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해 -12강-

멸성제와 도성제

(3) 멸성제 -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멸이란, ‘니르바나’의 음역으로,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하며, 흔히 ‘열반’이라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괴로움의 원인인 온갖 번뇌의 불길이 모두 꺼진 상태, 즉, 고가 소멸된 상태입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한다면, ‘최고의 행복’, ‘절대적 행복’ 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멸성제는 사성제의 집성제와 반대되는 경지입니다. 집성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순관]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고찰해 십이지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근본원인이 무명(無明)이라고 관찰한 것입니다. 이를 차례 차례로 바른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을 순관(順觀)이라 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도 없고[無無明],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다[無老死]’고 한 것은 바로 이 유전문의 이치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근본불교에서 이렇게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설명하고 있지만, 반야심경에서는 이것도 없다고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멸성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불교는 현상계가 ‘괴롭다’ 라고 하여, 그 원인을 밝히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는 않습니다. 즉,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것은, 그 원인을 제거하여 괴로움이 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작업일 뿐입니다. 어쨌든 괴로움의 원인을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통해 살펴보면, 그 근본 원인인 무명에서부터 차례로 하나씩 지분을 소멸시켜 나가는 환멸문[역관(逆觀)]을 통해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노병사의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생(生)을 멸해야 하고, 생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유(有)를 멸해야 하고, 유를 멸하기 위해 취(取)를 멸해야 하고……. 이렇게 해서, 결국에는 무명(無明)을 멸하면 괴로움의 모든 고리가 풀려서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상태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십이연기의 환멸문(還滅門)’이라 하며, 이렇게 관찰하여 열반의 상태로 다다르는 관법이 바로 역관(逆觀)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이 다함도 없고, 나아가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다’란 말은 바로 이 ‘십이연기의 환멸문도 사실은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멸성제에 대해 조금 더 부연합니다.

열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 즉, 육신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 하여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하고,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 합니다. 후자는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므로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苦)가 모두 소멸된 열반의 경지입니다.

(4) 도성제 - 괴로움 소멸의 실천에 대한 진리

도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서, 열반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도성제는 괴로움을 멸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을 떠난 길입니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아니고,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 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의 길을 말합니다. 『소나경』은 이러한 중도에 대한 좋은 비유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소나야, 너는 집에 있을 때 비파를 잘 타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파 줄을 너무 강하게 죄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비파 줄을 아주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야, 그와 마찬가지로 노력도 너무 지나치면 마음의 동요를 가져오고, 너무 느슨하면 나태하게 된다. 그러므로, 소나야, 군형을 유지해야 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나 존자는 세존의 가르침대로 행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거문고 줄이 지나치게 팽팽하거나, 지나치게 느슨하면 좋은 소리가 날 수 없고, 가장 좋은 소리를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듯이,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 또한 극단적인 상태를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바로 ‘팔정도(八正道)’입니다. 팔정도의 ‘정(正)’이 바로 중도의 ‘중(中)’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팔정도의 ‘정’과 중도의 ‘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덟가지 바른 길’이라고 할 때의 ‘바른’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또 중도의 중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중도라고 하여 그저 단순히 ‘중간’ 정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바른 길’이라고 했을 때도 도대체 무엇이 바른 길이냐 하는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과 ‘정’의 의미는 앞서 설명했던, 불교 근본 교설인 연기와 공, 삼법인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중도란 적당히 중간의 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 모든 대상은 고정된 실체 없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며 다만 인연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존재이므로 텅 비어 있다는 온전한 자각에서 오는 실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연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텅 빈 존재라면 어느 한 쪽을 택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하는 치우친 견해를 내세울 수 없게 됩니다. 팔정도에서 바른 길이라는 것도 연기와 무아, 공에 입각한 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견이라고 했을 때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인가 하면, 보되 실체적인 어떤 것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다만 인연 따라 생겼다가 흩어지는 것임을 바로 보라는 것이며, 항상하지 않는 것으로 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도와 팔정도의 실천은 곧 연기와 공과 삼법인의 실천인 것입니다. 뒤에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잡아함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리불의 옛 친구가 물었다.

“사리불이여, 왜 세존과 함께 청정한 수행을 하는가?”

“벗이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는가?”

“길은 있다. 그 길은 팔정도이니, 정견・정사・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 그것이다.”

1) 팔정도(八正道)

① 정견(正見) - 바른 견해

정견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나다’ 하는 아상 없이,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없이 사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불교의 진리인 연기의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 사성제의 진리를 여실히 보는 것을 말합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견해이며, 연기적으로 보는 견해이고,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는 텅 빈 시선으로 보는 견해이며, 항상하는 것이 없다는 견해로 보는 것입니다. 정견은 나머지 일곱 가지 정도의 실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궁극인 지혜의 견해라 하겠습니다.

② 정사(正思) - 바른 생각

정사는 바른 생각, 사유, 즉,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입니다.

생각할 바와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을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우리가 미리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바르게 되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을 통해, 바른 행동, 바른 말, 그리고 바른 생활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정어(正語) - 바른 말

바른 구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을 행하지 않고, 진실되고 부드러워 화합하는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이란, 거짓말・잘못된 말인 망어(妄語), 아부・아첨하는 말인 기어(綺語), 이간질하는 말인 양설(兩舌), 욕설 등의 험악한 말인 악구(惡口)를 말합니다. 요컨대, 삼업(三業) 중 구업을 올바로 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④ 정업(正業) - 바른 행동

바른 신업(身業)을 말하는 것으로,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선한 행위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업에도 유루(有漏)와 무루(無漏)가 있습니다. 유루의 업은 번뇌가 있는 행위라는 뜻으로, 아상에 기초한 행동이며 탐, 진, 치 삼독심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므로 그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되는 업을 말합니다. 무루의 업은 아상이 모두 사라져, 번뇌가 소멸되고 탐진치 삼독심을 벗어난 행위이므로, 이것은 과보를 받지 않는 수승한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⑤ 정명(正命) - 바른 생활

정명은 몸으로는 청정한 행위를 하고, 입으로는 청정한 말을 하고, 뜻으로 청정한 생각을 하는 것으로, 십선업을 닦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정사유, 정어, 정업이 삶 속에서 드러나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바른 직업을 가지고, 올바른 생활을 통해 올바른 의, 식, 주를 영위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⑥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

정진은 ‘노력한다’는 의미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실천해 가는 힘입니다. 물론, 나쁜 방향으로 정진해서는 안 되며, 정진은 항상 선한 것을 바르고 둥글게 키워나가기를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⑦ 정념(正念) - 바른 관찰

올바른 통찰, 관찰이라는 의미로서, 신체의 움직임, 좋고 싫은 느낌, 마음의 온갖 분별,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놓치지 않고 잘 관(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근본불교의 핵심적 수행방법인 사념처(四念處) 수행이며, 요즈음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위빠사나 수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따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⑧ 정정(正定) - 바른 선정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것으로, 평상시 산란하고 복잡한 번뇌・망상・분별심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집중력을 말합니다.

마음을 순일하게 하여 삼매(三昧)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정신집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定)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禪)이므로, 이 둘을 합해 선정(禪定)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참선도 이 정정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삼학(三學)

이상에서 살펴본 팔정도는 불교 수행의 세 가지 핵심인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발전시키고 완성하는 것을 돕습니다. 따라서,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을 중도설에 입각하여 세분하여 구체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정어, 정업, 정명은 계(戒)를 의미하며, 이러한 계행을 통한 올바른 생활을 바탕으로 올바른 수행생활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定)으로,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바른 수행을 통하여 밝은 지혜를 증득할 수 있으니, 이것이 혜(慧)이며, 정견(正見)과 정사(正思)가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제 10, 장엄정토분
정토를 장엄하다


莊嚴淨土分 第十
佛告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燃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不也 世尊 如來在燃燈佛所 於法 實無所得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是故 須菩提 諸菩薩 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 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 爲大不 須菩提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 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어떤 법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의 일상무상분에서는 깨달음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말아야 함을 말하였는데, 이 분 장엄정토분에서는 그러한 가르침을 정토장엄이라는 우리들에게 익숙한 표현을 빌어 다시한번 강조하시면서 정토를 장엄한다는 상을 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정토를 장엄한다거나, 불교를 수행한다거나, 중생을 구제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상을 깨버릴 것을 강조한다. 깨달음에도, 정토에도, 부처에도, 그 어디에도 머무는 마음을 내면 그것은 온전한 깨달음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눈귀코혀몸뜻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 그 어디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하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일상 생활 속에서 ‘함이 없이 하는 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 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어떤 법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에 대한 일화들을 다룬 경전에서는 공통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 인행(因行)의 시기에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受記)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연등부처님께서 꽃을 공양하는 선혜 비구에게 장차 사 아승지 십만 겁 후에 석가모니라는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내리셨다고 한다. 이러한 수기로 인해 일반적으로 연등부처님께서 과거에 선혜 비구에게 이미 어떠한 특별한 법을 주었으며 그 법을 얻어 결국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셨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기는 불본행집경, 자타카, 육도집경, 본생경 등에 등장하는 것으로써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다.
선혜 비구가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는 모습을 [불본행집경]을 통해 잠시 살펴보자.

어느 때 선혜라는 젊은 행자가 있었다. 생사의 진흙 수렁 속에서 방황하는 자신과 세상의 모습을 보고 크게 발심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큰 행원을 일으켰다.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끝없이 많사오니
내 부처되어 마지막 한 생명까지 기어이 건지리라.

젊은 선혜 행자는 부지런히 노동하고 받은 보수를 아껴서 은전 오백량을 모았다. 이 때 연등부처님께서 이 나라에 오시니, 왕과 백성들이 꽃을 바쳐 공양하려 하였다. 선혜 행자도 이 소식을 듣고 꽃을 구하려 하였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꽃을 찾아 거리를 헤매다가, 한 궁녀가 푸른 연꽃 일곱 송이를 감추어 가는 것을 보고, 사정 사정하여 은전 오백량을 주고 다섯 송이를 샀다.
이 때 연등부처님께서 거리로 걸어 오시니, 선혜 행자도 시민들과 함께 푸른 연꽃을 들어 바치었다. 마침 그 때, 연등부처님께서 걸어가시다가 진흙탕에 이르셨다. 이 모습을 본 선혜는 입었던 사슴 가죽옷을 벗어 진흙탕에 깔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자 엎드려 머리털을 풀어 길을 만들었다.
이 때에 연등부처님께서 선혜 행자를 향하여 찬탄하셨다.

“아 장하다. 선혜여! 그대의 보리심은 참으로 갸륵하구나. 이같이 지극한 공덕으로 그대는 오는 세상에 결정코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부르리라.”

이렇듯 연등부처님은 선혜 행자에게 석가모니가 되리라는 수기를 주셨다. 그런데 이 경전에서는 왜 수보리는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도 얻은 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가. 금강경은 일체의 모든 방편을 파하고 근본을 드러내는 경전이다. 금강경 앞에는 일체의 그 어떤 방편도 설 자리가 없다.

깨달음을 전해줄 수 있는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참된 깨달음은 전해주거나 전해받는 어떤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고 받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항상 현존하고 있다. 그대 앞에 항상 참된 모습으로 꽃을 피워내고 있다. 아니 그대의 존재 그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의 증거이며 부처의 현현이다. 우린 이미 완성되어 있다. 이미 깨달아 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받을 필요도 없고 얻고자 애쓸 것도 없다. 진리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여여부동하게 오고 감이 없이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어찌 두 부처님 사이에 법이 오고 갈 수 있단 말인가.

중생과 부처 사이에 법이 오고갈 수 있는가? 중생과 부처가 따로 나뉠 것이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오고 갈 법 또한 없다. 그런데 어찌 중생과 부처 사이에, 혹은 부처와 부처 사이에 오고 갈 어떤 법이 있겠는가. 주고 받고 할 어떤 수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없다.
아무것도 나뉘지 않은 텅 빈 적멸의 세계에서는 그저 부처만 있다. 이름을 부처라고 해서 그렇지 오직 ‘그것’만 있을 뿐이다. 오직 영원의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오직 성성적적의 적멸만이 가득 차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이미 부처이다. 당신은 과거에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는가. 어떤 깨달음을 선물로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 주고 받을 것이 없는데 어찌 이런 물음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나는 부처님께 수기를 받지 않았고, 어떤 특별한 법을 받지도 않았는데, 저 선혜라는 비구는 부처님께 이미 수기를 받았구나 하고 부러워 할 것도 없다. 선혜가 수기를 받는 순간 우리 모두는 함께 수기를 받았다. 아니 선혜가 연등부처님께 수기를 받았다는 그 표현 자체가 일체 모든 중생이 수기를 받았다는 방편의 설법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완전한 부처라는 방편의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무엇이 문제기에 깨달은 완전한 부처가 이렇게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왜 우리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중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어떻게 하면 그 사실을,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가. 어찌 하면 얻을 수 있는가.

간단하다. 진리는 너무나도 단순한 데 있다. 일체를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얻어진다. 그냥 놓아두면 된다. 놓아버리는 순간 영원한 대자유가 찾아온다. 그것은 얻는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그냥 본래의 고요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 깨닫게 되어있다. 깨닫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이미 부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은 항상 깨달음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만히 놓아두면 누구나 저절로 깨닫는다. 그냥 놓아두기만 하면 된다.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내면 깊은 곳에서 깨어있음의 빛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생각하고, 애쓰고, 안달하고, 수행하고, 고민하고, 노력하려는 그 모든 ‘나’의 행위들을 다 놓아버려라. 겉에 드러나 있는 거짓의 ‘나’가 행하는 모든 활동들을 멈춰라. 껍데기의 ‘나’를 놓아버려야 본래의 ‘나’가 활동을 시작한다. ‘나’를 가지고 어떻게 해 보려고 애쓰지 말라. 깨달음을 얻고자 안달하지 말라. ‘어떻게’ 해 보려는, 깨달아 보려는 마음을 푹 쉬기만 하면 된다. 푹 쉬었을 때 이 가짜의 ‘나’는 활동을 멈추고 내면의 ‘그것’이 드러난다. ‘그것’을 한마음이라고 해도 좋고, ‘참나’라고 해도 좋으며, ‘부처’라고 해도, ‘자성’이라고 해도, 그 어떤 표현을 써도 좋지만 거기에 머무르지는 말라. 그 표현에 집착하지 말라. 다만 다 놓아버리고 그 어떤 것도 붙잡지 말며, 그저 푹 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꾸만 ‘나’를 가지고 ‘어떻게’ 해 보려고 한다는데 있다. 그냥 있으면, 그냥 푹 쉬면 저절로 이루어지는데, 공연히 붙잡고, 깨닫고자 애쓰며, 부처가 되려고 노력한다. 모든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냥 놔두지를 않는데서 모든 문제가 생긴다. 모든 괴로움이 생기며, 모든 번뇌가 생기고, 모든 욕심과 집착이 들끓는다.

그냥 놓아두라. 애쓰지 말라. 애쓰려는 마음을 놓으면 그냥 얻어진다. 이미 얻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래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얻을 것’이 생기면 결코 얻을 수 없다. ‘얻고자 하는 것’이 없을 때 그 때 비로소 얻게 된다. 아니 그냥 ‘얻음’이란 말 자체가 끊어지고 지고한 평화만이 현현한다.
선혜 비구가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을 얻었다고 생각지 말라. 그 때 선혜 비구가 연등부처님께 무언가 얻은 특별한 법이 있었다면 선혜 비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법도 얻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부처를 이룬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앞 장에서 수행 사과라는 깨달음의 계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러한 깨달음 조차 놓아버려야 함을 언급했다. 수행 사과의 깨달음이라는 것도 본래 얻은 바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장에서는 과거 연등부처님에게 수기를 받은 선혜 비구 또한 어떤 특별한 법을 얻은 것이 아님을 밝혔다. 이렇듯 모든 보살들이 얻은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다.

여기에서는 보살의 깨달음의 사회화의 과정인 불국토 장엄에 대한 물음이 이어지고 있다. 깨달은 자는 스스로 깨달았다는 생각이 없다. 하물며 깨달은 자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깨닫지 못한 중생이나 할 수 있는 것이 불국토의 장엄이다. 깨달은 자는 불국토를 장엄하지 않는다. 장엄하지 않음으로써 장엄하고 있다.
불국토는 별도로 장엄할 필요가 없다. 불국토는 더없이 완전하다. 더 이상 손 댈 곳이 없다. 어떤 장엄이 따로 필요한 곳이라면 그곳은 불국토가 아니다. 스스로 완전한 곳 그곳이 불국토요 정토다. 그러므로 보살은 정토를 장엄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 장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장엄이라는 말 자체가 매우 생소하다. 그런 말이 필요 없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불국토며 정토이기 때문이다.

불국토, 정토는 어떤 곳인가. 부처님의 땅이며, 깨끗한 땅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땅이란 어떤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이 아니다. 만약 어떤 특정한 공간을 가지고 정토라고 했다면 그곳은 더 이상 정토가 아니다. 정토는 영역이 정해지지 않은 곳이다. 별도로 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없다. 정토의 경계를 긋는 순간 이미 정토는 사라지고 만다. 깨달음에는 시공(時空)의 차별이 없다. 하물며 어떤 특정한 공간을 가지고 정토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지역을 정토라고 했다면 그 지역에서 벗어난 곳은 예토(穢土), 즉 더러운 땅이 될 것인데, 그렇게 깨끗하고 더러움을 나누고, 이쪽 저쪽을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깨끗한 쪽을 택하는 그런 상대적인 곳을 가지고 어찌 정토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부처는 차별이 없다. 깨달음에는 그 어떤 나뉨도 없고, 극단도 없다.
그러니 정토를 장엄한다는 말은 어리석은 중생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보살은 정토를 장엄할 이유가 없다. 그들 자체가 그대로 정토이다. 정토를 장엄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온갖 정토를 무한히 장엄하고 있다. 정토의 장엄은 정토의 장엄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토의 장엄이다.

불교를 어느 정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알음알이로 지식을 축적하면 할수록 더욱 깨달음과는 멀어진다. 불교를 많이 공부한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수행을 많이 했고, 경전도 많이 보았으며, 깨달음과도 가깝고, 부처님의 좋은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많이 가르쳐 주며, 포교도 많이 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러한 모든 행위가 정토를 일구는 장엄한 깨달음의 길이요, 포교의 길이라고 여긴다. 스스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원을 잘 성취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복도 더 많이 짓고, 공부도 더 많이 했으니까 지옥에 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더 빨리 깨달음을 얻어 성불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깨달음과는 멀다. 오히려 초심자들의 발심보다도 더욱 멀어져 있다. 초발심의 행자들은 하심하며 지극히 겸손하다. 스스로 수행을 많이 했다거나, 불교를 좀 안다거나, 깨달음과 가깝다거나, 포교도 잘 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상이 없다. 오직 그런 마음을 비우고 하나에서부터, 낮은 마음에서부터 정진할 뿐이다. 초심자의 하심은 고참자의 그것보다 깨달음에 더욱 가깝다. 지식이 많을수록 깨달음과는 멀어진다. ‘공부했다’는 상에 빠질수록 공부와는 멀어지고 만다.

그래서 수행자의 첫 번째 덕목은 하심이며 겸손이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 말은 공부와 멀어졌다는 말이다. 해도 한 바가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의 수행은 깨달음과는 정 반대로 치닫고 있다. 포교를 했고, 법보시를 했고, 열심히 기도를 했으며, 온갖 불사를 했고, 정토를 일구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공덕은 사라진다. 그래서 달마는 전국에 온갖 불사를 이루어 놓은 양무제에게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했다. [전등록]을 잠시 살펴보자.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 절을 짓고 경전을 편찬하고 스님을 만든 것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은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이것은 인간과 천상의 작은 과보를 받는 유루(有漏)의 원인일 뿐,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있는 듯 하나 실체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입니까?”
“청정한 지혜는 묘하고 원만하여 본체가 원래 비고 고요하니, 이러한 공덕은 세상의 법으로는 구하지 못합니다.”
“어떤 것이 성스러운 진리의 제일가는 이치입니까?”
“텅 비어 성스러움이란 없습니다.”

공덕은 없다. 인간과 천상의 작은 과보를 받을 뿐. 아무리 복을 짓더라도 그것은 천상에 태어나거나, 조건 좋은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하는 그런 작은 과보만을 받을 뿐이다. 물론 사람들에게는 그런 과보처럼 크고 좋게 보이는 것이 없을 테니 큰 공덕이라고 좋아하겠지만 그것은 유루(有漏)의 공덕일 뿐, 무루(無漏)의 공덕에 미칠 수 없다. 아무리 천상에 산들, 아무리 조건 좋은 인간으로 태어난들, 설사 잘 생기고, 돈 많고, 집 좋고, 가문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한들 그것이 그대로 ‘행복한 삶’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조건 속에서 괴로움에 허덕이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조건을 뛰어넘어 어떠한 조건이나 상황 속에서도 의연하고, 초연하며, 여여하고, 평화로운 깨어있는 정신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 그러한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조건도 실체 없는 그림자요 헛된 환영일 뿐이다. 돈, 명예, 권력, 지위, 계급, 이 모든 것이 다 환영일 뿐이지 않은가.

그러면 참되고 진실한 공덕은 무엇인가. 청정한 지혜 공덕은 원만하며 고요하고 텅 비어 있다. 비어 있기에 세상의 법으로는 구할 수 없다.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지위나 계급이 아무리 높더라도, 청정한 지혜 공덕을 살 수도 얻을 수도 없다. 얻으려는 노력이나 애씀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다. 세상의 그 어떤 법으로도 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다. 빈 것은 따로 얻을 것이 없다. 이미 빈 그대로 충만하다. 빈 것을 또 다시 애써 비울 필요는 없잖은가.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도 그와 같다. 성스러운 진리는 맑게 비어 있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성스러운 진리는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라 다만 이름이 성스러운 진리인 것이다.

이처럼 진리도, 공덕도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실천하더라도, 공덕을 짓더라도 진리라는, 공덕이라는 상이 남아 있는 이상 그것은 가짜일 뿐이다. 무엇이든 잘 해 놓고 잘 했다고 상을 내면 잘 한 것이 아니다. 수행을 열심히 해 놓고 열심히 수행했노라고 하면 수행한 것이 아니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었노라고 하면 그 깨달음은 가짜가 된다.
아무리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더라도 불국토를 장엄했다는 상을 일으키고 거기에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참된 장엄이 아니다. 모름지기 함이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머무는 바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을 하고서도 수행했다는 바에 머물지 않아야 하며, 베풀고서도 베풀었다는 상을 일으켜 베풂에 마음을 머물지 않아야 한다. 마음이 머물게 되면 썩고 만다. 마땅히 마음을 일으키되 그 일으킨 마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마음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방하착하라. 일체를 다 놓아버리라. 다 놓아버렸을 때 그대로 진리는 드러난다고 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이 말을 자기방식대로만 해석을 한다. 다 놓아버려야 하니 아무 일도 할 것이 없고, 아무런 마음도 낼 것이 없으며, 그냥 빈둥 빈둥 놀기만 하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또 다 놓아버린다면 저 강가의 돌이나 산의 바윗덩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고 이 가르침을 의심한다.
다 놓아버리라고 하고, 얻을 것도 본래 없다고 하며, 깨닫고자 애쓰지 말고, 정토를 장엄할 것도 없다고 하니까 불교는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거냐고 따질지 모른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런 물음을 한 번 쯤은 던져 보았을 것이다. 이 게송은 바로 그 점에 대한 명확하고도 통쾌한 답변을 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모든 의문은 풀어질 것이다.

아무 마음도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마음을 낼 것인가 또한 어떻게 마음을 낼 것인가가 중요하다. 마땅히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청정한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는 것이며,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는 것이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어떤 바깥의 대상에도 마음이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즉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이다.

마음을 내고 나면 보통 사람들은 거기에 얽매이고 머물러 집착한다. 착한 일을 행하고도 거기에 마음이 머문다. ‘선행을 했다’는 상을 남기게 된다는 말이다. 착한 일을 했다는데 마음이 머물러 상을 남기게 되면 연이어 거기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게 된다. 보상을 기대하는 그 어떤 바람도 우리를 괴롭게 할 뿐이다. 기대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이고, 바람이 있을 때 그것의 성취 유무에 따라 괴로움과 즐거움이라는 두 가지 극단의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착한 일을 행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마땅히 마음을 일으켜 착한 일을 행하되 함이 없이 하라는 말이다. 선행을 하고도 선행을 했다는 상을 버려야 한다. 거기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돈을 열심히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돈을 벌되 돈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돈에 머무르는 마음으로 벌면 안 된다. 그것은 곧 괴로움을 가져온다. 돈에 대한 집착으로 돈을 벌면 많이 벌었을 때와 못 벌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 극단으로 치닫는다. 즐거움과 괴로움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린다. 즐거움에 휘둘리는 것은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즐거움도 일종의 괴로움이다. 즐거움에 크게 휘둘리는 사람일수록 괴로움에 크게 휘둘리게 마련이다. 즐겁거나 괴롭기 보다는 그 양 극단을 다 놓아버린 여여한 평화를 찾아야 한다.

수행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수행을 하되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수행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했다는 상을 내지 말고, 이만큼 수행했으니 곧 결과가 있겠지 하는 바람도 놓아버리고, 수행이라는 그 자체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수행을 했으니 곧 깨닫겠지, 혹은 이렇게 수행을 했는데도 왜 깨달음은 오지 않을까 하고 탓할 것은 없다. 다만 수행을 할 뿐이지 수행의 결과를 바란다거나, 내가 행한 수행에 대해 바라는 바를 가져선 안 된다. 그것은 집착이며 집착은 괴로움이다. 수행은 오직 지금 이 순간 행하는 것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지, 그것이 미래의 어떤 깨달음을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직 할 뿐, 바람을 놓아라. 수행이라는 말 자체가 머물지 않음을 뜻한다. 그것이 함이 없이 하는 도리이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법이다. 금강경의 모든 구절은 바로 이 뜻을 함축하고 있다.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행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주로 어디에 마음이 머물러 있는가. ‘나’라는 주관이 만날 수 있는 일체 모든 객관의 ‘대상’들에 마음이 머물러 있다. 주관은 무엇이고 객관계의 대상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이것을 십이처(十二處)로 설명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여섯가지 기관으로 세상과 접촉하고 대화한다. 그 여섯가지란 눈, 귀, 코, 혀, 몸, 뜻을 말한다. 눈으로 모든 형상을 바라보고, 귀로 세상의 소리를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며, 몸으로 감촉하고, 뜻으로 모든 대상들을 분별한다. 이 여섯 가지 말고 또 다른 세상을 접하는 기관이 있는가? 오직 이 여섯 가지가 한다. 바로 이 여섯 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을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여섯 가지 내 안의 뿌리라는 뜻이다.

주관인 이 여섯 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각각의 대상을 만나는데 그 대상이 바로 육경(六境)이다. 육근이 만나는 대상이 바로 육경이다. 그것은 각각 형상과 소리, 냄새와 맛, 감촉과 대상이다. 눈이라는 근(眼根)으로 형상이라는 경계(色境)를 접촉하며, 귀라는 근(耳根)으로 소리라는 경계(聲境)를 접촉하게 된다.
이렇듯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바로 그 때 일체의 모든 괴로움과 즐거움, 좋고 나쁜 느낌이 일어난다. 그 느낌에 따라 좋은 느낌은 더 많이 느끼기 위해 붙잡아 두려고 집착하고, 싫은 느낌은 느끼지 않기 위해 버리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래서 좋은 느낌을 많이 얻을 때 즐거움을 느끼고, 싫은 느낌을 많이 얻을 때 괴로움을 느낀다. 이렇듯 좋고 싫은 느낌에 따라 모든 집착이 생겨난다. 애욕이 생겨나고 증오가 생겨난다. 좋은 것을 더 갖고 싶은 것도 집착이며, 싫은 것을 버리고자 애쓰는 것도 집착이다.

우리들이 괴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육근과 육경이 접촉하고, 연이어 좋고 싫은 느낌이 일어나며, 그에 따라 온갖 집착이 생기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 집착이 바로 머무름이다. 어떤 경계를 대할 때라도 항상 집착이 생긴다. 눈귀코혀몸뜻이 대상을 만날 때면 항상 이렇듯 집착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즉 형상에 마음이 머물게 마련이고, 소리에 마음이 머물게 마련이며, 냄새와 맛, 감촉과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눈으로 좋은 것을 볼 때 더 보고 싶은 집착이 생겨나고, 칭찬을 받을 때 더 받고 싶은 집착이 일어나며, 좋은 냄새에도, 좋은 맛에도, 좋은 감촉에도 집착이 생겨난다. 이렇듯 모든 대상을 접촉할 때 집착이 생기므로 마음이 머물게 되는 것이다.

모든 수행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 머무는 마음, 집착을 놓아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일체 모든 대상을 만나고, 대상과 접촉하면서도 어떤 대상에도 머물러 집착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집착이 생겨나면 연이어 일체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
금강경에서는 이 가르침을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안내해 주고 있다. 마땅히 모든 마음을 내되 머무름이 없을 수 있다면 그 어떤 걸림도 있을 수 없는 대자유를 만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느끼고 있는 일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집착과 머무름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육근이 그 대상인 육경을 만나 접촉함으로써 좋고 싫은 느낌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 좋고 싫다는 느낌의 분별에서 온갖 집착이 생겨난다.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그 사이에서 온갖 시비 분별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이 대상을 받아들일 때 그 대상 자체는 과연 분별할 것이 있는 것일까?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뜻의 대상이 과연 좋고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차별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모양과 색깔이라는 형상에서 옳고 그른 것이 어디 있고 좋고 싫은 것이 어디에 있는가. 온갖 나무와 꽃들이 있지만 어떤 나무와 어떤 꽃은 옳고 다른 것은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의 일체 모든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대상은 모두 무분별(無分別), 무차별(無差別)이다. 우리들의 의식에서 차별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지 이 세상에는 본래부터 나뉨이란 없다.

태양과 달과 별, 바다와 시내와 강과 들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린 것인가. 정치인과 경제인 가운데 누가 옳은가? 서양의 여인과 동양의 여인과 아프리카의 여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 그들은 그저 서로 다를 뿐이지 분별할 수는 없다. 점수를 매겨 줄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체의 모든 차별과 분별로써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나누고 차별하고 점수 매기고 등수를 매기는 따위의 나눔은 오직 인간들만이 한다. 이 대자연 법계의 모든 존재와 생명은 오직 전 존재로써 받아들일 따름이다. 인간들만이 세상을 대상으로 차별하고 분별하며 그렇기에 인간들만이 좋고 나쁘며 옳고 그르다는 등의 어리석은 극단을 설정한다. 그리고 그 극단과 나뉨은 곧 부조화와 평화롭지 않은 상태를 가져온다. 그로인해 인간은 늘 어지럽고 복잡하며 괴롭다.

세상은 다만 변화할 뿐이다. 변화하는 세상에 어리석고 좁은 소견으로 좋다거니 싫다거나 하는 차별을 가하지 말라. 세상은 다만 변화만이 있을 뿐, 좋고 싫은 것은 없다. 봄을 알리는 꽃이나 여름의 우거진 초록이나 가을의 오색 단풍, 또 겨울의 호젓한 눈꽃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다. 1, 2, 3, 4등 등수를 매길 수는 없다. 어느 계절이 더 좋고 나쁜 것은 없고 다만 변화만 있을 뿐이다. 변화의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 변화의 어느 한 과정을 콕 찝어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맞다느니 틀리다느니,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차별하지 말라.
소리와 냄새와 맛 그리고 감촉 따위의 것들은 또 어떠한가. 그것들 또한 인연따라 잠시도 쉼 없이 변화할 뿐이지 차별되어 있지는 않다. 똑같은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듣기 좋은 말도 되었다가 또 어떤 이에게는 듣기 싫은 말도 될 수 있다. 청국장 찌개의 냄새처럼 똑같은 냄새가 어떤 때는 참 좋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구역질이 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육경이란 대상에 대한 일체 그 어떤 분별도 다 우리들의 의식이 만들어 내는 거짓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은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늘 여여(如如)하다. 다만 변화할 뿐 그 어떤 차별도 있지 않다. 본질은 무엇이든 다 부처이며 청정한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이 세상에 무엇을 차별하고 분별하며 나누겠는가. 무엇을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할 것이며, 무엇을 잘났다거니 못났다거니 할 것인가. 무엇을 크다거니 작다거니 분별할 것인가.

본질에 있어서는 옳고 그름도, 잘나고 못남도, 미추도, 장단도, 대소도, 그 어떤 나뉨도 없다. 두 가지로 나누게 되면 거기서부터 질긴 집착과 그로인한 괴로움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분별할 것이 없으면 집착할 것도 없고 따라서 괴로울 것도 없다. 그렇기에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도 분별하거나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양 극단을 설정해 놓고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해 대상을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양 극단은 세상을 올바로 정견으로 보는 눈이 아니다. 오직 중도(中道)만이 세상을 바로 보게 해 준다.

이 모든 것이 둘이 아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말이나,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이나, 분별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둘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말이 그대로 중도의 가르침이며 연기(緣起)의 가르침이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인 삼법인(三法印)의 가르침이다. 육근[육입(六入)]과 육경[명색(名色)]이 접촉[촉(觸)]함으로 느낌[수(受)]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좋고 싫은 애욕과 증오[애(愛)]가 일어나고, 그럼으로써 집착[취(取)]이 일어나고, 그로인해 온갖 업[유(有)]을 짓게 되어 생노병사[생(生), 노사(老死)]의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십이연기(十二緣起)의 가르침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설법에 이어 수미산만한 사람의 몸을 비유하며 크고 작다는 분별을 비우도록 이끌고 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모든 차별과 분별을 놓아야 한다. 아니 머무는 바가 없으면 차별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 어떤 마음도 일어날 것이 없다. 바로 그 때 일체 모든 분별이 타파되며 그랬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바라보는 정견의 눈이 열린다.

만약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그 몸이 큰 것인가 하는 부처님의 물음에 수보리는 크다고 답변을 드린다. 방금 설법한 것에 의하면 본래 크고 작을 것이 없어야 하는데 수보리는 왜 크다고 했는가. 이것이 바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법이다. 분별과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아무런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할 것인가.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며, 아무런 마음도 일으키지 말고 그저 저 산의 나무처럼, 저 들의 돌처럼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옳다 그르다는 표현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하고, 좋다 싫다는 표현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마땅히 마음을 내야 한다. 그러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크다는 마음도 내고 작다는 마음도 낼 수 있다. 그러나 크고 작음에 걸려 집착하면 안 된다. 옳고 그른 마음도 낼 수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불교는 산중에 홀로 들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아무런 분별도 일으키지 말며 은둔해서만 살아야 하는 그런 종교인 것은 아니다. 큰 것은 크다고 마음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좋고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한 쪽에 머물러 집착하는 마음을 키우다 보면 집착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다시 본문으로 가서, 부처님께서는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라고 하셨다. 그래서 수보리에게 비유로써 물음을 던지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형상이 그렇게 크다는 것을 말한다. 수보리에게 부처님은 수미산만큼 큰 사람의 몸이라는 형상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형상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다.

부처님의 물음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몸은 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몸이다. 큰 몸을 큰 몸이라고 하면 그것은 큰 몸이 아니다. 큰 몸은 큰 몸이 아니며 그랬을 때 큰 몸인 것이다. 큰 몸이라는데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크다고 할 수 없다. 다만 크고 작다고 방편으로써 말하고 있을 뿐 크다는데 머물고 작다는데 머물기 위해 크다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매우 크다고 답변을 드렸지만 그 이유는 큰 몸이라는데 머물러 있지 않았기에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큰 몸이라는데 집착을 하여 작은 몸에 상대되는 ‘큰 몸’으로써 ‘매우 크다’고 했다면 수보리의 답변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는 부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고 하셨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크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형상에 머물러 크다고 답변을 드린 것이 아니라 형상에 머무는 바 없이 크다고 답변을 드린 것이다.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말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답변이다.

차별을 넘어선 ‘법의 몸’, 법신(法身)은 어떤가. 그것은 크다 작다로는 표현될 수 없다. 수미산만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작은 것도 아니다. 법신의 몸은 한 티끌 속에도 포함될 수 있으며, 온 우주 법계 전체라는 표현으로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법신은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다. 말로써 표현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말로써는 도저히 표현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법신은 항상 침묵으로 우레와 같은 사자후(獅子吼)를 설함 없이 설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마음을 내지 않을 수 없다. 말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마음을 내되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물었고 수보리는 대답했다. 그것은 철저히 머무름 없는 물음이고 머무름 없는 답변이다. 단순히 크다고만 답했다면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단순히 크다고만 했다면 그것은 ‘이생기심(마음을 낸 것)’이지만, 그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응무소주(머무는 바 없음)’가 설명 되었다. 큰 이유는 몸이라는 것은 몸이 아니기에 큰 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큰 몸이라는데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큰 몸일 수 있는 것이다.

아래 산스크리트 원문의 답변을 들어 보면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세존께서 몸, 몸이라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것은 몸이 아니며, 몸 아님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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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여리실견분
진리의 참 모습을 보라.(참된 이치를 여실히 보라.)


如理實見分 第五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則見如來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형상을 보고서 여래를 보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앞의 2분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의 질문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대승정종분을 통해 네 가지 상에 머물지 않으면서, 함이 없는 마음으로 일체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멸도에 들게 하리라는 서원을 세우도록 이끄셨으며, 묘행무주분을 통해 머무는 바 없는 묘행을 실천함으로써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함을 일깨우셨다.

이 분 여리실견분에서는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이 이어진다. 진리의 참된 이치를 여실히 볼 수 있도록, 여리실견 할 수 있도록 일체의 모든 상의 허망함을 일깨우며, 일체의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결국 여래를 볼 수 있도록 수행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여리실견분에서 금강경 내용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금강경의 사구게가 등장을 하며, 이 사구게의 법문을 통해 우리가 수행해 나가야 할 마음공부의 방향을 설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이 때 대승정종분에서 부처님께서 해 주신 법문에 대해 수보리는 ‘이렇게 머무는 바 없는 묘행을 실천하면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성취한다고 하셨으니, 이와 같이 실천하였기에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을 얻으셨고, 저렇게 거룩한 32상의 상호를 구족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일어나고 있음을 부처님께서 관해 보시고 수보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형상을 보고서 여래를 보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형상에 얽매이고, 형상에 집착하며, 형상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를 분별하며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란 눈에 보여 지는 경계로써의 형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앞의 묘행무주분에서 언급했던 온갖 경계, 즉 눈귀코혀몸뜻의 대상이 되는 색성향미촉법의 모든 경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은 눈에 보여 지는데 집착하고, 귀로 들려지는데 집착하며,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는 모든 대상에 집착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을 바로 관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질문하고 계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형상인 육신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는가를 묻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일체 모든 대상의 형상을 보고 그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으며, 나아가 부처님 조차 형상으로써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형상으로써, 육신으로써는 부처를 볼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수보리 앞에 계신 부처님이라는 형상은 부처의 참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앞에 서 계시는 부처님의 육신은 단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가 모여 이루어진 인연가합의 형상일 뿐인 것이지 부처의 참 모습이 아니다. 지수화풍이 인연 따라 모여진 것은 언젠가는 인연 따라 흩어질 뿐이다. 인연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은 모두가 항상 하지 않으며(無常),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고(無我), 괴로우며(苦), 텅 비어 실체가 없는 것(空)이다. 부처님의 형상 또한 지수화풍 사대가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무상, 무아, 고, 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몸의 형상은 다만 지수화풍 사대가 임시로 모여 만들어진 가합이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부처님의 형상에 얽매이는 것은 요즈음 절의 불상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절에 불상이 있고, 그곳에 절을 하는 이유도 불상이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 법계 어느 한 곳 부처님의 숨결 아닌 곳이 없기 때문이며 결국에는 불상의 모습을 뛰어넘어 그 이면의 참모습을 보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부처님의 실체는 형상으로써의 육신 그 이면에 법신(法身)으로써 존재를 뛰어넘어 존재한다. 법신이란 형상이 아닌 진리 그 자체의 몸이며, 크고 작다거나 나고 죽는다거나 하는 모습이 아닌 진리의 당체이고, 온 우주 법계 대자연의 숨결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니 진리 그 자체로써, 법으로써 부처님을 보아야지 눈앞에 보여 지는 형상으로써의 거룩한 모습으로 부처님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눈앞에 계신 부처님의 육신을 무시하라는 말도 아니고, 형상은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형상을 통해 참 진리로 나아가는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을 다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하듯, 언제든 참 진리를 만났을 때 형상은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형상에 얽매이고,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부처라는 형상, 32상 80종호라는 형상의 거룩함에 얽매이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나아가 부처라는 형상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됨을 연설하고 있으며, 부처의 눈귀코혀몸뜻이 부처의 실체라고 집착해서도 안 됨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교주인 부처의 몸에 조차 집착하지 말라고 설한다. 부처의 몸이라는 것도 부처의 몸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부처의 몸일 뿐이다. 인연가합의 공한 존재일 뿐이다. 이처럼 하물며 부처의 형상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이외의 다른 그 어떤 것에 집착하여 머물고 실체화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정신은 제한 없는 무량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금강경의 제일 사구게가 등장하고 있다. 이 사구게야말로 금강경 전체를 아우르고, 일체 모든 경전의 진리를 아울러 담고 있는 불교의 핵심 경구라고 할 수 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게송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유명하고 중요하며 불교의 핵심사상을 요약해 놓은 게송이다.

‘범소유상’이란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제법, 일체의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주체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다시말해, 눈귀코혀몸뜻과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 코로 냄새 맡아지고, 혀로 맛보아지고, 몸으로 감촉되며 뜻으로 헤아려 지는 일체 모든 경계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개시허망’이란 일체가 다 허망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범소유상이 다 개시허망이다. 이 세상에 형상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는 말이다. 허망하다는 말은 공하다는 말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어 텅 비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표현되어지는 현상계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무아(無我), 무상(無常), 고(苦), 공(空), 인연(因緣), 중도(中道), 무집착(無執着), 무소득(無所得)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삼라만상 형상 있는 일체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으며[제행무상], 고정된 자아가 없고[제법무아], 괴롭다[일체개고]는 말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텅 비어 공하며,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형상이 있는 이유는 다 인연의 가합이라는 말이다. 인연이 가합되어 가짜로 존재할 뿐, 그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가 없으니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고, 얻을 바가 없는 무집착, 무소득인 것이다. 그러니 크고 작은 것도 없고, 많고 적은 것도 없으며, 잘나고 못나고도 없고, 나고 죽고도 없고, 생사와 열반도 없는 그 어떤 극단도 있을 수 없는 중도의 세계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사구게에 등장하는 ‘허망’이라는 단어는 ‘허무하다’거나 하는 등의 ‘허무주의’로 쓰인 말이 아니라 근본불교의 연기법과 삼법인의 진리를 의미하는 말과도 같고, 대승불교의 공사상이나 중도, 무집착이나 무소득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범소유상은 개시허망이라는 이 점이 우리 앞에 놓여진 이 현상계의 본래 모습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다 허망하여 어느 하나 참된 것이 없고, 항상[常]하거나 즐겁거나[樂] 고정된 자아가 있거나[我] 깨끗하지[淨]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음 게송인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라는 말,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인 것을 바로 알아 일체 모든 형상이 실제는 형상이 아니며 공하여 텅 빈 것임을 바로 깨닫게 되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즉 깨닫게 될 것이다 하는 말이다.

이 말이 바로 금강경의 핵심중에 핵심이며 나아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가운데 핵심이다. 우리 사람들이 괴로운 것은 모두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명예가 권력이 욕심이 집착이 자아가 나아가 부처 조차도 모두 허망한 것이요, 텅 빈 것이며,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이 실체적인 것으로 착각해 거기에 집착하니까 거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모든 이들이 느끼는 괴로움의 원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모두가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상이 실체적인 형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즉견여래 하지 못하고 괴로운 중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돈이 없어 괴로운 것도 돈이라는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며, 지위나 권력이 낮은 것도 지위나 권력이라는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고, 성공하지 못한 괴로움도 성공이라는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바로 그 ‘무엇’의 실체가 허망하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 내가 목숨 걸고 쟁취하려 했던 바로 그 ‘무엇’이 사실은 그렇게 집착할 만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때 바로 그 ‘무엇’에 대한 괴로움은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무엇’에 대한 집착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끝끝내 집착하고 내 소유로 만들고자 할 뿐 끝내 포기할 줄 모르고, 성공이라는 부유함이라는 삶의 목적에 대해서도 한 생각 돌이켜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포기할 줄 모른다. 바로 거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연기되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 처럼 내가 원하고 바라는 바로 ‘그것’을 쟁취해야지만 행복한 곳은 아니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이미 완전히 행복한 곳이고, 완전히 풍요로운 곳이며, 완전한 깨달음과 완전한 고요함으로 충만한 곳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허망하며 텅 비어 있기에 깨달음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 세상은 지극히 고요하고 적적한 것이란 말이다. 우리의 행복은 집착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그 마음을 포기할 때 비로소 찾아 온다. 완전히 풍족한 세상에 살면서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고, 아직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전도된 생각을 버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자족하며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받아들일 때 행복은 찾아온다. 그랬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이 본래 평화로운 곳이었다는 사실이 진실로써 내 안에 깃들게 된다. 본래불이라는 것이 그 말이다. 우리는 본래 부처요, 본래 무한히 행복한 자며, 완전한 평화의 존재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어떤 것에 상을 일으키고 그 상에 집착하면서부터 모든 문제는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스스로 상을 짓고 부수고, 행복을 만들고 없애고 그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본연의 세계, 이 진리의 법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본래 이 세상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런 변화도 없으며, 그 어떤 무언가가 나타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나타나지 않았으니 소멸될 것도 없고, 괴로워 할 아무것도 없다. 본래자리로 가면 일체 모든 것이 딱 끊이진 적멸의 자리일 뿐이다. 아무리 우리가 몇 백 생을 윤회하고 나고 죽고를 반복하더라도 본래의 입장에서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하룻밤 꿈을 꿀 때, 힘든 일도 있고, 어려운 일도 있고, 나고 죽기도 하며, 온갖 일들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아파하고 즐거워하며 온갖 행을 벌이고 있지만 딱 꿈을 깨고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 세상도 마찬가지다. 다만 꿈이었을 뿐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거기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답답해 할 아무 이유가 없다. 지금 이 현실 세계 또한 꿈인 것이다. 꿈이며 신기루고 환상이며 물거품인 것이다. 꿈 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이고 환상이다. 아무리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설사 이 지구가 몇 번 멸망을 하고 빙하기가 도래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털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본질에서는 적멸이고 지고한 평화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리가 이렇게 삶을 살아가며 나고 죽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본질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음을, 이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는 허망하여 어느 하나 실체가 없음을, 다만 인연이 거짓으로 모이고 흩어질 뿐임을 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란 말이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하기 때문에 약견제상비상하면 즉견여래 한다는 이 진리에 대한 무명 때문인 것이다.

그 무명,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집착’을 불러온다. 그리고 집착은 괴로움의 원인이 되어 우리를 얽어맨다. 그러니 바른 깨달음만 있으면, 바른 지혜와 안목이 열리면 더 이상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니다. 살아가며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그러한 지혜가 있다면 그 무엇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이 게송의 소중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고,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한다는 이 말 앞에 그 어떤 것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일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바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볼 것이다, 다시 말해 바로 대자유의 깨달음인 여래를 볼 것이라고 했는데, 더 이상 여기에서 군더디기 붙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게송에서 대자유인의 걸림 없고 여여한 삶을 볼 수 있다. 이렇듯 광대무변하며 성성적적 무량한 깨달음이 바로 금강경 제일사구게의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잠깐 산스크리트 원문과 현장역의 해석을 살펴보면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를 ‘상과 상이 아닌 두 가지 관점에서 여래를 보아야 한다’는 해석으로 해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에 나온 상이란 일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일체 모든 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부처님의 32상 이라는 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참된 여래를 보고자 한다면 32상이라는 모양으로만 보아도 안 되고, 모양이 아닌 관점으로만 보아도 안 되며 상과 상이 아닌 두 가지 관점으로 치우침 없이 보아야 한다는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상에도 집착하지 말고, 상 아닌 데에도 집착하지 말도록 이끄는 것으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상에서처럼 모든 상이 허망한 것이므로 모든 상에 치우쳐 집착하지 말라고 하면 도리어 상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상 아닌 것을 새로이 만들어 집착하게 되는데, 상에도 집착하면 안 되는 것 처럼, 상 아닌 것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즉, 형상에 집착하면 안 되듯이 형상 없는 것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 또한 결국에는 구마라집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해석과 마찬가지로, 크게 볼 때 상도 타파하고, 상 아닌 상도 타파해야 한다는 점에서 두 해석이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즉 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하니, 모든 상을 타파하면서 도리어 ‘상 아닌 것’을 새롭게 만들어 거기에 집착하는 것 또한 타파해야 할 것이란 얘기다. 상 아닌 것을 만드는 순간 그것 또한 또 다른 하나의 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분의 결론이자, 금강경의 중요한 핵심 가르침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비롯해 일체 형상 있고 없는 모든 상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도록 이끌고 있는 것임을 이 분에서 살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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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기본 법칙을 다른 관점에서 조금 더 확장해 보자. 이 법칙은 나아가 큰 것이 있으므로 작은 것이 있고, 옳은 것이 있으므로 틀린 것이 있고, 남자가 있으므로 여자가 있고, 깨끗한 것이 있으므로 더러운 것이 있고, 이 생각이 있으므로 저 생각이 있고, 생이 있으므로 노사가 있고, 중생이 있으므로 부처가 있고, 생사가 있으므로 열반이 있고, 이런 식으로 우리가 분별하고 있는 일체의 이원론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즉 크다 작다는 분별은 사실 고정적으로 크고 작은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큰 것이 있으므로 그것과 견주어 비교되는 작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키가 큰지 작은지는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결정되어지는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무인도에서 홀로 자라났다면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사람이라는 분별도 없었을 것이며,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키가 큰지 작은지,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똑똑한지 어리석은지 라는 일체의 분별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일체의 분별이 있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무언가 비교되고 견주어지는 다른 인연이 있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남자 여자라는 분별이 있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안 되고, 나라는 남자와 비교될 여자라는 타인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키가 작다는 것도 나보다 키가 큰 타인‘을 말미암아’ 작다는 분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양 극단의 분별은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연기되어진 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크다 작다거나, 남자다 여자다거나, 잘생겼다 못생겼다거나, 똑똑하다 어리석다거나 하는 두 가지 극단의 분별은 절대적이거나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 의지할 때에만 연기적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실체적 관념이 아니므로 공(空)하다고 한다.

또한 이런 양 극단의 분별은 끊임없이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무상(無常)이고, 그러므로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고정적인 자아적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키가 큰 사람도 농구 선수들 앞에 가면 작게 느껴지고, 키 작은 사람들 앞에서 있을 때 크게 느껴지는 것이듯이 인연따라 상황따라 변하는 것(무상)이며 그렇기에 ‘큰 사람’이라고 고정적으로 말 할 수 없다(무아)는 뜻이다.

이와 같이 양 극단의 분별로써 고정지을 수 없기 때문에 중도(中道)라고 한다. 즉 연기된 모든 것은 무상하고 무아이며 공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극단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항상 중도적인 치우치지 않은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한 사람을 보고 크다거나, 잘났다거나, 옳다거나, 혹은 작다거나, 못났다거나, 그르다거나, 그 어떤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도 인연따라 크거나 작을 뿐이고, 인연따라 선하거나 악할 뿐이며, 인연 따라 변해 갈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사람들을 볼 때 중도적인 치우침 없는 시선으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뒤에서 다시 언급하게 될 팔정도의 정견(正見)이다. 연기적인 시선이 바로 정견이며, 중도이고, 공과 무아, 무상의 바라봄인 것이다.

이처럼 연기적인 시각에서는 일체 모든 사람이 완전히 평등하며, 차별이 없어 높은 사람이라거나 낮은 사람이라거나, 능력 있고 없다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고 되지 않다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연기적인 시선에서, 또 깨달음을 얻으신 큰스님들의 시선에서 우리 모든 중생들은 똑같이 평등하고, 똑같이 사랑스러우며, 똑같은 존재감으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연기적인 치우침 없는 대 평등의 시선이 가능한 것이다.

옳고 그르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기법의 세상에서는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절대적으로 틀렸다거나 할 것이 없다. 옳고 그르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며, 연기적인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옳은 견해가 다른 나라에서는 그르게 나타날 수도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선이 다른 나라에서는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여인이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결혼하게 되어있고 그것이 옳은 이성관이지만, 예를 들어 무슬림은 한 남자가 네 명의 부인을 얻을 수 있고, 아프리카의 마사이족, 바쿠족, 간다족 등도 여러 아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부다처제와는 반대로 일처다부제인 곳으로는 티베트가 있는데, 티베트는 한 여성이 한 집안의 장남과 결혼하면 그 집안의 다른 형제들과도 결혼할 수 있고, 나이지리아의 하우사족 또한 자가(Zaga)혼인이라고 하여 남편과의 이혼 없이도 다른 남자와의 결혼이 가능하다.

이처럼 시대와 나라가 다르면 그곳의 문화나 풍습도 다르고, 성적인 윤리의식도 다를 수 있다. 옳고 그르다는, 선과 악이라는 것이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어느 나라건 어느 시대건 상관없이 다 똑같아야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서 보는 선악의 시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상호의존적이고, 상호규정적이며, 상황따라 달라질 수 있고, 시대나 나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선악은 연기적인 것이며 상의상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분법적으로 딱 나누어 진 것이 아니라 선이 있으므로 악이 있고 악이 있으므로 선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의존적이고 연속적으로 연결된 하나이다. 절대적인 선악의 차별이 있다면 거기에는 선에 대해 악을 배제하고, 강압하며, 미워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동반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남게 되지만 연기된 것으로 볼 때 선악은 유연하고 자율적이며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포섭할 수 있는 화합과 평화적인 윤리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전쟁을 볼 때 그 두 나라가 보기에는 서로가 극단적인 적이며 악이기 때문에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라는 이분법에 젖어 있음을 본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팔레스타인이 적이고 악이며, 팔레스타인들이 볼 때는 유대인들이 악이다. 그러나 한 발 떨어져 바라본다면 유대인이 있으므로 팔레스타인이 있고, 팔레스타인이 있으므로 유대인이 있는 것이지, 그 어느 한 나라가 선이고 다른 나라는 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어느 한 쪽에서 자신을 선이라고 생각하니까 상대방이 악이 되는 것이지 본래 선악이 정해 져 있지는 않은 것이다. 조금 예민한 문제이긴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이어져 왔던 종교전쟁들을 보더라도 내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나라는 절대선이고 타종교를 믿는 사람과 나라는 절대악인 것 처럼 규정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곤 했지만, 사실 그러한 두 종교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 현대에 와서는 그 두 종교가 모두 올바른 종교로써, 이 세상을 대표하는 종교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과연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모호해진다.

이것을 보더라도 본래부터 어느 종교가 선이고 다른 종교는 악이라고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상의상관적이며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난 것에 불과하다. 내 종교를 선이라고 규정하면서부터 타종교는 악이라는 규정이 생긴 것이니 상호규정적인 것이다.

이처럼 선악이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혹은 어떤 특정한 상황과 믿음 속에서 연기되어 발생한 것이라면 선악은 구체적인 상황을 떠나서 고정되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악은 연기된 것이고, 공(空)한 것이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것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처럼 선악이라는 분별이 연기된 것이기에 공하고 무상하며 무아라면 선악이라는 양 극단을 나누어 놓고 서로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따질 것도 없고, 이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선악의 양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은 위험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연기된 것이기에 양 극단을 내세울 것이 없으므로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이다.

중도적인 실천에서 본다면 선악으로 나눌 것도 없고, 어느 한 쪽은 옳다거나 다른 쪽은 그르다거나 하고 극단적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상황 따라 연기되어진 것이므로 사실은 고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선이라고 혹은 악이라고 낙인찍어 놓고 선이 악을 없애기 위해 폭력을 저지르는 것 또한 발붙일 수 없게 된다. 연기와 중도적인 관점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네가 없으면 내가 없고, 네가 존재함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전체적이며 동체로써의 자비로운 통찰이 진흙 속에 연꽃이 피어나듯 피어오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는 부유함과 가난의 양 극단의 삶은 양쪽 모두에게 온갖 사회적인 문제를 가져다 주고 있다. 이 세상 어느 한 쪽에서는 기아와 가난과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허덕이며 하루에도 5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이 3만 5천 명씩 죽어가는 마당에 또 다른 곳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비만으로 고민하고, 넘쳐나는 음식물 쓰레기로 고민을 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남한에서는 한 해 음식물쓰레기가 14조원에 달하는데 그 정도면 북한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양이라고 한다. 부자 나라는 부유해서 괴롭고, 가난한 나라는 가난해서 괴롭다. 선진국들은 개발과 발전으로 인한 온갖 환경문제들 때문에 괴롭고, 후진국들은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어서 괴롭다. 양 극단은 언제나 고(苦)를 가져온다.

이러한 양 극단의 문제는 연기적인 자각과 중도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양 극단의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극단을 지양하고 중도적인 삶을 실천할 수 있다면 양 극단의 고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한 나라는 스스로 만족과 청빈과 소욕을 바탕으로 한 동체대비의 자비사상으로써 가난한 나라에 나눔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남아도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만도 연간 15조원이상이 든다고 하고, 그 쓰레기로 인한 악취며 처리시 환경문제 등 온갖 부수적인 문제들도 만만치 않은 것을 생각했을 때, 스스로 조금씩 적게 가지고 적게 먹으며 쓰레기로 해치울 것들을 미리 가난한 나라들과 나누어 쓸 수 있다면 부유함의 괴로움도 가난함의 괴로움도 모두 함께 소멸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의 자각과 깨달음 그리고 소욕과 나눔의 실천적인 정신에 달려 있다. 이러한 소욕과 나눔의 정신의 바탕이 바로 가난한 나라가 없으면 부자 나라도 없고, 굶주리는 아이를 살리지 않으면 나 또한 사라지고 만다는 연기적인 철저한 자각인 것이다. 연기 중도적인 시선에서는 그들과 우리는 서로 의존하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 그들이 살아나야만 우리도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월출산 도갑사]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세상입니다.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괴로움은 괴로움대로
인연따라 온 것
인연따라 마음 열어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인생 앞에 펼쳐질 그 어떤 경계일지라도
일체를 다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두가 내가 지었기에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하는
철저한 인과의 통 속입니다.

다가오는 크고 작은 경계들은
결코 나를 헤칠 수 없으며, 나를 이길 수 없습니다.
버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다가오는 경계는
더욱 큰 힘을 발휘하여 나를 짓밟을 것입니다.
무소의 뿔처럼 거칠 것 없는 마음으로
일체를 다 받아들이십시오.

받아들이되 그 경계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놀라지도 말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받아들인 경계는
인연따라 잠시 생겨났기에 물거품과 같고 신기루와 같은
어설픈 환영일 뿐입니다.

괴로워하지 마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나약한 마음은
실체가 없는 경계들에게 자아의식을 강하게 심어줄 뿐입니다.
그 환영 같은 경계들을 실재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경계는
내 앞에 커다란 두려움의 존재로써 실재하게 될 것입니다.
본래 있지도 않은 경계를
애써 만들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입니다.

용광로와 같고 바다와 같은
밝은 참나 한마음속에 다 집어넣고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경계에 마음을 이끌리지 않고
비워버리게 되면
경계는 이제 더이상 고통도 기쁨도 아닙니다.
그저 스치는 하나의 작은 인연일 뿐입니다.
못 받아들일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의 모든 경계는
과거에 내가 지은 인연에 대한 과보이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원인은 지어두고 과보는 받지 않겠다는 도둑의 마음입니다.


하나도 잡을 것 없는 세상입니다.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괴로움은 괴로움대로
인연따라 온 것
그저 인연의 흐름에 맡겨 두어야 합니다.

인생 앞에 펼쳐질 그 어떤 경계일지라도
일체를 다 놓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잡음'이 있으면 괴로움이 뒤따릅니다.
그저 인연 따라 잠시 왔다
잠시 스쳐갈 수 있도록 놓아두어야 합니다.

이 모두가 내가 인연 지었기에 당연히 내게로 돌아 온
철저한 인과의 통 속입니다.
그 결과에 또 다른 착(잡음)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작은 마음으로 욕심 부려 잡게 되면
또 다른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경계도
애착을 둘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텅 빈 속에
신기루처럼, 때론 환영처럼
인연따라 잠시 일어났다 잠시 스쳐가는 것을
애써 착(着)을 두어 붙잡으려 하기에
애욕이 일고, 욕망이 일어
인연 다해 없어지면 괴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 '착'을 두지 말고
텅 빈 한마음으로 놓아버려야 합니다.
이 용광로와 같은 한마음 속에
온갖 경계들을 다 집어넣고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계라도 '착'을 두어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착'을 두게 되면
애착에 따른 욕심이 생기게 되며
내 것으로 만들려는,
아상(我相)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결국
내 앞에 펼쳐지는 세상 모든 경계는
어느 하나 버릴 것도 없고 잡을 것도 없습니다.

경계가 괴롭다고 외면하고 버려서도 안되며
경계가 즐겁다고 착을두어 잡아서도 안됩니다.

인연따라 잠시 오듯
물 흐르듯 다가오는 경계
가만히 흐르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다가오는 물이 싫다고
억지로 다른 쪽으로 물길을 돌리려 애쓸 필요도 없으며
(버릴 것도 없고)
너무 좋다고
물길을 틀어막아 가두어 둘 필요도 없습니다.
(잡을 것도 없다)

미운 것 '내것'의 울타리 밖으로 버리려 애쓰지 말고
좋은 것 '내것'의 울타리 속으로 끄집어 들이지도 마십시오.

오직
'내 것' 이란 울타리만 깨 버리면
버릴 것도 없고 잡을 것도 없습니다.
본래 모두가 내 것이며
모두가 내 것 아님이니...
'전체로서 하나'인
무량수 무량광 법신 부처님의 텅 빈 밝은세상...

그저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인연 따라 다가온 물의 흐름대로
그렇게 가만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 되는 것입니다.

잡으면 잡아서 괴롭고
버리면 버려서 괴로운 것이 우리네 기막힌 삶입니다.

오직 중도(中道)!!
그 하나면 족합니다.

그저
턱! 놓아버리고
물 흐르듯 여여하게 흘러가는
유수(流水)같은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Posted by 법상



[현재 한국에 하나밖에 안 남아 있는 목조탑, 국보 55호 법주사 팔상전, 법당 내부에 부처님의 일대기인 팔상성도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전체 높이는 상륜까지 65미터로 현존하는 한국 탑파중 가장 높은 것이지요. 어느 절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절에 갈 때는 오후 5시 쯤 느즈막이 가도 좋습니다. 도량을 참배하다가 보면 저녁예불의 장엄한 모습을 잘 볼 수 있지요. 특히 요즘같이 낮이 긴 여름에는... ]

방하착(放下着)이야말로
무아(無我)의 진리...
연기(緣起)의 진리...
삼법인(三法印)의 진리...
사성제(四聖諦)의 진리...
중도(中道)의 진리...
공(空)의 진리...
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 모든 교리에 대한 충실한 실천수행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一切, 森羅萬象)
다만 인연따라 잠시 왔다가 잠시 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연 인연들이 서로 연(緣)하여 일어나고(起)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고 그런 것입니다.[연기법]

인연이 만나 생(生)함이 있는 것과 같이
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멸(滅)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 어는 한 물건도 멸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제행무상]

그러나 이렇듯 연기의 진리대로
인연따라 잠시 왔다 가는 것을
어리석은 중생들은 '내 것'이라 집착하여 붙잡으려 합니다.
잠시 내게 온 돈을 '내 돈'이라 하고
'내 명예' '내 권력' '내 지식' '내 가족' '내 사랑'...
이렇게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아상]

그러나 본래 내 것이란 어디에도 없습니다.[제법무아]
'나'라는 존재 또한 잠시 인연따라, 전생 업식따라 왔다 가는 존재일진대
'내 것이다' '내가 옳다' 하는 마음이야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나'라는데에 집착하니 '상대'가 생겨납니다.[인상]
내가 있고 상대가 있다는 분별심이 생겨납니다.
그 최초의 분별심은 이윽고
수많은 지엽적인 분별심을 몰고 옵니다.[중생상, 수자상]

그런 수많은 분별심들은 어느 한 쪽을 고정짓고 대상화 하여
생사(生死), 미추(美醜), 장단(長短), 귀천(貴賤), 증감(增減)...
이라는 수많은 극단의 분별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본래로 인연따라 길고 짧음이 있으며
아름답고 추함이 있고
귀하고 천함이 있는 것이지
혼자서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젓가락은 길다.'와 같은 명제 또한
인연따라 전봇대 옆에 서면 짧아지고
이쑤시게 옆에 서면 길어지는 것이지
본래 길고 짧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답고 추함 또한
고정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에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천차만별입니다.

뚱뚱한 여인이 아름다운 나라,
목이 길어야 아름다운 나라,
아랫 입술을 뚫어 길게 늘어질수록 아름다운 나라,
우리처럼 가늘고 눈코입 배치가 잘 되어야 아름다운 나라....
그러나 이 또한 우리의 기준으로 잘 배치된 아름다움이겠지요.

이렇듯 세상 모든 극단적인 분별들은 고정됨이 없이 돌아갑니다.
인연따라 장단, 귀추, 생사, 거래, 시종, 고저, 대소 등이
일어나는 것이지 절대 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말해 어느 것을 보고 길다 짧다 할 수도 없으며
잘났다 못났다 할 수도 없고
아름답다 추하다 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본래로 극단은 존재하지 않아 모두가 중도(中道)입니다.

중도의 중(中)은 '가운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정도의 정(正)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르다는 것은 연기법, 삼법인, 무아를 이와 같이 바로 볼 수 있는
옳고 밝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렇듯 어느 한 쪽으로 고정지을 수 없기에 중도이며
그렇게 되면 길다고 할 수도 짧다고 할 수도 없고,
깨끗하다 더럽다도 있을 수 없으며
있다 없다도 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공(空)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고
인연따라 연기하여 만들어진 것이기에 공이고
무아이며, 중도인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 세상 어느 한 물건이라도
이렇듯 연기이며 무아이고 중도, 공이기 때문에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그림자 같고
물거품과 같고 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모든 상은 공한 것이니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여래를 볼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듯 어느 하나 집착할 대상이라곤 없습니다.[무집착, 무소득]
그렇기에 '집착을 놓아라' '마음을 비워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하착(放下着)'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하착이야말로
이렇듯 모든 불교 교리에서 이끌어 낸 최고의 수행법입니다.

그럼 불교 교리의 집성인 사성제(四聖諦)를 통해
다시한번 방하착의 교리를 체계지워 설명코자 합니다.
사성제를 일컬어
경전에서는 코끼리의 발자국이
모든 짐승의 발자국을 포섭하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포섭하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사성제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전체적으로 종합 정리를 해 보면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일체는 잠시 나고 사라지는 것이며
그렇기에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하여 일체는 '고(苦)'인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는 다른 말로 공(空)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세상을 중도(中道)의 바른 시각으로 바라보아
지혜(智慧, 明)를 증득해야 합니다.
이러한 연기와 삼법인, 공, 중도의 시각으로 일체을 정견(正見)해 보니
세상은 괴로움[고성제(苦聖諦)] 아님이 없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보니
모두가 집착(執着)에서 옵니다.

연기, 삼법인[무아, 무상, 고], 공, 중도를 바로 정견하여
일체에 집착할 것이 없는 허망(虛妄)한 것임을 바로 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공하고 허무한 것에 집착을 하니
온갖 분별망상이 일어나 신구의(身口意)로 업(業)을 짓게 되고
집착에 의해 끊임없이 윤회(輪廻)의 수레바퀴에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원인은 바로 '집착'에서 온다는 것이
바로 집성제(集聖諦)인 것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살펴보고 나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괴로움 소멸이란 지혜의 확신이 생겨납니다.
모든 일은 문제와 문제의 원인을 바로 알고 나면 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고)와 문제의 원인(집)을
지혜의 견해(연기, 삼법인, 중도, 공)로써 올바로 알고 나니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문제의 해답이 열리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멸성제(滅聖諦)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그리고 괴로움 소멸에 대한 확신을 얻고 나니
이제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는 길을 따라 정진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올바른 괴로움 소멸의 길이 바로 도성제(道聖諦)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도성제를
여덟가지 길로 나누어 팔정도라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도성제를 가장 쉽게 풀어 이야기 한다면
방하착(放下着)이 됩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이기 때문입니다.
방하착이 바로
집착(着)을 놓아버려라, 비워버려라,
소멸시켜 버려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 수행이라는 것은
괴로움의 원인을 바로 알아 그 원인을 소멸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말 그대로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을 소멸시키는 방하착인 것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모든 수행의 핵심을 '무집착(無執着)'이라 이야기 합니다.
집착이 없어야 한다, 다시말해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간 수행을 너무 어렵게 생각한 감이 있습니다.
이렇게 쉬운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둘러 가는 길이 아닌
곧장 올곧은 길로 가는 최고의 수행이 바로 방하착입니다.

일체(몸과 마음, 나와 너, 주관과 객관)
모든 경계의 근본 원인이 바로 '집착'이란 놈입니다.
그것을 놓고 가는 길이
참 수행자의 밝은 정도인 것입니다.
방하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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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