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게 살라.
단순하게 사는 것이 좋다.
단순한 것이 삶을 가장 분명하고 명료하게 해 준다.

우리 삶이 단순하지 못한 이유는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생각은 끊임없이 뿜어져 나온다.
언제 어느 때고 상관없이 쉴 사이 없이 올라온다.

그런데 이 생각이란 것이 솟아나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언제나 과거나 미래의 것들과 연관지어 일어난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의 현재에 집중하고 있을 때
생각은 맥을 못 추고 사라지곤 한다.
그러나 과거를 들추어 내거나, 미래를 상상할 때
생각은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다니면서
우리 내면을 복잡하고 정신없이 쏘 다니곤 한다.

그렇게 과거나 미래를 들추어 내어
온갖 생각의 밭에 양분을 듬뿍 뿌려 주고 나면
이제부터 우리의 마음은 정신 없이 바쁘고 복잡해 지게 마련이다.
생각하는 것들이 그대로 짐이 되고, 일이 된다.
이처럼 생각의 틀에 갇힘으로써 우리의 삶은 더없이 무겁고 버거우며
중독적으로 일에 집착하고, 짐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로 넘쳐난다.
그것도 온갖 경우의 수를 다 헤아리면서
내가 생각한 바 대로 세상을 이끌고 나가려는 욕심과 집착까지
함께 가세를 하여 우리의 삶은 단순함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만다.

생각이 많으면
정신이 복잡해지고 곧 삶도 함께 복잡해진다.
복잡하고 정신 없는 삶은 곧 내면에 틈새를 만들어낸다.

작은 틈 하나가 점점 더 커져 큰 둑을 터지게 하듯이
그 틈새를 비집고 욕망과 집착 그리고 온갖 소유욕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은 복잡성이 그 밑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복잡하고 정신없으며 바쁘게 살다 보니
이제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인이고
단순하고 명료하며 느리게 사는 사람은
무능하고 시대적 감각에 뒤쳐지는 못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언제나 진리의 편에는
단순성과 명료성이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인류의 수많은 성인의 삶에는 단순함과 그로인한 명료한 지혜가 반짝이고 있다.



단순함과 명료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찰나 찰나로 순간만을 사는 것이다.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바로 이 현실,
지금 여기의 이 삶만을 살아 나가는 것이다.

다른 시간을 다른 공간을 살 필요도 이유도 없지 않은가.
왜 지금 여기라는 생생하고 직접적인 삶을 놔두고
다른 과거나 미래의 다른 공간의 삶을 피상적으로 뒤척이고 있는가.

물론 때로는 과거를 뒤척이는 것이 위안을 줄 때도 있고,
따뜻한 미소를 머금게 할 때도 있으며,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삶을 더욱 열심히 살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과거나 미래에 속게 되는 것이다.
분명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꿈이 가져다 주는 속임수.

간밤에 단꿈을 꾸었다면 우리는 그 꿈으로 인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이요 환상에 불과한 것일 뿐이지 않은가.
왜 우리가 직접적이고 생생한 깨어있는 현실을 놔두고
꿈에 얽매이고, 꿈의 달콤함에 젖어 현실의 삶을 덜 살아가야 하는가.



과거나 미래를 살아갈 시간에
현재라는 순간을 더 깊이 있게 진하게 사는 것이
모든 명상과 수행의 핵심이다.

우리가 현재에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면서
과거나 미래로 끊임없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바로 생각이다.
우린 누구나 생각의 배를 타고 끊임없이 과거나 미래로 휩쓸리고 있다.

생각의 활동무대는 주로 과거 아니면 미래와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에 오직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는 정신으로 주의집중하게 되면
과거나 미래를 휘젓고 다니던 생각은 곧 사라지게 된다.

일 주일 후에 있을 레포트 발표와
한 달 후에 있을 중요한 고객과의 미팅과
일 년 후에 있을 시험이며 진급 발표며
몇 십 년 후에나 있을 안락한 노후준비를 위해
왜 지금 이 순간을 허비하며 정신없이 살아야 하는가.

훗날 있을 그 모든 일들을
왜 지금부터 끌어안아 고민하고 걱정하며 온갖 그로인한 생각들로 휩싸여야 하는가.
그렇기에 우리의 삶이 복잡하고 정신 없으며 항상 일이 많은 것이다.
실제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지금 여기’라는 현실은 별로 일이 없다.
그다지 할 일이 많지 않다.

다만 내 앞에 주어진 일을 하면 될 뿐이다.
현실에서 주어진 그것을 그냥 하면 된다.
거기에 무슨 많은 생각이 필요한가.

우리의 생각이 온갖 마음의 일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다.
생각은 늘 과거나 미래를 쏘다니며 온갖 일들을 붙잡고 온다.
그 중에 거의 대부분은 쓸데 없고, 필요 없는 짐인 경우가 많다.

꿈이 그렇듯, 과거나 미래가 그렇듯
생각은 환상이며,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생각이 나라고 착각하는 것이 생각의 실체성에 힘을 실어 주곤 한다.



생각은 내가 아니다.
판단이나 견해도 내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수많은 파편들 중 하나 일 뿐이다.
그 수많은 편린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기로 마음 먹어 놓고는
그 생각이 바로 나라고, 그 생각이 옳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집착하는 것일 뿐이다.

내가 어떤 생각을 했다고, 그 생각이 ‘내 생각’으로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연따라 상황따라 언제나 생각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다만 인연의 조화에 따른 생각일 뿐이지
그것이 곧 ‘내 생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일어나는 생각들을 잘 지켜보고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 대해 ‘좋다’ 혹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생각의 장난일 뿐,
그 상황 자체는 좋거나 나쁜 어떤 것이 아니다.

과거나 미래의 허한 양분을 빨아들여
나를 지배하려고 애쓰는 생각의 감옥에 갇히지 말라.
생각으로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다거나,
생각으로 모든 일을 해 낼 수 있다고 믿지 말라.

생각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생각은 우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정신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명료한 삶의 지혜를 놓치게 한다.

사람들은 생각 하나를 가지고
천상으로 지옥으로 얼마나 자주 왕래를 하곤 하는가.
스스로 만들어 낸 생각의 감옥에 갇혀
꼼짝 달싹 못하며 생각 속의 지옥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우리는 내 눈 앞의 현실을 놓치게 된다.
깨어있음이라는 ‘지금 여기’의 빛을 놓치게 된다.

그렇다고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미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생각에 얽매이고 생각의 감옥에 갇히지 않으면 된다.
생각이 일어나면 다만 그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라.
생각을 없애려고 애쓰지 말고 그대로 두고 다만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라.



보통 사람들은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온갖 지식들을 총 동원하고,
과거의 기억과 경험들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 등을
생각이라는 도구로 이리저리 끼워맞추고 조합함으로써
가장 명확한 일 처리를 할 수 있다고 믿는 듯 하다.

그러나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방법은
오히려 생각을 놓아버리고
다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고요함의 지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혜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심연에는 이미 지혜가 있다.
그것을 끌어다 쓰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저 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 전념(專念)하면 된다.
전념은 원초적 지혜이며 순수의식 그 자체이다.”

우리 내면의 깊은 심연에서 나오는 고요함의 지혜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여기’라는 현재에 깨어있는 주의집중을 통해서 나온다.
전념이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주의집중하여 알아차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내 눈 앞에 있는 현실을 살게 될 때
그저 현실만을 살아가면 된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온갖 지식들과 생각들을 동원하는 것은
오히려 삶을 번거롭고 정신 없게 만들 뿐이다.

다만 내 앞에 있는 그것만을 하라.
내일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라.
이미 지나 간 일을 끄집어 내어 생각하지 말라.

물론 꼭 생각을 써야 할 때가 있다면 생각을 사용할 수 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멍하니 살라는 말이 아니다.
아니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생각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말고
그 생각을 ‘나’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여기에서도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원칙이 통한다.
마땅히 생각을 일으키되 그 생각에 머물거나 집착함이 없이 생각을 일으키란 말이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살라.
생각으로 살지 말고 온 존재로써 살라.
온 존재가 그대로 직접 삶과 부딪치라.
내 앞의 현실만을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살게 될 때
우리 내면에 숨겨져 있던
단순함과 명료함의 지혜는 비로소 깨어나게 된다.

우리의 삶이 한없이 단순해 진다.
단순해 지면서 또렷해 진다.
삶을 사는 것 그 자체가 그대로 지혜의 움직임이 된다.

맑고 쾌청한 가을 하늘처럼
삶을 다만 살기만 하라.




Posted by 법상



이제 막 연초록의 잎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고
연초록의 새순들이 나무위로 내려앉으며,
노오란 생강나무와 분홍빛 진달래가
외롭던 산에 생기로운 벗이 되어주고 있다.

순간 파도처럼 산야를 스쳐지나가는
거샌 바람소리가 내 마음에 노크를 한다.
법당 풍경소리와 함께 바람에 부딪치는 낙엽소리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마음에 피어나는 봄꽃을 느낀다.

산은, 나무는, 꽃들은, 또 지난 해 땅에 떨어졌던 썩어가는 낙엽들은
이렇게 때때로 내 안에 생기로운 도반처럼 다가와 노크를 하곤 한다.
바람의 소리, 낙엽 소리, 물소리, 풍경소리들은 모두
내 안의 관조(觀照)의 빛을 일깨우는 우주의 경책소리처럼 들린다.

바람이 불어 와 대지를 스치고, 낙엽과 나무를 스치며, 내 뺨을 스치는
그 상서로운 느낌, 소리, 그것들을 가만히 느껴보고 있노라면
그 순간 내 마음은 표현할 수 없는 고요와 평안이 깃든다.

아직 바람은 차다.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창 밖으로 빗방울 소리가 대지를 적신다.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찬 바람을 느끼며
조근조근 낙엽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아,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은 내 몸은 하늘하늘 미묘한 설렘과
알 수 없는 적요, 가득함, 맑음, 밝음, 편안함, 차분함
같은 것들 속에 내맡겨져 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지금 여기’의 찰나로 돌아 와 보라.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며, 도반이며,
신이고 붓다 그 자체이다.

한번 내 존재를 가지고 실험 해 보라.
어떤 상황 속에서든 좋다.
바로 그 상황, 지금 이 순간의 그 상황이 바로
신을 만나고, 붓다를 친견하며, 내 안의 깊은 존재를 만날 수 있는 때다.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내 삶에 있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잠시 답답한 일이 있거나, 복잡한 생각들이 있거나,
대인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이 있거나,
회사 일로 인한 괴로움이 있더라도
언제든 잠시 한 생각 돌이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면
우린 무엇을 기다릴 것도 없이 직접 평화로운 정원에 도달할 수 있다.

왜 절에 가서 다리를 꼬고 앉아 참선을 시작해야만
고요와 평온과 삼매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아무런 괴로움이 없을 때만
우리 마음은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하는가.

우리 존재의 본래 속성은
지극한 평화로움과 고요함이며 깨어있음이다.
그러나 그 속성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과 만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어려운 일인가.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있기만 하면 되는데...

에크하르트 톨레는 그의 책 ‘고요함의 지혜’에서 말하고 있다.

“지금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한 순간밖에 없지 않은가?
삶은 언제나 '이 순간'이 아니던가?
이 한 순간, 즉 지금이 내가 도망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며,
나의 삶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오직 하나이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는 나는 어디에 있든 편안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편안하지 않다면
나는 어디를 가든 마음속에 불안이라는 짐보따리를 지고 간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
우리는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편안하다.
그것이 회사 사무실이 될 수도 있고, 꽉 막힌 도시의 차 안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바쁜 업무 중에 잠시 만나게 되는 짧은 순간일 수도 있고,
일이 안 풀리는 순간, 회사를 살리느냐 망하게 하느냐 하는 중요한 순간일 수도 있고,
직장 상사에게 꾸중을 듣는 순간, 동료들과 대화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순간이든 우리는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되는,
‘지금 이 순간’을 100% 존재하며 살아나가는 것을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을 묵묵히 지켜보고 바라보는 것이다.

아무리 편한 순간일지라도 마음이 ‘지금 여기’에 있지 않으면
그 마음은 평화가 아닌 번뇌요 복잡스런 순간이지만,
아무리 정신 없고, 큰 문제가 생겨난 순간일지라도
그 순간 마음이 ‘지금 여기’에 머물러 깨어있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바로 직접 그 자리에서 본연의 지혜를 보게 될 수 있다.

책에서는 또 말하고 있다.

“지금에 감사하고 지금에 경의를 표하라.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중요한 구심점이 될 때
삶은 여유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지금의 그 어떤 현실에도 경의를 표하라.
부처님께 예경하고, 신께 나아가 기도하듯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신께, 붓다에게 감사와 찬탄과 찬양과 경의를 표하라.
‘지금 이 순간’의 신을, 부처를 우리는 언제나 ‘지금’ 만날 수 있다.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지금을 사는 것이 삶의 구심점이 될 때
삶의 모든 문제들은 부처의 방식대로, 신의 방식대로,
지혜의 방식대로 여유롭고도 평화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모든 문제가 풀리는 그 진리의 열쇠가 바로 ‘지금 여기’다.



톨레는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삶에 대한 책임도 회피하는 것이다.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그러함'에
마음으로 반대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지금과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다.
삶과 조화를 이루겠다는 뜻이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매우 혁신적인 정신 수행이 있다.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을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안에서든 밖에서든 말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는 것은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고 온전히 살아내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인생 전체에 대한 직무유기이며 삶에 대한 회피이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 한가지는
오직 내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일이지,
미래를 위한 준비도 아니며, 목표 달성도 아니고, 노후 준비도 아니며,
진급도, 합격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온전히 느끼고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의 일체 모든 상황과 인연과 환경을
완전히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긍하며 반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것을 관하는 것,
그것은 곧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최선이며
언뜻 보기에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최고의 혁신적인 수행법이다.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순간과 다투려고 하지 말라.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상황을 통째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관하라.
내 앞의 삶과 투쟁하지 말고, 상황을 바꾸려 들지 말고,
지금 이 순간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 번뇌, 고민, 상황들일지라도
그것과 씨름하고 이겨내려 애쓰고 다투려 들지 말고
그저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다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가만히 비추어 보라.

신경쓰지 말라.
왜 이렇게 생각이 많고 번뇌가 많은 것이냐고 탓할 필요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 자연스러운 내면의 번뇌들을
나쁜 것으로 몰아붙이며 그것을 없애려고 애쓰는 내 다툼의 행이다.

내 안에서 혹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시비를 붙일 것도 없고, 탓할 것도 없다.
다만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고 다만 묵연히 지켜보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경계에 내 마음을 포개지 말라.
안팎의 경계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판단치 말라.
그저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인연따라 모든 것은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매 순간 순간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매 순간 순간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
그것이 수행과 정진, 마음공부의 핵심이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인생이 경이로움을, 존재가 신비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이 부처요 신의 나툼이 된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는 순간
나도 세상도 우주도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하루에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깨어있음의 빛을
지금 이 순간에 비추라.
그 빛이 지금을 비추는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지,
언젠가 있을 성도(成道)의 때란 없다.

계속해서 톨레는 말한다.

“불자들은 늘 알고 있던 진리였지만
최근 물리학자들이 과학적으로 밝혀낸 것이 있다.
이 세상에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이다.
겉모습 밑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만물은 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개체는 ‘지금 이 순간’이 취하는
특정한 형태를 준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긍정하는 순간 나는 생명의 지혜와 힘과 조화를 이룬다.
그 때 비로소 나는 이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일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별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이요, 상의상관성이다.
이 세상에는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사물도 없고,
아무 이유없이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건도 없다.

우주적인 전체의 진리성이
다만 ‘지금 이 순간’에 특정한 사물로 혹은 사건으로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말해 우주적인 진리성, 불성, 법신, 진리의 당체가
‘지금 이 순간’의 존재, ‘지금 이 순간’의 사건이라는 모습으로
끊임없이 내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며 번뇌들도
법신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이며,
내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며, 환경, 상황, 문제들 또한
불성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그 모든 일도, 사건도, 사물도, 사람도,
모두가 다 법신 진리의 나툼이며, 온 우주의 드러남이며,
부처의 시현이고, 신의 현현으로써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시공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란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모든 상의상관적인 연기법의 진리가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이며,
우주적인 전체성 속에서 법신불의 향기가 화신으로 나투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
‘지금 이 순간’을 느끼며 관하고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생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존귀하며,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행이요 수행이다.

‘지금 이 순간’이 부처이며 신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본질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의 전체이다.
끊임없이 놓치겠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그것이 수행자의 길이요 참된 삶의 길이다.



Posted by 법상



우리의 생각과 사고는 언제나 ‘과거’에 묶여 있으며
관심의 초점은 언제나 ‘미래’에 가 있다.
생각은 늘 과거의 연장이며
우리의 기대는 늘 미래를 꿈꾼다.

누구나 장밋빛 미래를 꿈꾼다.
아름답고도 찬란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미래가
언젠가는 내 앞에 그 화려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이 성공이나 부나 명성이나 지위일 수도 있고
혹은 여행이나 사랑이나 안정감일 수도 있다.
또 더 멀리 본다면 안정적이고 부유한 노후를 꿈꾸고 있을 수도 있다.

내일 있을 소풍이나 여행을 기다리며 부풀어 있을 수도 있고,
주말에 있을 미팅이나 데이트를 꿈꿀 수도 있으며,
이번 휴가 때 있을 해외여행을 부푼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또 아주 가깝게는
2~3분 뒤에 도착할 버스를 기다릴 수도 있고,
5분 뒤에 있을 쉬는 시간을 기다릴 수도 있으며,
10분 뒤에 있을 점심 시간을 기다리거나
30분 쯤 뒤에 있을 퇴근 시간을 기다릴 수도 있다.

심지어 그렇게 기다리던 주말 단풍놀이를 갔다가도
아름답게 피어난 오색 단풍을 즐기다 말고
빨리 집에 돌아가 편히 쉬며 좋아하는 TV 프로를 보려고 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기다려 오던 주말 산행을 가면서도
오를 때는 빨리 정상에 도착하기를 기대하고,
정상에 도착해서는 빨리 내려가 집에 도착하기를 바란다.

이쯤되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기다림은
병적이고 자동적이며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정말 진정으로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재에 존재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막연하게 미래에 대해 어떤 과장된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언제나 바로 다음 순간,
혹은 미래의 어느 순간을 꿈꾼다.
미래를 부푼 마음으로,
설레는 그리움으로 아련하게 기다린다.

미래는 분명
지금과는 전혀 다른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아주 굳게 믿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기대는
너무 부풀려져 있고 과장되어 있다.
심지어 환상적이고 매혹적인 어떤 것으로 확장되어 있다.

우리가 미래를 꿈꿀 때
그것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한다.
미래의 어떤 즐거운 일을 상상할 때,
기대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상상할 때,
우리 마음은 설렘을 넘어서 어떤 흥분 상태에까지 이르곤 한다.
그저 미래를 생각하기만 했는데도
충분히 우리 가슴은 부풀어 오른다.

이처럼 미래는 언제나 환상적이며 가슴이 뛰고
그 가치가 너무 과하게 확장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꿈꾸던 바로 그 흥분되는 미래가
막상 현실로 되었을 때는 어떤가?
과연 내 상상 속의 그 미래가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환상적으로 펼쳐지는가?
대개 그렇지 못하다.

생각과 상상과 계획 속에서 꿈꿔오던 그 부푼 미래가
현실이 되는 순간,
그것은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바뀐다.
그리고 현실은 우리에게 별다른 매력이 되지 못한다.

왜 그런가?
우리는 미래 그 자체를 진정으로 기다린 것이 아니라,
현재라는 ‘지금 이 순간’을 ‘누리고 즐기고 만끽하는’데
익숙하지 못하며,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서툰 것이다.

그렇게 부풀어지고 과장되어 있던 미래의 기대가
현실로 바뀌는 순간,
그것은 너무나도 소박하고 평범하며
맹물처럼 밍숭맹숭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심지어 대단한 성취나, 너무도 간절했던 바람이나,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순간 조차
잠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흥분할 뿐
그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또 다시 별반 다를 것 없는 현실이 이어질 뿐이다.
그리고는 또 다시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고 꿈꾼다.

군 생활 2년 내내 전역만을 바래오던 이들도
전역하는 날 소감을 물어보면
모두가 ‘의외로 담담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사랑하던 이와 마음을 애태우다 결국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그 기쁨과 설렘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대학생활을 마감하며 그렇게 기다리던 취직을 이루었더라도
취직하는 순간 그것은 설렘과 흥분의 어떤 것이기 보다
생생한 현실 그 자체로 바뀌고 만다.

이렇듯 기다리던 미래가 현실이 되면
그것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매혹적이지만은 않은 것임이 속속 증명된다.
그러면서 또 다른 설레는 미래를 찾는다.

이 현실의 실망감을 대신해 줄
또 다른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고 꿈꾸며 기다린다.
또 다시 그 기다림은 부풀어 오르고 설렘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것은 여전히 그냥 그럴 뿐이다.

미래는 언제나 부풀려 져 있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상상할 때
그 생각과 상상은 현실이 아닌 단지 사고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사고와 생각은 현실을 왜곡한다.
현실을 과장한다.

현실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일 뿐이고
있는 그대로의 현재는
말 그대로 지극히 현실적이며 평범하다.

물론 그 평범한 현재 속에
깊은 비범함이 숨겨져 있지만,
우리는 그 뒤에 감춰진
현실의 깊은 심연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한 채
겉에 드러난 평범함에 실망하고 만다.

옛 선사들은
‘평범함이야 말로 가장 큰 도’라고 했고,
‘지금 여기의 현재야말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순간’
이라고 했다.

그렇게 언제까지나 미래에 속으면서도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또 다른 환상적인 미래를 꿈꾸고 기대하는 것을 반복한다.
이것은 거의 병적이거나 장애 수준으로 이어지고 있다.
평생 동안 매번 속지만 늘 그것을 잊고
또 다시 새로운 미래를 꿈꾸기만 할 뿐,
죽기 직전까지도 ‘지금 여기’의 현재에 머물러
깨어있는 현존을 누려보지 못한다.

그렇듯 매 순간의 현재에 늘 미래를 꿈꾸고 있다 보니
생생한 지금 여기의 현재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현재는 언제나 밍숭맹숭하고 평범할 뿐이다.
현재는 우리의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다.
현재가 평범하고 미래가 장밋빛으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를 무시하고 늘 과거와 미래로 마음을 내 보내면서
상상으로 과거와 미래를 초대하기 때문에
현재가 그렇게 초라하게 바뀐 것일 뿐이다.

현재 그 자체가 초라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를 무시함으로써
현재가 그 빛을 잃은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우리의 삶은 빛을 잃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현재일 뿐이니까.
그렇게 꿈꾸고 기다리며 설레여 했던 미래가
현재가 되는 순간,
그것은 빛을 잃고 마는 것이다.

이런 삶이 반복되는 동안,
우리 삶은 언제까지고 희뿌옇고 빛을 잃으며
그저 그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보자.
한 달 뒤에 해외 여행을 가게 된다.
그 여행을 기다리는 한 달 동안 우리는 지금 여기에 없다.
오직 한 달 뒤에 있을 여행을 꿈꾸며 부풀어 있다.
그 여행에 대한 환상은
실제 여행보다 더 과장되어 있다.

막상 여행을 가는 날 아침이 되면
혹은 여행지에 도착하여 계속되는 일정을 소화해 가며
유적지를 찾아 돌아다닐 때가 되면,
그 여행이 내가 꿈꿔오던
그 설렘과 흥분과 환상의 여정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금방 증명이 된다.

그러면서 이 오래고 지겨운 여행이 빨리 끝나고
안락한 나의 보금자리로,
그리운 일상으로 되돌아 갈 날을 기다린다.
물론 그 또한 설레는 가족과의 조우나
친구들과의 만남이라는 과장된 기대를 동반한 채.

이처럼 끊임없이 우리는 미래에 대한 환상을 먹고 산다.
끊임없이 우리의 미래에 대한 기다림은 계속된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지금 여기’라는 현재에 있다.

우리의 그런 부풀려지고 과장된 미래에 대한 꿈이
단지 환영이고 신기루임을 바로 보고
‘지금 여기’의 현실로 되돌아오는 순간,
우리의 모든 방황과 혼돈과 기대는 사라지고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게 된다.

진째배기 알맹이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
미래는 그것이 아무리 환상적인 계획이나 성취일지라도
단지 생각과 상상이 만들어낸 과장일 뿐이다.

가만히 사유해 보라.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존재하는가?
지금 이 순간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수용하는가?
현재에 온전히 만족하는가?
가까운 미래든, 먼 미래든 미래의 어느 순간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
우리 모두는 늘 미래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럼으로써 무한한 에너지는
생명력의 원천인 현재를 축소시키고 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부풀려지고 과장된 미래를 분명히 보라.
분명 그것은 과장이지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생각이고 사고일 뿐이다.

완전히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라.
완전히 지금 여기를 즐기라.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라.
지금 이 자리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클라이막스다.

내가 그렇게 꿈꿔오던 모든 것이 성취되는 순간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이 말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기다리던 그 모든 순간은
사실 바로 ‘지금’에 있다.
그 어떤 순간도 기다릴 것이 없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실을
어떻게 살고, 얼마나 깨어있느냐에 따라
그 기초 위에 모든 미래는 펼쳐지기 때문이다.
현재에서
모든 미래는 나온다.

그렇기에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 대한 기다림은 언제나 거짓을 양산해 낸다.
기다림은 언제나 실패와 좌절로 끝날 뿐이다.

왜 그런가?
기다림의 끝에는 언제나
당신이 기다려 오지 않은 현재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 기다림의 끝에 있는 현실을 보는 순간
당신은 또 다시 좌절할 것이다.
당신의 속성은 현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미래를 생각 속에서 상상해 만들어 냄으로써
그 공허감을 채우려 할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미래를 기대하는데 에너지를 쏟을 것이 아니라,
기대의 끝에서 만나게 될 ‘현재’와 함께
공존하고 누리며 그 안에서 함께 사는 법을 깨닫는 것이다.

이 무한한 정신착란의 병적인 증세를
도대체 언제쯤 그만 둘 것인가.
바로 지금 그만 둬야 한다.
바로 지금 이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 머물라.
기다리지 말라.
미래의 무언가를 바라지 말라.
그것이 우리의 모든 꿈을 이루어지게 하는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순간이다.

매 순간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늘 살피라.
어디로 가려고 하는 마음을 지켜보라.
다음 순간을, 미래를 추구하고 있는 그 마음을 지켜보라.

매 순간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오라.
지금 여기의 삶을 다만 지켜보라.

그랬을 때
본래적인 삶의 신비와 접촉하게 된다.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성스러운 것이며,
경이로운 것인지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과장되고 부풀려진 미래 대신
그 자리에 차분하고도 평온하며
평범하지만 비범한
삶이라는 신비가 들어 차게 된다.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행복하라.
미래의 어느 때가 아니라 지금 당장 평화로우라.



Posted by 법상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많이 포근해 졌다. 그리고 벌써 이렇게 들녘엔 새봄을 맞이하는 꽃들이며 봄나물이 한창이다. 이렇게 세월은 하루가 다르게 흘러가는데 내 속 뜰의 공부는 얼마만큼 그 흐름에 부응하며 보내왔는지, 하루 이틀, 일분일초 이렇게 흐르는 시간을 너무 쉽게 소모해 버리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날이 갈수록 단순한 아쉬움에 그치지 않고 좀 더 뻐근한 가슴앓이로 다가온다.

  이 소중한 기회 이 소중한 순간을 놓쳐버리면 다음 순간이란 그다지 소중하지 못하다. 이 순간, 내게 주어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내 생에 가장 소중한 때다. 백일 천일 공부할 것도 없고, 전생이나 다음 생을 논할 것도 없으며, 과거나 미래를 논할 것도 없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내가 그렇게 찾던 '바로 그 순간'임을 알아야 할 것.

  우리는 끊임없이 바라고 또 바란다. 돈을 벌기 바라고, 지위가 오르길 바라고, 성공하기 바라며 계속해서 무엇인가 이루길 바란다. 그러나 바라는 순간 그 마음은 '지금 여기'에 없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을 최선으로 살아가는 길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진 순간이다. 자꾸 어디로 가려고 애를 쓰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우린 이미 도착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주 사소한 일상일지라도 그 일을 하는 순간 온전히 거기에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작은 일이 내 삶의 완전한 목적임을 알아야 한다. 작은 일상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집중하며 소중히 여길 수 있을 때, 수많은 어려운 일, 큰일들 또한 쉽게 이루어 낼 수 있는 선적인 수행의 힘이 생긴다.

 

 


  내 밥 먹는 사소한 일상을 돌이켜 본다. 매일 같이 하루 세 번을 나누어 공양供養을 하면서도 공양을 위한 공양을 한 적이 얼마나 있었나 싶다. 밥을 먹으면서 늘 다른 것을 계획하고, 신문을 보거나, TV를 켜거나 무언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고 밥 먹는 것은 소홀한 뒷전의 일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밥 먹을 때 온전히 밥만 먹지를 못했다. 밥 먹는 그 사소한 일상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의 순간임을 늘 그렇게 놓치고 산다.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그 순간이 온전한 ‘지금 여기’의 순간이자 내 생의 전부가 된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한다. 몸은 밥상 앞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무언가 다른 것을 찾아 헤매곤 하는 것을 본다.

  밥을 먹는 순간, 일을 하는 순간, 운전하는 순간, 걷는 순간, 대화하는 순간, 그 어떤 사소한 일상일지라도 매 순간 순간 몸과 마음은 온전히 거기에 있어야 한다. 매 순간 도착해 있어야 한다. 어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달려 갈 필요는 없다. 우린 이미 도착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착하려고 애쓸 것도 없고, 깨달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이 괴로운 세상 잘 살아 보려고 애쓸 것도 없이 매 순간 순간 도착해 마친 것임을 알면 된다. 그랬을 때 더없이 평화롭고 향기로울 수 있고, 낱낱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좌선이고 명상이며 깨어있음이 된다.


  사람 성격은 운전대를 잡아 봐야 알 수 있다고 하던데 맞는 말 같다.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도 운전대를 잡으면 갑자기 급해지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는 스님도 평소에는 정말이지 그렇게 여유가 있고 차분한데, 운전대만 잡았다 하면 그냥 폭주족 저리가라 하고 질주를 한다. 물론 내 경우도 비슷하다. 가만 보면 운전대를 잡을 때 참 공부가 많이 된다. 마음이 얼마나 바쁜가, 마음에 얼마나 일이 많은가가 평소에는 숨겨져 있다가 운전대만 잡으면 고스란히 드러나 스스로에게 들키고 만다. 그래서 더욱 내면의 뜰을 잘 지켜볼 수 있을 때가 운전을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운전을 할 때도 운전이 어디까지 도착하는 수단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만 운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도착하기 위해 운전을 하게 되면 내 마음은 도착지라는 목적에 가 있기 때문에 운전하는 순간순간에는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다. 마음은 목적지에 가 있는데 몸은 도중에 있으니 얼마나 조급한가. 운전하고 가는 순간순간 그대로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운전하는 그 자체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운전하는 순간순간 알아차림을 놓쳐선 안 된다는 말이다. 운전하는 순간 알아차리게 되면 내 마음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온전히 운전할 수 있게 된다. 운전을 위한 운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걷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걸어서 어떤 목적지에 가려고 할 때 우리 마음은 걷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직 도착하는 데만 마음이 가 있다. 빨리 도착하는 일만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 때 길을 걷는 일은 시원찮은 일이 되고 만다. 그러나 걷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빨리 도착하려는 조급한 마음도 비워지고 오직 걷는 그 자체로써 온전한 순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펼쳐진 그 어떤 일이라도 모두가 마찬가지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 그 순간순간이 그대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마음은 분열을 멈추고, 내적인 평화를 맞이할 수 있다. 마음이 즉한 순간 깨어있으면 그 순간 우리는 온 우주와 하나가 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들이 그렇게 찾아 나서던 궁극의 순간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린 지금까지 오랜 시간 세상을 살아왔지만 사실 우리가 산 세상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요, 오직 ‘지금 이 순간’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그 순간만 놓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을 돌아보자. 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려 하고, 무엇인가 목적 달성을 위해 애쓰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욕망과 집착의 사슬에 빠져 한 시도 만족하지 못하며, 한 시도 도착의 평화로움을 맛보지 못하는 이 마음을.

  우리 삶이란 것이 그렇게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 남들을 더 많이 재끼면서 달려가는데 혈안이 되어있지 한 시도 멈추고 비우며 자족하는 도착의 삶, 순간의 삶을 산 적이 없지 않은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이 모든 욕망과 집착에 얽매인 마음, 결과와 목적을 향해 치닫는 마음에 제동을 걸어 보자. 그 목적지를 향한 삶의 속도를 멈추는 순간, 이미 행복의 정원에 도착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빨리 달릴수록 더 빨리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더 빨리 멈출수록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

  자동차가 생겨나고, 기차며 비행기가 나날이 빨라지고 있지만 우리 삶의 속도는 점점 더 바빠지고 있다. 빨리 도착하도록 해 주는 운송수단이 생겨나면 빨리 도착한 만큼 더 많은 휴식과 여유가 생겨야 하는데 반대로 우리의 삶은 더 빨라지고 정신이 없어지며, 목적지는 더 멀게만 느껴진다.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세상이 부유해졌고 편리해졌지만 나는 여전히 가난하다고 느낀다. 세상의 부유함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세상 사람들의 부유함에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죽을 때 까지 할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내달려도 힘겨울 판이다. 그러니 어찌 멈출 수 있는가. 죽을 때 까지 달리고 또 달려야 한다. 어찌 마음을 비우고 ‘지금 여기’라는 순간에 멈춰 설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달려서 결국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 뿐이다. 그렇게 달려가는 목적지가 성공에 있는 줄 알겠지만 사실 그 속도감은 우리에게 죽음이란 목적지에 더 빨리 다다르게 할 뿐이다. 우리의 속도전은 죽음 앞에서 겨우 멈춰 서게 될 것이다. 삶에 대한 한없는 후회와 함께. 죽음의 목적지에서 모든 사람은 지난 삶을 되돌아 볼 것이다. 왜 매 순간의 삶을 온전히 누리며 느끼며 즐기며 살지 못하고 이 순간만을 향해 달려왔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왜 그 때에 가서야 깨달아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당장 멈추기만 한다면 행복과 평화, 고요함과 깨어있음이라는 참된 목적지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존現存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수행이며 명상, 기도란 것도 사실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깨어있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렇기에 모든 수행과 명상의 궁극도 깨달음을 향해 달려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멈춰 서는 깨어있음에 있다. 그러니 참선·염불·독경·진언·절 등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려고 해선 안 된다. 참선하는 바로 그 순간이 이미 본래성품을 드러내는 순간이고, 깨달음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선수행을 하기 위해 선방에 가는 순간도 그것이 절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기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절로 가는 그 걸음 걸음의 순간 또한 그대로 본래 성품을 드러내는 순간이고, 깨달음을 위한 과정이 아닌 바로 깨닫는 그 순간임을 알아야 한다. 절에 가는 순간 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한걸음 한걸음 걷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그것이 그대로 경행수행이 된다. 그랬을 때 절에 가는 과정도 참선이며, 절에 가서 앉아 있는 것도 참선이다. 법당에 들어서는 순간, 경전을 꺼내어들고 방석을 펴는 순간 매 순간순간을 놓치지 말고 깨어있으면 수행과 생활이 따로 없고, 과정과 목적이 따로 나뉘지 않는다. 주말에 있을 참선모임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무엇하러 그 긴 시간을 기다리느라 소모해야 하는가. 기다림을 버리고 ‘지금 여기’에 도착했을 때 모든 순간이 온전한 참선의 순간이 된다. 수행을 위한 준비는 필요 없다. 바로 그것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모든 수행의 순간이 깨달음의 순간이지 깨달음을 위한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은 명상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중생'이 수행이라는 '마음' 닦는 과정을 통해 깨달은 '부처'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말은 방편일 뿐이다. 중생이나 마음이나 부처가 그대로 하나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이며, 중생이 그대로 부처다. 그랬을 때 우리 삶의 그 어떤 순간도 우리를 괴롭게 만들지 못한다. 모든 순간이 다 온전한 순간이고,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깨달음의 순간이라면 온전한 만족만이 있을 뿐이다.

  지난 내 삶을 돌이켜 보라. 내 삶의 속도를 느껴보라. 시간이란 것이 다 우리가 만들어 낸 조잡한 관념에 불과하지만, 너무나도 빨리 스쳐 지나가는 이 시간 속에 내가 온전히 살고 있는 순간은 얼마나 되는가.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이다.

  순간을 살면 시간은 없다. 과거가 없고 미래가 없는데 시간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을 살 때, 매 순간 도착해 있으며, 매 순간 현존의 깨어있음이 빛을 피워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잡는 것은 ‘그 순간’만을 잡는 게 아니라 ‘삶 전체’를 잡는 것이다. 이 새로운 순간. 이 소중한 시간 시간을 결코 소홀히 흘려보내지 말자.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중에서


 




Posted by 법상



[파주 보광사, 산사에 늦은 봄눈이 내립니다.]

어떤 한 경계에서
가슴 시 린 쓰라린 아픔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아픔을 딛 고 일어서는 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공만을 바라고
바라는 대로 잘 되어지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겠지 만,
사실 늘상 성공만 하고
바라는 바 대로 이루기만 하 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내면의 뜰은 공허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실패 속에서
또 그 아픔 을 딛고 일어나는 그 속에서
더 강인해 질 수 있을 것 이고,
바라는 바가 좌절되어지는 그 속에서
좌절을 딛고 일 어설 수 있는 지혜로움이 생겨나며,
세상을 얕보지 않 을 수 있고
좀 더 겸손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 다.

요가를 가르치는 분이라거나
몸 다스리는 법에 대해 강의하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니
그 분들 비슷한 공통점이
어렸을 때 죽고 싶을 만큼 몸이 너 무 허약했다고들 그래요.

너무 몸이 약하고 병이 많다보 니
건강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고
그랬으 니 제 몸 죽어나지 않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겠습니 까.

제 몸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건강이라거나, 운동이라거나, 요가라거나
아무리 얘기를 해 줘도 나몰라라 하지
죽기 살기로 뛰어들어 공부할 수가 없어 요.
뭐. 당연한 일이지요.

한 번 아파 본 사람만이
그 것을 두 번 다시 경험하지 않으려고
정말이지 피나는 노력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에는 생각지 못하게
그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고
능통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취직 할 때도
쉽게 쉽게 좋 은 직장 취직 잘 한 사람은
직장 고마운 줄 잘 모릅니 다.
그러니 그만큼 열심히 일 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 요.

그런데 한 1년이고 2년이고 백 수 백조로 있다가
실업자로 논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 고 눈치보이고
어려운 지 충분히 경험했다가 어렵게 어렵게 취직한 사람 은
정말 고마운 마음으로 즐겁게 열심히 일 합니 다.

어지간히 어려운 일, 치사한 일이 있어도
꾹꾹 참고 견딜 수 있는 힘도 생기고
일 그만두지 않으려고,
집에서 논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건지 잘 아니까
회 사에서 힘겨운 일이나, 답답한 일이 생겨도
어지간하 면 뛰쳐 나올 생각 않고 최선을 다한단 말입니 다.

제가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 만 나다 보니까
여러 번 보아온 일입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되었다거 나
주식 투자해서 대박이 났다거나 그랬을 때
당장엔 이 경계가 '행복'이라고 느끼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한 번
노력 도 안 하고 큰 돈을 만져 본 사람은
절대 소박하고 정직하게 작은 돈 벌면서 살 수가 없어요.
수십억 수백 억을 쉽게 벌었다면
분명 쓰는 것도 아주 쉽게 쓸 수 밖 에 없고,
쉽게 쓰는 습을 익혀 놓으면 그게 결국 업이 되고 맙니 다.

그러니 그 사람은
계속해 서 요행만 바라지
정직하게 내가 일한 만큼 돈 벌면서
소박하게 살아갈 수가 없어집니다.
어디 몇백억 쉽게 벌 어 쉽게 막 쓰던 사람이
한달에 일이백만원씩 받아가면 서 정직한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처음엔 이 경계가 행복 인 줄 알았겠지만
결국에는 사람을 망쳐놓는 역경계 였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또 수행도 마찬가지입니 다.
멀쩡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 한테
아무리 부처님 가르침 가르쳐주고
행복에 이르는, 평화와 자유에 이 르는 길이라고 말을 해도
그리 크게 느끼지 못합니 다.

그 사람은 지금도 충분히 행복 하거든요.
그런데 뭐하러 또다른 행복을 목숨걸고 찾겠어요.
물 론 수행하고 공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간절하지 못 하고
그러다 보니 수행도 적당히 하고
시간 있을 때, 마음 내킬 때 적당히 하지
이게 생사를 결단짓는 중대한 문 제라고 여기면서
미친듯이 달려들지 않는단 말입니 다.

그런데 한 번 삶의 저 아래 진 흙탕에
떨어질 때까지 떨어지고,
괴로울 때까지 괴로워 해 보고,
정말 죽기 직전까지 갈 만큼, 자살하고 싶을 만큼
삶에서 아파하고 괴로워 해 본 사람은
이 가르침이 너 를 살려줄 수 있다 하고
이 가르침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 다 하면
정말 죽기 살기로 수행하고 정진하지 않을 수 없는 겁 니다.

실제로 그래요.
너무나도 큰 괴로움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죽고싶을 만큼 아파하는 사람은
불법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하 는 그 말을
정말 뼛속 깊은 곳에서 받아들이고
온몸을 다 바쳐 서 죽기살기로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너무 괴로워서 자살하겠 다고 어떤 사람이 찾아왔길래,
또 자살밖에 길이 없다고 워낙 확고하게 이야기 하길래
기왕에 자살 할꺼면
내 몸 내가 죽이면 그것 큰 죄가 되니까
법당에서 절하다가 엎어 져 죽으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가만 생각하다가 그러겠노 라고 하셨지요.

전 그 분 무슨 철인인줄 알았 습니다.
하루 종일 밥 생각도 별로 없고 절만 하시는데
밤 도 꼬박 새시면서 절만 하시는데
정말 절하다가 죽으 면 어쩌나 걱정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절대 절 하다가는 안 죽더라고요.
그렇게 한 몇 일을 하시더니만
죽어가야 될 사람이 생 기있는 눈을 뜨고는
이제 가겠다고 해요.

죽으러 가겠다는 말인지 알았 는데
살 생각이 생겼노라고 하시면서 돌아가셨지요.
집 에 돌아가서 뒷얘기를 들어보니까
매일같이 3000배 이상 절 을 하셨다고 그럽니다.

지금은 문제가 다 해결되었어 요.
문제 다 해결하고
나 살려준 것이 불법이다 싶어
불교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 래서 지지난 달인가 짐 다 싸들고
이 밝은 길 따라 출가하 겠노라고 오셨더랬습니다.
지금 행자생활 열심히 잘 하 고 계실겁니다.

이 분이 괴로운 역경이
자 살하고 싶을 만큼의 괴로운 역경이 없었다면
이렇게 다시 태어날 수 있었겠어요?
아마도 나중에 스님 되시면
훗날 설법하실 때 신도 님들께 당신 이야기
절절하 게 웃으면서 이야기 하실 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괴로움을 모르는 사람 은
괴로움을 당해서 아파해 보지 않은 사람은
또 역경 속에 서 좌절해 보지 않은 사람은
더 큰 행복 속으로 들어가 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는 삶이라는게 어때요?
지금 당장 괴로움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행복 의 밑거름이 되고,
지금 당장 행복인 것 같지만
그것이 사실은 괴로움의 시작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 까.

역경이 곧 순경이고
순경 이 곧 역경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역경과 순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았을 때
그 순간 괴로울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겠지만
눈에 보이 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역경이 다, 순경이다,
혹은 괴로움이다 즐거움이다,
이렇게 나누어 놓는 마음만 없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경계는 그저 분별없는 텅 빈 경계일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경계들을
죄 다 두 가지로 나누어 놓고
어느 하나는 선으로 어느 하나는 악으로,
어느 하나는 행복으로 어느 하나는 괴 로움으로,
그래 놓고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만 정신이 없었습 니다.

그러다 보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무분별의 참된 지혜의 눈을 가지지 못하 고
삐뚫어지고 왜곡되고 치우친 관점만을 지니게 된단 말입니 다.
그러니 거기에서 행복과 불행이 생겨나지요.

이를테면 '건강과 질병' 이렇 게 나누어 놓고,
우린 건강하기만을 바라면서 삽니 다.
건강하면 좋은 것이고
질병이 걸이면 나쁜 것이라고 분 별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질병에 대해서 나쁘다 고 분별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또 당장에 건강하다고 좋아하면서
안일하게 대처하여 운동도 안하고 몸도 안 돌보게 되면
겉으로는 건강이지만 내적으로 언젠가 터질지 모르는 질병 을
안고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질병이 걸림으로써
몸의 건 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도 알 게 되고,
그로인해 앞으 로 더 열심히 운동하고 심신을 단련해야겠다는 것도 알게 되 고,
또 내면에 쌓여있던 탁하던 기운들도
한 며칠 앓 아 누움으로써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게도 되는 것이지 요.

그러니 질병은 나쁜 것, 건강 은 좋은 것
그렇게 나누어 놓을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질병이 걸리는 것도
좀 더 넓고 지혜로운 시각으로 보 면
우리를 공부시키는 것이고, 이끄는 자성불의 나툼인 것입 니다.

역경이 처해 봐야
비로소 괴로운 줄 알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게 되며
그렇게 됨으로써 부처님 가르침을 좀 더 바르게
치열 하게 수행하려는 마음을 내게 되었다면
그 역경은 도리어 불법 으로 이끌려는 방편 공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경계를 가지고
역경이다 순경이다 하겠습니까?
다 우리 인간들이 만들 어 놓은 분별심일 뿐이지
이 법계는 항상 공평하고 여 여할 뿐입니다.

나쁠 때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가 가장 좋을 때일 수 있고,
좋을 때라고 생각하 지만
그 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 일 수 있는 것입니 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 다'는 말이 있잖아요.
젊어서 뿐 아니라 늙어서도 다 마찬 가지지요.
고생은 돈 주고 사서라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만 큼 우리 인생을 값지게 만들어주고
우리 삶에 밑거름 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항상 성공만하고
항상 마음 대로 하고 살아온 사람,
실패나 역경을 경험해 보지 못 한 사람은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이겠습니 까.

역경 속에서
수많은 실패 속에서 이겨내고
비틀비틀 쓰러질 듯 하다가도 오뚝이 처럼
당차게 일어서면서 세상을 살 줄 아는 사람
그 사람 은 내면에 딱 힘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계 속에 서도 이겨낼 수 있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경계에도 속지 않 고 당당할 수 있는
그런 내면의 중심이 잡힌 사람이라는 거지요.

한 가지 괴로운 경계가 온다 고 했을 때
우린 '괴롭다'고만 생각하지
그 경계의 고마운 점, 이익되는 점은 보지 못한단 말입니 다.

그러니 이런 저런 분별 하지 말고
오직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합니 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지금 현재 법우님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즐거우십니까 아니면 괴로 우십니까?
일이 잘 풀리는가요 아니면 잘 안 풀리는가요?
지금 의 경계가 역경입니까 순경입니까?

아닙니다.
역경도 역경이 아니고
순경도 순경이 아니며,
괴로움도 괴로움이 아니고
즐거움도 즐거움이 아닌 것입니다.

순역의 양 극단의 분별을 다 놓아버리세요.
다 놓아버리고
내 앞에 다가오는 그 어떤 경계라 도
부처님의 나투신 경계로 즐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러면 모두가 고마운 공부의 꺼리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한없이 자유롭습 니다.
역경도 순경도 아니고
다만 여여하고 평등한 하나의 순수한 경계일 뿐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괴로 운' 경계란 없는 것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서 '즐거운' 경계 또한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경계는
다만 그러한 경계일 뿐
좋고 나쁜 경계는 아니란 말입니 다.

괴로움도 고마운 공부의 재료 이고,
즐거움도 고마운 공부의 재료인 것입니다.
역경이든 순 경이든
우리 마음 속에서 분별해 가지고
행 불행을 마음 속 에 품고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순역의 경계,
즐거움 괴로 움의 경계를 다 놓아버리고
무분별로써 일체를 다 받아들이 면서
자유롭고 당당한 걸음을
휘적휘적 내딛으시기 바랍니 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평화 롭습니다.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아닙니 다.

모든 사람이
지금 이 순간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다 놓아 버리고 나면
지금 이 자리가 부처님의 자리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