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생활속 실천강의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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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과 마음공부

금강경 생활속 실천강의를 시작하며

목탁 소리 2007. 12. 1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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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경과 마음공부] 서문

 금강경 강좌를 끝맺으며, 또 금강경의 바다에 푹 빠져 있는 동안 내 안에 깊이 파도쳐 들어오는 한 가지 진한 울림이 있었다. 도대체 이 세상에 어떻게 이런 경전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내 삶에 금강경이 들어왔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축복인가, 아니 이 세상에 이런 경전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인류에게 있어 얼마나 큰 축복이며 보배인가 하는 감사의 울림이 그것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금강경이라는 경전은 단연코 인류의 정신사에 있어 최고의 정점에 서 있는 몇 안 되는 가르침이다. 이 경전으로써 인류의 정신은 얼마만큼 진화를 이루어 냈는가.

 처음 금강경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금강경은 너무나도 생소하고, 어렵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말들이 계속되어 반복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금강경을 언뜻 본 사람들은 바로 접고 마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금강경은 인간이 사량 분별로 헤아릴 수 있는 그 틀을 완전히 깨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야말로 금강과도 같은 지혜의 칼로써 인간들의 어리석은 차별심을 모조리 불살라 없애버린다. 그러나 인간의 어리석은 분별심을 깨기 위해 똑같은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또 다시 사람들은 그 언어를 자기 식대로 이해할 것이고, 자기 사량으로 금강경을 판단하고 말 것이다. 언어는 진리를 그대로 전달해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언어에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편견과 선입견들이 개입되어 있다.

 그래서 진리를 표현하려면 언어를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선사들은 ‘할’ ‘방’을 외치기도 했고, 때로는 침묵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은 너무 어렵다. 일반인들이 다가서기에는 너무 벽이 높다. 그래서 결국은 다시 언어를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언어로써는 진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어를 쓰면서도 언어를 초월하여 진리를 담아낼 수 있는 언어 아닌 언어를 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언어를 뛰어넘는 언어를 쓸 수 밖에 없다. 진리를 언어 속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그나마도 최선의 방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언어를 초월하는 진리의 언어, 그것이 바로 이 경전 금강경이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언어 밖의 언어 그것이 이 경전이 쓰여진 연유다.

 그렇기에 금강경은 평범한 사람이 펼쳐 보았을 때 어렵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금강경을 언뜻 살펴 본 사람이라면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기도 할 것이고, 알다가도 모를 소리라고 손사레를 치기도 할 것이며, 읽어내려 가다가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소식에 경전을 덮고 말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어쩔 수 없는 진리의 속성이다. 진리를 진리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자비로운 노력이 이와 같이 알 수 없는 표현방식으로 언어를 초월하여 경전에 한 올 한 올 곱게 아로새겨진 것이다.

 그렇기에 금강경을 읽을 때는, 금강경을 공부할 때는 일반적인 책을 읽는다거나, 세상의 지식을 얻어 들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다가서서는 안 된다. 세상의 잣대로, 기존의 편견과 선입견의 틀 속에서 금강경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더욱 멀어질 뿐이다. 그야말로 지금까지 배워 온, 익혀 온, 경험해 온, 책에서 읽고, 사람들에게서 들어 온 일체 모든 지식과 판단과 편견과 아집들을 몽땅 비워버리지 않고서는 도무지 금강경의 초입에도 이를 수 없다. 내 안에 그 어떤 고집과 욕심과 집착과 편견과 아상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금강경을 펼쳐 드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려야 한다.

 과거에 만들어 놓은 잣대를 가지고 금강경을 펼쳐 들지 말라. 완전히 과거의 나를 비우라. 비우고 비워 맑고 청정해진 때묻지 않은 순수한 정신으로 금강경의 초대를 받으라. 그랬을 때 비로소 금강경은 신비롭고 경이로운 진한 법신의 향기로써 나를 맞이할 것이다.

 ‘나’를 놓아버리고, ‘내 생각’을 놓아버리고 오직 금강경에 모든 것을 맡기라. 금강경의 자비로운 이끎에 모든 것을 맡기라. 금강경의 가르침이 내 존재 안에서 춤을 추도록 하라. 꽃이 되어 피어나도록 하라. 가려 듣지 말고 통째로 완전히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이제 금강경은 나를 진리의 길로 이끌 것이다. 아니 나를 사라지도록 도와 오직 금강경이 삶이되어 피어나도록 할 것이다. 금강경은 이제 내 깊은 곳에까지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고, 존재를 변화시켜 갈 것이다.

 이 금강경을 펼쳐 든 모든 이들에게, 진리로써 꽃피어난 자기다운 삶의 방식과 삶의 몫을 안내 할 것이다. 이제 나는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진리를 실현해 갈 것이다. 가장 자연스럽게, 가장 나답게, 가장 진리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 경전 안에서 발견해 나갈 것이다. 아! 금강경이란 얼마나 경이로운가. 이 경전을 회향하는 순간 우리 안에 지고한 안온과 평화와 경외와 감사의 눈물이 호수를 이룰 것이다.

 이처럼 금강경은 우리를 온전한 삶으로 이끈다. 우리 삶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다툼과 욕망과 아픔과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지, 어떻게 바라보고 변화시킬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아가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인류 공통의 문제들에 대한 분명하고도 지혜로운 답변을 내려 줄 것이다. 아! 왜 인류는 아직까지도 금강경의 지혜를 지니지 못한 채 상처를 키워만 가고 있는가. 왜 아직 인류는 금강경을 주목하지 않는가.

 지금 이 책의 서문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 그 지혜로운 길목에 들어 서 있다. 부디 중간에 금강경을 덮지 마시라. 한 번 읽고, 한 번 생각하고, 한 번 헤아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착각하지 말라. 그것은 금강경에 대한 나 자신의 해석일 뿐이지 금강경 그 자체가 아니다. 금강경은 아직도 더 진하게 우러나와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금강경을 한 번 읽고 덮는 것이 아니라, 금강경의 가르침이 오래도록 우리 삶에서 더욱 진하게 우러나와 내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금강경이 되고 금강경이 내가 되기 전까지는 덮지도 말고, 어떤 가르침이라고 단정짓지도 말라.

 물론 이 책 또한 금강경에 대한 온전한 해석 일 수는 없다. 다만 금강경에 어리석은 저자의 생각을 덮씌워 더럽혔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설서가 출간되는 이유는,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로 쓰여진 이 경전의 생명력이 조금이나마 우리들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 없을까 하는 작은 발원에 의해서다. 이 책은 될 수 있는 한 금강경을 우리들의 세상으로 끌어내려 우리들의 근기에서 우리들의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사실 금강경은 해설서를 보더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어릴적 처음 금강경을 대할 때 적잖이 당황스러웠던, 해설서를 보면서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던 기억은 두고 두고 이 책의 방향을 결정짓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또한 현실의 삶 속에서 어떻게 금강경을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쓰여 졌다. 그러다보니 이해는 조금 더 쉬워졌을 지 몰라도 금강경 본연의 지혜는 다 드러내지 못한 채 잠재웠을 수도 있다. 그 더 깊은 지혜를 우러내는 일은 나머지 독자의 몫으로 돌리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다.

 5년 전부터 이 책은 구상되고 쓰여지기 시작해 이제야 비로소 그 회향을 보게 된 것이다. 진리의 가르침은 풀어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호되게 깨달은 것도 바로 이 경전 금강경이다. 어떤 분에서는 사방이 은산철벽과도 같은 벽으로 둘러쳐져 있는 듯 도무지 뛰쳐나올 수 없어 그 게송을 마주하며 1년 여를 보낸 적도 있고, 또 어떤 분에서는 한없이 흐르는 감동과 경외의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그 깊이를 도저히 글로 표현해 낼 재간이 없어 한동안 글을 써내려가지 못한 적도 있다.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화두처럼 의문을 품고 몇 달을 앉은 끝에 한순간 번쩍이듯 그 의미가 다가왔을 때는 법신께 삼배를 하고 앉아 환희심을 억누르며 조악한 글솜씨로 서툴게 글을 맺은 적도 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금강경을 맺게 된 것은 모두가 법신 부처님의 몫이요 법신불의 회향으로 돌리고자 한다. 내가 했노라고 붙잡을 것이 없는 금강경의 세계에서는 유무를 초월한 법신의 공덕 아닌 공덕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금강경은 금강경이 아니요 다만 이름이 금강경일 뿐이다. 금강경의 해설 또한 금강경의 해설이 아니기에 금강경의 해설일 수 있는 것이다. 금강경을 공부하지만 금강경을 공부하지 말라. 금강경을 실천하지만 금강경을 실천하지 말라. 그것이 바른 금강경의 공부요 실천이다.


2007. 1. 1

강원도 양구 도솔사 산방에서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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