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9.08 화를 다스리는 명상법
  2. 2008.02.04 화를 다스리는 2가지 길
  3. 2007.12.21 이것만은 반드시 버려라 (1)
  4. 2007.12.12 두 번째 화살을 막는 방패



[설악산 울산바위에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인연따라 어떨 때는 화가 나기도 하고
또 인연이 다하고 나면 화가 사라지기도 하며,
또 상황 따라 어떤 때는 불같은 욕심이 치솟기도 하고
질투심, 고민, 집착, 증오, 사랑 등 수많은 감정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하기야 우리의 인생이란 것이 이런 감정적 기복의 연장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마음은 혼자서 독자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절대 저홀로 일어나는 법은 없다.
그럴만한 인연, 상황이 생겨야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평소 가깝던 친구가 별일 아닌 것으로 갑자기 욕을 한다면
그런 상황에 따라 마음에서는 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같이 욕도 하고, 때로는 주먹질까지 하게도 된다.
그렇게 같이 붙잡고 화를 내고 싸우고 나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 때부터 그 친구와의 관계는 불편해지고, 괴롭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친구가 그 때는 좋지 않은 일이 있어
나도 모르게 그랬다며 사과를 요청하게 되면 또 다시 마음은 금새 풀어진다.

이처럼 인연따라 우리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진다.
때로는 이렇게 작은 화가 일어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도저히 억누르기 어려울 만큼 큰 화가 생기기도 하고,
삶에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경계로 끝간데 없이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상황이, 이런 인연이
우리 삶 속에서는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경계가 생겨나기 때문에
우리 삶도 끊임없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 경계에 휘둘려 마음이 괴로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일생일대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처럼 인연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어떻게 잘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명상이라는 것, 수행이라는 것도
이처럼 인연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어떻게 잘 다스릴 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그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가.
친구가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욕을 해서 화가 났다고 생각해 보자.
혹은 직장 상사가 '그것도 못해?' 하며 사람들 앞에서 화를 냈다고 생각해 보자.
조금 예민하게 그 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화를 살펴보자.

친구가 욕을 하는 순간, 직장 상사가 '그것도 못해'하며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주는 순간,
그 마음을 조금 깊이 있게 지켜보자.
그 순간 욕을 얻어 먹는 순간은 어떤가.
그 순간에 내가 있는가?
그 순간에 욕을 얻어 먹는 내가 있는가?

조금 깊이 지켜보라.
욕을 얻어 먹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없다.
오직 그 순간에는 '화'만 존재한다.
아주 맹목적이고, 본능적으로 당장에 생각할 것도 없이 '화'가 올라온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법이라는 이치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인연이 생기면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뒤따른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욕을 하는데도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아무리 성숙하고, 젊잖으며, 수행력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대뜸 욕을 얻어먹고도 당장에 화가 올라오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몽둥이로 한 대 얻어 맞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부분이 아픈 것하고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프다.
마찬가지로 욕을 얻어 먹으면 자연스럽게 화가 올라온다.

그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때려서 아픈 것이나, 욕을 얻어 먹고 화가 나는 것이나
그것은 이 세상의 이치, 인연법의 이치에 따른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걸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그것을 가지고 '나는 왜 이렇게 화를 잘 내지?'하고 괴로워 할 것도 없다.

이처럼 인연이 서로 화합하여 접촉하는 순간에는
'나'라는 관념이 사라지고,
아니 '나'라는 관념이 생길 것도 없이
저절로 '화'라는 것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지금 여기까지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는가?
오히려 욕을 얻어 먹고도 화가 안 일어나거나,
때리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인 것이지,
욕을 얻어 먹고 화가 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반증이다.

그것은 자연의 변화라는 흐름에 따라
구름이 생겼다가 소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연따라 수증기가 구름이 되었닥가 다시 비가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 오면 숲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수확을 하며 열매를 맺었다가 단풍으로 떨어지고,
겨울이 되면 앙상한 가지가 남게 되는
이 자연스러운 자연의 변화와 무엇이 다른가.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우리 인간에게도 자연의 변화와 같은
자연스러운 변화가 끊임없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다음의 순간부터 생기기 시작한다.
욕을 얻어 먹는 순간 화가 났다면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인데 그것을 가지고 시비할 것이 무엇인가.
전혀 거기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결과에 시비를 건다.
즉, 그 순간에 아상을 개입시킨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화'만 있었지 거기에 '나'는 없었다.
그저 '화'가 났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화에 '나'를 개입시키기 시작한다.
그저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 '화'를 자기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나는 화가 났다' '나는 너 때문에 화가났다'
'너가 나를 화나게해?' '너가 나에게 욕을 해'하고
거기에 '나'를 개입시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때부터 그 '화'는 객관적이고 자연스런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는 것이 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연이어 그 '화'에
'내 생각'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감히 너가 나에게 욕을 해?'
'화 내는 것은 나쁜 것이니 화를 참아야 해'
'저 사람이 내게 화를 내니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저 친구가 나를 우습게 생각하고 무시하고 있구나'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 생각들은 아주 미세하고 순식간에 지나가는 생각일 지 모른다.
그러나 그 생각들의 이면에는 분명 '나'라는 아상이 개입되어 있다.

이제 그 '화'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 '화'는 '내 화'가 되어버렸다.
'욕을 얻어 먹은 나',
'화를 내면 안 되는 나',
'무시당하는 나'
그렇게 수많은 '나'가 생겨나게 된다.

이제 조금 전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버렸다.
조금 전 상황,
즉 '나'가 개입되기 이전,
오직 '화'라는 것만이 있던 상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나'가 개입되면서 그것은 '괴로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그 화로 인해 괴롭고 답답하다.

만약 처음 '화'가 일어날 때
그 때 '나'를 개입시키지 않고
다만 '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내버려 두고 다만 바라보기만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화는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났기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 두면 스스로 타오를 만큼 타올랐다가
인연이 다하면 저절로 소멸될 것이다.

마치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구름이 일어났다가
저절로 구름이 짙어져 먹구름으로 변했다가
인연이 다하면 저절로 비로 내려 대지를 적시는 것과 같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다.
우리 몸 또한 자연이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를 따른다.
그저 내버려두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꽃이 피었다가 사라지듯이 스스로 소멸되었을 것이다.

'화'를 '내 것'으로 붙잡지 말라.
거기에 '나'를 개입시키는 순간,
온갖 '내 생각' '내 분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들 것이다.
연이어 불같은 감정이 생겨나고,
불같은 말을 내뱉으며, 몸 또한 불같은 행동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욕을 얻어 먹으므로써 자연스럽게 화가 일어났다면
다만 내버려두고 지켜보기만 하라.
마치 내 일이 아닌 것 처럼,
그저 영화나 드라마를 보듯 그냥 순수하게 지켜보기만 하라.

거기에 해석이나 판단, 분석, 생각, 아상을 개입시키지 말라.
상대방의 행동에 그 어떤 판단이나 해석을 갖다 붙이지 말고,
내 화에 그 어떤 도덕적 판단이나, 분별, 구분을 가져오지 말라.

'나'와 '화'를 구분하지 말라.
관찰자와 관찰되어지는 대상을 나누지 말라.
다만 바라보는 것, 그것이 되라.
'화'가 났다면 그저 '화' 그것이 되는 것이다.
'나'와 '화'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순간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 그 화는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무아, 즉 '나는 없다'는 것이다.
단지 인연따라 '화'가 났을 뿐이지 거기에 '나'는 없다.
그저 '화'가 있을 뿐이다.
거기에 화난 나는 없다.

내 스스로 '내가 화났다'라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바로 그것이 없는 나를 실체적인 있는 나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나를 실체화하게 되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니 문제가 커지고 만다.

화는 중립이다.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실은 '화나는 상황'이 있을 뿐이지 '화'는 없다.

괴로움도 중립이다.
사실은 괴로움이라는 것도 이름붙인 것에 불과하지
그것도 괴로운 상황일 뿐이다.
다만 '괴로운 상황'이 있을 뿐, '괴로움'은 없다.
마찬가지로 '괴로운 상황'이 있을 뿐이지
'괴로운 나'는 없다.

괴로움이라는 것도, 괴로운 나라는 것도,
화라는 것도, 화를 내는 나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실체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해석을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니 '나'를 개입시키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놓아두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관(觀) 수행이라는 것이
무아(無我)에 이르는 근본불교의 수행이며,
아상(我相)을 타파하는 금강반야경의 수행이고,
연기 법칙을 깨닫는 수행인 것이다.

다만 '화'가 일어난
그 연기적 인과성, 즉 연기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뿐,
거기에 그 어떤 판단이나 해석을 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랬을 때 그 '화'에 '나'를 개입시키지 않으며,
'나'와 '화'를 나누지 않으며,
자아라는 관념을 실체화하지 않고,
'나'라는 상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인연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명상의 길이다.



Posted by 법상




[사진 : 해인사]

노여움은
사나운 불보다도 더 무섭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 자신을 잘 지켜서
노여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공덕을 파괴하는 도둑은
노여움보다 더한 것이 없다.

[유교경]



공덕을 파괴하는 도둑은 성냄보다 더한 것이 없다.
성냄이야말로 그동안 지어왔던
모든 공덕을 파괴하는 가장 큰 독이다.

화를 많이 내는 이유는 아집(我執) 때문이다.
그 중에도 ‘내 생각이 옳다’는
자기 생각에 대한 고집이 큰 사람일수록
화의 불길을 피할 수는 없다.

내 견해가 옳다는 고집이 크다보니
다른 사람의 견해는 그르다고 생각하게 되고,
‘너는 틀렸고 나는 옳다’는 생각 때문에
절대 내 생각을 굽히지 않고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성냄과 화와 싸움이 생겨난다.
자기 생각에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타인은 또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주장하니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옳다는 고집을 놓아버리고,
옳고 그르다는 분별을 놓아버리는 것만이
올라오는 불같은 화를 잠재울 수 있다.

이처럼 ‘내가 옳다’는 아상을 버리는 것,
그것이 화에게서 나를 잘 지키는 첫 번째 방법이다.

두 번째로 상황 따라 올라오는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화나는 순간, 성냄이 일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말고
잘 관(觀)하는 길이다.

화가 날 때
화가 난다는 것을
객관이 되어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올라오는 화를 관찰하면 화는 사라진다.
아니 도대체 화를 찾으려 해도
어디쯤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화와 나 사이의 거리를 띄우고,
멀리 떨어져서 나와는 상관없는 것을 지켜본다는 마음으로
노여움이 올라오는 순간을 지켜보라.

이처럼 아집을 놓아버리고,
마음을 관하는 것만이
자기 자신을 잘 지켜서
불같은 노여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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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사진 : 법주사]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이
갖가지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이 된다.
온갖 것에 대해 취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훗날 마음이 편안하여 마침내 근심이 없어진다.

[화엄경]

자기 마음에 드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탐심을 끊어버리기 위함이다.

자기 마음에 거슬리는 것에
성내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진심을 없애기 위함이다.

어리석은 말에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치심을 끊기 위함이다.

수행은 집착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지혜의 연마이다.

[잡아함경]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독이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이다.

이는 모두 ‘나’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것이니,
내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탐욕을 끊는 공부이고,
내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성냄을 끊는 공부이며,
실체적인 어떤 ‘나’가 있다는 생각을 비우는 것이
어리석음을 끊는 공부가 되는 것이다.

이같은 탐진치(貪瞋痴)의 뿌리는
한마디로 아상(我相), 아집(我執)에 있다.
‘나’라는 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내 것이다’라는 소유욕이 일어나고,
나의 소유물이 없으면 곧 나도 없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처럼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집착과 소유욕을 버리는 것이
탐심의 뿌리를 뽑는 첫 번째 수행이다.

두 번째로 ‘내가 옳다’는 생각에 집착하므로
내 생각과 어긋나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화를 내게 된다.

내가 옳다는 것은 너는 틀리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모든 다툼과 성냄의 씨앗이다.
사실 그 어떤 생각도 전적으로 옳거나 그를 수 없다.
다만 서로 다를 뿐이지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주는 것
이것이 진심의 뿌리를 뽑는 두 번째 수행이다.

그리고 셋째로 이 모든 뿌리에 있는 생각인
‘내가 있다’고 하는 착각이 바로 어리석음 곧 치심이다.
나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생겨난 비실체적이고 연기적인 존재임을 바로 알고
나에게 집착하지 않는 것이
치심의 뿌리를 뽑는 세 번째 수행이다.

수행이란 이렇듯
‘나’에 집착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지혜를 연마하여
탐진치 삼독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다.
Posted by 법상



어리석은 범부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게 되면 좋다거나 나쁘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범부들은 자기의 감정에 포로가 되어 집착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감정을 갖더라도 그것의 포로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은 두 번째의 화살을 맞는다고 말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두 번째의 화살을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잡아함경]





이를테면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여 욕을 하고 시비를 걸어 올 때
그것은 첫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 한마디에 휘둘리고 괴로워할 이유가 무엇인가.
어리석은 사람은 욕을 들음으로써 괴롭고,
연이어 그 괴로운 감정에 포로가 되어
오랫동안 그 욕 한마디에 집착하므로 또 한 번 괴롭다.

그러면서 온갖 화를 일으키고, 복수를 생각하거나,
똑같이 되갚아주려는 성냄을 일으킴으로써
몇 번이고 괴로운 화살을 연거푸 맞는다.
이것은 두 번째 화살 뿐 아니라
세 번째, 네 번째 화살을 연이어 맞는 격이다.

첫 번째 화살은 인연 따라 생겨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두 번째 화살부터는 내가 그 현실에 대한
좋고 나쁘다는 판단 분별을 일으키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즉 두 번째 화살부터는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니,
무엇 때문에 내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내
스스로 만든 고통에 빠져 괴로워해야 하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돈을 빌려가고 형편상 갚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첫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이지만,
그로인해 그를 원망하고, 욕하면서 몇 날 몇 일을 괴로워한다면
그것은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연거푸 맞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갔더라도
그것은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것이다.
이미 마음이 떠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애써 증오하거나, 복수하려 하거나, 잊지 못하면서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맞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두 번째 화살부터는 그 작자가 나다.
전혀 만들어 낼 필요가 없는 것을 내 스스로 만들어 낸 것 뿐이다.
내 생각, 내 분별, 내 판단이 연이은 수많은 고통을 가져왔다.
생각을 잘 관찰하고, 분별과 판단작용을 잘 관하면
두 번째 이후의 화살들을 맞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생각과 분별은 첫 번째 화살에 이은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만들어 내는 창조자이니
생각과 분별을 관하고 비우라.
지켜봄과 관 수행이야말로
빗발치는 화살을 막는 유일한 방패가 될 수 있다.



[사진 : 법주사]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