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나그네 비둘기는 한 때
북미 대륙에서 가장 흔한 들새였다.
나그네 비둘기의 큰 떼가 지나가면 하늘이 어두워질 정도였으므로,
아무도 이 새가 멸종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미국 개척시대가 시작되면서
나그네 비둘기의 수난은 시작되었다.
이 새는 아주 고기 맛이 좋고
대평원에서 큰 무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부 개척자들의 식탁에서 아주 인기있는 메뉴가 되었다.

미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철도가 놓이면서
이 새는 철도 건설 노동자를 위한 식사 뿐만이 아니라,
상품화되어 이웃 여러 마을로 신속하게 공급되었다.

이 나그네 비둘기의 포획을 위해 수천의 전문 사냥꾼이 고용되어
기관총을 비롯한 여러 화기를 사용하여 남획하기 시작했다.
이 새는 큰 나무에 수십 또는 수백씩 무리를 지어
새끼를 치는 생태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더욱 남획하기 쉬웠다.

사냥꾼들은 어린 새나 늙은 새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포획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855년 뉴욕의 한 거래처에서
한 사람이 하루에 18,000마리의 비둘기를 매매한 사실이 있고,
1869년 한 해 동안 한 지역에서
750만 마리의 나그네 비둘기가 포획된 기록도 있다.

이러한 남획으로 인해서 나그네 비둘기의 수는 격감하여
19세기 후반에는 큰 번식 집단을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희귀한 종이 되어 버렸다.

1894년 마지막 둥지가 발견되었으며,
1914년 신시네티 동물원에서 최후의 한 마리가 죽음으로써
이 새는 멸종되었다.

[지속가능한 사회와 생태학] 중에서...

지구는 공룡을 포함해 식물과 동물 수천종이 절멸한 6천500만년 전
소행성 충돌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생물 종들을 잃어가고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전 세계 포유류의 약 4분의 1, 양서류의 3분의 1,
조류의 10분의 1 이상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기후변화 요인 한 가지만으로
앞으로 50년 안에 추가로 생물종 15-37%가
멸종 직전으로 몰릴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추산한다.

세계환경보존연맹은 지난 5월 멸종 위협에 처한 생물 종의 수가
1만6천119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백상아리는 지난 50년 동안 최대 95%까지 감소했다.
북극곰은 앞으로 45년 간 개체 수가 30%쯤 감소할 전망이다.

사하라사막 지대에서는 무분별한 사냥과 서식지 파괴로
다마가젤의 수가 80%나 줄었다.
아프리카 민물고기의 4분의 1도 인류의 활동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

과학자들은
"중대한 생물다양성 위기 상황으로 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물다양성은 여전히 저평가되고 있고,
민간과 공공정책 결정시 적절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며
"생물다양성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적인 조직을 창설함으로써
과학과 정책 사이 간격을 시급히 메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겨레 신문]

지금도 매일 70~150여 종의 생물이
소리없이 아무도 모르게 멸종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 년이나 한 달이 아니라
하루에 말이지요.

생물이 멸종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몸이 꺼져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요.

위에서 나그네 비둘기가 없어진
그런 방식으로, 혹은 그보다 더 잔혹하거나, 미묘한 방법으로
수많은 종의 생물들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뿐 아니지요.
이 글을 읽고 있는 오늘 하루,
2만 헥타르(약 6천5십만평)의 사막을 만들어내고,
8,600만 톤의 비옥한 땅을 침식시켜 파괴하고,
1억 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브라질 아마존강 유역의 열대우림은
우리가 좋아하는 햄버거 등의 패스트푸드용
쇠고기를 생산하기 위한 목초지를 만드느라
매년 미국의 테네시 주보다 더 넓은 삼림지역이
차례 차례 불태워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아랄해는 목화재배를 위한 관계용수로 인해
빠르게 사막화 현상을 보이고 있어
해안선이 하루가 다르게 멀어져 가고 있고,

뭐 이런 예를 말로 일일이 다 적으려면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고,
내 평생 해도 모자랄 판이니
가슴도 아프고 그만 적도록 합니다.

우리의 집착,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들의, 인간들의 집착과 욕심이
이 모든 무서운 일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훗날 우리가 받아야 할
공업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업이니까
나 혼자만 환경 보존하고, 절약하고, 아끼고,
자연을 사랑한다고 될 일이 아니니
그냥 대충 살겠다고 한다면
그 공업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지만,

나 먼저 아끼고 절약하고 나누고
보존하며 자연을, 생명을 내 몸 아끼듯 사랑하고
동체의 자비로써 대한다면
내 업은 내 업대로 청정함을 유지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기상 이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업이 청정한 사람은 그것을 빗겨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폭풍우가 몰아친다고
다 죽는 것은 아니고, 다 과보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업에 따라 죽기도 살기도 하고,
업에 따라 자연의 갚음을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업이란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자연과 나와의 업이 청정하면
내가 자연을 어쩌지 않은 것 처럼
자연도 나를 어쩌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자연을 더럽히고, 오염시키고, 펑펑 써대며,
개발과 발전을 이유로 파헤치고 꺾고 뚫고 해 버린다면
자연 또한 그 업을 기억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업을 청정히 한다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자연과의 업이 청정해 진다면
그것이 바로 청정한 자연, 청정하고 지속가능한 지구를 만드는데
더없이 중요한 실천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숫타니파타]의 게송이 떠오릅니다.

악마가 말했다.
"자식 있는 자는 자식 때문에 기쁘고,
소가 있는 자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인간이 소유하고 집착하는 것은 기쁨이다.
집착할 것이 없는 자는 기뻐할 것도 없다."

그러자 붓다가 대답했다.
"자식이 있는 자는 자식 때문에 근심하고,
소 있는 자는 소 때문에 근심한다.
실로 인간의 근심은 무엇인가에 집착하는데서 생겨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자는 근심할 것도 없다."


Posted by 법상

 

 

          세상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평생가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자연의 소리는 아주 작고 여리기 때문에 아무나 들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하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그 살뜰한 소리는 고요한 법계法界의 울림과 모든 존재 내면의 쩌렁쩌렁한 깨우침을 담고 있다.

  그러나 보통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은 세상사에 찌든 온갖 소음들만 귀 고막이 터져라 듣고 산다. 세상의 소음에 익숙해지다 보면 작고 여린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 본래의 청음 능력을 상실한다.

  내 삶 속에 자연이라는 경이와 축복이 들어오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매 년 반복되는 계절을 그냥 저냥 흘려보내다가 어느 순간인가 자연 속에 깃들어 자연 그 자체가 되는 듯한 심연深淵의 떨림을 느끼면서부터 내 삶에 자연은 더없는 신비요 스승이며 벗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리산 종주길에 올라 하염없이 떨어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걷다가 문득, 아주 문득 자연의 가녀린 그러나 청청한 소식을 들었다. 그 작은 자연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마치 지리산 전체가 아니 이 우주가 그대로 내게 속삭이는 듯, 침묵 속에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러면서 자연은 둘도 없는 내 벗이요 도반이 되었다.

  우리들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 육근六根이라는 것이 본래는 세상의 작고 여린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고 우주와 자연의 작지만 커다란 울림과 공명할 수 있었지만, 감각적이고 자극적인데 서서히 익숙해지다 보니 그 본래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한다.

  동물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공인까지 받았다는 호주의 트리샤 맥카라는 분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녀의 말을 빌자면 ‘인간은 원래 텔레파시 능력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언어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이 능력은 퇴화돼 버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탄트 메시지』에서도 참사람 부족 사람들은 ‘인간은 본래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하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하며 실제 생활에서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고 거짓을 없앰으로써 부족 사람들은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자유로이 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그뿐인가. 『물은 답을 알고 있다』나, 『식물의 정신세계』같은 책에서는 물이나 식물 또한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받고 영향을 받는다는 기록과 과학적인 증명을 담고 있다.

  그 뿐인가. 얼마 전에 지진해일이 있었을 때 동물들은 미리 알고 피했다고 했고,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원시적으로 사는 원시 부족인들 또한 미리 피함으로써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동물들이나 원시 부족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며, 자연의 미세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자들이다. 분명 대자연은 그러한 큰 피해에 앞서 그 어떤 힌트를 보냈을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자들은 몸을 피했지만 듣지 못한 자들은 고스란히 그 아픔을 감당해야 했다. 자연에 깃들어 삶을 살 때 대자연은 어머님 품처럼 우리를 품어준다.

  이처럼 사람들은 본래부터 사람들 서로간 뿐만 아니라 동식물이나 자연의 무정물과도 미세한 마음의 공감과 대화를 텔레파시로써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을 만큼 감성적인 예민한 감각이 발달되어 있었고, 자연 속에서 신의 소리,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순수하고 청명했다. 그러나 인류역사 속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그 모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건 우리 스스로 작고 미세한 감각의 소중함을 버린 채 외부의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에만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마음을 돌이켜 정신을 내면의 미세한 느낌에 집중하고, 외부의 소박한 자연에 집중하며 관찰할 수 있다면 다시금 그 본래의 능력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봄이 오니 한겨울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그러면서 봄나물이며 봄꽃들이 얼마나 신이 나 있는지 모른다. 나도 처음엔 수필가들이 얘기하는 눈 녹는 소리며 바람 스치는 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서걱이며 온산을 놀라게 한다는 그런 표현들을 그저 시적인 표현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귀를 닫아 놓고 살아서 그렇지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정말 그 소리가 성성한 깨우침으로 귓전을 맑게 스치운다.

  조용한 가을 낙엽이 떨어지면 뒷산 전체가 서걱이고, 산 속 나무 그늘에 덥석 누워있다 보면 바람 지나가는 소리가 사람들 지나가는 소리만큼이나 선명하게 들리고, 초봄의 산사에는 눈 녹는 소리가 꿈틀거리듯 세속에 찌든 귀를 맑게 씻어준다.

  이러한 자연의 소리는 아주 작은 것이라 사소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건 결코 작은 소리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런 작은 것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깨어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만큼 내 마음이 맑게 비워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연의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에 복잡한 소음이 너무 많기 때문이고, 해야 할 일들로 마음이 꽉 차 있기 때문이며, 또 머리 속은 정신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내 안이 맑게 비어 있어야 비로소 이 법계의 작지만 우주를 울리는 이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듣지 말아야 할 것들만 듣고 사는 우리이고,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들만 보고 사는 우리이며, 먹어야 할 것은 먹지 않고 먹지 말아야 할 것들만 먹고사는 우리들이다. 그러니 우리의 육근六根인들 어디 좀처럼 온전할 수 있겠는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잘 다스려야 몸도 마음도 경쾌하게 추스릴 수 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육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대상인 육경六境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작고 소박한 데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하고, 자연이 가져다주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고요하게 앉으면 내 안에서 울려나오는 쩌렁쩌렁한 속 뜰의 메아리를 들을 수도 있고, 이 우주의 작은 한 켠에서도 전 법계의 소리 없는 거대한 울림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마음을 맑게 비우고, 속 뜰의 소리며 대자연이 전해주는 맑고 밝은 소식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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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요즈음 들어
더욱 그런 생 각이 가슴을 칩니다.

사람이며 동식물
이 산하대지 자연 삼라 만상...
풀 한 포기며, 나무 한 그루
흙 한 줌에서 볼을 스치는 바람 에 이르기까지

이 추운 날 오후 따스한 햇살 한 줄기,
저녁 나절 절 앞마당으로 고개를 숙이는 산그림자며,
저 산 너머로 수 줍은 듯 붉게 그려지는 노을
절 앞마당에서 꼬리를 흔들며 뛰어노 는 심안이 또 마음이...

이 모든 내 주위의 식구들이
나와 한 가 족, 한 몸이구나 하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의 손길이 범접 하지 않은
그냥 가만히 내 버려 둔 것들이
가장 생기 발랄하게 살아 있구 나 느낍니다.

세상의 법칙 대로
있는 그대로 내버려 진 것들에게서
그 어떤 살아있는 스승 같은 그 무엇을 느끼게 됩니 다.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은
애쓰 지 않고, 억지 부리지 않고, 자기 생각 내세우지 않고
대 자연의 순 리에 모든 것을 맡기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 는 것일 겁니다.

그러고 보면
나를 포함한 우리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아주 여법하게 잘 살고 있는
우리의 많은 자연 식구 들을
너무 못살게 굴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사람의 손길이 타게 되면
함께 사람의 욕심도 타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러움의 맛을 잃게 될 것 같습니 다.
사람들이란
자연을 대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 고 바라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있는 그대로 충분히 본다는 것은
자연을 충분히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 순간 아무런 분별 없이 자연 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연을 바라볼 때
어떻게 써먹 을까 하는 궁리만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용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하는...

그런 것 이외에
그냥 자연을 바라볼 수 는 없을까요.
아무런 분별도 가지지 않고
아무런 판단이나 이용가치를 따지지 않 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말입니다.

가만히 발길을 멈추고
언제나처럼 사무 실 앞을 지키고 서 있는
한 그루 작은 나무를 바라본 적이 있으신가 요?
그 나무에 등을 기대고 가슴을 기대에 본 적이 있는지 요.

한 여름에 땀을 식히려고 그늘을 찾는다거 나,
내 편리에 의해 이용하려는 마음으로 찾는 것 말고
있는 그대 로의 자연을 평화로운 마음으로 만나 보셨는지를 말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자연과 진정으로 만날 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이기심이나 이용가치를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만나는 것 말입니다.

그랬을 때
우린 비로소 사람과 만나는 법도,
다른 모든 세상과 만나는 법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랬 을 때
아마도 우린 비로소
모든 것들과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 아 닐까요?

눈귀코혀몸뜻으로 만나는
모든 감각적 인 대상을 대할 때도
그저 있는 그대로
아무런 판단이나 분별 없 이 순수하게 바라봐 주세요.

그냥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냥 그 렇게 보는 것이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보는 대 상과 보는 이가 따로 따로가 아니게 됩니다.
둘은 따로 나뉘지 않는 순수한 하나가 되고
또한 순수한 사랑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 다.

'바라보기'
이것은 이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가 소박하게 그러나 진지하게 실천할 수 있는
아마도 가장 소 중한 수행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과 하나될 수 있고,
풀 한포기 작은 자연과도 하나될 수 있으며,
딱정벌레와도 하나될 수 있고,
또한 많은 사람들과 하나될 수 있고,
진리와 하나될 수 있는...
어쩌 면 유일할 지 모를 실천행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이 바쁜 세상 속에서
바쁨 속에 내몰려 이리 저리 쫒기지만 말고,
잠시 짬이라도 내어
텅 빈 맑은 시선으 로 세상을 바라보세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일 지 모릅니다.

바쁜 걸음 잠시 멈추세요.
들고 내는 숨 을 바라보고,
걷는 걸음 걸음을 바라보고,
하루 종일 조잘 거리는 입도 한 번 바라보고,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몸도 바라보고,
원숭이처럼 늘 날뛰기 만 하는 생각들도 바라보고,

예전부터 사무실 청소하시던 아주머님 도,
매일같이 출퇴근 시켜주시는 버스 기사 아저씨도,
출퇴근 길에 스치 던 이름모를 눈에 익은 많은 사람들도,
회사 앞에서, 혹은 아파트 앞에 서 항상 마주치는 경비 아저씨 하며,
이따금씩 들리는 미용실, 슈퍼 마켓 주인 아주머님 또한

어쩌면 사소하다고 생각하고
별 관심 없이 스쳐 지나쳐 온 수 많은 이웃들에 대해서...
오늘은 좀 더 마음 을 모아
따뜻한 사랑을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아 주시길...

보도블럭 사이로 힘겹게 솟아난 작은 야생 풀도 바라보고
입사 때부터 있어왔지만
한 번도 관심어린 사랑으로 보지 못했 던 나무 한 그루도 보아주고,
집 뜰 곳곳에 피어오른 소박한 풀들에 서부터
저벅 저벅 뒷산으로 올라 시선 가는 곳곳 마음으로 바라보 고,

때때로 새벽 청청한 공기를 맞으며
산 위로 떠오르는 첫 햇살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퇴근길 서산위로 붉게 물든 노을도 충분히 보아주고,
사무실 한 켠에 외로이 서 있는 화분에 물도 줘 보고,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들은
또 우리 가 마음을 모아 관심 가져 주어야 할 것들은
내 눈과 마음에 밟히는 생명 있고 없는 모든 것들입니다.
어쩌면 아주 사소한 것들이지만
그 사소함이 나 자신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바라봄을 통해 느낄 수 있을 것 입니다.

참으로 바라보았을 때,
바라보는 나도 없고, 바라보는 대상도 없으며
좋은 대상도 싫은 대상도 없고,
옳은 것 도 그른 것도 없고,
오직 순수한 동체대비의 사랑과 지혜로움이
우리들 뻑뻑한 속 뜰을 맑게 적셔 줄 것 같습니다.
Posted by 법상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기본 법칙을 다른 관점에서 조금 더 확장해 보자. 이 법칙은 나아가 큰 것이 있으므로 작은 것이 있고, 옳은 것이 있으므로 틀린 것이 있고, 남자가 있으므로 여자가 있고, 깨끗한 것이 있으므로 더러운 것이 있고, 이 생각이 있으므로 저 생각이 있고, 생이 있으므로 노사가 있고, 중생이 있으므로 부처가 있고, 생사가 있으므로 열반이 있고, 이런 식으로 우리가 분별하고 있는 일체의 이원론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즉 크다 작다는 분별은 사실 고정적으로 크고 작은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큰 것이 있으므로 그것과 견주어 비교되는 작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키가 큰지 작은지는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결정되어지는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무인도에서 홀로 자라났다면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사람이라는 분별도 없었을 것이며,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키가 큰지 작은지,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똑똑한지 어리석은지 라는 일체의 분별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일체의 분별이 있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무언가 비교되고 견주어지는 다른 인연이 있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남자 여자라는 분별이 있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안 되고, 나라는 남자와 비교될 여자라는 타인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키가 작다는 것도 나보다 키가 큰 타인‘을 말미암아’ 작다는 분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양 극단의 분별은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연기되어진 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크다 작다거나, 남자다 여자다거나, 잘생겼다 못생겼다거나, 똑똑하다 어리석다거나 하는 두 가지 극단의 분별은 절대적이거나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 의지할 때에만 연기적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실체적 관념이 아니므로 공(空)하다고 한다.

또한 이런 양 극단의 분별은 끊임없이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무상(無常)이고, 그러므로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고정적인 자아적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키가 큰 사람도 농구 선수들 앞에 가면 작게 느껴지고, 키 작은 사람들 앞에서 있을 때 크게 느껴지는 것이듯이 인연따라 상황따라 변하는 것(무상)이며 그렇기에 ‘큰 사람’이라고 고정적으로 말 할 수 없다(무아)는 뜻이다.

이와 같이 양 극단의 분별로써 고정지을 수 없기 때문에 중도(中道)라고 한다. 즉 연기된 모든 것은 무상하고 무아이며 공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극단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항상 중도적인 치우치지 않은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한 사람을 보고 크다거나, 잘났다거나, 옳다거나, 혹은 작다거나, 못났다거나, 그르다거나, 그 어떤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도 인연따라 크거나 작을 뿐이고, 인연따라 선하거나 악할 뿐이며, 인연 따라 변해 갈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사람들을 볼 때 중도적인 치우침 없는 시선으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뒤에서 다시 언급하게 될 팔정도의 정견(正見)이다. 연기적인 시선이 바로 정견이며, 중도이고, 공과 무아, 무상의 바라봄인 것이다.

이처럼 연기적인 시각에서는 일체 모든 사람이 완전히 평등하며, 차별이 없어 높은 사람이라거나 낮은 사람이라거나, 능력 있고 없다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고 되지 않다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연기적인 시선에서, 또 깨달음을 얻으신 큰스님들의 시선에서 우리 모든 중생들은 똑같이 평등하고, 똑같이 사랑스러우며, 똑같은 존재감으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연기적인 치우침 없는 대 평등의 시선이 가능한 것이다.

옳고 그르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기법의 세상에서는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절대적으로 틀렸다거나 할 것이 없다. 옳고 그르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며, 연기적인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옳은 견해가 다른 나라에서는 그르게 나타날 수도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선이 다른 나라에서는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여인이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결혼하게 되어있고 그것이 옳은 이성관이지만, 예를 들어 무슬림은 한 남자가 네 명의 부인을 얻을 수 있고, 아프리카의 마사이족, 바쿠족, 간다족 등도 여러 아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부다처제와는 반대로 일처다부제인 곳으로는 티베트가 있는데, 티베트는 한 여성이 한 집안의 장남과 결혼하면 그 집안의 다른 형제들과도 결혼할 수 있고, 나이지리아의 하우사족 또한 자가(Zaga)혼인이라고 하여 남편과의 이혼 없이도 다른 남자와의 결혼이 가능하다.

이처럼 시대와 나라가 다르면 그곳의 문화나 풍습도 다르고, 성적인 윤리의식도 다를 수 있다. 옳고 그르다는, 선과 악이라는 것이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어느 나라건 어느 시대건 상관없이 다 똑같아야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서 보는 선악의 시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상호의존적이고, 상호규정적이며, 상황따라 달라질 수 있고, 시대나 나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선악은 연기적인 것이며 상의상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분법적으로 딱 나누어 진 것이 아니라 선이 있으므로 악이 있고 악이 있으므로 선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의존적이고 연속적으로 연결된 하나이다. 절대적인 선악의 차별이 있다면 거기에는 선에 대해 악을 배제하고, 강압하며, 미워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동반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남게 되지만 연기된 것으로 볼 때 선악은 유연하고 자율적이며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포섭할 수 있는 화합과 평화적인 윤리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전쟁을 볼 때 그 두 나라가 보기에는 서로가 극단적인 적이며 악이기 때문에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라는 이분법에 젖어 있음을 본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팔레스타인이 적이고 악이며, 팔레스타인들이 볼 때는 유대인들이 악이다. 그러나 한 발 떨어져 바라본다면 유대인이 있으므로 팔레스타인이 있고, 팔레스타인이 있으므로 유대인이 있는 것이지, 그 어느 한 나라가 선이고 다른 나라는 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어느 한 쪽에서 자신을 선이라고 생각하니까 상대방이 악이 되는 것이지 본래 선악이 정해 져 있지는 않은 것이다. 조금 예민한 문제이긴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이어져 왔던 종교전쟁들을 보더라도 내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나라는 절대선이고 타종교를 믿는 사람과 나라는 절대악인 것 처럼 규정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곤 했지만, 사실 그러한 두 종교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 현대에 와서는 그 두 종교가 모두 올바른 종교로써, 이 세상을 대표하는 종교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과연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모호해진다.

이것을 보더라도 본래부터 어느 종교가 선이고 다른 종교는 악이라고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상의상관적이며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난 것에 불과하다. 내 종교를 선이라고 규정하면서부터 타종교는 악이라는 규정이 생긴 것이니 상호규정적인 것이다.

이처럼 선악이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혹은 어떤 특정한 상황과 믿음 속에서 연기되어 발생한 것이라면 선악은 구체적인 상황을 떠나서 고정되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악은 연기된 것이고, 공(空)한 것이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것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처럼 선악이라는 분별이 연기된 것이기에 공하고 무상하며 무아라면 선악이라는 양 극단을 나누어 놓고 서로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따질 것도 없고, 이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선악의 양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은 위험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연기된 것이기에 양 극단을 내세울 것이 없으므로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이다.

중도적인 실천에서 본다면 선악으로 나눌 것도 없고, 어느 한 쪽은 옳다거나 다른 쪽은 그르다거나 하고 극단적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상황 따라 연기되어진 것이므로 사실은 고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선이라고 혹은 악이라고 낙인찍어 놓고 선이 악을 없애기 위해 폭력을 저지르는 것 또한 발붙일 수 없게 된다. 연기와 중도적인 관점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네가 없으면 내가 없고, 네가 존재함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전체적이며 동체로써의 자비로운 통찰이 진흙 속에 연꽃이 피어나듯 피어오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는 부유함과 가난의 양 극단의 삶은 양쪽 모두에게 온갖 사회적인 문제를 가져다 주고 있다. 이 세상 어느 한 쪽에서는 기아와 가난과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허덕이며 하루에도 5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이 3만 5천 명씩 죽어가는 마당에 또 다른 곳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비만으로 고민하고, 넘쳐나는 음식물 쓰레기로 고민을 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남한에서는 한 해 음식물쓰레기가 14조원에 달하는데 그 정도면 북한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양이라고 한다. 부자 나라는 부유해서 괴롭고, 가난한 나라는 가난해서 괴롭다. 선진국들은 개발과 발전으로 인한 온갖 환경문제들 때문에 괴롭고, 후진국들은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어서 괴롭다. 양 극단은 언제나 고(苦)를 가져온다.

이러한 양 극단의 문제는 연기적인 자각과 중도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양 극단의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극단을 지양하고 중도적인 삶을 실천할 수 있다면 양 극단의 고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한 나라는 스스로 만족과 청빈과 소욕을 바탕으로 한 동체대비의 자비사상으로써 가난한 나라에 나눔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남아도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만도 연간 15조원이상이 든다고 하고, 그 쓰레기로 인한 악취며 처리시 환경문제 등 온갖 부수적인 문제들도 만만치 않은 것을 생각했을 때, 스스로 조금씩 적게 가지고 적게 먹으며 쓰레기로 해치울 것들을 미리 가난한 나라들과 나누어 쓸 수 있다면 부유함의 괴로움도 가난함의 괴로움도 모두 함께 소멸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의 자각과 깨달음 그리고 소욕과 나눔의 실천적인 정신에 달려 있다. 이러한 소욕과 나눔의 정신의 바탕이 바로 가난한 나라가 없으면 부자 나라도 없고, 굶주리는 아이를 살리지 않으면 나 또한 사라지고 만다는 연기적인 철저한 자각인 것이다. 연기 중도적인 시선에서는 그들과 우리는 서로 의존하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 그들이 살아나야만 우리도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춘천 청평사 오르는 길에...]

비가 옵니다.
방안 널찍한 창 문을 활짝 열고
빗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습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기가 참 힘든데
오늘은 아침부터
우울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거친 파도처럼 밀려오다 밀려가다 그럽니 다.

나무들이며 들풀, 야생화들도
오늘은 한참 정신이 없어 보입니다.
저 녀석들 지금이 야 한참 정신 없다 보니
하늘에서 내리는 거친 비를 원 망할 지 모르겠지만
이런 역경이 자신을 더욱 강인하 게 만들어 준다는 걸
아마도 지금은 모를 겁니다.
비 가 그치고 햇살 쨍 하고 내려 쬘 때
그 때 조금씩 느낄 수 있겠지요.

이른 아침
저 숲 위로, 나 무 위로, 들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차 한 잔 생각도 나고
감성이 더 여리고 새록해 집니다.

저렇게 떨어지는 비를
그대 로 맞고 있는 나무들은, 저 숲의 생명들은
참 의연도 합니다.

절 주위는 얕은 산이라
온 갖 나무들이며 들풀, 꽃들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잠시 도 쉬지 않고 너가 지면 또 내가 피어나고
핀 꽃이 지 면 또 다른 꽃이 피고 그럽니다.

풀들도 처음 여린 잎의 생김새 와
한참 물이 올라 피어오른 모습은 전혀 달라요.
처음 엔 작은 풀이거니 했는데
비 한 번 오고 시간 조금 지 나고 나면
꼭 나무 처럼 쑥쑥 자라 나를 당황케 하는 녀석들도 있고,

처음엔 예쁘고 귀엽던 것들이
얼마나 생명력이 강하고 번식력이 강한지
무서울 정도 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기도 합니다.

채소밭에 너무 큰 풀들은 뽑아 주는데
한참 풀들을 뽑아주다 보면
뿌리가 얼마나 길고 굵 은 지
세상 위로 올라온 것의 몇 배 이상은 됨직한 뿌리를 보 면
섬짓 이네들의 생명력에 놀라고 두려움 마저 일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뽑아 낸다는 것이
어떨 때는 참 미안하기도 하고
저 녀석들도 다 이유가 있 어 피어오르는 것이고,
저렇게 당당한 뿌리를 만들었을 것인 데 하고 생각하면
풀 뽑는 일도 잠시 머뭇거리게 됩니 다.

그래서 될 수 있다면
풀 도 그대로 함께 자랄 수 있도록 내 버려 둡니다.
너무 커 서 채소들 키를 웃자랄 때가 되면
그런 녀석들만 뽑아서 옆에 놓아둘 뿐
될 수 있다면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저 채소들에게도 살아남기 위한 경쟁력도 될 것이 고,
그 경쟁력이 더욱 채소들을 생명력 있게 가꿀 것이 며,
또한 함께 자라주는 따뜻한 이웃이고
도반이 될 수 도 안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기도 합니 다.

이렇게 여러 가지 풀들이 함 께 자라고
이웃 풀들과 함께 경쟁도 하고
또 함께 살아가려고 서로 서로 도와 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자라난 채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실하고 열매가 적을 지 몰라도
그 생명력은 더욱 강인하며
실제로 병해충으로부터의 예방 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채소도 생명인데
우리 사람 들하고 사는 것이 다를 리야 있겠어요?
사람도 마찬가 지 아닙니까.
늘상 온실 속에서 자란 채소들 처럼
온갖 시련과 힘 겨운 경계를 당해 보지 못하고
늘 행복하게만, 늘 풍족하게 만, 늘 보호 속에서만 자란다면
그 사람의 내적인 생 명력은 빛을 잃게 되고 맙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실패 도 맛보면서 주춤주춤 거리다가
그래도 딱 버티며 일어서기 를
몇 번이고 반복할 수록
우리들의 내적인 삶의 빛 은 더 생기를 띨 수 있는 법이지요.

본래부터 아무리 큰 시련이며 역경이라도
꼭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만큼만 오고
또 꼭 필 요한 바로 그 때 오지
내가 이겨내지 못할 일이
도저 히 이겨내지 못할 때
찾아오는 법은 없다고 그럽니 다.

채소도 키워 보니까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처음에 자랄 때 오이에 진딧물이 자꾸 붙길래
손으로 떼어주고 떼어주고 하다가
어디서 주워 들은 얘기를 듣 고 담뱃재 우린 물도 줘 보고
그래도 그래도 끊임없이 끊 임없이 진딘물이 생기데요.

그래서 그래 너도 먹고 살아야 지 싶어
그냥 내 버려 두었지요.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진딧 물도 양심은 있는지
전체 오이를 다 괴롭히는 건 아니고
그 중에 부실한 몇몇 오이에만 가서 붙어 있으니
그래 도 얼마나 고맙나 싶어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었지 요.

우리 사람들이야 어디 그럽니 까.
될 수 있으면 좋은 것, 많은 것 더 가지려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최대한 많은 양을 모아 축적하려고 안달이 지
양심이라는 것이 우리들 욕심 앞에 맥을 못 추지 않아요.
진딧물에게도 배울 점이 있는겁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보니까
진딧물이 많이 붙은 오이에만 개미들이 모여요.
아직도 긴가 민가 하지만
아마도 개미들이 진딧물을 잡아 먹는 가 봅니다.
그러더니 며칠 전 부터는
무당벌레들도 몇몇마리 나와 서는
진딧물 사냥에 나서 주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내가 할 일 을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잘 해 주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다가 진딧물 싫다고 농약 막 쳤어 봐요.
그 농약에 개미들 도 무당벌레도 다 죽었을 거 아닙니까.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지 요.
시련과 역경이, 힘겨운 일이 생기면
그거 이겨내려고 발버둥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그냥 주저 않아 버 리지만,
그 상황이 아무리 최악이다 싶더라도
대자연 부처 님의 숨결에 일체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 수 있다면
분명 대자연 우주 법계에서는 해답을 내려 줄 것입니 다.

아무리 관찰해 보아도
자연 은 참으로 신비롭고 또 정확하다는 걸 느낍니다.
정확하 게 그 일이 바로 그 때 정확하게 일어나고 있어요.
필요 한 일이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생겨나는 겁니 다.

우리들 인간들 머리로
그 위대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려고만 하지 않고,
자연 과 함께 그 이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다면
저 숲 속의 생기어린 생명력과 포근함을
우리 사람 들 내면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연의 이치에 모든 것을 내맡 기고 산다는 것은
흡사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로 알 고 산다는 말이고,
자성불 주인공 자리에 일체 모든 것 을 맡기고 산다는 말입니다.
대자연 우주가 그대로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화신이기 때문이지요.

이 대자연의 숨결에
일체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면,
그래서 내 일로 잡 고 살지 말고
대자연 법신 부처님의 일로 돌려 놓고 살 면
우리 사람들에게서도
저 대자연의, 저 청청한 숲의 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osted by 법상




오후가 되더니
갑자기 하늘 이 맑게 어두워지고
이내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 진다.

마침
다실 문을 활짝 열고
차를 한 잔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이럴 때 갑자기 귀 속을 씻어주는 빗방울 소리는
이 얕은 산사에선 얼 마나 좋은 다반(茶伴)인지 모른다.

낮은 산 밑 작은 도량
이 6 월 청청한 산방에서
빈 속에 맑은 차 한 잔
그리고 갑 작스레 떨어지는 빗소리 좋은 도반...
생각이 되시는 가.

덕분에 어제 밤은
늦은 녘 까지 방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오랜만에 떨어지는 빗소리 를 보고 있자니
조촐한 도량의 풍경하며
이 산사 를 은은히 비추고 있는 외로운 가로등 하며
가슴 속 깊 이 파고드는 그 어떤 떨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빗방울이 좋고,
그 떨어지 는 빗방울에
묵은 때 벗어내는 이 자연이 좋 다.

우리들 또한 이 속에서 함께 숨쉬는
대자연의 숨결 그대로였을 터인데...
비가오면 비를 맞 고
눈이오면 눈 속을 걸어야 하는
그런 나그네였을 것이 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나그 네 성품, 대자연의 성품을
많이 잊고 지내고 산 다.

내가 그렇고,
우리 모두가 그러하며,
이 세상이 이 법계와 하나이기를 거부하게 된 것은 아닌가.

이 어둠 속에
이 비를 느끼 면서
문득 미친 생각 하나 스쳤었다.
발가벗고 이 산 속 에서
나무들과 함께 비 흠뻑 맞으며
첨벙첨벙 뛰어 놀고 싶다 는 생각.
물론 실천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부디 자유롭 게 실천할 수 있기를 법계에 빌어 볼 뿐...

사실은 그렇게 살았어야 하는 우리일 터인데...

그러고 보면
우리도 그렇 고, 우리 아이들도 그렇고
참 딱한 처지다.

그 흔한 흙한 번 맨발로 밟아 보지 못하고,
떨어지는 빗속을 맨몸으로 흠뻑 맞아 볼 생각조차 하지 못 하고,
저 나무를 두 팔 벌려 껴안고는 그 숨결을 느껴보지 못하며,
풀벌레와 친구가 되지 못한다.

구두를 신고 딱딱한 아스팔트 를 밟아야 하고,
고급 우산으로 떨어지는 비를 막아야 하 며,
모처럼 방에 들어온 풀벌레를 홈키파로 죽여야 한 다.

하기야 요즈음의 시대가
빗 물을 맨 몸으로 맞을 수 없게 되었고,
풀벌레나 꽃가 루 같은 것들에게 조차
무슨 전염을 옮기고, 무슨 무 슨 알레르기를 조심해야 할 정도로
우리도 나약해 졌고, 자연 도 오염을 시켜 버렸으니 어쩔 도리는 없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 대 자연과 하나가 됨을 의미하고,
우주 법계의 큰 흐름 에 온전히 나를 맡기고
그것과 함께 흘러 가는 것을 의미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그리 거창하거나 요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대자연의 섭리 는 그대로 우리의 삶이요 진리인 것이다.

그저 이 우주 법계 대자연의 순일한 흐름처럼
아무런 분별 없이
턱 맡기고 흐 르면 그만이다.
그것이 수행이고 그것이 부처의 삶인 것이다.

요즈음 들어
사람들과 함 께 하고 싶은 마음 보다
이네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 이 더 간절하다.

이 맑은 법신 부처님의 숨결 과...

비가 오니 자연도 씻길 때가 되었나 보다.
자연도 이제 목이 말랐는가.

Posted by 법상




[가평 현등사와
봉화 청량사의 텃밭]

요즘 환경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실정인데요,
그럴수록 더욱 부처님 가르침이
이 오염된 세상에 큰 가르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구 환경을 살릴 수 있는
정신적 대안은 오직 부처님 가르침에 입각한
연기적 삶이요, 자비적인 삶이라는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생태 불교를 공부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불교환경연대에서
백남석 법사님을 초청하여
'부처님 가르침과 생태운동'이라는
강의를 들었다고 하는데요,
다음은 그 강의 내용입니다.


'부처님 가르침과 생태운동'

사람들은 저마다 남들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소비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이루게 되면 행복해 하지만, 욕망을 이루지 못하거나 가진 것을 잃게 되면 괴로워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거나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 하나 영원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 것이라 집착하면서 근심걱정이 태산과 같다.
행복감은 재물로부터 오지 않으며, 온다 하더라도 일시적일 따름이다. 행복은 기대와 욕망의 충족으로 오기 때문에 밖으로 끝없는 욕망를 충족하기보다는 오히려 욕망를 일으키지 않거나 적게 갖을 때 보다 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제가 발전하지 않은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과 같은 나라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사람들의 이러한 끝없는 욕망은 생산력 증대로 이어졌다. 특히 산업사회의 발달과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보다 폭넓고, 치명적인 환경영향을 야기했다. 공업의 발달은 인구의 도시집중을 가속화시켰고, 생산성의 증대와 이동수단의 발달은 원자재와 에너지의 수요를 크게 증가시켜 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만큼의 무한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한정된 환경 자원을 오염시키고 파괴함으로써 모든 생명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황금에 눈먼 인류’라고 표현할 만큼, 사람들은 금을 갖고 싶어한다. 그런데 무수한 금광이 쏟아내고 있는 여러 가지 배설물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네바다주에서 금 1온스(31.1035 그람)는 485,000원 하는데, 이 금을 얻기 위해 100톤 이상의 흙을 깎아 내며 30톤 이상의 암석을 채굴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하루에 50만 톤의 흙과 암석을 파낸다고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금을 분리하는데 수은과 시안화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은을 사용하는 아말감법과 암석가루를 시안화물 용액에 잠그는 시안법이 이용되고 있다. 이로 인해 식수가 오염되고, 광산주변은 사막화되어 가고 있다.

이미 지구는 심각한 환경 문제에 직면해 있음이 밝혀진 지 오래다. 한 번 배출된 이산화탄소는 대기 중에 100년 간 잔류할 수 있다고 한다. 계속 축적된 이산화탄소 층은 지구를 온실화 하여 해수면을 상승시켰고, 이로 인해 대형 홍수 등 기상이변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대기 중 오염 물질은 이미 남한의 300배 이상 되는 넓이의 오존층을 파괴하였고, 이로 인해 자연 생태계뿐만 아니라 질병에 대한 면역력까지 떨어지고 있다. 이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대기 오염에서 비롯된 기관지, 피부 등의 질환을 앓고 있다.

그리고 산성비와 화학비료로 인하여 비옥한 토양이 사막화되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계획적이고 무차별적인 삼림훼손으로 많은 동식물이 멸종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생태위기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 않고, 난 개발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모든 것은 인연의 그물로 연결되어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고, 당장 눈으로 확인되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결과가 없으면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인 듯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환경 문제는 전 인류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며, 사고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풀 수 없는 문제가 되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북극의 빙하는 1만 1천년 동안 녹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작년(2005년) 미국빙설자료센터(NSIDC)가 밝힌 자료를 보면, 최근 5년 동안에 북극빙하의 25%가 사라졌다고 하며, 앞으로 반세기 안에 빙하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로 인해 동토(凍土) 대에 묻혀 있는 메탄가스가 대기로 증발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메탄가스는 이산화탄소보다 20배나 강한 온실가스인데, 동토 대에는 전 세계 메탄 매장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7백억 톤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메탄의 증발은 지구의 온난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이는 다시 더 많은 메탄을 방출하게 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급격한 온난화에 따른 기상재해의 피해액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날 것으로 추산된다.

수조 달러로 추산되는 북극의 자원을 노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앞다투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녹아 내리는 북극은 인류에게 주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은 대재앙을 안길 수 있다.

이로 인해 러시아 북극권에 자리한 비코프스키라는 작은 어촌마을의 이벤크족 주민들은 최근 해마다 5-6m씩 마을 쪽으로 다가오는 해안선을 속수무책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이 다음 대에는 바다에 잠길 것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러시아에는 이런 마을이 457개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북극권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페초라 탄전의 13만 명의 보르쿠타시 주민들도 요즈음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영구 동토층 위에 건설된 도시 건물의 80%가 지반이 녹으면서 붕괴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북극의 온난화가 가속화되면서 4백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북극권 8개국의 삶의 터전이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빙하가 녹기 시작하자 이를 걱정하며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전 세계 석유 및 가스의 4분의 1 이상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에너지 자원의 보고인 북극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불꽃을 튀기고 있다. 노르웨이 북쪽 해안에서만 시추기지가 50여 개나 건설되었다. 작년(2005년) 북해에서 바렌츠 해를 거쳐 유조선으로 운반된 석유는 1억 4천 6백만 배럴이다

유엔은 2001년 보고서를 통해 북극 지역의 15%만 개발권에 있으나 2050년에는 80%로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생태계 파괴를 견디다 못해 얼음과 사냥만을 알던 에스키모족들은 지난해 변호사를 고용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에스키모 마을 하나를 옮기는 데는 1억 달러(약 1천 55억 원) 이상이 든다고 한다.

북극처럼 아프리카의 호수도 문제가 심각하다. 677개에 달하는 아프리카 호수 대부분이 수자원을 부분별 하게 남용하고 있으며, 가뭄 등 기후 변화와 부적절한 댐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차드, 카메룬, 나이지리아, 니제르 4개국에 걸쳐있는 차드호는 현재 수량이 1960년대의 5% 정도에 불과하다고 추정되고 있다.

중국의 문제 한 가지를 살펴보면, 2004년 한해 동안 45억 개의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나무젓가락을 만들이 위해서는 잘 자란 나무 2천 5백만 그루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교적인 세계관을 바르게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생태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만 한다.


1. 선형인과율과 상호인과율

부처님 당시 바라문교도나 사문들은 ‘원인은 결과를 낳지만, 결과는 원인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선형적 단일 방향의 인과율을 주장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는 제일 원인이 무엇이냐가 매우 중요하다.

바라문교에서는 제일 원인이 창조주인 브라흐만이라 주장했고, 사문들은 다양한 요소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바라문교에서는 세계가 브라흐만의 전변이라 했고(轉變說), 사문들은 다양한 요소들의 집합이라고 했다(積聚說).
이들의 주장처럼 세계가 불변의 자기 동일성을 지닌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두 가지 주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바라문교도와 사문들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이들이 주장한 행위의 주체인 자아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 이유는 인지하거나 행위 하는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조건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라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선형적인 인과율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모든 것들은 상호의존관계에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를 일컬어 ‘연기법’이라고 한다.

연기법이라는 상호인과율에서는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 등을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화된 별개의 실체로 보지 않고 행위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본다.

칼루파하나 박사가 지은 <싯다르타의 길>(재연스님 역)에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은 다양한 조건에 의지하여 발생된다. 새싹은 종자의 번식력과 유효한 습기, 흙의 정기에 의존하여 발생한다.
종자에서 움이 텄을 때, 우리는 새싹을 발생시킨 배경을 살펴보고 이러이러한 조건들이 싹을 틔웠다고 말한다. 만일 싹이 틔워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러이러한 조건이 결핍되었으며, 따라서 싹이 띄지 않았다고 단정한다. 이것이 바로 의존적 발생의 원리, 즉 연기의 법칙이다.
이것이 존재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소멸함으로써 저것이 소멸된다. 이것이 바로 사물의 본성이 생성되는 방식이다.”


2. 인드라망의 생태계

부처님의 말씀처럼 생명의 본질은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에 있다. 따라서 이 세계는 인드라망(因陀羅網), 즉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여러 조건의 연쇄적인 그물 망으로 표상 된다.
인드라망이란 제석천이 머물고 있는 궁전을 장엄하고 있는 망(網)을 가리키는데, 이 망(網)의 각각의 코에 달려 있는 보주(寶珠)들은 저마다 다른 모든 보주의 그림자를 비쳐 무한히 교차 반영된다.

이처럼 생태계는 생명의 그물(web of life)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관계들의 연결망(network) 속에서 상호관련 되어 있다. 따라서 어떠한 생명이든 원래부터 타고난 자기 고유의 불변적인 어떤 것(본질, essence)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적 인연에 의한 잠정적인 어떤 것이다.

린 마굴리스와 도리언 세이건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란 책을 통해,

“생물은 자기 완결적이고 자율적인 개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생물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공동체이다. 우리는 숨 쉴 때마다 느리기는 하지만 역시 호흡하는 생물권의 나머지 생물들과 연결된다”고 했다.

여기 한 알의 콩이 있다고 가정할 때, 이 콩은 종자인가? 아니면 열매인가? 결론을 말하면 이 콩은 종자이자 열매인 것이다.

의상스님은 <법성게>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3. 나와 우주는 한 몸

모든 생명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를 사대(四大)라 한 다. 사대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을 말하는데, 이는 곧 견성(堅性), 습성(濕性), 난성(煖性), 동성(動性)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곧 사대의 요소가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음을 가리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중함만 알고 사대의 소중함은 모르고 있다. 자신이 곧 사대임을 깨닫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우선 사대 가운데 물에 관해 살펴보자. 물은 생명체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단세포 생물부터 약 10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된 인간까지 예외가 없다. 35억 년 전 원시바다에 있던 호기성 원핵생물도 물과 이산화탄소로 광합성의 재료를 얻었다. 호기성 원핵생물은 현재 생명체의 모든 세포 속에 존재하는 미토콘드리아의 조상 격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물이 없으면 생물이 생겨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물의 여러 가지 특성을 살펴보면 물은 생명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생명체가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은 암모니아 다음으로 비열이 큰 물질이다. 물의 온도를 올리는 데는 높은 열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외부 온도가 변하더라도 물은 쉽게 온도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물이 주성분인 생물체도 외부 온도가 올라가거나 내려가도 그것의 영향을 덜 받고 일정한 체온을 유지 한다.

생명유지의 기본은 ‘항상성(恒常性)’이다. 외부 환경의 변화가 있을지라도 체내 조건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체의 체온 조절에도 물이 중요하다. 물 1그람을 수증기로 바꾸는 데는 약 500칼로리의 기화열이 필요한데, 더울 때 적은 땀이 증발하면서 많은 열을 빼앗아 가므로 체온을 쉽게 내릴 수 있다.

물의 비중이 섭씨 4도에서 가장 무거운 것도 의미가 크다. 대부분의 물질은 온도가 내려갈수록 무거워지지만 물은 4도에서 가장 무거워졌다가 온도가 떨어지면 도리어 가벼워진다. 그래서 물이 0도에서 얼어 얼음이 되면 가벼워지면서 물 위로 떠오르게 된다.
물이 표면부터 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얼음이 물보다 무거웠다면 호수나 강바닥이 죄다 얼어붙을 뻔했다.

물은 다른 어느 액체보다 점도가 낮다. 물이 끈적끈적하고 걸쭉했다면 피가 모세혈관 속을 흐르지 못했을 것이다. 건강하려면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한다. 그것은 피의 점도를 낮춰 잘 흐르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어느 용매(溶媒)보다 소금을 잘 녹이는 것도 생명체에 중요하다. 소금은 세포막의 대사에서부터 신경에서 일어나는 흥분 전달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지구에 있는 물 가운데 민물(담수)은 고작 2.5%(나머지는 바닷물)에 지나지 않고, 그것도 빙하나 지하수로 묶여 있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물은 0.0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유엔은 2006년 3월 16일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개막된 제4차 물 포럼을 앞두고 ‘물-공유된 책임’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584족의 방대한 이 보고서에는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물 부족, 수질오염, 홍수피해 등 다양한 물문제가 담겨 있다.
이보고서는 특히 “21세기 들어 물 분쟁이 에너지 분쟁보다 많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2030년이면 전 세계 30억 명이 물 부족을 겪을 것이다. 현재도 세계 인구의 20%인 11억 명이 더러운 물을 마시고 있다.”
“물 공급의 양극화도 심각해져 미국과 아프리카 잠비아의 1인당 물 소비량은 120배 이상 차이가 난다.”

‘세계 물의 날’인 3월 22일까지 계속된 이번 포럼에는 세계 각국의 정부 관리와 전문가, 비정부기구 관계자 1만여 명이 참석해 물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유엔 보고서는 지난 세기 세계 인구는 2배 증가한 반면 물 사용량은 6배나 늘었다고 밝혔다. 인구 증가에 맞춰 2030년까지 세계 식량공급이 현재보다 55% 늘어나면 물 사용량은 더 급격히 증가해 30억 명이 물 부족을 겪을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11억 명(세계 인구의 20%)이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하며, 인구 대국인 중국과 인도의 물 위생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물 공급 양극화도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1인당 하루 500L의 물을 소비하지만 아프리카 잠비아는 4.5L, 말리는 8L에 불과하다. 유엔의 최소 권장량인 50L에 훨씬 못 미친다.
이와 함께 전 세계 도시 인구가 현재는 50%에 못 미치지만 2030년에는 75%가 넘을 것으로 보여 도시 빈민층에 대한 식수 공급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물은 또 식량 및 공업 생산과도 직결된다. 따라서 물을 확보하려는 국가 간, 지역 간 갈등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지구촌에서 갈등이 심각한 곳은 요르단 강과 나일 강이 흐르는 지역이다.
1967년 제3차 증동전쟁의 한 원인은 시리아가 요르단 강 상류에 댐을 건설하려 한 데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집트 수단 등 아프리카 8개국의 나일 강 쟁탈 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터키와 시라아, 이라크는 유프라케스 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중국과 인도는 브라마푸트라 강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5만에서 30만 명의 희생자와 250만 명의 난민을 초래한 수단 다르푸르 대학살도 물 부족이 한 원인이다.
2개국 이상을 지나는 국제 하천은 50개국에 241개이고, 세계 인구의 40%가 인접국의 물에 의지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경쟁적으로 댐을 쌓아 물을 확보하려는 나라 간 경쟁으로 강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수자원이 급속히 고갈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물뿐만 아니라 우리가 낭비하고 있는 종이를 놓고 보더라도 그러하다. 따라서 한 장의 종이가 곧 우주임을 알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 까닭은 한 장의 종이가 만들어지려면 우주의 모든 것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모여 한 장의 종이로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다른 모든 것을 자신의 몸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다루어야만 한다.

<법구경> ‘올바름의 장’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사람은 결코 위대한 성자가 될 수 없다. 이 모든 존재에게 연민의 마음을 느끼는 사람, 그 분이야말로 위대한 성자가 아니겠는가”라 하셨다.


4. 생태계 위기의 극복 방안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목숨은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있다고 하셨다. 즉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사이에 목숨이 달려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호흡과 같은 어순으로 사용되는 말이 있는데, 곧 매매(賣買), 수수(授受), 거래(去來) 등이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 팔고 삼, 주고받음, 가고 옴이다.
이 말들의 공통적인 숨겨진 의미를 살펴보면 ‘받기 전에 먼저 주어야 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생각해 보자. 모두가 받기 전에는 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느 누가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두가 받기에 앞서 먼저 주려고 한다면 저절로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바로 깨달아 물과 공기와 토양을 이용하기에 앞서, 먼저 그 생명을 살리는 데 관심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중중무진으로 얽혀 있는 깊은 인연을 살펴 볼 때, 내가 살고자 하면 다른 생명들도 잘 살 수 있게 해야만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생태계를 파괴하거나 교란하지 말고 영구 보존해야만 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이치(不二)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생태계 문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은 생활형편이 어려우니 ‘좀더 풍족해지면 생태계문제에 신경 쓰겠다’ 거나, 남들이나 후손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편하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공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지금 보다 나은 생태환경을 물려줄 수 있도록 보존하고 아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최소한 지금 우리가 누리는 만큼이라도 누릴 수 있도록 유지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이 시대의 빈부간, 지역간, 국가간의 문제로만 보고 해법을 찾기보다는 미래세대와 세대간의 형평과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도 기우려 나가야만 한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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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가을 하늘...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본다.

오랜만에 보는
가슴 탁 트 이는 하늘...
추위 쯤이야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 운 하늘이 머리위로 펼쳐진다.

이런 날은
그저 하늘만 바 라보고 있어도
이 마음 충분하고 충만하여
더 이 상 바랄 것이 없게 느껴진다.

날씨가 조금 춥긴 하지만
싸늘한 바람이 살결을 파고들긴 하지만
그런 추위가 더욱 이 높고 푸른 하늘이며
아련하게 두웅실 떠가는 뭉게 구름들을
한결 아름답게 해 주는 것 같다.

이런 날
이런 충만한 행복 감에 젖어들 때면,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있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내 주위에 이렇게 분명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나 와 함께 호흡하고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충만하 게 만드는
이 아름다운 자연이 내 옆에 있다는 사 실.

그 사실 하나가
내 마음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지 모른다.

요즈음은 그런 생각이 든 다.
나홀로 고요히 앉아 있더라도
소중한 친구와 함께 하 고 있다는 생각.

이 자연이라는 친구는
도무 지 질리지가 않고, 싫증나지 않으며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와
내 마음에 넘치는 생동감을 가져다 준다.

매일 매일 보는 하늘이지만
어쩌면 이렇게 매일같이 다를 수가 있는지,
늘상 곁 에 두고 보는 산이지만
어쩌면 이렇게 새로운 모습으 로 다가오는지,
항상 내 마음을 새롭게 만들어 준다.

바로 요즘
내가 새로 사 귄 정다운 친구다.

자연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내 속 뜰을 가만히 챙기고 있을 때 처럼
청명하고 명 징한 그 무언가가 있다.

그 명징한 무언가 가...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