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운명이나 숙명 대신에
스스로의 삶을 내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다는 인과(因果), 업보(業報)론에 기초하고 있다.
누구나 물론 전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자기만의 삶의 모습을 갖고 태어난다.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살 것인지,
어느 정도의 학벌과 능력과 외모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얼마 정도의 행복을 누리다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에 대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정해진 업력(業力)을 받고 태어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떤 배우자를 만날 것인지,
어느 정도의 대학이나 학벌을 가지게 될 것인지,
어떤 회사에 취직하여 어느 정도까지 진급을 하게 될 것인지,
어떤 인연을 만나서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받게 될 것인지,
언제 어떤 병이나 사고로 얼마만큼 고통을 겪게 될 것인지,
돈과 재산은 어느 정도를 벌어 쓸 수 있을 것인지,
그렇게 살다가 언제쯤 몇 살 쯤 죽어갈 것인지,
그런 것들에 대한 삶의 윤곽이 전생의 업식(業識)에 의해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전생의 업을 그대로 받을 것이니
이번 생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절대 그 업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것도 인생 일대의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말로 행동으로 생각으로 행하는 행위이다.
전생, 또 오랜 전생을 이어오며 지어왔던 온갖 행위들이
지금 내 안에서 기본적으로 이번 생을 어떻게 펼쳐나가게 될지에 대해
결정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정의 원인은 내 과거의 행위에 있다.
내 과거의 온갖 행위들에 의해 내 현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가.
결론은 내 현재의 행위에 따라 또 다시 내 미래가 바뀔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자신의 마음에 따라,
자신의 욕심과 집착의 크기에 따라,
자신의 마음공부와 수행과 기도의 정도에 따라,
내 삶은 언제든지 180도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달라질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 삶은 그 괘도를 수정해 나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일 있을, 내년에 있을 내 삶의 괘도가
내 행위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되어지고 있다.

그것을 운명이나 숙명이라고 이름 짓지 않고
업(業)이라고 이름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운명이나 숙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반해
업이라는 것은 언제고 바꿀 수 있으며,
바꿀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순간순간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오늘 힘겹게 살아가는 소년 소녀 가장을 만나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고,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 주었다면
바로 그 한 번의 행위가
1년 뒤 파산할 지 모르는 업연을 2년 뒤로 늦춰줄 수도 있다.

이웃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과 벗을 찾아가 위로해 주고,
지혜로운 삶의 길을 안내 해 주었다면,
이번 생에는 있지도 않았을 선지식 스승과의 인연이 생겨날 수도 있다.

오늘 부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마음을 비우며
그동안 가지고 있던 욕심과 집착을 말끔히 비워냈다면
다음 달에 닥칠지 모를 급성 위장염이나 위암 판정이
10년 쯤 뒤로 늦춰지게 될 수도 있다.

오래도록 마음속에 응어리 져 있던
미워하는 원수에 대한 불같은 화를 다스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를 해 주었다면
몇 달 뒤에 닥칠지 모를 홧병이 소멸될 수도 있다.

필요하다고 그 때 그 때 사 들이고,
여유가 있다고 아끼지 않고, 절약하지 않았던 삶의 습관이
10년 뒤에 올 퇴직을 1년 뒤로 앞당길 수도 있고,
나보다 못난 사람,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한 마디의 말이
지금의 내 높은 지위를 1년 빨리 끌어내릴 수도 있다.

어디 그 뿐인가.
파리나 모기, 풀벌레와 작은 곤충들의 생명을
별 생각 없이 죽이거나 괴롭혔다면
그것은 내 명(命)을 몇 년씩 앞당기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산을 함부로 깎고, 나무를 함부로 베는 행위로 인해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폭풍우가 내가 사는 지역을 강타했을 때
바로 내가 사는 집이 무너지고, 내 터전이 깎여나갈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행위에 따라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업은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불교의 제행무상이라는 이치에 따르면
그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업이라는 것 또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매일 매일 달라지고 지속된다는 것은
받아야 할 업의 과보 또한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구의 삼업,
신구의 삼업을 돌이켜 보라.
매일 매일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어떤 행위를 해 왔는가를 놓치지 말고 살피라.

삼업에 대한 일기를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삼업 일기장’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뉠 것이다.
첫 번째 단락은 몸의 행위를, 두 번째는 입으로 쏟아낸 말의 행위를
세 번째는 마음에서 일으킨 온갖 생각의 행위들을 적는 것이다.

몇 일, 몇 주, 몇 달 동안 삼업의 일기장을 쓰다 보면
업의 일정한 패턴을 살피 수 있을 것이다.
주로 어떤 악업을 많이 짓고 있는지,
어떤 선업들을 많이 행하고 있는지,
복은 얼마나 짓고 있는지, 죄는 얼마나 짓고 있는지,
탐욕에 따른 행위가 많은지, 성냄에 따른 행위가 많은지,
다양한 업의 패턴을 살펴보면
이제부터 내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것이다.

물론 전생부터 이어 온 내가 모르는 업들은 제쳐두더라도
삶에 대한 획기적이며 경이로운 성찰이 찾아 올 것이다.



업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선한 것들의 종류와 악한 것들의 종류가 있다.

말로써 하는 구업을 지을 때도
칭찬을 하거나, 조언을 해 주거나, 진리를 설해 주거나,
따뜻한 격려를 해 주는 등의 선을 베푸는 행위가 있을 수 있고,
비난을 하거나, 욕설을 하거나, 이간질을 하거나, 꾸며낸 말을 하는 등의
악을 행할 수도 있다.

마음으로써 하는 의업 또한
마음 속으로 미워하거나, 성내거나, 욕심내거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등의 악한 것들이 있고,
사랑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내며,
소박, 정직, 지혜, 나눔 등의 아름답고 선한 것들도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행하는 거의 모든 행위는
선하거나 악한 쪽으로 향한다.
선한 쪽으로 우리의 업을 펼쳐내는 것,
바로 거기에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열쇠가 담겨 있다.

업을 변화시키는 첫 번째 가장 큰 행위가 바로
보시 행이다.

선을 행하는 것,
내 것을 나누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업을 뛰어넘는 최고 단계의 실천 수행이다.

월급에서 일정부분을 떼어 내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해 사용하는 것,
또한 진리와 지혜를 많은 이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 전법하는 것,
필요가 아닌 욕망으로 많은 물건을 사들이기 보다는
꼭 필요한 것들만 소박하게 구입하여 쓰는 것,

내 것이 아니라고, 소모품이라고, 돈이 넉넉하다고 낭비하기보다는
물 한 방울이라도 아껴쓰고 근검 절약하는 것,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두려움을 주지 않아
나를 만나는 모든 이들이 평안을 느끼도록 하는 것,

이러한 작지만 분명한 한 가지 보시의 행이
내 앞에 펼쳐질 앞으로의 삶을 하나 하나씩 바꾸어 간다.
이러한 이타적인 업의 행위야말로
내 삶을 바꾸고, 내 미래를 바꾸는 결정적인 요소다.

두 번째로 운명을 뛰어넘는 요소가 바로 수행이다.
마음에 욕망과 집착을 비우고,
번뇌와 아상을 놓고 비우는 삶,
그것이야말로 업을 뛰어넘는 비결이다.

내가 잘났다는 생각, 내가 옳다는 아집을 놓아버리는 것,
내 소유와 내 물건이라는 소유욕을 놓아버리는 것,
모든 판단과 분별을 쉬는 것,
시비 분별을 끊고 올라오는 모든 생각들을 묵묵히 지켜보는 것,

좌복을 깔고 앉아 좌선에 드는 것,
경전을 공부하고, 독경하며, 지혜의 말씀을 사유하는 것,
매일 아침이나 저녁으로 108배 절 수행을 하는 것,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명호를 염불하거나 다라니, 진언을 독송하는 것,

이러한 작지만 분명한 지혜를 닦는 비움의 수행이
내 앞에 펼쳐질 앞으로의 삶을 하나 하나씩 바꾸어 간다.
이러한 자리적인 청정한 수행이야말로
내 삶을 바꾸고, 내 미래를 바꾸는 결정적인 요소다.

이치가 이러할진대
점을 보고, 사주팔자를 보며, 운명과 관상을 본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가.

사주팔자를 보며, 운명을 점치는 것은
이미 주어진 업을 더욱 강화시켜
더 이상 내 스스로 업을 변화 발전시킴으로써
업의 뛰어넘을 수 있는 본연의 무한한 능력을 축소시키고 만다.

사주를 점쳐 볼 바로 그 시간에 차라리
‘일체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소멸되고 평안하소서 안락하소서 행복하소서’
라는 자비의 게송을 읊는 것이 더욱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더욱 지혜로운 방법이다.

운명을 거부하는 것은 모든 고의 시작이며,
운명에 순응하는 것은 평범한 수준이지만,
운명을 스스로 바꾸고 개척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수행자가 가야 할 당당한 삶의 길이다.

어제와 오늘, 조금 전과 바로 지금의
나의 선한 행동, 나눔의 행동, 사랑의 행위, 깨어있는 행위가
내일 있을 괴로움을 몰아내고,
다음 주에 있을 병고를 없애주며,
다음 달에 있을 퇴직을 막아주고,
내년에 있을 이혼을 없애주며,
몇 년 뒤에 있을 단명의 업을 소멸시켜 줄 수 있다.

반대로 오늘 내가 행한 악행이
내일 있을 괴로움을 다음 순간으로 앞당기고,
다음 주에 있을 병고를 내일로 앞당기며,
다음 달에 있을 퇴직을 다음 주로 앞당기고,
내년에 있을 이혼을 다음 달로 앞당기고,
몇 년 뒤에 있을 단명의 업을 내년으로 앞당길 수 있다.

미래가 불안한가,
노후가 불안한가,
그 모든 불안을 해소시킬 유일한 탈출구는
바로 지금이며,
그 불안을 소멸시키는 약이 바로
사랑이 담긴 선행이며, 자비로운 나눔과 보시에 있다.



나눔과 비움, 보시와 수행, 복과 지혜,
이 두 가지의 실천이야말로
모든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삶의 길을 보여주는
유일한 진리의 나침반이 될 것이다.

혹 나는 공부에는 재능이 없다거나,
부유함은 나와는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체념한다거나,
내 운명은 어차피 진흙탕 속이라고 좌절하거나,
내 주제에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라고 주저하거나,
나 같은 악행을 많이 한 사람이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염려하거나,
내 삶은 포기와 좌절과 절망 뿐이라고
주어진 운명을 비관하지는 않았는가.

아직 비관할 때가 아니다.
절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니 그런 운명도, 그런 때도 없다.
이 세상에 정해진 운명이란 어디에도 없다.

언제든 마음을 돌이켜 ‘지금 여기’에서 시작한다면
수북이 쌓인 마른 풀이 성냥불 하나에 불타 없어지듯이,
수백 년 동안 어두웠던 동굴이 불빛 하나에 환히 밝아지듯이
어제의 모든 죄업은 일시에 소멸될 수도 있다.

내 삶은 내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다.
내 운명은 내 스스로 개척한다.
업이라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내 스스로 그 업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매 순간순간 업을 뛰어넘을 수 있는,
업을 경이롭게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지혜와 복덕이 담긴 행위를 해 나가고 있는가.
마음을 비우고, 소유를 나누는 비움과 나눔의 행위를 해 나가고 있는가.

작은 비움 하나가,
작은 나눔 하나가,
내 삶의 변화시키고 진화시킬 수 있다.

작은 비움,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
싫어하던 내 외모를 받아들이는 것,
기분 나쁘던 사람을 이해해 주는 것,
욕심 내던 것을 하나씩 포기해 가는 것,
집착하던 사람을 놓아주는 것,
혹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는 것,
아껴쓰고 절약하는 것,
소박하고 청빈하게 사는 것,
꼭 필요하지 않으면 사지 않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견해를 놓아버리는 것,
편견과 선입견을 비우는 것,
옳다 그르다는 생각들을 묵묵히 관하는 것,
매일 아침 절 수행을 하는 것,
염불, 독경, 진언, 좌선 수행을 하는 것,
때때로 주말에 가족이 함께 주말 템플스테이에 참여하는 것,
큰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
불경이나 불서를 가까이 하는 것,
마음을 관하는 것,
이러한 작은 비움들이
내 운명을 변화시키고 내 업을 바꾼다.

작은 나눔,
이웃을 보고 안부를 나누고 인사를 나누는 것,
지나치던 어린 아이에게 미소를 보내는 것,
직장의 청소부 아주머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
버스 기사 아저씨께, 톨게이트의 매표원 아주머님께 캔커피 하나를 드리는 것,
아내가 차려 준 밥상과 반찬에 칭찬세례를 퍼 붓는 것,
아들의 좋지 않은 성적에 웃으며 격려해 주는 것,
친구의 고민을 내 일처럼 들어주는 것,
나를 만나는 사람에게 나로 인한 불편함이 없게 해 주는 것,
남들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봉사하는 것,
내 집과 이웃 집 앞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것,
주말에 가족이 함께 고아원을 방문하는 것,
TV에 나오는 불우이웃을 위한 ARS에 때마다 전화하는 것,
매월 일정액의 보시를 행하는 것,
경전이나 지혜의 책들을 보시하는 것,
부처님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
이 세상을 향해 ‘고통이 소멸되고 평안하소서 안락하소서 행복하소서’라고 축원하는 것,
이러한 작은 나눔들이
내 운명을 변화시키고 내 업을 바꾼다.

이러한 나눔과 비움의 실천이
언젠가 있을 내 인생의 온갖 재앙들을 물리치고,
언젠가 있을 내 인생의 온갖 행복들을 더욱 더 몰고 온다.



[사진 : 승주 선암사]










Posted by 법상





평화로운 오후, 길을 걷고 있던 사람이
대형 광고판이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고,
또 다른 사람은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다가
광고판이 머리에 맞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복잡하던 길, 복잡하던 마트에서
수많은 사람이 그 광고판 아래를 걷고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불행하게도 그 사람에게, 그 순간에
그 광고판이 떨어지게 되었을까?

일부러 어떤 사람이 광고판 위에 서 있다가
그 사람을 맞추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떨어뜨려
정확히 그 사람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불교에서는 우연이란 없다고 말한다.
그것 또한 그 사람의 인연이요 업이다.
다시말해 그 사람은 그 아래를 정확히 그 시간에 걷도록 되어 있었고,
그 때에 맞춰 그 광고판은 추락을 할 수밖에 없던 인연이었다.

사람의 목숨이 아무런 인연도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이 그 때 죽어야 할 업도 아닌데,
아무 이유 없이 우연으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사라는 것은 정확하게 인연 따라 오고 갈 뿐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생긴다.
어떻게 그 광고판은 그 사람이 그 때 죽을 업이란 것을 알고
그 순간, 정확하게 그 사람을 맞췄단 말인가?

그 인과응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과관계라면 이해가 가지만,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 어떻게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도 인과관계와 인연법은 성립한다.

이 우주의 법칙은, 이 법계의 인연법이라는 법칙은
인간에게만, 혹은 생명이 있는 유정물(有情物)에게만 한정되는 법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뿐 아니라, 유정물 뿐 아니라
모든 무정물(無情物)에게까지 확장되는 우주의 법칙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유정물 뿐 아니라
무정물에게도 자비와 존귀함과 따뜻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보내야 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그 차가 자체 엔진고장을 일으켜 시동이 꺼지면서
고속도로에서 차가 갑자기 서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 대형사고가 났고, 많은 사람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그렇다면 그 사고에 연관된 많은 이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우연으로 그 사고를 당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고가 날 만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사고가 날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마침 그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소멸한다.
우연은 없다.

그렇다면 고장 난 자동차 엔진이
모든 인연법과 인과응보를 환히 알고,
사고가 날 모든 사람들의 운명과 업을 따져 본 뒤
그 순간에 그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꾸며낸 것인가?

그렇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해
그 자동차 엔진이 그런 일을 직접 했다기 보다는
이 법계의 인과응보라는 이치가 그 일을 계획하고
자동차 엔진은 거기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큰 틀에서
인연법이라는 법계의 큰 진리의 흐름 속에서
나고 죽으며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

이 쯤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자.
광고판이나 자동차 엔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몫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불교에서는 사람 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 나무와 풀과 개미와 이끼들조차
모두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며,
그들을 결코 인간 아래에 두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과 인간은 다르지 않다.

인간이 인간에게 죽음을 당할 수 있듯,
인간이 동물에게도 죽음을 당할 수 있고,
식물에게도,
심지어 위에서 보았듯 무정물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들과 인간은 인연법의 차원에서 서로 동등하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고장 나기 직전의 차였는데 주행 중에는 괜찮았고,
다행히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량이 고장 났다”고.
그래서 사고 없이 집까지 무사히 잘 왔다고 말이다.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아주 좋은 차를 타고 있었으면서도
차량이 문제를 일으켜 집까지 오는데
몇 시간이 더 걸렸을 수도 있다.

늦게 오는 것도 정확히 그럴 만한 인연이고,
사고 없이 빨리 오는 것도 그럴 만한 인연이다.

사업가가 아주 중대한 회사의 업무로
해외 사업가와의 미팅에서 차량 사고로 늦게 가는 바람에
그 큰 투자 사업을 망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량이 하필이면 왜 그 중요한 순간에 고장이 나는가.
차량 결함만 아니었어도 그 사업가는 대박이 났을 것인데.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차 고장만 아니었다면 완전히 대박이 났을까.
혹시 법계에서 그 사업이 대박이 나기에는 아직 이른 때라서,
아직 그 사람이 성숙하지 않았거나,
복이 부족했거나, 아직은 그 그릇이 작았거나 하는 이유로
차량 고장이라는 인연을 통해 그 사업을 뒤로 미룬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바로 그 차는,
차의 고장난 엔진은
온전한 법계의 이치에 따라
아주 여법한 진리를 수행하게 된 것이리라.

사람만 법계의 이치를, 인과의 이치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유정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처럼 무정물 또한 법계의 일부로써,
진리의 일부로써
바로 그 인연법이라는 우주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차의 탓으로 돌린다.
흥분해서 차 바퀴를 발로 걷어 차거나,
혹은 그 차를 폐차시키고 새 차를 사는 것으로 울분을 풀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차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내 문제다.
차가 바로 그 때 고장이 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주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 법계 우주가 각본을 쓰고 그 차는 단지 조연을 했을 뿐이다.
아니 법계와 차와의 공동감독에 공동주연의 연극이라는 편이 옳겠다.

어쨌든, 주연이었든 조연이었든
내 사업을 망친 직접적인 몫을 한 녀석은 자동차다.
그러니 자동차를 실컷 미워해도 좋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미워하는 만큼
법계의 일부분인 자동차도 나를 미워할 것이다.

손가락이 내 몸의 일부분이듯,
자동차는 이 우주법계의 일부분이다.
손가락이 아프면 나 또한 아프듯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도 아프다.
손가락이 아파 내가 아프면 어떻게든 손가락에게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에서도
자동차를 아프게 한 원인제공자에게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다.
바로 나에게.

그러니 자동차에게 분풀이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우주에게 진리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무정물 또한 인간과 유정물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존재이며, 존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유정무정 유형무형(有情無情 有形無形)’의 모든 존재가
다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정이란 나무나 돌 같이 감각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형이란 형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그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

옛 스님들은
“푸른 대나무숲 모두가 진여(眞如)요,
피어 늘어진 노란 꽃은 반야(般若) 아님이 없다.”고 했다.

[보장론(寶藏論)]에서는
“불성은 모든 것에 가득하고 풀이나 나무에도 깃들어 있으며,
개미에게도 완전히 퍼져 있으며, 가장 미세한 먼지나 털끝에도 있다.
불성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 『莊子』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답이 있다.

동곽자가 장주에게 물었다.
"도(道)라고 불리는 것, 그것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장주가 말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동곽자가 말했다.
"그것이 있는 곳을 지적해주십시오."
"개미에게 있다."
"그렇게 비천한 것에 있습니까?"
"작은 풀에도 있다."
"그것은 더욱 비천하지 않습니까!"
"벽돌이나 기왓장에도 있다."
"어떻게 그렇게 비천한 곳에 있을 수 있지요?"
"오줌과 똥에도 있다"
동곽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대 과학에서도 유정물과 무정물을
정확히 구분 짓기 어렵다고 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유정물, 다시말해 생명체는 DNA라는 복제 가능한 유전물질 지니고 있어
생식활동을 통해 자손을 만들어 내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무정물, 무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와 광우병의 원인체를 규명하면서 밝혀진
프리온이라는 원인물질이 유전자가 전혀 없는 단백질에 불과하지만
생물체내에서 증식하고 전파되어 확산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은 전면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 때 비로소 생명과학자들은
생물과 무생물, 유정물과 무정물이란 경계가 따로 없음을 깨닫게 된다.
유정, 무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분류이자 분별이었을 뿐이지,
본래 그렇게 나뉘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큰 한 바탕으로부터 비롯되어
여러 원인과 결과에 의해 만들어진 모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밝힌 미국의 프루즈너 교수는 97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유정물이나 무정물이라는 것은 단지 이름일 뿐,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 인간이 더 귀하고 천하다고,
더 우월하고 열등하다고 나누어 놓았을 뿐이지,
그 본 바탕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아무리 하찮다고 생각되는 무정물일지라도
그로인해 내가 죽음을 당할 수도 있고,
또한 그로인해 내가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옛 스님들은 무정물이 언제나 법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을 듣는 것은 오직 성인들 뿐이라고 했다.

하찮다고 생각되는 발 아래의 꽃을
신비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기 위해 고개를 숙임으로써
나에게 날아오던 화살을 피하게 될 수도 있고,
밤길에 차를 타고 가다가 불쑥 나타난
토끼 한 마리를 피하려다가 사고가 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내 운명을 갈라놓을 수도 있다.

내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이
반드시 인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찮다고 생각했던 무정물이 내 생사를 결정지을 수도 있고,
내 운명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 우주의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들이 모두
나와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하나도 하찮은 것이 없다.
더 귀하거나 천한 것은 없다.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소중한 것 처럼, 사람이 소중한 것 처럼,
똑같이 나무와 풀과 산과 흙과
심지어 자동차와 의자와 집과 컴퓨터 또한 소중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섰을 때처럼,
존경하는 스승 앞에 섰을 때처럼,
부처님 앞에 섰을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모든 존재 앞에 서라.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모든 존재 앞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마음으로 다가 서라.

일체 모든 존재를 존중하며 감사하고
찬탄하며 존귀하게 여기라.
이 세상의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에게
무한한 공경심으로 엎드려 절하라.
매 순간 세상 만물에게 기도하라.

유정물과 무정물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그 모든 것들이 인연법의 진리 안에서
동등한 입장으로 나와 인연을 짓고 있음을 안다면,
세상에는 더 이상 존귀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은 경이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세상을 향한 지고한 공경심!!
모든 존재를 향한 평등한 자비심!!
이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이 세상을 향한 마음이다.

학창시절에 원소, 원소주기율표라는 것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 때 나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간 학교에서 가르쳤던 것은 인간이 우월하다는 것이었고,
도저히 인간과 자연, 인간과 무정물은 하늘과 땅 차이일 수밖에 없었는데,
인간과 자연, 유정물과 무정물을 이루는 근본 원소는
동일한 것이라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동일한 원소들이 ‘어떤 인연으로 모였느냐’에 따라
인간도 되고, 동물도 되고, 식물도 되고,
심지어 자동차도 되고, 빌딩도 되고, 집도 되고, 물도 된다.
이것은 유정물과 무정물이 그 어떤 차별도 있지 않다는 반증이 아닌가.
우리는 결국 동일한 것들이 모여서 겉모습의 차이를 만들어 낼 뿐이지,
근원적인 어떤 높고 낮거나, 귀하고 천하거나 하는 차별은 없다.

나는 때때로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호젓하게 벗어나
홀로 산 길을 걸을 때,
아니면 낯설고 인적 드문 여행지를 거닐 때,
그럴 때조차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어떤 ‘존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미세한 느낌을 받곤 한다.

우리가 완전히 혼자 있을 때조차 사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발딛고 서 있는 대지와 흙과 함께 있는 것이며,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유정물, 무정물이
내 곁에서 따뜻한 도반으로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이러한 통찰 속에서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공경심과 찬탄과 신비 속에 머문다.
어찌 이런 세상이 신비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사소하거나, 하찮거나, 귀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통찰은 우리의 삶을
모든 존재를 향해 활짝 열려 있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향해 존중과 찬탄과 감사와 공경심을 갖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평등한 부처로써 섬기고 시봉할 수 있게 해 준다.

자동차를 타고 멀리 출장을 갈 때
자동차를 향해 동료의식을 가지고, 도반의식을 가지고
존중하며 감사하고 공경스런 마음을 보내라.
내 마음이 자동차를 향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향한
한없는 자비심과 공경심으로 넘칠 때
오늘의 운행은 안전하게 법계에서 자동차와 공동으로 도울 것이다.

설령 오늘 자동차 사고가 날 업이었다고 할지라도
모든 존재를 향한 깊은 존중과 감사와 공경심으로
조금 더 주의 깊게 운전을 함으로써
그 차량사고의 인연이 소멸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이나 식물도 사람 마음이 존중과 사랑과 자비로왔을 때
그 결정이 아름다워지고, 식물도 고요한 파장을 보낸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사람 마음에 따라 세포와 원소의 차원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그러니 모든 기도의 핵심인 감사와 존중과 공경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
그 주위의 모든 유정물, 무정물은
아름답고도 청정한 파장과 세포와 결정을 보여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감사와 공경심으로 충만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이
욕심과 화와 질투로 가득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에 비해
사고가 날 확률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의 마음자세가 운명을 바꾸고 업을 바꾼다는 말이다.
업장소멸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운명론이나 숙명론을 거부하지 않은가.
그 이유는 그 어떤 업일지라도, 그 어떤 과보일지라도
마음에 따라, 기도와 수행과 복덕을 얼마나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받아야 할 업장을 뒤에 받을 수도 있고,
다른 방법으로 보다 미세하게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침 공양을 하기 전에
물과 쌀과 야채와 수저와 식탁과 이 집에게 감사하라.
길을 걸으며 길가에 피어난 들꽃과
보도블럭과 신발과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무한한 공경을 보내라.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컴퓨터와 의자와 책상과 볼펜과 자판기와 책들과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도와주고 있음에 감사하라.

이처럼 무정물조차 나보다 못할 것이 없는
법계의 스승이며, 도반이고, 소중한 길벗이라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겠는가.

더 귀한 사람, 더 천한 사람,
더 중요한 사람, 덜 중요한 사람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일지라도,
바보나 정신병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이 생에서의 인연이 다했음을 알고 이교도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
그것이 바로 목련의 인연이었음을 바로 보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반대로 아무리 하찮게 느껴지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게서 내 인생의 가장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아주 나이 어린 어린이가 내 생명을 구해줄 은인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원수였던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니 사실은 내 인생에 귀하고 천한 사람은 없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거나, 좋거나 싫다고 정해진 사람은 없다.
모두가 똑같은 비중으로 존중받아 마땅한
내 삶의 부처요, 관음이고, 내 생명의 귀의처다.

귀한 사람에게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은 평범하다.
그러나 천한 사람에게 그 본질을 알고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의 이치를 몸소 깨닫고 실천하는 수행자다.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행하는 존중을 보내라.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에게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을 주라.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교수님들과 교직원 그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아주 유명했던 큰스님께서 감동스런 법문을 해 주셨던 적이 있다.
법문을 들으며 꼭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스님을 둘러싼 교수님들과 교직원분들의 눈치도 보이고
나 같은 한 명의 대학생의 질문이 거슬릴 것 같아 망설이다가
어렵게 나오시는 스님을 붙잡고 여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스님께서는 자비어린 시선으로 오래도록
내 눈을 진지하고도 진심어린 눈으로 마주보아 주시면서
나의 질문에 스님의 모든 노력을 다해 답변해 주셨다.
그 때 나는 너무도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어린 내 마음은 스님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아주 당연하지만 그 일은 오래도록 아주 특별한 경험으로 자리잡으면서
내 삶의 지침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 그 때 내가 했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은 기억에 없지만,
그 때의 그 존중받는 느낌과
나에게로 향한 그 스님의 집중과 자비와 눈빛은
두고 두고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몸소 깨닫게 해 주신
살아있는 법문으로 나를 밝혀주고 있다.

살아있는 지혜라는 것,
깨달음의 실천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을 보내주는 것,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존재에게
나의 모든 공경심을 바치는 것,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무정물들에게 조차
찬탄과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세상을 향한 차별 없는 열린 마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부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것이 부처다.










Posted by 법상




경계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대로 텅 비어 고요합니다.
여여하며 여법합니다.

그런 경계가 좋고 싫은 이유는
경계에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에 분별이 있는 탓입니다.

경계에 휘둘리는 마음 또한
내가 만들어낸 것이지
경계는 본래 휘둘리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맑은 하늘에
인연 따라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듯
텅 비어 고요한 본래자리에
인연 따라 이런 저런 경계가 잠시 모이고 흩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좋고 싫은 경계가 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분별의 경계가 꿈처럼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경계가 일어날 때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있는 그대로의 경계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모인 경계를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편견없이 바라보지를 못합니다.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모양을 짓고
좋고 나쁜 분별을 일으킵니다.

연이어 좋은 분별엔 애착[탐(貪)]의 마음을,
나쁜 분별엔 성내는 마음[진(嗔)]을 일으킵니다.
그런 두 가지 분별이 생기는 연유는
본래 나도 경계도 모두 공하고 허망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치(癡)]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경계는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아무런 분별이 없음을
밝게 깨쳐 알 수만 있다면 거기에 휘둘릴 것도 없습니다.

한 여름에는 너무 더워 짜증이 나고 화도 나고 그럽니다.
그러나 ‘더위’는 그냥 더위일 뿐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더위’일 뿐
좋고 싫다는 고정된 분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더위는 나쁘고 싫은 것이라든가
좋은 것이라든가 하는 분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텅 비어 고요한 더위라는 경계에
우리는 온갖 분별을 부여하고
그렇게 스스로 부여한 분별 때문에 괴로워 합니다.

한 여름에 땀을 뻘뻘흘리며 일을 할 때는
더위라는 경계에 ‘짜증난다’ ‘미치겠다’ ‘쪄죽겠다’ 하며
나름대로의 싫은 마음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애써 찾아간 사우나에 들어가면
그보다 더한 더위에서도 ‘시원하다’ ‘피로가 확 풀린다’
하고 좋은 마음으로 분별을 몰아갑니다.

본래 ‘더위’라는 경계는 텅 비어 고요하기에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더위’ 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서 좋고 싫다는 분별을 일으키고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은 분별 때문에 또 한번 괴로워합니다.

내 마음이 좋고 싫은 것이지
경계가 좋고 싫은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경계는 이처럼 아무런 잘못이 없고, 분별이 없지만
우리 마음은 작은 경계에도 끄달리고 휘둘리고 그럽니다.
그러니 제 혼자 만들고 그렇게 만든 분별로 인해
제 혼자 괴로워 하고 그러는 기가 막힌 세상입니다.

그러니 깨달은 이가 우리를 바라본다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밤하늘의 달을 보면서
한없이 북받쳐 오르는 우울함에 어쩔 줄 몰라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달을 보면서 행복해 합니다.
똑같은 달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사람, 적적해 하는 사람,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등 제각각입니다.

하늘의 달은 아무런 분별도 없고 잘못도 없습니다.
그냥 떠 있는 달일 뿐이지만,
우리 마음은 과거 달과의 연관된 기억이나 추억들로 인해
좋고, 싫고, 우울하고, 그리워하는 등의 분별을 일으킵니다.

육체적인 노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이라고 생각하면 힘들고 고된 일이 되지만,
운동 삼아 하는 일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기쁜 마음입니다.
일은 힘든 것이고 운동은 즐거운 것이지만,
사실 이 두 가지는 모두 똑같이 육신을 움직이는 것일 뿐입니다.

애써 운동을 하느라고 헬스크럽에 가서 땀을 뻘뻘 흘리며
육체적 한계를 느낄 만큼 무거운 역기를 들고도 힘든 줄 모르고,
샤워 후엔 그렇게 개운하고 시원하여 힘이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을 할 때면 그보다 더 가벼운 것을 들고도
쉽게 피곤해지고 노곤해져 일이 끝나면 녹초가 됩니다.

같은 육체적 노동이지만
마음 따라 일도 되었다가 운동도 되는 것입니다.
마음 따라 괴로워 녹초가 되기도 하고, 되려 힘이 펄펄 나기도 합니다.
육신을 움직인다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경계는 같지만 마음에서 일이다, 운동이다 분별하여
더 힘이 나게도 하고 녹초가 되게도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고 좋은 사람, 미운 사람 하고 분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누구라도 그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미운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밉다고 그 사람이 미운 사람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며,
내가 좋다고 그 사람이 좋은 사람하고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다 내가 만들어 놓은 분별일 뿐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고는
좋은 사람 보면 애착을 하여 헤어짐을 괴로워하고,
미운 사람 보면 괴로워하여 만남을 괴로워하고,
그렇게 제가 만들어놓은 틀에 제가 걸려 괴로워합니다.
기막힌 중생놀음이라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욕을 얻어먹으면 기분이 상합니다.
그러나 ‘욕’에도 좋고 싫음이 본래 없습니다.
내가 욕을 얻어먹거나
나와 가까운 사람이 욕을 얻어먹으면 기분이 상하지만,
미운 사람에게 누군가가 욕하는 것을 들으면 되려 통쾌합니다.

나와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즉 아상이 얼마나 큰 대상인가에 따라
같은 욕설에도 우리 마음은 천차만별로 변화합니다.
그러니 ‘욕’ 그 자체가 좋거나 싫은 것은 아닙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그럴듯한 욕은 참 듣기 좋기도 합니다.
본래 정해진 바가 없기에
인연 따라 좋았다가 싫었다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경계가 이와 같을진데
어찌 좋고 나쁨이 따로 정해져 있겠습니까.
똑같은 경계일지라도
좋다고 분별할 수도 있고, 나쁘다고 분별할 수도 있으며,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으며,
힘 빠지는 일일 수도 있고, 힘 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경계에 뭣하러 끄달립니까.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경계를 탓하는가 말입니다.
‘괴로움’ 하고 딱 정해졌다면이야, 절대적 괴로움이라면이야
어쩔 수 없이 괴로움을 당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도 절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괴로움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한 것입니다.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내가 선택하는 일인 것입니다.
경계는 아무런 분별도 잘못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택 또한 하나의 분별입니다.
그러니 그냥 놓아버리면 됩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그대로 자연스러운 세상입니다.
아무것도 잡지 않으면 그대로 고요한 세상입니다.
좋고 싫고 분별하지 않으면 그대로 해탈의 경계인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경계를
애써 좋다 나쁘다 분별하고,
행복하다 괴롭다 분별하여,
좋다고 잡으려 애쓰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느라
우리의 삶이 많이 번거로워 졌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평화로운데 말입니다.
그냥 놓아버리면 본래자리 그대로인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경계를 애써 탓하지 마십시오.
조건이 별로라고, 환경이 별로라고
부모님이 별로라고, 남편이 별로, 친구 성격이 별로라고 탓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는 절대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에게로 돌릴 일입니다.
내 마음이 변하면 경계는 따라서 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싫은 경계를 잡으면 괴로움이고,
좋은 경계를 잡으면 즐거움이지만,
그 마음 놓면 해탈입니다.
Posted by 법상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기본 법칙을 다른 관점에서 조금 더 확장해 보자. 이 법칙은 나아가 큰 것이 있으므로 작은 것이 있고, 옳은 것이 있으므로 틀린 것이 있고, 남자가 있으므로 여자가 있고, 깨끗한 것이 있으므로 더러운 것이 있고, 이 생각이 있으므로 저 생각이 있고, 생이 있으므로 노사가 있고, 중생이 있으므로 부처가 있고, 생사가 있으므로 열반이 있고, 이런 식으로 우리가 분별하고 있는 일체의 이원론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즉 크다 작다는 분별은 사실 고정적으로 크고 작은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큰 것이 있으므로 그것과 견주어 비교되는 작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키가 큰지 작은지는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결정되어지는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무인도에서 홀로 자라났다면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사람이라는 분별도 없었을 것이며,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키가 큰지 작은지,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똑똑한지 어리석은지 라는 일체의 분별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일체의 분별이 있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무언가 비교되고 견주어지는 다른 인연이 있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남자 여자라는 분별이 있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안 되고, 나라는 남자와 비교될 여자라는 타인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키가 작다는 것도 나보다 키가 큰 타인‘을 말미암아’ 작다는 분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양 극단의 분별은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연기되어진 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크다 작다거나, 남자다 여자다거나, 잘생겼다 못생겼다거나, 똑똑하다 어리석다거나 하는 두 가지 극단의 분별은 절대적이거나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 의지할 때에만 연기적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실체적 관념이 아니므로 공(空)하다고 한다.

또한 이런 양 극단의 분별은 끊임없이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무상(無常)이고, 그러므로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고정적인 자아적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키가 큰 사람도 농구 선수들 앞에 가면 작게 느껴지고, 키 작은 사람들 앞에서 있을 때 크게 느껴지는 것이듯이 인연따라 상황따라 변하는 것(무상)이며 그렇기에 ‘큰 사람’이라고 고정적으로 말 할 수 없다(무아)는 뜻이다.

이와 같이 양 극단의 분별로써 고정지을 수 없기 때문에 중도(中道)라고 한다. 즉 연기된 모든 것은 무상하고 무아이며 공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극단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항상 중도적인 치우치지 않은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한 사람을 보고 크다거나, 잘났다거나, 옳다거나, 혹은 작다거나, 못났다거나, 그르다거나, 그 어떤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도 인연따라 크거나 작을 뿐이고, 인연따라 선하거나 악할 뿐이며, 인연 따라 변해 갈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사람들을 볼 때 중도적인 치우침 없는 시선으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뒤에서 다시 언급하게 될 팔정도의 정견(正見)이다. 연기적인 시선이 바로 정견이며, 중도이고, 공과 무아, 무상의 바라봄인 것이다.

이처럼 연기적인 시각에서는 일체 모든 사람이 완전히 평등하며, 차별이 없어 높은 사람이라거나 낮은 사람이라거나, 능력 있고 없다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고 되지 않다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연기적인 시선에서, 또 깨달음을 얻으신 큰스님들의 시선에서 우리 모든 중생들은 똑같이 평등하고, 똑같이 사랑스러우며, 똑같은 존재감으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연기적인 치우침 없는 대 평등의 시선이 가능한 것이다.

옳고 그르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기법의 세상에서는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절대적으로 틀렸다거나 할 것이 없다. 옳고 그르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며, 연기적인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옳은 견해가 다른 나라에서는 그르게 나타날 수도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선이 다른 나라에서는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여인이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결혼하게 되어있고 그것이 옳은 이성관이지만, 예를 들어 무슬림은 한 남자가 네 명의 부인을 얻을 수 있고, 아프리카의 마사이족, 바쿠족, 간다족 등도 여러 아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부다처제와는 반대로 일처다부제인 곳으로는 티베트가 있는데, 티베트는 한 여성이 한 집안의 장남과 결혼하면 그 집안의 다른 형제들과도 결혼할 수 있고, 나이지리아의 하우사족 또한 자가(Zaga)혼인이라고 하여 남편과의 이혼 없이도 다른 남자와의 결혼이 가능하다.

이처럼 시대와 나라가 다르면 그곳의 문화나 풍습도 다르고, 성적인 윤리의식도 다를 수 있다. 옳고 그르다는, 선과 악이라는 것이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어느 나라건 어느 시대건 상관없이 다 똑같아야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서 보는 선악의 시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상호의존적이고, 상호규정적이며, 상황따라 달라질 수 있고, 시대나 나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선악은 연기적인 것이며 상의상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분법적으로 딱 나누어 진 것이 아니라 선이 있으므로 악이 있고 악이 있으므로 선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의존적이고 연속적으로 연결된 하나이다. 절대적인 선악의 차별이 있다면 거기에는 선에 대해 악을 배제하고, 강압하며, 미워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동반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남게 되지만 연기된 것으로 볼 때 선악은 유연하고 자율적이며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포섭할 수 있는 화합과 평화적인 윤리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전쟁을 볼 때 그 두 나라가 보기에는 서로가 극단적인 적이며 악이기 때문에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라는 이분법에 젖어 있음을 본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팔레스타인이 적이고 악이며, 팔레스타인들이 볼 때는 유대인들이 악이다. 그러나 한 발 떨어져 바라본다면 유대인이 있으므로 팔레스타인이 있고, 팔레스타인이 있으므로 유대인이 있는 것이지, 그 어느 한 나라가 선이고 다른 나라는 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어느 한 쪽에서 자신을 선이라고 생각하니까 상대방이 악이 되는 것이지 본래 선악이 정해 져 있지는 않은 것이다. 조금 예민한 문제이긴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이어져 왔던 종교전쟁들을 보더라도 내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나라는 절대선이고 타종교를 믿는 사람과 나라는 절대악인 것 처럼 규정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곤 했지만, 사실 그러한 두 종교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 현대에 와서는 그 두 종교가 모두 올바른 종교로써, 이 세상을 대표하는 종교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과연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모호해진다.

이것을 보더라도 본래부터 어느 종교가 선이고 다른 종교는 악이라고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상의상관적이며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난 것에 불과하다. 내 종교를 선이라고 규정하면서부터 타종교는 악이라는 규정이 생긴 것이니 상호규정적인 것이다.

이처럼 선악이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혹은 어떤 특정한 상황과 믿음 속에서 연기되어 발생한 것이라면 선악은 구체적인 상황을 떠나서 고정되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악은 연기된 것이고, 공(空)한 것이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것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처럼 선악이라는 분별이 연기된 것이기에 공하고 무상하며 무아라면 선악이라는 양 극단을 나누어 놓고 서로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따질 것도 없고, 이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선악의 양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은 위험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연기된 것이기에 양 극단을 내세울 것이 없으므로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이다.

중도적인 실천에서 본다면 선악으로 나눌 것도 없고, 어느 한 쪽은 옳다거나 다른 쪽은 그르다거나 하고 극단적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상황 따라 연기되어진 것이므로 사실은 고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선이라고 혹은 악이라고 낙인찍어 놓고 선이 악을 없애기 위해 폭력을 저지르는 것 또한 발붙일 수 없게 된다. 연기와 중도적인 관점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네가 없으면 내가 없고, 네가 존재함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전체적이며 동체로써의 자비로운 통찰이 진흙 속에 연꽃이 피어나듯 피어오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는 부유함과 가난의 양 극단의 삶은 양쪽 모두에게 온갖 사회적인 문제를 가져다 주고 있다. 이 세상 어느 한 쪽에서는 기아와 가난과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허덕이며 하루에도 5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이 3만 5천 명씩 죽어가는 마당에 또 다른 곳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비만으로 고민하고, 넘쳐나는 음식물 쓰레기로 고민을 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남한에서는 한 해 음식물쓰레기가 14조원에 달하는데 그 정도면 북한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양이라고 한다. 부자 나라는 부유해서 괴롭고, 가난한 나라는 가난해서 괴롭다. 선진국들은 개발과 발전으로 인한 온갖 환경문제들 때문에 괴롭고, 후진국들은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어서 괴롭다. 양 극단은 언제나 고(苦)를 가져온다.

이러한 양 극단의 문제는 연기적인 자각과 중도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양 극단의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극단을 지양하고 중도적인 삶을 실천할 수 있다면 양 극단의 고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한 나라는 스스로 만족과 청빈과 소욕을 바탕으로 한 동체대비의 자비사상으로써 가난한 나라에 나눔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남아도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만도 연간 15조원이상이 든다고 하고, 그 쓰레기로 인한 악취며 처리시 환경문제 등 온갖 부수적인 문제들도 만만치 않은 것을 생각했을 때, 스스로 조금씩 적게 가지고 적게 먹으며 쓰레기로 해치울 것들을 미리 가난한 나라들과 나누어 쓸 수 있다면 부유함의 괴로움도 가난함의 괴로움도 모두 함께 소멸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의 자각과 깨달음 그리고 소욕과 나눔의 실천적인 정신에 달려 있다. 이러한 소욕과 나눔의 정신의 바탕이 바로 가난한 나라가 없으면 부자 나라도 없고, 굶주리는 아이를 살리지 않으면 나 또한 사라지고 만다는 연기적인 철저한 자각인 것이다. 연기 중도적인 시선에서는 그들과 우리는 서로 의존하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 그들이 살아나야만 우리도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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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이고 다차원적인 연기 - 상의상관성

이상에서와 같이 연기법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나거나 또는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다른 모든 존재와 여러 원인,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 그렇기에 정신적, 물질적 모든 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을 ‘관계성의 법칙’, ‘상의성의 법칙’ 혹은 ‘상의상관성’ 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연기법에 대해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텐데, 부처님 당시에도 코티카라는 제자가 연기에 대해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며 사리푸타에게 좀 더 쉽게 설명해 달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답변하는 장면이 『상응부경전』12:67에 나온다.

벗이여! 여기 두 묶음의 갈대단이 있다고 하자.
이 갈대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가 있다.
즉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는 것이며,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 묶음의 갈대단 중 어느 하나를 치운다면 다른 갈대단도 쓰러지고 만다.
이처럼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는 것이며,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비유지만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연기법을 아주 쉽게 비유해 주고 있다. 두 묶음의 갈대단이 서로 의지해 있을 때 그 중 하나를 치우면 나머지 갈대단도 쓰러지는 것과 같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관계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도움을 주면서 상의상관적으로, 관계성으로 서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말은‘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 ‘저것’이 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는 말도, ‘이것’이 사라지는 결과로서 ‘저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함으로 생성 및 소멸되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서로가 서로를 돕고 도움 받는 긴밀한 연기적, 상의상관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결국 ‘이것’과 ‘저것’은 따로 따로 떼어 내서 생각할 수 없는 동체이며, 한생명이고, ‘이것’은 ‘저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고, ‘저것’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이것’과 ‘저것’ 그 어느 것도 실체적인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닌, 인연따라 생겨난 무아(無我)인 것이다. 무아이면서 인연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이고,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기에 공(空)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A와 B 사이의 연기성은 곧 B와 C 사이의 연기에서도 발견되며, 다시 C와 D 사이에서도, 또한 C와 A, D와 A, D와 B 사이에서도 발견되고 이러한 관계는 E, F, G...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온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에게로까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퍼져간다.

이처럼 온 우주의 일체 모든 존재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다른 모든 존재의 생성을 돕고 소멸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물론 어떤 한 존재의 생성과 소멸은 좁게는 근본적인 원인과 직간접적인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 것이지만 조금 더 연기의 시야를 넓혀 시공간으로 확장시켜 보면 이 우주 법계 전체가 한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관여되어 있다. 즉 이 우주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이 우주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한 가지 원인이 한 가지 결과를 발생케 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우주적인 다차원적인 원인으로 인해 하나의 존재가 생기며, 하나의 상황이 생겨나는 것이다. 서양 과학은 단일한 원인이 단일한 결과를 일으킨다고 믿었지만, 동양적인 불교적인 사고방식은 이처럼 전체적이고 우주적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다른 존재에 영향을 끼치면서 동시에 다른 존재의 영향도 받고 있는 것, 나아가 인간이 우주에 영향을 끼치면서 동시에 우주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 이러한 존재와 존재 사이의 서로 의존하고,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을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운명도 우연도 신의 뜻도 아니다

이러한 연기법에서 본다면, 어떤 한 존재가 생겼다거나, 어떤 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단순한 존재의 발생이나 사건이 아니라, 온 우주적이고도 전체적인 무한한 인연관계 속의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인 인생관에 반해 보통 세상의 또 다른 견해로는 모든 것이 운명이나 숙명이라는 운명론이나, 모든 일이나 존재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으며 그저 우연일 뿐이라는 우연론이나, 일체 모든 것은 신이나 브라만이 만들었다는 유신론적인 사고방식이 공존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에도 가장 주목을 끌었던 인생관이 바로 운명론과 유신론, 그리고 우연론이었다. 『중아함경』제3권을 살펴보자.

세상에는 극복해야 할 세 가지 그릇된 견해가 있다. 지혜 있는 사람들이 파벌을 만들어 서로 주장을 달리 하지만 인생에 있어 아무런 소득이 없다. 어떤 것이 셋인가. 첫째는 ‘사람의 모든 일은 일체가 다 숙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요, 둘째는 ‘사람의 모든 일은 일체가 다 신이 만든 것이다’는 주장이며, 셋째는 ‘모든 일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우연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만약 사람의 모든 일을 일체가 다 숙명에 의한다거나, 신이 만든다거나, 아무 인연도 없는 우연이라면,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분별하며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현실의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인간이 책임질 일은 하나도 없고, 선악의 구별도 없게 된다. 저들의 주장에 맞서 나는 연기법(緣起法)을 깨닫고 중생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운 선택에 의해 자기를 만들어 가는 길이다.

이러한 세 가지 주장은 시대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종교며 사상, 철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주요한 인생관들이다. 그러나 숙명론이나 운명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 내 자신이 스스로 내 운명을 개척해 갈 수도 없고, 내 삶을 바꾸어 갈 수도 없으며, 무조건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숙명이라 생각하고 체념하고 포기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대한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이런 사람들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내 운명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 무슨 일만 생기면 사주팔자를 보러 점집에 가고, 무속인들을 찾아 가 운명을 점치는 일 밖에 없다. 그것 외에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 한 가지도 내 스스로의 의지대로 해 나갈 수 없다. 오늘날도 툭 하면 연례행사처럼 점집을 찾아다니고 무당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사람이 바로 숙명론이나 운명론에 갇혀 스스로의 주체적인 삶을 포기하고 내 정신을 점쟁이에게 바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내 안의 오롯한 중심이 나를 이끌고 가도록 해야지 점이나 사주팔자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에서 ‘사람이 점쟁이가 되어서 많은 사람을 그릇되게 꾀어 재물을 구한다면, 이 죄로 말미암아 지옥 속에서 한없는 고통을 받아야 하고, 지옥 생활이 끝난 다음에는 그 죄로 인해 악업의 몸을 얻고 태어나 계속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고 했고, 『숫타니파타』에서는 ‘온갖 점을 치는 일이나 해몽, 관상 보는 일을 완전히 버리고, 길흉화복의 판단을 버린 수행자는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갈 것이다’라고 했다.

운명이나 숙명에 속박되어 있는 사람은 어차피 잘 되도 숙명이고 못 되도 숙명이기 때문에 삶을 개척해 나가고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없다. 이런 사람일수록 게으르고 나약한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기 쉬우며, 스스로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숙명 탓이나 남 탓, 나라 탓, 정치인 탓, 부모 탓만 하지 자기 스스로의 삶에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아무런 인연도 없고 원인이나 조건도 없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는 사람 또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 세상이 단순한 우연일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선도 악도 다 소용없고, 선하게 사는 사람과 악하게 사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말인가. 잘 살고 못 하는 것도 다 단순한 우연이란 말인가.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우연이라면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음행을 하는 등의 삿된 행위들 또한 우연일 뿐 잘못된 행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연론을 믿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 어떤 윤리적인 의식도 없을 것이고, 막행막식을 하면서도 아무런 인과응보가 없다고 생각할 것 아닌가. 또한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모든 것이 우연이니 의지를 일으킬 것도 없고, 세상을 선하고 살고자 애쓸 것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고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의 의지는 없고 오직 신의 뜻만 있다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오직 신의 가호나 은총만을 바라게 될 것이 아닌가. 이 또한 도둑질이나 살생이나 음행 등의 악행을 하더라도 그 또한 신의 뜻이라고 믿을 것이 아닌가. 여기에도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고 오직 신의 뜻만 있다고 믿는다면 이런 신관은 위험하다.

이러한 세 가지 잘못된 견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설하고 계신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와는 달리 연기법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이 100% 보장되고, 자신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으며, 행복에의 가능성, 깨달음에의 가능성을 스스로 성취시켜 나갈 수 있다. 또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도록 함으로써 인과응보의 윤리적 가르침으로도 손색이 없다.

또한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저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상의상관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너와 나의 차별이 없고, 너를 의지하여 내가 있고, 너로 인해 내가 있으며,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으로 연결된다는 동체대비의 자비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자비정신은 곧 보시와 나눔의 정신으로 이어져 모두 함께 풍요로운 세상의 밑거름이 된다.

이처럼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평등하며, 둘이 아니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로 말미암아 내가 존재한다는 바탕에는 ‘나’라고 내세울 그 어떤 실체성을 부여하지 않으므로 ‘나’중심의 이기적이고 아집에 물든 삶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

이상에서 본 것 처럼 불교의 연기법은 우연론도 아니요, 신의 뜻도 아니며, 숙명론도 아니다.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 모든 존재며 사건들이 서로 서로 깊은 연관관계 속에서 꽃피어나는 한바탕 신명나는 잔치다. 그 어떤 존재도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존재도 진리에서 떨어진 채 홀로 소외를 느끼지 않는다. 진리는 결코 사람을 버리지 않고, 소외시키지 않는다. 누구나 이 한바탕 신명나는 잔치에서 자기답게 자신의 몫으로 아름답게 꽃피어나도록 되어 있다. 이 연기의 장에서 모두는 한 가족이며, 벗이고 정겨운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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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셋째,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소멸에 대한 공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소멸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의 소멸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사라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소멸하는 법은 없으며 공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다’에서 살펴보았듯이 존재의 생성에 모든 존재들의 상호의존과 관계성이 담겨 있듯이 존재의 소멸에도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들의 상호연관의 연기법은 적용된다.

앞에서 자동차를 예로 들었는데, 만약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엔진이 고장 나 버렸다면 그 자동차는 더 이상 굴러갈 수 없을 것이다. 타이어가 펑크가 나도 마찬가지고, 타이어휠이 고장 나도 마찬가지며, 미션이나 기어가 고장 나도 자동차는 더 이상 자동차로써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하다못해 기름이 없어도 자동차는 무용지물이 되 버리며, 그 자동차를 운전할 사람이 없어도 자동차는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이처럼 자동차를 구성하고 있는 어느 한 요소만 없어지거나 고장이 난다고 하더라도 자동차는 더 이상 자동차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그렇기에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소멸에 대한 연기법의 공간적인 표현을 볼 때 엔진이 없으면 자동차도 없고, 타이어가 없으면 자동차도 없고,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가 없고, 운전자가 없으면 자동차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소멸은 저홀로 독자적인 소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함께 하고 있던 수많은 연기되어진 원인과 조건들이 소멸 될 때 ‘~로 말미암아’소멸되는 것이다.

상황의 소멸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거처하고 있는 절은 규모가 작고 강원도의 산골에 위치 해 있다 보니 처음에는 법회나 기도가 있는 날인데도 신도님들이 한 분도 오시지 않아 법회를 열지 못한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낙심 아닌 낙심이 되었지만, 이것도 다 인연이구나 하고 마음을 돌리니 오히려 그 시간에 미루었던 다른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인연이 화합하여 모였을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어느 한 쪽에서 응해 주지 않으면 그 법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소멸의 법칙에서 보듯이 신도가 없으면 법회도 없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일들은 인연화합을 통해 만들어지고 인연화합이 되지 않으면 소멸되는 것이니 이러한 연기의 법칙을 거스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인연을 거스르게 되면 거기에는 고통이 따른다. 신도가 없으면 법회가 없다는 연기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투덜투덜 거리면서 마음에 고통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신도가 없어 법회가 없었지만 또 다른 새로운 포교의 방법을 모색하거나 그 시간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다면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라는 소멸의 법칙을 받아들여 새롭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생성의 법칙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의 법칙은 온 우주를 운행하는 근원이 되는 이치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거스르는 순간 괴로움이 시작되지만 받아들이는 순간 평화가 깃들게 되고 또 다른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그래서 연기법에서 보았을 때 모든 생성은 곧 소멸을 의미하고, 소멸은 또 다른 새로운 생성을 의미한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닌 한바탕에서 이루어지는 연극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생성을 즐거워하며 집착하고 소멸을 괴로워하며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이치를 받아들이면 생과 사도 자유롭고, 성공과 실패에도 그렇게 연연해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있고 없음, 소유와 무소유, 부와 가난 등의 분별 속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존재의 발생의 원칙과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원칙은 모두 공간적인 연기의 해석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지금 여기에서 더불어 존재하는 것들이며, 서로 서로 의존관계를 이루었을 때만 존재의 의미를 얻을 수 있으며, 어느 한 가지 원인이나 조건이 소멸되면 다른 의존관계를 이루었던 모든 것들도 도미노처럼 차례로 소멸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 원칙은 나아가 이 우주적인 한 공간에서 이 우주, 이 세계, 이 나라를 이루고 있는 일체 모든 존재들은 서로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로써, 서로가 서로의 생성과 소멸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상의상관하고, 상호의존하는 결코 따로 따로 떼어낼 수 없는 한생명이며 한몸, 한마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불교적 자비사상이 움트는 것이다. 온 우주가 둘이 아닌 한 몸으로 동체이며, 그렇기에 네가 있기에 내가 있고,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며, 네가 사라질 때 나도 사라지고, 네가 괴로울 때 나 또한 괴로울 수 밖에 없는 생명공동체로써 하나인 것이다. 나라는 실체가 있어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우주이며, 내가 곧 일체 모든 존재와 둘이 아닌 하나로써 그들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더불어 살아가는 이 우주의 모든 생명을 내 몸처럼 아끼지 않을 것인가. 내 행복이 곧 일체 모든 존재의 행복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면 나를 돌보는 것 처럼 남을 돌보고, 나를 돌보는 것 처럼 자연을 돌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기를 바탕으로 하는 자비인 것이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넷째,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소멸에 대한 시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소멸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의 소멸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사라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소멸하는 법은 없으며 시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님이 생함으로 내가 생하고, 조상들이 생함으로 내가 생한 것 처럼 나의 탄생은 앞으로 있을 미래의 수많은 내 자손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라지면 앞으로 있을 자손들 또한 사라지고 만다. 이와 같이 어떤 한 존재의 소멸은 또 다른 존재의 소멸로 이어진다. 여왕벌이나 여왕개미의 소멸은 곧 엄청난 자손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온갖 산업화며 도시화, 기계화, 인구의 도시집중 등을 비롯한 개발과 발전이 자연을 파괴와 그로인한 환경의 오염을 가져왔고, 그러한 환경오염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퍼져 전체 생태계의 파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예전에는 많았던 수많은 동식물들이 사라지고 있다. 생물종이 아예 사라진 것들도 많다. 생태계에서 어느 한 단계의 생물종이 사라지게 되면 연이어 먹이사슬로 이어지는 다른 종도 함께 사라지고, 또 다시 그 종은 또 다른 종의 소멸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그야말로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이치가 환경생태에서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과학자들은 앞으로 50년 이내에 지구상 생물종의 1/4이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현재 매일 적어도 140종 이상의 동식물이 사라지고 있고, 1년에 최소한 5만종의 생물종이 멸종되고 있다고 한다. 그 원인은 주로 숲과 열대우림 등의 서식처의 파괴에 있다고 하는데, 현재 전 세계적으로 1분에 29ha, 즉 축구 경기장 40개에 달하는 면적의 열대우림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생물종이 멸종되어 가고 지구온난화 또한 가속화된다고 한다. 이런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물종이 소멸되고 지구온난화가 계속되게 되면 머지않아 우리 인간들 또한 멸종되게 될지 모른다.

실제로 세계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환경오염으로 인해 남성의 정자수가 급감하고 불임이 늘어 인간의 자체능력만으로 임신을 계속할 수 없어 이런 상태로 2017년까지 가면 결국 인간도 멸종에 이르게 될 것임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시간적인 표현에 입각해 보더라도 자연이 사라지면 생물종이 사라지고, 생물종이 사라지면 곧 인간도 사라진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자연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있다”는 말은 자연과 인간이 동시에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연이 사라지기 때문에 인간이 사라진다”는 말도 자연이 사라짐과 동시에 인간 또한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연의 모든 존재 하나 하나는 곧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과 직간접적으로 인연관계에 놓여 있다. 연기법에서 보면, 자연의 작은 한 개체가 소멸되거나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곧 머지않아 인간 또한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기적인 상의상관성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현재 지구상에서 끊임없이 증명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이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한국만 해도 장마 대신 우기 개념을 도입한다고 할 정도로 아열대 기후에 접근하고 있다. 엘리뇨, 라니냐, 지진해일 등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생명과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를 거꾸로 생각해 보면 ‘이것을 지켜냈을 때 저것도 지켜진다’라고 볼 수 있다. 나무와 숲과 열대우림이 사라지면 생물종도 사라지고, 생물종이 사라지면서 인간의 종까지도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면 거꾸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무와 숲을 보호하고, 열대우림을 지켜내며, 나부터 나무를 심고, 환경을 보호하며, 개발지상주의적인 모든 발전사업들을 보다 친환경적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친환경적인 발전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가 있는 개념이다. 될 수 있다면 발전과 개발을 늦추거나 최소한도로 줄이면서 자연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고, 최소한의 자연 파괴와 최대한의 자연 살림을 실천해야 한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부유함과 욕망의 충족과 돈 있는 노후를 꿈꾸고자 하는 거대한 욕망의 흐름을 끊고 거슬러 만족하고, 청빈하며, 자연과 교감하는 조화로운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도록 모든 교육, 제도, 정책 등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사라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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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화살과 같이 빠르고 정확하다.
두 남녀 사이에서 불붙는 욕망은 번뇌의 뿌리이다.
이성(異性)보다 강한 욕망은 없다.
이 세상에서 이성과 같은 것이
하나만 있다는 사실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성은 번뇌의 뿌리가 아니라 깨달음의 뿌리이다.
마치 메마른 땅이나 사막에서는 연꽃이 피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번뇌 때문에 깨달음의 싹은 튼다.
[이취경]




남녀 사이에서 불붙는 욕망의 크기만큼
거대하고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이성보다 더 강한 욕망은 없다.

그러나 되짚어 보면 이성에 대한 욕망의 크기가 큰 만큼
그로인한 깨달음도 크다.
지혜로운 수행자에게 이성은 깨달음의 뿌리이지만,
어리석은 중생에게 이성은 번뇌의 뿌리이다.
이성으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번뇌해도 좋다.
그로인해 깨달음의 싹은 트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라.
다만 사랑하는 동안
사랑이 생겨나고 머물고 떠나가는
그 모든 과정을 온전한 깨어있음으로 지켜보라.

사랑으로 인한 아픔도
사랑으로 인한 기쁨도
모두를 받아들이라.

어느 한 쪽만 일어나기를 바라지 말라.
양쪽 모두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사랑으로 인한 기쁨만을 바라는 사람은
불붙는 욕망으로써의 사랑에 빠지고 말지만,
그로인한 슬픔도 아픔도 모두를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사랑은 성스러운 수행의 과정이다.

온전히 사랑하는 순간 순간을 깊이 느껴 볼 수 있고 알아챌 수 있다면
그것은 욕망이 아닌 깨달음의 순간이 된다.

사랑으로 인한 가슴 아픈 번뇌의 마음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아파하는 그 근본에까지
바라봄이 빛을 놓을 수 있도록 살피고 또 살피라.

그렇게 되면 이성이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보게 된다.
이성에 대한 감정,
이를테면 사랑과 번뇌까지도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그로인해 행복하고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러한 인연이었음을,
다만 그러한 상황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다만 사랑이라는 인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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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기법이다. 부처님이 해탈, 열반을 성취하셨다고 했을 때 그것은 곧 진리를 깨달았다는 말이고 바로 그 진리가 연기법인 것이다. 수많은 불교 교리가 있고, 불교 경전이 있으며,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또 인도에서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현재 전 세계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수많은 논서와 강론 등을 낳아왔지만 그 모든 이치를 한 마디로 하자면 연기법이라고 정리 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중아함경』상적유경에서는 ‘연기를 보면 곧 진리를 본 것이요, 진리를 보면 곧 연기를 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연기를 보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보는 것이다.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무상, 고, 공, 무아, 자비, 일체법, 12연기, 업과 윤회 등의 근본불교 교리에서부터 부파, 대승불교 교리에 이르기까지 연기법을 벗어나는 교리나 사상은 없다. 모두가 연기법의 각론이며, 연기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방편들에 불과하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연기법을 깨닫게 되면 온 우주의 모든 이치를 확연히 깨닫게 되어 더 이상 그 어떤 의혹도 남아있지 않고 환히 다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다나』에서는 ‘성자가 참으로 진중하게 사유하여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모든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 그것은 연기의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계와 우주에 대한, 또 나라는 존재에 대한, 그리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이치에 대한 그 모든 의심과 의혹들은 비로소 연기법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이 확연해진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도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깨달으신 것이지 부처님께서 별도로 연기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연기법은 부처님이 오기 전에도 있었고 설령 오지 않으셨더라도 언제나 이 우주의 법칙이요 진리로써 항상 하고 있는 진리란 의미다.

『잡아함경』12권에서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지 안 하든지 항상 존재한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해탈을 성취해서 중생을 위해 분별하여 설하며 깨우칠 뿐이다.’라고 하셨다. 이처럼 연기법은 부처님께서 만들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교설이 아니라 이 우주를 운행하는 법칙으로써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부처님은 이러한 우주적인 진리를 바로 보고 깨달아, 중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연기법’이라고 편의상 이름 붙여 주신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연기법은 다만 방편으로 설해진 말에 불과한 것이지 연기법이라는 언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깨달아 아셨고, 연기법을 실천하는 분이며, 이러한 연기법을 중생을 위해 수많은 교리로써 분별하여 설하고 깨우쳐 주고 계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연기법이란 무엇인가. 연기법이 무엇이기에 부처님께서 이토록 역설하셨으며, 그 가르침이 2,500여 년을 이어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의 모든 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종교요 가르침이 되고 있는가. 물론 연기법을 간단하게 ‘이것이다’라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수많은 교리 해설서를 보더라도 경전의 말씀을 풀어 놓으면서 주석을 달고는 있지만 그것을 읽는다고 연기법을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연기법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러한 가르침을 읽고 나더라도 연기법에 대한 어떤 확연한 답을 얻지 못하는 수도 있다.

나 또한 대학 다닐 때 처음 접해 보았던 불교교리서나 경전해설서를 보면서 연기법이 진리라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왜 이 연기법이 불교를 대표하는 교리이며, 이것이 진리의 핵심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불교를 대표할 정도로, 이 세계와 우주를 운행하는 근본 원리요 법칙으로써의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것은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내 안에 화두로써 자리잡고 있었고, 아마도 그 의심이 지금까지 이렇게 불교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아마도 이 생각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공통된 의문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고민을 하던 제자들이 많았던가 보다. 『증일아함경』권46에 보면 아난 존자가 연기와 십이연기에 대한 법문을 듣고는 부처님께 여쭙는다. ‘제가 보기에는 연기법이 그리 깊은 뜻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라고 한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아난아,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십이연기는 매우 깊고 깊은 것이니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라고 답변하고 계신다. 이처럼 연기법은 언뜻 보기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법처럼 보인다.

여기에 수많은 수행자며 학자들의 공통된 어려움이 있다. 연기법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하고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으며, 그 깊이와 통찰력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역사 이래로 수많은 스님들께서, 또 수많은 수행자며 학자들이 고민해 온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사실 불교를 잘 모르는 수많은 이들이, 혹은 불교를 믿고 신행하는 초심 불자들이라도 ‘불교는 이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불교는 너무나도 방대하고, 교리들도 다양하며, 경전도 수없이 많아서 어떤 것이 불교를 단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인지 막연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불자들은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하는 질문을 받고 주저하게 된다. 도대체 어떤 교리를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도 막연하고 정리가 되어 있지 못하다.



연기의 의미

그러면 이제부터 연기법이 과연 어떤 법인가를 차근 차근 공부 해 보자. 연기법에서 보는 관점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제 멋대로 존재하는 것 같은 것들도 모두 다 일정한 법칙 속에 존재한다. 이 세상을 보면 불확실한 일들이 많고, 불확정적인 것들이 많으며, 복잡다단하고, 언뜻 보기에는 정신없어 보일 정도다. 이런 복잡한 세상을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불합리한 것 같고, 불평등한 것 같으며, 진리는 없는 것 같은 자괴감을 느낄 법한 일들도 벌어지곤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열심히 일하지 않고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가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못 사는 나라에 가난한 이로 태어나 기아와 전쟁으로 아귀다툼을 벌이다 죽어가는 이들도 있다. 같은 나라에 태어나 살더라도 어떤 이는 교묘한 술수와 이기적인 방법으로 성공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정직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 진리는 없는 것인가. 진리가 없기 때문에 이런 불평등이 벌어지고, 불합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치가 숨어 있다. 이 모든 존재며 상황들을 가능케 하는 우주적인 법칙이 숨어 있다. 그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먼저 ‘연기’란 말의 의미를 정리해 보자. 연기의 어원은 팔리어에서 온 것인데 이는‘Paticca Samuppada’라고 하여 ‘Paticca’는 ‘~때문에’, ‘~로 말미암아’라는 뜻이고, ‘Samuppada’는 ‘일어나다’는 의미이다. 즉 연기는 ‘~로 말미암아 일어나다’, ‘~때문에 생겨나다’는 의미이다.

연기의 산스크리트어 또한 ‘pratitya samutpada’로써 ‘pratitya’는 ‘~때문에’, ‘~의해서’, ‘~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mutpada’는 태어남, 형성, 생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마찬가지로 ‘~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독자적으로 저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 말미암아 생기고, 무언가에 의해서 의존해서 생기는 것이란 뜻이다. 이는 그 어떤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란 의미다.

『잡아함경』13권 335에서 이 연기법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경구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것은 일체 모든 존재며 상황은 과연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생성과 발생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일체 모든 존재와 상황은 어떻게 소멸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은 연기의 공간적인 표현이며,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연기법의 시간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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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황악산 직지사



[신라 아도화상이 세운 절 김천의 황악산 직지사, 절안의 오랜 소나무의 운치하며 깊은 계곡 맑은 물소리가 항상 맑게 들리는 절입니다. 경내에 나무가 참 많고 도량이 깨끗하기로 유명, 직지사는 전 대중스님들이 운력을 중시하기로 소문났지요. 아침 공양이 끝나면 모든 스님들이 나와 도량에서 운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불교의 기본 사상은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단순하게 사상으로만 그치는
허울좋은 관념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철저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연기법은 죽은 사상이지
살아 숨쉬는 생생한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자라고 한다면
연기법을 믿는 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 주위엔
참 겉보기만 불자인 사람이 참 많은 듯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혼자 있을 때와 여럿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서로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여럿이 있을 때는
참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도
남들이 보지 않을 때는 쉽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엔 얼마나 많던가요...

다른 법우님들과 함께 차를 탈때면
참 조심스레 천천히 운전을 하다가도
혼자 차를 몰게 되면
어느덧 거리의 무법자가 되어
다른 운전자를 황당케 하는 경우를 저 또한 관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연기법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법사인가?
하고 되묻곤 한답니다.
진정 연기법을 아는 이는
연기법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연기법을 실천한다는 것은
첫째가 인과를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남이 보지 않는다고 인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보고 있을 때는
상대에게 욕좀 얻어 먹고 나쁜 인상을 심어 줌으로써
어느정도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지만
혼자있을 때라면 그 과보 그대로를 훗날 모두 받아야 합니다.

법계의 인과는 어느 하나 예외가 없습니다.
법계에 그대로 저축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법계의 인과라는 철저한 진리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못 보이면
다음에 다시 잘 보이게 되면 그만이지만
한 번 지은 업장은 영원히 지워 버릴 수 없게 됩니다.

신구의 삼업(三業)으로 지은 모든 것이 그대로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무심코 지은 미세한 생각까지도 철저히
내가 짓고 내가 그대로 받아야 할 것들입니다.

인과를 믿는 사람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 누가 있든 없든
항상 맑고 향기로운 말과 행동과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어느 한 때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순간 순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어 공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순수한 삶을 살아 간다고 확신 할 수 있는가요.

그러나 우린 이미 인과라는 법계(法界)의 이치에
우리 삶의 일거수 일투족을
그대로 노출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일체 모든 이에게 나의 삶을
그대로 보일 수 있을 만큼 투명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연기를 믿는 사람은
항상 감사하는 삶, 그리고 회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먹고 있는 밥 한 톨에 담긴
일체 법계의 은혜를 명상해 보셨나요?

농부의 은혜,
농부를 낳아주신 부모님 그리고 또 그 부모님
그렇게 시작되어 무량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속의 모든 조상, 존재의 무한한 은혜...

곡괭이의 은혜, 비료의 은혜, 비료 공장 모든 인부들의 은혜
토양의 은혜, 태양의 은혜, 비와 바람의 은혜
그렇게 시작되어 무량한 공간을 향기롭게 감싸고 있는
이 모든 무한한 은혜...

우린 일상을 살아가며 작고 하찮은 일에서도
이 모든 시공을 초월한 무한한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니 순간 순간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새벽 두 눈을 뜨면서부터 감사하는 연기의 실천은 시작됩니다.
아침을 깨워주는 자명종의 은혜, 침대의 은혜, 맑은 아침공기의 은혜...
새면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물의 은혜, 비누, 샴푸의 은혜...
아침 공양에 올라온 이 모든 음식물의 은혜...
그리고 그 속에 녹아든 온 우주의 밝고 넓은 은혜...

... 너무나도 너무나도 세상엔 감사할 것들 뿐입니다.
이런 긍정명상을 통해 우린
나를 살려주고 있는 세상의 무한한 은혜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고개들어 세상을 보며 감격스런 눈물이 흐르기도 할 것입니다.
이 모두가 무한한 참생명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의 나툼이심을...

그렇기에 시공을 초월하여 일체의 모든 존재는
결코 둘이 아닌 '전체로서의 하나'입니다.
한마음 한생명이 인연따라 나툰 것일 뿐입니다.
무아(無我)이며 동시에 전체아(全體我)인 것입니다.

이런 감사한 세상을 향해,
나와 둘이 아닌 일체의 참생명을 향해,
무한한 생명력으로 나를 살려주고 있는 법계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회향 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회향해야 합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회향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회향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연기법을 믿는 수행자는
언제나 회향할 꺼리를 찾아 눈을 돌립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았기에 회향하고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일체의 모든 생명, 존재들이
나를 살려주고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회향하며 보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이 그저 이유라면 이유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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