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나절,

하늘은 화창하고,

푸르름은 너무도 높고,

몽실몽실 떠가는 구름은 아름답고,

바다색은 너무도 짙고,

고개 들어 산을 바라보면 희끗희끗 눈덮인 산맥이 성스럽고,

그 청명한 하늘 위로 자유로이 갈매기 떼들이 떼지어 날고 있습니다.

 

아, 이 곳에서의 삶은

하루 하루가 여행이며 만행이고,

모든 걸음 걸음이 히말라야이며,

매 순간 순간이 휴가이자 휴식입니다.

 

시선 가는 곳마다

영적이고

고요하며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아니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되지 않는

특별한 빈 공간이 꽉 차게 느껴집니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내가 발 딛고 살아가고 있구나!

매일 매일 흙냄새 맡으며 걷고

바닷바람과 포구를 거닐으며

저 고요한 산맥을 벗삼아 살고 있구나!

 

 

 

 

휴가나 여행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쉼, 설렘, 떠남, 평안 등의

일상적이지 않은 아주 특별한 상황을 의미하는데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휴가나 여행은

어떤 몸이 떠나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잠시의 멈춤으로써

휴가와 여행을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길을 걷고

길 위의 모든 존재에 눈빛을 보내며

따뜻한 사랑을 보내며

묵연히 걷기만 할 때

이 모든 존재와 하나됨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잠시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솟아오른 눈덮인 설악의 산맥을 보고 있자면

그 순간 바쁘고 정신 없던 일들은 사라지고

나는 지금 어느덧

히말라야 깊은 산 위를 걷게 됩니다.

 

아무리 해야 할 일로 번거롭다 할지라도

잠시 호흡에 마음을 모으고

맑고 시린 공기를 깊숙이까지 품어안았다가

내보내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나는 어느덧

2,500년 전 붓다의 영산회상 한 켠에 앉아있는

그 성스러운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되어있곤 합니다.

 

컴퓨터 모니터를 주시하다가도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이 곳은 익숙한 일터이거나

생존경쟁의 장이 아닌

호젓한 여행자가 머무는

인도의 시골마을 고즈넉한 게스트하우스가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자리를

휴식으로, 쉼으로,

여행으로, 휴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아니 본래 우리의 삶이

그렇듯

고요하고 신선한

쉼이었고, 여행이었으며, 휴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고도 간단합니다.

그것은 전혀 힘이 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구름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바삐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돌려 길 가에 앙상하게 피어난

겨울 나뭇가지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책을 보다가도, 신문을 읽다가도

잠시 보고 읽는 것을 멈추고

호흡의 들고 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행여 TV에 정신이 팔려 있었더라도

잠깐 TV를 끄고

그저 텅빈 빈 벽을 주시하며

내면의 아주 작고 여린 움직임을 관찰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루 중에,

하루 일과 중에,

익숙하던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잠깐 잠깐

단 10초라도 좋습니다.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행하고 있던,

바로 그 모든 행위를

잠시 비우고, 멈추고,

아주 낯선 시선으로

전혀 텅 빈 시선으로

속 뜰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바로 그 ‘멈춤’의 순간

위대한 신의 사랑과 축복이 깃들고,

붓다와 모든 성인의 깨어있음이

바로 그 자리에서 함께 하게 됩니다.

 

 

애써 한 시간, 두 시간 이상을

억지로 시간을 내서,

바쁜 가운데 짬을 내서,

절이나 선방에 찾아 가서

가부좌 트는 법을 배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주 잠깐,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참선을, 명상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것을 참선이나 명상이라고

애써 이름짓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그저 텅 빈 순수 그 자체이고,

깨어남이며,

모든 선각자들의 방법이었으며,

붓다의 방식입니다.

 

잠깐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그 때가 바로 휴가가 되고,

잠깐 숲으로 난 길을 걸을 때

그 순간이 곧 여행이 되고,

잠깐 생각을 멈추고 호흡을 지켜보는 순간

그 때가 바로 명상이 되며,

잠깐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순간

그 때가 바로 깨어남이 되고,

잠깐 내 앞의, 옆의 동료며 가족들을

편견 없이 마음을 비우고 낯설고 새롭게 바라볼 때

그 때가 바로 사랑이 되고,

이렇게 잠깐 잠깐 일상에서 멈추고 바라볼 때

우리는 지금 이 자리가 완전한 때임을 깨닫게 됩니다.

 

명상은 거창한 무엇이 아닙니다.

수행은 근기가 높은 특별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깨달음을 너무 멀리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구도의 길을 간다는 것에 너무 거창한 환상을 덧칠하지 마십시오.

 

본래 수행, 명상이라는 것이

그렇듯 피나게 노력하고 애쓴 끝에

소수의 사람만이 경쟁에서 승리해 쟁취해 내는

그런 논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다는 그간의 편견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고서는

나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 되고 말 뿐입니다.

 

그 편견을 놓으십시오.

백일 기도, 천일 정진, 동안거, 선방, 철야정진...

이 모든 거대한 편견들이 수행을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물론 그 또한 좋은 방법 중에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어려운 길만이 가장 옳은 길이거나,

유일한 길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매 순간 순간

일상에서 잠시 멈추는 것만으로도,

자주 자주 멈춤과 바라봄의 때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고도 쉽습니다.

아주 쉽지만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질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여기’라는 곳이야말로

모든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실은

나라는 존재야말로

완전하고도 충만하고 꽉 찬

더 이상 얻어야 할 또 다른 힘을 필요치 않는

무한한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본래 있던

힘과 지혜와 사랑을

없다고 착각하고 살다가

아주 작은 ‘멈춤’과 ‘봄’을 통해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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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아침에
예불을 올리고
좌선을 합니다.

좌선을 하기 전에
잠시 마음나눔의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모든 분들이 똑같습니다.
그냥 이렇게 법당에 앉아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똑같지를 못합니다.
어두운 마음으로 앉아있는 사람,
오늘 할 일에 대한 부담감으로 앉아 있는 사람,
요즈음의 안 풀리는 일상에 대한 무거운 마음으로 앉아있는 사람,

또 군인 법우들은
내가 지금 군대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무겁게 다가오기 때문에
온전히 앉아있을 수가 없기도 합니다.

사실은
모든 이들이
지금 이 순간 똑같이 앉아있습니다.

이렇게 앉아있는 데는
다른 분별이 붙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앉아있을 뿐이지요.

'누가'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 '어디에''왜'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있는 그 순간 집중하고 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장도 아니고,
주부도 아니며,
자식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어려운 일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도 아니고,
힘겨운 군생활하고 있는 군인도 아니고,
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앉아있을 뿐입니다.
아무런 분별이 없어요.
바로 그 순간이 부처님을 친견하는 순간이 됩니다.
깨달음을 체험하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바로 그 순간
우리는 온전한 평화로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마음을 모아 집중하며
이 순간을 느끼는 데에는
다른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이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평화로움과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마음 속에
어제 일에 대한,
요즈음의 일상에 대한,
또 오늘의 일이며 내일의 일에 대한,

일에 대한 스트레스며,
사무실 업무에 대한,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식 걱정이며 대학, 취직, 진급에 대한질투, 시기, 노여움, 다툼, 욕
심 등의 마음에 대한
온갖 번잡한 마음을 붙잡고 앉아 있게 되면
그것은
좌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마음 모아 관찰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똑같이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 때문에
지금 마음 집중하기가 어렵고,
미래에 올 두려운 일 때문에
지금 좌선이 잘 안 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과거나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의 문제입니다앉아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의 모든 시공에서의 문제입니다.

앉아서 평화로울 때 처럼
움직임 속에서,
무수한 일의 스트레스 속에서,
번잡한 출근 길의 정신없음 속에서,
사람들과의 부딪김 속에서,
우리는
바로 그 순간에 온전한 평화로움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그냥 다 놓아버리고
그 순간이 되어 느끼기만 하면 됩니다.
온전히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처럼 우린 누구나
지금 이 순간 평온을 느낄 수 있고,
자성부처님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나 미래에 짊어지고 있는 것들만 놓으면...
그래서 이 순간에 깨어있을 수 있다면
그 순간이 부처님을 친견하는
가장 좋은 때가 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어느 때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순간
직업도, 스트레스도, 두려움도,
온갖 나에게 붙여진 이름들도,
이를테면 부모, 자식, 사장, 직원, 친구, 수행자 등등하며,

온갖 과거로부터 짊어진 모든 이름, 모양, 아상들이며
오지도 않은 미래에 기대하고 있는 모든 것들까지
다 놓아버리고
온전히 지금 여기에서
이 순간에 집중하여 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충분하다기 보다
아니...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번쩍 열리는 깨달음을 구한다면
천리 만리 길을 잘못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환상에 젖은 깨달음은
그 자체로써 마장인 것입니다.

멀리서 찾지 말고,
엄청난 무언가를 찾지 말고,
아주 소박하지만
아주 미세하지만
그래서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더 어렵다고 하겠지만
이 순간의 아주 작은 평화는
너무 크기 때문에 작게 느껴지는 평화로움인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의 육근이 바깥으로 끄달리는감각적인 행복만을 추구해 오다 보니
이 작지만 온전한 행복을 느끼는데 익숙하지 않을 뿐입니
다.
크고, 웅대
하고, 엄청난...
그런 깨달음을 구하려 하지 마세요.
부처님의 밝은 미소는
아주 소박하게 다가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잠시 동안이라도 모든 번뇌일랑 다 놓아버린 채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관찰해 보세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에
가만히 집중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작은 평화로움 한 자락...
아주 미세한 속 뜰의 본래 향기가...
느껴지시는지...








Posted by 법상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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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달마스님의 파상론(破相論)을 보면
관심 수행에 대한 소중한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결심했다면
그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다른 모든 수행법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다른 일체 모든 수행법을 포함하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수행방법은 다름 아닌
마음을 지켜보는 일이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관하는 것이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며,
무심(無心)에 이르는 길이고, 집착을 놓는 일, 방하착의 길이며,
나아가 본성을 살피는 길인 것입니다.

제자는 다시 묻습니다.

"그러나 삼계와 육도는 무한히 넓습니다.
고작 마음을 지켜보는 일을 가지고
어떻게 이 끝없는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삼계의 업도 오직 마음에서 나온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으면
그것은 삼계를 초월한 것이다."

삼계와 육도의 모든 업 또한
결국 우리의 마음으로 지은 것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으면
곧장 삼계를 초월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다는 말은
'마음을 비운' 자리, 무심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삼계 육도를 다 청정하게 가꾸려 애쓸 필요가 없으며,
수미산 보다 높은 업장을 다 녹이려 애쓰거나
그 무거운 업장을 탓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관함으로써
지극한 침묵, 무심을 이루게 되면
본래 아무 일도 있지 않았던 본래의 자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은 또 이야기 합니다.

"그대가 닦는 수행이
그대의 마음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그대는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모든 불국토 또한 청정하다."

지켜보는 깨어있음의 수행은
그대로 우리의 마음과 하나가 됩니다.
깨어있지 못할 때 마음은 있지만,
온전히 깨어있는 순간 마음은 사라집니다.
그대로 무심(無心)입니다.

온전히 깨어있는 바로 그 순간이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이지
다른 곳에서 깨달음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마음을 잘 지켜봄으로써 깨어있을 수 있다면,
깨어있음으로 무심을 이룰 수 있다면,
모든 불국토가 그대로 청정해 질 것입니다.
깨어있는 순간이 그대로 부처요, 불국토라는 말이지요.

파상론의 본문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관심수행의 법문을 청해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수행을 성취하자면
여섯가지 도적을 쫓아 버려야 하는데,
눈의 도둑을 쫓아 버리자면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들리는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며,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하고,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맛에 탐미하지 않으며, 법다운 말만을 해야 하고,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고,
마음의 도적을 조절하자면 무지를 극복하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

여섯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들어오는
그 각각의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이
가장 큰 도둑이며, 도적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향기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며, 마음으로 분별하는 등
이 모든 우리 몸의 기관들은
바깥의 대상들 즉 육경, 색성향미촉법을
끊임없이 얻어 가지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 시도 평화로울 날이 없이 대상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물질(色)을 탐하고, 귀로 좋은 말(聲) 듣기를 원하며,
코로 좋은 향기(香) 맡기를 바라고, 혀로 맛(味)에 탐닉하고,
몸으로 좋은 감촉(觸)을 탐하며,
마음으로 온갖 분별을 일으켜 생각(法)을 지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여섯의 도둑 때문에
우리는 늘 고요하지 못하고 탐내며 성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여섯 기관으로 좋은 것을 탐내다가(貪心)
얻지 못하였을 때 화(嗔心)를 낸단 말입니다.
이처럼 여섯 기관의 도적에 휘둘려
여섯 대상이 텅 비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는 그 마음이 바로 어리석음(癡心)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이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항복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육근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들을 잘 관하여
들고 나는 그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육경이라는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눈의 도둑을 몰아내려면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에 좋고 나쁜 분별을 짓고
좋으면 애착하여 붙잡으려 하고, 싫으면 증오하여 버리려고 애를 쓰니
색이라는 경계에 휘둘려 마음을 번뇌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귀로 들려오는 그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아서
칭찬이든 비난이든 그 어떤 좋고 나쁜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합니다.
칭찬에 집착하여 자꾸 듣고자 애쓰지도 말고
칭찬을 들었다고 쉬 들뜰 것도 없으며,
비난을 들었다고 번뇌에 휩싸여
내 중심을 잃고 헤매어 서도 안 된 다는 말입니다.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향기에 분별하면 곧장 눈귀코와 몸뜻도 함께 분별을 일으켜
온갖 집착을 만들어 냅니다.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먼저, 맛에 탐미하여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야 합니다.
맛에 탐함이 많으면 때를 구분하지 못하여
시도 때도 없이 먹게 되고,
그리하여 그 탐심이 뱃속을 채우게 되어
몸을 어지럽히고 그로인해 정신이 혼미해져 마음에도 헤를 입힙니다.

또한 입을 잘 관하여 법다운 말만을 해야지
생각난다고 다 입 밖으로 내 놓게 되면
사람이 실없어 지고 공허해 집니다.
늘 입을 잘 다스려 침묵을 지킬 일이고
말을 할 때라면 몇 번이고 관하여 법다운 말을 어렵게 꺼낼 일입니다.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합니다.
자칫 감촉에 집착을 하게 되면
음탕한 행과 삿된 행으로 온갖 신업을 짓게 됩니다.
몸의 행동을 늘 잘 관하여
어떤 행동에도 감촉의 욕망에 휘둘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도적을 잘 조절하자면
수행을 통해 어리석은 마음을 잘 극복하고,
관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늘 경계따라 올라오는 마음을 잘 관하여
그 마음이 신구의(身口意)로 어떻게 퍼져 나가는 지 잘 살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여섯가지 도적을 잘 경계하여
이 도적들이 우리를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이 여섯가지 기관을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의 외곽이 튼튼하고 병사들이 두 눈 뜨고 깨어 있게 되면
함부로 도적들이 성을 뛰어 넘을 수 없지만,
병사들이 잠 자느라 깨어있지 못하게 되면
쉽사리 도적이 성을 침범하듯,
우리 몸의 여섯 기관을 잘 관하여
깨어있는 마음으로 지켜봄으로써
여섯가지 대상이 여섯 기관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는
여섯 도적을 항복 받기 위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거두어 내면을 관찰하고
밖의 대상의 일을 밝게 깨달아 잘 관조할 수 있다면
탐진치 삼독심을 완전히 끊을 수 있고,
밖에서 들어오는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막을 수 있다.

그러면 많은 공덕과 갖가지 장엄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요.
진리에 이르는 많은 길을 낱낱이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머지 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

여섯 도적을 잘 관조함으로써
삼독심을 끊고 온갖 공덕을 성취하며
머지 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수행의 관건은 바로 이 여섯 감각기관인
여섯 개의 문을 잘 관조함으로써
여섯 도둑들이 들어오는 것을 잘 막아내는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파상론의 말미로 갈수록
달마스님은 더욱 간절한 법문으로 우리를 일깨웁니다.

"부처는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깨어있음이 그대로 부처인 것입니다.
그러니 순간 순간 깨어있음을 통해
우리는 부처를 만나는 것입니다.
천지가 요동을 치는 엄청난 부처를 찾고자 애쓰지만 않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아주 쉽고도 은은하고 평화롭게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열반의 영원한 기쁨은 마음이 쉬는 데서 나온다...
세상을 지켜보는 것이나, 거룩함을 지켜보는 것,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보다도 빠르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진정한 문은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음을 지켜보는 일이 마음을 쉬는 일입니다.
애쓰려는 마음,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마음을 모두 쉬고
묵묵히 지켜봄으로써 열반의 영원한 기쁨은 나옵니다.
또한 세상을 지켜보고 마음의 거룩한 본성을 지켜보는 수행은
눈 깜짝할 사이보다도 빠르다고 합니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지금 바로 그대에게
깨달음은 한없는 평화로움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Posted by 법상




제 14, 이상적멸분
상을 떠나면 적멸이다


離相寂滅分 第十四
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 世尊 佛說 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 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 淸淨 卽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 希有功德 世尊 是 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世尊 我今 得聞 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佛告 須菩提 如是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希有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 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說 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 節節支解時 若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應生嗔恨 須菩提 又念 過去於 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若心有住 卽爲非住 是故 佛說菩薩心 不應住色布施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如來說 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須菩提 如來 是 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思語者 不異語者 須菩提 如來所得法此法 無實無虛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 入闇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 有目 日光 明照 見 種種色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 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卽爲如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無量無邊功德


그 때 수보리가 이 경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아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慧眼)으로는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경전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해지면 곧 실상(實相)을 깨달을 것이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같은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고, 중생상과 수자상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림을 당했을 적에 내게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과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에 내가 옛적에 사지를 마디마디 베이고 잘렸을 때 만일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여래가 과거에 오백 생애 동안 인욕 성인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더라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지니,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하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즉 머무름 아님이 된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응당히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한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상적멸은 말 그대로 상을 떠난 바로 그 자리가 적멸의 자리라는 뜻이다. 상을 깨는 것이 적멸 즉 실상이며 깨달음의 자리라는 말이다. 사실 부처님 가르침이 무량하며 그 방편이 무한하다고는 하지만 쉽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상을 깨라’는 한 가르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진리는 다양하게 표현되어질 수 있다.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방편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는 상을 여읨으로써 깨달음 즉 적멸에 이르는 방편의 가르침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분에서는 지금까지 13분까지 이어오며 설해 왔던 가르침에 대한 일종의 정리와도 같은 느낌이 드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상적멸분으로써 그동안의 가르침을 정리해 보자.


그 때 수보리가 이 경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아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慧眼)으로는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경전입니다.



불교 공부를 해 오던 분들 가운데는 여기 이렇게 수보리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수보리 뿐이 아니다. 누구든 어둡고 막연했던 삶에 대해 어리석었다가 밝은 진리의 가르침을 듣고 나면 환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 맑은 신심을 일으켜 이 공부를 해 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눈물을 흘려 보았을 것이다.
보통 눈물이라는 것이 슬플때나 기쁠 때 나오기도 하지만, 진리의 감동에 젖어 온몸으로 흘리는 눈물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온다. 그동안 온통 상에 물들어 세상을 왜곡해서 보고, 분별 판단 시비하여 걸러 보았다 보니 우리 마음에 온갖 때가 끼고 녹이 슬어 좀처럼 상 이전의 맑고 순수한 본래심을 보지 못한다. 그렇게 어리석게 살다가 상을 여읜 진리의 자리에 대한 법문을 듣고 난다면 누구든 상 이전의 본래 자리에서부터 감로가 샘솟듯 온몸의 감동이 눈물로써 나오곤 하는 법이다.

또한 법문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할 때, 마음이 텅 빈 상태에서 모든 상이 잠시 떨어져 나가고 고요해 지면서 온통 상으로 둘려 쌓였던 탁한 마음이 잠시 적적한 세계를 맛보게 되는 순간 우리는 온 존재로써 감동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감동은 눈물로써 표현되곤 한다.
그런 눈물은 애써 감출 것이 아니다. 법문을 들을 때건, 수행을 할 때건, 내면의 깊은 곳에서 눈물이 흘러나올 때는 오직 그 눈물에 내 온 존재를 맡겨라.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것도 없고, 눈물을 억지로 닦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몸과 마음의 떨림과 흐르는 눈물과 하나가 되어 함께 흐르라. 눈물이 스스로 멈출 때 까지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해 보려는 의도를 버리고 그저 눈물과 하나가 되어 흘리기만 하라.

그 눈물은 눈이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인연에 따라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아플 때, 혹은 너무 기쁜 일이 있을 때, 그런 온갖 종류의 인연이 내게 다가올 때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인연 따라 흘리는 눈물은 실체가 없어 공하다. 인연이 다하고 나면 눈물도 메말라 버린다. 기쁜 일이 가고 일상으로 되돌아오면 눈물은 멎는다.
그러나 진리의 눈물은 다르다. 그것은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며, 진리가 온 존재로써 일치되어지는 작은 경험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업장(業障)이 소멸되는 눈물이며, 진리의 발견에 대한 귀의(歸依)의 눈물이고, 본래의 존재로 회귀하려는 귀향(歸鄕)의 눈물이다.

그렇다고 그 눈물을 붙잡아 두려 할 것은 없다. 그냥 내버려 두라. 흐르는 눈물에 또 다른 의미를 덮씌우거나 붙잡고자 하면 그것은 또 다른 어리석은 상을 만드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한 눈물을 흘리고 난 뒤에 오는 그 선명함과 가볍고 적멸한 느낌을 애써 반복하여 경험하고자 하는 집착을 버려라. 눈물을 흘리고 난 뒤에 오는 그 맑은 느낌도 스스로 맑다느니, 업장 소멸의 느낌이라느니 하고 분별을 붙이고 나면 되려 어두워지게 될 것이다. 그저 아무런 분별도 붙이지 말고, 스스로 대견하다고 느끼지도 말고, 좋아하면서 붙잡고자 하지도 말고, 왜 이럴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품지도 말고, 다만 그냥 내버려 두고 지켜보라. 다만 그 눈물과 하나가 되어 흘리기만 하라.
또한 왜 난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것일까, 왜 난 깊은 체험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혹은 왜 난 수행 중에 온갖 경계를 한번도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등의 분별 또한 턱 놓아버릴 일이다. 어떤 사람은 수행을 조금만 해도 금새 삼매에 든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조금만 기도를 해도 금새 눈물이 흘러 나오며 깊은 감동을 느낀다는데, 나는 아무리 기도하고 수행을 하더라도 눈물은 커녕 그 어떤 감각적인 느낌도 없고, 환희심도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서로 다를 뿐이다. 수행 중에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이 좋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눈물을 탓하지 말라. 눈물을 많이 흘리고, 정진 속에서 부처님을 본다거나 아름다운 환상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놓아버릴 뿐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마장이 될 뿐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금강경 법문을 듣고 나니 수보리의 온 존재는 저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흘러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도무지 이런 법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진리를 들었다는 그 사실이 수보리의 온 존재를 강렬한 눈물로써 휘감고 있다. 어떠한가. 당신의 존재에서도 눈물이 흐르는가. 앞의 13장 동안에 정진해 왔던 금강경의 가르침이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는가.
우리는 그동안 온갖 상에 얽매여 맑은 눈이 가려져 버렸다. 본래의 텅 빈 시선에 온갖 어둡고 탁한 것들이 잔뜩 끼어 버렸다. 수보리는 그동안 얻어 들었던 가르침으로 인해 지혜의 눈이 열렸지만, 수보리의 혜안으로 보더라도 지금의 이 가르침은 희유하고 희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찌 찬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리의 가르침을 만나거든 수보리와 같이 찬탄하고 또 찬탄하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찬탄의 연주가 온 우주 법계에 까지 울려 퍼지게 하라. 찬탄하는 것 자체가 그대로 중요한 수행이 된다. 찬탄은 법계를 울리고, 또한 내 안의 본래 자성을 일깨운다. 찬탄의 소리는 그대로 진언이 되고, 다라니가 되어 안팎을 진리의 향기로 수놓을 것이다.
여기서 수보리가 지금까지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간 소승의 견해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대승의 가르침을 이제야 비로소 바로 보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이라는 의미는 이 금강경의 가르침만이 가장 수승하며 소승의 다른 가르침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오랜 기간 동안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곧게 전해져 내려오다가 부파불교를 거치면서 왜곡되고 퇴락해 가는 기존 불교의 삿된 부분을 타파하고자 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만큼 당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즉 당시의 소승불교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 즉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을 원하는 대중의 소망이 컸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점, 삿된 점을 파하고 바른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가 바로 대승이며, 대승의 기본이 되는 경전이 반야경인 것이다. 물론 이 금강경은 반야경 속의 작은 경전이며, 동시에 반야경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경전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소승불교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리 자체를 포함시켜 소승불교는 잘못된 것이고, 대승불교는 훌륭한 것이라거나 하는 분별도 어리석은 것일 뿐이다. 고려시대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많이 타락하고 퇴락해 갈 때 이러한 잘못된 불교를 바로잡고자 새로운 불교결사로써 정혜결사가 이루어 졌다고 해서 고려의 불교 가르침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인 것과 같다.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부파불교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해 오던 부파의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고 곡해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을 타파하고 바른 가르침을 세우기 위해 반야경, 금강경의 가르침이 나타나고 그로인해 부처님의 오롯한 정법이 다시금 새롭게 출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해지면 곧 실상(實相)을 깨달을 것이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설해오신 이 가르침을 얻어 듣고 그 가르침을 믿는 마음이 청정해 진다면 그 사람은 곧 실상을 깨달을 것이며, 이 사람은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이라고 했다. 이 가르침, 즉 사상을 비롯한 일체의 상을 여의는 이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맑아지면 곧 실상을 깨닫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체 상을 여의게 되면 좋다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등의 일체 모든 시비 분별을 쉬게 된다. 시비 분별이 없다면 좋다고 더 집착하여 잡으려 할 것도 없고, 싫다고 미워하여 버리려 할 것도 없게 된다. 일체의 모든 상에 대해 잡으려 하지도 않고 버리려 하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고요한 적멸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좋은 것(시비분별)을 더 붙잡아(집착) 두려고 하고, 그래서 그것을 ‘내 것’(아집)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 원인은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아상) 내가 있으니 ‘내 것’을 더 늘리고 싶고, ‘내 것’을 더 늘리려다 보니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집착이 일체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과정 때문에 사람들은 괴로움에 허덕이고 아파하는 것이다. 그러니 반대로 그 모든 근본 원인이 된 ‘나’라는 ‘아상’만 여의게 된다면 일체 모든 괴로움은 소멸되고 만다. ‘나’라는 아상이 없어지면 ‘내 것’을 늘리려는 마음을 여의게 되고, ‘내 것’을 늘리려는 마음을 여의게 되면 자연스레 ‘집착’도 사라지며, 모든 집착이 사라지면 자연스레 좋고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분별심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어느 한 가지 상도 내세울 수 없는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상’을 깨달을 것이라고 했는데, 실상을 깨닫는다는 말은 따로이 실상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깨닫는다는 뜻이 아니다. 상이 본래 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실상이다. 상을 여의게 되면 일체 그 어떤 상도 남지 않게 되는데 그것을 이름 붙여 실상이라고 방편으로 표현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라고 했다.

다시말해 실상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상이라는 이름을 방편으로 붙였을 뿐이지 실상이라는 상은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상이라는 표현에 어떤 모양을 짓고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벌써 실상에서 벗어나 있다. 실상은 그 어떤 상도 아니기에 실상일 수 있는 것이다. 흡사 이 말은, 불성은 그 어떤 상도 아니기에 불성일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 보통 사람들은 불성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느냐고 질문을 하곤 한다. 그 질문에는 ‘내가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어떤 불성이라는 모양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즉 불성이라는 상을 어떻게 만들어 둘 것인가 하는 마음으로 불성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는 말이다. 그랬을 때는 그 어떤 답도 내려줄 수 없다. 불성은 허공과 같다거나, 거울과 같다거나 억지로 방편으로 그렇게 표현은 해 줄 수 있겠지만 어찌 불성을 어떤 모양, 어떤 상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불성이란 일체의 상을 여의었을 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 없는 자리가 바로 불성이며 실상이기 때문인 것이다. 깨달음이 어떤 모양이냐고 묻는다면 도무지 대답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모양 없는 모양을 어찌 모양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어떠한가. 실상을 깨달았을 때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이 말도 방편일 뿐이다. 실상을 깨달아, 일체 모든 상을 여의었다면 공덕이라는 것도 방편의 말일 뿐이지, 별도로 공덕이 있을 리 없다. 일체의 상을 여읜 마당에 어찌 공덕이라는 또 다른 상이 붙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무량한 공덕이라거나 하지 않고, ‘희유한 공덕’이라고 했다. 공덕은 공덕인데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거나, 어떤 보상이나 대가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듯 억만장자가 되는 보상이 따른다거나, 능력과 외모, 성격 등이 출중해 진다거나 하는 그런 공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체의 상을 여의어 실상이 밝게 드러나면 그 어떤 공덕도 없다. 아니 공덕이라는 방편을 쓸 필요조차 없어진다. 그냥 여여부동하며 성성적적하여 어떤 한 법도 일으킬 것이 없어지고, 어떤 한 말 조차 붙일 틈이 없어진다. 그야말로 텅 비어 충만할 뿐이다. 그렇기에 공덕이라는 말의 표현을 빌릴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희유한 공덕’이다. 아무런 시비를 붙일 것도 없고, 아무런 비교나 판단이나 집착이나 욕망도 일어나지 않으며, 나와 너를 나눌 것도 없고, 잘살고 못산다거나, 잘나고 못났다거나, 아름답고 추하다거나, 좋고 나쁘다거나, 행복하고 불행하다거나 하는 일체의 모든 분별상들을 다 비워버렸기 때문에 둘 중 어떤 한 가지 좋은 쪽을 택해 많이 얻게 되는 그런 공덕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좋고 나쁜, 양 극단을 초월한 절대의 평화만이 있음도 없이 있을 뿐인 것이다. 좋다거나, 잘났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행복하다거나 하는 그런 상대를 가진 좋은 쪽의 공덕이 아닌 그러한 일체 모든 양 극단을 뛰어넘은 ‘희유한 공덕’이 있다는 말이다. 즉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희유한 좋음’이 있고, 긍정 부정 양 극단을 뛰어넘는 ‘대 긍정’이 있으며, 공덕있음과 공덕 없음을 뛰어넘는 ‘희유한 공덕’이 있다는 말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같은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고, 중생상과 수자상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살아 계실 때라면 직접 부처님으로부터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 듣고 지닐 수 있겠지만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같은 경을 신해수지(信解受持)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께 진리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 중에서도 아라한이 되지 못한 자는 수도 없이 많았거늘 어찌 오는 세상 미래세에 이러한 희유한 가르침을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지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해수지하는 것도 희유할진데 미래세에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희유한 사람일 것인가.

앞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렇더라도 물론 올바로 믿어 이해하고 받아지니는 희유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만을 인연지은 것이 아니라 수 억겁동안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지으며 가르침을 듣고 공부하여 실천한 까닭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신해수지 하는 희유한 사람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사람에게 아상은 더 이상 아상이 아니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 또한 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을 여의는 이 가르침에 있어 깨달음이란 오직 ‘상을 여의는 것’이며, 부처님이라는 것은 오직 ‘상을 떠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적멸(寂滅)이란 이상(離相)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아주 중요한 이 경의 핵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한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이것이다. 오직 상을 떠나는 것, 오직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이 우리에게 주는 화두요 깨우침이다.

일상 속에서 우린 얼마나 상에 얽매여 살고 있는가. ‘나’라는 것이 본래 없는데 다만 인연따라 거짓으로 만들어진 육신을 보고, 또한 눈귀코혀몸뜻을 보고 그것이 ‘나’라고 얼마나 고집하며 얽매여 살고 있는가. 상을 떠난 관점에서 보면 ‘나’와 ‘너’를 가를 것도 없으며, 인간과 자연을, 신과 인간을, 인간과 우주를 나눌 것도 없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나’라는 상을 짓고, ‘너’라는 상을 지으며, ‘우주’라는, ‘자연’이라는, ‘신’이라는 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왜 나와 너를 갈라놓고 내가 너보다 더 부자가 되려고, 내가 너보다 더 유명해지려고, 내가 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는가. 왜 부와 가난이라는 상을 만들어 놓았으며, 높고 낮음을 만들어 놓았으며, 아름답고 추함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거기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는가.

꽃은 꽃대로 완전한 진리의 나툼이며, 나무는 나무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공기는 공기대로 저마다 온전한 진리의 인연 따른 나툼임을 모르고, 그들을 갈라 놓고 등수를 매기며, 좋고 나쁜 것을 골라내야만 하는가. 사람 또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농부는 농부대로,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이는 가난한 이대로 저마다 온전한 자신으로써의 나툼이 있건만 스스로 너와 나를 비교하고 분별하며, 비교 우위와 비교 열등에 목숨 걸고 소중한 인생을 낭비해야 하는가.
그래놓고 그렇게 만들어 놓은 상에 스스로 얽매여, 좋다거니 싫다거니 개념을 붙여 놓고,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개념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렇게 만든 개념에 빠져 좋은 것은 더 못 가져서 안달하고, 싫은 것은 떼어내지 못해서 안달하는 이런 어리석은 일을 왜 계속해서 하고만 있는 것인가.

이 모든 문제는 오직 ‘상을 여의었을 때’ 끝난다. 상을 여의었을 때 실상이 드러난다. 상을 여읜 것이 바로 적멸이며,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어찌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르침은 그동안 우리가 배워왔고 익혀왔던 세상의 가르침과는 거꾸로 가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보다 많이 소유하고, 보다 많이 배워 익히며, 보다 ‘내 것’을 많이 쌓는 것에서 찾아 왔다. ‘나’라는 상을 만들어 놓고 ‘내 것’을 많이 채우는 것이야말로, ‘나’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며 삶의 의미라고 생각해 왔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나’를 드러내고자 돈을 벌고, 명예를 높이며, 학벌과 재력과 권력을 쌓아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라는 이름 석자를 더 많이 알릴 수 있고, 나는 더 유명해질 수 있으며, 나는 더 높아질 수 있고, 결국 그러한 ‘나’라는 아상이 강화될수록 우리는 더욱 더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굳게 믿어왔다. 그것이야말로 내 행복의 조건이고, 진리에 입각한 삶이라고 여겨왔다.
그렇게 아상을 높이려는 내 삶의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잠시 쉴 새도 없이 달려오기만 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만 쉬는 것 같아 도무지 쉴 수가 없다. 쉬다보면 남보다 뒤쳐질 것 같고, 남보도 더 적게 소유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남들보다 더 못난 사람이 될 것이고, 더 뒤쳐진 사람이 될 것이며, 더 불행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도 쉴 수가 없다. 나는 늘 바쁘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늘 바쁘고, 남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한 숨도 쉴 수 없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자위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렇게 내 삶의 전부를 걸고 달려왔던 이 길, 이 길만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 길. 지금 이 길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가르침과 만난 것이다. [금강경]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있다. 그 길은 참된 진리가 아니며,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데려다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는 ‘나’라는 것은 본래 없고, 다만 인연따라 생겨난 것이기에 텅 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다’ 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으며, 그렇기에 ‘내 것이다’라고 할 만한 소유도 실제는 내 소유가 아니고, ‘내가 옳다’고 여겨왔던 내 사상, 견해, 생각에 대한 것 또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목숨 걸고 가지려고 애써왔던 그 모든 소유의 일들이 모두 헛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라고 할 만 한 것이 없는 마당에 ‘내 것’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양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이 상이 아니라는 것을 올바로 볼 수 있을 때 여래를 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왔던, 내 삶의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달려왔던 이 모든 것이 다 텅 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고 까무라칠 일인가. 언뜻 들어보면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고, 놀랄만한 일이며, 겁나는 일인가. 지금 금강경의 이 가르침은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나’라는 상을 높이려고 살아왔던 나의 삶 자체를 모두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내가 집착하고 있는 일체 모든 것이 다 실체가 없으니 다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일체를 다 놓아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다 비우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당황스런 말인가. 그동안 쌓고 쌓느라 얼마나 많은 생을 소비해 왔는데, 얼마나 애써왔는데, 이제와서 다 놓아버리라니, 다 비워버리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그래서 보통 사람이라면 처음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들으면 놀라고 두려워하며 겁내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놀라고 겁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실체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제와서 다 비워버리라니, 다 허망한 것이라니 얼마나 억울하고 두려운 일인가.
그런데 이러한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희유한 사람이겠는가. 그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이니 셋 넷 다섯 부처님에게만 선근 인연을 지으며 공부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고 수행을 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한 번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는 것 만으로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

제일바라밀이란 무엇인가. 구마라집은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이라 번역했고, 현장은 최승바라밀(最勝波羅蜜)이라 번역을 했다. 일반적으로 제일바라밀은 육바라밀 가운데 첫 번째인 보시바라밀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구마라집 번역의 제일바라밀이 첫 번째 바라밀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인데, 산스크리트 원전을 직접 번역하신 각묵스님은 이것이 구마라집 번역의 한문 해석만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해석이 나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장은 최승바라밀은 다름 아닌 반야바라밀이라고 부연설명하고 있으며[如來說最勝波羅蜜多 謂般若波羅蜜多], 각묵스님은 ‘산냐를 극복하라는 이 가르침이야말로 최초기부터 세존께서 고구정녕히 설하신 것이고 그 정신을 바로 전해 받은 이 경이야말로 최고의 바라밀, 최고의 가르침, 불교의 핵심이라는 말로 이해한다’고 함으로써 제일바라밀을 ‘최고의 바라밀’ 즉 ‘최고의 가르침’, ‘불교의 핵심’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최고의 가르침은 바로 ‘상을 깨는’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야말로 반야바라밀이다. 즉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약견제상비상]이 가르침이야말로 반야바라밀, 즉 지혜로써 저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는 궁극의 깨달음을 설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니 각묵스님의 최고의 바라밀이라는 의미나 현장스님의 반야바라밀이라는 의미나 크게 다를 것은 없다고 본다.

또한 구마라집 번역의 보시바라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로 보자면 동일 선 상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금강경에서는 상을 타파하는 것이 주된 가르침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설법의 대상이 주로 보살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앞서 말한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주된 서원인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그 중에서도 하화중생의 관점에서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이롭게 하는 보시를 예를 들어 상을 타파할 것을 설하고 있다.
즉 보살이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자 원을 세워 실천하지만, 보살에게 ‘내가 중생을 교화한다’거나, ‘내가 중생에게 가르침으로써 베풀고 있다’ ‘나는 법보시를 행하고 있다’는 등의 ‘내가 보시한다’는 아상이 있다면 그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아상’의 틀을 깨고 나오지 못한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문장의 제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라 해석하거나, 최고의 바라밀이라 해석하거나, 혹 보시바라밀이라 해석하더라도 큰 금강경의 문맥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면 다시 경전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은 일체의 상을 타파한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했기 때문에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다’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즉 제일바라밀이라는 것, 혹은 최상의 바라밀, 반야바라밀, 보시바라밀이라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림을 당했을 적에 내게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과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에 내가 옛적에 사지를 마디마디 베이고 잘렸을 때 만일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여래가 과거에 오백 생애 동안 인욕 성인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더라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일체의 상을 타파한 사람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했으므로 이러한 가르침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반야바라밀에도 집착하지 않고 보시바라밀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인욕바라밀에도, 육바라밀에도, 나아가 부처님의 그 어떤 가르침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지만 그 모든 가르침을 집착함이 없이 다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또 제일바라밀에 이어 또 하나의 비유로써 인욕바라밀을 들고 계신다.

인욕(忍辱)이란 어떤 괴로움이라도 잘 참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억지로 참는다거나, 마음 속에 꾹꾹 눌러 놓고 쌓아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참된 인욕이란 참되 참는다는 생각마저도 다 소멸된 참음이다. 참는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참는 나’가 있다는 말이다. 즉 ‘나’라는 아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참음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 완전히 소멸되고, 일체의 상 또한 모두 소멸된 가운데 참는 것을 말한다.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라고 했다. 인욕바라밀이라고 말하면서 인욕바라밀을 행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인욕바라밀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인욕바라밀을 행하는 자는 ‘내가 인욕바라밀을 행한다’는 상이 없다. 그러한 수행자에게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에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계실 때, 고요한 숲 속 나무 아래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마침 그 나라의 왕인 가리왕(歌利王)이 사냥을 나와 있었다. 가리왕이 산 중에서 사냥을 하다가 잠을 자고 깨어 보니 함께 온 시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때 함께 온 시녀들은 나무 밑에 앉아 선정에 들어 있는 인욕선인을 발견하고는 그 모습이 너무나 청정하고 고귀해 보여 친견하고 예를 올리고 있던 차였다. 이 광경을 본 가리왕은 질투심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말하기를, “어찌 방자하게 남의 여색을 탐하는가” 라고 하니, 선인은 답하기를 “나는 여색을 탐하지 않습니다. 나는 인욕을 닦는 수행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얼마나 인욕을 잘 하는가 두고보자’ 싶은 마음에 인욕선인의 코를 베고, 팔을 베고, 다리를 베면서 사지를 갈기갈기 잘라 놓고는 “네놈이 이래도 화가 나거나, 원망하는 생각 없이 참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었다.

이에 인욕선인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거늘 어찌 화를 내거나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인욕 선인은 육신이 ‘나’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육신이 베이고 잘림을 당하였지만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억지로 참아 가슴 속에 화를 담아 둔 것이 아니라 청정한 인욕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것은 화를 낼 ‘나’가 없으며, 원망할 ‘나’가 없다는 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의 인욕선인으로 사지를 찢기고 베일 때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지만, 부처님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에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육신이란 다만 인연의 모임에 불과한 것이다. 밥과 반찬이 내 앞에 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먹는다는 인연에 따라 밥과 반찬이 인연따라 내가 된 것일 뿐이다. 밥과 반찬이 나로써 윤회를 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대소변으로 빠져 나가거나, 땀으로 빠져 나갔다면 그것은 다시금 인연따라 대지로 돌아간 것이다. 이와같이 일체의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은 인연따라 잠시 우리 몸으로도 변했다가, 흙으로도 변했다가, 나무로도 변하고, 꽃으로도 변하는 것일 뿐, 어느 한 모습을 가지고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과 하나가 있을 때 그것을 칼로 자르면 우리는 화를 내지 않는다. 사과는 그저 사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과를 내가 먹고 사과가 우리 몸의 살로 변했다고 치자. 그랬을 때 칼로 살을 자르면 우리는 화를 내고 원망할 것이다. 그것은 ‘내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그 몸이 ‘내 것’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다만 사과가 변한 것에 불과하다. 내가 먹은 것이 내 몸으로 잠시 변화하여 인연따라 나툰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내 몸을 칼로 그었을 때 괴롭거나 화를 내려거든, 사과를 칼로 자르거나, 나무를 칼로 자를 때도 똑같이 화를 내고 원망해야 할 것 아닌가.

어디 인욕선인 뿐이겠는가.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금강경을 번역하신 구마라집의 문하에 승조(僧肇)라는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승조스님은 워낙 명성이 뛰어나 불교계 뿐 아니라 세간에서 또한 크게 숭상받았는데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의 모함도 받게 되었고 왕이 부하로 만들려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이 승조스님을 탐낸 진나라 왕 의희는 스님을 퇴속시켜 자신의 부하로 만들려고 갖은 희유와 협박을 다 하였다.

"스님께서 속인으로 돌아와 재상이 되면 천하의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니 부디 짐의 청을 저버리지 마시오"

그러나 스님은

"재상이 다 무엇이고 천하가 다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 법에서 볼 때는 모두가 부질없는 꿈 속의 일일 뿐입니다. 나는 무상대도를 얻어 만 중생을 이익되게 할 것입니다."

라며 단번에 거절해 버렸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진왕은 승조스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승조스님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사형이 집행되기 전 칠을 동안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꿰뚫은 보장론을 저술하며 죽음을 앞에 두고도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번역하는데 몰두하였다. 곧 형틀에 올라 칼로 목을 베이는 참수형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태연하게 게송 하나를 읊었다고 하니 다음과 같다.

"사대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원래 주인이 없고(四大元無主)
다섯 가지로 모여진 이 몸은 본래부터 비었도다.(五陰本來空)
장차 흰 칼날이 내 목을 자를 것이나,(將頭臨白刀)
이는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을 뿐이다."(猶似斬春風)

마치 봄바람을 칼로 베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아! 이 금강경 가르침이야말로 감히 범인으로써는 범접하기 어려운 광대한 기상과 깨달음을 담고 있는가.

이처럼 세상의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은 다만 인연따라 끊임없이 모양을 변화시킬 뿐,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다. 내가 죽어 다음 생에 개나 돼지로 태어났다고 치자. 그러면 이번 생의 내가 나인가, 다음 생의 개나 돼지가 나인가. 또 그 다음 생에는 천상에도 태어날 것이고, 또 그 다음 생에는 지옥으로도 태어날 것이며, 어떤 생에는 여자 몸을 받았다가 또 어떤 생에는 남자 몸을 받게 될 것인데, 어느 한 때를 콕 찝어 ‘나’라고 고정지어 말 할 수 있겠는가. 어느 것도 ‘나’가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변화하기만 할 뿐.

이와같이 부처님께서는 과거 오백 생 동안 인욕 선인이 되었을 때에도, 수없는 생을 윤회하고 육신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한 번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지니,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무상정등정각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마땅히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보리심을 일으키되 일체의 상을 떠나서 일으켜야 한다. 일체의 어떤 상에도 얽매임 없이, 집착함이 없이, 머무름이 없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보리심을 일으킨다. 수많은 이들이 다 깨달음을 추구하며, 위없는 대 보리를 증득하고자 수행하고 정진하며 또 보시하고 있다. 지혜와 복덕을 얻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리심을 일으킨 수행자라 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상에 머무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깨닫고자 하는 보리심을 일으키긴 하는데, 거기에 또 ‘나’를 내세우게 된다. ‘내가 깨닫겠다’ ‘내가 보리를 이루겠다’ 하는 아상에 머물러 깨달음을 추고하곤 한다. ‘내가 깨달아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행복을 이루겠다’거나, ‘내가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구제하겠다’거나 하는 등 깨닫고자 하는 주체를 ‘나’라는 상에 꽁꽁 묶어 두곤 한다.

혹은 부처라는 상을 만들어 두고, 진리라는 모양을 만들어 두고, 내가 깨달아 가야 할 이상향을 마음 속에 설정하여 모양을 만들어 두고는 그 길로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진리는 없다. 그런 부처는 없다. 어떤 모양을 가진 진리, 어떤 상을 가진 부처는 없다. 모양을 짓고, 개념을 붙이며, 생각하는 그 속에는 결코 진리도, 부처도 있지 않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상에 머물러 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키되, 그 어떤 상에 머물러 보리심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참된 구도자의 길이 아니다. 수행자는 일체 모든 상을 다 타파할 수 있어야 한다. ‘나’라는 상도, 부처라는 상도, 진리라는 상도, 참나라거나, 불성이라거나, 주인공, 진아, 본래자성, 본래불 그 어떤 말을 가져다 붙일지라도 그것이 다 방편인 줄 알아야지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고 머물러서는 안 된다.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켜야 한다.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라고 했는데, 색성향미촉법이란 다시말해 우리 인간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 육근의 대상, 즉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을 말한다고 했다. 다시말해 ‘나’라는 주관이 접촉하여 만날 수 있는 일체의 외계 대상을 말한다. 바로 이 육근과 육경의 가르침은 근본불교에서부터 줄곧 중요한 생활 법문으로 이어져 온 중요한 가르침이기에 다시한번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 몸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게 마련이다.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고,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색이란 눈에 보이는 대상인 빛깔과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즉, 우리는 바깥 대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는지에 마음이 머물길 좋아한다. 사람을 만나더라도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고, 못난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가. 그래서 좋은 사람은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쓰고 집착하면서 싫은 사람과는 떨어지지 못해 안달한다. 그렇게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이 사람들의 일상이다. 그러나 몸이라는 것도 어떤가. 사람의 몸은 그저 똥주머니일 뿐이라는 선지식의 말씀이 있다. 그야말로 이 몸이라는 것은 온갖 오물 같은 오장 육부와 모든 것들을 집어넣어 놓은 똥주머니일 뿐이다. 좀 비위 상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몸 속의 모든 내장 기관들을 다 끄집어 내 보라. 그것이 어디 예쁘고 좋을 것이 있겠는가. 얼굴이 예쁘다는 것도 눈코입 중 어느 하나가 조금만 살짝 옆으로 옮겨 달렸더라면 못난 얼굴이 되지 않았겠는가. 이 몸뚱이라는 것, 외모라는 것도 다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몸을 받을 것일 뿐이다.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에 따라 이 똥주머니의 생김새도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몸에 집착할 것이 무엇인가. 100년도 못 살다가 대지의 지수화풍으로 돌아갈 육신이거늘 어디에 집착해 내 것이라고 단정 짓고 소유할 수 있겠는가.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낸다는 것이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낸다. 칭찬이나 비난을 들을 때 울고 웃으면서 우리는 그 소리(聲)에 많이 휘둘린다. 칭찬을 들으면 좋아하고 비난을 들으면 싫어하기 때문에, 칭찬은 더 듣고 싶어 안달이고, 비난은 듣기 싫어 안달이다. 그러나 칭찬과 비난이라는 소리 또한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다만 소리일 뿐이지 않는가. 인연따라 잠시 칭찬도 들을 수 있고 비난도 들을 수 있는 일인 것이지, 칭찬을 들었다고 내가 정말 칭찬받을만한 실체적인 무엇이 되는 것도 아니고, 비난을 들었다고 스스로가 비하되거나 못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말에, 소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말에 휘둘린다는 것이 얼마나 짐승스러운가.

또한 냄새에, 맛에, 감촉에, 생각의 대상인 법에 우리는 늘 휘둘리면서 산다. 늘 그러한 육근의 대상에 이끌려 자기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고, 그 중 좋은 데 탐심(貪心)을 내며 집착하고, 싫은 것에는 진심(嗔心)을 내며 미워하곤 한다. 그러나 좋고 나쁜 것이 본래 없다. 그 어떤 육근의 대상도, 그 어떤 색성향미촉법이란 대상도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꿈처럼 나툴 뿐이다. 우리가 집착할 그 어떤 실체도 아닌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니 치심(癡心)이 들끓어 마음을 머물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탐심, 진심, 치심이란 삼독심(三毒心) 생겨나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이 본래 텅 비어 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다. 바른 지혜만이 탐진치 삼독심을 끊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일체의 상을 타파하는 길이다. 일체의 상이 타파될 때 삼독심이 소멸하며 그 어떤 집착의 대상도 없게 된다. 그래야 자유롭다. 어디에도 걸림 없이,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고 집착할 것 없이 자유롭게 휘적휘적 삶의 길을 내딛게 될 수 있다.

여기서 이와 관련된 달마스님의 파상론의 말씀을 좀 더 들어보자.

“수행을 성취하자면 여섯가지 도적을 쫓아 버려야 하는데, 눈의 도둑을 쫓아 버리자면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들리는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며,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하고,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맛에 탐미하지 않으며, 법다운 말만을 해야 하고,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고, 마음의 도적을 조절하자면 무지를 극복하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

달마스님은 여섯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들어오는 그 각각의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이 가장 큰 도둑이며, 도적이라고 하고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향기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며, 마음으로 분별하는 등 이 모든 우리 몸의 기관들은 바깥의 대상들 즉 육경, 색성향미촉법을 끊임없이 얻어 가지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 시도 평화로울 날이 없이 대상을 탐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물질(色)을 탐하고, 귀로 좋은 말(聲) 듣기를 원하며, 코로 좋은 향기(香) 맡기를 바라고, 혀로 맛(味)에 탐닉하고, 몸으로 좋은 감촉(觸)을 탐하며, 마음으로 온갖 분별을 일으켜 생각(法)을 지어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섯의 도둑 때문에 우리는 늘 고요하지 못하고 탐내며 성내고 어리석은 것이다. 여섯 기관으로 좋은 것을 탐내다가(貪心) 얻지 못하였을 때 화(嗔心)를 낸다. 이처럼 여섯 기관의 도적에 휘둘려 여섯 대상이 텅 비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는 그 마음이 바로 어리석음(癡心)인 것이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이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항복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육근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들을 잘 관(觀)하여 들고 나는 그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할 것이다.

눈의 도둑을 몰아내려면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에 좋고 나쁜 분별을 짓고 좋으면 애착하여 붙잡으려 하고, 싫으면 증오하여 버리려고 애를 쓰니 색이라는 경계에 휘둘려 마음을 번뇌로 몰아가는 것이다.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귀로 들려오는 그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아서 칭찬이든 비난이든 그 어떤 좋고 나쁜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 칭찬에 집착하여 자꾸 듣고자 애쓰지도 말고 칭찬을 들었다고 쉬 들뜰 것도 없으며, 비난을 들었다고 번뇌에 휩싸여 내 중심을 잃고 헤매어 서도 안 된다.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 향기에 분별하면 곧장 눈귀코와 몸뜻도 함께 분별을 일으켜 온갖 집착을 만들어 낸다.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먼저, 맛에 탐미하여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야 한다. 맛에 탐함이 많으면 때를 구분하지 못하여 시도 때도 없이 먹게 되고, 그리하여 그 탐심이 뱃속을 채우게 되어 몸을 어지럽히고 그로인해 정신이 혼미해져 마음에도 헤를 입힌다. 또한 입을 잘 관하여 법다운 말만을 해야지 생각난다고 다 입 밖으로 내 놓게 되면 사람이 실없어 지고 공허해 진다. 늘 입을 잘 다스려 침묵을 지킬 일이고 말을 할 때라면 몇 번이고 관하여 법다운 말을 어렵게 꺼낼 일이다.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 자칫 감촉에 집착을 하게 되면 음탕한 행과 삿된 행으로 온갖 신업을 짓게 된다. 몸의 행동을 늘 잘 관하여 어떤 행동에도 감촉의 욕망에 휘둘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마음의 도적을 잘 조절하자면 수행을 통해 어리석은 마음을 잘 극복하고, 관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아야 한다. 늘 경계따라 올라오는 마음을 잘 관하여 그 마음이 신구의(身口意)로 어떻게 퍼져 나가는 지 잘 살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십이연기에서는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라는 지분으로 설명하고 있다. 명색(名色)이란 색성향미촉법 육경(六境)을 말하며, 육입(六入)이란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을 말한다. 육입이 명색을 촉(觸)할 때 수(受)가 일어나고 수는 곧 애(愛)를 불러오며 애는 취(取)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촉이란 육근과 육경이 접촉하는 것을 말하며, 수는 느낌, 감정을, 애는 애욕, 취는 집착을 말한다. 이렇게 어려운 용어를 써서 그렇지 쉽게 말하면,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여섯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각각 눈으로는 빛과 모양을, 귀로는 소리를, 코로는 냄새를, 혀로는 맛을, 몸으로는 감촉을, 뜻으로는 뜻의 대상인 법을 만날 때(촉) 좋고 싫은 느낌을 가져오고 그 느낌의 결과 애욕(애)을 일으키며 그것이 결국 집착(취), 취착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즉 위에서 말한 비유에서와 같이, 사람이 육근 중 안근인 눈(육근)으로 예쁜 사람(육경)을 볼 때(촉) 좋은 느낌(수)이 일어나고 연이어 애욕이 생겨나고(애) 그 결과 그 사람에게 집착(취)하려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이런 집착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인이 이와같은 육근과 육입의 접촉으로 인해 생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금강경에서는 육근을 가지고 육경을 접촉하되, 육경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육근이 있는 이상 육경을 접촉하지 않을 수 없고 접촉하게 되면 느낌과 애욕, 집착이 연이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육경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면 십이연기의 중간 단계에서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요소를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 더 쉽고 실천적인 부분으로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수, 애, 취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색성향미촉법 육경을 만날 때 색에도 머물지 않고,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겠는가.

그 해답을 부처님께서는 정념(正念)에 두셨다. 즉 잘 관찰하고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바로 깨어있는 마음으로써 잘 관찰함으로써 육경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눈이 대상을 볼 때,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코로 냄새를 맡을 때, 혀로 맛을 볼 때, 몸으로 접촉할 때, 뜻으로 헤아릴 때 항시 육근과 육경을 또 육근과 육경의 접촉을, 그 접촉에서 오는 느낌을, 그 느낌에서 오는 애욕과 집착을 마음을 모아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근본불교의 사념처(四念處)에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 네 곳을 잘 관하라고 하고 있다. 즉 육근이 머물러 있는 신념처, 즉 우리의 몸과 몸의 감각기관을 잘 관하라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로 육근과 육경이 만날 때 일어나는 수념처, 즉 느낌, 감정을 잘 관하라는 것이다. 셋째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경계를 관하며, 넷째로 법에 대한 관찰을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깨어있는 비춤으로 관하게 되었을 때, 색에도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 여섯가지 도적인 육경을 잘 경계하여 이 도적들이 우리를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이 여섯가지 기관, 육근을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성의 외곽이 튼튼하고 병사들이 두 눈 뜨고 깨어 있게 되면 함부로 도적들이 성을 뛰어 넘을 수 없지만, 병사들이 잠 자느라 깨어있지 못하게 되면 쉽사리 도적이 성을 침범하듯, 우리 몸의 여섯 기관을 잘 관하여 깨어있는 마음으로 지켜봄으로써 여섯가지 대상이 여섯 기관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도 여섯 도적을 항복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하라고 연이어 법문하고 계신다.

"만약 마음을 거두어 내면을 관찰하고 밖의 대상의 일을 밝게 깨달아 잘 관조할 수 있다면 탐진치 삼독심을 완전히 끊을 수 있고, 밖에서 들어오는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막을 수 있다. 그러면 많은 공덕과 갖가지 장엄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요. 진리에 이르는 많은 길을 낱낱이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머지 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

여섯 도적을 잘 관조함으로써 삼독심을 끊고 온갖 공덕을 성취하며 머지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수행의 관건은 바로 이 여섯 감각기관인 여섯 개의 문을 잘 관조함으로써 여섯 도둑들이 들어오는 것을 잘 막아내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하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구마라집의 해석본에는 없지만 연이어 산스크리트 원본에서는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라고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경전에서는 법을 진리 혹은 존재로 번역하고 있다. 제법무아에서의 법은 존재를, 삼법인에서 법은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 어떤 법이라도 마찬가지다. 제법무아에서 보듯이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어 무아이고 텅 비어 있는 공 그 자체이다. 그러니 일체 그 어떤 존재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비존재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을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진리에도 진리가 아닌 것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어디에든 마음이 머물 곳을 정해 두면 그것은 집착이고 상에 얽매이는 것일 뿐이다. 진리에도 머물면 안 되고, 부처에도 머물면 안 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일체 그 어떤 것에도 머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 그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간에 이 마음은 집착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집착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대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여기, 무집착에 있다. 금강경에서 상을 타파하라는 것도 상에 얽매여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때문이며, 근본불교에서 제법무아, 제행무상, 일체개고의 삼법인을 설한 것이며, 사성제를 설한 것 또한 집착을 타파토록 하기 위함이다. 선불교에서 방하착(放下着)하라는 말 또한 집착을 놓으라는 말이고, 인류의 모든 성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인 ‘마음을 비우라’는 것 또한 일체 모든 애착과 집착을 비우라는 말인 것이다. 집착이 없으면 어디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아 자유롭다. 집착이 없으면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도 사라지며, 내것과 네것을 나누는 분별도 사라진다. 집착이 없으면 베풀어도 베풀었다는 상이 생겨날 수가 없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집착 없음에 있다. 즉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이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이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즉 머무름 아님이 된다.

마음이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고 했는데, 사실 마음이 머물러 있다는 것도 사실은 머무름이 아니다. 본래적인 진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디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고, 머물 주체가 없으며, 머물 곳이 없거늘, 어디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머물러 집착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집착할만 한 것도 없다. 집착이라는 것 또한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꿈에 집착한다고 하지만 실은 꿈을 깨고 보면 집착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집착한다고 생각하지만 환상으로 환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환상은 환상일 뿐 실체가 될 수 없다. 꿈 속에서 집착하고 아파할 수는 있지만, 그래서 그 꿈 속에서는 죽을 것 같고 아파 미치겠지만 꿈을 깨고 보면 그것이 실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금새 깨달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집착했지만 사실은 집착이 아닌 것이다.

연극의 주인공은 사랑하고 아파하며 집착하고 그 연극 속에서 필요한 모든 마음을 다 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은 연극일 뿐 실제가 아닌 줄 알기 때문에, 사랑하고 아파하며 집착하지만 마음이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집착 없이 집착하고 집착 없이 사랑하며, 집착 없이 아파하고 즐거워하고 있을 뿐이다.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뿐이다.
사실은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집착 없이 살고 있다. 머물러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머무름 없이 살고 있다. 그렇기에 선지식 큰스님들께서는 깨닫고 보니 깨달을 것이 없고, 닦을 것이 없으며, 집착을 버릴 것도 없고, 무언가 끊어낼 번뇌가 없다고 하셨다. 이미 다 이룬 부처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생노병사에 얽매여 고통받고 있지만, 사실은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가 꿈 속에서 일어나는 것 처럼 환상이고 꿈이며 신기루와 같은 것임을 보신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이룰 것이 있는가. 우리는 이 자체로써 이미 다 이룬 부처이며,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입장에서 본다면, 더 이상 깨달을 것도 없고, 무언가를 구할 것도 없으며, 수행해서 진리를 깨닫겠다는 것도 다 허망한 말일 뿐이다. 깨닫고자 노력하고 애쓰는 그 자체가 벌써 어긋나 있는 것일 뿐이다. 이미 우리는 본래부터 부처였으며, 본래 다 깨달아 있던 것이다. 본래부터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고 있었으며, 집착 없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머무름 있다는 것도 사실은 머무름 아닌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응당히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보시도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 것이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 보살이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할 수 있겠는가. 보살은 보살도를 실천하며,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하화중생하지만, 스스로 보시한다는 생각이 없다. 스스로 보시를 하면서도 보시한다는데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다.
이 몸(색)에 집착하여 이 몸을 더 편히 하겠다는 생각이라거나, 이 몸이 깨달음을 이루자거나, 내가 널리 보시하여 일체 중생을 구함으로써 큰 복덕을 누리자거나 하는 그런 색에 머무는 보시를 하지 않는다. ‘나’에 집착하고, 육신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보살은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하지도 않는다. 그 어떤 일체 육근의 대상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름이 없다. 보다 좋은 소리를 듣겠다거나, 보다 좋은 향기와 맛과 감촉이나 법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름이 없다.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함으로써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보살 스스로는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보시하겠다는 상이 없다. 나와 너라는 상대 개념이 없으며, 좋고 싫다는 분별도 없고, 중생과 부처라는 차별이 없고, 생사와 열반이라는 생각 또한 텅 비어 공적할 뿐이다.
보살은 어떤 한 생각도 일지 않는다. 무심(無心)일 뿐이다. 마음으로 무언가를 행하거나, 마음으로 깨닫고자 하거나, 마음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마음 자체가 없다. 일으킬 마음도 없고, 닦을 마음도 없으며, 깨달을 마음 또한 완전히 텅 비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보살의 광대무변하고 원만한 일체 중생을 향한 무분별의 보시이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상을 타파하라고 했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 일체 모든 상이 개시허망이므로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것도 없다. 타파할 상이 없다. 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공연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가운데, 중생들이 홀연히 꿈처럼 망상을 일으켜 상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 낸 상 또한 상이 아니다. 상이라고 분별을 일으켰을 뿐이지 그것은 상이 아니다. 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스스로 그 상에 빠지고 걸리며 집착을 일으킴으로써 울고 웃고 해 왔지만 여전히 상은 생겨난 적도 없고 소멸된 적도 없다.

다만 저 혼자서 상을 만들고 깨고 그러면서 상을 만들었을 때는 중생이라고 생각하며 상을 깨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상을 깨버린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이름 짓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중생이 수행을 통해 열반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이 만들어 낸 공일 뿐이고, 망상일 뿐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중생도 마음도 부처도 이 셋은 서로 차별이 없다고 했다. 중생이 마음을 닦는 과정을 통해 부처를 이룬다는 것 자체가 공한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중생이고 무엇이 마음이며 무엇이 수행이고 무엇이 부처인가. 다 꿈 속의 일일 뿐이다. 다 신기루이고 물거품이며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중생이 따로 없고 부처가 따로 없다. 부처님께서 지금까지 설하신 상이라는 것, 중생이라는 것은 다만 방편일 뿐이다. 홀연히 상을 만들어 내, 그 상에 갖히고 집착해 있는 자신을 중생이라고 하여 얽매이니까 ‘그게 아니다. 상이 상이 아니다. 무릇 모든 상이 다 허망한 것이다. 상이 상이 아님을 볼 때 부처를 볼 것이다. 중생도 중생이 아니며 부처도 부처가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을 뿐이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고 있지만 도무지 오리무중일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상이 그렇게 많고 두터우며 지중하다. 온갖 망상과 번뇌가 하늘을 찌르며 수미산을 덮는다. 그러니 어찌 이러한 부처님 말씀에 금새 신심을 일으키고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가만히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제는 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했다가 또 상도 상이 아니라고 하시고, 중생이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가 중생도 중생이 아니며 부처도 부처가 아니라고 하시니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 쯤 되니 번뇌가 깊고, 두터운 상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은 의심이 든다. 부처님 말씀에 대한 의문이 들고 의심이 든다. 도대체 저 말이 참말이란 말인가. 실다운 말이며 여법한 말인가. 거짓말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왜 저렇게 이랬다 저랬다 하시면서 서로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온갖 부처님 말씀에 대한 의심이 들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고 말씀하신다.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여래는 참된 말만을 하는 이다. 거짓된 말을 하지 않는다. 또한 실없이 이유없이 말씀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말씀만을 하신다. 온갖 다량한 상에 얽매여 있는 복잡 다단한 중생들에게 얽매여 있는 다양한 상을 깨뜨려 주기 위해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씀만을 하실 뿐이다. 그 부처님의 모든 말씀은 여법하다. 법에 합당하며, 진리로 이끄는 말씀만을 하고 계신다. 그렇기에 거짓된 말일 수가 없다.

우리 생각에는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을 하시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을 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부처님께서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이 필요했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보살이 스스로 하화중생을 하며 중생을 구제하면서 아주 작게나마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내가 보시한다’는 상을 내고 있음을 보시고, 그에 응해 상에 머물러 보시하지 말며, 보시한다는 마음을 일으킴도 없이 보시해야 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언뜻 금강경의 설법을 보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보인다. 이 말씀을 했다가 갑자기 저 말씀을 하는 듯 보이고, 이 설법을 하시다가 왜 갑자기 다른 말씀을 하시는가 싶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설법이 응병여약의 대기설법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근기에 맞춰, 온갖 중생의 근기에 맞춰 그때 그때 필요한, 그때 그때 그 사람의 마음상태와 근기, 상황과 일어난 온갖 생각들을 비추어 보시고 그에 합당한 여법한 법문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보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일지 모르지만, 마음을 모아 금강경에 집중하여 공부해 보면 위없는 부처님의 지혜에 그만 깊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이상에서와 같이 설법을 하고 나면 이 즈음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의 극단에 치우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옭고 그르다거나, 좋고 싫다거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등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어찌 전적으로 옳거나 그를 수 있는가. 어떻게 절대적으로 좋거나 싫을 수 있단 말인가. 삶의 그 어떤 모습도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것이다. 삶에는 정답이 있지 않다. 정답일수도 오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렇게 분별하고 시비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말씀도 어느 쪽이 맞느냐 하고 둘 중 하나를 골라 그 하나를 불법이라고 못박으라고 독촉하곤 한다.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다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불생불멸이고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이라고 하면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생이면 생이고 멸이면 멸이지, 또 불생이면 불생이고 불멸이면 불멸이지 불생불멸은 무엇인가 하고 따지고 든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말 해 놓으면 어찌할 것은가. 그 사람은 그 옳다고 배운 한 쪽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옳다고 느끼며 상대는 틀리다고 몰아붙일 것이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리다고 느끼기 때문에, 상대와 다툴 일이 생기고 싸울 일이 생겨난다. 이에 따라 나 또한 괴롭다. 어느 한 쪽에 고집함은 결국 고통을 부를 뿐이다. 그런데도 왜 애써 둘을 서로 나누어 놓고 그 중 하나만을 고집하고 집착하려고 애쓰는가.

왜 불자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빠져 불교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가. 불교만이 진리고 불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틀에 빠지면 타종교 신자와 싸울 수 밖에 없고 그로인해 나는 고통당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도 부처님의 이런 열린 가르침이 불법을 수행하는 이들에게는 당연스레 받아들여지다 보니 불법으로인해 전쟁이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어떤 종교는 그 종교만이 진리라는데 치우치다보니 얼마나 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종교만이 진리라고 고집하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곧 옳고 그른 것을 가져오고 그러한 시비는 다툼과 전쟁을 불러오며, 그로인해 우리는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은 종교전쟁으로 아파했으며 고통당해야 했는가. 인류의 전쟁 가운데 상당한 부분이 종교로 인한 전쟁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내 것만이 옳고, 이것만이 진리다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참된 종교도 참된 진리도 될 수 없다. 참된 진리가 아닐 뿐 아니라 그것은 전쟁을 부르고, 살상을 부를 뿐이다. 이제 올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올바로 볼 정견의 지혜의 안목이 있어야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온전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불교는 그런 종교이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종교. 어디에도 고집하지 않는 종교. 불교 그 자체에도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종교이다. 진리에도, 법에도, 부처에도,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갈 수 있고, 그 어떤 종교와도 열린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그 어떤 진리의 모습들도 다 감싸안고 받아들일 수 있다. 혹 외도들과도 마땅히 대자비심이 바탕이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것은 불교 그 자체에도 고집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불법의 위대함이다. 불법의 치우침 없는 진리성을 대변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말하고 있다. ‘여래가 얻은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이 얼마나 광대무변한 걸림 없는 대자유의 설법인가. 도무지 이런 말은 진리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는 그동안 금강경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왔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의 분별, 시비하는 습관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도 어느 한 쪽에 기울고 말 것이다. ‘역시 금강경의 가르침은 참된 것이구나’ ‘이 진리야말로 실다운 것이구나’ 하고 감동하거나, 혹 또다른 사람은 ‘도무지 금강경은 알 수가 없구나’ ‘실다운 것이 아닌 헛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일체 모든 상도 상이 아니라 하고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하니 ‘불법은 다 허망한 것이구나’ ‘불법이란 다 헛된 것이구나’ 하고 생각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두 가지 차별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실답다고 생각하는 그 치우친 생각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헛되다고 생각하는 그 치우친 생각에서도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금강경의 가르침, 불법을 실답다고 생각하면 그 외의 다른 것은 실답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불법이 실답다는 그 견해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러한 견해는 곧 옳다는 편견을 불러오고, 그것은 집착을, 또한 그 가르침에 대한 집착은 다툼과 고통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헛되다는 치우친 생각 또한 그르다는 편견을 불러옴으로써 그릇되다는 집착과 편견으로 인해 다툼과 고통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두 가지 모두 치우친 견해일 뿐이고, 고통을 불러오게 될 뿐이다.

또한 선악(善惡)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보통 선악을 나누어 놓고 선은 좋은 것이니까 취해도 좋고 악은 나쁜 것이니까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의 설법일 뿐이다. 본질에서 본다면 선악이 서로 나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선에 치우치더라도 고통받고 악에 치우치더라도 고통받게 된다는 그 끝은 변함이 없다. 선에도 머물지 말고 악에도 머물지 않을 수 있어야 선악을 초월해 대 자유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실답다는 데 머무르지도 말 것이며, 헛되다는 데 머무르지도 말라고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을 통해 끊임없이 보살의 보시에 대한 상을 놓아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승의 보살은 거의 깨달음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이제 보살에게는 그 어떤 번뇌도 그 어떤 괴로움도 거의 다 사라졌다. 업(業)이 거의 다 소멸되었다. 그렇기에 보살은 업에 의해 태어나지 않고 원(願)에 의해 태어난다. 업생이 아닌 원생이다. 깨달음에 들기를 잠시 뒤로 미루고 일체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하화중생의 원이 모든 보살을 보살이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렇기에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보다는 중생을 교화하여 열반에 들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다. 아니 거의 깨달음의 입구까지 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필요가 없다. 언제든지 열반에 들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일체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는 대비중생의 원력만이 보살을 지금 이 중생계에 묶어 두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보살에게는 오직 하나의 서원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겠다’ ‘일체중생에게 보시하겠다’는 한 가지 서원 밖에 없다. 그러나 서원 또한 일종의 욕심이다. 그러나 그 욕심은 중생들의 욕심처럼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욕심이 아닌 일체 중생을 향한 이타의 승화된 욕심이다. 승화된 욕심이지만 여전히 중생계에 남는 이유가 되는 욕심이다. 여전히 부처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언제든지 다시금 중생계로 떨어질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다시금 시비 분별의 세계에 물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 보살들의 이타적인 서원이 이기적인 욕심으로 바뀌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 전체에 걸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에게 설법하고 있다. 어떤 법에도 머물러 보시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중생을 구제하고 중생을 위해 보시하면서도 내가 보시한다는 상을 일으키지 말라는 당부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자비심이다. 한 두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부모님께서 어린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타이르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여 이야기 하듯 부처님께서도 보살에게 똑같은 법을 계속해서 설하고 있다.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일순간 어두워질 것이다. 밝은 깨달음의 마음이 소멸하고 곧장 어두운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으로 떨어질 것이다. 보살이 일체 중생을 위해 교화하고 보시하지만 자칫 보시한다는 한 생각에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보살은 곧장 어두워질 것이다. 곧장 무명, 치심(癡心)에 물들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계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염려하고 계신다.
그러나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이 그 밝음은 유지될 것이다. 그 광명은 한없이 중생계에 빛을 놓을 것이다.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다음 세상에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운다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다. 부처님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진리 그 자체, 진리의 당체인 법신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법을 향하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법으로써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 우리 마음 안의 진리를 다 알고 다 보시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운 사람은 스스로 공덕을 성취한다는 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다. 만약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더라도 스스로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바라는 마음으로 경전을 읽고 외운다면 그 사람에게는 공덕이 없다.

달마대사가 양무제에게 그 많은 절을 짓고 불전에 보시를 했더라도 그것은 어떤 공덕도 있지 않다는 말과 같다. 스스로 절을 짓고 보시했다는 상에 얽매이고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은 어떤 공덕도 없다. 그러나 일체 모든 공덕을 놓아버릴 때 일체 모든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일체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릴 때 일체 모든 것이 다 잡힌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완전히 놓아버릴 때 깨달음은 오며, 갖고자 하는 일체 모든 소유욕을 포기할 때 일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 ‘나’라는 울타리를 완전히 비우고 놓아버릴 때, 완전한 나, 전체의 나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법상






[고양 흥국사 연못에 비친 종각]

선택하지 말라.
분별하고 차별하지 말라.
우리의 삶을 가만히 바라보면
끊임없는 선택과 분별의 연속이다.

단 한 순간도 선택을 멈춘 적이 없다.
선택하지 않으면 세상을 살 수 없을 것 같다.
바보가 될 것 같다.
매 순간 순간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선택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란 점은 좀처럼 생각지 못하고 있다.
선택이 우리를 괴롭히며,
선택이 우리를 어리석음으로 몰고간다.

우리는 생각한다.
보다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순간 순간 보다 올바로 선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며,
공부하고 자료를 찾으며 온갖 정보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 모든 배움들은 이제 다 놓아버릴 때가 되었다.
모든 분별과 차별, 그로인한 '선택'은 삶에 대한 근원적인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선택받지 못한다.
한 가지를 옳다고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그른 것이 되어 선택받지 못하고 만다.

그러면 우리 삶은 둘로 나뉜다.
옳고 그른 것, 맞고 틀린 것으로 나뉜다.
그렇게 둘로 나뉘면 반드시 그 중 하나는 좋고 하나는 싫어진다.
보통 사람들은 그 가운데 좋은 것은 선택하여 내 것으로 가지려 하고
싫은 것은 선택하지 않은 채 버려두거나 혐오하고 심지어 파괴시키고 죽이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좋고 싫은 것으로 나누는 것,
그것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본 진리의 관점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혼란과 분열, 시기와 질투 그리고 전쟁을 가져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은 더욱 더 좋고 싫은 것을 나누게 되고,
점점 더 사물을 비뚫어지게 보게 된다.
한 쪽으로 치우친 시선으로 보게 된다.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잃고 만다.

항상 우리의 답변은 둘 중 하나다.
좋거나 싫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그러나 어찌 항상 좋을 수만 있고, 옳을 수만 있는가.
어찌 항상 싫을 수만 있고, 그를 수만 있겠는가.

흔히 '저 사람 어때?' 하고 물으면 그 답변은 늘
'괜찮아' 혹은 '별로야'이거나,
'좋은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거나하는 둘 중 하나의 답변이 돌아오곤 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둘 중 하나의 견해로 규정지어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거나 하는
둘 중 하나로 나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판단 자체가 그 사람에 대한 온전치 못한 편견을 불러올 뿐이다.

'나쁜 사람이야', '성격이 별로야'란 평가를 들었다고 치자.
그러면 분명 우리 마음에는 그 사람에 대한 '나쁘다' '별로다'라는 편견이 자리한다.
그런 치우친 견해로 상대를 판단하게 된다.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나 자비를 베풀었더라도 마음 속에는
'혹시 무언가 또다른 나쁜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된다.
좀처럼 그 편견을 깨기란 쉽지 않다.

모든 나뉨과 판단과 분별 그리고 선택이란 것이 이와 같다.
좋게 보는 것도 본질적이지 않고
나쁘게 보는 것도 본질적이지 못하다.

어떤 한 가지를 좋고 보고 나면 그 모든 것이 좋아진다.
또 한 가지가 나빠지면 모든 것이 싫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면이 다 좋아보이지만,
한 번 미운 사람은 하는 행동이 다 미워보이지 않는가.

좋고 싫은 색안경이 있는 이상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우리 마음은 더욱 더 비뚫어지고 분열 될 뿐이다.

보다 본질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선택하지 않는 일이다.
판단하지 않는 일이다.
선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만 보기만 하라.
판단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그 어떤 해석도, 분별도, 선택도 하지 말라.
그랬을 때 치우침 없는 정견의 시야가 열린다.
좋고 나쁜 양변에 갇히지 않은 무분별의 맑은 견해가 생겨난다.

누가 나에게 욕을 했다고?
시험에 진급에 떨어졌다고?
아이의 성적이 나쁘다고?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원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고?
실패를 했다고?

그것이 뭐 어쨌단 말인가.
그 사실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그 사실, 그 상황에 대해
이런 저런 좋고 나쁜 분별을 갇다 붙인 것일 뿐이다.

대그룹 입사 시험에 떨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 사실은 항상 두 가지를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시험에 떨어져서 그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에 또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의 상황 가운데 우리는 보통 전자를 선택함으로써 괴로운 상황으로 몰고가곤 한다.
그러나 왜 그 선택만을 고집해야 하는가.
그 선택에만 갇혀 있어야 하는가.

보다 창조적이고 주체적이며 긍정적이고 영적인 사람이라면
시험에 떨어졌다는 그 사실에 아무런 판단이나 선택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둘 중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분명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었다.
다만 내 스스로 '반드시 이렇게 되야 한다'고,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고 고집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고집과 집착이 나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다.

어떤 한 가지 상황에 대해 이런 저런 판단과 해석을 가하지 말라.
판단하고 분별하고 차별함으로써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선택하지는 말라.
그 어떤 상황도 전적으로 좋은 것이라거나 전적으로 나쁜 것이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상황을 보고 내 마음이 좋은 것이라 선택하고,
나쁜 것이라 선택했을 뿐인 것이다.

실패가 왜 반드시 나쁜 것이기만 한 것인가.
그로인해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을 수도 있고,
그러한 몇 번의 실패로 인해 내적인 힘이 쌓였을 수도 있으며,
과거의 악업을 소멸시킬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의 때였을 수도 있고,
때때로 실패가 훗날 생각해 보면 더 큰 성공을 위한 정말 필요한 기초작업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어떤 판단도 버리라.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하지 말라.
선택 없이 그 상황 자체를 무분별로 받아들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라.
큰 틀에서 삶을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

그것이 바로 업을 뛰어넘는 길이다.
업에 얽매이지 않고 업에 구속되지 않는 길이다.
악업과 죄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다.

어떤 한 사람을 보고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하지 말라.
'능력있는 사람'이라거나 '능력없는 사람'이라거나 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습관을 버리라.
마찬가지로 어떤 한 상황을 보고 좋다거나 나쁘다고 판단치 말라.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고,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사람도, 상황도 그것 자체는 완전한 무분별이다.
완전 중립이다.
다만 그 사람에 대한, 그 상황에 대한 해석이
모든 문제를 가져올 뿐이다.

모든 분별을 버리라.
모든 차별과 선택을 버리라.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라.

선택없이 분별없이 다만 바라보기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을 대상으로 힘겨운 투쟁을 버리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 온갖 혼란과 분열을 가져오지 않아도 되며,
우리 삶을 괴롭히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다.

선택하지 말고 다만 바라보라.
분별하지 말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Posted by 법상




[봄이 오고 있는데,
사진은 벌써 가을 단풍이네요...]

28.
깨어있는 명상으로써 마음을 관하는 수행자는
방일과 근심에서 벗어나 지혜의 정상에 올라
어리석은 중생을 내려다본다.
마치 정상에 오른 자가 산 아래 사람을 내려다보듯이



어느 날 삡팔리 동굴에서 수행을 하던 마하가섭이 아침에 탁발을 하고 돌아와 공양을 드시고 자리에 앉아 천안으로 사람과 짐승들을 포함한 일체 중생들이 어떻게 업에 따라 나고 죽는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어느 정도 마음을 닦아 밝아졌는지, 또 어떤 사람은 얼마나 나태하고 산만한 마음으로 생을 허비하고 있는지에서부터, 어떤 사람은 어떤 인연으로 이번 생에 이렇게 부유하게 태어났으며, 또 어떤 사람은 어떤 과거생의 인연으로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지, 또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인연과 업은 어떤 과거생의 수많은 인연으로 얽혀있었는지 등에 대해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연을 환히 보고자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가섭을 관찰하시고는 가섭 앞에 모습을 나타내시어 말씀하신다.

“가섭이여, 일체 중생들이 각자의 업에 따라 어떻게 태어나고 죽는지를 환히 깨달아 아는 것은 오직 붓다의 지혜에만 한계가 없다. 다른 이의 지혜로서는 중생들이 여기 저기에서 업에 따라 부모를 만나며 나고 죽는지를 다 알 수 없다.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은 네 능력 밖이다. 붓다만이 이 모든 진실을 완전히 알 수 있느니라.”

물론 가섭 또한 아라한이기 때문에 전생과 업에 대해 볼 수는 있을지라도 일체 모든 중생들의 심지어 축생들과 곤충들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을 다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과연 어떤 업 때문에 저 두 사람이 원수 지간이 되었는지, 어떤 업 때문에 저 아이들이 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업 때문에 저들은 이생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거나, 이별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인연이기에 이번 생에 함께 결혼하게 되었는지, 또 스승과 제자가 되었으며, 주인과 하인이 되었는지 일체 모든 중생의 일체 모든 업연을 하나 하나 낱낱이 환히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부처님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업과 인과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스승들은 무수히 많이 있었지만 부처님처럼 일체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과 윤회의 사실을 분명하고도 환히 알고 보는 분은 없었다. 또한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이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었지만 부처님처럼 그 무수히 많은 출재가의 재자들에게 그것도 분명한 대기설법을 통해 때로는 말 한마디로, 때로는 지속적인 수행의 주제를 내어 주고 법을 설해 줌으로써 아라한으로 이끈 이는 없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 당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과거 전생의 수많은 인과와 윤회 이야기가 무수히 등장한다. 어떤 하나의 사실만을 가지고도 그것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인과 이야기를 부처님께서는 설하고 계시는 것을 본다. 또한 믿기 힘들 정도로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의 설법 하나만을 가지고 수많은 이들이 때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과를 증득하거나 또 어떤 경우는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심지어는 수십, 수백명이 동시에 아라한과를 증득하기도 하는 것을 본다.

이러한 능력은 인류 역사 속의 그 어떤 위대한 영적인 스승일지라도 가능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물론 인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스승이 등장하고, 성자가 등장하고 그들의 능력은 우리의 생각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그러나 부처님 같은 이런 능력은 그 어떤 이에게도 없었다.

바로 이 가섭에게 한 설법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가섭이 어떤 제자인가. 마하가섭이라는 칭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처님의 상수 제자 가운데에서도 단연 으뜸인 제자요, 선에서는 부처님의 법을 물려받은 제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가섭의 지혜 조차 부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 아마도 가섭 정도의 지혜라면 인류의 수많은 성자와 영적 스승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으뜸인 지혜의 정상에 오른 분 가운데 한 분이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섭의 지혜 조차 부처님의 지혜에는 이토록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지혜야말로 얼마나 헤아릴 수 없고 무한한 것인가.

그러한 부처님의 지혜를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접하고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것은 전생부터의 선근 공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공부해 가다 보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계신 국토에 태어나 우리도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처럼 부처님의 법문 한 자락 끝에 저마다 깨달음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선근 공덕을 지어야 하고, 바로 그 선근이란 것이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에 다름 아니다.

방일함이 없이 깨어있는 관찰의 수행을 닦는 수행자는 언젠가 지혜의 정상에 올라 어리석은 중생들을 내려다 볼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을 내려다 본다는 것은 한 단계 아래로 깔본다거나,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마치 정상에 오른 자가 산 아래의 대지와 사람들을 한눈에 내려다보듯이 지혜의 정상에 오른 붓다는 모든 중생들의 인과와 업과 근기 등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이다.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근기와 업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고 그에 걸맞는 수행재료를 줄 수도 있고, 저마다의 근기에 따라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처님만 유독 수많은 중생들을 하나같이 깨달음에 이르게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깨어있는 명상이라는 마음 관찰의 수행이 있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사진 : 인도의 홀리 축제, 델리 기차역 앞에서]

26.
지혜가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에 게으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값진 보물처럼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을 지키고 보호한다.

27.
언제나 깨어있으라.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말라.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명상의 힘을 키우는 이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지혜로운 이는 값진 보물을 지키듯 깨어있음의 마음 관찰 수행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방일하지 않는다. 매 순간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깨어있으며 명상의 힘을 키우는 자,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않는 자, 그런 수행자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차이는 깨어있음의 유무에서 온다. 지혜롭게 깨어있는 이는 매 순간 순간 세상을 향해 온 존재를 열어두고,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활짝 깨어 지켜본다. 그에게 과거나 미래의 잣대는 무의미하다. 과거의 판단과 기억과 고정된 관념으로 현재를 걸러서 보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추어 볼 뿐이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이의 눈은 언제나 갓 태어난 어린 아이가 놀랍고도 신비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난생 처음 만난 것 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내 앞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모든 경계를 새롭게 새롭게 마주한다. 그에게 모든 대상은 ‘다만 그러할 뿐’,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며,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치우친 견해로 대상을 판단하지 않으며, 다만 중도적인 열린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항상 과거에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과 편견어린 시선, 온갖 판단 분별을 잣대를 가지고 현재를 재단하려 든다. 그에게 보여지는 모든 대상은 옳거나 그르거나, 좋거나 나쁜 양자 택일의 것일 뿐이다. 극단의 두 가지 판단 속에는 언제나 괴로움과 집착이 내포되어 있다. 그에게 세상은 언제나 거기서 거기이고, 진부하고도 매일 똑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다.

그가 보는 시선은 언제나 과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새로운 어떤 것을 보더라도 과거의 비슷했던 기억과 분별들을 동원하여 그것을 과거의 틀 속에 가둔다. 에너지는 정체되어 있고, 눅눅하며, 과거와 미래로 생각을 끄집고 다니느라 늘 힘이 없고, 빨리 지친다.

어느 날 사위성에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라 불리는 축제가 열렸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자기 몸에 똥과 재를 바르고 온갖 욕설과 악담을 해 대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마도 이 축제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오늘날 인도의 홀리 축제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의 홀리 축제는 약간 성격이 달라진 듯 한데, 각종의 물감과 진흙으로 범벅하여 온몸에 뒤집어 쓰거나 바르고, 모닥불을 피우며 노래를 부르고 제사를 올리기도 한다.

오늘날 홀리는 남자에게 눌려 살던 여성이나, 낮은 계급의 지위에서 항상 당하기만 하던 사람들을 위한 날로, 평소 눈엣가시이던 상층 카스트나 남성들에게 합법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날인 것이다. 그 공격이란 것도 흉악한 것이 아니라 물감을 푼 물이나 물풍선 따위를 던지면서 장난을 치는 수준으로, 대부분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간 계급에 짓눌려 있던 이들이 모처럼의 일탈을 즐기는 수준이다.

부처님 당시의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가 지금의 홀리축제처럼 이어져 내려온 것이 맞다면 아마도 시대가 흐르면서 조금씩 축제의 성격이 순화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도 부처님 당시의 그 축제는 주로 쌍스러운 욕설과 온갖 악담을 하는 등 그 부작용이 더 많았던 듯 하다.

이 축제 때인 일주일 동안에는 부처님을 비롯한 스님들일지라도 어김없이 소똥과 재를 맞으며 욕설과 악담을 들어야 했던 듯 하다. 그러다보니 부처님과 승단에 늘 공양을 올리던 재가신도들은 부처님과 스님들께 일주일 동안은 음식을 준비해 사원으로 미리 보내고 절대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일주일 간의 축제가 끝나고 부처님과 스님들을 집으로 초청한 재가신자들이 부처님께 그동안의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에 대해 말씀드리며 부처님을 공양에 초청하지 못했던 연유를 말씀드렸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을 설하시며, 지혜로운 사람들은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깨어있음이라는 관 수행을 실천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축제에서처럼 악담과 욕설의 업을 지으며 깨어있지 못한 행동을 한다고 설법하셨다.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말고, 한 순간도 방일하지 말며 언제나 깨어있으라.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명상의 힘을 키우는 이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Posted by 법상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법상 (무한,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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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긴건 달라도
마음만은
밝은 빛을 꿈꾸는 도반이랍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러나 만일 그대가
현명하고 잘 화합하며
행실이 올바르고 영민한 동반자를 얻게 되 면
모든 재난을 극복할 수 있으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걸어가라.'

라던 [숫타니파타]의 말씀처럼
우린 함께 밝은 한줄기 빛을 기다리는
영원한 도반
영민한 동반자입니다.

도반과 함께 맞이하는
설레는 새벽처럼

도반과 함께
어둠을 깨치고
깨달음의 밝은 빛을 보려합니다.

누구든 먼 저 깨달으면
그 깨침을 나누기로 한
그 옛날 밝은 수행 도반의 그것처럼

우리도...
그런 밝은 도반입니다.

도반의
구도의 길에
아침 햇살이 떠오릅니다.

언젠가 다가올
깨침의 밝은 빛처럼
그렇게 우 리 앞을 환히 비춰줍니다.




그냥...
바라볼 일입니다.

바라보면...
급한 마음 여유로 와 지고,
복잡한 마음이 고요해 지고,
산란한 마음은 평온해 집니다.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은
비로소 깊은 휴식을 가집니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근심과 긴장에서 자유로워 집니다.

쉽게 성내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너그러워지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인격을 만들어줍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으며 여유로와 집니다.

부드럽고 정갈 한 마음을 갖게 하고,
밝은 마음으로 삶을 긍정하게 되며,
겸손하여 하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 으며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고,
자기 중심 잡힌 삶을 살게 됩니다.

모든 판단에서
핵심을 간파할 수 있는
바른 견해(정견)을 만들어 줍니다.

바라볼 때
비로소 잊고 있었던
인생과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바 라보는 순간이
깨어있는 순간이고,
열반의 순간이 됩니다.

오직...
바라보기만 할 뿐
깨달음을 위해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바라보기 수행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고 평화롭게 하며
궁극에 밝은 깨달음을 가져 다 줄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걱정이 생기고,
사랑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생긴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으면
걱정도 두려움도 없다.

사랑은 미움의 뿌리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 고,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법집요송경]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데도 방법이 있습니다.
무조건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하 는 방법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잘 사랑하는 방법은
집착을 두지 않는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집착하 여 잡아두는데 있지 않고,
놓아주는데 그 아름다움이 있는 법입니다.

사랑하되 집착하지 않으면
만나거나 헤어지거 나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전재로 한 사랑이 아닌,
미움의 뿌리로서의 사랑이 아닌,
맑은 사랑을 하자는 겁니 다.

물론 밉다는 마음에 집착해서도 안됩니다.
사랑과 미움에 집착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 못 만나도 괜찮 고,
미워하는 사람 만나도 괜찮은 것입니다.

사람 사는 일상이란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아야 하는 것입 니다.
턱 놓고 살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도리가 나옵니다.

...

얼마전 김제동이 금강경이라고 인용하면서
위의 구절을 이야기 했었는데요,
사실은 법집요송경, 그리고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이랍니다.

또 하나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하는 내용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하는 내용이었지요.
이것 또한 금강경이 아니라
숫타니파타라는 오래된 불교경전의 가르침입니다.




될 수 있다면
아침에 일어남과 동시에
'알아차림' 할 수 있어야 합 니다.

하루에 얼마를
깨어있는 시간으로 사는가!
알아차리고 살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처음엔 알아 차림이
마음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그냥 휘둘려 살아온
동안의 삶이 습으로 눌러 앉았기 때문입니다.

내 주위 를 돌아보세요.
내 눈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을 찾는 겁니다.

그리고는
'관(觀)'이란 단어를 몇 개 만들어,
눈 가는 곳마다 붙여놓는 것입니다.

적어도
눈이 머무는 잠깐의 동안 만큼은
깨어있을 수 있 을 것입니다.

'관'이라는 글자가 보이면
다른 모든 분별이며
일어나는 마음을 다 놓아버리고,
순간 집 중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면 되겠지만,
연습이 안 된 초보 수행자라면
호흡을 관찰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에
마음을 집중해 보는 것입 니다.
온전히 알아차리면서
하던 일을 계속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알아차림이 끊어지겠지만,
고개를 들면
또다시 알아차릴 수 있으니
그래도 좋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수행,
바라보기 수행,
마음 집중의 수행,
깨어있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
분명
조금씩 달라지는 나 를 볼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언제나 어느 때나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사실을 기억하라.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아무런 고통이나 근심도 없다.

만약 어떤 문제나 걱정거리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겉에 드러난, 나를 치장하고 있는 껍데기에서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것은 갑옷처럼 단단하며,
혹은 어떤 특정한 유니폼처럼 그것을 입고 있는
나를 규정짓고 내가 바로 그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내가 입고 있는 유니폼이나 겉옷이나 껍데기에 속지 말라.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 껍데기는 이를테면
내 성격이라고 해도 좋고,
내 몸, 육신이라고 해도 좋고,
내 느낌, 욕구, 생각, 견해, 집착일 수도 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나’라고 규정짓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성격이 나이며, 몸이 나이고,
내 느낌이나, 내 생각, 내 견해, 내 욕구가 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 모든 문제며 근심 걱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바로 알아야 한다.



나 자신의 본질에 있어서는
언제나 아무런 문제도 걱정도 없다.
다만 문제가 있고, 근심 걱정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내 성격이나, 몸이나,
느낌이나, 생각이나, 욕구 따위에서 생겨난다.

그것들이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문제들이
곧 ‘나의 괴로움’이라고 착각하고,
그런 괴로움들에 일일이 관여하고 결박당하며
꽁꽁 묶여 꼼짝달싹 못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내가 누구냐고 했을 때
나의 성격을 내세우곤 하지만,
성격이 어찌 결정적인 나일 수 있겠는가.
성격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내가 살아 온 환경 속에서,
또 나의 경험 속에서 인연 따라 만들어 진 것일 뿐이다.
만약 다른 경험과 환경이 나에게 주어졌다면
나의 성격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또 언제라도 지금의 내 성격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매 순간 순간 성격은 변화에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언제나 성격은 현재진행형이며 종착역에 이를 수 없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어느 한 순간을 선택해 그것이 ‘나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 그것을 나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면 몸뚱이가 나인가.
이 몸 또한 다만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어제의 내 몸과 내일의 내 몸은 전혀 다른 몸일 수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이 발견해 낸 진리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고 있는 느낌들이 나인가.
느낌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변한다.
어떤 특정한 경험 속에서 느낌이 규정되어지기도 하고,
똑같은 조건 속에서도 느낌은 달라질 수 있다.

욕구도, 생각도, 집착도, 관념이나 견해들도
그것이 ‘나’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지,
그것들이 나일 수는 없다.

인연 따라 욕구도 집착도 생겨나고,
인연 따라 온갖 생각이나 관념, 견해들도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제 있던 욕구가 사라지고 오늘은 또 다른 새로운 욕구가 생겨나기도 한다.
어제의 깨지지 않을 것 같던 관념들도
새로운 어떤 조건에 의해 완전히 깨지면서
전혀 새로운 관념과 신념에 의해 무장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조건 따라, 상황 따라 끊임없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면서
생성소멸을 반복할 뿐이다.
거기에 어떤 변치 않는 결정적인 ‘나’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껍데기들을 ‘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굳게 믿으면서 거기에 죽고 살며, 거기에 내 삶의 모든 것을 건다.
그것들이 근심 걱정에 시달리면
나도 따라서 근심 걱정에 시달리고,
그것들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인 양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성격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격에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성격과 나는 동일인이 아니다.

그것을 내가 풀려고 애쓰지 말라.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니 상관하지 말고, 개의치 말라.
그냥 내버려 두라.
내버려 두되 다만 있는 그대로 살펴 보고 관찰하라.

성격이 만들어 낸 문제들을 내가 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성격이 만들어 낸 문제를 내가 다 풀 수는 없다.
하나의 문제를 풀었더라도 그것은 끊임없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고,
그렇게 하다가는 끊임없이 성격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을
뒤치다꺼리는 일로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을 소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나에게 주어진 이 한 생이 아깝지 않은가.
나에게는 나 자신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삶의 몫이 있다.
모든 존재들에게는 존재에게 주어진 본연의 물음이 있고,
해결해야 할 자신만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누구인가’ 하고 나 자신을 찾는 일이고,
그 일을 풀 수 있는 해결책은 관찰자가 되는 일 밖에 없다.

인격이 만들어 내는 문제,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 등
그 모든 다른 문제들을 다 놓아버리고,
다만 관찰자가 되어 주시하고 지켜보는 일,
그것이 바로 본연의 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근본 목적이요,
모든 수행의 시작이자 끝은 지관(止觀), 정혜(定慧)의 두 축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를 보자.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에 일일이 다 관여하면서
몸에게 휘둘릴 필요도 없다.
몸도 성격과 마찬가지로 내가 아니다.
다만 몸이 움직이며 어떤 일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내가 할 일은 다만 관찰하고 주시하는 일일 뿐이다.

예를 들어 몸에 감기 몸살이 왔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은 다만 인연 따라 육체와 이 세상 사이의
어떤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그것은 흡사 때때로 폭풍우가 몰아치고, 태풍이 오는 것 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몸이 나라고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병적인 현상이 되고 만다.
그러면서부터 몸에 문제가 생겼다고 안달하고
괴로워하며 내 마음까지 괴롭히곤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만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서
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다만 주목하고 주시하면 된다.
감기 몸살이 아주 멀리서 일어나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자연현상이라 생각하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감기 몸살과 나 자신 사이에
객관적인 넓은 공간, 먼 거리를 만들라.
혹은 감기 몸살이 다만 영화 속에서 어떤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관객이 되어 지켜보라.

다른 나와 동일시하고 있던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다.
욕구가 일어나고, 생각이 일어나고,
집착이나 관념이 생겨날지라도
그것과 나 사이에 먼 공간을 만들어 지켜보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와 상관 없이 일어나는 어떤 현상을 다만 지켜보듯이,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장면들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관객처럼 내 삶의 연극을 다만 지켜보라.

내 삶의 모든 문제는
나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근심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다만 그 모든 일들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아주 멀리에서 나와 상관 없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듯이
그러나 흥미롭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주시하기만 하면 된다.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다만 문제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라고 가면을 쓴 가짜들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가짜에 속지 말라.
껍데기에 속지 말라.

내 몸, 내 성격, 내 느낌, 내 생각, 내 관념, 내 욕구...
이 모든 것들에 ‘내’라는 ‘나’라는 수식을 빼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문제들에 휩쓸리지 말라.
그 모든 문제며 근심걱정들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만 가짜가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다.

그것들은 다만 내가 바라볼 것들이지,
나 자신의 실체가 아님을 기억하라.

흥미로운 영화를 보듯
내 삶의 연극을 지켜보라.



[사진 : 범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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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노포동 | 범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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