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 녹취읽기

세상을 창조하는 불교 시크릿

목탁 소리 2010. 2. 18. 08:06



현실의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아, 이렇게 비가 내리고 있네요. 비가 오니까 초록들이 더 싱그러움을 띄는 것 같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서 바람도 함께 불다보니까 창밖으로 나뭇잎들이 싱그럽게 오고가는 모습들이 얼마나 보기가 아름답고 생기로운지 모릅니다.

그때그때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항상 우리 주변에는 있거든요. 그런데 때때로 고민이 있거나 괴로운 일이 있어서 상담을 하려고 찾아오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을 가만히 뵈면 찾아서 걸어 들어오는 그 얼굴에 아주 큰 고민과 번뇌와 안쓰러움이 얼굴 표정에도 묻어납니다.

그런 분들을 뵈면 제 마음이 참 안쓰럽고, 안타깝고, 아프거든요.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전혀 눈길 한번 줄 수 없고, 이 아름다음을 누릴 수 없는 가슴을 가지고 찾아오신 것에 대한 안타까움, 이런 것들이 자리하게 되곤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를테면 '수행을 하십시오'라고 하고, 당장 빚 독촉 때문에 시달리고 계시는 분한테 '수행하라'고 하거나, 당장 죽을병에 걸린 분이라던가 아니면 부부 관계가 안 좋거나 뭔가 자식이 당장 어려움에 처했거나 세속적인 큰 결정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계시는 분에게는 대개 어떤 이야기를 해주어도, 어떤 좋은 부처님 가르침을 말해 드리더라도 그것이 귀에 잘 들리지 않습니다.

때때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수행해라, 기도해라 하는 이야기가 그냥 멀쩡한 사람들한테나 해당되는 얘기지 우리같이 힘들어 죽겠는 사람한테 그런 얘기 하면 되겠습니까, 우린 당장 먹고 살 길이 힘들고 당장 내 앞에 갑갑한 일들이 많은데 그 수행이 어떻고 하는 게 다 팔자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얘기 아닙니까?”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불교의 근본법과 방편법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불교의 본질, 근본법에 입각해서 본다면 수행에 대한 담론으로 들어가야 될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다양한 방편법들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은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현실 생활 속에서 힘들고 고되고 괴로워하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은 먼저 그것부터 어떻게 풀 수 있을지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방편법으로써 다가서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행히도 불교는 다양한 상황에 처해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이들을 위한 다양한 방편 법문을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방편으로써 우선 그 사람의 힘든 일부터 보듬어 주고 그 사람이 살면서 당장에 최소한 필요한 의식주부터 잘 다스릴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뭐랄까 부득이하게 본질적인 근본법보다는 방편법을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생겨나게 되기도 합니다.

 

시크릿을 보는 불교적 관점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방편법에 관련된 건데요, 조금 쉽게 말해서 내가 좀 잘 살고 싶고 뭔가 좀 남들만큼 살고 싶은 사람들, 정말 지금 나한테 있어서 나의 목을 콱 조이고 있는 이 힘들고 고된 문제부터 어쨌든 먼저 해결해야 되겠다 싶은 그런 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보통 쉽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면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세속적인 성공과 관련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관련된 책들도 요즘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요즘에 『시크릿』이라고 해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시크릿』에서는 내가 마음 하나 일으키는 것으로서 내 삶을 창조해 낼 수가 있다, 내가 마음먹은 것을 세상에서 끌어당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주 희망에 찬 이야기지요. 이것이 불교의 아주 가장 기본이 되는 방편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 삶에 있어서 아주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생각을 조작해서 성공하는 삶, 생각을 조작해서 부자가 되는 삶,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 우주라는 것, 이 세상이 만들어진 창조의 원리는 무엇이냐 하면 나의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그 생각한 것을 어떻게 말로 내뱉고 또 그것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느냐 하는 것이 나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인데, 그 근본에는 바로 생각이 있는 겁니다.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이 생각을 가지고, 이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써야지만 내 삶을 멋지게 만들 수 있느냐, 행복한 삶으로 바꿀 수 있고 성공적인 삶으로 바꿀 수 있느냐,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즘에 아주 유행하는 『시크릿』이나 어떤 다양한 이런 류의 책들은 이 생각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기 때문에 이 생각으로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이니까 이 생각을 조작하고 움직임으로써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런 관련된 책들 가운데 어떤 것은 가난을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청빈의 정신을 말하는 것을 자기는 참을 수가 없다, 용납이 안 된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사람이 있던데요, 방편법에 너무 치우치게 되면 이런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생각에 실체가 있어서 생각으로 부유함을 창조해 내고 부자가 되라, 성공해라, 여기까지를 얘기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 부자와 성공에 너무 집착해 있는 모습을 그런 책들을 통해서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의 한계 같은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 정도 까지만 해도 많이 발전된 모습이라고는 보여집니다. 그렇게 우선 방편의 진리라도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보다는, 그래서 괴로움 속에 허덕이고 사는 것 보다는 일단 일차적인 문제부터 해결하고, 내 삶에 딱 중심을 잡고 그리고 나면 이제 근본법을 향해 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동안은 많은 근본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던 것 같고 오늘은 이 방편의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가지고 내 삶을 아름답게 바꿔낼 수 있느냐, 어떻게 내 삶을 정말 행복한 삶으로 바꿔내고 성공적인 삶으로, 부유하고 풍요로운 삶으로 바꿀 수 있느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 하나하나 자세히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창조과정과 업보

불교에서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신구의 삼업으로서 이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랬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생각한 그것이 하나의 에너지가 되어서 그것이 이 우주 법계로 진동을 해 나간다는 것이지요. 즉 내 생각으로 내 삶을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어떤 절대자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내 삶을 대신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설계하고 창조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우리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서 화가가 마음 먹은 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듯이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내 현실 세계라는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지요.

마음에서 일으키는 대로 현실세계를 그림 그리듯 그려나갈 수 있다 이 말은 어찌 보면 많이 들어본 듯한 그런 이야기인데요, 이것은 그저 내가 아는 이야기야 하고 덮어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본적은 있을지언정 이것에 대해서 굳게 믿거나 진지하게 사유해보거나 그것이 정말 맞구나 라고 무릎을 쳐 본적은 사실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 생각할 뿐이에요.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하면 생각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때때로 몇몇 가지는 생각한대로 이루어지는 수도 있지만 세상이 어떻게 생각한대로 이루어지느냐, 그렇게 안 된다, 이렇게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일체유심조가 아니라는 쪽으로 굳게 믿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여러분의 삶을 만들어내는 것은 여러분의 바로 그 생각입니다. 그 마음입니다. 내가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서 내가 마음 쓴 대로 현실이 만들어지고 창조되는 것입니다. 또 마음 일으키는 것이 근본이 되어서 말로 가고 행동으로 감으로써 신구의 삼업이 바탕이 되어서 내 현실세계를 이루어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인간으로 태어났거나, 부자로 태어났거나 가난하게 태어났거나, 능력 있게 태어났거나 능력 없게 태어났거나 이 모든 현실의 모습이 내 과거의 신구의 삼업에 의해서 지금 만들어진 결과라는 말입니다.

업의 결과, 즉 업보(業報)로써 지금의 이 현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누가 만들어 주었겠어요. 내가 지은 업(業)에 따른 보(報)를 받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만들어 주었겠습니까.

모든 것이 그냥 신의 뜻대로 라든가 부처의 뜻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어찌 그렇게 부처나 신이 불공평할 수가 있겠습니까. 누구는 부유하게 태어나게 해 주고, 누구는 가난하게 태어나게 하고, 누구는 태어나자마자 한 살, 두 살, 세 살 밖에 안 되었을 때 기아로 죽어가도록 내버려 둔다는 말이지요. 이런 사람이라면 자유의지를 가지고 뭔가 새롭게 아름다운 삶을 살아볼 여지가 없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으니까 말이지요.

닭장에서 한 달 만에 죽어서 무슨무슨 치킨이며 온갖 닭고기, 통닭으로 우리 입에 들어가고 있는 닭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태어나자마자 아무 힘도 못써본 채, 파닥거리지도 못해본 체 그냥 한 달 만에 죽어가지고 그렇게 도살을 당해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이 만듭니다. 내가 만들지 결코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이 마음의 힘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엄청나고 어마어마합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우리가 알아야 되는 아주 확실한 불변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불교에서는 이 세상이 공한 것이다, 환영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이 세상은 공한 것이고 환영 같은 것이어서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듯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실체가 없는 그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단 말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에게 그 고통은 실체가 아니야 라고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람은 그 고통이 당장 자신에게는 실체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空)병에 걸려가지고, 깨달음 병에 걸려가지고 '모든 것이 다 공이야' 라고 쉽게 치부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내일 당장 죽더라도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가난해지더라도 상관이 없고 고통 받아서 내일 당장 큰 병으로 죽어 가더라도 휘둘리지 않을 정도는 되는 사람이라야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느냐, 그런 깨달음에 놓여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렇지 않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방편법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을 잘 쓸 수가 있는지, 이 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이것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를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껍데기 마음, 표면의식, 거짓 나

그러니 그것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보자는 거죠. 우선 제가 아주 쉽게, 어렵게 하면 복잡해지니까 쉽게 마음을 두 가지 정도로 분류해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것 또한 방편입니다. 첫 번째 마음은 편의상 이렇게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껍데기 마음’이라고 한번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이 껍데기에 드러난 표면의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것, 내가 내 생각을 가지고 ‘아, 오늘 이런 생각을 했구나. 저런 생각을 했구나’ 하고 느끼는 마음, 이 생각으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살아가는 것, 내가 생각을 쓰며 살아가는 그 표면의식, 껍데기에 들어가는 그 생각들, 그걸 이제 껍데기 마음이라고 한번 이름 붙여 보자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겉에 드러난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껍데기 마음, 이것을 가지고 세상을 만들어내고 창조해내고 있습니다. 이 겉껍데기 마음, 표면의식의 특징이 뭐냐 하면 끊임없이 생각이 올라온다는 겁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내 의지대로가 아니라 제 멋대로 우후죽순으로 올라옵니다. 이건 논리도 없고, 체계성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합니다. 우리가 꿈 꿀 때 보면 갑자기 이 꿈의 장면에서 갑자기 다른 장면으로 막 그냥 휙휙 바뀌는데 논리적이지가 않고 막 왔다 갔다 하잖아요. 오락가락 합니다. 그걸 보면서 왜 그렇게 꿈은 말도 안 되게 오락가락할까 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오락가락하죠. 가만히 내 생각을 지켜보다 보면, 이 생각이었다가 갑자기 저 생각으로 바뀌었다가 뜬금없이 또 다른 생각으로 바뀌었다가 정말 논리도 없고 맥락도 없는 아무 생각이나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옵니다. 논리가 없어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그것이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면서 나의 실체라고 착각하면서 그 생각을 부둥켜안고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 생각에 휘둘려서 살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온갖 생각들에 하나하나 그냥 휘둘려 가면서 에너지를 쏟아가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겉껍데기로써의 나’는 주로 아상(我相), 아집(我執), 아견(我見)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상, 에고에 갇혀서 언제나 나에게 도움 되는 일, 나한테 이익 되고 좋은 일들만을 계속 하고 있는 겁니다. 이 ‘나’라는 아상에 치우쳐진 껍데기 나는 어떻게 하면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까 하고 생각할 뿐 이타적인 마음이 거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아상에 밥 주는 일’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상, 아집을 강화시키는 일에만 힘을 쏟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껍데기 마음, 표면의식은 항상 나한테 좋은 방향이 뭘까만 생각합니다. 아상에 갇혀 있어요. 이것을 아상, 에고 말고도 ‘거짓자아’ ‘거짓 나’ ‘가짜 나’ ‘껍데기 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거짓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순식간에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해가 될까, 이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해가 될까 하는 것을 그냥 자동적으로 계산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사실 이 표면의식, 껍데기 마음, 아상, 생각이라는 것은 우리가 신뢰할 바가 못 됩니다. 신뢰할 바가 못 되고 진실 되지 못합니다. 항상 거짓을 꾸며내고 항상 이기적인 마음들만 꾸며내게 마련입니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는 아주 귀한 존재이고, 나를 돕고, 나를 가엽게 여기고, 언제나 나를 위해 희생하는 존재이니 나에게는 둘도 없는 귀한 존재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은 근원적인 참나에 대한 이해가 없고, 이타적인 자비가 없으며, 이 우주법계가 둘이 아닌 하나 된 존재라는 이해가 없습니다.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것이지만, 지혜로운 이가 보기에는 이타성이 결여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껍데기 마음, 표면의식에 휩싸여 왔는데, 여기에 휩싸여 살아서는 우리 삶을 온전하게, 아름답게, 지혜롭게 살아 낼 수가 없습니다.

 

더 깊은 마음, 근원의식, 참 나

그러나 우리 마음은 그 껍데기 마음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는 더 깊은 차원의 깨어있는 마음, 참나, 근원적인 자아가 있습니다. 사실 앞에서 말한 겉에 드러난 표면의식의 생각들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그 표면의식의 밑에 그 바다 그 엄청난 뿌리에는 히말라야와도 같은 엄청난 근원적인 뿌리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드러난 것은 표면에 드러난 빙산의 일각밖에 안 보이지만 더 깊은 차원의 세계,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이 우리 안에는 내재돼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제 편의상 ‘더 깊은 마음’이라고 제가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물론 이것 또한 근원의식이라고 불러도 좋고, 참나라고 불러도 좋고, 불성, 신성, 어머니 대지, 그 무엇으로 불러도 좋습니다. 대충 짐작하셨겠지만, 이 ‘더 깊은 마음’은 우리 내면의 깊은 마음, 참나이면서 동시에 이 우주법계 전체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더 깊은 마음’은 나에 한정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근원을 이루는 근간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더 깊은 마음의 특징은 어떤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나와 남이라는 분별이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더 깊은 마음’은 나와 남이라는 분별이 없습니다. 이 우주법계 일체 모든 존재의 근원이니 어떻게 나와 남의 분별이나 차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겉에 드러난 표면의식의 특징은 물론 나와 남의 구분이 분명합니다. 나와 남의 분별이 있으니, 나와 너를 나누고, 내 편 네 편을 나누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분별하며, 모든 대상물을 나누고 구분짓고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더 깊은 마음,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나와 남의 분별이 없으며, 일체의 모든 분별과 차별이 없습니다. 그렇듯 나다 너다 하는 마음의 분별이 없으니까 이기적인 마음이 일어나지가 않는 거예요. 상대가 곧 나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온 우주를 평등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 이익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를 이타적인 사랑으로 바라봅니다. 그렇기에 항상 온 우주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모든 일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나와 남의 분별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더 깊은 마음의 주요 특성입니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우리 마음의 본질은 우리 겉에 드러난 껍데기가 아니라 근본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본질은 나와 남의 구분이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보통의 나는 이 껍데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서 나와 남을 끊임없이 분별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남에게 욕하고, 남이 잘되는 것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남들에게 해코지를 하고 산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들을 깔아뭉갤 수 있느냐 이런 것에 교묘하게 머리가 돌아간단 말이에요. 조금 똑똑하고 세련된 지성을 가진 사람일수록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자기를 높이고 남들을 내려 누릅니다. 그러나 그 근본을 보자면 전부 나라는 상에 입각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거죠.

 

상대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

그러다보니까 우리는 보통 남에게 욕을 하고 시비를 걸고 하기를 좋아하는데 더 깊은 마음의 특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 내가 남에게 욕하는 것은 곧 뭐를 의미하냐면, 내가 나 자신을 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근본에 있는, 내 본질에 있는 마음에서는 나와 너의 분별이 없으니까 내가 남들한테 '너 이 죽일 놈, 나쁜 놈' 하면서 욕을 하면, 우리 본질의 마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면 나와 남이 없으니까, 너 죽일 놈 나 죽일 놈이라고 하는 너나의 구분이 없으니까 본질의 마음에서는 뭘 인식하냐 하면 욕이라는 것만 인식하는 겁니다. 죽일 놈이라는 것만 인식하는 겁니다. 내가 남에게 죽일 놈 욕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은 나 자신을 죽일 놈을 만드는 창조의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들에게 욕을 했다 했을 때, 못난 놈이라고 얘기하고 실패나 해버려라 하고 얘기 한다면 사실은 정작 내 마음은 나와 너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한 얘기지만, 남에게 한 나쁜 생각이고 나쁜 마음이지만 그것은 돌이켜 나에게 와서 화살이 꽂히는, 그래서 나의 현실을 창조해 내는 창조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욕하고, 탓하고, 시기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은 나 자신을 탓하고 욕하고 시기하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나는 이런 부정적인 현실을 창조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 스스로가 그 부정적인 현실을 창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나는 하지 않았다’고 착각할 뿐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나는 절대 실패를 창조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남들에게 욕하고 시비하고 실패하라고 얘기했던, 남들을 미워했던, 그 마음이 고스란히 나에게 와서 꽂히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내가 나의 미래를 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미래를 그렇게 창조한 적이 없고 남에게만 욕을 했지 나에겐 안했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거꾸로 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남에게 행하는 것은 고스란히 내가 나에게 행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본질적인 더 깊은 마음의 특징이에요. 거기에는 너와 나의 차별이 없습니다.

앞에서 ‘더 깊은 마음’은 이 우주법계 전체의 근간을 이루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근원이자 이 우주 전체의 근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너와 나의 분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근원의 자리에서는 네가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너인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입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를테면 다른 사람에게 보시를 베푼다, 자비를 베푼다, 사랑을 베푼다, 그 사람이 힘들 때 옆에서 도움을 주고 상담을 해준다고 할 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상대방을 돕는 것을 넘어서 내가 나 자신에게 베푸는 최고의 보시행위입니다. 내 인생을 풍요롭게 창조하고 내 인생을 행복하게 창조하고 내 인생을 부자로 창조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내가 남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오니까 이 우주의 법칙은 내가 보낸 대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이 고스란히 나에게로 돌아오게 되어있어요.

욕이 나가면 반드시 욕이 돌아옵니다. 칭찬이 나가면 칭찬이 돌아옵니다. 마음속에서 저 사람을 어떻게든 무너뜨려야지 하고 생각한다면,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져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게 생각할 때 이 우주법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무너뜨려 줍니다. 어떤 문제 때문에 근심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 또한 내가 나 자신을 향해서 끊임없이 근심 걱정하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점을 어떻게 맞춰야 하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남이 잘 안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 내가 잘 안 되기를 바라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남을 물고 늘어지면 안 됩니다. 남을 물고 늘어지면 내 바깥을 향한단 말입니다. 에너지의 방향이 자꾸 바깥을 향해 있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성공하고 싶다, 진급하고 싶다, 부자 되고 싶다 이랬을 때, 내가 진급하고 싶다는 생각은 차라리 낫지요, 나의 경쟁자가 어떻게든 사고를 쳐가지고 좀 무너져라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나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일한 말의 에너지라도 전혀 다릅니다. 부정적인 것을 상대방에게 보낼 때는 그것이 나에게 오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상대방에게 보내는 연습을 하지 말고, 나를 향하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상대방을 향한 연습을 하게 되면 끊임없이 우리 마음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쏟아 붓게 됩니다.

그런데 나를 향하게 마음을 쓰게 되면 항상 긍정적이 돼요. 내가 나 자신에게 욕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내가 나 자신이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래서 우리 본래의 마음은 나와 너의 구분이 없습니다. 분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남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내가 나에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라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본래적인 마음의 더 깊은 마음의 특징을 안다면 우리의 삶이 바뀌어야 되겠죠. 상대방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나에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말입니다.

 

긍정적인 언어의 파장

또한 둘째로, 이것도 비슷한 얘기인데요 ‘더 깊은 마음’ ‘우주적 근원의 마음’은 완전한 무분별이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라는 것이 없습니다. 네 편 내편이 없어요. 또한 긍정 부정이라는 분별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단어를 사용할 때 부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면 안 됩니다. 긍정적인 단어를 자꾸 사용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우주법계는 말하는 대로 그저 현실로 만들 뿐이지 긍정적인 것은 만들고 부정적인 것은 안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주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똑같은 창조에너지로 작용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말하는 것은 모두 구업(口業)으로 작용합니다. 즉 말이란 것은 에너지가 되어 특별한 파장으로 우주법계에 기록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록된 것은 반드시 나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부정적인 에너지의 단어를 많이 사용하면 부정적인 현실이 창조되고, 긍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면 긍정적인 현실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우주법계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분별없이 내 입에서 나간 것을 전부 나 자신에게로 되돌려 주는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황을 보고 부정적인 단어로 얘기할 수가 있고 긍정적인 단어로 얘기할 수 있잖아요. 긍정적인 마음의 에너지를 뿜을 수가 있고 부정적인 마음의 에너지를 뿜을 수가 있습니다. ‘너 자꾸 거짓말 하면 나쁜 놈 된다.’ 이렇게 자식한테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부정적인 단어를 자꾸 연습시키는 겁니다. 이 말에는 ‘거짓말’이라는 말과 ‘나쁜 놈’이라는 부정적인 말들이 계속 연이어 반복됩니다. 이 똑같은 말을 이렇게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진실 된 말을 하면 아주 착한 사람이 된단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같은 의미이지만 긍정적인 단어의 연속으로 바뀝니다. ‘거짓말’ 대신 ‘진실 된 말’로 바뀌었고, ‘나쁜 놈’ 대신 ‘착한 사람’으로 바뀌었단 말이지요. 그 에너지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단어를 쓰게 되면 그것이 고스란히 자식에게 가서 탁탁 박히게 되는거에요. 이것은 어찌 보면 사소한 말의 습관이지만, 이 평범한 말의 습관이 전혀 다른 과보를 우리에게 가져옵니다.

사실은 요즘 젊은이들이나 어르신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정말 신기하게도 자기 자신의 숨겨져 있는 엄청난 잠재의식을 현실에서 전혀 써먹지 못하고 사는 게 현실 세계입니다. 여러분에게 엄청난 능력이 있는데 그것을 써먹지 못하고 살아요. 그 이유가 뭔지 압니까? 어릴 적에 우리가 부모님한테 들어왔던 습관 때문에 그래요.

'하지 마' '안 돼' '나쁜 사람 돼' '무조건 하지 마' '절대 안 돼' 이런 소리를 듣고 자라오다 보니까 우리는 자동적으로 인식이 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아, 나는 안 되는구나.’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나쁜 것이구나’ 이런 것들만 인식이 되는 거예요. 좋은 것이 인식되지 않고 나쁜 것들이 자꾸 인식이 됩니다.

이를테면 불교에서도 그렇게 방편으로 말을 쓰긴 하지만 ‘무명(無明)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라는 말을 쓰기보다는 차라리 ‘지혜가 충만하게 되기를 발원합니다’하는 모습이 발원문에 쓸 때 훨씬 아름다운 긍정의 표현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 안에서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내 안에서 내가 쓰는 생각, 많은 패턴들이 얼마나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는가 이것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것을 부정적인 것이라고 인식을 안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우주 법계는 그렇다 아니다 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긍정, 부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쓴 그 단어 자체가 나에게 와서 꽂히는 거예요. ‘나쁜 놈 되지 않기를 발원합니다.’ 이거는 나쁜 놈이라는 에너지를 내보내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 되기를 발원합니다.’ 쪽이 얼마나 더 듣기도 좋습니까.

 

근원에 믿고 맡기라

그리고 또한 세 번째는 ‘더 깊은 마음’은 이 우주 법계와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합니다. 완전히 연결되어 있을뿐더러 즉 내안의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여러분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고 또 내 안에 있는 마음과 이 우주법계 전체에 있는 마음이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연결만 되어있는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정보, 모든 지혜, 모든 지식, 모든 에너지, 모든 업장까지 모든 것을 다 그 안에 구족(具足)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의 설법을 통해서 과학적으로 증명됐던 이야기들을 말씀 들렸을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 더 깊은 차원의 이 마음은 어마어마한 지혜의 저장고입니다. 엄청난 지혜와 어마어마한 정보와 엄청난 업력(業力)과 모든 우리가 원하고 추구하는 일체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족되어 있습니다. 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모르는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표면의식, 껍데기 마음에 의해서 세상을 살아가면 아집에 길들여진 그런 현실 세계를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아상에 물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요. 항상 보면 좀 문제 있는 삶을 살아가기가 쉬워집니다.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것이 생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 내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 그런 표면의식으로 살지 않고 더 깊은 차원의 마음에 나를 일치 시키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항상 완벽하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항상 나를 돕고 있습니다. 항상 나에게 끊임없는 자비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깊은 차원과 내가 일치를 이룰 수만 있다면 그 근원의 마음이 나를 이끌고 갈 수 있고 우리 삶은 더 이상 문제를 만들어내는 삶이 아닌 기존에 만들어냈던 문제를 끊임없이 비우고 없애버리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있게 됩니다. 내가 사는 삶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어떤 부처가 나를 이끌고 가는 삶, 내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의 세계가 나를 이끌고 가는 삶을 살 수가 있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때때로 ‘일체 모든 것을 맡겨라’ ‘너라는 아상이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근원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겨라’ ‘네 일이 아닌 부처님 일이다’라는 내맡김의 수행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어떻게 세상을 잘 살아 보려고 애쓰지 말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모든 것을 근원의 주인공 자리에 맡기고 가라, 그랬을 때 될 것은 될 것이고 안 될 것은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곧 표면에서 안 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써 안 되는 것이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서 잘되어야지만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깊은 차원의 지혜는 더 큰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당장은 힘든 일을 겪더라도 마땅히 그것을 겪게 해줌으로써 그 사람을 더욱 더 한 단계 성숙시키기 위한 더 큰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계획을 우리는 다 알 수가 없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인지, 이 일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업장이 녹아내리는지, 나의 영적 성숙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다 알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오직 모를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 수가 없어요. 이 우주법계의 모든 계획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답답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다만 어떠한 계획이 있구나, 더 깊은 차원에서 나를 위해서 준비해 놓은 또 다른 어떤 계획이 있구나 라고 굳게 믿고 내 안에 있는 근본에 모든 것을 턱 믿고 맡기고 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아상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진리가, 지혜가 나를 끌고 가게 되고 그렇게 됐을 때 나도 모르는 생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결정지을 때 생각으로서 판단하기 보다는 어떤 더 깊은 차원의 어떤 직관이나 어떤 영감 같은 것이 나를 이끌고 가도록 나를 완전히 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안의 직관적인 힘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끄심은 항상 정확해요.

 

우주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또 한 가지는요, 무엇이든지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모든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본질은 모든 것은 이대로 완벽하며 완전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눈에 완전하게 보이지 않고, 불완전하게 해석되어서 그렇지 본질적인 무분별의 근원적 시각으로 본다면 삶은 언제나 완전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쓸 때 내 생각을 하나하나 쓰잖아요. 그러면 내 껍데기의 마음은 많은 생각을 하는데 더 깊은 차원에서는 내 껍데기가 만들어 놓은 내 생각들을 구현해 내는 작업을 합니다. 껍데기 마음이 일으킨 것을 현실로 창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드러난 이 생각은 그것을 현실로 이루는 힘이 없어요.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얘기한 것은 내가 껍데기에서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깊은 차원에 있는 그 마음이 힘을 실어준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표면의식만 잘 다스릴 수 있으면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의 창조 에너지를 끌어 쓸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을 다스려라, 번뇌를 놓아버려라, 집착을 버려라, 욕심을 버려라 하는 이유가 표면의식을 잘 다스리라는 이야기 입니다. 겉에 드러난 이 껍데기의 마음을 잘 다스리면, 그 겉에 드러난 껍데기 마음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더 깊은 차원의 어마어마한 힘, 어마어마한 창조의 에너지 장을 우리 현실로서 가져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 마음의 어마어마한 힘과 에너지는 어떤 특성이 있을까요? 우리는 이 힘이 현실로 나타나도록 해야 하는데요, 우리 안에 잠재된 이 창조에너지를 우리는 때때로 현실에서 경험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이것은 우리의 표면의식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어떤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이 나를 이끌고 가는 작업이었구나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어떤 직관적인 힘, 어떤 느낌을 딱 감지하거든요. 그럴 때 그것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을 때때로 목격하게 됩니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어떤 사람이, 나와 깊은 인연이 있는 어떤 사람이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부모님이 자식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날따라 무언지 모를 어떤 찜찜한 직관 같을 느낌들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것은 겉 표면의식이 그것보다 더 깊은 차원의 마음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동시성(同時性)

이를테면 융이 말하는 동시성(同時性)이라는 것도 이것과 좀 비슷한데요. 이 우주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테면 우리가 어떤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새롭게 무언가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그 전에는 그 공부한 것이 눈에 띄지 않다가 내가 뭔가 새로운 것을 공부했을 때 갑자기 그런 내용들이 TV를 켜면 TV에서 나오고, 책을 보면 책에서 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우연히 그 얘기를 하기도 하고, 내가 이것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망신당할 뻔 했구나 싶을 때도 있는 등으로 동시적으로 현실에 나타나게 된다는 거지요.

또 예를 들어 내가 뭔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는데, 이것에 대해 내 내면 안에 눈덩이처럼 커진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TV를 켰을 때 우연히 그 TV에서 거기에 실마리가 될 만한, 답변이 될 만한 소식을 들을 수가 있다거나, 누군가 우연히 만났던 사람이 한 마디 던진 말이 해답을 가져다 줬다거나, 우연히 책을 아무 페이지나 펼쳤는데 나에게 정말 필요한 대답이 탁 들어 있었다거나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보살님께서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불법이 담겨있는 책을 항상 가까이 놓아두고 때때로 읽어보고 있다는데, 우연히 뭔가 자식문제로 고민이 있거나 이런 저런 고민이 있을 때 중간에 아무 곳이나 책을 펼치면 신기하게도 마침 거기에 내가 오늘의 문제를 풀어 줄 만한 얘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두 번, 세 번 이어진다는 것이에요. '야 이거 참 신기하다.' 그래서 이분이 뭔가 풀리지 않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책에다 손을 얹고서는 마음속으로 마음을 비운답니다. 마음을 말끔하게 비우고는 책을 넘긴대요. 그러면 물론 이것이 100% 다 맞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 필요한 답변이 될 만한 경구들을 발견하게 되더라 이런 얘기들을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는 우연이라고 볼 것이냐,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어떤 동시성의 원리가 실제 우리 현실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에서 이 우주 법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연결 되어진 상태에서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우주 법계가 나에게 답변해 주는 작업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또 모처럼 누군가가 생각이 나서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해야지 하고 생각을 했는데 그 사람에게 먼저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고, 내가 누구에게 전화를 하려고 막 누르려는데 그 사람도 나에게 전화를 하고 있는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심상화 기법(Visualization)

요즘 의학계에서는 심상화기법(Visualization)이라는 것을 많이 사용한다고 하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상상하게 됐을 때 그 일이 현실로 신기하게도 이루어진다 하는 내용입니다. 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방사선 치료로 인해 암세포들이 막 죽는 상상을 해라, 또 백혈구가 죽어 있는 그 암세포를 밖으로 막 떼어 내어 주는 그런 상상을 해라, 하고 마음속으로 상상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심상화기법을 암 환자들에게 실행했더니 159명의 치료 불가능한 불치병 환자들 가운데 4년 후에 63명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 평균치의 두 배가 넘는 경우라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전 나사(NASA) 연구소의 연구원이자, 현재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있는 경기력 과학연구소장인 찰스 A, 가필드(Charles A. Garfield) 박사에 의하면 구소련의 최정상급 운동선수들을 대상으로 마음의 상상력과 실제 신체능력 간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먼저 운동선수들을 네 그룹으로 나눈 뒤 첫 번째 그룹은 연습시간의 100%를 훈련에만 전념시켰고, 두 번째 그룹은 75%의 시간은 훈련을 시키고, 25%의 시간은 그들이 하는 운동에서 바라는 성과를 그대로 이루는 모습을 상상하는데 쓰게 했습니다. 금메달 따는 장면, 승리하는 장면 등을 상상으로 생각하도록 심상화기법을 쓴 것이지요. 세 번째 그룹은 그 비율을 50 : 50으로 했고, 네 번째 그룹은 25 : 75로 했습니다. 그야말로 네 번째 그룹은 조금 모험에 가까웠지요. 한 시간을 연습시키고 세 시간을 앉아서 자신이 승리하는 장면을 떠올리게만 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1980년도 뉴욕의 레이크 프레스드에서 벌어진 동계올림픽에서 네 번째 그룹, 즉 세 시간을 마음속으로 승리한다고 생각하고 1시간만 운동했던 그 그룹이 가장 뛰어난 경기력 향상을 보였고, 그 다음이 세 번째, 그다음이 두 번째 그룹 순이었다고 합니다. 심상화기법은 쓰지 않고 운동만 했던 첫 번째 그룹은 운동량에 있어서는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실제 결과에서는 심상화기법을 사용한 그룹보다 경기력 향상이 적었다는 것입니다. 가필드에 의하면 심상화기법이 신체의 움직임을 두뇌 속에서 홀로그램 방식으로 기록되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연구들 덕분에 요즘에는 운동선수들을 보면 이런 심상화 트레이너가 별도로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위약(僞藥) 효과, 즉 플라시보 효과도 일종의 이런 힘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몸이 아플 때 병원에 갔다 오면 낫곤 합니다. 그런데 병원 갔다 와서 나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의 20~30% 정도만이 병원에서 치료에 의해서 나은 것이지 실제로 70~80%는 플라시보 효과일 것이라고 현대 의학계에서도 인정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상당 부분의 경우 내가 병원 갔다 왔으니까 낫겠지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나를 낫게 해 준 것이지 실제 약이 나를 낫게 해 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런 위약효과의 연구는 아주 너무나도 많은데요. 예를 들어서 50년대에 협심증 환자들의 경우에는 수술을 해야 했답니다. 그런데 그 수술을 할 때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한 팀은 정상적인 수술을 했고요, 다른 한 팀은 신체를 잠깐 조금만 절개를 했다가 수술했다고 하고 닫아 놓고는 그 사람에게는 수술이 잘 끝났다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똑같이 양쪽이 다 협심증이 치료되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플라시보 효과가 온갖 병들, 두통, 알레르기, 감기, 천식, 사마귀, 통증, 구토, 위궤양, 우울증, 상당한 정신과적 증후군, 관절염, 당뇨병 심지어 암에 이르기까지 어지간한 것들이 플라시보 효과로 완쾌가 되더라하는 말입니다.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심지어 말기 암 환자가 죽을 때가 됐는데 플라시보 효과로 위안을 주면서 신약이라고 하면서 이걸 먹으면 무조건 난다라고 했을 때 그 걸 멀고 완쾌가 되더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9세기 유행을 했던 결핵이라는 병은 1880년부터 갑자기 없어지기 시작을 했다는데요. 그 결핵의 원인이 1882년 로베르트 코흐라는 박사에 의해 밝혀지고 그 사실이 세계적인 이슈가 되면서 이제는 약만 개발하면 된다는 아주 기쁜 소식에 들떠 그 신문기사만을 보고도 결핵환자들이 획기적인 감소를 했다고 합니다. 단지 원인만을 알아냈지 그것을 통해 약을 만드는 데는 약 50년이 소요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알아냈다는 희망적 기사만을 가지고 그 당시 10만 명당 600명이 결핵 환자였는데 200명으로 갑가지 대폭 감소를 했다는 것입니다. 10만 명당 400명이 그 소식만 듣고 나아버린 겁니다.

이것처럼 사실 우리 마음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바꾸고 다스리느냐에 따라 불치병도 낫고, 온갖 질병이 나으며, 운동 경기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고, 심지어 동시성이라는 방식을 통해 이 우주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끌어당겨 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끌어 쓸 수 있는 방법만 안다면 좋은데, 문제는 여러분이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 몇 가지 말씀을 드렸지만, 그 방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내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

제가 교육을 하던 중에 사람들에게 『시크릿』이라는 책을 읽은 사람이 많기에 그 책의 내용 즉, 마음에서 일으킨 것은 현실로 이루어진다, 마음에서 어떤 것을 끌어당겼을 때 그것이 이 우주에 있는 것을 끌어 당겨서 이루어지게 만들어준다, 우리 마음의 힘이 그만큼 엄청난 것이다 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진짜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아니 어찌 생각해 보면 조금 당연하지만 한 10~20% 정도만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있을 것이라고 믿는 반면에 나머지 80~90% 정도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냐 하고 반문을 하곤 하였습니다. 될 수 있으면 마음을 긍정적으로 해 나가라고 권장사항 정도로 말해 놓은 책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하거나, 마음을 낸다고 100% 그것이 실제 현실로 일어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만약 실제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그걸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실제로 마음 낸 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은가 하고 반문을 하더란 말입니다.

신기하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마음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처럼요. 그러니 어때요. 내 안에서 스스로 그런 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한 그대로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안 믿기 때문에 그것이 현실로 되지 않아요. 이처럼 안 이루어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고, 창조해 낼 수 있는 큰 힘을 가진 존재들이지만 그것을 현실로 그려낼 수 있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못해요. 그러면 왜 그런 힘을 내가 쓸 수 없는지, 그 이유를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사실은 많은 것이 이루어진다. 보지 못할 뿐!

우선 첫째는, 사실은 많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 내는 대로, 여러분이 생각한 것의 상당수가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스스로가 살면서 깨어있지를 못해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분명히 지켜볼 수 있는가요? 평소에 마음이 어떤 것을 일으키고 만들어내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지켜보지 못해요. 내 안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지 조차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또 겉에 드러난 마음에서는 이런 생각을 했지만 깊은 속마음으로는 어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내가 미처 캐치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나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게 왜 벌어졌지 하고 착각을 하는거에요. 내가 분명히 생각을 한 것인데, 그러니까 내가 주의 깊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일으킨 생각에 대해서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안 이루어졌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사실은 우리가 일으켰던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아니 사실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 것들만이, 창조한 것들만이 내 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지켜봐야 합니다. 지켜보게 되면 ‘아, 이 생각이 이러한 현실을 창조했구나’라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를 똑똑히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면 사라진다

또한 심지어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을뿐더러, 분명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만성 두통 환자분들이 있는데요. 만성 두통 환자들을 모아놓고 뭔가 실험을 하려고 두통 환자들에게 우선 어느 정도의 강도와 어느 정도의 빈도로 두통이 일어나는지 알아보려고 몇 가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일단 치료할 수 있는 기초 작업을 하려고 얼마만큼의 강도로 머리가 아프냐, 그리고 얼마만큼 자주자주 머리가 아프냐를 조사하게 했습니다. 매일매일 얼마만큼 머리가 아프고 얼마만큼 자주 아픈지를 다 쓰게 했어요. 오늘은 얼마만큼 아프고 얼마만큼 자주 아프고 몇 번이나 아팠고 이런 것을 자세히 관찰하며 쓰게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그냥 그 빈도와 강도를 단지 조사해서 쓴 것 밖에 없는데 두통이 나아버린 겁니다. 사실은 기초 작업을 하려고 한 것인데 그 기초 작업만을 가지고도 두통이 나아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만성두통이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그것을 지켜보게 되었을 때 그것만으로도 두통이 해소되기도 합니다. 해소되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해소가 분명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오락가락 하는 마음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생각의 특성은 너무나도 엄청난 잡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쉴 새 없이 온갖 잡념, 온갖 생각들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오고 있단 말이에요. 이게 밑도 끝도 없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너무나도 많은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올라와요.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창조적인 마음의 에너지가 집중되지를 않는 겁니다. 온갖 잡다한 생각들마다 다 에너지를 실어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다가 우리 마음이 어떠냐하면 그 한 가지를 줄곧 밀고 가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할까 하다가도 바로 마음이 바뀌어 저렇게 하고, 이 결정을 할까 하다가 금세 저 결정으로 바뀌곤 한단 말입니다. 사실은 수백 수천 번도 더 오락가락하면서 어느 한 쪽의 마음을 딱 선택하지 못합니다. 아침에 어쩌다 절에 나오시는 분들은 '절에 갈까? 에이, 가지말자. 에이, 그래도 가자.' 머릿속에서 이것 하나 결정하는데 열 번 백 번을 반복하다 오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그 정도로 무슨 한 가지를 판단 할 때도 우리 생각은 끊임없이 오락가락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한 가지에 집중적으로 창조 에너지를 실어 주어야 그것이 실현이 될 것인데, 이랬다저랬다 하고, 오락가락 하니까 우주의 에너지가 제대로 실리지가 않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하자’ 그랬다가 오후에는 ‘하지 말자’ 그랬다가, 또 10분 전에는 ‘가자’ 그랬다가 10분도 채 못 되어 ‘가지 말자’ 그런단 말입니다. 자장면 먹자 그랬다가 금방 짬뽕으로 바뀌듯이 말입니다. 중국집에 밥 한 끼 먹으러 가면서 발은 걷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자장면이냐 짬뽕이냐를 가지고 수십 번도 넘게 반복한단 말 이예요. 이렇게 우리 생각이 날뛰는 원숭이처럼, 조금 심하게 말하면 정신병자처럼 오락가락합니다.

 

명상수행과 창조에너지

그래서 우리가 명상을 하거나 집중을 합니다. 무언가 한 가지에 집중함으로써 삼매에 빠지는 경험도 하고, 조용히 마음을 고요히 지켜보는 명상을 한단 말입니다. 명상을 하고 집중을 하게 됐을 때, 한 가지에 딱 집중을 하게 됐을 때 잡념이 사라지고 그 한 가지에만 집중을 하게 되잖아요. 그리 됐을 때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이 강력한 힘으로 바뀌게 됩니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평소 상태는 온갖 잡념 상태이거든요. 복잡다단한 생각들, 문맥도 없고, 맥락도 없고, 주제도 없고, 명확한 방향도 없는 온갖 잡스런 생각들이 우리 머릿속을 끊임없이 휘청거리며 오고가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런 잡념이 우후죽순처럼 올라오는 사이에 성공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부자가 되어야지, 내가 잘돼야지, 이렇게 생각한들 온갖 잡념 중에 하나밖에 안되니까 그것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해서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이를테면 이 공기 중에는 모든 라디오 주파수가 다 떠돌아다니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주파수를 딱 맞추려면 제대로 맞춰야지만 하나의 주파수가 딱 잡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대로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지지직거리기만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주파수를 제대로 딱 맞추면 소리가 분명하게 잘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산란된 마음을 비우고 한 가지 마음의 원(願)으로서 딱 주파수를 맞췄을 때 그것이 내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딱 주파수가 연결이 되어서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설마 진짜 그렇게 되겠습니까?’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비움과 집중 속에 드러난 하나의 생각, 마음, 서원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해 주는 아주 중요한 통로요 방법이 됩니다. 껍데기 마음이 비움과 집중을 만나 하나의 강력한 마음으로 바뀔 때 그것은 강력한 창조의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겉껍데기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집중과 관찰입니다. 깨어있음, 명상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지관(止觀)수행이죠.

예를 들어 여러분들 발원(發願)기도를 하잖아요. 이렇게 되기를 발원하고, 저렇게 되기를 발원한단 말입니다. ‘건강해지기를 발원합니다.’ 이런단 말이에요. 발원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을까요? 막 시도 때도 없이 발원한다고 그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을 비운 다음에, 마음을 고요히 비운 상태에서 한 가지를 발원하고 마음을 냈을 때 그 발원은 큰 힘을 얻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때요. 기도하지 않습니까. 집에서 기도하고 참선하잖아요. 기도 끝에, 기도함으로써 마음을 비우고 수행함으로서 그 마음을 딱 비워놓은 다음에 그 청정해진 마음을 가지고 발원을 했을 때 발원에 강한 창조의 에너지가 붙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집에서 기도할 때도 발원문은 기도를 다 하고 난 제일 마지막 부분에 독송하라는 것입니다. 법회를 가도 사홍서원의 발원을 제일 마지막에 하잖아요. 마음을 비우고, 욕심과 집착을 비우고, 기도로써 마음을 고요히 한 끝에 발원을 하면 거기에 더 큰 힘이 붙습니다.

그것은 온갖 산란한 마음들 사이에서 일어난 생각이 아니라 마음이 고요해진 사이에 일어난 한 생각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것은 내 겉에 드러난 껍데기 마음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되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우주법계의 근원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비워진 상태에서 마음 하나를 딱 일으켰을 때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이 되고 온 우주 법계의 마음과 연결 되어서 우주 법계가 나를 도와주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 말입니다.

그 일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작업을 내 내면만 시작하는 게 아니라

온 우주 법계 전체가 나를 도와주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뭔가 원을 세울 때는 마음을 고요히 한 상태에서 원을 세워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이 몇 천 배, 몇 만 배, 수십억 배 높아지게 되는 겁니다. 그 본연의 에너지를 완벽하게 쓸 수 있는 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력이 높은 수행자일수록 한 번 일으킨 마음이 금방 현실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행력이 낮은 사람일수록 생각과 현실의 창조 사이가 멀어요. 창조가 될지라도 늦게 창조가 되는데 반해 마음이 청정한 수행자는 한 생각 일으킨 것이 곧장 우주법계와 연결이 되어 곧장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라한과를 증득하면 과거의 수많은 업장들을 그 생에 다 해결하고, 그 한 생에 동안 받을 것 다 받고 완전한 반열반(般涅槃)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수행력은 곧 창조의 힘과 다르지 않습니다. 수행하고 명상하는 사람은 무한한 창조에너지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한정의 관념을 타파하라

다음은 세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 마음이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인데 그것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믿음’에 있습니다. 왜 안 이루어지느냐 하면 제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안 믿거든요. 스스로 안 믿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안 믿어요. 스스로 자신은 능력이 없고, 부족하고,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부족한 현실이 창조되고, 능력 없다고 생각하면 능력 없는 현실이 100% 창조되는 것을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힘을 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못 쓰는 쪽으로 창조하고 있으니까 사실은 못 쓰는 쪽으로 완벽한 창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일으킨 마음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절대 안 믿습니다. 100%를 못 믿어요. 한 50%만을 믿거나 어떤 사람은 한 30%정도쯤 믿거나 이런단 말입니다. 내가 100% 믿으면 그것이 100% 힘을 발휘하고 50% 믿으면 50%만 힘을 발휘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자기 능력에 대해서 스스로가 ‘내 능력은 이 정도 밖에 안 돼’ 하고 자기 한정의 관념에 빠져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된다, 나의 능력은 이 정도야 라고 한정 짓고 있단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자기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의 틀 속에 제한하고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어떻게 성공하고 싶은지를 물어보면 ‘나는 그냥 조그만 식당하나 운영해서 적당히 먹고 살 정도만 되면 됩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기왕이면 좀 더 넓은 식당을 운영해서 부자 되면 그것으로 남들에게 복도 많이 짓고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지 않느냐 하고 물으면, ‘아닙니다. 저는 그 정도 능력은 안 되고요. 그냥 밥 벌어 먹을 정도나 할 수 있으면 좋은 거죠.’ 이렇게 생각해요. 더 큰 힘이 나에게는 없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재수해 가지고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목표가 어디냐 그러면 '그냥 서울에 있는 대학 정도 되면 됩니다.' 라고 합니다. 기왕 목표를 잡을 거면 서울대나 하버드대학을 목표로 잡지 왜 그 정도를 잡느냐 그러면 '해봐도 안 됩니다. 제 능력은 제가 아는데, 공부는 못한다는 걸 뻔히 아는데 그렇게 목표 잡아봐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물론 높은 목표에 집착하라거나, 부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높은 목표에 집착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내 스스로의 능력을 미리부터 한정 지을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과 청빈이라면 좋지만, 내 스스로 나는 안 되고, 가난하고, 못난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가난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내 능력이 그것 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능력을 완벽하게 한정 짓고 제한하기 때문에 내 능력은 내가 한정 지은 그것만큼 밖에 드러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능력은 요만큼 밖에 안 돼’라고 내 마음으로 딱 만들어 놨잖아요. 그러니까 우주 법계에서는 내 마음에서 만든 것을 100% 힘을 실어줍니다. 100% 이루게 해줘요. 그러니까 고만큼만 100% 이루어지는 거지요.

내가 공부 열심히 하면 한 50%는 서울대에 붙을 것도 같고 50%는 안 붙을 것도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붙을 확률이 반반 입니다. 그게 사실은 우주에서 100% 힘을 실어준 거예요. 내가 50%만 원했으니까 50%만 이루게 해준거에요.

마음의 힘, 의업(意業)의 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은 어때요. 그게 100% 이루어진 겁니다. 내가 믿지 않는 만큼 안 이루어졌거든요. 그러니까 100% 이루어진 거 아니에요. 안 이루어지도록 믿었으니까 안 이루어 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한정시키고, 제한시키게 되면 결코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 울타리, 그 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나는 안 돼’ 하고 울타리를 쳐 놓으면 그 틀은 그 누구도 대신 깨줄 수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부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자기라는 틀을 깨주려고 노력을 했지만 스스로 울타리 친 그 틀은 부처님조차 대신해서 깨뜨려 주지 못했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출가를 하실 때 마부로 뒤따라왔던 찬나라는 마부가 나중에 출가해서 수행자가 됐는데 ‘지금은 이렇게 부처님의 제자들이 많지만 초기에 부처님이 출가하셨을 때는 나밖에 없었어. 너희들이 대단한 제자들이라고 으스대지만 내가 최고다. 너희들 중 누가 처음에 부처님 출가하셨을 때 옆에 있었느냐? 그때 부처님을 지켜준 건 오직 나뿐이었다. 내가 최고의 제자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겸손하지를 못했지요. 찬나에게 부처님께서는 몇 번을 설득하고 타이르면서 그런 마음을 버려라 버려라 해 주셨는데 그 마음을 못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부처님 살아생전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어요.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시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한 끝에 그 이후에 깨달음을 얻게 됐습니다. 그 특단의 조치가 뭐냐 하면, 모든 제자들에게 저 찬나에게는 모두 침묵으로 대해라, 말도 응해주지 마라, 묵빈대처(默賓對處)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 전에는 이런 묵빈대처의 방법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교화가 불가능한 외도들에게만 그런 방법을 쓰셨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찬나가 그 얘기를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아! 부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지. 여기엔 뭔가 뜻이 있지 않겠는가. 내가 잘못이 이 정도로 컸단 말인가. 어리석었구나.' 하고 스스로 크게 뉘우친 끝에 결국 나중에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처럼 자기 스스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나는 이렇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틀이 있으면 부처도 그 틀을 깨주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나의 능력을 한정 짓고 있는 이상 그 능력은 내 스스로가 깨야 되는 것이지 부처가 와도 여러분의 그 자기한정과 제한된 틀을 못 깨줍니다.

큰 스승을 만나면 깨줄 것 같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멋모르고 스승만 찾아다닌다고 그 스승이 나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언제나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내 안에서 시작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내면에 변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올지라도 외부에서 나를 변화시키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나 내가 활짝 열려 있어서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내 옆에 있는 내 도반이 나의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고, 나의 자식도 훌륭한 스승이 될 수가 있는 거예요. 그 때는 세상 곳곳에서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나를 열어두고 내 스스로가 ‘내 능력은 이것밖에 안 돼’, ‘나는 깨달음을 얻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라고 한정 짓는 마음을 먼저 버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자신 스스로 자기를 가두는 마음을 버려야 해요.

 

상대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

다음은 네 번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가 거꾸로 연습하는 겁니다. 우주는 마음에 뭔가 연습한대로 되돌려주려고 한다고 그랬잖아요. 우리가 방법을 모르는 거예요.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우주는 나와 너의 구분이 없는데, 나와 상대가 따로 떨어진 존재로 있는 줄 알고 상대방에게 욕을 하니까 사실 그것은 곧 나 자신에게 욕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타인을 욕하고 공격하고 못났다고 낮추는 것이 곧 나를 욕하고 내 능력을 위축시키는 일이거든요. 저 사람 확 망해버려라 하면서 그 사람이 성공 하는 것에 대해 배가 아프다면, 사실 그 말은 나를 성공 못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전에 몇 번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는 기도를 하고 뭔가 원하고 바라면서 기복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무언가를 원하고 빌고 바란다는 마음 자체가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몸에 지병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몸이 낫기를 바라고 원하면서 ‘몸 낫기를 바랍니다’ 하고 기도한단 말 이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되레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질 수가 있습니다. 그 바람 자체가 ‘내 몸은 너무 좋지 않다’라는 사실을 자꾸만 느끼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계속된다, 또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지속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관(觀)하라는 알아차림의 관 수행을 자주 말합니다. 마음을 관찰하고 깨어있으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 깨어있는 것이 잘 안 됩니다. 그런데 때때로 마음을 어떻게 관찰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런 분들에게 저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느껴 보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그것을 느껴보라, 우울한 사람에게는 우울감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 말고 우울한 그 느낌을 느껴보고, 고독한 그 느낌을 느껴보라고 합니다. 화가 날 때는 그 화나는 느낌을 느껴보고 지켜보는 것입니다. 욱하고 화가 올라올 때 그 올라오는 화를 느껴보아라 하는 겁니다. 느낀다는 것 자체가 관(觀)한다는 것이고요. 그 관하고 느끼는 것, 그것에 우주 법계는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는 마음은 무엇을 느끼게 해주느냐하면 우리에게 부족한 바로 그것을 느끼게 해줘요. 결핍된 것을 느끼게 해줘요. 그러니까 사실은 '부처님, 부자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빌지만 사실 그 말은 ‘지금은 부자가 아닙니다’ ‘나는 부족합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뜻이 되고 그 결과 부족과 결핍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지금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지금 현재 받고 있는 연봉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그 돈에 대한 풍요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랬을 때 돈에 대해서 긍정과 감사와 풍요로움이 느껴져요. 그러면 우주법계는 이 사람이 풍요로움을 느끼니까 풍요로움을 자꾸 가져다줍니다. 돈에 대한 풍요로움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돈을 가져다줘요. 내보내는 것이 돈으로 인해 풍요로운 마음을 내보내니 그 결과로써 들어오는 것도 풍요로운 결과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언제나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온다는 법칙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업보의 법칙 이예요. 생각으로 업을 지으면 그 과보를 받는 겁니다. 부유하고 풍요롭다는 생각, 의업을 세상으로 내보내면 거기에 따라 풍요롭고 부유한 현상세계가 그 과보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불만이 많은 사람은 그 자식이 계속 불만스러운 행동을 하게 됩니다. 자식이 컴퓨터와 게임에 빠져 있잖아요. 그럼 너는 왜 만날 컴퓨터에 빠져있어 하고 화를 내고 탓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결코 그 컴퓨터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 집착을 내가 놓아 버리기 전까지는. 오히려 거기에 대한 더 큰 집착이 생기게 됩니다. 오히려 그것을 탁 놔버릴 줄 알았을 때 그랬을 때 이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은근히 마음속에 반발심이라는 게 엄청 커요. 부모님이 하는 이야기에는 일단 반발심부터 일어납니다. 그 반발심을 잠재우지 못하면 어떤 좋은 말도 거꾸로 들려요. 거꾸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만화책 보지 마! 컴퓨터 하지 마! 게임 하지 마!’ 이 말이 오히려 게임을 더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자꾸 받아들여진다는 말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못 하게 하면 더 애틋한 마음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도 떼어 놓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 둘 사이의 사랑의 감정은 더 깊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게임하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잘못된 것일까요? 이건 옳다 그르다하는 차원에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옳다 그르다 얘기한다면 게임하면 안 되겠죠. 그렇죠? 그러나 게임하면 안 된다는 부모님 마음의 집착 그 집착이 더 큰 문제입니다. 자식이 게임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그 문제의 크기보다 너는 그 게임하면 안 되고 공부만 해야 돼 라는 부모의 집착이 사실은 더 문제고 더 큰 탁하고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져 옵니다. 우주 법계를 더 어둡게 만든다 이 말 이예요. 그건 자식과의 관계회복도 어려워지게 하고 그렇게 되면 결코 자식은 부모님 말을 듣지 않고, 부모의 말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금강경』에서는 불교 그 자체에도 집착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거기에 집착해서 그것을 고집하는 것이 도가 넘어서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도 아니고, 지혜로움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창조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이상에서처럼 창조의 원리를 말씀드렸고, 왜 우리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창조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놓쳐서는 안 될 창조과정의 핵심적인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하되 결과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떤 마음을 가짐으로써, 마음속에서 바라고 의도함으로써 현실을 창조해 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상에서와 같은 이이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힘을 낼 것입니다. ‘아, 나도 저렇게 마음을 잘만 쓰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겠구나’, ‘나도 원하는 대로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지위나 권력도 얻을 수 있고, 능력도 키울 수 있겠구나’ 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이면에는 창조에 대한 바람, 집착이 있게 마련입니다. 무언가를 원하고 의도했는데 그대로 되지 않았을 때 괴롭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많이 의도하고, 많이 바라고, 큰 에너지로써 창조한 것일수록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괴로움도 크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창조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괴로움을 창조해 내는 것이 되고 맙니다.

『금강경』에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고 하여,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마음을 일으키지도 말고, 의도를 일으키지도 말고, 창조 작업을 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아무런 분별도 없이 그저 멍하니 바보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다 내고 살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땅히 마음을 내고, 의도하고, 창조하고, 바라면서 살기는 할지라도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순수하게 마음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묻겠지만 당연히 가능합니다. 사실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이런 삶도 괜찮고 저런 삶도 괜찮다, 이 결과도 좋고 저 결과도 좋다고 믿고 받아들이되, 다만 나는 이런 쪽을 선택하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방향을 설정하는 겁니다. 그 방향이 다른 방향보다 더 좋아서가 아니라, 반드시 이 길 아니면 절대 안 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두 가지 평등한 길 가운데에서 어느 한 쪽을 자연스럽게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길도 좋고 저 길도 좋으나 나는 그저 이 길을 택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 길로 접어들더라도 상관없단 말입니다. 어차피 어느 쪽으로 가든 내 표면의식대로는 안 되었을 지라도 더 깊은 차원의 우주에서는 나에게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것을 언제나 보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이 우주법계는 정확히 필요한 일을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보내주고 있습니다. 우주는 언제나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사실은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일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완전한 일이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깨달음을 얻은 자는 무언가를 창조하고,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를 가지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 자신은 더 이상 그 무엇도 바랄 것이 없고, 얻을 것도 없고, 필요한 것도 없고, 창조할 것도 없이, 이대로 완전하고 완벽하다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창조하는 방법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 더 본질적인 것은 매 순간 순간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이 부분은 뒤에 가서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고 다시 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

그러면 이제 정리를 해야 할 시간이 오고 있는데요, 세상을 창조하는 방편의 가르침과 내맡기는 본질적인 가르침을 아우르는 아주 경이로운 수행방법 하나를 말씀드리면서 마칠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입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 라고 반복하는 거예요.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어떤 경계, 어떤 느낌, 어떤 괴로움이 일어나더라도 그 괴로움을 대상으로, 그 미운 사람을 대상으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 순간순간의 모든 마음들을 대상으로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 아니면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 숨을 내쉬면서 사랑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숨이 들어 올 때 감사함으로써 대긍정으로써 들어올 수 있도록 내 안의 에너지를 긍정으로 감사로, 풍요로움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나에게 그 어떤 것이 들어오더라도 그것은 감사할 재료가 됩니다.

자식이 컴퓨터에 빠져서 미쳐있습니다. 그거는 감사할 일이에요. 감사할 일이죠. 자식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을병에 걸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부모님 입장에서 그냥 공부 못해도 좋으니까, 컴퓨터 앞에서 게임만 할지라도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할 거거든요.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그런 감사함의 결정을 할 것이냐 하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그 결정을 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공부 잘하기를 바라지 말고 성적이 떨어지더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적이 떨어졌다는 그 사실 때문에 스스로 충격을 받아서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도 있거든요.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은, 분별하는 것은 좋은 쪽으로 분별할지라도 차라리 분별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부모님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스님, 자식들한테 자꾸 좋은 얘기를 해줘야지. 분별하지 않고 그냥 뭐든지 받아들여 주고 허허 웃기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말이지요. 물론 안 될 수도 있지요.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똑바로 얘기해 주는 것을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말은 거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집착해 빠져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옳은 것이 아니게 됩니다. 분별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거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식과의 관계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말을 하되 그 말에 집착하지 않고 하면 자식이 나쁜 짓을 하게 되더라도 괜찮아요. 내가 내 생각에서 나쁜 짓이고, 그 아이의 행동에 대한 나의 해석이 나쁜 것이지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어떤 것이 되었든 들어 올 때는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또 나에게서 나갈 때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 나갈 수 있도록 내가 내뿜는 호흡도 사랑의 호흡을 내뿜을 수 있도록, 또 나에게서 나가는 말 한 마디도 ‘사랑’으로 나갈 수 있고, 나에게서 나가는 행동 하나도 ‘사랑’이 가득한 행동으로 내보내고, 모든 마음의 에너지를 내보낼 때는 사랑의 에너지를 보태서 내보내는 것입니다. 육근(六根) 즉,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로써 들어오고, 심지어 누가 나한테 욕을 하더라도 감사하다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못 할 이유가 없지요.

감사할 이유를 찾으면 감사할 이유는 모든 것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주 법계는 언제나 나를 돕고 있으며, 나를 성숙케 하기 위한 자비로운 일만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괴로운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나를 영적으로 성숙시키기 위한 더 큰 차원의 계획의 일환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 내 계산으로 따지면 나쁜 일일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주법계의 계산으로 따지면 사실은 모든 것이 근원적으로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렇게 했을 때는 모든 것이 감사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육근(六根)으로 들어오는,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감사하게 느껴지고, 귀로 들리는 모든 소리가 감사하게 느껴지고, 코로 냄새 맡는 모든 것이 감사한 냄새가 되고, 맛보는 모든 음식을 감사하게 음미하게 되고, 감촉 느끼는 것, 생각하는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써 들어오게 되고 나에게서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내 폐를, 내 오장육부를, 내 내면을 한번 거치고 나갈 때는,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감사와 사랑과 자비심으로서 융화가 되어서, 그것이 뿜어져 나갈 때는 항상 사랑으로써 나갑니다. 자비로움으로써 나갑니다.

그랬을 때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얼마나 경이롭게 바뀌는지, 그냥 조금조금 바뀌는 게 아니라 얼마나 획기적으로 바뀌는지를 스스로의 존재로서 증명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라는 존재를 가지고 내가 얼마만큼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내 인생 내 존재가 그렇게 바뀌어 갈 수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해 내지 않으면 체험이 안 됩니다.

불교는 체험의 종교이지 그냥 껍데기 종교가 아닙니다. 이걸 내 스스로 체험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현실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내 스스로가 실천하게 된다면 여러분 인생은 지금부터 경이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요, 사실은 부단한 노력을 통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한 생각 바뀌면서 삶이 바뀌는 겁니다. 그 한 생각 바꾸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뭐 하러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혹은 아주 안 좋은 경험을 통해서나 고난을 격고 나서야 비로소 한 생각을 바꿉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에 한 생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 한 생각 바꾸는 아주 좋은 방법, 그래서 생각을 아름답게 바꾸는 방법, 방편적인 진리의 실천, 그것이 바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고 그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은 호흡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으로 나를 항상 데려오게 만듭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본질법, 근본법과도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삶에서 풍요롭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끕니다.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에 대해서는 별도로 목탁소리 홈페이지나 저의 다른 글들에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내 능력은 무능하다. 나는 능력이 없다. 이렇게 생각했던 모든 마음의 에너지들을 거둬들이고 이제부터 새롭게, 정말 멋지게 내 삶을 내 스스로 부처가 되어서 내 삶을 바꿔 나갈 수 있는 그런 엄청난 경이로운, 신비로운 그런 삶을 스스로의 존재로서 살아내 보시고 직접 체험해 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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