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7.22 월다잉, 죽는 순간의 마음가짐
  2. 2007.12.04 죽음을 준비하자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도 생사의 분별에 집착하지 않으면
평생을 쌓아온 업장이라도 소멸할 수 있다.
일생을 수행했을지라도 임종에 이르러 생사에 집착하면
그 수행은 물거품이 되고 오히려 마귀의 포로가 되고 만다.
지금이라도 본래 마음을 깨달으면 다시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달마대사 혈맥론(血脈論)]


하루 중에도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 중요하다.

시끄러운 TV 소음에 시달리다 잠에 들면
잠든 내내 소음이 꿈속까지 뒤따라 와 정신을 뒤흔들어 놓지만,
잠들기 직전 고요한 와선 속에서 잠에 들면
밤새 고요함이 지켜진다.

가만히 잠들기 직전 무슨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는지,
그리고 그 생각들과 꿈에는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를 떠올려보라.
잠들기 직전의 생각이 온통 꿈속까지 휘젓고 다니며
단잠을 방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데는
그리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하루 중에 이처럼 잠드는 순간이 중요하듯,
일평생 가운데는 죽는 순간이 중요하다.

아무리 일평생 수행을 잘 했다 하더라도
죽는 순간 생에 집착하여 미련을 못 버린다면
그간의 모든 수행은 물거품이 되고
오히려 마귀의 포로가 되어 헤매고 말지만,
죽음에 이르러 생에 집착하지 않고
냉철한 깨어있음으로 죽음의 순간을 지켜본다면
일평생의 수행을 뛰어넘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부처님 당시 밤사국 왕인 우데나왕의 왕비
사마와띠는 첫째 왕비인 마간디아의 음모로 인해
시녀 500명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궁에 갇혀
불에 타 죽게 된다.

그 때 깨어있음의 수행을 익힌 사마와띠는
함께 불법을 수행하던 500의 시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불에 타 죽게 되는 인연을 알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작을 알 수 없는 긴 윤회 속에서
이 또한 분명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떤 원인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니 순간 순간 일어나는 현상에 마음을 챙기십시오.
불에 타는 고통스런 순간에도
그 고통에 반응하는 마음을 정확히 관찰하십시오"

사마와띠의 말을 들은 500의 시녀들은
모두 불이 몸에 다가오는 순간에도
동요 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의 고통스런 느낌에 마음을 집중해 수행했다.
그래서 죽기 직전에 어떤 이는 사다함과를
또 어떤 이는 아나함과를 증득했다고 한다.

죽는 순간 생사의 집착에서 자유롭기 위해
사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생사의 집착을 놓아버리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하루 하루의 삶이 깨어있으며,
집착을 버리고 욕망을 거스르며,
온갖 번뇌를 놓아가는 쪽으로 비움과 수행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죽음은 삶의 연장이다.

삶의 순간 순간을 어떤 방식으로 살았느냐에 따라
죽는 순간을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결정되어지기 때문이다.

올바른 웰빙이란 웰다잉과 다르지 않다.
웰다잉을 위해, 죽는 순간의 공부를 위해,
사는 순간 생사의 집착 없이 올바로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생사를 비롯한 양극단의
모든 분별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참말로 잘 죽는 웰다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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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때늦은 5월, 동백의 낙화...]

우리의 삶에 있어
가장 큰 괴로움은 역시 '죽음'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하여
생하고 멸하는 것 또한
본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생불멸이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과 연이 화합하면 만들어지는 것이며(生),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死)일 뿐입니다.

예컨대, 나무와 나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나무(因)와 나무[因]를 인위적으로 비벼줌[緣]으로써
불[果]을 얻을 수 있으며
우리는 따뜻함(報)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본래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던 것이 아니며,
공기 중에 있던 것도,
비벼주는 손 안에 있던 것 또한 아닙니다.
불은 다만 인연따라 생겨난 것일 뿐입니다.

또한, 일정한 시간이 지나 나무가 모두 타게 되면,
인과 연이 소멸하였기에 불은 자연히 스스로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하며 인연 소멸(消滅)하는 것일 뿐입니다.

즉, 불이 본래 있던 것이 아니듯,
우리 존재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잠시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죽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시냇물이 태양이라는 연(緣)을 만나 수증기가 되고
수증기가 뭉쳐 구름이 되며
구름이 다시 비가 되고 눈이 되고 그럽니다.

그렇다고 우린 시냇물이 죽고 수증기가 되었다고 하지 않으며
수증기가 죽어 구름이 되었다고 하지 않는 것 처럼
우리의 인생 또한 그와 같이 돌고 도는 것입니다.

구름이 없어짐(死)과 동시에 비가 생겨나듯(生)
생하는 순간 멸하는 것이며 멸하는 순간 다시 생하는 것이
모든 존재의 이치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네 죽음 또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입니다.
이 껍데기 유효기간이 다 되어 새롭게 몸을 바꾸는 것일 뿐입니다.
이 생에서 지은 업에 걸맞는 새로운 껍데기를 찾아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것일 뿐입니다.

선업의 과보는 천상이요, 악업의 과보는 지옥이며,
탐욕의 과보는 아귀, 성냄의 과보는 수라,
어리석음의 과보는 축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일 뿐이지
그 본성에 있어서는 죽고 사는 것이 아니며, 영원성을 지닌 것입니다.

이처럼 본래부터 생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 범부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가 실재적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착하므로 온갖 괴로움이 따라 붙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를 바라볼 때,
생과 사를 초월하여
인연 따라 다만 흐르는 것이라는 것임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공성(空性)의 올바른 이해이며
연기(緣起)의 올바른 이해인 것입니다.

즉, 연기된 존재이기에 불생불멸이며,
그렇기에 공인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 모든 존재의 본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하여 본래 생과 사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명상할 수 있다면
우리네 목숨 없어지는 것에도 여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인생 일대의 명제 앞에 두고
당당히 싸워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 조차 이겨 낼 수 있다면
죽음의 관념 조차 텅 비워 방하착 할 수 있다면
인생에서 오는 그 어떤 괴로움도 여여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란 명제 앞에서는 그 어떤 일상의 괴로움도
그다지 큰 괴로움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까짓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면 생사를 놓아버릴 수 있다면
인생에서 오는 그 어떤 괴로움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이따금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합니다.
아무리 힘겨운 경계라도 죽음과 맞바꿀 수는 없기에
죽음을 초월하는 명상 앞에 더 이상 괴로움은 있지 않습니다.

늘 죽음과 마주하는 삶,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네 생활 수행자들의 첫 번째 마음 자세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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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