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10.30 멸성제와 도성제 - 반야심경 강의 12강
  2. 2007.12.20 깨달음, 깨달음의 안목



반야심경 강해 -12강-

멸성제와 도성제

(3) 멸성제 -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멸이란, ‘니르바나’의 음역으로,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하며, 흔히 ‘열반’이라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괴로움의 원인인 온갖 번뇌의 불길이 모두 꺼진 상태, 즉, 고가 소멸된 상태입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한다면, ‘최고의 행복’, ‘절대적 행복’ 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멸성제는 사성제의 집성제와 반대되는 경지입니다. 집성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순관]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고찰해 십이지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근본원인이 무명(無明)이라고 관찰한 것입니다. 이를 차례 차례로 바른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을 순관(順觀)이라 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도 없고[無無明],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다[無老死]’고 한 것은 바로 이 유전문의 이치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근본불교에서 이렇게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설명하고 있지만, 반야심경에서는 이것도 없다고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멸성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불교는 현상계가 ‘괴롭다’ 라고 하여, 그 원인을 밝히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는 않습니다. 즉,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것은, 그 원인을 제거하여 괴로움이 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작업일 뿐입니다. 어쨌든 괴로움의 원인을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통해 살펴보면, 그 근본 원인인 무명에서부터 차례로 하나씩 지분을 소멸시켜 나가는 환멸문[역관(逆觀)]을 통해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노병사의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생(生)을 멸해야 하고, 생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유(有)를 멸해야 하고, 유를 멸하기 위해 취(取)를 멸해야 하고……. 이렇게 해서, 결국에는 무명(無明)을 멸하면 괴로움의 모든 고리가 풀려서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상태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십이연기의 환멸문(還滅門)’이라 하며, 이렇게 관찰하여 열반의 상태로 다다르는 관법이 바로 역관(逆觀)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이 다함도 없고, 나아가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다’란 말은 바로 이 ‘십이연기의 환멸문도 사실은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멸성제에 대해 조금 더 부연합니다.

열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 즉, 육신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 하여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하고,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 합니다. 후자는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므로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苦)가 모두 소멸된 열반의 경지입니다.

(4) 도성제 - 괴로움 소멸의 실천에 대한 진리

도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서, 열반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도성제는 괴로움을 멸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을 떠난 길입니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아니고,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 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의 길을 말합니다. 『소나경』은 이러한 중도에 대한 좋은 비유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소나야, 너는 집에 있을 때 비파를 잘 타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파 줄을 너무 강하게 죄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비파 줄을 아주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야, 그와 마찬가지로 노력도 너무 지나치면 마음의 동요를 가져오고, 너무 느슨하면 나태하게 된다. 그러므로, 소나야, 군형을 유지해야 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나 존자는 세존의 가르침대로 행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거문고 줄이 지나치게 팽팽하거나, 지나치게 느슨하면 좋은 소리가 날 수 없고, 가장 좋은 소리를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듯이,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 또한 극단적인 상태를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바로 ‘팔정도(八正道)’입니다. 팔정도의 ‘정(正)’이 바로 중도의 ‘중(中)’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팔정도의 ‘정’과 중도의 ‘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덟가지 바른 길’이라고 할 때의 ‘바른’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또 중도의 중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중도라고 하여 그저 단순히 ‘중간’ 정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바른 길’이라고 했을 때도 도대체 무엇이 바른 길이냐 하는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과 ‘정’의 의미는 앞서 설명했던, 불교 근본 교설인 연기와 공, 삼법인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중도란 적당히 중간의 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 모든 대상은 고정된 실체 없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며 다만 인연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존재이므로 텅 비어 있다는 온전한 자각에서 오는 실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연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텅 빈 존재라면 어느 한 쪽을 택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하는 치우친 견해를 내세울 수 없게 됩니다. 팔정도에서 바른 길이라는 것도 연기와 무아, 공에 입각한 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견이라고 했을 때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인가 하면, 보되 실체적인 어떤 것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다만 인연 따라 생겼다가 흩어지는 것임을 바로 보라는 것이며, 항상하지 않는 것으로 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도와 팔정도의 실천은 곧 연기와 공과 삼법인의 실천인 것입니다. 뒤에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잡아함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리불의 옛 친구가 물었다.

“사리불이여, 왜 세존과 함께 청정한 수행을 하는가?”

“벗이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는가?”

“길은 있다. 그 길은 팔정도이니, 정견・정사・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 그것이다.”

1) 팔정도(八正道)

① 정견(正見) - 바른 견해

정견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나다’ 하는 아상 없이,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없이 사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불교의 진리인 연기의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 사성제의 진리를 여실히 보는 것을 말합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견해이며, 연기적으로 보는 견해이고,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는 텅 빈 시선으로 보는 견해이며, 항상하는 것이 없다는 견해로 보는 것입니다. 정견은 나머지 일곱 가지 정도의 실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궁극인 지혜의 견해라 하겠습니다.

② 정사(正思) - 바른 생각

정사는 바른 생각, 사유, 즉,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입니다.

생각할 바와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을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우리가 미리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바르게 되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을 통해, 바른 행동, 바른 말, 그리고 바른 생활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정어(正語) - 바른 말

바른 구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을 행하지 않고, 진실되고 부드러워 화합하는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이란, 거짓말・잘못된 말인 망어(妄語), 아부・아첨하는 말인 기어(綺語), 이간질하는 말인 양설(兩舌), 욕설 등의 험악한 말인 악구(惡口)를 말합니다. 요컨대, 삼업(三業) 중 구업을 올바로 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④ 정업(正業) - 바른 행동

바른 신업(身業)을 말하는 것으로,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선한 행위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업에도 유루(有漏)와 무루(無漏)가 있습니다. 유루의 업은 번뇌가 있는 행위라는 뜻으로, 아상에 기초한 행동이며 탐, 진, 치 삼독심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므로 그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되는 업을 말합니다. 무루의 업은 아상이 모두 사라져, 번뇌가 소멸되고 탐진치 삼독심을 벗어난 행위이므로, 이것은 과보를 받지 않는 수승한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⑤ 정명(正命) - 바른 생활

정명은 몸으로는 청정한 행위를 하고, 입으로는 청정한 말을 하고, 뜻으로 청정한 생각을 하는 것으로, 십선업을 닦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정사유, 정어, 정업이 삶 속에서 드러나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바른 직업을 가지고, 올바른 생활을 통해 올바른 의, 식, 주를 영위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⑥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

정진은 ‘노력한다’는 의미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실천해 가는 힘입니다. 물론, 나쁜 방향으로 정진해서는 안 되며, 정진은 항상 선한 것을 바르고 둥글게 키워나가기를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⑦ 정념(正念) - 바른 관찰

올바른 통찰, 관찰이라는 의미로서, 신체의 움직임, 좋고 싫은 느낌, 마음의 온갖 분별,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놓치지 않고 잘 관(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근본불교의 핵심적 수행방법인 사념처(四念處) 수행이며, 요즈음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위빠사나 수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따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⑧ 정정(正定) - 바른 선정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것으로, 평상시 산란하고 복잡한 번뇌・망상・분별심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집중력을 말합니다.

마음을 순일하게 하여 삼매(三昧)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정신집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定)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禪)이므로, 이 둘을 합해 선정(禪定)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참선도 이 정정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삼학(三學)

이상에서 살펴본 팔정도는 불교 수행의 세 가지 핵심인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발전시키고 완성하는 것을 돕습니다. 따라서,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을 중도설에 입각하여 세분하여 구체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정어, 정업, 정명은 계(戒)를 의미하며, 이러한 계행을 통한 올바른 생활을 바탕으로 올바른 수행생활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定)으로,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바른 수행을 통하여 밝은 지혜를 증득할 수 있으니, 이것이 혜(慧)이며, 정견(正見)과 정사(正思)가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두륜산 대둔사 부도탑]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깨달음이란 어떤 것일까?'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궁금해 하는 문제일 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한 일종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듯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러해야 한다'
'내가 알 수 없는 그 엄청난 무엇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더해 가고 있는 듯 합니다.

깨달음과 자기 자신과의 사이를
너무 멀리 잡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깨달음은 그 어떤 특정한 근기의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 말입니 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수행자라고 자부하는 이들마저도
'이번 생에는 복이나 짓고 그러다보면 다음 생 언젠가 깨칠 날이 있겠지'
하고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법회 때 한번은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 다.
'성불(成佛)하는 것이 이번 생의 원(願)이신 분?' 하고 말입니다.
어느 정도 생각은 하였지만 이 정도로 안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입으로는 '성불하세요' '성불합시다' 하면서
실은 성불보다는 눈앞에 닥친 욕망의 충족에 더 큰 마음을 쓰고 살아갑니 다.

성불, 깨달음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딴 세상의 일일거라는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10년 씩 장좌불와하는 스님들이나,
수십 년 세속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구하는 이들도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가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너무도 큽니다.

그러나 법우님, 생활수행자 도반님들!
깨달음에 대한 환상에서 이제 벗어나야 합니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서 바로 '나'의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깨달음 그 자체는 환상도 아니요,
신비주의적인 그 어떤 오묘한 형상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상상하고 있는 그런 모습은 깨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깨달음을 그렇게 어렵게 바라보고 있 는
그 시선이 나를 깨달음과 멀어지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깨달음은 대단하고 엄청난 것일 것이며,
하늘이 열리고 온 우주가 개벽을 하고
천지가 내 안에 와락 들어와 안기게 될 것이라는
그런 환상적인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깨달은 이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들의 분별 망상일 뿐입니다.

깨달음이란
가장 단순한 일이며,
가장 평범하고,
가장 우리와 가까운 일일 터입니다.

그 어떤 엄청난 노력과 집중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깨달음 그 자체가 우리를 진리에서 너무도 멀어지게 만들게 되는 것입니 다.

본래면목자리, 참나 주인공이란
멀리서,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닌 바로 내 안에서 언제나처럼
은은한 시선과 미소로 우리의 내면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일 것입니다.
너무 가까이 있기에 오히려 찾을 수 없는,
눈이 다른 모든 사물을 볼 수 있지만
늘 함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신(눈)을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깨달음이란
보여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닐 터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 다.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일체 법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正見)'
바로 그것이 깨달음일 것입니다.

매우 평범하고 단순하면서도 가까운 것 말입 니다.
오히려 그렇게 단순한 것이기에
우리들의 깨달음에 대한 환상적 고정관념이
깨달음에서 우리 스스로를 점점 멀어지게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자신의 잣대로 재고 분별하여 바라보는 이가 중생이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가 깨달은 이일 터입니다.

깨달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터입니다.

자신을 돌이켜 봅시다.
'나는 과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눈을 가졌는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들의 시야는 그러지 못합니 다.
천지 법계는 있는 그대로 언제나처럼 그렇게 여여한 모습으로 놓여있건만
우리의 시선은 온통 고정관념과 업식(業識)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 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는 숯한 편견과 색안경을 낀 채 '자기잣대'로 삐뚫어지게 세상을 바라 봅니다.

어느 한 대상을 바라봄에도
자기잣대 만큼만 바라보고 자기만큼만 판단합니다.
내 식대로의 바라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을 바라봄에도
수백, 수천명이 바라보는 그 '한 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여여히 그대로의 모습으로 한 사람이건만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 수대로 수백, 수천이 되어 버립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글쓴이에 대해
읽고 계시는 분들은 어느 한 분이라도
똑같은 모습으로서의 글쓴이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읽고 계시는 분들 모두는 '자기의 잣대만큼의 글쓴이'를 인지할 뿐입니 다.

이 말은 곧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글쓴이는 오직 하나이건만
바라보는 이는 '있는 그대로의 글쓴이'를 천차만별의 잣대로 인지합니 다.

그처럼 우리의 눈은 정견(正見)의 바라봄이 되지 못합니다.
온통 자기가 쌓아 온 만큼의 업식따라 제 멋대로 바라봅니다.
온갖 분별심을 투영하여 대상을 바라봅니다.

'과연 나는 분별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가'
하고 수행자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반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사람을 보더라도 생김새며 출신, 학벌 등과 상관없이
처음보는 그 사람을 여여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가 하는 등의 것들 말입 니다.

깨달음의 시선은
무분별(無分別), 무소유(無所有), 무소득(無所得), 무집착(無執着)의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편견 없는 맑은 시야입니다.

분별하지 않음이며,
소유하지 않음이며,
얻고자 하지 않음이고,
그렇기에 집착하지 않는 맑은 마음입니다.

대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분별하지 않 으며,
'내것이다, 네것이다' 소유의 관념을 짓지 않고,
아집 때문에 내것으로 얻고자 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무분별의 맑은 시야입니다.

그저 일체의 모든 대상은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분별 지을 수도 없고,
소유 할 수도 없으며, 집착 할 것도 없는
애써 말한다면 '그저 그런 것' 일 뿐입니다.
숭산스님의 말씀처럼 '오직 모를 뿐'입니다.

어떻게도 이름 지을수 없고 분별할 수 없기 에
'이것이 무엇인가(이뭣고)' '나는 누구인가' 했을 때
앞뒤가 꽉 막혀 버리고, 말을 꺼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두'인 것입니다.
오직 '의문'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이렇듯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깨달음을 추구하는 우리 생활수행자 밝은 도반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 연습을 해 나가는 일입니다.
그 연습은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연습이며, 부처님 마음 연습이 됩니 다.

그러한 편견 없는 '바라보기'는 일체 대상 을 대함에 있어
'무분별' '무소유' '무소득' '무집착'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空)의 실천이며,
방하착(放下着)의 생활수행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과 편견어린 시선을 버리고
분별하지 말고, 소유하려 들지 말고, 얻으려 들지 말고, 집착하지 않 음,
그래서 일체를 다 놓고 가는 방하착의 생활실천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