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의 세계에서 일체 모든 존재는 우연이나 운명론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며 존재가 만들어 내는 현상들은 모두가 그럴만한 인과 연에 의해 인연따라 연기되어진 것이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원인에 따른 분명한 과보를 받게 마련이다. 인과응보, 업인과보의 법칙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은 움직인다. 원인이 있으면 그에 따른 분명한 결과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나에게 주어진 현실은 어떠할까. 나에게 주어진 현실 또한 엄연한 인과응보의 결과일 뿐이다. 현실이라는 결과 또한 과거의 내 인연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에 받는 것이다. 내 스스로 만들어 내 스스로 받는 것이다. 업인과보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그것은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분명한 인과의 흐름을 타고 내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억울한 것 같고, 불평등한 것 같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일지라도 그것은 엄연한 인과의 법칙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부자들은 계속해서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오히려 정직하고 노력하는 자는 가난해 지기 쉽고, 오히려 열심히 살지 않더라도 머리만 잘 쓰고, 이기적인 사람이 성공하기 쉬운 현실을 한탄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에도 불만이 많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을 잘 만나 행복하게 부유하게 자라지만, 또 어떤 사람은 가난한 가정에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다. 그 뿐인가. 어떤 사람은 부자 나라에서 태어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척박한 땅에서 가난과 기아와 질병과 전쟁 속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은 세상을 한탄하고, 신을 원망하며, 진리가 과연 있는 것이냐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세상은 왜 이리도 불공평하단 말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이야말로 완전한 평등의 진리가 꽃피어나는 곳이다. 다만 우리의 눈에는 일부분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불공평한 것 처럼 보일 뿐이다. 전생과 이번생, 그리고 다음 생으로까지 이어지는 시간을 뛰어넘어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며, 공간적으로도 볼 수 있는 시야는 한정되어 있다.

인과라는 엄연한 진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정견의 시야가 없으며, 연기적이고 상호연관되어 일어나는 현상들을 전체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다. 그렇기에 우리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불평등하고 조화롭지 못하게 보인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세상, 인연과보, 연기의 세상은 완전한 대평등의 세계다. 어떤 이들에게는 인과가 적용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적용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인과의 진리는 적용되고 있다. 지혜로운 이는 인과를 보고 알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인과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등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인과를 전체적으로 볼 수 없더라도 이 세상이 연기법, 인과응보라는 진리로써 운행된다는 것을 안다면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연기라는, 인과라는 진리를 온전히 믿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믿든 안 믿든 연기와 인과의 진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연기와 인과의 법칙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앞에 펼쳐진 그 모든 것들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연기와 인과는 분명하다. 내 앞에 펼쳐진 그 어떤 괴로움일지라도,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모든 것은 인연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인과응보의 분명한 법칙에 따라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어떤 현실도 원인 없이, 이유 없이 나타날 수는 없다. 바로 지금이라는 현실이 내가 그 결과를 받아야 할 순간이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괴로운 일이 벌어지더라도, 조금은 불평등해 보이는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모든 것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꼭 필요한 일이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너무 괴로워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일지라도 그것은 바로 지금이라는 이 시기에 내가 받을 수밖에 없는 연기적인 현실이다.

그 현실은 누가 만들어냈는가. 그것은 바로 나다. 내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지을 때는 복도 짓고 죄도 짓지 않았는가. 그동안 우리는 살면서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우리 안에는 선업과 악업이 항상 공존하고 있다. 언제든 현실에서 발현되기만을 기다리다가 인연에 맞는 때가 오면 바로 그 순간에 선업이든 악업이든 현실로써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을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지을 때는 선행과 악행을 함께 지어 놓고 받을 때는 선행의 결과만 받고자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스스로 만든 현실을 내가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앞에 펼쳐진 그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라. 거부하지 말라. 받아들인다는 것, 섭수한다는 것이야말로 연기를 이해하는 모든 수행자들의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다. 즐거운 일은 과거에 지어 놓은 선의 결과를 받는 것이니 즐겁게 받아들이고, 괴로운 현실은 과거에 지어 놓은 악업의 결과를 받는 것이니 이 또한 받아들임으로써 악업을 녹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는 것이다. 업이 올라오는 순간에 완전한 긍정으로써 크게 받아들이고 섭수하면 올라오는 대로 녹아내린다. 눈부신 햇살에 겨울눈이 녹아내리듯 현실에서 나타나는 그 모든 인연들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여 녹이라.

받아들임에는 좋고 나쁜 분별이 없다. 좋고 나쁜 것이 있으면, 좋은 것은 받아들임을 넘어 집착이 붙게 마련이고, 나쁜 것은 거부와 배척이 뒤따른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선과 악 등의 이분법적인 분별이 붙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인간의 분별이 온갖 극단을 스스로 만들어 낼 뿐이다. 모든 경계를 다만 있는 그대로 분별없이 바라보면 받아들임의 지혜가 생겨난다. 좋고 나쁜 것이 없으니 좋다고 집착할 것도, 싫다고 거부할 것도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받아들임이야말로 곧 무분별과 무집착과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실천이며, 연기의 실천인 것이다.

이처럼 받아들임, 섭수야말로 연기와 중도, 공에 대한, 이 우주적인 진리에 대한 수용이며 존중이고 실천이다. 우주적인 진리를 진리로써 인정하며 그 앞에 나를 굴복시키고 복종시키는 진리의 숭고한 실천이다.

내 앞에 펼쳐지는 그 모든 상황을 전체적으로 수용하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 현실을 통째로 인정하라. 좋은 현실이든 나쁜 현실이든 분별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섭수하라.

순간순간의 모든 삶과 삶 속에서 피어나는 모든 경계들을 흔쾌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에는 평화가 깃든다. 삶을 대상으로 투쟁해 온 모든 다툼과 전쟁은 종식되고 지고의 안온과 평화와 자유로움이 깃든다. 모든 선악과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림이라는 극단적인 분별이 소멸되고 중도의 지혜와 텅빈 고요함이 드러난다. 섭수는 삶을 인정하는 것이고,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부처님과 부처님의 진리를 고스란히 내 품에 끌어안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려 하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을 놓아버려야만 사라지나니
이것은 변치 않는 영원한 진리이다.



이 게송에 얽힌 질기고 질긴 인과의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 당시 사위성에 두 아내가 한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실 때문에 둘째 아내를 들여놓고도 둘째 아내가 임신을 하자 질투가 일어 온갖 방법으로 몰래 아이를 낙태시켰다. 두 번째 아이까지 낙태를 하고 세 번째 아이의 출산까지 실패를 하면서 둘째 부인은 첫째 부인이 지금까지 자신의 아이를 죽인 것을 알고 증오와 원한을 품었지만 복수하지 못하고 아기와 함께 결국 죽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남편은 분노하여 첫 번째 아내를 구타했고, 결국 첫 번째 아내도 죽고 말았다.

이 두 여인은 다음 생에 원한을 버리지 못한 채 다시 태어났는데, 첫째 부인은 암탉이 되고, 둘째 부인은 고양이가 되었다. 암탉이 알을 낳을 때마다 고양이가 와서 먹어 버리더니 결국은 암탉까지 죽여 버렸다.

원한을 품고 죽은 암탉은 표범이 되었고, 고양이는 죽어 암사슴으로 윤회했다. 이번에는 표범이 세 번이나 암사슴의 새끼를 잡아먹었다.

또 다시 원한을 품은 이들은 죽어 암사슴은 여자 귀신으로 표범은 사위성의 여자 아이로 태어났고, 여자 귀신은 여자아이가 성장해 출산을 할 때 또 다시 아들을 죽였다. 마찬가지로 둘째까지 죽고 세 번째 아이를 출산했을 때 여자는 귀신을 피해 아이를 안고 도망쳐 부처님에게로 갔다.

부처님께서는 여인과 따라 온 귀신에게 그들의 과거 전생의 얽히고설킨 원한의 이야기를 해 주심으로써 이 두 중생에게 서로의 증오와 원망을 놓아버릴 수 있도록 이 게송을 설하셨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려 하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을 놓아버려야만 사라지나니 이것은 변치 않는 영원한 진리이다.”

한 번 일으킨 원한의 마음이 어떻게 몇 생을 이어가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돌며 얽히고설켜 서로에게 아픔과 괴로움을 주는지를 위의 이야기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돌고 도는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끈질긴 인과의 현장을 볼 때 원한의 마음, 증오와 미움의 마음이 얼마나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지, 그것도 어느 한 생, 어느 한 순간만 괴롭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음 생까지 이어져 원망의 마음을 완전히 비우기 전까지 계속되는 것을 볼 때, 내 안에 숨겨져 있는 원망과 미움과 증오를 어떻게 해야 할지 충분히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릿속에서의 깨달음일 뿐, 현실 속에서 원망과 증오는 좀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이상과 같은 억겁의 돌고 도는 죽고 죽이는, 괴롭히고 괴롭히는 연극 같은 일들이 바로 지금 우리들의 삶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저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원망과 미움과 증오의 인연들이 내 삶에는 부지기수로 퍼져 있어서 언제고 시절인연이 무르익으면 그 결과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지금 나의 삶을 돌이켜 보라. 내가 원망하는 사람, 나를 원망하는 사람, 내가 증오하고 미워하는 사람, 나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인가. 아직도 그를 생각하면 화가 나고 복수하고 싶고 심지어 죽이고 싶은 사람은 없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위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읽어보라. 저 이야기가 바로 그 사람과 나와의 인연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버리지 않는 이상, 그 사람과 나와의 인연은 언제까지고 다음 생 그 다음 생까지 이어지며 계속되고야 말 것이다. 증오스럽고 원망스러운 원수일수록 반드시 다음 생에 또 만나게 되어 있다. 원한과 증오의 마음을 놓아버리지 않는 이상 그 사람과의 만남은 계속될 것이다. 미워하는 사람을 한 번 만나기도 너무 힘겨운데, 다음 생 그 다음 생까지 계속해서 만나게 된다면 이 얼마나 지옥 같은 일인가. 그 지옥 같은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은 마음 속에서 원망과 증오를 놓아버리는 용서 밖에 없다.

내 안에 미운 마음, 증오스러운 마음, 복수심, 질투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과의 인연은 족쇄가 되어 나를 영겁토록 짓누를 것이다. 방법은 내 안에서 원망을 놓아버리고, 증오를 놓아버리는 일 밖에 없다. 내 안에서 참으로 용서해 주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얼마 전 TV에서 마음에 관한 특별기획으로 나온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프로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인 유영철을 처음에는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진심으로 용서하고 연민하게 되자 마음도 후련해졌다는 인터뷰 내용이 많은 이들의 가슴에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용서란 이와 같은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 묻어두고 있으면 그것은 내 안에서 병이 되고, 정신 질환이 되고, 또한 다음 생의 악업이 되고야 만다. 다음 생까지 갈 것도 없이 현대의학에서도 화를 자주 내면 혈압이 상승하고 혈관벽이 손상되며 심장질환을 일으키고 나아가 발암확률을 상승시킨다고 한다. 그러니 화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원한, 분노, 증오, 미움의 모든 뿌리를 놓아버림으로써만 사라지나니 이것이야말로 변치않는 영원한 진리이다. 원망을 원망으로, 증오를 증오로,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으려 하면 그것은 또 다른 원망과 증오와 폭력을 부를 뿐이다.

달라이라마는 자신의 나라와 땅을 정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까지 한 중국을 마음 안에서 진정으로 용서하고 미워하지 않음으로써 노벨평화상을 탓을 뿐 아니라 전 세계 평화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고 있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이가 있다면, 어쩌면 내가 전생에 그를 너무나도 괴롭혔기 때문일 수 있다. 지금 나에게 원망스럽고 증오스런 대상이 있다면, 어쩌면 전생에 내가 그를 원망하고 증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나를 욕하거나, 나에게 굴욕을 준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내가 전생에 한 것을 고스란히 갚기 위해 그가 나에게 똑같은 일을 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고통과 증오와 폭력과 원한은 내 안에서 용서하고 놓아버리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내 안에 증오를, 원망을, 미움을 그대로 가지고 갈 것인가, 아니면 이번 생에 그 모든 악업의 족쇄를 모두 끊고 맑고 청정해진 업으로 남은 생을 자유롭게 살아갈 것인가.
Posted by 법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천 황악산 직지사



[신라 아도화상이 세운 절 김천의 황악산 직지사, 절안의 오랜 소나무의 운치하며 깊은 계곡 맑은 물소리가 항상 맑게 들리는 절입니다. 경내에 나무가 참 많고 도량이 깨끗하기로 유명, 직지사는 전 대중스님들이 운력을 중시하기로 소문났지요. 아침 공양이 끝나면 모든 스님들이 나와 도량에서 운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불교의 기본 사상은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단순하게 사상으로만 그치는
허울좋은 관념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철저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연기법은 죽은 사상이지
살아 숨쉬는 생생한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자라고 한다면
연기법을 믿는 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 주위엔
참 겉보기만 불자인 사람이 참 많은 듯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혼자 있을 때와 여럿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서로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여럿이 있을 때는
참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도
남들이 보지 않을 때는 쉽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엔 얼마나 많던가요...

다른 법우님들과 함께 차를 탈때면
참 조심스레 천천히 운전을 하다가도
혼자 차를 몰게 되면
어느덧 거리의 무법자가 되어
다른 운전자를 황당케 하는 경우를 저 또한 관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연기법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법사인가?
하고 되묻곤 한답니다.
진정 연기법을 아는 이는
연기법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연기법을 실천한다는 것은
첫째가 인과를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남이 보지 않는다고 인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보고 있을 때는
상대에게 욕좀 얻어 먹고 나쁜 인상을 심어 줌으로써
어느정도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지만
혼자있을 때라면 그 과보 그대로를 훗날 모두 받아야 합니다.

법계의 인과는 어느 하나 예외가 없습니다.
법계에 그대로 저축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법계의 인과라는 철저한 진리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못 보이면
다음에 다시 잘 보이게 되면 그만이지만
한 번 지은 업장은 영원히 지워 버릴 수 없게 됩니다.

신구의 삼업(三業)으로 지은 모든 것이 그대로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무심코 지은 미세한 생각까지도 철저히
내가 짓고 내가 그대로 받아야 할 것들입니다.

인과를 믿는 사람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 누가 있든 없든
항상 맑고 향기로운 말과 행동과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어느 한 때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순간 순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어 공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순수한 삶을 살아 간다고 확신 할 수 있는가요.

그러나 우린 이미 인과라는 법계(法界)의 이치에
우리 삶의 일거수 일투족을
그대로 노출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일체 모든 이에게 나의 삶을
그대로 보일 수 있을 만큼 투명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연기를 믿는 사람은
항상 감사하는 삶, 그리고 회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먹고 있는 밥 한 톨에 담긴
일체 법계의 은혜를 명상해 보셨나요?

농부의 은혜,
농부를 낳아주신 부모님 그리고 또 그 부모님
그렇게 시작되어 무량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속의 모든 조상, 존재의 무한한 은혜...

곡괭이의 은혜, 비료의 은혜, 비료 공장 모든 인부들의 은혜
토양의 은혜, 태양의 은혜, 비와 바람의 은혜
그렇게 시작되어 무량한 공간을 향기롭게 감싸고 있는
이 모든 무한한 은혜...

우린 일상을 살아가며 작고 하찮은 일에서도
이 모든 시공을 초월한 무한한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니 순간 순간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새벽 두 눈을 뜨면서부터 감사하는 연기의 실천은 시작됩니다.
아침을 깨워주는 자명종의 은혜, 침대의 은혜, 맑은 아침공기의 은혜...
새면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물의 은혜, 비누, 샴푸의 은혜...
아침 공양에 올라온 이 모든 음식물의 은혜...
그리고 그 속에 녹아든 온 우주의 밝고 넓은 은혜...

... 너무나도 너무나도 세상엔 감사할 것들 뿐입니다.
이런 긍정명상을 통해 우린
나를 살려주고 있는 세상의 무한한 은혜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고개들어 세상을 보며 감격스런 눈물이 흐르기도 할 것입니다.
이 모두가 무한한 참생명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의 나툼이심을...

그렇기에 시공을 초월하여 일체의 모든 존재는
결코 둘이 아닌 '전체로서의 하나'입니다.
한마음 한생명이 인연따라 나툰 것일 뿐입니다.
무아(無我)이며 동시에 전체아(全體我)인 것입니다.

이런 감사한 세상을 향해,
나와 둘이 아닌 일체의 참생명을 향해,
무한한 생명력으로 나를 살려주고 있는 법계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회향 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회향해야 합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회향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회향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연기법을 믿는 수행자는
언제나 회향할 꺼리를 찾아 눈을 돌립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았기에 회향하고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일체의 모든 생명, 존재들이
나를 살려주고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회향하며 보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이 그저 이유라면 이유일 뿐입니다.

'마음공부 생활수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하착, 그 마음을 놓으라  (0) 2007.12.11
내 고집을 버리라  (0) 2007.12.11
죽음을 준비하자  (0) 2007.12.04
기도하기 힘들 때는  (0) 2007.12.04
연기법의 생활실천  (0) 2007.11.09
연극처럼 살라  (0) 2007.11.09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