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의 세계에서 일체 모든 존재는 우연이나 운명론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며 존재가 만들어 내는 현상들은 모두가 그럴만한 인과 연에 의해 인연따라 연기되어진 것이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원인에 따른 분명한 과보를 받게 마련이다. 인과응보, 업인과보의 법칙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은 움직인다. 원인이 있으면 그에 따른 분명한 결과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나에게 주어진 현실은 어떠할까. 나에게 주어진 현실 또한 엄연한 인과응보의 결과일 뿐이다. 현실이라는 결과 또한 과거의 내 인연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에 받는 것이다. 내 스스로 만들어 내 스스로 받는 것이다. 업인과보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그것은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분명한 인과의 흐름을 타고 내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억울한 것 같고, 불평등한 것 같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일지라도 그것은 엄연한 인과의 법칙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부자들은 계속해서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오히려 정직하고 노력하는 자는 가난해 지기 쉽고, 오히려 열심히 살지 않더라도 머리만 잘 쓰고, 이기적인 사람이 성공하기 쉬운 현실을 한탄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에도 불만이 많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을 잘 만나 행복하게 부유하게 자라지만, 또 어떤 사람은 가난한 가정에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다. 그 뿐인가. 어떤 사람은 부자 나라에서 태어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척박한 땅에서 가난과 기아와 질병과 전쟁 속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은 세상을 한탄하고, 신을 원망하며, 진리가 과연 있는 것이냐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세상은 왜 이리도 불공평하단 말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이야말로 완전한 평등의 진리가 꽃피어나는 곳이다. 다만 우리의 눈에는 일부분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불공평한 것 처럼 보일 뿐이다. 전생과 이번생, 그리고 다음 생으로까지 이어지는 시간을 뛰어넘어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며, 공간적으로도 볼 수 있는 시야는 한정되어 있다.

인과라는 엄연한 진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정견의 시야가 없으며, 연기적이고 상호연관되어 일어나는 현상들을 전체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다. 그렇기에 우리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불평등하고 조화롭지 못하게 보인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세상, 인연과보, 연기의 세상은 완전한 대평등의 세계다. 어떤 이들에게는 인과가 적용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적용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인과의 진리는 적용되고 있다. 지혜로운 이는 인과를 보고 알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인과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등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인과를 전체적으로 볼 수 없더라도 이 세상이 연기법, 인과응보라는 진리로써 운행된다는 것을 안다면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연기라는, 인과라는 진리를 온전히 믿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믿든 안 믿든 연기와 인과의 진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연기와 인과의 법칙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앞에 펼쳐진 그 모든 것들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연기와 인과는 분명하다. 내 앞에 펼쳐진 그 어떤 괴로움일지라도,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모든 것은 인연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인과응보의 분명한 법칙에 따라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어떤 현실도 원인 없이, 이유 없이 나타날 수는 없다. 바로 지금이라는 현실이 내가 그 결과를 받아야 할 순간이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괴로운 일이 벌어지더라도, 조금은 불평등해 보이는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모든 것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꼭 필요한 일이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너무 괴로워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일지라도 그것은 바로 지금이라는 이 시기에 내가 받을 수밖에 없는 연기적인 현실이다.

그 현실은 누가 만들어냈는가. 그것은 바로 나다. 내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지을 때는 복도 짓고 죄도 짓지 않았는가. 그동안 우리는 살면서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우리 안에는 선업과 악업이 항상 공존하고 있다. 언제든 현실에서 발현되기만을 기다리다가 인연에 맞는 때가 오면 바로 그 순간에 선업이든 악업이든 현실로써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을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지을 때는 선행과 악행을 함께 지어 놓고 받을 때는 선행의 결과만 받고자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스스로 만든 현실을 내가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앞에 펼쳐진 그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라. 거부하지 말라. 받아들인다는 것, 섭수한다는 것이야말로 연기를 이해하는 모든 수행자들의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다. 즐거운 일은 과거에 지어 놓은 선의 결과를 받는 것이니 즐겁게 받아들이고, 괴로운 현실은 과거에 지어 놓은 악업의 결과를 받는 것이니 이 또한 받아들임으로써 악업을 녹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는 것이다. 업이 올라오는 순간에 완전한 긍정으로써 크게 받아들이고 섭수하면 올라오는 대로 녹아내린다. 눈부신 햇살에 겨울눈이 녹아내리듯 현실에서 나타나는 그 모든 인연들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여 녹이라.

받아들임에는 좋고 나쁜 분별이 없다. 좋고 나쁜 것이 있으면, 좋은 것은 받아들임을 넘어 집착이 붙게 마련이고, 나쁜 것은 거부와 배척이 뒤따른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선과 악 등의 이분법적인 분별이 붙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인간의 분별이 온갖 극단을 스스로 만들어 낼 뿐이다. 모든 경계를 다만 있는 그대로 분별없이 바라보면 받아들임의 지혜가 생겨난다. 좋고 나쁜 것이 없으니 좋다고 집착할 것도, 싫다고 거부할 것도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받아들임이야말로 곧 무분별과 무집착과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실천이며, 연기의 실천인 것이다.

이처럼 받아들임, 섭수야말로 연기와 중도, 공에 대한, 이 우주적인 진리에 대한 수용이며 존중이고 실천이다. 우주적인 진리를 진리로써 인정하며 그 앞에 나를 굴복시키고 복종시키는 진리의 숭고한 실천이다.

내 앞에 펼쳐지는 그 모든 상황을 전체적으로 수용하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 현실을 통째로 인정하라. 좋은 현실이든 나쁜 현실이든 분별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섭수하라.

순간순간의 모든 삶과 삶 속에서 피어나는 모든 경계들을 흔쾌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에는 평화가 깃든다. 삶을 대상으로 투쟁해 온 모든 다툼과 전쟁은 종식되고 지고의 안온과 평화와 자유로움이 깃든다. 모든 선악과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림이라는 극단적인 분별이 소멸되고 중도의 지혜와 텅빈 고요함이 드러난다. 섭수는 삶을 인정하는 것이고,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부처님과 부처님의 진리를 고스란히 내 품에 끌어안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모든 존재는
나와 연결되어 있다.
그저 피상적으로 조금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직접적이고도 가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너와 내가 서로 통해 있다는 것이고,
너의 문제가 곧 내 문제라는 것이며,
세상의 문제가 곧 내 문제라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하나의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 일은 결코 작지 않다.
그 하나의 사건에는 무수히 많은 존재가,
나아가 이 우주법계가
크고 작은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중에도 내가 만나는 존재, 나와 마주하는 존재는
특별한 어떤 인연의 힘을 가지고
나와 특별한 끈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특별한 인연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그 존재는, 그 사건은, 그 사물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내 인생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일들이,
내 인생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그 모든 사람과 존재들이
모두 내 내면에 있는 어떤 것들이다.

나의 내면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외적으로 투영되어 나올 수가 없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내면과 외부가 둘이 아니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가,
내 안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이 외부의 어떤 대상을 끌어당기게 되고
그럼으로써 내면의 어떤 문제가
겉보기에는 외적인 어떤 문제인 것처럼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외적으로 투영되어 나오는 문제 또한
나와 전혀 관련이 없던 것이
투영되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즉 나와 전혀 관련 없는 사람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나와 인연이 있었던,
과거 전생의 어느 시기에 나와 인연이 있었던,
혹은 업의 관계, 빚진 관계, 원수 관계,
복을 베푼 관계, 사제관계, 부자관계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빚어진 업과 인연의 인다라망과 같은
복잡한 사슬 속에 놓여 있던 어떤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즉 내 안에 화의 업이 올라오게 되면
과거 전생의 화와 원수관계 등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 혹은 물질이나 존재들이
내 안의 화라는 직접적인 원인(인연 중에 ‘인’)에 의해
우주법계의 인연법으로써 내 앞에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 안에는 무수히 많은 인과와 업,
그리고 무수히 많은 생각과 기억과 관념들이 가득하다.
이번 생에서 만들어 낸 것들은 대개 기억과 관념으로 투영되어 존재하고,
지난 생에서 만들어 진 것들은 업이라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번 생의 것이든 지난 생의 것이든
우리가 분명히 인지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극히 드물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형성하면서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우리 앞에 나타난 어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우리는 그 원인을, 그 무수히 많은 원인을 다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원인은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무량수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부처님만이 분명히 환히 볼 수 있지,
가섭존자 조차 낱낱이 살펴 알기 어렵다고 했다.

심지어 매 순간 순간 우리 주변에는
1500만 비트의 정보가 발생하는데 반해
우리가 자각할 수 있는 정보는 고작 15비트에 불과하다고
호오포노포노에서는 밝히고 있다.

이것을, 업의 차원에서 본다면
1500만 비트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그 몇 백배, 몇 천배 이상의 복잡다단한 인과의 그물코가
우리 삶의 현장에 매 순간 놓여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타고 가던 차를
뒤의 차량이 와서 접촉사고를 냈다고 치자.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앞차와 뒤차만의 인과관계인 듯 보인다.
그러나 업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 단순해 보이는 하나의 사건 속에는
수백 수천만가지 이상의 엄청난 인과가 얽혀 있고,
수많은 존재와 존재들, 사람과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

만약 이 두 차의 운전자가 병원에 갔다면
병원의 의사 간호사와도 연결되어 있으며,
집의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이 모두 함께 걱정을 할 것이고,
병문안을 와야 할 것이고,
병문안을 오느라고 또 차를 타고 와야 하고,
음료수라도 사 와야 하니 슈퍼마켓에도 들러야 하고,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면 다른 것을 했을 그 시간에
그 모든 사람들이 병문안 오기 위해 시간을 비웠어야 할 것이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밥 한 톨이 내 앞에 오기까지
우주 법계가, 수백 수천만 이상의 사람들, 존재들이
밥 한 톨 먹는 것을 도왔다는 연기법의 이야기에서처럼
마찬가지로 수백 수천 수만가지 이상의 온갖 존재들이
이 접촉사고 하나와는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차사고가 난 두 당사자는
우연으로 그런 접촉사고가 났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고 속에는 어떤 식으로든
내 안의 어떤 부분이
상대방 안의 어떤 업의 부분과 절묘하게 바로 그 순간에 만나서
그런 사고를 만들어 낸 것이다.

왜 하필이면 앞차가 5초만 빨리 왔어도
그냥 지나갈 수 있는 교차로에서 멈춰서게 되었으며,
왜 하필이면 뒤차의 운전자가 바로 그 순간에
주의가 흐려져 앞에 서 있는 차를 못 보고 그냥 들이받았겠는가?

그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차원에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업과 인과의 차원에서의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좋고 나쁘고의 차원을 넘어 서 있다.

직장에서 상사가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는 바람에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는 상황을 가정 해 보자.
이 또한 상사와 나 사이에, 또 수많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일어난 법계의 일인 것이다.

그로인해 그 상사는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어졌을 수도 있고,
그래서 오후에 있을 일의 성과가 좋아졌을 수도 있으며,
그로인해 나는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빠져서
직장 동료들에게도 화를 내고, 집에 와서도 뾰로통 해 있으며,
오늘 했어야 할 일들을 다 끝마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상황은 단순히 그 상사와 나, 둘 만의 일이 아니다.
그로인해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 일들을 생각해 보라.
그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새롭게 연결되어져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해 낸다.

회사의 부장이 과장에게 화를 냈다는 그 하나의 사실,
그로인해 그 부서에 그 과에 분위기가 하루 종일 냉랭했고,
그 탓에 부하직원 한 명은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아 조퇴하려고 했다가
눈치보느라 조퇴도 못 하고 꼼짝 없이 회사에 갇혀 있는 바람에
병이 더 심해 져서, 저녁에 쓰러질 수도 있다.

그 하나의 상황은
크고 작은 수많은 또다른 상황들을 만들어 낸다.
사실 그 하나의 상황은
이 모든 사람, 상황들까지도 감안한 법계의 치밀한 계획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한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하나의 사건이나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내 앞에서 그 문제가 발생했다면,
나와 연관되어져서 그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것은 나와는 상관 없는 ‘그 사람들’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것은 내 밖의 문제라고 생각되어지겠지만,
사실은 나와 연결된 문제이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사실은 ‘내 문제’인 것이다.

법계의 계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깊고 더 세세하며 더 치밀하다.
수많은 업과 기억과 생각과 수많은 정보들을
법계에서는 분명하게 보고 분명하고도 치밀한 계획으로
그 문제를 바로 그 순간에 바로 그 자리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와 연관된 사람들 또한
모두가 그 문제와 연관된 나름대로의 내면의 문제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인 것이다.
그 문제와 관련된 어떤 문제가 있는 사람들만
그 문제 주변에 모여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혹은 내 삶 속에서 목격하는
그 모든 일들은
모두가 나와 직간접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그 문제가 내 외부의 문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내 문제 아래에 놓여 있는 문제란 뜻이다.

내가 목격하는 모든 문제는,
내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
제3자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와 관계된 문제이며,
나아가 바로 ‘내 문제’라는 것이다.

내 안에 없는 것들은
결코 내 밖으로 투영되어 나오지 않는다는
법계의 이치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면의 투영이다.
내 문제요, 내 책임이다.

그것은 또 다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에게서 나온 문제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문제나 고민을 가지고 올 때
그 고민을 들어 주고 답을 내려 주지만,
우리 내면에는 그것이 ‘네 잘못’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것은 ‘너의 문제’이고 나는 그 문제를 상담해 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그의 문제이기도 한 동시에
‘나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내 안에 어떤 문제가 없다면
그 사람이 그 문제를 나에게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풀어가야 할 우리 공동의 과제가 된 것이다.

왜 그런가?
세상은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그 사람이 나에게 상담을 하려 왔겠는가?
나와의 공유된 업이,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상대방의 고민을 들으며
사실은 내 안의 업을 닦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문제를 치유해 준다는 것은
곧 내 안의 문제를 치유한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큰스님들께 상담을 하고 온 신도님들 중에는
특별히 큰스님께서 답을 주신 것은 없는 것 같은데,
다녀오고 났더니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거나,
병으로 아파하던 환자가
큰스님을 친견하고 났더니 낫기 시작한다거나 하는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 가능한가?
큰스님과 심리상담가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상담가들은 상대방의 문제를 상대방의 문제로 보고
상대방이 어떻게 치유를 하면 될지를 알려주는데 반해,
수행자의 방식은
상대방이 가져 온 문제를 상대방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바로 내 문제라고 생각함으로써
내 닦을거리라고 받아들인다.

상대방과 나 사이에는 연기법이라는 법칙으로써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그를 나에게 이끌었으며
그와 내가 만나는 순간 그 문제는 더 이상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나 자신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상담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
내 안에 어떤 업장, 어떤 문제가
저런 고민을 가진 상대방을 내 앞에 오게 했는가?

물론 그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원인이 되는 이유는 한두가지가 아니며,
한 두 생에 걸친 원인이 아닌 몇 생에 걸친
수많은 업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거나,
수백 수천가지 이상의 크고 작은 인연들이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얽혀 있을 수도 있고,
조금 더 나아간다면
사실 그 원인은 이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 수백 수천 수만가지 이상의
우주 법계와 연결되어 있는 전체적 연결고리를
어떻게 우리 중생의 눈으로 다 볼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1500만 비트의 정보 중에서도
고작 15비트만을 인식하는 우리가,
수억만 종류 이상의 업과 인과의 소식을 어떻게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부처님께서만 아실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것은 그 모든 원인은 내 안에도 있다는 사실이고,
그렇기에 내 안에 있는 그 원인을 닦고 비움으로써
상대방과 연결되어 있는 공업이 함께 닦여지면서
상대방과의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 의식이나 법회에서 행하는
축원의 비밀이다.
스님들이 축원을 해 준다고
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물론 가장 직접적이고 빠른 방법은
자기 자신이 직접 닦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와 인연지어진 스님께서
마음을 비우고,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축원을 해 준다면
당신의 마음 닦은 그 힘이 법계를 울리고
나와 연결되어진 내 안의 업도 함께 변화를 맞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수행자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서 가능하며
실제로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이
이러한 마음 마음, 발원과 기원의 힘들에 의한 것들이 많다.

이상에서 공부한 이 이치는
결과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내가 만나는 모든 경계, 사건, 문제, 사람들은
사실은 온전히 내 문제며, 내 책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상대를 탓할 일은 하나도 없다.
상대를 바꾸려고 애쓰지 말라.
그 문제를 상대의 문제로 돌리고,
그 잘못을 상대방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상대방이 바뀌기를 바뀌는 한
그 문제의 본질은 흐려지고 만다.

그 문제를
내 내면이 투영된 ‘나의 문제’요, ‘나의 책임’이라고
자각하면서
나 자신으로 돌아올 때,
그 문제는 이제 본격적인 열쇠를 스스로 찾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관하고,
나 자신의 내면을 닦아갈 때
나와 연결되어 있는
상대방의 문제, 내 밖의 경계들이 닦여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제를 바깥 탓으로 돌리지 말라.
내가 그 문제를 인식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그것은 내 문제요, 내 숙제다.

내 안에서 그 문제를 풀라.
내 안에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
정치문제, 경제문제, 사회적인 각종의 문제들, 부정부패들,
환경문제, 가정문제, 아들문제, 남편문제,
이 모든 문제들은 사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내 문제’다.

내 문제가 풀리고 나면
내가 사는 세상이 청정해진다.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해 진다는 경전의 말씀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때때로 사회 변혁을 꿈꾸는 사회운동가들이
자기 자신의 변혁은 등안시 한 채,
부정부패로 얼룩지고 탐욕으로 점철된 시대를 나라를 개혁하고자 하지만
마음 같이 사회가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그로인해 자신 안에 화를 키우고,
사회에 대한 불신과 미움과 증오를 키우다가
오히려 자신 몸에 병도 나고,
자신의 마음이 미움과 증오로 얼룩지곤 하는 것을 본다.

사회를 변화시키고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선결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변화이며,
자기 자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내가 변하면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변한다.
세상은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법계로 언제나 청정해 있다.
다만 내 마음이 오염되고 물들어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이라는 필터로 걸러서 본 나의 세상도 오염되어 있을 뿐이다.

깨닫고 보니
이 세상은 본래부터 깨달아 있었다는 말이 있다.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특별히 구제해야 할 중생은 없다는 말도 있다.

내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
이 우주는 동시에 함께 깨어난다.
내 업장을 닦고 소멸시키는 순간,
이 우주도 함께 어둠을 닦아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문제를
바깥으로 돌리지 말고,
내 문제로 보고
나 자신을 닦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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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인과 - 인과응보

연기법을 원인과 결과의 상관성의 측면에서 살펴본 말로 인과, 인과율 혹은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다. 원인이 있으면 그 원인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가 있게 마련이며, 결과가 있다는 것은 곧 그에 대한 원인이 있게 마련이라는 의미다. 또한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를 받고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를 받는다고 하여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법이 그대로 연기법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인과율이 연기법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연기와 인과가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설명은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있고, 또한 ‘저것’으로 인해 ‘이것’이 있다는 상의상관적인 관계이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의지해 있고 도움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반해, 인과라는 것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을 수 있다는 직선적이고 시간적인 인과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에서 씨앗이라는 ‘인’에 다양한 ‘연’이 화합함으로써 열매라는 ‘과’를 맺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인과법칙의 좋은 비유가 될 수 있다. 씨앗이라는 인(因)과 흙과 거름과 물 등의 연(緣)이 화합하여 열매를 맺고[果] 그 열매를 우리가 먹음으로써 생명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 이처럼 인연이 화합하면 그에 따른 결과인 과(果)를 맺는다. 인과에서 본다면 직접적인 원인인 인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이 모두 어떤 한 결과를 맺는 원인으로 작용했으므로 이 두 가지를 다 ‘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씨앗이라는 ‘인’으로 인해 열매라는 ‘과’를 맺은 것도 인과이며, 농부의 노력이라는 ‘인’으로 열매라는 ‘과’를 맺은 것도 인과인 것이다. 이처럼 인과는 인간과 사물 간에도 작용하고, 존재와 존재 간, 존재와 사물 간 등 모든 생명 있고 없는 존재들에게 해당되는 자연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과 그에 따른 결과라는 인과를 별도로 업보(業報)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즉 인간의 의지적인 행위라는 원인[인]을 ‘업’이라고 부르며, 그러한 의지적인 업에 따른 필연적인 대상의 반응을 ‘보’라고 한다. 이것을 업인과보(業因果報)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바로 뒤에서 설명될 십이처 교리에 입각한 주체적인 인간의 육근과 객관적인 대상이라는 육경 사이의 법칙인데, 인간이 눈귀코혀몸뜻으로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작용을 일으키면[인]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은 필연적으로 그에 따른 반응[과]을 보인다는 것이다. 즉 인간과 대상 사이에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과 대상 사이에 인과의 법칙이 존재하는데, 그 대상은 일반적으로 자연물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인과의 관계는 성립된다.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말해주듯이 내가 상대방에게 선으로 대하면 선의 결과가 돌아오지만, 악한 행위를 하면 악의 결과가 돌아오는 것이다. 이 업보에 대해서는 뒤에 업과 윤회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한다.




법계 - 법주법계

이상의 연기, 인연, 인과에 대한 설명에서처럼 이 우주의 근저에는 연기라는 법칙이 전제되어 있다. 이 우주의 기본 법칙이기도 하면서, 인간과 모든 존재들의 기본적인 운행 법칙이 바로 연기법인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것들도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즉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연기법이라는 법칙에 머물고 있으며[法住], 연기법이라는 진리의 세계[法界]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잡아함경』 12권 296에서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出現)하시건 혹은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으시건 이 법은 항상 머무르나니(法住), 법이 항상 머무르는 곳을 법계(法界)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즉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건 출현하지 않으시건 일체 모든 존재는 항상 연기라는 법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이 세상은 항상 진리가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에 진리의 세계 곧 법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잡아함경』12권 299에서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 다만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정각을 이루어 중생들을 위해 분별하여 설하고 드러내 보이신다.”고 함으로써 연기법이라는 진리가 법계에 상주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법주 법계의 이치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저 우연히 생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저마다 완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며, 진리의 몫을 해 내기 위해 진리로써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 모든 것들을 ‘제법’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제각기 진리로써 존재하고 있는 ‘법’이라는 의미다.

사람만 진리로써 나툰 것이 아니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도, 저 하늘의 구름이며, 바람이며, 별들도, 아무리 작은 풀벌레며 곤충과 심지어 미생물들 또한 제각기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진리로써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진리의 법계에 법으로써 법주하는 것이다. 즉 진리의 세계에 진리로써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인간만을 우월하다 하고, 자연이나 자연물들을 열등하다 할 수 있겠는가.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어찌 높고 낮은 우월감이 발붙일 수 있겠는가. 일체 모든 존재는 그대로 법계에 법주하고 있는 법으로써 정확히 필요한 곳에 정확히 필요한 이유를 가지고 정확히 필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편견으로 보았을 때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존재이유는 분명한 진리의 몫을 띄고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이 세상을 원망하곤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자이고 좋은 가문에 태어나고,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반해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먹고 살 걱정, 의식주 걱정으로 허덕이며 근근이 살아간다. 또 어떤 사람은 간교한 계략과 이기적인 술수로써 살아가는데도 성공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성실하고 소박하게 베풀며 살아가는데도 가난을 면치 못하기도 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더욱 더 이런 불만과 불평등의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신을 욕하고 부처를 탓하며 이같이 불평등한 세상에 무슨 진리가 있겠느냐고 자조 섞인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연기법에 기반한 법주 법계의 진리에서 본다면 이 모든 불평등해 보이는 세상이 사실은 분명한 진리로써 진리의 모습에 하나도 어긋남 없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좁은 소견에서 본다면 당장에 이번 한 생 밖에 볼 수 없으며, 당장에 눈 앞에 보여지는 것에만 연연하지만 우주적인 진리의 시야는 시공을 초월하며 전체적이고 전 우주적인 툭 트인 정견(正見)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언뜻 보기에는 불평등해 보이고, 진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일지라도 사실은 그 이면에 분명하고도 정확한 인연, 인과, 연기의 진리가 일체 모든 존재의 저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진리가 머물러 있는 진리의 세계, 법계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이 법계를 판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선이 전체적인 법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견해를 정견으로 바꾸어 나가야지, 현재의 갇혀 있는 좁은 소견으로 이 법주법계를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치우쳐 있고, 갇혀 있는 좁은 소견을 온전하고도 전체적인 치우침 없는 정견으로 바꾸어 가기 위해, 그래서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열반을 증득하려면 먼저 법에 머무를 줄 알아야 한다. 즉 법주를 알아야 한다. 『잡아함경』14권 347에서는 “그들은 먼저 법에 머무를 줄을 알고 뒤에 열반을 알았느니라. 그 모든 선남자(善男子)들은 홀로 어느 고요한 곳에서 분명하게 사유하기를 게으르지 않으며, 나라는 소견[我見]을 여의고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잘 해탈하였느니라.”라고 설하고 있듯이, 법에 머무를 줄 알고 난 뒤에야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법주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이 곧 법이 머물러 있는 곳임을 분명하게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이 우주는 그대로 법신불(法身佛)이요, 낱낱의 존재는 모두가 자성불(自性佛)이라고 하는 말도 바로 법주법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진리가 항상 머물러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 우주 법계를 법신불이라고 하며, 나라는 존재 또한 사실은 진리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진리의 몸이기 때문에 자성불이라고 한 것이다.

법신불이니 자성불이니 하는 말이 어떤 실체나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진리로써의 몸 없는 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열반을 구하려는 수행자는 이러한 법주를 바로 알아 내 안에, 또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주에 언제나 법이 머물러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그러한 법신불과 자성불의 진리에 일체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의 첫째는 나를 완전히 내던져 맡기는 것에 있다. 경전의 말씀처럼 법주를 분명히 알아야 열반이 있는데, 법주를 분명히 알아 실천한다는 것은 곧 ‘홀로 고요한 곳에서 분명히 사유하기를 게으르지 않고, 나라는 소견을 여의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에 있다. 나를 완전히 진리에 내맡기고 진리의 흐름에 들어 완전히 힘을 빼고 함께 따라 흐를 때, ‘나’라는 소견을 벗어날 수 있으며, 번뇌 또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즉, 법에 머무른다는 말은 곧 ‘나’라는 소견을 놓아버리고 모든 생각과 번뇌를 다 내맡기고 다만 홀로 고요히 사유하고 바라보기를 게으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에 모든 것을 맡겨야 ‘나’를 내세우지 않을 수 있고, 법이 머무르고 있음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홀로 고요히 사유하고 지켜보는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에게도, 내 주변의 세계에도 진리가 항상 머물러 있음을 바로 알고 믿어 법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나의 소견을 내세우지 않으며, 고요히 법을 사유하고 지켜보는 수행을 했을 때 법에 머무르는 지혜[法住智]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주지(法住智)를 얻으면 ‘나’라는 소견이 사라지고, 일체 모든 것을 법에 내맡기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평화가 깃들고 지혜가 생겨난다. 『잡아함경』14권 345에 보면 “저 사리불 비구는 실로 내가 하루 내지 7일 밤낮 동안 다른 글귀와 다른 맛으로 묻는 이치에 대해, 7일 밤낮 동안 다른 글귀와 다른 맛으로 그것을 해설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사리불 비구는 법계(法界)에 잘 들어갔기 때문이니라.”라는 대목이 보인다.

즉 부처님께서 몇 일 밤낮 동안 다양한 가르침을 행하시더라도 사리불은 그 모든 법을 해설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데, 그것은 사리불이 법계에 잘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리불 비구는 법계에 잘 들어가 진리의 세계를 완전히 깨닫고 진리와 하나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부처님의 말씀이라도 다 이해하고 해설해 줄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는 핵심은 바로 이 세계가 단순한 세계가 아니라 진리로 이루어진 법계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이러한 법주법계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방법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우주법계가 곧 진리의 세계이며, 나라는 존재 또한 진리가 머물고 있는 법신임을 믿어 ‘나’를 내세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일체 모든 것을 진리에 내맡기고 살아가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내가 산다고 하면 아상에 빠지게 되고, 이기와 아집에 빠지고 말지만, ‘진리’가 산다고 믿고 맡기며, 부처님이 산다고 믿고 맡기고 살게 되면, 괴로움에 허덕일 것도 없고, 삶을 헐떡거리며 살아갈 것도 없어진다. 그 때부터는 삶이 고요해지고, 이기와 아집이 소멸하며, 평화와 안식이 깃들게 된다.

괴롭기 위해서는 괴로운 ‘나’가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것을 법주법계에 맡기고 살게 되니 ‘나’가 사라지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진리’만이 남아 진리답게 법답게 저절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주법계로 사는 수행자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사는 것이며,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주 법계의 수많은 진리의 인연에 의해 살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 법주법계에서 알아야 할 중요한 한 가지는 법주나 법계를 주체적인 어떤 상으로 실체화시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법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진리로써의 이치를 설하는 것이지 별도의 상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중생계와 별도로 실체적인 어떤 법계가 있다거나, 내가 머물고 있는 이 현상계와 별도로 법주가 있다고 이해한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교의 무아에서는 그 어떤 실체도 발붙일 틈이 없다. 심지어 그것이 진리일지라도, 부처일지라도 거기에 집착하고 머물러 실체화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를 벗어나고 만다.

Posted by 법상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 연기법 강의(3)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 연기법 강의(2)
2007/11/09 - [불교교리강좌] -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다 - 연기법 강의(1)
세계는 한 송이 꽃 - 우주가 나를 돕는다

『지구를 치료하는 법』이라는 책에 보면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예를 볼 수 있다. 책에 의하면 1950년대 보르네오 섬의 어떤 마을에 말라리아가 크게 유행했을 때 말라리아 모기를 없애기 위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DDT를 뿌렸다고 한다. 모기는 모두 죽고 말라리아는 사라졌다. 그런데 그 후 여러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민가의 지붕이 너덜너덜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민가의 지붕에 살던 말벌이 DDT로 인해 모두 죽고 굼벵이를 먹이로 하던 말벌이 사라지자 굼벵이가 크게 번식하여 갈대로 이엉을 엮은 지붕을 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양철판 지붕으로 바꾸었지만 열대지방의 맹렬한 소나기인 스콜이 양철지붕을 때리는 소리에 주민들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DDT로 인해 수많은 벌레가 죽고 죽은 벌레를 먹은 엄청난 양의 뱀 또한 죽었다.

그 뱀을 고양이가 먹었는데 먹이사슬이 올라갈 때마다 DDT 농도가 농축되어 고농도 DDT를 섭취한 고양이들도 잇따라 죽어갔다. 고양이가 사라지자 쥐들이 극성을 부렸고, 쥐가 증가하자 다른 전염병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곤경에 빠진 WHO에서는 그 해결책으로 14,000마리의 고양이를 낙하산에 매달아 하늘에서 뿌렸다는 다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먹이사슬 전체에 혼란이 일어났는데 그 근본원인을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 보다는 당장에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를 뿌렸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단편적인 견해이며, 일차원적인 접근이고,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일어나고 소멸된다는 연기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결과인가.

이처럼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의존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일어나면 그로인한 다양한 ‘저것’들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어 있고, 또 그 ‘저것’들은 또 다른 제2, 제3의 ‘저것’들을 무수히 만들어 낸다. 연기를 모르면 그 근본 원인이 ‘이것’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제3, 제4의 ‘저것’들에서만 문제를 밝혀내고자 애쓰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지구나 우리 생활 속의 모든 일은 여러 가지 다른 일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의 작은 한 가지 구성원이 사라지면 곧 그것과 연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수많은 존재들이 사라지거나 직간접적으로 위험에 놓이게 되며, 결국 그것은 사람의 목숨까지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정신적 물질적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존, 공생의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 자연과 자연, 개인과 전체가 서로 서로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로써 공생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연의 한 개체가 파괴된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자연의 한 부분을 오염시킨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몸을 오염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그 어떤 현상일지라도 A의 결과는 B라고 하는 단편적이고 직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접근하면 그 현상에 대한 온전한 통찰이 어렵다. 모든 존재며 현상들은 어느 것 하나 전체적이며 우주적이고 연기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어떤 한 가지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중층적이고 무량하게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그 한 가지 일에는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를 피우는 데에도 온 우주가 동참하고 있다. 한 겨울의 얼어붙은 땅을 뚫고 피어나는 봄 꽃 한 송이에도, 한여름 우거진 녹음이며 쏟아지는 장대비에도, 가을철 아름다운 단풍과 이어지는 첫 눈의 설레임에도 크고 작은 온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연기적인 대 화합의 오케스트라를 장엄하게 연주해 줌으로써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면서 내 발을 씻어주는 생생한 현실 속에도 달의 인력이며 수 억 광년 떨어진 별의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

꽃 한 송이는 그저 단순한 꽃 한 송이가 아니라, 연기적으로 온 우주가 함께 피워낸 꽃이요, 온 우주의 숨결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나도 단순히 내가 아니라 온 우주의 반영이며, 우주적인 진리가 나로써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하나, 행동 하나 하나가 낱낱이 온 우주로 퍼져나가고 있고, 온 우주와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공존 공생하고 있다. 온 우주가 더불어 나를 살려주고 있고, 나를 돕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너’를 돕고 있다. 이처럼 온 우주가 한 송이 연꽃이요 평화로운 한 가족이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만공스님의 일갈도 이 같은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나온 깨침의 언어인 것이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어리석은 자들은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인 줄을 모르고 있어.
그래서 나와 너를 구분하고,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다투고 빼앗고, 죽이고 있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라.
흙이 있어야 풀이 있고,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

남편이 있어야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부모가 있는 법.

남편이 편해야 아내가 편하고,
아내가 편해야 남편이 편한 법.
남편과 아내도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이요,
이웃과 이웃도 한 송이 꽃이요,
나라와 나라도 한 송이 꽃이거늘,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을 바로 지니면 세상은 편한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참 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중생심에서 보면 나와 너, 남편과 아내, 이웃과 이웃, 나라와 나라, 내 종교와 네 종교, 인간과 자연 등 수많은 분별이 작용하여 ‘나’, ‘내 것’ 이라는 이기와 아집을 형성하지만, 연기적으로 보면 너가, 이웃이, 타인이, 다른 나라가, 다른 종교가, 자연이, ‘나 아닌 것들’이 모두 ‘나’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나’‘내 것’‘내 종교’‘내 나라’ 때문에 온갖 시비와 분별, 욕심과 전쟁 등을 초래하지만 연기적 시각에서는 그 모든 것이 동체적인 모습으로 한 뿌리, 한 몸, 한 가족일 뿐이다. 거기에서 온 우주와 나를 다르게 보지 않는 동체대비의 자비가 싹튼다. 이기는 사라지고 참된 사랑이 움튼다.

이러한 연기법의 상호의존관계에서 볼 때, 그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 말을 잘 살펴보면 이 속에는 그 어떤 존재도 실체적인 자아가 있지 않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인간도 인간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도 자연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인간과 자연은 공존, 공생의 관계이며, 그 둘은 모두 인연에 의해 존재하므로 비실체적인 것이다. 즉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는 무아(無我)인 것이며, 공(空)인 것이다.

그렇듯 일체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뗄 수 없는 연기적 동체(同體)의 존재요, 서로가 독자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비실체적 공생의 존재이며, 그렇기에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일체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자기 몸처럼 아껴주고 도와주며 존중해주는 자비를 실천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연기적인 삶의 기본 원칙은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의상관의 연기법과 그렇기에 그 어떤 존재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실체적 자아를 내세워 이기심을 축적할 수 없다는 공과 무아와 아집의 소멸, 그리고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되는 필수불가결한 한생명이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한 가족과 같은 따뜻한 사랑과 자비로써 대해야 한다는 자비사상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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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발생에 대한 공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으며 공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자동차 한 대를 놓고 보면 차는 차로써의 이름이 있고, 차로써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은 차의 낱낱의 모든 부품들이 인연 따라 잘 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에 인연 따라 잘 조합되어 있지 못하고 바퀴 따로, 운전대 따로, 엔진 따로, 모든 것이 따로 따로 다른 공간에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을 보고 ‘자동차’라고 이름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한 공간에 그것도 반드시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낱낱의 부품들이 서로 서로를 의지하고 연하여 잘 모여 있을 때에만 자동차로써의 존재 가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자동차는 각각의 부품들이 서로 서로 의지하여 너트는 볼트에 의지하고, 볼트는 너트로 말미암아 함께 붙어 있게 되고 그런 수많은 상의상관적인 의존관계 속에서만 자동차는 이 한 공간에 조화롭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존재의 발생에 대한 공간적인 연기의 표현으로 본다면,‘볼트가 있으므로 너트가 있고’‘너트가 있으므로 볼트가 있으며’, ‘타이어가 있으므로 타이어휠이 있고’‘타이어휠이 있으므로 타이어가 있고’, ‘엔진이 있으므로 미션이 있고’‘미션이 있으므로 기어가 있고’,

이와 같은 자동차를 이루는 모든 부품들이 서로 서로 ‘~말미암아 일어나는’연기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동차의 모든 부품 하나 하나는 서로 떼어내려고 해도 떼어낼 수 없는 관계이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함으로써만이 한 공간에 자동차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동차는 자동차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부품 하나하나가 연기로써 모여 인연화합을 이루어야지만 자동차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형성이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연기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바른 관계성을 유지해야지만 존재되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 뿐 아니라 존재가 이루어내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 사람을 흉 보고 뒷담화를 하게 될 때 A라는 사람은 전혀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이 없는 줄 알고 화장실에 가서 험담을 했는데 알고 보니 화장실 안에서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면 A라는 사람은 몹시 기분이 상할 것이다. 똑같이 A라는 사람에게 욕을 했지만 그 공간이 어떤 공간이었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껄끄러운 인연관계가 될 수도 있고, 원수 같은 앙숙이 될 수도 있지만, 또 어떤 공간이었느냐에 따라서 그 험담이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 또 같은 험담이더라도 친한 친구끼리의 허물없는 자리에서 하는 것과 맞선을 보는 자리나, 사업적인 자리에서 하는 것과는 크게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상황도 공간적으로 어떤 조건과 원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교통사고가 나는 상황을 보더라도, 졸음운전으로 중앙선 침범을 했을 때 마침 그 공간에 상대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가 없었다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만약 그 순간에 그 공간에 상대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가 있었다면 큰 사고가 나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연기의 공간적 이해로 본다면 ‘졸음운전이 있으므로 중앙선 침범이 있고’‘중앙선 침범이 있으므로 사고가 있고’‘사고가 있으므로 죽음이 있다’그러나 상대 차선에서 오는 차가 없었다면 이 연기는 이런 비극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저홀로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함께 하고 있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법칙은 같은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존재방식이 상호의존적이며 상의상관적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숨을 쉬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만약에 공기가 없다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기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 공기는 숲과 나무가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숲과 나무가 없다면 머지않아 생명은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나무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숲이 있으므로 내가 있는 공간적인 연기법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뿐인가. 태양이 없어도 살 수 없으며, 물이 없어도, 흙이 없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태양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물과 흙이 있으므로 내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쌀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농부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논과 밭이, 과일과 채소가, 시내와 강이, 호수와 구름이, 정치인과 경제인이, 도매상인과 소매상인이, 옷과 집이, 옷 만드는 사람과 집 짓는 사람이, 나아가 이 우주의 일체 모든 것들이 있으므로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우주의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존재가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를 키워내며,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는 상호의존적인 연기의 법칙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자연이 긴밀한 상호의존과 상의상관 속에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인간들은 인간과 자연을 마치 서로 다른 존재인 것 처럼, 전혀 상관이 없는 것 처럼 자연에 대한 대대적인 훼손과 파괴를 자행해 왔다. 자연의 파괴와 훼손 위에 기초한 개발과 발전, 산업화와 도시화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인간이 자연을 파괴한 만큼 자연은 고스란히 인과응보를 인간에게 되돌려 주고 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오늘날의 전세계적인 환경오염 아니 환경재앙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것이 모두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자연이 있으므로 인간이 있다’는 연기의 법칙을 모르는 어리석음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유럽이며 선진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연환경은 그대로 두고 후진국의 자연을 파괴시켜 온 그 기초 위에서 자신들의 행복을 세우려고 했지만, 결국 환경재앙은 후진국만이 아닌 전세계적인 대재앙이 되고 있다. 자신들의 숲은 살려두고 저 브라질이나 아프리카의 밀림을 대규모로 파괴하고 있지만 결국 지구 전체의 살림부족으로 나타나 지구온난화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의 세계에서 본다면 전 세계는 모두가 한생명이며 공동운명이기 때문에, 아프리가의 밀림이 있어야 우리의 숲이 있고, 숲과 자연이 있어야 우리가 마실 공기가 있고, 맑은 환경이 있어야 우리의 생명의 터전이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서로 다른 남남이 아니고, 적이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키워주고 도움을 주고 받는 상호의존, 상의상관이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의 숲이 사라자고 사막이 늘어나는 일이 결코 중국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곧 황사로써 한국과 일본 그리고 많은 나라에 직접적인 피해를 가져오고 있다. 중국의 숲이 있어야 한국의 맑은 자연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밥을 먹을 수 있어야 내가 굶지 않을 수 있고, 중동에 평화가 있어야 우리나라에도, 내 안에도 평화가 깃들 수 있으며, 브라질의 아마존이 있어야 나에게 맑은 공기가 있고, 전 세계적인 자연환경의 보호가 있어야 우리의 아름다운 미래가 있을 수 있다.

연기법에서는 온 우주가 이와 같이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나비효과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우주의 어느 한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대로 다른 모든 이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둘째,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발생에 대한 시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으며 시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공간적인 자동차의 연관관계를 살펴보았는데, 시간적인 의존성과 관계성을 살펴본다면 자동차의 역사를 거슬러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자동차가 있고, 그 자동차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공간적인 부속들의 인연화합의 결합에 따라 자동차로써 존재하고 있지만, 사실 그 자동차가 이렇게 만들어지기까지는 단순한 공간적인 결합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자동차 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하여 지금의 자동차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누군가가 둥근 바퀴를 만들었을 것이고, 연이어 수레가 만들어 졌을 것이며, 처음에는 소나 말 등의 가축이 끌기도 했을 것이고, 이윽고 증기 자동차를 거쳐 가솔린 자동차 등의 단계별로 발전을 이루어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적인 연관관계를 볼 때, 지금의 자동차는 어느 날 갑자기 저홀로 생겨난 것이 아니며, 오랜 역사를 두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탈 것으로 발전해 결국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즉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연기의 법칙에 따라 둥근 바퀴가 생함으로 수레가 생했고, 수레가 생함으로 우마차가 생했고, 우마차가 생함으로 증기 자동차가, 증기자동차가 생함으로 가솔린 자동차가, 가솔린 자동차가 생함으로 오늘날과 같은 자동차가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가 발생하는데는 오랜 세월 그것이 발생하기까지의 수많은 다양한 노력과 조건과 원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듯이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시간적인 여러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시간적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나는 나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어머님과 아버님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부모님도 마찬가지로 당신들의 아버님과 어머님이 계셨기에 존재할 수 있었고, 또 그 부모님의 부모님, 그 부모님의 부모님까지 계속해서 거슬러 가다 보면 수없이 많은 조상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로부터 20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209만 명, 30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21억이 넘는 조상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니, 엄밀히 말하면 이 수많은 조상님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 빠진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사람도 그 사람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 때인가 저 위의 조상님들 대에서는 부부였을 수도 있고, 형제나 부자지간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한 뿌리요, 한 가족, 한 생명이 아닌가. 이렇게 보았을 때 역사의 모든 인물들은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씨줄 날줄로 서로 서로 얽혀 있을 것이고, 그 모든 이들의 삶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지금의 나란 존재는 시간을 거슬러 일체 모든 과거의 조상들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 부모님이 생함으로 내가 생했고, 할아버님이 생함으로 부모님이 생했고, 증조 고조 할아버지가 생함으로 할아버님이 생했으며, 나아가 수많은 조상님들이 생함으로 지금의 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현대 자연과학의 진화론에서 보면 수많은 포유류가 있지만 그들의 두개골을 이루는 뼈의 수나 기능과 구조 등이 모두 같으며, 목뼈를 놓고 보더라도 그 개수가 기린과 같이 목이 긴 동물이나 사람을 비롯한 목이 짧은 동물이나 모두 같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고래의 앞지느러미나 포유류의 앞발, 그리고 새의 날개 등도 지금은 서로 다른 기능과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그 기본형은 같다고 한다. 이것은 이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적응하며 살다보니 자신의 신체 구조와 기능이 바뀌었을 뿐이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모두 같은 조상에서 유래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상의상관적인 시간적 연관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존재들과 인간 사이에도 시간적인 연기의 관계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존재의 발생에 대한 시간적인 연기법의 측면에서 볼 때, ‘조상이 생함으로 내가 생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조상 안에는 온갖 동물들의 조상도 포함되며, 나아가 인간과 동물들의 조상이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조상이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결국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독자적으로 홀로 태어나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시간적으로 수많은 생명들의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환경문제라는 것도 과거의 수많은 개발과 발전으로 인한 자연의 파괴가 결국 오늘날의 환경재앙과 기상이변 등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산업혁명으로 인해 촉발된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각종의 개발과 발전이 생겨남으로 자연환경의 파괴가 생기고, 자연환경의 파괴가 생김으로 기상이변이며 지구온난화 등의 환경재앙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며 상황은 시간적으로 수많은 다른 존재와 상황들과의 상호작용과 연관관계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