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아바타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아주 인상 깊었던 대사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제이크 설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여주인공 네이티리가 했던 말이다.
 “어머니 대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다만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지”


이처럼 진리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고, 안팎의 차별이 없다. 다만 균형을 맞출 뿐이다. 누군가의 돈을 훔쳤다면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 것이다. 그 때 우주법계는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훔친자에게서는 앗아가고, 빼앗긴 자에게는 되돌려 주는 작용을 만들어 낸다. 욕을 했으면 욕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고, 사랑하면 사랑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 사이에는 이처럼 정확한 균형이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우주가 하는 일이며, 진리가 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로 칭찬해 주고, 찬탄해 주어 보라. 무엇이 돌아오겠는가. 칭찬과 감사와 찬탄이 돌아온다. 칭찬해 주는데 욕이 돌아올 일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법칙도 이와 같다.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느냐에 따라 무엇이 다시 내게로 들어올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감사함을 느낄 때 더 많은 감사할 일이 찾아오고, 불만을 느낄 때 더 많은 불만스러운 일이 찾아오며, 화를 내보내면 화낼 일이 들어오고, 만족하면 만족할 일들이 생기고, 무시하면 무시 받을 일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의 에너지는 언제나 균형을 맞출 뿐이다.

불교의 업보(業報)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업보의 법칙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사이의 법칙인데, 나라는 존재인 육근이 무엇을 내보냈느냐에 따라 육경이라는 외부의 세상이 어떤 보를 끌어당기느냐 하는 법칙을 말한다. 이러한 업보의 법칙이 바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이치인 것이다. 즉 누군가가 돈을 훔쳐갔다면 우주는 얻은 자와 잃은 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처럼 업보라는 삶의 균형의 이치에서 본다면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다. 업이 곧 보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낼 생각보다는 더 많이 얻고 바라며 가지려고만 한다. 내보내야만 들어온다는 우주의 평등한 이치를 모른 채 내보내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나누고, 베풀고, 보시하며, 내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고, 얻고, 빼앗고, 성취하고, 쌓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한창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이 유행을 했지만 그것은 우주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 가운데 ‘내보내는 것’보다 ‘받는 것’에 중점을 둔 표현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열광을 얻어냈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나에게서 나가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 더 관심이 많지 않은가. 그러나 끌어당기는 것에 중점을 두면 끌어당겨질 것에 대해 바라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그 의도가 순수해 지기 어렵다. 보시를 할 때도 바라는 바 없이 하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의 중점은 끌어당겨질 것이 아니라 내보낼 것에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보다 ‘내보내는 법칙’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무엇이 끌어당겨 질 것이냐를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사랑으로 다만 내보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무언가를 끌어당길 필요 없이 모든 존재는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 부족하면 끌어당겨서 더 채워야 하겠지만 완벽하다면 넘쳐나는 풍요를 내보내고 나눌 수 있다. 끌어당김은 목표 지향적이고 미래 중심적이지만 내보내는 것은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문제이고 더욱이 지극히 실천적인 수행의 방향이다.

 매 순간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태어나서 죽는 그 날지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고 보시하며 나누었는가? 내가 내보낸 것들로 인해 세상은 얼마나 밝아졌는가? 세상이 밝아질 때 곧장 내가 밝아지는데 성공한 것이다.











Posted by 법상




[사진 : 인도 맥그로드 간지에서 만난, 인도에서 만났던 가장 예쁜 소녀^^]



내보내는 것이 들어오는 것이다

돈으로 보시를 하면 내 돈이 나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리 많은 돈을 보시를 해도
언젠가 그 돈은 분명히 다시 들어오게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로 칭찬해 주고, 찬탄해 주어 보라.
무엇이 돌아오겠는가.
칭찬과 감사와 찬탄이 돌아온다.
칭찬해 주는데 욕이 돌아올 일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법칙도 이와 같다.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느냐에 따라
무엇이 다시 내게로 들어올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언제나 영적인 균형을 맞추는
대평등의 일들만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이 우주의 운행 법칙이다.

나에게서 나간 것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언제나 다시 내게로 들어온다.

내가 상대방을 괴롭히면
상대방과 나와의 에너지는 불평등하게 되고
우주는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상대방이 나를 괴롭힐 일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욕을 하면
욕을 얻어먹을 일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주의 조화로운 작용이다.

예를 들어 직장상사가 직원을 욕하고 괴롭혔다 치자.
그러면 우주적인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다.
상사는 화를 풀었지만 직원은 괴롭힘을 당했다.
상사는 +에너지가 되었지만 직원은 -에너지가 되었다.
둘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직원이 어떻게든 다시 상사를
욕하고 괴롭힐 일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불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설사 이번 생에 두 사람이 다시 못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에너지의 불균형은 남기 때문에
두 사람은 다음 생에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
에너지의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교적인 표현으로는 인연이고 업보인 것이다.
‘저 사람과는 악연인가봐’라고 할 때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다음 생에는 반대로 직원이 직장상사로 태어나고
상사가 부하직원으로 태어나게 된다.
상사는 에너지의 불균형을 균형 있게 맞춰야 하기 때문에
우주적인 작용으로써 이상하게 그 부하직원만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사가 부하직원을 괴롭히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만남과 상황을 주선하는 것이 바로 우주법계고,
아바타에서 말한 에이와고,
불교에서는 불성이라고, 기독교에서는 신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인디언들은 어머니 대지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무엇이라고 부르든 상관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주는 이와 같이
대 평등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을 언제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세상이 불평등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차원의 진리에서 보았을 때
이 우주는 지극히 평등하며
언제나 완전한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진행된다.

아주 쉽게 누군가에게 욕을 해 보라.
무엇이 되돌아오는지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사랑하고 칭찬하면
사랑받고 칭찬받을 일들이 생겨난다.

감사함을 느낄 때 더 많은 감사할 일이 찾아오고,
불만을 느낄 때 더 많은 불만스러운 일이 찾아오게 된다.
감사를 내보내면 감사가 들어오고,
화를 내보내면 화낼 일이 들어오며,
만족하면 만족할 일들이 생기고,
무시하면 무시 받을 일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우주의 평등하게 균형을 맞추는
영적인 작업인 것이다.
이처럼 우주의 에너지는 언제나 균형을 맞출 뿐이다.
그것은 우주의 작용, 혹은 법칙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작용을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함이 없이 그저 균형을 맞출 뿐이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면
자연은 균형을 맞추려고 기상이변 등을 일으켜
본래적인 자연의 상태로 되돌아 가려고,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사람도 몸을 함부로 다뤄 탁한 에너지가 몸 안에 쌓아면
감기몸살 같은 형태를 통해 내보내줌으로 인해
우리 몸의 자정작용, 균형작용을 돕는다.

이 우주 전체와 그 안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존재는
언제나 이와 같이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에너지가 흐른다.


삶의 균형을 맞출 뿐

일전에 보았던 아바타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제이크 설 리가
에이와에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을 때
여주인공 네이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에이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오직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지”

우주법계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오직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다.
진리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고, 안팎의 차별이 없다.
다만 균형을 맞출 뿐이다.
에너지의 불균형을 없애는 일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돈을 훔쳤다면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 것이다.
그 때 우주법계는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훔친자에게서는 앗아가고,
빼앗긴 자에게는 되돌려 주는 작용을 만들어 낸다.
욕을 했으면 욕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고,
사랑하면 사랑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 사이에는
이처럼 정확한 균형이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우주법계가 하는 일이며, 진리가 하는 일인 것이다.

한창 유행처럼 번지던 ‘시크릿’에서는
이러한 진실을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무엇이든 내가 내보내는 것이 끌어당겨 지는 것이다.
생각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나,
불교의 화엄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
혹은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서
마음먹은대로 세상에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다는 말이
모두 이러한 법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법칙,
즉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라는 것은
언제나 증명되고 있다.

우주는 이처럼 다만 우리가 내보내는 것을 들어오게 할 뿐이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는다.

우주의 본질에는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른 것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에서, 판단과 분별에서 옳고 그름이 생겨나는 것이지
우주법계에는 그런 차별이 본래부터 있지 않다.
다만 내보내는 것을 분별 없이 들여보낼 뿐이다.


내보내는 것에 중심을 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낼 생각보다는
더 많이 얻고 바라며 가지려고만 한다.
내보내야만 들어온다는 우주의 평등한 이치를 모른 채
내보내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나누고, 베풀고, 보시하며,
내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고, 얻고, 빼앗고, 성취하고,
쌓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우리가 이 우주를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내보내는 것에 있다.
진실은,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란 사실이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이 곧 나에게로 들어올 것이다.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는 곧 무엇을 받을 것인가와 같은 말이다.
무엇을 나누고 베풀 것인가가
곧 무엇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짓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들어오는 것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가,
내보내는 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로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보내는 것 뿐이다.
내보내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지만
들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우주법계의 의지일 뿐이다.

즉 우리가 우리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들어오는 것이 아닌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더 크게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엄밀이 말하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우리는 오직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내보낼까,
나눌까, 베풀까, 보시할까, 회향할까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을 뿐이다.

들어오는 것에는 아예 관심을 갖지 말라.
들어오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법계의 소관일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니!


내보내는 것과 업보(業報)

불교의 업(業)사상도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어떤 업을 지었느냐에 따라 어떤 과보를 받는지가 결정된다.
업에 따라 보(報)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업을 지었느냐가
곧 어떤 것을 내보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몸과 말과 생각으로
무엇을 이 세상에 내보냈느냐에 따라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업보의 법칙이라고 말해지는 이 법칙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사이의 법칙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육근이 바로 나 자신이고
육경이 외부의 대상을 말하는 것이니
나와 세상 사이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육근이 즉 내가 무엇을 육경으로 내보냈느냐에 따라
육경은 보를 보내주는 것이다.
그래서 육근은 업을 짓고 육경은 보를 받는다.

우리가 업을 지으면 그에 따른 보를 받는다는 이 업보의 이치가
바로 내보내는 것을 필연적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법칙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업보의 법칙이
바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우주의 이치인 것이다.
우주는 언제나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
업보라는 어떤 사상을 만들어내려고 애쓴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악행을 함으로써 악업을 지으면
둘 사이의 에너지는 불균형을 이루게 되고,
그 때 우주는 그 불균형을 균형과 조화로써 맞추기 위해
당연하게 과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업보니, 인과니 하는 것이 바로
이 우주법계의 대 평등성, 균형과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육근은, 즉 우리는 오직 업을 지을 뿐이지
어떤 ‘보’를 받는지까지를 결정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보’라는 것은 ‘다르게 익어간다’는 의미로,
육근이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우주법계에서는 어떤 과보를 받을지를
천편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온갖 정보, 업력, 인연 등을 총괄적으로 따져
‘보’를 최종적으로 보내주는 것이다.

우주법계는 총체적이고,
시공을 초월한 전체적인 관점에서 판단한 뒤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언제 받아야
그나마도 그 사람에게 영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즉 우주법계는 ‘보’를 받을 때
항상 자비와 사랑의 바탕에서
그러한 결정을 바로 그 때 내려주는 것이다.

이렇듯 우주 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위한,
우리를 돕기 위한 자비와 사랑의 관점에서
순리롭게 행하는 바 없이 무위(無爲)로써 일을 행한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업을 지었느냐에 따라
어떤 보를 받느냐가 결정된다는 큰 틀은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과보를 받는 것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법계에서 어떤 과보를 언제 받을지를 결정한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떤 과보를 받을까가 아니라,
어떤 복을 받을까가 아니라,
어떤 업을 지을까, 어떤 복을 지을까,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어떤 행위를 할까,
즉 어떤 것을 이 세상으로 내보낼까 하는데 있는 것이다.

‘나는 매 순간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기로 예정된 것이니
들어올 것에는 신경도 쓰지 말고,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놓아버리고
오직 내보내는 것에만 마음을 모으라.


책 ‘시크릿’과 영화 ‘아바타’와 불교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바타에서 말한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과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
그리고 불교의 업보, 인과응보의 법칙은
모두 같은 진리를 다르게 표현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나 자신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나를 중심으로 내가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다.
시크릿의 표현으로 하자면
내보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끌어당기는 것인 것이다.

아바타에서는 이것을 전체적인 이치로써 설명하고 있다.
즉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우주는, 에이와는,
불성은, 신성은 언제나 내보낸 것을 다시 받게 함으로써,
즉 내보낸 것을 끌어당기게 해 줌으로써
균형을 맞춰주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표현에 의하면
내가 업을 지음으로써 과보를 받게 될 수밖에 없다는
인과응보, 업인과보, 업보의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아바타에서 말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
업인과보의 법칙 등은 전체적인 진리를 표현한 말이고,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은
내보내는 것 보다는 ‘받는 것’에 중점을 둔 표현이며,
불교의 업사상은
받는 것 보다는 ‘내보내는 것’에 중점을 둔
실천적인 표현인 것이다.

우리가 시크릿에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사람들은 나에게서 나가는 것보다
나에게로 들어오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내가 짓는 업(業)보다는 받을 보(報)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시크릿에서는
돈도 끌어당길 수 있고, 인간관계도, 건강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끌어당길 수 있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설명되어지고 있다.
물론 무엇을 내보냈을 때 끌어당겨질 수 있는지도
설명되고는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점은
내 바깥에서 무엇이 들어올 것이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에 있다.

직접적으로 우리의 의지로써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놓고 보았을 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끌어당기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내보내느냐에 있다.

끌어당기느냐에 중점을 두면
끌어당겨질 것에 대해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기에
그 의도가 순수해 지기 어려운 점이 있다.

보시를 할 때나, 선을 행할 때도
바라는 바 없이 하라고 하지 않는가.
내가 보시를 하면 많은 돈이 끌어당겨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면
그 보시는 큰 결과로 이어질 수 없다.
그 보시의 행위 자체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가진 풍요를 누리고, 만족함으로써
부유함이 끌어당겨진다고 할 때라도
끌어당겨질 미래의 결과를 마음에 두고
풍요를 누리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며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끌어당김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의 중점은 끌어당겨질 것이 아니라
내보낼 것에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보다 ‘내보내는 법칙’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내보내는 것이 곧 끌어당겨지는 것이라는 법칙에.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끌어당김의 법칙을 말했을 때에 비해
당황스러워 한다.
우리는 내보내기는 싫고 끌어당기는 것은 좋아한다.
끌어당긴다는 표현이 우리의 욕심을 더 충족시켜주며,
우리를 달콤하게 유혹하기 쉽다.
그렇기에 ‘내보내는 법칙’에 대해 실망감이 들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내보내는 것이 곧 끌어당겨지는 것이다.
현재 속에 미래가 있다.
우리는 다만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만 생각하면 된다.

무엇이 끌어당겨 질 것이냐, 들어올 것이냐를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투명하게, 이타적으로, 사랑으로
다만 내보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주적인, 불성과 영성에서 보내주는,
에이와의 무한한 에너지, 힘이 거기에 붙게 될 것이다.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
바로 거기에 이 모든 법칙을
내가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운행시킬 수 있는
힘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오늘은 또 무엇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화와 증오와 미움과 욕설과 질투와 탐심과
집착으로 얼룩진 에너지를 세상으로 보내지는 않았는가?
그것은 곧 내가 내보낸 것이기에 곧 내가 받을 것이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 아내에게 자식에게 바라지 말라


아내에게 바라는 마음을 내보내지 말라.
자식에게 좋은 성적을 바라고, 좋은 성격을 바라지 말라.
그저 내가 먼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남편이 되어 줌으로써 좋은 남편의 모습을 내보내고,
좋은 아버지의 모습을 내보내 주라.
그러면 내가 내보낸 것과 일치하는
좋은 아내, 좋은 자식이 딸려 올 것이다.
내보내는 것이 들어오는 것이니.

아내에게 내조를 잘 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결국 아내가 내조를 못 한다는 것을 내보내는 것이 아닌가.
내조를 잘 하기를 바랄 때 우리는 우주를 향해
‘내조 못하는 아내’라는 메시지를 내보냄으로써,
결국 지금 보다 더 내조 못하는 아내를 과보로 받게 될 것이다.

자식에게 좋은 성적을 바란다는 것은 결국
자식의 나쁜 성적으로 인해
실망스럽다는 마음을 내보내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정확히 그것이 다시 들어 올 것이다.
자식의 성적이 더 나빠지기를
우주법계에 요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대로에 만족하고 감사해 하라.
만족과 감사를 내보내라.
아내의 부족한 부분을 보고 그 점을 지적함으로써
‘부족한 아내’라는 부정적 에너지를 내보내지 말고,
그래도 잘 하는 부분을 보고
그 점에 감사해 하고 만족하는 마음을 내보냄으로써
아내에게 감사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라.

정확히 바로 그 만족스러운 점, 감사한 점이
내보낸 만큼의 크기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아내가 달라지겠지 하는
끌어당겨질 것을 미리 마음에 두고 행해선 안 된다.
끌어당김의 법칙이 아닌 ‘내보내는 법칙’에 마음을 쏟을 때
그 힘은 더욱 투명해지고 순수해져 우주법계의 힘이 붙을 것이다.

자신의 월급에, 연봉에 불만이 있는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연봉에 대한 불만을 내보내지 말라.
돈에 대해 작다는 불평어린 마음을 내보내면
우주는 고스란히 적은 돈을 되돌려 줄 것이다.
그러나 작은 월급일지라도
그 돈으로 인해 행복해 하고, 감사해 하고,
풍요로운 마음을 내보낸다면
우주법계는 고스란히 그 돈으로 인한 풍요로움을
더 많이 만들어 보내 줄 것이다.

당신이 회사 사장이라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사원들에게 혹은 고객들에게
적은 이익을 되돌려 주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회사가 부자가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회사가 부자가 되는 것, 더 많은 돈을 버는 것,
그것은 정확히 끌어당기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끌어당겨질 것, 부자가 될 것에 대한 마음은 완전히 비워버리라.
그리고 내보내는 것에만 집중하라.
즉 사원들에게 회사가 번 이익을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어 주라.
안철수 연구소의 안철수 사장은 아무런 조건 없이 회사의 지분을
자녀들이 아닌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나.

또한 고객들에게 돈을 끌어당기려는 마음을 버리고,
다만 고객들에게 무엇을 나눌 수 있을지를 고민하라.
고객들에게 어떤 것을 베풀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라.
무언가를 얻을 생각 없이 다만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고,
내보내 줄 것에 마음을 집중할 때
바로 우주법계의, 에이와의, 불성이며 신성의
사랑과 자비의 한량없는 힘이 붙을 것이다.


먼저 자신에게서 시작하라

자신의 삶에 전적으로 만족하라.
전적으로 감사를 표명하라.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라.
그것은 곧 자신의 삶에 무한한 만족스러운 일들과
감사할 일들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전적인 사랑을 보내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감사를 느끼는 자에게
무엇이 흘러나오겠는가?
또한 반대로 자신을 억압하고, 미워하고, 자괴감을 느끼며,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서 무엇이 내보내지겠는가?

아름다운 것, 지혜로운 것, 사랑과 자비, 만족과 감사와 같은
진리의 덕목들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그것이 되어야 한다.
먼저 자신부터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며,
만족하고, 예뻐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끌어당겨질 것이 아닌
내보낼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끌어당겨질 것, 받을 것, 얻을 것에 집중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은 아직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부족하니 바깥에서 무언가를 끌어옴으로써
나를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언제나 완전하고 완벽하다.
삶은 언제나 풍요롭다.
지금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한다면
미래의 그 어떤 순간에도 만족은 없다.

반대로 나 자신이 꽉 차 있어서 흘러 넘친다면 어떻겠는가?
나 자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감사와
풍요로움과 만족이 넘친다면
애써 외부에서 무언가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내 안에 자가발전소가 있어서
무한히 생산할 수 있는 자력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엇을 바깥에서 바라겠는가?
그 사람은 바깥에서 무언가를 끌어오려고 하기 보다는
내 안에서 생산한 것을 바깥으로 나누어 주고, 내보내 주고,
베풀어 주는데 더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

매 순간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주의 깊게 살펴보지 못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주의 한 마음이 내보내는 것들로 인해
힘겨워할 일이 생길 것이다.

하루를 정리하며 매일 밤 ‘내보낸 일기’를 적어 보라.
오늘 하루 무엇을 내보냈는가를 돌이켜 보라.
물질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내보낸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마음으로 내보낸 것이 없는지도 주의 깊게 살피라.
신업과 구업이 중요하지만 의업이 더없이 중요한 것처럼
마음으로 무엇을 세상에 내보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야말로
‘내보내는 법칙’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무언가가 내게 끌어당겨지기를 바라지 말라.
무엇을 얻을까, 벌까, 가질까를 생각지 말라.
무엇을 내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라.

내가 태어나서 죽는 그 날까지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고 보시하며 나누었는가?
내가 내보낸 것들로 인해 세상은 얼마나 밝아졌는가?
세상이 밝아질 때 곧장 내가 밝아지는데 성공한 것이다.







Posted by 법상





평화로운 오후, 길을 걷고 있던 사람이
대형 광고판이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고,
또 다른 사람은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다가
광고판이 머리에 맞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복잡하던 길, 복잡하던 마트에서
수많은 사람이 그 광고판 아래를 걷고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불행하게도 그 사람에게, 그 순간에
그 광고판이 떨어지게 되었을까?

일부러 어떤 사람이 광고판 위에 서 있다가
그 사람을 맞추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떨어뜨려
정확히 그 사람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불교에서는 우연이란 없다고 말한다.
그것 또한 그 사람의 인연이요 업이다.
다시말해 그 사람은 그 아래를 정확히 그 시간에 걷도록 되어 있었고,
그 때에 맞춰 그 광고판은 추락을 할 수밖에 없던 인연이었다.

사람의 목숨이 아무런 인연도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이 그 때 죽어야 할 업도 아닌데,
아무 이유 없이 우연으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사라는 것은 정확하게 인연 따라 오고 갈 뿐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생긴다.
어떻게 그 광고판은 그 사람이 그 때 죽을 업이란 것을 알고
그 순간, 정확하게 그 사람을 맞췄단 말인가?

그 인과응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과관계라면 이해가 가지만,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 어떻게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도 인과관계와 인연법은 성립한다.

이 우주의 법칙은, 이 법계의 인연법이라는 법칙은
인간에게만, 혹은 생명이 있는 유정물(有情物)에게만 한정되는 법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뿐 아니라, 유정물 뿐 아니라
모든 무정물(無情物)에게까지 확장되는 우주의 법칙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유정물 뿐 아니라
무정물에게도 자비와 존귀함과 따뜻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보내야 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그 차가 자체 엔진고장을 일으켜 시동이 꺼지면서
고속도로에서 차가 갑자기 서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 대형사고가 났고, 많은 사람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그렇다면 그 사고에 연관된 많은 이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우연으로 그 사고를 당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고가 날 만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사고가 날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마침 그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소멸한다.
우연은 없다.

그렇다면 고장 난 자동차 엔진이
모든 인연법과 인과응보를 환히 알고,
사고가 날 모든 사람들의 운명과 업을 따져 본 뒤
그 순간에 그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꾸며낸 것인가?

그렇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해
그 자동차 엔진이 그런 일을 직접 했다기 보다는
이 법계의 인과응보라는 이치가 그 일을 계획하고
자동차 엔진은 거기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큰 틀에서
인연법이라는 법계의 큰 진리의 흐름 속에서
나고 죽으며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

이 쯤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자.
광고판이나 자동차 엔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몫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불교에서는 사람 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 나무와 풀과 개미와 이끼들조차
모두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며,
그들을 결코 인간 아래에 두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과 인간은 다르지 않다.

인간이 인간에게 죽음을 당할 수 있듯,
인간이 동물에게도 죽음을 당할 수 있고,
식물에게도,
심지어 위에서 보았듯 무정물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들과 인간은 인연법의 차원에서 서로 동등하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고장 나기 직전의 차였는데 주행 중에는 괜찮았고,
다행히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량이 고장 났다”고.
그래서 사고 없이 집까지 무사히 잘 왔다고 말이다.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아주 좋은 차를 타고 있었으면서도
차량이 문제를 일으켜 집까지 오는데
몇 시간이 더 걸렸을 수도 있다.

늦게 오는 것도 정확히 그럴 만한 인연이고,
사고 없이 빨리 오는 것도 그럴 만한 인연이다.

사업가가 아주 중대한 회사의 업무로
해외 사업가와의 미팅에서 차량 사고로 늦게 가는 바람에
그 큰 투자 사업을 망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량이 하필이면 왜 그 중요한 순간에 고장이 나는가.
차량 결함만 아니었어도 그 사업가는 대박이 났을 것인데.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차 고장만 아니었다면 완전히 대박이 났을까.
혹시 법계에서 그 사업이 대박이 나기에는 아직 이른 때라서,
아직 그 사람이 성숙하지 않았거나,
복이 부족했거나, 아직은 그 그릇이 작았거나 하는 이유로
차량 고장이라는 인연을 통해 그 사업을 뒤로 미룬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바로 그 차는,
차의 고장난 엔진은
온전한 법계의 이치에 따라
아주 여법한 진리를 수행하게 된 것이리라.

사람만 법계의 이치를, 인과의 이치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유정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처럼 무정물 또한 법계의 일부로써,
진리의 일부로써
바로 그 인연법이라는 우주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차의 탓으로 돌린다.
흥분해서 차 바퀴를 발로 걷어 차거나,
혹은 그 차를 폐차시키고 새 차를 사는 것으로 울분을 풀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차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내 문제다.
차가 바로 그 때 고장이 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주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 법계 우주가 각본을 쓰고 그 차는 단지 조연을 했을 뿐이다.
아니 법계와 차와의 공동감독에 공동주연의 연극이라는 편이 옳겠다.

어쨌든, 주연이었든 조연이었든
내 사업을 망친 직접적인 몫을 한 녀석은 자동차다.
그러니 자동차를 실컷 미워해도 좋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미워하는 만큼
법계의 일부분인 자동차도 나를 미워할 것이다.

손가락이 내 몸의 일부분이듯,
자동차는 이 우주법계의 일부분이다.
손가락이 아프면 나 또한 아프듯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도 아프다.
손가락이 아파 내가 아프면 어떻게든 손가락에게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에서도
자동차를 아프게 한 원인제공자에게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다.
바로 나에게.

그러니 자동차에게 분풀이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우주에게 진리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무정물 또한 인간과 유정물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존재이며, 존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유정무정 유형무형(有情無情 有形無形)’의 모든 존재가
다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정이란 나무나 돌 같이 감각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형이란 형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그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

옛 스님들은
“푸른 대나무숲 모두가 진여(眞如)요,
피어 늘어진 노란 꽃은 반야(般若) 아님이 없다.”고 했다.

[보장론(寶藏論)]에서는
“불성은 모든 것에 가득하고 풀이나 나무에도 깃들어 있으며,
개미에게도 완전히 퍼져 있으며, 가장 미세한 먼지나 털끝에도 있다.
불성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 『莊子』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답이 있다.

동곽자가 장주에게 물었다.
"도(道)라고 불리는 것, 그것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장주가 말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동곽자가 말했다.
"그것이 있는 곳을 지적해주십시오."
"개미에게 있다."
"그렇게 비천한 것에 있습니까?"
"작은 풀에도 있다."
"그것은 더욱 비천하지 않습니까!"
"벽돌이나 기왓장에도 있다."
"어떻게 그렇게 비천한 곳에 있을 수 있지요?"
"오줌과 똥에도 있다"
동곽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대 과학에서도 유정물과 무정물을
정확히 구분 짓기 어렵다고 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유정물, 다시말해 생명체는 DNA라는 복제 가능한 유전물질 지니고 있어
생식활동을 통해 자손을 만들어 내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무정물, 무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와 광우병의 원인체를 규명하면서 밝혀진
프리온이라는 원인물질이 유전자가 전혀 없는 단백질에 불과하지만
생물체내에서 증식하고 전파되어 확산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은 전면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 때 비로소 생명과학자들은
생물과 무생물, 유정물과 무정물이란 경계가 따로 없음을 깨닫게 된다.
유정, 무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분류이자 분별이었을 뿐이지,
본래 그렇게 나뉘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큰 한 바탕으로부터 비롯되어
여러 원인과 결과에 의해 만들어진 모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밝힌 미국의 프루즈너 교수는 97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유정물이나 무정물이라는 것은 단지 이름일 뿐,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 인간이 더 귀하고 천하다고,
더 우월하고 열등하다고 나누어 놓았을 뿐이지,
그 본 바탕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아무리 하찮다고 생각되는 무정물일지라도
그로인해 내가 죽음을 당할 수도 있고,
또한 그로인해 내가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옛 스님들은 무정물이 언제나 법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을 듣는 것은 오직 성인들 뿐이라고 했다.

하찮다고 생각되는 발 아래의 꽃을
신비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기 위해 고개를 숙임으로써
나에게 날아오던 화살을 피하게 될 수도 있고,
밤길에 차를 타고 가다가 불쑥 나타난
토끼 한 마리를 피하려다가 사고가 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내 운명을 갈라놓을 수도 있다.

내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이
반드시 인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찮다고 생각했던 무정물이 내 생사를 결정지을 수도 있고,
내 운명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 우주의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들이 모두
나와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하나도 하찮은 것이 없다.
더 귀하거나 천한 것은 없다.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소중한 것 처럼, 사람이 소중한 것 처럼,
똑같이 나무와 풀과 산과 흙과
심지어 자동차와 의자와 집과 컴퓨터 또한 소중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섰을 때처럼,
존경하는 스승 앞에 섰을 때처럼,
부처님 앞에 섰을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모든 존재 앞에 서라.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모든 존재 앞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마음으로 다가 서라.

일체 모든 존재를 존중하며 감사하고
찬탄하며 존귀하게 여기라.
이 세상의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에게
무한한 공경심으로 엎드려 절하라.
매 순간 세상 만물에게 기도하라.

유정물과 무정물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그 모든 것들이 인연법의 진리 안에서
동등한 입장으로 나와 인연을 짓고 있음을 안다면,
세상에는 더 이상 존귀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은 경이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세상을 향한 지고한 공경심!!
모든 존재를 향한 평등한 자비심!!
이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이 세상을 향한 마음이다.

학창시절에 원소, 원소주기율표라는 것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 때 나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간 학교에서 가르쳤던 것은 인간이 우월하다는 것이었고,
도저히 인간과 자연, 인간과 무정물은 하늘과 땅 차이일 수밖에 없었는데,
인간과 자연, 유정물과 무정물을 이루는 근본 원소는
동일한 것이라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동일한 원소들이 ‘어떤 인연으로 모였느냐’에 따라
인간도 되고, 동물도 되고, 식물도 되고,
심지어 자동차도 되고, 빌딩도 되고, 집도 되고, 물도 된다.
이것은 유정물과 무정물이 그 어떤 차별도 있지 않다는 반증이 아닌가.
우리는 결국 동일한 것들이 모여서 겉모습의 차이를 만들어 낼 뿐이지,
근원적인 어떤 높고 낮거나, 귀하고 천하거나 하는 차별은 없다.

나는 때때로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호젓하게 벗어나
홀로 산 길을 걸을 때,
아니면 낯설고 인적 드문 여행지를 거닐 때,
그럴 때조차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어떤 ‘존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미세한 느낌을 받곤 한다.

우리가 완전히 혼자 있을 때조차 사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발딛고 서 있는 대지와 흙과 함께 있는 것이며,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유정물, 무정물이
내 곁에서 따뜻한 도반으로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이러한 통찰 속에서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공경심과 찬탄과 신비 속에 머문다.
어찌 이런 세상이 신비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사소하거나, 하찮거나, 귀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통찰은 우리의 삶을
모든 존재를 향해 활짝 열려 있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향해 존중과 찬탄과 감사와 공경심을 갖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평등한 부처로써 섬기고 시봉할 수 있게 해 준다.

자동차를 타고 멀리 출장을 갈 때
자동차를 향해 동료의식을 가지고, 도반의식을 가지고
존중하며 감사하고 공경스런 마음을 보내라.
내 마음이 자동차를 향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향한
한없는 자비심과 공경심으로 넘칠 때
오늘의 운행은 안전하게 법계에서 자동차와 공동으로 도울 것이다.

설령 오늘 자동차 사고가 날 업이었다고 할지라도
모든 존재를 향한 깊은 존중과 감사와 공경심으로
조금 더 주의 깊게 운전을 함으로써
그 차량사고의 인연이 소멸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이나 식물도 사람 마음이 존중과 사랑과 자비로왔을 때
그 결정이 아름다워지고, 식물도 고요한 파장을 보낸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사람 마음에 따라 세포와 원소의 차원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그러니 모든 기도의 핵심인 감사와 존중과 공경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
그 주위의 모든 유정물, 무정물은
아름답고도 청정한 파장과 세포와 결정을 보여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감사와 공경심으로 충만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이
욕심과 화와 질투로 가득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에 비해
사고가 날 확률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의 마음자세가 운명을 바꾸고 업을 바꾼다는 말이다.
업장소멸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운명론이나 숙명론을 거부하지 않은가.
그 이유는 그 어떤 업일지라도, 그 어떤 과보일지라도
마음에 따라, 기도와 수행과 복덕을 얼마나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받아야 할 업장을 뒤에 받을 수도 있고,
다른 방법으로 보다 미세하게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침 공양을 하기 전에
물과 쌀과 야채와 수저와 식탁과 이 집에게 감사하라.
길을 걸으며 길가에 피어난 들꽃과
보도블럭과 신발과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무한한 공경을 보내라.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컴퓨터와 의자와 책상과 볼펜과 자판기와 책들과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도와주고 있음에 감사하라.

이처럼 무정물조차 나보다 못할 것이 없는
법계의 스승이며, 도반이고, 소중한 길벗이라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겠는가.

더 귀한 사람, 더 천한 사람,
더 중요한 사람, 덜 중요한 사람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일지라도,
바보나 정신병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이 생에서의 인연이 다했음을 알고 이교도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
그것이 바로 목련의 인연이었음을 바로 보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반대로 아무리 하찮게 느껴지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게서 내 인생의 가장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아주 나이 어린 어린이가 내 생명을 구해줄 은인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원수였던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니 사실은 내 인생에 귀하고 천한 사람은 없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거나, 좋거나 싫다고 정해진 사람은 없다.
모두가 똑같은 비중으로 존중받아 마땅한
내 삶의 부처요, 관음이고, 내 생명의 귀의처다.

귀한 사람에게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은 평범하다.
그러나 천한 사람에게 그 본질을 알고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의 이치를 몸소 깨닫고 실천하는 수행자다.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행하는 존중을 보내라.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에게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을 주라.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교수님들과 교직원 그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아주 유명했던 큰스님께서 감동스런 법문을 해 주셨던 적이 있다.
법문을 들으며 꼭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스님을 둘러싼 교수님들과 교직원분들의 눈치도 보이고
나 같은 한 명의 대학생의 질문이 거슬릴 것 같아 망설이다가
어렵게 나오시는 스님을 붙잡고 여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스님께서는 자비어린 시선으로 오래도록
내 눈을 진지하고도 진심어린 눈으로 마주보아 주시면서
나의 질문에 스님의 모든 노력을 다해 답변해 주셨다.
그 때 나는 너무도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어린 내 마음은 스님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아주 당연하지만 그 일은 오래도록 아주 특별한 경험으로 자리잡으면서
내 삶의 지침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 그 때 내가 했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은 기억에 없지만,
그 때의 그 존중받는 느낌과
나에게로 향한 그 스님의 집중과 자비와 눈빛은
두고 두고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몸소 깨닫게 해 주신
살아있는 법문으로 나를 밝혀주고 있다.

살아있는 지혜라는 것,
깨달음의 실천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을 보내주는 것,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존재에게
나의 모든 공경심을 바치는 것,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무정물들에게 조차
찬탄과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세상을 향한 차별 없는 열린 마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부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것이 부처다.










Posted by 법상





[봄 속에서 가을을 본다.
봄 꽃과 연초록의 새순 안에서
가을 단풍을 본다.
봄 단풍잎과 가을 단풍잎, 그 신비로운 변화]

삶이란
끊없는 평형작용이다.

내 몸을 깃점으로
들이고 내는 것은 항상 평형을 이룬다.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항상 균형감을 잃지 않는다.

많이 들어오면 반드시 나가게 되어 있고,
많이 내보내면 반드시 다시금 들어오게 되어 있다.

먹는 음식도
많이 들어오면 곧 나가는 신호가 오고
또 많이 나가면 다시
몸의 조화와 평형에 필요한 무언가를 찾게 마련이다.

업도 상대에게 악업을 지으면
상대에게 악의 과보를 받게 되고,
상대에게 선업을 지으면
상대에게 선의 결과를 받게 되지 않는가.

사실 인과응보나 업보설이란
우주의 평형성을 일컫는 말에 다름 아니다.

내가 남에게 사기를 치면
우주의 에너지는 평형이 깨지게 되고
그 평형을 맞추기 위해 우주는
나에게 사기 당할 기회를 마련해 준다.

사기 당할 기회,
사기 당하는 것이 어찌 기회인가 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 하나의 기회요,
나를 위한 평형의 추를 바로 놓을 수 있는
영적 성숙과 비움의 귀중한 때인 것이다. 

내가 남에게 욕을 했다면
나와 상대방 사이의 에너지는 평형이 깨지게 되고
우주는 그 평형을 맞춰 주기 위해
나에게 욕 얻어 먹을 상황을 마련해 준다.

욕을 얻어 먹어야지만
나와 우주 간의 평형이 올바른 균형감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만약 욕을 하고 받지 않고 지나간다면
그것은 내 안에 남아
탁한 에너지의 형태로 잠재된 채
그 덩치를 키우게 될 것이다.

그 탁한 에너지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이자가 늘어나듯 불어갈 것이고,
만약 아주 오랜 훗날 그 과보를 받게 된다면
몇 배, 몇 십배 이상 커진 과보로 되돌아 올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많이 베풀면 분명 많은 것이 들어오지만,
인색한 구두쇠가 된다면
그 어떤 것도 다시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많을수록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의 조화요
내 몸과 마음의 조화로운 작용이다.

이 몸이라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는,
다만 들이고 내는,
들어오고 내보내는 중간 역할을 할 뿐이다.

끊임없이 베풀라.
그러면 반드시 끊임없이 들어 올 것이다.

내 것을 꽁꽁 묶어 두고
절대로 타인과 나누지 말라.
그러면 반드시 들어오는 것이 막힐 것이다.

내보내는 것,
그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다.

나가는 것을 막는 것은
곧 들어오는 것을 막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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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 - 인과응보

연기법을 원인과 결과의 상관성의 측면에서 살펴본 말로 인과, 인과율 혹은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다. 원인이 있으면 그 원인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가 있게 마련이며, 결과가 있다는 것은 곧 그에 대한 원인이 있게 마련이라는 의미다. 또한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를 받고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를 받는다고 하여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법이 그대로 연기법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인과율이 연기법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연기와 인과가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설명은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있고, 또한 ‘저것’으로 인해 ‘이것’이 있다는 상의상관적인 관계이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의지해 있고 도움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반해, 인과라는 것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을 수 있다는 직선적이고 시간적인 인과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에서 씨앗이라는 ‘인’에 다양한 ‘연’이 화합함으로써 열매라는 ‘과’를 맺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인과법칙의 좋은 비유가 될 수 있다. 씨앗이라는 인(因)과 흙과 거름과 물 등의 연(緣)이 화합하여 열매를 맺고[果] 그 열매를 우리가 먹음으로써 생명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 이처럼 인연이 화합하면 그에 따른 결과인 과(果)를 맺는다. 인과에서 본다면 직접적인 원인인 인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이 모두 어떤 한 결과를 맺는 원인으로 작용했으므로 이 두 가지를 다 ‘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씨앗이라는 ‘인’으로 인해 열매라는 ‘과’를 맺은 것도 인과이며, 농부의 노력이라는 ‘인’으로 열매라는 ‘과’를 맺은 것도 인과인 것이다. 이처럼 인과는 인간과 사물 간에도 작용하고, 존재와 존재 간, 존재와 사물 간 등 모든 생명 있고 없는 존재들에게 해당되는 자연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과 그에 따른 결과라는 인과를 별도로 업보(業報)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즉 인간의 의지적인 행위라는 원인[인]을 ‘업’이라고 부르며, 그러한 의지적인 업에 따른 필연적인 대상의 반응을 ‘보’라고 한다. 이것을 업인과보(業因果報)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바로 뒤에서 설명될 십이처 교리에 입각한 주체적인 인간의 육근과 객관적인 대상이라는 육경 사이의 법칙인데, 인간이 눈귀코혀몸뜻으로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작용을 일으키면[인]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은 필연적으로 그에 따른 반응[과]을 보인다는 것이다. 즉 인간과 대상 사이에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과 대상 사이에 인과의 법칙이 존재하는데, 그 대상은 일반적으로 자연물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인과의 관계는 성립된다.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말해주듯이 내가 상대방에게 선으로 대하면 선의 결과가 돌아오지만, 악한 행위를 하면 악의 결과가 돌아오는 것이다. 이 업보에 대해서는 뒤에 업과 윤회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한다.




법계 - 법주법계

이상의 연기, 인연, 인과에 대한 설명에서처럼 이 우주의 근저에는 연기라는 법칙이 전제되어 있다. 이 우주의 기본 법칙이기도 하면서, 인간과 모든 존재들의 기본적인 운행 법칙이 바로 연기법인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것들도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즉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연기법이라는 법칙에 머물고 있으며[法住], 연기법이라는 진리의 세계[法界]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잡아함경』 12권 296에서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出現)하시건 혹은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으시건 이 법은 항상 머무르나니(法住), 법이 항상 머무르는 곳을 법계(法界)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즉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건 출현하지 않으시건 일체 모든 존재는 항상 연기라는 법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이 세상은 항상 진리가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에 진리의 세계 곧 법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잡아함경』12권 299에서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 다만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정각을 이루어 중생들을 위해 분별하여 설하고 드러내 보이신다.”고 함으로써 연기법이라는 진리가 법계에 상주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법주 법계의 이치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저 우연히 생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저마다 완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며, 진리의 몫을 해 내기 위해 진리로써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 모든 것들을 ‘제법’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제각기 진리로써 존재하고 있는 ‘법’이라는 의미다.

사람만 진리로써 나툰 것이 아니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도, 저 하늘의 구름이며, 바람이며, 별들도, 아무리 작은 풀벌레며 곤충과 심지어 미생물들 또한 제각기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진리로써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진리의 법계에 법으로써 법주하는 것이다. 즉 진리의 세계에 진리로써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인간만을 우월하다 하고, 자연이나 자연물들을 열등하다 할 수 있겠는가.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어찌 높고 낮은 우월감이 발붙일 수 있겠는가. 일체 모든 존재는 그대로 법계에 법주하고 있는 법으로써 정확히 필요한 곳에 정확히 필요한 이유를 가지고 정확히 필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편견으로 보았을 때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존재이유는 분명한 진리의 몫을 띄고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이 세상을 원망하곤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자이고 좋은 가문에 태어나고,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반해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먹고 살 걱정, 의식주 걱정으로 허덕이며 근근이 살아간다. 또 어떤 사람은 간교한 계략과 이기적인 술수로써 살아가는데도 성공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성실하고 소박하게 베풀며 살아가는데도 가난을 면치 못하기도 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더욱 더 이런 불만과 불평등의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신을 욕하고 부처를 탓하며 이같이 불평등한 세상에 무슨 진리가 있겠느냐고 자조 섞인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연기법에 기반한 법주 법계의 진리에서 본다면 이 모든 불평등해 보이는 세상이 사실은 분명한 진리로써 진리의 모습에 하나도 어긋남 없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좁은 소견에서 본다면 당장에 이번 한 생 밖에 볼 수 없으며, 당장에 눈 앞에 보여지는 것에만 연연하지만 우주적인 진리의 시야는 시공을 초월하며 전체적이고 전 우주적인 툭 트인 정견(正見)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언뜻 보기에는 불평등해 보이고, 진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일지라도 사실은 그 이면에 분명하고도 정확한 인연, 인과, 연기의 진리가 일체 모든 존재의 저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진리가 머물러 있는 진리의 세계, 법계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이 법계를 판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선이 전체적인 법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견해를 정견으로 바꾸어 나가야지, 현재의 갇혀 있는 좁은 소견으로 이 법주법계를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치우쳐 있고, 갇혀 있는 좁은 소견을 온전하고도 전체적인 치우침 없는 정견으로 바꾸어 가기 위해, 그래서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열반을 증득하려면 먼저 법에 머무를 줄 알아야 한다. 즉 법주를 알아야 한다. 『잡아함경』14권 347에서는 “그들은 먼저 법에 머무를 줄을 알고 뒤에 열반을 알았느니라. 그 모든 선남자(善男子)들은 홀로 어느 고요한 곳에서 분명하게 사유하기를 게으르지 않으며, 나라는 소견[我見]을 여의고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잘 해탈하였느니라.”라고 설하고 있듯이, 법에 머무를 줄 알고 난 뒤에야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법주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이 곧 법이 머물러 있는 곳임을 분명하게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이 우주는 그대로 법신불(法身佛)이요, 낱낱의 존재는 모두가 자성불(自性佛)이라고 하는 말도 바로 법주법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진리가 항상 머물러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 우주 법계를 법신불이라고 하며, 나라는 존재 또한 사실은 진리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진리의 몸이기 때문에 자성불이라고 한 것이다.

법신불이니 자성불이니 하는 말이 어떤 실체나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진리로써의 몸 없는 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열반을 구하려는 수행자는 이러한 법주를 바로 알아 내 안에, 또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주에 언제나 법이 머물러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그러한 법신불과 자성불의 진리에 일체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의 첫째는 나를 완전히 내던져 맡기는 것에 있다. 경전의 말씀처럼 법주를 분명히 알아야 열반이 있는데, 법주를 분명히 알아 실천한다는 것은 곧 ‘홀로 고요한 곳에서 분명히 사유하기를 게으르지 않고, 나라는 소견을 여의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에 있다. 나를 완전히 진리에 내맡기고 진리의 흐름에 들어 완전히 힘을 빼고 함께 따라 흐를 때, ‘나’라는 소견을 벗어날 수 있으며, 번뇌 또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즉, 법에 머무른다는 말은 곧 ‘나’라는 소견을 놓아버리고 모든 생각과 번뇌를 다 내맡기고 다만 홀로 고요히 사유하고 바라보기를 게으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에 모든 것을 맡겨야 ‘나’를 내세우지 않을 수 있고, 법이 머무르고 있음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홀로 고요히 사유하고 지켜보는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에게도, 내 주변의 세계에도 진리가 항상 머물러 있음을 바로 알고 믿어 법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나의 소견을 내세우지 않으며, 고요히 법을 사유하고 지켜보는 수행을 했을 때 법에 머무르는 지혜[法住智]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주지(法住智)를 얻으면 ‘나’라는 소견이 사라지고, 일체 모든 것을 법에 내맡기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평화가 깃들고 지혜가 생겨난다. 『잡아함경』14권 345에 보면 “저 사리불 비구는 실로 내가 하루 내지 7일 밤낮 동안 다른 글귀와 다른 맛으로 묻는 이치에 대해, 7일 밤낮 동안 다른 글귀와 다른 맛으로 그것을 해설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사리불 비구는 법계(法界)에 잘 들어갔기 때문이니라.”라는 대목이 보인다.

즉 부처님께서 몇 일 밤낮 동안 다양한 가르침을 행하시더라도 사리불은 그 모든 법을 해설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데, 그것은 사리불이 법계에 잘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리불 비구는 법계에 잘 들어가 진리의 세계를 완전히 깨닫고 진리와 하나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부처님의 말씀이라도 다 이해하고 해설해 줄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는 핵심은 바로 이 세계가 단순한 세계가 아니라 진리로 이루어진 법계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이러한 법주법계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방법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우주법계가 곧 진리의 세계이며, 나라는 존재 또한 진리가 머물고 있는 법신임을 믿어 ‘나’를 내세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일체 모든 것을 진리에 내맡기고 살아가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내가 산다고 하면 아상에 빠지게 되고, 이기와 아집에 빠지고 말지만, ‘진리’가 산다고 믿고 맡기며, 부처님이 산다고 믿고 맡기고 살게 되면, 괴로움에 허덕일 것도 없고, 삶을 헐떡거리며 살아갈 것도 없어진다. 그 때부터는 삶이 고요해지고, 이기와 아집이 소멸하며, 평화와 안식이 깃들게 된다.

괴롭기 위해서는 괴로운 ‘나’가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것을 법주법계에 맡기고 살게 되니 ‘나’가 사라지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진리’만이 남아 진리답게 법답게 저절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주법계로 사는 수행자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사는 것이며,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주 법계의 수많은 진리의 인연에 의해 살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 법주법계에서 알아야 할 중요한 한 가지는 법주나 법계를 주체적인 어떤 상으로 실체화시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법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진리로써의 이치를 설하는 것이지 별도의 상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중생계와 별도로 실체적인 어떤 법계가 있다거나, 내가 머물고 있는 이 현상계와 별도로 법주가 있다고 이해한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교의 무아에서는 그 어떤 실체도 발붙일 틈이 없다. 심지어 그것이 진리일지라도, 부처일지라도 거기에 집착하고 머물러 실체화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를 벗어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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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과 흔히 혼용하여 쓰고 있거나, 함께 쓰고 있는 것으로 인연(因緣)이란 말이 있는데, 사실 연기는 인연생기(因緣生起), 혹은 인연소기(因緣所起)의 줄인 말이다. 인과 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인과 연이 화합함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연기법인 것이다.

여기에서 ‘인’은 결과를 발생케 하는 직접적인 원인을 의미하고, ‘연’은 간접적이며 보조적인 원인을 뜻한다. 그래서 인은 직접적이고 연은 간접적이라는 뜻으로 친인소연(親因疏緣)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식물에서 본다면 식물의 직접원인인 ‘인’은 씨앗이 될 것이고, 간접적인 원인인 ‘연’은 거름과 흙과 태양과 공기와 물과 농부의 노력 등 식물을 싹틔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간접적인 일체의 원인을 말하는 것이다.

즉, 어떤 한 존재가 생겨나는데는 그것이 아무리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한 가지 원인만을 가지고 생겨날 수는 없으며, 인과 함께 수많은 보조적이고 간접적인 연들이 무수하게 도움을 주어야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과 연이 화합한다고 해서 인연화합이라고 한다.

식물 하나를 싹틔우고 꽃피우는데 만도 이 우주의 지수화풍의 모든 요소와 태양과 바람과 구름과 모든 멀고 가까운 온갖 조건과 원인들이 수도 없이 많은 보조적인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연이라는 것은 다만 몇몇가지 간접 원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형성시키는데 도움을 준 일체 모든 것들의 크고 작은 모든 원인을 의미하며, 나아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식물 한 그루를 싹틔우는 보조적인 연으로써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체 모든 생겨난 것은 인연화합의 이치를 따른다. 앞의 연기의 설명에서 보았듯이 이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것들은 저홀로 독자적으로 생겼거나, 어떤 특정한 한 가지 원인에 의해 한 가지 결과가 도출한다는 직선적이고 단일적인 인과가 아니라 인연법에서 보듯이 인과 연의 무수한 원인과 조건들이 조화를 이루어 화합하였을 때 결국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인연법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인과 연이라는 것이 확정적으로 어떤 것이 ‘인’이고, 어떤 것이 ‘연’이라고 딱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또한 어떻게 보느냐의 관점에 따라, 시간과 공간적인 차이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인과 연이 바뀔 수도 있다.

인연법에서 중요한 것은 결정론적으로 ‘인’이 무엇이고, ‘연’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생겨나는 것들은 그 생성과 소멸에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들이 무한하게 중층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연계되면서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인연화합의 가장 대표적인 경전의 비유는 우유와 치즈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우유를 발효하여 치즈를 만든다고 했을 때 우유가 직접적인 원인인 인이 되고, 발효과정이나 발효에 들어가는 간접적인 모든 조건들이 연이 되는 것이다. 우유만 있어도 발효라는 연이 있지 않으면 치즈를 만들 수 없고, 발효라는 연의 조건이 있더라도 우유라는 인이 없으면 치즈라는 과를 가져올 수 없으므로 인과 연은 어느 하나가 빠지더라도 과를 생성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비유로 물의 순환을 들 수 있는데, 물이라는 것이 인연 따라 여름철 장마를 만나면 비로도 내렸다가, 겨울에 추운 조건이 형성되면 눈으로도 내리고, 또 때로는 우박으로도 내린다. 특정하게 물이 어떤 실체가 있었다면 그렇지 않겠지만 물 또한 실체 없이 다만 인연 따라 변화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대지 위를 내린 비는 산과 숲을 만나 인연 따라 나무의 수액도 되었다가,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피나 땀이 되기도 하고, 지하수도 되었다가, 호수나 계곡물로도 되고, 나아가 강이나 바다로도 흘러든다. 또한 뜨거운 햇살이 내리쬘 때면 수증기로도 증발하고 다시금 하늘에 구름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름이 다시 인연을 만나면 비나 우박이나 눈 등으로 다시 쏟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인연 따라 물은 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이름도 비, 눈, 우박, 서리, 이슬, 구름, 수증기, 수액, 피, 땀, 강, 바다, 계곡물 등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바뀐다. 이처럼 물이라는 근본 원인(因)이 어떤 조건, 어떤 연(緣)을 만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돌고 돌며 순환한다.

물론 그 물이라는 분자 또한 수소원자와 산소원자로 나뉘면서 변화해 가고, 수소나 산소 또한 그것을 쪼개면 원자핵과 전자로 나뉘는 등 어떤 실체적인 것 없이 끊임없이 인연따라 변화해 갈 뿐인 것이다. 이처럼 그 모든 것은 인연화합의 이치를 따르며 변화해 간다.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 따라 바뀌어 갈 뿐이다. 그래서 무아이고, 공이며, 무상이고, 그 모든 것을 연기 혹은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어 공이며, 무아이고, 무상이며, 연기이다.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도 마찬가지고, 존재의 생주이멸(生住異滅)도 마찬가지이며, 우주의 성주괴공(成住壞空)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이 다만 인과 연의 화합에 의해 생성되고 머물며 변해가고 소멸되는 단계를 밟고 있는 것이다.

작게는 나라는 존재도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인과 그 두 분의 사랑, 결혼 등이라는 연에 의해 생겨나고, 또 다시 수많은 사람들과 우주적인 도움을 받아 인연 따라 성장하고 늙어 가다가 죽는 것이며, 모든 존재의 생주이멸도 그러하고, 우주의 성주괴공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별의 탄생이라는 것도 독자적으로 어느 순간 탄생된 것이 아니라, 별과 별 사이의 성간물질이라고 하는 ‘인’이, 빛과 탄소와 그로인한 수축 등의 다양한 ‘연’을 만나면서 빛을 발하고 핵융합 반응을 하면서 인연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러한 모든 별들은 만들어졌다가 머무는 단계를 거친 뒤에는 어김없이 핵융합 반응의 원료인 수소를 다 쓰게 되어 소멸될 수밖에 없다.

태양만 보더라도 과학에서는 현재 50억 년 정도 핵융합 반응을 통해 성주(成住)의 과정을 거쳤고, 앞으로 50억 년 쯤 후가 되면 수소 핵융합 반응의 원료인 수소를 다 소모하게 되어 태양의 일생도 괴공(壞空)의 단계로 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처럼 이 우주의 일체 모든 생성된 것들은 크든 작든 모두가 인연화합의 법칙에 적용을 받는다. 누군가가 창조한 것도 아니고, 우연처럼 생겨난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 인과 연의 화합에 따라 만들어지고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은 본래 텅 비어 있는 공이었지만, 인과 연을 만나면 생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의심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어떻게 인과 연을 만난다고 해서 결과를 발생케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이지만, 무이지만, 인연을 만나면 결과를 이룬다는 이 사실에 대해 단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비유로 불의 비유가 있다.

여기에 나무와 나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나무와 나무[因]를 인위적으로 비벼줌[緣]으로써 우리는 여기에서 불[果]을 얻을 수 있다. 본래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공기 중에 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비벼주는 손에 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무라는 인(因)에 힘을 가하여 비벼 주는 연(緣)으로 인해 결과인 불[과(果)]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불이 만들어 진 것은 나무 때문만도 아니고, 공기 때문도 아니며, 비벼주는 손 때문만도 아니다. 다만 나무와 공기와 손, 그리고 습도며 주변여건 일체가 인연 화합하여 모일 때에만 불이란 결과를 생(生)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젖은 나무를 아무리 비벼도 불을 얻을 수 없으며, 공기가 없는 곳에서는 아무리 나무를 비벼도 불을 얻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일정한 시간이 지나 나무가 모두 타게 되면, 인과 연이 소멸하였기에 불은 자연히 스스로 꺼지게 된다. 모든 존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하여 인연소멸(消滅)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의 비유는 모든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귀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모든 존재의 생성과 소멸이 이와 같이 인연 따라 만들어지고 인연 따라 소멸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생명의 탄생에 대해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를 가지고 논쟁하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인연론, 연기론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존재는 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소멸된다는 이치이다. 불이라는 것은 본래 어디에도 없었다. 손에도, 공기 중에도, 나무 안에도 불은 없었지만, 그 모든 인과 연의 조건이 화합하는 순간 불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불이 창조되었다거나 진화되었다거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인연 따라 생겨났을 뿐이다.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다만 인연이 모이면 생성되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인연법, 연기법의 이치에 따라 생성과 소멸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유(有)는 원래 스스로 무(無)인데, 인연의 이룬 바이다’라고 했다. 본래부터 존재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모든 것이 텅 빈 무이며, 공이었고, 무아였지만, 다만 인연이 화합하는 순간 인연따라 신기루처럼,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금강경』에서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體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고 하여 일체의 모든 만들어지고 소멸되는 것들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하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본래의 모습은 텅 비어 있는 공이지만, 다만 인연의 화합으로 인해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이러한 인연법은 존재와 사물의 생멸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삶에도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아무리 태어나면서부터 부자로 태어나는 ‘인’을 부여 받았더라도 모두가 다 성공하고 그 부유함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하고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인’을 부여받았더라도 스스로 그 현실을 받아들이며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는 등의 연을 쌓는다면 오히려 성공적인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더욱 좋은 연들을 많이 만날 수도 있지만, 좋지 않은 연들을 만남으로써 실패를 맛보게 될 수도 있다.

보통 사람들은 똑같은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혹은 더 많은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남보다 더 못살고, 더 잘 살지 못했을 때 세상을 원망하고 부처를 원망하며 이 세상에는 진리가 없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인연법이라는 진리를 올바로 깨닫지 못한 탓이다.

인연법에서는 똑같이 시험 성적을 90점 맞았다고 그 90점을 맞은 사람들이 똑같이 잘 살며, 똑같은 부유함을 유지하며, 똑같이 대학에 합격하고, 똑같이 사회에서 상류층에 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시험 성적을 90점을 맞았다는 그 근본 원인인 ‘인’에 내 적성과 취향과 꿈,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조언 등 무수히 많은 ‘연’이 함께 화합함으로써 어떤 사람은 A라는 대학 a과에 진학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B라는 대학 b라는 과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며, 또 다른 많은 연들로 인해 두 사람의 인생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공부를 잘 한 사람은 무조건 회사도 좋은 곳에 들어가고 잘 진급하며, 못 한 사람은 나쁜 회사에 들어가 진급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공부를 잘 한 사람은 공부만 한 대신 인간관계를 잘 못 지었지만, 공부를 못한 어떤 사람이 대신에 인간관계를 잘 지었다면 오히려 공부를 못 했던 사람이 또 다른 ‘연’으로 인해 진급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연을 잘 지어야 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든 내 삶에 있어 수많은 원인과 조건으로써 나의 삶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맑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 사람들이 하나같이 인이 되고 연이 되어 내 삶의 아름다운 인연으로 성숙되어 가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A라는 근본 원인이 그대로 a라는 결과만을 똑같이 가져다 주는 곳이 아니다. 그 근본 원인에 또 다른 무수한 어떤 연이 화합되느냐에 따라 수많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오고, 똑같은 과목으로 공부를 했지만 저마다의 적성과 취향과 직업과 능력과 가치관이 다른 것 아닌가.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열심히만 살면 똑같이 성공해야 한다거나, 똑같이 노력했는데 왜 저 사람은 되고 나는 안 되는가 생각한다거나, 저 사람은 이기적으로 사는데도 성공하고, 나는 이타적으로 살아도 실패를 맛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들이 단순하게 원인과 결과에 대한 단일적이고 일차원적인 결과만을 놓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인’과 ‘연’이라는 수많은 복잡다단한 부수적이고 간접적인 연까지 전체적이게 연기적이게 보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A는 a가 되는데, 나에게는 왜 A가 c가 되느냐고 억울해 할 것이 아니라, 그 A라는 근본원인에 타인과 내가 어떤 부수적이고 간접적인 연들에 대한 차이가 있었는가를 잘 살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같은 A라는 원인을 지었어도 선업이 많고, 복이 많으며, 인간관계에서 선한 인연을 많이 심어 놓은 사람의 결과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Posted by 법상




[사진 : 지리산 천은사]

‘내게는 업보가 닥치지 않으리라’고
작은 악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방울물이 고여서 항아리를 채우나니
작은 악이 쌓여서 큰 죄악이 된다.

‘내게는 업보가 오지 않으리라’고
작은 선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방울물이 고여서 항아리를 채우나니
조금씩 쌓은 선이 큰 선을 이룬다.

[법구경]



아무리 작은 악업을 짓더라도
그 업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를 불태운다.

작은 악업의 결과가 미미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다보니
당장에는 비켜갔으리라고 안심할지 모르지만
방울물이 모여 항아리를 채우는 듯
그러한 작은 악이 모여 언젠가는 분명한 큰 재앙으로 온다.

아무리 작은 업이라도
언젠가는 분명한 결과를 받는 법.

지금 몸이 건강하다고,
지금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지금 집안이 화목하다고,
지금 나의 행복이 충분하다고
현재에 안주하여 작은 선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훗날 내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누가 알겠는가.

막상 역경과 고통에 처했을 때
그 때, 대비하려면
이미 늦다.

행복할 때, 만족스러울 때를
더욱 조심하여
이 행복이 언젠가 소멸될 것을 알아
더 많은 복을 지을 일이다.

행복하다는 것은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뜻하니
복을 다 받고 나면
복의 창고는 곧 비고 말 것이다.

그러니 지혜로운 이는
행복할 때를 더욱 조심한다.

그렇다고 괴로울 때
삶을 포기하지도 말라.
기왕 이렇게 된 것
악행을 일삼고 스스로를 더욱 괴롭혀서는 안 된다.

불행하다는 것, 괴롭다는 것은
오히려 과거의 죄업을 받고 있는 것이니
사실은 불행한 때가
업장을 녹이는 소중한 순간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이는
행복한 때가 오히려 위기이고,
불행할 때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인과를 깨달아,
순경에 거만하지도
역경에 좌절하지도 않으며
언제나 조화로운 중도를 지킴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지켜 나간다.
Posted by 법상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기본 법칙을 다른 관점에서 조금 더 확장해 보자. 이 법칙은 나아가 큰 것이 있으므로 작은 것이 있고, 옳은 것이 있으므로 틀린 것이 있고, 남자가 있으므로 여자가 있고, 깨끗한 것이 있으므로 더러운 것이 있고, 이 생각이 있으므로 저 생각이 있고, 생이 있으므로 노사가 있고, 중생이 있으므로 부처가 있고, 생사가 있으므로 열반이 있고, 이런 식으로 우리가 분별하고 있는 일체의 이원론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즉 크다 작다는 분별은 사실 고정적으로 크고 작은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큰 것이 있으므로 그것과 견주어 비교되는 작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키가 큰지 작은지는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결정되어지는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무인도에서 홀로 자라났다면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사람이라는 분별도 없었을 것이며,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키가 큰지 작은지,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똑똑한지 어리석은지 라는 일체의 분별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일체의 분별이 있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무언가 비교되고 견주어지는 다른 인연이 있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남자 여자라는 분별이 있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안 되고, 나라는 남자와 비교될 여자라는 타인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키가 작다는 것도 나보다 키가 큰 타인‘을 말미암아’ 작다는 분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양 극단의 분별은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연기되어진 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크다 작다거나, 남자다 여자다거나, 잘생겼다 못생겼다거나, 똑똑하다 어리석다거나 하는 두 가지 극단의 분별은 절대적이거나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 의지할 때에만 연기적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실체적 관념이 아니므로 공(空)하다고 한다.

또한 이런 양 극단의 분별은 끊임없이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무상(無常)이고, 그러므로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고정적인 자아적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키가 큰 사람도 농구 선수들 앞에 가면 작게 느껴지고, 키 작은 사람들 앞에서 있을 때 크게 느껴지는 것이듯이 인연따라 상황따라 변하는 것(무상)이며 그렇기에 ‘큰 사람’이라고 고정적으로 말 할 수 없다(무아)는 뜻이다.

이와 같이 양 극단의 분별로써 고정지을 수 없기 때문에 중도(中道)라고 한다. 즉 연기된 모든 것은 무상하고 무아이며 공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극단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항상 중도적인 치우치지 않은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한 사람을 보고 크다거나, 잘났다거나, 옳다거나, 혹은 작다거나, 못났다거나, 그르다거나, 그 어떤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도 인연따라 크거나 작을 뿐이고, 인연따라 선하거나 악할 뿐이며, 인연 따라 변해 갈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사람들을 볼 때 중도적인 치우침 없는 시선으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뒤에서 다시 언급하게 될 팔정도의 정견(正見)이다. 연기적인 시선이 바로 정견이며, 중도이고, 공과 무아, 무상의 바라봄인 것이다.

이처럼 연기적인 시각에서는 일체 모든 사람이 완전히 평등하며, 차별이 없어 높은 사람이라거나 낮은 사람이라거나, 능력 있고 없다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고 되지 않다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연기적인 시선에서, 또 깨달음을 얻으신 큰스님들의 시선에서 우리 모든 중생들은 똑같이 평등하고, 똑같이 사랑스러우며, 똑같은 존재감으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연기적인 치우침 없는 대 평등의 시선이 가능한 것이다.

옳고 그르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기법의 세상에서는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절대적으로 틀렸다거나 할 것이 없다. 옳고 그르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며, 연기적인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옳은 견해가 다른 나라에서는 그르게 나타날 수도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선이 다른 나라에서는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여인이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결혼하게 되어있고 그것이 옳은 이성관이지만, 예를 들어 무슬림은 한 남자가 네 명의 부인을 얻을 수 있고, 아프리카의 마사이족, 바쿠족, 간다족 등도 여러 아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부다처제와는 반대로 일처다부제인 곳으로는 티베트가 있는데, 티베트는 한 여성이 한 집안의 장남과 결혼하면 그 집안의 다른 형제들과도 결혼할 수 있고, 나이지리아의 하우사족 또한 자가(Zaga)혼인이라고 하여 남편과의 이혼 없이도 다른 남자와의 결혼이 가능하다.

이처럼 시대와 나라가 다르면 그곳의 문화나 풍습도 다르고, 성적인 윤리의식도 다를 수 있다. 옳고 그르다는, 선과 악이라는 것이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어느 나라건 어느 시대건 상관없이 다 똑같아야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서 보는 선악의 시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상호의존적이고, 상호규정적이며, 상황따라 달라질 수 있고, 시대나 나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선악은 연기적인 것이며 상의상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분법적으로 딱 나누어 진 것이 아니라 선이 있으므로 악이 있고 악이 있으므로 선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의존적이고 연속적으로 연결된 하나이다. 절대적인 선악의 차별이 있다면 거기에는 선에 대해 악을 배제하고, 강압하며, 미워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동반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남게 되지만 연기된 것으로 볼 때 선악은 유연하고 자율적이며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포섭할 수 있는 화합과 평화적인 윤리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전쟁을 볼 때 그 두 나라가 보기에는 서로가 극단적인 적이며 악이기 때문에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라는 이분법에 젖어 있음을 본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팔레스타인이 적이고 악이며, 팔레스타인들이 볼 때는 유대인들이 악이다. 그러나 한 발 떨어져 바라본다면 유대인이 있으므로 팔레스타인이 있고, 팔레스타인이 있으므로 유대인이 있는 것이지, 그 어느 한 나라가 선이고 다른 나라는 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어느 한 쪽에서 자신을 선이라고 생각하니까 상대방이 악이 되는 것이지 본래 선악이 정해 져 있지는 않은 것이다. 조금 예민한 문제이긴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이어져 왔던 종교전쟁들을 보더라도 내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나라는 절대선이고 타종교를 믿는 사람과 나라는 절대악인 것 처럼 규정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곤 했지만, 사실 그러한 두 종교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 현대에 와서는 그 두 종교가 모두 올바른 종교로써, 이 세상을 대표하는 종교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과연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모호해진다.

이것을 보더라도 본래부터 어느 종교가 선이고 다른 종교는 악이라고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상의상관적이며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난 것에 불과하다. 내 종교를 선이라고 규정하면서부터 타종교는 악이라는 규정이 생긴 것이니 상호규정적인 것이다.

이처럼 선악이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혹은 어떤 특정한 상황과 믿음 속에서 연기되어 발생한 것이라면 선악은 구체적인 상황을 떠나서 고정되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악은 연기된 것이고, 공(空)한 것이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것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처럼 선악이라는 분별이 연기된 것이기에 공하고 무상하며 무아라면 선악이라는 양 극단을 나누어 놓고 서로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따질 것도 없고, 이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선악의 양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은 위험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연기된 것이기에 양 극단을 내세울 것이 없으므로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이다.

중도적인 실천에서 본다면 선악으로 나눌 것도 없고, 어느 한 쪽은 옳다거나 다른 쪽은 그르다거나 하고 극단적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상황 따라 연기되어진 것이므로 사실은 고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선이라고 혹은 악이라고 낙인찍어 놓고 선이 악을 없애기 위해 폭력을 저지르는 것 또한 발붙일 수 없게 된다. 연기와 중도적인 관점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네가 없으면 내가 없고, 네가 존재함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전체적이며 동체로써의 자비로운 통찰이 진흙 속에 연꽃이 피어나듯 피어오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는 부유함과 가난의 양 극단의 삶은 양쪽 모두에게 온갖 사회적인 문제를 가져다 주고 있다. 이 세상 어느 한 쪽에서는 기아와 가난과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허덕이며 하루에도 5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이 3만 5천 명씩 죽어가는 마당에 또 다른 곳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비만으로 고민하고, 넘쳐나는 음식물 쓰레기로 고민을 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남한에서는 한 해 음식물쓰레기가 14조원에 달하는데 그 정도면 북한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양이라고 한다. 부자 나라는 부유해서 괴롭고, 가난한 나라는 가난해서 괴롭다. 선진국들은 개발과 발전으로 인한 온갖 환경문제들 때문에 괴롭고, 후진국들은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어서 괴롭다. 양 극단은 언제나 고(苦)를 가져온다.

이러한 양 극단의 문제는 연기적인 자각과 중도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양 극단의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극단을 지양하고 중도적인 삶을 실천할 수 있다면 양 극단의 고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한 나라는 스스로 만족과 청빈과 소욕을 바탕으로 한 동체대비의 자비사상으로써 가난한 나라에 나눔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남아도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만도 연간 15조원이상이 든다고 하고, 그 쓰레기로 인한 악취며 처리시 환경문제 등 온갖 부수적인 문제들도 만만치 않은 것을 생각했을 때, 스스로 조금씩 적게 가지고 적게 먹으며 쓰레기로 해치울 것들을 미리 가난한 나라들과 나누어 쓸 수 있다면 부유함의 괴로움도 가난함의 괴로움도 모두 함께 소멸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의 자각과 깨달음 그리고 소욕과 나눔의 실천적인 정신에 달려 있다. 이러한 소욕과 나눔의 정신의 바탕이 바로 가난한 나라가 없으면 부자 나라도 없고, 굶주리는 아이를 살리지 않으면 나 또한 사라지고 만다는 연기적인 철저한 자각인 것이다. 연기 중도적인 시선에서는 그들과 우리는 서로 의존하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 그들이 살아나야만 우리도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 연기법 강의(3)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 연기법 강의(2)
2007/11/09 - [불교교리강좌] -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다 - 연기법 강의(1)
세계는 한 송이 꽃 - 우주가 나를 돕는다

『지구를 치료하는 법』이라는 책에 보면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예를 볼 수 있다. 책에 의하면 1950년대 보르네오 섬의 어떤 마을에 말라리아가 크게 유행했을 때 말라리아 모기를 없애기 위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DDT를 뿌렸다고 한다. 모기는 모두 죽고 말라리아는 사라졌다. 그런데 그 후 여러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민가의 지붕이 너덜너덜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민가의 지붕에 살던 말벌이 DDT로 인해 모두 죽고 굼벵이를 먹이로 하던 말벌이 사라지자 굼벵이가 크게 번식하여 갈대로 이엉을 엮은 지붕을 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양철판 지붕으로 바꾸었지만 열대지방의 맹렬한 소나기인 스콜이 양철지붕을 때리는 소리에 주민들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DDT로 인해 수많은 벌레가 죽고 죽은 벌레를 먹은 엄청난 양의 뱀 또한 죽었다.

그 뱀을 고양이가 먹었는데 먹이사슬이 올라갈 때마다 DDT 농도가 농축되어 고농도 DDT를 섭취한 고양이들도 잇따라 죽어갔다. 고양이가 사라지자 쥐들이 극성을 부렸고, 쥐가 증가하자 다른 전염병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곤경에 빠진 WHO에서는 그 해결책으로 14,000마리의 고양이를 낙하산에 매달아 하늘에서 뿌렸다는 다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먹이사슬 전체에 혼란이 일어났는데 그 근본원인을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 보다는 당장에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를 뿌렸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단편적인 견해이며, 일차원적인 접근이고,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일어나고 소멸된다는 연기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결과인가.

이처럼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의존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일어나면 그로인한 다양한 ‘저것’들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어 있고, 또 그 ‘저것’들은 또 다른 제2, 제3의 ‘저것’들을 무수히 만들어 낸다. 연기를 모르면 그 근본 원인이 ‘이것’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제3, 제4의 ‘저것’들에서만 문제를 밝혀내고자 애쓰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지구나 우리 생활 속의 모든 일은 여러 가지 다른 일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의 작은 한 가지 구성원이 사라지면 곧 그것과 연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수많은 존재들이 사라지거나 직간접적으로 위험에 놓이게 되며, 결국 그것은 사람의 목숨까지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정신적 물질적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존, 공생의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 자연과 자연, 개인과 전체가 서로 서로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로써 공생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연의 한 개체가 파괴된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자연의 한 부분을 오염시킨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몸을 오염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그 어떤 현상일지라도 A의 결과는 B라고 하는 단편적이고 직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접근하면 그 현상에 대한 온전한 통찰이 어렵다. 모든 존재며 현상들은 어느 것 하나 전체적이며 우주적이고 연기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어떤 한 가지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중층적이고 무량하게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그 한 가지 일에는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를 피우는 데에도 온 우주가 동참하고 있다. 한 겨울의 얼어붙은 땅을 뚫고 피어나는 봄 꽃 한 송이에도, 한여름 우거진 녹음이며 쏟아지는 장대비에도, 가을철 아름다운 단풍과 이어지는 첫 눈의 설레임에도 크고 작은 온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연기적인 대 화합의 오케스트라를 장엄하게 연주해 줌으로써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면서 내 발을 씻어주는 생생한 현실 속에도 달의 인력이며 수 억 광년 떨어진 별의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

꽃 한 송이는 그저 단순한 꽃 한 송이가 아니라, 연기적으로 온 우주가 함께 피워낸 꽃이요, 온 우주의 숨결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나도 단순히 내가 아니라 온 우주의 반영이며, 우주적인 진리가 나로써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하나, 행동 하나 하나가 낱낱이 온 우주로 퍼져나가고 있고, 온 우주와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공존 공생하고 있다. 온 우주가 더불어 나를 살려주고 있고, 나를 돕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너’를 돕고 있다. 이처럼 온 우주가 한 송이 연꽃이요 평화로운 한 가족이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만공스님의 일갈도 이 같은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나온 깨침의 언어인 것이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어리석은 자들은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인 줄을 모르고 있어.
그래서 나와 너를 구분하고,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다투고 빼앗고, 죽이고 있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라.
흙이 있어야 풀이 있고,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

남편이 있어야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부모가 있는 법.

남편이 편해야 아내가 편하고,
아내가 편해야 남편이 편한 법.
남편과 아내도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이요,
이웃과 이웃도 한 송이 꽃이요,
나라와 나라도 한 송이 꽃이거늘,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을 바로 지니면 세상은 편한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참 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중생심에서 보면 나와 너, 남편과 아내, 이웃과 이웃, 나라와 나라, 내 종교와 네 종교, 인간과 자연 등 수많은 분별이 작용하여 ‘나’, ‘내 것’ 이라는 이기와 아집을 형성하지만, 연기적으로 보면 너가, 이웃이, 타인이, 다른 나라가, 다른 종교가, 자연이, ‘나 아닌 것들’이 모두 ‘나’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나’‘내 것’‘내 종교’‘내 나라’ 때문에 온갖 시비와 분별, 욕심과 전쟁 등을 초래하지만 연기적 시각에서는 그 모든 것이 동체적인 모습으로 한 뿌리, 한 몸, 한 가족일 뿐이다. 거기에서 온 우주와 나를 다르게 보지 않는 동체대비의 자비가 싹튼다. 이기는 사라지고 참된 사랑이 움튼다.

이러한 연기법의 상호의존관계에서 볼 때, 그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 말을 잘 살펴보면 이 속에는 그 어떤 존재도 실체적인 자아가 있지 않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인간도 인간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도 자연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인간과 자연은 공존, 공생의 관계이며, 그 둘은 모두 인연에 의해 존재하므로 비실체적인 것이다. 즉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는 무아(無我)인 것이며, 공(空)인 것이다.

그렇듯 일체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뗄 수 없는 연기적 동체(同體)의 존재요, 서로가 독자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비실체적 공생의 존재이며, 그렇기에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일체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자기 몸처럼 아껴주고 도와주며 존중해주는 자비를 실천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연기적인 삶의 기본 원칙은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의상관의 연기법과 그렇기에 그 어떤 존재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실체적 자아를 내세워 이기심을 축적할 수 없다는 공과 무아와 아집의 소멸, 그리고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되는 필수불가결한 한생명이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한 가족과 같은 따뜻한 사랑과 자비로써 대해야 한다는 자비사상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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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셋째,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소멸에 대한 공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소멸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의 소멸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사라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소멸하는 법은 없으며 공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다’에서 살펴보았듯이 존재의 생성에 모든 존재들의 상호의존과 관계성이 담겨 있듯이 존재의 소멸에도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들의 상호연관의 연기법은 적용된다.

앞에서 자동차를 예로 들었는데, 만약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엔진이 고장 나 버렸다면 그 자동차는 더 이상 굴러갈 수 없을 것이다. 타이어가 펑크가 나도 마찬가지고, 타이어휠이 고장 나도 마찬가지며, 미션이나 기어가 고장 나도 자동차는 더 이상 자동차로써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하다못해 기름이 없어도 자동차는 무용지물이 되 버리며, 그 자동차를 운전할 사람이 없어도 자동차는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이처럼 자동차를 구성하고 있는 어느 한 요소만 없어지거나 고장이 난다고 하더라도 자동차는 더 이상 자동차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그렇기에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소멸에 대한 연기법의 공간적인 표현을 볼 때 엔진이 없으면 자동차도 없고, 타이어가 없으면 자동차도 없고,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가 없고, 운전자가 없으면 자동차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소멸은 저홀로 독자적인 소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함께 하고 있던 수많은 연기되어진 원인과 조건들이 소멸 될 때 ‘~로 말미암아’소멸되는 것이다.

상황의 소멸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거처하고 있는 절은 규모가 작고 강원도의 산골에 위치 해 있다 보니 처음에는 법회나 기도가 있는 날인데도 신도님들이 한 분도 오시지 않아 법회를 열지 못한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낙심 아닌 낙심이 되었지만, 이것도 다 인연이구나 하고 마음을 돌리니 오히려 그 시간에 미루었던 다른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인연이 화합하여 모였을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어느 한 쪽에서 응해 주지 않으면 그 법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소멸의 법칙에서 보듯이 신도가 없으면 법회도 없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일들은 인연화합을 통해 만들어지고 인연화합이 되지 않으면 소멸되는 것이니 이러한 연기의 법칙을 거스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인연을 거스르게 되면 거기에는 고통이 따른다. 신도가 없으면 법회가 없다는 연기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투덜투덜 거리면서 마음에 고통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신도가 없어 법회가 없었지만 또 다른 새로운 포교의 방법을 모색하거나 그 시간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다면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라는 소멸의 법칙을 받아들여 새롭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생성의 법칙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의 법칙은 온 우주를 운행하는 근원이 되는 이치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거스르는 순간 괴로움이 시작되지만 받아들이는 순간 평화가 깃들게 되고 또 다른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그래서 연기법에서 보았을 때 모든 생성은 곧 소멸을 의미하고, 소멸은 또 다른 새로운 생성을 의미한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닌 한바탕에서 이루어지는 연극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생성을 즐거워하며 집착하고 소멸을 괴로워하며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이치를 받아들이면 생과 사도 자유롭고, 성공과 실패에도 그렇게 연연해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있고 없음, 소유와 무소유, 부와 가난 등의 분별 속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존재의 발생의 원칙과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원칙은 모두 공간적인 연기의 해석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지금 여기에서 더불어 존재하는 것들이며, 서로 서로 의존관계를 이루었을 때만 존재의 의미를 얻을 수 있으며, 어느 한 가지 원인이나 조건이 소멸되면 다른 의존관계를 이루었던 모든 것들도 도미노처럼 차례로 소멸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 원칙은 나아가 이 우주적인 한 공간에서 이 우주, 이 세계, 이 나라를 이루고 있는 일체 모든 존재들은 서로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로써, 서로가 서로의 생성과 소멸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상의상관하고, 상호의존하는 결코 따로 따로 떼어낼 수 없는 한생명이며 한몸, 한마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불교적 자비사상이 움트는 것이다. 온 우주가 둘이 아닌 한 몸으로 동체이며, 그렇기에 네가 있기에 내가 있고,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며, 네가 사라질 때 나도 사라지고, 네가 괴로울 때 나 또한 괴로울 수 밖에 없는 생명공동체로써 하나인 것이다. 나라는 실체가 있어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우주이며, 내가 곧 일체 모든 존재와 둘이 아닌 하나로써 그들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더불어 살아가는 이 우주의 모든 생명을 내 몸처럼 아끼지 않을 것인가. 내 행복이 곧 일체 모든 존재의 행복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면 나를 돌보는 것 처럼 남을 돌보고, 나를 돌보는 것 처럼 자연을 돌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기를 바탕으로 하는 자비인 것이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넷째,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소멸에 대한 시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소멸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의 소멸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사라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소멸하는 법은 없으며 시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님이 생함으로 내가 생하고, 조상들이 생함으로 내가 생한 것 처럼 나의 탄생은 앞으로 있을 미래의 수많은 내 자손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라지면 앞으로 있을 자손들 또한 사라지고 만다. 이와 같이 어떤 한 존재의 소멸은 또 다른 존재의 소멸로 이어진다. 여왕벌이나 여왕개미의 소멸은 곧 엄청난 자손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온갖 산업화며 도시화, 기계화, 인구의 도시집중 등을 비롯한 개발과 발전이 자연을 파괴와 그로인한 환경의 오염을 가져왔고, 그러한 환경오염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퍼져 전체 생태계의 파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예전에는 많았던 수많은 동식물들이 사라지고 있다. 생물종이 아예 사라진 것들도 많다. 생태계에서 어느 한 단계의 생물종이 사라지게 되면 연이어 먹이사슬로 이어지는 다른 종도 함께 사라지고, 또 다시 그 종은 또 다른 종의 소멸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그야말로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이치가 환경생태에서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과학자들은 앞으로 50년 이내에 지구상 생물종의 1/4이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현재 매일 적어도 140종 이상의 동식물이 사라지고 있고, 1년에 최소한 5만종의 생물종이 멸종되고 있다고 한다. 그 원인은 주로 숲과 열대우림 등의 서식처의 파괴에 있다고 하는데, 현재 전 세계적으로 1분에 29ha, 즉 축구 경기장 40개에 달하는 면적의 열대우림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생물종이 멸종되어 가고 지구온난화 또한 가속화된다고 한다. 이런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물종이 소멸되고 지구온난화가 계속되게 되면 머지않아 우리 인간들 또한 멸종되게 될지 모른다.

실제로 세계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환경오염으로 인해 남성의 정자수가 급감하고 불임이 늘어 인간의 자체능력만으로 임신을 계속할 수 없어 이런 상태로 2017년까지 가면 결국 인간도 멸종에 이르게 될 것임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시간적인 표현에 입각해 보더라도 자연이 사라지면 생물종이 사라지고, 생물종이 사라지면 곧 인간도 사라진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자연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있다”는 말은 자연과 인간이 동시에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연이 사라지기 때문에 인간이 사라진다”는 말도 자연이 사라짐과 동시에 인간 또한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연의 모든 존재 하나 하나는 곧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과 직간접적으로 인연관계에 놓여 있다. 연기법에서 보면, 자연의 작은 한 개체가 소멸되거나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곧 머지않아 인간 또한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기적인 상의상관성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현재 지구상에서 끊임없이 증명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이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한국만 해도 장마 대신 우기 개념을 도입한다고 할 정도로 아열대 기후에 접근하고 있다. 엘리뇨, 라니냐, 지진해일 등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생명과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를 거꾸로 생각해 보면 ‘이것을 지켜냈을 때 저것도 지켜진다’라고 볼 수 있다. 나무와 숲과 열대우림이 사라지면 생물종도 사라지고, 생물종이 사라지면서 인간의 종까지도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면 거꾸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무와 숲을 보호하고, 열대우림을 지켜내며, 나부터 나무를 심고, 환경을 보호하며, 개발지상주의적인 모든 발전사업들을 보다 친환경적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친환경적인 발전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가 있는 개념이다. 될 수 있다면 발전과 개발을 늦추거나 최소한도로 줄이면서 자연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고, 최소한의 자연 파괴와 최대한의 자연 살림을 실천해야 한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부유함과 욕망의 충족과 돈 있는 노후를 꿈꾸고자 하는 거대한 욕망의 흐름을 끊고 거슬러 만족하고, 청빈하며, 자연과 교감하는 조화로운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도록 모든 교육, 제도, 정책 등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사라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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