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체험 후의 깨어남 -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보통 깨달음이라는 것은 옛날 전통방식에서는
'수행을 통해서만 온다' 그리고 '특정한 수행을 통해서만 온다'고
우리가 생각하기도 했었는데요, 꼭 그런 것이 아니죠.
요즘에 그 서양이나 뭐 이런 데서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불교를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분들도 계시지만
또 중국 조사서에서 보면 어떤 스님의 한 마디, 말 한마디에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뭐 어떤 꽃 한 송이를 바라보다가,
부처님 같은 경우는 새벽 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시기도 하고
혹은 요즘에 보면 아주 깊은 그 절망과 고통과 우울과 이런 어떤 깊은,
어떤 침체에 빠져 있던 사람이 정말 극에까지 가는 어떤 괴로움 속에 있다가
한 생각, 한 순간 그냥 그것이 탁 깨지면서 깨달음이 오는 경우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즘에 또 이렇게 알려져 있는 것들 가운데 보면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임사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경험하고 돌아와서 봤더니
옛날과, 전과는 전혀 다른 어떤 세상을 보는 어떤 관점들이 생기게 되고,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티벳 사자의 서』에도 보면 우리가 죽음이란 것은
죽고 나서 놀라운 깨달음의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칠칠재를, 일곱 번 재를 하는 이유도 일곱 번의 어떤 가능성이 열린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살아 있을 때 이 깨달음도 마찬가지잖습니까?
우리가 생각했을 때는 그냥 한 생각 탁 깨달은 것 같지만,
겉에 보기에는 한 생각 깨달은 것이지
실제로 보면 부단히 닦고 노력하고 어떤 선근 인연을 쌓고 그랬을 때
어느 한 마디 말에 의해 탁 깨달을 수도 있고 하는 것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있을 때 수행을 열심히 하거나
또는 오랜 생 동안 많은 공부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살아 있는 어느 순간에 탁 깨달음의 순간이 올 수도 있지만,
그 놀라운 기회 중에 하나가 죽음이라는 거죠.
죽음이라는 그 순간에 놀라운 깨달음을 탁 얻게 되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임사체험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아주 놀라운 어떤 것들을 경험하고 오는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오늘 제가 여러분께 한 분을 좀 소개를 시켜드릴까 하는데요.
아니타 무르자니라는 분인데요.
제가 법보신문에 '스님이 사랑하는 책들' 인터뷰에도 실었던 책 중에 한 권인데,
이 사람은 암과의 사투 끝에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가, 갔다가 돌아온 인도여성입니다.
싱가포르에서 태어나서 홍콩에서 계속 살았던 사람인데요,
2002년에 임파선 암이 발견되고, 4년 동안 투병 생활을 했고,
2006년에 이제 마침내 악성세포로 인해서 모든 몸의 기능이 멈추게 됐고,
이제 뭐 죽음의 상태, 임사체험의 상태로 들어가면서
한 30여 시간 동안 이제 임사체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경험을 하고 다시 살아났는데,
살아나고 나서 너무나 그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 거예요.
임사체험이라는 시간동안 이분은
그야말로 깨달음과 같은 그런 어떤 경험들을 체험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런 책들 유형의 비슷한 책들도 또 여럿 나와 있는데,
이 책이 특별히 아주 감동적인 어떤 이야기들이 있고,
이분이 지금도 아주 임사체험 끝에 건강을 되찾아서
지금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강의도 하러 다니고 있고,
유투브에도 보면 이분의 어떤 인터뷰 같은 것들이 나와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쓴 책이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라는 책인데,
저도 어떤 신도님께서 추천을 해주셔서 읽어봤는데, 아주 그 내용도 아름다웠지만
그 곳곳에 나오는 이분이 죽음을 체험한 다음에 돌아와서 느꼈던 깨달음,
뭐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적어놓은 부분이 정말 제가 여태까지 내가 하던 이야기들,
흔히 그런 이야기들, 혹은 스님들이나 불교에서 항상 하던 이야기들,
그런 것과 그야말로 동일한 그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제가 몇 구절을 좀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내 자신에게, 내가 만난 모든 이에게, 그리고 삶 자체에게
언제나 내 고유한 본질을 표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되려는 노력은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진정한 나 자신을 앗아가기만 했다.
그럴수록 다른 이들이 내 진정한 모습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뿐이었고,
내가 그들과 진정으로 만나지 못하게 만들 뿐이었다.
진정한 내 자신이 되지 않는 것은 또한 내가 여기에 와서 되고자 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존재의 모습을 이 우주로부터 빼앗는 것이었다.”
이분이 깨달은 첫 번째가 이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삶 자체에
언제나 자신의 고유한 본질, 나다운, 자기다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자신의 본질을 표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니까 즉, 나는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뭔가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딴 사람 저게 좋아 보이고,
저 사람은 저게 좋아 보이고,
저 사람의 삶이 더 멋있어 보이고,
저 사람이 가진 돈이 부럽고,
저 사람이 가진 외모가 부럽고,
저 사람이 가진 능력이 부럽고,
저 사람 아들은 시험도 잘 보고, 학교도 좋은 데 갔고,
남의 남편은 돈도 잘 벌어 오는데, 진급도 잘하고 하는데 내 남편은 왜 이런가. '
이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내 바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람과 나의 삶을 비교하고, 어떤 우월감에 때로는 우쭐하다가
또 비교 열등감에 때로는 기분이 축 쳐지기도 하고
이런 삶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산단 말이에요.
즉, 나 자신이라는 내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고,
타인의 삶을 살지 못해서 안달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동안....
그런데 그런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하거나 뭔가가 되려고 하는 노력은 나를 더 나은 존재로
절대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오히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앗아가는 거죠.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앗아갈 뿐입니다.
우리는 남의 삶을 기웃거리면서, 남의 삶을 부러워하면서
남처럼 살려고, 저 사람의 좋은 점을 따라가려고 뒤꽁무니만 쫓아가면서,
저도 살아보니까 학교 다닐 적에 끊임없는, 끊임없는 절망의 연속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학교 다닐 때 보면요, 놀라울 정도로 이 세상에는
대단한 친구들이 많고, 대단한 능력을 갖춘 아이들이 많습니다.
공부를 아무리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기 마련이고요.
아무리 그 학교에서 1, 2등을 해서 카이스트를 가도
카이스트에서 꼴찌를 하는 아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카이스트에서 저 밑바닥을 기는 아이들이 있단 말이죠.
공부로 전혀 따라갈 수 없는 아이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내 외모에 자신이 있다 할지라도
나보다 더 잘생기고 잘난 사람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심지어 누가 보편적으로 그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생겼다 여길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그 여인은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을 더 좋아한다면
이것 또한 사람들에게 절망이 된단 말이죠.
너무 잘난 저 사람에게, 저 친구에게 내가 이것만은 이기고 말 거야 해서
막 열심히 해서 그 친구를 딱 이겨버렸더니 그 친구가 음악 시간에 보니까 연주를 하는데,
놀랍게 연주를 하는 것을 보고 또 절망을 한단 말이죠.
어떻게 저렇게 저것까지 잘하는 친구가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이기기 위해서,
이 사람에게 이기기 위해서 아무리 아무리 노력을 한들
그런 삶의 패턴 자체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절망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잘할 수가 없거든요. 우리는....
그리고 모든 것을 잘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거든요.
어쩌면 우리는 어느 생엔가 완벽하게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으로 태어나 보기도 했었을 것이고,
그 삶을 통해서 배운 것은 이미 배웠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지금 나라는 모습의 이 개성을 가진, 이 삶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삶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나온 겁니다.
다른 삶을 산다면 내가 배워야 할,
이생에 내가 반드시 배워야 할 그것을 배우지 못하고 말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진정한 나 자신이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여기서 와서 되고자 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본연의 존재의 모습을 이 우주로부터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써 살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전혀 기웃거리지 않더라도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허용하면서,
지금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주면서, 기특하다고 이야기해주면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다 할지라도,
온갖 고통을 겪었다 할지라도,
뭔가 힘든 일들이 내 인생을 스쳐 갔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나다운 삶에서 나만이,
이 우주에 있는 이 세상에 있는 그 많은 인구 가운데
오직 유일하게 나만이 겪을 수 있는 그 경험을 통해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이 우주법계 전체와 부처님이라는 우주법계 전체와 공유하기 위해서,
내가 그 우주법계 전체의 바다라는, 부처의 바다에 나라는 물결이,
내가 느낀 깨달음을 전체와 함께 공유하기 위해서,
거기에 기여하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내가 우주법계의 하나이면서 전체인,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인 그러한 방식으로
내가 이 우주법계 전체에 공헌하는 방식이고, 공헌한다고 할 수도 없죠.
우주법계 그대로가 나니까,
그러니까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다운 방식으로 살 때만이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우주법계에 기여할 수 있고,
자기부처를 드러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분이 그 명징한 상태 속에서 깨달은 큰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그 명징한 상태 속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가
내가 늘 생각하던 그 모습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기 이렇게 몸도, 인종도, 문화도, 종교도, 신념도 없이 내가 있어.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는 이렇게 존재해.
그렇다면 나는 뭐지? 나는 누구지?
분명 어떤 식으로도 내가 줄어들거나 작아지지 않았어.
오히려 나는 이렇게 크고 이렇게 힘 있고
또 이렇게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존재였던 적이 없어.
와, 정말 이런 식으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구나. ”하고 느끼게 됐다는 것이죠.
“거기에 내가 있었다. 몸이나 다른 어떤 물리적 특징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내 순순한 본질은 여전히 존재했고,
내 전체 자아에서 조금도 덜어내진 요소는 없었다.
아니, 내 물리적 존재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강렬하며 훨씬 더 넓어졌다고 느껴졌다.
사실상 장엄했다는 표현이 옳겠다.
나는 언제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언제나,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저 장엄할 뿐이라는 앎이 나를 가득 채웠다.
내가 이렇다는 걸 어떻게 전에는 까마득히 몰랐을 수가 있지? 나는 몹시도 궁금했다.“
이것이 바로 어찌 보면
우리가 보통 ‘참나’라고 하는, 주인공, 불성이라고 하는 그 자리를
탁 확인해보고 개합하면서 확인해보고서 느낀 어떤 체험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나라는 존재는 내가 죽은 그 상황 속에서도 줄어들거나 작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크고 더 힘 있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존재였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죠.
“순수한 나의 본질은 언제나 존재하고,
조금도 덜어내어지는 것은 없고, 훨씬 더 크고 강렬하고 넓어졌다.
나는 사실상 장엄했다. 있는 그대로 완전한 장엄한 순간이었다.”
이 ‘장엄하다’는 표현은 부처님과 불국토를 표현할 때 쓰는 표현이거든요.
모든 것이 원만구족해서 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원만 구족한 그대로로써 온전한 그것을 장엄하다고 표현합니다.
우리의 본질은 지금 이렇게 아파하고 있고,
지금 이렇게 돈이 없어 허덕이고, 지금 이렇게 힘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몸뚱이가 남들보다 못났고, 이랬다고 느끼는 이 순간에조차
우리는 언제나 장엄한 존재로서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할 뿐입니다.
단 한순간도 이 장엄한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훼손되지 않고, 줄어들지 않고, 어디로 달아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단 한 번도 부처가 나에게서 벗어난 적은 없습니다.
내가 부처가 아니었던 적은 없고, 우리가 부처를 잊어버린 적은 없다.
다만, 우리가 부처에 집중하지 않고,
내 머릿속에서의 내 드라마,
내가 만들어낸 연기,
내가 만들어낸 연극,
내가 만들어낸 이 삶이라는 이 시나리오 속을 살고 있으니까
그것이 진짜인 줄 알고,
내가 이 아이의 아빠고, 이 아이의 엄마고, 이 뭐 학교에서는 뭐고,
사회에서는 어떤 존재고, 절에 가서는 어떤 존재고,
이런 내가 만들어 놓은 드라마, 이 한낮 꿈, 이생에서 경험하는 독자적인 하나의 꿈,
이 꿈 이것이 나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고 사니까, 그게 심각해지는 겁니다. 중요해지고....
그러니까 그것만이 나에게 중요하구나라고 착각하면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남들과 비교하면서 사니까 나는 남보다 더 못하고,
더 잘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이것밖에 못 살고,
남들이 나를 무시했고, 남들이 나를 욕했고,
그것이 나인 줄로 착각하니까 그게 심각해지는 겁니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
내가 뭘 먹고 살든, 뭘 해먹고 살든,
돈이 많든 적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데,
그게 중요하다고 여겨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본질은 단 한 번도 훼손되지 않고
장엄한 부처 그 자체로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이 드라마 속에 빠져서,
이 머릿속에 어떤 시나리오와 각종의 어떤 망상 분별 속에 빠져서
그것이 실체라고 여기면서 착각하고 사는 그 순간에조차 그것은 착각일 뿐이지,
사실은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이대로 장엄하다.
이대로 온전한 '참나'의 어떤 존재란 말이죠.
그것을 확인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또 이분이 깨달은 것이,
“나는 왜 늘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려고만 하고
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창조적인 능력을 억누르기만 했을까?
(그동안 나는 삶에서) 싫을 때도 좋다고 하면서 번번이 내 자신을 왜 배신하기만 했을까.
그냥 내가 되는 대신 늘 다른 사람의 인정을 구하면서 스스로를 모독하기만 했었구나.
왜 나의 아름다운 가슴을 따르지 않고 나의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왜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이것을 깨닫지 못할까?
자신에게 그토록 가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난 어찌도 그리 몰랐을까?
나는 여전히 조건 없는 사랑과 수용의 바다에 온전히 잠겨 있었다.
새로워진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있었고,
내가 이 우주의 아름다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나는 판단이 아니라
부드러운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별히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내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사랑을 받아 마땅한 존재였다.
이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깨달음이었다.
나는 늘 노력을 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든지
사랑받을 만한 뭔가를 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몹시 놀랐다.
내가 아무 조건 없이 사랑받고 있다니.
그저 내가 존재한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사랑받고 있다니.
이 확장된 장엄한 존재의 본질이 실제의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명징한 상태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내 존재의 진실이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 우리라는 이 존재의 진실은...
우리는 자꾸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잖아요.
그 인정받아서 뭐하겠다고.
한편 생각하면 그게 참 허망한 거라는 걸 알 듯 알 듯하지만
이 몸의 습관이 배겨놓으니까 자꾸 인정받고 싶단 말이죠.
남들이 나를 인정해줬으면 좋겠고,
내 남편이, 내 자식이, 내 주변 친구들이 나를 인정해줬으면 좋겠고,
‘야, 너 참 대단하다.'
'너의 남편은 참 대단하구나, 야, 너 아들 참 대단하다.’
이런 얘기를 꼭 듣고 싶고,
절의 스님에게도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고,
모든 사람에게 ‘잘한다, 훌륭하다, 뛰어나다.’ 이런 소리를 듣고 싶단 말이죠.
왜 듣고 싶겠어요?
인정받아야지만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할 거로 생각하고,
그래야지만 나는 인정받은 존재가 될 거야.
'나는 지금 이대로는 인정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야,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야.
내가 인정받을 만한 존재가 되고, 그럴싸한 존재가 되고, 멋있는 존재가 되고,
위대한 존재가 되어야지만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존경할 거야.
그러기 전까지 나는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안 될 거야.’
이러면서 인정을 갈구하고, 사랑을 갈구하고,
관심을 갈구하면서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단 한순간도 이 우주법계로부터,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부처이지만 부처로 살지 않고
자기 머릿속에 저마다, 자기 머릿속에, 망상 속에 만들어 놓은 자기 드라마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꿈속에, 망상 속에 살고 있어요. 전부다!
그러니까 자기 망상 속에 있는 사람이 그 망상에서 판단했을 때 '저 사람 별로'거든.
그런데 내가 내 망상도 지금 깨부숴야 될 판인데,
남의 망상이 나를 판단하는 것에 그것까지 신경 쓰면서 살기가
이거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내가 내 망상 깨 부시고 살기도 지금 바빠 죽겠는데,
남의 망상 속에 들어가서 거기에 휘둘리면 사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나를 판단하는, 나를 욕하는 그 사람도 자기 자신의 본질이 뭔지도 몰라요.
그 사람의 판단이 옳지 않습니다.
옳다는 보장이 없어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의 망상 속에서 나를 판단하고 있는 것일 뿐이니까.
그걸 다 믿을 필요가 없고, 그걸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상대방의 망상에 힘을 실어주고 있단 말이에요.
상대방이 나를 욕하면 진짜 내가 욕 얻어먹을 사람인가 하고 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고.
어떤 이런 분이 계셨어요.
20대 때 자기를 싫어하는 어떤 사람이, 싫어해서 그런 것도 아니겠죠.
어떤 사람이 자신한테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뒤에서 살짝 들은 거예요.
“아니, 어떻게 저렇게 비호감으로 생겼냐. 생긴 자체가 비호감이야.” 이런 얘기를 들었나 봐요.
그런데 그분이 실제 비호감인 건 아닌데 그 사람 마음에 안 드는 거였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요, 나이 한 4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나는 비호감의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20대 때 그 사람에게 한 마디 듣고 깨달았다는 거예요.
자신은 여태까지 자신이 비호감이란 것을 몰랐는데
그 때 그 사람 말 한 마디 듣고 내가 비호감이구나 라는 걸 깨닫고,
25년을 ‘나는 모든 사람이 나를 비호감으로 느낄 거야.’ 라는 관념 속에 빠져 살았던 겁니다.
회사 다니면서 자꾸 위축되고 사람들이 나를 비호감으로 볼 텐데,
이런 마음으로 위축되는 삶을 계속 살아온 거예요.
정말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그 사실을 제가 알고서는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고 너무나도 황당했습니다.
너무나도 훌륭하시고 아름답고 정말 괜찮은 분이셨거든요. 겸손하고...
그런데 그분의 삶은 25년 동안 그렇게 자기 자신을 억누르면서,
그 말 한마디 때문에. 그 상대방이 자기 머릿속에서 만들어 놓은 그 관념에,
한 마디 툭 내뱉은 그 말에 25년을 사로잡혀서 살았단 말이죠.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지가 트라우마처럼 내 안에 상처가 돼서 남아요.
그 성격이란 게 그래서 형성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 그런 건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진실이 아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아야만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고,
사실은 모든 사람들의 부처의 차원에서는,
부처의 자리에서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고 있단 말이죠.
다만 그 사람의 망상 차원에서만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지.
심지어 우리 겉에 드러난 이 망상의 의식은 사람들을 좋아하고 싫어하지만,
우리 근원에 있는 부처의 의식에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패륜아라고 느끼는 뭐 무슨, 뭐라고 그러지요?
연쇄 살인범조차 우리 근원의 부처의 자리에서는 사랑하고 있단 말이에요. 한 치의 차별 없이...
우리의 망상 차원에서나 사람들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판단분별이 있는 것이지.
우리는 인정을 구하면서 오히려 스스로를 모독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그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기 위해서
뭔가를 노력해야 되는 존재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로 이미 우리는 사랑받을 만하고,
더 사랑받을 만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 완전한 존재인데,
‘나는 사랑받을 만하지 못해. 나는 인정받을 만하지 못해. 나는 능력 없어.’
이런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러한 현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겁니다.
내 삶이 그러한 현실에 노출되어서 그 말은 곧 우주법계를 향해서,
‘우주법계 법신부처님, 하나님 저는 인정받을 만한 존재가 안 됩니다.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못 됩니다. 그러니 그런 삶을 나에게 가져다주십시오.’ 그것과 똑같아요.
나 스스로 나를 인정받을 만하지 않고 사랑받을 만하지 못하다고 느끼니까
그런 것을, 자꾸 그 에너지를 자꾸 세상으로 내보내게 되고,
그러니까 우주법계에서는 뭘 보내주느냐 하면,
자꾸 나한테 욕하는 사람, 나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자꾸 내 인생에 등장시키는 겁니다.
왜? 내가 내 인생의 창조주이니까.
우리는 언제나 내가 내 인생의 부처이기 때문에
나와 이 우주법계가 공동 창조하는 공동창조자입니다.
내가 한 생각 일으키는 것으로 우주법계는
‘오케이! 내가 그 말을 들어줄게.’ 하고 그냥 만들어주는 거예요. 삶을....
그러니까 머릿속에 망상 분별하는 삶을 살게 되면
망상분별하게 되는 이 생각을 우주법계로 투영하게 되고,
우주법계는 아무런 분별심이 없어요.
뭐가 되었든 그 생각을 내보내면 그대로 되돌려 준단 말이에요.
그것이 '인과응보'입니다.
'업의 법칙'입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내보내면 그 생각이 현실로 돼서 돌아오는 겁니다.
그것으로 인해 이렇게 꿈과 같은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고요.
그 이면을 지탱하는 또 다른 어떤 연결된, 상호 둘이 아닌 것이 있단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과 살아있는 존재들만이 아니라, 밖으로 넓어지고 넓어져
우주 안의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로 엮여 있는 통합체였다.
모든 사람과 동물, 식물, 곤충, 산과 바다, 무생물, 우주까지.
나는 전체 우주가 살아있으며,
모든 생명과 자연이 다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무한한 전체에 속해 있는 것이다.
나는 전체 생명과 떼려야 뗄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 통합체의 일면들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이며, 우리 각자는 집단적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다.
매순간 속에 무한한 가능성이 들어 있고, 시간의 한 지점이란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결정과 선택, 생각들의 정점과도 같은 것이었다.
내 수많은 두려움 그리고 나의 엄청난 힘이 바로 이 병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이 세상이 모두 다 생물과 무생물 할 것 없이
우주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의상관성, 연기법을 저절로 이 차원에서 깨닫게 된 겁니다.
우리는 나누어져 있는, 따로따로 나누어져 있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둘로 나눌 하등의 이유가 없는
‘너다 나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내 것 네 것’ 나눌 수 있는
이런 존재가 아니었고 전체가 하나로 엮여 있는 통합체였다.
그냥 모두를 전체로, 하나로 인식한단 말이죠.
그런 차원에서는 어떤 차별이 있고, 분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이런 차원에서는 무한한 전체 속에 있는,
그럼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무아 전체에 그대로 영향을 주고 있고,
또 모든 이들의 삶과 배움과 깨달음이 그대로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상대방의 깨달음은 곧 나의 깨달음과 똑같습니다.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나셔서,
모든 부처님은, 모든 깨달은 자는 혼자 있지 않고,
자비심을 내어서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한단 말이죠.
모든 중생의 깨달음이 그대로 나의 깨달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힘든 사람을 돕고,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그 사람을 깨닫게 하고, 그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은
곧 내가 나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현실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욕하고 미워할 때
그것은 곧 나 자신을 욕하고 미워하는 것과 한 치도 다름이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죠.
"나는 어떤 것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 일을 이룰 수 있을지 방법을 알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저 그 일이 펼쳐지게끔 허용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런 허용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오직 ‘내 자신이 되는 것’뿐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 지난한 삶 동안에 내가 해야 할 일은 기실 단 하나뿐이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결함이 있다는 그 어떤 느낌이나 판단 없이 그저 내가 되는 것이었다.
동시에 우리의 본질은 그 핵심이 순수한 사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는 순수한 사람 그 자체이다.
그러니 사랑이 되는 것과 본연의 자기 모습이 되는 것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나는 이 진리를 찾아서 여기저기 뛰어다닐 필요가 없고,
어떻게 하면 이 방법에 이를 수 있을까를 헤매고, 노력하고, 찾고,
인도를 찾아가고, 무슨 수미산을 찾아가고, 스승을 찾아가고
그렇게 막 뛰어다닐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삶이라는 것 그 자체가 나의 스승입니다.
내 삶이 이러이러한 특정한 방식,
나다운 방식, 나만의 방식으로 내 삶이 펼쳐진다는 것,
그것 자체가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한 최적화된 나만의 스승이란 말이죠.
그것에 나를 허용하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내맡기고, 허용하고, 그 일이 펼쳐지도록 허용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 허용의 상태, 내가 온전히 나 자신으로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허용하는,
"그것을 하기 위해서 내가 할 일은 단 하나, 오직 내가 나 자신이 되는 것뿐! "
허용한다는 것은 뭐예요?
이렇게 못난 자신을 허용하는 겁니다.
나 자신이 되는 것,
남들처럼 되려고 애쓰지 않는 거예요.
지금의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을 그대로 허용해주는 겁니다.
내가 좀 못났더라도, 내 인생이 좀 힘들더라도 그것을 허용해 주는 거예요.
힘든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허용해주고,
그것을 통해 내가 진정 나 자신이 될 수가 있고,
그것을 통해 놀라운 깨달음이 그 활짝 열려 있는 허용의 가슴을 통해서
놀라운 깨달음이 들어오고 놀라운 자비와 사랑이 들어옵니다.
우리는 부처라는 것은 곧, 자비와 지혜를 얘기하거든요.
사랑과 지혜를 얘기합니다.
무한한 지혜는 곧 무한한 사랑, 자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무한한 자비를, 무한한 사랑 이것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무한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오직 하나,
'나를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도록 허용해주는 것.'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오만과 독선을 가지고
내 식대로 남들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내 방식대로 고집하고 집착을 해서 내 식대로만 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허용한다는 것은 뭐겠어요?
내 삶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허용한다는 거예요.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나의 단점을 이렇게 딱 지적해주고,
‘다 좋은 데 이러이러한 점은 참 잘못된 것 같습니다. 요런 점은 좀 바꾸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적해 준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왜, 그 많은 사람 가운데
그 사람이 나에게 와서 그 얘기를 했을까요?
그것을 허용한다는 것은
독선을 가진 게 아니라 거기에 마음을 열고 있기 때문에
그 말에 휘둘리지 않을지언정 그 말을 귀담아듣는 겁니다.
아, 저 얘기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되면 누구나 정말 오만해지고 독선해집니다.
그런데요, 잘 나가는 사람일수록,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래지기가 쉽습니다.
남들에게 존중받고 존경받는 사람일수록 그래지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내가 잘나서 이만큼 올라갔다고 생각해요.
내가 잘나서 이만큼 왔기 때문에 내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아무리 얘기를 하고 조언을 해도 너희들이 그 자리까지 올라가 봤어?
지금 이 자리에 올라와 봤어? 내가 올라왔잖아. 그러니 내 방식이 옳은 거야.’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에요.
이것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예요.
자식이 잘 컸잖아요? 내 자식이 뭐 정말 좋은 대학 다니고, 직장도 좋은 데 다니고 잘 컸습니다.
그럼 이 부모님은 생각하느냐 하면,
내 자식이 잘 큰 것은 나 때문이다. 내 육아 방식이 옳았기 때문이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키운 방식이 옳았기 때문에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가 많습니다.
그것은 자식이 잘나서 그런 것이지, 자식이 자기 업이 잘나서 그런 것이지
내가 육아 방식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단 말이에요.
왜냐하면요, 똑같은 성격을 가진 부모님이 계셔요.
자식을 정말 꼼짝 못 하게 만들고, 그냥 윽박지르고, 화내고, 혼내고,
얘가 자기 말을 한 번도 표현해보지 못하고,
아주 그냥 뭐 공포 분위기 속에서, 위압감 속에서
그런 부모님 밑에서 살아왔던 아이들이 여럿 있는데,
그 아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그 가운데 정말 잘 살고,
어떤 사람은 거기에 억눌려가지고 막 희생자인 것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동일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자식들 가운데도
전혀 업이 달라서 다르게 성장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내가 잘나서 잘 키운 게 아니란 말이죠.
‘내 방식이 옳기 때문에 잘 키웠다.’라고 집착하면 안 됩니다.
그 아이의 업이 그것을 다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을 만한
그 아이의 고귀한 어떤 심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똑같은 병이 와도요,
어떤 사람은 그 병을 대수롭지 않게 이겨내고
금방 탁 털고 일어난 사람이 있고요,
또 어떤 사람은 보니까 그 병을 이겨내긴 했는데,
이겨내고 나서 후유증이 엄청 심하게 와서 그 강박증 같은 것이 온 사람도 제가 봤어요.
똑같은 병인데, 그 병 이후로 강박증이 걸려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막 손을 씻고 이렇게 하는,
다른 사람은 그 병이 걸려도 그렇지 않은데,
그 사람은 그 병이 걸린 다음에 그런 강박장애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
동일한 사건이 벌어지고 동일한 일이 벌어져도
우리는 똑같은 결론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다 달라질 수가 있다.
아까 그 얘기로 돌아가서요,
그래서 내가 잘났다는 생각, 그 생각은 정말 오만하고 교만한 생각이기 쉽습니다.
다음에 한 두 구절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이후로 더 이상은 이른바 문제라는 것들이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삶을, 그리고 자기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전에 그랬듯이 말이다.
예전에 나는 내 드라마는 물론 다른 사람의 드라마에도 끌려들어 갔다.
하지만 임사 체험을 하고 나서는 그저 살아있다는 것,
여기서 나를 표현할 기회를 한 번 더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제 더는 이 위대한 모험에 단 1분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는 한 가장 많이 내가 되고 싶었고,
살아 있는 이 기분 좋은 순간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음미하며 즐기고 싶었다.
정말이지 그 온갖 잡다한 세상사,
미래나 돈, 직장, 집, 집안일, 걱정 따위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사소해 보였다.
특히 내 앞에 어떤 과정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우리가 느끼는 문제라는 것들,
온갖 세상사, 집안일, 걱정, 근심 이런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심각할 것이 없는 것이죠.
이 진리의 차원에 봐서는.
왜?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한 편의 드라마이고,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어떤 한 편의 어떤 망상일 뿐이니까.
그 망상을 붙잡고 막 심각해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머릿속에서 등장하는 그 망상을 붙잡고 막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이럴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그 망상을 붙잡고 싸우는 일만을 지금까지 하며 살아왔단 말이에요.
절에서 뭔가 마음공부 하려고 마음 내는 이 순간을 빼고는 그것과의 씨름입니다.
내 머릿속에 있는 망상과의 씨름!
성공하면 망상에서 성공해 놓고 성공했다고 하고,
망상에서 실패하면 실패했다고 하고,
꿈과도 같은 것을 허망한 망상을 만들어내고 무너뜨리고 그런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죠.
혜민스님이 말하시는 것처럼,
사실 남들은 그렇게 관심이 없어요.
우리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떤 분이 그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자신은 정말, 정말 정말 힘들여서 1차, 2차, 3차 진급까지 다 떨어지고,
어렵게 어렵게 4차에 겨우겨우 막차에 진급을 딱 해가지고 자신이 너무 기특하고,
너무 막 정말 뿌듯하고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고,
와, 정말 어렵게 어렵게 진급을 했더니 내가 정말 정말 너~무 행복하더래요.
그래가지고 지휘관 딱 나가가지고 사람들이 전부 다 나를 정말 대단하게 생각할 거라고
마음속에 생각하고 딱 갔는데, 지휘관으로 딱 갔는데,
그 누구도 나를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왜 그러겠어요?
그 밑에 사람들은 당연히 지휘관으로 누군가 와야 되는데 누군가 올 사람이 온 거예요.
대단해서 온 게 아니고, 그야 대단하니까 어쨌든 지휘관으로 왔겠죠.
쉽게 말해 감안하고 보는 겁니다.
어차피 이 사람이 이 계급을 단 사람이라고 감안하고 보는 것이지
이 사람이 대단하다고 생각 안 해요.
그런데 그 사람 마음속에서는
'누구든 나를 대단하다고 생각해야 돼'하고 생각하고 살지만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 안 합니다. 남들은.
내가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했어도 대단하다고 생각 안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친구들하고 밥 먹다 얘기해보세요.
'야, 우리 아들이 어디 가서 무슨 상을 타왔고, 우리 딸은 반에서 몇 등을 했고,
이번 무슨 시험에서 몇 등을 했고, 어디 가서 무슨 상도 타왔다.’ 신나게 해 보세요.
신나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말하는 사람!
혼자 신이 날 뿐이지 남들은 같이 신나해 주지 않습니다.
남들은 별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좀 재수 없게 느낄 수도 있고, 기분 나쁘게 느낄 수 있을 뿐이지.
자기만 신나는 일이죠.
남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실패하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진급 못 하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여기서 내가 버틸 수 있을까?’
다 망상입니다.
남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왜냐하면, 진급하는 사람은 한 2, 30프로고, 못하는 사람이 태반인데,
못하는 사람은 당연한 것이고 한 사람이 대단한 것이지
그 사람 수준 떨어진다고 생각하거나 전혀 그러지 않습니다.
자기 망상 속에서 그러는 것이죠.
아무리 세상에 큰일이 벌어져도
내 일이 아닐 때 우리가 그렇게 큰 관심 갖습니까?
기껏 해 봐야 그냥 인터넷 들어가서 댓글 한마디, 욕 한마디 다는 게 다지,
연예인들이 댓글 다는 것 보고 죽고 싶다고 하는데,
뭐 그럴 필요도 없는 거예요.
욕하는 댓글 달아도 그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욕하는 댓글을 다는 사람들 심리상태가 자존감이 뚝 떨어져 있어서
누군가에게 이 괴로운 마음을, 뚝 떨어진 자존감을 욕을 해서라도 뭔가 풀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없으니까, 남들 앞에 가서 욕을 하면 내가 욕 얻어 먹을까봐 자신이 없는 거예요.
하도 쪼그라들어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그냥 안 보이는 익명성을 기대가지고
그렇게 욕을 한마디 하고 그러면서 자기위안을 얻고,
그러한 정말 수준 떨어지는 망상,
남들이 가지고 있는 그 망상에 내가 휩쓸려서 괴로워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그 말 한마디에 휘둘릴 필요가 뭐가 있어요.
저도 지금 한 15년째 인터넷에서 글을 쓰고 하는데,
제 글에 댓글 달면서 욕하는 사람 없었겠습니까?
온갖 기상천외한 욕을 다 들어봤죠. 저도...
심지어 타 종교 어디에서는 제 글을 고소까지 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욕하고 이런 게 아닌데,
모 성직자분이
“불교 믿는 사람은 다 가난하고, 불교 믿는 나라는 다 가난하다.”
이렇게 얘기를 했길래 거기에 반박하는 얘기를 요목조목,
데이터를 대가면서 왜 아니다 그 얘기만 딱 했어요.
그랬을 뿐인데 이 글을 시정, 변경해달라고 고소를 하고 막 이랬더라고요.
그런 일들도 있고, 온갖 욕도 다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망상이 만들어낸 그것이고,
물론 그것을 제가 수용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제가 무시는 하지만 마음속에서
‘아!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면서 조금 더 겸손해져요.
조금 더 ‘아, 타 종교인들에 대한 배려를 조금 더 해야 되겠구나.
’아! 불교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조금 더 쉽게 또 이야기를 해야 되는구나.
내 말만, 내 감정에 빠져가지고 내 좋다고
내 혼자만 막 그 얘기를 그냥 한다는 게 좋은 게 아닐 수 있구나.‘
뭐 이런 것도 깨닫고 그러기야 하지만,
깨달음은 내가 얻을지 말지언정 거기 휩쓸려 갈 필요는 없단 말이에요.
그 망상에 끄달려 갈 필요는 없단 말이죠.
이 세상은, 우주법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망상덩어리가 우리를 판단할 수 있을지언정
우주법계는 우리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우리를 단 한 번도 판단하지 않습니다.
판단하는 것은 내 망상이 스스로 판단할 뿐이지.
'내가 나쁜 놈이다, 좋은 사람이다, 죄를 지었다, 선을 행했다'
이게 다 망상이고 우리 판단일 뿐이지
우리 망상과 우리 판단이 그런 현실을 끌어올 뿐이지
우주법계는 우리에게 벌을 주는 그 순간조차 벌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냥 나 스스로 벌을 끌어당겼으니까 그 맞는 것을 깨달으라고,
내가 그 잘못한 것을 올바르게 깨달으라고
그 벌이라고 보여지는 그런 인과응보를 보내줄 뿐이지,
그 순간에조차 우리를 괘씸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부처님은, 진리는.
우리를 어떻게 하면 깨닫게 해줄까 그것만이 오직 관심사인 겁니다.
제가 여러 가지를 좀 봐 왔지만, 중간 삭제하고 한 두 개만 더 말씀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아, 너무 좋은 말들이 너무 많아서 뭘 얘기를 해드려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네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요거 하나 말씀드리면 되겠네요.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지가
실제로 삶의 조건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이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에게 진실한 것이
긍정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나를 화나게 하는 것들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이 들 때
나는 그 느낌을 그대로 허용한다.
감정을 꼭꼭 담아두는 것보다
그런 감정을 생생히 경험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의 내 느낌에 저항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냥 ‘허용’한다는 말이다.
판단 없이 허락하는 바로 이 행위가 자기 사랑의 행위이다.
오늘 하루 일진이 사나웠다든가
한 주 내내 일이 잘 안 풀렸다든가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그럴 때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가 더 중요하다.
힘든 시간을 맞고 있다 하더라도 그 광정을 신뢰하는 것,
그래서 불안이나 슬픔, 두려움을 억누르기보다
그 감정들이 지나갈 때까지 있는 그대로 느끼는 걸 겁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그 느낌, 그 감정이 일어날 때
화가 나거나, 슬픔이 일어나거나, 고통이 일어나거나, 우울함이 일어나거나
그 어떤 느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일어날 때
그 느낌을 거부하려 하고 그것을 감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감당하지 않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 감정, 그 느낌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수용하는 것,
그래서 그 감정이 왔다가 가기를 허용하는 겁니다.
나에게 왔다가 경험되어지고 가라고 허용해 주는 거예요.
내버려 주는 것. 그게 놀라운 효과를 발휘합니다.
여러분들 어떤 힘든 일 있을 때, 아픈 일 있을 때, 고통이 있을 때
이걸 습관적으로 거부하려는 게 이게 시스템이 되어 있어요. 우리한테는...
그런데 그 시스템이 되어있는 것을, 습관적으로 거부하려는 마음을 탁! 관찰하고서
‘아, 거부하지 말고 허용해보자.’
그 아픔이 올 때, 그 아픔을 충분히 느껴주는 거예요. 거부하지 않고.
‘그래, 느껴줄게.’ 하고 느껴주는 겁니다.
한 번 해보세요. 아주 묘~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분명히 나는 지금 큰 문제 상황 속에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묘한 즐거움이, 묘한 어떤 기쁨이
나를 이끌고 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아, 이 문제가 문제가 아니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그것과 함께 할 때 아프지만 아프지 않단 말이에요.
그 슬픔을 나는 충분히 경험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 슬픔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는 않게 됩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라는 그 사실이 귀할 뿐이고,
그랬을 때 그것은 충분히 느끼고 있지만 고요함을 느끼게 된단 말이에요.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 때.
만일 내가 그것을 공격적으로 추구한다면
그로 인해 나는 우주 에너지에 맞서 싸우게 될 것이다.
그것을 손에 넣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나는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더 많이 알게 된다.
그에 반해 허용하는 것은 힘이 들지도 않는다.
허용이라는 것은 ‘놓아버림’에 가깝다.
‘놓아버린다는 건’ 모든 것이 하나이므로
내가 얻고자 하는 그것이 이미 내 것임을 깨달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네, 뭐 이 정도로 여러분에게 우선 말씀을 드리고요, 한 번 기회가 되신다면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라는 책, 아니타 무르자니라는 지은이가 쓴 책인데요.
한번 읽어보시면 아주 아름다운 어떤 한 편의 글이 될 겁니다.
이처럼 지금의 시대에는요,
다양한, 다양한 방식으로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꼭 불교적인 방식으로만이 아니라, 꼭 불교적 전통 속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적 전통 속에서도, 천주교적 전통 속에서도,
이슬람, 어떤 신비주의 전통 속에서도,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종교를 뛰어넘어서 종교가 없는 사람들 속에서도 온갖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큰 깊은 절망감 속에 우리가 속칭 말하는 정신병이라고 알려져 있는
그런 어떤 깊은 침체와 우울감 속에 빠져 있던 사람이 일순간 깨어나기도 하고요,
이렇게 죽음을 체험했던
이런 암이라는 어떤 죽음을 체험했던 이런 극한 상황 속에 갔다가
그 속에서 뭔가 어떤 깨어남이라고도 할 수 있고,
아니면 성품을 확인한다고 할 수도 있고,
본다고 할 수도 있고 이런 일들이 경험되기도 하고,
또 이렇게 여러분,
계속해서 법회에 다니고, 법당에 다니면서 계속해서 법을 듣는단 말이에요.
법이 어떤 것인지, 부처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이 법답게 사는 것인지, 여법하게 사는 것이지를 공부한단 말이에요.
이렇게 계속해서 반복해서 듣다보면,
여러분들 어차피 법문 한 두 번 듣고 말거 아니잖습니까?
계속해서 꾸준히 꾸준히 꾸준히 법을 듣다보면
어느 한순간 이것이 이제 딱 무르익게 되면 어느 한순간 기연을 만나게 된단 말이죠.
깨달음의 인연을 만나게 된단 말입니다.
그것은 법문을 듣다가 그냥 탁 찾아올 수 있고,
그냥 자연을 관찰하다가 찾아올 수 있고,
아들, 딸이 그냥 이름을 부르는데 휙 돌아보다가 뭔가 이런 어떤 체험이 찾아올 수도 있고,
그 모든 것은 어떤 상황, 어디에서 올지 모른단 말이에요.
모든 것을 마음을 열고 있을 때 찾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허용하고 있을 때 찾아옵니다.
마음을 닫고 있어서 선택적으로만 받아들일 때는 안 찾아와요.
왜냐하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 머릿속에서 망상 지어놓은 것,
시스템화 시켜 놓은 이 망상시스템,
이것대로만 사니까 이것대로만 사는 이상은 그게 안 찾아옵니다.
부처님 법은 다른 것 없습니다.
이 망상으로 만들어 놓은 이 삶을 대하는 시스템,
뭘 보면 보자마자 바로 바로 분별하는 시스템,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이 시스템의 방식, 이 방식을 내려놓으라는 거예요.
이걸 내려놓은 공부를 조금 조금씩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게 탁 내려놔지는 그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꾸준히 공부를 하고, 법문을 듣고
이게 얼마나 귀한지를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법과 자꾸자꾸 접촉하지 않고서는,
인연을 자꾸자꾸 맺지 않고서는,
선근을 자꾸 짓지 않고서는
어느 생에 계속 퇴보할지언정 어느 생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어요.
그래서 가슴을 활짝 열고 삶 자체를 허용하고,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면서
법문을 꾸준히 들으면서, 법을 귀담아 들으면서
‘언젠가 내가 반드시 깨닫고야 말겠다.’는 발심을 일으키고
하루하루를 순간순간에 충실하며 살게 된다면 매 순간 순간 부처님이 법문하고 있으니까,
저만 여러분에게 일주일에 한 번만 딱 법문하는 게 아니고,
아들이 법문하고 있고,
딸이 법문하고 있고,
집이 법문하고 있고,
나무가 법문하고 있고,
바람이 법문하고 있고.
하늘의 햇살이 법문하고 있고,
더위가 법문하고 있고,
모~든 것이 그 자체로서 실상으로
내 삶 자체가 법문을 하고 있단 말이죠. 매 순간.
그래서 이러한 다양한 방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슴을 활짝 열고 공부를 하면 좋겠다.
그것이 바로 불법이다.
그런 차원에서 제가 법당에 와서 왜 그렇게 뭐 얄궂은 그런 책이나 뭐 이런 걸 얘기하십니까?
불교는 불교 안에 갇히는 게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모든 것이 불법인 줄 아는 것이 그게 바로 진정한 불법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불교 아닌 것을 갖다가 불교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온갖 불교를 지금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