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가까이에
허브 농장이 있다고 하여
잠시 다녀오는데,
농장에서 만난 글귀들.

산책로가 있고
산책로를 따라 이런 글귀들이
여기 저기 있었습니다.

이런 글귀를 담은
주인의 마음을 읽는 듯 하여
농장을 다시 한 번 보게 하데요.

이렇게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이런 글귀를 만난다는 건
삶을 더없이 행복하게 해 주는 일들입니다.
격외의 소득이라고 할까요?

큰 파문이 없는 것 만이 행복이 아니라는 말,
욕심의 주머니를 비우고
'없음'의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라는 말,
우리들 모두에게 필요한 말들이 아닐까요?

"행복은
큰 파문이 없는 잔잔한 삶이 아니라
파문이 일어도
물처럼 향기처럼 스며드는
위로와 평안과 감사입니다."

"욕심이란 주머니를
모두 비워내고
'없음'의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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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TAG 욕심, 행복




[선암사에서...
원광스님과 수녀님...]

요즈음 들어
가난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거추장스러움도 많이 느끼게 되고,
소유에 오히려 걸리는 일들 또한 가만히 바라보게 됩니다.

과연 내게는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충분하게 갖추어져 있는가
스스로 비추어 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하게 산다는 건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내가 충분히 지혜롭고
또 그 지혜로움을 실천할 용기가 있는가
그것이 요즈음 화두처럼 제 삶 속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선택한 가난은
무한한 지혜로움의 원천이며,
영혼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산다는 건
소박하게 살고, 청빈하게 산다는 건,
우리 안의 창조적이고 자주적인 본연의 능력을
삶 속에서 마음껏 발휘하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지혜로움을 충분하게 실현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부유하게 살고
그래서 편리하게 살게 되면
우리는 본래의 능력을 자꾸만 잃어버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그만큼 축소되면서
몸과 마음의 능력도 함께 퇴화되고 맙니다.

그렇게 부유함에 길들여져 무능력해 지고 나면
그 때부터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게 되고,
반드시 물질적인 편리함이 뒷받침되어야지만 살 수 있는,
경제력이라는 경계에,
'소유'에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요즘같은 사회에서야
경제력이 그 사람의 능력을 가늠지을 수 있는 잣대인 듯
세상에서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지만,
그래서 너도 나도 돈 돈 하며 부자가 되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사실 그 내면적인 모습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부유할수록 자신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영역이 퇴화되고
모든 것을 기계가 대신해주며, 돈이 대신해주어야만 할 수 있는
그런 나약한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부유하고 돈이 많을수록
우리 손과 발은 할 일이 없어집니다.
대신에 머릿속에 집어 넣어야 하는 것들이 늘어나고,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계산하고 따지고 비교 분석하는 등의
온갖 번뇌와 혼란스러운 삶이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더욱 편리한 삶을 추구하게 되고,
더욱 손과 발을 놀리길 원하게 되며,
그러기 위해 더욱 더 부유해 지길 원하곤 합니다.
그 마음은 곧 욕심과 집착을 부추기고
욕심과 집착은 곧 모든 괴로움의 씨앗이 됩니다.

발로 걸을 것 차가 다 알아서 태워 주고,
농사 지어 먹거리 만들 것을 돈이 알아서 다 만들어 주며,
스스로 밥하고 반찬 할 것을 가정부가 다 해 주고,
스스로 집도 고치고, 시장도 보고, 밭도 갈고
그래야 할 일들을 돈이 알아서 다 해주게 되니까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자꾸만 줄어드는 것입니다.

물론 돈 많은 사람만 그런다는 게 아니예요.
요즘 사람들의 삶을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분야만 잘 하면 먹고 살 수 있게 변했습니다.

컴퓨터만 치면 되는 사람,
운전수만 하면 되는 사람,
기계 돌리는 사람,
그것도 기계의 어느 한 부분만, 똑같은 공정을
하루 종일, 아니 일년 365일을 똑같은 일만 해 먹고 사는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사람의 일이 분업화 되다 보니까
사람이 할 일이 없어졌어요.
그냥 한 가지 일만 잘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요즘이야 그런 분업이 좋은 것이라고 야단인데다
한 분야만 깊이 연구하고 공부하고 실습하면 전문가로 인정받는 세상이다 보니
당연하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는 있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도 한 번쯤 깊이 있는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한 가지 일만 하면 되다 보니까
다른 일에 대해서는 그냥 깜깜무소식이고 어둔 밤입니다.
요즘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형광등 하나 갈지 못하고
변기 하나 제대로 고치지 못한다고 하잖아요.

물론 할 필요가 없으니까 안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아주 단순해졌고
우리의 손과 발이, 우리 몸이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의 길이
딱 막혀 버린 겁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난했을 때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밭도 갈고, 농사도 짓고, 밥도 짓고,
두 발로 걷고, 두 손으로 일하고,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돈이 많아져 버리면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이 없어져요.
어쩌면 소소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
그러나 인간의 삶에 있어 아주 근간이 되고 근본이 되는
그런 기본적인 의식주와 관련된 일들이
그냥 돈의 몫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이 자꾸만 놀게 되고
돈으로 만들어진 온갖 가공되고 영양가 없는 것들이
판을 쳐서 우리 몸을 공격하고 맙니다.
몸으로 일하지 않으니까 우리 몸도 병약해 지는 겁니다.

이건 얼마나 불행인 건 지 몰라요.
몸이 해야 할 것을 돈이 다 알아서 해 주니까
몸의 많은 기능이 그냥 놀게 되고
퇴화되어 버리고
그러면서 온갖 병이 몸을 공격하는 겁니다.

사람이 두 발로 흙 위를 걸을 수 있어야
그래야 비로소 가장 기본적인 몸과 마음의 근본이 서게 되는데
걸을 일이 없다보니
몸이 병약해 지고, 생명력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무인도에서라도,
숲 속에서라도 자신의 창조적인 본연의 능력을 사용하면서
또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몸과 마음을 함께 움직이면서
비로소 대자연과 내 몸이, 내 마음이 하나될 수 있는데,
이제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 겁니다.

우리 몸은 자꾸 움직여 줘야 합니다.
내 발로 대지 위를 걸을 수 있어야 하고,
내 몸으로써 대자연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른 것이 대신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손과 발이 있는 이유는
손과 발로써 움직이고 일을 하며
살면서 필요한 모든 생활을 위해 필연적으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손발의 본래 목적을 방치하면서
그 일을 돈이 대신하고, 기계가 대신하도록 하면
그 때부터 우리는 손발 본연의 창의와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퇴화되며, 온갖 병이 만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돈이 없으면
당장에 농사를 지어야 하고,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온몸으로 흙속에 뛰어들어야 하고,
스스로 농사를 짓고 스스로 모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흙과 가까워질 수 있고,
대자연과 바람과 구름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몸으로써, 손발로써 늘 일을 하고 씨앗을 뿌리며 거둠으로써
몸도 건강해 지고 마음 또한 함께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거두어 먹으니 욕심이 줄어들고
마음은 이내 평온을 되찾게 됩니다.

더 많이 거두어 봐야 저장할 곳도 없고 상하기만 할 것이니
많은 것을 쌓아두려고 애쓸 일도 없어집니다.
그 때 그 때 필요한 것을 필요에 의해 만들어 쓸 수 있습니다.
남는 것은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모자란 것은 모자란대로 부족한 듯 아껴 쓸 수도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대자연의 조화에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고 그 흐름과 하나되어 삶으로써
나 또한 대자연의 일원으로 건강하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옛 선지식이나 현자들은
가난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는
가장 소중한 부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해 질 수 있고,
온갖 번뇌며 욕심에서 벗어나 호젓하게 살 수 있습니다.

가난했을 때
우리가 그동안 욕심과 집착 소유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게 되며,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물이 흘러가듯
아주 자연스럽고 고요하게
걸림없으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길 빌어서는 안됩니다.
부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부유하더라도
그 부유함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이 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소유한 것이 많더라도
그 소유의 달콤함에서 벗어나고
소유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가난하게 살며
아끼고 살며
나누고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가난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모두가 입을 모으고
부자를 칭송하는 때이지만,
눈밝은 지혜로운 이라면 지금 이 시대에서도
가난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에 쫒아갈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그 길로 간다고 나도 그리로 따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모든 경제인, 정치가, 위인들...
이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 길로 가더라도
지혜로운 이는 외롭지만 홀로 가는 밝은 길을 택할 것입니다.

가난한 삶이 주는
그 참된 지혜와 복덕을
가슴 깊이 사유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충분히 지혜롭다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할 것이고,
내게 충분히 용기가 있다면
스스로 지혜로운 가난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이 세상 모든 것은
인간이 고안해 낸 상징에 불과하다.
모든 개념작용들은
환영과도 같은 공허한 헛 것에 불과하다.

이 세상은 태초에 텅 비어 있었다.
아무런 개념도, 관념도, 분별도, 상징도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꽉 찬 충만함이 여여(如如)하게 있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시비도, 분별도, 싸움도, 좋고 나쁨도,
행복과 괴로움도, 성공도 실패도 없었다.

나아가 중생과 부처도 없고, 어리석음과 깨달음도 없고,
삶과 죽음도 없고, 인간과 자연의 구분도 없었기에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한 노력이나 수행도 필요 없고,
어리석은 이가 지혜롭게 되기 위한 공부도 필요 없고,
죽지 않기 위해, 늙지 않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으며,
성공을 위해, 부유함을 위해, 승리를 위해, 해탈을 위해 달려갈 필요도 없었다.

모든 것이 완전하고 원만하며 충만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부처였고, 신이였으며, 그저 그것으로 족했다.
그것은 도저히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태초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그러하다.
아니 어느 한 순간 그러한 텅빈 충만이 깨어진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도대체 왜 나에게는 그런 충만하고 청정한 진리의 세계가 없는가.
이 세상은 왜 이토록 어둡고 탁하며 어지러운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가.
이제 그 실마리를 찾아 사유의 뜰을 거닐어 보자.

사람들이 좋아하는 습관은 이름짓기다.
무엇이든 거기에 이름을 짓고, 상을 짓고, 규정 짓기를 좋아한다.
이른바 상징을 만들어 내는 습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에 상을 짓고,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어떤 감정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고,
또 어떤 감정에는 ‘미움’이라는 상징을,
또 어떤 감정에는 ‘슬픔’이니, ‘행복’이니 하는 상징을 붙여 놓았다.
또 어떤 것에는 ‘부유함’을 또 어떤 것에는 ‘가난’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고,
어떤 상태에는 ‘성공’이라고, 또 어떤 상태에는 ‘실패’라는 이름을 짓기도 했으며,
어떤 것에는 ‘옳음’ 또 어떤 것은 ‘그름’이라는 이름을 짓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또 어떤 존재에 대해서는 ‘중생’이라는 이름을,
또 어떤 존재에 대해서는 ‘부처’라는 이름을 붙여놓기도 했다.

이렇듯 사람들은 이름붙이고 상징화하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이런 상징화하는 작용, 이름짓고, 상을 짓는 작용
이것이 모든 문제를 어렵게 만들어 놓는 시발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쉽게 ‘이러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뭉뚱그려 ‘이런 이름’을
‘저러한 상황’들에 대해서는 ‘저런 이름’을 붙이고는 있지만
사실 그러한 이름과 그러한 상황이 정확히 일치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상징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사랑’이라는 말에 그 어떤 정해진 실체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랑이라는 말 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고,
또 특정한 상황과 특정한 사람과 특정한 관계 속에서
수많은 사랑이 행해질 수 있게 마련이다.

아마도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 사랑이 있을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100번의 사랑을 했다면
거기에 또한 100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 많은 사랑의 상황 가운데
어떤 것만을 딱 찝어 ‘사랑’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성공과 실패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연봉 3,000만원을 받으면서 성공했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같은 연봉 속에서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다.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마음이 부유하다면 성공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을지라도 실패한 인생이라 자책할 수도 있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성공이라고,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사랑도 미움도, 성공도 실패도, 옳음도 그름도, 좋음도 나쁨도,
부자도 가난도, 중생도 부처도, 모두가 고정된 실체가 없다.
다만 대충 이러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이름짓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약속이 많은 문제점을 유발시켰다.

이런 수많은 약속, 수많은 상징, 수많은 이름들은
그 어떤 기억과 감정과 찌꺼기들을 양산해 낸다.



이렇게 이름짓고, 상징화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만 어떤 상황을 접할 때 오직 순수하게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 순간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경험들은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경험으로 분별없이,
과거의 기억에 걸러지지 않은 채로,
과거의 상징이며 이름들과 섞이지 않은 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징과 이름을 정해 놓기로 약속한 순간부터
우리의 어떤 경험은 어떤 이름으로 붙여져 기억 속에 저장되기 시작한다.
기억 속에 저장되기 위해서는 이름이 붙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도 파일을 저장하려면 이름이 있어야 하고,
창고에도 물건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그 물건의 이름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상황과 관계 속에서 생겨난
어떤 특정한 느낌이며 감정들을 ‘A'라고 이름을 짓기 시작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접할 수 있는 그와 비슷한 감정들은
그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똑같이 ‘A'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 시작한다.
사실은 그것은 전혀 ‘A'가 아닌데도 똑같이 'A'로 불리는 것이다.
사랑도 똑같은 사랑이 아닌데 그저 이름은 똑같이 사랑인 것 처럼.

이것은 엄청난 문제를 초래한다.
이제부터 우리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하고, 따분해 지기 시작한다.
이름을 붙여 놓고 나면 곧 그것은 기억 속에 저장되게 된다.
특히나 저장될 때는 그 과거의 기억에 빗대어
좋거나 싫다는 둘 중 하나의 감정이 자동으로 섞인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것과 비슷한 또 다른 상황을 만나게 될 때
자동적으로 튀어 나와 새로운 상황을 예전의 기억 속에 담겨진 이름으로 걸러서
판단하고 분별하게 만든다.
전혀 새로운 상황을 예전의 그 상황으로 한정짓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삶은 고리타분하고 따분하며 진부한 삶으로 전락하고 만다.
전혀 새롭고 신선한 매 순간 순간을 늘상 그저 그렇고 새로울 것 없는
따분한 상황으로 몰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랑으로 인해 아픔을 겪은 사람이라면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될 때 과거의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그 과거의 ‘사랑’이 아프고 ‘싫은’ 것이었으므로
새로운 사람과의 새로운 사랑을 새롭게 마주하지 못한 채
과거의 기억으로 걸러서 해석을 하게 된다.
그 사람에게 사랑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과거에 해 보았던 기억과 그 기억에 담긴 느낌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 새롭게 마주한 사랑의 상황에 대해서도 똑같은 해석과 전제를 깔게 된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나타난 상황과 사람에 대한 폭력이며 억압이다.
그것은 얼마나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보지 못한 채 놓치고 있는 것인가.

이처럼 예전의 기억이 좋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좋다’는 관념으로 저장되어졌다가
훗날 새로운 비슷한 상황을 맞을 때 똑같이 ‘좋다’고 해석하게 되고,
‘나쁘다’는 관념으로 저장되어 있던 상황들은
또 다른 상황을 맞을 때 ‘나쁜 상황’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제부터 모든 상황은 과거의 기억으로 걸러지고 해석되게 된다.
과거로 걸러지면서 그것은 좋고 나쁜 두 가지 감정으로 한정되고 만다.
과거의 기억에는 언제나 그 기억이 가졌던 감정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실수며, 오류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오류인지를 모른다.
아니 그것이 옳다고 느끼고, 정당한 해석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내 생각이 옳고, 내 감정이 옳다고 고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사람들은
매 순간 순간 전혀 새롭고 신선한 경험들을
새롭고 경이롭게 체험하고 경험하지 못한 채
과거의 기억과 감정에 얽매여 아집에 사로잡힌 해석을 가하게 된다.
그러면 세상은 새로운 곳이 아니다.
매 순간 순간은 과거의 연장이며, 과거의 속박 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렇게 기억된 수많은 감정들 가운데
과거의 경험에 빗대로 ‘좋았던’ 감정을 ‘행복’이라고 이름 짓고
계속해서 그 좋았던 행복의 감정을 추구하고 집착하게 된다.
물론 반대로 과거에 ‘나빴던’ 감정은 회피하고 멀리하려고 애쓰게 된다.



우리의 욕망이나 집착의 실체가 바로 이런 것이다.
욕망과 집착은 과거의 잔재이며 기억된 감정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이렇게 욕망하고, 욕망한 것을 얻어 내는 방법으로 행복을 쌓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욕망을 채워나가는 방법으로는
언제까지고 욕망을 끝낼 수는 없다.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는 결코 욕망을 끝낼 수 없다.
욕망이 생겨나게 된 전체적인 마음의 작용을 전체적으로 사유하고 깨달아
욕망이라는 것이 허망하게 일어났으며, 허망하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볼 때 욕망은 종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는
‘아상’과 ‘아집’을 놓아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상’ ‘상징’에 얽매여
그러한 상에 집착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욕망의 문제를 끝장낼 수 없다는 것이다.

욕망을 채우겠다거나, 욕망을 없애겠다는 생각 모두 또 다른 욕망일 뿐이다.
그 두 가지 모두 일어나는 방식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욕망을 채우겠다는 것이 중생이라는 상징에 얽매여 있는 것이라면,
욕망을 없애고 초월하겠다는 것은 부처라는 상징에 얽매여 있는 것일 뿐이다.
부처라는 상징도, 중생이라는 상징도
모두 다 하나의 만들어진 상징일 뿐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욕망과 집착과 아상의 전체적인 이해와 사유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피나는 수행으로 욕망을 버리려 해서도 안 되고,
욕망을 채워 나가겠다는 생각도 안 된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것은 욕망을 채우거나 끊는 문제로 다가설 것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욕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전체적인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관찰하되,
그 어떤 시비분별도 옳고 그르다는 판단도 없어야 한다.

다만 매 순간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상황을 좋거나 싫다는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전체적으로 자각하여 바라볼 때
욕망의 본래 성품을 바로 보게 될 수 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났다.
우리의 습관은 순간 과거의 어떤 비슷한 상황과 기억으로 쏜살같이 달려 갈 것이다.
그리고는 번개처럼 이 상황이 좋은 상황인지 나쁜 상황인지를 판단 해 낼 것이다.
그것이 좋은 감정이라고 판단이 되면 그 상황에 집착할 것이고,
나쁜 감정이라고 판단되면 그 상황을 회피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모든 과정을 낱낱이 돌이켜 관조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애써 그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것도 없고,
애쓸 것도 없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면 된다.

바라보다 보면 순간 좋게 보거나 나쁘게 보는 습관이
나를 지배하게 되는 순간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작용을 지켜보게 되면 좋거나 나쁘게 보는 틀이
깨어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온전히 보면
매 순간 새롭고 신선한 삶이 내 앞에 펼쳐진다.
온전히 바라보면
욕망을 없애려고도 채우려고도 하지 않은 채
욕망이라는 이름조차 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랬을 때
내 앞에 펼쳐지는 지금 이 순간이
다시금 태초의 텅 빈 고요로써 되돌아 옴을 느낀다.
본래 아무 일도 없었음을.



[사진 : 강화도 적석사 낙조]


Posted by 법상



[법주사의 금강문과 천왕문]


집착하는 까닭에 탐욕이 생기고,
탐욕이 생기는 까닭에 얽매이게 되며,
얽매이는 까닭에
생로병사와 근심, 슬픔, 괴로움과 같은
갖가지 번뇌가 뒤따르는 것이다.
[열반경]




집착과 탐욕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다.
집착을 놓아버리고, 탐욕을 놓아버리면 괴로움은 저절로 없어진다.

우리 삶의 목적이
무언가를 자꾸 집착하고 탐욕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지혜로운 자의 삶의 목적은
내 안에 바라는 바, 집착하는 바를
어떻게 하면 놓아버리고 비워버려
홀가분하고 고요하게 살아가느냐에 있다.

놓고 비우면 괴로움은 없다.
지금 괴로운 것이 있는가.
그것은 탐욕 하는 것, 집착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을 놓아버리면 괴로움은 사라진다.

극단적으로 몸뚱이 집착심을 놓고,
살고자 하는 욕망과 집착을 놓아버리면
지금 이 순간 죽음이 오더라도 괴로울 것이 없다.

끝에 가서는 삶에 대한 집착까지도 놓아버렸을 때
잘 죽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하물며 살아있으면서 온갖 집착을 가지겠는가.

물질적인 소유에의 집착,
자식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집착,
내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는 생각에 대한 집착,
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면 거리낄 것이 없고,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집착과 탐욕을 놓아버릴 것인가.
온전히 놓고 비울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관찰하는 것이다.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어야
나를 괴롭히는 원인이 집착과 탐욕임을 알 수 있고,
바로 알고 바로 보았을 때
집착과 탐욕은 소멸된다.

내 삶의 모든 문제를 종식시키고 싶은가.
그렇다면 내 삶의 모든 문제를 만들어 낸 원인인
집착과 탐욕을 관하여 놓고 비우라.

탐욕을 채움으로써
완전한 행복과 평화에 이른 사람은 없다.
탐욕을 관하여 놓아버림으로써만
지고의 행복과 평화는 찾아온다.
Posted by 법상



바람이 좋다.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숲을 지나 뺨까지 스치는 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으면 나는 행복을 느낀 다.

매일 매일
공양 때 마다 밥상위로 올라오는
아직은 어린 상추, 케일, 근대, 쑥갓들 하 며,
지난 주 보살님께서 담아주신 물김치들로
요즘은 밥 때가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내 손으로 직접 지은 채소,
비료, 농약, 제초제를 뿌리지 않은 온연한 채소들을 보 고 있으면
자식 키우는 재미가 이런게 아닐까 싶 다.

하기야 자식들이야 키우는 재미는 있다지만
하도 말썽을 피고
다 커서는 부모 속을 얼마나 썩이 나.
이 녀석들은 별 속도 안 썩이면서
하루에 세 번 거스르지 않고 효도를 하니 얼마나 고마운 지...

비료를 안 뿌리니까
이렇게 더디고 실하지 않다면서,
농약을 안 뿌리니까
이렇게 잎이 벌레를 먹었다면서
제초제를 안 뿌리니까
채소에게 갈 양분이 잡초들에게 다 간다면서
이러면 안된다고 고집하시던 마을 분들도
이젠 법당 채소에 탐을 내는 분위 기.

그런데
직접 농사를 지어 보니까
농부들의 마음 백번 이해가 간다.

비료 조금만 뿌리면
열 개 달릴 꺼 스무게 삼십게는 달릴 것이 고,
비실비실 작은 상추잎도 더 커지겠고,
농약 조금만 뿌리면
벌레 안 먹은 보기 좋고 윤기있는 채소를 재배할 테 니...

그 유혹을 그래도 이겨내려면
밝은 지혜, 온전한 앎이 있어야 할 것 같 다.

비료 주어서, 농약 뿌려서 열매가 더 열리면
그만큼 열매의 생명력은 떨어지게 마련이 다.
인간의 손길로 잔뜩 영양제 뿌려주고
외부로부터의, 벌레로부터의 재해를 막아주니
열매는 몸집만 크고 열매가 많아질 지언정
그 내적으로 실하지 못하고 생명력이 떨어지지 않겠 는가.

사람도 고난과 힘겨움을 당해 보고
그 속에서 내면의 힘도 생기는 것이 고,
아프고 고달파 봄으로써
더 튼튼한 건강을 챙기게 되는 것이 며,
외부로부터의 경쟁상대가 있어야
내적으로 더 똘똘뭉치고 실해지지 않는 가.

그러니 그런 생명력 없는 음식 아무리 많이 먹어도
입에는 달고 보기에는 좋을지언정
우리 몸을 그만큼 약화시키고
생명력을 감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 같 다.

요즘이야
채식도 온통 사람들 손으로 생명력을 떨어뜨린
나약하고 겉만 뻔지르르한 채식이고,
육식도 사람들 먹기 위해 억지로 먹이고 길러서
살만 잔뜩 찌워 잡아 죽인 육식이니
뭐 하나 마음 놓고 먹을 만한 것이 없 다.

그것이 다 사람들 욕심에서 나온 어리석은 결과 다.
사람들은 사실 최소한의 보조역할만 하면
채소도 다 우리 먹을 만큼 자라 줄 것이 고,
동물들이야 우리 사람들의 보조도 필요없이
잘 자라게 되어 있을 것이다.

대자연 우주는 그렇게 본래부터
다 갖추고 있는 온전한 하나의 생명체 다.
사람들 욕심만 갖다 붙이지 않으면
그들은 절대 부족할 것 없이 충분히 사람도 먹여 살리고
온 우주 법계가 서로 서로를 먹여 살리도록 되어 있 다.
그것이 법계의 온전한 본래 모습.

대자연 우주 법계 보다
사람이 더 잘난줄 아는 것이 병통이 다.
사람이 더 잘났다는 생각이 있으니까
대자연의 이치는 덮어두고 사람의 생각대로 행한 다.
그러나 절실히 필요한 자각 하나.
사람의 지식이 더 올바른 것이 아니라
대자연 우주 법계의 지혜가 더 근원적이라는 사 실.

그런데 농업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대량 생산, 대량 축적, 대량 소비라는 허울만 좋 은,
사실은 엄청난 어리석음과 욕심을 동반한
농업혁명이 아닌 농업폐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알지 못한 다.

더 많이, 더 큰 것을 더 빨리 얻으려는 욕심으로
대자연 우주를 마구 훼손하여 그 속에서
질소, 인산, 칼리라는 비료의 3요소를 뽑아내어
비료를 만들어 놓았고,

채소, 농작물과 공존하면서
그들의 생명력을 강화시켜주고 상생하고 있는 소중한 해 충들을
아주 몰살시켜 채소만 멀쩡하게 잘 자랄 수 있게
농약들을 개발시켰으며,

땅심을 좋게 하고, 황폐화되고 산성화된 흙을 비옥하게 바꾸어 주는
소중한 야생의 풀들을 잡초라고 몰아붙여
청산가리 1만배가 넘는 독극물인 제초재를 개발시켜 놓고 말았다.

이것이 다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법계 전체를 보지 못하고
당장의 욕심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탐심과 치심에서 나온 것이다.

본래 좋고 나쁨이 없기 때문에,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이 있어야 하 고,
나쁜 것이 있음으로 인해 좋게 될 수 있다는 공존의 원 리
연기의 원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이 그 바탕이 된 것이 다.

산업혁명, 농업혁명이 사실은
그 근본이 어리석음인 줄 누가 알고나 있겠는 가.

해충이 있어야 익충도 있는 법이고,
잡초가 있어야 채소도 있는 법이다.
좋고 나쁨을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좋은 것만을 선택하려고 하면
그것은 벌써 분별심, 어리석음의 결과인 것입니 다.

좋고 나쁨이 나뉘지 않은
법계 전체의 여법한 모습을 보지 않는데서 오는
어리석음인 것이다.

이 어마어마하게 인류가 병든 결과는
결국 인간의 욕심과 어리석음에 기인하는 것이 다.

인간이 욕심으로 축적하려는 욕심 때문에
더 많이 더 크게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는 것이 고,
결국 대량생산은 전체 농업을 파괴하고 말았 다.

그렇게 세상이 혼탁해 지니
자연스럽게 육신도 혼탁해 지는 것이고,
따라서 마음도 함께 혼탁해져 가는 것이 다.

이렇게 세상이 다 오염되어 가는
오탁악세의 세상...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은 있다.
우리 마음 안에...

마음 하나 바르게 쓸 수 있다면
생명력 떨어진 채소도
중생의 육신을 뜯어먹는 육식도
우리 마음으로 다 정화시킬 수 있 고,
그런 음식들의 폐해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것이 다.

기쁜 마음으로,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우주 법계의 은혜로움에 보은하는 마음으로
기분 좋고, 맛있게 먹는 것.

기왕에 먹을 거라면
몸에 좋지 않은 것이라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먹는 것.

그것이 보다 근원적인 마음씀이 될 수 있 다.

될 수 있다면
육식 보다는 채식을 해야 하겠고,
술도 될 수 있다면 자재를 하고,
담배도 될 수 있다면 끊어야 하고,
오신채도 될 수 있다면 적게 먹으면 좋 고,
인스턴트 식품, 탄산음료 등도 줄여 나가는 것이 좋은 일이 지만,

꼭 먹어야 한다면
꼭 먹어야 할 때가 생긴다면
이 우주 법계에 감사하는 마음으 로,
그 음식도 나와 둘이 아닌 마음으로
고기들 천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하겠 다.

Posted by 법상




[사진 : 범어사]

고통의 원인은 탐욕이다.
세상의 즐거움이란 결국 고통 아닌 것이 없다.
탐욕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것,
모든 고통과 근심은 바로 탐욕에서 생기는 것이다.

[화엄경]

온갖 괴로움의 원인은 바로 탐욕이다.
중생은 생각이 어리석어 탐욕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탐욕이 바로 괴로움인 줄 알기 때문에 수시로 끊어버린다.
탐욕을 욕망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소금물을 마셔 더욱 갈증이 심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탐욕을 없앤다면 괴로움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성실론]



탐욕은 괴로움이다.
탐욕을 채우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 또한
결국 고통이 되고 만다.
탐욕을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탐욕은 커진다.
만족은 잠시일 뿐 이윽고 또 다른 탐욕이 생겨난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죽을 때 까지 오직 탐욕을 채우기에만 여념이 없지 않은가.
많은 이들이
탐욕을 채웠을 때 오는 잠시의 행복이
참된 행복인 줄 착각하고 산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온갖 악행과 기만을 서슴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탐욕을 채워나간다.

나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상대방을 짓누르고 밟고 일어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아니 당연한 정도가 아니라
능력 있는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슬프다.
이 세상도 슬프고, 탐욕에 물든 사람들도 슬프다.
탐욕이란 사람을 눈멀게 하고,
온전한 만족에서 멀어지게 하며,
영적인 성숙과 이별하게 만든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탐욕이다.
탐욕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
그렇다고 탐욕을 끊기 위해 탐욕을 미워하고 증오할 필요는 없다.

탐욕에 대한 그 어떤 분별도 버려야 한다.
탐욕 그 자체는 좋거나 나쁜 어떤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중립적이고 비실체적인 것이다.

탐욕을 없애려고 애쓰지 말고,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도 말고,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머물렀다가
어떤 일들을 만들어내고 또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그냥 알아차리고 지켜보기만 하라.

그랬을 때 전체적인 탐욕에 대한 지혜가 생기고
지혜의 빛은 곧 탐욕을 사랑으로 불태운다.
Posted by 법상




[사진 : 범어사]

욕심은 더럽기가 똥덩이 같고,
밑 빠진 그릇 같으며,
무섭기가 독사와 같고 원수와 같아 위험하며
햇볕에 녹는 눈처럼 허망하기 그지없다.

욕심은 예리한 칼날 위에 묻어있는 꿀과 같고,
화려한 화장실에 칠해진 단청과 같으며,
화려한 병에 담긴 추한 물건 같으며,
물거품처럼 허망하여 견고하지 못하다.

[증일아함경]


욕심같이 더럽고 추하며 허망하고 위험한 것은 없다.
그러나 욕심같이 겉포장이 잘 되어있는 것도 없다.

욕심은 예리한 칼날 위에 묻어있는 꿀과 같아
잠시 달콤할지 모르지만 혀를 베는 결과를 얻고,
화장실에 칠해진 단청과 같아
겉만 화려하나 속은 더럽고 추하여 냄새가 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욕심의 구린 냄새를 알지 못하고
화려하게 포장된 겉모습에만 빠져든다.
그것이 곧 내 혀를 베고, 내 몸을 베며,
내 존재의 뿌리를 잘라 내리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욕심이 지금 당장에 아무리 큰 기쁨을 가져다 줄 지라도
그 끝은 추하며 고통스럽다.
당장의 기쁨을 위해 곧 다가올 삶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욕심의 실체를 여실히 들여다보라.
욕심에 얽매여 있는 나의 모습을
한 발자국 뒤에서 전체적으로 지켜보라.
과연 나는 어떤 욕심에 빠져있는가.

똥덩이 같고, 밑 빠진 그릇 같으며,
독사와 같고 원수와 같으며,
물거품처럼 허망하여 견고하지 못한
욕심의 실체를 확연히 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욕심의 덧에 걸리고 만다.

그렇다고 욕심을 없애 버리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욕망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욕망을 다루는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다.

욕망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전 과정을 깨어있는 관찰로써 온전히 이해해야 할 어떤 것이다.
욕망을 전체적으로 이해했을 때
그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혀를 베는 칼날’의 의미를 바로 볼 수 있다.

나에게는 어떤 욕심이 일어나고
머물다가
사라지고 있는가.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