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침묵 속의 새벽길

 

드디어 오늘부터는 모든 고산에의 적응을 마쳤다고 보고

한없이 원 없이 오르는 날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안나푸르나도 다녀왔고,

물론 그 전에 인도 북부의 라다크, 판공초에서 5,000고지를 몇 번 넘어도 봤고,

또 이렇게 지금껏 일주일 동안 5,000고지 이상을 오르기 위한

느릿느릿 고산적응 산행을 계속 해 온 터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도를 올리며

내가 가야 할 바로 그 곳들을 두 발로 휘적휘적 걸어올라 줄 차례다.

첫 새벽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이른 청신(淸晨)의 길을 나선다.

 

 

 

어제 출발하던 바로 그 언덕길을 걸어올라 이제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

어제처럼 오늘도 타보체피크, 촐라체, 아라캄체,

니제카 피크, 로부체피크 등의 봉우리들이

내가 가야 할 방향 앞으로 병암(屛巖)처럼

그 우뚝 선 백발의 봉우리들을 한껏 드높이며 장중하게 버티고 서 있다.

 

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겨울옷과 장갑, 모자까지

단단히 몸에 붙여 메고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차분하고도 초엄한 솜씨로 한발 한발 나아간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이미 수목한계선을 넘은 지 오래라

초원이요, 벌판이며, 흙먼지길이거나 소설(素雪)의 해쓱해쓱한 설산이 전부다.

이런 낯선 황량함이 왠지 모르게 고향처럼 따뜻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웅려하고도 시린 풍경 앞에서

내 눈은 찬란히 부셔오고 감각은 새록새록 깨어나며

발걸음 하나조차,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나

설산 너머 어디쯤에선가 들려오는 침묵이 무너지는 소리조차

다 들려오는 듯 민예하게 활짝 열려 있다.

 

 

‘이것이 정작 현실이란 말이냐.’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

아늑한 영겁 전에 이미 이 길을 뒤 뜰 처럼 거닐었던 듯

새로우면서도 익숙하고, 시리면서도 따스하며,

외로우면서도 꽉 차 있는 느낌!

철저한 고독감 속에 그러나 온 존재와 함께 하고 있는 듯한 이 느낌! 느낌!

 

이런 선연한 길 위를 내 존재를 이끌고 이렇듯 두 발로

그것도 아무도 없는 이 적막의 새벽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요, 경이에 가까운 체험이 아닌가.

 

걸으며 모든 생각을 잊는다.

모든 기억과 기대, 바람과 희망도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과거와 미래 따위는 더 이상 입에 담을 흔적조차 없다.

모든 사고의 기초가 붕괴된 듯, 텅 빈 대지 위, 텅 빈 하늘 아래,

텅 빈 한 존재가 다만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을 뿐!

 

걷다보니 햇살이 발길을 비추고, 하나 둘씩 짐꾼들이 스쳐간다.

제 몸보다 더 크고 높고 무거운 짐을 이마에 짊어지고

몸을 최대한 앞으로 낮게 기울인 채 목에 힘을 딱 주고

시선은 오직 땅에 고정,

때때로 그 힘겨운 눈을 치켜뜨며 몇 미터 앞 길을 주시하며 묵묵히 나아간다.

 

 

 

 

그 노련한 시선과 여행자의 눈길이 마주칠 때

그들은 어김없이 미소 짓는다.

그 힘들고 고된 짐의 무게에 짓눌려 마음도 무거울 거라는 생각은

단지 여행자들의 상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이 설산에서 만난 대부분의 포터나 짐꾼들은

그 순수한 눈빛에 수줍은 미소를 품고 있다.

 

때때로 짐꾼들의 풍경은

이 히말라야 속의 또 다른 설산이요 산맥처럼

이미 이 풍경 속의 한 자락을 형성하는 또 다른 살아있는 자연 그 자체다.

 

 

 

검은 새들의 불규칙한 움직임처럼,

저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고산 야생화들의 생명력처럼,

저 설산 주위로 붙었다 떨어지고 사라졌다 생겨나기를 반복하는

감감 도는 구름의 출몰처럼,

저들 셀파 족들의 걸음 걸음 속에는

또 다른 히말라야가 맥박처럼 흐르고 있다.

 

사람이면서 인위적이기를 거부하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택한, 말하자면 자연주의자,

그러나 그것 또한 듣기 거북한 하나의 거추장스런 수식일 수밖에 없는

‘그저 거기,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곳,

그곳이 바로 히말라야다.

 

한 무리의 트레커들이 내려오고 있다.

안나푸르나에서는 줄로 홀로, 혹은 둘이서 오는 여행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 반해

이 곳 에베레스트 지역에서는

주로 이처럼 팀을 이루어 찾아 오는 사람들이 많다.

 

 

 

 

4,800 고지를 흐르는 생명수

 

두사(Duda, 4503m) 마을을 지난다.

마을이라고 해야 집 두어 채가 전부인데다

그곳조차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전혀 인기척이 없다.

아마도 그저 목장 주인이 때때로 야크를 데리고 풀 뜯으러 올 때나 잠시 들러

바람을 피해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두사에서 약 30분 쯤 더 걸으니

산산한 작은 계곡을 감돌아 토클라(Thokla, 일명 Dughla, 4620m)가 나온다.

 

 

토클라 또한 롯지 두세 곳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를테면 딩보체나 페리체에서 로부체로 가기 위해

잠시 쉬어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는 간이역인 셈이다.

 

 

 

토클라 롯지 앞 빈 의자에 잠시 앉는다.

몇몇 여행자와 포터, 그리고 짐꾼들이 야외 식당에 잠시 걸터앉아

풍연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롯지 뒤로는 바로 설산이 휘몰아쳐 있다.

바람에 펄럭이는 룽다 조차 잠시 쉬어가는 곳,

새들만 바삐 먹이를 찾느라 롯지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너무 오래 지체할 수는 없다.

잠시 호흡을 고르며 배낭도 풀지 않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

이십 여 미터를 오르다

고개를 돌려 다시금 토글라를 바라본다.

 

 

이제부터는 다소 가파른 오르막 하나를 넘어야 한다.

숨을 고르고는 이제 다시 출발! 4,600 이상의 고도에서

오르막길을 오른다는 건 아무래도 호흡에 벅찬 일이다.

단숨에 200미터를 올라 4,800고지를 밟아주겠다던 야무진 계획이

호흡에서 턱턱 막힌다.

 

한두 걸음 걷고 잠시 멈춰 서서 호흡을 고르고,

몇 걸음 걷고 거친 숨을 헉헉거리며 쏟아내면서

느린, 아주 느린 발걸음을 꼬무작거리며 꾸준히 옮긴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그야말로 단숨에 뛰어 올랐을

평범한 언덕 정도인데 보는 것처럼 만만하진 않다.

 

 

 

포터 지텐은 벌써 저 멀리 달아났다.

지텐은 언제부턴가 출발하고 나면

으레 알아서 다음 코스에 먼저 가서 쉬면서 기다리고 있다.

고지로 올라갈수록 현지인들과의 호흡 차이가 금방 드러난다.

그야말로 체력 차이라기보다는 호흡 차이가 아닌가 싶다.

저들은 이 숨쉬기 힘든 고지에서 아주 헐하게 산을 오른다.

 

가파른 비탈길을 도드밟아 꼭대기에 올라서니

초르텐들이 줄지어 서 있고,

룽다가 여기저기에서 외로운 진혼곡을 부르듯 처연하게 흩날린다.

 

 

이들 초르텐은 이 쿰부지역 설봉을 오르다가 명을 달리 한

세계 각국의 히말라야 등반 대원들을 위한

추모와 명복을 비는 개개인의 무덤 내지는 묘탑이다.

 

 

 

 

 

 

잠시 숙연해진다.

내 마음만 숙연해 지는 것이 아니라

공기도, 룽다도, 바람도, 흙과 바위도,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숙엄하게만 느껴진다.

 

로부체 방향으로 백여 미터 더 걸으니

장쾌한 시야가 터지며 또 다른 호장한 풍경을 빚어낸다.

 

 

 

좌우 설산을 배경으로 계곡이 흐르고

이제부터는 계곡 옆길을 따라 걷는다.

햇빛에 반짝이는 계곡물이 완전히 살아있는 그 어떤 생명력을 연출해 낸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어떤 생명을 본다.

그것은 단순한 하나의 물이 아니라

무언가 모를 생동하는 깊은 존재의 숨결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흐르는 물이 다 그렇지만 유독 이곳에서 만난 계곡물에서는

더없이 강렬한 생명의 연주를 감지한다.

어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4,800고지 이 높은 곳을 흐르는 생명의 물이 아닌가.

 

나는 때때로 흐르는 물 앞에 서곤 한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내 안의 아주 내밀하고 깊은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일상적이지 않은 그 어떤 새로운 박동이 느껴진다.

완전히 살아 생동하는 그 어떤 우주적 흐름과도 같은,

혹은 내 안에서 흐르고 있는 수대(水大)의 여린 움직임의 감각과도 같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히말라야의 맑고도 시린 호흡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다.

내 호흡과 히말라야의 호흡이 일치를 보는 듯,

이 생기어린 주변 환경과 걸음과 호흡이 마치 하나가 된 듯,

걷는다는 사실도 잊고 걷는다.

 

모든 것이 조화롭고 순화롭다.

유장한 침묵이 흐른다.

이 묵연한 선정을 따라 내 존재도

자연스레 본래의 커다란 침묵과 공명을 이룬다.

평소 같았으면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며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을

생각이라는 목소리들이 이 고요한 풍경 앞에 넋을 잃었는지

끼어 들 틈을 잃었다.

 

저 산 아래에서는 매일같이 내 존재를 복잡하게 휘어잡던 온갖 것들이

제자리를 찾고 질서를 찾아가는 듯하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다.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서 모두가 충분히 제 몫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나 또한 이 길 위를 걷고 있음으로써

내 몫의 삶을 표연히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이 순간 내 존재의 몫은 길 위를 그저 걷는 것에 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100% 순수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내가 그 어떤 엄청난 성취를 할 때나,

대단한 일을 이루어냈을 때보다도

그저 지금 이렇게 걷고 있음으로써

오히려 완전히 삶을 연소하고 있다는 생생한 존재감이 깃든다.

단순히 걷는다는 행위 속에서

이렇게 충장하고 꽉 찬 삶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배운다.

 

우리 삶에 있어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행위를 하느냐보다

그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데 있지 않나 싶다.

 

행위 자체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아무리 성스러운 행위일지라도 그 행위 하는 자의 마음속에

삿된 생각이 끼어들어 있다면

그것은 먼저 우주에서 알고 그 행위를 성스러움에서 배제시키겠지만,

아무리 사소한 행위를 하고 있을지라도,

심지어 겉으로 보기에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행위자가 온전히 깨어있음으로써 그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진리에서의 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행위 자체보다 행위의 바탕을 이루는 마음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다.

 

 

 

계획은 언제든 변경될 수 있다

 

물길을 따라 한두 시간 걸었나 싶더니

거짓말처럼 이 처연한 땅 위에 계곡 옆으로 작지만 빼어난 풍경의 마을,

로부체가 나타난다.

 

 

 

 

6,000미터 로부체 피크를 비롯해

7,000, 8,000미터의 거대한 지붕들을

마치 뒷산 거느리듯 연꽃처럼 옴팡진 곳 꽃술자리 한 가운데

로부체 마을이 꽃처럼 피어나 있다.

 

이 마을이 바로 오늘 하루를 신세질 곳인데,

서너 곳 있는 롯지는 이미 이른 아침에 다 차서 방이 없단다.

사정을 알고 봤더니 요즘 같은 성수기 빅시즌에는

단체 트레커들이 자신의 포터를 전날이나 당일 새벽부터 로부체 마을에 먼저 보내

방들을 전부 잡아 놓는다고 한다.

 

더구나 로부체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칼라파타르를 오르기 위한

전진기지와 같은 곳이라

다양한 루트로 올라 온 사람들이

거의 전부 이곳에서는 꼭 하룻밤을 묵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보니

더욱 방 잡기가 힘든 곳이다.

 

그런 사정이다 보니 이 곳 로부체뿐만 아니라,

고락샵, 종라, 고쿄 등 정상 부근 사람들이 붐비는 전초기지로서의 마을들은

항상 방 잡는 일이 전쟁과도 같다고 한다.

 

 

 

 

마침 우리 지텐이 잠시 기다려 보라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로부체 위로 두세 시간 거리, 내일 하루 묵기로 계획된 고락샵에

마침 도미토리 침대 딱 한 자리가 남았다고 그곳이라도 가겠느냐고 묻는다.

 

그마저도 누가 고산병으로 부랴부랴 내려가는 바람에

조금 전에 취소된 자리라고 한다.

당연히 따지고 생각할 겨를 없이 고락샵에 가서 묵기로 한다.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어제 5,000고지의 낭카르창 피크를 다녀왔으니

고산 염려는 안 해도 될 거라는 지텐의 말을 듣고

조금 더 힘을 내기로 했다.

 

사실 고락샵까지 안 가고 오늘 하루 로부체에서 자고

내일 고락샵에서 자기로 계획한 이유는

거리가 멀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고산 적응을 위한 계획이었다.

 

지금부터의 높이에서는

고산병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 여행자들의 조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렇게 된 바에야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법계에 맡기고 그저 인연 따라 갈 수밖에.

 

어쩌면 이것이 더 깊은 차원의 나와 연결된 우주 법계의 지성이

나를 위해 준비한 본연의 계획이었을지 모른다.

언제나 나의 생각, 인간의 판단과 계획보다는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차원의 세계에서

준비한 더 깊은 계획에 맡기고 산다는 것이야말로

내 삶의 중요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저 믿고 맡기며 자연스러운 우주의 이치대로 흐르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너의 일과를 하느님께 맡기라’고 했던 성경의 가르침이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 혹은

‘아상을 버리고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

노자가 말했던 ‘무위자연’의 이치 또한 바로 그것이다.

 

내가 계획했던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가안(假案)의 계획일 뿐,

‘절대’ 바꿀 수 없는 계획은 없다.

언제든 그 계획은 바뀔 수 있다.

유연하고도 활짝 열려 있는 마음으로

미리 잡아 놓은 계획에 집착하지 않는다.

 

여행의 일정도 그렇고, 삶의 여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내일, 아니 당장에 다음 순간 벌어질 일에 대해

내가 무엇을 결정적으로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혹은 이 계획대로 되야만 한다’고 고집하게 되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괴롭다.

 

그러나 계획은 있되 그 계획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이치에 나를 맡기다 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아니 오히려 내 앞에 펼쳐질 수많은 가능성에 대해

활짝 마음을 열어 둠으로써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과 마주할 투명한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보통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정해 놓으면 스스로 정한 그 틀에 갇혀

새로운 가능성으로 눈을 돌리지 못한 채,

그 틀 안에서의 비좁은 삶만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그런 사람에게 삶은 진부하고 반복적인

그냥 그런 통속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정해진 방식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내 앞에 펼쳐질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삶에 나를 활짝 열어두고,

그 어떤 것이 오더라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매 순간 순간의 삶이 새롭고 창조적이며

나아가 영적인 차원과 접촉할 수 있는

깨어남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것이기도 하다.

 

계획이 변경되었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혹시 고산병이 걸리더라도 그 또한 새로운 하나의 가능성이자,

새로운 체험의 하나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래서 최종적인 목적지의 하나였던

칼라파타르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지라도

그리 좌절할 바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의 성공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순간 성공만이 있을 뿐이지 실패란 없다.

더 깊이 들어간다면 실패도 성공도 없고

다만 우리 생각이 성공이라고 혹은 실패라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일 뿐이다.

 

판단과 해석을 놓아버리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성공적이다.

사실 모든 실패는 실패했다는 생각일 뿐이지 실패가 아니다.

 

이 고지대에서도

봄처럼

아름다운 노오란 꽃이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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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이틀 머문 남체에 벌써 정이 든 것인지,

발걸음을 떼려니 꽁대와 남체바자의 풍광이 시선을 잡아 끈다.

 

 

 


 

 

매 순간 순간의 현실에 나를 활짝 열어 둔다.

진정 열려있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진하게 느낀다.

이 대자연의 모든 것이 그 어떤 걸러짐도 없이 파도치듯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것들을 받아들여 충분히 느끼는 것 뿐이다.

 

남체에서 텡보체(Tengboche, 3860m)까지의 첫 번째 구간은

어제 에베레스트 뷰 호텔에서 보았던 바로 그 길로

두세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웅대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아! 이것은 자연이 만들어 내는 장엄한 예술작품이요

엄중한 오케스트라이고 설산의 대서사시다.

 

발걸음과 호흡과 눈에 비친 대자연이 투명한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되어 걷는다.

아! 그렇다. 이것은 걷는다기 보다는 그렇게 하나가 되는 과정이 아닌가.

 

 



 

 

설산을 배경으로

하얀 설산과도 같은 스투파(탑)가 우뚝 서 있다.

 

 

 

 

여행자는 길을 걷다

스투파 앞에서 예를 올린다.

 

이 장엄한 스투파 앞에서 모든 종교는 하나다.

종교의 틀이라는 것조차 조잡한 하나의 형식이 아닐까 하는,

그리하여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장대하고 너른 사유가 희말라야에서는 저절로 피어오른다.

 

아마다블람과 스투파의 미묘한 조화.

 

 

 

 

왼편으로는 에베레스트를

오른편으로는 탐세쿠, 아마다블람, 눕체 등의 영봉을

함께 걷는 구도의 도반처럼 곁에 두고 푸르른 하늘길을 걷는다.

 

 

 

 

 

한 두 시간 쉬엄 쉬엄 걸으면 사나사가 나오고,

두어 채의 롯지와 기념품 판매하는 곳에 이른다.

잠시 롯지 마당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롯지의 툭 트인 전망을 바라본다.

 

 

 

 

 

이 곳까지 함께 걸어 온 많은 여행자들이

이 곳 사나사에서부터 고쿄로 가는 팀과 에베레스트 방면의 팀으로 나뉜다.

 

사나사를 지나다 보면 좌측 오르막길로 쿰중 가는 길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고쿄와 에베레스트의 두 갈래 길이 나온다는 것을 안내하는

반가운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희말라야를 다니면서 어지간 해서는 갈림길이라도 이정표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이정표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갈림길임을 대번에 알 수가 있다.

위쪽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오르막이 고쿄로 가는 길이고,

아래쪽 숲길이 에베레스트와 칼라파타르로 가는 길이다.

 

남체에서부터 사나사를 지나 점심을 먹을 곳인 푼키텡가(Phunki Tenga, 3250m)까지는

평탄하거나 완만한 내리막이다.

가벼운 발걸음이 마음까지 경쾌하게 만든다.

설산 봉우리 중에도 단연 눈에 띄는 아마다블람을 가까이 곁에 두고 함께 걷는다.

 

 

 

 

 

아! 비로소 나는 지금 이 길 위에 아무런 기대도 없이, 아무런 바람도 없이

그저 그저 걷고 있을 뿐이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것들이 놓여지고

지금 이 순간 내 앞에는

바로 다음의 발걸음과 한 호흡의 들숨과

눈앞에 펼쳐진 하이얀 산맥의 현존만이 강물처럼 흐른다.

 

 



 

 

아! 이 느낌!

이 현존,

모처럼 잊혀졌던 그 무언가들이 다시금 새록새록 존재 위를 흐른다.

 

푼키텡가 조금 못 미처 타싱가(Thasinga, 3600m)를 지나니

동네 아이들이 숲속을 놀이터로,

꺾어진 나뭇가지를 시소삼아 올라 타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마을길을 지나 설산 초오유에서 발원한 두드코시를 지나는 다리를 건넌다.

두드코시는 우유란 뜻의 두드와 강이란 뜻의 코시가 합쳐진

우유빛을 띄는 빙하 녹은 물로

빙하물은 미세한 광물입자들을 함유하고 있어 빛과의 산란작용에 의해

우유빛 바탕에 푸른 에머럴드 색을 동시에 띈다고 한다.

 

 

 

 

이 두드코시가 언뜻 보기에는 그저 작은 산골의 골짜기 같지만,

이 강이 흘러 흘러 인도인의 영혼의 고향, 갠지즈강으로 뻗어나가고

최종적으로 인도양까지 흘러들게 되는 장대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발원지인 셈이다.

 

 

 

 

 

두드코시를 건너 푼키텡가에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자리가 꽉 찬 터라 저쪽 구석자리에 홀로 앉아 계시는 지긋한 어르신께

옆 자리 함석을 여쭙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산에서 한 번도 보아오지 못했던 한국분이 아닌가!

“한국 분 아니세요?”

하는 물음이 얼마나 반갑던지.

춘추가 60이 넘으셨는데 이렇게 정년 퇴직 후에 산으로 산으로 떠도신다고 한다.

 

퇴직 후 지난 몇 년간 세계 도처를 여행하시다

요즘은 네팔의 설산에 반해 안나푸르나, 랑탕에 이어 이렇게 에베레스트까지 오시게 되었다고.

희끗희끗한 연세에 홀로 저렇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물론 그만한 경제적 여유도 있어야 하니

특별한 소수 특권층이나 가능한 것이라고 혀를 차는 사람들도 주위에 있다고 하던데,

이 어르신의 대답은

“물론 그것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돈이 있어도 못 오는 사람도 많고,

또 조금만 절약하면 인도나 네팔 같은 나라는 한국에서 지내도 그 정도의 돈은 쓸 정도”

라고 항변하신다.

 

아내나 자식들과 함께 오고 싶어 아무리 설득을 해도

 “그 험한 산에 힘들게 왜 가느냐?”고 한다네.

 

그런 거 보면 모든 것은 제 마음이 동해야 하지

아무리 좋은 것도 저 싫다면 그만이다.

 

 

 

 

그래서 때때로 삶을 힘겨워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방법 같은 것을 알려줘도 그것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자기 자신만의 관점과 견해와 좋고 싫은 어떤 견고한 틀이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진정으로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비우고 활짝 열 수 있어야 한다.

가슴의 창이 닫겨 있으면

그 창으로 지혜도, 행복도, 풍요로움도 들어갈 수 없다.

 

닫혀진 마음에는

늘 자신의 기존 관점이나 색안경으로 걸러진 선택적인 것들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갈 때는

언제나 빈 마음이어야 하고,

자신을 완전히 내려 놓고

‘내가 옳다’고 여겨 온 모든 울타리를 걷어 치우고 친견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자기 고집, 아상과 아견을 꽁꽁 움켜쥔 채 찾아간다면

붓다나 예수를 만날지라도 거기에 소통과 참된 이해는 깃들지 않는다.

그 때 우주는 당신을 도울 수 없다.

늘 충만한 우주의 도움을 당신은 스스로 닫음으로써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인연 없는 중생은 붓다고 구제하기 어렵다”고 했다.

 

잠시의 대화를 뒤로한 채

점심을 마치신 어르신은 포터와 가이드를 영솔하며 먼저 길을 나서신다.

점심을 먹고 이 곳 롯지에서 파는 상점을 잠시 돌아 보며 숨을 돌린다.

 

 

 

 

 

이 곳 푼키텡가부터 텡보체까지는

무려 고도 600미터를 단숨에 올라야 하는 가파른 오르막 구간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오른 무릎의 통증은 여전하다.

오르막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 오르며

오른 무릎으로 주의력을 옮긴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그곳에서 감지된다.

그것을 탓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빨리 나으라고 재촉하지 않고

다만 그 작은 통증을 가만히 지켜보며 걷는다.

 

지켜보는 동안 그 통증은 사실 ‘통증’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저 단순한 어떤 느낌일 뿐이다.

공연히 그 하나의 생생한 느낌에 ‘통증’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걷다보면 그것은 싫은 어떤 느낌이 아니라

그저 그것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오히려 지켜보는 가운데 생기로운 생명력 같은 무엇을 느끼게도 되고,

그것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 같은 것을 느끼게도 된다.

그 하나의 통증이 오히려 명상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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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례적으로, 고산증세가 오기 시작한다는
3,440고지 남체바자에서
많은 여행객들은 고산적응 시간으로 이틀 밤을 머문다.

도착한 다음날 바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고산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으로 하루를 더 머물며,
주로 남체바자 마을의 뒤쪽 산 위에 자리잡은 샹보체(syangboche, 3720m)와
아마다블람(ama dablam, 6,856m), 로체(lhotse, 8,516m), 타보체(Taboche, 6367m),
탐세르쿠, 에베레스트(everest, 8,850m) 등의 영봉들이 환히 보이는
일본인이 소유의 에베레스트 뷰 호텔(Everest View Hotel, 3900m)을 다녀오는 일정으로
하루를 더 보내곤 하는 것이다.

물론 나 또한 그 관례를 따르기로 한다.
때때로 젊고 혈기 왕성한 트레커들이 하룻밤 고산적응 시간 없이,
또 얼마나 빠른 시간내에 완주를 이루어내나 내기라도 하듯
하루 사이에 700~1,000 고도 이상을 오르는 강행군을 며칠이고 이은 끝에
몇몇은 당연한 고산증세로 뛰쳐 내려오거나 실려 내려오고,
또 몇몇은 그 초월적인 일정을 신기하게도 무사히 마침으로써
세간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으쓱한 자기 과시도 이어가는 경우도 있더라고 한다.

나야 시간도 느긋하게 잡았고,
빨리 오르는 것이 목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고,
생에 처음으로 친견하는 희말라야 산군에게 나를 낮춰 겸손한 마음으로
법신(法身)을 친견하듯 오르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모은다.

이른 새벽, 아직 동도 터오기 전에 저절로 잠에서 깨어났다.
찌뿌등한 몸을 좀 풀고
아래층 화장실 옆 작은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두꺼운 방한복을 껴입고 나왔는데도 도저히 추위가 가시지를 않는다.
그나마도 전날밤은 두꺼운 이불을 두 개씩이나 무겁게 누르고 잤기에
설치지 않고 푹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드디어 동쪽 하늘이 어둠을 뚫고 짙푸른 빛으로 물드는 듯 하더니
콩대(Kornde, 6187m)의 만년설 봉우리 위로 황금빛 일출이 시작된다.



방에 올라가 커튼을 활짝 열었더니
창문 밖으로 콩대 봉우리가 액자에 걸린 그림처럼 펼쳐진다.

 


 

봉우리의 일출을 방 안에서 마주하며
그 황금빛 붓다의 성상을 향해 차분히 예불을 올린다.

아침 식사를 롯지 식당에서 간단히 마치고,
바로 뒷산 격인 샹보체를 오르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일찍부터 산을 오르는 여행객들도 드문 드문 눈에 띄고,
이 높은 곳에 학교가 있는 것인지 가방을 둘러 여학생들과,
목에 댕댕 거리며 종소리를 울리고 무겁게 걷는 야크들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함께 길을 오른다.

 

 






샹보체를 향해 한발 한발 오르는 동안
남체바자의 조망이 한층 드넓게 트이면서
이윽고 산정에서 하나도 가리지 않은 알몸의 남체 전경을 만난다.





남체바자는 그야말로 희말라야 산정 마을의
그 어느 곳보다 크고 아름다우며 성스럽다.
안나푸르나의 촘롱이나 간드룽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조망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샹보체를 향해 걷는다.



능선을 따라 오르다보면 너댓집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작은 마을 풍경이 펼쳐지고,

 
20여 분 더 오르면 바로 샹보체가 나온다.
샹보체가 상 정상에 있는 마을의 이름인줄 알았는데
마을이라기 보다는 황량한 초원벌판의 비행장이다.
롯지가 두어 곳 있고, 그 옆으로 너른 비행장이 펼쳐져 있다.
말이 비행장이지 그저 헬기장 수준의 너른 벌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샹보체, 툭 터진 비행장의 전경 앞에 앉아 호흡을 돌린다.
흡사 골프장 잔디밭을 연상케 하는 자연 그대로의 푸른 초원,
그 건너편 위로 솟아오른 구름에 반쯤 가려진 탐세르쿠와 캉테가 만년설산,
산행하기에 적당한 날씨와 따스한 햇살,
산들 산들 불어오는 달콤한 바람까지 모든 것이 꿈같고, 선연하여
마음을 추스르기 힘겨울 정도다.

 

 




초원의 비행장 좌측 얕은 산 정상 위에
캉테가와 탐세르쿠를 병풍처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롯지 하나가 시선을 잡아끈다.
그것이 희말라야 뷰 호텔인가 했더니 호텔은 그 롯지 너머에 있다고 하네.



한참을 앉아 있자니 미니 비행기 한 대가 루클라 쪽에서 날아오더니
남체와 샹보체를 한 바퀴 휘휘돌아 건너편 산 뒤로 사라진다.



그리고 또 잠시 뒤 한 대의 헬기가 날아오더니
샹보체가 이렇게 어설퍼 보여도 헬기장이 맞다고 소리치는 듯
웅웅거리는 큰 소음과 함께 프로펠러를 휘날리며 착륙한다.



한참 전부터 헬기장 한 편에 서 있던 일단의 여행자들이
헬기에 몸을 싣고 짐을 싣더니 곧장 수직 상승하며 날아간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 곳 샹보체에서 헬기를 통해
곧장 카투만두로 가는 헬기 교통편이 있다고 한다.
대략 1인에 50만원을 상회하는 금액이 든다고 하니
우리 같은 최대한 아끼며 다니는 배낭여행자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나마도 오늘같이 날씨가 좋은 날은 상관이 없지만,
부득이하게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은 미리 선금으로 헬기값을 지불해 놓고도
구름 속에서 헬기 소리만 듣다가 착륙을 못해 타지 못하고
걸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런 경우 일단 헬기가 떴기 때문에
비용을 되돌려 받지는 못한다고 하니
그 막대한 비용을 고스란히 버리고도
신의 뜻이라는 한마디에 숨을 죽일 수밖에 없다.

한참을 앉아 쉬었더니 설산을 휘휘 돌아 불어오는
툭 트인 초원의 시린 바람을 온몸으로 마주하느라 한기가 느껴진다.
샹보체에서 비행장 좌측편으로 보이는 얕은 언덕 사이로
희말라야 뷰 호텔, 그리고 쿰중과 연결되는 길이 보인다.



언덕길을 따라 오르니 쿰중과 호텔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산정 즈음에
스투파 하나가 당차게 서 있다.

 

 

 
우측 비행장 옆으로는 그림 같은 노오란 초원이 펼쳐진다.



좁은 숲길을 산책하듯, 경행하듯
길가에 자유로이 피어난 꽃이며 작은 풀들에 마음을 빼앗기며 걷는다. 

 

 

 

 

 


조금 더 걸으니 거짓말처럼
모든 희말라야의 봉우리들이 환희 보이며
내일부터 걸어 올라가야 할 마을들이 한눈에 펼쳐지는
언덕 위 아름다운 뷰포인트를 만난다.



좁은 숲길에서 꽃들과의 숨바꼭질을 하다가 숲길 끝나는 곳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이 전망 좋은 풍경을 만나니
무슨 선물이라도 받은 듯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하다.
이 전망 좋은 풍경을 놓칠세라 여행자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며 감탄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 곳에서 위쪽 능선길을 따라 오르면 또 다른 쿰중으로 가는 길이고,
아래쪽으로 산허리를 가르는 작은 오솔길이 에베레스트 뷰 호텔로 가는 길이다.
이 아래쪽 호텔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일부러 만든 것처럼
절벽 같은 산사면의 구부능선 즈음에
길 옆으로 빨갛고 노오란 꽃들이 앞다퉈 피어난
그야말로 그림 같은 길이다.

 



황막히 불어와 뺨에 박히는 칼바람만 아니어도
이 길가에 앉아 가만가만 살펴도 보고,
여유있게 누워서 하염없이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보고,
앙증맞게 피어난 울긋불긋한 꽃들도 바라보고,
건너편 우뚝 솟아오른 만년설산에도 눈길을 주면서,
그러다가 심심하면 책도 읽어가면서 오후 내내 염연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오히려 에베레스트 뷰 호텔보다 호텔로 가는 길이 더 뷰 포인트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 30여 분을 걸어 호텔에 도착,
호텔 야외 전망대에서 따뜻한 레몬티 한 잔으로 몸을 녹인다.

 



설산의 봉우리들이 자신의 하얀 살저름에서 떼어내 구름을 만드는 것인지
새벽에는 구름 한 점 없이 청연하던 하늘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구름으로 뒤덮인다.



주로 구름은 텅 빈 하늘을 떠 다니는게 아니라
산봉우리 주변으로 띠를 이루며, 연모의 포옹을 하듯
그렇게 달라붙어 있다.

때문에 구름으로 뒤덮인 설산 봉우리들을 뚜렷이 보지 못하는게 아쉽다.
곁에서 전문 사진장비를 갖추고 숨죽이며 전망을 주시하던 일본인 사진작가 두 분이
일본인 특유의 말투와 억양으로 투박한 영어를 내뱉으며
두 팔을 뻗어 구름을 확 걷어내고 싶다는 몸짓을 보이면서 아쉬워하고 있다.

타박타박 걷던 길을 다시 돌이켜 남체바자로 향한다.



한적하게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선명한 희말라야를 흠뻑 느껴본다.
남체로 내려가는 길에 부채꼴 모양의 선명한 남체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본다.

 



샹보체와 호텔을 두루 돌아 왔는데도 오후 시간이 고스란히 주어졌다.
점심을 먹고 몇몇 트레킹 샵을 돌아본다.
엊그제 팍딩에서의 추위가 생각나
든든한 겨울용 침낭을 빌리러 몇몇 곳에서 가격을 살핀다.

어떤 가게에서는 하루 대여료가 200루피,
또 다른 가게에서는 150루피였는데,
한 가게에서 살짝 얼굴만 내밀고 물었더니 80루피를 부르는게 아닌가.
너무 반가워 가게에 들어서니, 내 모습을 위아래로 살피다 말고
“Japan?” “Korea?” 하더니 바로 다시 150루피를 달라는게 아닌가.

방금 전 분명히 80루피라고 했는데 왜 그러냐고 따져 물었더니
웃으면서 살짝 보고 네팔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하며,
어차피 말했으니 그럼 그렇게 하자고 시원스레 침낭을 보여준다.

한국이나 일본인들의 여행자들이 트레킹을 하러 많이 오는데,
처음 출발할 때는 여행자 같다가도 일주일 이상 지나고 나면
까맣게 탄 얼굴이며, 씻지 않은 몸, 헤어지고 더러워진 옷가지 등으로 인해
말만 안 하고 있으면 네팔 현지인이라고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래도 이렇게 때때로 그 덕을 보기도 하니 그도 좋은 일이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의자를 가득 메우고 있다.
혼자라 이런 점이 좋다.
그저 자리가 없어도 한 자리 정도야 아무 곳이나 끼어 앉아도 좋다.

대부분 롯지 식당의 특색은
우리나라처럼 따로 따로 4명, 8명씩 앉도록 해 놓은 것이 아니라
ㄷ자로 만들어진 회의장을 연상하면 딱 맞다.

덕분에 오붓하게 세계 각지의 여행자가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도 보내며 또 서로에 대해, 나라에 대해, 또 자신이 먹는 음식들에 대해,
그리고 대부분은 주로 다음 트레킹 일정이나 루트에 대해 묻고 답하면서
이런 저런 정보교환과 살풋하고 정감어린 교류의 장을 마련하곤 한다.

그야말로 자기 나라 사람들끼리, 혹은 일행끼리만 어울리는 것이 아닌
모두가 같은 산에 오르는 동료 의식을 가지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활짝 열린 소통의 장을 만들어 가고 있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 삼면으로 둘러쳐진 테이블 가운데는
어릴적 초등학교에서 보았을 법한 뗄감 난로가 있고,
그 주위로 여행자들의 시선이 차분히 오고 간다.

묵묵히 맛있게 밥을 먹는 사람,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몸을 녹이는 사람,
다정히 웃고 떠드는 한 무리의 사람들 하며,
그윽한 오랜 중년의 부부,
또 한 켠에서는 머리에 해드랜턴을 켜고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
그 가운데 난로 주위로 현지인 포터들의 다정한 이야기꽃하며,
접시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는 식당 종업원들까지,
이 설면한 풍경이 가슴 속에 짠하게 사진 찍히듯 박혀 온다.
두고 두고 롯지의 저녁 시간은 추억속에 아롱질 듯 하다.

보통 6시 쯤이면 저녁 식사를 하니
7시 쯤부터 시작되는 저녁의 호젓한 시간을 다른 이들은 어떻게 보낼까!
아마도 하루 이틀은 이 텅 빈 시간이 낯설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늘 할 일들로 북적이며,
우리의 집에는 언제나 TV와 인터넷이 저녁시간을 가득 채운다.
이제 이 낯선 어둠의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이런 때야말로 우리가 진정 여행을 떠나는 의미에 답해 주는 공간이 아닐까?
이런 일상에서 누려보지 못한 모처럼의 그윽한 순간 조차
포커와 화투를 들고 와 때로는 소량일지라도 돈까지 오가며
곁에 있는 여행자의 여유로움까지 방해하는 일은
때때로 눈살을 찌뿌리게 한다.

물론 홀로가 아닌 함께하는 여행에서는
때때로 적당한 그런 놀이가 어쩔 수 없는 관계형성의 장을 채우는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너무 과하면 무엇이든 문제가 된다.

그래서 홀로 떠나는 여행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여행의 질적 차원이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도 좋지만,
내가 홀로 떠나는 여행을 즐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녁을 먹고 오늘도 어두운 마을길을 따라 랜턴에 의지하며 가벼운 산책을 즐긴다.
제법 큰 마을이라 그런지 팍딩에서의 산책과는 다른
분주하고 활기찬 풍경이 이 무거운 어둠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듯 하다.

나처럼 터벅터벅 소요를 즐기는 사람,
가벼운 쇼핑을 즐기는 사람,
미쳐 준비하지 못한 트레킹 용품을 구입하는 사람,
그리고 이 먼 산에서 느려터진 속도에 인내심을 키워가며
비싼 인터넷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
- 참고로 카투만두에서는 1시간 80루피하는 인터넷 비용이 이곳에서는 1분에 100루피 - ,
또 모처럼 1년 만에 대목을 맞은 트레커 용품점 주인들의
손님을 끄는 능숙한 목소리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몸짓들이 이어진다.
이 모든 것이 그윽하고 아름답다.

산책을 마치고 나도 시간이 아긋하다.
나 같아도 다른 때 같았으면 이 밤중의 시간을 무슨 일을 한다,
글을 쓴다, 뉴스를 시청한다, 인터넷을 한다고 바빴을 터다.
이번 오랜 순유(巡遊)에서는 그 모든 것이 여행을
떠남과 함께 내던져지고
저녁시간의 여유가 오직 나 자신과 함께 존재하는
깨어남의 공간으로 바꾸어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 이번 여행의 투명하고도 오롯한 아름다움이 되고 있다.
잠들기 전의 투명한 깨어있음은 밤과 잠자는 시간 내내 이어지고
우리의 잠을 순수하고 청연하게 만든다.

잠들기 직전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거나,
좋지 않은 뉴스를 듣거나, TV를 켜두고 자거나 할 경우는
그 무의식적인 혼란이 밤중 내내 이어지고
때때로 그것은 우리의 꿈까지 쫓아와 의식을 혼란에 빠뜨리곤 한다.

그런 밤을 보내고 새벽을 맞이해보라.
예민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 찌뿌드하고 개운하지 않은 의식의 흐려짐을 경험할 것이다.

그래서 죽기 직전의 의식상태가 다음 생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하듯,
잠들기 직전의 의식상태가 중요한 것이다.
새벽녘 오랜 계곡의 투명한 폭포수처럼
잠들기 직전의 깨어있는 현존은
밤과 새벽 뿐 아니라 그 다음날의 의식의 밑바탕을 이루곤 한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듯
마음을 예민하게 지켜 본 사람이라면 그 차이를 느낄 것이다.

오랜 인도 여행에서 보다
오히려 지난 안나푸르나에서,
그리고 이번 쿰부 에베레스트 순례에서
저녁시간의 명징함이 더욱 빛나고 있음을 느낀다.

이 깊은 의식의 빛이 점차 매 순간순간으로
그 투명함을 전달해 주는 듯하다.
낮 시간 동안 걷는 걸음걸음 사이에,
오르막을 오르는 그 숨가쁜 호흡 사이에 맑은 공간이 생겨나고
그 하나 하나의 발자국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한 발걸음의 아름다움, 한 순간의 온전함,
매 현재 현재의 전체성이 이론과 생각을 너머
저 희말라야 봉우리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듯
조금씩 높고 깊은 내면의 희말라야로 가까워 옴을 느낀다.

명상도 일상 속에서의 그것과
여행 속에서의, 자연 속에서의 그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래서 저 티벳의 밀라레빠는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은 성취된 것’이라고 했던 것일까.





Posted by 법상

 

 

이제 본격적으로 설산의 초대를 받는 것인가 싶어
마음을 다시한번 추스르며
삼보일배를 올리는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조붓한 발걸음을 옮긴다.

탐세쿠, 캉테가(kangtega) 영봉들이 연이어 마중을 나오고
설산의 빙하가 녹아 흘렀을 남빛 계곡물이 길벗이 되어 흐르며,
이 믿기 힘든 풍경 위로 그림 같은 아름다운 계곡마을이 펼쳐진다.

아! 이것은 한 폭의 그림,
어찌 이 속에 애살스럽고 어루꾀는 천박한 사람들이 살 수 있겠는가.
그를 애워싸고 있는 둘레 환경은
곧 자기의 분신처럼 업의 투영으로 그곳에 있는 것이다.

내 주변에 사기꾼이 많다면
그것은 곧 내 마음에 사기의 업이 있는 것이고,
내 주변에 나를 돕는 이들이 많다면
나의 마음 한 켠에 이타심이 춤추기 때문이다.

내가 살면서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상황도, 그 어떤 문제도, 그 어떤 환경도
사실은 모두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내 마음이 외적으로 투영된 것일 뿐이다.

내 안에 없는 것들은 내 앞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똑같은 환경 속에서, 똑같은 일터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어떤 사람에게 그곳은 지옥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 그곳은 천국일 수도 있다.
마음이 세상을 만들어내기 때문.

똑같은 조건, 똑같은 세상 속에서
어떤 이는 지옥을 경험하고 어떤 이는 자유를 경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 하나가 바뀌면 세상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마음이 바뀌면서 세상 자체가
그 어떤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개벽을 이룬다는 말이 아니라,
내 마음에 비친 세상이 바뀜을 의미한다.

똑같은 물을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되지만
젖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는 것처럼.
마음이 바뀌면 독이 우유로 바뀌고 불행스럽던 현실이 행복으로 바뀐다.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주변 환경은 그 속의 사람을 바꾸고,
사람은 그 주변 환경을 바꾼다.
모든 것은 상의상관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이 사는 곳은 그 풍경도 아름다워지고,
아름다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풍경 덕분에 마음이 아름다워진다.
그것이 바로 신토불이의 소식!

큰 산이 큰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반대로 큰 사람이 그 산을 위대한 산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큰 산, 명산, 명당 자리에서 위인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 산에 위대한 영혼이 깃들어 있다면 그 산이 거꾸로 성스러워지는 것.

이 아름답고 성스러운 쿰부 계곡 자락에
어찌 마구잡이로 시류에 휩쓸린 사람들이 깃들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와중에도 희말라야의 성스러운 품어줌과 길들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에고와 아집의 길에서 길을 잃은 영혼들이야 어쩔 수 없는 일.
세상 어디에나 돌연변이는 있게 마련이니까.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이 가지는 또 다른 역설이요,
어쩌면 그 또한 꼭 필요한 더 깊은 차원의 다양성이고
삶이라는 연극을 위한 필수적인 신의 장치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밴커(Bankar)와 몬조(Monjo) 마을을 연이어 지난다.



마을을 정확히 관통하는 마을길을 따라 걷자니
아기자기한 집들과 지붕 위에 흩날리는 룽다,
그리고 집집마다 작은 돌담을 쌓아올려 밭농사를 짓는 모습들이
새삼스런 진풍경으로 다가온다.

 



아침 햇빛에 반짝이며 빛나는 배추잎사귀며
흡사 상추나 쑥갓을 같은 소담한 초록빛 채소들이
어쩌면 저렇게 싱그러울 수 있는지,
저 평범한 채소들조차 이 희말라야 대자연의 품 속에서
그 기운을 먹고 자란 것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저들에게서 마구마구 생명력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다.

 

 



나른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집 앞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지나치는 여행자들을 보며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아침밥을 짓는 것인지
집집마다 하얀 연기를 뿜어올리며
여행자의 가슴에 고향의 정감을 선사하고 있다.
머얼리 하얀 구름 테를 두른 캉테가가 올려다 보이는
몬조 마을의 풍경이 선명하다.
그림 같은 마을 풍경들이 계속된다.

 



몬조 마을을 지나서 조금 더 걸으니
조르살레를 조금 못 미쳐
퍼밋과 팀스를 체크하는 조르살레 체크포스트가 나온다.



팀스(TIMS, 트레커 정보운영 시스템)는
카투만두에서 미리 준비 해 와야 하고
퍼밋(Permit, 입장허가서)은 이 곳에서 직접 발급을 받을 수 있다.
잠시 팀스와 퍼밋을 체크하고 숨을 돌린 뒤에 곧장 조르살레로 향한다.



이른 점심을 조르살래의 빛이 잘 드는 식당에서 가볍게 먹고
오후의 여유를 즐긴다.
부서지는 햇살이 온 세상을, 순례자의 얼굴을,
한 포기 이름 모를 풀을 향해 축복을 내린다.
이 투명한 여유와 평화로움을 시끌시끌한 식당 앞 뜨락에서 가만히 누려본다.

지텐이 너무 이른 식사라 조금 더 가다가 점심을 먹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 말에
앞으로는 남체까지 전혀 밥 먹을 수 있는 마을이 없다고 하더니
역시 점심 이후에는 그동안의 나지막한 계곡이 완만함을 뛰어올라
폭포 같은 거친 가파름으로 바뀌더니
인간의 길 또한 가파른 오르막으로 바뀌고 있다.

 



호흡에 발걸음을 일치시키며
한 숨 한 숨 지켜보는 걸음걸이로 오르막을 오른다.

이 높은 계곡 중턱에 아찔한 출렁다리 위로
사람도 건너고 야크도 건너고 룽다와 산골 시린 바람도 함께 건넌다.

 



그 오금이 저려오는 절벽 위 출렁다리를 중간 쯤 걸어갔나 싶은데
저 쪽 반대편 끝에서 야크의 육중한 행렬이 이어지는게 아닌가.
이 비좁은 흔들다리 위에서 야크와 마주치는 운명이라니.
다리 위로 펄럭이는 룽다가 점점 거세진다.



계곡의 바람치고는 너무 거칠다.
아슬아슬 다리를 건넜는데 이번엔 이쪽 야크 떼와
조금 더 규모가 큰 저쪽 야크떼가
내 바로 앞에서 비좁은 길을 앞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 싶어
그 가파른 산자락을 숨도 안 쉬고 아슬이 야크떼를 피해 뛰어오른다.

 






그리고 이윽고 계속되는 오르막길.



천천히 천천히 오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발 한 발만을 숨과 함께 내딛다 보니
어느덧 남체의 그림 같은 마을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이얀 설산으로 둘러싸인 옴팍하게 부채꼴을 이루며
마치 야외 콘서트장을 연상케 하는
쿰부지역 제일의 마을이자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의 전초기지,
바로 남체바자다.

마을의 입구에는 티벳과 가까운 마을임을 알려주듯
티벳불교의 스투파와 스투파 주위를 감싸며 휘날리는 룽다와 타르초가
여행자를 반기듯 맞아 준다.

가려고 했던 시설 좋고 값도 싸고 음식 맛도 좋다던 유명한 롯지는
오전에 이미 꽉 차고,
조금 허름하고 오래되었지만
지텐의 친구가 운영한다는 롯지가 있어 그리로 방을 정한다.

이 산중에서 하룻밤 싱글룸이 200루피,
지텐 친구라고 특별히 할인하여 150루피에 얻었다.
약 2,000원 남짓하는 돈이니 시설은 허름하지만 가격대비 재법 만족스럽다.
이렇게 거의 모든 롯지가 방값은 200~300루피를 오르내리지만
한 끼 밥값도 똑같이 200~300루피를 심심치 않게 넘어선다.
그도 그럴 것이 방에는 침대 하나 달랑, 희미한 형광등 하나가 전부다.
난방이며 전기 충전시설, 화장실이나 욕조는 꿈도 꾸지 마시라.

물론 500~600루피를 생각한다면
몇몇 고급 롯지에서 묵으며 욕실 겸 화장실이 딸린 방에서
마음껏 전기 충전도 하며 호화롭게 묵을 수도 있다.
하기야 그래 봐야 우리 돈으로 7,000~8,000원 정도의 돈이지만
이 곳 네팔에서는 손을 덜덜 떨며 쓰기 어려운 돈에 속하다 보니
길 위의 여행자에게도 마찬가지의 큰 돈이 되고 있다.

작은 방에 짐을 풀어 놓고 잠시 남체바자의 시내를 돌아본다.
이 산중에서 지금까지 보아 온 마을하고는 차원을 달리하는 제법 큰 마을이다.
어떻게 이 많은 건물들과 상점들과 다양한 물건들을 도로도 없는 곳에서
그것도 3440고지나 되는 고산 마을에 이렇게 지어다 날랐을까를 생각해 보면
인간의 능력과 의지가 신비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길 없는 곳에, 그것도 걸어서 이틀을 꼬박 걸어 와야 하는,
그것도 루클라에 공항이 없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투만두에서 버스로 이삼일을 달려 와야 루클라에 도착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 기적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체바자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 없이 다 있다.
주로 트레킹 관련 장비를 팔거나 대여해 주는 상점들이 많고,
여행자들이 많다 보니 여행자를 위한 편의시설들도 제법 있다.
제과점이나 빵집, 에스프레소 커피 카페에, 인터넷방,
국제전화가 가능한 인터넷 전화방, 책방, 편의점 같은 마트도 있고,
여행자들에게 현지의 티벳 전통 물품들을 파는 기념품 가게나 옷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점과 마트가 즐비하게 늘어 서 있다.



잠시 마을길을 따라 언덕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남체바자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건물들이 주로 롯지며 게스트하우스인데,
현대식으로 또 유럽풍으로 아름답게 지어 놓은,
그것도 최근에 지었을 법한 최신식 건물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의 색색의 롯지들이 선명하고도 아름답다.
이런 풍경은 사실은 매우 낯선 풍경이어야 하는데
내 눈에는 낯설다기 보다는 오히려 고향에 온 것 같은
아주 친숙하고도 설레는 친근한 마을풍경으로 다가온다.




 



산그림자가 일찌감치 슬금슬금 기어오더니 금방 마을을 뒤덮는다.
어둑어둑한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얕은 집 지붕 위로 야크똥과 함께
바로 그 곁에서 무슨 야채인지 나물인지를 말리는 풍경이 한눈에 잡힌다.
먹거리 바로 옆에 야크똥을 함께 말리고 있는 풍경이 낯설지만
인도와 네팔을 한두달 다니다 온 나로서는 제법 익숙하게 느껴진다.

 


다시 마을로 내려오니 어둠이 완전히 내린 작은 시내 상점들이
모두들 흐릿한 불빛을 켜 놓고 막바지 여행객들을 호객하며
여전히 장사를 이어가고 있다.

여행자들도 모처럼 큰 마을의 시내구경에
흥미로운 눈빛으로 거닐며
이런 저런 필요한 것들을 구입도 하고, 산책도 하고,
트레킹에 필요한 물품들을 빌리기도 하는 듯 밤풍경이 제법 활기차다.

 

 

 

 

 

 

 

 

 

다시 롯지로 돌아오니 롯지 식당이 여행자들로 꽉 차 만원을 이룬다.
그야말로 한 명 끼어 앉을 자리가 없다.
이럴 때는 지텐의 친구가 경영하는 롯지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텐의 친구인 20대 초반의 롯지 사장이
지텐 친구면 자신에게도 친구라며 의외로 후한 대접을 해 준다.

자신의 안방을 내어주면서
그곳에서 저녁밥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카메라 밧데리 충전비용이 한 시간에 200루피인데
모든 밧데리와 핸드폰, 전기기구를 몇 시간이든 마음껏 사용해도 좋다는
특별 대접도 받는다.

그 뿐 아니라 내 작은 침낭을 보더니
두툼한 이불을 두 개나 가져다 주면서 따뜻하게 자야 한다고 말해 주는데
이 작은 관심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고맙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모처럼 따뜻한 방에서 맛있는 저녁 공양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뛰어든다.




Posted by 법상




 

밤새 잠을 설쳤다.
생각지 못했던 추위 때문이다.

팍딩 마을 자체가 계곡 바로 곁에 위치한데다가
높은 산 아래 그늘진 곳이라 그런 것인지,
본래가 안나푸르나에 비해 이곳이 더 추워서 그런 것인지 알수는 없지만
2주쯤 전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4,000고지 이상에서도
그리 큰 추위를 느끼지 못했던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추위가 이번 산행의 가장 큰 관건으로 떠올랐다.

2,600고지 밖에 안 되는 이 낮은 곳의 추위가 이 정도면
앞으로 걸어 올라5,000고지 이상에서 며칠을 묵어야 하는 나로서는
달리 다른 고민 할 필요 없이
남체에서라도 겨울 침낭을 빌리는 것 외에는
뽀족한 다른 수가 없어 보인다.

8월말 한국에서 출발하면서 봄여름용 작은 침낭을 하나만 가져 온 데다가
그것 하나만으로도 안나푸르나에 올랐을 때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기에
여기도 괜찮겠지 하고 카투만두에서 침낭을 안 빌려 왔더니
그 예상이 크게 빗나간 것이다.

팍딩에서 남체까지는
쉬엄쉬엄 걸어도 3~4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언 몸, 언 손을 따뜻한 밀크티 한 잔과 가벼운 스프로 녹이고
이른 아침 길을 나선다.



어젯밤을 배회하던 바로 그 거리를 가로질러
팍딩 마을을 뒤로 하며 길을 걷는데,
길 좌우로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의 선연한 기상이 시선을 압도한다.

 



계곡 옆 길을 따라 걷는다.

 



밤새 밖에서 노숙을 했을 야크들도
짐을 잔뜩 등에 인 채 출발 준비에 한창이다.

 


어제와 같이 계곡을 따라 옹기종기 마을들이,
아니 롯지와 집들이 하나 둘씩 모여 있다.
출렁다리로 계곡을 두 번 건너고
몇몇 마을과 게스트 하우스를 지난다.



새벽빛에 반짝이는 꽃들과 인사를 나눈다.
아직은 낮은 고도라 발아래 작고 소박한 꽃들이 소담히 피어올랐다.

 

 

 

 

 

 

 

한참을 걷자니 돌을 깨 집을 짓는 풍경이 펼쳐진다.
한 쪽에선 힘줄 굵은 사내들이 모여 앉아 거친 돌들을 깨어 다듬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 돌들을 모아 벽채를 세우고 있다.
그 모습이 햇살에 따스히 반사되어 아름답고 숭고하게까지 느껴진다.

 

 

 



모든 일은 성스럽다.
위대한 일과 하찮은 일이란 인간의 잣대일 뿐,
그래서 오히려 위대하고 유명하던 사람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다음생으로 가면
지옥의 동기동창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이 나왔다.

위대함과 큰 일 속에서는
더욱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이 개입되기 쉽기 때문이다.
대단한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엄청난 크기의 욕심과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큰 업에는 큰 과보가 따르는 법.

천상세계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으로,
이를테면 먹는 것, 입는 것 같은
어찌보면 작고 유치한 어린이나 할 법한 일들로 다툰다고 한다.

업이 무겁지 않다보니 큰 규모의,
이를테면 사업 확장을 위해 엄청난 돈을 대출받거나,
진급을 위해 타인을 음해하거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해치거나,
땅을 몇 만평씩 사서 리조트를 짓거나,
산을 깎아 골프장이며 스키장을 짓거나,
어디 어디에 투자가치가 좋은가를 살펴 투기를 하거나,
사업을 국제적으로 키워 가거나,
명성이 온 세계에 드러나거나 하는 등의
무거운 고민거리가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업이 가벼운 사람들은 고작해야
기본적인 의식주 같은 사소한 것이 크게 보인다.
그래서 선방의 스님들은 저 스님이 나에게 얼마를 크게 사기쳤다거나 하는
그런 걸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먹는 것 하나로 유치한 투덜거림을 일삼기도 한다.
아주 원초적이고 가벼운 것들이 작지만
그들 단순하고 평범한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옛날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는
꽃밭에서 꽃향기를 맡았다는 이유로 선신(善神)들의 꾸중을 들었다.
아난다가 발끈하여 저 많은 사람들은 꽃을 꺾고 꽃밭을 해집는데도 왜 가만히 놔두면서
나는 향기 맡은 것을 가지고 그리 크게 꾸중을 하느냐고 따져 물었더니
“업이 무거운 자들에게는 그 무거운 업에 비해
꽃을 꺾는 정도의 업은 죄 축에도 끼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이지만,
업이 가벼운 수행자에게는 그 어떤 탁한 악업의 구름이 없어 투명하고 맑기 때문에
작은 죄업도 크게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큰 일 보다는 작은 일,
작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몫이 있는 법이니
자기 그릇에 주어진 몫을 그저 받아들이고
집착과 욕심 없이 행할 수 있다면
아무리 큰 일을 할지라도 그것은 흔적 없는 위대성이 깃든 일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직업’ 자체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행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업적이나 성취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이 아집과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그 성취의 과정에서 아무런 무리가 없고,
타인의 고통 위에 기초하지 않는
그런 자연스러운 일을 행할 것이다.

그런 일은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법계(法界)의 흐름을 타고
저절로 그렇게 되어지는 무위(無爲)의 바탕에 기초한다.

그래서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 일을 행하면서 억지와 개인적 욕심으로 무리하게 추진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주변 환경의 흐름을 타고,
주변 법계의 알 수 없는 비밀스런 도움을 받으면서
힘들이지 않고 너무 과도하게 애쓰지 않고 진행되는 일,
그 일이야말로 진리의 일이요 신이 나에게 부여해 준
이번 생에 내가 가야 할 나다운 삶의 길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좋아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것이 은연중에 나를 드러내고 과시하며
아상을 강화시키려는 삿된 목적에 동조하는 일이라면
당장에 그 일을 그만두거나,
그 일의 흐름을 자연스러운 무위로써,
이타적인 자비로써, 무아의 실천으로써, 또 깨어있음으로써 바꿔 나가야 한다.

자기 손으로 자기 집을 짓고 고치고 보수하며 산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본래적인 일인가.
네팔의 시골마을을 다니다 보면 자신의 집 뒤안에
누구나 집을 짓고 고치는데 필요한 공구함이나 창고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
또한 젊은이들이 직접 톱질하고 켜고 짜맞추면서
나무를 손질하거나 집을 수리하거나 지붕을 고쳐나가는 풍경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지구상의 모든 숨을 가진 생명은
모두가 제 집을 제 힘으로 짓고 고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생명 고유의 본능적인 것이지
능력이라고 부르기도 새삼스러운 본연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유일하게 인간의 세계에서만 자기가 살 집을 자기 손으로 짓지 못하며,
자기가 먹을 먹거리를 제 힘으로 구하지 못하고,
자기의 가족이 입고 살 옷을 제 힘으로 얻지 못한다.

의식주라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래적인 것을
오직 인간들만 타인의 손에 맡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본래적인 차원에서 무언가 벗어나 있다는 것조차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돈이 다 해 주는데 무슨 상관이람!”
요즘 같은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세상에서
무슨 얼토당토 않은 논리를 펴는가 할 것이다.
바로 이 분업화와 전문화가 이 세상을 파괴하고
인간 본연의 창조적이고 자발적이며 자연스러운 삶의 기초를
붕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길을 걸으며 내 얼굴에 미소를 만드는 것은 꽃들과
진하다 못해 새까맣게 푸른 하늘과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나무와 계곡 물들 뿐인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들의 천진한 미소!
새까만 얼굴에 발그라니 익어간 볼살,
줄줄 흘러내려 손등으로 훔친 자국이 역력한 콧물 자국,
오래 씻지 않았거나 빗지 않은 자유분방한 머릿결과 살결,
기워 입고 덧데입고 오래도록 어머니의 손길로 오히려 예스러워진,
아마도 몇 대를 물려받아 입었을 법한 오랜 누더기 웃옷하며,
이 성스러운 설산의 기운을 닮은 반짝이는 눈빛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된 듯한 천연의 또 다른 자연을 만나는 것이다.

 

 

 

 

 

 

 

 

 



저 어린 아이의 투박하지만 살풋하고,
열퉁적지만 오달지고 선명한 눈빛을 보라.
부디 저 천진함이 먼저 슬어 간 어른들의 시그러진 정신과
세상의 어리석음을 닮지 말기를.

아이들이 뛰어노는 마을 한 켠 귀퉁이 낡은 책상 위에
나른한 눈빛으로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낯선 여행자의 카메라를 보고 깜짝 놀라는 고양이 한 마리.



그리고 코스모스는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옆 집 담장 곁을 하늘거리며 서 있다.

 


여행자들의 발길은 쉼 없이 흐른다.
어떤 여행자는 그저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만이 이 여행의 목적인 양
끊임없이 양 발로 땅을 퍽퍽거리며 내치며 걸어가고,
또 어떤 여행자는 하늘도 바라보고 아이들의 눈빛도 바라보고
느릿느릿 세월아 네월아 하며 발걸음을 즐기고 걷기도 한다.

이른 아침 팍딩에서 함께 출발했던 두 커플인 듯 보이는 한 무리의 여행자가
꼬질꼬질한 여자 아이에게 막대사탕을 하나 건네더니
아예 짐을 풀고 쉬면서 이내 그 집안까지 둘러보고는
아이와 한바탕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삶 속에서, 또 이런 자칫 팍팍해지기 쉬운 순례길에서
잠시만 시선을 평범한 곳에 고정짓고 지켜보다 보면
이렇듯 일순간의 작은 웃음과 여유가
밋밋한 여행길에 맑은 샘 같은 청량함을 선사하곤 한다.
미소가 있고, 웃음이 있는 풍경은
바라보기만 해도 정겹고 살갑다.

그리고 또 발걸음은 계속된다.



우뚝 우뚝 솟아 있는 바위 봉우리들이 진한 하늘색과 어우러져
마치 동화 같고 소설 같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 푸르른 하늘색을 배경으로
이번에는 그림같은 높은 폭포수가 길 바로 옆으로
시원한 노랫소리를 연주하며 떨어진다.
이 이른 아침, 사뭇 찬 온도 속에서도 폭포 아래 작은 샘터 호수에는
벌거벗은 아이들의 물장난이 흥미롭다.

 



그리고 바로 그 인상적인 폭포를 지나자마자
건너편에 어둡게 드리워져 있던 검은 그림자의 앞 산이 툭 트이면서
그 뒤로 숨어 있던 하이얀 설산
탐세쿠(thamserku)가 거짓말처럼 순간 눈 앞에 솟아올랐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