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행무상'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1.15 정해진 숙명이란 없다
  2. 2009.07.31 나에 대한 의미있는 명상
  3. 2009.07.23 변하는대로 변하게 내버려두라






불교에서는 운명이나 숙명 대신에
스스로의 삶을 내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다는 인과(因果), 업보(業報)론에 기초하고 있다.
누구나 물론 전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자기만의 삶의 모습을 갖고 태어난다.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살 것인지,
어느 정도의 학벌과 능력과 외모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얼마 정도의 행복을 누리다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에 대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정해진 업력(業力)을 받고 태어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떤 배우자를 만날 것인지,
어느 정도의 대학이나 학벌을 가지게 될 것인지,
어떤 회사에 취직하여 어느 정도까지 진급을 하게 될 것인지,
어떤 인연을 만나서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받게 될 것인지,
언제 어떤 병이나 사고로 얼마만큼 고통을 겪게 될 것인지,
돈과 재산은 어느 정도를 벌어 쓸 수 있을 것인지,
그렇게 살다가 언제쯤 몇 살 쯤 죽어갈 것인지,
그런 것들에 대한 삶의 윤곽이 전생의 업식(業識)에 의해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전생의 업을 그대로 받을 것이니
이번 생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절대 그 업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것도 인생 일대의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말로 행동으로 생각으로 행하는 행위이다.
전생, 또 오랜 전생을 이어오며 지어왔던 온갖 행위들이
지금 내 안에서 기본적으로 이번 생을 어떻게 펼쳐나가게 될지에 대해
결정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정의 원인은 내 과거의 행위에 있다.
내 과거의 온갖 행위들에 의해 내 현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가.
결론은 내 현재의 행위에 따라 또 다시 내 미래가 바뀔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자신의 마음에 따라,
자신의 욕심과 집착의 크기에 따라,
자신의 마음공부와 수행과 기도의 정도에 따라,
내 삶은 언제든지 180도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달라질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 삶은 그 괘도를 수정해 나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일 있을, 내년에 있을 내 삶의 괘도가
내 행위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되어지고 있다.

그것을 운명이나 숙명이라고 이름 짓지 않고
업(業)이라고 이름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운명이나 숙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반해
업이라는 것은 언제고 바꿀 수 있으며,
바꿀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순간순간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오늘 힘겹게 살아가는 소년 소녀 가장을 만나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고,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 주었다면
바로 그 한 번의 행위가
1년 뒤 파산할 지 모르는 업연을 2년 뒤로 늦춰줄 수도 있다.

이웃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과 벗을 찾아가 위로해 주고,
지혜로운 삶의 길을 안내 해 주었다면,
이번 생에는 있지도 않았을 선지식 스승과의 인연이 생겨날 수도 있다.

오늘 부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마음을 비우며
그동안 가지고 있던 욕심과 집착을 말끔히 비워냈다면
다음 달에 닥칠지 모를 급성 위장염이나 위암 판정이
10년 쯤 뒤로 늦춰지게 될 수도 있다.

오래도록 마음속에 응어리 져 있던
미워하는 원수에 대한 불같은 화를 다스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를 해 주었다면
몇 달 뒤에 닥칠지 모를 홧병이 소멸될 수도 있다.

필요하다고 그 때 그 때 사 들이고,
여유가 있다고 아끼지 않고, 절약하지 않았던 삶의 습관이
10년 뒤에 올 퇴직을 1년 뒤로 앞당길 수도 있고,
나보다 못난 사람,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한 마디의 말이
지금의 내 높은 지위를 1년 빨리 끌어내릴 수도 있다.

어디 그 뿐인가.
파리나 모기, 풀벌레와 작은 곤충들의 생명을
별 생각 없이 죽이거나 괴롭혔다면
그것은 내 명(命)을 몇 년씩 앞당기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산을 함부로 깎고, 나무를 함부로 베는 행위로 인해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폭풍우가 내가 사는 지역을 강타했을 때
바로 내가 사는 집이 무너지고, 내 터전이 깎여나갈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행위에 따라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업은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불교의 제행무상이라는 이치에 따르면
그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업이라는 것 또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매일 매일 달라지고 지속된다는 것은
받아야 할 업의 과보 또한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구의 삼업,
신구의 삼업을 돌이켜 보라.
매일 매일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어떤 행위를 해 왔는가를 놓치지 말고 살피라.

삼업에 대한 일기를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삼업 일기장’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뉠 것이다.
첫 번째 단락은 몸의 행위를, 두 번째는 입으로 쏟아낸 말의 행위를
세 번째는 마음에서 일으킨 온갖 생각의 행위들을 적는 것이다.

몇 일, 몇 주, 몇 달 동안 삼업의 일기장을 쓰다 보면
업의 일정한 패턴을 살피 수 있을 것이다.
주로 어떤 악업을 많이 짓고 있는지,
어떤 선업들을 많이 행하고 있는지,
복은 얼마나 짓고 있는지, 죄는 얼마나 짓고 있는지,
탐욕에 따른 행위가 많은지, 성냄에 따른 행위가 많은지,
다양한 업의 패턴을 살펴보면
이제부터 내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것이다.

물론 전생부터 이어 온 내가 모르는 업들은 제쳐두더라도
삶에 대한 획기적이며 경이로운 성찰이 찾아 올 것이다.



업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선한 것들의 종류와 악한 것들의 종류가 있다.

말로써 하는 구업을 지을 때도
칭찬을 하거나, 조언을 해 주거나, 진리를 설해 주거나,
따뜻한 격려를 해 주는 등의 선을 베푸는 행위가 있을 수 있고,
비난을 하거나, 욕설을 하거나, 이간질을 하거나, 꾸며낸 말을 하는 등의
악을 행할 수도 있다.

마음으로써 하는 의업 또한
마음 속으로 미워하거나, 성내거나, 욕심내거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등의 악한 것들이 있고,
사랑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내며,
소박, 정직, 지혜, 나눔 등의 아름답고 선한 것들도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행하는 거의 모든 행위는
선하거나 악한 쪽으로 향한다.
선한 쪽으로 우리의 업을 펼쳐내는 것,
바로 거기에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열쇠가 담겨 있다.

업을 변화시키는 첫 번째 가장 큰 행위가 바로
보시 행이다.

선을 행하는 것,
내 것을 나누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업을 뛰어넘는 최고 단계의 실천 수행이다.

월급에서 일정부분을 떼어 내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해 사용하는 것,
또한 진리와 지혜를 많은 이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 전법하는 것,
필요가 아닌 욕망으로 많은 물건을 사들이기 보다는
꼭 필요한 것들만 소박하게 구입하여 쓰는 것,

내 것이 아니라고, 소모품이라고, 돈이 넉넉하다고 낭비하기보다는
물 한 방울이라도 아껴쓰고 근검 절약하는 것,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두려움을 주지 않아
나를 만나는 모든 이들이 평안을 느끼도록 하는 것,

이러한 작지만 분명한 한 가지 보시의 행이
내 앞에 펼쳐질 앞으로의 삶을 하나 하나씩 바꾸어 간다.
이러한 이타적인 업의 행위야말로
내 삶을 바꾸고, 내 미래를 바꾸는 결정적인 요소다.

두 번째로 운명을 뛰어넘는 요소가 바로 수행이다.
마음에 욕망과 집착을 비우고,
번뇌와 아상을 놓고 비우는 삶,
그것이야말로 업을 뛰어넘는 비결이다.

내가 잘났다는 생각, 내가 옳다는 아집을 놓아버리는 것,
내 소유와 내 물건이라는 소유욕을 놓아버리는 것,
모든 판단과 분별을 쉬는 것,
시비 분별을 끊고 올라오는 모든 생각들을 묵묵히 지켜보는 것,

좌복을 깔고 앉아 좌선에 드는 것,
경전을 공부하고, 독경하며, 지혜의 말씀을 사유하는 것,
매일 아침이나 저녁으로 108배 절 수행을 하는 것,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명호를 염불하거나 다라니, 진언을 독송하는 것,

이러한 작지만 분명한 지혜를 닦는 비움의 수행이
내 앞에 펼쳐질 앞으로의 삶을 하나 하나씩 바꾸어 간다.
이러한 자리적인 청정한 수행이야말로
내 삶을 바꾸고, 내 미래를 바꾸는 결정적인 요소다.

이치가 이러할진대
점을 보고, 사주팔자를 보며, 운명과 관상을 본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가.

사주팔자를 보며, 운명을 점치는 것은
이미 주어진 업을 더욱 강화시켜
더 이상 내 스스로 업을 변화 발전시킴으로써
업의 뛰어넘을 수 있는 본연의 무한한 능력을 축소시키고 만다.

사주를 점쳐 볼 바로 그 시간에 차라리
‘일체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소멸되고 평안하소서 안락하소서 행복하소서’
라는 자비의 게송을 읊는 것이 더욱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더욱 지혜로운 방법이다.

운명을 거부하는 것은 모든 고의 시작이며,
운명에 순응하는 것은 평범한 수준이지만,
운명을 스스로 바꾸고 개척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수행자가 가야 할 당당한 삶의 길이다.

어제와 오늘, 조금 전과 바로 지금의
나의 선한 행동, 나눔의 행동, 사랑의 행위, 깨어있는 행위가
내일 있을 괴로움을 몰아내고,
다음 주에 있을 병고를 없애주며,
다음 달에 있을 퇴직을 막아주고,
내년에 있을 이혼을 없애주며,
몇 년 뒤에 있을 단명의 업을 소멸시켜 줄 수 있다.

반대로 오늘 내가 행한 악행이
내일 있을 괴로움을 다음 순간으로 앞당기고,
다음 주에 있을 병고를 내일로 앞당기며,
다음 달에 있을 퇴직을 다음 주로 앞당기고,
내년에 있을 이혼을 다음 달로 앞당기고,
몇 년 뒤에 있을 단명의 업을 내년으로 앞당길 수 있다.

미래가 불안한가,
노후가 불안한가,
그 모든 불안을 해소시킬 유일한 탈출구는
바로 지금이며,
그 불안을 소멸시키는 약이 바로
사랑이 담긴 선행이며, 자비로운 나눔과 보시에 있다.



나눔과 비움, 보시와 수행, 복과 지혜,
이 두 가지의 실천이야말로
모든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삶의 길을 보여주는
유일한 진리의 나침반이 될 것이다.

혹 나는 공부에는 재능이 없다거나,
부유함은 나와는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체념한다거나,
내 운명은 어차피 진흙탕 속이라고 좌절하거나,
내 주제에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라고 주저하거나,
나 같은 악행을 많이 한 사람이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염려하거나,
내 삶은 포기와 좌절과 절망 뿐이라고
주어진 운명을 비관하지는 않았는가.

아직 비관할 때가 아니다.
절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니 그런 운명도, 그런 때도 없다.
이 세상에 정해진 운명이란 어디에도 없다.

언제든 마음을 돌이켜 ‘지금 여기’에서 시작한다면
수북이 쌓인 마른 풀이 성냥불 하나에 불타 없어지듯이,
수백 년 동안 어두웠던 동굴이 불빛 하나에 환히 밝아지듯이
어제의 모든 죄업은 일시에 소멸될 수도 있다.

내 삶은 내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다.
내 운명은 내 스스로 개척한다.
업이라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내 스스로 그 업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매 순간순간 업을 뛰어넘을 수 있는,
업을 경이롭게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지혜와 복덕이 담긴 행위를 해 나가고 있는가.
마음을 비우고, 소유를 나누는 비움과 나눔의 행위를 해 나가고 있는가.

작은 비움 하나가,
작은 나눔 하나가,
내 삶의 변화시키고 진화시킬 수 있다.

작은 비움,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
싫어하던 내 외모를 받아들이는 것,
기분 나쁘던 사람을 이해해 주는 것,
욕심 내던 것을 하나씩 포기해 가는 것,
집착하던 사람을 놓아주는 것,
혹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는 것,
아껴쓰고 절약하는 것,
소박하고 청빈하게 사는 것,
꼭 필요하지 않으면 사지 않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견해를 놓아버리는 것,
편견과 선입견을 비우는 것,
옳다 그르다는 생각들을 묵묵히 관하는 것,
매일 아침 절 수행을 하는 것,
염불, 독경, 진언, 좌선 수행을 하는 것,
때때로 주말에 가족이 함께 주말 템플스테이에 참여하는 것,
큰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
불경이나 불서를 가까이 하는 것,
마음을 관하는 것,
이러한 작은 비움들이
내 운명을 변화시키고 내 업을 바꾼다.

작은 나눔,
이웃을 보고 안부를 나누고 인사를 나누는 것,
지나치던 어린 아이에게 미소를 보내는 것,
직장의 청소부 아주머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
버스 기사 아저씨께, 톨게이트의 매표원 아주머님께 캔커피 하나를 드리는 것,
아내가 차려 준 밥상과 반찬에 칭찬세례를 퍼 붓는 것,
아들의 좋지 않은 성적에 웃으며 격려해 주는 것,
친구의 고민을 내 일처럼 들어주는 것,
나를 만나는 사람에게 나로 인한 불편함이 없게 해 주는 것,
남들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봉사하는 것,
내 집과 이웃 집 앞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것,
주말에 가족이 함께 고아원을 방문하는 것,
TV에 나오는 불우이웃을 위한 ARS에 때마다 전화하는 것,
매월 일정액의 보시를 행하는 것,
경전이나 지혜의 책들을 보시하는 것,
부처님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
이 세상을 향해 ‘고통이 소멸되고 평안하소서 안락하소서 행복하소서’라고 축원하는 것,
이러한 작은 나눔들이
내 운명을 변화시키고 내 업을 바꾼다.

이러한 나눔과 비움의 실천이
언젠가 있을 내 인생의 온갖 재앙들을 물리치고,
언젠가 있을 내 인생의 온갖 행복들을 더욱 더 몰고 온다.



[사진 : 승주 선암사]










Posted by 법상




우리가 흔히들 생각하는 '나'란 존재에 대해
명상을 해 보는 일은 매우 의미있는 작업입니다.

우린 모두
'나'란 틀에 갖혀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만을
'나'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참으로 '나'를 그르치기 쉽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에 대한 명상을
해 보기로 합니다.
물론 이것은 '너'에 대한 명상일수도 있으며
이 우주 전체에 대한 명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를 포함한 일체모든 만유는
시간, 공간적으로 모든 것(一切)에 서로 서로
의지해 있다는 의미심장한 결론을 먼저 내려 두기로 합시다.
그리고 시간적인 면에서 바라본 '나'의 실상과
공간적인 면에서 바라본 '나'의 모습을 하나씩 살펴보는 것입니다.

먼저 시간적인 '나'의 생명을 명상 해 봅시다.
나를 낳게 해주신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할머님, 할아버지
그 위 모든 조상님들, 그리고 또 그 위 조상님들,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이 역사 속의 모든 사람들이 나의 형제요 부모 아님이 없습니다.
나로부터 20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209만명
30대를 소급해서 올라가면
약 21억이 넘는 조상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엄격히 따져보면 이들 중 한 명만 빠져도
나란 존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지금의 나란 존재는
시간을 거슬러 일체 모든 과거의 인연들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속의 모든 인물들과 나는
뗄 수 없는 상호 연관된 존재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의 나란 존재는
아버님과 어머님의 사랑으로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의 고리 일체가
나와 통해 있고 지금 이 순간
내 속에 갈무려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 인류의 역사가
지금 이 순간 내 속에 나라는 모습으로
생동감 있게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따져도 마찬가지 입니다.
동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지금의 나를 관찰해 봅시다.
옷을 입고, 신발, 양말을 신고 다니며,
아침, 점심, 저녁으로 밥을 먹습니다.
그것들 나를 살아가도록 해주는 부수적인 것들은
과연 나에게 그대로 구족된 것인가요?
'나'만의 능력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옷이 지금 내 몸에 붙어 있기까지는
너무나도 많은 이들의 노고와 피땀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옷 공장이 돌아가려고 해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매달려야 하는가요.
유통과정에서의 도매상, 소매상, 옷가게 주인 등등...
그리고 내가 먹는 밥은 어떠합니까.
단지 내가 내돈 내고 먹으니 내것이고
나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니
내가 고생해서 내가 먹는 거지라는 생각은
너무도 편협한 생각입니다.

내가 밥을 먹기 위해서는 농부들의 피땀이 필요하고
그 농부가 있기 위해서는 비료 만드는 사람,
삽만드는 사람, 쟁이 만드는 사람,
곡식이 잘 자랄 수 있는 모든 조건,
즉, 땅, 씨앗, 물, 태양, 등등의 많은 것이
연관되어 있지 않고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례로 태양이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버틸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얼마안가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폐허가 되고 말 것입니다.
물이 없어도 마찬가지 겠지요.

이처럼 우리는 그저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주위의 모든 조건들과
상호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존재의 무한한 은혜에 의해
살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라 의상스님의 법성게에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란
바로 이런 사실을 읊은 것입니다.
'한 티끌 속에 온 우주를 머금었다'는
화엄의 법계연기의 세계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시간, 공간적으로
'나'란 존재는
일체 모든 만유, 만생, 유정, 무정의 중생들,
그리고 자연만물과 함께 연관되어서
공생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일체의 사소한 미물과도
하다못해 곤충, 짐승, 물, 태양 등과도
나는 연관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시간, 공간적으로 일체 모든 존재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인연생입니다.
그러나 유일신에서의 신은
오직 스스로 유일한 존재이기에
불교에서는 수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세요.
모두가 나의 다른 모습들입니다.
나와 인연을 주고 받는 참으로 아름다운
나의 도반들이며
나의 부처님 이십니다.
이 모두에게 불공 올릴 일입니다.


Posted by 법상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일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
즉 무상(無常)의 진리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한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 찰나로 흐른다.
어느 한 순간도 멈출 수 있는 것은 없다.

변화를 멈출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어떻게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변한다는 진리를 멈출수는 없다.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그렇듯 끊임없이 변화해 가기 때문이다.

고정된 진리는 하나도 없다.
끊임없이 변화할 뿐.
변화한다는 그 사실만이 변치않고 항상할 뿐.

진리와 하나되어 흐를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이 그대로 진리가 된다.
우리 자체가 곧 진리의 몸이 되어 버린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진리와 하나되어 흐르라.
그러면 어떻게 진리와 하나되어 흐를 수 있는가.

변화한다는 진리,
무상이라는 진리와 하나되어 흐르면 된다.
변화를 받아들이며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라.
그 흐름을 벗어나려 하지 말라.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변화는 진리이다.
변화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진리다운 현상이다.
그러니 변화를 붙잡으려 하지 말라.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데서 온다.

변화하는 것은 두렵다.
변하면 안 될 것 같다.
지금 이 모습이 그대로 지속되길 바란다.

이 몸이 지속되길 바라고,
이 행복의 느낌이 지속되길 바라며,
내 돈과 명예, 권력, 지위, 가족, 친구, 사랑......
이 모든 것이 지속되길 바란다.

그것들이 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변화는 곧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도된 망상이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변화’한다는, 무상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지속’과 ‘안주’를 바란다.
지속됨과 안주 속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언제까지고 지속되는 것은 없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변화만이 있을 뿐.
변화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온전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며,
감정도 변하고, 사랑도 미움도 변한다.
사상이나 견해도 끊임없이 변하고,
욕구나 욕심도 변한다.
명예나 권력, 지위도 언젠가는 변하고 만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법계의 본연의 모습이다.
바로 그것을 받아들이라.

함께 변화하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수행이란
바로 이것 밖에 없다.

모든 것은 변화하는데
나만 변치않고자 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난다.
모두가 변화하는데 나는 변하기 싫고,
다 변하는데 내 것은 영원하길 바라며
내 생명, 내 소유, 내 사랑, 내 사상은 영원하길 바란다.

모든 것을
변하는 대로 그대로 두라.

어떻게 하려고 애쓰지 말라.
붙잡아 두려고 노력하지 말라.
어떻게 바꿔보려고 다투지 말라.

그냥 변한다는 진리를
변하도록 그냥 놓아두라.

그 흐름에 들라.
변하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목적이
‘변치않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세상을 그냥 놓아두라.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다만 흐르도록 놓아두라.
변화하도록 그대로 두라.

‘나’라는 것도 붙잡지 말라.
‘나’도 끊임없이 변화할 뿐,
거기에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
안주할 내가 없다.

이 세상은 그냥 놓아두면 스스로 알아서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은 정확하다.
정확히 있어야 할 일이
있어야 할 그 때에
있어야 할 곳에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법계라고 하는 것이다.
명확한 진리, 법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라는 뜻이다.

법계는 변화에 의해 온전하게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을 거부하지 말라.
그대로 놓아두라.

어떤 것도 잡지 말라.
깨달음 또한 잡지 말라.
잡을 것이 없는 것, 고정된 것이 없는 것,
안주할 것이 없는 것, 항상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그런데 왜 도리어 그것을 잡지 못해 안달하는가.

깨달음은 잡았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놓았을 때 온다.
깨닫고자 애쓸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조차 완전하게 쉴 때 온다.
깨달음 속에 안주하려 들지 말라.
안주하는 순간 깨달음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오직 이것이다.
그냥 놓아두라.
어느것도 붙잡지 말라.
변하는 대로 그대로 놔두라.

변화는 진리이니 그것을 따를 일이지
그것을 내 고집으로 붙잡고자 하지 말라.

이렇게 단순한 것이 불법이다.
단순한 진리를 공연히 머리굴려 어렵게 만들지 말라.
단순한 것은 단순하게 놓아두라.

그저 푹 쉬기만 하라.
푹 쉬면서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라.
함께 따라 흐르라.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놓아두라.
그저 놔두고 푹 쉬기만 하라.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