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김용사]

그만 기다리세요.
우리가 평생토록 해 왔던
기다림이 지겹지도 않으신가요?
이제 그만 기다림에 대한 환상을 놓아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기다리던 일이 완성되면 또 다른 것을 기다리고
그것이 완성되면 또 다른 기다림의 대상을 만들어
우리의 기다림은 끝이 없이 계속됩니다.

초등학생은 중학생이 되길 기다리고
고등학생은 대학생이 되길 기다리며,
대학생은 좋은 취직 자리를 기다리고,
학생은 좋은 성적 좋은 학교를 기다리며,
직장인은 좀 더 인정 받기를 기다리고 진급하기를 기다리며,
수행자는 깨닫기를 기다립니다.

한 가지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내 앞에 나타날 사랑을 기다리고,
빨리 졸업하기를 기다리며,
빨리 큰 돈을 벌기를, 큰 집, 좋은 차 사기를 기다리고,
더 나은 직장을, 지위를, 권력을 기다립니다.

출근하고 나면 빨리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평일에는 빨리 휴일이 오길 기다리고,
다음 휴가철을 기다리고,
수업시간에 쉬는 시간을 기다리고,
몇일 후에 있을 소풍이나 만남을 기다립니다.

뭔가 재미난 일을 기다리고,
가을엔 첫눈 오는 날을 기다리고,
겨울엔 만물의 태동을 기다리며,
봄엔 여름 휴가 때를
여름엔 가을 단풍구경 갈 때를 기다립니다.
물론 단풍이 떨어질 때 또다시 첫 눈을 기다리겠지요.

성공하기를, 부자 되기를, 행복하기를
깨달음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그렇게 끊임없이 평생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우리는 결국 한번도 기다리지도 않았던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달려가면서
한 순간도 기다림을 포기했던 적이 없었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온 것이라고는 한번도 기다리지 않았던
버림이고 죽음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삶 속에서 기다림의 결과로 얻어 낸
그 어떤 가치있는 것이라도
결국에 죽음 앞에서는 모두 다 무의미한 것일 뿐입니다.
모두 다 버리고 가야할 것들 뿐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 유일하게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살아오면서 우리가 별로 바라지 않았던
‘현재의 깨어있는 힘(지혜)’과 ‘사랑과 베품(자비)’입니다.

평생을 다음 순간만 바라고 살았지만,
더 낳은 순간만을 바라고 살았지만
죽고 나서 우리가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이
‘기다림의 결과’가 아닌 ‘기다림 없는 순간에 깨어있는 힘’이라는 것은
참으로 우리의 기다림을 허탈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다림’이 아닌
‘기다림의 놓음’입니다.
기다리지 않았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현존할 수 있습니다.
기다림을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기다림이란
지금 이 순간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이 아닌 다음 순간을 원한다는 말이고,
현재가 아닌 미래를 원한다는 말이며,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원한다는 말이고,
‘지금의 나 처럼’이 아닌 ‘다른 사람처럼’되길 원한다는 말이며,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닌 갖지 못한 것을 원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기대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그 갈등이 바로 괴로움의 실체로 다가옵니다.
기다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고되고 괴로울 뿐입니다.

이런 우리의 기다림은 습관적입니다.
항상 무엇인가를 기다리지 않으면 견디질 못합니다.
그 기다림을 좋은 말로 ‘희망’이라고도 하고 꿈이라도도 하겠지요.
또 ‘목적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그런 기다림을 당연하게 여기다 보니
이런 기다림을 ‘희망’이니, ‘꿈’이니, ‘목적의식’이니 하고
좋은 말처럼 꾸며 놓았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기다림은 우릴 피곤하게 만들 뿐입니다.
여전히 기다림은 온전한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을 방해하고,
삶의 근원적인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할 뿐입니다.

그런 습관적인 기다림에
이젠 지칠 때도 되지 않았는가요?
그동안 우리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까.
아니 어쩌면 우리 삶 전체를
이런 쓸모없는 기다림에 헛되이 소모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기다림이란 낭비이고 불필요한 것입니다.
공연히 내적인 에너지를 소모할 뿐입니다.
기다릴 시간에
저지르는 편이 더 현명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편이 더 궁극적입니다.

현실적인 돈, 명예, 권력, 학벌, 지위, 성공 등은
기다림을 통해 얻게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행복은
결코 기다림을 통해 얻을 수 없습니다.

현실적인 돈, 명예, 권력, 학벌, 성공이라는 것이
다 궁극적으로 행복을 위한 방편이 아니던가요?
그런 껍데기를 위한 기다림에 휘둘려서는 안됩니다.
바로 궁극적인 행복 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행복은 결코 기다린다고 오지 않습니다.
행복은 결코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돈, 명예, 권력, 지위, 학벌, 성공 속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행복은
다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음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완전한 자족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항상 행복은 이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늘 그렇게 있을 뿐이지요.
기다리는 마음은 이 자리에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 자리를 봐야 하는데
다른 자리를 찾고 기다리고 있으니 어떻게 볼 수 있겠어요.

기다림의 결과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 기다림을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그 때 언제나 있어왔던 행복을 볼 수 있을 뿐.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내가 누구이든 간에,
내가 무슨 일에 종사하든 간에,
나의 직위, 직장, 학벌, 재산, 세속적인 성공에 상관없이
다만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인정하며 사랑하고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그냥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이면 되지
한참을 기다린 후에나 얻을 수 있는
‘다른 그 무엇’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내 모습에,
내가 가지고 있는 만큼의 소유물에,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음에
감사하고 존중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또 다른 것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린 이 순간에 깨어있는 법을 터득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분명 머지 않아
맑은 행복과 평화로움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기다림을 놓아버리세요.
다음 순간을 기다리지 마시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이
기다림을 이룬 순간이 되도록 하세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 순간에 서 있으면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다림을 놓아버리고
바로 이 자리에 서 있으시길...



Posted by 법상



우리의 생각과 사고는 언제나 ‘과거’에 묶여 있으며
관심의 초점은 언제나 ‘미래’에 가 있다.
생각은 늘 과거의 연장이며
우리의 기대는 늘 미래를 꿈꾼다.

누구나 장밋빛 미래를 꿈꾼다.
아름답고도 찬란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미래가
언젠가는 내 앞에 그 화려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이 성공이나 부나 명성이나 지위일 수도 있고
혹은 여행이나 사랑이나 안정감일 수도 있다.
또 더 멀리 본다면 안정적이고 부유한 노후를 꿈꾸고 있을 수도 있다.

내일 있을 소풍이나 여행을 기다리며 부풀어 있을 수도 있고,
주말에 있을 미팅이나 데이트를 꿈꿀 수도 있으며,
이번 휴가 때 있을 해외여행을 부푼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또 아주 가깝게는
2~3분 뒤에 도착할 버스를 기다릴 수도 있고,
5분 뒤에 있을 쉬는 시간을 기다릴 수도 있으며,
10분 뒤에 있을 점심 시간을 기다리거나
30분 쯤 뒤에 있을 퇴근 시간을 기다릴 수도 있다.

심지어 그렇게 기다리던 주말 단풍놀이를 갔다가도
아름답게 피어난 오색 단풍을 즐기다 말고
빨리 집에 돌아가 편히 쉬며 좋아하는 TV 프로를 보려고 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기다려 오던 주말 산행을 가면서도
오를 때는 빨리 정상에 도착하기를 기대하고,
정상에 도착해서는 빨리 내려가 집에 도착하기를 바란다.

이쯤되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기다림은
병적이고 자동적이며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정말 진정으로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재에 존재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막연하게 미래에 대해 어떤 과장된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언제나 바로 다음 순간,
혹은 미래의 어느 순간을 꿈꾼다.
미래를 부푼 마음으로,
설레는 그리움으로 아련하게 기다린다.

미래는 분명
지금과는 전혀 다른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아주 굳게 믿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기대는
너무 부풀려져 있고 과장되어 있다.
심지어 환상적이고 매혹적인 어떤 것으로 확장되어 있다.

우리가 미래를 꿈꿀 때
그것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한다.
미래의 어떤 즐거운 일을 상상할 때,
기대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상상할 때,
우리 마음은 설렘을 넘어서 어떤 흥분 상태에까지 이르곤 한다.
그저 미래를 생각하기만 했는데도
충분히 우리 가슴은 부풀어 오른다.

이처럼 미래는 언제나 환상적이며 가슴이 뛰고
그 가치가 너무 과하게 확장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꿈꾸던 바로 그 흥분되는 미래가
막상 현실로 되었을 때는 어떤가?
과연 내 상상 속의 그 미래가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환상적으로 펼쳐지는가?
대개 그렇지 못하다.

생각과 상상과 계획 속에서 꿈꿔오던 그 부푼 미래가
현실이 되는 순간,
그것은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바뀐다.
그리고 현실은 우리에게 별다른 매력이 되지 못한다.

왜 그런가?
우리는 미래 그 자체를 진정으로 기다린 것이 아니라,
현재라는 ‘지금 이 순간’을 ‘누리고 즐기고 만끽하는’데
익숙하지 못하며,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서툰 것이다.

그렇게 부풀어지고 과장되어 있던 미래의 기대가
현실로 바뀌는 순간,
그것은 너무나도 소박하고 평범하며
맹물처럼 밍숭맹숭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심지어 대단한 성취나, 너무도 간절했던 바람이나,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순간 조차
잠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흥분할 뿐
그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또 다시 별반 다를 것 없는 현실이 이어질 뿐이다.
그리고는 또 다시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고 꿈꾼다.

군 생활 2년 내내 전역만을 바래오던 이들도
전역하는 날 소감을 물어보면
모두가 ‘의외로 담담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사랑하던 이와 마음을 애태우다 결국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그 기쁨과 설렘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대학생활을 마감하며 그렇게 기다리던 취직을 이루었더라도
취직하는 순간 그것은 설렘과 흥분의 어떤 것이기 보다
생생한 현실 그 자체로 바뀌고 만다.

이렇듯 기다리던 미래가 현실이 되면
그것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매혹적이지만은 않은 것임이 속속 증명된다.
그러면서 또 다른 설레는 미래를 찾는다.

이 현실의 실망감을 대신해 줄
또 다른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고 꿈꾸며 기다린다.
또 다시 그 기다림은 부풀어 오르고 설렘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것은 여전히 그냥 그럴 뿐이다.

미래는 언제나 부풀려 져 있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상상할 때
그 생각과 상상은 현실이 아닌 단지 사고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사고와 생각은 현실을 왜곡한다.
현실을 과장한다.

현실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일 뿐이고
있는 그대로의 현재는
말 그대로 지극히 현실적이며 평범하다.

물론 그 평범한 현재 속에
깊은 비범함이 숨겨져 있지만,
우리는 그 뒤에 감춰진
현실의 깊은 심연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한 채
겉에 드러난 평범함에 실망하고 만다.

옛 선사들은
‘평범함이야 말로 가장 큰 도’라고 했고,
‘지금 여기의 현재야말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순간’
이라고 했다.

그렇게 언제까지나 미래에 속으면서도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또 다른 환상적인 미래를 꿈꾸고 기대하는 것을 반복한다.
이것은 거의 병적이거나 장애 수준으로 이어지고 있다.
평생 동안 매번 속지만 늘 그것을 잊고
또 다시 새로운 미래를 꿈꾸기만 할 뿐,
죽기 직전까지도 ‘지금 여기’의 현재에 머물러
깨어있는 현존을 누려보지 못한다.

그렇듯 매 순간의 현재에 늘 미래를 꿈꾸고 있다 보니
생생한 지금 여기의 현재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현재는 언제나 밍숭맹숭하고 평범할 뿐이다.
현재는 우리의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다.
현재가 평범하고 미래가 장밋빛으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를 무시하고 늘 과거와 미래로 마음을 내 보내면서
상상으로 과거와 미래를 초대하기 때문에
현재가 그렇게 초라하게 바뀐 것일 뿐이다.

현재 그 자체가 초라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를 무시함으로써
현재가 그 빛을 잃은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우리의 삶은 빛을 잃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현재일 뿐이니까.
그렇게 꿈꾸고 기다리며 설레여 했던 미래가
현재가 되는 순간,
그것은 빛을 잃고 마는 것이다.

이런 삶이 반복되는 동안,
우리 삶은 언제까지고 희뿌옇고 빛을 잃으며
그저 그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보자.
한 달 뒤에 해외 여행을 가게 된다.
그 여행을 기다리는 한 달 동안 우리는 지금 여기에 없다.
오직 한 달 뒤에 있을 여행을 꿈꾸며 부풀어 있다.
그 여행에 대한 환상은
실제 여행보다 더 과장되어 있다.

막상 여행을 가는 날 아침이 되면
혹은 여행지에 도착하여 계속되는 일정을 소화해 가며
유적지를 찾아 돌아다닐 때가 되면,
그 여행이 내가 꿈꿔오던
그 설렘과 흥분과 환상의 여정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금방 증명이 된다.

그러면서 이 오래고 지겨운 여행이 빨리 끝나고
안락한 나의 보금자리로,
그리운 일상으로 되돌아 갈 날을 기다린다.
물론 그 또한 설레는 가족과의 조우나
친구들과의 만남이라는 과장된 기대를 동반한 채.

이처럼 끊임없이 우리는 미래에 대한 환상을 먹고 산다.
끊임없이 우리의 미래에 대한 기다림은 계속된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지금 여기’라는 현재에 있다.

우리의 그런 부풀려지고 과장된 미래에 대한 꿈이
단지 환영이고 신기루임을 바로 보고
‘지금 여기’의 현실로 되돌아오는 순간,
우리의 모든 방황과 혼돈과 기대는 사라지고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게 된다.

진째배기 알맹이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
미래는 그것이 아무리 환상적인 계획이나 성취일지라도
단지 생각과 상상이 만들어낸 과장일 뿐이다.

가만히 사유해 보라.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존재하는가?
지금 이 순간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수용하는가?
현재에 온전히 만족하는가?
가까운 미래든, 먼 미래든 미래의 어느 순간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
우리 모두는 늘 미래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럼으로써 무한한 에너지는
생명력의 원천인 현재를 축소시키고 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부풀려지고 과장된 미래를 분명히 보라.
분명 그것은 과장이지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생각이고 사고일 뿐이다.

완전히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라.
완전히 지금 여기를 즐기라.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라.
지금 이 자리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클라이막스다.

내가 그렇게 꿈꿔오던 모든 것이 성취되는 순간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이 말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기다리던 그 모든 순간은
사실 바로 ‘지금’에 있다.
그 어떤 순간도 기다릴 것이 없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실을
어떻게 살고, 얼마나 깨어있느냐에 따라
그 기초 위에 모든 미래는 펼쳐지기 때문이다.
현재에서
모든 미래는 나온다.

그렇기에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 대한 기다림은 언제나 거짓을 양산해 낸다.
기다림은 언제나 실패와 좌절로 끝날 뿐이다.

왜 그런가?
기다림의 끝에는 언제나
당신이 기다려 오지 않은 현재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 기다림의 끝에 있는 현실을 보는 순간
당신은 또 다시 좌절할 것이다.
당신의 속성은 현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미래를 생각 속에서 상상해 만들어 냄으로써
그 공허감을 채우려 할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미래를 기대하는데 에너지를 쏟을 것이 아니라,
기대의 끝에서 만나게 될 ‘현재’와 함께
공존하고 누리며 그 안에서 함께 사는 법을 깨닫는 것이다.

이 무한한 정신착란의 병적인 증세를
도대체 언제쯤 그만 둘 것인가.
바로 지금 그만 둬야 한다.
바로 지금 이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 머물라.
기다리지 말라.
미래의 무언가를 바라지 말라.
그것이 우리의 모든 꿈을 이루어지게 하는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순간이다.

매 순간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늘 살피라.
어디로 가려고 하는 마음을 지켜보라.
다음 순간을, 미래를 추구하고 있는 그 마음을 지켜보라.

매 순간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오라.
지금 여기의 삶을 다만 지켜보라.

그랬을 때
본래적인 삶의 신비와 접촉하게 된다.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성스러운 것이며,
경이로운 것인지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과장되고 부풀려진 미래 대신
그 자리에 차분하고도 평온하며
평범하지만 비범한
삶이라는 신비가 들어 차게 된다.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행복하라.
미래의 어느 때가 아니라 지금 당장 평화로우라.



Posted by 법상

 

 

 

나의 신앙적 정체성은 무엇인가.
물론 나는 불교신자다.
불교 수행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기독교 신자도, 천주교 신자도,
이슬람교며 힌두교의 신자도 될 수 있다.

내가 불교 수행자라는 이유가
나를 기독교 신지가 되지 못하도록 만들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또한 그렇다고 나의 이러한 종교적 생각이
나의 불교적인 신앙 정체성을 흔들어 놓을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참된 불교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렇게 활짝 열려있으며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적인 삶이고, 지혜로운 삶이다.

불교는 불교 그 자체에 고집하지 않는다.
불교라는 것은 다만 이름붙인 것일 뿐이다.
진리를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일 뿐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 이름이나 틀 속에 스스로 갇히길 좋아하고,
그러한 틀 속에 보다 많은 신자들을 편입시키고자 애를 쓴다.

'이것은 불교다'라고 이름 지어 놓고,
그렇게 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갇혀 다른 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불교가 불교에 갇혔을 때는 이미 불교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금강경』의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라는 유명한 게송은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 틀에서 빨리 빠져 나오라.

참된 불교 신자라면, 기독교나 천주교의 가르침,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도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저 고대 인도인들이나 페르시아인,
또 아프리카나 호주, 아메리카의 원주민 인디언들에게서도,
공자나 노자에게서도, 저 들의 농부에게서도
또한 저 한 송이 가녀린 꽃송이에서도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무조건 금기시 하거나, 터부시 할 필요는 없다.
물런 어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기독교 신자는 너무 편협학소 열려 있지 못하고,
불교를 너무 싫어한다거나,
혹은 성경을 읽어보면 너무 앞뒤가 맞지 않는다거나 논리적이지 못하다거나,
또는 어떤 특정한 성경의 구절과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는
이렇기 때문에 이것은 불교와는 전혀 다른 것이며,
이것은 진리일 수 없다고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따진다면 불교도 할 말은 없다.
논리적으로 따져서 불경의 게송이나 이야기 하나 하나를 반박한다면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보면 부처님을 신격화 시킨다거나,
신이적인 모습으로 미화시킨 부분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지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불교도 진리가 아니라고 좌절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진리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경이나 성경 그 자체의 본 뜻을 파악하지 않고
피상적으로만 바라본 것일 뿐이다.
문자에만 치우쳐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런 것들은 후대에 만들어 졌다거나,
후대 사람들이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신격화 시켜놓은 것일 뿐,
거기에 내 온 존재를 내맡길 필요는 없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깊은 곳에서 피어나오는 진리의 향기이며,
본질적인 가르침이다.

혹은 어떤 한 사람의 행위를 가지고 그 가르침을 판단하려 해서도 안된다.
어떤 사람은 불자인데 왜 저 모양인가?
저 사람은 교회도 열심히 다니는데 어떻게 저런 나쁜 성품을 가질 수 있는가?
그런 소수의 몇몇 사람들만을 바라보고 그 가르침 자체를 판단하지 말라.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가르침을 잘 들은 제자들 가운데
부처님을 헐뜯는다거나 반역을 일으킨 자도 있었다.
부처님께서도 모든 사람을 다 깨달음으로 이끌지는 못하셨다.
부처님께서도 '원을 세우지 않는 자와 인연 없는 자는 교화하기 어렵다' 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람을 보거나, 경전의 피상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가지고
그 전체를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크게 보아서' 기독교도 불교고 천주교도 불교다.
그 모든 이들의 그 모든 행위가 그대로 불교다.
불교는 어떤 특정한 종교 안에서 만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란 삶 전체의 진리이며, 온 우주, 온 세계 모든 이들,
모든 존재들에게 공통이 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어찌 불교가 불자들만의 진리일 수 있겠는가.
물론 이는 타종교 입장에서 본다면,
불교도 기독교이고 불교도 천주교란 말과 다르지 않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는 물론 한 가지 전제가 붙는다.

그것은 불경을 또 성경을 '열린 지혜의 안목'으로
올바로 바라보았을 때 가능한 말이다.
성경을 꽉 닫힌 시각으로 바라보거나,
문자 그대로 해석하게 되면 성경에 담긴 참 뜻을 볼 수 없다.
즉, 집착 없이 텅 빈 마음으로 한없는 사랑으로 바라보았을 때 가능한 말이다.

다시말해 우리 불교 신자는 성경을 헐뜯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성경은 무조건 잘못되었으며 나쁜 것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법신의 관점에서, 불교적 관점, 활짝 열린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이 글은 그러한 관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과 하느님은 분별이 없다.
당신들께서는 불교 신자를 늘리고자 애쓰지 않고,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자를 늘리는데는 관심이 없으실 것이다.
그 어떤 틀에 가두는 것을 원치 않는다.
틀에 가두는 순간 진리도 진리의 빛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어디에도 갇히지 않는다.
늘 활짝 열려있는 자세를 취한다.
활짝 열려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관점이 없다.
특정한 관점이 없는 관점이 바로 진리의 관점이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하고 나누는 것은
훗날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지
정작 당신들께서는 그런 분별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더 많은 분별과 분열만 일으킬 뿐,
진리에서는 그런 울타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고집하지 않으며
부처님은 당신을 부처라고 부르라고 고집한 적이 없다.

그 이름은 사람들이 붙인 것이고 편의상 붙인 것이지
당신들이 그렇게 불러주기를 바란 것이 아니다.
당신들이 불교를 제창하셨거나, 기독교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불교의 교세를 확장하고자,
천주교의 교세를 확장하고자 애쓰신 적이 없다.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관점이 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데도 여러 가지 신관이 있을 수 있다.
진리는 항상 그 자리에 온전하게 서 있고,
하느님은 항상 진리로써 그 자리에 있을 뿐이지만,
사람들이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신관을 만들어 냈고,
수많은 성경의 해석을 만들어 냈다.

그러한 사람들의 해석 때문에, 관점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피를 흘리는 수많은 전쟁도 일어났고, 싸움도 분열도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하느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느님은 늘 그 자리에 아무런 분별 없이 진리의 빛을 나투고 계셨을 뿐이다.
진리는 늘 그 자리에서 현현되고 있었을 뿐이다.
그 다툼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지 말라.
그것은 사람들의 잘못이지 진리 그 자체의 잘못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집착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께 집중함은 탁 트인,
광대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로마서 8:6, THE MESSAGE]

자신에게 집착하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견해에 집착하지 말라.
아집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할 뿐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관념, 견해에 집착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께 집중하라.

우리 안에 또 밖에 충만한 하나님의 본질에 집중하라.
하나님의 진리 그 자체에 집중하라.
그랬을 때 삼매를 얻을 수 있고, 광대하고 자유로운 삶이 현현될 것이다.

물론 불경 또한 마찬가지다.
불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따라 온갖 불교가 나누어져 왔다.
소승과 대승, 현교와 밀교, 선불교 등 수많은 해석이 나뉘어져 왔다.
그러나 그렇게 나뉘면서도 진리 그 자체는
한 번도 나뉜 적이 없고, 변화한 적이 없다.

다만 사람들이 근거에 따라 수많은 가르침으로 나누어 놓았고
물론 그런데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지만,
몇몇 어리석은 이들은 그로 인해 수많은 다툼과 분열로 아파하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본질에 있어서는 한 번도 나뉜 적이 없고, 변한 적이 없으며,
늘 그 자리에서 진리의 향기를 꽃피우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분열되었다고 부처님도 함께 분열되어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는 않았다.
하느님도 마찬가지다시다.

문제는 사람들에게 있다.
진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과 해석이 피를 낳았고, 전쟁을, 분열을 낳았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어떤 한가지 관점을 정해 놓고
그것을 진리로 고집하고 집착하면서부터 모든 문제는 시작되었다.

진리는 하느님 그 자체이지,
그 가르침에 대한 해석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잊고 말았다.
요즘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
또 신관들이 불교적인 법신의 관점의 그것처럼
활짝 열려 있는 해석을 많이 보게 된다.
기독교 안에서도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이
활짝 열려 있으며, 불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법신은 어떤 하나의 해석이 아니다.
부처라는 것은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당체 그 자체이다.

인간에게 선과 악을 내리는 그런 존재가 신이 아니다.
신에게는 선과 악이 없다.
선악을 초월한다.
그것이 하느님을 바로 보는 것이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을 지혜로써 바로 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그대로 진리이고,
그것 또한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를 수 없다.
그랬을 때 성경 속에서 불경의 가르침을 볼 수 있고,
진리를 볼 수 있으며, 부처님을 볼 수 있다.

불경 속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볼 수 있다.
그랬을 때 하느님과 부처님은 다르지 않다.
관점을 버리고 무분별로써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또 부처님을 볼 때
두 분은 서로 다른 두 분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성경과 불경은 똑같은 것이며,
그러므로 모두가 똑같은 진리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성경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우리가 접근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처럼 성경을 편협하게 해석하고
옹졸하며 좁은 의미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건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진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항상 사람에게 있다.
사람들의 분별과 관점과 해석 그리고 집착에 있다.
부처님도 하느님도 항상 진리의 빛을 한없이 비추고 계실 뿐이다.
그러니 불자가 기독교를 싫어한다거나,
기독교 신자가 불교를 싫어한다거나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서로 싸우고 배격하며 헐뜯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근본에 있어서는,
어떤 종교를 믿는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믿는가가 중요하다.
어떻게 치우치지 않으며 활짝 열린 시선으로 온전하게 믿는가 그 점이 중요하다.

내가 아는 목사님이나 신부님, 수녀님들 중에는
그야말로 활짝 열려있는 분들이 많다.
목사님이면서 불경도 공부하고, 법회에도 참석하시며,
그 속에 담긴 진리의 가르침에 깊이 깨우치며 감사하는 분도 계시고,
신부님이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시면서
참선도 하고 불경도 외는 분도 계시다.
물론 스님들 가운데에도 성경을 진실된 마음으로 공부하고
예수님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는 분들도 많으시다.

종교를 신앙하는 데에도,
뭐랄까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영적이고 정신적인 수준이 있다.
그리고 그 수준이 결정되는 가장 큰 잣대는
첫째, '열려 있음' 즉 '어느 한 쪽에 집착하지 않음'에 있고
둘째로, 한없이 큰 사랑에 있다.

집착을 버리는 것, 마음을 비우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종교며 사상에서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공통적인 지혜의 일깨움이 아닌가.

하느님과 부처님 그 자체라는 진리에 마음을 둘 것이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하느님에 대한 또 부처님에 대한 수많은 해석과 견해를
진리라고 여겨 거기에 집착하면 안된다.

그리고 그렇게 집착을 버리고 활짝 열린 마음으로 마음을 비웠을 때,
바로 그 때 사랑과 자비는 한없이 넘쳐날 수 있다.
어느 한 쪽에 집착하여, 그 한쪽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기독교 신자라는 울타리를 쳐 놓고,
그 울타리, 그 가르침에만 집착을 하여,
그 속에 있는 이에게만 사랑을 베풀고,
나머지 다른 종교 신자는 모두가 사탄이며
올바른 종교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사랑이지
온 우주 전체를 하나로 사랑하는 그런 참된 사랑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런 편협한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을 그런 편협하고 옹졸한 하느님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일을 당장에 그만 두어야 한다.

하느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만
별도로 편협하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그 누구라도 하느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말하고 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문제는 '하느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제자가 될 수 있지만
아무리 하느님을 사랑할지라도
이웃을 사랑하고, 온 우주를 사랑하지 못하며
단독으로 자기 종교 신자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참된 하느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인만을 단독으로 사랑하셨다고 해석하지 말라.
물론 구약을 있는 그대로 문자대로 해석하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 당시 사회 문화적인 배경에 힘입은
그 당시 사람들의, 유대인들의 해석일 뿐이지 본질은 그렇지 않다.

특히 신약보다도 구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게 되었을 때
수많은 오류를 범하기 쉽다.
구약의 하느님은 살생을 하고 폭력적이며
질투가 넘쳐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 자체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런 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느님을 그대로 표현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하느님으로 묘사해 놓고 있을 뿐이다.

그 말에 현혹되지 말라.
그 말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진실을 찾으라.
하느님은 어느 한 부족 사람들만을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 어떤 분별이나 차별도 있지 않다.
온 우주 법계의 본질이신 하느님께서
어찌 조악하게 한 부족만을 사랑하고
다른 부족을 죽이려고 안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인간의 해석과 견해를 버려라.
그런 신관을 버려라.
문자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려 들지 말라.

진리는 문자 그 너머에 있다.
문자를 가지고 진리를 그대로 나타낼 수는 없다.
문자는 항상 오류가 많다.
한 가지 말을 가지고 백 명의 사람은 백 가지 해석을 할 것이다.
그것이 언어, 문자, 말이 가지는 치명적인 오류다.

문자에 연연해 성경의 깊은 가르침을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그로인해 무리를 만들며, 그 해석만이 진리라고 집착하지 말라.
그렇게 만들어 놓은 자기대로의 해석을 가지고
상대방의 해석을 공격하며 싸우려 들지 말라.

분명히 기억하라.
하느님은 어떤 견해도 있지 않으신 분이시다.
어떤 특정한 견해나, 어떤 특정한 부족이나,
어떤 특정한 가르침에만 치우치시는 분이 아니다.
항상 하느님은 진리만을 말하며, 진리로써 살아가시는 분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요한복음 8:32]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지
진리에 대한 해석, 견해가 우리를 자유케 해 주지는 못한다.

그렇게 나누는 것은 바로 우리들 인간이다.
내가 해석한 대로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느님 그 자체가 진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참된 사랑은 내 종교, 네 종교라는 울타리를 두지 않는다.
선을 그어놓지 않는다.
모두가 똑같은 사랑의 대상이고,
모두가 똑같은 형제 자매며 똑같은 도반일 뿐이다.

내 종교를 믿어야지만 구원받을 수 있고,
내 종교를 믿어야지만 해탈하고 열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좁은 사람이다.  

불교 안에서도, 기독교며 천주교 안에서도,
또 나아가 스님들 가운데에도 신부님이며 목사님들 가운데에도
그러한 편협하고 치우쳐진 낮은 수준의 종교를 신앙하는 분들이 물론 있다.

그런 분들과 함께 신행생활을 하는 신자들이라면
당연히 그것만이 당연한 것일 줄 착각할 것이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야지만 잘 하고 있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게 될 것은 뻔하다.

1960년대 벌써 로마 교향 요한 23세는
세계 종교사에 획을 그을만한 획기적인 발언을 해서
종교인들을 놀라게, 혹은 경이롭게 한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타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으며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보수적인 사람들의 반발도 컸지만,
이 교황의 말씀 한 마디는 전 세계를 평화로 물결치게 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종교 지도자들이 가장 중점적으로 해야 할 일은,
내 종교 신자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리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즉, 그 말은 기독교, 천주교, 불교라는 틀 속에서
서로 많은 신자를 확보하기 위해서 싸워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떤 종교를 믿든 그 종교를 참되게 믿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점이다.

참되게 믿는다면 불교도 천주교도 기독교도
그 어떤 종교신자 일지라도 참된 진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간디는 힌두교였지만 참된 진리를 따랐기 때문에
힌두교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불교도 기독교도 다 받아들일 수 있었고,
교황 요한 23세 또한 참된 진리를 따랐기 때문에
천주교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어떤 종교도 다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달라이라마 스님이며 틱냩한 스님, 숭산스님이며 청화스님 또한
불교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모든 종교 안에서 진리를 볼 수 있었다.

참된 자비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한결같이 '모든 이'들을 '참된 행복'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
내 종교인들만 행복으로 이끌려는 마음이라면
그것은 참된 자비이며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또한 모든 이들이 '참된 행복'에 이르도록 이끌어야 한다.

다만 궁극적인 참된 행복으로 가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왜 '해탈'이거나 '천당'이어야만 하는가.
그 길을 왜 꼭 '예수'를 통해서만, 혹은 '불교'를 통해서만 갈 수 있단 말인가.
그 궁극의 행복의 자리, 깨침의 자리에 그 어떤 모양을 만들어 두지 말라.
불교적인 해탈과 기독교적인 천당은 결코 별도로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달라이라마 스님께서는 이 세상에 종교가 불교밖에 없는 것 보다는
오히려 여러 종교가 많은 것이 더 좋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깊이 공감이 되는 말씀이다.

왜 애써 내 종교 신자를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야 하는가.
왜 내 종교를 늘리기 위해 다른 종교 신자들과 다투고,
심지어 전쟁까지 불사해야 하는가.
이것은 부처님도 하느님도, 보살님도 예수님도 정작 바라는 바가 아니다.

다만 '올바른 신앙'으로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불교가 되었든, 기독교가 되었든, 천주교가 되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올바로 참되게 믿고 실천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분명 성경을 열린 시각으로,
지혜의 시각으로 해석하기가 너무 어렵다.
성경 속에는 수많은 인간들의 견해가 너무도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 속에 나타나는 것을 문자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 속에서 인간들의 편협하고 옹졸한 견해, 생각들을 버리고
진리로써 해석하고 받아들이라.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절대 종교를 바꿀 수 없는 타종교 신자를 만나더라도
애써 개종하려 들지는 말라는 말이다.
그로인해 다툼과 시기와 전쟁을 일삼고자 한다면
그것보다는 그 종교 안에서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도 있음을 알라.
성경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열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을 올바로 볼 수 있다면 그 속에서 불경을, 부처를, 진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올바로' 믿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로 믿고 실천하면 불교를 믿어도 기독교를 천주교를 믿어도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해탈에 이를 수 있지만,
'올바로' 믿지 않는다면 불교를 믿든 기독교 천주교를 믿든
모두가 지옥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경에도 이런 말이 있다.
'태생에 의해 성직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태생에 의해 성직자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로 인해 성직자가 되기도 하고,
행위로 인해 성직자가 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술자가 되며,
행위에 의해 상인이 되고, 또한 행위에 의해 고용인이 된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에 의해 신하가 되고, 행위에 의해 왕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믿고 실천하는가 하는 그 행위이지,
어떤 종교를 믿는가는 그 다음 문제다.

참되게 믿으면 기독교를 믿어도 불교를 믿는 것이지만,
올바로 믿지 않는다면 불교를 믿더라도 외도를 믿는 것이다.
반대로 참되게 믿으면 불교를 믿어도 기독교를 믿는 것이지만
참되게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를 믿더라도 사탄을 믿는 것일 뿐이다.
참되게 믿으면 그 사람 안에 본래 구족되어 있는 부처를 깨닫게 되고,
참되게 믿으면 그 사람 안에 하느님이 거하시게 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종교를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종교를 믿는가에 있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어떤 종교라도 좋다.
어디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있다.
부처님과 하느님은 다른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르다고 믿고,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견해고, 관점일 뿐이지
'그 분'들의 입장이 아니다.

'그 분'들은 사실 '들'이 아니다.
'들'로써 둘로 혹은 여럿으로 나뉘는 분이 아니시다.

이 세상이 온전한 진리의 나툼이며,
온 우주 어디에도 법신의 숨결 아닌 것이 없을진데,
어찌 하느님은 법신이 아니고, 예수님은 법신이 아닐 수 있겠는가.
어떻게 신부님이나 수녀님, 목사님은 법신이 아니고
타종교 신자라고 법신으로써의 본래불이 아닐 수 있겠는가.

나누기 시작하면 천차만별로 갈라지지만
하나로 보기 시작하면
전체가 한 맛으로 귀일하게 된다.

그렇게 하라.
나누어 두고 보지 말라.
나눔으로써 더 옳고 그르며,
잘나고 못난 것을 나누고
그를 가지고 싸우며 다투고 심지어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

온 우주에 두두만물 진리의 나툼이며,
법신 부처님의 나툼일진데,
어디에서 타종교를 찾을 것이며,
어디에서 별도로 다른 신을 찾을 것인가.

부처를 부처라고 이름붙였듯이,
부처를 신이라고 이름붙일 수도,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싸워서 좋을 것이 무엇인가.
나누어서 좋을 것이 무엇인가.
큰 진리의 관점에서 전체를 바라보라.

어떻게 믿고 신앙할 것인가.
어떻게 다른 종교인을 대하고, 다른 종교를 대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Posted by 법상



[파주 보광사, 산사에 늦은 봄눈이 내립니다.]

어떤 한 경계에서
가슴 시 린 쓰라린 아픔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아픔을 딛 고 일어서는 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공만을 바라고
바라는 대로 잘 되어지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겠지 만,
사실 늘상 성공만 하고
바라는 바 대로 이루기만 하 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내면의 뜰은 공허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실패 속에서
또 그 아픔 을 딛고 일어나는 그 속에서
더 강인해 질 수 있을 것 이고,
바라는 바가 좌절되어지는 그 속에서
좌절을 딛고 일 어설 수 있는 지혜로움이 생겨나며,
세상을 얕보지 않 을 수 있고
좀 더 겸손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 다.

요가를 가르치는 분이라거나
몸 다스리는 법에 대해 강의하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니
그 분들 비슷한 공통점이
어렸을 때 죽고 싶을 만큼 몸이 너 무 허약했다고들 그래요.

너무 몸이 약하고 병이 많다보 니
건강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고
그랬으 니 제 몸 죽어나지 않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겠습니 까.

제 몸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건강이라거나, 운동이라거나, 요가라거나
아무리 얘기를 해 줘도 나몰라라 하지
죽기 살기로 뛰어들어 공부할 수가 없어 요.
뭐. 당연한 일이지요.

한 번 아파 본 사람만이
그 것을 두 번 다시 경험하지 않으려고
정말이지 피나는 노력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에는 생각지 못하게
그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고
능통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취직 할 때도
쉽게 쉽게 좋 은 직장 취직 잘 한 사람은
직장 고마운 줄 잘 모릅니 다.
그러니 그만큼 열심히 일 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 요.

그런데 한 1년이고 2년이고 백 수 백조로 있다가
실업자로 논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 고 눈치보이고
어려운 지 충분히 경험했다가 어렵게 어렵게 취직한 사람 은
정말 고마운 마음으로 즐겁게 열심히 일 합니 다.

어지간히 어려운 일, 치사한 일이 있어도
꾹꾹 참고 견딜 수 있는 힘도 생기고
일 그만두지 않으려고,
집에서 논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건지 잘 아니까
회 사에서 힘겨운 일이나, 답답한 일이 생겨도
어지간하 면 뛰쳐 나올 생각 않고 최선을 다한단 말입니 다.

제가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 만 나다 보니까
여러 번 보아온 일입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되었다거 나
주식 투자해서 대박이 났다거나 그랬을 때
당장엔 이 경계가 '행복'이라고 느끼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한 번
노력 도 안 하고 큰 돈을 만져 본 사람은
절대 소박하고 정직하게 작은 돈 벌면서 살 수가 없어요.
수십억 수백 억을 쉽게 벌었다면
분명 쓰는 것도 아주 쉽게 쓸 수 밖 에 없고,
쉽게 쓰는 습을 익혀 놓으면 그게 결국 업이 되고 맙니 다.

그러니 그 사람은
계속해 서 요행만 바라지
정직하게 내가 일한 만큼 돈 벌면서
소박하게 살아갈 수가 없어집니다.
어디 몇백억 쉽게 벌 어 쉽게 막 쓰던 사람이
한달에 일이백만원씩 받아가면 서 정직한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처음엔 이 경계가 행복 인 줄 알았겠지만
결국에는 사람을 망쳐놓는 역경계 였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또 수행도 마찬가지입니 다.
멀쩡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 한테
아무리 부처님 가르침 가르쳐주고
행복에 이르는, 평화와 자유에 이 르는 길이라고 말을 해도
그리 크게 느끼지 못합니 다.

그 사람은 지금도 충분히 행복 하거든요.
그런데 뭐하러 또다른 행복을 목숨걸고 찾겠어요.
물 론 수행하고 공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간절하지 못 하고
그러다 보니 수행도 적당히 하고
시간 있을 때, 마음 내킬 때 적당히 하지
이게 생사를 결단짓는 중대한 문 제라고 여기면서
미친듯이 달려들지 않는단 말입니 다.

그런데 한 번 삶의 저 아래 진 흙탕에
떨어질 때까지 떨어지고,
괴로울 때까지 괴로워 해 보고,
정말 죽기 직전까지 갈 만큼, 자살하고 싶을 만큼
삶에서 아파하고 괴로워 해 본 사람은
이 가르침이 너 를 살려줄 수 있다 하고
이 가르침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 다 하면
정말 죽기 살기로 수행하고 정진하지 않을 수 없는 겁 니다.

실제로 그래요.
너무나도 큰 괴로움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죽고싶을 만큼 아파하는 사람은
불법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하 는 그 말을
정말 뼛속 깊은 곳에서 받아들이고
온몸을 다 바쳐 서 죽기살기로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너무 괴로워서 자살하겠 다고 어떤 사람이 찾아왔길래,
또 자살밖에 길이 없다고 워낙 확고하게 이야기 하길래
기왕에 자살 할꺼면
내 몸 내가 죽이면 그것 큰 죄가 되니까
법당에서 절하다가 엎어 져 죽으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가만 생각하다가 그러겠노 라고 하셨지요.

전 그 분 무슨 철인인줄 알았 습니다.
하루 종일 밥 생각도 별로 없고 절만 하시는데
밤 도 꼬박 새시면서 절만 하시는데
정말 절하다가 죽으 면 어쩌나 걱정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절대 절 하다가는 안 죽더라고요.
그렇게 한 몇 일을 하시더니만
죽어가야 될 사람이 생 기있는 눈을 뜨고는
이제 가겠다고 해요.

죽으러 가겠다는 말인지 알았 는데
살 생각이 생겼노라고 하시면서 돌아가셨지요.
집 에 돌아가서 뒷얘기를 들어보니까
매일같이 3000배 이상 절 을 하셨다고 그럽니다.

지금은 문제가 다 해결되었어 요.
문제 다 해결하고
나 살려준 것이 불법이다 싶어
불교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 래서 지지난 달인가 짐 다 싸들고
이 밝은 길 따라 출가하 겠노라고 오셨더랬습니다.
지금 행자생활 열심히 잘 하 고 계실겁니다.

이 분이 괴로운 역경이
자 살하고 싶을 만큼의 괴로운 역경이 없었다면
이렇게 다시 태어날 수 있었겠어요?
아마도 나중에 스님 되시면
훗날 설법하실 때 신도 님들께 당신 이야기
절절하 게 웃으면서 이야기 하실 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괴로움을 모르는 사람 은
괴로움을 당해서 아파해 보지 않은 사람은
또 역경 속에 서 좌절해 보지 않은 사람은
더 큰 행복 속으로 들어가 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는 삶이라는게 어때요?
지금 당장 괴로움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행복 의 밑거름이 되고,
지금 당장 행복인 것 같지만
그것이 사실은 괴로움의 시작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 까.

역경이 곧 순경이고
순경 이 곧 역경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역경과 순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았을 때
그 순간 괴로울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겠지만
눈에 보이 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역경이 다, 순경이다,
혹은 괴로움이다 즐거움이다,
이렇게 나누어 놓는 마음만 없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경계는 그저 분별없는 텅 빈 경계일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경계들을
죄 다 두 가지로 나누어 놓고
어느 하나는 선으로 어느 하나는 악으로,
어느 하나는 행복으로 어느 하나는 괴 로움으로,
그래 놓고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만 정신이 없었습 니다.

그러다 보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무분별의 참된 지혜의 눈을 가지지 못하 고
삐뚫어지고 왜곡되고 치우친 관점만을 지니게 된단 말입니 다.
그러니 거기에서 행복과 불행이 생겨나지요.

이를테면 '건강과 질병' 이렇 게 나누어 놓고,
우린 건강하기만을 바라면서 삽니 다.
건강하면 좋은 것이고
질병이 걸이면 나쁜 것이라고 분 별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질병에 대해서 나쁘다 고 분별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또 당장에 건강하다고 좋아하면서
안일하게 대처하여 운동도 안하고 몸도 안 돌보게 되면
겉으로는 건강이지만 내적으로 언젠가 터질지 모르는 질병 을
안고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질병이 걸림으로써
몸의 건 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도 알 게 되고,
그로인해 앞으 로 더 열심히 운동하고 심신을 단련해야겠다는 것도 알게 되 고,
또 내면에 쌓여있던 탁하던 기운들도
한 며칠 앓 아 누움으로써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게도 되는 것이지 요.

그러니 질병은 나쁜 것, 건강 은 좋은 것
그렇게 나누어 놓을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질병이 걸리는 것도
좀 더 넓고 지혜로운 시각으로 보 면
우리를 공부시키는 것이고, 이끄는 자성불의 나툼인 것입 니다.

역경이 처해 봐야
비로소 괴로운 줄 알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게 되며
그렇게 됨으로써 부처님 가르침을 좀 더 바르게
치열 하게 수행하려는 마음을 내게 되었다면
그 역경은 도리어 불법 으로 이끌려는 방편 공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경계를 가지고
역경이다 순경이다 하겠습니까?
다 우리 인간들이 만들 어 놓은 분별심일 뿐이지
이 법계는 항상 공평하고 여 여할 뿐입니다.

나쁠 때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가 가장 좋을 때일 수 있고,
좋을 때라고 생각하 지만
그 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 일 수 있는 것입니 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 다'는 말이 있잖아요.
젊어서 뿐 아니라 늙어서도 다 마찬 가지지요.
고생은 돈 주고 사서라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만 큼 우리 인생을 값지게 만들어주고
우리 삶에 밑거름 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항상 성공만하고
항상 마음 대로 하고 살아온 사람,
실패나 역경을 경험해 보지 못 한 사람은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이겠습니 까.

역경 속에서
수많은 실패 속에서 이겨내고
비틀비틀 쓰러질 듯 하다가도 오뚝이 처럼
당차게 일어서면서 세상을 살 줄 아는 사람
그 사람 은 내면에 딱 힘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계 속에 서도 이겨낼 수 있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경계에도 속지 않 고 당당할 수 있는
그런 내면의 중심이 잡힌 사람이라는 거지요.

한 가지 괴로운 경계가 온다 고 했을 때
우린 '괴롭다'고만 생각하지
그 경계의 고마운 점, 이익되는 점은 보지 못한단 말입니 다.

그러니 이런 저런 분별 하지 말고
오직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합니 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지금 현재 법우님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즐거우십니까 아니면 괴로 우십니까?
일이 잘 풀리는가요 아니면 잘 안 풀리는가요?
지금 의 경계가 역경입니까 순경입니까?

아닙니다.
역경도 역경이 아니고
순경도 순경이 아니며,
괴로움도 괴로움이 아니고
즐거움도 즐거움이 아닌 것입니다.

순역의 양 극단의 분별을 다 놓아버리세요.
다 놓아버리고
내 앞에 다가오는 그 어떤 경계라 도
부처님의 나투신 경계로 즐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러면 모두가 고마운 공부의 꺼리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한없이 자유롭습 니다.
역경도 순경도 아니고
다만 여여하고 평등한 하나의 순수한 경계일 뿐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괴로 운' 경계란 없는 것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서 '즐거운' 경계 또한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경계는
다만 그러한 경계일 뿐
좋고 나쁜 경계는 아니란 말입니 다.

괴로움도 고마운 공부의 재료 이고,
즐거움도 고마운 공부의 재료인 것입니다.
역경이든 순 경이든
우리 마음 속에서 분별해 가지고
행 불행을 마음 속 에 품고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순역의 경계,
즐거움 괴로 움의 경계를 다 놓아버리고
무분별로써 일체를 다 받아들이 면서
자유롭고 당당한 걸음을
휘적휘적 내딛으시기 바랍니 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평화 롭습니다.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아닙니 다.

모든 사람이
지금 이 순간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다 놓아 버리고 나면
지금 이 자리가 부처님의 자리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법주사의 금강문과 천왕문]


집착하는 까닭에 탐욕이 생기고,
탐욕이 생기는 까닭에 얽매이게 되며,
얽매이는 까닭에
생로병사와 근심, 슬픔, 괴로움과 같은
갖가지 번뇌가 뒤따르는 것이다.
[열반경]




집착과 탐욕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다.
집착을 놓아버리고, 탐욕을 놓아버리면 괴로움은 저절로 없어진다.

우리 삶의 목적이
무언가를 자꾸 집착하고 탐욕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지혜로운 자의 삶의 목적은
내 안에 바라는 바, 집착하는 바를
어떻게 하면 놓아버리고 비워버려
홀가분하고 고요하게 살아가느냐에 있다.

놓고 비우면 괴로움은 없다.
지금 괴로운 것이 있는가.
그것은 탐욕 하는 것, 집착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을 놓아버리면 괴로움은 사라진다.

극단적으로 몸뚱이 집착심을 놓고,
살고자 하는 욕망과 집착을 놓아버리면
지금 이 순간 죽음이 오더라도 괴로울 것이 없다.

끝에 가서는 삶에 대한 집착까지도 놓아버렸을 때
잘 죽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하물며 살아있으면서 온갖 집착을 가지겠는가.

물질적인 소유에의 집착,
자식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집착,
내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는 생각에 대한 집착,
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면 거리낄 것이 없고,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집착과 탐욕을 놓아버릴 것인가.
온전히 놓고 비울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관찰하는 것이다.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어야
나를 괴롭히는 원인이 집착과 탐욕임을 알 수 있고,
바로 알고 바로 보았을 때
집착과 탐욕은 소멸된다.

내 삶의 모든 문제를 종식시키고 싶은가.
그렇다면 내 삶의 모든 문제를 만들어 낸 원인인
집착과 탐욕을 관하여 놓고 비우라.

탐욕을 채움으로써
완전한 행복과 평화에 이른 사람은 없다.
탐욕을 관하여 놓아버림으로써만
지고의 행복과 평화는 찾아온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