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여리실견분
진리의 참 모습을 보라.(참된 이치를 여실히 보라.)


如理實見分 第五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則見如來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형상을 보고서 여래를 보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앞의 2분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의 질문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대승정종분을 통해 네 가지 상에 머물지 않으면서, 함이 없는 마음으로 일체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멸도에 들게 하리라는 서원을 세우도록 이끄셨으며, 묘행무주분을 통해 머무는 바 없는 묘행을 실천함으로써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함을 일깨우셨다.

이 분 여리실견분에서는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이 이어진다. 진리의 참된 이치를 여실히 볼 수 있도록, 여리실견 할 수 있도록 일체의 모든 상의 허망함을 일깨우며, 일체의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결국 여래를 볼 수 있도록 수행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여리실견분에서 금강경 내용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금강경의 사구게가 등장을 하며, 이 사구게의 법문을 통해 우리가 수행해 나가야 할 마음공부의 방향을 설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이 때 대승정종분에서 부처님께서 해 주신 법문에 대해 수보리는 ‘이렇게 머무는 바 없는 묘행을 실천하면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성취한다고 하셨으니, 이와 같이 실천하였기에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을 얻으셨고, 저렇게 거룩한 32상의 상호를 구족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일어나고 있음을 부처님께서 관해 보시고 수보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형상을 보고서 여래를 보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형상에 얽매이고, 형상에 집착하며, 형상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를 분별하며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란 눈에 보여 지는 경계로써의 형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앞의 묘행무주분에서 언급했던 온갖 경계, 즉 눈귀코혀몸뜻의 대상이 되는 색성향미촉법의 모든 경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은 눈에 보여 지는데 집착하고, 귀로 들려지는데 집착하며,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는 모든 대상에 집착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을 바로 관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질문하고 계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형상인 육신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는가를 묻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일체 모든 대상의 형상을 보고 그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으며, 나아가 부처님 조차 형상으로써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형상으로써, 육신으로써는 부처를 볼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수보리 앞에 계신 부처님이라는 형상은 부처의 참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앞에 서 계시는 부처님의 육신은 단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가 모여 이루어진 인연가합의 형상일 뿐인 것이지 부처의 참 모습이 아니다. 지수화풍이 인연 따라 모여진 것은 언젠가는 인연 따라 흩어질 뿐이다. 인연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은 모두가 항상 하지 않으며(無常),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고(無我), 괴로우며(苦), 텅 비어 실체가 없는 것(空)이다. 부처님의 형상 또한 지수화풍 사대가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무상, 무아, 고, 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몸의 형상은 다만 지수화풍 사대가 임시로 모여 만들어진 가합이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부처님의 형상에 얽매이는 것은 요즈음 절의 불상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절에 불상이 있고, 그곳에 절을 하는 이유도 불상이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 법계 어느 한 곳 부처님의 숨결 아닌 곳이 없기 때문이며 결국에는 불상의 모습을 뛰어넘어 그 이면의 참모습을 보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부처님의 실체는 형상으로써의 육신 그 이면에 법신(法身)으로써 존재를 뛰어넘어 존재한다. 법신이란 형상이 아닌 진리 그 자체의 몸이며, 크고 작다거나 나고 죽는다거나 하는 모습이 아닌 진리의 당체이고, 온 우주 법계 대자연의 숨결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니 진리 그 자체로써, 법으로써 부처님을 보아야지 눈앞에 보여 지는 형상으로써의 거룩한 모습으로 부처님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눈앞에 계신 부처님의 육신을 무시하라는 말도 아니고, 형상은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형상을 통해 참 진리로 나아가는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을 다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하듯, 언제든 참 진리를 만났을 때 형상은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형상에 얽매이고,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부처라는 형상, 32상 80종호라는 형상의 거룩함에 얽매이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나아가 부처라는 형상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됨을 연설하고 있으며, 부처의 눈귀코혀몸뜻이 부처의 실체라고 집착해서도 안 됨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교주인 부처의 몸에 조차 집착하지 말라고 설한다. 부처의 몸이라는 것도 부처의 몸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부처의 몸일 뿐이다. 인연가합의 공한 존재일 뿐이다. 이처럼 하물며 부처의 형상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이외의 다른 그 어떤 것에 집착하여 머물고 실체화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정신은 제한 없는 무량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금강경의 제일 사구게가 등장하고 있다. 이 사구게야말로 금강경 전체를 아우르고, 일체 모든 경전의 진리를 아울러 담고 있는 불교의 핵심 경구라고 할 수 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게송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유명하고 중요하며 불교의 핵심사상을 요약해 놓은 게송이다.

‘범소유상’이란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제법, 일체의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주체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다시말해, 눈귀코혀몸뜻과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 코로 냄새 맡아지고, 혀로 맛보아지고, 몸으로 감촉되며 뜻으로 헤아려 지는 일체 모든 경계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개시허망’이란 일체가 다 허망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범소유상이 다 개시허망이다. 이 세상에 형상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는 말이다. 허망하다는 말은 공하다는 말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어 텅 비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표현되어지는 현상계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무아(無我), 무상(無常), 고(苦), 공(空), 인연(因緣), 중도(中道), 무집착(無執着), 무소득(無所得)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삼라만상 형상 있는 일체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으며[제행무상], 고정된 자아가 없고[제법무아], 괴롭다[일체개고]는 말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텅 비어 공하며,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형상이 있는 이유는 다 인연의 가합이라는 말이다. 인연이 가합되어 가짜로 존재할 뿐, 그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가 없으니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고, 얻을 바가 없는 무집착, 무소득인 것이다. 그러니 크고 작은 것도 없고, 많고 적은 것도 없으며, 잘나고 못나고도 없고, 나고 죽고도 없고, 생사와 열반도 없는 그 어떤 극단도 있을 수 없는 중도의 세계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사구게에 등장하는 ‘허망’이라는 단어는 ‘허무하다’거나 하는 등의 ‘허무주의’로 쓰인 말이 아니라 근본불교의 연기법과 삼법인의 진리를 의미하는 말과도 같고, 대승불교의 공사상이나 중도, 무집착이나 무소득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범소유상은 개시허망이라는 이 점이 우리 앞에 놓여진 이 현상계의 본래 모습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다 허망하여 어느 하나 참된 것이 없고, 항상[常]하거나 즐겁거나[樂] 고정된 자아가 있거나[我] 깨끗하지[淨]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음 게송인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라는 말,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인 것을 바로 알아 일체 모든 형상이 실제는 형상이 아니며 공하여 텅 빈 것임을 바로 깨닫게 되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즉 깨닫게 될 것이다 하는 말이다.

이 말이 바로 금강경의 핵심중에 핵심이며 나아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가운데 핵심이다. 우리 사람들이 괴로운 것은 모두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명예가 권력이 욕심이 집착이 자아가 나아가 부처 조차도 모두 허망한 것이요, 텅 빈 것이며,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이 실체적인 것으로 착각해 거기에 집착하니까 거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모든 이들이 느끼는 괴로움의 원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모두가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상이 실체적인 형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즉견여래 하지 못하고 괴로운 중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돈이 없어 괴로운 것도 돈이라는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며, 지위나 권력이 낮은 것도 지위나 권력이라는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고, 성공하지 못한 괴로움도 성공이라는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바로 그 ‘무엇’의 실체가 허망하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 내가 목숨 걸고 쟁취하려 했던 바로 그 ‘무엇’이 사실은 그렇게 집착할 만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때 바로 그 ‘무엇’에 대한 괴로움은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무엇’에 대한 집착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끝끝내 집착하고 내 소유로 만들고자 할 뿐 끝내 포기할 줄 모르고, 성공이라는 부유함이라는 삶의 목적에 대해서도 한 생각 돌이켜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포기할 줄 모른다. 바로 거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연기되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 처럼 내가 원하고 바라는 바로 ‘그것’을 쟁취해야지만 행복한 곳은 아니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이미 완전히 행복한 곳이고, 완전히 풍요로운 곳이며, 완전한 깨달음과 완전한 고요함으로 충만한 곳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허망하며 텅 비어 있기에 깨달음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 세상은 지극히 고요하고 적적한 것이란 말이다. 우리의 행복은 집착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그 마음을 포기할 때 비로소 찾아 온다. 완전히 풍족한 세상에 살면서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고, 아직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전도된 생각을 버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자족하며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받아들일 때 행복은 찾아온다. 그랬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이 본래 평화로운 곳이었다는 사실이 진실로써 내 안에 깃들게 된다. 본래불이라는 것이 그 말이다. 우리는 본래 부처요, 본래 무한히 행복한 자며, 완전한 평화의 존재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어떤 것에 상을 일으키고 그 상에 집착하면서부터 모든 문제는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스스로 상을 짓고 부수고, 행복을 만들고 없애고 그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본연의 세계, 이 진리의 법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본래 이 세상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런 변화도 없으며, 그 어떤 무언가가 나타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나타나지 않았으니 소멸될 것도 없고, 괴로워 할 아무것도 없다. 본래자리로 가면 일체 모든 것이 딱 끊이진 적멸의 자리일 뿐이다. 아무리 우리가 몇 백 생을 윤회하고 나고 죽고를 반복하더라도 본래의 입장에서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하룻밤 꿈을 꿀 때, 힘든 일도 있고, 어려운 일도 있고, 나고 죽기도 하며, 온갖 일들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아파하고 즐거워하며 온갖 행을 벌이고 있지만 딱 꿈을 깨고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 세상도 마찬가지다. 다만 꿈이었을 뿐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거기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답답해 할 아무 이유가 없다. 지금 이 현실 세계 또한 꿈인 것이다. 꿈이며 신기루고 환상이며 물거품인 것이다. 꿈 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이고 환상이다. 아무리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설사 이 지구가 몇 번 멸망을 하고 빙하기가 도래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털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본질에서는 적멸이고 지고한 평화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리가 이렇게 삶을 살아가며 나고 죽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본질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음을, 이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는 허망하여 어느 하나 실체가 없음을, 다만 인연이 거짓으로 모이고 흩어질 뿐임을 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란 말이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하기 때문에 약견제상비상하면 즉견여래 한다는 이 진리에 대한 무명 때문인 것이다.

그 무명,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집착’을 불러온다. 그리고 집착은 괴로움의 원인이 되어 우리를 얽어맨다. 그러니 바른 깨달음만 있으면, 바른 지혜와 안목이 열리면 더 이상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니다. 살아가며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그러한 지혜가 있다면 그 무엇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이 게송의 소중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고,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한다는 이 말 앞에 그 어떤 것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일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바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볼 것이다, 다시 말해 바로 대자유의 깨달음인 여래를 볼 것이라고 했는데, 더 이상 여기에서 군더디기 붙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게송에서 대자유인의 걸림 없고 여여한 삶을 볼 수 있다. 이렇듯 광대무변하며 성성적적 무량한 깨달음이 바로 금강경 제일사구게의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잠깐 산스크리트 원문과 현장역의 해석을 살펴보면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를 ‘상과 상이 아닌 두 가지 관점에서 여래를 보아야 한다’는 해석으로 해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에 나온 상이란 일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일체 모든 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부처님의 32상 이라는 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참된 여래를 보고자 한다면 32상이라는 모양으로만 보아도 안 되고, 모양이 아닌 관점으로만 보아도 안 되며 상과 상이 아닌 두 가지 관점으로 치우침 없이 보아야 한다는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상에도 집착하지 말고, 상 아닌 데에도 집착하지 말도록 이끄는 것으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상에서처럼 모든 상이 허망한 것이므로 모든 상에 치우쳐 집착하지 말라고 하면 도리어 상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상 아닌 것을 새로이 만들어 집착하게 되는데, 상에도 집착하면 안 되는 것 처럼, 상 아닌 것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즉, 형상에 집착하면 안 되듯이 형상 없는 것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 또한 결국에는 구마라집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해석과 마찬가지로, 크게 볼 때 상도 타파하고, 상 아닌 상도 타파해야 한다는 점에서 두 해석이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즉 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하니, 모든 상을 타파하면서 도리어 ‘상 아닌 것’을 새롭게 만들어 거기에 집착하는 것 또한 타파해야 할 것이란 얘기다. 상 아닌 것을 만드는 순간 그것 또한 또 다른 하나의 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분의 결론이자, 금강경의 중요한 핵심 가르침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비롯해 일체 형상 있고 없는 모든 상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도록 이끌고 있는 것임을 이 분에서 살펴 보았다.


Posted by 법상
 [금강경과 마음공부] 서문

 금강경 강좌를 끝맺으며, 또 금강경의 바다에 푹 빠져 있는 동안 내 안에 깊이 파도쳐 들어오는 한 가지 진한 울림이 있었다. 도대체 이 세상에 어떻게 이런 경전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내 삶에 금강경이 들어왔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축복인가, 아니 이 세상에 이런 경전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인류에게 있어 얼마나 큰 축복이며 보배인가 하는 감사의 울림이 그것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금강경이라는 경전은 단연코 인류의 정신사에 있어 최고의 정점에 서 있는 몇 안 되는 가르침이다. 이 경전으로써 인류의 정신은 얼마만큼 진화를 이루어 냈는가.

 처음 금강경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금강경은 너무나도 생소하고, 어렵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말들이 계속되어 반복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금강경을 언뜻 본 사람들은 바로 접고 마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금강경은 인간이 사량 분별로 헤아릴 수 있는 그 틀을 완전히 깨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야말로 금강과도 같은 지혜의 칼로써 인간들의 어리석은 차별심을 모조리 불살라 없애버린다. 그러나 인간의 어리석은 분별심을 깨기 위해 똑같은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또 다시 사람들은 그 언어를 자기 식대로 이해할 것이고, 자기 사량으로 금강경을 판단하고 말 것이다. 언어는 진리를 그대로 전달해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언어에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편견과 선입견들이 개입되어 있다.

 그래서 진리를 표현하려면 언어를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선사들은 ‘할’ ‘방’을 외치기도 했고, 때로는 침묵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은 너무 어렵다. 일반인들이 다가서기에는 너무 벽이 높다. 그래서 결국은 다시 언어를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언어로써는 진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어를 쓰면서도 언어를 초월하여 진리를 담아낼 수 있는 언어 아닌 언어를 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언어를 뛰어넘는 언어를 쓸 수 밖에 없다. 진리를 언어 속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그나마도 최선의 방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언어를 초월하는 진리의 언어, 그것이 바로 이 경전 금강경이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언어 밖의 언어 그것이 이 경전이 쓰여진 연유다.

 그렇기에 금강경은 평범한 사람이 펼쳐 보았을 때 어렵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금강경을 언뜻 살펴 본 사람이라면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기도 할 것이고, 알다가도 모를 소리라고 손사레를 치기도 할 것이며, 읽어내려 가다가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소식에 경전을 덮고 말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어쩔 수 없는 진리의 속성이다. 진리를 진리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자비로운 노력이 이와 같이 알 수 없는 표현방식으로 언어를 초월하여 경전에 한 올 한 올 곱게 아로새겨진 것이다.

 그렇기에 금강경을 읽을 때는, 금강경을 공부할 때는 일반적인 책을 읽는다거나, 세상의 지식을 얻어 들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다가서서는 안 된다. 세상의 잣대로, 기존의 편견과 선입견의 틀 속에서 금강경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더욱 멀어질 뿐이다. 그야말로 지금까지 배워 온, 익혀 온, 경험해 온, 책에서 읽고, 사람들에게서 들어 온 일체 모든 지식과 판단과 편견과 아집들을 몽땅 비워버리지 않고서는 도무지 금강경의 초입에도 이를 수 없다. 내 안에 그 어떤 고집과 욕심과 집착과 편견과 아상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금강경을 펼쳐 드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려야 한다.

 과거에 만들어 놓은 잣대를 가지고 금강경을 펼쳐 들지 말라. 완전히 과거의 나를 비우라. 비우고 비워 맑고 청정해진 때묻지 않은 순수한 정신으로 금강경의 초대를 받으라. 그랬을 때 비로소 금강경은 신비롭고 경이로운 진한 법신의 향기로써 나를 맞이할 것이다.

 ‘나’를 놓아버리고, ‘내 생각’을 놓아버리고 오직 금강경에 모든 것을 맡기라. 금강경의 자비로운 이끎에 모든 것을 맡기라. 금강경의 가르침이 내 존재 안에서 춤을 추도록 하라. 꽃이 되어 피어나도록 하라. 가려 듣지 말고 통째로 완전히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이제 금강경은 나를 진리의 길로 이끌 것이다. 아니 나를 사라지도록 도와 오직 금강경이 삶이되어 피어나도록 할 것이다. 금강경은 이제 내 깊은 곳에까지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고, 존재를 변화시켜 갈 것이다.

 이 금강경을 펼쳐 든 모든 이들에게, 진리로써 꽃피어난 자기다운 삶의 방식과 삶의 몫을 안내 할 것이다. 이제 나는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진리를 실현해 갈 것이다. 가장 자연스럽게, 가장 나답게, 가장 진리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 경전 안에서 발견해 나갈 것이다. 아! 금강경이란 얼마나 경이로운가. 이 경전을 회향하는 순간 우리 안에 지고한 안온과 평화와 경외와 감사의 눈물이 호수를 이룰 것이다.

 이처럼 금강경은 우리를 온전한 삶으로 이끈다. 우리 삶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다툼과 욕망과 아픔과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지, 어떻게 바라보고 변화시킬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아가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인류 공통의 문제들에 대한 분명하고도 지혜로운 답변을 내려 줄 것이다. 아! 왜 인류는 아직까지도 금강경의 지혜를 지니지 못한 채 상처를 키워만 가고 있는가. 왜 아직 인류는 금강경을 주목하지 않는가.

 지금 이 책의 서문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 그 지혜로운 길목에 들어 서 있다. 부디 중간에 금강경을 덮지 마시라. 한 번 읽고, 한 번 생각하고, 한 번 헤아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착각하지 말라. 그것은 금강경에 대한 나 자신의 해석일 뿐이지 금강경 그 자체가 아니다. 금강경은 아직도 더 진하게 우러나와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금강경을 한 번 읽고 덮는 것이 아니라, 금강경의 가르침이 오래도록 우리 삶에서 더욱 진하게 우러나와 내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금강경이 되고 금강경이 내가 되기 전까지는 덮지도 말고, 어떤 가르침이라고 단정짓지도 말라.

 물론 이 책 또한 금강경에 대한 온전한 해석 일 수는 없다. 다만 금강경에 어리석은 저자의 생각을 덮씌워 더럽혔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설서가 출간되는 이유는,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로 쓰여진 이 경전의 생명력이 조금이나마 우리들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 없을까 하는 작은 발원에 의해서다. 이 책은 될 수 있는 한 금강경을 우리들의 세상으로 끌어내려 우리들의 근기에서 우리들의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사실 금강경은 해설서를 보더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어릴적 처음 금강경을 대할 때 적잖이 당황스러웠던, 해설서를 보면서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던 기억은 두고 두고 이 책의 방향을 결정짓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또한 현실의 삶 속에서 어떻게 금강경을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쓰여 졌다. 그러다보니 이해는 조금 더 쉬워졌을 지 몰라도 금강경 본연의 지혜는 다 드러내지 못한 채 잠재웠을 수도 있다. 그 더 깊은 지혜를 우러내는 일은 나머지 독자의 몫으로 돌리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다.

 5년 전부터 이 책은 구상되고 쓰여지기 시작해 이제야 비로소 그 회향을 보게 된 것이다. 진리의 가르침은 풀어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호되게 깨달은 것도 바로 이 경전 금강경이다. 어떤 분에서는 사방이 은산철벽과도 같은 벽으로 둘러쳐져 있는 듯 도무지 뛰쳐나올 수 없어 그 게송을 마주하며 1년 여를 보낸 적도 있고, 또 어떤 분에서는 한없이 흐르는 감동과 경외의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그 깊이를 도저히 글로 표현해 낼 재간이 없어 한동안 글을 써내려가지 못한 적도 있다.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화두처럼 의문을 품고 몇 달을 앉은 끝에 한순간 번쩍이듯 그 의미가 다가왔을 때는 법신께 삼배를 하고 앉아 환희심을 억누르며 조악한 글솜씨로 서툴게 글을 맺은 적도 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금강경을 맺게 된 것은 모두가 법신 부처님의 몫이요 법신불의 회향으로 돌리고자 한다. 내가 했노라고 붙잡을 것이 없는 금강경의 세계에서는 유무를 초월한 법신의 공덕 아닌 공덕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금강경은 금강경이 아니요 다만 이름이 금강경일 뿐이다. 금강경의 해설 또한 금강경의 해설이 아니기에 금강경의 해설일 수 있는 것이다. 금강경을 공부하지만 금강경을 공부하지 말라. 금강경을 실천하지만 금강경을 실천하지 말라. 그것이 바른 금강경의 공부요 실천이다.


2007. 1. 1

강원도 양구 도솔사 산방에서

법상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