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외로움과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철저한 고독과 마주한다는 것은,

한 편 바깥 세상에 대한
모든 기대와 관심을 다 놓아버리고
혼자서 걷는다는 말도 되지만,

또 한 편 그 내적인 의미는
내적인 고독, 내적인 침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는
수많은 생각과 기억, 고정관념, 편견, 판단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것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혼자서 가만히 있는다고
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예요.
다 혼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머릿 속에서 온갖 생각과 기억들이 춤을 춘다면
그 사람은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과거로부터 온 생각과 기억 판단들과
함께 있는 것이지요.

혼자 있는다는 것은,
내면적으로 완전히 침묵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적으로 침묵한다는 말은
과거로부터 배워왔거나 익혀왔거나 들어왔던
수많은 기억, 판단, 편견, 이미지, 사상, 고정관념, 생각들을
온전히 비워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생각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이미 과거의 일들입니다.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수많은 복잡한 것들에
얽매여 있다면
결코 침묵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말 없는 것이 침묵이 아니예요.
내적인 침묵이 참된 침묵입니다.

과거의 기억을 들추어 내지 말고,
그 어떤 가르침이나 사상, 이데올로기도 따르지 말고,
누군가에게 혹은 어디에선가 배워온 것을 쫒지 말고,
지금 이 순간
고요 속의 즉각적인 통찰만을 따르면 됩니다.
온전히 내가 되라는 말입니다.

지금의 나를 돌이켜 보면,
만들어진 나, 교육되어진 나, 훈습되어진 나일 뿐
지금 이대로의 텅 빈 나가 되지 못합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까지 가져오지 마세요.
그랬을 때 우리는 온전히 내가 될 수 있습니다.
내적으로 완전히 침묵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배운 것, 익혀온 것을 바탕으로
지금을 판단하지 말고
아무런 판단이나 기억도 일으키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완전한 내적 침묵 속을
거닐음도 없이 거닐고 있음입니다.
그것만이
내 안의 온갖 기억들을 비워낼 수 있는 길입니다.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지 말고,
깨달음을 찾아 나서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찾는다는 것은
이미 또다른 색안경이며 기억, 앎을 만드는 것일 뿐이고,
또다시 '교육되어진 나'를 만드는 일이 될 뿐입니다.

내 안에는 너무 많은 생각, 사상, 기억, 앎들이 있어요.
그로인해 우리는 침묵하지 못합니다.
그로인해 속 뜰의 나 자신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어요.

참나를 찾기 위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또다른 스승을 찾아 나서고,
또다른 성전을 찾아 나선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또다른 사상을 배우고자 하는 것일 뿐이고,
내 안에 또다른 관념을 주입시키는 것밖에 되지 못합니다.

불교는 쌓는 공부가 아니라 비우는 공부입니다.
다만 방편으로 비우기 위해 쌓는 것을 가르칠 뿐이예요.
그동안 제가 한 말이
'비우기 위해 쌓는 것'을 말했다면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비움'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온전한 비움을 위해
내적인 완전한 침묵을 위해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애써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아무런 분별도 없이,
아무런 판단도 없이,
과거를 떠올리거나 미래를 계획함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마음 모아 알아차리면 됩니다.

아무런 판단 분별 없이
'알아차림'만이 있을 수 있다면
바로 그 순간
알아차리는 나도 없고 알아차려지는 대상도 없습니다.

관하는 나가 없는 이유는
'나'라는 것은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이고,
그 과거의 기억으로 걸러진 판단 분별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관할 때 '관하는 나'도 없고, '관하여지는 대상'도 없습니다.

다른 것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생각이며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하되,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그 어떤 분별도 일으키지 말고,
다만 관하면서 그것과 하나되어 흐르기만 하세요.

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궁극의 수행이며,
수행 아닌 수행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우리 인생 전체를 놓고 살펴보자.
우리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평범한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나를 확장시키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나'라는 에고를 증장시키는 것,

다시말해 ‘나’라는 상(相)을 강화시키고, 확장시키고,
확대시키며, 널리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다.
‘나’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무엇이기 때문에
나라는 진짜배기 실체를 확장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라고 생각하는 상’, 즉 허상을 강화시키고 확장시키려는 것일 뿐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간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사는가?
바로 아상을 늘리려는 목적, 에고를 확장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내 돈, 내 소유를 늘리고자,
내 집, 내 차, 내 사람, 내 사랑, 내 명예, 내 권력을 늘리고자,
나아가 내 학식, 내 고집, 내 사상, 내 종교, 내 가족, 내 나라,
온갖 ‘내 것’이라는 아상을 늘리고 확장하고 확대시키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준다.

이처럼 삶이란 끊임없이 ‘내 것’을 늘리는 작업의 연장이다.
그래서 이 ‘나의 확장’에 성공한 사람은
인생을 성공한 것이고,
여기에 실패한 사람은 인생에서 실패를 한 것이 된다.

‘나’라는 상을 확장시키는데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사장, 회장, 정치인, 종교인, 교수, 의사, 판검사...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직업의 요소들이 모두
아상의 종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나 자기가 처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직업 속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싶고, 자기를 과시하고 싶고,
자기라는 상을 확장, 확대하고 싶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거나, 유명세를 타거나,
명예나 지위가 높아지거나 하는 것 등을 통해
자신이 ‘더 높아진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상의 확장이요 에고의 확대다.
그 직업이나 직책 같은 이름을 자기 자신으로 동일시 하는 것이다.

 

 



보통 학생 시절에는 공부를 잘 함으로써,
혹은 반장이나 학교 회장 등이 됨으로써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아상을 키워가며,
회사에 취직하면
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진급을 통해
아상을 확장시키려 하고,
사업을 시작했다면
보다 많은 돈을 끌어모음으로써
나라는 아상은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의 경우에
20대 즈음이 아상이 확장되기 시작하는 때이고,
30대, 40대를 거치며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아상은 한없이 확장되고 솟구친다.

그러나 아상이라는 것의 속성이
무한정 확장될 수 없는 것이며,
언젠가는 축소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기에
아무리 확장되던 아상도 때가 되면 축소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50대, 60대 즈음이 되어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게 되거나,
사업을 하다가 망했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거나,
몸에 큰 병이 왔다거나,
혹은 유명인들이 젊었을 때 솟구치던 인기가 시들어져
시대의 뒤안길로 잊혀져 간다고 느낄 때,
그 때 우리는 엄청난 아상의 소멸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아상의 소멸은
곧 ‘나’의 소멸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최고의 좌절이며, 실패이고,
더 이상 이 세상에 나를 드러낼 방법이 없어지는
최악의 절망의 순간이 되곤 하는 것이다.

물론 나이와는 상관 없이
젊었을 때 아상의 소멸을 경험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잘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비리 혐의로 구속이 되었다거나,
아름답던 외모가 화상으로 흉측하게 변했다거나,
건강하던 몸에 큰 병이 오게 되었다거나,
삶에 어떤 큰 고통과 좌절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의 아상은 완전히 꺾이고 마는 것이다.

내가 보아 온 가장 큰 아상의 소멸은
때때로 목격하게 되는
자식의 죽음, 부모의 죽음, 가족의 사망과 같은 때이다.
나와 완전히 동일시하고 살아왔던 사랑스럽던 자식이
갑자기 죽게 되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전히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사실은
누구나 아상의 확장과 확대를 꿈꾸며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아상은 축소되고 꺾인다는 것이다.

즉 아상의 확대에서 오는 즐거움은
결코 영원하지 않고, 유한하며, 제한적이다.
잠시 즐거울 뿐이다.
그 즐거움, 그 아상확장의 유혹에 빠져 집착하게 된다는 것은
곧 언젠가 오게 될 불행, 고통을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의 목적은
여전히 아상확장에 있다.
그것을 결코 버릴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진리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고,
가장 큰 괴로움으로 여기는 아상의 축소, 아상의 소멸을
오히려 가장 큰 즐거움,
가장 큰 수행의 목적, 진리의 목적으로 여긴다.

세상에서는 아상의 축소를 가장 괴로워하지만,
진리에서는 아상의 축소가 가장 즐겁고,
세상 사람들은 아상의 확장이 유일한 삶의 의미이지만
진리의 길을 걷는 수행자에게 아상의 확장은 곧 절망이다.

사실은 아상이 무한히 확장되는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절박한 순간이요, 위기의 순간이다.
아상이 확장될 때, 집착과 욕망도 함께 확대되며
우리는 우리 안에 잠재적인 괴로움의 크기를 한껏 부풀리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아상이 축소될 때, 아상이 꺾이고 좌절될 때,
바로 그 때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회의 순간이요,
영적인 성장을 도모하고,
삶에서 한 단계 정신적인 도약을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깨달음의 순간인 것이다.

여기에 인생의 아이러니가 있다.
우리 눈에는
아상이 확장되는 것이 행복이고, 성공이며,
아상이 축소되는 것은 좌절이고, 실패로 보이지만,
사실은, 진리의 눈에는
아상이 확장되는 것이 좌절이고, 위기이며,
아상이 축소되는 것에서 영적 성장과, 깨달음의 기회가 오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의 이치를 눈여겨 보라.
그동안 아상을 확장시키려고,
성공하려, 진급하려, 돈 벌려고, 지위를 얻으려고,
앞도 뒤도 안 돌아보고,
자식이며 가족도 희생시키면서,
동료들을 밟고 일어서면서까지,
정신 없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아상확장의 길 위를 미친듯이 질주하던
우리의 삶에 제동을 걸고 멈춰 서서 돌이켜 보라.

내가 인생의 성공이라고 생각하던
바로 그 길이 바로
아상확장, 아상확대의 길은 아니었던가.
‘내 것’이라는 소유의 확대,
‘나’라는 존재감의 확대,
이 사회 속에서의 ‘내 영향력’의 확대와
내 이름이 드러나는 것에
너무 병적으로 집착해 왔던 것은 아닌가?
바로 그것이 ‘아상확장’의
어리석은 길이었음을 모른 채.

물론 외적으로는 그런 길을 걷더라도,
내면에서 집착함이 없고,
머무는 바가 없으며,
자연스럽게 인연 따라 그 길 위를 걷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외적인 확대와 확장 속에서도
아상은 한 치도 확대되지 않은 것이다.

그랬을 때는
그 사람의 직업이나 일이
곧 수행의 길이며, 마음공부의 길과 일치한다.
또한 물론 그런 사람이 종종 사회 곳곳에서
아름다운 삶의 가치를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다.

그 사람은 아무리 유명세와 지위와 부와 명예를 얻었더라도
전혀 거기에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그것이 자기 자신의 실체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다만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일 뿐이지
내가 언제까지고 집착하여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때가 되면 소멸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런 사람은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부유함을 수많은 사람과 나누고, 사랑을 전하며,
한없는 겸손함과 소박함의 덕목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연예인들 가운데
끊임없이 자선하며 아무런 바람 없이 남몰래 기부하는 이들이나,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에서 보듯이
사업으로 모은 재산을 많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근검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아가는 이들,
이런 사람은 아상의 확장에 집착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아상이 확대되는 것을
곧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가 실재적으로 확대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삶의 진실을 바로 본다면,
아상이 확대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기요,
아상의 소멸, 아상의 축소야말로 즐거움이며 기회의 순간이다.

아상의 확대를 경계하라.
아상이 확대되고,
돈을 많이 벌며, 계급이 높아가고, 인기가 늘어가며,
소유가 늘어가고, 지위가 높아져 갈수록
내 영적인 토대는 흔들리기 쉽다.

그렇기에 아상이 확대되었을 때,
바로 그 때가 가장 중요한 위기의 순간임을 알고,
명명백백하게 자기 자신을 지켜봄으로써
그 아상의 확대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외적으로 드러난 성공, 부, 명예, 권력, 지위, 명성들이
곧 ‘나 자신’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것을 나와 동일시하며,
그로인해 내가 높아지는 착각에 빠지고,
교만과 아만과 환각에 취해 있게 되면
삶은 빛을 잃고 만다.

반대로
아상의 축소를 즐거워하라.
아상이 축소되고 소멸되는 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들의 기쁨이자 선열미의 양식이다.

아상의 축소를 즐거워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들은 진급하는 것을 즐거워하지만,
진급에서 떨어지는 것이야말로 아상의 축소이니
그것을 즐거워 하라는 것이다.
도저히 즐거워하지는 못하겠다면
진급 낙선 그 자체를 괴로움이라고 단정 짓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 눈에는 괴로움일지라도 또 다른 차원에서 그것은 즐거움일 수도 있다.
물론 보다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완전 무분별의 평등한 것이다.
진급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진급 낙선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거나 대박 나는 것을 즐거워하지만
돈을 못 벌고 가난할지라도
그 아상의 축소를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부자였다가 갑자기 사업이 망해 가난해 졌을지라도
그것 자체가 절대적인 괴로움인 것은 아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 그것은 아상의 소멸이요,
그렇기에 그것은 또 다른 기회이자,
영적인 차원의 진보로 발전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보통 일반인들은 사업이 망했다는 평등한 하나의 사건에
절망, 패배, 실패라는 평가와 판단을 함으로써 불행으로 삼지만
지혜로운 이는 그 사건이야말로 아상의 축소를 가져다주는
새로운 영적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임으로써
삶의 전환을 삼을 수도 있다.

내 명예와 명성과 인기가 떨어지더라도
거기에 기죽고, 풀 죽어 있을 필요가 없다.
그것이야말로 아상의 축소요,
그것이야말로 모든 성자가, 수행자가, 현자들이 기뻐한 일이다.
일부로라도 세상의 명예와 명성을 피해 은둔했던
옛사람의 삶을 생각했을 때,
이렇게 여건이 저절로 마련되어 진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좋은 일이며, 법계가 나를 위해 마련한 공부의 때인가.

사랑하는 이와 이 생에서 이별을 고했더라도
거기에 좌절하고, 아파하며 언제까지고 고통받기만 할 것은 없다.
언젠가 우리는 그 누구와도 이별을 해야 할 것이며,
단지 그 때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별과 죽음은 또 다른 차원에서
나를 아상소멸과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게 함으로써
그로인해 삶의 크나큰 영적 성장을 도모할 수도 있고,
그로인해 좌절과 방황 속에서 끝을 보고 말 수도 있다.

사실 아상의 축소든 확대든 모든 상황이나 사건은
어떤 분명한 하나의 가르침과 삶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을 지혜로운 이는 바로 보고 거기에서 얻을 것을 얻지만
어리석은 이는 외적인 현상만 보고 판단함으로써 고통을 얻을 뿐이다.

 

 



아상의 축소, 아상의 소멸은
이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고,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져 버리는 것 같으며,
내가 상대보다 더 작아지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사실은 이 세상이 버린 대신 진리가 나를 선택한 순간이며,
물질적으로 적어지는 대신 정신적으로 커지는 것이며,
이번 생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대신 다음 생의 즐거움이 커지는 것이고,
비로소 깨어있음, 비움, 진리, 깨달음, 평화라는 덕목이
내 존재 위를 아무런 걸림 없이 자유로이 오고 갈 수 있는
토대가 완성된 순간인 것이다.

어리석은 이는
아상이 축소될 때 괴로워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아상의 축소를 반긴다.

더 나아가
어리석은 이는
아상이 축소될 때 괴로워하고, 아상이 확장될 때 즐거워하면서
양 극단에 좌지우지되는 휘둘리는 삶을 살지만,
지혜로운 이는
아상의 축소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상의 확장에도 집착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아상의 확장과 축소에 걸리지 않은 채로
언제나 여여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해 간다.

아상이 확대되면 거기에 걸리지 않으면서
그 확대된 것을 이웃과 나누며 살면 되고,
아상이 축소된다면
그것을 자연스러운 비움으로 받아들이고,
아상타파라는 금강경 실천의 기회로 받아들이며,
비로소 수행자가 될 최고의 조건이 찾아왔다고 생각함으로써
그것을 영적인 전환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실패를 두려워 말라.
실패는 곧 아상 소멸의 때이니 실패도 즐거움의 소식이다.
직장을 잃을까 두려워 말라.
직장 퇴출이 곧 아상 소멸의 때이니 그 또한 또 다른 기회의 순간이다.

명예나 명성을 잃을까 두려워 말라.
아무런 명성 없이 은둔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큰 공덕이 깃드는 때이다.
가난을 두려워 말라.
가난한 삶이야말로 모든 성인과 현자가 걸어간 삶의 방식이다.

남들의 비난이나 욕 얻어 먹는 것을 두려워 말라.
비난받을 때가 바로 아상 소멸의 때이니
그 때야말로 내 업장이 소멸되는 감사한 순간이다.

심지어 죽음조차 두려워 말라.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또 죽은 뒤 49일의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열려있는 영적 전환의 순간이다.
죽음 직전에 ‘나무아미타불’ 10번을 부르면 극락간다는 말 속에는
죽음 직전이라는 완전한 아상소멸의 순간을 받아들이고
열린 마음으로 수용함으로써
금강경의 무아상, 아상타파의 깨달음이 깃들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위기의 순간,
모든 아상 축소의 순간은
외적으로는 고통인 대신에
그 내면적으로는 또 다른 차원의
성스러운 배움의 기회와 성장의 기회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사실은 아상이 축소될 때가
기쁘고 즐거운 때이다.
성숙한 이는 아상의 축소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한 때로 받아들인다.

아상이 축소되고, 내가 작아질 때야말로
법계가 나에게 주는
자연스러운 아상타파의 성스러운 법문을 베푸는 순간이다.
그 사실에 즐거워하라.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