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라.

진실은,

두려워 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두려워할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우리 스스로 두려움을 만들어 낼 뿐!

 

이 우주의 근원의 에너지는

언제나 사랑이요, 무한한 자비다.

실체라는 말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 말을 써야 한다면,

우리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자비와 사랑이라는 말 뿐일 것이다.

 

자비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우리라는 존재의

근원적 실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 파장은

오직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신도,

그 어떤 염라대왕이거나,

그 어떤 진리의 다르마도,

당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분들은,

성스러운 붓다며 신은,

우리 나약한 인간들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벌을 주기 위해

온갖 지옥을 만들어 내거나,

온갖 고통을 만들어 내거나,

인간을 단죄하기 위한

온갖 다양한 틀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이 두려움에 떨어야 할

그 어떤 장치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답지 못한 인간,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

신을 믿지 못하는 인간,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

온갖 악행을 일삼는 인간,

성적으로 타락한 인간,

그 어떤 최악의 인간들을 처단하고 벌주기 위해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무시무시하며,

두려움에 벌벌 떨 만한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이는

그런 지옥을, 지하세상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일 뿐!

오직 인간의 생각일 뿐!

인간의 욕심일 뿐!

 

부처는

다만 무한한 자비 그 자체이며,

신은

무한한 사랑 그 자체일 뿐이다.

 

그 분들은

인간을 단죄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의지도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은, 붓다는

오직 순수한 사랑일 뿐!

단죄하는 분이 아니다.

 

방편으로

계율을 율법을 지키라고,

죄를 짓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는 하셨을 지언정

그것을 어겼을 때

벌하기 위한

그 어떤 특단의 조치도 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시다.

 

다만 그 모든 인간의 악행들을

아무런 판단도 없이 지켜보실 뿐!

 

그 분들의 시선에서는

악행, 선행이라는 차별이 없다.

다만 사랑으로 지켜보실 뿐이다.

 

선악을 넘어선 분이

선악을 구분지어 놓고

그 가운데 악을 행한 자만을 단죄하고

선을 행한 자를 선물주기 위해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고,

우리 멋대로 지어낸 신에 대한, 절대자에 대한

바람이고 환상일 뿐이다.

 

신은, 붓다는, 절대자는

아무런 판단도 없이

일체 모든 이들을 위해

다만 오직 사랑과 자비만을 준비해 두고 있다.

 

아니 신은, 붓다는, 이 우주는

그 자체가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의 의식 속에는

지옥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고통도 있으며,

무시무시하고 소름돋는

최악의 지옥이 있다.

 

가짜로 있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인연 가합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누가 만들어 냈는가?

 

그렇다.

신이 만들어 낸 것이거나,

붓다가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내었다.

 

가짜로.

생각으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생각은 에너지를 갖는다.

생각이 바탕이 되어 삶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렇게 창조된 가짜 세상일지라도

그것은 인간들에게 마치 진짜 같이 느껴진다.

 

고통도 진짜고,

지옥도 진짜고,

모든 것이 진짜처럼 생생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의 진실은,

그 모든 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없다.

오직 사랑만이 있고,

오직 무한한 자비와 연민만이 있을 뿐!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이 창조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말고

삶을 사랑하는데 마음을 쏟으라.

두려워할 것이 없는 본연의 사랑이라는 세상에

생각으로 두려운 것들을 창조해 내지 말라.

 

세상이 당신에게 알려준,

종교가 당신에게 알려준,

사람들이, 선생님들이, 종교인들이 당신에게 알려 준

원죄에 속지 말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었다.

삶은 두려워할 무엇이 아니다.

죽음 또한 두려워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이다.

무한한 아름다움이며, 무한한 지고의 기쁨이다.

 

죄를 지으면 지옥 간다고 했던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계율을 범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지 말라는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죄의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신이 우리를 단죄한다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심판을 한 뒤 몇몇은 지옥으로 던져버린다고?

계율을 어기면 지옥에 간다고?

 

지옥은 없다.

죄 또한 없다.

그렇기에

두려워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항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이 없고, 죄 또한 없다면

잘못을 저질러도 되고,

악행을 저질러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물론 상관이 있다.

물론 지옥에 떨어진다.

큰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준비해 둔 것이거나,

부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니며,

더욱이 그 곳은 실체적인 곳이 아니다.

 

똑같은 상황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천상을 경험하게 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연봉 3,000만원이 괴로움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한없는 즐거움이지 않은가.

 

배가 터지도록 부른 사람에게

자장면 곱빼기는 고통을 가져오지만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그것은 천국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고통을 받지만

그 고통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지옥에 떨어지지만

그 지옥은 실체적인 어떤 영역에 신이 만들어 둔

절대적인 영역이거나, 절대적인 곳이 아니라

다만 스스로 만들어 내고

스스로 그 곳에 빠져 괴로워하기로 선택한 그런 곳이다.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지옥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지옥을 생각으로 만들어내어

그곳에 떨어지면 어쩌지?

죽고 나서 지옥에 가는 건 아닐까?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함으로써 있지도 않은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말라.

 

우리가 두려움에 떨면

그 두려움으로 인해

두려운 세상을 창조한다.

지옥에 가게 될까봐 걱정 근심을 한다.

 

누구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는 지옥에 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그 두려움이 지옥을 창조해 낸다.

 

그러니 두려움에 떨지 말라.

두려움으로 인해 지옥을 창조해 내지 말라.

두려운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죄의식이 죄를 만든다.

 

마음 속에

지옥을 품지 말고,

두려움을 품지 말고,

죄의식을 품지 말라.

그것을 품음으로써 그것을 창조하지 말라.

 

대신에

마음 속에

무한한 사랑을 품으라.

무한한 동체대비의 자비로움을 품으라.

 

신은 무한한 사랑이며,

붓다는 무한한 자비로움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죽음을 사랑하라.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오히려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죽음은 경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삶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래를 두려워하는 대신,

지은 죄를 두려워하는 대신,

삶을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라.

 

삶도 죽음도 경이롭다.

그 둘은 둘이 아니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아무리 달려갈지라도,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쓸지라도,

혹은 아무리 도달하려고 애쓸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뿐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 자신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주어진 삶을 사랑하라.

다가올 미래를 사랑하라.

진리를, 신을, 붓다를 사랑하라.

 

오직

다만

사랑이기만 하라.

 

두려움도,

고통도,

죄의식도,

근심 걱정도,

지옥도,

죽음도

모두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

사랑 안에 녹아내리게 하라.

 

본래부터 그것은 없던 것이고,

가짜일 뿐이니,

진짜로 가짜를 품어 안으라.

 

사랑할 때,

사랑이 창조된다.

아니 본래 사랑이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언제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을 향해 도착할 뿐이다.

 

영적인 진보,

수행의 완성,

그것은 곧 잊고 있었던 사랑을 되찾고,

사랑이라는 근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숭고한 귀의(歸依)의 여정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사랑과 하나될 것이다.

무한한 자비로움을 체험할 것이다.

 

두려움이라고 불리우는

가짜에 속아오던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사랑과 자비의 파장으로 춤출 것이다.









Posted by 법상

 

[사진 : 북한산 진관사]

옛 사람의 글을 읽다가
승조스님의 죽음 앞에 읊은
한 자락의 게송이
가슴에 짠한 울림을 가져다 줍니다.

수많은 경전을 역경하신 구마라집 문하에
승조(僧肇)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본래는 노장사상에 심취하였었는데
뒤에 유마경을 읽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불교에 귀의하신 분입니다.

워낙 명성이 뛰어나
불교계 뿐 아니라 세간에서 또한 크게 숭상받았는데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의 모함도 받게 되었고
왕이 부하로 만들려고 협박을 하기도 하셨지요.

특히 이 승조 스님을 탐낸 진나라 왕 의희는
스님을 퇴속시켜 자신의 부하로 만들려고
갖은 희유와 협박을 다 하였습니다.

"스님께서 속인으로 돌아와 재상이 되면
천하의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니
부디 짐의 청을 저버리지 말라"

그러나 스님은
"재상이 다 무엇이고 천하가 다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 법에서 볼 때는 모두가 부질없는 꿈 속의 일일 뿐입니다.
나는 무상대도를 얻어 만 중생을 이익되게 할 것입니다."
라며 단번에 거절하여 버렸습니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진왕은 승조스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승조스님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사형이 집행되기 전 칠을 동안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꿰뚫은 보장론을 저술하며
죽음을 앞에두고도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번역하는데
몰두하였습니다.

곧 형틀에 올라 칼로 목을 베이는 참수형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태연하게 게송 하나를 읊었다고 합니다.

四大元無主
五陰本來空
將頭臨白刀
猶似斬春風

"사대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원래 주인이 없고
다섯 가지로 모여진 이 몸은 본래부터 비었도다.
장차 흰 칼날이 내 목을 자를 것이나,
이는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을 뿐이다."


마치 봄바람을 칼로 베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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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부처님 저는
'만약 이 복잡한 세상을 살다가
어느 순간 죽게 된다면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이며, 어디에 태어나게 될까'
하는 생각만 하면 두려워집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설령 그대가 죽는다 해도 괴로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오랫동안
믿음과
계율을 지님,
진리를 배움,
집착과 욕망을 버림,
지혜을 닦는 등의 수행을 하였다면
비록 언제 어떻게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설사 사나운 짐승이나 새에게 먹힌다해도
그의 마음은 높이 올라 좋은 곳으로 가게 된다.

마치 기름종지를 깊은 연못에 넣어 깨트리면
깨진 종지의 조각들은 가라앉겠지만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이
오랜동안 믿음, 지계, 진리, 비움, 지혜를 닦은 이는
설사 죽는다 해도 그의 마음은 높이 올라 좋은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처럼 그대가 죽는다 하더라도
나쁜 죽음은 없을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

죽은 뒤를 걱정하지 말라.
언제 어떻게 죽을지 걱정하지 말라.
어차피 죽음은 오게 되어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죽음 이후를 걱정하지 말고
다만 지금 이 순간
나의 믿음과 지계, 진리, 비움, 지혜가
부족하지 않은가를 살피라.

죽음 이후는
이미 지금 여기에서
나의 삶을 통해 결정된다.

삶에서
진리에 대한 굳은 믿음을 지니고 살았는가!
계율을 생명처럼 지키고 살고 있는가!
진리를 배우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는가!
욕망과 집착을 비우며 살고 있는가!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고 있는가!

이 다섯 가지에 대해
나는 얼마나 떳떳한가!
얼마나 지키고 닦으며 살고 있는가.

이 다섯 가지 실천의 가르침을
아름답게 실천하고 있다면,
혹 완전히 지키지는 못할지라도
이 실천을 향해
내 삶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면,
진보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가라앉지 않고
높이 높이 올라 좋은 곳으로 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설사 죽음을 맞더라도
죽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나쁜 죽음은 없을 것이다.

똑같은 죽음을 목격한다고
그것이 모두 같은 죽음이 아니다.
같은 병으로 똑같이 죽었을지라도
그 죽음은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 이후는 전혀 다르다.

나의 죽음 이후를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나의 삶을 보라.
삶에서 내가 벌이는 모든 일들을 살피라.
그 삶의 방향이
믿음과 계율과 진리와 비움과 지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나 답하기가 두렵다면
그 삶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며,
죽음과 동시에 간장종지가 깨져
호수 아래로 가라앉듯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아
지옥 끝까지 도달할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삶을 두려워하라.
주의깊지 못한 삶을 두려워하라.

수행자에게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
이 육신의 겉모습은
살 수도 죽을 수도 있지만
근본에서는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삶 그 자체는 언제나 영원하다.

지혜로운 수행자는
미래에 올 죽음을 걱정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주의깊게 살핀다.



Posted by 법상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도 생사의 분별에 집착하지 않으면
평생을 쌓아온 업장이라도 소멸할 수 있다.
일생을 수행했을지라도 임종에 이르러 생사에 집착하면
그 수행은 물거품이 되고 오히려 마귀의 포로가 되고 만다.
지금이라도 본래 마음을 깨달으면 다시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달마대사 혈맥론(血脈論)]


하루 중에도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 중요하다.

시끄러운 TV 소음에 시달리다 잠에 들면
잠든 내내 소음이 꿈속까지 뒤따라 와 정신을 뒤흔들어 놓지만,
잠들기 직전 고요한 와선 속에서 잠에 들면
밤새 고요함이 지켜진다.

가만히 잠들기 직전 무슨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는지,
그리고 그 생각들과 꿈에는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를 떠올려보라.
잠들기 직전의 생각이 온통 꿈속까지 휘젓고 다니며
단잠을 방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데는
그리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하루 중에 이처럼 잠드는 순간이 중요하듯,
일평생 가운데는 죽는 순간이 중요하다.

아무리 일평생 수행을 잘 했다 하더라도
죽는 순간 생에 집착하여 미련을 못 버린다면
그간의 모든 수행은 물거품이 되고
오히려 마귀의 포로가 되어 헤매고 말지만,
죽음에 이르러 생에 집착하지 않고
냉철한 깨어있음으로 죽음의 순간을 지켜본다면
일평생의 수행을 뛰어넘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부처님 당시 밤사국 왕인 우데나왕의 왕비
사마와띠는 첫째 왕비인 마간디아의 음모로 인해
시녀 500명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궁에 갇혀
불에 타 죽게 된다.

그 때 깨어있음의 수행을 익힌 사마와띠는
함께 불법을 수행하던 500의 시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불에 타 죽게 되는 인연을 알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작을 알 수 없는 긴 윤회 속에서
이 또한 분명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떤 원인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니 순간 순간 일어나는 현상에 마음을 챙기십시오.
불에 타는 고통스런 순간에도
그 고통에 반응하는 마음을 정확히 관찰하십시오"

사마와띠의 말을 들은 500의 시녀들은
모두 불이 몸에 다가오는 순간에도
동요 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의 고통스런 느낌에 마음을 집중해 수행했다.
그래서 죽기 직전에 어떤 이는 사다함과를
또 어떤 이는 아나함과를 증득했다고 한다.

죽는 순간 생사의 집착에서 자유롭기 위해
사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생사의 집착을 놓아버리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하루 하루의 삶이 깨어있으며,
집착을 버리고 욕망을 거스르며,
온갖 번뇌를 놓아가는 쪽으로 비움과 수행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죽음은 삶의 연장이다.

삶의 순간 순간을 어떤 방식으로 살았느냐에 따라
죽는 순간을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결정되어지기 때문이다.

올바른 웰빙이란 웰다잉과 다르지 않다.
웰다잉을 위해, 죽는 순간의 공부를 위해,
사는 순간 생사의 집착 없이 올바로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생사를 비롯한 양극단의
모든 분별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참말로 잘 죽는 웰다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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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6.
‘결국 우리 모두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
는 사실을 모르고 사람들은 계속 다투고 있다.
이것을 바로 아는 이들은
더 이상 서로 다투지 않고 마음을 쉰다.



사람들 사는 세상에 다툼은 끊이지 않는다. 크고 작은 다툼으로 나라와 나라, 이웃과 이웃, 가족들 간에도 끊임없이 다툼이 일고 있다. 다투고 다투고 또 다투다가 결국 우리의 삶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결국은 한순간에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우리의 불안한 삶에서 다툼으로 허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사람들은 이 소중한 시간을 허망한 다툼으로 소모한다.

당장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을 앞두고 작은 일로 허망하게 다툴 수 있겠는가. 누구나 죽음의 순간이 오면 비본질적이고, 근원적이지 않은 모든 행은 멈추어지고 본질적이고 근원을 향하는 행으로 전환하게 된다. 과연 무엇이 근원적인 행인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것을 모른다. 아무리 부처님 말씀을 설해주더라도 그것은 머릿속으로만 이해될 뿐 본질적인 삶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죽음에 임박한 사람은 누구나 저절로 종교적이 되고, 본질적인 삶을 실천하고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내일 죽는다고 생각해 보라. 어떻게 사소한 일로 싸우거나, 욕심을 채우거나, 돈을 벌거나, 명예나 지위를 얻으려 애쓰거나, 내 것을 늘리려 하겠는가. 죽음을 앞둔 모든 사람은 누구나 성인의 길을 따른다. 그것은 누가 알려주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죽음에 이르러 더 이상 쌓고 벌고 늘려 나갈 일이 없음을 깨닫게 될 때 저절로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던 근원적인 지혜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행하는 일은 살아 있을 때 행하는 일의 정 반대다. 살아있을 때는 내 것을 늘려나가려고 애쓰지만 죽음에 이르면 그동안 늘리고 쌓아왔던 모든 것을 나누는 일에 에너지를 쏟는다. 살아있을 때는 욕심과 번뇌와 집착을 끊임없이 키우고 살지만 죽음에 이르면 그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 우리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도대체 왜 죽음에 임박해서야 뒤늦게 그것을 깨달아야 한단 말인가. 지혜로운 이는 그것이 늦다는 것을 안다. 죽음에 이르러서는 이미 늦다. ‘결국 우리 모두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는 이 사실을 모르고 사람들의 다툼은 계속된다. 무의미하고 비본질적인 다툼과 어리석음과 욕망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 알고 바로 보는 이들은 더 이상 서로 다투지 않고 마음을 쉰다. 죽음에 이르러 마음을 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 모든 다툼을 종식시키고 평화 속으로 뛰어든다.

우리의 다툼은 얼마나 사소한 일인가.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벌이고 있는 다툼과 증오와 미움과 원망은 얼마나 가벼운가. 우리의 다툼은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된다. 오히려 큰 다툼은 분명히 보이기 때문에 다스리기 어렵지 않지만, 작은 다툼, 작은 분열이 우리 생의 남은 시간을 허망하게 소비하도록 만든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허망한 다툼을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수행자들, 성직자들조차 사소한 다툼으로 무너진다.

부처님 당시에도 스님들 사이에 다툼이 종종 일어났다. 그런데 코삼비 마을에서는 아주 사소한 문제 하나 때문에 승가 전체의 화합이 깨지고 다툼이 일어나는 사건이 있었다.

코삼비 마을의 절에서 각각 계율과 법을 지도하는 율사(律師)와 강사(講師)스님이 화장실 사용에 대한 사소한 계율을 범한 일 때문에 크게 다투는 일이 벌어진 것. 강사스님이 화장실을 사용하고 물로 변기를 깨끗이 씻고 나와야 하는데 뒤처리가 조금 부족했던가 보다. 이 일 때문에 율사스님이 강사스님을 비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율사스님께 공부를 수학하는 스님들과 강사스님을 따르는 제자들 사이에 집단적인 다툼이 일어나고 승가의 화합이 깨어진 것이다.

이윽고 부처님께서 직접 코삼비로 와 양쪽의 비구들을 화합으로 이끌었지만 결국 부처님의 중재도 소용없게 되었고, 감정 싸움의 골은 더욱 깊어갔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깊은 숲으로 들어가셔서 홀로 석 달 동안 머무셨다. 이를 지켜본 재가 신자들은 승가의 화합이 깨어진 것에 실망하고 부처님을 뵐 수 없는 것에 실망하여 승단에 모든 보시와 공양을 금지했고,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국왕도 화합하지 않고 부처님의 말씀도 거역한 스님들을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결국 양쪽의 스님들은 부처님 앞에 엎드려 울며 참회하고 용서를 간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이들을 용서하시며 게송을 읊으셨다.

“‘결국 우리 모두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람들은 계속 다투고 있다. 이것을 바로 아는 이들은 더 이상 서로 다투지 않고 마음을 쉰다.”

살아가야 할 남은 생이 얼마나 된다고 정진하지 않고 다투며 삶을 소비하는가. 하기야 이처럼 스님들 또한 사소한 일로 다투고 화합을 깨뜨리는데 중생들의 삶이란 어떠하겠는가.

내 안의 모든 다툼을 종식시키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다툼이 종식될 때 마음에도 평화가 자리 잡기 쉬워진다. 수행이라는 것은 내 마음 안에서의 온갖 다툼을 쉬는 일일진데, 내 안에서의 다툼은커녕 타인과의 다툼조차 쉬지 못한다면 어찌 수행자라 할 수 있겠는가. 타인과의 인연이 맑아져야 내면 안에서도 텅 빈 하늘처럼 평화가 깃든다.



Posted by 법상




[사진 : 범어사]

고통의 원인은 탐욕이다.
세상의 즐거움이란 결국 고통 아닌 것이 없다.
탐욕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것,
모든 고통과 근심은 바로 탐욕에서 생기는 것이다.

[화엄경]

온갖 괴로움의 원인은 바로 탐욕이다.
중생은 생각이 어리석어 탐욕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탐욕이 바로 괴로움인 줄 알기 때문에 수시로 끊어버린다.
탐욕을 욕망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소금물을 마셔 더욱 갈증이 심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탐욕을 없앤다면 괴로움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성실론]



탐욕은 괴로움이다.
탐욕을 채우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 또한
결국 고통이 되고 만다.
탐욕을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탐욕은 커진다.
만족은 잠시일 뿐 이윽고 또 다른 탐욕이 생겨난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죽을 때 까지 오직 탐욕을 채우기에만 여념이 없지 않은가.
많은 이들이
탐욕을 채웠을 때 오는 잠시의 행복이
참된 행복인 줄 착각하고 산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온갖 악행과 기만을 서슴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탐욕을 채워나간다.

나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상대방을 짓누르고 밟고 일어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아니 당연한 정도가 아니라
능력 있는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슬프다.
이 세상도 슬프고, 탐욕에 물든 사람들도 슬프다.
탐욕이란 사람을 눈멀게 하고,
온전한 만족에서 멀어지게 하며,
영적인 성숙과 이별하게 만든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탐욕이다.
탐욕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
그렇다고 탐욕을 끊기 위해 탐욕을 미워하고 증오할 필요는 없다.

탐욕에 대한 그 어떤 분별도 버려야 한다.
탐욕 그 자체는 좋거나 나쁜 어떤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중립적이고 비실체적인 것이다.

탐욕을 없애려고 애쓰지 말고,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도 말고,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머물렀다가
어떤 일들을 만들어내고 또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그냥 알아차리고 지켜보기만 하라.

그랬을 때 전체적인 탐욕에 대한 지혜가 생기고
지혜의 빛은 곧 탐욕을 사랑으로 불태운다.
Posted by 법상



[때늦은 5월, 동백의 낙화...]

우리의 삶에 있어
가장 큰 괴로움은 역시 '죽음'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하여
생하고 멸하는 것 또한
본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생불멸이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과 연이 화합하면 만들어지는 것이며(生),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死)일 뿐입니다.

예컨대, 나무와 나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나무(因)와 나무[因]를 인위적으로 비벼줌[緣]으로써
불[果]을 얻을 수 있으며
우리는 따뜻함(報)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본래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던 것이 아니며,
공기 중에 있던 것도,
비벼주는 손 안에 있던 것 또한 아닙니다.
불은 다만 인연따라 생겨난 것일 뿐입니다.

또한, 일정한 시간이 지나 나무가 모두 타게 되면,
인과 연이 소멸하였기에 불은 자연히 스스로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하며 인연 소멸(消滅)하는 것일 뿐입니다.

즉, 불이 본래 있던 것이 아니듯,
우리 존재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잠시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죽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시냇물이 태양이라는 연(緣)을 만나 수증기가 되고
수증기가 뭉쳐 구름이 되며
구름이 다시 비가 되고 눈이 되고 그럽니다.

그렇다고 우린 시냇물이 죽고 수증기가 되었다고 하지 않으며
수증기가 죽어 구름이 되었다고 하지 않는 것 처럼
우리의 인생 또한 그와 같이 돌고 도는 것입니다.

구름이 없어짐(死)과 동시에 비가 생겨나듯(生)
생하는 순간 멸하는 것이며 멸하는 순간 다시 생하는 것이
모든 존재의 이치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네 죽음 또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입니다.
이 껍데기 유효기간이 다 되어 새롭게 몸을 바꾸는 것일 뿐입니다.
이 생에서 지은 업에 걸맞는 새로운 껍데기를 찾아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것일 뿐입니다.

선업의 과보는 천상이요, 악업의 과보는 지옥이며,
탐욕의 과보는 아귀, 성냄의 과보는 수라,
어리석음의 과보는 축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일 뿐이지
그 본성에 있어서는 죽고 사는 것이 아니며, 영원성을 지닌 것입니다.

이처럼 본래부터 생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 범부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가 실재적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착하므로 온갖 괴로움이 따라 붙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를 바라볼 때,
생과 사를 초월하여
인연 따라 다만 흐르는 것이라는 것임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공성(空性)의 올바른 이해이며
연기(緣起)의 올바른 이해인 것입니다.

즉, 연기된 존재이기에 불생불멸이며,
그렇기에 공인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 모든 존재의 본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하여 본래 생과 사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명상할 수 있다면
우리네 목숨 없어지는 것에도 여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인생 일대의 명제 앞에 두고
당당히 싸워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 조차 이겨 낼 수 있다면
죽음의 관념 조차 텅 비워 방하착 할 수 있다면
인생에서 오는 그 어떤 괴로움도 여여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란 명제 앞에서는 그 어떤 일상의 괴로움도
그다지 큰 괴로움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까짓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면 생사를 놓아버릴 수 있다면
인생에서 오는 그 어떤 괴로움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이따금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합니다.
아무리 힘겨운 경계라도 죽음과 맞바꿀 수는 없기에
죽음을 초월하는 명상 앞에 더 이상 괴로움은 있지 않습니다.

늘 죽음과 마주하는 삶,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네 생활 수행자들의 첫 번째 마음 자세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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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