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오후, 길을 걷고 있던 사람이
대형 광고판이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고,
또 다른 사람은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다가
광고판이 머리에 맞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복잡하던 길, 복잡하던 마트에서
수많은 사람이 그 광고판 아래를 걷고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불행하게도 그 사람에게, 그 순간에
그 광고판이 떨어지게 되었을까?

일부러 어떤 사람이 광고판 위에 서 있다가
그 사람을 맞추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떨어뜨려
정확히 그 사람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불교에서는 우연이란 없다고 말한다.
그것 또한 그 사람의 인연이요 업이다.
다시말해 그 사람은 그 아래를 정확히 그 시간에 걷도록 되어 있었고,
그 때에 맞춰 그 광고판은 추락을 할 수밖에 없던 인연이었다.

사람의 목숨이 아무런 인연도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이 그 때 죽어야 할 업도 아닌데,
아무 이유 없이 우연으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사라는 것은 정확하게 인연 따라 오고 갈 뿐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생긴다.
어떻게 그 광고판은 그 사람이 그 때 죽을 업이란 것을 알고
그 순간, 정확하게 그 사람을 맞췄단 말인가?

그 인과응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과관계라면 이해가 가지만,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 어떻게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도 인과관계와 인연법은 성립한다.

이 우주의 법칙은, 이 법계의 인연법이라는 법칙은
인간에게만, 혹은 생명이 있는 유정물(有情物)에게만 한정되는 법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뿐 아니라, 유정물 뿐 아니라
모든 무정물(無情物)에게까지 확장되는 우주의 법칙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유정물 뿐 아니라
무정물에게도 자비와 존귀함과 따뜻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보내야 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그 차가 자체 엔진고장을 일으켜 시동이 꺼지면서
고속도로에서 차가 갑자기 서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 대형사고가 났고, 많은 사람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그렇다면 그 사고에 연관된 많은 이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우연으로 그 사고를 당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고가 날 만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사고가 날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마침 그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소멸한다.
우연은 없다.

그렇다면 고장 난 자동차 엔진이
모든 인연법과 인과응보를 환히 알고,
사고가 날 모든 사람들의 운명과 업을 따져 본 뒤
그 순간에 그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꾸며낸 것인가?

그렇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해
그 자동차 엔진이 그런 일을 직접 했다기 보다는
이 법계의 인과응보라는 이치가 그 일을 계획하고
자동차 엔진은 거기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큰 틀에서
인연법이라는 법계의 큰 진리의 흐름 속에서
나고 죽으며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

이 쯤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자.
광고판이나 자동차 엔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몫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불교에서는 사람 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 나무와 풀과 개미와 이끼들조차
모두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며,
그들을 결코 인간 아래에 두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과 인간은 다르지 않다.

인간이 인간에게 죽음을 당할 수 있듯,
인간이 동물에게도 죽음을 당할 수 있고,
식물에게도,
심지어 위에서 보았듯 무정물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들과 인간은 인연법의 차원에서 서로 동등하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고장 나기 직전의 차였는데 주행 중에는 괜찮았고,
다행히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량이 고장 났다”고.
그래서 사고 없이 집까지 무사히 잘 왔다고 말이다.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아주 좋은 차를 타고 있었으면서도
차량이 문제를 일으켜 집까지 오는데
몇 시간이 더 걸렸을 수도 있다.

늦게 오는 것도 정확히 그럴 만한 인연이고,
사고 없이 빨리 오는 것도 그럴 만한 인연이다.

사업가가 아주 중대한 회사의 업무로
해외 사업가와의 미팅에서 차량 사고로 늦게 가는 바람에
그 큰 투자 사업을 망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량이 하필이면 왜 그 중요한 순간에 고장이 나는가.
차량 결함만 아니었어도 그 사업가는 대박이 났을 것인데.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차 고장만 아니었다면 완전히 대박이 났을까.
혹시 법계에서 그 사업이 대박이 나기에는 아직 이른 때라서,
아직 그 사람이 성숙하지 않았거나,
복이 부족했거나, 아직은 그 그릇이 작았거나 하는 이유로
차량 고장이라는 인연을 통해 그 사업을 뒤로 미룬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바로 그 차는,
차의 고장난 엔진은
온전한 법계의 이치에 따라
아주 여법한 진리를 수행하게 된 것이리라.

사람만 법계의 이치를, 인과의 이치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유정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처럼 무정물 또한 법계의 일부로써,
진리의 일부로써
바로 그 인연법이라는 우주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차의 탓으로 돌린다.
흥분해서 차 바퀴를 발로 걷어 차거나,
혹은 그 차를 폐차시키고 새 차를 사는 것으로 울분을 풀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차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내 문제다.
차가 바로 그 때 고장이 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주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 법계 우주가 각본을 쓰고 그 차는 단지 조연을 했을 뿐이다.
아니 법계와 차와의 공동감독에 공동주연의 연극이라는 편이 옳겠다.

어쨌든, 주연이었든 조연이었든
내 사업을 망친 직접적인 몫을 한 녀석은 자동차다.
그러니 자동차를 실컷 미워해도 좋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미워하는 만큼
법계의 일부분인 자동차도 나를 미워할 것이다.

손가락이 내 몸의 일부분이듯,
자동차는 이 우주법계의 일부분이다.
손가락이 아프면 나 또한 아프듯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도 아프다.
손가락이 아파 내가 아프면 어떻게든 손가락에게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에서도
자동차를 아프게 한 원인제공자에게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다.
바로 나에게.

그러니 자동차에게 분풀이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우주에게 진리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무정물 또한 인간과 유정물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존재이며, 존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유정무정 유형무형(有情無情 有形無形)’의 모든 존재가
다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정이란 나무나 돌 같이 감각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형이란 형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그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

옛 스님들은
“푸른 대나무숲 모두가 진여(眞如)요,
피어 늘어진 노란 꽃은 반야(般若) 아님이 없다.”고 했다.

[보장론(寶藏論)]에서는
“불성은 모든 것에 가득하고 풀이나 나무에도 깃들어 있으며,
개미에게도 완전히 퍼져 있으며, 가장 미세한 먼지나 털끝에도 있다.
불성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 『莊子』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답이 있다.

동곽자가 장주에게 물었다.
"도(道)라고 불리는 것, 그것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장주가 말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동곽자가 말했다.
"그것이 있는 곳을 지적해주십시오."
"개미에게 있다."
"그렇게 비천한 것에 있습니까?"
"작은 풀에도 있다."
"그것은 더욱 비천하지 않습니까!"
"벽돌이나 기왓장에도 있다."
"어떻게 그렇게 비천한 곳에 있을 수 있지요?"
"오줌과 똥에도 있다"
동곽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대 과학에서도 유정물과 무정물을
정확히 구분 짓기 어렵다고 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유정물, 다시말해 생명체는 DNA라는 복제 가능한 유전물질 지니고 있어
생식활동을 통해 자손을 만들어 내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무정물, 무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와 광우병의 원인체를 규명하면서 밝혀진
프리온이라는 원인물질이 유전자가 전혀 없는 단백질에 불과하지만
생물체내에서 증식하고 전파되어 확산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은 전면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 때 비로소 생명과학자들은
생물과 무생물, 유정물과 무정물이란 경계가 따로 없음을 깨닫게 된다.
유정, 무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분류이자 분별이었을 뿐이지,
본래 그렇게 나뉘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큰 한 바탕으로부터 비롯되어
여러 원인과 결과에 의해 만들어진 모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밝힌 미국의 프루즈너 교수는 97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유정물이나 무정물이라는 것은 단지 이름일 뿐,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 인간이 더 귀하고 천하다고,
더 우월하고 열등하다고 나누어 놓았을 뿐이지,
그 본 바탕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아무리 하찮다고 생각되는 무정물일지라도
그로인해 내가 죽음을 당할 수도 있고,
또한 그로인해 내가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옛 스님들은 무정물이 언제나 법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을 듣는 것은 오직 성인들 뿐이라고 했다.

하찮다고 생각되는 발 아래의 꽃을
신비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기 위해 고개를 숙임으로써
나에게 날아오던 화살을 피하게 될 수도 있고,
밤길에 차를 타고 가다가 불쑥 나타난
토끼 한 마리를 피하려다가 사고가 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내 운명을 갈라놓을 수도 있다.

내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이
반드시 인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찮다고 생각했던 무정물이 내 생사를 결정지을 수도 있고,
내 운명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 우주의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들이 모두
나와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하나도 하찮은 것이 없다.
더 귀하거나 천한 것은 없다.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소중한 것 처럼, 사람이 소중한 것 처럼,
똑같이 나무와 풀과 산과 흙과
심지어 자동차와 의자와 집과 컴퓨터 또한 소중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섰을 때처럼,
존경하는 스승 앞에 섰을 때처럼,
부처님 앞에 섰을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모든 존재 앞에 서라.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모든 존재 앞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마음으로 다가 서라.

일체 모든 존재를 존중하며 감사하고
찬탄하며 존귀하게 여기라.
이 세상의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에게
무한한 공경심으로 엎드려 절하라.
매 순간 세상 만물에게 기도하라.

유정물과 무정물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그 모든 것들이 인연법의 진리 안에서
동등한 입장으로 나와 인연을 짓고 있음을 안다면,
세상에는 더 이상 존귀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은 경이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세상을 향한 지고한 공경심!!
모든 존재를 향한 평등한 자비심!!
이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이 세상을 향한 마음이다.

학창시절에 원소, 원소주기율표라는 것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 때 나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간 학교에서 가르쳤던 것은 인간이 우월하다는 것이었고,
도저히 인간과 자연, 인간과 무정물은 하늘과 땅 차이일 수밖에 없었는데,
인간과 자연, 유정물과 무정물을 이루는 근본 원소는
동일한 것이라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동일한 원소들이 ‘어떤 인연으로 모였느냐’에 따라
인간도 되고, 동물도 되고, 식물도 되고,
심지어 자동차도 되고, 빌딩도 되고, 집도 되고, 물도 된다.
이것은 유정물과 무정물이 그 어떤 차별도 있지 않다는 반증이 아닌가.
우리는 결국 동일한 것들이 모여서 겉모습의 차이를 만들어 낼 뿐이지,
근원적인 어떤 높고 낮거나, 귀하고 천하거나 하는 차별은 없다.

나는 때때로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호젓하게 벗어나
홀로 산 길을 걸을 때,
아니면 낯설고 인적 드문 여행지를 거닐 때,
그럴 때조차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어떤 ‘존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미세한 느낌을 받곤 한다.

우리가 완전히 혼자 있을 때조차 사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발딛고 서 있는 대지와 흙과 함께 있는 것이며,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유정물, 무정물이
내 곁에서 따뜻한 도반으로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이러한 통찰 속에서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공경심과 찬탄과 신비 속에 머문다.
어찌 이런 세상이 신비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사소하거나, 하찮거나, 귀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통찰은 우리의 삶을
모든 존재를 향해 활짝 열려 있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향해 존중과 찬탄과 감사와 공경심을 갖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평등한 부처로써 섬기고 시봉할 수 있게 해 준다.

자동차를 타고 멀리 출장을 갈 때
자동차를 향해 동료의식을 가지고, 도반의식을 가지고
존중하며 감사하고 공경스런 마음을 보내라.
내 마음이 자동차를 향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향한
한없는 자비심과 공경심으로 넘칠 때
오늘의 운행은 안전하게 법계에서 자동차와 공동으로 도울 것이다.

설령 오늘 자동차 사고가 날 업이었다고 할지라도
모든 존재를 향한 깊은 존중과 감사와 공경심으로
조금 더 주의 깊게 운전을 함으로써
그 차량사고의 인연이 소멸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이나 식물도 사람 마음이 존중과 사랑과 자비로왔을 때
그 결정이 아름다워지고, 식물도 고요한 파장을 보낸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사람 마음에 따라 세포와 원소의 차원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그러니 모든 기도의 핵심인 감사와 존중과 공경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
그 주위의 모든 유정물, 무정물은
아름답고도 청정한 파장과 세포와 결정을 보여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감사와 공경심으로 충만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이
욕심과 화와 질투로 가득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에 비해
사고가 날 확률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의 마음자세가 운명을 바꾸고 업을 바꾼다는 말이다.
업장소멸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운명론이나 숙명론을 거부하지 않은가.
그 이유는 그 어떤 업일지라도, 그 어떤 과보일지라도
마음에 따라, 기도와 수행과 복덕을 얼마나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받아야 할 업장을 뒤에 받을 수도 있고,
다른 방법으로 보다 미세하게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침 공양을 하기 전에
물과 쌀과 야채와 수저와 식탁과 이 집에게 감사하라.
길을 걸으며 길가에 피어난 들꽃과
보도블럭과 신발과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무한한 공경을 보내라.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컴퓨터와 의자와 책상과 볼펜과 자판기와 책들과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도와주고 있음에 감사하라.

이처럼 무정물조차 나보다 못할 것이 없는
법계의 스승이며, 도반이고, 소중한 길벗이라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겠는가.

더 귀한 사람, 더 천한 사람,
더 중요한 사람, 덜 중요한 사람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일지라도,
바보나 정신병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이 생에서의 인연이 다했음을 알고 이교도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
그것이 바로 목련의 인연이었음을 바로 보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반대로 아무리 하찮게 느껴지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게서 내 인생의 가장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아주 나이 어린 어린이가 내 생명을 구해줄 은인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원수였던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니 사실은 내 인생에 귀하고 천한 사람은 없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거나, 좋거나 싫다고 정해진 사람은 없다.
모두가 똑같은 비중으로 존중받아 마땅한
내 삶의 부처요, 관음이고, 내 생명의 귀의처다.

귀한 사람에게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은 평범하다.
그러나 천한 사람에게 그 본질을 알고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의 이치를 몸소 깨닫고 실천하는 수행자다.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행하는 존중을 보내라.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에게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을 주라.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교수님들과 교직원 그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아주 유명했던 큰스님께서 감동스런 법문을 해 주셨던 적이 있다.
법문을 들으며 꼭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스님을 둘러싼 교수님들과 교직원분들의 눈치도 보이고
나 같은 한 명의 대학생의 질문이 거슬릴 것 같아 망설이다가
어렵게 나오시는 스님을 붙잡고 여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스님께서는 자비어린 시선으로 오래도록
내 눈을 진지하고도 진심어린 눈으로 마주보아 주시면서
나의 질문에 스님의 모든 노력을 다해 답변해 주셨다.
그 때 나는 너무도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어린 내 마음은 스님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아주 당연하지만 그 일은 오래도록 아주 특별한 경험으로 자리잡으면서
내 삶의 지침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 그 때 내가 했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은 기억에 없지만,
그 때의 그 존중받는 느낌과
나에게로 향한 그 스님의 집중과 자비와 눈빛은
두고 두고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몸소 깨닫게 해 주신
살아있는 법문으로 나를 밝혀주고 있다.

살아있는 지혜라는 것,
깨달음의 실천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을 보내주는 것,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존재에게
나의 모든 공경심을 바치는 것,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무정물들에게 조차
찬탄과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세상을 향한 차별 없는 열린 마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부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것이 부처다.










Posted by 법상



미국 나그네 비둘기는 한 때
북미 대륙에서 가장 흔한 들새였다.
나그네 비둘기의 큰 떼가 지나가면 하늘이 어두워질 정도였으므로,
아무도 이 새가 멸종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미국 개척시대가 시작되면서
나그네 비둘기의 수난은 시작되었다.
이 새는 아주 고기 맛이 좋고
대평원에서 큰 무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부 개척자들의 식탁에서 아주 인기있는 메뉴가 되었다.

미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철도가 놓이면서
이 새는 철도 건설 노동자를 위한 식사 뿐만이 아니라,
상품화되어 이웃 여러 마을로 신속하게 공급되었다.

이 나그네 비둘기의 포획을 위해 수천의 전문 사냥꾼이 고용되어
기관총을 비롯한 여러 화기를 사용하여 남획하기 시작했다.
이 새는 큰 나무에 수십 또는 수백씩 무리를 지어
새끼를 치는 생태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더욱 남획하기 쉬웠다.

사냥꾼들은 어린 새나 늙은 새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포획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855년 뉴욕의 한 거래처에서
한 사람이 하루에 18,000마리의 비둘기를 매매한 사실이 있고,
1869년 한 해 동안 한 지역에서
750만 마리의 나그네 비둘기가 포획된 기록도 있다.

이러한 남획으로 인해서 나그네 비둘기의 수는 격감하여
19세기 후반에는 큰 번식 집단을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희귀한 종이 되어 버렸다.

1894년 마지막 둥지가 발견되었으며,
1914년 신시네티 동물원에서 최후의 한 마리가 죽음으로써
이 새는 멸종되었다.

[지속가능한 사회와 생태학] 중에서...

지구는 공룡을 포함해 식물과 동물 수천종이 절멸한 6천500만년 전
소행성 충돌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생물 종들을 잃어가고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전 세계 포유류의 약 4분의 1, 양서류의 3분의 1,
조류의 10분의 1 이상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기후변화 요인 한 가지만으로
앞으로 50년 안에 추가로 생물종 15-37%가
멸종 직전으로 몰릴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추산한다.

세계환경보존연맹은 지난 5월 멸종 위협에 처한 생물 종의 수가
1만6천119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백상아리는 지난 50년 동안 최대 95%까지 감소했다.
북극곰은 앞으로 45년 간 개체 수가 30%쯤 감소할 전망이다.

사하라사막 지대에서는 무분별한 사냥과 서식지 파괴로
다마가젤의 수가 80%나 줄었다.
아프리카 민물고기의 4분의 1도 인류의 활동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

과학자들은
"중대한 생물다양성 위기 상황으로 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물다양성은 여전히 저평가되고 있고,
민간과 공공정책 결정시 적절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며
"생물다양성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적인 조직을 창설함으로써
과학과 정책 사이 간격을 시급히 메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겨레 신문]

지금도 매일 70~150여 종의 생물이
소리없이 아무도 모르게 멸종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 년이나 한 달이 아니라
하루에 말이지요.

생물이 멸종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몸이 꺼져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요.

위에서 나그네 비둘기가 없어진
그런 방식으로, 혹은 그보다 더 잔혹하거나, 미묘한 방법으로
수많은 종의 생물들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뿐 아니지요.
이 글을 읽고 있는 오늘 하루,
2만 헥타르(약 6천5십만평)의 사막을 만들어내고,
8,600만 톤의 비옥한 땅을 침식시켜 파괴하고,
1억 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브라질 아마존강 유역의 열대우림은
우리가 좋아하는 햄버거 등의 패스트푸드용
쇠고기를 생산하기 위한 목초지를 만드느라
매년 미국의 테네시 주보다 더 넓은 삼림지역이
차례 차례 불태워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아랄해는 목화재배를 위한 관계용수로 인해
빠르게 사막화 현상을 보이고 있어
해안선이 하루가 다르게 멀어져 가고 있고,

뭐 이런 예를 말로 일일이 다 적으려면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고,
내 평생 해도 모자랄 판이니
가슴도 아프고 그만 적도록 합니다.

우리의 집착,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들의, 인간들의 집착과 욕심이
이 모든 무서운 일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훗날 우리가 받아야 할
공업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업이니까
나 혼자만 환경 보존하고, 절약하고, 아끼고,
자연을 사랑한다고 될 일이 아니니
그냥 대충 살겠다고 한다면
그 공업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지만,

나 먼저 아끼고 절약하고 나누고
보존하며 자연을, 생명을 내 몸 아끼듯 사랑하고
동체의 자비로써 대한다면
내 업은 내 업대로 청정함을 유지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기상 이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업이 청정한 사람은 그것을 빗겨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폭풍우가 몰아친다고
다 죽는 것은 아니고, 다 과보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업에 따라 죽기도 살기도 하고,
업에 따라 자연의 갚음을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업이란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자연과 나와의 업이 청정하면
내가 자연을 어쩌지 않은 것 처럼
자연도 나를 어쩌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자연을 더럽히고, 오염시키고, 펑펑 써대며,
개발과 발전을 이유로 파헤치고 꺾고 뚫고 해 버린다면
자연 또한 그 업을 기억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업을 청정히 한다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자연과의 업이 청정해 진다면
그것이 바로 청정한 자연, 청정하고 지속가능한 지구를 만드는데
더없이 중요한 실천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숫타니파타]의 게송이 떠오릅니다.

악마가 말했다.
"자식 있는 자는 자식 때문에 기쁘고,
소가 있는 자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인간이 소유하고 집착하는 것은 기쁨이다.
집착할 것이 없는 자는 기뻐할 것도 없다."

그러자 붓다가 대답했다.
"자식이 있는 자는 자식 때문에 근심하고,
소 있는 자는 소 때문에 근심한다.
실로 인간의 근심은 무엇인가에 집착하는데서 생겨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자는 근심할 것도 없다."


Posted by 법상





이상에서와 같이 연기법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사건도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연기법에 입각해 보면, 쌀 한 톨이 존재하기 위해서도 좁게는 농부와 소매상, 도매상, 태양과 흙과 물과 바람과 각종의 영양분 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넓게는 나아가 이 우주 만물, 우주 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들이 직간접적으로 쌀 한 톨의 생명을 돕지 않으면 도저히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작은 미생물, 곤충, 벌레, 짐승이며 사람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존재는 서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지 않을 수 없고, 나아가 이 우주의 어머니와 같은 보살핌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모든 것은 서로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는다. 모든 존재는 모든 존재를 살리기 위한 중요한 요인이 된다.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이 자리에 존재하기까지는 내 발 아래의 작은 꽃 한 송이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흙과 바람과 구름과 햇살이 어머니의 품이 되어 나를 보살펴 주었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웃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내가 삶 속에서 마주치는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존재들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나를 살려주고, 보살펴주고, 키워 준 소중한 어머니요 아버지인 것이다.

그들이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 하찮게 여겼던 풀 한 포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었고, 숲의 나무들 때문에 내가 살고 있으며,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직간접적인 도움 없이는 지금의 나는 이 자리에 설 수 없다. 어디 그 뿐인가. 시간을 거슬러 옛 조상님들을 비롯하여 그야말로 ‘일체 모든 존재’들이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있고, 또한 내가 있기에 그들이 있다.

이러한 연기적인 세상에서 우리들이 실천해야 할 첫 번째 실천의 덕목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감사와 찬탄이다. 어찌 나를 이끌어준 이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이렇게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나를 살려주고 보살펴 준 우주 법계의 소식에 경외와 찬탄을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기법의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이의 삶의 방식은 찬탄과 감사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존재들이 나의 어머니요 아버지다. 대지와 태양과 바람과 구름이 나의 아버지이며, 이웃과 나무와 꽃과 풀들이 나의 어머니다.

내가 잘나서 이렇게 성장하고 잘 자랐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오만한 생각이 있을까.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가 성격이 좋아서, 내가 잘나서 이 자리까지 온 것이 아니다. 삼라만상 일체의 모든 존재들이 나를 돕고, 나를 살려주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어머니의 품처럼 나를 품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려지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따뜻한 보살핌에 의해 살려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산다고 생각하면 그 주체가 내가 되어 아만과 아집과 이기가 생겨나기 쉽지만, 살려진다는 말에는 연기와 감사와 겸손의 덕목이 숨 쉬고 있다. 온 우주의 크고 작은 모든 존재들에 의해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매 순간순간 살려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어떠한가. 인간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아집과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 내가 잘난 줄 알고, 인간만이 우월한 줄 안다. 인본주의,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것은 나를 키워 준 아버지 자연을 소외시키고, 어머니 대지를 짓밟으면서 인간만이 우월하다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해도 좋다는 인간의 오만으로 치닫고 있다.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나누는 것은 연기적인 사고가 아니다. 그 모두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 인간과 신이, 인간과 자연이 평등한 인연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상생과 조화의 관계다. 이것이 깨지면서부터 온갖 환경오염이 재앙적으로 출현하지 않았는가.

인간이 신을 찬탄하고 신에게 모든 감사를 돌리듯이, 연기적인 가르침에서는 인간이 신에게 한 것과 똑같은 신성함으로 자연을 찬탄하고 자연에게 감사를 돌리며, 또한 이웃을 찬탄하고 감사를 돌리는 삶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며 존재가 만들어 내는 일들은 모든 것이 찬탄과 감사의 대상이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를 공경스런 마음으로 찬탄하고 찬양하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에게 감사와 외경의 예를 올리라. 예를 올리는 대상은 부처님이거나 신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일체 모든 존재가 부처요 신이다. 부처님의 은혜, 신의 은총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다고? 바로 그 부처님의 은혜와 신의 은총의 실체는 온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들의 은혜요 은총이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도움을 주고 받는다는 이 대 우주의 자비로운 오케스트라에 감사하고 찬탄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이 은혜와 은총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다.

새벽 정갈한 마음으로 감로의 천수를 공양 올리며 초와 향을 사르고 나아가 불전에 온 마음을 다해 지극정성으로 예를 올리는 바로 그 마음으로 온 우주에 예를 올리라.

6시간을 어렵게 올라 봉정암의 부처님께 공양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 발 아래 힘겹게 피어오른 민들레 한 송이에 찬탄과 감사의 예경을 보내라.

어렵게 어렵게 모처럼 큰스님을 친견하는 마음으로 아내와 남편을, 자식과 이웃을 매일매일 친견하라.

어머님과 아버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라.

하루 동안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나를 살려주어 감사하다’는 찬탄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라

Posted by 법상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 연기법 강의(3)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 연기법 강의(2)
2007/11/09 - [불교교리강좌] -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다 - 연기법 강의(1)
세계는 한 송이 꽃 - 우주가 나를 돕는다

『지구를 치료하는 법』이라는 책에 보면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예를 볼 수 있다. 책에 의하면 1950년대 보르네오 섬의 어떤 마을에 말라리아가 크게 유행했을 때 말라리아 모기를 없애기 위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DDT를 뿌렸다고 한다. 모기는 모두 죽고 말라리아는 사라졌다. 그런데 그 후 여러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민가의 지붕이 너덜너덜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민가의 지붕에 살던 말벌이 DDT로 인해 모두 죽고 굼벵이를 먹이로 하던 말벌이 사라지자 굼벵이가 크게 번식하여 갈대로 이엉을 엮은 지붕을 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양철판 지붕으로 바꾸었지만 열대지방의 맹렬한 소나기인 스콜이 양철지붕을 때리는 소리에 주민들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DDT로 인해 수많은 벌레가 죽고 죽은 벌레를 먹은 엄청난 양의 뱀 또한 죽었다.

그 뱀을 고양이가 먹었는데 먹이사슬이 올라갈 때마다 DDT 농도가 농축되어 고농도 DDT를 섭취한 고양이들도 잇따라 죽어갔다. 고양이가 사라지자 쥐들이 극성을 부렸고, 쥐가 증가하자 다른 전염병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곤경에 빠진 WHO에서는 그 해결책으로 14,000마리의 고양이를 낙하산에 매달아 하늘에서 뿌렸다는 다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먹이사슬 전체에 혼란이 일어났는데 그 근본원인을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 보다는 당장에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를 뿌렸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단편적인 견해이며, 일차원적인 접근이고,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일어나고 소멸된다는 연기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결과인가.

이처럼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의존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일어나면 그로인한 다양한 ‘저것’들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어 있고, 또 그 ‘저것’들은 또 다른 제2, 제3의 ‘저것’들을 무수히 만들어 낸다. 연기를 모르면 그 근본 원인이 ‘이것’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제3, 제4의 ‘저것’들에서만 문제를 밝혀내고자 애쓰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지구나 우리 생활 속의 모든 일은 여러 가지 다른 일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의 작은 한 가지 구성원이 사라지면 곧 그것과 연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수많은 존재들이 사라지거나 직간접적으로 위험에 놓이게 되며, 결국 그것은 사람의 목숨까지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정신적 물질적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존, 공생의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 자연과 자연, 개인과 전체가 서로 서로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로써 공생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연의 한 개체가 파괴된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자연의 한 부분을 오염시킨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몸을 오염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그 어떤 현상일지라도 A의 결과는 B라고 하는 단편적이고 직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접근하면 그 현상에 대한 온전한 통찰이 어렵다. 모든 존재며 현상들은 어느 것 하나 전체적이며 우주적이고 연기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어떤 한 가지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중층적이고 무량하게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그 한 가지 일에는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를 피우는 데에도 온 우주가 동참하고 있다. 한 겨울의 얼어붙은 땅을 뚫고 피어나는 봄 꽃 한 송이에도, 한여름 우거진 녹음이며 쏟아지는 장대비에도, 가을철 아름다운 단풍과 이어지는 첫 눈의 설레임에도 크고 작은 온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연기적인 대 화합의 오케스트라를 장엄하게 연주해 줌으로써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면서 내 발을 씻어주는 생생한 현실 속에도 달의 인력이며 수 억 광년 떨어진 별의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

꽃 한 송이는 그저 단순한 꽃 한 송이가 아니라, 연기적으로 온 우주가 함께 피워낸 꽃이요, 온 우주의 숨결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나도 단순히 내가 아니라 온 우주의 반영이며, 우주적인 진리가 나로써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하나, 행동 하나 하나가 낱낱이 온 우주로 퍼져나가고 있고, 온 우주와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공존 공생하고 있다. 온 우주가 더불어 나를 살려주고 있고, 나를 돕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너’를 돕고 있다. 이처럼 온 우주가 한 송이 연꽃이요 평화로운 한 가족이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만공스님의 일갈도 이 같은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나온 깨침의 언어인 것이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어리석은 자들은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인 줄을 모르고 있어.
그래서 나와 너를 구분하고,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다투고 빼앗고, 죽이고 있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라.
흙이 있어야 풀이 있고,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

남편이 있어야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부모가 있는 법.

남편이 편해야 아내가 편하고,
아내가 편해야 남편이 편한 법.
남편과 아내도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이요,
이웃과 이웃도 한 송이 꽃이요,
나라와 나라도 한 송이 꽃이거늘,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을 바로 지니면 세상은 편한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참 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중생심에서 보면 나와 너, 남편과 아내, 이웃과 이웃, 나라와 나라, 내 종교와 네 종교, 인간과 자연 등 수많은 분별이 작용하여 ‘나’, ‘내 것’ 이라는 이기와 아집을 형성하지만, 연기적으로 보면 너가, 이웃이, 타인이, 다른 나라가, 다른 종교가, 자연이, ‘나 아닌 것들’이 모두 ‘나’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나’‘내 것’‘내 종교’‘내 나라’ 때문에 온갖 시비와 분별, 욕심과 전쟁 등을 초래하지만 연기적 시각에서는 그 모든 것이 동체적인 모습으로 한 뿌리, 한 몸, 한 가족일 뿐이다. 거기에서 온 우주와 나를 다르게 보지 않는 동체대비의 자비가 싹튼다. 이기는 사라지고 참된 사랑이 움튼다.

이러한 연기법의 상호의존관계에서 볼 때, 그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 말을 잘 살펴보면 이 속에는 그 어떤 존재도 실체적인 자아가 있지 않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인간도 인간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도 자연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인간과 자연은 공존, 공생의 관계이며, 그 둘은 모두 인연에 의해 존재하므로 비실체적인 것이다. 즉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는 무아(無我)인 것이며, 공(空)인 것이다.

그렇듯 일체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뗄 수 없는 연기적 동체(同體)의 존재요, 서로가 독자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비실체적 공생의 존재이며, 그렇기에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일체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자기 몸처럼 아껴주고 도와주며 존중해주는 자비를 실천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연기적인 삶의 기본 원칙은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의상관의 연기법과 그렇기에 그 어떤 존재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실체적 자아를 내세워 이기심을 축적할 수 없다는 공과 무아와 아집의 소멸, 그리고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되는 필수불가결한 한생명이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한 가족과 같은 따뜻한 사랑과 자비로써 대해야 한다는 자비사상이 되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셋째,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소멸에 대한 공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소멸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의 소멸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사라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소멸하는 법은 없으며 공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다’에서 살펴보았듯이 존재의 생성에 모든 존재들의 상호의존과 관계성이 담겨 있듯이 존재의 소멸에도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들의 상호연관의 연기법은 적용된다.

앞에서 자동차를 예로 들었는데, 만약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엔진이 고장 나 버렸다면 그 자동차는 더 이상 굴러갈 수 없을 것이다. 타이어가 펑크가 나도 마찬가지고, 타이어휠이 고장 나도 마찬가지며, 미션이나 기어가 고장 나도 자동차는 더 이상 자동차로써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하다못해 기름이 없어도 자동차는 무용지물이 되 버리며, 그 자동차를 운전할 사람이 없어도 자동차는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이처럼 자동차를 구성하고 있는 어느 한 요소만 없어지거나 고장이 난다고 하더라도 자동차는 더 이상 자동차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그렇기에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소멸에 대한 연기법의 공간적인 표현을 볼 때 엔진이 없으면 자동차도 없고, 타이어가 없으면 자동차도 없고,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가 없고, 운전자가 없으면 자동차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소멸은 저홀로 독자적인 소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함께 하고 있던 수많은 연기되어진 원인과 조건들이 소멸 될 때 ‘~로 말미암아’소멸되는 것이다.

상황의 소멸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거처하고 있는 절은 규모가 작고 강원도의 산골에 위치 해 있다 보니 처음에는 법회나 기도가 있는 날인데도 신도님들이 한 분도 오시지 않아 법회를 열지 못한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낙심 아닌 낙심이 되었지만, 이것도 다 인연이구나 하고 마음을 돌리니 오히려 그 시간에 미루었던 다른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인연이 화합하여 모였을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어느 한 쪽에서 응해 주지 않으면 그 법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소멸의 법칙에서 보듯이 신도가 없으면 법회도 없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일들은 인연화합을 통해 만들어지고 인연화합이 되지 않으면 소멸되는 것이니 이러한 연기의 법칙을 거스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인연을 거스르게 되면 거기에는 고통이 따른다. 신도가 없으면 법회가 없다는 연기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투덜투덜 거리면서 마음에 고통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신도가 없어 법회가 없었지만 또 다른 새로운 포교의 방법을 모색하거나 그 시간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다면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라는 소멸의 법칙을 받아들여 새롭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생성의 법칙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의 법칙은 온 우주를 운행하는 근원이 되는 이치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거스르는 순간 괴로움이 시작되지만 받아들이는 순간 평화가 깃들게 되고 또 다른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그래서 연기법에서 보았을 때 모든 생성은 곧 소멸을 의미하고, 소멸은 또 다른 새로운 생성을 의미한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닌 한바탕에서 이루어지는 연극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생성을 즐거워하며 집착하고 소멸을 괴로워하며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이치를 받아들이면 생과 사도 자유롭고, 성공과 실패에도 그렇게 연연해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있고 없음, 소유와 무소유, 부와 가난 등의 분별 속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존재의 발생의 원칙과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원칙은 모두 공간적인 연기의 해석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지금 여기에서 더불어 존재하는 것들이며, 서로 서로 의존관계를 이루었을 때만 존재의 의미를 얻을 수 있으며, 어느 한 가지 원인이나 조건이 소멸되면 다른 의존관계를 이루었던 모든 것들도 도미노처럼 차례로 소멸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 원칙은 나아가 이 우주적인 한 공간에서 이 우주, 이 세계, 이 나라를 이루고 있는 일체 모든 존재들은 서로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로써, 서로가 서로의 생성과 소멸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상의상관하고, 상호의존하는 결코 따로 따로 떼어낼 수 없는 한생명이며 한몸, 한마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불교적 자비사상이 움트는 것이다. 온 우주가 둘이 아닌 한 몸으로 동체이며, 그렇기에 네가 있기에 내가 있고,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며, 네가 사라질 때 나도 사라지고, 네가 괴로울 때 나 또한 괴로울 수 밖에 없는 생명공동체로써 하나인 것이다. 나라는 실체가 있어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우주이며, 내가 곧 일체 모든 존재와 둘이 아닌 하나로써 그들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더불어 살아가는 이 우주의 모든 생명을 내 몸처럼 아끼지 않을 것인가. 내 행복이 곧 일체 모든 존재의 행복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면 나를 돌보는 것 처럼 남을 돌보고, 나를 돌보는 것 처럼 자연을 돌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기를 바탕으로 하는 자비인 것이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넷째,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소멸에 대한 시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소멸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의 소멸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사라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소멸하는 법은 없으며 시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님이 생함으로 내가 생하고, 조상들이 생함으로 내가 생한 것 처럼 나의 탄생은 앞으로 있을 미래의 수많은 내 자손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라지면 앞으로 있을 자손들 또한 사라지고 만다. 이와 같이 어떤 한 존재의 소멸은 또 다른 존재의 소멸로 이어진다. 여왕벌이나 여왕개미의 소멸은 곧 엄청난 자손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온갖 산업화며 도시화, 기계화, 인구의 도시집중 등을 비롯한 개발과 발전이 자연을 파괴와 그로인한 환경의 오염을 가져왔고, 그러한 환경오염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퍼져 전체 생태계의 파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예전에는 많았던 수많은 동식물들이 사라지고 있다. 생물종이 아예 사라진 것들도 많다. 생태계에서 어느 한 단계의 생물종이 사라지게 되면 연이어 먹이사슬로 이어지는 다른 종도 함께 사라지고, 또 다시 그 종은 또 다른 종의 소멸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그야말로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이치가 환경생태에서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과학자들은 앞으로 50년 이내에 지구상 생물종의 1/4이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현재 매일 적어도 140종 이상의 동식물이 사라지고 있고, 1년에 최소한 5만종의 생물종이 멸종되고 있다고 한다. 그 원인은 주로 숲과 열대우림 등의 서식처의 파괴에 있다고 하는데, 현재 전 세계적으로 1분에 29ha, 즉 축구 경기장 40개에 달하는 면적의 열대우림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생물종이 멸종되어 가고 지구온난화 또한 가속화된다고 한다. 이런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물종이 소멸되고 지구온난화가 계속되게 되면 머지않아 우리 인간들 또한 멸종되게 될지 모른다.

실제로 세계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환경오염으로 인해 남성의 정자수가 급감하고 불임이 늘어 인간의 자체능력만으로 임신을 계속할 수 없어 이런 상태로 2017년까지 가면 결국 인간도 멸종에 이르게 될 것임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시간적인 표현에 입각해 보더라도 자연이 사라지면 생물종이 사라지고, 생물종이 사라지면 곧 인간도 사라진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자연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있다”는 말은 자연과 인간이 동시에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연이 사라지기 때문에 인간이 사라진다”는 말도 자연이 사라짐과 동시에 인간 또한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연의 모든 존재 하나 하나는 곧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과 직간접적으로 인연관계에 놓여 있다. 연기법에서 보면, 자연의 작은 한 개체가 소멸되거나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곧 머지않아 인간 또한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기적인 상의상관성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현재 지구상에서 끊임없이 증명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이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한국만 해도 장마 대신 우기 개념을 도입한다고 할 정도로 아열대 기후에 접근하고 있다. 엘리뇨, 라니냐, 지진해일 등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생명과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를 거꾸로 생각해 보면 ‘이것을 지켜냈을 때 저것도 지켜진다’라고 볼 수 있다. 나무와 숲과 열대우림이 사라지면 생물종도 사라지고, 생물종이 사라지면서 인간의 종까지도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면 거꾸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무와 숲을 보호하고, 열대우림을 지켜내며, 나부터 나무를 심고, 환경을 보호하며, 개발지상주의적인 모든 발전사업들을 보다 친환경적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친환경적인 발전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가 있는 개념이다. 될 수 있다면 발전과 개발을 늦추거나 최소한도로 줄이면서 자연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고, 최소한의 자연 파괴와 최대한의 자연 살림을 실천해야 한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부유함과 욕망의 충족과 돈 있는 노후를 꿈꾸고자 하는 거대한 욕망의 흐름을 끊고 거슬러 만족하고, 청빈하며, 자연과 교감하는 조화로운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도록 모든 교육, 제도, 정책 등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사라질 수 밖에 없다.
Posted by 법상




[가평 현등사와
봉화 청량사의 텃밭]

요즘 환경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실정인데요,
그럴수록 더욱 부처님 가르침이
이 오염된 세상에 큰 가르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구 환경을 살릴 수 있는
정신적 대안은 오직 부처님 가르침에 입각한
연기적 삶이요, 자비적인 삶이라는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생태 불교를 공부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불교환경연대에서
백남석 법사님을 초청하여
'부처님 가르침과 생태운동'이라는
강의를 들었다고 하는데요,
다음은 그 강의 내용입니다.


'부처님 가르침과 생태운동'

사람들은 저마다 남들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소비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이루게 되면 행복해 하지만, 욕망을 이루지 못하거나 가진 것을 잃게 되면 괴로워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거나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 하나 영원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 것이라 집착하면서 근심걱정이 태산과 같다.
행복감은 재물로부터 오지 않으며, 온다 하더라도 일시적일 따름이다. 행복은 기대와 욕망의 충족으로 오기 때문에 밖으로 끝없는 욕망를 충족하기보다는 오히려 욕망를 일으키지 않거나 적게 갖을 때 보다 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제가 발전하지 않은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과 같은 나라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사람들의 이러한 끝없는 욕망은 생산력 증대로 이어졌다. 특히 산업사회의 발달과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보다 폭넓고, 치명적인 환경영향을 야기했다. 공업의 발달은 인구의 도시집중을 가속화시켰고, 생산성의 증대와 이동수단의 발달은 원자재와 에너지의 수요를 크게 증가시켜 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만큼의 무한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한정된 환경 자원을 오염시키고 파괴함으로써 모든 생명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황금에 눈먼 인류’라고 표현할 만큼, 사람들은 금을 갖고 싶어한다. 그런데 무수한 금광이 쏟아내고 있는 여러 가지 배설물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네바다주에서 금 1온스(31.1035 그람)는 485,000원 하는데, 이 금을 얻기 위해 100톤 이상의 흙을 깎아 내며 30톤 이상의 암석을 채굴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하루에 50만 톤의 흙과 암석을 파낸다고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금을 분리하는데 수은과 시안화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은을 사용하는 아말감법과 암석가루를 시안화물 용액에 잠그는 시안법이 이용되고 있다. 이로 인해 식수가 오염되고, 광산주변은 사막화되어 가고 있다.

이미 지구는 심각한 환경 문제에 직면해 있음이 밝혀진 지 오래다. 한 번 배출된 이산화탄소는 대기 중에 100년 간 잔류할 수 있다고 한다. 계속 축적된 이산화탄소 층은 지구를 온실화 하여 해수면을 상승시켰고, 이로 인해 대형 홍수 등 기상이변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대기 중 오염 물질은 이미 남한의 300배 이상 되는 넓이의 오존층을 파괴하였고, 이로 인해 자연 생태계뿐만 아니라 질병에 대한 면역력까지 떨어지고 있다. 이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대기 오염에서 비롯된 기관지, 피부 등의 질환을 앓고 있다.

그리고 산성비와 화학비료로 인하여 비옥한 토양이 사막화되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계획적이고 무차별적인 삼림훼손으로 많은 동식물이 멸종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생태위기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 않고, 난 개발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모든 것은 인연의 그물로 연결되어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고, 당장 눈으로 확인되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결과가 없으면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인 듯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환경 문제는 전 인류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며, 사고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풀 수 없는 문제가 되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북극의 빙하는 1만 1천년 동안 녹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작년(2005년) 미국빙설자료센터(NSIDC)가 밝힌 자료를 보면, 최근 5년 동안에 북극빙하의 25%가 사라졌다고 하며, 앞으로 반세기 안에 빙하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로 인해 동토(凍土) 대에 묻혀 있는 메탄가스가 대기로 증발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메탄가스는 이산화탄소보다 20배나 강한 온실가스인데, 동토 대에는 전 세계 메탄 매장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7백억 톤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메탄의 증발은 지구의 온난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이는 다시 더 많은 메탄을 방출하게 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급격한 온난화에 따른 기상재해의 피해액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날 것으로 추산된다.

수조 달러로 추산되는 북극의 자원을 노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앞다투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녹아 내리는 북극은 인류에게 주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은 대재앙을 안길 수 있다.

이로 인해 러시아 북극권에 자리한 비코프스키라는 작은 어촌마을의 이벤크족 주민들은 최근 해마다 5-6m씩 마을 쪽으로 다가오는 해안선을 속수무책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이 다음 대에는 바다에 잠길 것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러시아에는 이런 마을이 457개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북극권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페초라 탄전의 13만 명의 보르쿠타시 주민들도 요즈음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영구 동토층 위에 건설된 도시 건물의 80%가 지반이 녹으면서 붕괴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북극의 온난화가 가속화되면서 4백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북극권 8개국의 삶의 터전이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빙하가 녹기 시작하자 이를 걱정하며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전 세계 석유 및 가스의 4분의 1 이상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에너지 자원의 보고인 북극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불꽃을 튀기고 있다. 노르웨이 북쪽 해안에서만 시추기지가 50여 개나 건설되었다. 작년(2005년) 북해에서 바렌츠 해를 거쳐 유조선으로 운반된 석유는 1억 4천 6백만 배럴이다

유엔은 2001년 보고서를 통해 북극 지역의 15%만 개발권에 있으나 2050년에는 80%로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생태계 파괴를 견디다 못해 얼음과 사냥만을 알던 에스키모족들은 지난해 변호사를 고용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에스키모 마을 하나를 옮기는 데는 1억 달러(약 1천 55억 원) 이상이 든다고 한다.

북극처럼 아프리카의 호수도 문제가 심각하다. 677개에 달하는 아프리카 호수 대부분이 수자원을 부분별 하게 남용하고 있으며, 가뭄 등 기후 변화와 부적절한 댐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차드, 카메룬, 나이지리아, 니제르 4개국에 걸쳐있는 차드호는 현재 수량이 1960년대의 5% 정도에 불과하다고 추정되고 있다.

중국의 문제 한 가지를 살펴보면, 2004년 한해 동안 45억 개의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나무젓가락을 만들이 위해서는 잘 자란 나무 2천 5백만 그루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교적인 세계관을 바르게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생태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만 한다.


1. 선형인과율과 상호인과율

부처님 당시 바라문교도나 사문들은 ‘원인은 결과를 낳지만, 결과는 원인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선형적 단일 방향의 인과율을 주장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는 제일 원인이 무엇이냐가 매우 중요하다.

바라문교에서는 제일 원인이 창조주인 브라흐만이라 주장했고, 사문들은 다양한 요소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바라문교에서는 세계가 브라흐만의 전변이라 했고(轉變說), 사문들은 다양한 요소들의 집합이라고 했다(積聚說).
이들의 주장처럼 세계가 불변의 자기 동일성을 지닌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두 가지 주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바라문교도와 사문들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이들이 주장한 행위의 주체인 자아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 이유는 인지하거나 행위 하는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조건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라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선형적인 인과율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모든 것들은 상호의존관계에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를 일컬어 ‘연기법’이라고 한다.

연기법이라는 상호인과율에서는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 등을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화된 별개의 실체로 보지 않고 행위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본다.

칼루파하나 박사가 지은 <싯다르타의 길>(재연스님 역)에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은 다양한 조건에 의지하여 발생된다. 새싹은 종자의 번식력과 유효한 습기, 흙의 정기에 의존하여 발생한다.
종자에서 움이 텄을 때, 우리는 새싹을 발생시킨 배경을 살펴보고 이러이러한 조건들이 싹을 틔웠다고 말한다. 만일 싹이 틔워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러이러한 조건이 결핍되었으며, 따라서 싹이 띄지 않았다고 단정한다. 이것이 바로 의존적 발생의 원리, 즉 연기의 법칙이다.
이것이 존재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소멸함으로써 저것이 소멸된다. 이것이 바로 사물의 본성이 생성되는 방식이다.”


2. 인드라망의 생태계

부처님의 말씀처럼 생명의 본질은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에 있다. 따라서 이 세계는 인드라망(因陀羅網), 즉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여러 조건의 연쇄적인 그물 망으로 표상 된다.
인드라망이란 제석천이 머물고 있는 궁전을 장엄하고 있는 망(網)을 가리키는데, 이 망(網)의 각각의 코에 달려 있는 보주(寶珠)들은 저마다 다른 모든 보주의 그림자를 비쳐 무한히 교차 반영된다.

이처럼 생태계는 생명의 그물(web of life)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관계들의 연결망(network) 속에서 상호관련 되어 있다. 따라서 어떠한 생명이든 원래부터 타고난 자기 고유의 불변적인 어떤 것(본질, essence)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적 인연에 의한 잠정적인 어떤 것이다.

린 마굴리스와 도리언 세이건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란 책을 통해,

“생물은 자기 완결적이고 자율적인 개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생물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공동체이다. 우리는 숨 쉴 때마다 느리기는 하지만 역시 호흡하는 생물권의 나머지 생물들과 연결된다”고 했다.

여기 한 알의 콩이 있다고 가정할 때, 이 콩은 종자인가? 아니면 열매인가? 결론을 말하면 이 콩은 종자이자 열매인 것이다.

의상스님은 <법성게>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3. 나와 우주는 한 몸

모든 생명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를 사대(四大)라 한 다. 사대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을 말하는데, 이는 곧 견성(堅性), 습성(濕性), 난성(煖性), 동성(動性)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곧 사대의 요소가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음을 가리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중함만 알고 사대의 소중함은 모르고 있다. 자신이 곧 사대임을 깨닫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우선 사대 가운데 물에 관해 살펴보자. 물은 생명체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단세포 생물부터 약 10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된 인간까지 예외가 없다. 35억 년 전 원시바다에 있던 호기성 원핵생물도 물과 이산화탄소로 광합성의 재료를 얻었다. 호기성 원핵생물은 현재 생명체의 모든 세포 속에 존재하는 미토콘드리아의 조상 격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물이 없으면 생물이 생겨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물의 여러 가지 특성을 살펴보면 물은 생명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생명체가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은 암모니아 다음으로 비열이 큰 물질이다. 물의 온도를 올리는 데는 높은 열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외부 온도가 변하더라도 물은 쉽게 온도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물이 주성분인 생물체도 외부 온도가 올라가거나 내려가도 그것의 영향을 덜 받고 일정한 체온을 유지 한다.

생명유지의 기본은 ‘항상성(恒常性)’이다. 외부 환경의 변화가 있을지라도 체내 조건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체의 체온 조절에도 물이 중요하다. 물 1그람을 수증기로 바꾸는 데는 약 500칼로리의 기화열이 필요한데, 더울 때 적은 땀이 증발하면서 많은 열을 빼앗아 가므로 체온을 쉽게 내릴 수 있다.

물의 비중이 섭씨 4도에서 가장 무거운 것도 의미가 크다. 대부분의 물질은 온도가 내려갈수록 무거워지지만 물은 4도에서 가장 무거워졌다가 온도가 떨어지면 도리어 가벼워진다. 그래서 물이 0도에서 얼어 얼음이 되면 가벼워지면서 물 위로 떠오르게 된다.
물이 표면부터 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얼음이 물보다 무거웠다면 호수나 강바닥이 죄다 얼어붙을 뻔했다.

물은 다른 어느 액체보다 점도가 낮다. 물이 끈적끈적하고 걸쭉했다면 피가 모세혈관 속을 흐르지 못했을 것이다. 건강하려면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한다. 그것은 피의 점도를 낮춰 잘 흐르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어느 용매(溶媒)보다 소금을 잘 녹이는 것도 생명체에 중요하다. 소금은 세포막의 대사에서부터 신경에서 일어나는 흥분 전달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지구에 있는 물 가운데 민물(담수)은 고작 2.5%(나머지는 바닷물)에 지나지 않고, 그것도 빙하나 지하수로 묶여 있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물은 0.0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유엔은 2006년 3월 16일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개막된 제4차 물 포럼을 앞두고 ‘물-공유된 책임’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584족의 방대한 이 보고서에는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물 부족, 수질오염, 홍수피해 등 다양한 물문제가 담겨 있다.
이보고서는 특히 “21세기 들어 물 분쟁이 에너지 분쟁보다 많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2030년이면 전 세계 30억 명이 물 부족을 겪을 것이다. 현재도 세계 인구의 20%인 11억 명이 더러운 물을 마시고 있다.”
“물 공급의 양극화도 심각해져 미국과 아프리카 잠비아의 1인당 물 소비량은 120배 이상 차이가 난다.”

‘세계 물의 날’인 3월 22일까지 계속된 이번 포럼에는 세계 각국의 정부 관리와 전문가, 비정부기구 관계자 1만여 명이 참석해 물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유엔 보고서는 지난 세기 세계 인구는 2배 증가한 반면 물 사용량은 6배나 늘었다고 밝혔다. 인구 증가에 맞춰 2030년까지 세계 식량공급이 현재보다 55% 늘어나면 물 사용량은 더 급격히 증가해 30억 명이 물 부족을 겪을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11억 명(세계 인구의 20%)이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하며, 인구 대국인 중국과 인도의 물 위생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물 공급 양극화도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1인당 하루 500L의 물을 소비하지만 아프리카 잠비아는 4.5L, 말리는 8L에 불과하다. 유엔의 최소 권장량인 50L에 훨씬 못 미친다.
이와 함께 전 세계 도시 인구가 현재는 50%에 못 미치지만 2030년에는 75%가 넘을 것으로 보여 도시 빈민층에 대한 식수 공급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물은 또 식량 및 공업 생산과도 직결된다. 따라서 물을 확보하려는 국가 간, 지역 간 갈등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지구촌에서 갈등이 심각한 곳은 요르단 강과 나일 강이 흐르는 지역이다.
1967년 제3차 증동전쟁의 한 원인은 시리아가 요르단 강 상류에 댐을 건설하려 한 데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집트 수단 등 아프리카 8개국의 나일 강 쟁탈 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터키와 시라아, 이라크는 유프라케스 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중국과 인도는 브라마푸트라 강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5만에서 30만 명의 희생자와 250만 명의 난민을 초래한 수단 다르푸르 대학살도 물 부족이 한 원인이다.
2개국 이상을 지나는 국제 하천은 50개국에 241개이고, 세계 인구의 40%가 인접국의 물에 의지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경쟁적으로 댐을 쌓아 물을 확보하려는 나라 간 경쟁으로 강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수자원이 급속히 고갈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물뿐만 아니라 우리가 낭비하고 있는 종이를 놓고 보더라도 그러하다. 따라서 한 장의 종이가 곧 우주임을 알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 까닭은 한 장의 종이가 만들어지려면 우주의 모든 것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모여 한 장의 종이로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다른 모든 것을 자신의 몸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다루어야만 한다.

<법구경> ‘올바름의 장’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사람은 결코 위대한 성자가 될 수 없다. 이 모든 존재에게 연민의 마음을 느끼는 사람, 그 분이야말로 위대한 성자가 아니겠는가”라 하셨다.


4. 생태계 위기의 극복 방안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목숨은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있다고 하셨다. 즉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사이에 목숨이 달려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호흡과 같은 어순으로 사용되는 말이 있는데, 곧 매매(賣買), 수수(授受), 거래(去來) 등이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 팔고 삼, 주고받음, 가고 옴이다.
이 말들의 공통적인 숨겨진 의미를 살펴보면 ‘받기 전에 먼저 주어야 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생각해 보자. 모두가 받기 전에는 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느 누가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두가 받기에 앞서 먼저 주려고 한다면 저절로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바로 깨달아 물과 공기와 토양을 이용하기에 앞서, 먼저 그 생명을 살리는 데 관심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중중무진으로 얽혀 있는 깊은 인연을 살펴 볼 때, 내가 살고자 하면 다른 생명들도 잘 살 수 있게 해야만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생태계를 파괴하거나 교란하지 말고 영구 보존해야만 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이치(不二)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생태계 문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은 생활형편이 어려우니 ‘좀더 풍족해지면 생태계문제에 신경 쓰겠다’ 거나, 남들이나 후손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편하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공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지금 보다 나은 생태환경을 물려줄 수 있도록 보존하고 아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최소한 지금 우리가 누리는 만큼이라도 누릴 수 있도록 유지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이 시대의 빈부간, 지역간, 국가간의 문제로만 보고 해법을 찾기보다는 미래세대와 세대간의 형평과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도 기우려 나가야만 한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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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발생에 대한 공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으며 공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자동차 한 대를 놓고 보면 차는 차로써의 이름이 있고, 차로써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은 차의 낱낱의 모든 부품들이 인연 따라 잘 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에 인연 따라 잘 조합되어 있지 못하고 바퀴 따로, 운전대 따로, 엔진 따로, 모든 것이 따로 따로 다른 공간에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을 보고 ‘자동차’라고 이름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한 공간에 그것도 반드시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낱낱의 부품들이 서로 서로를 의지하고 연하여 잘 모여 있을 때에만 자동차로써의 존재 가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자동차는 각각의 부품들이 서로 서로 의지하여 너트는 볼트에 의지하고, 볼트는 너트로 말미암아 함께 붙어 있게 되고 그런 수많은 상의상관적인 의존관계 속에서만 자동차는 이 한 공간에 조화롭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존재의 발생에 대한 공간적인 연기의 표현으로 본다면,‘볼트가 있으므로 너트가 있고’‘너트가 있으므로 볼트가 있으며’, ‘타이어가 있으므로 타이어휠이 있고’‘타이어휠이 있으므로 타이어가 있고’, ‘엔진이 있으므로 미션이 있고’‘미션이 있으므로 기어가 있고’,

이와 같은 자동차를 이루는 모든 부품들이 서로 서로 ‘~말미암아 일어나는’연기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동차의 모든 부품 하나 하나는 서로 떼어내려고 해도 떼어낼 수 없는 관계이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함으로써만이 한 공간에 자동차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동차는 자동차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부품 하나하나가 연기로써 모여 인연화합을 이루어야지만 자동차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형성이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연기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바른 관계성을 유지해야지만 존재되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 뿐 아니라 존재가 이루어내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 사람을 흉 보고 뒷담화를 하게 될 때 A라는 사람은 전혀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이 없는 줄 알고 화장실에 가서 험담을 했는데 알고 보니 화장실 안에서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면 A라는 사람은 몹시 기분이 상할 것이다. 똑같이 A라는 사람에게 욕을 했지만 그 공간이 어떤 공간이었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껄끄러운 인연관계가 될 수도 있고, 원수 같은 앙숙이 될 수도 있지만, 또 어떤 공간이었느냐에 따라서 그 험담이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 또 같은 험담이더라도 친한 친구끼리의 허물없는 자리에서 하는 것과 맞선을 보는 자리나, 사업적인 자리에서 하는 것과는 크게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상황도 공간적으로 어떤 조건과 원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교통사고가 나는 상황을 보더라도, 졸음운전으로 중앙선 침범을 했을 때 마침 그 공간에 상대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가 없었다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만약 그 순간에 그 공간에 상대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가 있었다면 큰 사고가 나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연기의 공간적 이해로 본다면 ‘졸음운전이 있으므로 중앙선 침범이 있고’‘중앙선 침범이 있으므로 사고가 있고’‘사고가 있으므로 죽음이 있다’그러나 상대 차선에서 오는 차가 없었다면 이 연기는 이런 비극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저홀로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함께 하고 있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법칙은 같은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존재방식이 상호의존적이며 상의상관적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숨을 쉬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만약에 공기가 없다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기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 공기는 숲과 나무가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숲과 나무가 없다면 머지않아 생명은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나무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숲이 있으므로 내가 있는 공간적인 연기법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뿐인가. 태양이 없어도 살 수 없으며, 물이 없어도, 흙이 없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태양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물과 흙이 있으므로 내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쌀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농부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논과 밭이, 과일과 채소가, 시내와 강이, 호수와 구름이, 정치인과 경제인이, 도매상인과 소매상인이, 옷과 집이, 옷 만드는 사람과 집 짓는 사람이, 나아가 이 우주의 일체 모든 것들이 있으므로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우주의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존재가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를 키워내며,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는 상호의존적인 연기의 법칙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자연이 긴밀한 상호의존과 상의상관 속에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인간들은 인간과 자연을 마치 서로 다른 존재인 것 처럼, 전혀 상관이 없는 것 처럼 자연에 대한 대대적인 훼손과 파괴를 자행해 왔다. 자연의 파괴와 훼손 위에 기초한 개발과 발전, 산업화와 도시화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인간이 자연을 파괴한 만큼 자연은 고스란히 인과응보를 인간에게 되돌려 주고 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오늘날의 전세계적인 환경오염 아니 환경재앙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것이 모두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자연이 있으므로 인간이 있다’는 연기의 법칙을 모르는 어리석음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유럽이며 선진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연환경은 그대로 두고 후진국의 자연을 파괴시켜 온 그 기초 위에서 자신들의 행복을 세우려고 했지만, 결국 환경재앙은 후진국만이 아닌 전세계적인 대재앙이 되고 있다. 자신들의 숲은 살려두고 저 브라질이나 아프리카의 밀림을 대규모로 파괴하고 있지만 결국 지구 전체의 살림부족으로 나타나 지구온난화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의 세계에서 본다면 전 세계는 모두가 한생명이며 공동운명이기 때문에, 아프리가의 밀림이 있어야 우리의 숲이 있고, 숲과 자연이 있어야 우리가 마실 공기가 있고, 맑은 환경이 있어야 우리의 생명의 터전이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서로 다른 남남이 아니고, 적이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키워주고 도움을 주고 받는 상호의존, 상의상관이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의 숲이 사라자고 사막이 늘어나는 일이 결코 중국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곧 황사로써 한국과 일본 그리고 많은 나라에 직접적인 피해를 가져오고 있다. 중국의 숲이 있어야 한국의 맑은 자연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밥을 먹을 수 있어야 내가 굶지 않을 수 있고, 중동에 평화가 있어야 우리나라에도, 내 안에도 평화가 깃들 수 있으며, 브라질의 아마존이 있어야 나에게 맑은 공기가 있고, 전 세계적인 자연환경의 보호가 있어야 우리의 아름다운 미래가 있을 수 있다.

연기법에서는 온 우주가 이와 같이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나비효과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우주의 어느 한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대로 다른 모든 이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둘째,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발생에 대한 시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으며 시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공간적인 자동차의 연관관계를 살펴보았는데, 시간적인 의존성과 관계성을 살펴본다면 자동차의 역사를 거슬러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자동차가 있고, 그 자동차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공간적인 부속들의 인연화합의 결합에 따라 자동차로써 존재하고 있지만, 사실 그 자동차가 이렇게 만들어지기까지는 단순한 공간적인 결합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자동차 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하여 지금의 자동차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누군가가 둥근 바퀴를 만들었을 것이고, 연이어 수레가 만들어 졌을 것이며, 처음에는 소나 말 등의 가축이 끌기도 했을 것이고, 이윽고 증기 자동차를 거쳐 가솔린 자동차 등의 단계별로 발전을 이루어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적인 연관관계를 볼 때, 지금의 자동차는 어느 날 갑자기 저홀로 생겨난 것이 아니며, 오랜 역사를 두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탈 것으로 발전해 결국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즉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연기의 법칙에 따라 둥근 바퀴가 생함으로 수레가 생했고, 수레가 생함으로 우마차가 생했고, 우마차가 생함으로 증기 자동차가, 증기자동차가 생함으로 가솔린 자동차가, 가솔린 자동차가 생함으로 오늘날과 같은 자동차가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가 발생하는데는 오랜 세월 그것이 발생하기까지의 수많은 다양한 노력과 조건과 원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듯이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시간적인 여러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시간적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나는 나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어머님과 아버님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부모님도 마찬가지로 당신들의 아버님과 어머님이 계셨기에 존재할 수 있었고, 또 그 부모님의 부모님, 그 부모님의 부모님까지 계속해서 거슬러 가다 보면 수없이 많은 조상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로부터 20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209만 명, 30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21억이 넘는 조상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니, 엄밀히 말하면 이 수많은 조상님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 빠진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사람도 그 사람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 때인가 저 위의 조상님들 대에서는 부부였을 수도 있고, 형제나 부자지간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한 뿌리요, 한 가족, 한 생명이 아닌가. 이렇게 보았을 때 역사의 모든 인물들은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씨줄 날줄로 서로 서로 얽혀 있을 것이고, 그 모든 이들의 삶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지금의 나란 존재는 시간을 거슬러 일체 모든 과거의 조상들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 부모님이 생함으로 내가 생했고, 할아버님이 생함으로 부모님이 생했고, 증조 고조 할아버지가 생함으로 할아버님이 생했으며, 나아가 수많은 조상님들이 생함으로 지금의 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현대 자연과학의 진화론에서 보면 수많은 포유류가 있지만 그들의 두개골을 이루는 뼈의 수나 기능과 구조 등이 모두 같으며, 목뼈를 놓고 보더라도 그 개수가 기린과 같이 목이 긴 동물이나 사람을 비롯한 목이 짧은 동물이나 모두 같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고래의 앞지느러미나 포유류의 앞발, 그리고 새의 날개 등도 지금은 서로 다른 기능과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그 기본형은 같다고 한다. 이것은 이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적응하며 살다보니 자신의 신체 구조와 기능이 바뀌었을 뿐이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모두 같은 조상에서 유래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상의상관적인 시간적 연관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존재들과 인간 사이에도 시간적인 연기의 관계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존재의 발생에 대한 시간적인 연기법의 측면에서 볼 때, ‘조상이 생함으로 내가 생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조상 안에는 온갖 동물들의 조상도 포함되며, 나아가 인간과 동물들의 조상이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조상이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결국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독자적으로 홀로 태어나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시간적으로 수많은 생명들의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환경문제라는 것도 과거의 수많은 개발과 발전으로 인한 자연의 파괴가 결국 오늘날의 환경재앙과 기상이변 등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산업혁명으로 인해 촉발된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각종의 개발과 발전이 생겨남으로 자연환경의 파괴가 생기고, 자연환경의 파괴가 생김으로 기상이변이며 지구온난화 등의 환경재앙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며 상황은 시간적으로 수많은 다른 존재와 상황들과의 상호작용과 연관관계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