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적이고 다차원적인 연기 - 상의상관성

이상에서와 같이 연기법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나거나 또는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다른 모든 존재와 여러 원인,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 그렇기에 정신적, 물질적 모든 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을 ‘관계성의 법칙’, ‘상의성의 법칙’ 혹은 ‘상의상관성’ 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연기법에 대해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텐데, 부처님 당시에도 코티카라는 제자가 연기에 대해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며 사리푸타에게 좀 더 쉽게 설명해 달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답변하는 장면이 『상응부경전』12:67에 나온다.

벗이여! 여기 두 묶음의 갈대단이 있다고 하자.
이 갈대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가 있다.
즉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는 것이며,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 묶음의 갈대단 중 어느 하나를 치운다면 다른 갈대단도 쓰러지고 만다.
이처럼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는 것이며,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비유지만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연기법을 아주 쉽게 비유해 주고 있다. 두 묶음의 갈대단이 서로 의지해 있을 때 그 중 하나를 치우면 나머지 갈대단도 쓰러지는 것과 같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관계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도움을 주면서 상의상관적으로, 관계성으로 서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말은‘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 ‘저것’이 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는 말도, ‘이것’이 사라지는 결과로서 ‘저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함으로 생성 및 소멸되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서로가 서로를 돕고 도움 받는 긴밀한 연기적, 상의상관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결국 ‘이것’과 ‘저것’은 따로 따로 떼어 내서 생각할 수 없는 동체이며, 한생명이고, ‘이것’은 ‘저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고, ‘저것’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이것’과 ‘저것’ 그 어느 것도 실체적인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닌, 인연따라 생겨난 무아(無我)인 것이다. 무아이면서 인연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이고,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기에 공(空)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A와 B 사이의 연기성은 곧 B와 C 사이의 연기에서도 발견되며, 다시 C와 D 사이에서도, 또한 C와 A, D와 A, D와 B 사이에서도 발견되고 이러한 관계는 E, F, G...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온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에게로까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퍼져간다.

이처럼 온 우주의 일체 모든 존재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다른 모든 존재의 생성을 돕고 소멸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물론 어떤 한 존재의 생성과 소멸은 좁게는 근본적인 원인과 직간접적인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 것이지만 조금 더 연기의 시야를 넓혀 시공간으로 확장시켜 보면 이 우주 법계 전체가 한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관여되어 있다. 즉 이 우주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이 우주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한 가지 원인이 한 가지 결과를 발생케 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우주적인 다차원적인 원인으로 인해 하나의 존재가 생기며, 하나의 상황이 생겨나는 것이다. 서양 과학은 단일한 원인이 단일한 결과를 일으킨다고 믿었지만, 동양적인 불교적인 사고방식은 이처럼 전체적이고 우주적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다른 존재에 영향을 끼치면서 동시에 다른 존재의 영향도 받고 있는 것, 나아가 인간이 우주에 영향을 끼치면서 동시에 우주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 이러한 존재와 존재 사이의 서로 의존하고,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을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운명도 우연도 신의 뜻도 아니다

이러한 연기법에서 본다면, 어떤 한 존재가 생겼다거나, 어떤 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단순한 존재의 발생이나 사건이 아니라, 온 우주적이고도 전체적인 무한한 인연관계 속의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인 인생관에 반해 보통 세상의 또 다른 견해로는 모든 것이 운명이나 숙명이라는 운명론이나, 모든 일이나 존재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으며 그저 우연일 뿐이라는 우연론이나, 일체 모든 것은 신이나 브라만이 만들었다는 유신론적인 사고방식이 공존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에도 가장 주목을 끌었던 인생관이 바로 운명론과 유신론, 그리고 우연론이었다. 『중아함경』제3권을 살펴보자.

세상에는 극복해야 할 세 가지 그릇된 견해가 있다. 지혜 있는 사람들이 파벌을 만들어 서로 주장을 달리 하지만 인생에 있어 아무런 소득이 없다. 어떤 것이 셋인가. 첫째는 ‘사람의 모든 일은 일체가 다 숙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요, 둘째는 ‘사람의 모든 일은 일체가 다 신이 만든 것이다’는 주장이며, 셋째는 ‘모든 일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우연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만약 사람의 모든 일을 일체가 다 숙명에 의한다거나, 신이 만든다거나, 아무 인연도 없는 우연이라면,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분별하며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현실의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인간이 책임질 일은 하나도 없고, 선악의 구별도 없게 된다. 저들의 주장에 맞서 나는 연기법(緣起法)을 깨닫고 중생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운 선택에 의해 자기를 만들어 가는 길이다.

이러한 세 가지 주장은 시대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종교며 사상, 철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주요한 인생관들이다. 그러나 숙명론이나 운명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 내 자신이 스스로 내 운명을 개척해 갈 수도 없고, 내 삶을 바꾸어 갈 수도 없으며, 무조건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숙명이라 생각하고 체념하고 포기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대한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이런 사람들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내 운명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 무슨 일만 생기면 사주팔자를 보러 점집에 가고, 무속인들을 찾아 가 운명을 점치는 일 밖에 없다. 그것 외에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 한 가지도 내 스스로의 의지대로 해 나갈 수 없다. 오늘날도 툭 하면 연례행사처럼 점집을 찾아다니고 무당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사람이 바로 숙명론이나 운명론에 갇혀 스스로의 주체적인 삶을 포기하고 내 정신을 점쟁이에게 바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내 안의 오롯한 중심이 나를 이끌고 가도록 해야지 점이나 사주팔자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에서 ‘사람이 점쟁이가 되어서 많은 사람을 그릇되게 꾀어 재물을 구한다면, 이 죄로 말미암아 지옥 속에서 한없는 고통을 받아야 하고, 지옥 생활이 끝난 다음에는 그 죄로 인해 악업의 몸을 얻고 태어나 계속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고 했고, 『숫타니파타』에서는 ‘온갖 점을 치는 일이나 해몽, 관상 보는 일을 완전히 버리고, 길흉화복의 판단을 버린 수행자는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갈 것이다’라고 했다.

운명이나 숙명에 속박되어 있는 사람은 어차피 잘 되도 숙명이고 못 되도 숙명이기 때문에 삶을 개척해 나가고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없다. 이런 사람일수록 게으르고 나약한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기 쉬우며, 스스로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숙명 탓이나 남 탓, 나라 탓, 정치인 탓, 부모 탓만 하지 자기 스스로의 삶에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아무런 인연도 없고 원인이나 조건도 없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는 사람 또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 세상이 단순한 우연일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선도 악도 다 소용없고, 선하게 사는 사람과 악하게 사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말인가. 잘 살고 못 하는 것도 다 단순한 우연이란 말인가.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우연이라면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음행을 하는 등의 삿된 행위들 또한 우연일 뿐 잘못된 행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연론을 믿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 어떤 윤리적인 의식도 없을 것이고, 막행막식을 하면서도 아무런 인과응보가 없다고 생각할 것 아닌가. 또한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모든 것이 우연이니 의지를 일으킬 것도 없고, 세상을 선하고 살고자 애쓸 것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고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의 의지는 없고 오직 신의 뜻만 있다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오직 신의 가호나 은총만을 바라게 될 것이 아닌가. 이 또한 도둑질이나 살생이나 음행 등의 악행을 하더라도 그 또한 신의 뜻이라고 믿을 것이 아닌가. 여기에도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고 오직 신의 뜻만 있다고 믿는다면 이런 신관은 위험하다.

이러한 세 가지 잘못된 견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설하고 계신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와는 달리 연기법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이 100% 보장되고, 자신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으며, 행복에의 가능성, 깨달음에의 가능성을 스스로 성취시켜 나갈 수 있다. 또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도록 함으로써 인과응보의 윤리적 가르침으로도 손색이 없다.

또한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저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상의상관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너와 나의 차별이 없고, 너를 의지하여 내가 있고, 너로 인해 내가 있으며,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으로 연결된다는 동체대비의 자비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자비정신은 곧 보시와 나눔의 정신으로 이어져 모두 함께 풍요로운 세상의 밑거름이 된다.

이처럼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평등하며, 둘이 아니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로 말미암아 내가 존재한다는 바탕에는 ‘나’라고 내세울 그 어떤 실체성을 부여하지 않으므로 ‘나’중심의 이기적이고 아집에 물든 삶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

이상에서 본 것 처럼 불교의 연기법은 우연론도 아니요, 신의 뜻도 아니며, 숙명론도 아니다.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 모든 존재며 사건들이 서로 서로 깊은 연관관계 속에서 꽃피어나는 한바탕 신명나는 잔치다. 그 어떤 존재도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존재도 진리에서 떨어진 채 홀로 소외를 느끼지 않는다. 진리는 결코 사람을 버리지 않고, 소외시키지 않는다. 누구나 이 한바탕 신명나는 잔치에서 자기답게 자신의 몫으로 아름답게 꽃피어나도록 되어 있다. 이 연기의 장에서 모두는 한 가족이며, 벗이고 정겨운 친구다.
Posted by 법상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 연기법 강의(3)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 연기법 강의(2)
2007/11/09 - [불교교리강좌] -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다 - 연기법 강의(1)
세계는 한 송이 꽃 - 우주가 나를 돕는다

『지구를 치료하는 법』이라는 책에 보면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예를 볼 수 있다. 책에 의하면 1950년대 보르네오 섬의 어떤 마을에 말라리아가 크게 유행했을 때 말라리아 모기를 없애기 위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DDT를 뿌렸다고 한다. 모기는 모두 죽고 말라리아는 사라졌다. 그런데 그 후 여러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민가의 지붕이 너덜너덜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민가의 지붕에 살던 말벌이 DDT로 인해 모두 죽고 굼벵이를 먹이로 하던 말벌이 사라지자 굼벵이가 크게 번식하여 갈대로 이엉을 엮은 지붕을 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양철판 지붕으로 바꾸었지만 열대지방의 맹렬한 소나기인 스콜이 양철지붕을 때리는 소리에 주민들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DDT로 인해 수많은 벌레가 죽고 죽은 벌레를 먹은 엄청난 양의 뱀 또한 죽었다.

그 뱀을 고양이가 먹었는데 먹이사슬이 올라갈 때마다 DDT 농도가 농축되어 고농도 DDT를 섭취한 고양이들도 잇따라 죽어갔다. 고양이가 사라지자 쥐들이 극성을 부렸고, 쥐가 증가하자 다른 전염병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곤경에 빠진 WHO에서는 그 해결책으로 14,000마리의 고양이를 낙하산에 매달아 하늘에서 뿌렸다는 다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먹이사슬 전체에 혼란이 일어났는데 그 근본원인을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 보다는 당장에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를 뿌렸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단편적인 견해이며, 일차원적인 접근이고,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일어나고 소멸된다는 연기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결과인가.

이처럼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의존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일어나면 그로인한 다양한 ‘저것’들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어 있고, 또 그 ‘저것’들은 또 다른 제2, 제3의 ‘저것’들을 무수히 만들어 낸다. 연기를 모르면 그 근본 원인이 ‘이것’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제3, 제4의 ‘저것’들에서만 문제를 밝혀내고자 애쓰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지구나 우리 생활 속의 모든 일은 여러 가지 다른 일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의 작은 한 가지 구성원이 사라지면 곧 그것과 연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수많은 존재들이 사라지거나 직간접적으로 위험에 놓이게 되며, 결국 그것은 사람의 목숨까지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정신적 물질적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존, 공생의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 자연과 자연, 개인과 전체가 서로 서로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로써 공생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연의 한 개체가 파괴된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자연의 한 부분을 오염시킨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몸을 오염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그 어떤 현상일지라도 A의 결과는 B라고 하는 단편적이고 직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접근하면 그 현상에 대한 온전한 통찰이 어렵다. 모든 존재며 현상들은 어느 것 하나 전체적이며 우주적이고 연기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어떤 한 가지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중층적이고 무량하게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그 한 가지 일에는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를 피우는 데에도 온 우주가 동참하고 있다. 한 겨울의 얼어붙은 땅을 뚫고 피어나는 봄 꽃 한 송이에도, 한여름 우거진 녹음이며 쏟아지는 장대비에도, 가을철 아름다운 단풍과 이어지는 첫 눈의 설레임에도 크고 작은 온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연기적인 대 화합의 오케스트라를 장엄하게 연주해 줌으로써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면서 내 발을 씻어주는 생생한 현실 속에도 달의 인력이며 수 억 광년 떨어진 별의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

꽃 한 송이는 그저 단순한 꽃 한 송이가 아니라, 연기적으로 온 우주가 함께 피워낸 꽃이요, 온 우주의 숨결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나도 단순히 내가 아니라 온 우주의 반영이며, 우주적인 진리가 나로써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하나, 행동 하나 하나가 낱낱이 온 우주로 퍼져나가고 있고, 온 우주와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공존 공생하고 있다. 온 우주가 더불어 나를 살려주고 있고, 나를 돕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너’를 돕고 있다. 이처럼 온 우주가 한 송이 연꽃이요 평화로운 한 가족이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만공스님의 일갈도 이 같은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나온 깨침의 언어인 것이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어리석은 자들은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인 줄을 모르고 있어.
그래서 나와 너를 구분하고,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다투고 빼앗고, 죽이고 있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라.
흙이 있어야 풀이 있고,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

남편이 있어야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부모가 있는 법.

남편이 편해야 아내가 편하고,
아내가 편해야 남편이 편한 법.
남편과 아내도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이요,
이웃과 이웃도 한 송이 꽃이요,
나라와 나라도 한 송이 꽃이거늘,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을 바로 지니면 세상은 편한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참 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중생심에서 보면 나와 너, 남편과 아내, 이웃과 이웃, 나라와 나라, 내 종교와 네 종교, 인간과 자연 등 수많은 분별이 작용하여 ‘나’, ‘내 것’ 이라는 이기와 아집을 형성하지만, 연기적으로 보면 너가, 이웃이, 타인이, 다른 나라가, 다른 종교가, 자연이, ‘나 아닌 것들’이 모두 ‘나’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나’‘내 것’‘내 종교’‘내 나라’ 때문에 온갖 시비와 분별, 욕심과 전쟁 등을 초래하지만 연기적 시각에서는 그 모든 것이 동체적인 모습으로 한 뿌리, 한 몸, 한 가족일 뿐이다. 거기에서 온 우주와 나를 다르게 보지 않는 동체대비의 자비가 싹튼다. 이기는 사라지고 참된 사랑이 움튼다.

이러한 연기법의 상호의존관계에서 볼 때, 그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 말을 잘 살펴보면 이 속에는 그 어떤 존재도 실체적인 자아가 있지 않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인간도 인간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도 자연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인간과 자연은 공존, 공생의 관계이며, 그 둘은 모두 인연에 의해 존재하므로 비실체적인 것이다. 즉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는 무아(無我)인 것이며, 공(空)인 것이다.

그렇듯 일체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뗄 수 없는 연기적 동체(同體)의 존재요, 서로가 독자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비실체적 공생의 존재이며, 그렇기에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일체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자기 몸처럼 아껴주고 도와주며 존중해주는 자비를 실천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연기적인 삶의 기본 원칙은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의상관의 연기법과 그렇기에 그 어떤 존재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실체적 자아를 내세워 이기심을 축적할 수 없다는 공과 무아와 아집의 소멸, 그리고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되는 필수불가결한 한생명이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한 가족과 같은 따뜻한 사랑과 자비로써 대해야 한다는 자비사상이 되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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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기법이다. 부처님이 해탈, 열반을 성취하셨다고 했을 때 그것은 곧 진리를 깨달았다는 말이고 바로 그 진리가 연기법인 것이다. 수많은 불교 교리가 있고, 불교 경전이 있으며,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또 인도에서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현재 전 세계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수많은 논서와 강론 등을 낳아왔지만 그 모든 이치를 한 마디로 하자면 연기법이라고 정리 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중아함경』상적유경에서는 ‘연기를 보면 곧 진리를 본 것이요, 진리를 보면 곧 연기를 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연기를 보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보는 것이다.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무상, 고, 공, 무아, 자비, 일체법, 12연기, 업과 윤회 등의 근본불교 교리에서부터 부파, 대승불교 교리에 이르기까지 연기법을 벗어나는 교리나 사상은 없다. 모두가 연기법의 각론이며, 연기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방편들에 불과하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연기법을 깨닫게 되면 온 우주의 모든 이치를 확연히 깨닫게 되어 더 이상 그 어떤 의혹도 남아있지 않고 환히 다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다나』에서는 ‘성자가 참으로 진중하게 사유하여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모든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 그것은 연기의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계와 우주에 대한, 또 나라는 존재에 대한, 그리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이치에 대한 그 모든 의심과 의혹들은 비로소 연기법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이 확연해진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도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깨달으신 것이지 부처님께서 별도로 연기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연기법은 부처님이 오기 전에도 있었고 설령 오지 않으셨더라도 언제나 이 우주의 법칙이요 진리로써 항상 하고 있는 진리란 의미다.

『잡아함경』12권에서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지 안 하든지 항상 존재한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해탈을 성취해서 중생을 위해 분별하여 설하며 깨우칠 뿐이다.’라고 하셨다. 이처럼 연기법은 부처님께서 만들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교설이 아니라 이 우주를 운행하는 법칙으로써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부처님은 이러한 우주적인 진리를 바로 보고 깨달아, 중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연기법’이라고 편의상 이름 붙여 주신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연기법은 다만 방편으로 설해진 말에 불과한 것이지 연기법이라는 언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깨달아 아셨고, 연기법을 실천하는 분이며, 이러한 연기법을 중생을 위해 수많은 교리로써 분별하여 설하고 깨우쳐 주고 계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연기법이란 무엇인가. 연기법이 무엇이기에 부처님께서 이토록 역설하셨으며, 그 가르침이 2,500여 년을 이어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의 모든 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종교요 가르침이 되고 있는가. 물론 연기법을 간단하게 ‘이것이다’라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수많은 교리 해설서를 보더라도 경전의 말씀을 풀어 놓으면서 주석을 달고는 있지만 그것을 읽는다고 연기법을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연기법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러한 가르침을 읽고 나더라도 연기법에 대한 어떤 확연한 답을 얻지 못하는 수도 있다.

나 또한 대학 다닐 때 처음 접해 보았던 불교교리서나 경전해설서를 보면서 연기법이 진리라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왜 이 연기법이 불교를 대표하는 교리이며, 이것이 진리의 핵심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불교를 대표할 정도로, 이 세계와 우주를 운행하는 근본 원리요 법칙으로써의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것은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내 안에 화두로써 자리잡고 있었고, 아마도 그 의심이 지금까지 이렇게 불교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아마도 이 생각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공통된 의문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고민을 하던 제자들이 많았던가 보다. 『증일아함경』권46에 보면 아난 존자가 연기와 십이연기에 대한 법문을 듣고는 부처님께 여쭙는다. ‘제가 보기에는 연기법이 그리 깊은 뜻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라고 한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아난아,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십이연기는 매우 깊고 깊은 것이니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라고 답변하고 계신다. 이처럼 연기법은 언뜻 보기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법처럼 보인다.

여기에 수많은 수행자며 학자들의 공통된 어려움이 있다. 연기법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하고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으며, 그 깊이와 통찰력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역사 이래로 수많은 스님들께서, 또 수많은 수행자며 학자들이 고민해 온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사실 불교를 잘 모르는 수많은 이들이, 혹은 불교를 믿고 신행하는 초심 불자들이라도 ‘불교는 이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불교는 너무나도 방대하고, 교리들도 다양하며, 경전도 수없이 많아서 어떤 것이 불교를 단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인지 막연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불자들은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하는 질문을 받고 주저하게 된다. 도대체 어떤 교리를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도 막연하고 정리가 되어 있지 못하다.



연기의 의미

그러면 이제부터 연기법이 과연 어떤 법인가를 차근 차근 공부 해 보자. 연기법에서 보는 관점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제 멋대로 존재하는 것 같은 것들도 모두 다 일정한 법칙 속에 존재한다. 이 세상을 보면 불확실한 일들이 많고, 불확정적인 것들이 많으며, 복잡다단하고, 언뜻 보기에는 정신없어 보일 정도다. 이런 복잡한 세상을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불합리한 것 같고, 불평등한 것 같으며, 진리는 없는 것 같은 자괴감을 느낄 법한 일들도 벌어지곤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열심히 일하지 않고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가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못 사는 나라에 가난한 이로 태어나 기아와 전쟁으로 아귀다툼을 벌이다 죽어가는 이들도 있다. 같은 나라에 태어나 살더라도 어떤 이는 교묘한 술수와 이기적인 방법으로 성공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정직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 진리는 없는 것인가. 진리가 없기 때문에 이런 불평등이 벌어지고, 불합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치가 숨어 있다. 이 모든 존재며 상황들을 가능케 하는 우주적인 법칙이 숨어 있다. 그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먼저 ‘연기’란 말의 의미를 정리해 보자. 연기의 어원은 팔리어에서 온 것인데 이는‘Paticca Samuppada’라고 하여 ‘Paticca’는 ‘~때문에’, ‘~로 말미암아’라는 뜻이고, ‘Samuppada’는 ‘일어나다’는 의미이다. 즉 연기는 ‘~로 말미암아 일어나다’, ‘~때문에 생겨나다’는 의미이다.

연기의 산스크리트어 또한 ‘pratitya samutpada’로써 ‘pratitya’는 ‘~때문에’, ‘~의해서’, ‘~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mutpada’는 태어남, 형성, 생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마찬가지로 ‘~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독자적으로 저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 말미암아 생기고, 무언가에 의해서 의존해서 생기는 것이란 뜻이다. 이는 그 어떤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란 의미다.

『잡아함경』13권 335에서 이 연기법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경구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것은 일체 모든 존재며 상황은 과연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생성과 발생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일체 모든 존재와 상황은 어떻게 소멸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은 연기의 공간적인 표현이며,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연기법의 시간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