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로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12.12 스스로 선택한 가난의 삶
  2. 2009.08.22 자연과 나와의 관계, 공존




[선암사에서...
원광스님과 수녀님...]

요즈음 들어
가난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거추장스러움도 많이 느끼게 되고,
소유에 오히려 걸리는 일들 또한 가만히 바라보게 됩니다.

과연 내게는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충분하게 갖추어져 있는가
스스로 비추어 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하게 산다는 건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내가 충분히 지혜롭고
또 그 지혜로움을 실천할 용기가 있는가
그것이 요즈음 화두처럼 제 삶 속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선택한 가난은
무한한 지혜로움의 원천이며,
영혼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산다는 건
소박하게 살고, 청빈하게 산다는 건,
우리 안의 창조적이고 자주적인 본연의 능력을
삶 속에서 마음껏 발휘하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지혜로움을 충분하게 실현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부유하게 살고
그래서 편리하게 살게 되면
우리는 본래의 능력을 자꾸만 잃어버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그만큼 축소되면서
몸과 마음의 능력도 함께 퇴화되고 맙니다.

그렇게 부유함에 길들여져 무능력해 지고 나면
그 때부터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게 되고,
반드시 물질적인 편리함이 뒷받침되어야지만 살 수 있는,
경제력이라는 경계에,
'소유'에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요즘같은 사회에서야
경제력이 그 사람의 능력을 가늠지을 수 있는 잣대인 듯
세상에서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지만,
그래서 너도 나도 돈 돈 하며 부자가 되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사실 그 내면적인 모습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부유할수록 자신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영역이 퇴화되고
모든 것을 기계가 대신해주며, 돈이 대신해주어야만 할 수 있는
그런 나약한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부유하고 돈이 많을수록
우리 손과 발은 할 일이 없어집니다.
대신에 머릿속에 집어 넣어야 하는 것들이 늘어나고,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계산하고 따지고 비교 분석하는 등의
온갖 번뇌와 혼란스러운 삶이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더욱 편리한 삶을 추구하게 되고,
더욱 손과 발을 놀리길 원하게 되며,
그러기 위해 더욱 더 부유해 지길 원하곤 합니다.
그 마음은 곧 욕심과 집착을 부추기고
욕심과 집착은 곧 모든 괴로움의 씨앗이 됩니다.

발로 걸을 것 차가 다 알아서 태워 주고,
농사 지어 먹거리 만들 것을 돈이 알아서 다 만들어 주며,
스스로 밥하고 반찬 할 것을 가정부가 다 해 주고,
스스로 집도 고치고, 시장도 보고, 밭도 갈고
그래야 할 일들을 돈이 알아서 다 해주게 되니까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자꾸만 줄어드는 것입니다.

물론 돈 많은 사람만 그런다는 게 아니예요.
요즘 사람들의 삶을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분야만 잘 하면 먹고 살 수 있게 변했습니다.

컴퓨터만 치면 되는 사람,
운전수만 하면 되는 사람,
기계 돌리는 사람,
그것도 기계의 어느 한 부분만, 똑같은 공정을
하루 종일, 아니 일년 365일을 똑같은 일만 해 먹고 사는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사람의 일이 분업화 되다 보니까
사람이 할 일이 없어졌어요.
그냥 한 가지 일만 잘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요즘이야 그런 분업이 좋은 것이라고 야단인데다
한 분야만 깊이 연구하고 공부하고 실습하면 전문가로 인정받는 세상이다 보니
당연하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는 있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도 한 번쯤 깊이 있는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한 가지 일만 하면 되다 보니까
다른 일에 대해서는 그냥 깜깜무소식이고 어둔 밤입니다.
요즘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형광등 하나 갈지 못하고
변기 하나 제대로 고치지 못한다고 하잖아요.

물론 할 필요가 없으니까 안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아주 단순해졌고
우리의 손과 발이, 우리 몸이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의 길이
딱 막혀 버린 겁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난했을 때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밭도 갈고, 농사도 짓고, 밥도 짓고,
두 발로 걷고, 두 손으로 일하고,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돈이 많아져 버리면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이 없어져요.
어쩌면 소소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
그러나 인간의 삶에 있어 아주 근간이 되고 근본이 되는
그런 기본적인 의식주와 관련된 일들이
그냥 돈의 몫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이 자꾸만 놀게 되고
돈으로 만들어진 온갖 가공되고 영양가 없는 것들이
판을 쳐서 우리 몸을 공격하고 맙니다.
몸으로 일하지 않으니까 우리 몸도 병약해 지는 겁니다.

이건 얼마나 불행인 건 지 몰라요.
몸이 해야 할 것을 돈이 다 알아서 해 주니까
몸의 많은 기능이 그냥 놀게 되고
퇴화되어 버리고
그러면서 온갖 병이 몸을 공격하는 겁니다.

사람이 두 발로 흙 위를 걸을 수 있어야
그래야 비로소 가장 기본적인 몸과 마음의 근본이 서게 되는데
걸을 일이 없다보니
몸이 병약해 지고, 생명력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무인도에서라도,
숲 속에서라도 자신의 창조적인 본연의 능력을 사용하면서
또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몸과 마음을 함께 움직이면서
비로소 대자연과 내 몸이, 내 마음이 하나될 수 있는데,
이제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 겁니다.

우리 몸은 자꾸 움직여 줘야 합니다.
내 발로 대지 위를 걸을 수 있어야 하고,
내 몸으로써 대자연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른 것이 대신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손과 발이 있는 이유는
손과 발로써 움직이고 일을 하며
살면서 필요한 모든 생활을 위해 필연적으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손발의 본래 목적을 방치하면서
그 일을 돈이 대신하고, 기계가 대신하도록 하면
그 때부터 우리는 손발 본연의 창의와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퇴화되며, 온갖 병이 만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돈이 없으면
당장에 농사를 지어야 하고,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온몸으로 흙속에 뛰어들어야 하고,
스스로 농사를 짓고 스스로 모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흙과 가까워질 수 있고,
대자연과 바람과 구름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몸으로써, 손발로써 늘 일을 하고 씨앗을 뿌리며 거둠으로써
몸도 건강해 지고 마음 또한 함께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거두어 먹으니 욕심이 줄어들고
마음은 이내 평온을 되찾게 됩니다.

더 많이 거두어 봐야 저장할 곳도 없고 상하기만 할 것이니
많은 것을 쌓아두려고 애쓸 일도 없어집니다.
그 때 그 때 필요한 것을 필요에 의해 만들어 쓸 수 있습니다.
남는 것은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모자란 것은 모자란대로 부족한 듯 아껴 쓸 수도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대자연의 조화에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고 그 흐름과 하나되어 삶으로써
나 또한 대자연의 일원으로 건강하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옛 선지식이나 현자들은
가난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는
가장 소중한 부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해 질 수 있고,
온갖 번뇌며 욕심에서 벗어나 호젓하게 살 수 있습니다.

가난했을 때
우리가 그동안 욕심과 집착 소유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게 되며,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물이 흘러가듯
아주 자연스럽고 고요하게
걸림없으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길 빌어서는 안됩니다.
부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부유하더라도
그 부유함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이 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소유한 것이 많더라도
그 소유의 달콤함에서 벗어나고
소유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가난하게 살며
아끼고 살며
나누고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가난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모두가 입을 모으고
부자를 칭송하는 때이지만,
눈밝은 지혜로운 이라면 지금 이 시대에서도
가난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에 쫒아갈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그 길로 간다고 나도 그리로 따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모든 경제인, 정치가, 위인들...
이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 길로 가더라도
지혜로운 이는 외롭지만 홀로 가는 밝은 길을 택할 것입니다.

가난한 삶이 주는
그 참된 지혜와 복덕을
가슴 깊이 사유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충분히 지혜롭다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할 것이고,
내게 충분히 용기가 있다면
스스로 지혜로운 가난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미국 나그네 비둘기는 한 때
북미 대륙에서 가장 흔한 들새였다.
나그네 비둘기의 큰 떼가 지나가면 하늘이 어두워질 정도였으므로,
아무도 이 새가 멸종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미국 개척시대가 시작되면서
나그네 비둘기의 수난은 시작되었다.
이 새는 아주 고기 맛이 좋고
대평원에서 큰 무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부 개척자들의 식탁에서 아주 인기있는 메뉴가 되었다.

미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철도가 놓이면서
이 새는 철도 건설 노동자를 위한 식사 뿐만이 아니라,
상품화되어 이웃 여러 마을로 신속하게 공급되었다.

이 나그네 비둘기의 포획을 위해 수천의 전문 사냥꾼이 고용되어
기관총을 비롯한 여러 화기를 사용하여 남획하기 시작했다.
이 새는 큰 나무에 수십 또는 수백씩 무리를 지어
새끼를 치는 생태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더욱 남획하기 쉬웠다.

사냥꾼들은 어린 새나 늙은 새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포획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855년 뉴욕의 한 거래처에서
한 사람이 하루에 18,000마리의 비둘기를 매매한 사실이 있고,
1869년 한 해 동안 한 지역에서
750만 마리의 나그네 비둘기가 포획된 기록도 있다.

이러한 남획으로 인해서 나그네 비둘기의 수는 격감하여
19세기 후반에는 큰 번식 집단을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희귀한 종이 되어 버렸다.

1894년 마지막 둥지가 발견되었으며,
1914년 신시네티 동물원에서 최후의 한 마리가 죽음으로써
이 새는 멸종되었다.

[지속가능한 사회와 생태학] 중에서...

지구는 공룡을 포함해 식물과 동물 수천종이 절멸한 6천500만년 전
소행성 충돌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생물 종들을 잃어가고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전 세계 포유류의 약 4분의 1, 양서류의 3분의 1,
조류의 10분의 1 이상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기후변화 요인 한 가지만으로
앞으로 50년 안에 추가로 생물종 15-37%가
멸종 직전으로 몰릴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추산한다.

세계환경보존연맹은 지난 5월 멸종 위협에 처한 생물 종의 수가
1만6천119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백상아리는 지난 50년 동안 최대 95%까지 감소했다.
북극곰은 앞으로 45년 간 개체 수가 30%쯤 감소할 전망이다.

사하라사막 지대에서는 무분별한 사냥과 서식지 파괴로
다마가젤의 수가 80%나 줄었다.
아프리카 민물고기의 4분의 1도 인류의 활동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

과학자들은
"중대한 생물다양성 위기 상황으로 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물다양성은 여전히 저평가되고 있고,
민간과 공공정책 결정시 적절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며
"생물다양성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적인 조직을 창설함으로써
과학과 정책 사이 간격을 시급히 메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겨레 신문]

지금도 매일 70~150여 종의 생물이
소리없이 아무도 모르게 멸종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 년이나 한 달이 아니라
하루에 말이지요.

생물이 멸종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몸이 꺼져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요.

위에서 나그네 비둘기가 없어진
그런 방식으로, 혹은 그보다 더 잔혹하거나, 미묘한 방법으로
수많은 종의 생물들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뿐 아니지요.
이 글을 읽고 있는 오늘 하루,
2만 헥타르(약 6천5십만평)의 사막을 만들어내고,
8,600만 톤의 비옥한 땅을 침식시켜 파괴하고,
1억 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브라질 아마존강 유역의 열대우림은
우리가 좋아하는 햄버거 등의 패스트푸드용
쇠고기를 생산하기 위한 목초지를 만드느라
매년 미국의 테네시 주보다 더 넓은 삼림지역이
차례 차례 불태워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아랄해는 목화재배를 위한 관계용수로 인해
빠르게 사막화 현상을 보이고 있어
해안선이 하루가 다르게 멀어져 가고 있고,

뭐 이런 예를 말로 일일이 다 적으려면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고,
내 평생 해도 모자랄 판이니
가슴도 아프고 그만 적도록 합니다.

우리의 집착,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들의, 인간들의 집착과 욕심이
이 모든 무서운 일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훗날 우리가 받아야 할
공업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업이니까
나 혼자만 환경 보존하고, 절약하고, 아끼고,
자연을 사랑한다고 될 일이 아니니
그냥 대충 살겠다고 한다면
그 공업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지만,

나 먼저 아끼고 절약하고 나누고
보존하며 자연을, 생명을 내 몸 아끼듯 사랑하고
동체의 자비로써 대한다면
내 업은 내 업대로 청정함을 유지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기상 이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업이 청정한 사람은 그것을 빗겨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폭풍우가 몰아친다고
다 죽는 것은 아니고, 다 과보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업에 따라 죽기도 살기도 하고,
업에 따라 자연의 갚음을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업이란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자연과 나와의 업이 청정하면
내가 자연을 어쩌지 않은 것 처럼
자연도 나를 어쩌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자연을 더럽히고, 오염시키고, 펑펑 써대며,
개발과 발전을 이유로 파헤치고 꺾고 뚫고 해 버린다면
자연 또한 그 업을 기억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업을 청정히 한다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자연과의 업이 청정해 진다면
그것이 바로 청정한 자연, 청정하고 지속가능한 지구를 만드는데
더없이 중요한 실천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숫타니파타]의 게송이 떠오릅니다.

악마가 말했다.
"자식 있는 자는 자식 때문에 기쁘고,
소가 있는 자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인간이 소유하고 집착하는 것은 기쁨이다.
집착할 것이 없는 자는 기뻐할 것도 없다."

그러자 붓다가 대답했다.
"자식이 있는 자는 자식 때문에 근심하고,
소 있는 자는 소 때문에 근심한다.
실로 인간의 근심은 무엇인가에 집착하는데서 생겨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자는 근심할 것도 없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