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의 낙조]

우리의 삶에서
마음 씀씀이를 배우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공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같은 조건 속에서도
같은 환경 속에서도
어떤이는 지옥이 될 수 있지만
어떤이는 천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참으로 당당한 수행자입니다.
내 마음인데 내가 자유롭게 써야지
다른 경계에 이끌린다면 그건
내 마음 떳떳한 주인공이 아닌
노예의 나약한 마음일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자유롭게 쓰는 방법,
'마음 돌리기'의 가르침을
깨우치게 된 작은 인연이 있었기에
적어 볼까 합니다.

한번은 논산 군법당 법회에 참석키 위해
은사스님을 모시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법회 시간은 다가오는데
갑자기 차가 밀리기 시작하는데
마음이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조금만 더 밀리면 법회에 늦을 것 같았습니다.
약 5000명의 장병들이
은사스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있을 것을 생각하니 더욱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내 마음과는 다르게
큰스님은 시종 편안하셨습니다.
그러더니 '허허'하고 웃으시면서
"법계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우렁차게 설법하라고 밥때를 챙겨주시는구나"
하시며 밥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만행중에는 도시락을 싸서
다녔지만 시간이 모자라 못 먹고 굶을 때가
다반사였답니다.

그러시고는
"법상아!
수행자는 법계를 써먹을 줄 알아야 되는게야..
일체 법계가 나를 도와주는 도리를 알아야 하는게지.

마음을 어떻게 돌리느냐에 따라
그 어떤 경계도 나를 도와주는 부처님의
나툼이 될 수 있는게지...
마음을 돌리고 나면
모든 것이 내편이야..."

큰스님의 벽력같은 말씀에
조금씩 조바심나는 마음을 돌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 졌습니다.

그리고 빨리 가야한다는 착을 놓아버리고
밀리는 도로사정에 대해서도
공양하라는 것으로 마음을 돌리고 나니
이내 고요해졌습니다.

옆에 계시던 보살님께서,
10여년 스님을 모시고 다녔지만 한 번도 차가 막혀
법회에 늦은 적이 없었으니
걱정 안해도 될 거라며
안심을 시켜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공양을 끝내었는데...
거짓말처럼
차가 뻥 뚤리는 것이었답니다.

은사스님께서는
하하 웃으시며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우리 제자들 공부시키라는 법신 부처님 나툼이라며..
그렇게 소탈한 웃음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돌려
'착'되는 마음을 놓아버리면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께서 법계에 나투어
그 고요하게 놓여진 마음이 시키는대로
그저 그렇게
여여하게 되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너무도
맑고 향기롭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계에서도
마음을 돌리고 나면
모두가 부처님의 나툼이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이 나도록 은사스님이 높아보였습니다.
스님을 향한 감사의 예를 마음속으로
가만히 드려 보았습니다.

그 어떤 외부 경계도
경계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바로 '내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꾸어야 할 것은 그 외부의 '경계'가 아니라
바로 '내 마음'인 것입니다.
내 마음 돌리면 모두가 천상입니다.
내 마음 돌리면 모두가 행복입니다.

마음 돌리기...
수행자의 당당함이
여기에서 나오는 듯 합니다.

까짓거 하는 일이 잘 안되더라도
부처님께서 더 잘하라고 채찍하시는구나
하고 마음을 돌려 보면 어떨까요?

잘 안 되는 속에 잘 되어짐이 있고
괴로움 속에 행복해질 수 있는 너른 길이 있고
답답함 속에 훤칠하게 뚫려 있는 확연함이 있음을

안 되는 것도 되기 위해 안 되는 것임을

그렇게 믿고 맡기며
내 안에 있는 부처님 참생명
주인공 자리에
모든 것을 내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 공양이 최고의 공양입니다. "아무리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그것에 화를 내고 분별심 낼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좋은 쪽으로 마음을 잘 돌리면
모든 일이 풀리게 되어 있는게야...
법계는 그런 사람을 위해 돌아가기 마련이지..."

은사스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약해 질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을 잘 써먹으라는 말씀이십니다.
우주 법계의 주인이 되라는 말씀이십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누님에게 남동생이 크게 다쳤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턱뼈가 부러지고 이빨이 나가는 바람에
약 8주의 진단이 나오고 치료비용도
약 2천 만원이 넘게 들것이라고 하며 걱정이었죠.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하실까 하여
위로를 드리려고 전화를 했답니다.
당연히 망연자실하여 괴로워하실 것을 염려하였으나
전화를 드리자 오히려
나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고 하시며
우리 아들 법사님이 기도해 준 덕분에
그나마 더 잘못될 수 있을 것이 이 정도였다고 하시며
꿈 이야기를 들려 주셨답니다.

그저 동생이 다치던 날 꿈에 내가 나타났더라고 말입니다.
스님이 된 이후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날 마침 꿈에 나타난 것이
동생을 구하려고 한 것이었으리라고 믿으시며
그나마 이 정도인 것에 대해
부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짓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어머님의 전화를 끊고
참으로 얼마나 감사드렸는지 모릅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나툼도 이럴 수 있을까 하며...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신 어머님이시지만
마음만은 이렇게도 순수하구나... 하고 말입니다.

이런 마음을 내지 않고 걱정하시며
가만히 잘 있을 놈이 다쳐 왔다고 한탄을 하며
괴로워한다면 부모님의 마음은
상대적으로 지옥인 것이지만
이렇게 마음을 돌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을 자꾸 연습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같은 경계가 닥쳐도 그것에 꼼짝 못하고 이끌려
마음을 빼앗기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경계를 돌려서 내가 주인이 되어
슬기롭게 이겨내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우주 법계의 주인이 되어
그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인연생기한 무상한 경계들을
주체적으로 이끌고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거대한 우주의 인연의 고리에 이끌려
노예의 삶을 살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인 것이지요.

마음을 돌리면 인생은 괴로움이 아닙니다.
모든 경계에 나의 마음을 올바로 돌리면
모든 경계가 수행의 재료가 되고 ,
나를 도와주는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처럼
인생에 있어서의 길흉화복은 언제나 바뀌게 마련입니다.
또한 지금 당장에는 불행이라 느끼는 것도
마음을 어떻게 돌리느냐에 따라
보다 낳은 행복을 위한 과정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조건 속에서도
마음 닦는 이의 마음은
언제나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Posted by 법상



우리네 중생들의 마음은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첫째는 『상황 따라 변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항상 짊어지고 다니는 겉으로 드러난
마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환경, 조건, 경계에 따라 변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왜 이 마음을
상황 따라 변하는 마음이라고 했겠습니까?
우리들 마음이 상황 따라
하루에 열 두 번도 넘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직장에서 남편이 승진을 하였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빨리 가족들, 친척들에게 알리고
친구들과 축하 술도 한 잔 하고...
이것이 바로 극락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이 기쁜 마음에 술을 한 잔 하고
집으로 오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을 고비를 맞았다면 어떻겠습니까.
승진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 마음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사실 우리들 마음의 모습은 이와 같습니다.
수 십 년을 살아도 이처럼 행복·불행,
괴로움·즐거움이란 극단적인 두 갈래 길 속에서
희비가 엇갈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간 순간의 상황에 따라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쉽게 쉽게 움직입니다.
금방 좋았다가도 금방 괴로울 수 있는 경우는
너무도 많습니다.
아니 우리의 삶 그 자체가
고통과 행복의 무한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엇갈리는 이유는
바로 상황이 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상황, 환경은 반드시 변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상황이 변함에 따라
우리들의 마음도 반드시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어떤 기쁘고 괴로운 상황이라도
언젠가는 변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 무상(無常)한 상황에 노예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항상하지 않는 상황에
지금껏 노예가 되어 상황에 이끌리며 살아왔습니다.
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상황'이란 것에 노예가 되어 살아야겠습니까.

이처럼 상황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소중한 것을 잊고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잠재된 능력입니다.
우리 내면에 숨쉬고 있는 또 다른 마음입니다.
바로 『본래의 청정한 마음』,
즉 존재의 참생명 "불성(佛性)"인 것입니다.
이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꿈쩍하지 않는
바위와도 같은 당당한 내면의 본래모습입니다.

그 참생명의 마음은
너무도 떳떳하며 당당합니다.
그 어떤 괴롭고, 외롭고, 답답한 상황에도
놀아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내 안에 당당히 버티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이
그 마음을 외면해 버리기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도 힘들고 답답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내 안에 법신 부처님의 참생명을
조용히 불러 봅시다.
때로는 절절히 불러 봅시다.
그래도 너무 힘들때는 소리치면 불러 봅시다.
"나.. 무.. 아.. 미.. 타.. 불.. "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 여섯 마디면 충분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이 속에 그 어떤 상황도
그 어떤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릴 것입니다.

그 마음은 그 어떤 쇠라도 녹일 수 있는
용광로와도 같기에
우리 안에 일어나는 그 어떤 오염된 마음이라도
녹여 줄 수 있습니다.

까짓
상대방이 욕 하고 화내는 것?,
여자친구가 멀어지는 것?
돈, 명예, 권력에 울고 웃고 하는 우리네의 약한 마음쯤은
단 한번의 칼날 같은 마음으로 녹여버리십시오.
그 어떤 괴로운 상황에도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그 상황은 반드시 바뀌기 때문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지금 이 마음이 항상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그 바탕이 됩니다.
당장 지금 괴로우니 평생 괴로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의 상황이 언제나 계속될 것으로 생각하기에
그런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나/ 무/ 아/ 미/ 타/ 불/
자신감 있고 당당한 마음으로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본래 내 안에는 바위와 같고 산과 같아
그 어떤 거센 외부의 바람, 폭풍우에도 끄떡하지 않는
당당히 밝게 빛나는 마음,
부처님 참생명 주인공이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그 밝은 염불 속에 모두 다 갖추고 있습니다.



Posted by 법상


본래 우리의 능력은
한계가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 자신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려놓고 살아갑니다.
'나의 능력은 이정도야' 라고
스스로 자기 한정의 관념의 선을 그어 놓기 마련입니다.
그리고는 그 능력 밖의 일에 대해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로 덮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나 나 자신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어느 선까지만 규정지어 놓고는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그 자기한정의 관념에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내 능력은 이 정도야' 라고 할 때
그 정도의 능력은 바로 스스로 짓고 있는
그 자기한정의 관념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얼마만큼 한정 지어 두느냐에 따라
정말 자신의 능력의 범위가 결정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능력의 범위란
본래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능력을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 둔 그 정도의 능력밖에는 발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본래 우리의 능력이라는 것은 한정지어진 개념이 아닙니다.
한정한다는 것은 이미 무엇인가가 얼마만큼 있다는 말이지만
본래 우리의 본성은 텅 비어 있기에
얼마 만큼이라는 한정이 있지 않습니다.
텅 비어 무엇이라도 또 얼마만큼이라도 담을 수 있는
모양이 없고 크기도 없는 공(空)의 그릇입니다.

본래 갖추고 있는
텅 비어 오히려 충만한 그 공의 무한 능력을 바로 보십시오.
무량수 무량광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그 한량없는 무한 시공의 나툼을 말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바로 법신 비로자나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을...

그러나 우리 본바탕의 법신 주인공이
잠시 실체 없는 연(緣)을 따라 실체 없는 중생심을 일으킨 것입니다.
겉 껍데기의 허상을 보지 말고
내면에 또 이 우주에 가득하여 충만한 법신 부처님을 보십시오.

언제인가 해외토픽에 나온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시장에 갔다 돌아오는 어머님이
집앞에 뛰어놀고 있는 아들을 불렀는데
아이가 어머니를 향해 뛰어오다가 그만 차에 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차 밑으로 들어간 아들을 향해 달려가
차를 힘껏 치켜들고는 아이를 구해내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나중에 그 힘이 어디서 나왔나 하여
다시 들어보도록 했더니 꼼짝도 안 하더란 말입니다.
덩치 큰 장정들이 몇 이 들어야 들릴 그런 무게였습니다.

아들이 차에 치인 순간
어머님의 머릿속에는 내가 저 차를 들 수 있을까!
얼마나 무거울까! 무거운데 들지도 못할꺼 119에 전화나 할까! 하는 등의
그 어떤 분별이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차를 향해, 아들을 향해 달려간 것입니다.

그 어머님의 마음에 자기한정의 관념은
도저히 붙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할 수 있겠다 없겠다 하는
그 어떤 분별도 가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직 자식을 향한 일념만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이끌었을 것입니다.
오직 목표를 향한 순수하고 텅빈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다른 예로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이란 박사도
평생을 연구에 몰두하였다고 하지만
자신의 두뇌 활용 용량의 단 몇 퍼센트도 쓰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본래 우리가 가진 능력은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한정의 관념에 빠지기 때문에
그 관념의 사슬로 인해 자신의 능력이 그 관념따라 실제화되는 것입니다.

자기 한정의 늪에서 벗어나세요.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무한히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
자기한정이라는 것은
이미 아집(我執)이라는 자기집착에 노예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본래 나가 없고 상대가 없다면
나는 안되고 상대는 된다는 분별도 사라집니다.

오직 상대가 할 수 있다면
당연히 나 또한 할 수 있게 됩니다.

힘겨운 일을 당해서도,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도,
스스로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마음은 버려야 할 첫 번째 관념입니다.
'할 수 있을까' 하는 나약한 마음이 반복되면
그 마음은 점차 실체화 되어질지도 모릅니다.

공부가 안 되어도
공부 안 된다는 생각, 시험 잘 볼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일찍부터 버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사업이 잘 안 되더라도
왜 이렇게 사업이 안되지 하는 마음은 금물입니다.
혹은 누가 물어 오더라도 '잘 된다' 고 이야기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잘 될 수 있도록 하는
마음공부, 마음연습이기 때문입니다.

마음도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본래 한정된 것,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마음 일으킨대로 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마음 속에는
모든 것이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될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하여 굳게 믿지 못하는 데서
일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는 것이며,
구하지만 안되는 이유는 오직 '나는 안되'하는
자기 한정의 마음 때문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이야말로 내 마음 닦은 그대로의 나툼입니다.
빌려 준 돈 떼어 먹혔어도 내 마음의 탐심(貪心) 나툼이며,
주윗 사람이 화를 내도 내 마음의 진심(嗔心) 나툼이요,
생각한 만큼 일이 잘 안 되는 것 내 마음의 치심(癡心) 나툼입니다.

밝은 마음 계속 연습하면 세상이 밝아지고,
어두운 마음 연습하면 세상이 어두워집니다.
내가 닦은 만큼 세상은 그만큼만 밝아질 것입니다.
애누리 없는 세상, 그것이 바로 인과의 철칙아니던가요.

스스로 한정짓지 않고 텅 비어
무엇이라도 다 담을 수 있도록 밝게 열린 마음을 연습을 하세요.
'된다' '된다' 하는 마음 담아 두면 절로 되어지고,
'안된다' '안된다' 하는 마음 담아 두면
될 일도 그르쳐지는 것이 우리네 마음 도리입니다.

한정짓지 않는 무한한 마음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청안청락 밝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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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인과 - 인과응보

연기법을 원인과 결과의 상관성의 측면에서 살펴본 말로 인과, 인과율 혹은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다. 원인이 있으면 그 원인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가 있게 마련이며, 결과가 있다는 것은 곧 그에 대한 원인이 있게 마련이라는 의미다. 또한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를 받고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를 받는다고 하여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법이 그대로 연기법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인과율이 연기법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연기와 인과가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설명은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있고, 또한 ‘저것’으로 인해 ‘이것’이 있다는 상의상관적인 관계이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의지해 있고 도움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반해, 인과라는 것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을 수 있다는 직선적이고 시간적인 인과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에서 씨앗이라는 ‘인’에 다양한 ‘연’이 화합함으로써 열매라는 ‘과’를 맺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인과법칙의 좋은 비유가 될 수 있다. 씨앗이라는 인(因)과 흙과 거름과 물 등의 연(緣)이 화합하여 열매를 맺고[果] 그 열매를 우리가 먹음으로써 생명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 이처럼 인연이 화합하면 그에 따른 결과인 과(果)를 맺는다. 인과에서 본다면 직접적인 원인인 인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이 모두 어떤 한 결과를 맺는 원인으로 작용했으므로 이 두 가지를 다 ‘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씨앗이라는 ‘인’으로 인해 열매라는 ‘과’를 맺은 것도 인과이며, 농부의 노력이라는 ‘인’으로 열매라는 ‘과’를 맺은 것도 인과인 것이다. 이처럼 인과는 인간과 사물 간에도 작용하고, 존재와 존재 간, 존재와 사물 간 등 모든 생명 있고 없는 존재들에게 해당되는 자연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과 그에 따른 결과라는 인과를 별도로 업보(業報)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즉 인간의 의지적인 행위라는 원인[인]을 ‘업’이라고 부르며, 그러한 의지적인 업에 따른 필연적인 대상의 반응을 ‘보’라고 한다. 이것을 업인과보(業因果報)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바로 뒤에서 설명될 십이처 교리에 입각한 주체적인 인간의 육근과 객관적인 대상이라는 육경 사이의 법칙인데, 인간이 눈귀코혀몸뜻으로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작용을 일으키면[인]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은 필연적으로 그에 따른 반응[과]을 보인다는 것이다. 즉 인간과 대상 사이에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과 대상 사이에 인과의 법칙이 존재하는데, 그 대상은 일반적으로 자연물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인과의 관계는 성립된다.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말해주듯이 내가 상대방에게 선으로 대하면 선의 결과가 돌아오지만, 악한 행위를 하면 악의 결과가 돌아오는 것이다. 이 업보에 대해서는 뒤에 업과 윤회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한다.




법계 - 법주법계

이상의 연기, 인연, 인과에 대한 설명에서처럼 이 우주의 근저에는 연기라는 법칙이 전제되어 있다. 이 우주의 기본 법칙이기도 하면서, 인간과 모든 존재들의 기본적인 운행 법칙이 바로 연기법인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것들도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즉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연기법이라는 법칙에 머물고 있으며[法住], 연기법이라는 진리의 세계[法界]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잡아함경』 12권 296에서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出現)하시건 혹은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으시건 이 법은 항상 머무르나니(法住), 법이 항상 머무르는 곳을 법계(法界)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즉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건 출현하지 않으시건 일체 모든 존재는 항상 연기라는 법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이 세상은 항상 진리가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에 진리의 세계 곧 법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잡아함경』12권 299에서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 다만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정각을 이루어 중생들을 위해 분별하여 설하고 드러내 보이신다.”고 함으로써 연기법이라는 진리가 법계에 상주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법주 법계의 이치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저 우연히 생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저마다 완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며, 진리의 몫을 해 내기 위해 진리로써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 모든 것들을 ‘제법’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제각기 진리로써 존재하고 있는 ‘법’이라는 의미다.

사람만 진리로써 나툰 것이 아니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도, 저 하늘의 구름이며, 바람이며, 별들도, 아무리 작은 풀벌레며 곤충과 심지어 미생물들 또한 제각기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진리로써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진리의 법계에 법으로써 법주하는 것이다. 즉 진리의 세계에 진리로써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인간만을 우월하다 하고, 자연이나 자연물들을 열등하다 할 수 있겠는가.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어찌 높고 낮은 우월감이 발붙일 수 있겠는가. 일체 모든 존재는 그대로 법계에 법주하고 있는 법으로써 정확히 필요한 곳에 정확히 필요한 이유를 가지고 정확히 필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편견으로 보았을 때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존재이유는 분명한 진리의 몫을 띄고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이 세상을 원망하곤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자이고 좋은 가문에 태어나고,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반해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먹고 살 걱정, 의식주 걱정으로 허덕이며 근근이 살아간다. 또 어떤 사람은 간교한 계략과 이기적인 술수로써 살아가는데도 성공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성실하고 소박하게 베풀며 살아가는데도 가난을 면치 못하기도 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더욱 더 이런 불만과 불평등의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신을 욕하고 부처를 탓하며 이같이 불평등한 세상에 무슨 진리가 있겠느냐고 자조 섞인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연기법에 기반한 법주 법계의 진리에서 본다면 이 모든 불평등해 보이는 세상이 사실은 분명한 진리로써 진리의 모습에 하나도 어긋남 없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좁은 소견에서 본다면 당장에 이번 한 생 밖에 볼 수 없으며, 당장에 눈 앞에 보여지는 것에만 연연하지만 우주적인 진리의 시야는 시공을 초월하며 전체적이고 전 우주적인 툭 트인 정견(正見)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언뜻 보기에는 불평등해 보이고, 진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일지라도 사실은 그 이면에 분명하고도 정확한 인연, 인과, 연기의 진리가 일체 모든 존재의 저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진리가 머물러 있는 진리의 세계, 법계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이 법계를 판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선이 전체적인 법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견해를 정견으로 바꾸어 나가야지, 현재의 갇혀 있는 좁은 소견으로 이 법주법계를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치우쳐 있고, 갇혀 있는 좁은 소견을 온전하고도 전체적인 치우침 없는 정견으로 바꾸어 가기 위해, 그래서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열반을 증득하려면 먼저 법에 머무를 줄 알아야 한다. 즉 법주를 알아야 한다. 『잡아함경』14권 347에서는 “그들은 먼저 법에 머무를 줄을 알고 뒤에 열반을 알았느니라. 그 모든 선남자(善男子)들은 홀로 어느 고요한 곳에서 분명하게 사유하기를 게으르지 않으며, 나라는 소견[我見]을 여의고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잘 해탈하였느니라.”라고 설하고 있듯이, 법에 머무를 줄 알고 난 뒤에야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법주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이 곧 법이 머물러 있는 곳임을 분명하게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이 우주는 그대로 법신불(法身佛)이요, 낱낱의 존재는 모두가 자성불(自性佛)이라고 하는 말도 바로 법주법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진리가 항상 머물러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 우주 법계를 법신불이라고 하며, 나라는 존재 또한 사실은 진리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진리의 몸이기 때문에 자성불이라고 한 것이다.

법신불이니 자성불이니 하는 말이 어떤 실체나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진리로써의 몸 없는 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열반을 구하려는 수행자는 이러한 법주를 바로 알아 내 안에, 또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주에 언제나 법이 머물러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그러한 법신불과 자성불의 진리에 일체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의 첫째는 나를 완전히 내던져 맡기는 것에 있다. 경전의 말씀처럼 법주를 분명히 알아야 열반이 있는데, 법주를 분명히 알아 실천한다는 것은 곧 ‘홀로 고요한 곳에서 분명히 사유하기를 게으르지 않고, 나라는 소견을 여의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에 있다. 나를 완전히 진리에 내맡기고 진리의 흐름에 들어 완전히 힘을 빼고 함께 따라 흐를 때, ‘나’라는 소견을 벗어날 수 있으며, 번뇌 또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즉, 법에 머무른다는 말은 곧 ‘나’라는 소견을 놓아버리고 모든 생각과 번뇌를 다 내맡기고 다만 홀로 고요히 사유하고 바라보기를 게으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에 모든 것을 맡겨야 ‘나’를 내세우지 않을 수 있고, 법이 머무르고 있음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홀로 고요히 사유하고 지켜보는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에게도, 내 주변의 세계에도 진리가 항상 머물러 있음을 바로 알고 믿어 법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나의 소견을 내세우지 않으며, 고요히 법을 사유하고 지켜보는 수행을 했을 때 법에 머무르는 지혜[法住智]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주지(法住智)를 얻으면 ‘나’라는 소견이 사라지고, 일체 모든 것을 법에 내맡기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평화가 깃들고 지혜가 생겨난다. 『잡아함경』14권 345에 보면 “저 사리불 비구는 실로 내가 하루 내지 7일 밤낮 동안 다른 글귀와 다른 맛으로 묻는 이치에 대해, 7일 밤낮 동안 다른 글귀와 다른 맛으로 그것을 해설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사리불 비구는 법계(法界)에 잘 들어갔기 때문이니라.”라는 대목이 보인다.

즉 부처님께서 몇 일 밤낮 동안 다양한 가르침을 행하시더라도 사리불은 그 모든 법을 해설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데, 그것은 사리불이 법계에 잘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리불 비구는 법계에 잘 들어가 진리의 세계를 완전히 깨닫고 진리와 하나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부처님의 말씀이라도 다 이해하고 해설해 줄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는 핵심은 바로 이 세계가 단순한 세계가 아니라 진리로 이루어진 법계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이러한 법주법계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방법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우주법계가 곧 진리의 세계이며, 나라는 존재 또한 진리가 머물고 있는 법신임을 믿어 ‘나’를 내세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일체 모든 것을 진리에 내맡기고 살아가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내가 산다고 하면 아상에 빠지게 되고, 이기와 아집에 빠지고 말지만, ‘진리’가 산다고 믿고 맡기며, 부처님이 산다고 믿고 맡기고 살게 되면, 괴로움에 허덕일 것도 없고, 삶을 헐떡거리며 살아갈 것도 없어진다. 그 때부터는 삶이 고요해지고, 이기와 아집이 소멸하며, 평화와 안식이 깃들게 된다.

괴롭기 위해서는 괴로운 ‘나’가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것을 법주법계에 맡기고 살게 되니 ‘나’가 사라지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진리’만이 남아 진리답게 법답게 저절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주법계로 사는 수행자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사는 것이며,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주 법계의 수많은 진리의 인연에 의해 살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 법주법계에서 알아야 할 중요한 한 가지는 법주나 법계를 주체적인 어떤 상으로 실체화시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법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진리로써의 이치를 설하는 것이지 별도의 상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중생계와 별도로 실체적인 어떤 법계가 있다거나, 내가 머물고 있는 이 현상계와 별도로 법주가 있다고 이해한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교의 무아에서는 그 어떤 실체도 발붙일 틈이 없다. 심지어 그것이 진리일지라도, 부처일지라도 거기에 집착하고 머물러 실체화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를 벗어나고 만다.

Posted by 법상



그대들이 진리답게 살려면
대장부의 기상을 가져야만 한다.

깨진 그릇에는
좋은 음식을 담을 수 없듯이
자기의 분명한 마음의 중심도 세우지 못하고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면 결코 법다울 수 없다.

그릇이 크고 중심 잡힌 사람은
남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는다.
자기가 살아가는 곳곳에서 주인이 되면
그가 사는 곳이 항상 참됨이 되니
조건에 휘둘리지 말라.

[임제록(臨濟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가 바로
당당한 자기중심을 세우는 일이다.

우리 삶의 모습은 늘 주변상황에 이끌리고,
조건에 휘둘리며, 칭찬과 비난에 휘둘리곤 한다.
그것이 다 자기중심이 서 있지 못한 탓이고,
그릇이 작은 탓이다.

그릇이 크고 자기 안에 중심이 선 사람은
남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이나 경계에 휘둘리지 않으며,
언제나 자기가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주인이 된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야말로 참사람의 행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살아가는 곳곳에서 주인공이 되면
그가 서 있는 곳은 다 진실한 것이다.

그 어떤 곳에 있더라도,
그 어떤 상황, 그 어떤 사람과 함께 있더라도,
그 어떤 장소에 있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내가 있는 바로 그 곳에서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가
가장 중요한 삶의 순간이고, 참된 순간이다.

다른 곳에서 찾지 말라.
다른 순간을 찾지 말라.
바로 지금 여기이지 다른 곳, 다른 때가 아니다.
어느 곳에서라도 주인으로 살지 객으로 살지 말라.

‘나 자신’으로써 사는 것이 주인공으로 사는 것이다.
‘남처럼’ ‘누구처럼’ 살려고 하지 말라.
‘누구처럼’ 살려고 했을 때,
그것은 벌써 지금의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비교 속에서 행복을 얻으려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 자신’의 빛을 찾고
그 빛으로 삶을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삶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바로 그 곳에서
지금 그 모습으로 주인공이 되면
바로 그 자리가 진실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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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아래 칼럼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에 대한
부연의 글입니다.
신행상담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
(질문)

스님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께서 쓰신 칼럼중에 ''내 일''이 아닌 ''부처님의 일''이란 글을 읽었
어요.

저번에도 여러 글들에서 보면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요..
저는 실생활에서 부처님의 일로 돌려보려고 해도 잘 안되는것 같아요.
마음이 언잖은 일이 있을때 ''부처님의 일이야''해놓고
결국은 ''내 일''로 생각이 고정된답니다.

스님! ^^
제가 아직 그 글을 잘 이해못하는것 같아요.
조금만 더 쉽게 설명해 주세요.^^

--------------

(답변)

일체 모든 일을
부처님 일로 돌리라는 말은,
''나''라는 아상을 녹이기 위한 수행 방편입니다.

나아가
주위 경계에
일이라는 경계에 휘둘리지 말고
내가 내 중심을 굳게 잡고 살아가자는 말입니다.
내 주인공 자성불 굳게 믿고
그 자리에 일체를 다 놓고 가자는 말입니다.

방하착 하자는 말을
쉽게 풀이하자니 ''부처님 일''로 돌려 놓으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께 빌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복으로 흐르자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내 중심 굳게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껍데기로서의 거짓''나''를 믿지 말고,
참 주인공으로서의 참 ''나''를 믿자는 말입니다.
그게 믿으면 크게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괴롭고,
내가 기쁘고,
내가 슬프며, 외롭고, 서글프고,
내가 있으니 칭찬받고 싶고, 이름 드러내고 싶고,
잘나고 싶고, 얼굴이며 외모도 꾸미고 싶고,
다이어트 해서 내 모습 아름답게 가꾸고 싶고...

우리가 살아가며 만들어내는
모든 일들이 다 ''나''라는 놈이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나''만 쑥 빠지면
어느 한 가지에라도 걸릴 것이 없습니다.

아상 때문에
세상이 괴롭고 힘겨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상을 놓으면
세상 어느 것에도 걸릴것이 없어집니다.

''부처님 일''이라고 했을 때
''부처님''이란 내 밖에 있는 부처님이 아닙니다.
내 안의 ''참나''''자성불''''주인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일이라고 하면
온갖 괴로움이며 분별, 욕구, 집착이 붙습니다.
그래서 잘 되면 행복,
못 되면 괴로움 하고 분별짓게 됩니다.

그러니 세상이 참 답답한 노릇이죠...

그런데
내 앞에 펼쳐지는 이 모든 일들을
''부처님 일''로 돌려 놓게 되면
내가 걱정할 일이 없어집니다.

부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놓으면
사사로운 나의 욕심이며, 분별, 집착이 놓여지게 됩니다.

잘 되는 것도 부처님 일이니 너무 들뜰 것 없고,
못 되는 것도 부처님 일이니 너무 괴로워 할 것 없고,

''내 일''이라고 하면
내 능력의 범위 한도 내에서만 잘 할 수 있겠지만,
''부처님 일''이라고 하면
능력이 무한대로 확장되어 못하는 것이 없어지니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실제로 ''내가 한다''고 ''내 일''이라고 하고 일을 추진하면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에 대해서는
잘 할 수가 없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하면서
''그래 부처님 일이다'' 하고
''부처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턱 놓고 일을 하면
사사로운 ''나''가 사라지는 대신에
무량수 무량광 부처님의 능력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일들이 저절로 풀리게 됨을 경험합니다.

이 말은
결코 헛물케는 ''말도 안되는'' 말이 아닙니다.
참으로 이렇게 하면
밝게 밝게 되게 되 있습니다.

주인공 굳게 믿고
자성불 주인공이 알아서 하라고 턱 맡겨 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산다면
세상 사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게 당당하겠습니까.

내가 산다고 하니
걱정되고, 이것 저것 재봐야 하고, 불안하지
부처님께서 산다고 하면
그냥 그렇게만 턱 놓고 살면
세상 그보다 당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든든한 부처님 빽^^ 믿고 사는 사람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돌려 놓고 나서
''부처님 일로 돌려 놓았으니 잘 되겠지!''
하고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놓은 것이 아닙니다.
놓는 흉내만 낸 것입니다.

내 일이 아닌데 ''잘 되겠지, 못 되겠지''가 어디 있어요?
잘 되도 부처님 일
못 되도 부처님 일이라 생각하고
잘 되고 못 되는 양 쪽을 다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되면
그것도 잘 되느라 못 된 것이라고
또 한번 굳게 그 결과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크게 놓은 것이지요.

잘 되려고
이렇게 하면 잘 될 줄 알고
놓는다고 하면
그것은 한참을 방하착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쉽게 말해...

부처님 일로 돌리기 위해서는...
(중요합니다. 잘 들으시고 실천하세요)

무슨 일을 하든,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입니다.''
''알아서 잘 이끌고 가세요''
''난 모릅니다''
하세요...

난 어리석어 모르니
밝으신 부처님께서 이끌고 가십시오.
하고 가세요.

잘 되든 못 되든
나는 그저 ''순간 순간 최선을 다 할 뿐''입니다.
그냥 그러기만 하면
그 뒷 일은 자성부처님께서 다 알아서 할 것입니다.

못난 나를,
모자른 나를,
능력의 한계가 있는 나를 잡고 가지 말고,
무량 무변의 한도 끝도 없는
무한 생명 부처님을 잡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해 보세요...

이것 저것 따지지 말고,
그냥 그렇게 실천해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만...
잘 안된다고 생각되는 것도
부처님이 안 되는 것이지
내가 안 되는 것 아니다
하고 놓고 가세요.

처음엔 잘 안되는 것이
그것이 잘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 되면 수행 왜 하겠어요.
쉬우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겠지요.

계속해서
지금 말씀드린데로
꾸준히 실천해 보세요...

법우님 스스로가 깜짝 놀랄만한 일들이
순간 순간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무한 능력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디에서 이런 능력이 나왔을까
하고 참 신기해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체험하고 나서도
그 환희심 마저 부처님 것으로 돌려야지
내가 가지려고 하지 마세요.

부처님 일이니 당연한 것입니다.
내 일에서는 불가능한 일도
부처님 일이니 당연한 것입니다.
놀랄 필요도 없다는 것이지요.

이제 법우님은
무한 능력을
법계의 무한 능력을
가져다 쓰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배움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능력 안에서만 이룰 수 있었고,
내 것 안에서만 가질 수 있었고,
내 아이큐 안에서만 헤아릴 수 있었으며,
내 생각, 고정관념 안에서만 판단할 수 있었지만...

이젠...
부처님 능력을,
부처님의 고정되지 않은 무한한 생각을,
법계의 모든 소유를
그저 가져다 쓸 수 있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참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제 실천해 보는 일만 남았습니다.
생활 속에서, 경계 속에서
그대로 실행에 옮겨 보는 것 말입니다.

나로 살지 말고,
부처님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