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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24 마음을 활짝 여는 명상
  2. 2009.12.16 고집을 버리고 마음을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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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쉽게 오픈마인드라는 말을 듣곤 한다.
마음을 닫지 말고 활짝 열라고 한다.
그러면, 마음을 닫지 말고 활짝 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음을 여는 것이 마음공부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살펴보자.

문을 닫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것도 문 안으로 들어 올 수가 없다.
다만 문 안의 주인이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들만 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있으면
내가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깥의, 우주의 모든 것들이
자유로이 내 존재의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게 된다.
그 모든 무한한 지혜와 사랑과 힘들이
자유로이 오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즉, 마음을 닫고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만,
내게 이득되는 것만,
분별하고 판단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마음을 활짝 연다는 것은
그 어떤 분별도 일으키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애착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을 닫고 있을 때는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중심이 되어,
문을 열 것인지 닫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면 열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닫으며,
내 입맛에 맞는 것, 내 견해와 일치하는 것은 열고
내 입맛에 안 맞거나, 내 생각과 다른 것은 닫는 것이다.

즉, 문을 닫고 있을 때는
아상에 갇히게 된다.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문을 열고 있을 때
아상은 타파되고
내가 아닌 우주법계의 질서와 차원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된다.

즉 문을 닫는 것은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게 하는 것이고,
문을 열 때
비로소 온전한 ‘내맡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을 열고
이 우주법계의 진실에 삶을 내맡길 때,
나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무위로써 살게 된다.

그 때 모든 지혜와 힘이
무한한 자비로써 나를 돕기 시작한다.
우주법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속도로 깨어나게 됨을 의미한다.
아니 완전히 열었을 때
비로소 그 자리가 바로 삶의 완전성,
원만구족과 온전함이 깃드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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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본래 완전하고,
모든 것이 구족된 존재이고,
완전히 깨달아 있는 존재인데,
‘나’라는 아상과 이기가
문을 닫고 막아 섬으로써
그 완전성과 원만구족과 깨어남과 자비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존재 근원의 깊은 차원의 질서에 내맡기지 못하고,
마음을 열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오다,
문득 깨달아 문을 활짝 열게 되면
우주적 깨달음과 완전성이
허물어진 벽과 툭 트인 문을 통해
고스란히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깨어남은 더뎌진다.
지혜도 자비도 내게 들어오지 못한다.

오직 있는 건,
아상 뿐!

아상만이 나를 집어 삼키고,
아상이 시키는 대로,
이기와 에고가 시키는 대로의 삶만을
반복적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삶은 전혀 새롭지 않다.
언제나 비슷한 패턴의 삶이 반복된다.
아상은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싫어하고,
과거에 안주하며, 안정만을 쫓는다.

아상의 기준에서
문을 선택적으로 분별하여 열고 닫기 때문에,
언제나 비슷한 것만을 열어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사람은
대중 앞에 나서는 결정은 죽어도 못 한다.
병이 나서 죽을 지경이 될지라도
병원과 현대의학만을 신봉하는 사람은
대체의학이나 명상과 기도를 통한 치유는
다분히 기복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이라 매도하며
전혀 마음을 열지 않는다.

어느 한 종교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거나,
어느 한 집단, 사상, 이념, 가치만이 옳다고 믿는 이는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과 다른 사상, 종교, 이념, 가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닫은 이에게는
계속적으로 똑같은 진부한 일상만이 반복될 뿐이다.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을 열지는 못하는 것이다.
당장에 마음만 열면
내가 원하는 그 모든 것이
언제든 들어 올 준비를 하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마음을 열고자 한다면,
먼저 내 마음 속에서 반복되는
좋고 싫다는, 옳고 그르다는, 맞고 틀리다는
분별과 차별심을 잘 관찰하고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두 가지 극단적인 분별이 있으면
좋고 옳고 맞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문을 열게 되고,
싫고 틀리고 그른 것은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는
좋은 것도 유효하고 싫은 것도 유효하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이란
내 생각의 틀일 뿐 실체가 아니다.
역경 속에서도 배울 수 있고,
순경 속에서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경과 순경을,
행복과 불행을,
맞고 틀리는 모든 것을,
그 양 쪽 모두를 향해
완전히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을 그저 우유부단하게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모든 게 다 맞다고 여기면서,
바보가 되라는 말로 여겨선 안 된다.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좋고 나쁜 선호 조차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좋아해도 너무 집착하지 않고,
싫어해도 너무 증오하지 않으면서
그 두 가지 모두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의 경계 모두를 받아들여
그 양 변을 통해 깨달아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닫지 말라는 것이다.
역경을 통해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순경계에서만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은 순역의 좋고 나쁜 모든 경계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 양 쪽 모두에서 영적인 진보, 깨달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우주법계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찬란하고도 눈부신 삶이라는 축제를 온전히 즐기라.
우주법계는 언제나 완벽하고도 충만한 지혜와 자비로써
당신의 삶을 조화롭게 균형 잡아 줄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음으로써,
선택적으로 좋은 것들만 받아들임으로써,
우주법계가 내게 무한히 공급해주고 있는
진리의 법비를 뿌리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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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신부처님께서는, 신성의 하느님과 성령은
언제나 무한한 지혜와 자비로써
우리를 완전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나에게 딱 걸맞는
완벽한 인생의 시나리오와
삶의 교과과정을 언제나 준비해 두고 있다.

그것도 저마도 모든 사람들에게,
맞춤식으로 정확히 필요한 일들을 균형 있게 내보내 줌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배워야 하고 깨달아야 할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이 다 똑같지 않고 다 다른 것이고,
또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생의 어느 때에는 잘 풀리며 행복해 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안 풀리며 괴로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균형 있는 삶과 인생의 교육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곧 깨달음의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귀의(歸依)라는 구도의 과정을 걷고 있는 것이다.
본래 부처였고, 본래 진리였으며, 본래 청정한 수행자인
바로 그 본향인 자성의 귀의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귀의하는 것,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지향해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이요, 인생의 목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귀의의 숭고한 여정은
언제나 부처님의 가피, 신의 가호,
우주법계의 자비롭고도 완벽한 도움이
매 순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온전한 도움이 바로 인생이라는 수업이다.
저마다에게 딱 걸맞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나 자신만을 위한 맞춤식 인생수업이
바로 나의 인생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인생의 수업을 온전히 이수해야지,
내가 선택적으로 원하는 수업만을 들음으로써,
좋아하는 수업만 선별해서 들음으로써,
균형과 조화로운 영적 진보와
성스러운 귀의로 가는 구도의 길을
에둘러 멀고 먼 길로 돌아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완전히 열고 받아들이면
수업의 진도는 급격히 빨라지고,
깨달음에로의 당도는 멀지 않지만,
마음을 닫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
지지부진하게 깨어남의 속도는 느려지는 것이다.

그 수업을 완전히 이수해야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을 받아들이고 수용했을 때
괴로움도, 병도, 아픔도, 스트레스도, 역경도
빨리 소멸된다고 하는 것이다.

거부하고 두려워하며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그 거부하던 것은 계속되고 지속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부하면 거부하는 것이 계속된다.
결국 포기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

그러니 어떤가.
삶을 거부하지 말고,
마음을 활짝 열고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놀이하듯 즐기며 살아내라.

설사 그 인생의 길에
굴곡진 역경이 놓여질지라도
‘괴로운 삶’이라고 해석하고 판단함으로써,
그리고 그 괴로운 삶을 거부함으로써,
그 인생의 수업을 이수 못한 채
다음 생에까지 나머지 공부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살하는 사람이 바로 나머지공부의 대표적 사례다.
주어진 역경을 못 견디고 거부하고 저항한 나머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면,
그는 곧장 그 수업을 끝마치기 위해
그 역경을 다시 선택해서 삶을 부여받는 것이다.
이 생에 거부하고 저항하던 에너지를 듬뿍 양분으로 받아
다음 생에서는 지금보다 더 힘겨운 수업을 이수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주어진 삶을 받아들임으로써,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삶을
마음껏 누리고 느끼며
놀이하듯 가지고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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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문경 대승사, 대승사는 요즘의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는 다른 유명절과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들어가는 마을에서부터 입구 어디에도 현대식 건물을 찾기 힘들고, 다른 절 같이 식당이며 온갖 것들이 있지 않은, 그저 완전히 시골 마을 시골 절입니다. 사불산 해발 600미터높이 산마루에 자리한 대승사는 근래 대승선원에 치열하게 정진하는 선승들이 많이 찾는 참선도량이기도 합니다. 부속 암자로 나옹스님의 출가 암자이자 성철스님께서 정진했던 묘적암과 비구니 선원으로 아기자기한 도량 윤필암 그리고 보현암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울타리 속에 갖혀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전부인 줄 그렇게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그 안에 있는 것에
익숙해져 갈 때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나' '내 것' '내 생각' 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연따라 잠시 왔다 스쳐 가는 것을
애써 잡아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울타리를 쳐서
'나'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빠져버립니다.
내가 스스로 만든 '나'에 집착합니다.

부처님은 외치고 계십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
그건 너가 아니야
그 울타리만 걷어차고 나오면
무한한 세상이 다 네 것이야'

지금껏 우리는 이렇게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내 것'을 많이도 늘려놓았습니다.
'내 것'을 늘리는 일,
그것이 우리네 사는 일상입니다.
우리네 한평생 살림살이입니다.

누구나 '내 생각'이 있게 마련입니다.
주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관이라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철저한 객관들의 모임에 불과합니다.

순수한 '내 생각'은
쉽게 찾아낼 수 없습니다.
모두가 '길들여진 내 생각' 이었음을 봅니다.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내 생각이었음을...
지독한 고정관념의 연장이었음을...

사회가 만들어낸 수많은 고정된 틀
그 수많은 고정관념들을
뭉뚱그려 '내 생각'으로 만들어 놓고
주관이라 그럽니다.
내 생각, 내 가치관이라 그럽니다.

선과 악에 대한
자신의 판단 또한 그렇습니다.
여기에서는 '선'이었던 것들이
다른 쪽으로 가면 '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선과 악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보고 선이라 하고 악이라 해야 합니까.
극단적인 비유로 살생(殺生)은 모두 '악' 인가요?
상황에 따라 그 또한 '선'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일들은
고정된 바 없이 돌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딱하게도
지독하게 고정되어 돌아갑니다.

스스로 혹은 사회에서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고정되게 틀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 기준에 빠져 우리는 울고 웃고 그럽니다.
그 얄팍한 틀을 깨고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것이 인연따라, 상황따라
선도 되고 악도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선악의 비유를 들었지만
대부분의 모든 관념의 틀이
이렇듯 고정지은 바 대로 어처구니 없게 돌아갑니다.

상황 따라 바뀌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고정관념은 상황이 바뀌어도
한 가지 관념만을 고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도
공(空)에 너무 치우친 이에게는 유(有)를 일깨우셨고,
유에 치우친 이에게는 공의 이치로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렇게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건만
우리의 생각들은 너무도 편협하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안고 살아가는
괴로움의 대부분은
바로 이런 고정된 관념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생각을 고집하지만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린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고집을 버리면 세상이 고요합니다.
주위가 평온해 집니다.

고정관념의 틀을 깨야 세상이 달라집니다.
알에서 나온 병아리처럼...
우물에서 뛰쳐나온 개구리처럼...
그렇게 세상을 보는 기준이 확연히 달라집니다.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을 버리고
뻥 뚫려 활짝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이미 내 앞에 활짝 열려 있음을 볼 것입니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상대방이 '꼭 이렇게 해라' 하고 이야기 할 때
고집이 많고, 고정관념이 큰 사람일수록
내 생각에 대한 미련 때문에
쉽게 상대의 의견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내가 옳다면 상대도 옳을 수 있음을
가슴 깊이 명심하셔야 합니다.
'아니야 그래도 이 것만은 내가 옳아!' 라고 고집 할 때
이미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절대적으로 100% 옳은 것은 없는 법입니다.
상황따라, 인연따라 옳은 것일 뿐입니다.

어차피 바꾸지 못할 바에는
빨리 내 고집을 포기해 버려야 합니다.
빨리 방하착 해야 합니다.
턱! 하고 놓아버려야 합니다.
내 생각의 틀을 깨고 보면
상대방의 생각에 대한 이해가 달라 질 것입니다.

우유부단하게
무조건 상대방에게
이끌리기만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미리 고정지어둔 고정관념을
깨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한 마음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마음속의 분별심들 때문에
정견(正見)의 잣대가 흔들려선 안됩니다.

텅 빈 마음으로
상대의 의견을 내 의견처럼
몽땅 받아들여 볼 수 있는 열린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상대의 의견과 내 의견의 대립이 아니라
그저 평등한 두 가지 의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내 고집을 버리고
상대를 향해 마음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법은 없습니다.
이것도 법이요, 저것도 법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보면
세상엔 참 옳은 의견이 많습니다.

이건 이래서 옳고
저건 저래서 옳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지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는 어두운 마음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