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해 -9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이 장에서부터는, 서두에서 다루었던 오온(五蘊)을 비롯하여, 십이처, 십팔계, 십이연기, 사성제 등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교설에 대해, 대승의 공 사상이라는 큰 진리 속에서 모두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로 알아야 할 것은,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교설을 부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르침의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전체가 하나로 통일, 통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대와 상황이 바뀜에 따라 그 상황에 맞도록 방편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스승이 제자를 지도할 때, 제자의 근기(根器)에 따라, 성품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비난을 들었을 때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자에게는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잘 하고 있는 점을 칭찬해 줌으로써 더욱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지도할 수 있을 것이며, 본인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줌으로써 올바르게 고쳐 나아갈 수 있는 제자라면 마땅히 잘못된 점을 하나 하나 지적해 주어 스스로 고쳐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방법이 긍정을 통한 교육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부정을 통한 지도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진리를 나타내는 방법도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진리의 가르침에 대해서 하나 하나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어 진리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긍정적인 방법이 있고, 다른 방법은 공이라는 부정을 통해서 진리가 스스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후자의 방법이 대승의 공 사상인 것입니다. 결국 추구하고자 하는 진리에로의 귀결은 한결같은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서두에서 핵심 사상을 나타낼 때, 이미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충분한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두에 나오는,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이란, 공의 세계에서 오온[색수상행식]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부정의 논리로 나타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다음 장에서부터 십이처와 십팔계의 부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십이처란, 안근(眼根)[눈], 이근(耳根)[귀], 비근(鼻根)[코], 설근(舌根)[혀], 신근(身根)[몸], 의근(意根)[뜻, 마음] 의 여섯 감각기관[육근(六根)]과, 그것에 상응하는 여섯 개의 대상[육경(六境)], 즉 색경(色境)[빛깔과 모양], 성경(聲境)[소리], 향경(香境)[냄새], 미경(味境)[맛], 촉경(觸境)[촉감], 법경(法境)[생각, 마음의 대상]을 합친 것을 말합니다.

이 십이처설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현상에 대한 인식의 구조와 한계를 제시한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관점입니다. 여기에서 근(根)이라 하면, 기관 이외에 그 기능까지를 포함합니다. 예를 들면, 안근은 눈과 눈의 보는 기능까지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눈[안근]으로 빛깔과 모양[색경]을 볼 수 있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느끼며,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마음으로 많은 생각을 합니다. 이는 모든 정신 작용[식(識)]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들 주관계의 감각기관과, 객관계의 대상이 서로 만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십이처의 분류법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 분류법으로, 인간의 인식 능력을 대상으로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나’라고 하는 주관적 존재와, 내 외부에 나타나는 객관세계를 합쳐 일체(一切)라고 하는 것이며, 이것을 육근(六根), 육진(六塵)이라고도 합니다. 육근이란, 눈, 귀, 코, 혀, 몸, 뜻의 주관적 인식기관은 외부의 객관 대상을 인식하는 의지처가 되므로, 그 근본이 된다고 하여, ‘근(根)’이라 하였고, 빛과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 등의 객관 대상(六境)들은 우리의 깨끗한 마음을 더럽히고 미혹되게 하기에, ‘진(塵)’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이처’의 교설 또한 ‘오온무아’에서처럼, 근본불교 ‘무아’의 교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에 항상 변화하며,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 또한 계속해서 들리지는 않습니다. 냄새도 마찬가지로 인과 연이 화합하여 잠시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며, 맛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몸의 감촉 또한 항상하지 않으며, 우리의 생각들도 어디에선가 잠시 왔다가 잠시 후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듯 여섯 개의 대상, 육경은 항상하지 않으며, 우리 몸의 주관적 인식기관인 육근 자체도 우리가 죽으면 또한 사라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렇듯, 육근과 육경은 항상하지 않는 것이며, 항상하지 않아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의 모임인 일체, 즉 십이처도 또한 항상하지 않고, 그러므로 딱히 잡아, ‘나다’ 라고 할만한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근본불교 교설인 십이처는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일체인 십이처는 항상하지도 않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인과 연이 모이면 존재를 형성하고, 인과 연이 다하면 존재를 파괴하도록 만드는 연기의 법칙에 지배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스스로의 자성(自性)이 없으며, 차별의 세계를 초월하여 무분별(無分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라는 말로써 육근과 육경[육진(六塵)]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근과 육경, 즉 십이처를 부정함으로써 공(空)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는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십팔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팔계(十八界)란 인간의 주관적 감각기관의 요소인 안계, 이계, 비계, 설계, 신계, 의계와 객관적 대상의 요소인 색계, 성계, 향계, 미계, 촉계, 법계, 그리고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서로 만날 때 나타나는 인식작용인 안식계, 이식계, 비식계, 설식계, 신식계, 의식계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란 십팔계의 첫 번째 안계에서부터 십팔계의 마지막 요소인 의식계까지의 열 여덟 가지 모든 요소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십팔계는, 앞에서 말한 십이처에 육식(六識)을 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식 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관[육근]과, 인식의 대상[육경]과, 인식작용[육식]의 3가지 요소가 필요한 것입니다. 십이처와 십팔계가 다른 근본적인 차이는, 마음의 영역에 여섯 가지 인식을 하나로 합하여 하나의 의식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눈, 귀, 코, 혀, 몸, 뜻의 각각에 독자적인 인식작용을 내세우고 있는가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자가 십이처의 의처(意處)이며, 후자가 십팔계의 여섯 가지 별개의 인식인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인 것입니다.

 

이처럼, 십팔계는 십이처에서 설명하였던 육근과 육경에 육식을 더하면 성립이 됩니다. 육근과 육경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육식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언급이 된다면 십팔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육식을 설명하기 전에 잠시 부연한다면, 이러한 십팔계의 여섯 가지 식의 존재에 대한 연구와 함께, 마음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거듭한 부파불교의 법에 대한 연구는 이후에 그 부족한 점을 보충하여 마음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낳았으니, 이것이 바로 유식(唯識) 사상인 것입니다. 여기서는 육식의 이해를 위해 유식 사상에 의거하여 육식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육식의 첫째는, 안근(眼根)으로 색경(色境)을 바라볼 때 나오는 마음인 안식(眼識)입니다. 불교 전문 용어를 사용하니 어려운 느낌이 들지만, 사실은 쉬운 말입니다. 눈[안근]으로 모양이나 빛깔[색]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좋고 싫고, 그저 그렇다고 분별하는 마음이 바로 안식입니다. 안식으로는 사물의 내면에 있는 오묘한 마음까지는 분별하지 못하며, 오직 현재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만을 인식하는 기초적인 분별작용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안식에서는 꽃을 보면 직감적으로 좋아하고, 대변을 보면 흔연해 하지 않는 기초적인 인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이외에 이것이 꽃인가, 대변인가, 나아가 꽃이면 무슨 꽃인가, 그 꽃은 언제 피며, 어느 나라의 어느 지방에서 잘 자라는지 정도까지 유추해서 의식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기능을 위해서는 제6의식의 작용이 함께 해야 합니다. 이때 제6의식은 과거의 경험과 기억 등을 생각해 내고, 다른 것들과 비교 판단하며, 때로는 잘못 인식하기도 하는 등의 구체적인 인식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근(耳根)으로 성경(聲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인 이식(耳識)입니다. 이것은, 귀[이근]로 소리[성경]를 들을 때 느낄 수 있는, 좋고 싫은 마음의 분별[이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식의 대상은 오직 소리입니다. 소리를 유식의 용어로 하면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비근(鼻根)으로 향경(香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인 비식(鼻識)입니다. 즉,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생기는 ‘좋은 냄새’, ‘나쁜 냄새’ 하는 즉각적인 마음의 분별입니다. 당연히 비근의 대상은 냄새입니다. 향이라고 하나, 향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우리가 맡을 수 있는 모든 냄새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넷째는, 설근(舌根)으로 미경(味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인 설식(舌識)입니다. 이것은 혀로 음식 등을 먹을 때 느끼는, 맛있고, 맛없고 등의 마음 작용입니다. 여기에는 다만 맛이 있고 없는 것 뿐 아니라 뜨겁고 찬 것, 달고 짠 맛, 맵고, 싱겁고, 신 맛 등, 혀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합니다.

 

다섯째는, 신근(身根)으로 촉경(觸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의 작용인 신식(身識)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으로 물질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입니다. 신근의 대상은 촉경이라고 하여 물질계를 말하는데, 물질계란 단순히 딱딱한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전체를 그 대상으로 합니다. 근본불교 교설의 오온에서 물질인 색(色)을 설명할 때 지, 수, 화, 풍으로 설명한 것을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즉,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물질인 지(地)의 성질뿐만 아니라, 축축하거나 건조한 것 등의 수(水)의 성질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신근의 대상이며, 무덥거나 춥고, 뜨겁거나 찬 것 등 화(火)의 성질, 그리고 호흡이나 불어오는 바람 등도 우리의 몸인 신근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것입니다. 이처럼 촉경의 범위는 대단히 넓습니다.

 

다시한번 정리하면, 이상 다섯 가지의 인식작용은 모두 선과 악, 좋고 나쁜 등의 직접적으로 드러난 부분에 대한 식별만이 가능합니다. 반면에 유식에서 말하는 제6의식은 십팔계의 의식으로서, 의근(意根)에 의지하여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 모두를 포함한 일체 유형무형의 모든 대상, 즉 법경(法境)을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이 6의식은 앞에서 말한 5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선 전오식은 의지처가 눈, 귀, 코, 혀, 몸 등 모두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6의식은 순수한 정신적인 기관이 그 의지처입니다. 대상 또한 객관적인 물질계뿐만 아니라 정신적, 물질적인 모든 경계를 그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여섯 가지 의식, 즉 6식이 공(空)인 연유에 대해서 살펴보는 일이 남았습니다. 앞에서 꾸준히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주관적인 감각기능은 반드시 객관적인 대상이 있어야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귀는 있지만 소리가 없다거나, 코는 있는데 대상인 냄새가 없어도 안되며, 반대로 객관계의 대상은 있지만 우리 주관계의 기관이 없다면 인식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즉, 맹인이라면, 눈은 있지만 정확히 말해 안근(眼根)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안근이라는 것은 그 기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까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귀머거리나 벙어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육근과 육경은 항상 함께 작용하는 것이며, 이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해야만 육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앞에서, 육근과 육경은 항상하지 않아[무상], 고정된 실체가 없고[무아], 연기하는 존재로서, 무자성이며, 공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나아가 이 두 가지 육근과 육경이 합쳐졌을 때 일어나는 인식작용인 육식도 공하다는 것을 살펴보면, 십팔계 또한 공임이 밝혀질 것은 물론입니다.

 

왜 육식은 공(空)한 것일까? 육근과 육경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온갖 마음 작용의 뿌리는 과연 무엇일까? 육식은 육근이라는 인간의 기관에 숨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육경이라는 대상 속에 숨어 있는 것일까? 육식은 육근에도, 육경에도 숨어 있는 작용이 아닙니다. 다만 ‘접촉’, ‘결합’, ‘연관’, ‘인연’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육근에도 없고, 육경에도 없는 것이 어떻게 연관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한다면,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는가? 절대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은 있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공기 중에 불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무와 나무를 서로 연관지어 접촉을 가하면 그 인연 관계 속에서 불이 일어납니다. 나무와 나무를 서로 비벼주면 불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불은 있지 않으며, 다만 연관, 인연 속에서 불이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식도 이와 같습니다. 육근에도 그렇다고 육경에도 육식은 없지만, 서로 ‘연관’되고 ‘접촉’ 됨으로 인해 육식이 연하여 일어나는(緣起)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가지고 딱히, ‘육식이다’ 라고 고정되게 말할 수 없는 것[무아]입니다. 또한, 나무를 비벼 불을 냈지만, 그 불도 인연이 다하면 꺼지게 마련이듯, 육식 또한 인연이 바뀌게 되면 사라지는 것[무상]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어떤 고정된 자아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의식도 항상하여 고정된 것이 아니며, 주위의 상황, 경계에 의해, 즉 인과 연에 의해 항상 바뀌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식에도 스스로의 자성이 없기에, 무아, 무자성이며, 항상하지 않기에 무상이고, 인과 연에 의해서 생멸을 반복하므로 연기이며, 이러한 사실을 통틀어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결론짓고 있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도일체고액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란 일체의 고액[고통과 액난, 괴로움]을 건너, 해탈, 열반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란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봄으로써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체의 고액이 과연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세 가지 괴로움, 그리고 사고(四苦)와 팔고(八苦)를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괴롭다는 말은, 그 성격상 고고(苦苦)・행고(行苦)・괴고(壞苦)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고고란 괴로움의 괴로움이란 의미로서, 인간의 감각적인 괴로움을 의미합니다. 즉, 육체적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맞아서 아프다던가, 병으로 아프다던가, 배고파서 겪는 괴로움, 그리고 추워서 느끼는 괴로움 등입니다.

 둘째로 행고란 행의 괴로움이란 의미로서, 변하기 때문에 겪는 괴로움입니다. 다시 말해, 삼법인 중 제행무상의 진리 때문에 오는 괴로움으로, 모든 것이 항상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의미합니다. 이 괴로움이 바로 불교의 고성제에서 말하는 괴로움과 가장 가까운 괴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며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괴로움이며, 늙고 병들어 예전처럼 한 십 년 정도 젊어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괴로움 등이 모두 행고에 속합니다. 또한 사랑하던 이와의 사랑이 늘 계속되길 바라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랑하는 감정이 사라짐에서 오는 괴로움, 돈이 항상 할 것 같고, 명예나 권력이며, 지위, 계급, 사랑이 항상 할 것 같지만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항상할 것 같지만 언젠가는 변화하게 마련이라는 데서 오는 괴로움 등이 모두 행고입니다. 우리가 흔히 괴로움이라고 말하는 생, 노, 병, 사의 인생 사고(四苦)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괴고(壞苦)는 부서짐의 괴로움이라는 의미로서, 항상하기를 바라지만 일체의 법은 항상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부서지게 되는, 인간으로 말하면 죽음의 괴로움입니다. 자연을 보면 성(成), 주(住), 괴(壞), 공(空)하여 반드시 변하여 부서지게 되고, 인간을 보더라도 생, 노, 병, 사하여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뿐 아니라, 현재에는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없어졌을 때 느끼는 괴로움도 괴고에 속하는데, 이는 우리가 재물, 지위, 혹은 명예 등을 상실했을 때 느끼는 괴로움입니다. 자세히 말해, 돈이나 나의 소유물 등이 인과 연이 다해 나에게서 멀어질 때 느끼는 괴로움도 바로 이 괴고에 속하는 것입니다.이러한 괴로움 등은 괴고이면서 동시에 행고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경전에서는 괴로움의 성격상 세 가지로 나누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불교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고가 바로 사고와 팔고의 교설입니다. 사고(四苦)란 생노병사로 생(生)은 태어나는 괴로움이며, 노(老)는 늙는 괴로움 병(病)은 병드는 괴로움, 사(死)는 죽는 괴로움을 말합니다. 여기에 다시 네 가지 괴로움을 더해 팔고(八苦)라 합니다. 그 네 가지란 원증회고(怨憎會苦)로 이는 미워하는 대상과 만나는 괴로움, 애별리고(愛別離苦)란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구부득고(求不得苦)는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고, 오음성고(五蔭盛苦)는 오음 즉 오온이 치성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다시 말해 오음성고란 ‘나다’라고 아상을 내세우는데서 오는 괴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좀 더 자세히 팔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사고팔고의 시발점은 생고(生苦)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머지 일곱 가지의 괴로움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생기는 부수적인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태어나는 것이 무슨 고인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팔고 중 가장 근본이 되는 괴로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인데 물론 이 세 가지는 누구나 괴로움이라고 인정하겠지만, 혹 어떤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 말고, 그와 반대의 개념, 즉, 젊고, 건강하고, 살아있다는 즐거움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불교가 그런 즐거움을 모두 없다라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삶의 어느 한 단면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닌, 인생 전체를 보면 우리는 결국에 가서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라는 궁극적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사고(四苦)에 네 가지를 더해 팔고(八苦)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그 첫째가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괴로움인 애별리고입니다. 한창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던 두 남녀가 언젠가 그 중 한 명이 죽는다던가, 다른 이성과 눈이 맞아 헤어지려 한다면 이 괴로움은 그야말로 죽는 괴로움보다 더 괴로울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부모, 형제, 친지, 친구들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하는 괴로움도 애별리고입니다. 또한, 사람뿐아니라, 물건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물건에 집착이 클수록 그것이 사라졌을 때 오는 괴로움은 큽니다.

 다음은, 그와 반대인 원증회고인데, 원망스럽고 싫은 것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을 말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 얼굴만 보아도 화가 나고 답답하고 혹은 두려운 사람들과 항상 만나야 한다면 그보다 괴로운 일이 있을까요? 특히나 군대에서 보기 싫고 두렵기 까지 한 선임병 때문에 너무 괴로운 나머지 자살까지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군에서 자살하는 경우를 보면 첫째가 사랑하는 이와 헤어짐에서 오는 괴로움 때문이고, 둘째가 미워하는 이와의 괴로움에서 오는 괴로움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니 이만하면 왜 생노병사라는 네 가지 괴로움 다음으로 애별리고, 원증회고를 언급하였을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구부득고는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이 세계의 생명 있는 중생들 중 과연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 이들이 있을까요? 그러나,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쉽게 마냥 얻을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은, 심지어 축생들조차, 많든 적든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구해지지 않으면 괴로워합니다. 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원하고, 수행하는 이들은 깨달음을 얻으려 하고, 사업가는 사업이 번창하기를 원하며, 정치가는 최고의 권좌에 오르길 원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바라는 마음이 끝이 없고, 그것이 모두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괴로워합니다.

 다음으로 오음성고(五陰盛苦)는, 오온이라는 인간의 구성요소에서 오는 괴로움으로,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이 치성하는 데서 비롯된 괴로움입니다. 다시 말해, 오온, 즉, ‘나다’ 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으로,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내 마음대로 한다’ 하는 상을 가지기 때문에 그만큼 괴로움이 오는 것입니다.  이 오음성고는 앞의 일곱 가지 괴로움을 포괄하고 있는 괴로움입니다. 오온, 즉 ‘나다’ 하는 데에서 모든 괴로움이 오는 것이지, ‘나다’ 하고 고정 지을 것이 없다면 괴로움이 붙을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의 주체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오음성고의 괴로움이 타파된다는 말은 아상이 타파되고, 그렇기에 괴로움을 여의고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오온이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공하다는 사실을 올바로 조견할 때 이 괴로움은 소멸되는 것입니다. 오음성고의 괴로움이 소멸되면 일체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입니다.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아상(我相), 아집(我執)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나다’ 라는 상이 없다면 우리는 괴로울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괴로움의 주체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괴로움의 주체가 사라진다면 어디에 괴로움이 붙을 자리가 있겠습니까? 내 것이라는 상 때문에, 내 것을 빼앗겼을 때 괴롭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니 괴롭고, ‘내가 옳다’ 라는 상 때문에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생로병사의 네 가지 괴로움 또한 이러한 아상, 오음성고의 괴로움이 근본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것이고,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상이 없다면, 일체가 ‘나’ 아님이 없기에 일체 대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한 대상에 대한 집착심으로의 사랑이나 증오의 감정이 있을 리 없으며, 그렇다면 애별리고나 원증회고가 있을 리 없는 것입니다. ‘나’ 라는 상이 없으니, 즉, 일체가 나 아님이 없으며 대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으니, 돈, 재물, 명예, 지위, 나아가 깨달음에 대한 집착심을 여의게 되고, 그러기에 구부득고의 괴로움도 있을 리 만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에서 말한 인생팔고는, 덮어놓고 무조건 ‘인생은 괴로움’이라고 결론짓는 것만은 아닙니다. 아상이 있는 우리네 중생들에게 있어 인생은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공부하는 수행자들에게 있어 인생은 고가 아닙니다. 일체의 경계는 인과 연이 화합하여 잠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항상하지 않는 경계일 뿐이지만, 우리네 중생들은 그것이 실재하는 줄로 착각을 하므로 그 경계에 집착하여 경계 따라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며 온갖 망상을 일으키는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괴로움은 여러 가지 실체가 없는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일어나는 것, 즉 연기하는 것입니다. 연기하는 것은 괴로움인 것입니다. 그 경계들이 연기로서 본래 공한 것임을 올바로 알아야 하고, 경계가 공하므로 나도 공한 것임을 올바로 알아, 모든 경계를 나온 자리에 놓고 생활한다면, 우리의 삶은 부처님의 삶에서처럼 향기가 묻어 날 것입니다. 거짓된 나를 붙들고, 거짓된 경계에 얽매여 괴롭게 살 것인가, 본래 공한 나의 본 성품을 올바로 믿고, 일체의 아집과 번뇌를 모두 놓고, 자연스럽고도 편안하게, 여여하게 살아갈 것인가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괴로움이 ‘성스러운 진리’ 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여실히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이 비실체적인 것임을 알아, 그것을 정면으로 부딪쳐 극복할 수 있기에 괴로움이 ‘성스러운 진리’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괴로움의 철저한 인식, 즉 인생이 괴로움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고의 철저한 인식이 바로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발심(發心)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살펴본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을 되짚어보면, ‘조견오온개공’을 실천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이는 반드시 ‘도일체고액’할 수 있다는 실천적 가르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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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온(五蘊)이라고 하면 일체 현실의 세계를 다섯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또한, 인간을 다섯 가지 요소로 나눈 것이기도 합니다. 이 오온을 특별히 인간에 적용시켜 말할 경우 오취온(五趣蘊)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에 대하여 고정적인 자아[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취]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오온개공에 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오온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근본불교에서의 오온무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온의 ‘蘊(Skandha)’은 ‘모임’이라는 뜻으로, 때로는 음(陰)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일체의 현상세계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모임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온은 좁은 의미로 볼 때 인간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일체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일체의 구조를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인데, 색은 현상계의 물질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며, 수상행식은 정신세계의 총체를 네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분류법은 물질보다는 정신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분류법입니다. 특별히 오온설은 물질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서 무상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정신은 실체적이며, 영원하다고 믿고 그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법한 교설입니다. 그러므로 오온은 물질보다 정신을 더 자세하게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오온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색온(色蘊)

 색이란 빛과 모양을 가진 물질을 의미하며, 인간에게 있어서는 육체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색은 네 가지의 요소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사대(四大)라고 하며,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를 말합니다. 지(地)라는 것은 우리의 몸에서 뼈, 손톱, 머리카락, 살 등 딱딱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우리가 죽을 때 모두 땅[地]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게 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수억 겁을 윤회한 이 땅의 이 모든 자연, 흙, 나무, 등이 모두 과거, 또 그전 과거에는 나의 몸이었을 수 있는 것이며, 지금 나의 몸 또한 백 년 내지 이백 년 후면 다시 처음 나왔던 그 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육신, 지(地)는 일체세간의 지가 인연을 만나 우리의 몸을 잠시 이루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내 앞에 떨어진 흙 한 줌, 나무 한 토막이 과거나 미래의 어느 순간 나의 몸을 이루는 내가 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올바로 보지 못하기에 우리는 이 육신에 집착합니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몸은 그렇게 아끼며 집착하지만, 자연에 대해서는 내 몸처럼 아끼고 잘 가꾸지 않는 것이 우리네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색(色)이 항상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이 몸뚱이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 뿐 아니라 대지 위에 있는 나무, 돌, 광석들은 모두 항상하지 않습니다. 현대과학은, 모든 물질은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 하나가 모두 플러스, 마이너스의 스핀 운동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세포 하나하나가 죽고 새로 생기기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우리의 몸이 전혀 새로운 세포로 변화되는데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색온은 무상한 것, 항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2)수온(受蘊)

 수란 감수작용(感受作用)으로 느낌, 감정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그리고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입니다. 즐거운 감정과 괴로운 감정, 그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을 말합니다. 우리의 주관적, 내적인 감각기관인 육근(六根)과 그것에 상응하는 외적인 대상인 육경(六境)이 서로 만날 때, 이러한 세 가지의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안근(眼根)[눈-모양]으로 색을 바라볼 때, 예컨대 우리가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 좋다는 감정이 생기며, 징그러운 해골을 보던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볼 때, 싫다는 감정이 생깁니다. 그러나 무심코 지나다니는 사람을 멍하니 지켜볼 때처럼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근(耳根)[귀-소리]으로 무언가를 들을 때, 즉, 욕을 듣던가 꾸지람을 들으면 싫은 감정이 생길 것이며, 칭찬을 들으면 좋다는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비근(鼻根)[코-냄새], 설근(舌根)[혀-맛], 신근(身根)[몸-접촉], 의근(意根)[뜻-생각]들도 이러한 세 가지의 감정을 나타내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러한 수온(受蘊)의 감정은, 그때그때 인연이 생함에 의해 잠시 나타났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비근[코]으로 나쁜 냄새를 맡고 나서도 잠시 후, 혹은 다른 장소로 이동함으로써 다시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의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생각이 들다가도 과거의 좋지 않았던 일을 회상하며 순간 기분이 나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수온의 세 가지 감정도, 색온(色蘊)의 그것과 같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순간순간 변해 가는 것들입니다.

 이와 같이, 수온의 감정이 무상한 것임을, 그리고, 그 감정에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아 거짓임을 안다면, 좋고 나쁜 감정에 얽매여 괴로워하는 우(愚)를 범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그 일에 마음을 꽁꽁 묶어 두고 괴로워하며,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한없이 들뜬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이 두 가지 감정 모두가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알아 거기에 얽매이거나 회피하는 두 가지 모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수행자의 바른 행이라 하겠습니다. 기분 나쁜 마음과 좋은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그 경계에 처했을 때, ‘이 감정은 실체가 아니다’라고 관(觀)함으로써 어느 정도 자유로와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온 또한 항상하지 않는 무상한 것입니다.


(3)상온(想蘊)

 상은 개념, 또는 표상(表象) 작용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대상에 대하여 식별하고, 그 대상들에 이름을 부여하는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당의 부처님을 뵙고, ‘아! 저 분은 부처님이시구나!’ 하고 개념을 만드는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것에 대하여 상을 짓는 것을 말합니다. 무언가를 보면, 우리는 이전에 우리가 이름지어 놓은 것을 되살리어 기억 속에 개념지어 놓은 것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예컨대, 머리를 깎고, 회색 먹물 옷을 입은 분은 스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스님’이라고 이름짓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은 고정 불변한 것일까요? 우리들은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에 빠져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없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 일체 대상에 대한 표상, 이름들은 우리가 그렇게 정해놓은 것이지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한글을 만들 때, 하늘, 나무, 스님, 꽃, 집, 절, 아버지, 자식 등의 개념을 대상에 접목시켜 이름 붙인 것 뿐이란 말입니다.

 이렇듯 상을 짓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항상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자신의 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4)행온(行蘊)

 행이란 ‘형성하는 힘’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히 인간의 의지작용이나 욕구 등을 가르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작용, 행위로 인해 업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로, 행은 수, 상, 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을 총괄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기억, 상상, 추리 등의 정신작용을 말합니다.

 우리들은 몸으로, 입으로 행동하기에 앞서 정신적인 의지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온으로 인하여 우리들은 선한 행위, 악한 행위 - 여기에서 선하다, 악하다는 판단은 상온에 해당한다 -를 하며, 그러한 선, 악이라는 판단에 따라 윤리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업이 되는 것인데, 이렇게 업을 짓게 하는 것이 바로 행온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작용은 우리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상에 기초한 선악이라는 개념작용 등에 의지하여 생기게 마련입니다.

십이연기에서는 무명에 의해 행이 생긴다고 했는데, 상온에 대한 무명, 다시 말해 ‘항상한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행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온 또한 무상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기반인 상온이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5)식온(識蘊)

 식은 일반적으로 분별, 인식 및 그 작용을 말합니다. 그러나 직접 대상을 판단하고 인식하는 작용을 하는 것은 상온의 작용이고, 식온은 다만 대상을 상이 생겨나기 전(前) 단계까지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의(注意) 작용정도라 하면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해, 눈앞에 책 한 권이 있을 때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난 것을 인식하는 작용을 말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이상에서 이야기 했던 각각의 다섯 가지 온에 대하여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컨대, 입안에 사탕이 하나 들어왔다고 할 때 무언가가 들어왔음을 아는 것이 바로 ‘식온’이며, 전의 기억, 사탕이라는 것에 대한 이전의 표상작용에 의해, ‘아하! 사탕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 ‘상온’이고, 달고 맛있다는, 다시 말해, 좋은 느낌이 바로 ‘수온’의 작용이고, 맛있으므로 빨아먹는 행위, 그리고 더 먹고 싶어서 다른 사탕을 찾는 행위, 다른 사탕을 찾아 먹는 행위 등이 바로 ‘행온’의 작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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