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분지에서 민박집 어르신이 일어주신 산마을 식당에 들러
울릉도에서 난 산채들로만 만들었다는 산채비빔밥을 시켰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산채들이 풍성하게 한 그릇 가득이다.

주인 아주머님 인심은 또 얼마나 좋은지,
밥이며 산채며 반찬들이 전통 한정식 저리가라 하고 많이 나오는데다
민박집 어르신 얘기를 했더니
이 곳의 자생인 천궁, 호박, 더덕 등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씨앗주라는 곡차도 한 사발 내어 주셨다.

늦은 점심을 먹고는 터벅터벅 바닷가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고갯길을 오르니 나리분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1시간 남짓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을 걷다보니
시원스런 바다와 거친 파도가 가슴을 뻥 뚫어준다.
그리고 바닷길 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산에서 바다 쪽을 향해 약간 기울어 진 듯 보이는
육중한 바위산 하나가 시선을 잡아끈다.
성인봉의 한줄기 산봉우리가
송곳처럼 뽀족하게 생겼다고 해서 송곳산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송곳산 때문에 이 인근 마을도 송곳산의 한자명인
‘송곤 추(錐), 메 산(山)’자를 써서 추산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높이가 430m라고 하니 육중한 바위산이라고 말했던 규모가 짐작이 가려나.

그리고 송곳산에서 바다 쪽으로 눈을 돌리면
일명 코끼리 바위라고 불리는 공암이 바다 위에 떠 있다.
바위 모양이 코끼리가 물 속에 코를 담그고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로 난 길을 따라 잠시 걸으니
저 멀리로 죽암이 보인다.



죽암과 삼선암을 들렀다가 서면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북면 쪽에서 너무 시간을 오래 끌다 보면
내일 떠나야 하는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겠나 싶어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여행을 다니며 구경을 하는 것도 아쉬운 듯 한 것이 좋고,
모조리 다 감상을 하겠다는 것 보다는 욕심을 좀 덜 내는 것이 좋다는 것을
몇 몇 만행길에서 터득한 바다.

바닷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인적은 드물다.
그래도 작은 어촌 마을인데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한 건가 싶을 정도로
여간해서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바람은 점점 거세진다.
때때로 파도의 잔영들이 뺨을 스치운다.
한참을 걷다보니 바닷길 위에까지 파도가 흩뿌려져 겉옷이 축축하다.

걷다가 걷다가 길가 간이 의자에 앉았다가 이내 드러누웠다.
가만히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을 보며 온 몸으로 간간이 뛰어드는 파도를 맞아가며
점점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의 찬기를 느끼면서
아무도 없는 외딴 섬 길 위에 버려진 듯 철저한 고독의 소리를 듣는다.

산 위에서 그랬듯이 길 위에도 인적은 없다.
이따금씩 지나치는 차량만이
이 땅이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뿐이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요즘, 늦가을부터 겨울까지는
거의 관광객들도 없고, 일들도 많이 줄어드는 시기라고 한다.
요즘 같으면 배가 들어왔어도 나가지 못하는 날이 더 많은 연유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차라리 한 몇 일 이 곳에 갇히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센 바닷가 한 켠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마음도 고정시켜 본다.
외로운 느낌을 가만히 살펴본다.
이럴 때, 외로운 느낌이 존재를 뒤덮으려 할 때,
바로 그 때가 수행자에게는 가장 좋은 구도의 때다.

가만히 그 느낌을 주시하고 있다보면
이내 느낌도 생각도 어느덧 사라지는 것을 본다.
다만 파도가 칠 뿐.



바다도 산처럼 사람의 생각을 잠재우고
감성을 일깨우는 그 어떤 힘을 가졌다.
이런 외딴 섬에서의 외로운 거센 파도는 내 삶에서도 드문 경우다.
더구나 이런 철저히 외딴 곳에서의 거친 풍경은 더욱 드문 일이다.
이런 생경한 경험들이 지진하던 내 속 뜰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바다와 하늘, 구름의 경계선이 사라진다.
온몸은 거센 바닷바람을 따라 춤을 춘다.
또 다시 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걷다가 지치면 멈추고 눕다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이렇게 조용하게 그 어떤 훼방 없이 걸을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처음이지 싶다.
길 위의 고요를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언제나 길은 시끄럽다.
차량이 줄을 잇고, 엔진의 소음이 그칠 줄 모른다.
차의 길은 차의 소음으로 시끄럽고
사람의 길은 사람들의 재잘거림으로 시끄럽다.
물론 벗과 함께 걷는 길에는 사람들의 소리들까지도 정겹지만
홀로 속 뜨락을 거닐을 때는 때때로 조용한 길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법이다.

이 곳 울릉도의 길이 바로 그런 길이다.
이 길은 차 만을 위한 길이 아니다.
길 위에서 사람도 자유롭게 걸을 수 있고
바다도 파도도 그리고 깊은 침묵 또한 길 위를 걷는다.

차량의 행렬이 멈춘 도로는 낯설다.
그 낯섬이 길을 걷는 여행자에게는 반가운 도반이다.

저 섬 반대편까지 가야 일몰을 볼 수 있으리란
민박집 어르신의 말씀이 문뜩 떠올라
지나치는 차를 향해 손을 들었다.

이곳의 차량은 언제나 사람을 태울 준비가 되어 있는 듯 하다.
차량 향해 손만 들으면 어떤 차도 어떤 사람을
당연히 태우고 갈 준비가 되어있지 싶다.
차도 섬을 닮아 가슴이 따뜻한가.

거의 반나절을 걷고 걸어 되돌아 보면 한 뼘이더니
이 섬의 차는 순식간에 내 수고를 덜어
훌쩍 섬 반대편 태하의 성하신당에서 나를 떨구어 주었다.

역시 차를 타고 오다보니 놓치는 것이 많다.
눈을 초롱 초롱 뜨고 산과 바다를 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것들을 향해
깊은 시선을 던지긴 했어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하나를 얻으면 역시 하나를 잃게 마련이다.

문명의 이기는 이렇듯 볼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기능도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놓치는 것이 많아진다.
차창 밖에 보여지는 사물들만 놓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 하나의 풍경들이 담고 있는 내 안의 의미도 놓치고
그들이 내게 던져주는 화두 같은 것도 놓치게 된다.

삶의 속도도 매한가지다.
인생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더 빨리 얻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이다.
삶의 참된 의미는
봄 꽃이 피어나는 듯 느린 가운데에서 꽃피어난다.

태하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도 완전히 태풍에 강타를 당했다.
물론 이 곳 또한 물길 작업이 한창이고,
바닷가 쪽은 방파제 작업으로 분주하다.
거대한 굉음과 장비들의 소음이
이 아름다운 풍경의 정서를 반감시키고 있다.

태양은 이제 저 바다 너머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어둑 어둑한 뭉개구름들 사이로 투명한 빛이 바다를 향해 쏟아진다.



빛의 향연. 아직 빛은 투명하다.
이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빛은 더욱 따뜻한 노을빛으로 바뀔 것이다.



저 건너편 풍경이 이채롭다.
늘상 바라는 바지만 저 언덕 위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조그만 텃밭을 일구며 매일같이 바닷가로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사는 것을 그려보게 된다.



시끄러운 소음과 정신없는 공사 때문에
이 곳에서 일몰을 맞으려던 생각을 바꾸었다.
태하 마을을 걸어 나오는데
울릉도 곳곳에서 자주 목격하던 오징어 말리는 풍경이 이젠 익숙하다.



아직 일몰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다.
또 한 번 차를 얻어 탔다.


통구미 거북바위 일출을 바라보며(통구미 도착, 16:00)

사자바위 쪽에서 일몰을 볼까 하다가
아무래도 도동 가까운 곳이 좋겠다 싶어 단숨에 통구미까지 내달렸다.
거북이가 마을을 향해 기어가는 듯한 모양을 보고
거북이가 들어가는 통과 같다고 하여 통구미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이 곳은 향나무 자생지로도 유명한데 천연기념물 48호로 지정된 곳이라 한다.
포구 앞의 바위는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거북바위라 부른다.

통구미와 거북바위의 일몰도 유명하다고 했는데
차에서 내리니 ‘잘못 온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바위 하나 달랑 있고
도로 곁에 그 흔한 슈퍼나 식당 조차 없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관광지의 유명 명소는
호텔과 휴양시설이며 온갖 식당가와 관광물품판매점에, 심지어 유흥업소까지
얼마나 정신 없는 시설들로 꽉 들어 차 있는가.
그런데 지금까지 울릉도를 걸으며 느낀 공통점이 바로
울릉도의 명소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곳에 통구미라는 지명까지 만들어졌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일몰을 구경 온 관광객도 없고,
관광객들을 위한 그 흔한 일몰 전망대 같은 것도 없다.
그냥 길가에 앉으면 그곳이 전망대도 되고 휴게실도 된다.

이렇게 개발되고 발전되지 않아 호젓한
이런 곳이 참으로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그 텅 빈 가운데 꽉 찬 무언가가 있다.
너저분한 것들이 없어야 정말 보아야 할 그 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법이다.

길을 벗어나 바다 쪽으로 바위가 하나 있어 그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양도 이제 많이 내려왔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저 수평선 바다가
저 위의 붉은 생명을 단숨에 품어 안을 것이다.



여러모로 이번 여행은 의미가 남다르다.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로 넘쳐나고,
문명의 이기로 넘쳐나는 그런 여행지 풍경 속에서는
나 자신에 집중하기도, 여행지 풍경에 집중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그러나 이 곳에선 호젓한 가운데, 아무런 걸림 없이, 아무런 방해 없이
두 눈의 시선은 오직 저 붉은 태양에 고정되고 있다.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의 살결도 찬연하지만
그 위에서 휴식을 취하듯 소박한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갈매기들의 모습에서도
더없는 평화로움과 삶의 여유를 읽을 수 있다.



노을이 내려앉은 바다 물결이 곱다.
용광로 같은 태양 아래
바위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갈매기가
빛을 받아 더욱 반짝인다.

잠잠히 앉아서 일몰을 기다리던 갈매기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루를 마감하는 일몰의 축제에 빠져든 듯
노을진 하늘을 배경으로 떼지어 날아올라 황홀경에 빠져들고 있다.



거북바위가 지는 태양의 곁에서 묵묵히 일몰을 지켜주고 있다보니
함께 곁에서 지켜보는 여행자의 가슴도 따뜻해진다.



시간과 함께
태양은 뜨거운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한 30분 남짓의 시간동안 서서히 아주 조금씩
태양과 바다의 간격이 좁혀지더니
이네 푸른 선과 붉은 원이 감격의 재회를 맞으며 하나 된다.



둘이 만남을 이루고 나면
태양은 빠른 속도로 바다 속을 파고들며 자신을 소멸시킨다.

이내 태양은 보이지 않고 수평선만 외로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태양이 사라져도 여운은 남는다.
아직도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은 태양의 여운으로 은은하다.



또 다시 바다 곁을 따라 난 길을 걸으며 녹록한 태양의 여흥을 느껴본다.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호올로 길 위를 걷는 느낌은 적막 혹은 적멸이다.
첫 느낌은 적막하기 그지없는 휑하고 허한 느낌이지만
그 느낌을 깊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휑한 적막감은 이내 깊은 고요와 평화를 간직한 적멸의 자리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걷다보면 길 위에서 적멸의 벗을 만나게 될 것도 같다.

한참을 걷다 또 한 차례 차를 얻어 타고 도동으로 내달렸다.
저녁 공양을 하고 잠시 도동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피곤이 몰려온다.


다음날 새벽, 행남등대와 해안산책로 일출(도동항 출발, 05:50)

애초 아침 일찍 독도를 다녀오려고 했는데
마침 오늘이 독도편 배가 출항하지 않는 날이라
독도를 다녀오는 계획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대신에 행남등대와 해안산책로를 돌아보기로 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도동항에서 해안산책로가 아닌
산길을 따라 행남등대까지 가는 길을 택했다.

아직 도동은 한밤중이다.
도동항 마을에서 가파른 계단을 따라 얕은 산 위로 올라가니
도동의 밤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손전등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탓에
어두운 산길을 두 눈 부릅뜨고 직감에 의지해 걸어야 한다.

어둠 속에서 낯선 산길을 걷는 건 또 다른 생경함이다.
어둠은 짙고 세상은 조용하다.
터벅 터벅 길이 난 곳만을 향해 계속해서 걷는다.
이른 새벽 숲 길의 청명함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방에서 나올 때만해도 바람이 차다고 느꼈는데
한참 걷다보니 안에서부터 땀이 주르륵 흘러 내린다.

금방 도착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밤길이라 그랬는지 1시간을 조금 넘게 걸은 것 같다.
오르락 내리락 하며
또 둘로 난 길에서는 그냥 대충 직감을 따라 길을 선택했다.
우측으로 가면 바다에 다다를 것이고
너무 좌측으로 가면 저동에 다다를 것 같고
중간 즈음의 길을 따라 계속 걷다보니 길 끝에 집이 한 채 보이고
갈라진 길 앞의 간이 이정표에 ‘행남등대’ ‘저동’이란 푯말이 보였다.

행남등대에 잠시 올랐다가 일출을 보기에는 바다쪽이 낫겠다 싶어
다시 해안산책로 쪽으로 내려왔다.
빠른 걸음으로 해안산책로에 다다르니 이제 막 일출이 시작되고 있다.



어제 새벽 저동의 일출과는 또 다른 느낌의 태양이 떠오른다.
뭐랄까 조금 더 부드럽고 따뜻하며 차분한 느낌.
어제의 일출이 강렬했다면 오늘의 일출은 포근하고 따스하다.

때때로 고기잡이 어선이 하나 둘씩 지나간다.



갈대 사이로 솟아오른 태양이 지극히 순박하다.

갈대도 태양을 향해
합장을 하듯 이 아침의 일광보살을 맞이한다.



산책로 사이로 피어난 왕해국이 대견하게 느껴진다.



바위틈 사이 그 척박한 곳에 왕해국 작은 꽃무지도
그 곳이 제 집이라고 뿌리를 박고 피어올랐다.



바위틈에서 자란 건 왕해국만이 아니다.
그 곁에서 산부추도 계절감을 잊고 바위틈에서
바닷바람을 피해가며 호젓하게 서 있다.



바위 위에 앉아 떠오르는 태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갈매기 한 마리가 내 외로움을 달래준다.



그 하늘 위로 뭉개구름 몇 송이 평화롭게 떠 다닌다.
한참동안 발을 떼지 못 하고 바다쪽을 향해 서 있다.



아! 이 뜨거운 하늘, 바다, 태양 그리고 섬...
이 한 편의 장면이 그대로 동화 속 풍경처럼 선명하게 그려진다.



예상했던 것 보다 해안산책로의 절경은 더없이 특별하다.
어제까지의 풍경들이 평범한 가운데 평화와 순박의 경이가 담겨있었다면
오늘 아침 해안산책로의 그것은 경희(驚喜) 그 자체다.



이런 풍경은 도무지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이런 풍경을 대할 때마다
대자연의 무위의 예술성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찌 이런 절경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기암괴석의 하늘신이 빗어놓은 듯한 천상의 산책로 위로
새벽 태양빛이 하늘에서 금싸라기를 흩어 뿌리는 듯 난연히 비춰주는
이 해안의 풍경은 도무지 언어로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 어떤 언어로 이 대자연의 하늘 연주를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깍아 지른 듯한 기암괴석 아래로
금새라도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스릴을 느끼면서 걷는다.



아! 지금 이 순간
내 영혼도 저 갈매기처럼
청량한 하늘 위를 날고 싶다.



내 안에서는 또 다시 침묵의 선율이 흐른다.
모든 티끌들이 말끔히 사라지고
청연청아한 텅 빈 공간이 내 안의 뜰에 맑은 비질을 한다.
이 선연한 하늘의 연주와 선율을 알아들었기라도 했다는 듯
하늘 위로 갈매기 떼의 발랄한 날개짓이 춤을 춘다.

천천히 경행하듯 옮긴 발걸음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어느덧 도동항에 다다랐다.
도동항 마을도 아침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인다.



해도 이제 제법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날씨가 좋아 배는 당연히 뜬다고 했다.
육지로, 일상으로 다시 되돌아 가는 배에 몸을 싣고 잠시 눈을 붙였다.
꿈결 속에서 울릉도를 다시 그려본다.



설레임 가득한 일탈의 만행을 만들어 준 울릉도,
언제 다시 오게 될 지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 안녕.







Posted by 법상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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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관례적으로, 고산증세가 오기 시작한다는
3,440고지 남체바자에서
많은 여행객들은 고산적응 시간으로 이틀 밤을 머문다.

도착한 다음날 바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고산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으로 하루를 더 머물며,
주로 남체바자 마을의 뒤쪽 산 위에 자리잡은 샹보체(syangboche, 3720m)와
아마다블람(ama dablam, 6,856m), 로체(lhotse, 8,516m), 타보체(Taboche, 6367m),
탐세르쿠, 에베레스트(everest, 8,850m) 등의 영봉들이 환히 보이는
일본인이 소유의 에베레스트 뷰 호텔(Everest View Hotel, 3900m)을 다녀오는 일정으로
하루를 더 보내곤 하는 것이다.

물론 나 또한 그 관례를 따르기로 한다.
때때로 젊고 혈기 왕성한 트레커들이 하룻밤 고산적응 시간 없이,
또 얼마나 빠른 시간내에 완주를 이루어내나 내기라도 하듯
하루 사이에 700~1,000 고도 이상을 오르는 강행군을 며칠이고 이은 끝에
몇몇은 당연한 고산증세로 뛰쳐 내려오거나 실려 내려오고,
또 몇몇은 그 초월적인 일정을 신기하게도 무사히 마침으로써
세간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으쓱한 자기 과시도 이어가는 경우도 있더라고 한다.

나야 시간도 느긋하게 잡았고,
빨리 오르는 것이 목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고,
생에 처음으로 친견하는 희말라야 산군에게 나를 낮춰 겸손한 마음으로
법신(法身)을 친견하듯 오르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모은다.

이른 새벽, 아직 동도 터오기 전에 저절로 잠에서 깨어났다.
찌뿌등한 몸을 좀 풀고
아래층 화장실 옆 작은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두꺼운 방한복을 껴입고 나왔는데도 도저히 추위가 가시지를 않는다.
그나마도 전날밤은 두꺼운 이불을 두 개씩이나 무겁게 누르고 잤기에
설치지 않고 푹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드디어 동쪽 하늘이 어둠을 뚫고 짙푸른 빛으로 물드는 듯 하더니
콩대(Kornde, 6187m)의 만년설 봉우리 위로 황금빛 일출이 시작된다.



방에 올라가 커튼을 활짝 열었더니
창문 밖으로 콩대 봉우리가 액자에 걸린 그림처럼 펼쳐진다.

 


 

봉우리의 일출을 방 안에서 마주하며
그 황금빛 붓다의 성상을 향해 차분히 예불을 올린다.

아침 식사를 롯지 식당에서 간단히 마치고,
바로 뒷산 격인 샹보체를 오르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일찍부터 산을 오르는 여행객들도 드문 드문 눈에 띄고,
이 높은 곳에 학교가 있는 것인지 가방을 둘러 여학생들과,
목에 댕댕 거리며 종소리를 울리고 무겁게 걷는 야크들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함께 길을 오른다.

 

 






샹보체를 향해 한발 한발 오르는 동안
남체바자의 조망이 한층 드넓게 트이면서
이윽고 산정에서 하나도 가리지 않은 알몸의 남체 전경을 만난다.





남체바자는 그야말로 희말라야 산정 마을의
그 어느 곳보다 크고 아름다우며 성스럽다.
안나푸르나의 촘롱이나 간드룽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조망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샹보체를 향해 걷는다.



능선을 따라 오르다보면 너댓집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작은 마을 풍경이 펼쳐지고,

 
20여 분 더 오르면 바로 샹보체가 나온다.
샹보체가 상 정상에 있는 마을의 이름인줄 알았는데
마을이라기 보다는 황량한 초원벌판의 비행장이다.
롯지가 두어 곳 있고, 그 옆으로 너른 비행장이 펼쳐져 있다.
말이 비행장이지 그저 헬기장 수준의 너른 벌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샹보체, 툭 터진 비행장의 전경 앞에 앉아 호흡을 돌린다.
흡사 골프장 잔디밭을 연상케 하는 자연 그대로의 푸른 초원,
그 건너편 위로 솟아오른 구름에 반쯤 가려진 탐세르쿠와 캉테가 만년설산,
산행하기에 적당한 날씨와 따스한 햇살,
산들 산들 불어오는 달콤한 바람까지 모든 것이 꿈같고, 선연하여
마음을 추스르기 힘겨울 정도다.

 

 




초원의 비행장 좌측 얕은 산 정상 위에
캉테가와 탐세르쿠를 병풍처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롯지 하나가 시선을 잡아끈다.
그것이 희말라야 뷰 호텔인가 했더니 호텔은 그 롯지 너머에 있다고 하네.



한참을 앉아 있자니 미니 비행기 한 대가 루클라 쪽에서 날아오더니
남체와 샹보체를 한 바퀴 휘휘돌아 건너편 산 뒤로 사라진다.



그리고 또 잠시 뒤 한 대의 헬기가 날아오더니
샹보체가 이렇게 어설퍼 보여도 헬기장이 맞다고 소리치는 듯
웅웅거리는 큰 소음과 함께 프로펠러를 휘날리며 착륙한다.



한참 전부터 헬기장 한 편에 서 있던 일단의 여행자들이
헬기에 몸을 싣고 짐을 싣더니 곧장 수직 상승하며 날아간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 곳 샹보체에서 헬기를 통해
곧장 카투만두로 가는 헬기 교통편이 있다고 한다.
대략 1인에 50만원을 상회하는 금액이 든다고 하니
우리 같은 최대한 아끼며 다니는 배낭여행자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나마도 오늘같이 날씨가 좋은 날은 상관이 없지만,
부득이하게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은 미리 선금으로 헬기값을 지불해 놓고도
구름 속에서 헬기 소리만 듣다가 착륙을 못해 타지 못하고
걸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런 경우 일단 헬기가 떴기 때문에
비용을 되돌려 받지는 못한다고 하니
그 막대한 비용을 고스란히 버리고도
신의 뜻이라는 한마디에 숨을 죽일 수밖에 없다.

한참을 앉아 쉬었더니 설산을 휘휘 돌아 불어오는
툭 트인 초원의 시린 바람을 온몸으로 마주하느라 한기가 느껴진다.
샹보체에서 비행장 좌측편으로 보이는 얕은 언덕 사이로
희말라야 뷰 호텔, 그리고 쿰중과 연결되는 길이 보인다.



언덕길을 따라 오르니 쿰중과 호텔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산정 즈음에
스투파 하나가 당차게 서 있다.

 

 

 
우측 비행장 옆으로는 그림 같은 노오란 초원이 펼쳐진다.



좁은 숲길을 산책하듯, 경행하듯
길가에 자유로이 피어난 꽃이며 작은 풀들에 마음을 빼앗기며 걷는다. 

 

 

 

 

 


조금 더 걸으니 거짓말처럼
모든 희말라야의 봉우리들이 환희 보이며
내일부터 걸어 올라가야 할 마을들이 한눈에 펼쳐지는
언덕 위 아름다운 뷰포인트를 만난다.



좁은 숲길에서 꽃들과의 숨바꼭질을 하다가 숲길 끝나는 곳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이 전망 좋은 풍경을 만나니
무슨 선물이라도 받은 듯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하다.
이 전망 좋은 풍경을 놓칠세라 여행자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며 감탄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 곳에서 위쪽 능선길을 따라 오르면 또 다른 쿰중으로 가는 길이고,
아래쪽으로 산허리를 가르는 작은 오솔길이 에베레스트 뷰 호텔로 가는 길이다.
이 아래쪽 호텔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일부러 만든 것처럼
절벽 같은 산사면의 구부능선 즈음에
길 옆으로 빨갛고 노오란 꽃들이 앞다퉈 피어난
그야말로 그림 같은 길이다.

 



황막히 불어와 뺨에 박히는 칼바람만 아니어도
이 길가에 앉아 가만가만 살펴도 보고,
여유있게 누워서 하염없이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보고,
앙증맞게 피어난 울긋불긋한 꽃들도 바라보고,
건너편 우뚝 솟아오른 만년설산에도 눈길을 주면서,
그러다가 심심하면 책도 읽어가면서 오후 내내 염연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오히려 에베레스트 뷰 호텔보다 호텔로 가는 길이 더 뷰 포인트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 30여 분을 걸어 호텔에 도착,
호텔 야외 전망대에서 따뜻한 레몬티 한 잔으로 몸을 녹인다.

 



설산의 봉우리들이 자신의 하얀 살저름에서 떼어내 구름을 만드는 것인지
새벽에는 구름 한 점 없이 청연하던 하늘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구름으로 뒤덮인다.



주로 구름은 텅 빈 하늘을 떠 다니는게 아니라
산봉우리 주변으로 띠를 이루며, 연모의 포옹을 하듯
그렇게 달라붙어 있다.

때문에 구름으로 뒤덮인 설산 봉우리들을 뚜렷이 보지 못하는게 아쉽다.
곁에서 전문 사진장비를 갖추고 숨죽이며 전망을 주시하던 일본인 사진작가 두 분이
일본인 특유의 말투와 억양으로 투박한 영어를 내뱉으며
두 팔을 뻗어 구름을 확 걷어내고 싶다는 몸짓을 보이면서 아쉬워하고 있다.

타박타박 걷던 길을 다시 돌이켜 남체바자로 향한다.



한적하게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선명한 희말라야를 흠뻑 느껴본다.
남체로 내려가는 길에 부채꼴 모양의 선명한 남체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본다.

 



샹보체와 호텔을 두루 돌아 왔는데도 오후 시간이 고스란히 주어졌다.
점심을 먹고 몇몇 트레킹 샵을 돌아본다.
엊그제 팍딩에서의 추위가 생각나
든든한 겨울용 침낭을 빌리러 몇몇 곳에서 가격을 살핀다.

어떤 가게에서는 하루 대여료가 200루피,
또 다른 가게에서는 150루피였는데,
한 가게에서 살짝 얼굴만 내밀고 물었더니 80루피를 부르는게 아닌가.
너무 반가워 가게에 들어서니, 내 모습을 위아래로 살피다 말고
“Japan?” “Korea?” 하더니 바로 다시 150루피를 달라는게 아닌가.

방금 전 분명히 80루피라고 했는데 왜 그러냐고 따져 물었더니
웃으면서 살짝 보고 네팔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하며,
어차피 말했으니 그럼 그렇게 하자고 시원스레 침낭을 보여준다.

한국이나 일본인들의 여행자들이 트레킹을 하러 많이 오는데,
처음 출발할 때는 여행자 같다가도 일주일 이상 지나고 나면
까맣게 탄 얼굴이며, 씻지 않은 몸, 헤어지고 더러워진 옷가지 등으로 인해
말만 안 하고 있으면 네팔 현지인이라고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래도 이렇게 때때로 그 덕을 보기도 하니 그도 좋은 일이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의자를 가득 메우고 있다.
혼자라 이런 점이 좋다.
그저 자리가 없어도 한 자리 정도야 아무 곳이나 끼어 앉아도 좋다.

대부분 롯지 식당의 특색은
우리나라처럼 따로 따로 4명, 8명씩 앉도록 해 놓은 것이 아니라
ㄷ자로 만들어진 회의장을 연상하면 딱 맞다.

덕분에 오붓하게 세계 각지의 여행자가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도 보내며 또 서로에 대해, 나라에 대해, 또 자신이 먹는 음식들에 대해,
그리고 대부분은 주로 다음 트레킹 일정이나 루트에 대해 묻고 답하면서
이런 저런 정보교환과 살풋하고 정감어린 교류의 장을 마련하곤 한다.

그야말로 자기 나라 사람들끼리, 혹은 일행끼리만 어울리는 것이 아닌
모두가 같은 산에 오르는 동료 의식을 가지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활짝 열린 소통의 장을 만들어 가고 있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 삼면으로 둘러쳐진 테이블 가운데는
어릴적 초등학교에서 보았을 법한 뗄감 난로가 있고,
그 주위로 여행자들의 시선이 차분히 오고 간다.

묵묵히 맛있게 밥을 먹는 사람,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몸을 녹이는 사람,
다정히 웃고 떠드는 한 무리의 사람들 하며,
그윽한 오랜 중년의 부부,
또 한 켠에서는 머리에 해드랜턴을 켜고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
그 가운데 난로 주위로 현지인 포터들의 다정한 이야기꽃하며,
접시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는 식당 종업원들까지,
이 설면한 풍경이 가슴 속에 짠하게 사진 찍히듯 박혀 온다.
두고 두고 롯지의 저녁 시간은 추억속에 아롱질 듯 하다.

보통 6시 쯤이면 저녁 식사를 하니
7시 쯤부터 시작되는 저녁의 호젓한 시간을 다른 이들은 어떻게 보낼까!
아마도 하루 이틀은 이 텅 빈 시간이 낯설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늘 할 일들로 북적이며,
우리의 집에는 언제나 TV와 인터넷이 저녁시간을 가득 채운다.
이제 이 낯선 어둠의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이런 때야말로 우리가 진정 여행을 떠나는 의미에 답해 주는 공간이 아닐까?
이런 일상에서 누려보지 못한 모처럼의 그윽한 순간 조차
포커와 화투를 들고 와 때로는 소량일지라도 돈까지 오가며
곁에 있는 여행자의 여유로움까지 방해하는 일은
때때로 눈살을 찌뿌리게 한다.

물론 홀로가 아닌 함께하는 여행에서는
때때로 적당한 그런 놀이가 어쩔 수 없는 관계형성의 장을 채우는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너무 과하면 무엇이든 문제가 된다.

그래서 홀로 떠나는 여행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여행의 질적 차원이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도 좋지만,
내가 홀로 떠나는 여행을 즐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녁을 먹고 오늘도 어두운 마을길을 따라 랜턴에 의지하며 가벼운 산책을 즐긴다.
제법 큰 마을이라 그런지 팍딩에서의 산책과는 다른
분주하고 활기찬 풍경이 이 무거운 어둠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듯 하다.

나처럼 터벅터벅 소요를 즐기는 사람,
가벼운 쇼핑을 즐기는 사람,
미쳐 준비하지 못한 트레킹 용품을 구입하는 사람,
그리고 이 먼 산에서 느려터진 속도에 인내심을 키워가며
비싼 인터넷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
- 참고로 카투만두에서는 1시간 80루피하는 인터넷 비용이 이곳에서는 1분에 100루피 - ,
또 모처럼 1년 만에 대목을 맞은 트레커 용품점 주인들의
손님을 끄는 능숙한 목소리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몸짓들이 이어진다.
이 모든 것이 그윽하고 아름답다.

산책을 마치고 나도 시간이 아긋하다.
나 같아도 다른 때 같았으면 이 밤중의 시간을 무슨 일을 한다,
글을 쓴다, 뉴스를 시청한다, 인터넷을 한다고 바빴을 터다.
이번 오랜 순유(巡遊)에서는 그 모든 것이 여행을
떠남과 함께 내던져지고
저녁시간의 여유가 오직 나 자신과 함께 존재하는
깨어남의 공간으로 바꾸어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 이번 여행의 투명하고도 오롯한 아름다움이 되고 있다.
잠들기 전의 투명한 깨어있음은 밤과 잠자는 시간 내내 이어지고
우리의 잠을 순수하고 청연하게 만든다.

잠들기 직전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거나,
좋지 않은 뉴스를 듣거나, TV를 켜두고 자거나 할 경우는
그 무의식적인 혼란이 밤중 내내 이어지고
때때로 그것은 우리의 꿈까지 쫓아와 의식을 혼란에 빠뜨리곤 한다.

그런 밤을 보내고 새벽을 맞이해보라.
예민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 찌뿌드하고 개운하지 않은 의식의 흐려짐을 경험할 것이다.

그래서 죽기 직전의 의식상태가 다음 생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하듯,
잠들기 직전의 의식상태가 중요한 것이다.
새벽녘 오랜 계곡의 투명한 폭포수처럼
잠들기 직전의 깨어있는 현존은
밤과 새벽 뿐 아니라 그 다음날의 의식의 밑바탕을 이루곤 한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듯
마음을 예민하게 지켜 본 사람이라면 그 차이를 느낄 것이다.

오랜 인도 여행에서 보다
오히려 지난 안나푸르나에서,
그리고 이번 쿰부 에베레스트 순례에서
저녁시간의 명징함이 더욱 빛나고 있음을 느낀다.

이 깊은 의식의 빛이 점차 매 순간순간으로
그 투명함을 전달해 주는 듯하다.
낮 시간 동안 걷는 걸음걸음 사이에,
오르막을 오르는 그 숨가쁜 호흡 사이에 맑은 공간이 생겨나고
그 하나 하나의 발자국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한 발걸음의 아름다움, 한 순간의 온전함,
매 현재 현재의 전체성이 이론과 생각을 너머
저 희말라야 봉우리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듯
조금씩 높고 깊은 내면의 희말라야로 가까워 옴을 느낀다.

명상도 일상 속에서의 그것과
여행 속에서의, 자연 속에서의 그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래서 저 티벳의 밀라레빠는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은 성취된 것’이라고 했던 것일까.





Posted by 법상




[벌써 몇 년 전 여름이었나?
우리 목탁소리 법우님들과 함께
한 몇 일 남쪽지방으로 만행을 떠났었다.
그 때의 기억들이
사진을 보니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왼쪽부터, 두하, 성연법우(지금 무상스님), 서원 법우(지금 인하스님), 법기스님,
법상스님, 원광스님, 심연, 여여, 진석법우]


오늘 아침은
추위가 한창이다.

얼마 전
군에 온 지 6년이 되었다고
기념으로 국방부에서 얻어 입게 된
겨울철 누비 두루마기를 꺼내 입고
그 기쁨에
오전 내내 도량 주위를 서성였다.

누비 두루마기를 입고 낙엽을 쓸다보니
지치지도 않고
쓰는 일이 그렇게도 홀가분했다.

오늘은
조금 춥긴 해도
날씨 또한 끝내주게 좋은 날이었거든.

작년 겨울 법기스님이
거사님께서 사 주신 누비두루마기를 입고
이거 하나 있으니까 얼마나 든든한 지 모른다고
그 얘기 했을 때
그러냐고 했지만 속으로 내심 얼마나 부러웠는지...^^

그때는 그 누비 두루마기 하나가
얼마나 좋아 보이던지...
지금 생각하면 어린애처럼 부러워했네.

이제 소원 성취했으니
이제 빨리 겨울이 왔으면 하고 기다려진다.
많이 추워야 오늘 아침처럼
이렇게 입고 휘적 휘적 걸을 수 있지 않겠나.

누비 두루마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가만 생각해 보면
난 처음 출가하던 때부터
든든한 누비두루마기가 그렇게 갖고 싶었다.

처음에는
형편이 넉넉치 못해 사 입지 못하다가
이제와서는
문득 깨달은 게 있어 사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 참에
하나 얻어 입고 보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이 작은 천조각 하나에
몸을 의지하면서
이렇게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 생각해 보면 참 우습기도 하고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이것도 집착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소박한 일에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음도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그동안 그 누비 두루마기를
사지 못할 형편인 것은 아니었다.
물론 사려면 까짓 그거 하나 못 사 입었겠나.

그런데 일부러 사 입지를 않았다.
사고 싶다고 그 때 그 때 휙 사 버리면
그다지 감사하지도 않고
그렇게 행복감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 싶은 것이야 왜 없겠나.
이래 저래 필요한 것들도 있고
또 정 사려면 충분히 사 쓸 수 있고 사 먹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사고 싶을 때
금새 휙 사 버리고 났더니
그것이 그리 풋풋하고 애정어리지가 않다는 것을
요즘들어 새삼스레 더욱 느끼게 된다.

특히 책을 살 때 많이 그랬는데
마음 쉬 일어난다고
이 책 저 책 꾸역꾸역 사다가 책장에 꽃아 놓으면
잠시는 흐뭇하고 기뻐도
그 책을 읽는 마음은 그렇게 썩 배 부르지가 못하다.

그래서 이제는 꼭 사고 싶은 책이 있어도
바로 사지 않고
한 번 서점에 가서 뒤척여 보고
그 다음에 또 한 번 서점에 가서 뒤척여 보고
그래도 정 사야겠다 싶을 때
그 때가서 꼭 한 권만 골라 나오기로 했다.

예전 같았으면
쉽게 들어온 돈이 있으면
그냥 몇 권씩 골라서 돌아오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거기에 별 재미를 보지 못했거든.

그래서 요즘은
서점에 두어번 가면
그 때 한 권 정도 사가지고 나온다.
한꺼번에 두 권이상을 사게 되면
그게 행복이 아니라 욕심이었음을 경험을 통해 배웠다.

그래서 요즘은 될 수 있다면
정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될 수 있으면 안 사려고 하고,
불편하게 지내는 법을 익혀보려고 한다.

불편한 즐거움을
요즘 들어 새록 새록 느껴가고 있는 중이다.

한동안 불편하다가
정 필요할 때 그 때 필요한 것을 사게 되면
그 때 느끼는 행복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갖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좀 원초적이긴 해도
그런 마음은 정말 끊임없이 올라온다.
그런데 그걸 가만히 느껴보고 바라보는 것도
참 좋은 공부꺼리가 된다.

먹을 것도
먹고 싶다고 다 사 먹게 되면
그것도 잔뜩 사다 놓고 먹게 되면
그게 영 맛이 없고 먹는 재미도 없다.

그런데 조금 참아도 보고
정 먹고 싶을 때
어렵게 그것도 부족하다 싶을 만큼만 사서
한 입 베어 물면
그 행복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어릴 적에는 수박이 왜 그리 맛있었는지.
수박 뿐 아니라
맛 없는 것이 없었으니까.

가만 생각해 보면
그게 다 부족해서 그랬던 것이지 다른 게 아닌 것 같다.

부족하면 그 안에 행복이 있다.
풍부한데 행복이 있는 게 아니라
부족한 거기에서 짠한 행복감은 밀려오는 법.

아마도 내가 어릴 때는
여름 한 철 수박 한 통 먹기가 어려웠다.
모르긴 해도 어떤 때는
한 해 여름 동안 수박 한 조각 못 먹고 난 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지금도 생각나는 어릴 적 기억이
여름의 초입에 서서
'올 여름은 수박 한 조각 먹을 수 있으려나'
했던 생각들이 부시시 떠오를 정도니까.

그 때 수박은
그야말로 꿀맛정도가 아니었다.
아니 그 맛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나.

여름철 뿐 아니지 겨울은 또 어떻고.
겨울철 교실에 누군가가 귤 하나를 가져와서
몰래 까서는 친한 친구들만
한 조각씩 나누어 줄 때
그것 하나 얻어 먹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조용하던 교실에
누군가 귤 껍질 하나 까게 되면
그 감미롭고 상큼한 향기가
초등학교 온 교실을 미치도록 만들었었다.

그 때가 참 좋았다.
그건 부족해서 그랬던 거지 다른 게 아니다.
요즘은 넘쳐나니까
귤도 옛날의 그 맛이 아니고
수박도 옛날의 그 맛이 아니다.

모든 게 다 그렇다.
세상이 풍족해 지니까
마음은 점점 더 허해지기만 한다.

우리들 가슴이
넘쳐나는 것들로 인해
점점 더 헛헛해 져만 간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왜 허한지
왜 그렇게 가슴이 뻥 뚫려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가만히
자근 자근 곱씹어 볼 일이 아니겠나.

두루마기 얘기 하다가 여기까지 왔네.

어쨌거나 갑자기 추워진 날씨 덕분에
누비 두루마기를 걸쳐 입었더니
이 갑작스런 추위가 오히려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하다.

이런 소소한 것에
이렇게 기쁨을 느끼다니...

행복은 이렇듯
욕심을 쉽게 충족시키는데서 오지 않고
불편을 스스로 선택하는데서 오기도 한다.

요즘 사회가 어렵고 경제가 어렵다고 하는데
이럴 때일수록,
아니 경제적으로 잘 풀리고
돈이 좀 생길 때일수록,
오히려 더욱 아껴쓰고
좀 덜 사고, 덜 쓰고, 덜 버리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필요할 때
바로 바로 사지 말고
그냥 불편한 대로 살아봄도 좋고,
좀 나둬 보았다가
정 필요할 때 그 때 꼭 필요한 것만
어렵게 구입하는 것도
참 좋은 일이 아니겠나 싶다.

갖고 싶어도 좀 참아보기.

어렵게 얻으면
어렵게 얻는 만큼
행복은 더없이 충만하다.

낮에 아래 사무실에
누굴 좀 만나러 가면서는
따뜻한 햇살 아래서 누비 입고 다니려니
좀 궁상맞기도 하여 피식 웃음이 나왔다.



Posted by 법상




[사진 : 법주사]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은
집착하지 말고 다 버려라.
내 것이 아닌 것을 모두 버릴 때
세상을 소유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이가
뒷동산에 있는 나뭇잎을 가지고 간다고 했을 때
왜 나뭇잎을 가졌느냐고 그와 싸우겠는가.

수행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아서
자기 소유가 아닌 물건에 대하여 애착을 버려야 할 것이니
버릴 것을 버릴 수 있어야 마음이 평온하다.

[잡아함경(雜阿含經)]



본래부터 ‘내 것’이 어디에 있는가.
‘나’라는 존재 또한
잠시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무상한 존재인데,
하물며 ‘내 것’이라고 붙잡아 두고 집착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뒷동산의 나뭇잎이 어찌 ‘내 것’일 수가 있으며,
땅에 금을 그어 놓고 돈을 지불한다고
어찌 ‘내 땅’일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의 오만한 생각일 뿐.

이 세상에
내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일체의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완전한 거지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온 것에 대해서까지
억지로 다 버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기 소유물들의 특성을 알 필요는 있다.
내 소유물들은 인연 따라 잠시 나를 스쳐갈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잠시 보관하면서 인연 따라 쓸 뿐이다.

잠시 스쳐가는 것들을 스쳐가지 못하게
‘나’라는 틀 속에 가두게 되면
나를 중심으로 우주적인 에너지는 정체되고 만다.

세상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이 끝없는 우주를 여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들의 목적은 끊임없는 여행에 있지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데 있지 않다.
바로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
여행길 위에서 잠시 들른 간이역일 뿐이라는 것을.
그 어떤 것도 종착역으로써 나에게로 온 것은 없다.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지.

그러니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시했다 하더라도
사실은 보시가 아니라 그저 가야할 곳에 갔을 뿐인 것이다.
그것이 그것의 다음역이었던 것이지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준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주고 받았다는
그 생각이 바로 집착이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