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새롭게 일어나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법상 (무한,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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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착한 일은
드러내 주고
허물은 숨겨 주라.

남의 부끄 러운 점은
감추어 주고
중요한 이야기는
발설하지 말라.

작은 은혜라도
반드시 갚을 것을 생각하 고,
자기를 원망하더라도
항상 착한 마음을 가져라.

자기를 원망하는 자와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똑같 이 괴로워하거든
먼저
원망하는 자를 구원하라.

[우바새계경]의 말씀입니다.

상대방의 허물이며
부끄 러운 점
또한 약점이 되는 점 등은
결코 숨겨 줄 일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드러내게 되면
상대의 업 을
자칫 내가 받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덮어두면 없어질 것도
나의 입으로 천하에 드러냄으로써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커진 업의 보는
온전히 나의 몫으로 남을 것입니다.

행여
나를 원망 하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나를 원망하고 욕 해 줌으로써
나의 업을 갚아주니 말입니다.
나에게 진 업으로 인해
상대는 지독한 과보를 받을 것이니,
가장 먼저
구원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상대의 허물을 숨겨주고,
나를 미워하는 이를 구원하는 마음이
생활수행자 의 '착한 마음'인 것입니다.




모든 재앙은
입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법구경에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몸을 찌르는
날카로운 칼날이라 하였습니다.

입을 조심할 일입니다.
입을 관하세요.

말하기 전에
올라오는 마음을
한 번 관하고 말하시는 겁니다.

마음에서 한 번 거르고
내뱉어야 합니다.

걸러지지 않은 말은
재앙이 되기 쉽습니다.

묵언을 즐길 일입니다.
묵언하고 묵언하고
묵언 속에 걸러 진
내면의 참말, '진언'을 내뱉을 일입니다.





남에게
충고하고자 할 때에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충고할 만한 때를
가려서 말할 것이요,
그렇지 못할 때는 묵언을 지킨다.

진심에서 충고하고
거짓 되게 하지 않는다.

부드러운 말씨로 이야기하고,
거친 말을 쓰지 않는다.

의미있는 일에 대해서만 말하고,
무의미한 일은 말하지 않는다.

인자한 마음으로 이야기 하고,
성난 마음으로는 말하지 않는 다.

[증지부경전]의 말씀입니다.

보통 상대방의 잘못된 점을 보면
충고를 해야 할까
그대 로 두어야 할까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첫째로,
무조건 충고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니
그 때를 알아 야 한다는 말입니다.
울그락 불그락 하는
친구 앞에서 충고를 한다면
되려 화를 키우게 될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조심스런 나머지
진실을 외면한 채
적당히 거짓을 섞게 되면
진실로 상대를 위한 충고가 되지 못합니다.

세번째로,
충고는 어떤 경우일 지라도
부드러운 말씨라야 합니다.
말은 마음을 전달하는 매개입니다.
마음이 부드러우면
말도 함께 부드러워 질 것입니다.

넷째 로,
말을 아낄 일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무의미한 말를 반복하기 보다는,
내면에서 깊게 걸러진
참으 로 의미있는 일에 대해서만
어렵게 충고 할 일입니다.

다섯째,
제 화를 못이겨
성난 마음으로 내뱉으면 안 됩니 다.
그것은 조언이 아닌
상대에게 업을 짓는 일입니다.
충고의 근본은
상대방에 대한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바른 충고는
스스로 복 짓는 일이며
상대를 밝게 변화시키는 일이지만,
자칫 잘못된 충고는
도리 어 스스로 구업을 짓고
상대를 어둠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내면에서 걸러진
맑은 조언은
상대를 변화시키고
법계 를 감동시킬 것입니다.




이따금
불평 불만이 많을 때,
힘겹고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생각 돌이켜 보면
도리어 그 불평이
행복을 근원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차가 없 어
매일 걸어 다녀야 한다고 불평한다면
그것은 내 다리가 건강하다는
행복을 누리고 있음이며,

사 람들 앞에서 말을 못하는 것이
단점이라 늘 불평이었다면,
그것은 벙어리가 아니라는
엄청난 행복을 누리고 있 음이고,

자식들이 말을 안 들어 고민이라면
자식 없는 이들에 비하면
너무도 고마운 일이 될 것입니다.

수행이 안 되어 괴롭다면
수행 인연도 짓지 못한
수많은 이들에 비하면
참으로 행복한 수행자일 것이고,

서 울 살면서 공기가 좋지 않아
숨 쉬기가 어렵다고 불평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숨을 쉴 수 있으니
살아 있다는 행복을 누리고 있음입니다.

살아가면서
그 어떤 혹독한 괴로움에 떨고 있다면
그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 는
가장 큰 행복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괴로워 하고 계시는
그 어떤 분이라도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다는 것은
장님이나, 글조차 읽지 못하는
세계의 수많은 문맹들에 비한다면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 다.

나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행복을 안고 있는가
생각해 볼 수 있는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법상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려 하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을 놓아버려야만 사라지나니
이것은 변치 않는 영원한 진리이다.



이 게송에 얽힌 질기고 질긴 인과의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 당시 사위성에 두 아내가 한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실 때문에 둘째 아내를 들여놓고도 둘째 아내가 임신을 하자 질투가 일어 온갖 방법으로 몰래 아이를 낙태시켰다. 두 번째 아이까지 낙태를 하고 세 번째 아이의 출산까지 실패를 하면서 둘째 부인은 첫째 부인이 지금까지 자신의 아이를 죽인 것을 알고 증오와 원한을 품었지만 복수하지 못하고 아기와 함께 결국 죽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남편은 분노하여 첫 번째 아내를 구타했고, 결국 첫 번째 아내도 죽고 말았다.

이 두 여인은 다음 생에 원한을 버리지 못한 채 다시 태어났는데, 첫째 부인은 암탉이 되고, 둘째 부인은 고양이가 되었다. 암탉이 알을 낳을 때마다 고양이가 와서 먹어 버리더니 결국은 암탉까지 죽여 버렸다.

원한을 품고 죽은 암탉은 표범이 되었고, 고양이는 죽어 암사슴으로 윤회했다. 이번에는 표범이 세 번이나 암사슴의 새끼를 잡아먹었다.

또 다시 원한을 품은 이들은 죽어 암사슴은 여자 귀신으로 표범은 사위성의 여자 아이로 태어났고, 여자 귀신은 여자아이가 성장해 출산을 할 때 또 다시 아들을 죽였다. 마찬가지로 둘째까지 죽고 세 번째 아이를 출산했을 때 여자는 귀신을 피해 아이를 안고 도망쳐 부처님에게로 갔다.

부처님께서는 여인과 따라 온 귀신에게 그들의 과거 전생의 얽히고설킨 원한의 이야기를 해 주심으로써 이 두 중생에게 서로의 증오와 원망을 놓아버릴 수 있도록 이 게송을 설하셨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려 하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을 놓아버려야만 사라지나니 이것은 변치 않는 영원한 진리이다.”

한 번 일으킨 원한의 마음이 어떻게 몇 생을 이어가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돌며 얽히고설켜 서로에게 아픔과 괴로움을 주는지를 위의 이야기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돌고 도는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끈질긴 인과의 현장을 볼 때 원한의 마음, 증오와 미움의 마음이 얼마나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지, 그것도 어느 한 생, 어느 한 순간만 괴롭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음 생까지 이어져 원망의 마음을 완전히 비우기 전까지 계속되는 것을 볼 때, 내 안에 숨겨져 있는 원망과 미움과 증오를 어떻게 해야 할지 충분히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릿속에서의 깨달음일 뿐, 현실 속에서 원망과 증오는 좀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이상과 같은 억겁의 돌고 도는 죽고 죽이는, 괴롭히고 괴롭히는 연극 같은 일들이 바로 지금 우리들의 삶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저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원망과 미움과 증오의 인연들이 내 삶에는 부지기수로 퍼져 있어서 언제고 시절인연이 무르익으면 그 결과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지금 나의 삶을 돌이켜 보라. 내가 원망하는 사람, 나를 원망하는 사람, 내가 증오하고 미워하는 사람, 나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인가. 아직도 그를 생각하면 화가 나고 복수하고 싶고 심지어 죽이고 싶은 사람은 없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위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읽어보라. 저 이야기가 바로 그 사람과 나와의 인연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버리지 않는 이상, 그 사람과 나와의 인연은 언제까지고 다음 생 그 다음 생까지 이어지며 계속되고야 말 것이다. 증오스럽고 원망스러운 원수일수록 반드시 다음 생에 또 만나게 되어 있다. 원한과 증오의 마음을 놓아버리지 않는 이상 그 사람과의 만남은 계속될 것이다. 미워하는 사람을 한 번 만나기도 너무 힘겨운데, 다음 생 그 다음 생까지 계속해서 만나게 된다면 이 얼마나 지옥 같은 일인가. 그 지옥 같은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은 마음 속에서 원망과 증오를 놓아버리는 용서 밖에 없다.

내 안에 미운 마음, 증오스러운 마음, 복수심, 질투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과의 인연은 족쇄가 되어 나를 영겁토록 짓누를 것이다. 방법은 내 안에서 원망을 놓아버리고, 증오를 놓아버리는 일 밖에 없다. 내 안에서 참으로 용서해 주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얼마 전 TV에서 마음에 관한 특별기획으로 나온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프로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인 유영철을 처음에는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진심으로 용서하고 연민하게 되자 마음도 후련해졌다는 인터뷰 내용이 많은 이들의 가슴에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용서란 이와 같은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 묻어두고 있으면 그것은 내 안에서 병이 되고, 정신 질환이 되고, 또한 다음 생의 악업이 되고야 만다. 다음 생까지 갈 것도 없이 현대의학에서도 화를 자주 내면 혈압이 상승하고 혈관벽이 손상되며 심장질환을 일으키고 나아가 발암확률을 상승시킨다고 한다. 그러니 화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원한, 분노, 증오, 미움의 모든 뿌리를 놓아버림으로써만 사라지나니 이것이야말로 변치않는 영원한 진리이다. 원망을 원망으로, 증오를 증오로,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으려 하면 그것은 또 다른 원망과 증오와 폭력을 부를 뿐이다.

달라이라마는 자신의 나라와 땅을 정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까지 한 중국을 마음 안에서 진정으로 용서하고 미워하지 않음으로써 노벨평화상을 탓을 뿐 아니라 전 세계 평화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고 있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이가 있다면, 어쩌면 내가 전생에 그를 너무나도 괴롭혔기 때문일 수 있다. 지금 나에게 원망스럽고 증오스런 대상이 있다면, 어쩌면 전생에 내가 그를 원망하고 증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나를 욕하거나, 나에게 굴욕을 준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내가 전생에 한 것을 고스란히 갚기 위해 그가 나에게 똑같은 일을 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고통과 증오와 폭력과 원한은 내 안에서 용서하고 놓아버리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내 안에 증오를, 원망을, 미움을 그대로 가지고 갈 것인가, 아니면 이번 생에 그 모든 악업의 족쇄를 모두 끊고 맑고 청정해진 업으로 남은 생을 자유롭게 살아갈 것인가.
Posted by 법상




3.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미움이 가라앉지 않는다.

4.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놓아버리면
마침내 미움이 가라앉게 된다.



지난 삶을 돌이켜 보라. 내가 원망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며, 내가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나를 욕하고, 나에게 폭력을 가하며, 나를 굴복시키고 비참하게 만들며, 내 것을 빼앗아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힘겨운,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쾅거리며 증오가 불길처럼 불타오르는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내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과연 얼마인가.

만약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증오와 미움과 원망의 대상이 있다면 내 마음 수행의 첫 번째 과제는 바로 그를 용서하는 것이다. 진심(嗔心)을 버리지 못하면 더 이상 수행은 무르익지 않는다. 『출요경』에서는 ‘탐진치의 치열한 번뇌 중에 성냄의 번뇌가 가장 심하니 성냄의 불길은 욕계로부터 초선의 하늘세계까지 태운다’고 하였다.

우리가 원망과 증오의 대상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상대를 위한 배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원망하고 증오하는 동안에 우리 안에는 미움과 증오의 씨앗이 싹트게 된다. 그것은 상대를 괴롭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괴롭힌다.

상대를 미워한다고 하지만 그 미워하는 마음은 누구 마음인가. 그것은 상대가 아닌 내 마음이다. 우리가 상대를 미워할 때 우리 마음 안에는 ‘미움’이라는 씨앗이 싹을 틔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미움과 증오의 씨앗이 내 안에 퍼지고 싹트게 되면 내 마음은 온통 증오로 물든다. 그런 사람은 세상을 볼 때 증오와 미움이라는 필터로 세상을 걸러서 보게 된다. 그 사람에게 세상의 모든 일들은 부정적이고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다. 내 안에 심겨진 씨앗이 사랑과 자비가 아닌 미움과 증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밉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조금 밉상스런 행동을 했을 때 지혜롭고 자비로운 사람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만 미움과 증오를 붙잡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행동을 보고 온갖 화와 성냄과 미움과 욱 하는 마음이 더욱 크게 올라올 수밖에 없다.

나라는 존재 안에 미움과 증오가 남아 있는 이상 우리가 만나게 될 현실은 증오스럽고 미울 수밖에 없다. 반면에 마음 안에 미움과 증오를 다 놓아버리고 용서함으로써 찌꺼기가 없는 이라면 설사 세상의 부정적이고 잘못된 모습을 보더라도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외부적인 그 어떤 경계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이 고요하면 세상이 고요하다. 마음에 증오가 넘치면 세상 모든 것이 증오의 대상으로 보이고,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면 세상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다.

또한 우리의 마음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처럼 비슷한 것을 끌어당기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미움과 증오를 품고 있으면 미움과 증오스런 일들을 끌어당기고 사랑과 자비를 품고 있으면 사랑스럽고 자비로운 일들이 찾아오게 된다.

증오를 버리지 못한 이에게는 계속해서 화나는 일, 증오스러운 일들이 깃들게 마련이다. 마음에서 증오를 담고 있으며, 마음에서 증오를 버리지 못하니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이 되어 세상을 만든다.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는 첫 번째 게송의 가르침에 따라 괴로운 일들이 그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용서하라. 진정한 승리자는 적을 이긴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증오와 미움을 이겨낸 사람이다.

그렇다고 미움과 증오를 억지로 가라앉히려고 해서 되지는 않는다. 그 미움의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과거의 원인이 되는 기억들 이를테면 ‘욕하고 때렸으며 굴복시키고 빼앗았다’는 그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는 원망의 씨앗을 쉴 수 있어야 한다.

미움을 일으킨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고 얽매여 있는 한 그 원망스런 마음을 비우기는 어렵다. 우리가 미움과 원망, 증오의 마음을 느낄 때는 그럴 만한 과거의 기억과 그에 대한 집착이 반드시 따르게 마련이다. 과거에 얽매이는 집착심을 놓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까지 증오와 원망을 그대로 가져와 현재에 투사하는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대상은 ‘미운 사람’ ‘좋은 사람’이 아닌 그저 지금 이 순간 전혀 새로운 ‘사람’일 뿐이다. 이전의 기억과 과거에 얽매이는 마음으로, 미움과 증오의 대상으로 상대를 보지 말라.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내 것을 빼앗았다.” 라고 할 만한 ‘그’가 내 안에 단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도록 모든 이를 용서하라. 과거의 그 어떤 사람들을 순간 떠올릴지라도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을 수 있도록 모든 이를 용서하라. 바로 그 때부터 나의 삶은 원망과 미움과 증오에서 벗어나 전혀 새롭고 빛나는 삶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