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는 내가 없고, 밖에는 세상이 없다 - 녹취록
오늘은요, 그 우리가 이제 생각하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생각을 하냐 하면
여기 안에 안에는 나라는 존재가 있고, 바깥에는 나라는 피부,
바깥 이라고 생각 할지 어디라 생각 할지 모르겠지만
내 바깥에는 바깥의 세상이 따로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바깥에 있는 세상과 접촉을 하면서 이 세상을 인지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즉 나라는 것, 독자적인 어떤 실체가 따로 있고
바깥에는 저마다 자기만의 어떤 독자적인 규범을 가지고
자신의 삶의 룰을 따르고 있는 어떤 특정한 외부 존재가 별도로 있다고 여긴다 말이죠.
저 나무 한 구르는 저기 저대로 정해진 대로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것을 우리가 그저 인식할 뿐인 거겠죠. 우리는 그렇게 보고 있단 말이죠.
뭔가 실체적인 무언가가 내 바깥에 절대적으로 전적으로 탁 존재하고 있고
그래서 그것의 어떤 특징이나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저마다 인식하고 있다 그렇게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오류를 범하느냐 하면 어디 절에 갔다 왔어? 이렇게 물어 봅니다
아니면 어디 좋은데 여행지에 갔다 왔어? 하고 물어보면,
어 나도 갔다 왔어, 나도 알아 이렇게 저마다 다 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까 어떤 특정한 한 여행지를 갔다 왔다 이러면 너도 갔다 오고 나도 갔다 왔다 이러면
같은 것을 보고 왔을 거라고 지리짐작을 해버립니다.
근데 같은 여행지에 가서 같은 것을 보고 오지를 않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업대로 보고 옵니다.
뭐, 무슨 나무 연구가 같으면 그 지역에 있는 나무나 어떤 식물, 꽃들을 주로 보고 올 수도 있고요,
뭐 수석 전문가는 돌 같은 것들을 주로 보고 왔었을 수도 있겠죠.
어떤 한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그 사람 알아? 나도 알아 그 사람, 이라고 얘기는 하지만
우리가 진짜 그 사람을 아는가 라고 인제 얘기를 해보면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똑같이 십분 만나고 왔는데
그 사람은 성격이 어떻고 이렇게 얘기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은 능력이 어떻고
그 사람은 외모가 어떻고 저마다 보는 사람마다 관점을 다르게 이해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똑 같은 사람을 보고 왔는데도 백이면 백 전부다 다른 것을 보고 왔단 말이죠.
그럼 우리가 생각 했을 때 그 바깥에 그 만의 독자적인 어떤 정해진 실체가 있는가
정해진 어떤 독자적인 바깥에 있는 어떤 그 무엇도 정해진 실체라는 것은 없고
다만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 하느냐에 저마다 인식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입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내 바깥에는 뭔가 독자적인 실체가 있다라고 항상 생각 한단 말이죠.
눈, 귀, 코, 혀, 몸, 뜻이라는 육근이 인제 인식활동 뭐 감각활동, 감각작용 이렇게 얘기하는데
눈으로 뭔가를 보고, 귀로 뭔가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의식으로 생각을 한다 말이죠. 이 여섯 가지가 접촉할 때 바깥에 있는 대상을 접촉할 때 이 여섯 가지 기능을 활용해서 우리는 그것을, 대상을 파악 합니다.
그래서 색, 성, 향, 미, 촉, 법 이라는 내 바깥에 있는 대상을 파악하는데요
그걸 육근과 육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눈으로 뭔가를 볼 때 이 보는 의식이 생깁니다.
알음알이 판단 분별이 생기는 거에요.
이게 뭐구나 하고 판단 한다 말이죠.
이 육식 의식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이걸 보면 컵이라고 분별하고 분별해서 아는 것이죠.
아는 마음을 우리는 식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보통 마음 이러면 식을 마음이라고 해요.
그래서 심은 식의 동의어다 하는데 마음과 의식 이런 말은 같은 말로 쓴다는 말이죠.
그래서 뭔가를 파악할 때 내 바깥에 있는 뭔가를 파악할 때 우리는 마음으로 인식으로 인식되는 것을 이제 알았다.
파악했다. 이렇게 여기는 겁니다. 근데 이것이 이제 근원적인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 그러죠.
내 바깥에 뭔가 독자적인, 여러분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바깥에 뭐가 실체가 있다 이렇게 느끼자나요.
근데 우리는 바깥의 실체가 뭔가 진짜로 있어서 그것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초기불교의 설명해 의하면, 내 육근이라는 감각기관과 바깥에 있는
대상이라는 감각 대상과 그것이 접촉했을 때
인식 작용이 일어나는 것뿐이랍니다.
우리가 안다는 마음, 인식 한다라는 인식 작용 또한 내가 진짜 있고
바깥의 대상이 실제 있어서 이게 접촉하면 내가 바깥에 있는 것을 인식하는 구나 이게 아니고,
근데 뭐, 현대 과학이나 이런 거에는 바깥에 있는 실체가 도대체 그것이 어떤 특성을 가지느냐,
어떤 이치를 가지느냐 하고 그것을 파고 들어서
이것만의 독자적인 어떤 규범이나 어떤 법칙이 있다라고 생각해서
이것은 어떤 법칙으로 움직이고 있느냐 이걸 연구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근데 그런 건 없다는 것이죠. 요즘에 양자물리학에서 비로서
아 우리가 지금까지 과학에서 물리학에서 바깥에는 어떤 독자적인 것들을
그것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어떤 실체를 가지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었단 말이에요.
근데 바깥에 언제나 독자적인 실체가 있었고 사람은 그게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를
연구하는 존재에 불과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의 양자 물리학에서는 그게 아니구나 라는 것이 분명해 졌어요.
바깥에 실체가 있어서 내가 그것을 보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바깥에 있는 실체라는 별도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의식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서
바깥의 대상이 규정되는 것이구나.
이 주관이 객관과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독자적인 내 바깥의 실체라는 것은 없구나 라는 것이 분명해졌단 말이죠.
그러니까 주관을 빼고 객관을 이야기 할 수 없다라는 상황이 분명해 졌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는 이 알갱이가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관찰하는 순간 있다가 관찰하지 않는 순간에는 사라진다는 것이죠.
이게 인제 초기불교 부처님께서 육근 육경 십이처 십팔계에서 이미 하신 말씀인데요
우리가 눈이 뭔가 대상을 바라볼 때 육경을 볼 떄 육 식이 생기는데
육근과 육경과 육식이라는 것은 세가지가 상호의존해 있다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가 같이 이렇게 의존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느 하나가 없어지면 나머지가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나머지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바깥의 실체적인 대상이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나
라는 감각기관이 있고 바깥에 대상이 있어서 그것이 접촉함과 동시에 인식이 생겨나는
이 세 가지 중에 한가지만 없어도 인식작용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라는 거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깥에 실체가 있다고 여깁니다.
바깥에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대에서 모든 괴로움이 시작 되잖아요.
실제로는 바깥에 실체가 없는데. 뭐 우리 바깥에 돈이 있다고 여겨요,
아파트가 있다고 여기고 자동차가 있다고 여겨서 있다고 여기니까 이게 중요해지고 내가 가지고 싶어지고
집착하고 싶어지잖아요. 이게 진짜라고 여기니까 실체가, 여러분 실체라고 여기지 않는데 그것을 집착하겠습니까?
실체라고 여기니까 집착하는 것 입니다.
자식에게 왜 집착 하겠어요. 자식은 내 자식이라는 정해진 실체가 있다라고 여기니까
그 자식에게 집착을 하는 거에요. 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면 집착할 필요가 없겠죠.
내가 내 자식은 귀하고 내 자식이 경쟁 관계에 있는 그 경쟁하는 친구가 맨날 둘이 일등 이등을 다퉈 했다.
그럼 내 자식 일등을 해야 이 친구는 이등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등을 하기 바라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쟤는 떨어지고 내 자식 일등 했으면 좋겠다 라고 여겨 왔지만
생각해 보니까 가만히 전생을 보니까 이등 했던 이 친구가 전생에 내 자식이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나는 이번 생만 보니까 내 자식 일등 했으면 좋겠고
그 친구는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이 아이는 전생의 자식이고 얘는 현생의 자식이면
그런데 그 반에 있는 30명 40명 아이들이 전부가 과거 어느 생엔가 내 자식 이였을 수도 있고
내 부모였을 수도 있고 내 형제였을 수도 있고 내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 라는 사실을 안다면
누가 일등하고 누가 꼴지 하느냐 그걸 어떻게 나눠 가지고 이번 생의 자식만 잘됐으면 좋겠다 라고 집착하고
분별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렇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일 뿐입니다.
실제 그 가치를 가진 어떤 특정한 대상이 내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대상에다가 대고
내 나름대로의 가치를 분별할 뿐이에요.
뭐에 따라서?
자신의 업에 따라서.
자신 업에 따라서 그냥 바깥에 있는 어떤 하나의 특정한 중립적인 대상을 가치 부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 스님들 만나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차를 너무 좋아하는 스님들 같으면 그 스님들은 이제 신도님들이 차를 많이 사다 주죠.
근데 신도님들이 사다 주는 차도 인제 드시지만 그 차를 마시기에도 사실은 이게 번거로움 많을 수도 있거든요.
근데 당신들은 꼭 차를 당신들이 사서 드십니다.
귀한 차 정말 좋은 차 어떤 차가 좋은지 차 매니아들은 차를 딱 그 차를 사서 드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차를 사서 드시는 분들이 이제 뭐 우리 같은 우리 있는 거 그냥 먹는 다 말이죠.
스님한테 와서 묻는다 말이죠 차 어디서 사냐고. 그럼 우리는 좀 갸우뚱스럽죠. 차를 왜 사지?
있는 거 먹기도 바쁜데. 그냥 있는 데로 먹는데 주는 대로 먹고 그냥 있으면 먹고 좀 없으면 좀 아껴먹고,
그냥 그러고 산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게 당황스러워 하면서
어떻게 스님이라는 사람이 차를 스스로 사서 안 먹을 수가 있느냐고 그 무슨 소리에요 이랬더니
차는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된다고 그럼, 왜 그렇습니까 이랬더니.
어떻게 차를 아무거나 먹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그 분은 이제 차에 대해서 아주 가치 부여를 하다 보니까,
탁 아주 좋은 차를 스스로 사서 아주 귀하게 드시고 하다 보니까
당신은 차를 마실 때 아주 마음부터 경건해 지고 이게 아주 귀한 차니까 귀하게 드시면서
아주 음미 하면서 천천히 드시면서 그걸 또 수행 삼아 하시고 이런단 말이죠.
그건 그 나름대로의 그 스님의 어떤 삶의 방식입니다. 그 스님이 가치 부여한 어떤 방식인 거에요.
그럼 그분이 이제 좀 갸웃했더니 그 분이 이제 비유를 드는데 이렇게 얘기를 한다 말이죠.
스님 책을 내가 내 스스로 서점가서 골라 사서 봐요 안 봐요 이래서 책이야 골라 보죠,
책도 남이 주는 것만 보고 안주는 것은 안보고 그럽니까 아니면 사서 봅니까
그래서 책이야 내가 원하는 거 사서 보죠.
뭐 큰 스님들 법문들을 때 내가 선택해서 어른 스님 법문 듣겠다고 선택해 봅니까 아니면
그냥 들리는 대로 듣습니까. 선택해서 듣죠.
그 스님 하는 얘기가 그것과 똑같다. 차를 수행 삼아 하는 사람에게는
차가 아주 귀한 스님이 책 사서 보는 것과 차를 사서 먹는 것과 똑같다.
들어보니까 일리가 있더라고요.
그것처럼 우리는 자신이 가치 부여한 거에 대해서 가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명품백에 이렇게 빠져 있는 사람, 명품 백 무슨 뭐 루이비통이니
이런 명품 백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한다 말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내가 딱 들고 있을 때 내가 우월해지는 것 같고
남들을 내가 확 내려 누른 것 같고 남들이 나에게 딱 눌리겠지 하는 어떤 느낌을 느낄 수도 있고.
화장을 가치부여 하는 사람은 화장이 잘 된 날은 왠지 모르게 딱 뿌듯하고
또 남자들 같으면 자동차나 뭐 이런 것들을 좋은 차를 딱 타고 어디를 가면
사람들이 벌써 나에게 탁 눌리겠구나 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내가 올라가겠구나
내 가치가 올라가겠구나 하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겠죠. 저마다 가치부여 하는게 다르거든요.
근데 아무리 다이아몬드가 있더라도 그건 뭐 저를 다이아몬드를 갖다 주면 뭘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루이비통 가방을 뭐 몇 백만 원짜리를 저한테 갖다 준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냥 굴러다니는 뭐 하나의 그것밖에 안 되는 거지. 거기는 하다못해 뭐 목탁이나 승복조차 넣고 다닐 수가 없자나요. 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가방은.
제가 가치부여를 안 냈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것이지 그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의미부여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만의 삶이 만들어지는 것 입니다.
그 사람의 삶이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다 나쁘다라고 판단할 수는 없는 거에요.
제가 여러분에게 뭐 가방에 집착을 내려놔라 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놔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집착하고 있는 사람에게 부여하는 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병 있는 사람에게만 약이 필요하지 병 없는 사람에게는 약도 필요 없는 것처럼
가방에 대한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가방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 필요가 없는 것이죠.
오히려 그 사람에게는 가방을 너무 하찮게 여기고 가방에 집착하는 사람을
너무 욕하는 사람에게는 야 저 사람도 저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내가 차나 뭐 책이나 뭐 무슨 공부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듯이
저 분은 그 가방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찮다라는 그런데 집착하는 사람은
못난 사람이다라는 집착이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이야기 해줌으로써 못났다 라는 상을 깨 줄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무엇을 집착한다 할 지라도 그게 좋은 것도 아니고 나뿐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스님들이 어떤 수행에 집착하고 명상에 집착하고 깨달음에 집착하는 것과
어떤 한 신도님이 루이비통 가방에 집착하는 것과
사실은 깨달은 자 입장에서 보면 오십 보 백 보다. 집착하는 것은 똑같다 이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그건 다 망상분별 허망한 생각이라는 생각이 만들어내는 분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분별에서 오는 모든 분별들은 오십 보 백 보일 뿐이지
더 수승한 분별 더 안 좋은 분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도에는 선도 필요 없고 악도 필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착한 것이 도가 아니고 나쁜 것이 아니듯이 착한 것도 도가 아니다.
선 악이라는 분별이 있으면 그건 벌써 선악의 이분법으로 분별해서 나누는
거기서 나눠놓고 그 중에 좋은 거 선택하는 것 밖에 안되 자나요?
둘로 나누고 그 중에 좋은 거 선택하는 것은 근원적이지 못한 것 입니다.
좋은 거 선택해서 거기 집착할게 뻔하니까.
좋은 거 선택해서 집착 하고서는 나쁜 거 선택해서 거기 집착하는 사람을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우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우월감에 빠진다고 말이죠.
이건 똑같이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이 나는 수행하는 사람이고 나는 삼천배를 열번한 사람이고
나는 공부하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다. 너희들은 중생이다.
수행도 안하고 공부도 안하고 법문도 안 듣고 세상에 집착만 하는 사람들이니
너희들은 못난 사람들 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거는 정말 똑 같은 것이죠. 똑같은 거
저 위에서 본다면 분별 없는 자리에서 본다면 똑같이 분별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와 같이 분별하는 그 자체 분별한다 라는 그 자체 분별한다 라는 그 자체가 바로
이 의식 인식이 하는 식이라는 것이 분별심 이럽니다. 알음알이, 분별심, 분별심이 바로 식이에요.
근데 이 분별심 조차 정해진 고정된 실체적인 집착할 것이 못 된다
그것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을 접촉했을 때 그저 일어나는 하나의 망상일 뿐이라 말이죠.
실체가 아니라. 이 분별심 이라는 이 마음이 대상을 보고
대상을 실체 한다고 착각하고 실체 한다고 착각하니까 분별심을 일으킨 것뿐입니다.
실체 한다고 여기니까 좋다고 생각하고 실체 한다고 여기니까 싫다고 생각하는 거지 않습니까?
실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내 바깥에 있는 대상이 실체가 아니라고 안다면
좋다고 실체로 집착할 필요도 없고 싫다고 실체적으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밀쳐 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겠죠.
바깥에 대상은 이 인식 식 우리가 식이라고 생각하는 알음알이 분별 식의 대상
이 인식의 대상을 초기불교에서는 명색이라고 부릅니다.
명이라는 건 주로 정신적인 대상 정신적인 대상에는 이름이 붙자 나요
정신적으로 뭔가 물질적으로 딱 이루어지지 않은 것 이니까 그런 이름이 붙는다 말이에요.
예를 들어 사랑, 사랑이 물질적인 어떤 대상이 있는 게 아니지 안습니까
정신적으로 정신적인 대상이지. 그러니까 사랑이란 이름을 붙여 놓는다 말이죠.
또 색이라는 것은 물질, 모양을 이야기 합니다.
이거는 컵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색이 있단 말이죠
사람 몸뚱어리도 색이 있고 우리가 대상이라고 인식하고 알음알이 분별 하나 모든 것은 이름이 부여돼있거나
정신적인 대상이라서 이름이 부여돼있거나 아니면 색이다. 모양이 있는 색이다.
그래서 이름을 어떤 상을 짓던 모양을 모양 있는 대상을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전부다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상을 부여한다 말이죠.
상이라는 것은 사랑했을 때 사랑 이라는 내 마음속에 만들어진 이미지 있잖습니까
이 이미지를 상이라고 합니다. 컵 이러면 컵 이라는 어떤 이미지가 딱 떠오르지 안습니까 그것이 상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그 상을 타파해야 된다 그러죠 왜 상을 타파해야 되느냐
명과 색 이름 붙인 모든 것 물질적인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뭐 물질적인 대상을 본다고 했을 때 예를 들어 뭐 청국장이란 대상이 있다.
청국장이라는 것은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이것을 인식했을 때 좋은 것인가요 나쁜 것인가요?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은 그걸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청국장 하면 좋은 맛도 좋고 향기도 좋고 접촉해서 씹어봐도 좋고 생각해봐도 좋고 다 좋단 말이에요
그러나 외국인들은 그런 거 처음 느껴보고 그런 사람들은
이 무슨 화장실 냄새 같기도 하고 그걸 아주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향기도 안 좋고 맛도 안 좋고 이렇게 느낄 사람도 있단 말이죠.
홍어 같은 거 안 좋아하는 사람은 그걸 어떻게 먹느냐 하고 이렇게 생각하지만
또 좋아하는 사람은 또 너무너무 좋아하는 것처럼 홍어라는 것 자체에 고정된 자체 성품이 없단 말입니다.
실체적인 어떤 고정된 자체 성품을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규범을 가지고 있는 자체 성품이 딱 있다고 한다면
그 어떤 사람이 그걸 보더라도 똑같이 인식할 것입니다.
자체 성품이 없으니까 누구는 그것을 좋게 인식하고 누구는 나쁘게 인식한단 말이죠.
독자적인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아까 말한 명품 백이라고 할지 다이아몬드라고 할지 자동차라 할지 좋은 집이라 할지
돈이라고 할지 이 모든 것들이 자체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수천억 수 조원을 벌었다 할지라도 본인이 그걸 다 쓰고 죽을 것 같지만
자신이 살아 있으면서 실제 쓸 수 있는 것은 한정되고 제한돼있지 않습니까?
인생이 어떤 사람은 한때 몇 백억씩 벌었다가 망해가지고 몇 백억을 한꺼번에 그냥 탕진해본 이런 것들도 있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분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몇 백억을 벌어서 막 떵떵거리며 살다가 하루 아침에 그냥 다 날려가지고
완전히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된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야 진짜 한바탕 꿈이 일어난 것이구나……
정말 내가 부자라는 하나의 생각을 확 가지게 되는 한 시기가 있었고
또 왕창 날리는 어떤 시기가 있었고 그 정말 한바탕 꿈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것과 다르지 않구나.
삼천억 가지고 있는 중에도 삼천억을 쓰고 살지 않지는 안잖습니까
어차피 밥 먹을 때 똑같이 밥 먹고 똑같이 삼천 원, 오천 원, 만 원짜리 밥 먹지,
잠잘 때 어차피 똑같이 누워 자는 그것은 똑같습니다.
똑 같은 이불 덥고 수백만 원짜리 이불 덥고 자는 것도 아니고,
뭐 백 평짜리 아파트 산다고 그것을 다 돌아다니며 사는 것도 아니고
화장실을 쓴다고 해서 똑 같은 변기 위에 앉아 있는 거지 뭐 더 고급스럽고 더 큰 변기에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그 순간 똑같이 쓰고 있는 것이거든요.
길을 걸을 때 똑같이 걸어 가는 거구, 차에 탈 때 똑같이 타는 거구
뭐 조금 편하냐 안 편하냐 이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크게 달라질 것은 없거든요
내 의식에서 야 이 돈이 내가 있다 괜히 든든한 마음을 마음속으로 품고 있는 거구
또 돈이 다 없어졌으니까 나 인제 궁핍할 거다 하는 어떤 이러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 뿐이지
그게 마음으로 만들어내고 마음으로 무너뜨리는 것 뿐이지
그런 어떤 삶의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신적인 대상도 마찬가지죠 뭐 예를 들어 종교 불교라는 종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단 말이죠.
그 이미지가 실체적인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해 해야 될 거에요
어떤 사람은 좋아하지만 예를 들어 배타적인 타 종교 신자 중에 일부는
뭐 아주 불교는 사탄이고 마귀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실체가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그 대상은 전적으로 달라질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접촉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이 마찬가지이다.
그 대상이 실체가 있는 대상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내 마음에서 규정할 뿐이지
내 마음에서 가치 부여를 한대로 가치부여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내가 가치부여를 이것을 A라는 것을 좋게 가치 부여를 하게 되면 그건 나에게 와서 좋게 바뀝니다.
내가 꽃이라고 불러줄 때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하듯이
내가 이것을 아름답게 생각하면 그건 나에게 와서 좋은 영향을 미친단 말이에요.
어떤 차를 어떤 분에게 차에 아주 정말 푹 빠진 분들은요
거의 차를 만병통치약처럼 느끼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리고 심지어 차를 마시면 저절로 수행이 된다고 여기는 분께서도 계시더라고요.
이 차를 마시면 수행이 엄청 난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차를 마시고 탁 앉아 있으면
좌선이 저절로 삼매에 드는 이런 정도 까지 생각하는 분들이 계셔요.
또 몸이 엄청 건강해 진다고 여기는 분들도 계시고요.
예전에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죽염에 대한 어떤 아주 강력한 신앙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계셨어요.
이 분은 감기 걸려도 죽염 먹으면 낳는다고 생각하고 무슨 병이 걸려도 죽염만 먹으면 다 낳는 거에요
이분한테는. 배탈이 나도 죽염 먹으면 낳는다고 생각하고
그런데 실제로 그분은 뭔 병이 걸려도 죽염만 먹으면 낳는 현실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실제 바깥에 실질적인 어떤 규정지어진 어떤 실체적인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의식에 따라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염 먹으면 만병통치약이라고 곧게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굳게 믿고 있는 이 가치부여 한 것 때문에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뭔 일이 있어도 죽염만 먹으면 낳길 시작해요.
기도하면 모든게 낳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기도만 하면 낳기 시작합니다.
믿음 없이 기도하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낳지를 않는 것이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죽염 먹으면서도 별 생각 없이 먹죠.
어떤 분이 죽염을 이만한 통에 들은 죽염을 자주자주 먹으라고 사다 주셨어요.
저는 그게 그렇게 귀한 줄도 몰랐고 좋은 줄도 모르고 하니까
별 생각 없이 먹고 그렇게 크게 먹을 일도 없으니까 별로 안 먹었고
신도님들이 김치 담근다고 하니까 이것도 같이 넣어서 담그세요 하고 드리기도 하고 그러고 지냈죠.
나중에 이분이 와가지고 그때 그 죽염 잘 드셨냐고, 네 잘 먹었습니다 했더니
그거는 그냥 먹으면 안되고 이건 뭐 아홉 번 어떻게 어떻게 하고 해서 이거는 사기도 힘들뿐더러
너무 귀한 거라 꼭 입에 넣어가지고 침으로 녹여서 드셔야 하고 뭐 한참 설명을 해주시더라고요.
그게 그렇게 귀한 거에요 이랬더니 구하기도 힘든 정말 귀한 거라고.
누가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먹었을 겁니다 이랬더니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야 이게 그렇게 귀한 것인가 싶고 그분께서 그것을 먹고 확 나은 이야기를 해주세요.
야 이게 그런 거구나 한번은 보이차를 요만큼 빼서 갖다 줬단 말이죠.
그것을 스님들하고 나눠서 맛있게 잘 먹었죠
근데 뭐 보이차 어떤 게 귀하고 어떤 게 안 귀한지 제가 잘 모르니까 그냥 맛있게 먹었죠.
후딱 먹어버렸죠. 근데 얼마 있다 오셔가지고 그 보이차 좀 가지고 오라고
그분은 이제 같이 먹는 보이차가 있고 저 뒤에 구석에 혼자 먹는 보이차가 따로 있으신 거에요.
저도 이제 구석에 쟁여놓은 줄 알고 가지고 오라고. 없습니다 이랬더니.
그 어찌했냐 하셔서 그 다음날 다 없어졌죠 그랬더니 그게 시가로 따진다면 몇 천만 원 보이차 수가 있다
이거 구하기 귀한 건데 그런 보이차다.
근데 뭐 우리가 보기에는 보이차 정말 좋아하는 귀한 보이차는요 이거를 한번 넣어가지고
열 번 이십 번 삼십 번 사십 번씩 막 이게 물 색깔 안 나올 때까지 우려먹습니다.
아무 색깔 안 날 때까지 우려먹다가 그걸 또 나가지고 말려요.
그걸 다 마른 것을 주전자에 넣어가지고 또 끓여 드십니다. 그
정도의 어떤 가치를 딱 부여하고 계신 분께서 계신다고 봐야죠.
실제 그런 분에게 그게 효과가 있습니다.
그 보이차만 먹으면 정말 아주 막 수행도 더 잘되고 공부도 더 잘된다 말이죠.
이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웃기는 이야기죠 그냥 우스운 이야기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우스운 이야기지만
아는 사람이 보면 정말 심각하게 중요하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그렇게 중요하게 느끼는 사람을 우리가 보면 웃기죠.
근데 이런 일들을 우리 모두가 하고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돈이 중요하다고 이렇게 여기지 않습니까?
자식이 성적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서울대 가고 좋은데 취직하고
돈을 많이 벌고 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정말 깨달은 도인들이 봤을 때 이건 웃기는 거겠죠.
거기에 가치 부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건 우스운 일이죠
내가 가치 부여한 게 다르니까
심지어 내가 젊은 친구들이 내가 사랑하는 여자친구에게 마음이 딱 꽂혔다.
거기에 막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가치는 거기가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야 내가 백억을 줄 테니까 그 여자를 버려 버리겠습니까?
백억을 줘도 안 버립니다. 한참 그냥 사로잡혀 있을 때는 아파트를 줘도 안 버리고요
그러면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어떻게 가치 부여를 했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고
그것이 나를 좌우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은 이렇게 만들어 집니다.
여러분들이 견고하다고 여겼던 모든 가치는 단지 내가 부여한 것일 뿐이지
그러한 견고한 가치를 지닌 내 바깥에 있는 특정한 대상은 없습니다.
돈이라는 게 그렇게 견고한 것 같지만 그러한 가치를 가진 무언가가 아닙니다.
자식이 서울대 가는 게 아주 중요한 어떤 거 같지만
서울대 갔지만 거기 가서 갑자기 뭐 교통 사고로 죽었다거나
아니면 그 서울대 갔지만 그래서 좋은데 취직했지만 거기서 진급도 못하고 이랬다던가
거기에서 뭔가 아주 안 좋은 일들이 벌어진다던가
회사를 취직했는데 좋은데 취직해서 돈은 많이 버는데 그 삶이 괴롭다던가
돈 많이 버는 사람은 삶이 괴롭지 않겠습니까? 괴로울 수 있죠.
하루하루 사는 게 괴롭다거나 아니면 맨날 싸우고 자식과 맨날 싸우고
하루하루가 정말 죽고 싶을 만큼 괴롭다던가 수백억을 벌어온들 그런다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내가 지금 중요하다고 여기고 가치 부여했던 모든 것들은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 다른 쪽에 가치부여를 하는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는 전부다 우스운 일밖에 안됩니다.
나 혼자서 심각하게 집착하고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일 뿐이지
이렇게 내 바깥에 있는 모든 대상은 이렇게 내가 스스로 가치 부여를 해가지고 그게 대단하다고 여길 뿐이지
실체적인 어떤 규범을 가지고 기준을 가진 특정한 가치를 가진 무언가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없다는 말이죠
다이아몬드라는 것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니까 그게 중요해 진 것이지
이 바깥에 있는 풀 잡초들이 우리가 보기에는 잡초지만
제가 한때 자연 이런걸 공부할 때 보니까요 잡초라고 여기던 대부분의 것들이 약초 입니다. 약초.
그런데도 우리는 밭에서 크는 것들은 사실은 이것은 그렇게 크게 몸에 도움되는 것들이 아니더라고요.
그냥 막 자라는 잡초들 이것들 뜯어 먹으면 제일 건강해지기 쉽더라고요.
산에서 피어나는 수없이 많은 마구자비로 그냥 우리는 잡초라고 생각하는 것들
이게 최고의 어떤 가치를 지닌 것들이기 쉽습니다.
근데 그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은요 이 잡초요 이거 간단합니다.
이걸 대단한 걸로 만드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왜 간단합니까 여기에다가 돈만 투자하면은 이거는 대단한 게 되어 버립니다.
무슨 말이에요?이랬더니
예를 들어 무슨 가시오가피라던가 뭔가 그 특정한 가시오가피를
어디 지역에나 특정한 가시오가피 그걸 연구를 시켰다는 거에요.
몇 억을 투자해서 연구를 시켜서 그것이 얼마만큼 몸에 효능이 좋은지를 연구를 딱 시켜서
논문을 몇 개를 만들었더니 갑자기 그때부터 대서특필이 되고
그때부터 이게 엄청난 약초인 것처럼 되더란 말입니다.
어느 날 연구를 좀 해서 막 길가에 피어난 민들레가 좋다 이러니까
민들레를 서로 다 뜯어가서 먹고 유행을 하더라
이 세상 모든 것이 이렇게 가치를 어떻게 부여할 거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모든 가치부여를 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돈이 드는 것뿐이지,
노력이 필요한 것일 뿐이지 그러니까 그 가치 부여를 해놓아 버리면 거기 사로잡혀 버리면
거기 노예가 되어서 심지어 목숨까지 겁니다.
예를 들어 특정 이단 종교가 있어요 그 종교에 가치 부여한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그 종교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 받치고 내 전 재산까지 갖다 받칩니다.
실질적인 실체가 있어서 받치는 게 아니라
내가 실체가 있다라고 내 스스로 여기고 내 스스로 가치 부여를 했기 때문에
내가 인식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초기불교에서 십팔계라는 육근 육경 육식이라는 십팔계라는 가르침은 어떤 것도 실체가 없다
여기 안에 나도 없고 바깥에 특정한 가치를 지닌 대상도 없고 내가 단지 인식할 뿐이다
내가 그렇게 알음알이로 인식해서 허망하게 생각으로 마음으로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세상 모든 것은 오직 식 뿐이다.
이렇게 유식이 이 십팔계를 나중에 유식 불교에서는 오직 식뿐이다 해서 유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모든 것은 식이 나눈 건데 그 식초자 허망한 것이란 말이죠.
허망한 식이 나눈 것일 뿐이다.
그래서 유식에는 뭐라고 하냐 하면 나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어요, 내가 세상을 보지 않습니까?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향기 맡고 접촉하지 않습니까?
보는 부분 나라고 여기는 부분 이 주관이라고 생각하고
바깥은 객관이라고 생각하는데 주관이라고 여기는 부분 보는 부분 이것을 견분이라고 합니다.
견분 보는 쪽이다 이거죠. 바깥에 있는 대상 객관이라는 대상을 상분 이라고 부릅니다.
보여지는 상이란 말이죠 상 이미지 대상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견분이 상분을 접촉한다
그런데 이 견분과 상분이 모두가 동일한 식에서 나온 거라는 말이죠
즉 나도 바깥에 있는 대상도 전부다 식 마음 알음알이에서 나온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내가 대상을 보는 게 아니고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뿐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컵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이 컵을 보자마자 과거 기억 속에 컵이라는 것을 배우고 익히고 경험해서 안
그 옛날에 배웠던 것을 자동으로 떠올려가지고 걸러 가지고 아 이건 컵이구나 라고 인식하는 것뿐이란 말이죠.
내 안에서 인식한 것을 다시 재 상영할 뿐인 것 입니다.
불교라는 것을 볼 때 부처님을 볼 때 여러 여러 법담 할 때 날마다 새롭지 못한 이유는
법담 할 때 지난주 그 지난주 계속 나와서 봤던 부처님을 인식하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는 오늘 지금 부처님을 보고 계시지만 새로운 부처님을 보고 계신 게 아니에요.
지금 이순간에 있는 그대로의 부처님을 보고 계신 것이 아니고
과거 기억 속의 부처님을 투영해서 재생해서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매일같이 새로운 부처님을 못 봐요.
저를 볼 때도 지금 이 순간의 있는 그대로의 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내가 알고 있던 그 법상스님을 내 기억 속에 투영해서 바라볼 뿐인 것입니다
처음 볼 때는 좀 새롭게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가 내 머릿속의 기억을 되살려야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바깥에 있는 저라는 실체를 본다고 여러분은 여기겠지만
저를 있는 그대로 지금 이순간의 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의 저는 지난주일 때 저와 전혀 다른 존재 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전혀 새로운 존재에요.
제가 지난주에 하였던 설법과 지금의 설법과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새로운 설법 입니다.
여러분이 전혀 새롭게 들을 수가 있다면
과거의 배워 익혔던 그 어떤 기억들을 끄집어 내어가지고 투영해가지고 해석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순간에 새롭게 들을 수만 있다면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이 식이 둘로 나눠가지고
주관과 객관으로 나눠서 동일한 식이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는 것 입니다. 실
제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우리가 생각을 했다 하면 그건 벌써 주관과 객관으로 나뉘는 것 입니다.
둘로 분별된단 말이죠 그래서 이 인식작용이 주관과 객관으로 나눠서
내가 나를 보는 건데 내가 나를 보는 것인지 모르고 내가 세상을 본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이 인식이 세상을 본다라는 것 자체가 인연 따라 본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인연 따라 모든 것은 육근과 육식 육경과 육식이 인연 따라 맺어져야 상호상의관 상의상관적인 관계 따라서
인연 따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그래서 능히 세상을 인연 따라 인연을 맺어서 보는 주관이 저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능히 나는 인연을 맺지만 내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내가 인연 맺을 때 인연 맺어지는 대상이란 말이죠.
그런 면에서 유식에서는 능견 이라고 부르고
이 견분에 보면 나의, 주관적인 부분을 능연 능히 인연을 맺는 사람이다
바깥에 있는 대상을 소연 그래서 인연이 맺어지는 바다 그래서 바소(所)자를 써서 소연이라 부릅니다.
즉 인연 맺어지는 것도 나고 인연 맺어지는 대상도 다 원래 하나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인연을 맺는 인연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은 이렇게 내 마음이 나눈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또 이 능연을 능량이라 부르고 소연을 소량이라고도 부릅니다.
헤아릴 량 자를 써서 즉 내가 생각하고 헤아려서 아는 모든 생각들
이 헤아린 알음알이 이 모든 것 전부다 능량이든 소량이든 전부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허망한 식에서 투영되어서 나온 착각이고 분별심일 뿐이다.
진짜 제대로 된 생각 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소리입니다.
전부다 능량 아니면 소량일 뿐이지 내가 능히 이렇다라고 내가 내 스스로 분별한 생각 이거나
바깥에 우리가 세상이 전부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세상이 전부다 저건 나쁜 것이고 이건 좋은 것이야 하고 기준을 매겨 놓지 안잖습니까
객관적이라고 여기자나요 개관적이라고 여겨지는 그렇게 소량 되는 그런 어떤 분별심이 있을 뿐이지
실제 그건 그렇지 않다.
그래서 뭐 능연식 소연경 이럽니다.
이 식이라는 것이 능히 분별하고 분별되는 많은 바깥의 경계 대상으로서 분별 되어지는 바다 이런 식으로
말을 쓰기도 하죠 그래서 유식이란 이 용어 때문에 어려운데 그냥 한가지 입니다.
다른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보는 쪽이나 보는 바 대상이나 전부다 식의 작용일 뿐이다.
마음의 작용일 뿐이다.
우리는 내가 진짜 바깥에 있는 규정된 어떤 실체적인 좋고 나쁜 대상을 따라서 움직인다고 생각 하지만
저기 좋은 게 있으니까 내가 그것을 따라가 집착하는 것이지요 라고 생각하지만
저기 좋은 게 진짜 있어서 내가 따라가는 게 아니었단 말입니다.
내가 좋은 거라고 규정함과 동시에 내가 좋은 거라고 집착함과 동시에
허망한데 내가 그걸 좋은 거라고 가치를 매김과 동시에 그게 좋은 게 돼버리고
내가 그걸 쫓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 내가 그 동안 집착했구나 집착에 빠져가지고
그걸 못 갖게 된다고 괴로워하다가 그럼 또 인제 집착을 떨어뜨리려고 고생고생하고
수행을 한다고 난리를 치다가 그 수행을 해서 다 떨구고 났더니 막 자유로워졌다 하면서
나는 그 집착에서 자유로워졌어 나는 집착을 떨군 사람이야 하고 자유인인척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러지만 또 다른데 집착을 끊임 없이 하게 된단 말이에요. 이
집착의 대상을 끊임없이 바꿔가면서 우리 인생은 평생 이렇게 계속해서
이 식의 노예가 되어서
이 헤아림의 알음알이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 것입니까
허망하게 내가 그렇게 내가 만든 것에 내가 빠져가지고
내가 거기 노예가 돼서 괴로워하고 사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입니까.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이 모두가 공하다 나도 세상도 텅 비어있다.
나도 아상일 뿐이고 세상이라 여기는 것도 법상일 뿐이지
아상과 법상이 전부다 공허하다 그래서 아공법공 이런단 말이죠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의 작용일 뿐이다
그래서 생각을 하나 일으켰다 하면
이것은 전부다 둘로 나뉘고 주관과 객관으로 나뉘고 둘로 나뉘어서
분별 판단이 시작되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래서 불법은 생각으로 헤아려서 알 수 있는 방편은 어느 정도 까지지
불법에 본질을 꾀 뚫어 보려면 생각이 움직여서 안 된단 말이죠.
생각이 딱 멎는 곳에서 그래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분별 없이 지켜보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분별로서는 그 어떤 불법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을 불교에서 예를 들면 솜씨 부릴 수 없는 그 어떤 솜씨도 부릴 수 없는 자리이다.
내가 아무리 똑똑해도 머리를 가지고 아무리 분별해가지고 솜씨를 부리려고 해도 어긋난단 말이죠.
조작해서는 어긋나는 자리이다 라고 얘기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괴로워하는 모든 것은 이 나가 진짜라고 생각해서
더 좋은 나를 만들려고 더 좋은 나가 만들어지지 못하니까 괴로운 것인데
그 또 한 허망한 분별일 뿐이고
바깥에 있는 진짜 중요하다고 여기고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그러한 가치를 부여해 놓고 거기 쫓아가느라고 괴로운 거란 말이에요.
이 사람 쫓아가고 저 사람 쫓아가고 하느라 괴로운 것인데 그 또한 허망한 분별일 뿐이다.
옛날에 학교 다닐 때 인제 외국에 가있을 때인지 보니까
아주 순진한 여학생이 있는 거에요. 예쁘고 착하고 순진한 여학생이 있는데
예쁘고 착하고 순진하니까 남자들이 막 서로 관심을 갖겠죠.
와 근데 참 이게 뭐랄까 막 동생 같고 하는데 너무 가슴이 아픈 거에요
분명히 이놈들이 시퍼런 속내가 보이는 거에요. 제가 시퍼런 속내가 보이는데
순진하니까 좀 잘생기고 하니까 쫓아갔다가 하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픈 거에요.
그러면서 제가 좋아하는 마음이 든 건지 이렇겠죠 그러다 보니까 집착이 생겼겠죠
그러다 보니까 얘가 남자한테 휘둘리고 저 사람한테 휘둘리고
또 새로운 다른 사람이 막 이렇게 하니까 막 착하니까 이리 끄달리고 저리 끄달려 다니니까 가슴이 아픈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명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냐 하면요
야 내가 이 아이가 착하고 순진하다고 동생 같다고
이 아이가 이사람 만나고 저 사람 만나고 다 가슴이 아파하고 다 하지 말라 하고 이거 집착하면
내가 이세상 모든 사람들 다 쫓아다니면서 그래야 될 판인데
내가 이세상 모든 사람 다 쫓아다니면서 그럴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집착해야 맞느냐 굳이 집착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해줄 수 있지만.
이때 제가 깨달은 게 뭐냐 하면요
그전만 해도 제가 예를 들어 정치인들이 뭐 잘못했다 아
니면 뭐 연예인들 누가 뭘 잘못을 했다 친구 누가 뭔 잘못을 했다
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학회장이 뭔 잘못을 했다
이런 거 있을 때마다 내일인 것처럼 막 화를 내고 열을 내면서
이걸 내가 바꿔야 될 것 갖고 이세상을 내가 다 바꿔야 될 것 갖고
내가 안 바꾸면 절대 안될 것 갖고 그랬거든요
근데 그게 딱 깨달은 게 뭐냐 하면
아 내가 이모든 것을 다 바꿀 수가 없구나
내가 정의심을 가지고 어떤 이 세상을 아름다운 자비심을 가지고 바꿔준다고
나는 집착해 생각하지만 그거는 정의감이 아니라 내 집착일 뿐이구나.
내가 정말 자비로운 마음을 내서 그런 마음을 낸다면
내가 특정한 사람에게만 집착을 한다라는 거 자체는 집착일 뿐이지 이건 정의감도 뭐도 아니구나.
예를 들어 한국의 어떤 정치인이나 누가 잘못했다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절대적으로 내가 이걸 안 바꾸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 한다면
그건 한국이라는 집단적인 아상에 갇혀있는 사람이에요.
사실은 한국이라는 아상이 아니라 좀 더 확장하면 인류라는 어떤 것으로 넓혀진다면
왜 한국 사람 한국 정치인 잘못한 것만 문제 삼습니까
외국 정치인들이 잘못한 거 다 문제 삼아야죠
인류라는 전체를 놓고 본다면 그런데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게 옳은 것입니까.그러지 못하거든요.
다 그래서 내 문제라고 집착하게 되면 그걸로 내가 괴롭지만
그걸 내려놓게 되면 내가 최선은 다하되 내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최선은 다하되
나만이 할 수 있다거나 내가 안되면 절대 안 된다거나 이거는 내 집착일 뿐이구나 이걸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옳은 명분을 가지고 옳게 일하는 사람도 그럴 수 있어
요 명분은 옳은데 그럴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그 명분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에 이거 반드시 내가 해야 된다거나 하고 집착 할 때는
그게 틀려버릴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큰 가치에서 봤을 때는 그게 참 허망한 것이거든요
제가 인류 세계사 같은 것을 다시금 뒤져보니까 더 분명해 집니다.
세상을 세계사를 전체를 놓고 봤더니만
모든 사람들이 내가 바꿔야 된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을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수많은 인류 속에 있는 위인들이나 정치인들 임금들
모든 사람들이 신하들이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을 바꾸려고 미친 듯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어느 순간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바뀌어진 세상은 또다시 타락하고 또 다시 무너지고 또 바뀌고 또 무너지고 이 연속이더라고요.
이게 세상이라는 것이 인류라는 것이 배우고 깨닫는 과정입니다
올라 갔을 때도 배우는 것이고 내려갔을 때도 배우는 것이 있는
이 파장 속에서 배우고 깨달아가는 과정이었단 말이죠
그렇게 여기면 세상을 바꾸는 건 당연히 해야 되지만 바꾸는 것에 집착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좀 세상이 다운돼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크게 문제 삼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되 집착할 필요는 없다 말이죠.
그러니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하려고는 하되 그렇게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해서 내가 괴로워 죽을 것 같지는 않는 것입니다
왜 그 모든 것이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한바탕 꿈과 같은 것 인줄 아니까
우리는 세상이 이렇게 흥망성회를 한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허망한 것들이 일어나는 것이 분명해 지기 때문에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깥을 바꾸는 것이 아니구나
나를 바꾸는 것이 먼저구나 내가 내 마음을 바꾸면 그게 세상을 바꾸는 것이구나
부처님께서 딱 깨닫고 봤더니
온 우주가 부처님이 깨달음과 동시에 온 우주 전체가 깨달음을 얻은 것과 똑같다
세상은 바꾸려고 집착할 뿐이지 아무리 쫓아가도 다 바꿀 수 없습니다
기를 써서 우리나라 바꿔나도 다른 나라가 또 괴로운데
그 다른 나라 가서 또 바꿀 겁니까?
굳이 바꿀 필요가 없을 수도 있어요
왜 부처님이 법을 전하지 않으려고 처음에 했었던 것처럼
본래 깨달아 있는 사람들이 다만 허망한 착각을 가지고 그리 살고 있을 뿐이고
그들은 그 누구나 그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깨달음의 과정으로 가고 있을 뿐이다 그
리고 우리가 정말로 시급한 건 바깥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바깥을 바꾸려고 하다가 내가 죽습니다.
내가 더 괴로워서 내가 바깥을 다 못 바꾸니까 증오에 불타올라서 괴롭단 말이에요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이 바깥을 바꾸려고 하다가
내가 그 괴로움에 넘어가가지고 내 마음도 못 다스린단 말이죠
내 마음이 딱 먼저 다스려지고 내 공부가 먼저 딱 되는 게 세상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도 나라 전체를 구제해야 할 왕자가 나라를 탁 버리고 가서
나 자신을 먼저 구제했더니 지금 이렇게 인류전체를 구제하는 큰 인물이 된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꾸 바깥에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막 나서는 거 나쁘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먼저 자신을 구제해야 하고 바깥에 세상에 귀하다고 쫓아다닐게 아니고
나 자신을 먼저 구제하면 그 모든 게 허망하다라는 게 탁 깨달아 지니까
거기서 더 이상 쫓아갈 것도 없고
이거 쫓아가고 저걸 쫓아가고 더 많이 더 많이 더 많이 하는
이러한 허망한 삶을 그 자리에서 끝낼 수 있는 게 바로 이 마음공부란 말이죠 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이 공부를 하게 되면 그 어떤 것도 바깥으로 쫓아다닐 필요 없이
이 자리에서 탁 끝나는 공부다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