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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달연 예쁠아 님이 제게 보시해 주신 작품입니다]

우리는 흔히 베풂과 나눔을 실천하면서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이렇게 베풀고 나눈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이를 다 구제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이 세상의 어느 한 귀퉁이
아주 작은 마을 고작 한두 개,
내지는 몇몇 사람에게 밥 몇 그릇 나누어 주거나,
교육을 뒷바침해 주거나,
아무리 도움을 준들 겨우 그 정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
실망하고 만다.

아무리 우리가, 내가 열심히 돕는다고 한들
그것은 너무나도 미약하여
이 세상을 밝히는데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 같아
좌절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내가 베푼 아주 작은 나눔의 행위가
그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아무리 작은 나눔과 베풂일지라도
이 전 우주법계를 감동시키고,
한 줄기 커다란 빛과 사랑으로써
우주법계에 기록되고 공명하여
더 많은 자비와 나눔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퍼져나갈 수도 있다.

그 어떤 작고 보잘것 없는 보시일지라도
그것은 우주법계를 변화시킨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고도 부드럽게
이 세상을 바꾸어 내는 무한한 권능을 담고서 말이다.

왜 그럴까?
내가 한 것은 고작
제3세계 어린 아이 한 명을 도운 것 뿐인데,
네팔이나 미얀마의 학교를 위해
고작 1만원을 베푼 것 뿐인데,
법보시 서적 고작 몇몇 권을 베풀었을 뿐인데,
그것이 어떻게 이 우주법계를
강력하게 자비의 빛으로 물들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물질의 차원이 아닌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질적 차원에서 내가 베푼 것은
고작 몇 만원이고,
한 두 명을 도운 것 뿐이고,
자원봉사를 며칠 한 것 뿐이지만,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어떨까?

우리는 한 사람을 도울 때
뿌듯한 행복감과
도와줄 수 있었다는 기쁨과
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느낌,
나의 작은 보시가 누군가를 배부르게 했다는 풍요의 느낌 등
아름답고도 풍요로운 행복한 느낌과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도울 때 중요한 것은
사실 물질적인 나눔에 있다기 보다는
도울 때의 그 행복한 느낌, 풍요로운 느낌,
상대방을 도울 수 있었다는 자신에 대한 대견하고도 뿌듯한 느낌,
누군가를 내가 돕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다는 귀한 감정
바로 그 느낌과 감정에 있다.

우주 법계가 원하는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풍요와 행복과 나눔의 정신이 깃든
그 마음인 것이다!

우주법계는 그 물질적 보시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보시한 마음,
베풂의 그 풍요의 정신,
나눌 수 있다는 그 넉넉한 마음을 받는 것이다.

우주법계는 그 풍요와 나눔과 보시의 마음을 받아들여
다시금 이 우주법계 곳곳으로 공명시키고
더 많이 나누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나간 보시의 마음, 나눔의 마음은
우주법계라는 무한한 정보장, 불성의 장을 거쳐
이 우주법계 끝까지, 세계 곳곳에까지,
저 아프리카의 굶주린 모든 어린 아이들의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인구의 정신 깊은 곳에까지
그 마음을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누군가가 보시를 행할 때,
사실 그 마음은
이 우주 전체에까지 퍼져나가
온 우주에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전 세계 모든 인구의, 유정 무정의 전체 생명에게
그 마음은 비국소적으로 전달이 되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의 정보장으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행한 보시의 순수하고도 귀한 마음은
온 우주의 모든 세포, 공간, 존재 전체에
정보로써 입력을 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법계는
우리의 보시 액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시할 때의 그 마음을 기억하여
그 마음의 정보를
온 우주 끝까지 비국지적인 정보장으로써
펼쳐 내는 몫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 한 사람의 보시는
우주적인 것이다.

당신 한 사람이
오늘 행한 아무리 작은 액수의 나눔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작을 수가 없다.
그것은 결코 잊혀질 수 없다.
그것은 곧장 이 우주 끝까지 전달되어
온 우주로 공명이 되고,
모든 생명에게 공명이 되어 공동의 자산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없이 고무적인 것은,
바로 그 보시의 마음들이 모이고 또 모이게 되었을 때
이 우주법계는 단순한 수치적인 것을 넘어서서
여러분이 보낸 보시의 마음과 느낌과 감정들을
그대로 우주 곳곳으로 반사해 낸다는 데 있다.

우주는 우리의 보시의 마음을 받아서
고스란히 이 우주로 그 마음을 반사하고 반영하여
더 많은 행복과 나눔과 보시의 정신이
이 우주 곳곳에 뿌리내려지도록 도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보시의 액수가 아니다.
우리가 보시할 때 느낄 수 있는 그 느낌, 감정,
고양된 기분, 풍요롭고도 뿌듯한 그 마음,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특히 가르침을 보시하고, 법문을 들려주고,
지혜의 말씀을 나눔으로써
상대방을 영적인 진보와
수행의 성숙으로 이끄는 토대를 베풀어 주었다면
그것은 사소한 물질적 베풂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영겁을 이끄는 정신적인 완성의 토대가 될 것이 아닌가.

사실이 이러할진데,
어찌 가진 것이 별로 없다고
보시하고 나누며 베풀지 않을 것인가.

별로 없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나누는 순간의,
베푸는 바로 그 순간의 고양된 느낌,
거기에 있는 것이다.

보시는 또 다른 보시를 불러오고,
보시는 또 다른 풍요로움을 불러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당장에
이 우주를 위해
내가 행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보시와 나눔과 사랑을 베풀라.

힘겨워하는 이웃에게,
친구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그것은 결코 그 친구와 나 사이의
개별적인 관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적인 하나의 사건이다.
내가 그 친구에게 행한 그 따뜻한 사랑의 마음은
우주 전체에 따뜻함과 사랑을 가져다주고
공명해주고 반사해 주는 역동적인 자비의 힘이 될 것이다.

나아가 내가 행하는 하루 삶의 모든 순간들이
조건 없는 사랑, 무주상의 보시가 될 수 있도록,
이 세상을 밝힌다는 고귀한 발원의 행위가 될 수 있도록,
단 하나의 행위와 말과 생각에서도
보시와 나눔을 실천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법상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풍요로우며, 긍정적이고, 감사할 일로 넘쳐나는,

무엇보다도 무한한 사랑이 꽃피어나는

생활 속에서 실천 가능한 명상법이 있어 화재다.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으로 연기법이라는 것이 있다.
연기법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연들이 화합함으로써
연하여 일어난다는 이 세상의 법칙을 말한다.

어떤 한 가지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장엄한 동참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른 봄에 피는 꽃 한 송이 조차
저홀로 피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가 참여하고 도운 것이다.

연기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 삶 위에 놓여 있는 일체 모든 존재며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하나도 예외없이 우주법계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얽히고설킨 인연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나무에 초록의 새순이 돋아나는 것조차
그 나무 혼자서 초록을 틔우는 것이 아니라
흙과 물과 바람과 햇살과
나아가 일체 모든 존재가 크고 작은 연관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렇게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먹는 쌀 한 톨 조차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유정 무정의 일체 모든 존재들이
도왔고 참여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물며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가?
내가 이렇게 먹고 자고 입고 살아가는 것,
그것 또한 내가 잘나서, 내가 돈 잘 벌어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또한 조금 깊이 연기적으로 사유해보면
일체 모든 사람들과 하늘 바람 구름 햇살을 비롯한
이 우주법계 전체가 어머님의 품처럼 나를 돌보며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가.
우리는 과연 그러한 법계의 도움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겠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그러한 우주법계의 크고 작은 도움들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해 오면서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주지 않는데 대해
탓하고 미워하며 원망만 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그 일체 모든 존재의 무량한 베풂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 살기 보다는
더 많이 주지 않음을 원망하며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법을 이해하는 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연기적인 우주의 도움을
매 순간 감사하며 고맙게 여기고 살아야 한다.
그러한 감사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우주의 은혜에, 법계의 도움에 보답하는 삶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에서 ‘감사’가 중요한 이유다.

이러한 연기적인 ‘감사’의 실천은
생각하고 따져봐서 감사할만한 이유가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조건적인 감사, 밑도 끝도 없이 대책 없는 감사를
온 우주에 펼쳐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이 우주의 드넓고도 깊은 차원의 전방위적인 도움을
도저히 다 헤아리고 알아차릴 수 없다.
어떻게 생각으로 그것을 다 보고 알 수 있겠는가.

그 우주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의 도움과 은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것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넓고 깊다.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영겁의 생과
전생에서의 업장과 인연들 전체를 아우르는,
시공을 초월하는 작용으로써 우리를 무한히 돕고 있으며,
우리를 살려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짚어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삶의 핵심 키워드가 있다.

 



이러한 무한히 살려주는 연기의 법칙이 우주 법계의 방식이라면
그 우주법계의 진리와 하나되는 길,
법계의 진리를 깨닫고, 우주의 힘을 끌어 쓸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바로
‘감사’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삶에 대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지금 나에게 갖추어진 상황과 조건에 대해,
완전히 받아들여 수용하고,
나아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방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우주의 크나큰 도움에 보답하고
작게나마 회향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더구나 우주법계에서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도와 줄 준비를 항상 마치고 있다.
언제든 우리가 그 도움을 요청하고,
그 은혜를 받아들일 준비만 되어 있다면
우주법계는 모든 것을 내어 준다.

그래서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돕는 일만 하며,
항상 우리를 돕고자 하는 자비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100%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우주법계의 도움을
마땅히 뿌리친다.
뿌리칠뿐더러 우주법계의 도움에 대해
여전히 부족하다고 아쉬워하고 원망하며
심지어 증오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그 우주법계의 도움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는가?
먼저 첫째는 나를 열어놓아야 한다.
우주법계의 도움이 아무런 걸림 없이 나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해야 한다.
마음을 닫아두면 들어 올 수가 없다.
마음을 활짝 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주법계의 자비롭고도 밝은 힘은
나에게 와 닿으며 나를 변화시키고
내 주위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여기 그 우주법계의 도움을
조금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법계를 감동시키고 움직여
나에게 더 많은 도움이 올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우주법계가 나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 사실에 대해 고마워한다는 뜻이다.
일체를 받아들이되 대 긍정으로 감사로써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대해
충분히 만족스러우며 충분히 감사하다는 뜻이다.
충분히 누리고 있으며, 충분히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이 우주법계로 인해
더 많은 감사와 더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오게 만드는 핵심적인 에너지이고,
마음 하나로 세상의 주인이 되는 방식이며,
이 우주법계와 하나 되는 진리의 방식이다.

만족과 감사는
그냥 단순한 도덕적인 덕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언어요, 참된 말 즉 진언(眞言)이다.

단순하다.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라.
만나는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느끼라.
그것이 어렵다면 그저 ‘감사’를 외치라.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라.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해
밑도 끝도 없는 무조건적인 감사를 외치라.

나 자신을 향해,
이 세상과 우주를 향해,
법신 부처님을 향해,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를 향해,
그리고 자동차와 집과 하늘과 구름과
읽고 있는 책과 신고 있는 신발과
버스 기사님, 청소부 아저씨,
심지어 미워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물건이나
원수처럼 증오하는 대상에게까지
무작정 대책 없는 ‘감사’를 외치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오랜 방식이며,
예수의 오랜 방식이기도 하고,
인류 모든 성인들의 방식이며,
호오포노포노를 비롯한 수많은 성인과 명상가와 영적인 교사들의
공통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은 절에 가거나 교회에 가면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진급하게 해 주세요’
‘좋은 성적 나오게 해 주세요’
하며 비는 기도를 하곤 한다.

그러나 비는 것은 진리의 방식이 아니다.
빌게 되면 사실은 거꾸로를 연습하게 된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은
돌아켜 보면 가난과 결핍을 연습하는 말이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비는 마음은 가만히 살펴보면
지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은 결국 내 안에 가난과 결핍과 부족을 연습하게 되고,
우주법계는 내가 마음에서 연습한 것을 고스란히 보내주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의 참된 의미는
‘감사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참된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다고 외치는 것이다.
부족과 결핍에 집중하는 마음에서
감사와 만족에 집중하는 마음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야말로 참된 기도다.

평소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상황을
당연하게 바라보지 말고 새롭게 감사한 상황으로 바꾸라.
모든 상황, 모든 사람, 모든 소유물, 모든 존재에게 감사하라.

내가 받고 있는 현재의 연봉과 월급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며 감사를 느끼라.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들에게 온전히 감사하라.
더 나은 조건의 직업, 더 나은 성적을 가져오는 자식,
더 나에게 잘 해주는 아내, 더 많은 돈을 벌어오는 남편을 바람으로써
결핍과 부족과 불만족에 에너지를 집중하지 말고
그 모든 상황이 내포하고 있는 긍정과 만족과 감사한 것들에 마음을 모으라.

우주는 항상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것을 100% 가져다 준다.
일체유심조, 우리의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
마음에서 그린 것은 분명히 현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우주의 창조원리다.

내 마음이 부족과 결핍에서 만족과 감사로 바뀌게 되면
내 마음의 그릇이 감사하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바뀌니까
우주법계는 내 마음의 요구를 100% 들어주게 된다.
전에는 부족과 결핍을 가져다 주다가 감사할 일들로 삶을 수놓게 된다.

진언을 외듯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루에 100번에서 1,000번 정도 반복해 외우라.
모든 상황에서 ‘감사합니다’라는 진언을
관세음보살 염불하듯, 아미타불 염불하듯 할 수 있는 모든 순간 외치라.
이 작은 외침이 우리 삶에 경이로운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순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모든 상황에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감사합니다’
심지어 나를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최악의 상황에 처하더라도 언제나 계산하거나 따지지 말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도저히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나
증오하고 미워하는 원수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우주법계는 항상 나를 돕기 위한 일만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법계의 본질적인 에너지는 언제나 넘치는 자비와 사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것이 괴로운 상황이고, 꼬이는 상황이며,
답답하고 힘겨운 상황일지라도
법계에서는 나의 업장을 소멸시켜주기 위해서,
혹은 나를 조금 더 성숙시켜 주기 위해서 그 일을 벌인 것이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모든 상황이, 모든 최악의 조건이
나를 위해 법계에서 준비한 최상의 자비로운 상황으로 바뀐다.

아무리 힘들고 괴롭고 답답한 상황일지라도
사실은 우주가 그것을 통해 나를 돕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인생의 오묘한 장치인 것임을 완전히 대긍정으로 받아들이라.
그러한 대긍정의 받아들임의 표현이 바로 ‘감사합니다’ 라는 외침이다.

‘감사합니다’라고 계산하고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적으로 외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우주의 근원적인 파장은 언제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나 얕은 의식에서는 감지하지 못할지라도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넘치는 사랑과 자비로 이끌어 주고 있다.
바로 그 사실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감사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또 하나의 배움이 있다.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사랑과 자비라는 바탕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모든 종교와 사상, 성자와 현자들의 가르침에서
사랑과 자비를 그 가르침의 근원적 원리로 이야기하지 않는 이들은 없다.
이 우주의 바탕, 깊은 차원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는
끊임없이 넘쳐흐르는 자비와 사랑의 에너지 파장에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와 이치와 합일을 이루려면,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자 한다면,
우주적인 삶의 방식과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 또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자비와 사랑이 넘쳐흐르는 삶,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깨닫게 하고, 신에 이르게 하며
근원적인 차원과 연결해 주는 유일한 삶의 목적이다.

불교에서도 수행을 통해 해탈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깨달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일체 중생을 자비로써 사랑으로써 구제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깨달음이 먼저가 아니라 중생구제라는 동체대비가 먼저 있다.

금강경에서도 ‘어떻게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다스려야 합니까?’ 하는 질문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구류중생들을 열반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마음을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일체 중생을 참된 행복과 평화인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수행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이유인 것이다.

결국 부처는 자비 그 자체이고, 신은 사랑 그 자체이다.
이 우주에는 오직 자비와 사랑 밖에 없는 것이다.
부처가 되고 싶다면, 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밖에 없다.
사랑을 연습하고, 자비심을 연습하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진리이다.

오랜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도
이러한 자비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자비심을 연습하는 수행법으로 자비관(慈悲觀)을 말하고 있다.

“수행자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쳐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어떤 생물일지라도, 강하거나 약하거나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나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남을 속여도 안 되고, 경멸해서도 안되며,
화를 내어 남에게 고통을 주어서도 안 된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지키듯이,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온 세계에 대해서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져라.”

이것이 바로 자비와 사랑을 연습하는 오랜 방법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해 행복하라 안락하라 평안하라 하고 외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모든 존재를 향해 자비심을 연습하는 것이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자비를 연습하는 것이다.
온 세계를 향해 무한한 자비를 행하며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이 오랜 자비관을 삶 속에서 연습하고 실천하는
아주 쉬운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라.
어머니가 외아들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온 우주를 향해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사랑을 외치라.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한 이 사랑의 외침을 실천하라.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는 것 처럼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면 된다.
모든 상황에, 모든 사람에게, 눈 뜨고 있는 모든 순간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쳐보라.

이 두 가지 단어야말로
이 우주의 진리를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당기는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참된 말, 진언(眞言)이다.

이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진리의 언어를
매일 매일 매 순간순간 염불하듯 독송해 나간다면
우리의 삶은 경이로운 변화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감사할 일들이 넘쳐나고,
세상은 사랑으로 물들 것이다.

우주의 법칙에서 중요한 것은
보내는 것대로 받는다는 점에 있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을 고스란히 받는 업보의 원리다.

돈을 베풀면 돈을 얻게 되고,
병든 사람을 간호하면 건강을 얻게 되며,
나이든 분들을 공경하면 장수를 얻게 된다.
인색함을 내보내면 들어오는 것도 인색해지고
성냄과 다툼을 내보내면 싸울 일들이 줄을 선다.

마찬가지로
감사를 내보내면 감사할 일들이 넘쳐나고,
사랑을 내보내면 사랑할 일들이 많아진다.
감사와 사랑이 한없이 나를 향해 파도쳐 들어오는 삶을 상상해 보라.
그런 삶이 바로 정토고 극락이며 천상세계가 아니겠는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의 에너지 파장을 담고 있는
핵심적인 언어인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조금 더 수행과 연결지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아름다운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호흡관’이다.
숨이 들어올 때 ‘감사합니다’ 하고 외치고,
숨이 나갈 때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이름하여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다.

호흡관이란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을 호흡에 모아 집중하고 관찰하는 오랜 수행방법이다.
호흡을 관찰하는 이 수행법은
불교에서뿐 아니라 모든 명상법에서도
필수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수행법으로 잘 알려져 왔다.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알아차림으로써
온갖 망상과 번뇌를 비우고, 탐진치 삼독을 비우고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재에 깨어있는 수행법이다.

호흡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의 일이며 과거나 미래의 일이 아니다.
호흡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과거나 미래로 끊임없이 끄달리는 마음을 다스려
지금 이 순간이라는 본질로 통하는 통로와 연결될 수 있다.

호흡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우리 삶과 연결되어 있다.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나 호흡과 함께 한다.
그렇듯 자연스럽게 삶과 연결되어 있는 호흡에
우리의 의식의 빛을 쏘아 줌으로써 의식적으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바로 이 수천년을 이어 온 수행의 전통인 호흡관에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연결시키는 수행법,
그것이 바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라고 짧게 말하고,
숨을 내쉬면서 ‘사랑’하고 짧게 말해도 좋다.

호흡이 들어올 때 ‘감사합니다’, 호흡이 나갈 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지금 이 순간의 호흡에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호흡에 집중할 때 우리는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한다.
과거나 미래로 혹은 생각이나 망상에 끄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과 함께 연결된 호흡에 깨어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텅 빈 명상의 장에 머물면서
우주와 연결된 그 현재의 순간을 통해
감사와 사랑의 파장을 우주로 보내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평소에 우리는 우주와의 연결고리를 잃고 헤맨다.
평소에 끊어져 있던 바로 그 우주와의 소통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때가 바로 ‘지금 여기’라는 때이고,
그 현재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는 우주 전체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영민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 삶에서 ‘지금 여기’를 반영해 주는 가장 투명한 것이 바로 호흡인 것이다.
우리는 호흡관찰을 통해 지금 여기라는 우주와의 연결고리와
조화로운 소통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텅 빈 마음으로 지금 여기의 호흡에 머물면서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우주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나에게 돌아오겠는가?
그것은 바로 우주법계의, 진리세계에서 보내주는
무한한 감사와 사랑의 창조 에너지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주법계와 하나되는 차원에 연결되는 것이다.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통해
우리는 ‘지금 여기’라는 명상의 장과 연결되고,
또한 감사와 사랑이라는 우주적인 아름다운 파장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근본법과 방편법을 아우르는 수행법이다.

본질적인 진리에 다다르는 수행법이자,
삶을 풍요로운 감사와 사랑의 에너지로 가득 차게 만드는
현상계와 본체계를 아우르는 수행법인 것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라.
숨이 들어오면서 이 단순한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무한한 감사로써 들어온다고 느끼는 것이다.
숨을 내뱉을 때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라.
숨이 들어왔다가 내 몸을 스치고 내 밖으로 나가면서
모든 존재를 향한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다.

단순한 공기, 호흡 한 자락 조차
나에게 들어올 때는 감사함으로 들어오고
나를 스쳐 나갈 때는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 호흡관을 통해 호흡만
감사함으로 들어오고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모든 것이 감사로 들어오고 사랑으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물질이든, 음식이든, 호흡이든, 말 한마디든, 행동이든, 생각이든,
그것들이 나에게 들어올 때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내 존재와 함께 파도치고 흘러 나갈 때는 무한한 ‘사랑’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도, 밥 한 공기 물 한 모금을 먹을 때도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 받아들여 먹고
음식을 통해 힘과 에너지를 쌓은 뒤
그 힘으로 세상에 사랑과 자비의 일을 행함으로써 내보내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한 마디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을 받아들일 때는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말이 나갈 때는 ‘사랑’스러운 말, 애어(愛語)로써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감사의 숨을 들이쉬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에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사랑의 숨을 내뒤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에서 나가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 흘러나가게 하는 상징을 담고 있다.

다시말해 내 삶에 등장하는, 내 삶에 나타나는 모든 상황, 조건, 사람 등
일체 모든 것들을 감사로써 받아들이고,
내가 이 세상에 내보내는 모든 행동, 말, 생각, 파장 등
일체 모든 것은 사랑을 내뿜고 자비를 방사하는 의미로 확장되는 것이다.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로 받아들이고,
나에게서 나가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 나갑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10번만 해도 에너지가 바뀌는데,
하루에 10번씩 10번을 반복해 100번 이상을 실천한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롭게 에너지가 바뀌게 된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 수행법이 아주 단순한 것 같은데,
우리의 내면세계는 아주 민감하기 때문에
이 사소하고 단순한 것 같은 수행법에
우리의 생각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힘이 붙게 되는 것이다.

말은 그 자체로써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냥 헛소리처럼 지껄이는 말이라도 일정한 양의 파장이 형성된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도
찌그러진 물의 결정에 ‘감사’와 ‘사랑’이라는 말을 외쳤을 때
순식간에 물의 결정이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야말로 가장 아름답게 바뀌는 언어가 바로 ‘감사’와 ‘사랑’이라는 단어라고 한다.

우리 몸이 70% 이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으니
우리가 한 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하고 외칠 때
그 몸의 모든 결정이 한꺼번에 아름답게 바뀔 것이고,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싱그럽고 이상적인 세포로 바뀌게 될 것이다.

하루에 100번만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실천해도
우리의 인생이 아름답게 바뀐다.
조금 민감하게 깨어서 지켜보는 사람은 직접적으로 느낄 것이다.
이 작은 실천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모든 상황에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연결해 보라.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순간 즉각 호흡을 관찰하며
들숨에 감사, 날숨에 사랑을 붙여보라.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면서 옷을 입으면서도
감사와 사랑의 부드러운 호흡으로 깨어나라.
운전 중이나, 지하철 안에서도,
일하다가 잠시 짬나는 시간 동안에도,
언제나 의식적으로 호흡을 관찰하며 감사와 사랑을 연습하라.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신호등에서 대기하는 시간,
커피를 뽑아 마시는 시간,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두근거리는 순간,
앞 차가 끼어들기를 하는 순간, 누군가에게 욕을 얻어먹는 순간 등
이 수행을 통해 하루 중에 만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수행의 순간, 명상의 순간, 삶에서 깨어나는 순간으로 바꿀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수행이란 그리 거창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몇 시간을 고통을 참아가며 좌선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3,000배나 1만배를 통해서 선정을 얻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작은 감사와 사랑의 호흡을 통해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삶 속에서 명상과 수행을 실천할 수 있다.

그리고 수행이란 사실 그런 것이다.
이처럼 삶 속에서 삶과 하나되는 것이다.
삶과 동떨어진 수행은 참된 수행이 아니다.
좌선하고 앉아 있을 때만 고요하고
일어나 다시 삶 속으로 들어갈 때 흩어진다면
그것을 어찌 참선이라고, 명상이라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

하루 중 만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 감사하라, 사랑하라.
원수같은 사람에게 도저히 감사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겠다면
내 안에 무언가 좋지 않은 업이 그 원수를 만나게 한 것이므로
내 안에 있는 바로 그 업에다 대고 감사와 사랑을 외치라.

괴롭고 답답하고 힘겨운 그 상황을 만들어 낸
내 안의 꽉 막힌 어떤 에너지를 향해
무한한 감사와 사랑의 부드러운 호흡을 보내주라.
그랬을 때 막힌 기운은 뚫리고, 거친 업은 눈 녹듯 활짝 녹아내리게 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병을 미워하고 바이러스를 죽여 없애려는 마음을 내지 말고,
그 대신 그 병과 바이러스를 향해
감사와 사랑의 따뜻한 호흡을 보내주라.

불교적인 방식은 암세포도 사랑하는 방식이고 자비로 감싸주는 방식이며
암세포 조차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내 업이 암세포라는 방식으로 밖으로 나와 줌으로써
업이 풀리고 소멸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구나 하고
고맙다고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방식이다.

암세포 또한 동체대비로써 나와 싸울 적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품어 주어야 할 세포인 것이다.
감사와 사랑의 힘을 호흡관을 통해 매 순간순간 암세포에게 보내줄 때
그 수행은 우주법계를 감동시키고 작동시킴으로써
작게는 내 안의 모든 세포들이 치유의 작업을 시작하도록 하고
넓게는 암을 치유할 수 있는 의사나 치유자를 보내주는 작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처럼 명상적이고 수행자적인 방식은
세상 모든 것을 사랑으로 안아주는 방법이다.
심지어 암세포 일지라도 사랑으로 품어주고 안아줌으로써
우리 안에는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좋지 않은 상황, 경계, 대상은
미워하고 싸워서 이겼을 때는 잠시 꺽일 뿐이지만,
감사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녹여냈을 때는
완전히 그 근원까지 녹아내려 치유가 된다.

이처럼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은
온 우주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나의 본연의 힘을 이끌어 내어
온 우주가 함께 나를 도와주는 작용을 시작하게 해 준다.
내 안의 모든 세포가 나를 위한 사랑의 도움을 시작할 뿐 아니라,
주변의 분위기, 일의 흐름 등을 바꿈으로써
우주 전체가 나를 돕는 일에 전체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그러나 지극히 단순한 명상을 삶 속에서 실천하라.
당장 실천하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매일 절이나 교회에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부좌를 틀고 몇 시간을 앉아야 하는 것도 아니며,
몇 시간씩 방석위에서 절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무슨 준비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부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며,
시간과 장소에 그 어떤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내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수행법이다.

잠시 모든 것을 멈춰보라.
지금 당장 시작하라.

들어오는 숨을 지켜보며
‘감사합니다’
나가는 숨을 지켜보며
‘사랑합니다’

들숨에 감사
날숨에 사랑





Posted by 법상


종교의 근본적인 목적

우리가 절에 나와서 불교를 공부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불교의 근원적인 목적이 무엇일까, 혹은 불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갖고 있는 종교의 근원적인 이유, 본질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바로 그 부분을 오늘은 좀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불교의 근원적인 목적이 무엇이냐’ 라고 한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교는 해탈과 열반을 향해 가는 종교다, 그리고 ‘나의 해탈과 열반뿐 아니라 일체중생을 해탈과 열반으로 이끄는 종교다.’라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금강경의 물음을 다시한번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수보리가 수행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부처님께 여쭙습니다. 이 질문과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금강경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는지’의 답변에 대해 우리 생각에는 부처님께서 수행법을 알려주면서 ‘이렇게 수행해라.’라고 답을 할 것으로 일반적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의외로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십니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들, 구류 중생이라고 하는 일체 모든 중생들을 열반으로 인도하여 완전히 멸도에 들게 하리라’ 라는 마음으로 살라고 답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수행을 해야 되느냐?’ 라고 하는 이 질문에 ‘일체 중생을 완전한 행복인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라고 하는 동체대비의 마음, 자비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내야 한다 라고 답을 하고 계신다는 말이죠.

여기에 아주 중요한 불교의 목적이자, 우리들 모든 존재의 삶의 목적이 드러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불교의 목적은 깨달아 부처가 되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쉽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깨달음을 얻어서 무엇에 쓰려고 하겠어요. 깨달음을 얻어서 그것으로써 내가 돈 좀 벌어볼까, 명예를 높여 볼까, 내가 좀 큰 스님으로 대접받아 볼까, 유명세를 타 볼까, 깨달은 자로서의 어떤 대접을 받아볼까 라는 생각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나 홀로 깨달음을 얻어서 나 혼자 행복하게 살겠다거나 하는 그런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유, 인류의 수많은 수행자, 스님들께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했던 이유는, 그 이유는 바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일체 중생들을 구제하기가 쉬워진다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 중생들을, 많은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끌고 평화로움으로 이끌고 자비로 이끄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잘못 거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불교는 그냥 깨달음을 얻으면 끝나는 종교구나, 깨달음만 얻으면 되는구나, 이렇게 된다면 설사 지혜가 조금 증장된다 할지라도 자비를 소홀히 여기기 쉽게 됩니다. 물론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닙니다. 나중에는 결국 하나로 만나는데, 너무 깨달음과 수행에 집착하고 매진해 있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비와 사랑을 조금 소홀히 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는 말이죠.


얼마만큼 공부가 되었는가를 보는 잣대

그런데 어찌되었든 간에 불교에서의 근본적인 목적, 우리가 절에 다니는 근본적인 목적은, 내가 어떻게 잘 먹고 잘 살겠다, 불교를 통해서 내 마음 좀 편안해 보겠다, 어떻게든 내 삶이 좀 아름다워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이런 목적으로만 절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목적은 불교를 공부함으로써 나의 행복도 행복이지만 나아가서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에 내가 도움을 주기 위해서,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을 자비와 사랑으로 이끌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가 불교 공부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곧 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인 것입니다. 바로 이 자각,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지혜이고, 이러한 동체대비의 지혜가 생겨나면 저절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가 곧 자비이고, 깨달음이 곧 사랑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모든 목적이 자비와 사랑에 있다면, 사실 내가 수행을 해 나가면서, 마음공부를 해 나아가면서 또 절에 다니면서, 내가 어느 정도 마음공부가 되었느냐, 내가 어느 정도 영적으로 성숙되었느냐, 나의 삶에 어떤 진보가 있었느냐, 내가 조금 더 깨달음에 가까워 졌느냐, 이것을 살펴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얼마만큼 자비로워지고 있느냐를 살펴보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절에 다니기 전보다 절에 다니면서 조금 더 자비로워 졌느냐, 무자비하고 악의에 찬 화와 증오에 물든 행동을 얼마만큼 더 줄여 나아가고 있느냐, 내가 많은 사람들을 볼 때 얼마만큼 더 사랑이 깊어지고 있느냐, 내 마음이 사랑과 자비로 넘쳐나고 있는지, 이것을 살펴보면, 내가 얼마만큼 수행이 되어가고 있고, 얼마만큼 삶을 바른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을 판가름해 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잣대가 된다는 겁니다.



행위 자체보다 그 이면의 의도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이 직업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어떤 의도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해 집니다. 똑같이 공무원일지라도, 똑같이 사회봉사단체에서 사회봉사를 하고 있을 지라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 지라도, 또 똑같이 절에 와서 절을 하고 있을지라도, 어떤 의도로 하느냐, 이것이 내 개인적인 기복을 위한 것이거나 내 개인적인 성공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보다 많은 이들의 행복과 평화로움을 위해서 하는 것이냐 하는 그 의도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행위 자체를 중요시 여기기보다는, 행위 이면에 있는 의도를 중요시 여깁니다. 어떤 마음의 의도로써 그 행동을 했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봤을 때는 아주 무자비하게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그것을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들이 했을 때는 그것을 우리가 무자비하다 라고 생각지 않거든요.

저의 은사 스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아주 엄하시단 말 이예요. 너무 엄하셔서 아주 소문이 자자하게 날 정도입니다. 그냥 뺨을 때리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때로는 거친 욕설도 하시고, 저 때만 하더라도 때때로 맞았는데, 저의 윗대 사형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지금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하고 훌륭한 스님들, 그 스님들 또한 은사 스님 밑에서 공부할 때는, 거의 하루도 안 맞은 적이 없다고 그래요. 옛날에 군 생활 하다 보면, 하루라도 안 맞으면 잘 때 오히려 불안하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그야말로 그것처럼 하루라도 은사 스님께 안 맞은 날이 없다는 거예요. 그 정도로 그랬다는데 지금에 와서 그 사형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요, 은사 스님이 그렇게 무서웠었고, 매서웠던 것에 대해서 증오를 품고 있다거나, 아주 미운 마음을 품고 있다거나,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라고 원망한다거나 이런 것이 없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 의도를 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화를 내고, 때로는 매를 들고 하시는 그 의도, 그 이면에 있는 의도가 우리를 이끌어 주기 위해서, 진리로 깨우침으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 마음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그 행위를 하느냐 하는 그 이면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똑같이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똑같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할 것이냐, 그 이면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할 것이냐 하는 이것을 분명하게 명확하게 기준을 세워 둘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라는 바탕의 의도에 따라 회사 전체를 돕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직장 생활에서 똑같이 월급 받고 똑같이 일하는 것일지라도 거기에 무한한 공덕이 붙고 무한한 복이 쌓인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똑같이 월급 받고 똑같이 일했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 복이 안 붙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마음으로 죄를 지으면서 그 일을 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겉에 드러난 일을 똑같이 하더라도 전혀 차원이 달라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일을 통해 사랑을 나누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 일을 통해 이면에서는 고통과 화와 짜증을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은 자를 볼 때 그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알 수가 없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깨달음을 얻은 자는, 너무나도 평범해 집니다. 우리와 다를 것이 없어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평상심으로 사는 겁니다. 지극한 평상심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길거리에서 휙휙 날라 다니거나,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신통 자재함을 부리거나, 여러분들 눈을 가만히 쳐다보고는 ‘내년을 조심하십시오. 사업에 투자하지 마세요!’ 라고 하거나 뭐 아는 소리 한다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너무나도 똑같고 평범해 지지만, 그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이 스며 있는 겁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평범함 가운데의 그 비범함을 모르죠. 똑같이 밥 먹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청소하고 똑같이 사니까 말 이예요. 그러나 이 이면에 담긴 의도는 우리와는 천차만별로 차이가 납니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대비심,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이면의 의도가 어떠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동일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행위 속에 이 우주를 먹여 살릴 만한 큰 대자비의 마음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또 똑같은 행위 속에 겉으로 봤을 때는 자비의 행을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복을 까먹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랑과 자비라는 게 중요한데, 우리가 보통 깨달음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자비심 그것 자체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달음을 얻었다 라고 할 때는 그것 자체가 완전한 동체대비심, 완전한 자비심, 일체 모든 중생을 향한 완전한 자비심 이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참된 자비란 무엇인가

그러면 자비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라고 하는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사랑, 자비심, 이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라는 것은 어떤 한계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한정된 것이 아니고, 선택적인 것이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이런 사람들은 사랑하고, 저런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눠놓고 그 중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선택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것은 온전한 동체대비의 사랑이 아닙니다. 동체대비라는 말 자체가, 동체(同體), 같은 몸이라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여러분과 내가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동체, 바로 내 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이 진정한 사랑, 진정한 자비라는 것은 온 우주를 하나 거르지 않고 모조리 사랑하는 것이지, 어떤 것은 사랑하고 어떤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적인 사랑이 아니다,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분별이 없고 차별이 없는, 해석이 없고 심판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 내가 어떤 여인을 사랑했고, 어떤 멋있는 남자를 사랑했다 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영적인 사랑이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 보통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아주 좀 뭐랄까요.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 나라는 상에 갇힌 사랑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사랑하는 이면에는 사실 증오와 믿음도 동시에 지니고 있어요. 깊이 사랑하면 깊이 사랑할수록 사실은 더 깊은 곳에서는 깊은 증오도 함께 품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난다고 얘길 했을 때, 조금 사랑했던 사람보다, 내가 정말 믿었고 정말 사랑했다. 라고 생각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면 더 큰 충격을 받고, 더 복수를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 그냥 떠나가더라도 별 느낌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 이면에 사실은 증오도 함께 포함하고 있는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온전히 사랑할 뿐이라면, 내가 이만큼 사랑했으니까 이만큼 사랑 받겠지 라는 계산이 깔리지 않은 온전히 베푸는 사랑을 한다면 그냥 줬을 뿐이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되돌려주지 않더라도 그것이 억울하거나, 원망스럽지 않게 될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가를 살펴보려면, 여기에 분별심에 의한 사랑이냐, 차별심에 의한 사랑이냐, 아니면 무분별에 의한 무차별에 의한 사랑이냐를 알아야 된다는 말이죠. 차별이 생기면 이게 좋고 나쁜 게 생긴단 말이에요. 좋고 나쁜 게 생기면 좋은 것은 내 편이 되고, 나쁜 것은 적이 된다 말이죠. 적과 아군이 생겨요. 그래서 내 편 네 편으로 나눠놓는 마음이 생기고, 내 것 네 것으로 나눠놓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옳다 그르다 라는 마음이 생겨요.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적과 아군이 생기면 어떻게 되겠어요? 서로 싸우게 됩니다. 다투게 돼요. 내가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고,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다 라는 생각이 있을 때 옳은 것과 틀린 것이 서로 싸우게 됩니다. 전쟁을 하게 되요.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온전한 사랑은 그 어떤 다툼도 없다는 거죠.



심판하지 않고 무한히 사랑하는 신

우리는 보통 ‘신은 우리를 심판하신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일을 했는지 그른 일을 했는지를 신께서 심판하신다. 그래서 저 위에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을 우리는 신으로 알고 섬기고 있다는 말이죠. 좋은 심판 받기를 바라면서, 또 나쁜 심판을 받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신은 심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뭐에요?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나누는 것이거든요. 이것은 죄다 이것은 선이다 하고 나누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그러니까 신은, 신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인 것이고 완전히 절대적인 것이지 나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사랑하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미워하고 이러는 분이 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신에 대해서 잘못 알아왔습니다. 우리가 심판을 하는 신으로 알다 보니까 어때요? 신 앞에 서면 떨게 됩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요.

그러나 사실 신은 무한한 사랑이고, 완전한 자비이며, 무분별 그리고 무차별로써 일체 모든 존재를 어머니가 자식을 품어 안듯 그렇게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못했다고 미워하고, 잘 한 자식만 선택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듯이, 신도 그 이상입니다.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좋아하고, 어떤 나라 사람들은 좋아하고 어떤 나라 사람들은 싫어하고, 죄를 지은 사람은 벌주고 착한 일 한 사람은 선물을 주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 모든 존재를 완전히 품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분이십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신 앞에 서서 두려움에 떨지 않고, 포근함을 느낄 수 있지 않겠어요? 바로 그게 신의 진실 된 모습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하는 신에 대한 용어는요, 어떤 특정 종교의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도 같은 용어입니다. 온 우주의 근원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의 사랑이라는 것은, 심판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차별이 있게 되면 너와 내가 생기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사실 어떤 종교에서든지 신의 사랑이 유대인들만 사랑하는 것이고 유대인들만이 신의 자식이라고 한정짓는 선민사상, 이것을 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신을 모독하는 겁니다. 어떻게 신의 사랑이 어느 한 종족에게만 한정될 수 있겠어요. 또 신의 사랑이 어떤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 그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신의 사랑이 있다, 이것처럼 신을 무시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절에 다니니까 저의 어릴 적 아주 절친했던 친구는, “이렇게 착하게 살아도 소용없다. 우리 신을 믿지 않으면 그렇게 착하게 살아도 지옥 갈 텐데, 네가 너무 안쓰러워서 내가 봐줄 수가 없다. 제발 좀 개종해라” 이렇게 하는 분이 있었단 말이죠. 그것은 진정한 신이 아니지요. 아니 신을 그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분으로 만들면 되겠습니까. 어떻게 신이라는 분이 네 종교, 내 종교 나눠서 이 종교에 있는 사람만 올바르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사랑 안 한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참된 하느님께서는 불자들도 사랑하고, 참된 부처님께서는 기독교, 천주교 신자들도 똑같이 자비로써 대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많은 목사님 신부님 또 성직자 분들을 만나 뵈면, 지금 말했던 이러한 신을 섬기지, 어떤 한계 지어진 조건 지어진 신을 섬기지 않더란 말입니다. 신은 그 어떤 모든, 일체 모든 존재에 대해서 조건을 내세우지 않고, “네가 이 종교 믿으면 사랑할거야” 이런 것이 아니란 말이죠. 모든 존재를 완전하게 사랑하신다, 거기에는 전혀 차별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고, 진정한 자비라는 거죠. 그래서 진정한 자비라는 것은 전혀 분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 그랬어요.


사랑 없음을 탓하지 말라. 다만 차별하지만 말라

그 말은 다시 말해서 뭐냐 면요,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 하는 실천적 지침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그런 것이 있을 겁니다. 불교에서는 자비를 얘기하는데, 또 교회나 성당을 가도 사랑을 얘기하는데, ‘나는 너무도 자비심이 부족한 것 같아. 나는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 이런 죄책감, 죄의식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거든요. 우리 스님들, 성직자나 수행자들은 그것이 좀 더 심할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처음에 출가하고 나서 내가 진정한 수행자라면 끓어오르는 자비심을 주체할 수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만은 않단 말이죠. 그래서 ‘아 내가 이렇게 못난 사람인가, 한없는 자비심이 왜 없는 것이지?’ 하고 실망감과 죄의식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었단 말이죠. 그런데 ‘나는 왜 이리 사랑이 없지, 난 왜 이렇게 자비롭지 못하지’ 하고 자기 자신을 탓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랑이 없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면,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끊임없는 판단이 일어나는 것, 이것을 걱정해야 된다는 말이죠. 판단과 분별과 시비와 이런 것이 일어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즉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될 것이다 라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만 볼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완벽한 사랑 그 자체입니다.

“아니, 스님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차별하지 않는 게 어찌 사랑입니까? 정말 아껴주는 게 사랑이죠”라고 말씀들 하시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차별하지 않고 바라봐 주는 것. 이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바라볼 때, 사랑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보살의 사랑과는 조금 다른 사랑입니다. 자식을 바라볼 때 사랑하는 눈빛으로는 바라보거든요. 그런데 그 눈빛은 ‘내 자식’이라고 하는 아상이 개입된 사랑입니다. 완전한 무차별심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내 자식은 한없이 사랑하거든요. 그 때는 완전한 사랑 같아요. 그런데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싸움이 붙었어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무조건 내 자식 편을 들거든요. 내 자식이 조금 잘못한 것 같아도, 내 자식의 편을 든다는 말이죠. 그건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나누는 차별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다만 ‘내 것’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이고, 아상, 에고가 개입된 사랑인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라면 상대방과 나를 함께 사랑합니다. 남의 자식과 내 자식들 둘로 나누지 않고 그 모두를 사랑하는 거예요. 네 것과 내 것, 네 편과 내편, 내 가족과 다른 가족, 이렇게 둘로 나누는 차별심이 있는 마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한국축구가 중국에게 지면 기쁜 일?

우리가 예를 들어, 축구 경기를 본단 말이죠. 우리나라와 중국이 축구 경기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애국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기기를 간절히 바래요. 우리나라가 이기면 한 없이 기쁘고 신이 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이긴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할 것도 없고 진다고 괴로워할 것도 없죠. 우리가 이겼을 때는 한국 사람들이 기쁜 거죠. 4천만이 기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졌을 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나와 너의 틀, 내 나라 너의 나라 이런 분별이 없이 완전히 툭 터진 마음으로 본다면 우리가 중국에 지면 어떻습니까? 지면 13억 인구가 기쁜 겁니다. 4천만 인구가 조금 기분이 나쁠지언정, 저 13억 인구가 기쁜 거예요. 그것은 지구 전체의 에너지를 놓고 본다면 훨씬 플러스(+) 에너지가 많아지는 겁니다. 4천만 인구가 기뻐하고 13억 인구가 괴로워하느니, 13억 인구가 기뻐하고 4천만이 조금 서운해 한들 우주 전체로 놓고 본다면 그게 더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과연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요? 우리 생각은 늘 ‘나’의 관념에 빠져 있고, ‘내 나라’의 관점에 빠져 있다 보니 우리는 이런 생각을 못 합니다. 그 모든 분리, 분별을 넘어서는 더 큰 생각을 못 한단 말 이예요. 이 말은 그렇다고 애국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응원을 하되 이기면 우리가 이겨서 좋고, 지면 중국이 이겨서 그것도 또 좋아해 줄 수 있는 드넓은 가슴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동체대비의 관점에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관점에서는 이처럼 툭 터진 너른 가슴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동체적인 관점에서는 생각을 못 하지요. 내 나라 내 가족 내 자식만을 아끼고 사랑해요. 애국이라는 것 또한 내 나라라는 틀이 있는 겁니다. 내 나라 너의 나라라는 틀이 있는 거예요. 내 종교 네 종교, 인간과 자연, 이런 일체의 모든 틀로부터 벗어나서 분별과 차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분별없이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은 내 것과 네 것을 나누지 않습니다. 즉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싸움이 붙었어요. 그 때 맹목적으로 내 자식의 편을 드는 게 사랑이 아니고, 자식을 위해서도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내 자식이 조금 잘못이 있으면 잘못이 있다고 분명히 알려 주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인거죠. 맹목적으로 편드는 게 사랑이 아니고요.

예를 들어 우리가 자식에게 화가 나잖아요. 자식이 막 속을 썩입니다. 그럼 자식에게 욱 하고 버럭 화를 낸단 말이죠.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죠. 사랑의 행동이 아니죠. 그런데 진정한 사랑의 행동은 무엇이냐 하면, 그 상황, 내가 지금 화가 올라오는 상황, 자식이 화를 돋우는 상황,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겁니다. 분별하지 않고 고스란히 지켜보는 거예요. 지켜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요? 지켜보게 되면 욱 하고 화를 내지르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그 화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화에 휘둘리지 않으면 자식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대신, 그 화를 지켜보게 되고 저절로 지혜로운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됩니다. 화를 내지르지 않게 되요. 있는 그대로 분별없이 지켜보게 된다면 화를 다스리게 되는데 그 화에 휩쓸리면 욱 하고 화를 낸단 말이죠. 한 템포 늦추고, 잠시 멈춰서,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화를 가만히 지켜보게 되면 우리 내면의 더 큰 나, 참나의 자리, 근원의 자리에서 그 화를 저절로 사라지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 화나는 상황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지를 알아서 이끌어 주게 됩니다. 한 번 해 보세요. 직접 해 보지 않고는 이 말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스갯소리인데요, 얼마 전에 은행에 갔을 때, 어떤 아주머님이 어린 딸 하고 같이 은행에 왔다가 업무를 보는데 딸이 하도 옆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시끄럽게 하니까 “야 조용히 좀 해, 조용히 해!” 하고 화를 내면서 꼼짝 못 하게 옆에 잡아두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은행 창구에 서서 업무를 보는데, 딸이 옆에 서 있다가 뭐 재미있는 게 없나 찾더니 이내 엄마 뒤에 가서 있는 힘껏 똥침을 놓았어요. 이건 실제 제가 본겁니다. 제가 뒤에 앉아 있었는데, 엄마를 찌르는데 이게 너무 제대로 들어갔나 봐요. 아, 이 어머님께서 그 순간 너무 화가 났는지, 고개를 확 돌리더니 갑자기 딸을 보자마자 한 대 퍽 때리면서 화를 버럭 내는 겁니다. 딸이 그 전까지만 해도 막 즐겁게 떠들고 놀고 그러다가 장난 좀 친 걸 가지고 그 사람들 많은데서 크게 한 대 얻어맞았단 말이에요. 그 뒤에 딸은 갑자기 기가 확 죽어가지고, 풀이 죽어 앉아있단 말이죠.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냐, 그런 방식으로 욱 하고 내지르는 것이 그게 사랑이 아니지요. 진정한 사랑은, 전체적인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겁니다. 즉 내가 올라오는 화, 그것을 잠시만 지켜보고 있었어도 그런 식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요. 모든 상황에서, 이 상황에 어떻게 내가 대응해야 하는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사랑으로써 대응하는 것이냐 이게 기준입니다.

즉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우주 전체에 보다 많은 자비와 사랑을 품어주는 뿜어주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나갈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 그게 중요한 거예요.


결정을 내리는 기준, 사랑과 자비

내가 이 사업을 확장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이런 고민이 있을 때, 어떤 것을 고민으로 삼느냐. ‘내가 사업을 확장하면 돈을 많이 벌겠지? 그러면 좋은 집도 사겠지?’ 이런 이기적인 마음, 내 욕심이 개입이 된 것이냐, 아니면 순수하게 이것이 확장돼서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고,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사회에 이득을 줄 수 있는 것이냐는 그 기준에서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결정이 안 나면 어떨까요? 이게 이기적인 욕심인지, 아니면 이타적인 마음인지 잘 모르겠다 그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마음을 관해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분별심 없이 차별심 없이 관찰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분별심 차별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을 의미 하거든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생각. 그런데 그 생각은 항상 내 이기적인 마음, 아상에 길들여진 생각입니다. 있는 그대로 관하게 되면 생각이 잦아들면서 생각 그 이면에 있는 무심(無心), 더 깊은 차원의 어떤 직관적인, 더 깊은 차원의 불성과 불성에서 우려 나오는 어떤 본연의 직관적인 지혜를 만나게 된단 말이죠. 그렇게 관했을 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진정한 사랑으로써 이것에 해답을 놓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던 사랑과는 차원이 조금 다를 수가 있어요. 우리는 좋아하는 것, 편들어 주는 것, 그게 사랑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분별없이 지켜봐 주는 것, 차별하지 않고, 네 편 내편 나누지 않고 지켜봐 주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명상이라고 하는 것, 참선이라고 하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관 수행,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을 찾는 방법입니다. 사랑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라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랑을 증장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했을 때, 사랑이 커지는 겁니다. 자비와 사랑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사랑이 태양처럼 빛난다

마치 이 사랑과 자비라는 것은, 태양이 뿜어내는 빛과도 같습니다. 태양빛은 어때요? 온 우주에 골고루 비친단 말이죠. 어디에만 선택적으로 비치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비칩니다. 태양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비치고, 빛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비쳐요. 심지어 태양빛을 비추지 말라고 증오하고 욕하는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비칩니다. 아무런 차별이 없어요. 분별이 없어요. 좋은 사람에게도 비추고 나쁜 사람에게도 비추고, 죄인에게도 비추고 성자에게도 비추고, 동일한 태양의 빛이 모든 존재에게 인간과 짐승 할 것 없이 자연만물 모든 것에 평등하게 비출 뿐입니다. 하다못해 동굴 속에 10년 20년 갇혀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동굴 안에만 벗어난다면 언제든 그 빛이 비칠 수 있습니다.

“나는 빛이 싫어. 빛을 믿지 않아. 빛은 없어. 즉 진리는 없어. 신은 없어. 부처는 없어.”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빛은 그 사람에게 비칩니다. 태양은 언제나 있지요. 태양이 비추는 것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 우주 법계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근원적인 빛, 이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자비와 사랑이 물결치고 있고, 부처님의 자비와 신의 사랑이 언제나 충만하게 우리에게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는 있느냐면, 우리가 그것을 ‘안 보겠다. 난 믿지 않겠다. 태양을 보지 않겠다’라고 고개를 숙일 수는 있습니다. 고개 숙이고 안 보겠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태양이 없는 거죠.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조차 고개를 들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고개를 드는 순간 태양은 바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어디 도망간 게 아니란 말이죠.

우리 모두에게 부처님은 한없는 자비로써, 법계는 언제나 완전한 자비로써 우리를 품어주는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심판하는 일, 우리를 미워하는 일 이런 일을 전혀 안 한다는 말이죠. 항상 사랑하는 일 밖에 안 합니다. 그야말로 ‘사랑밖엔 난 몰라’예요.

그러면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고, 나에게 괴로운 일이 생기는 이유는 뭡니까. 그건 내가 만들어 낸 거죠. 내가 만들어 낸 겁니다. 부처님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내가 그것을 만들겠다고 해서 작정하고 만드는 사람에게 이 태양빛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 버리는 사람에게는 태양도 어쩔 수가 없는 거죠.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우리에게는 언제나 자비와 사랑이 우리 삶 속에 끊임없이 물결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일체 모든 사람을 내가 자비로 대하고 있느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것이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이 바탕 된 마음으로 하고 있느냐 이것을 봐야 됩니다.


최악으로 힘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

군에 몇 년 전부터 비젼캠프라고 해서 군 생활에 잘 적응을 못 하고 힘들어 하는 특별한 장병들을 열 댓 명씩 모아서 4박 5일 일종의 치유의 수련회 내지는 집단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군에 계시는 목사님, 신부님, 스님들이 같이 진행을 하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처음에 몇 번을 하면서 뭐랄까 상담을 할 때도 보면, 너무 힘든 경우가 있거든요.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만 모아 놓으니까 막 힘이 드는 거예요. 너무 에너지가 소진되고 그 친구들과 하루 지내고 나서 저녁에 잘 때가 되면, 힘이 쭉 빠질 정도로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었거든요. ‘너무 힘들다.’ 이런 느낌이 들었단 말이죠. 그런데 너무 힘들어 하던 어느 날, 문든 한 생각 일어나면서 이 모든 것이 감사함과 복된 것으로 다가오데요. 정말 삶이 힘든 사람들은 힘이 들수록 빛을 너무 갈구하는 사람들이죠. 행복한 삶을 너무 갈구하는 사람들이죠. 너무 고통 받을수록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에너지가 너무 강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또 다르게 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좀 힘들지언정 자비를 실천할 수 있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너무나도 기가 막힌 수행의 장이고 자비를 닦아갈 수 있는 장인데, 내 스스로 이렇게 내 마음을 어지럽혔었구나 그 생각이 들더란 말이죠.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한 다음부터 오히려 그들과 만나고 대화 나누고 하는 것들이 더 귀하게 느껴지고, 이게 너무나도 소중한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죠.

여러분들이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만나면 행복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만나기만 하면 나한테 번번이 하소연만 하고, 힘들다고만 얘기하고 답답하다고만 얘기하니까 조금은 짜증스런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한두 번 들어주는 것이 세 번 네 번 계속 얘기하면 짜증스럽고, “야 좀 그만 좀 와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오히려 그런 사람들일수록 우리의 자비심을 계발할 수 있는 아주 귀한 순간입니다.

평범하거나 위대한 사람들에게 지혜를 알려주고, 사랑을 전해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힘들고 고되고 막막한 사람들에게, 즉 정말 간절히 사랑을 원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 최상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에게 있어서 최상의 사랑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고, 그들이 사랑을 느끼고 감사를 받는 그만큼 고스란히 사실은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는 자비로, 신은 사랑으로 바꿔 불러라

우리가 한 번 두 번 자비심을 연습하고 마음에 사랑을 연습하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의 행위가 자비와 사랑이 바탕이 된 행동을 했을 때, 우주는 나를 위해서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줍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본질적 에너지가 바로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법계는 사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어요. ‘오직 자비 밖에 없고 사랑 밖에 없다.’ 우리가 부처라고 표현하는 그 단어는 사실, 자비라고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그 단어는 사실, 신이라는 용어보다는 사랑이라는 용어가 더 어울립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법계는 항상 자비 밖에는 없단 말이에요.

내가 우주법계의 본질과 주파수를 맞췄을 때, 자비를 실천하고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고, 사랑의 마음을 실천했을 때 즉 우주법계와 주파수가 맞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경전에는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자비심을 연습하면 보다 빨리 깊은 명상에 들기 쉽다.’ 자비가 바탕이 되어야지만 수행의 성취가 빠르다는 말이죠. 그러나 자비심을 연습하지 않았을 때, 마음이 흐트러지고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을 했을 때 사랑이 나에게 올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우리가 일체의 모든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고 자비로 대하는 연습을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또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어떤 일을 하든지, 누구와 대화를 하든지, 직장 생활을 하든지, 자비와 사랑이 근원에 깔려 있느냐 이것을 항상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자비심, 사무량심을 닦으라

불교 경전에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이란 얘기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사무량심이란 것은, 네 가지 무량한 마음, 우리가 일으킬 수 있는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말하는데, 무량한 마음이라는 것은, 무량한 부처님의 마음을 말하는 겁니다. 해탈의 마음, 그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우리가 일으켜야 될 네 가지 무량한 마음, 그리고 이 네 가지 마음을 일으켰을 때 무량한 공덕이 성취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사무량심인데, 그게 바로 자비희사(慈悲喜捨)입니다.

첫째, 자심(慈心), 자무량심(慈無量心)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더해주기 위해서, 행복과 평화로움을 더해주기 위해서 마음 쓰는 것, 이게 바로 자심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까, 행복하게 해줄까 하고 마음 쓰는 것이 자심이에요.

둘째, 비심(悲心)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통을 없애 줄까, 고통을 덜어 줄까, 내가 그 사람의 고통을 함께 감내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연민심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측은하고 가엾은 마음입니다. 힘들고 고통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냥 고개를 확 돌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든 함께 없애줄 수 있을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고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을 바로 비심이라고 합니다.

이 자심과 비심을 합쳐서 자비심(慈悲心)이라고 하죠.

그리고 세 번째 마음이 희심, 희무량심(喜無量心)인데, 이것은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에요. 어떤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함께 기뻐해 주는 마음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희심이라는 것을 쉽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우리가 아주 잘 못 일으키는 마음이 바로 희심입니다. 함께 기뻐하는 걸 우리는 잘 못해요. 오히려 남들이 잘 되면 배 아프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남들이 좋은 일이 생기고 대박이 나고 잘 되면 괜히 배가 아프단 말이에요. 괜히 꼴 보기 싫고 칭찬해 주기 싫고, 칭찬에 굉장히 인색하고 그렇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함께 기뻐해 준다, 이것을 수희동참한다고 하거든요.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함께 수희동참해줄 때, 함께 기뻐해 주면서 함께 동참해 주었을 때 내 마음 속에 연습 되는 것은 그 장점 그 좋은 점이 고스란히 내 마음 속에 남는 겁니다. 내가 함께 동참해 준다는 것은 곧 내가 함께 한 것과 다름없는 공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은요, 물질적인 것을 보시했을 때만 보시의 공덕이 있는 게 아니라, 보시하는 마음을 찬탄하고 수희하면서 함께 기뻐해 줬을 때 동일한 보시의 공덕이 지어지는 겁니다.

물질세계란 내가 직접 그 물질을 얻어야지만 물질세계가 아니라, 마음만 내어도 그 물질세계가 영향을 미친다 하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아령을 들고 운동을 해야 근력이 강화되지만, 마음속으로 아령을 들고 운동을 하는 상상을 하잖아요. 그렇게 상상을 하고 나면, 동일한 시간을 상상했을 뿐인데 근력이 마찬가지로 강화됩니다. 상상밖에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우리 마음 작용의 본질이 그래요. 그렇게 마음을 내기만 했는데도, 그것이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희동참하는 마음, 누가 보시를 했을 때, ‘그래, 너 잘났다. 돈이 많으니 그렇게 보시하지. 난 하기 싫어서 안하냐.’ 이렇게 빈정거리기 보다는, 함께 기뻐해 주는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은 동일하게 함께 보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수희공덕, 수희의 수행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수희동참, 모든 기쁜 일이 있을 때, 남들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아니꼽다는 눈으로 보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함께 기뻐해 주는 것, 그랬을 때 수희공덕이 생깁니다. 직접 한 사람만 공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수희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공덕이 생긴단 말입니다.

그래서 『화엄경』 보원행원품(普賢行願品)에 보면, 보원행원에 다섯 번째가 수희공덕이란 게 있습니다. ‘내가 평생 수희공덕 짓기를 발원합니다. 함께 기뻐해 주는 공덕을 짓기를 발원합니다.’ 하는 것이 다섯 번째의 발원 일 만큼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함께 기뻐해 주고 찬탄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공덕이 되는 겁니다. 그걸 수희찬탄이라고 해요.

길거리에서 향을 파는 사람이 향을 하나 피워 놓으면, 향을 파는 사람도 향냄새를 맡죠? 향을 사려고 보는 사람도 향냄새를 맡습니다. 그곳을 지나가기만 해도 사람들이 향냄새를 맡습니다. 그것처럼 향을 직접 사지도 않았고 팔지도 않았지만 향냄새를 누구나 맡는 것처럼 수희를 하게 되면, 내가 직접 피운 향은 아닐지라도 향냄새를 맡는다 이 말입니다. 수희공덕, 수희찬탄, 모든 것을 보고 찬탄하는 마음, 공경하고 감사하는 마음, 함께 기뻐하는 마음, 이 찬탄심을 일으켰을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심의 발로다 하는 이야깁니다. 진정한 자비심이 있어야 그것이 찬탄이 되고, 수희가 됩니다.

그런데 그 수희가 되었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좋을 것을 보고 함께 수희동참을 했을 때 그것이 곧 나에게 벌어집니다. 돈 많이 버는 사람들, 남들 아파트 값이 올라서 두 세배 올랐다 그러면 배 아파 죽잖아요. ‘에이 난 그 옆에 있는 아파트를 샀는데 안 오르고, 왜 저사람 아파트 값만 오르는 거야’ 하지 말고, ‘와, 저 사람은 전생에 지은 공덕이 얼마나 많으면 저렇게 됐을까.’ ‘참 잘 되었다’ 하고 수희찬탄해 주면, 나에게도 그 공덕이 온다 이 말입니다. 그래야 함께 공덕이 쌓여요. 그래서 수희찬탄을 많이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네 번째로 사심(捨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아까 말씀드린 무차별심, 무분별심, 모든 평등심을 의미합니다. 사심은 좋고 나쁜 것을 완전히 놓아 버리는 완전한 평등심을 얘기 하거든요. 그래서 최고봉에 사심이 있다고 그럽니다. 자심과 비심만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희심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심입니다. 진정한 자비는 희심과 사심에서 나옵니다.

모든 존재를 완전한 평등한 마음으로 보고, 네 편 내 편을 나누지 않고, 좋은 것 나쁜 것 나누지 않고, 좋은 것을 보고 수희동참하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 좋은 것을 보든 나쁜 것을 보든 분별하지 않고 관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게 바로 사심이고 최고의 자비심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비희사를 연습하게 되었을 때 우리 안에 무량한 자비심이 생기고 무량한 공덕이 생기고 무량심이 생겨난다 이 소립니다. 그게 바로 사무량심의 의미입니다.


자비심의 실천력, 사섭법

사섭법(四攝事)이라고 하는 것은 네 가지의 사무량심보다 구체적으로 자비심을 어떻게 발현할 것인가를 의미하는 실천적인 가르침입니다. 사섭법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를 말해요.

첫째, 보시섭은 이 자비심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첫째 보시해야 한다 그 말입니다. 나눌 수 있어야 된다, 자비를 입으로만 보시, 보시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미소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고 가르침을 나누고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자비심을 실천할 수 있는 첫 번째 마음입니다.

두 번째는 애어(愛語)인데요, 애어가 뭐냐 하면 사랑스러운 말입니다. 나누는 데서 중요한 것이 말 한마디를 나누는 것이란 말이죠. 말 한마디 따뜻하게 해주고, 아름다운 말 한마디 해주는 것, 그것이 중생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는 소립니다. 우리가 말 한마디 가지고도 천 냥 빚을 값 듯이, 말 한마디 갖고서도 그 사람에게 온전한 사랑을 나눌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으며, 행복을 전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지만 말을 제대로 표현 못함으로써, 애어를 못함으로써 속으로는 사랑하지만 겉으로는 미워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남자들이 주로 그런다면서요. 경상도 남자들이 주로 그런다고, 마음으로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겉으로는 말을 안 하니까 아내는 알 수가 없다 그러면서 막 툴툴거리잖아요. 사랑스러운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에는 특별한 파동, 파장의 에너지가 있어서 이 말의 파장이 이 우주 법계 끝까지 퍼져나갑니다. 그 말의 에너지가 하나의 창조 에너지가 되어 우주 끝까지 전달되고,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말이든 만 번이고 십만 번이고 반복해 말하면 무조건 그게 현실이 된다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진언(眞言)이 된다는 소립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행(利行)입니다.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이로운 행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몸으로써 이타적인 것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애어는 구업을 말하고, 이행은 신업을 말합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데 생각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보시를 해야 하는데, 애어와 이행으로, 즉 말과 행동으로 직접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구의 삼업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것이 바로 신업입니다. 행동이에요.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먼저 행동을 바꾸면 생각도 뒤따라옵니다. 생각을 바꾸긴 쉽지 않지만 행동을 바꾸기는 쉬워요. 그래서 먼저 행동으로 저지르라는 것입니다. 보시를 실천하고 싶다고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저질러 물질로써, 몸으로써 실천해야 합니다. 생각으로 얼마를 보시해야지가 아니고, 직접 저질러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가 동사섭(同事)입니다. 도움을 주고자 하는 그 사람이 하고 있는 그 일을 함께 하는 겁니다.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으면서 잘 하라고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일에 뛰어들어 고락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어요. “불살생을 지켜야 하는 스님들이 어떻게 군대에 가십니까?” 이런 게 바로 하나의 동사섭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군대가 누구 죽이는 단체에요? 살리는 단체죠. 살리기 위해서 만든 단체가 군대이지, 죽이기 위해서 만든 단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한 군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죠. 여러분의 아들들이 군에 있단 말입니다. 이들을 행복으로 안내하고, 고통에서 구제하고, 이들에게 뭔가 진리를 알려주려면, 나는 아주 초월해서 그냥 저기 신선처럼 있으면서 “중생들아, 좀 잘 살아봐” “너희들 군 생활 힘내서 잘 해라” 이렇게 얘기한다고 그게 되겠습니까? 그곳에서 함께 훈련도 하고, 함께 뛰고 하면서 동사(同事)하면서 함께 그곳에 있어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비심의 발로라는 것입니다. 중생 속에 함께 뛰어들어서 그 일을 함께 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동사섭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뭔 일을 할 때, 설령 안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뛰어들어서 그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을 동사(同事)로서 구제해 주는 것, 그것이 아주 중요한 자비 실천의 덕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에서도 보듯이 우리가 자비심을 자꾸 계발할 수 있어야 되고, 삶 속에서 내가 얼마나 자비를 실천하고 있느냐, 사랑과 자비의 마음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느냐, 나의 모든 행위의 그 이면에 있는 의도가 자비심의 발로이냐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의 발로이냐 하는 것을 끊임없이 지켜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사랑이 기적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것이 생각처럼 잘 실천되지 않더라도 그래서 무조건 저질러 실천하고 봐야 합니다. 처음에 실천하기는 어려워도 그것을 어렵게 한 번 저질러 실천하고 나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는 연습한 것이 그야말로 습(習)이 되어서 훨씬 더 쉬워집니다.

악행을 연습하고 부정적인 마음을 연습하면 동일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다음에 똑같이 화를 내고 욕을 하기가 더 쉬워지거든요. 이걸 습(習)이라고 그래요. 업이 습이 되는 겁니다. 업습(業習)이라고 그러죠. 그런데 선한 업을 짓는 것이, 의도적으로 연습을 하면, 그것이 처음에는 어려워도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로 갈수록 더 쉬워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선업의 습의 물드는 거예요.

그러면 이 우주의 근원적인 에너지가 근원적인 힘이 우리에게 있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돕게 됩니다. 우주의 그 어떤 힘보다도 자비의 힘 사랑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인큐베이터에 쌍둥이 아이 둘이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한 명의 아이가 죽었어요. 그런데 간호사 한 분이 그 아이가 죽은 지 미처 모르고서 죽은 아이 옆에 살아 있는 쌍둥이 아이를 같이 두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조금 있다 살아있는 쌍둥이 아이가 죽어 있는 아이를 그냥 끌어안았단 말이에요. 그 사진 찍어 놓은 것이 인터넷에 많이 떠돌던데 보셨나 모르겠어요.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는데 이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났어요. 이것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 근원에 사랑이라는 아주 본질적인 흐름이 누구에게나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죠. 그 어린 아이도 저절로 사랑을 향해 행동하게 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근원은 사랑으로 물결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사랑은 기적을 가능하게 하는 겁니다.

『지리산 스님들의 못 말리는 수행이야기』라는 책을 보니까 말이죠. 그 지리산의 스님 세 분이 독초를 먹고 죽을 지경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서도 약이 없다고 그러고, 그런데 세 분 모두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스님 세 분이 자기 몸을 걱정하기는커녕 서로 다른 스님들의 몸을 걱정해 주고, 약이 한 사람 먹을 양 밖에 없었는데, 서로 내가 안 먹겠다, 다른 스님보고 먹으라고 하고, 모든 스님들에게 ‘나’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겁니다. 나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 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보고 한 스님이, 당신도 아파 죽겠지만 다른 스님들의 그 마음 씀씀이의 사랑을 보고, 안 죽는다는 확신이 생겼다는 겁니다. ‘아, 우리는 죽지 않겠구나’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이렇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 마음이 있는 이상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다는 것이죠. 병원도 안 갔는데 그 날 밤에 수행을 하고 앉아서 참선도 하고, 밤을 꼬박 새었는데 죽지 않고 다들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자비와 사랑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를 살린 것이지, 이기적인 마음이 있었다면 나 먼저 살고자 했던 마음이 있었다면, 우린 다 죽었을 것이다 라고 스님께서 말씀하시더란 말입니다.

사랑과 자비라는 것은 그 어떤 모든 덕목에도 제일 우선가는 것이고, 우리 삶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최우선시 돼야 하는 것이고, 사랑과 자비가 있었을 때 우리 삶에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사랑으로 병을 치유한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다 칩시다. 암에 걸렸어요. 어떤 분들은 보니까 암세포와 싸워 이기는 상상을 하도록 시키기도 하던데요, 그렇게 암세포와 싸워 이기는 상상을 한다는 것은, 싸워가지고 전쟁으로써 적을 죽임으로써 내가 살아보겠다는 마음이거든요. 암세포라는 것을 왜 적으로 생각해야 합니까. 암세포는 적이 아니에요. 그 세포 또한 중생입니다. 우리가 구제해야 할 중생 이예요. 암세포를 죽이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 암세포가 바로 나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죽이려 하지 않듯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인 암세포를 죽이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암세포가 문제가 아니지요. 내 안에 있는 어떤 부정적인 부분, 탁한 에너지, 어떤 악업 같은 어떤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암세포로 물질화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 원인은 나에게 있어요. 즉 내 안의 어떤 사랑이 아닌 부분, 자비가 아닌 부분, 지혜가 아닌 부분, 바로 그 부분이 세포를 기형적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이 아닌 것을 없애기 위해 그것을 죽여 없애는 방법을 쓴다는 것은 근원적인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암세포, 종양 제거 수술을 무사히 마친 사람들도 삶의 방식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고, 본질적으로 그 병의 원인이 치유되지 않는다면 또 다시 암이 재발하거나, 다른 부위로 재발하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대의학의 기본개념이 어디가 아프면 그곳을 딱 잘라 버리는 거잖아요.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써는 온전한 치유는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암세포를 사랑하고 내 몸 안에 있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를 사랑하는 큰 자비의 마음으로써 관하게 되었을 때 오히려 살 수 있는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적으로 알아서는 안 돼요. 내 몸에 어디 안 좋은 부분이 있다는 것, 그것은 나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자비로써 풀어줄 수 있어야 됩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비심이 바탕이 되면 그 어떤 문제도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마음이 발로가 되었다면 그 일은 망하기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나는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써 삶을 살아 나아가고 있는가, 사랑으로써 이웃을 대하고 있고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가, 이것을 우리 수행자들은 끊임없이 삶 속에서 지켜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자비심으로 할 수도 있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할 수도 있어요. 어쩔 수 없이 모기 한 마리를 죽여야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화난 마음으로 짜증스럽게 죽일 수도 있고, ‘네가 미물로 태어나서 이렇게 고생스레 살고 있구나,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하여 잘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자비스러운 마음을 내고 염불하고 기도해 주고 어쩔 수 없이 죽인다면 그건 앞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죽임입니다. 죽여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아무리 하찮은 미물도 죽여선 안 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할 일이 생긴다고 한다면 마음을 이렇게 써야 한다는 거예요. 겉에 드러난 행위 이면의 의도가 ‘자비’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얘기가 있어요. 깨달은 자는 살생을 해도 그 중생을 살리는 살생을 할 수가 있지만 중생은 중생을 살리면서도 죽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행위 이면에 자비의 마음이 바탕이 됐느냐.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이 바탕이 됐느냐 이 차이가 그렇게 중요하단 거예요.

그러니까 행위 그 자체를 문제 삼지 말고, 그 이면에 담겨있는 자비심, 사랑의 마음, 그것을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의 근원에 사랑과 자비가 언제나 춤추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이 우주법계의 근원에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에너지와 파장이 언제나 빛나고 있을 뿐입니다. 탁한 에너지 같은 것은 없어요. 있다면 그것은 단지 내가 아상으로, 아집으로 환상을 만들어 낸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비와 사랑을 연습하면, 사섭법과 사무량심을 연습하면,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우주법계의 근원과 연결이 됩니다. 그 순간 우주법계가 함께 기뻐하고, 우리를 돕게 됩니다. 그 연결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빛나게 해 줄 수 있는 근원적인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여러분들 모두에게 파도처럼 밀려들어오기를 두 손 모아 발원하고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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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두려워하지 말라.

진실은,

두려워 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두려워할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우리 스스로 두려움을 만들어 낼 뿐!

 

이 우주의 근원의 에너지는

언제나 사랑이요, 무한한 자비다.

실체라는 말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 말을 써야 한다면,

우리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자비와 사랑이라는 말 뿐일 것이다.

 

자비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우리라는 존재의

근원적 실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 파장은

오직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신도,

그 어떤 염라대왕이거나,

그 어떤 진리의 다르마도,

당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분들은,

성스러운 붓다며 신은,

우리 나약한 인간들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벌을 주기 위해

온갖 지옥을 만들어 내거나,

온갖 고통을 만들어 내거나,

인간을 단죄하기 위한

온갖 다양한 틀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이 두려움에 떨어야 할

그 어떤 장치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답지 못한 인간,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

신을 믿지 못하는 인간,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

온갖 악행을 일삼는 인간,

성적으로 타락한 인간,

그 어떤 최악의 인간들을 처단하고 벌주기 위해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무시무시하며,

두려움에 벌벌 떨 만한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이는

그런 지옥을, 지하세상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일 뿐!

오직 인간의 생각일 뿐!

인간의 욕심일 뿐!

 

부처는

다만 무한한 자비 그 자체이며,

신은

무한한 사랑 그 자체일 뿐이다.

 

그 분들은

인간을 단죄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의지도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은, 붓다는

오직 순수한 사랑일 뿐!

단죄하는 분이 아니다.

 

방편으로

계율을 율법을 지키라고,

죄를 짓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는 하셨을 지언정

그것을 어겼을 때

벌하기 위한

그 어떤 특단의 조치도 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시다.

 

다만 그 모든 인간의 악행들을

아무런 판단도 없이 지켜보실 뿐!

 

그 분들의 시선에서는

악행, 선행이라는 차별이 없다.

다만 사랑으로 지켜보실 뿐이다.

 

선악을 넘어선 분이

선악을 구분지어 놓고

그 가운데 악을 행한 자만을 단죄하고

선을 행한 자를 선물주기 위해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고,

우리 멋대로 지어낸 신에 대한, 절대자에 대한

바람이고 환상일 뿐이다.

 

신은, 붓다는, 절대자는

아무런 판단도 없이

일체 모든 이들을 위해

다만 오직 사랑과 자비만을 준비해 두고 있다.

 

아니 신은, 붓다는, 이 우주는

그 자체가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의 의식 속에는

지옥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고통도 있으며,

무시무시하고 소름돋는

최악의 지옥이 있다.

 

가짜로 있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인연 가합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누가 만들어 냈는가?

 

그렇다.

신이 만들어 낸 것이거나,

붓다가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내었다.

 

가짜로.

생각으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생각은 에너지를 갖는다.

생각이 바탕이 되어 삶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렇게 창조된 가짜 세상일지라도

그것은 인간들에게 마치 진짜 같이 느껴진다.

 

고통도 진짜고,

지옥도 진짜고,

모든 것이 진짜처럼 생생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의 진실은,

그 모든 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없다.

오직 사랑만이 있고,

오직 무한한 자비와 연민만이 있을 뿐!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이 창조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말고

삶을 사랑하는데 마음을 쏟으라.

두려워할 것이 없는 본연의 사랑이라는 세상에

생각으로 두려운 것들을 창조해 내지 말라.

 

세상이 당신에게 알려준,

종교가 당신에게 알려준,

사람들이, 선생님들이, 종교인들이 당신에게 알려 준

원죄에 속지 말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었다.

삶은 두려워할 무엇이 아니다.

죽음 또한 두려워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이다.

무한한 아름다움이며, 무한한 지고의 기쁨이다.

 

죄를 지으면 지옥 간다고 했던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계율을 범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지 말라는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죄의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신이 우리를 단죄한다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심판을 한 뒤 몇몇은 지옥으로 던져버린다고?

계율을 어기면 지옥에 간다고?

 

지옥은 없다.

죄 또한 없다.

그렇기에

두려워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항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이 없고, 죄 또한 없다면

잘못을 저질러도 되고,

악행을 저질러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물론 상관이 있다.

물론 지옥에 떨어진다.

큰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준비해 둔 것이거나,

부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니며,

더욱이 그 곳은 실체적인 곳이 아니다.

 

똑같은 상황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천상을 경험하게 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연봉 3,000만원이 괴로움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한없는 즐거움이지 않은가.

 

배가 터지도록 부른 사람에게

자장면 곱빼기는 고통을 가져오지만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그것은 천국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고통을 받지만

그 고통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지옥에 떨어지지만

그 지옥은 실체적인 어떤 영역에 신이 만들어 둔

절대적인 영역이거나, 절대적인 곳이 아니라

다만 스스로 만들어 내고

스스로 그 곳에 빠져 괴로워하기로 선택한 그런 곳이다.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지옥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지옥을 생각으로 만들어내어

그곳에 떨어지면 어쩌지?

죽고 나서 지옥에 가는 건 아닐까?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함으로써 있지도 않은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말라.

 

우리가 두려움에 떨면

그 두려움으로 인해

두려운 세상을 창조한다.

지옥에 가게 될까봐 걱정 근심을 한다.

 

누구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는 지옥에 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그 두려움이 지옥을 창조해 낸다.

 

그러니 두려움에 떨지 말라.

두려움으로 인해 지옥을 창조해 내지 말라.

두려운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죄의식이 죄를 만든다.

 

마음 속에

지옥을 품지 말고,

두려움을 품지 말고,

죄의식을 품지 말라.

그것을 품음으로써 그것을 창조하지 말라.

 

대신에

마음 속에

무한한 사랑을 품으라.

무한한 동체대비의 자비로움을 품으라.

 

신은 무한한 사랑이며,

붓다는 무한한 자비로움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죽음을 사랑하라.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오히려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죽음은 경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삶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래를 두려워하는 대신,

지은 죄를 두려워하는 대신,

삶을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라.

 

삶도 죽음도 경이롭다.

그 둘은 둘이 아니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아무리 달려갈지라도,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쓸지라도,

혹은 아무리 도달하려고 애쓸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뿐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 자신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주어진 삶을 사랑하라.

다가올 미래를 사랑하라.

진리를, 신을, 붓다를 사랑하라.

 

오직

다만

사랑이기만 하라.

 

두려움도,

고통도,

죄의식도,

근심 걱정도,

지옥도,

죽음도

모두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

사랑 안에 녹아내리게 하라.

 

본래부터 그것은 없던 것이고,

가짜일 뿐이니,

진짜로 가짜를 품어 안으라.

 

사랑할 때,

사랑이 창조된다.

아니 본래 사랑이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언제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을 향해 도착할 뿐이다.

 

영적인 진보,

수행의 완성,

그것은 곧 잊고 있었던 사랑을 되찾고,

사랑이라는 근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숭고한 귀의(歸依)의 여정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사랑과 하나될 것이다.

무한한 자비로움을 체험할 것이다.

 

두려움이라고 불리우는

가짜에 속아오던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사랑과 자비의 파장으로 춤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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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두려워하지 말라.

진실은,

두려워 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두려워할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우리 스스로 두려움을 만들어 낼 뿐!

 

이 우주의 근원의 에너지는

언제나 사랑이요, 무한한 자비다.

실체라는 말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 말을 써야 한다면,

우리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자비와 사랑이라는 말 뿐일 것이다.

 

자비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우리라는 존재의

근원적 실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 파장은

오직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신도,

그 어떤 염라대왕이거나,

그 어떤 진리의 다르마도,

당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분들은,

성스러운 붓다며 신은,

우리 나약한 인간들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벌을 주기 위해

온갖 지옥을 만들어 내거나,

온갖 고통을 만들어 내거나,

인간을 단죄하기 위한

온갖 다양한 틀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이 두려움에 떨어야 할

그 어떤 장치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답지 못한 인간,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

신을 믿지 못하는 인간,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

온갖 악행을 일삼는 인간,

성적으로 타락한 인간,

그 어떤 최악의 인간들을 처단하고 벌주기 위해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무시무시하며,

두려움에 벌벌 떨 만한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이는

그런 지옥을, 지하세상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일 뿐!

오직 인간의 생각일 뿐!

인간의 욕심일 뿐!

 

부처는

다만 무한한 자비 그 자체이며,

신은

무한한 사랑 그 자체일 뿐이다.

 

그 분들은

인간을 단죄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의지도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은, 붓다는

오직 순수한 사랑일 뿐!

단죄하는 분이 아니다.

 

방편으로

계율을 율법을 지키라고,

죄를 짓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는 하셨을 지언정

그것을 어겼을 때

벌하기 위한

그 어떤 특단의 조치도 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시다.

 

다만 그 모든 인간의 악행들을

아무런 판단도 없이 지켜보실 뿐!

 

그 분들의 시선에서는

악행, 선행이라는 차별이 없다.

다만 사랑으로 지켜보실 뿐이다.

 

선악을 넘어선 분이

선악을 구분지어 놓고

그 가운데 악을 행한 자만을 단죄하고

선을 행한 자를 선물주기 위해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고,

우리 멋대로 지어낸 신에 대한, 절대자에 대한

바람이고 환상일 뿐이다.

 

신은, 붓다는, 절대자는

아무런 판단도 없이

일체 모든 이들을 위해

다만 오직 사랑과 자비만을 준비해 두고 있다.

 

아니 신은, 붓다는, 이 우주는

그 자체가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의 의식 속에는

지옥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고통도 있으며,

무시무시하고 소름돋는

최악의 지옥이 있다.

 

가짜로 있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인연 가합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누가 만들어 냈는가?

 

그렇다.

신이 만들어 낸 것이거나,

붓다가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내었다.

 

가짜로.

생각으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생각은 에너지를 갖는다.

생각이 바탕이 되어 삶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렇게 창조된 가짜 세상일지라도

그것은 인간들에게 마치 진짜 같이 느껴진다.

 

고통도 진짜고,

지옥도 진짜고,

모든 것이 진짜처럼 생생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의 진실은,

그 모든 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없다.

오직 사랑만이 있고,

오직 무한한 자비와 연민만이 있을 뿐!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이 창조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말고

삶을 사랑하는데 마음을 쏟으라.

두려워할 것이 없는 본연의 사랑이라는 세상에

생각으로 두려운 것들을 창조해 내지 말라.

 

세상이 당신에게 알려준,

종교가 당신에게 알려준,

사람들이, 선생님들이, 종교인들이 당신에게 알려 준

원죄에 속지 말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었다.

삶은 두려워할 무엇이 아니다.

죽음 또한 두려워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이다.

무한한 아름다움이며, 무한한 지고의 기쁨이다.

 

죄를 지으면 지옥 간다고 했던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계율을 범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지 말라는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죄의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신이 우리를 단죄한다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심판을 한 뒤 몇몇은 지옥으로 던져버린다고?

계율을 어기면 지옥에 간다고?

 

지옥은 없다.

죄 또한 없다.

그렇기에

두려워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항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이 없고, 죄 또한 없다면

잘못을 저질러도 되고,

악행을 저질러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물론 상관이 있다.

물론 지옥에 떨어진다.

큰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준비해 둔 것이거나,

부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니며,

더욱이 그 곳은 실체적인 곳이 아니다.

 

똑같은 상황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천상을 경험하게 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연봉 3,000만원이 괴로움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한없는 즐거움이지 않은가.

 

배가 터지도록 부른 사람에게

자장면 곱빼기는 고통을 가져오지만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그것은 천국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고통을 받지만

그 고통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지옥에 떨어지지만

그 지옥은 실체적인 어떤 영역에 신이 만들어 둔

절대적인 영역이거나, 절대적인 곳이 아니라

다만 스스로 만들어 내고

스스로 그 곳에 빠져 괴로워하기로 선택한 그런 곳이다.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지옥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지옥을 생각으로 만들어내어

그곳에 떨어지면 어쩌지?

죽고 나서 지옥에 가는 건 아닐까?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함으로써 있지도 않은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말라.

 

우리가 두려움에 떨면

그 두려움으로 인해

두려운 세상을 창조한다.

지옥에 가게 될까봐 걱정 근심을 한다.

 

누구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는 지옥에 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그 두려움이 지옥을 창조해 낸다.

 

그러니 두려움에 떨지 말라.

두려움으로 인해 지옥을 창조해 내지 말라.

두려운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죄의식이 죄를 만든다.

 

마음 속에

지옥을 품지 말고,

두려움을 품지 말고,

죄의식을 품지 말라.

그것을 품음으로써 그것을 창조하지 말라.

 

대신에

마음 속에

무한한 사랑을 품으라.

무한한 동체대비의 자비로움을 품으라.

 

신은 무한한 사랑이며,

붓다는 무한한 자비로움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죽음을 사랑하라.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오히려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죽음은 경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삶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래를 두려워하는 대신,

지은 죄를 두려워하는 대신,

삶을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라.

 

삶도 죽음도 경이롭다.

그 둘은 둘이 아니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아무리 달려갈지라도,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쓸지라도,

혹은 아무리 도달하려고 애쓸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뿐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 자신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주어진 삶을 사랑하라.

다가올 미래를 사랑하라.

진리를, 신을, 붓다를 사랑하라.

 

오직

다만

사랑이기만 하라.

 

두려움도,

고통도,

죄의식도,

근심 걱정도,

지옥도,

죽음도

모두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

사랑 안에 녹아내리게 하라.

 

본래부터 그것은 없던 것이고,

가짜일 뿐이니,

진짜로 가짜를 품어 안으라.

 

사랑할 때,

사랑이 창조된다.

아니 본래 사랑이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언제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을 향해 도착할 뿐이다.

 

영적인 진보,

수행의 완성,

그것은 곧 잊고 있었던 사랑을 되찾고,

사랑이라는 근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숭고한 귀의(歸依)의 여정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사랑과 하나될 것이다.

무한한 자비로움을 체험할 것이다.

 

두려움이라고 불리우는

가짜에 속아오던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사랑과 자비의 파장으로 춤출 것이다.









Posted by 법상



[질문]

 이틀전 새벽예불을 보고 절문을 나서는데 
낯익은 분이 맨발에  주저앉아 절망을 남편에게 마구 쏫아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산길을 돌아 내려오며 만감이교차  올 것이 와나보구나 하는 직감이었습니다
이분들을 두번 보았습니다 .
한번은 절 문전을 기웃대며 바라보기만 다가가서 법당을 들어가 보시라니까  쓸쓸한 웃음만...
두번째는 남편께서  언제 들어가도 좋으냐고 물어오더군요.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 들어가시라고.....
땅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는 모습,남편이 어찌 해야 할찌 기로에 서있는 모습 에 
점점 죽음의 늪에서 포기 하는 상태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절을 가면  무언가 위안을 받기에  그럼에도 절 문턱을 넘지 못하는 애처로움,,,,

그분들의 모습에   나는 살아있음에  감사. 건강함에 감사.
나의기도가 탐진치 삼독에 물들지 않기를 발원했습니다
그 부부들에게 부처님의 자비 함께하길  이틀내내 마음이 쓰였습니다
오늘 새벽예불을 보고 산 모퉁이를 내려오는데 만났습니다
차 앉에 기대어 축 늘어져있는 상태로 컵라면을 들고
한젓가락 입에 넣는 힘없는 애처로운 모습 살기위해  먹어야 한다는 그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없이 눈물이 나도 모르고 흘렀습니다.
과감히 도와드리고 싶다고 전화번호를 받아냈습니다

내일은 그분을 만나  병마와 싸우는 부인을 힘이 되어주고자 방문을 하려고 합니다
언제 까지일지 모르지만 그 분이  가는길에  한 번이라도 
법당의 부처님을 뵙게 해 주고 싶습니다
스님 , 망설임 없는 결정에 다소 긴장이 됩니다
어떤 자세로 대하여야  하며 혹여   저로 인해 상처않받고
마음편히 가슴에 담았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갈수있게 할 수있을까요?


[답변]

예... 아름다운 마음을 내어 주셨네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은 어렵고 힘겨운 분들을 만났을 때,

눈물이 나오고, 함께 가슴 아프고,

그럴 때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첫마음은 누구나

'돕고싶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그 투명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 일어남을

외면하지 말고 저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법우님, 아주 잘 하셨어요.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돕고싶은 마음이 일어나다가도,

그 다음에 연이어 일어나는

아상에서 기인하는 생각, 판단, 분별, 과거를 개입시키기 때문에

얼른 저질러 돕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법우님처럼 그렇게 탁 저질러 돕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지만,

그 뒤에 우리 마음은

또 다시 아상에 기인한 생각, 분별들이

끊임없이 솟구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부터가 제대로 된 생활 속의 수행을

시도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순간을 맞는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그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생활 선원이요, 선방이 아닐까 싶습니다.

 

잘 한 일일까?

너무 성급한 일은 아니었을까?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 도움을 순수하게 여기지 않으면 어쩌지?

오히려 저들에게 상처를 주면 어쩌지?

언제까지 도울 수 있을까?

끊임없이 도움을 주지 못할 바에는 도움을 주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

 

하면서 끊임없이 분별이 올라올 것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 분별들을 잘 지켜보면서,

놓아가는 것이야말로

생활 속의 수행이고 명상이며 선인 것입니다.

 

그런 분별들은 잘 지켜보고,

탁 내려놓으세요.

내려 놓는 것이 잘 안 되면,

내려놓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아, 이런 마음이, 이런 생각이 또 일어나는구나'

하고 가만히 내버려 두고 지켜보기만 하시기 바랍니다.

 

내일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말을 꺼낼까,

무엇부터 시작할까,

어떻게 구체적으로 도와주어야 할까,

어떤 말을 해야 상처받지 않을까

하고 많은 생각과 계획을 세울 필요 없이,

그저 텅 빈 마음으로

저질러 보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생각보다

우리의 텅 빈 마음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사랑과 자비의 근원적인 마음이

더 깊고 더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텅 빈 마음으로 저지르는 것이

온갖 생각으로 계획을 짜는 것 보다

더 지혜롭단 말입니다.

 

너무 고민하지 마시고,

턱 맡겨 버리세요.

생각도 놓아버리고

그렇게 올라오는 생각들도 가만히 지켜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법상





평화로운 오후, 길을 걷고 있던 사람이
대형 광고판이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고,
또 다른 사람은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다가
광고판이 머리에 맞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복잡하던 길, 복잡하던 마트에서
수많은 사람이 그 광고판 아래를 걷고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불행하게도 그 사람에게, 그 순간에
그 광고판이 떨어지게 되었을까?

일부러 어떤 사람이 광고판 위에 서 있다가
그 사람을 맞추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떨어뜨려
정확히 그 사람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불교에서는 우연이란 없다고 말한다.
그것 또한 그 사람의 인연이요 업이다.
다시말해 그 사람은 그 아래를 정확히 그 시간에 걷도록 되어 있었고,
그 때에 맞춰 그 광고판은 추락을 할 수밖에 없던 인연이었다.

사람의 목숨이 아무런 인연도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이 그 때 죽어야 할 업도 아닌데,
아무 이유 없이 우연으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사라는 것은 정확하게 인연 따라 오고 갈 뿐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생긴다.
어떻게 그 광고판은 그 사람이 그 때 죽을 업이란 것을 알고
그 순간, 정확하게 그 사람을 맞췄단 말인가?

그 인과응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과관계라면 이해가 가지만,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 어떻게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도 인과관계와 인연법은 성립한다.

이 우주의 법칙은, 이 법계의 인연법이라는 법칙은
인간에게만, 혹은 생명이 있는 유정물(有情物)에게만 한정되는 법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뿐 아니라, 유정물 뿐 아니라
모든 무정물(無情物)에게까지 확장되는 우주의 법칙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유정물 뿐 아니라
무정물에게도 자비와 존귀함과 따뜻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보내야 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그 차가 자체 엔진고장을 일으켜 시동이 꺼지면서
고속도로에서 차가 갑자기 서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 대형사고가 났고, 많은 사람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그렇다면 그 사고에 연관된 많은 이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우연으로 그 사고를 당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고가 날 만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사고가 날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마침 그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소멸한다.
우연은 없다.

그렇다면 고장 난 자동차 엔진이
모든 인연법과 인과응보를 환히 알고,
사고가 날 모든 사람들의 운명과 업을 따져 본 뒤
그 순간에 그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꾸며낸 것인가?

그렇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해
그 자동차 엔진이 그런 일을 직접 했다기 보다는
이 법계의 인과응보라는 이치가 그 일을 계획하고
자동차 엔진은 거기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큰 틀에서
인연법이라는 법계의 큰 진리의 흐름 속에서
나고 죽으며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

이 쯤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자.
광고판이나 자동차 엔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몫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불교에서는 사람 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 나무와 풀과 개미와 이끼들조차
모두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며,
그들을 결코 인간 아래에 두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과 인간은 다르지 않다.

인간이 인간에게 죽음을 당할 수 있듯,
인간이 동물에게도 죽음을 당할 수 있고,
식물에게도,
심지어 위에서 보았듯 무정물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들과 인간은 인연법의 차원에서 서로 동등하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고장 나기 직전의 차였는데 주행 중에는 괜찮았고,
다행히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량이 고장 났다”고.
그래서 사고 없이 집까지 무사히 잘 왔다고 말이다.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아주 좋은 차를 타고 있었으면서도
차량이 문제를 일으켜 집까지 오는데
몇 시간이 더 걸렸을 수도 있다.

늦게 오는 것도 정확히 그럴 만한 인연이고,
사고 없이 빨리 오는 것도 그럴 만한 인연이다.

사업가가 아주 중대한 회사의 업무로
해외 사업가와의 미팅에서 차량 사고로 늦게 가는 바람에
그 큰 투자 사업을 망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량이 하필이면 왜 그 중요한 순간에 고장이 나는가.
차량 결함만 아니었어도 그 사업가는 대박이 났을 것인데.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차 고장만 아니었다면 완전히 대박이 났을까.
혹시 법계에서 그 사업이 대박이 나기에는 아직 이른 때라서,
아직 그 사람이 성숙하지 않았거나,
복이 부족했거나, 아직은 그 그릇이 작았거나 하는 이유로
차량 고장이라는 인연을 통해 그 사업을 뒤로 미룬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바로 그 차는,
차의 고장난 엔진은
온전한 법계의 이치에 따라
아주 여법한 진리를 수행하게 된 것이리라.

사람만 법계의 이치를, 인과의 이치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유정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처럼 무정물 또한 법계의 일부로써,
진리의 일부로써
바로 그 인연법이라는 우주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차의 탓으로 돌린다.
흥분해서 차 바퀴를 발로 걷어 차거나,
혹은 그 차를 폐차시키고 새 차를 사는 것으로 울분을 풀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차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내 문제다.
차가 바로 그 때 고장이 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주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 법계 우주가 각본을 쓰고 그 차는 단지 조연을 했을 뿐이다.
아니 법계와 차와의 공동감독에 공동주연의 연극이라는 편이 옳겠다.

어쨌든, 주연이었든 조연이었든
내 사업을 망친 직접적인 몫을 한 녀석은 자동차다.
그러니 자동차를 실컷 미워해도 좋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미워하는 만큼
법계의 일부분인 자동차도 나를 미워할 것이다.

손가락이 내 몸의 일부분이듯,
자동차는 이 우주법계의 일부분이다.
손가락이 아프면 나 또한 아프듯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도 아프다.
손가락이 아파 내가 아프면 어떻게든 손가락에게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에서도
자동차를 아프게 한 원인제공자에게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다.
바로 나에게.

그러니 자동차에게 분풀이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우주에게 진리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무정물 또한 인간과 유정물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존재이며, 존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유정무정 유형무형(有情無情 有形無形)’의 모든 존재가
다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정이란 나무나 돌 같이 감각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형이란 형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그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

옛 스님들은
“푸른 대나무숲 모두가 진여(眞如)요,
피어 늘어진 노란 꽃은 반야(般若) 아님이 없다.”고 했다.

[보장론(寶藏論)]에서는
“불성은 모든 것에 가득하고 풀이나 나무에도 깃들어 있으며,
개미에게도 완전히 퍼져 있으며, 가장 미세한 먼지나 털끝에도 있다.
불성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 『莊子』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답이 있다.

동곽자가 장주에게 물었다.
"도(道)라고 불리는 것, 그것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장주가 말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동곽자가 말했다.
"그것이 있는 곳을 지적해주십시오."
"개미에게 있다."
"그렇게 비천한 것에 있습니까?"
"작은 풀에도 있다."
"그것은 더욱 비천하지 않습니까!"
"벽돌이나 기왓장에도 있다."
"어떻게 그렇게 비천한 곳에 있을 수 있지요?"
"오줌과 똥에도 있다"
동곽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대 과학에서도 유정물과 무정물을
정확히 구분 짓기 어렵다고 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유정물, 다시말해 생명체는 DNA라는 복제 가능한 유전물질 지니고 있어
생식활동을 통해 자손을 만들어 내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무정물, 무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와 광우병의 원인체를 규명하면서 밝혀진
프리온이라는 원인물질이 유전자가 전혀 없는 단백질에 불과하지만
생물체내에서 증식하고 전파되어 확산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은 전면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 때 비로소 생명과학자들은
생물과 무생물, 유정물과 무정물이란 경계가 따로 없음을 깨닫게 된다.
유정, 무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분류이자 분별이었을 뿐이지,
본래 그렇게 나뉘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큰 한 바탕으로부터 비롯되어
여러 원인과 결과에 의해 만들어진 모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밝힌 미국의 프루즈너 교수는 97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유정물이나 무정물이라는 것은 단지 이름일 뿐,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 인간이 더 귀하고 천하다고,
더 우월하고 열등하다고 나누어 놓았을 뿐이지,
그 본 바탕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아무리 하찮다고 생각되는 무정물일지라도
그로인해 내가 죽음을 당할 수도 있고,
또한 그로인해 내가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옛 스님들은 무정물이 언제나 법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을 듣는 것은 오직 성인들 뿐이라고 했다.

하찮다고 생각되는 발 아래의 꽃을
신비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기 위해 고개를 숙임으로써
나에게 날아오던 화살을 피하게 될 수도 있고,
밤길에 차를 타고 가다가 불쑥 나타난
토끼 한 마리를 피하려다가 사고가 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내 운명을 갈라놓을 수도 있다.

내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이
반드시 인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찮다고 생각했던 무정물이 내 생사를 결정지을 수도 있고,
내 운명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 우주의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들이 모두
나와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하나도 하찮은 것이 없다.
더 귀하거나 천한 것은 없다.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소중한 것 처럼, 사람이 소중한 것 처럼,
똑같이 나무와 풀과 산과 흙과
심지어 자동차와 의자와 집과 컴퓨터 또한 소중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섰을 때처럼,
존경하는 스승 앞에 섰을 때처럼,
부처님 앞에 섰을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모든 존재 앞에 서라.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모든 존재 앞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마음으로 다가 서라.

일체 모든 존재를 존중하며 감사하고
찬탄하며 존귀하게 여기라.
이 세상의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에게
무한한 공경심으로 엎드려 절하라.
매 순간 세상 만물에게 기도하라.

유정물과 무정물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그 모든 것들이 인연법의 진리 안에서
동등한 입장으로 나와 인연을 짓고 있음을 안다면,
세상에는 더 이상 존귀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은 경이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세상을 향한 지고한 공경심!!
모든 존재를 향한 평등한 자비심!!
이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이 세상을 향한 마음이다.

학창시절에 원소, 원소주기율표라는 것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 때 나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간 학교에서 가르쳤던 것은 인간이 우월하다는 것이었고,
도저히 인간과 자연, 인간과 무정물은 하늘과 땅 차이일 수밖에 없었는데,
인간과 자연, 유정물과 무정물을 이루는 근본 원소는
동일한 것이라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동일한 원소들이 ‘어떤 인연으로 모였느냐’에 따라
인간도 되고, 동물도 되고, 식물도 되고,
심지어 자동차도 되고, 빌딩도 되고, 집도 되고, 물도 된다.
이것은 유정물과 무정물이 그 어떤 차별도 있지 않다는 반증이 아닌가.
우리는 결국 동일한 것들이 모여서 겉모습의 차이를 만들어 낼 뿐이지,
근원적인 어떤 높고 낮거나, 귀하고 천하거나 하는 차별은 없다.

나는 때때로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호젓하게 벗어나
홀로 산 길을 걸을 때,
아니면 낯설고 인적 드문 여행지를 거닐 때,
그럴 때조차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어떤 ‘존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미세한 느낌을 받곤 한다.

우리가 완전히 혼자 있을 때조차 사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발딛고 서 있는 대지와 흙과 함께 있는 것이며,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유정물, 무정물이
내 곁에서 따뜻한 도반으로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이러한 통찰 속에서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공경심과 찬탄과 신비 속에 머문다.
어찌 이런 세상이 신비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사소하거나, 하찮거나, 귀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통찰은 우리의 삶을
모든 존재를 향해 활짝 열려 있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향해 존중과 찬탄과 감사와 공경심을 갖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평등한 부처로써 섬기고 시봉할 수 있게 해 준다.

자동차를 타고 멀리 출장을 갈 때
자동차를 향해 동료의식을 가지고, 도반의식을 가지고
존중하며 감사하고 공경스런 마음을 보내라.
내 마음이 자동차를 향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향한
한없는 자비심과 공경심으로 넘칠 때
오늘의 운행은 안전하게 법계에서 자동차와 공동으로 도울 것이다.

설령 오늘 자동차 사고가 날 업이었다고 할지라도
모든 존재를 향한 깊은 존중과 감사와 공경심으로
조금 더 주의 깊게 운전을 함으로써
그 차량사고의 인연이 소멸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이나 식물도 사람 마음이 존중과 사랑과 자비로왔을 때
그 결정이 아름다워지고, 식물도 고요한 파장을 보낸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사람 마음에 따라 세포와 원소의 차원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그러니 모든 기도의 핵심인 감사와 존중과 공경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
그 주위의 모든 유정물, 무정물은
아름답고도 청정한 파장과 세포와 결정을 보여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감사와 공경심으로 충만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이
욕심과 화와 질투로 가득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에 비해
사고가 날 확률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의 마음자세가 운명을 바꾸고 업을 바꾼다는 말이다.
업장소멸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운명론이나 숙명론을 거부하지 않은가.
그 이유는 그 어떤 업일지라도, 그 어떤 과보일지라도
마음에 따라, 기도와 수행과 복덕을 얼마나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받아야 할 업장을 뒤에 받을 수도 있고,
다른 방법으로 보다 미세하게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침 공양을 하기 전에
물과 쌀과 야채와 수저와 식탁과 이 집에게 감사하라.
길을 걸으며 길가에 피어난 들꽃과
보도블럭과 신발과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무한한 공경을 보내라.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컴퓨터와 의자와 책상과 볼펜과 자판기와 책들과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도와주고 있음에 감사하라.

이처럼 무정물조차 나보다 못할 것이 없는
법계의 스승이며, 도반이고, 소중한 길벗이라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겠는가.

더 귀한 사람, 더 천한 사람,
더 중요한 사람, 덜 중요한 사람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일지라도,
바보나 정신병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이 생에서의 인연이 다했음을 알고 이교도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
그것이 바로 목련의 인연이었음을 바로 보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반대로 아무리 하찮게 느껴지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게서 내 인생의 가장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아주 나이 어린 어린이가 내 생명을 구해줄 은인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원수였던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니 사실은 내 인생에 귀하고 천한 사람은 없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거나, 좋거나 싫다고 정해진 사람은 없다.
모두가 똑같은 비중으로 존중받아 마땅한
내 삶의 부처요, 관음이고, 내 생명의 귀의처다.

귀한 사람에게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은 평범하다.
그러나 천한 사람에게 그 본질을 알고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의 이치를 몸소 깨닫고 실천하는 수행자다.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행하는 존중을 보내라.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에게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을 주라.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교수님들과 교직원 그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아주 유명했던 큰스님께서 감동스런 법문을 해 주셨던 적이 있다.
법문을 들으며 꼭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스님을 둘러싼 교수님들과 교직원분들의 눈치도 보이고
나 같은 한 명의 대학생의 질문이 거슬릴 것 같아 망설이다가
어렵게 나오시는 스님을 붙잡고 여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스님께서는 자비어린 시선으로 오래도록
내 눈을 진지하고도 진심어린 눈으로 마주보아 주시면서
나의 질문에 스님의 모든 노력을 다해 답변해 주셨다.
그 때 나는 너무도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어린 내 마음은 스님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아주 당연하지만 그 일은 오래도록 아주 특별한 경험으로 자리잡으면서
내 삶의 지침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 그 때 내가 했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은 기억에 없지만,
그 때의 그 존중받는 느낌과
나에게로 향한 그 스님의 집중과 자비와 눈빛은
두고 두고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몸소 깨닫게 해 주신
살아있는 법문으로 나를 밝혀주고 있다.

살아있는 지혜라는 것,
깨달음의 실천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을 보내주는 것,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존재에게
나의 모든 공경심을 바치는 것,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무정물들에게 조차
찬탄과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세상을 향한 차별 없는 열린 마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부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것이 부처다.










Posted by 법상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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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이상에서와 같이 연기법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사건도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연기법에 입각해 보면, 쌀 한 톨이 존재하기 위해서도 좁게는 농부와 소매상, 도매상, 태양과 흙과 물과 바람과 각종의 영양분 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넓게는 나아가 이 우주 만물, 우주 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들이 직간접적으로 쌀 한 톨의 생명을 돕지 않으면 도저히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작은 미생물, 곤충, 벌레, 짐승이며 사람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존재는 서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지 않을 수 없고, 나아가 이 우주의 어머니와 같은 보살핌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모든 것은 서로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는다. 모든 존재는 모든 존재를 살리기 위한 중요한 요인이 된다.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이 자리에 존재하기까지는 내 발 아래의 작은 꽃 한 송이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흙과 바람과 구름과 햇살이 어머니의 품이 되어 나를 보살펴 주었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웃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내가 삶 속에서 마주치는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존재들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나를 살려주고, 보살펴주고, 키워 준 소중한 어머니요 아버지인 것이다.

그들이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 하찮게 여겼던 풀 한 포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었고, 숲의 나무들 때문에 내가 살고 있으며,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직간접적인 도움 없이는 지금의 나는 이 자리에 설 수 없다. 어디 그 뿐인가. 시간을 거슬러 옛 조상님들을 비롯하여 그야말로 ‘일체 모든 존재’들이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있고, 또한 내가 있기에 그들이 있다.

이러한 연기적인 세상에서 우리들이 실천해야 할 첫 번째 실천의 덕목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감사와 찬탄이다. 어찌 나를 이끌어준 이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이렇게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나를 살려주고 보살펴 준 우주 법계의 소식에 경외와 찬탄을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기법의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이의 삶의 방식은 찬탄과 감사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존재들이 나의 어머니요 아버지다. 대지와 태양과 바람과 구름이 나의 아버지이며, 이웃과 나무와 꽃과 풀들이 나의 어머니다.

내가 잘나서 이렇게 성장하고 잘 자랐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오만한 생각이 있을까.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가 성격이 좋아서, 내가 잘나서 이 자리까지 온 것이 아니다. 삼라만상 일체의 모든 존재들이 나를 돕고, 나를 살려주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어머니의 품처럼 나를 품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려지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따뜻한 보살핌에 의해 살려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산다고 생각하면 그 주체가 내가 되어 아만과 아집과 이기가 생겨나기 쉽지만, 살려진다는 말에는 연기와 감사와 겸손의 덕목이 숨 쉬고 있다. 온 우주의 크고 작은 모든 존재들에 의해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매 순간순간 살려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어떠한가. 인간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아집과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 내가 잘난 줄 알고, 인간만이 우월한 줄 안다. 인본주의,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것은 나를 키워 준 아버지 자연을 소외시키고, 어머니 대지를 짓밟으면서 인간만이 우월하다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해도 좋다는 인간의 오만으로 치닫고 있다.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나누는 것은 연기적인 사고가 아니다. 그 모두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 인간과 신이, 인간과 자연이 평등한 인연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상생과 조화의 관계다. 이것이 깨지면서부터 온갖 환경오염이 재앙적으로 출현하지 않았는가.

인간이 신을 찬탄하고 신에게 모든 감사를 돌리듯이, 연기적인 가르침에서는 인간이 신에게 한 것과 똑같은 신성함으로 자연을 찬탄하고 자연에게 감사를 돌리며, 또한 이웃을 찬탄하고 감사를 돌리는 삶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며 존재가 만들어 내는 일들은 모든 것이 찬탄과 감사의 대상이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를 공경스런 마음으로 찬탄하고 찬양하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에게 감사와 외경의 예를 올리라. 예를 올리는 대상은 부처님이거나 신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일체 모든 존재가 부처요 신이다. 부처님의 은혜, 신의 은총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다고? 바로 그 부처님의 은혜와 신의 은총의 실체는 온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들의 은혜요 은총이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도움을 주고 받는다는 이 대 우주의 자비로운 오케스트라에 감사하고 찬탄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이 은혜와 은총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다.

새벽 정갈한 마음으로 감로의 천수를 공양 올리며 초와 향을 사르고 나아가 불전에 온 마음을 다해 지극정성으로 예를 올리는 바로 그 마음으로 온 우주에 예를 올리라.

6시간을 어렵게 올라 봉정암의 부처님께 공양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 발 아래 힘겹게 피어오른 민들레 한 송이에 찬탄과 감사의 예경을 보내라.

어렵게 어렵게 모처럼 큰스님을 친견하는 마음으로 아내와 남편을, 자식과 이웃을 매일매일 친견하라.

어머님과 아버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라.

하루 동안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나를 살려주어 감사하다’는 찬탄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라

Posted by 법상



[대승사 산내암자 윤필암]

부처님과
하느님이 둘이 아니십니다.

불교 신자와
천주교 신자와
기독교 신자가
참으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과
하느님 가르침의 실천이 둘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자성부처님
굳게 믿어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놓고 가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굳게 믿어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놓고 가는 것이
삼위일체 하느님 가르침의 실천인 것이지요.

하느님을 내밖에 그 어떤
동떨어진 대상으로 설정해 놓고
밖을 향해 믿음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하느님과 부처님은 이름만 다를 뿐 '하나'가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일체를 당신께 맡기고 가야 합니다.

내 안에 충만한 성령이
그대로가 성부이며 성자인 것이지
그 셋을 어찌 서로 다르다 할 수 있겠어요.

성부와 성자 또한
성령으로써 내 안에 항상 충만한 것이며,
이 우주 법계에 아니 계신 곳 없이
모든 생명 모든 사람에게 항상 빛을 놓고 계십니다.

법신과 보신과 화신 삼신 부처님 또한
서로 다른 부처님이 아닌
내 안의 자성부처님으로서 '하나'인 것입니다.

'참 나'의 이름을
부처님이라고 부르면 어떻고,
또 하느님이라고 부르면 어떠할 것이며,
알라신이라고 부른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결국
부처님 하느님 알라신이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진리의 몸(法身)인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고 합니다.
다만 여러 가지로 말할 뿐
근본이 흔들리는 법은 없는 것이지요.

현자들이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을 가지고
어리석은 우리들의 좁은 소견으로
분별하고 나누어 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니
니 종교니 내 종교니 하면서
싸울 것도 없고,
내 가르침이 더 깊이가 있다고 고집할 것도 없으며,
내 가르침만이 나를 천당으로 가게 할 수 있고,
내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란
고집하지 않음입니다.
어느 한 쪽을 고집하게 되면
벌써 진리에서 한참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좋고 싫고, 옳고 그르다는 등의
일체 분별을 다 여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가
'불교이기 때문에'
'천주교, 기독교 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진리이기 때문에' 믿어야지요.

그 말은
불교를 믿고 있지만,
천주교를 기독교를 믿고 있지만,
또 다른 참진리를 만난다면
당연히 그 참진리 또한 버려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아가 더 밝은 진리를 만난다면
기존 종교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고
새로운 밝은 진리를 따를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참 진리를 찾는 구도자이며,
수행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고집이 아닌 맑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종교만이 옳다'는 고집을 가지고
'참된 믿음'이라 착각을 하지는 마세요.

참된 믿음이란
억척스러운 고집이 아니라
텅 비어 어느 것이라도 담을 수 있는
맑고 향기로운 열린 믿음일 것입니다.

마음이 어느 한 쪽에 머물러 고집스레 집착을 하게 되면,
다른 그 어떤 가르침도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진리란 어떤 방법으로든 설해질 수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 것인지요.

활짝 열린 탁 트인 마음이
모든 수행자의, 모든 구도자의 참마음일 것입니다.
수도자란 모름지기 그래야 합니다.

텅 비어 있기에 도리어 꽉 찬 그런 훤칠하게 트인 길로 가야지,
좁은 한 길만 고집하는 옹졸한 마음으로
어찌 만중생을, 숯한 어린 양들을 구할 것입니까.

불교 신자, 수행자 법우님들과,
기독교 천주교 신자, 수도자 형제 자매님들
참으로 우리 모두는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참 진리의 길을 걷는 '좋은 도반'입니다.

세계일화
세계는 한 송이 꽃으로 언제나 맑고 향기롭습니다.

'내 종교'라는 울타리에 갖혀
불교다, 기독교다, 천주교다 하고 금긋고 살았지만,
실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인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같은 진리의 길을 걷는 도반이었음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제
'나'도 놓아버리고,
'내 종교'도 놓아버리고,
'내 알음알이 진리'도 놓아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본래자리 밝으신 '자성부처님' '한마음 부처님'을 모시고,
그 자리에
내면의 참된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실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리석은 중생으로,
어린 양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자성부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삼위일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당당하고 시원스레 살아갑시다.

부처님으로 살아가고,
하느님으로 살아갑시다.

내가 산다고 생각지 마세요.
자꾸 아상을 키우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나'라는 아상 대신에,
'자성부처님'께서,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살아가시도록 온전히 믿고 맡기시면 됩니다.

그렇게만 되면
세상 모든 이가 부처님이고 하느님이십니다.
그 믿음에서 '자비'가 나오고 '사랑'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 믿음 안에서
부처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은
세계일화의 맑고 향기로운 빛을 놓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린 모두 '하나'이며 '참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