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엄정토분
정토를 장엄하다


莊嚴淨土分 第十
佛告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燃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不也 世尊 如來在燃燈佛所 於法 實無所得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是故 須菩提 諸菩薩 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 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 爲大不 須菩提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 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어떤 법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의 일상무상분에서는 깨달음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말아야 함을 말하였는데, 이 분 장엄정토분에서는 그러한 가르침을 정토장엄이라는 우리들에게 익숙한 표현을 빌어 다시한번 강조하시면서 정토를 장엄한다는 상을 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정토를 장엄한다거나, 불교를 수행한다거나, 중생을 구제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상을 깨버릴 것을 강조한다. 깨달음에도, 정토에도, 부처에도, 그 어디에도 머무는 마음을 내면 그것은 온전한 깨달음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눈귀코혀몸뜻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 그 어디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하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일상 생활 속에서 ‘함이 없이 하는 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 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어떤 법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에 대한 일화들을 다룬 경전에서는 공통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 인행(因行)의 시기에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受記)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연등부처님께서 꽃을 공양하는 선혜 비구에게 장차 사 아승지 십만 겁 후에 석가모니라는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내리셨다고 한다. 이러한 수기로 인해 일반적으로 연등부처님께서 과거에 선혜 비구에게 이미 어떠한 특별한 법을 주었으며 그 법을 얻어 결국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셨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기는 불본행집경, 자타카, 육도집경, 본생경 등에 등장하는 것으로써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다.
선혜 비구가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는 모습을 [불본행집경]을 통해 잠시 살펴보자.

어느 때 선혜라는 젊은 행자가 있었다. 생사의 진흙 수렁 속에서 방황하는 자신과 세상의 모습을 보고 크게 발심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큰 행원을 일으켰다.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끝없이 많사오니
내 부처되어 마지막 한 생명까지 기어이 건지리라.

젊은 선혜 행자는 부지런히 노동하고 받은 보수를 아껴서 은전 오백량을 모았다. 이 때 연등부처님께서 이 나라에 오시니, 왕과 백성들이 꽃을 바쳐 공양하려 하였다. 선혜 행자도 이 소식을 듣고 꽃을 구하려 하였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꽃을 찾아 거리를 헤매다가, 한 궁녀가 푸른 연꽃 일곱 송이를 감추어 가는 것을 보고, 사정 사정하여 은전 오백량을 주고 다섯 송이를 샀다.
이 때 연등부처님께서 거리로 걸어 오시니, 선혜 행자도 시민들과 함께 푸른 연꽃을 들어 바치었다. 마침 그 때, 연등부처님께서 걸어가시다가 진흙탕에 이르셨다. 이 모습을 본 선혜는 입었던 사슴 가죽옷을 벗어 진흙탕에 깔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자 엎드려 머리털을 풀어 길을 만들었다.
이 때에 연등부처님께서 선혜 행자를 향하여 찬탄하셨다.

“아 장하다. 선혜여! 그대의 보리심은 참으로 갸륵하구나. 이같이 지극한 공덕으로 그대는 오는 세상에 결정코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부르리라.”

이렇듯 연등부처님은 선혜 행자에게 석가모니가 되리라는 수기를 주셨다. 그런데 이 경전에서는 왜 수보리는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도 얻은 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가. 금강경은 일체의 모든 방편을 파하고 근본을 드러내는 경전이다. 금강경 앞에는 일체의 그 어떤 방편도 설 자리가 없다.

깨달음을 전해줄 수 있는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참된 깨달음은 전해주거나 전해받는 어떤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고 받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항상 현존하고 있다. 그대 앞에 항상 참된 모습으로 꽃을 피워내고 있다. 아니 그대의 존재 그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의 증거이며 부처의 현현이다. 우린 이미 완성되어 있다. 이미 깨달아 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받을 필요도 없고 얻고자 애쓸 것도 없다. 진리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여여부동하게 오고 감이 없이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어찌 두 부처님 사이에 법이 오고 갈 수 있단 말인가.

중생과 부처 사이에 법이 오고갈 수 있는가? 중생과 부처가 따로 나뉠 것이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오고 갈 법 또한 없다. 그런데 어찌 중생과 부처 사이에, 혹은 부처와 부처 사이에 오고 갈 어떤 법이 있겠는가. 주고 받고 할 어떤 수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없다.
아무것도 나뉘지 않은 텅 빈 적멸의 세계에서는 그저 부처만 있다. 이름을 부처라고 해서 그렇지 오직 ‘그것’만 있을 뿐이다. 오직 영원의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오직 성성적적의 적멸만이 가득 차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이미 부처이다. 당신은 과거에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는가. 어떤 깨달음을 선물로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 주고 받을 것이 없는데 어찌 이런 물음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나는 부처님께 수기를 받지 않았고, 어떤 특별한 법을 받지도 않았는데, 저 선혜라는 비구는 부처님께 이미 수기를 받았구나 하고 부러워 할 것도 없다. 선혜가 수기를 받는 순간 우리 모두는 함께 수기를 받았다. 아니 선혜가 연등부처님께 수기를 받았다는 그 표현 자체가 일체 모든 중생이 수기를 받았다는 방편의 설법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완전한 부처라는 방편의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무엇이 문제기에 깨달은 완전한 부처가 이렇게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왜 우리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중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어떻게 하면 그 사실을,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가. 어찌 하면 얻을 수 있는가.

간단하다. 진리는 너무나도 단순한 데 있다. 일체를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얻어진다. 그냥 놓아두면 된다. 놓아버리는 순간 영원한 대자유가 찾아온다. 그것은 얻는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그냥 본래의 고요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 깨닫게 되어있다. 깨닫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이미 부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은 항상 깨달음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만히 놓아두면 누구나 저절로 깨닫는다. 그냥 놓아두기만 하면 된다.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내면 깊은 곳에서 깨어있음의 빛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생각하고, 애쓰고, 안달하고, 수행하고, 고민하고, 노력하려는 그 모든 ‘나’의 행위들을 다 놓아버려라. 겉에 드러나 있는 거짓의 ‘나’가 행하는 모든 활동들을 멈춰라. 껍데기의 ‘나’를 놓아버려야 본래의 ‘나’가 활동을 시작한다. ‘나’를 가지고 어떻게 해 보려고 애쓰지 말라. 깨달음을 얻고자 안달하지 말라. ‘어떻게’ 해 보려는, 깨달아 보려는 마음을 푹 쉬기만 하면 된다. 푹 쉬었을 때 이 가짜의 ‘나’는 활동을 멈추고 내면의 ‘그것’이 드러난다. ‘그것’을 한마음이라고 해도 좋고, ‘참나’라고 해도 좋으며, ‘부처’라고 해도, ‘자성’이라고 해도, 그 어떤 표현을 써도 좋지만 거기에 머무르지는 말라. 그 표현에 집착하지 말라. 다만 다 놓아버리고 그 어떤 것도 붙잡지 말며, 그저 푹 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꾸만 ‘나’를 가지고 ‘어떻게’ 해 보려고 한다는데 있다. 그냥 있으면, 그냥 푹 쉬면 저절로 이루어지는데, 공연히 붙잡고, 깨닫고자 애쓰며, 부처가 되려고 노력한다. 모든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냥 놔두지를 않는데서 모든 문제가 생긴다. 모든 괴로움이 생기며, 모든 번뇌가 생기고, 모든 욕심과 집착이 들끓는다.

그냥 놓아두라. 애쓰지 말라. 애쓰려는 마음을 놓으면 그냥 얻어진다. 이미 얻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래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얻을 것’이 생기면 결코 얻을 수 없다. ‘얻고자 하는 것’이 없을 때 그 때 비로소 얻게 된다. 아니 그냥 ‘얻음’이란 말 자체가 끊어지고 지고한 평화만이 현현한다.
선혜 비구가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을 얻었다고 생각지 말라. 그 때 선혜 비구가 연등부처님께 무언가 얻은 특별한 법이 있었다면 선혜 비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법도 얻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부처를 이룬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앞 장에서 수행 사과라는 깨달음의 계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러한 깨달음 조차 놓아버려야 함을 언급했다. 수행 사과의 깨달음이라는 것도 본래 얻은 바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장에서는 과거 연등부처님에게 수기를 받은 선혜 비구 또한 어떤 특별한 법을 얻은 것이 아님을 밝혔다. 이렇듯 모든 보살들이 얻은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다.

여기에서는 보살의 깨달음의 사회화의 과정인 불국토 장엄에 대한 물음이 이어지고 있다. 깨달은 자는 스스로 깨달았다는 생각이 없다. 하물며 깨달은 자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깨닫지 못한 중생이나 할 수 있는 것이 불국토의 장엄이다. 깨달은 자는 불국토를 장엄하지 않는다. 장엄하지 않음으로써 장엄하고 있다.
불국토는 별도로 장엄할 필요가 없다. 불국토는 더없이 완전하다. 더 이상 손 댈 곳이 없다. 어떤 장엄이 따로 필요한 곳이라면 그곳은 불국토가 아니다. 스스로 완전한 곳 그곳이 불국토요 정토다. 그러므로 보살은 정토를 장엄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 장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장엄이라는 말 자체가 매우 생소하다. 그런 말이 필요 없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불국토며 정토이기 때문이다.

불국토, 정토는 어떤 곳인가. 부처님의 땅이며, 깨끗한 땅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땅이란 어떤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이 아니다. 만약 어떤 특정한 공간을 가지고 정토라고 했다면 그곳은 더 이상 정토가 아니다. 정토는 영역이 정해지지 않은 곳이다. 별도로 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없다. 정토의 경계를 긋는 순간 이미 정토는 사라지고 만다. 깨달음에는 시공(時空)의 차별이 없다. 하물며 어떤 특정한 공간을 가지고 정토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지역을 정토라고 했다면 그 지역에서 벗어난 곳은 예토(穢土), 즉 더러운 땅이 될 것인데, 그렇게 깨끗하고 더러움을 나누고, 이쪽 저쪽을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깨끗한 쪽을 택하는 그런 상대적인 곳을 가지고 어찌 정토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부처는 차별이 없다. 깨달음에는 그 어떤 나뉨도 없고, 극단도 없다.
그러니 정토를 장엄한다는 말은 어리석은 중생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보살은 정토를 장엄할 이유가 없다. 그들 자체가 그대로 정토이다. 정토를 장엄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온갖 정토를 무한히 장엄하고 있다. 정토의 장엄은 정토의 장엄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토의 장엄이다.

불교를 어느 정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알음알이로 지식을 축적하면 할수록 더욱 깨달음과는 멀어진다. 불교를 많이 공부한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수행을 많이 했고, 경전도 많이 보았으며, 깨달음과도 가깝고, 부처님의 좋은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많이 가르쳐 주며, 포교도 많이 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러한 모든 행위가 정토를 일구는 장엄한 깨달음의 길이요, 포교의 길이라고 여긴다. 스스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원을 잘 성취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복도 더 많이 짓고, 공부도 더 많이 했으니까 지옥에 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더 빨리 깨달음을 얻어 성불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깨달음과는 멀다. 오히려 초심자들의 발심보다도 더욱 멀어져 있다. 초발심의 행자들은 하심하며 지극히 겸손하다. 스스로 수행을 많이 했다거나, 불교를 좀 안다거나, 깨달음과 가깝다거나, 포교도 잘 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상이 없다. 오직 그런 마음을 비우고 하나에서부터, 낮은 마음에서부터 정진할 뿐이다. 초심자의 하심은 고참자의 그것보다 깨달음에 더욱 가깝다. 지식이 많을수록 깨달음과는 멀어진다. ‘공부했다’는 상에 빠질수록 공부와는 멀어지고 만다.

그래서 수행자의 첫 번째 덕목은 하심이며 겸손이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 말은 공부와 멀어졌다는 말이다. 해도 한 바가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의 수행은 깨달음과는 정 반대로 치닫고 있다. 포교를 했고, 법보시를 했고, 열심히 기도를 했으며, 온갖 불사를 했고, 정토를 일구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공덕은 사라진다. 그래서 달마는 전국에 온갖 불사를 이루어 놓은 양무제에게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했다. [전등록]을 잠시 살펴보자.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 절을 짓고 경전을 편찬하고 스님을 만든 것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은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이것은 인간과 천상의 작은 과보를 받는 유루(有漏)의 원인일 뿐,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있는 듯 하나 실체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입니까?”
“청정한 지혜는 묘하고 원만하여 본체가 원래 비고 고요하니, 이러한 공덕은 세상의 법으로는 구하지 못합니다.”
“어떤 것이 성스러운 진리의 제일가는 이치입니까?”
“텅 비어 성스러움이란 없습니다.”

공덕은 없다. 인간과 천상의 작은 과보를 받을 뿐. 아무리 복을 짓더라도 그것은 천상에 태어나거나, 조건 좋은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하는 그런 작은 과보만을 받을 뿐이다. 물론 사람들에게는 그런 과보처럼 크고 좋게 보이는 것이 없을 테니 큰 공덕이라고 좋아하겠지만 그것은 유루(有漏)의 공덕일 뿐, 무루(無漏)의 공덕에 미칠 수 없다. 아무리 천상에 산들, 아무리 조건 좋은 인간으로 태어난들, 설사 잘 생기고, 돈 많고, 집 좋고, 가문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한들 그것이 그대로 ‘행복한 삶’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조건 속에서 괴로움에 허덕이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조건을 뛰어넘어 어떠한 조건이나 상황 속에서도 의연하고, 초연하며, 여여하고, 평화로운 깨어있는 정신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 그러한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조건도 실체 없는 그림자요 헛된 환영일 뿐이다. 돈, 명예, 권력, 지위, 계급, 이 모든 것이 다 환영일 뿐이지 않은가.

그러면 참되고 진실한 공덕은 무엇인가. 청정한 지혜 공덕은 원만하며 고요하고 텅 비어 있다. 비어 있기에 세상의 법으로는 구할 수 없다.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지위나 계급이 아무리 높더라도, 청정한 지혜 공덕을 살 수도 얻을 수도 없다. 얻으려는 노력이나 애씀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다. 세상의 그 어떤 법으로도 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다. 빈 것은 따로 얻을 것이 없다. 이미 빈 그대로 충만하다. 빈 것을 또 다시 애써 비울 필요는 없잖은가.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도 그와 같다. 성스러운 진리는 맑게 비어 있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성스러운 진리는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라 다만 이름이 성스러운 진리인 것이다.

이처럼 진리도, 공덕도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실천하더라도, 공덕을 짓더라도 진리라는, 공덕이라는 상이 남아 있는 이상 그것은 가짜일 뿐이다. 무엇이든 잘 해 놓고 잘 했다고 상을 내면 잘 한 것이 아니다. 수행을 열심히 해 놓고 열심히 수행했노라고 하면 수행한 것이 아니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었노라고 하면 그 깨달음은 가짜가 된다.
아무리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더라도 불국토를 장엄했다는 상을 일으키고 거기에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참된 장엄이 아니다. 모름지기 함이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머무는 바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을 하고서도 수행했다는 바에 머물지 않아야 하며, 베풀고서도 베풀었다는 상을 일으켜 베풂에 마음을 머물지 않아야 한다. 마음이 머물게 되면 썩고 만다. 마땅히 마음을 일으키되 그 일으킨 마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마음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방하착하라. 일체를 다 놓아버리라. 다 놓아버렸을 때 그대로 진리는 드러난다고 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이 말을 자기방식대로만 해석을 한다. 다 놓아버려야 하니 아무 일도 할 것이 없고, 아무런 마음도 낼 것이 없으며, 그냥 빈둥 빈둥 놀기만 하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또 다 놓아버린다면 저 강가의 돌이나 산의 바윗덩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고 이 가르침을 의심한다.
다 놓아버리라고 하고, 얻을 것도 본래 없다고 하며, 깨닫고자 애쓰지 말고, 정토를 장엄할 것도 없다고 하니까 불교는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거냐고 따질지 모른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런 물음을 한 번 쯤은 던져 보았을 것이다. 이 게송은 바로 그 점에 대한 명확하고도 통쾌한 답변을 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모든 의문은 풀어질 것이다.

아무 마음도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마음을 낼 것인가 또한 어떻게 마음을 낼 것인가가 중요하다. 마땅히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청정한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는 것이며,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는 것이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어떤 바깥의 대상에도 마음이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즉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이다.

마음을 내고 나면 보통 사람들은 거기에 얽매이고 머물러 집착한다. 착한 일을 행하고도 거기에 마음이 머문다. ‘선행을 했다’는 상을 남기게 된다는 말이다. 착한 일을 했다는데 마음이 머물러 상을 남기게 되면 연이어 거기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게 된다. 보상을 기대하는 그 어떤 바람도 우리를 괴롭게 할 뿐이다. 기대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이고, 바람이 있을 때 그것의 성취 유무에 따라 괴로움과 즐거움이라는 두 가지 극단의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착한 일을 행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마땅히 마음을 일으켜 착한 일을 행하되 함이 없이 하라는 말이다. 선행을 하고도 선행을 했다는 상을 버려야 한다. 거기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돈을 열심히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돈을 벌되 돈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돈에 머무르는 마음으로 벌면 안 된다. 그것은 곧 괴로움을 가져온다. 돈에 대한 집착으로 돈을 벌면 많이 벌었을 때와 못 벌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 극단으로 치닫는다. 즐거움과 괴로움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린다. 즐거움에 휘둘리는 것은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즐거움도 일종의 괴로움이다. 즐거움에 크게 휘둘리는 사람일수록 괴로움에 크게 휘둘리게 마련이다. 즐겁거나 괴롭기 보다는 그 양 극단을 다 놓아버린 여여한 평화를 찾아야 한다.

수행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수행을 하되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수행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했다는 상을 내지 말고, 이만큼 수행했으니 곧 결과가 있겠지 하는 바람도 놓아버리고, 수행이라는 그 자체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수행을 했으니 곧 깨닫겠지, 혹은 이렇게 수행을 했는데도 왜 깨달음은 오지 않을까 하고 탓할 것은 없다. 다만 수행을 할 뿐이지 수행의 결과를 바란다거나, 내가 행한 수행에 대해 바라는 바를 가져선 안 된다. 그것은 집착이며 집착은 괴로움이다. 수행은 오직 지금 이 순간 행하는 것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지, 그것이 미래의 어떤 깨달음을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직 할 뿐, 바람을 놓아라. 수행이라는 말 자체가 머물지 않음을 뜻한다. 그것이 함이 없이 하는 도리이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법이다. 금강경의 모든 구절은 바로 이 뜻을 함축하고 있다.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행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주로 어디에 마음이 머물러 있는가. ‘나’라는 주관이 만날 수 있는 일체 모든 객관의 ‘대상’들에 마음이 머물러 있다. 주관은 무엇이고 객관계의 대상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이것을 십이처(十二處)로 설명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여섯가지 기관으로 세상과 접촉하고 대화한다. 그 여섯가지란 눈, 귀, 코, 혀, 몸, 뜻을 말한다. 눈으로 모든 형상을 바라보고, 귀로 세상의 소리를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며, 몸으로 감촉하고, 뜻으로 모든 대상들을 분별한다. 이 여섯 가지 말고 또 다른 세상을 접하는 기관이 있는가? 오직 이 여섯 가지가 한다. 바로 이 여섯 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을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여섯 가지 내 안의 뿌리라는 뜻이다.

주관인 이 여섯 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각각의 대상을 만나는데 그 대상이 바로 육경(六境)이다. 육근이 만나는 대상이 바로 육경이다. 그것은 각각 형상과 소리, 냄새와 맛, 감촉과 대상이다. 눈이라는 근(眼根)으로 형상이라는 경계(色境)를 접촉하며, 귀라는 근(耳根)으로 소리라는 경계(聲境)를 접촉하게 된다.
이렇듯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바로 그 때 일체의 모든 괴로움과 즐거움, 좋고 나쁜 느낌이 일어난다. 그 느낌에 따라 좋은 느낌은 더 많이 느끼기 위해 붙잡아 두려고 집착하고, 싫은 느낌은 느끼지 않기 위해 버리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래서 좋은 느낌을 많이 얻을 때 즐거움을 느끼고, 싫은 느낌을 많이 얻을 때 괴로움을 느낀다. 이렇듯 좋고 싫은 느낌에 따라 모든 집착이 생겨난다. 애욕이 생겨나고 증오가 생겨난다. 좋은 것을 더 갖고 싶은 것도 집착이며, 싫은 것을 버리고자 애쓰는 것도 집착이다.

우리들이 괴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육근과 육경이 접촉하고, 연이어 좋고 싫은 느낌이 일어나며, 그에 따라 온갖 집착이 생기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 집착이 바로 머무름이다. 어떤 경계를 대할 때라도 항상 집착이 생긴다. 눈귀코혀몸뜻이 대상을 만날 때면 항상 이렇듯 집착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즉 형상에 마음이 머물게 마련이고, 소리에 마음이 머물게 마련이며, 냄새와 맛, 감촉과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눈으로 좋은 것을 볼 때 더 보고 싶은 집착이 생겨나고, 칭찬을 받을 때 더 받고 싶은 집착이 일어나며, 좋은 냄새에도, 좋은 맛에도, 좋은 감촉에도 집착이 생겨난다. 이렇듯 모든 대상을 접촉할 때 집착이 생기므로 마음이 머물게 되는 것이다.

모든 수행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 머무는 마음, 집착을 놓아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일체 모든 대상을 만나고, 대상과 접촉하면서도 어떤 대상에도 머물러 집착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집착이 생겨나면 연이어 일체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
금강경에서는 이 가르침을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안내해 주고 있다. 마땅히 모든 마음을 내되 머무름이 없을 수 있다면 그 어떤 걸림도 있을 수 없는 대자유를 만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느끼고 있는 일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집착과 머무름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육근이 그 대상인 육경을 만나 접촉함으로써 좋고 싫은 느낌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 좋고 싫다는 느낌의 분별에서 온갖 집착이 생겨난다.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그 사이에서 온갖 시비 분별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이 대상을 받아들일 때 그 대상 자체는 과연 분별할 것이 있는 것일까?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뜻의 대상이 과연 좋고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차별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모양과 색깔이라는 형상에서 옳고 그른 것이 어디 있고 좋고 싫은 것이 어디에 있는가. 온갖 나무와 꽃들이 있지만 어떤 나무와 어떤 꽃은 옳고 다른 것은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의 일체 모든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대상은 모두 무분별(無分別), 무차별(無差別)이다. 우리들의 의식에서 차별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지 이 세상에는 본래부터 나뉨이란 없다.

태양과 달과 별, 바다와 시내와 강과 들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린 것인가. 정치인과 경제인 가운데 누가 옳은가? 서양의 여인과 동양의 여인과 아프리카의 여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 그들은 그저 서로 다를 뿐이지 분별할 수는 없다. 점수를 매겨 줄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체의 모든 차별과 분별로써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나누고 차별하고 점수 매기고 등수를 매기는 따위의 나눔은 오직 인간들만이 한다. 이 대자연 법계의 모든 존재와 생명은 오직 전 존재로써 받아들일 따름이다. 인간들만이 세상을 대상으로 차별하고 분별하며 그렇기에 인간들만이 좋고 나쁘며 옳고 그르다는 등의 어리석은 극단을 설정한다. 그리고 그 극단과 나뉨은 곧 부조화와 평화롭지 않은 상태를 가져온다. 그로인해 인간은 늘 어지럽고 복잡하며 괴롭다.

세상은 다만 변화할 뿐이다. 변화하는 세상에 어리석고 좁은 소견으로 좋다거니 싫다거나 하는 차별을 가하지 말라. 세상은 다만 변화만이 있을 뿐, 좋고 싫은 것은 없다. 봄을 알리는 꽃이나 여름의 우거진 초록이나 가을의 오색 단풍, 또 겨울의 호젓한 눈꽃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다. 1, 2, 3, 4등 등수를 매길 수는 없다. 어느 계절이 더 좋고 나쁜 것은 없고 다만 변화만 있을 뿐이다. 변화의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 변화의 어느 한 과정을 콕 찝어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맞다느니 틀리다느니,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차별하지 말라.
소리와 냄새와 맛 그리고 감촉 따위의 것들은 또 어떠한가. 그것들 또한 인연따라 잠시도 쉼 없이 변화할 뿐이지 차별되어 있지는 않다. 똑같은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듣기 좋은 말도 되었다가 또 어떤 이에게는 듣기 싫은 말도 될 수 있다. 청국장 찌개의 냄새처럼 똑같은 냄새가 어떤 때는 참 좋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구역질이 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육경이란 대상에 대한 일체 그 어떤 분별도 다 우리들의 의식이 만들어 내는 거짓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은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늘 여여(如如)하다. 다만 변화할 뿐 그 어떤 차별도 있지 않다. 본질은 무엇이든 다 부처이며 청정한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이 세상에 무엇을 차별하고 분별하며 나누겠는가. 무엇을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할 것이며, 무엇을 잘났다거니 못났다거니 할 것인가. 무엇을 크다거니 작다거니 분별할 것인가.

본질에 있어서는 옳고 그름도, 잘나고 못남도, 미추도, 장단도, 대소도, 그 어떤 나뉨도 없다. 두 가지로 나누게 되면 거기서부터 질긴 집착과 그로인한 괴로움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분별할 것이 없으면 집착할 것도 없고 따라서 괴로울 것도 없다. 그렇기에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도 분별하거나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양 극단을 설정해 놓고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해 대상을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양 극단은 세상을 올바로 정견으로 보는 눈이 아니다. 오직 중도(中道)만이 세상을 바로 보게 해 준다.

이 모든 것이 둘이 아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말이나,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이나, 분별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둘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말이 그대로 중도의 가르침이며 연기(緣起)의 가르침이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인 삼법인(三法印)의 가르침이다. 육근[육입(六入)]과 육경[명색(名色)]이 접촉[촉(觸)]함으로 느낌[수(受)]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좋고 싫은 애욕과 증오[애(愛)]가 일어나고, 그럼으로써 집착[취(取)]이 일어나고, 그로인해 온갖 업[유(有)]을 짓게 되어 생노병사[생(生), 노사(老死)]의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십이연기(十二緣起)의 가르침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설법에 이어 수미산만한 사람의 몸을 비유하며 크고 작다는 분별을 비우도록 이끌고 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모든 차별과 분별을 놓아야 한다. 아니 머무는 바가 없으면 차별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 어떤 마음도 일어날 것이 없다. 바로 그 때 일체 모든 분별이 타파되며 그랬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바라보는 정견의 눈이 열린다.

만약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그 몸이 큰 것인가 하는 부처님의 물음에 수보리는 크다고 답변을 드린다. 방금 설법한 것에 의하면 본래 크고 작을 것이 없어야 하는데 수보리는 왜 크다고 했는가. 이것이 바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법이다. 분별과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아무런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할 것인가.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며, 아무런 마음도 일으키지 말고 그저 저 산의 나무처럼, 저 들의 돌처럼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옳다 그르다는 표현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하고, 좋다 싫다는 표현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마땅히 마음을 내야 한다. 그러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크다는 마음도 내고 작다는 마음도 낼 수 있다. 그러나 크고 작음에 걸려 집착하면 안 된다. 옳고 그른 마음도 낼 수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불교는 산중에 홀로 들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아무런 분별도 일으키지 말며 은둔해서만 살아야 하는 그런 종교인 것은 아니다. 큰 것은 크다고 마음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좋고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한 쪽에 머물러 집착하는 마음을 키우다 보면 집착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다시 본문으로 가서, 부처님께서는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라고 하셨다. 그래서 수보리에게 비유로써 물음을 던지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형상이 그렇게 크다는 것을 말한다. 수보리에게 부처님은 수미산만큼 큰 사람의 몸이라는 형상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형상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다.

부처님의 물음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몸은 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몸이다. 큰 몸을 큰 몸이라고 하면 그것은 큰 몸이 아니다. 큰 몸은 큰 몸이 아니며 그랬을 때 큰 몸인 것이다. 큰 몸이라는데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크다고 할 수 없다. 다만 크고 작다고 방편으로써 말하고 있을 뿐 크다는데 머물고 작다는데 머물기 위해 크다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매우 크다고 답변을 드렸지만 그 이유는 큰 몸이라는데 머물러 있지 않았기에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큰 몸이라는데 집착을 하여 작은 몸에 상대되는 ‘큰 몸’으로써 ‘매우 크다’고 했다면 수보리의 답변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는 부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고 하셨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크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형상에 머물러 크다고 답변을 드린 것이 아니라 형상에 머무는 바 없이 크다고 답변을 드린 것이다.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말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답변이다.

차별을 넘어선 ‘법의 몸’, 법신(法身)은 어떤가. 그것은 크다 작다로는 표현될 수 없다. 수미산만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작은 것도 아니다. 법신의 몸은 한 티끌 속에도 포함될 수 있으며, 온 우주 법계 전체라는 표현으로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법신은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다. 말로써 표현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말로써는 도저히 표현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법신은 항상 침묵으로 우레와 같은 사자후(獅子吼)를 설함 없이 설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마음을 내지 않을 수 없다. 말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마음을 내되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물었고 수보리는 대답했다. 그것은 철저히 머무름 없는 물음이고 머무름 없는 답변이다. 단순히 크다고만 답했다면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단순히 크다고만 했다면 그것은 ‘이생기심(마음을 낸 것)’이지만, 그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응무소주(머무는 바 없음)’가 설명 되었다. 큰 이유는 몸이라는 것은 몸이 아니기에 큰 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큰 몸이라는데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큰 몸일 수 있는 것이다.

아래 산스크리트 원문의 답변을 들어 보면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세존께서 몸, 몸이라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것은 몸이 아니며, 몸 아님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몸이라고 합니다.”


Posted by 법상



[여수 흥국사]



불교 수행의 주안점은
'느낌'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모든 느낌을
바로 보고 닦아낼 수 있을 때
업식(業識)을 더 이상 짓지 않을 수 있는 밝은 길이 열립니다.

우리 몸에서 느낌을 일으키는 곳은
육근(六根)이라 하여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눈, 귀, 코, 혀, 몸, 뜻 이렇게 여섯 가지입니다.
이를 주관계의 감각기관이라 하며 이는 다시
객관계의 여섯가지 대상, 즉 육경과 접촉을 일으키게 됩니다.
육경이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뜻의 대상 이렇게 여섯가지입니다.

바로 이 여섯가지 주관계의 감각기관, 육근에서
그 대상인 여섯가지 객관계의 대상 즉 육경을 접촉할 때
느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느낌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고수(苦受), 낙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싫은 느낌, 좋은 느낌, 좋지도 싫지도 않는 느낌(무관심) 이렇게 말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교설이며 우리가 몇 번이고 주목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 세가지 느낌에서
삼독심(三毒心)이 나오며 각종의 분별작용과
나아가 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삼독심이란 탐내고(貪心), 성내고(嗔心), 어리석은(癡心) 마음으로
우리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무명을 의미합니다.

좋은느낌(樂受)을 계속 일으키고 싶은 마음에서
탐심(貪心, 탐냄, 애욕)이 생기며,
싫은느낌(苦受)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진심(嗔心, 성냄, 화냄)이 생기고,
본래 좋고 싫음이 나누어 있지 않은 무분별의 느낌에
'좋은느낌' '싫은느낌' 하고 분별하고 나눔으로 인해
치심(癡心, 어리석음, 무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각기관, 우리 몸에서
느낄 수 있는 이 모든 '느낌'들은
어느 하나 빼 놓지 않고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탐진치 삼독심의 원동력이 바로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삼독심이 원인이 되어
각종의 분별(識)과 행위(業)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중생인 이유, 윤회하는 이유,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느낌을 잘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탐진치 삼독심을 소멸하는 것을 일컬어
열반(涅槃)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말해 삼독심의 소멸, 즉 무명의 소멸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길, 열반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육근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느낌들을 닦아가는 것이 바로 수행의 핵심이라 할 것입니다.
눈으로 색을 바로보고, 귀로 소리를 바로듣고, 코로 냄새를 바로 맡고...

그렇다면 바로 본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로 본다는 것은 세 가지 느낌을 통해 따라 일어나는
삼독심을 일어나지 않도록 차단해 버린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세 가지 느낌이 일어날 때 부수적으로 따르는
탐냄, 성냄, 어리석음을 그 앞 단계 즉 느낌의 단계에서 녹여버리는 것입니
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시시해' 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2,500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가르침으로
사념처 혹은 요즘 말로 위빠싸나라고도 이름합니다.

싫은 느낌, 좋은 느낌,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를 꼬집었다고 했을 때
싫다라는 느낌을 일으키기 전에
그 꼬집었다는 느낌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싫다는 느낌을 일으키면 연이어
진심, 즉 성내는 마음이 따라 일어나게 되고
성냄의 마음은 곧 다툰다던가 싸운다던가 나쁜 마음을 가지는
그 어떤 의지적 행위, 즉 업을 쌓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쉽게 말해 왜 꼬집냐고 상대에게 화를 내고(진심)
화내는 마음에 상대를 미워하고(의업) 욕하며(구업)
다시 꼬집거나 싸우는(신업) 등의 행위(업)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업으로 인해[인(因)]
상대는 또 다시 나를 미워하게 되며[과(果)]
나중에 그 어떤 행위로써 또다시 나를 괴롭힐 것입니다.[응보(應報)]
이번 생에 나를 괴롭히지 못하고 죽으면
반드시 다음 생에까지 나를 따라와 그 원한을 갚고자 할 것입니다.
짓고 받음의 도리, 인과응보의 도리는 철두철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윤회인 것입니다.

이렇듯 이렇게 일으킨 한 번의 싫다는 느낌이
끊임없는 분별을 일으켜
삼독심이며 업과 윤회의 원동력이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꼬집는 순간
'왜 꼬집을까' '아파 죽겠다' '이게 죽을라고...' 하는
분별을 일으키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지켜봄의 힘이 커지게 되면
꼬집는다는 그 자체에 그 어떤 싫다는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음을
바로 볼 수 있게[정견(正見)] 될 것이며
그 느낌에 내가 흥분해 대응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몰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올바로 지켜보기만 하면 내면에서
저절로 저절로 그렇게 되어질 것입니다.

꼬집는다는 그 자체는 고(苦)도 락(樂)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연화합의 현상 그 자체일 뿐입니다.
꼬집는다는 그 자체에 어떤 고락이란 실체가 있다면
상대방을 꼬집을 때도 내가 아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실체가 없기에
인연따라 상황따라 대상에 따라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한 것입니다.
나를 꼬집으면 아프고, 내 자식이나 부모를 꼬집어도 어느정도 (마음이)아
프지만
전혀 모르는 상대를 꼬집으면 안 아프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상대를 꼬집으면 아프기보다 즐거울 수도 있는 것입
니다.
꼬집는다는 그 자체에 어떤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올바로 지켜본다면 느낌에 노예가 되질 않게 됩니다.
그저 하나의 현상으로 지켜볼 뿐
그로인해 마음에 그 어떤 분별을 일으키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꼬집는다는 그 마음은
나에게 괴로움을 줄 수도 없으며
또다른 업을 짓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좋은 느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
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거나 키스를 했을 때(觸) 좋은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 좋은 느낌을 지속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해
우린 애욕과 탐심을 일으키며,
그로인해 계속 만나고 싶다거나(의업) 또 키스하고 싶다(신업)에서
나아가 결혼하고 싶다, 사랑한다(구업)고 말하는 등의
각종 의지적 작용, 즉 업을 낳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 결과 상대에 대한 애욕이 생기며
애욕은 집착으로 한 걸음 내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한다는 마음만을 간직한 채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되면
다음 생에서까지 그 업식으로 인해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업이 생기고 윤회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직 지켜봄에 머물어야 합니다.

다만 지켜볼 때는
그저 '지켜볼 뿐'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할 뿐'입니다.
절대 그 외의 다른 분별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순간 순간 지켜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 머물러야 합니다.
지금 여기를 놓지고 나면 이미 그 느낌은
닦이지 못한 채 과거나 미래로 멀어질 것입니다.

주관인 육근이 객관인 육경과 촉(觸)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순간을 놓치면 이미 우리의 마음은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 말하는
다음 단계인 느낌(受), 갈애(愛), 집착(取)을 지나
한없는 번뇌와 고를 동반하여 새로운 존재를 낳는
윤회의 사슬에 묶이게 될 것입니다.

십이연기란 생노병사 괴로움과 윤회의 원인을
일어나는 단계별로 살펴본 교설인데
쉽게 말해 이 열 두가지 단계를 밟아 인간이 윤회하며
괴로움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십이연기의 어느 한 가지 단계를 소멸하면
열 두 가지의 모든 지분이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십이연기란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입니다.
느낌수행은 이 가운데 수(受, 느낌)의 단계에서
느낌 그 자체를 닦음으로써
다음의 지분인 애, 취, 유, 생, 노사... 로의 흐름을
미리부터 소멸시켜 버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정신적인 분류인
오온(五蘊)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색, 수, 상, 행, 식 이라는 다섯가지 가운데
정신적 분류인 수, 상, 행, 식 중
'수(受, 느낌)'를 닦아내는 수행인 것입니다.
'수'를 닦음으로써 수에 연이어 일어나는 상, 행, 식의
각종 정신 작용 또한 소멸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느낌(수)이 일어나니 마음속의 분별(식)이 일고
그에따라 의지작용(행)이 일어나며
그 인연으로 표상작용(상)을 일으키기에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함으로써 지혜(여실지견)가 일어나고
그에따라 어리석은 분별, 행위, 표상작용 또한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행동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할 뿐' 이 되어야 하며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수많은 다른 분별을 일으키려는 순간
다시금 '할 뿐'으로 돌아와
순간을 온전히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이나 밝은 수행자들과 우리네 중생들이 다른 점은
바로 이 점, 즉 느낌 다스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부처님이라고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육근과 육경이 있는 한 두 가지가 촉(觸)하게 마련이고
촉이 있는 한 느낌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느낌을 올바로 관찰함으로써
느낌 다음 단계인 애욕, 집착 등으로 마음을 넘겨보내지 않습니다.
느낌 그 자체를 온전히 관찰함으로써
번뇌로 연결되는 것을 능히 막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한 좋은 예로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범부들이나 수행자나 모두 세가지 느낌을 일으킨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범부들은 싫은느낌이 일어날 때
괴로움에 빠져 슬퍼하다가 점점 혼미해지느니라.
그것은 마치 첫 번째 화살을 맞고 다시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과 같으니,
그에 비해 수행자는 싫은느낌을 받아도
비탄에 빠지거나 슬퍼하며 혼미해지지 않느니라.
나는 그것을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다시 말해 꼬집힘을 당해서 오는 아픈 느낌이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것이라면
수행자는 마땅히 그 싫은 느낌을 올바로 관찰하고 다스려
더 큰 괴로움과 번뇌가 되도록 마음을 진행시키지 않음으로써
그저 흘려보냄으로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풀려 '싫은 느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도 고수, 락수, 불고불락수를 모두 느끼지만
그 느낌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을 앞두시고 열병에 걸리셨을 때의
그 괴로운 감각을 수행으로 닦아가신 것을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꼬집혀 싫은 느낌과 함께
두 번째 화살인 온갖 번뇌를 일으킵니다.
즉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 욕하고, 함께 꼬집고, 증오하는 등의
온갖 또 다른 업식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방법,
즉 경계를 맞아 탐진치 삼독심을 일으키지 않는 방법,
윤회의 원동력인 업식을 일으키지 않는 방법,
좋고 싫은 그 어떤 느낌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방법,
그 방법이 바로
지켜봄의 수행인 것입니다.

방하착 수행이 '집착'을 놓아버리는 수행이라면
오히려 관수행은 그 이전단계인 '느낌'에 대해 관함으로써
애초부터 갈애며 집착이 생겨나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수행이라 할 것입니다.
물론 집착 이전 단계인 느낌 또한 놓아버릴 것이며
이미 일으킨 집착이라도 있는 그대로 관하게 되면
초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놓음이 바로 관이며 관이 바로 놓음 수행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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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4, 묘행무주분
머무름 없는 묘행(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라.)

妙行無住分 第四
復次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경계(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른
바 색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할 것이며,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 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앞의 대승정종분이 금강경 가르침의 요지가 핵심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면, 이 제 4분인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강경의 실천적인 가르침이 잘 드러나 있는 분이라고 하겠다. ‘묘행무주’라는 이 분의 제목은 모든 수행자들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실천의 행을 일컫는 말이며, 불교 수행의 핵심이 잘 드러나 있고 동시에 수행자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묘행무주란 쉽게 말해 ‘머무는 바 없는 미묘한 행’이라는 말인데, 묘행과 무주는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다. 어떤 행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묘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묘행에서 ‘묘(妙)’ 자는 불교에서 종종 등장하는 말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언어를 뛰어넘어 그 이면의 ‘참 말’을 전하고자 할 때 보통 사용하는 말로써, 묘행이란 부처의 행, 즉 깨달은 이의 머무름 없는 행, 함이 없는 행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행이면 행이지 함이 없는 행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겠지만, 바로 그처럼 언어를 뛰어넘는 ‘묘’한 말씀이기 때문에 묘행이라고 한 것이다. ‘함이 없이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묘한 가르침인가. 그러면 묘행은 어떠해야 하는가가 궁금해 질 터인데 그에 대한 답이 바로 ‘무주’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묘행은 ‘머무는 바 없는 행’ 즉, ‘무주’인 것이다. 함이 없이 행하고, 머무는 바 없이 실천하는 행이 바로 부처의 행인 것이다.

머무는 바 없다는 말은 집착함이 없다는 말이고, 바라는 바가 없다는 말이며, 아무런 분별도 없이 무분별의 행을 한다는 말이며, 나아가 과거나 미래에 걸리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이란 뜻이다. 어떤 행을 하면서도, 그 행동에 이유가 없고, 목적이 없고, 그 행동을 했을 때 이렇게 되겠지 하고 바라지 않으며, 내 이익을 위해 머리 굴려 행동하지 않고,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예측에 대한 연상작용에 의해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무주의 행은 즉각적이면서도 전체적이면서 온전한 행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주의 묘행은 온 우주 법계에 그대로 내맡기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행인 것이다. 내가 하는 행이 아니라, 법계가 하는 행이고, 부처님이 하는 행인 것이다.

불교에서 ‘마음을 비워라’ ‘놓아라’ 하니까 많은 분들이 의문을 가진다. 다 비우고 놓으라고만 하니 그럼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고 반문하곤 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일도 하지 말고, 그냥 목석처럼 앉아 있으라는 말이냐고 말이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묘행무주에 있다. 즉, 아무 행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묘행을 하라는 말이며, 즉 머무는 바 없는 행을 하라는 말인 것이다. 돈도 벌고, 일도 하고, 사랑도 하고 할 것 다 하면서도 집착함이 없이 머무름이 없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돈에 집착해서 돈을 벌지 말고, 사랑에 집착해서 사랑을 하지 말고, 일에 집착하여 일의 결과나 성취에 마음을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집착함이 없는 행이고, 머무는 바 없는 행이며, 바로 무주묘행인 것이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경계(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 4분의 법문은 앞선 수보리의 질문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하는데 대한 답변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머무는 바 없이 머물러야 하고, 함이 없는 행인 묘행의 실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분에서 묘행은 구체적으로 ‘보시’를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갑자기 보시의 법문이 나오게 되니 조금 의문스러운 점이 있을 것이다. 무주의 묘행으로 보시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 선녀인들, 즉 보살마하살들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바를 설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앞의 대승정종분에서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들을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해야 한다는 설법을 하셨는데, 이 말은 보살이기 때문에 상구보리는 거의 이루었으므로 하화중생이라는 보살의 대원을 세워 일체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설법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부처와 보살의 묘행은 근원에서 무주의 행으로 하나이지만, 방편으로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하나가 지혜 증득을 위한 깨달음의 실천 즉 수행이고, 다른 하나가 이타적인 보시의 실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이는 모든 보살의 두 가지 큰 서원이며,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을 복과 지혜가 충만한 분으로 묘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보살을 보살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즉 보살이 부처가 되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일체중생을 성불의 길로 이끌겠다는 회향의 발원, 보시의 발원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 보살에게 있어 유일한 묘행은 ‘보시’인 것이다. 보살이 보살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겠다는 하화중생의 발원, 즉 법보시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에게 묘행이라는 보시를 설하고 계신 것이다.

앞서 대승정종분에서 일체 중생을 모두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서원하라고 말씀을 하셨고, 이 분 묘행무주분에서는 그 서원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이 바로 머무름이 없는 실천행을 해야 한다는 점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보살들은 아직 완전히 100% 부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수행의 퇴전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 될 것이고, 아주 작고 미세한 분별과 번뇌일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보살들이 서원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행여나 퇴전하게 될지 모를 점을 짚어주고 계시는 것이다. 일체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는 것이 바로 법보시인 것이며, 법보시야 말로 가장 온전한 보시다. 이러한 보살들의 하화중생이란 법보시의 실천에 있어 부처님께서는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고 설하고 계신 것이다. 행여나 있을지 모를 ‘내가 보시한다’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내가 하화중생을 실천한다’라고 하는 작은 상조차도 다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나’라는 상 없이 보시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보시를 하면서, 또 일체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면서 ‘내가 한다’는 아상이 있다면 그것은 무주가 아니며 묘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는 나(施輪)도 없고 받는 상대(受輪)도 없으며, 주는 것(物輪) 또한 다 청정한,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보시, 묘행의 보시를 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상의 타파가 곧 바른 보시의 실천인 것이다. 사상이 타파되지 않고서는 참된 보시가 불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묘행 무주의 의미는 좀 더 깊이 있게 다가올 것이다. 묘행이란 실천의 가르침이며, 무주는 이론의 가르침이고, 묘행이란 보시의 실천행이며, 무주란 지혜의 실천행이고, 묘행이 하화중생의 가르침이면, 무주란 상구보리의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주와 묘행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무주일때만이 묘행이 될 수 있고, 묘행이 그대로 무주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의 깨달음에 이르러 하화중생의 원을 세운 보살마하살들에게만 이 보시의 법문이 중요한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일체 모든 발심한 선남자 선녀인, 즉 우리들 같은 생활 수행자들의 모든 실천 수행 또한 머무는 바 없는 보시행이 되어야 한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상구보리의 측면이고 상구보리가 체득되어 깨달음을 얻고 나면 저절로 하화중생의 발원, 즉 일체 중생을 향한 동체 대비의 마음이 바탕 된 보시행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상구보리가 그대로 하화중생이란 말이다. 즉 깨달음이라는 것이 곧 보시의 실천과 다르지 않다. 지혜가 곧 자비인 것이다. 지혜가 생긴다는 말은 곧 일체 중생을 향한 자비의 마음, 보시의 마음이 생긴다는 뜻이다. 반대로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비의 마음, 보시의 마음을 일으키고 실천한다면 그 실천은 곧 지혜의 증장으로, 깨달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보시를 하되 진리의 보시를 하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보시를 하며, 또한 보시를 하되 색성향미촉법 어느 곳에도 머무는 바 없이 텅 빈 마음으로 보시를 실천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깨달음의 발심을 실천하는 수행자인 것이다. 이처럼 보시와 수행은 둘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부처님께서는 묘행무주의 실천행으로,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답변에 묘행무주의 보시행을 설하고 계신 것이다.


이른바 색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할 것이며,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


앞에서 보살은 마땅히 경계(境界)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고 했다. 경계라는 말을 구마라집은 법(法)이라고 번역을 했고, 현장스님은 사(事)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는 공히 경계를 의미하는 말로써, 여기 이어지는 경전의 내용에서처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경(六境) 혹은 육진(六塵)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경이란 육근(六根)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육근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즉 눈․귀․코․혀․몸․뜻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육근은 우리 몸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며, 육경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으로, 눈(眼根)으로 보여지는 대상인 모양과 빛깔을 색경(色境)이라 하고, 귀(耳根)로 들리는 대상인 소리를 성경(聲境), 코(鼻根)의 대상인 냄새를 향경(香境), 혀(舌根)의 대상인 맛을 미경(味境), 몸(身根)의 대상인 감촉을 촉경(觸境), 뜻(意根)의 대상인 온갖 생각을 법경(法境)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외부의 세계와 접촉할 때는 오직 이 여섯가지 주관적 기관이 여섯가지 객관적 세계를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 공부를 하다 보면 경계라는 말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우리가 눈귀코혀몸뜻으로 접촉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경계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육근과 육경이 접촉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 두 가지가 모두 공한 것으로, 잠시 인연따라 기관이 생겨난 것이며, 또한 인연따라 경계가 생겨나는 것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눈귀코혀몸뜻은 항상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잠시 인연따라 나툰 것일 뿐이다. 우리의 생이 끝나갈 때 우리의 감각기관인 육근 또한 함께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100년도 안 되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잠시 이 몸뚱이를 받아 이 세상에 왔다가 몸뚱이 유효기간이 다 되면 곧 법계로 흩어질 뿐,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눈은 우리가 죽고 나면 곧 사라질 뿐, 본다는 기능도 사라지고, 눈 그 자체도 사라지는 것이며 귀코혀몸뜻 또한 마찬가지로 공한 것이다. 또한 육근의 대상인 육경 또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항상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눈에 보여지는 것이든, 귀로 들려지는 것이든, 코로 냄새 맡아 지는 것이든, 혀로 맛보는 것이든, 몸으로 감촉이 느껴지는 것이든, 뜻으로 헤아려 지는 것이든 언제까지고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육근도 육경도 모두 제행무상이며, 제법무아이고, 공한 것이며, 다만 인연 가합으로 인해 신기루처럼,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생겼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서는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이 항상하고 영원불멸하는 고정된 실체성이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육경에 머물러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공한 것이며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를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색에 머물러 보시를 한다는 것은, 보시하는 나와 보시받는 대상 그리고 보시하는 물건을 눈으로 분별하면서 보시를 한다는 말인데, 쉽게 말해, 우리 눈으로 보여지는 형상에 집착하여 보시를 하는 것으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뚱뚱한 사람, 마른 사람, 착하게 보이는 사람, 착하지 않게 보이는 사람, 가난해 보이는 사람,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 등을 분별해서 그 모양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보시하고 어떤 이에게는 보시를 하지 않는다거나, 어떤 이에게는 많이 보시하고, 어떤 이에게는 적게 보시를 한다거나, 이 사람에게는 이만큼 보시하면 큰 보상이 따르겠다거나, 이 사람에게는 아무리 보시를 해도 덕 보는 것이 없겠다거나 하는 등의 분별을 지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리에 머물러 보시를 한다고 하면, 나를 칭찬하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 혹은 말이 거친 사람, 말이 싹싹하고 부드러운 사람 등을 분별하여 그에 따라 보시의 유무와 많고 적음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중생들은 보여지는데 얽매여 분별을 하고 집착을 하며, 들려지는데, 냄새 맡아지는데, 맛보아지는데, 감촉되어지는데, 또한 각종의 생각의 대상에 얽매여 분별을 하고 집착을 한다. 그렇듯 육경에 얽매이는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 그래서 이 묘행무주분에서는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과 온갖 생각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체가 공한 마음으로, 경계에 따라 분별되어지고, 계산되어지는 마음으로 보시를 할 것이 아니라 텅 빈 마음으로 보시를 실천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육근이든 육경이든 어디에 마음을 머물 것이며, 무엇에 집착을 할 수 있겠는가. 육경이라는 모든 대상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집착할 만한 것, 마음을 머무를 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근과 육경을 구분하고, 나와 남을 구분하며 오랜 아상을 키워가기에 여념이 없다. 육근이 있고, 육경이 있으며 육근과 육경이 접촉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거기에서 인간의 근본 무지인 아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육근도 공했고, 육경도 공했을 진데 공한 것과 공한 것이 마주하여 접촉한들 무엇이 더 생겨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육근과 육경을 실체화 시켜 놓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집착하게 되니 그때부터 아상이 생겨나고 온갖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경계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상에 머물러 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상으로 보시하지 말라는 말인 것이다. 즉 ‘내가 한다’, ‘내가 보시한다’는 생각으로 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생각을 다 놓아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즉 삼륜(三輪)이 청정해야 참된 보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삼륜이란 시륜(施輪)과 수륜(受輪), 물륜(物輪)으로 베푸는 자, 받는 자, 주고 받는 것을 의미한다. 돌고 도는 바퀴인 륜(輪)의 의미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마치 수레바퀴가 돌고 도는 것처럼 고정불변하지 않는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 이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한다는 말은 이 세 가지가 모두 공했음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보시하는 나도 공했고, 보시를 받는 상대도 공하며, 보시하고 받는 것 또한 모두 공한 것이거늘,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생각이 어디에 가서 붙을 것인가. 주고도 준 것이 없고, 받고도 받은 것이 없으며, 주고 받은 물건 또한 공했을 때 바로 묘행무주가 실천되는 순간인 것이다. 함이 없는 보시행, 머무는 바 없는 보시행 그것이 바로 무주의 묘행인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마음에 ‘내가 보시했다’고 하는 아상을 전제로 보시를 했다면, 그것은 거래이고, 장사는 될 지언정 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보시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상에 머무는 보시를 하면 ‘난 참 장한 일을 했다’거나, ‘내가 보시했으니 많은 칭찬과 존경을 받겠지’라거나, ‘이만큼 했으니 돌아오는 것이 있겠지’라거나, ‘이렇게 보시를 했으니 상대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없더라도 내 안에 많은 복이 지어지겠지’라거나 하는 등의 수많은 관념과 바라는 마음이 따라 붙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듯 바라는 마음으로 주었다면 그것을 어찌 보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었으니 받아야 한다는 바라는 마음이 전제되는 순간 그것은 장삿속이나 거래는 될 지언정 참된 베풂은 될 수 없다.

아무런 바라는 바 없이, 아무런 분별 없이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마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을 때, 그 때 비로소 보시는 무주상보시가 되어 보시바라밀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주었으니 받겠지 하는 바라는 마음이 전제되고, 상에 머물러 보시를 하게 된다면 물론 인연법에 따라 준 만큼은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복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주고도 준 바가 없이 함이 없는 보시를 했을 때, 그 보시의 공덕은 도무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이다.
무주상보시의 복덕을 가르켜 무량대복(無量大福)이라고 한다. 다시말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을 무량대복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무량대복이란 말 그대로 복이 도무지 셀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의미다. 복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셀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너무 커서 크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온 우주 법계 전체를 다 소유하고 있는 복을 말한다. 다 소유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말한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란 말처럼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체를 소유하고 있는, 즉 정해져 있지 않고 셀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가 되어버린 무량의 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복이 많아야 돈도 많이 벌고, 사업도 잘 되고, 배고프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에 머무는 보시, 바라는 바가 있는 보시를 많이 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결과인 유루복(有漏福)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보통 우리가 행하는 복이 대부분 유루의 복이다. 유루의 복을 지으니 받는 결과도 유루의 결과만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고, 바라는 바 없는 보시를 행하는 과보는 유루의 복이 아닌 무루(無漏)의 복이 되는 것이다. 무루복이란 앞서 말한 무량대복을 의미한다.
무량대복을 소유하면 가진 것 하나도 없이 온 우주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며, 거지가 되어 들판을 거닐고 있을 때라도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량대복을 소유하고 있으면 마음 하나 일으켜 그 무엇이라도 다 얻을 수 있게 된다. 도무지 복의 양을 셀 수 없으려면 온 우주 법계와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대로 법계가 되고 그대로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허공과도 같이 툭 트여 그 무엇이든 다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적인 설법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실천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행하면 누구든지 이런 무량대복, 무루복이 주어진다. 무량대복을 가진 수행자는 아무것도 없이 거지처럼 살더라도 필요에 의해 한마음 일으키면 이 법계에서 무엇이든 만들어 준다. 그러니 따로이 저축할 필요도 없고, 미래를 계획할 필요도 없고, 날마다, 아니 매 순간 순간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이다. 소유의 관념에 얽매여 내 것을 늘리려고 애쓸 것도 없다. 언제든지 한마음 일으켜 법계의 모든 것을 다 가져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많이 보시하면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란 생각 때문에 선뜻 보시를 실천하지 못한다. 그러나 상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면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온 우주를 소유함 없이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는 법문의 참뜻인 것이다. 온 우주 법계가 그대로 내 것이고, 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니, 따로이 ‘내 것’ ‘네 것’을 나눌 것도 없이 내가 곧 전체이고, 내가 곧 우주이며, 나와 남을 나눌 수 없는 전체로서의 하나, 한마음 참 부처를 이루는 순간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툭 트여 한없이 자유로운 법계에 한 생각 잘못 일으켜 ‘내 것’을 나누고, ‘내 것이 아닌 것’을 나누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 것’으로 편입시키려고 할 때,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때, 즉 아상이 생겨나는 순간 우리 안에 충만하게 존재하던 무량대복은 한순간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날마다 베푸는 삶을 실천할 일이다. 누구를 만나든지 ‘뭐 줄 것 없을까’ 하고 고민할 일이다. 계산하고 따져 가면서 적당히 보시할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필요에 의한 보시라면 아무런 계산도 하지 말고 다 베풀 일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참으로 진실한 법문 한 가지 꼭 가슴에 새겨 실천할 일이다. 베푼다고 절대 가난해 지지도 않고, 많이 베푼다고 절대 못 살지 않으며, 오히려 필요에 의해 베풀어야 할 인연처가 생기면 턱 저질러 베풀었을 때, 그 마음에 바로 무량대복이 생겨 온 우주법계 전체가 내것이 되는 것이다.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의 경계가 사라져 전체로서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무량대복이 생겨나면 언제든 ‘욕심’이 아닌 ‘필요’에 의해 한마음 일으켰을 때 법계에서는 얼마든지 그것을 가져다 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청정한 수행자들은 한마음 내어 무엇이든 자유자재로 법계를 굴려 쓰고, 법계에서 필요한 무엇이든 가져다 쓸 수 있으며, 참으로 법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맑고 청정한 도량, 청정한 수행자가 사는 곳은 그래서 ‘원만구족’한 것이다. 소유한 것이 많아서 원만구족이 아니고, 소유한 것은 하나도 없더라도 필요에 의해 가져다 쓸 수 있는 무량대복이 언제나 충만하기 때문에 원만구족인 것이다. 절에 쌀이 다 떨어져 없을 때 즈음이면 어디서든 쌀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나타나게 마련이고, 돈이 필요하면 또 어디서든 돈이 생겨나며, 사람이 필요하면 무량대복이 사람의 인연으로 화하여 주게 마련인 것이다. 수행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법계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굴리고 자유자재하게 쓸 수 있어야 대장부 수행자라 하지 않겠나.
이것은 비단 스님들만의 또 치열하게 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치가 아니다.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는 그 어떤 사람도 당연스럽게 누릴 수 있는 법계의 선물이며, 이치이고 진리인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허공의 비유를 들어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의 공덕을 말씀하고 계신다. 허공이야말로 툭 트여 도무지 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으며 우리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 또한 헤아릴 수 없다고 다시한번 비유로써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보통 우리가 쉽게 들어 본 말이 사방(四方), 팔방(八方)일 터인데, 경전에서는 허공을 사방 팔방이 아닌 십방(十方)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보통 사방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방위인 동서남북(東西南北)을 의미하고, 팔방이라고 하면 여기 사방에다가 사방의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간위인 동북, 동남, 서남, 서북을 더한 것으로, 경전에서의 사유(四維)가 바로 이 네 가지 간위를 뜻한다. 여기에 상하(上下)를 더하여 10방위가 되는 것이다. 보통 경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바로 이렇게 10가지의 방위를 말하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끝없이 넓어 셀 수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시방세계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무주상보시의 복덕 또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음을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누차 무주상보시의 복덕이 크고 원만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설법을 접하고 나면 누구나 무주상보시를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 이면에는 벌써 무주상보시를 해야만 무량대복을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깔려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마음 조차 잘 관하여 놓아버렸을 때 참된 보시의 복덕을 얻을 수 있을 것입이다.

사실 무주상보시를 실천할 때는 복덕이라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야 한다. 복덕이라는 말 자체도 필요 없는 말이 되어야 한다. 그저 보시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지 벌써 여기에 ‘복덕’이라는 말이 전제되고 나면 누구든 복덕을 위해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려고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보시한다는 말도 필요 없고, 그저 필요한 것이 필요한 곳에 놓여진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어차피 이 우주 법계는 정확하게 필요한 일이 필요한 순간에 벌어지고 있으며, 필요한 것이 정확히 필요한 자리에 놓여지게 되어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인연의 인다라망은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원만하게 펼쳐지는 법계에 공연히 한생각 분별심을 일으켜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것만 다 놓아버리면 ‘보시’도 없고, ‘복덕’도 없고, 주는 ‘나’도 없고, 받는 ‘너’도 없으며, 주고 받는 ‘물건’도 없고, 오직 부처님의 성품이 이 법계에 여여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며, 다만 인연따라 부처님이 가지가지 모습과 행으로써 나투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인연법이라는 법칙에 따라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렇게 놓여 있다. 사람이 가졌다 버렸다 하거나, 주고 받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인연의 법칙에 따라 있어야 할 그 자리에 그저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준다 받는다는 말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러니 한생각도 분별할 것이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방편으로써 복덕을 이야기 하고, 무주상보시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무주상보시를 하고서도 이것이 복덕이라고 생각하면 벌써 복덕을 잃을 것이고, 복덕이라는 생각 조차 놓아버렸을 때 그 복덕은 실로 무량할 것이다. 이것은 흡사, 일체 모든 집착을 놓아버려야 오히려 얻을 것이고, 얻고자 하면 도리어 얻지 못하는 이치와 같으며, 무소유 했을 때 전체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고, 소유하고자 하면 도리어 소유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면 벌써 깨달음은 저만치 달아날 것이지만, 깨달음 조차 놓아버리고 났을 때 이미 무시무종으로 언제나 깨달음과 하나 되어 있었던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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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강해 -9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이 장에서부터는, 서두에서 다루었던 오온(五蘊)을 비롯하여, 십이처, 십팔계, 십이연기, 사성제 등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교설에 대해, 대승의 공 사상이라는 큰 진리 속에서 모두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로 알아야 할 것은,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교설을 부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르침의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전체가 하나로 통일, 통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대와 상황이 바뀜에 따라 그 상황에 맞도록 방편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스승이 제자를 지도할 때, 제자의 근기(根器)에 따라, 성품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비난을 들었을 때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자에게는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잘 하고 있는 점을 칭찬해 줌으로써 더욱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지도할 수 있을 것이며, 본인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줌으로써 올바르게 고쳐 나아갈 수 있는 제자라면 마땅히 잘못된 점을 하나 하나 지적해 주어 스스로 고쳐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방법이 긍정을 통한 교육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부정을 통한 지도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진리를 나타내는 방법도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진리의 가르침에 대해서 하나 하나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어 진리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긍정적인 방법이 있고, 다른 방법은 공이라는 부정을 통해서 진리가 스스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후자의 방법이 대승의 공 사상인 것입니다. 결국 추구하고자 하는 진리에로의 귀결은 한결같은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서두에서 핵심 사상을 나타낼 때, 이미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충분한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두에 나오는,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이란, 공의 세계에서 오온[색수상행식]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부정의 논리로 나타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다음 장에서부터 십이처와 십팔계의 부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십이처란, 안근(眼根)[눈], 이근(耳根)[귀], 비근(鼻根)[코], 설근(舌根)[혀], 신근(身根)[몸], 의근(意根)[뜻, 마음] 의 여섯 감각기관[육근(六根)]과, 그것에 상응하는 여섯 개의 대상[육경(六境)], 즉 색경(色境)[빛깔과 모양], 성경(聲境)[소리], 향경(香境)[냄새], 미경(味境)[맛], 촉경(觸境)[촉감], 법경(法境)[생각, 마음의 대상]을 합친 것을 말합니다.

이 십이처설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현상에 대한 인식의 구조와 한계를 제시한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관점입니다. 여기에서 근(根)이라 하면, 기관 이외에 그 기능까지를 포함합니다. 예를 들면, 안근은 눈과 눈의 보는 기능까지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눈[안근]으로 빛깔과 모양[색경]을 볼 수 있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느끼며,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마음으로 많은 생각을 합니다. 이는 모든 정신 작용[식(識)]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들 주관계의 감각기관과, 객관계의 대상이 서로 만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십이처의 분류법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 분류법으로, 인간의 인식 능력을 대상으로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나’라고 하는 주관적 존재와, 내 외부에 나타나는 객관세계를 합쳐 일체(一切)라고 하는 것이며, 이것을 육근(六根), 육진(六塵)이라고도 합니다. 육근이란, 눈, 귀, 코, 혀, 몸, 뜻의 주관적 인식기관은 외부의 객관 대상을 인식하는 의지처가 되므로, 그 근본이 된다고 하여, ‘근(根)’이라 하였고, 빛과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 등의 객관 대상(六境)들은 우리의 깨끗한 마음을 더럽히고 미혹되게 하기에, ‘진(塵)’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이처’의 교설 또한 ‘오온무아’에서처럼, 근본불교 ‘무아’의 교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에 항상 변화하며,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 또한 계속해서 들리지는 않습니다. 냄새도 마찬가지로 인과 연이 화합하여 잠시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며, 맛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몸의 감촉 또한 항상하지 않으며, 우리의 생각들도 어디에선가 잠시 왔다가 잠시 후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듯 여섯 개의 대상, 육경은 항상하지 않으며, 우리 몸의 주관적 인식기관인 육근 자체도 우리가 죽으면 또한 사라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렇듯, 육근과 육경은 항상하지 않는 것이며, 항상하지 않아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의 모임인 일체, 즉 십이처도 또한 항상하지 않고, 그러므로 딱히 잡아, ‘나다’ 라고 할만한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근본불교 교설인 십이처는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일체인 십이처는 항상하지도 않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인과 연이 모이면 존재를 형성하고, 인과 연이 다하면 존재를 파괴하도록 만드는 연기의 법칙에 지배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스스로의 자성(自性)이 없으며, 차별의 세계를 초월하여 무분별(無分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라는 말로써 육근과 육경[육진(六塵)]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근과 육경, 즉 십이처를 부정함으로써 공(空)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는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십팔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팔계(十八界)란 인간의 주관적 감각기관의 요소인 안계, 이계, 비계, 설계, 신계, 의계와 객관적 대상의 요소인 색계, 성계, 향계, 미계, 촉계, 법계, 그리고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서로 만날 때 나타나는 인식작용인 안식계, 이식계, 비식계, 설식계, 신식계, 의식계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란 십팔계의 첫 번째 안계에서부터 십팔계의 마지막 요소인 의식계까지의 열 여덟 가지 모든 요소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십팔계는, 앞에서 말한 십이처에 육식(六識)을 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식 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관[육근]과, 인식의 대상[육경]과, 인식작용[육식]의 3가지 요소가 필요한 것입니다. 십이처와 십팔계가 다른 근본적인 차이는, 마음의 영역에 여섯 가지 인식을 하나로 합하여 하나의 의식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눈, 귀, 코, 혀, 몸, 뜻의 각각에 독자적인 인식작용을 내세우고 있는가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자가 십이처의 의처(意處)이며, 후자가 십팔계의 여섯 가지 별개의 인식인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인 것입니다.

 

이처럼, 십팔계는 십이처에서 설명하였던 육근과 육경에 육식을 더하면 성립이 됩니다. 육근과 육경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육식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언급이 된다면 십팔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육식을 설명하기 전에 잠시 부연한다면, 이러한 십팔계의 여섯 가지 식의 존재에 대한 연구와 함께, 마음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거듭한 부파불교의 법에 대한 연구는 이후에 그 부족한 점을 보충하여 마음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낳았으니, 이것이 바로 유식(唯識) 사상인 것입니다. 여기서는 육식의 이해를 위해 유식 사상에 의거하여 육식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육식의 첫째는, 안근(眼根)으로 색경(色境)을 바라볼 때 나오는 마음인 안식(眼識)입니다. 불교 전문 용어를 사용하니 어려운 느낌이 들지만, 사실은 쉬운 말입니다. 눈[안근]으로 모양이나 빛깔[색]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좋고 싫고, 그저 그렇다고 분별하는 마음이 바로 안식입니다. 안식으로는 사물의 내면에 있는 오묘한 마음까지는 분별하지 못하며, 오직 현재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만을 인식하는 기초적인 분별작용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안식에서는 꽃을 보면 직감적으로 좋아하고, 대변을 보면 흔연해 하지 않는 기초적인 인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이외에 이것이 꽃인가, 대변인가, 나아가 꽃이면 무슨 꽃인가, 그 꽃은 언제 피며, 어느 나라의 어느 지방에서 잘 자라는지 정도까지 유추해서 의식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기능을 위해서는 제6의식의 작용이 함께 해야 합니다. 이때 제6의식은 과거의 경험과 기억 등을 생각해 내고, 다른 것들과 비교 판단하며, 때로는 잘못 인식하기도 하는 등의 구체적인 인식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근(耳根)으로 성경(聲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인 이식(耳識)입니다. 이것은, 귀[이근]로 소리[성경]를 들을 때 느낄 수 있는, 좋고 싫은 마음의 분별[이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식의 대상은 오직 소리입니다. 소리를 유식의 용어로 하면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비근(鼻根)으로 향경(香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인 비식(鼻識)입니다. 즉,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생기는 ‘좋은 냄새’, ‘나쁜 냄새’ 하는 즉각적인 마음의 분별입니다. 당연히 비근의 대상은 냄새입니다. 향이라고 하나, 향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우리가 맡을 수 있는 모든 냄새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넷째는, 설근(舌根)으로 미경(味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인 설식(舌識)입니다. 이것은 혀로 음식 등을 먹을 때 느끼는, 맛있고, 맛없고 등의 마음 작용입니다. 여기에는 다만 맛이 있고 없는 것 뿐 아니라 뜨겁고 찬 것, 달고 짠 맛, 맵고, 싱겁고, 신 맛 등, 혀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합니다.

 

다섯째는, 신근(身根)으로 촉경(觸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의 작용인 신식(身識)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으로 물질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입니다. 신근의 대상은 촉경이라고 하여 물질계를 말하는데, 물질계란 단순히 딱딱한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전체를 그 대상으로 합니다. 근본불교 교설의 오온에서 물질인 색(色)을 설명할 때 지, 수, 화, 풍으로 설명한 것을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즉,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물질인 지(地)의 성질뿐만 아니라, 축축하거나 건조한 것 등의 수(水)의 성질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신근의 대상이며, 무덥거나 춥고, 뜨겁거나 찬 것 등 화(火)의 성질, 그리고 호흡이나 불어오는 바람 등도 우리의 몸인 신근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것입니다. 이처럼 촉경의 범위는 대단히 넓습니다.

 

다시한번 정리하면, 이상 다섯 가지의 인식작용은 모두 선과 악, 좋고 나쁜 등의 직접적으로 드러난 부분에 대한 식별만이 가능합니다. 반면에 유식에서 말하는 제6의식은 십팔계의 의식으로서, 의근(意根)에 의지하여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 모두를 포함한 일체 유형무형의 모든 대상, 즉 법경(法境)을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이 6의식은 앞에서 말한 5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선 전오식은 의지처가 눈, 귀, 코, 혀, 몸 등 모두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6의식은 순수한 정신적인 기관이 그 의지처입니다. 대상 또한 객관적인 물질계뿐만 아니라 정신적, 물질적인 모든 경계를 그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여섯 가지 의식, 즉 6식이 공(空)인 연유에 대해서 살펴보는 일이 남았습니다. 앞에서 꾸준히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주관적인 감각기능은 반드시 객관적인 대상이 있어야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귀는 있지만 소리가 없다거나, 코는 있는데 대상인 냄새가 없어도 안되며, 반대로 객관계의 대상은 있지만 우리 주관계의 기관이 없다면 인식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즉, 맹인이라면, 눈은 있지만 정확히 말해 안근(眼根)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안근이라는 것은 그 기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까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귀머거리나 벙어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육근과 육경은 항상 함께 작용하는 것이며, 이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해야만 육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앞에서, 육근과 육경은 항상하지 않아[무상], 고정된 실체가 없고[무아], 연기하는 존재로서, 무자성이며, 공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나아가 이 두 가지 육근과 육경이 합쳐졌을 때 일어나는 인식작용인 육식도 공하다는 것을 살펴보면, 십팔계 또한 공임이 밝혀질 것은 물론입니다.

 

왜 육식은 공(空)한 것일까? 육근과 육경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온갖 마음 작용의 뿌리는 과연 무엇일까? 육식은 육근이라는 인간의 기관에 숨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육경이라는 대상 속에 숨어 있는 것일까? 육식은 육근에도, 육경에도 숨어 있는 작용이 아닙니다. 다만 ‘접촉’, ‘결합’, ‘연관’, ‘인연’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육근에도 없고, 육경에도 없는 것이 어떻게 연관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한다면,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는가? 절대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은 있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공기 중에 불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무와 나무를 서로 연관지어 접촉을 가하면 그 인연 관계 속에서 불이 일어납니다. 나무와 나무를 서로 비벼주면 불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불은 있지 않으며, 다만 연관, 인연 속에서 불이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식도 이와 같습니다. 육근에도 그렇다고 육경에도 육식은 없지만, 서로 ‘연관’되고 ‘접촉’ 됨으로 인해 육식이 연하여 일어나는(緣起)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가지고 딱히, ‘육식이다’ 라고 고정되게 말할 수 없는 것[무아]입니다. 또한, 나무를 비벼 불을 냈지만, 그 불도 인연이 다하면 꺼지게 마련이듯, 육식 또한 인연이 바뀌게 되면 사라지는 것[무상]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어떤 고정된 자아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의식도 항상하여 고정된 것이 아니며, 주위의 상황, 경계에 의해, 즉 인과 연에 의해 항상 바뀌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식에도 스스로의 자성이 없기에, 무아, 무자성이며, 항상하지 않기에 무상이고, 인과 연에 의해서 생멸을 반복하므로 연기이며, 이러한 사실을 통틀어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결론짓고 있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문경 김용사]

분별하지 않으며
묵묵히 비추어 보십시요.

우리는 순간 순간
끊임없이 경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의 경계를 마주하는 것이지요.

경계를 마주하게 되면
우리 안에서는 자동적으로, 반사적으로
분별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보통 사람들일 경우
100가지 경계를 만나면 100가지 분별을 일으킵니다.

분별을 일으킬 때는
우선 앞선 나의 기억이나, 경험, 업식들을
하나 하나 샅샅이 뒤진 뒤에
지금 이 경계와 유사한 기억들을 끄집어 내게 되고,
그 색안경 같은 업식의 거울로
지금의 경계를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눈(안근)으로 장미꽃을 보면서(색경)
옛 애인에게 주었던 100송이의 장미꽃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것이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면
장미꽃 또한 기분 좋은 분별을 만들어 낼 것이고,
이후에 헤어진 애인이었다면
서글퍼 진다거나, 그립다거나, 원망스럽다거나
심지어는 격한 감정이 올라오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납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우리 마음 속에서는 충분히 그 사람을 분
별해 버립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어떤 사람인지 그것은 둘째 문제이지
그 사람의 본래 바탕에는 우선 관심이 없습니다.
우선 첫째는 내 안에서 분별부터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업식이 본래부터 텅 비어있다면
어찌 처음 보는 사람을,
처음 보는 풍경을
처음 행하는 일들에 대해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분별할 수도 없고 분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을 짓는 이유는 업 때문인 것이지요.

처음 보는 어떤 스님이 설법을 하십니다.
그 스님은 한 분이고 한 가지 설법을 하셨을 뿐이지만,
듣는 사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분의 스님을 분별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한 분이 아니라 듣는 사람 수 만큼의 스님이 되어 버립니다.

설법을 잘한다, 못한다,
말투는 어떻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쉽고 어렵고, 훌륭하고 그렇지 못하고,
내 안에서 업식이 비춰주는 한 끊임없는 분별이 이어집니다.

스님의 똑같은 말 한마디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해했고,
또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르게 이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업식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참 신기한 것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듣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저도 모르게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TV를 보면서도
연예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꼭 이런 저런 한마디를 거들고 끼어들어야 하고,
사소한 몸짓 하나, 몸매 하나를 보고도
꼭 시비를 걸고 욕을 하고 나무라고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
다.

그냥 가만히 보고 있지를 못하는 거지요.
TV를 보고 있지만무엇인가를 계속해서 궁시렁 궁시렁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은
결코 비추어 보지 못하고
매냥 남의 모습, 남의 말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거지요.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 보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말인 줄 잘 알기만 해도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아무 소득이 없음을 알고 있더라도
경계를 만나면 또다시 금새 궁시렁 거리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업식인 것이지요.

우리는 아무리 작은 경계를 만나더라도
업식에 비추어
입으로 몸으로 아니면 생각으로
끊임없이 분별과 그에 따른 행위를 이어갑니다.

이것이 모든 이들의 병통입니다.
이 분별이 바로 모든 업의 시작이기 때문이지요.
업에 비추어 모든 분별을 일으키고,
또 그 분별은 또다른 업의 씨앗이 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한도 끝도 없이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지독한 윤회의 수레바퀴 아니겠습니까.

수행이란
바로 이 분별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비우고 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새로운 업을 짓지 않도록 하고,
업의 그림자인
안에서 올라오는 경계며,
바깥에서 다가오는 경계를
그 자리에서 녹여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계와 맞닿은 순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분별을
잘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를 보고
싫다거나 좋다는 분별이 일어날 때,
바로 그 분별을 비추어 보고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일을 하면서
답답하다, 버겁다 하는 분별이 일어날 때
그 분별을 즉한 순간 비추어 보고 비워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을 때(눈)
또 무엇을 들었을 때(귀),
무슨 냄새를 맡았을 때(코),
무슨 음식을 먹고 맛을 볼 때(혀),
무슨 대상을 감촉하여 부딪기고 느낄 때(몸),
어떤 생각이 올라올 때(뜻),
그 여섯가지 경계와 맞닫는 순간
분명 분별은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올라오는 분별을 잘 단속해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분별이 올라올 때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대상을 보고 좋게 분별하여 집착과 애욕을 만들어 내고,
싫은 대상을 보고 싫게 분별하여 미움과 증오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선업과 악업의 씨앗이 되며
그로 인해 우리는 또다른 업을 짓게 되어
괴로운 삶을 스스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육근이 육경을 만날 때,
바로 그 때를 놓치지 말고
잘 비추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잘 비추어 보면 그대로 비워집니다.
관조(觀照)가 깊어지면 저절로 방하착이 됩니다.

모든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이란
분별을 여의는 일입니다.
분별을 여의기 위해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마세요.
그냥 담담해 지고 여여해 지세요.
이렇다 저렇다 취사 선택하지 말고,
잘잘못을 따지려 들지 마세요.
한 티끌도 분별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억지로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업이 있는 이상
저절로 분별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분별이 올라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잘 비추어 보아 관하라는 것이지요.

분별이 없으려며는
그냥 다 받아들이고,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아야 합니다.
다 인정하고 수용하며 섭수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묵묵히 비추면 됩니다.

그러면 조금씩 깨어있게 되고,
분별이 잦아들게 되어
어느 순간 무념(無念) 무심(無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
지금 분별 녹이는 연습을 자꾸 하고,
지금 관하는 연습을 자꾸 해야
그것이 성불인연 짓는 것이고,
그래야 나중에라도 성불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 생각도 그냥 놓아버리세요.
그것이 아닙니다.

나중이란 아무 필요도 없고
또 그런건 없어요.

지금 이 순간
비추어 보는 그 순간이
그대로 본래자리 자성부처님의 현현인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가 되야 하고,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무량수 무량광 부처 마음을 쓰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부처이며,
부처 마음으로 법계를 호령하며 산다는 것이,
이 꽉 찬 우주 법계를 자유롭게 꺼내 쓰고
자유자재 하게 굴리며 산다는 것이 말입니다.

치열하게 수행하고 정진하여
언젠가는 깨닫겠다, 부처 되겠다 그러면
공부 못합니다.

공부는 지금 이 순간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지금 이 순간의 일입니다.

다시한번 말하건데
애쓰지 마세요.
깨달으려 애쓰지 말고
성불하려 노력하지 마세요.

묵묵히 비추어 보고
온갖 분별을 여의기만 하면
바로 지금 이 자리가 자성불 본래자리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욕심이란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하여
애착하고 좋아하며 생각하고
물들어 집착하는 것이다.

또한 귀는 소리를, 코는 냄새를, 혀는 맛을
몸은 감촉을 접촉하여 그것을 만날 때
애착하고 즐겨하며 생각하고 물들어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대상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거나 태어나지 않았거나
언제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써
존재하는 자연일 뿐이니
우리가 항상 보고 듣는 사물 그 자체가 욕심은 아니다.

이 세상의 갖가지 대상에 대하여
보고 들으면서 느끼고 생각하여 분별하는 것이 우리의 욕심이다.
대상에 대하여 일어나는 집착심을 잘 다스리는 것이
욕심과 집착을 벗어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길이다.

[잡아함경]


눈으로 사물을 볼 때,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혀로 맛을, 몸으로 감촉을 느낄 때,
또한 생각으로 온갖 번뇌를 일으킬 때,
바로 그 순간 집착이 생겨난다.

눈귀코혀몸뜻이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과 법을 만날 때,
바로 그 순간을 잘 비추어 보고 다스려야 한다.
모든 집착과 번뇌 분별들은 바로 그 순간 일어난다.

눈이 대상을 봄으로써 좋고 싫음을 일으키고,
귀로 칭찬이나 비난을 들음으로써 좋고 싫은 번뇌가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집착과 번뇌 분별의 시작이 바로
우리 몸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이 세상의 여섯 가지 대상을 만날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접촉점을 잘 살펴야 한다.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을 만날 때,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지, 어떤 분별이 일어나는지,
어떤 집착과 욕망이 일어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잘 살피고 지켜보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관찰하면
다만 주관이 대상을 만날 뿐,
더 이상 분별과 집착은 일어나지 않는다.

귀로 어떤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순식간에 그 말에 대해 좋거나 나쁘다는 분별을 하곤 한다.
바로 그 순간, 말과 귀의 접촉점을 잘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귀로 말을 듣는 순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그 말은 중립적인 말일 뿐이지 좋거나 싫은 말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좋거나 나쁜 어떤 극단으로 몰고 가려는 습성이 있다.
이 나쁜 습성의 치료약이 바로 알아차림이다.

눈귀코혀몸뜻의 대상에 접촉하여 일어나는
분별과 집착을 잘 관하여 다스림으로써
욕심과 집착을 벗어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수행의 길이고, 명상의 길이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