어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텅 빈 명상의 장에 머물면서
우주와 연결된 그 현재의 순간을 통해
감사와 사랑의 파장을 우주로 보내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평소에 우리는 우주와의 연결고리를 잃고 헤맨다.
평소에 끊어져 있던 바로 그 우주와의 소통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때가 바로 ‘지금 여기’라는 때이고,
그 현재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는 우주 전체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영민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 삶에서 ‘지금 여기’를 반영해 주는 가장 투명한 것이 바로 호흡인 것이다.
우리는 호흡관찰을 통해 지금 여기라는 우주와의 연결고리와
조화로운 소통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텅 빈 마음으로 지금 여기의 호흡에 머물면서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우주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나에게 돌아오겠는가?
그것은 바로 우주법계의, 진리세계에서 보내주는
무한한 감사와 사랑의 창조 에너지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주법계와 하나되는 차원에 연결되는 것이다.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통해
우리는 ‘지금 여기’라는 명상의 장과 연결되고,
또한 감사와 사랑이라는 우주적인 아름다운 파장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근본법과 방편법을 아우르는 수행법이다.

본질적인 진리에 다다르는 수행법이자,
삶을 풍요로운 감사와 사랑의 에너지로 가득 차게 만드는
현상계와 본체계를 아우르는 수행법인 것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라.
숨이 들어오면서 이 단순한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무한한 감사로써 들어온다고 느끼는 것이다.
숨을 내뱉을 때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라.
숨이 들어왔다가 내 몸을 스치고 내 밖으로 나가면서
모든 존재를 향한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다.

단순한 공기, 호흡 한 자락 조차
나에게 들어올 때는 감사함으로 들어오고
나를 스쳐 나갈 때는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 호흡관을 통해 호흡만
감사함으로 들어오고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모든 것이 감사로 들어오고 사랑으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물질이든, 음식이든, 호흡이든, 말 한마디든, 행동이든, 생각이든,
그것들이 나에게 들어올 때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내 존재와 함께 파도치고 흘러 나갈 때는 무한한 ‘사랑’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도, 밥 한 공기 물 한 모금을 먹을 때도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 받아들여 먹고
음식을 통해 힘과 에너지를 쌓은 뒤
그 힘으로 세상에 사랑과 자비의 일을 행함으로써 내보내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한 마디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을 받아들일 때는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말이 나갈 때는 ‘사랑’스러운 말, 애어(愛語)로써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감사의 숨을 들이쉬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에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사랑의 숨을 내뒤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에서 나가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 흘러나가게 하는 상징을 담고 있다.

다시말해 내 삶에 등장하는, 내 삶에 나타나는 모든 상황, 조건, 사람 등
일체 모든 것들을 감사로써 받아들이고,
내가 이 세상에 내보내는 모든 행동, 말, 생각, 파장 등
일체 모든 것은 사랑을 내뿜고 자비를 방사하는 의미로 확장되는 것이다.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로 받아들이고,
나에게서 나가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 나갑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10번만 해도 에너지가 바뀌는데,
하루에 10번씩 10번을 반복해 100번 이상을 실천한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롭게 에너지가 바뀌게 된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 수행법이 아주 단순한 것 같은데,
우리의 내면세계는 아주 민감하기 때문에
이 사소하고 단순한 것 같은 수행법에
우리의 생각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힘이 붙게 되는 것이다.

말은 그 자체로써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냥 헛소리처럼 지껄이는 말이라도 일정한 양의 파장이 형성된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도
찌그러진 물의 결정에 ‘감사’와 ‘사랑’이라는 말을 외쳤을 때
순식간에 물의 결정이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야말로 가장 아름답게 바뀌는 언어가 바로 ‘감사’와 ‘사랑’이라는 단어라고 한다.

우리 몸이 70% 이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으니
우리가 한 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하고 외칠 때
그 몸의 모든 결정이 한꺼번에 아름답게 바뀔 것이고,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싱그럽고 이상적인 세포로 바뀌게 될 것이다.

하루에 100번만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실천해도
우리의 인생이 아름답게 바뀐다.
조금 민감하게 깨어서 지켜보는 사람은 직접적으로 느낄 것이다.
이 작은 실천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모든 상황에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연결해 보라.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순간 즉각 호흡을 관찰하며
들숨에 감사, 날숨에 사랑을 붙여보라.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면서 옷을 입으면서도
감사와 사랑의 부드러운 호흡으로 깨어나라.
운전 중이나, 지하철 안에서도,
일하다가 잠시 짬나는 시간 동안에도,
언제나 의식적으로 호흡을 관찰하며 감사와 사랑을 연습하라.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신호등에서 대기하는 시간,
커피를 뽑아 마시는 시간,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두근거리는 순간,
앞 차가 끼어들기를 하는 순간, 누군가에게 욕을 얻어먹는 순간 등
이 수행을 통해 하루 중에 만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수행의 순간, 명상의 순간, 삶에서 깨어나는 순간으로 바꿀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수행이란 그리 거창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몇 시간을 고통을 참아가며 좌선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3,000배나 1만배를 통해서 선정을 얻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작은 감사와 사랑의 호흡을 통해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삶 속에서 명상과 수행을 실천할 수 있다.

그리고 수행이란 사실 그런 것이다.
이처럼 삶 속에서 삶과 하나되는 것이다.
삶과 동떨어진 수행은 참된 수행이 아니다.
좌선하고 앉아 있을 때만 고요하고
일어나 다시 삶 속으로 들어갈 때 흩어진다면
그것을 어찌 참선이라고, 명상이라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

하루 중 만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 감사하라, 사랑하라.
원수같은 사람에게 도저히 감사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겠다면
내 안에 무언가 좋지 않은 업이 그 원수를 만나게 한 것이므로
내 안에 있는 바로 그 업에다 대고 감사와 사랑을 외치라.

괴롭고 답답하고 힘겨운 그 상황을 만들어 낸
내 안의 꽉 막힌 어떤 에너지를 향해
무한한 감사와 사랑의 부드러운 호흡을 보내주라.
그랬을 때 막힌 기운은 뚫리고, 거친 업은 눈 녹듯 활짝 녹아내리게 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병을 미워하고 바이러스를 죽여 없애려는 마음을 내지 말고,
그 대신 그 병과 바이러스를 향해
감사와 사랑의 따뜻한 호흡을 보내주라.

불교적인 방식은 암세포도 사랑하는 방식이고 자비로 감싸주는 방식이며
암세포 조차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내 업이 암세포라는 방식으로 밖으로 나와 줌으로써
업이 풀리고 소멸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구나 하고
고맙다고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방식이다.

암세포 또한 동체대비로써 나와 싸울 적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품어 주어야 할 세포인 것이다.
감사와 사랑의 힘을 호흡관을 통해 매 순간순간 암세포에게 보내줄 때
그 수행은 우주법계를 감동시키고 작동시킴으로써
작게는 내 안의 모든 세포들이 치유의 작업을 시작하도록 하고
넓게는 암을 치유할 수 있는 의사나 치유자를 보내주는 작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처럼 명상적이고 수행자적인 방식은
세상 모든 것을 사랑으로 안아주는 방법이다.
심지어 암세포 일지라도 사랑으로 품어주고 안아줌으로써
우리 안에는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좋지 않은 상황, 경계, 대상은
미워하고 싸워서 이겼을 때는 잠시 꺽일 뿐이지만,
감사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녹여냈을 때는
완전히 그 근원까지 녹아내려 치유가 된다.

이처럼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은
온 우주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나의 본연의 힘을 이끌어 내어
온 우주가 함께 나를 도와주는 작용을 시작하게 해 준다.
내 안의 모든 세포가 나를 위한 사랑의 도움을 시작할 뿐 아니라,
주변의 분위기, 일의 흐름 등을 바꿈으로써
우주 전체가 나를 돕는 일에 전체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그러나 지극히 단순한 명상을 삶 속에서 실천하라.
당장 실천하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매일 절이나 교회에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부좌를 틀고 몇 시간을 앉아야 하는 것도 아니며,
몇 시간씩 방석위에서 절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무슨 준비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부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며,
시간과 장소에 그 어떤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내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수행법이다.

잠시 모든 것을 멈춰보라.
지금 당장 시작하라.

들어오는 숨을 지켜보며
‘감사합니다’
나가는 숨을 지켜보며
‘사랑합니다’

들숨에 감사
날숨에 사랑





Posted by 법상


 얼마 전에 아바타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아주 인상 깊었던 대사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제이크 설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여주인공 네이티리가 했던 말이다.
 “어머니 대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다만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지”


이처럼 진리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고, 안팎의 차별이 없다. 다만 균형을 맞출 뿐이다. 누군가의 돈을 훔쳤다면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 것이다. 그 때 우주법계는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훔친자에게서는 앗아가고, 빼앗긴 자에게는 되돌려 주는 작용을 만들어 낸다. 욕을 했으면 욕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고, 사랑하면 사랑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 사이에는 이처럼 정확한 균형이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우주가 하는 일이며, 진리가 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로 칭찬해 주고, 찬탄해 주어 보라. 무엇이 돌아오겠는가. 칭찬과 감사와 찬탄이 돌아온다. 칭찬해 주는데 욕이 돌아올 일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법칙도 이와 같다.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느냐에 따라 무엇이 다시 내게로 들어올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감사함을 느낄 때 더 많은 감사할 일이 찾아오고, 불만을 느낄 때 더 많은 불만스러운 일이 찾아오며, 화를 내보내면 화낼 일이 들어오고, 만족하면 만족할 일들이 생기고, 무시하면 무시 받을 일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의 에너지는 언제나 균형을 맞출 뿐이다.

불교의 업보(業報)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업보의 법칙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사이의 법칙인데, 나라는 존재인 육근이 무엇을 내보냈느냐에 따라 육경이라는 외부의 세상이 어떤 보를 끌어당기느냐 하는 법칙을 말한다. 이러한 업보의 법칙이 바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이치인 것이다. 즉 누군가가 돈을 훔쳐갔다면 우주는 얻은 자와 잃은 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처럼 업보라는 삶의 균형의 이치에서 본다면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다. 업이 곧 보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낼 생각보다는 더 많이 얻고 바라며 가지려고만 한다. 내보내야만 들어온다는 우주의 평등한 이치를 모른 채 내보내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나누고, 베풀고, 보시하며, 내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고, 얻고, 빼앗고, 성취하고, 쌓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한창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이 유행을 했지만 그것은 우주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 가운데 ‘내보내는 것’보다 ‘받는 것’에 중점을 둔 표현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열광을 얻어냈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나에게서 나가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 더 관심이 많지 않은가. 그러나 끌어당기는 것에 중점을 두면 끌어당겨질 것에 대해 바라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그 의도가 순수해 지기 어렵다. 보시를 할 때도 바라는 바 없이 하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의 중점은 끌어당겨질 것이 아니라 내보낼 것에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보다 ‘내보내는 법칙’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무엇이 끌어당겨 질 것이냐를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사랑으로 다만 내보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무언가를 끌어당길 필요 없이 모든 존재는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 부족하면 끌어당겨서 더 채워야 하겠지만 완벽하다면 넘쳐나는 풍요를 내보내고 나눌 수 있다. 끌어당김은 목표 지향적이고 미래 중심적이지만 내보내는 것은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문제이고 더욱이 지극히 실천적인 수행의 방향이다.

 매 순간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태어나서 죽는 그 날지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고 보시하며 나누었는가? 내가 내보낸 것들로 인해 세상은 얼마나 밝아졌는가? 세상이 밝아질 때 곧장 내가 밝아지는데 성공한 것이다.











Posted by 법상




[사진 : 인도 맥그로드 간지에서 만난, 인도에서 만났던 가장 예쁜 소녀^^]



내보내는 것이 들어오는 것이다

돈으로 보시를 하면 내 돈이 나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리 많은 돈을 보시를 해도
언젠가 그 돈은 분명히 다시 들어오게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로 칭찬해 주고, 찬탄해 주어 보라.
무엇이 돌아오겠는가.
칭찬과 감사와 찬탄이 돌아온다.
칭찬해 주는데 욕이 돌아올 일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법칙도 이와 같다.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느냐에 따라
무엇이 다시 내게로 들어올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언제나 영적인 균형을 맞추는
대평등의 일들만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이 우주의 운행 법칙이다.

나에게서 나간 것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언제나 다시 내게로 들어온다.

내가 상대방을 괴롭히면
상대방과 나와의 에너지는 불평등하게 되고
우주는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상대방이 나를 괴롭힐 일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욕을 하면
욕을 얻어먹을 일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주의 조화로운 작용이다.

예를 들어 직장상사가 직원을 욕하고 괴롭혔다 치자.
그러면 우주적인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다.
상사는 화를 풀었지만 직원은 괴롭힘을 당했다.
상사는 +에너지가 되었지만 직원은 -에너지가 되었다.
둘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직원이 어떻게든 다시 상사를
욕하고 괴롭힐 일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불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설사 이번 생에 두 사람이 다시 못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에너지의 불균형은 남기 때문에
두 사람은 다음 생에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
에너지의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교적인 표현으로는 인연이고 업보인 것이다.
‘저 사람과는 악연인가봐’라고 할 때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다음 생에는 반대로 직원이 직장상사로 태어나고
상사가 부하직원으로 태어나게 된다.
상사는 에너지의 불균형을 균형 있게 맞춰야 하기 때문에
우주적인 작용으로써 이상하게 그 부하직원만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사가 부하직원을 괴롭히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만남과 상황을 주선하는 것이 바로 우주법계고,
아바타에서 말한 에이와고,
불교에서는 불성이라고, 기독교에서는 신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인디언들은 어머니 대지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무엇이라고 부르든 상관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주는 이와 같이
대 평등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을 언제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세상이 불평등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차원의 진리에서 보았을 때
이 우주는 지극히 평등하며
언제나 완전한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진행된다.

아주 쉽게 누군가에게 욕을 해 보라.
무엇이 되돌아오는지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사랑하고 칭찬하면
사랑받고 칭찬받을 일들이 생겨난다.

감사함을 느낄 때 더 많은 감사할 일이 찾아오고,
불만을 느낄 때 더 많은 불만스러운 일이 찾아오게 된다.
감사를 내보내면 감사가 들어오고,
화를 내보내면 화낼 일이 들어오며,
만족하면 만족할 일들이 생기고,
무시하면 무시 받을 일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우주의 평등하게 균형을 맞추는
영적인 작업인 것이다.
이처럼 우주의 에너지는 언제나 균형을 맞출 뿐이다.
그것은 우주의 작용, 혹은 법칙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작용을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함이 없이 그저 균형을 맞출 뿐이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면
자연은 균형을 맞추려고 기상이변 등을 일으켜
본래적인 자연의 상태로 되돌아 가려고,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사람도 몸을 함부로 다뤄 탁한 에너지가 몸 안에 쌓아면
감기몸살 같은 형태를 통해 내보내줌으로 인해
우리 몸의 자정작용, 균형작용을 돕는다.

이 우주 전체와 그 안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존재는
언제나 이와 같이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에너지가 흐른다.


삶의 균형을 맞출 뿐

일전에 보았던 아바타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제이크 설 리가
에이와에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을 때
여주인공 네이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에이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오직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지”

우주법계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오직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다.
진리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고, 안팎의 차별이 없다.
다만 균형을 맞출 뿐이다.
에너지의 불균형을 없애는 일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돈을 훔쳤다면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 것이다.
그 때 우주법계는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훔친자에게서는 앗아가고,
빼앗긴 자에게는 되돌려 주는 작용을 만들어 낸다.
욕을 했으면 욕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고,
사랑하면 사랑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 사이에는
이처럼 정확한 균형이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우주법계가 하는 일이며, 진리가 하는 일인 것이다.

한창 유행처럼 번지던 ‘시크릿’에서는
이러한 진실을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무엇이든 내가 내보내는 것이 끌어당겨 지는 것이다.
생각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나,
불교의 화엄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
혹은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서
마음먹은대로 세상에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다는 말이
모두 이러한 법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법칙,
즉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라는 것은
언제나 증명되고 있다.

우주는 이처럼 다만 우리가 내보내는 것을 들어오게 할 뿐이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는다.

우주의 본질에는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른 것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에서, 판단과 분별에서 옳고 그름이 생겨나는 것이지
우주법계에는 그런 차별이 본래부터 있지 않다.
다만 내보내는 것을 분별 없이 들여보낼 뿐이다.


내보내는 것에 중심을 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낼 생각보다는
더 많이 얻고 바라며 가지려고만 한다.
내보내야만 들어온다는 우주의 평등한 이치를 모른 채
내보내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나누고, 베풀고, 보시하며,
내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고, 얻고, 빼앗고, 성취하고,
쌓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우리가 이 우주를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내보내는 것에 있다.
진실은,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란 사실이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이 곧 나에게로 들어올 것이다.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는 곧 무엇을 받을 것인가와 같은 말이다.
무엇을 나누고 베풀 것인가가
곧 무엇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짓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들어오는 것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가,
내보내는 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로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보내는 것 뿐이다.
내보내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지만
들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우주법계의 의지일 뿐이다.

즉 우리가 우리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들어오는 것이 아닌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더 크게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엄밀이 말하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우리는 오직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내보낼까,
나눌까, 베풀까, 보시할까, 회향할까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을 뿐이다.

들어오는 것에는 아예 관심을 갖지 말라.
들어오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법계의 소관일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니!


내보내는 것과 업보(業報)

불교의 업(業)사상도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어떤 업을 지었느냐에 따라 어떤 과보를 받는지가 결정된다.
업에 따라 보(報)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업을 지었느냐가
곧 어떤 것을 내보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몸과 말과 생각으로
무엇을 이 세상에 내보냈느냐에 따라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업보의 법칙이라고 말해지는 이 법칙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사이의 법칙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육근이 바로 나 자신이고
육경이 외부의 대상을 말하는 것이니
나와 세상 사이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육근이 즉 내가 무엇을 육경으로 내보냈느냐에 따라
육경은 보를 보내주는 것이다.
그래서 육근은 업을 짓고 육경은 보를 받는다.

우리가 업을 지으면 그에 따른 보를 받는다는 이 업보의 이치가
바로 내보내는 것을 필연적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법칙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업보의 법칙이
바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우주의 이치인 것이다.
우주는 언제나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
업보라는 어떤 사상을 만들어내려고 애쓴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악행을 함으로써 악업을 지으면
둘 사이의 에너지는 불균형을 이루게 되고,
그 때 우주는 그 불균형을 균형과 조화로써 맞추기 위해
당연하게 과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업보니, 인과니 하는 것이 바로
이 우주법계의 대 평등성, 균형과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육근은, 즉 우리는 오직 업을 지을 뿐이지
어떤 ‘보’를 받는지까지를 결정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보’라는 것은 ‘다르게 익어간다’는 의미로,
육근이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우주법계에서는 어떤 과보를 받을지를
천편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온갖 정보, 업력, 인연 등을 총괄적으로 따져
‘보’를 최종적으로 보내주는 것이다.

우주법계는 총체적이고,
시공을 초월한 전체적인 관점에서 판단한 뒤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언제 받아야
그나마도 그 사람에게 영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즉 우주법계는 ‘보’를 받을 때
항상 자비와 사랑의 바탕에서
그러한 결정을 바로 그 때 내려주는 것이다.

이렇듯 우주 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위한,
우리를 돕기 위한 자비와 사랑의 관점에서
순리롭게 행하는 바 없이 무위(無爲)로써 일을 행한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업을 지었느냐에 따라
어떤 보를 받느냐가 결정된다는 큰 틀은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과보를 받는 것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법계에서 어떤 과보를 언제 받을지를 결정한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떤 과보를 받을까가 아니라,
어떤 복을 받을까가 아니라,
어떤 업을 지을까, 어떤 복을 지을까,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어떤 행위를 할까,
즉 어떤 것을 이 세상으로 내보낼까 하는데 있는 것이다.

‘나는 매 순간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기로 예정된 것이니
들어올 것에는 신경도 쓰지 말고,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놓아버리고
오직 내보내는 것에만 마음을 모으라.


책 ‘시크릿’과 영화 ‘아바타’와 불교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바타에서 말한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과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
그리고 불교의 업보, 인과응보의 법칙은
모두 같은 진리를 다르게 표현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나 자신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나를 중심으로 내가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다.
시크릿의 표현으로 하자면
내보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끌어당기는 것인 것이다.

아바타에서는 이것을 전체적인 이치로써 설명하고 있다.
즉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우주는, 에이와는,
불성은, 신성은 언제나 내보낸 것을 다시 받게 함으로써,
즉 내보낸 것을 끌어당기게 해 줌으로써
균형을 맞춰주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표현에 의하면
내가 업을 지음으로써 과보를 받게 될 수밖에 없다는
인과응보, 업인과보, 업보의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아바타에서 말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
업인과보의 법칙 등은 전체적인 진리를 표현한 말이고,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은
내보내는 것 보다는 ‘받는 것’에 중점을 둔 표현이며,
불교의 업사상은
받는 것 보다는 ‘내보내는 것’에 중점을 둔
실천적인 표현인 것이다.

우리가 시크릿에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사람들은 나에게서 나가는 것보다
나에게로 들어오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내가 짓는 업(業)보다는 받을 보(報)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시크릿에서는
돈도 끌어당길 수 있고, 인간관계도, 건강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끌어당길 수 있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설명되어지고 있다.
물론 무엇을 내보냈을 때 끌어당겨질 수 있는지도
설명되고는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점은
내 바깥에서 무엇이 들어올 것이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에 있다.

직접적으로 우리의 의지로써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놓고 보았을 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끌어당기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내보내느냐에 있다.

끌어당기느냐에 중점을 두면
끌어당겨질 것에 대해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기에
그 의도가 순수해 지기 어려운 점이 있다.

보시를 할 때나, 선을 행할 때도
바라는 바 없이 하라고 하지 않는가.
내가 보시를 하면 많은 돈이 끌어당겨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면
그 보시는 큰 결과로 이어질 수 없다.
그 보시의 행위 자체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가진 풍요를 누리고, 만족함으로써
부유함이 끌어당겨진다고 할 때라도
끌어당겨질 미래의 결과를 마음에 두고
풍요를 누리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며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끌어당김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의 중점은 끌어당겨질 것이 아니라
내보낼 것에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보다 ‘내보내는 법칙’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내보내는 것이 곧 끌어당겨지는 것이라는 법칙에.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끌어당김의 법칙을 말했을 때에 비해
당황스러워 한다.
우리는 내보내기는 싫고 끌어당기는 것은 좋아한다.
끌어당긴다는 표현이 우리의 욕심을 더 충족시켜주며,
우리를 달콤하게 유혹하기 쉽다.
그렇기에 ‘내보내는 법칙’에 대해 실망감이 들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내보내는 것이 곧 끌어당겨지는 것이다.
현재 속에 미래가 있다.
우리는 다만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만 생각하면 된다.

무엇이 끌어당겨 질 것이냐, 들어올 것이냐를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투명하게, 이타적으로, 사랑으로
다만 내보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주적인, 불성과 영성에서 보내주는,
에이와의 무한한 에너지, 힘이 거기에 붙게 될 것이다.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
바로 거기에 이 모든 법칙을
내가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운행시킬 수 있는
힘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오늘은 또 무엇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화와 증오와 미움과 욕설과 질투와 탐심과
집착으로 얼룩진 에너지를 세상으로 보내지는 않았는가?
그것은 곧 내가 내보낸 것이기에 곧 내가 받을 것이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 아내에게 자식에게 바라지 말라


아내에게 바라는 마음을 내보내지 말라.
자식에게 좋은 성적을 바라고, 좋은 성격을 바라지 말라.
그저 내가 먼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남편이 되어 줌으로써 좋은 남편의 모습을 내보내고,
좋은 아버지의 모습을 내보내 주라.
그러면 내가 내보낸 것과 일치하는
좋은 아내, 좋은 자식이 딸려 올 것이다.
내보내는 것이 들어오는 것이니.

아내에게 내조를 잘 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결국 아내가 내조를 못 한다는 것을 내보내는 것이 아닌가.
내조를 잘 하기를 바랄 때 우리는 우주를 향해
‘내조 못하는 아내’라는 메시지를 내보냄으로써,
결국 지금 보다 더 내조 못하는 아내를 과보로 받게 될 것이다.

자식에게 좋은 성적을 바란다는 것은 결국
자식의 나쁜 성적으로 인해
실망스럽다는 마음을 내보내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정확히 그것이 다시 들어 올 것이다.
자식의 성적이 더 나빠지기를
우주법계에 요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대로에 만족하고 감사해 하라.
만족과 감사를 내보내라.
아내의 부족한 부분을 보고 그 점을 지적함으로써
‘부족한 아내’라는 부정적 에너지를 내보내지 말고,
그래도 잘 하는 부분을 보고
그 점에 감사해 하고 만족하는 마음을 내보냄으로써
아내에게 감사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라.

정확히 바로 그 만족스러운 점, 감사한 점이
내보낸 만큼의 크기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아내가 달라지겠지 하는
끌어당겨질 것을 미리 마음에 두고 행해선 안 된다.
끌어당김의 법칙이 아닌 ‘내보내는 법칙’에 마음을 쏟을 때
그 힘은 더욱 투명해지고 순수해져 우주법계의 힘이 붙을 것이다.

자신의 월급에, 연봉에 불만이 있는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연봉에 대한 불만을 내보내지 말라.
돈에 대해 작다는 불평어린 마음을 내보내면
우주는 고스란히 적은 돈을 되돌려 줄 것이다.
그러나 작은 월급일지라도
그 돈으로 인해 행복해 하고, 감사해 하고,
풍요로운 마음을 내보낸다면
우주법계는 고스란히 그 돈으로 인한 풍요로움을
더 많이 만들어 보내 줄 것이다.

당신이 회사 사장이라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사원들에게 혹은 고객들에게
적은 이익을 되돌려 주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회사가 부자가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회사가 부자가 되는 것, 더 많은 돈을 버는 것,
그것은 정확히 끌어당기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끌어당겨질 것, 부자가 될 것에 대한 마음은 완전히 비워버리라.
그리고 내보내는 것에만 집중하라.
즉 사원들에게 회사가 번 이익을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어 주라.
안철수 연구소의 안철수 사장은 아무런 조건 없이 회사의 지분을
자녀들이 아닌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나.

또한 고객들에게 돈을 끌어당기려는 마음을 버리고,
다만 고객들에게 무엇을 나눌 수 있을지를 고민하라.
고객들에게 어떤 것을 베풀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라.
무언가를 얻을 생각 없이 다만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고,
내보내 줄 것에 마음을 집중할 때
바로 우주법계의, 에이와의, 불성이며 신성의
사랑과 자비의 한량없는 힘이 붙을 것이다.


먼저 자신에게서 시작하라

자신의 삶에 전적으로 만족하라.
전적으로 감사를 표명하라.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라.
그것은 곧 자신의 삶에 무한한 만족스러운 일들과
감사할 일들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전적인 사랑을 보내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감사를 느끼는 자에게
무엇이 흘러나오겠는가?
또한 반대로 자신을 억압하고, 미워하고, 자괴감을 느끼며,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서 무엇이 내보내지겠는가?

아름다운 것, 지혜로운 것, 사랑과 자비, 만족과 감사와 같은
진리의 덕목들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그것이 되어야 한다.
먼저 자신부터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며,
만족하고, 예뻐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끌어당겨질 것이 아닌
내보낼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끌어당겨질 것, 받을 것, 얻을 것에 집중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은 아직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부족하니 바깥에서 무언가를 끌어옴으로써
나를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언제나 완전하고 완벽하다.
삶은 언제나 풍요롭다.
지금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한다면
미래의 그 어떤 순간에도 만족은 없다.

반대로 나 자신이 꽉 차 있어서 흘러 넘친다면 어떻겠는가?
나 자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감사와
풍요로움과 만족이 넘친다면
애써 외부에서 무언가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내 안에 자가발전소가 있어서
무한히 생산할 수 있는 자력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엇을 바깥에서 바라겠는가?
그 사람은 바깥에서 무언가를 끌어오려고 하기 보다는
내 안에서 생산한 것을 바깥으로 나누어 주고, 내보내 주고,
베풀어 주는데 더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

매 순간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주의 깊게 살펴보지 못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주의 한 마음이 내보내는 것들로 인해
힘겨워할 일이 생길 것이다.

하루를 정리하며 매일 밤 ‘내보낸 일기’를 적어 보라.
오늘 하루 무엇을 내보냈는가를 돌이켜 보라.
물질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내보낸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마음으로 내보낸 것이 없는지도 주의 깊게 살피라.
신업과 구업이 중요하지만 의업이 더없이 중요한 것처럼
마음으로 무엇을 세상에 내보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야말로
‘내보내는 법칙’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무언가가 내게 끌어당겨지기를 바라지 말라.
무엇을 얻을까, 벌까, 가질까를 생각지 말라.
무엇을 내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라.

내가 태어나서 죽는 그 날까지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고 보시하며 나누었는가?
내가 내보낸 것들로 인해 세상은 얼마나 밝아졌는가?
세상이 밝아질 때 곧장 내가 밝아지는데 성공한 것이다.







Posted by 법상





평화로운 오후, 길을 걷고 있던 사람이
대형 광고판이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고,
또 다른 사람은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다가
광고판이 머리에 맞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복잡하던 길, 복잡하던 마트에서
수많은 사람이 그 광고판 아래를 걷고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불행하게도 그 사람에게, 그 순간에
그 광고판이 떨어지게 되었을까?

일부러 어떤 사람이 광고판 위에 서 있다가
그 사람을 맞추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떨어뜨려
정확히 그 사람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불교에서는 우연이란 없다고 말한다.
그것 또한 그 사람의 인연이요 업이다.
다시말해 그 사람은 그 아래를 정확히 그 시간에 걷도록 되어 있었고,
그 때에 맞춰 그 광고판은 추락을 할 수밖에 없던 인연이었다.

사람의 목숨이 아무런 인연도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이 그 때 죽어야 할 업도 아닌데,
아무 이유 없이 우연으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사라는 것은 정확하게 인연 따라 오고 갈 뿐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생긴다.
어떻게 그 광고판은 그 사람이 그 때 죽을 업이란 것을 알고
그 순간, 정확하게 그 사람을 맞췄단 말인가?

그 인과응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과관계라면 이해가 가지만,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 어떻게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도 인과관계와 인연법은 성립한다.

이 우주의 법칙은, 이 법계의 인연법이라는 법칙은
인간에게만, 혹은 생명이 있는 유정물(有情物)에게만 한정되는 법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뿐 아니라, 유정물 뿐 아니라
모든 무정물(無情物)에게까지 확장되는 우주의 법칙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유정물 뿐 아니라
무정물에게도 자비와 존귀함과 따뜻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보내야 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그 차가 자체 엔진고장을 일으켜 시동이 꺼지면서
고속도로에서 차가 갑자기 서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 대형사고가 났고, 많은 사람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그렇다면 그 사고에 연관된 많은 이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우연으로 그 사고를 당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고가 날 만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사고가 날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마침 그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소멸한다.
우연은 없다.

그렇다면 고장 난 자동차 엔진이
모든 인연법과 인과응보를 환히 알고,
사고가 날 모든 사람들의 운명과 업을 따져 본 뒤
그 순간에 그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꾸며낸 것인가?

그렇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해
그 자동차 엔진이 그런 일을 직접 했다기 보다는
이 법계의 인과응보라는 이치가 그 일을 계획하고
자동차 엔진은 거기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큰 틀에서
인연법이라는 법계의 큰 진리의 흐름 속에서
나고 죽으며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

이 쯤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자.
광고판이나 자동차 엔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몫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불교에서는 사람 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 나무와 풀과 개미와 이끼들조차
모두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며,
그들을 결코 인간 아래에 두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과 인간은 다르지 않다.

인간이 인간에게 죽음을 당할 수 있듯,
인간이 동물에게도 죽음을 당할 수 있고,
식물에게도,
심지어 위에서 보았듯 무정물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들과 인간은 인연법의 차원에서 서로 동등하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고장 나기 직전의 차였는데 주행 중에는 괜찮았고,
다행히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량이 고장 났다”고.
그래서 사고 없이 집까지 무사히 잘 왔다고 말이다.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아주 좋은 차를 타고 있었으면서도
차량이 문제를 일으켜 집까지 오는데
몇 시간이 더 걸렸을 수도 있다.

늦게 오는 것도 정확히 그럴 만한 인연이고,
사고 없이 빨리 오는 것도 그럴 만한 인연이다.

사업가가 아주 중대한 회사의 업무로
해외 사업가와의 미팅에서 차량 사고로 늦게 가는 바람에
그 큰 투자 사업을 망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량이 하필이면 왜 그 중요한 순간에 고장이 나는가.
차량 결함만 아니었어도 그 사업가는 대박이 났을 것인데.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차 고장만 아니었다면 완전히 대박이 났을까.
혹시 법계에서 그 사업이 대박이 나기에는 아직 이른 때라서,
아직 그 사람이 성숙하지 않았거나,
복이 부족했거나, 아직은 그 그릇이 작았거나 하는 이유로
차량 고장이라는 인연을 통해 그 사업을 뒤로 미룬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바로 그 차는,
차의 고장난 엔진은
온전한 법계의 이치에 따라
아주 여법한 진리를 수행하게 된 것이리라.

사람만 법계의 이치를, 인과의 이치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유정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처럼 무정물 또한 법계의 일부로써,
진리의 일부로써
바로 그 인연법이라는 우주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차의 탓으로 돌린다.
흥분해서 차 바퀴를 발로 걷어 차거나,
혹은 그 차를 폐차시키고 새 차를 사는 것으로 울분을 풀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차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내 문제다.
차가 바로 그 때 고장이 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주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 법계 우주가 각본을 쓰고 그 차는 단지 조연을 했을 뿐이다.
아니 법계와 차와의 공동감독에 공동주연의 연극이라는 편이 옳겠다.

어쨌든, 주연이었든 조연이었든
내 사업을 망친 직접적인 몫을 한 녀석은 자동차다.
그러니 자동차를 실컷 미워해도 좋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미워하는 만큼
법계의 일부분인 자동차도 나를 미워할 것이다.

손가락이 내 몸의 일부분이듯,
자동차는 이 우주법계의 일부분이다.
손가락이 아프면 나 또한 아프듯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도 아프다.
손가락이 아파 내가 아프면 어떻게든 손가락에게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에서도
자동차를 아프게 한 원인제공자에게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다.
바로 나에게.

그러니 자동차에게 분풀이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우주에게 진리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무정물 또한 인간과 유정물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존재이며, 존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유정무정 유형무형(有情無情 有形無形)’의 모든 존재가
다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정이란 나무나 돌 같이 감각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형이란 형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그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

옛 스님들은
“푸른 대나무숲 모두가 진여(眞如)요,
피어 늘어진 노란 꽃은 반야(般若) 아님이 없다.”고 했다.

[보장론(寶藏論)]에서는
“불성은 모든 것에 가득하고 풀이나 나무에도 깃들어 있으며,
개미에게도 완전히 퍼져 있으며, 가장 미세한 먼지나 털끝에도 있다.
불성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 『莊子』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답이 있다.

동곽자가 장주에게 물었다.
"도(道)라고 불리는 것, 그것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장주가 말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동곽자가 말했다.
"그것이 있는 곳을 지적해주십시오."
"개미에게 있다."
"그렇게 비천한 것에 있습니까?"
"작은 풀에도 있다."
"그것은 더욱 비천하지 않습니까!"
"벽돌이나 기왓장에도 있다."
"어떻게 그렇게 비천한 곳에 있을 수 있지요?"
"오줌과 똥에도 있다"
동곽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대 과학에서도 유정물과 무정물을
정확히 구분 짓기 어렵다고 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유정물, 다시말해 생명체는 DNA라는 복제 가능한 유전물질 지니고 있어
생식활동을 통해 자손을 만들어 내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무정물, 무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와 광우병의 원인체를 규명하면서 밝혀진
프리온이라는 원인물질이 유전자가 전혀 없는 단백질에 불과하지만
생물체내에서 증식하고 전파되어 확산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은 전면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 때 비로소 생명과학자들은
생물과 무생물, 유정물과 무정물이란 경계가 따로 없음을 깨닫게 된다.
유정, 무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분류이자 분별이었을 뿐이지,
본래 그렇게 나뉘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큰 한 바탕으로부터 비롯되어
여러 원인과 결과에 의해 만들어진 모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밝힌 미국의 프루즈너 교수는 97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유정물이나 무정물이라는 것은 단지 이름일 뿐,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 인간이 더 귀하고 천하다고,
더 우월하고 열등하다고 나누어 놓았을 뿐이지,
그 본 바탕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아무리 하찮다고 생각되는 무정물일지라도
그로인해 내가 죽음을 당할 수도 있고,
또한 그로인해 내가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옛 스님들은 무정물이 언제나 법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을 듣는 것은 오직 성인들 뿐이라고 했다.

하찮다고 생각되는 발 아래의 꽃을
신비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기 위해 고개를 숙임으로써
나에게 날아오던 화살을 피하게 될 수도 있고,
밤길에 차를 타고 가다가 불쑥 나타난
토끼 한 마리를 피하려다가 사고가 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내 운명을 갈라놓을 수도 있다.

내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이
반드시 인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찮다고 생각했던 무정물이 내 생사를 결정지을 수도 있고,
내 운명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 우주의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들이 모두
나와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하나도 하찮은 것이 없다.
더 귀하거나 천한 것은 없다.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소중한 것 처럼, 사람이 소중한 것 처럼,
똑같이 나무와 풀과 산과 흙과
심지어 자동차와 의자와 집과 컴퓨터 또한 소중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섰을 때처럼,
존경하는 스승 앞에 섰을 때처럼,
부처님 앞에 섰을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모든 존재 앞에 서라.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모든 존재 앞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마음으로 다가 서라.

일체 모든 존재를 존중하며 감사하고
찬탄하며 존귀하게 여기라.
이 세상의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에게
무한한 공경심으로 엎드려 절하라.
매 순간 세상 만물에게 기도하라.

유정물과 무정물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그 모든 것들이 인연법의 진리 안에서
동등한 입장으로 나와 인연을 짓고 있음을 안다면,
세상에는 더 이상 존귀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은 경이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세상을 향한 지고한 공경심!!
모든 존재를 향한 평등한 자비심!!
이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이 세상을 향한 마음이다.

학창시절에 원소, 원소주기율표라는 것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 때 나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간 학교에서 가르쳤던 것은 인간이 우월하다는 것이었고,
도저히 인간과 자연, 인간과 무정물은 하늘과 땅 차이일 수밖에 없었는데,
인간과 자연, 유정물과 무정물을 이루는 근본 원소는
동일한 것이라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동일한 원소들이 ‘어떤 인연으로 모였느냐’에 따라
인간도 되고, 동물도 되고, 식물도 되고,
심지어 자동차도 되고, 빌딩도 되고, 집도 되고, 물도 된다.
이것은 유정물과 무정물이 그 어떤 차별도 있지 않다는 반증이 아닌가.
우리는 결국 동일한 것들이 모여서 겉모습의 차이를 만들어 낼 뿐이지,
근원적인 어떤 높고 낮거나, 귀하고 천하거나 하는 차별은 없다.

나는 때때로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호젓하게 벗어나
홀로 산 길을 걸을 때,
아니면 낯설고 인적 드문 여행지를 거닐 때,
그럴 때조차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어떤 ‘존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미세한 느낌을 받곤 한다.

우리가 완전히 혼자 있을 때조차 사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발딛고 서 있는 대지와 흙과 함께 있는 것이며,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유정물, 무정물이
내 곁에서 따뜻한 도반으로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이러한 통찰 속에서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공경심과 찬탄과 신비 속에 머문다.
어찌 이런 세상이 신비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사소하거나, 하찮거나, 귀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통찰은 우리의 삶을
모든 존재를 향해 활짝 열려 있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향해 존중과 찬탄과 감사와 공경심을 갖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평등한 부처로써 섬기고 시봉할 수 있게 해 준다.

자동차를 타고 멀리 출장을 갈 때
자동차를 향해 동료의식을 가지고, 도반의식을 가지고
존중하며 감사하고 공경스런 마음을 보내라.
내 마음이 자동차를 향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향한
한없는 자비심과 공경심으로 넘칠 때
오늘의 운행은 안전하게 법계에서 자동차와 공동으로 도울 것이다.

설령 오늘 자동차 사고가 날 업이었다고 할지라도
모든 존재를 향한 깊은 존중과 감사와 공경심으로
조금 더 주의 깊게 운전을 함으로써
그 차량사고의 인연이 소멸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이나 식물도 사람 마음이 존중과 사랑과 자비로왔을 때
그 결정이 아름다워지고, 식물도 고요한 파장을 보낸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사람 마음에 따라 세포와 원소의 차원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그러니 모든 기도의 핵심인 감사와 존중과 공경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
그 주위의 모든 유정물, 무정물은
아름답고도 청정한 파장과 세포와 결정을 보여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감사와 공경심으로 충만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이
욕심과 화와 질투로 가득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에 비해
사고가 날 확률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의 마음자세가 운명을 바꾸고 업을 바꾼다는 말이다.
업장소멸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운명론이나 숙명론을 거부하지 않은가.
그 이유는 그 어떤 업일지라도, 그 어떤 과보일지라도
마음에 따라, 기도와 수행과 복덕을 얼마나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받아야 할 업장을 뒤에 받을 수도 있고,
다른 방법으로 보다 미세하게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침 공양을 하기 전에
물과 쌀과 야채와 수저와 식탁과 이 집에게 감사하라.
길을 걸으며 길가에 피어난 들꽃과
보도블럭과 신발과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무한한 공경을 보내라.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컴퓨터와 의자와 책상과 볼펜과 자판기와 책들과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도와주고 있음에 감사하라.

이처럼 무정물조차 나보다 못할 것이 없는
법계의 스승이며, 도반이고, 소중한 길벗이라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겠는가.

더 귀한 사람, 더 천한 사람,
더 중요한 사람, 덜 중요한 사람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일지라도,
바보나 정신병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이 생에서의 인연이 다했음을 알고 이교도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
그것이 바로 목련의 인연이었음을 바로 보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반대로 아무리 하찮게 느껴지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게서 내 인생의 가장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아주 나이 어린 어린이가 내 생명을 구해줄 은인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원수였던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니 사실은 내 인생에 귀하고 천한 사람은 없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거나, 좋거나 싫다고 정해진 사람은 없다.
모두가 똑같은 비중으로 존중받아 마땅한
내 삶의 부처요, 관음이고, 내 생명의 귀의처다.

귀한 사람에게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은 평범하다.
그러나 천한 사람에게 그 본질을 알고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의 이치를 몸소 깨닫고 실천하는 수행자다.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행하는 존중을 보내라.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에게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을 주라.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교수님들과 교직원 그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아주 유명했던 큰스님께서 감동스런 법문을 해 주셨던 적이 있다.
법문을 들으며 꼭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스님을 둘러싼 교수님들과 교직원분들의 눈치도 보이고
나 같은 한 명의 대학생의 질문이 거슬릴 것 같아 망설이다가
어렵게 나오시는 스님을 붙잡고 여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스님께서는 자비어린 시선으로 오래도록
내 눈을 진지하고도 진심어린 눈으로 마주보아 주시면서
나의 질문에 스님의 모든 노력을 다해 답변해 주셨다.
그 때 나는 너무도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어린 내 마음은 스님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아주 당연하지만 그 일은 오래도록 아주 특별한 경험으로 자리잡으면서
내 삶의 지침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 그 때 내가 했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은 기억에 없지만,
그 때의 그 존중받는 느낌과
나에게로 향한 그 스님의 집중과 자비와 눈빛은
두고 두고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몸소 깨닫게 해 주신
살아있는 법문으로 나를 밝혀주고 있다.

살아있는 지혜라는 것,
깨달음의 실천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을 보내주는 것,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존재에게
나의 모든 공경심을 바치는 것,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무정물들에게 조차
찬탄과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세상을 향한 차별 없는 열린 마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부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것이 부처다.










Posted by 법상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현실세계에 펼쳐지고 있는
경제, 정치, 문화, 철학, 의술, 종교행위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당연히 불교도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예부터 스님들은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안심입명 이라고 표현하였고,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인 행복을 말씀하셨는데
궁극적인 행복은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해탈, 열반, 성불은 불교만이 제시하는 고귀한 가르침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일상 생활속에서
가장 근원적인 행복을 실현할수 있는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찰’ 수행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행복의 가장 중요한 여건은 매 순간 순간
나에게 찾아오는 상황을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진언처럼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루에 100번에서 1.000번 정도 외우십시요!

모든 상황마다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을 볼때마다 그 사람에게 무조건 ‘감사합니다’!
나를 욕하고 도망간 사람에게도 ‘감사합니다’!
그사람이 나에게 욕을 했기 때문에
내 업이 녹을수 있으므로 감사함을 표하는 것입니다.

당연하고 평범하게 생각했던
모든 상황과 조건, 물질, 인간, 존재들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내 마음의 상태가 감사하지 못한 상태,
즉 다시 말해서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실 지금 이순간 이미 부처로 다 이뤄졌다’
라고 말씀하셨으나
우리는 내안의 불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인정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란 이미 완성된 존재인데,
이미 우리는 충분히 행복한 사람인데
우리는 아직 행복하지 못하다는 착각이 있으니까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를 지금 되 뇌일수 있다는 것은
지금 이순간의 조건, 내 상황에 완전히 만족스럽게 받아들이고  
수긍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를테면 지금 나의 연봉에 대해 나는 완전히 만족하며 감사한다.
내 남편, 내 아내에게 온전히 만족하고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내 업이 나온 것이고,
내 인연 만큼의 아내, 남편, 월급, 복이 나올 수밖에 없은,
거기에서 또 다른, 더 많은 것을 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내면이 바뀌어야 바같이 바뀐다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감사 합니다’ 하면
풍요로운 마음으로 물들게 되면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면은,
내 마음의 그릇이  감사하니까, 행복하고 감사 한것이 쌓이니까
이 우주법계가 자꾸 감사 한것을 보내준다는 것입니다.
감사한 일이 자꾸 생기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감사 하기는 커녕
‘이것이 부족하고 저것이 부족합니다’
‘이거 갖다 주시고 저거 갖다 주십시요‘
‘부처님 이거 되게 해주시고, 저것도 되게 해주십시요’ 라고 함으로서
자꾸 부족한거 연습하고, 없는거 연습하고,
불만사항 연습하여 자꾸 쌓이니까
우리 삶이 힘들어 지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감사합니다’라는 진언을 ‘관세음보살’ 염불하듯이
하루에 100번을 반복하면 우리의 삶이 경이로운 변화가 찾아옵니다.
엄청난 변화가 찾아옵니다.
진리는 아주 단순한데 있습니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단순한데 있습니다.

감사와 관용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은 종교가 있고 사상, 철학이 있고
성현들이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지금 ‘목탁소리’ 카페에서는
호흡관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호흡관수행은 부처님께서 직접 깨달음을 성취하신 수행법의 하나로서
지금 남방불교권 나라를 위시하여
세계 각국에서 위빠사나명상수행으로 널리 전개되고
의료치유명상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는 초기불교 수행법입니다.

숨이 콧구멍이나 윗입술을 통해서 들어가고 나갈 때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며 들숨 날숨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아 나가면서
호흡의 숫자를 세기도 합니다.

호흡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일이며,
깨달음도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발견될수 있습니다.
일체를 다 놓아버렸을 때,
오직 지금 이 순간에는 들고 내는 숨만이
적요한 침묵으로 피어오르고.
바로 그 숨을 놓치지 말고 관찰해야 합니다.

호흡관 수행을 할 때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또는 ‘감사’!라고 짧게 말하고,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 또는 ‘사랑’! 이라고 하면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 됩니다.

숨이 들어오면서
이 단순한 숨을 들어 마시는것 조차
무한한 감사를 느끼는 것입니다.

숨을 내뱉을 때 ‘사랑’이라는 것은
숨이 나가면서, 내안에 있는것이 밖으로 나가면서
모든 존재를 향해서 사랑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내 물질이 나가든, 숨이 나가든, 말 한마디가 나가든,
행동이 나가든, 생각이 나가든
모든 것이 나갈때는 ‘사랑’으로서 나갑니다.

모든 것이 들어 올때는 감사한 존재입니다.
나에게 기분 나쁜일이 생겨서 기분 나뿐일이 오든, 좋은 일이 오든
월급이 많게 오든 적게 오든 상관없이
무작정 대책없이 ‘감사 합니다’~
나에게 모든 것은 ‘감사 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단순하게 일년 365일 평생 나에게 매순간 오고 있는
들숨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고,
나에게 매순간 나가고 있는 날숨에게 사랑의 에너지를 보태가지고
사랑과 자비의 에너지를 밖으로 방사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하고,
나에게서 나가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서 나갑니다.

여기서 더 이상 실천할 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숨을 쉴때 들숨에 ‘감사’, 날숨에 ‘사랑’을 반복하면서
하루에 10번만 해도 에너지가 바뀌는데, 하루 100번씩 하면
집중적으로 에너지가 바뀌게 됩니다.

이게 아주 단순한것 같은데
우리의 내면세계 마음자리는 아주 민감합니다.
그러나 ‘감사’와 ‘사랑’에 대하여
누구나 얘기하고 또 여러분은 많이 들었지만
인생이 바뀌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바뀌지 않은지 아십니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렇기도 하겠다, 좋겠다’ 하면서 그다음에는 한번도
반복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매순간 순간에 ‘감사합니다. 사랑 합니다’를
염불 하듯이 반복 해보신분 있으십니까?.....

말이란 뜻이 담긴 말은 더 강력한 에너지가 있지만,
뜻이 담기지 않고 그냥 헛소리 처럼 막 지껄이더라도
그것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은 말 자체로서 에너지가 들어 있습니다.
말과 행동과 생각이 마찬가진데, 그냥 별 생각없이 지껄이는
말에도 에너지가 들어 있습니다.

말뿐 아니라 글자에도 에너지가 담겨 있습니다.
물의 결정에다가 ‘사랑’아라는 글자를 한글로 써놓고 나둬도
물의 결정이 아름답게 바뀝니다.

영어로 love를 써붙여 놓고 보거나,
전 세계 각국언어로 사랑을 써븥여 봐도 결과는
똑같이 결정이 아름답게 바뀝니다.
가장 아름답게 바뀌는 것은 ‘사랑’과 ‘감사’라는 단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은 몇 십, 몇 백억조개의 이상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는데
우리가 마음속에 ‘감사 합니다’ 한마디 했을 때
이상적인 세포로 확~ 바뀌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70%이상이 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우리몸의 물의 결정이 감사와 사랑을 외쳤을 때
이상적인 세포로 바뀌게 됩니다.

하루에 100번을 들숨에 감사와 날숨에 사랑을 외쳤을 때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이 경이롭게 바뀝니다.

조금 민감하게 깨어 있으면서 지켜보는 사람은
직접적으로 느낍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펼쳐집니다.

아이가 공부를 아주 못했고 마음이 산만 했는데
내가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외쳤을 때
아이에게도 변화가 옵니다.

기도의 본질이 감사요, 복의 본질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복을 짓는 것이고 자비가 있어야 복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두가지를 매순간
모든 사람들에게,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모든 대상들에게, 모든 상광과 문제를 향해
하루에 100번씩 일주일만
연습하면 저절로 안 변할 수가 없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감사 합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사랑 합니다’를 반복하시기 바랍니다.

원수에게 감사와 사랑을 정히 못하겠다면
내안의 뭔가 좋지 않은 업이 있기 때문에 원수를 만나게 된 것이므로
내안의 업에다 대고 ‘감사 합니다’ ‘사랑 합니다‘ 를 외쳐야
좋지 않은 업이 녹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 모든 조건에 사랑과 감사를 외치게 되면은
삶의 상황들이 확~확~ 엄청나게 바뀌게 됩니다.

몸이 시름시름 앓고 병이 있는 사람도 병이 호전 되게됩니다.
호흡관을 통하여 감사와 사랑을 외치게 되면은
우리안에 있는 근원적인 자성불, 불성을 움직이게 되고
불성자리에서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온 우주가 도와주는 작용을 시작하게 됩니다.
나만 나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나를 도와주기 시작합니다.

부도난 사람이 부도를 내게한 사람과 부도상황에 대하여
감사와 사랑을 끊임없이 외치게 되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우주 법계의 도움이 오기도 합니다.

암세포도 그것을 떼어 낸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시 재발 할수도 있는것입니다.
나만이 나의 암세포를 없앨수 있습니다.

현대의학은 암세포를 적으로 생각하고 싸워서 내가 이기는
빙식을 채택하여 짤라 내는것을 치료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온전한 방식이 아니라 다시 동일한 병을 몰고 오거나
또다른 병을 몰고 올수도 있습니다.
그 업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계속 발병되며 다음 생에서도 태어나자마자
병을 달고 태어 나기도합니다.

불교적인 방식은 암세포도 사랑하는 방식이고 자비로서 감싸주는
방식이고 암세포에게 감사하게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내업이 밖으로 나와 줌으로서 업이 풀릴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구나!
하고 암세포에게 감사하고 사랑해야 되고 감싸줘야 됩니다.
동체대비로서 나와 싸울 적이 아니라
사랑해서 품어 주어야할 세포인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을 암세포에게 주었을때
내안에서 모든 세포들이 작동을 시작합니다.
모두가 함께, 심지어는 암세포도 함께 스스로 없어질려고 노력하고
주변에 있는 모든 세포들이 함께 암세포를 품어주고 안아주는 것입니다.
싸워서 세균들에게 찔러 죽이는 방식이 아니라
안아주는 방식을 취하면서
우리몸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수많은 기도하는 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서 불치병을
치료 했다는 것은 가능한 얘기입니다.
미워하다가 그 마음을 탁~ 돌이켜 가지고 바꾸었을 때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사실은 이 우주에는 마음도리만 알면
가능하지 않는것이 없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식으로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하루에 100번씩
끊임없이 반복을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싫은 상황이 있고 미운 사람이 있다면,
몸이 안 좋은 부분이 있다면 그곳을 관하면서
그곳에다가 직접적으로 반복하여도 좋습니다.

- 법상스님의 ‘관음사 불교아카데미강좌’ 중에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 내용만
녹취 정리 하여 올렸습니다 -        

묘현 합장_()_

* 묘현 거사님께서
그렇지 않아도 언제 글을 써서 올려야지 했는데,
이렇게 잘 녹취하여 정리해 주셔서
저 또한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