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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21 금강경 16분 능정업장분 강의
  2. 2009.07.30 문제는 나에게 있다




제 16, 능정업장분
업장을 깨끗이 맑힘


能淨業障分 第一六
復次 須菩提 善男子 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 先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 輕賤故 先世罪業 卽爲消滅 當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我念 過去 無量阿僧祗劫 於燃燈佛前 得値八百四千萬億 那由他諸佛 悉皆供養承事 無空過者 若復有人 於後末世 能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於我所供養 諸佛功德 百分 不及一 千萬億分 乃至 算數譬喩 所不能及 須菩提 若善男子 善女人 於後末世 有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我若具說者 或有人聞 心卽狂亂 狐疑不信 須菩提 當知 是經義 不可思議 果報 亦 不可思議


“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도 만일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 이유는 응당히 악도에 떨어질 만한 전생의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곧 소멸될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 겁 전의 과거를 생각해 보니 연등부처님 뵙기 전에도 팔만 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어 헛되이 지냄이 없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과 내지 어떤 산술적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는 공덕을 내가 다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업을 깨끗이 맑히는 법을 설해 놓은 이 분이야말로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살아야 하는지를 인과(因果)와 업보(業報)의 관점에서 쉽게 설해주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수행을 하고 금강경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이미 나는 깨끗해졌고 맑아졌으며 모든 괴로움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수행과 기도를 하며, 절에도 다니고, 경전 공부도 하니까 나에게는 괴로움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제 막 수행을 시작해 놓고, 혹은 이제 겨우 몇 년에서 몇 십년 마음공부를 실천해 놓고 ‘이제 나는 행복해 질 것이다’라고 바라지 말아야 한다. 절에 다니니까 나쁜 일은 모두 사라질 것이고 좋은 일만 올 것이라고 믿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은 새벽에 기도를 하고 출근했으니 오늘 하루 재앙은 말끔히 소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도 수행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진리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다. 물론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 수행하고 있고, 마음을 관(觀)하고 있으며, 순간 순간 깨어있을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영락없는 깨달음의 향기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느 한 쪽으로 고정 지으면 안 된다. 내가 바라는 쪽으로, 좋은 일만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수행 잘 하고, 마음 관찰 잘 하면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쪽으로 고정을 지으면 그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 깨어있음의 향기는 곳 사라지고 만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더라도 업(業)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업이란 과거 우리가 몸과 말과 뜻으로 지어 온 온갖 행위이기 때문에 그 업의 힘은 여전히 남아서 우리의 현실을 투영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마음을 비추어 보고, 수행하고,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업의 문제까지 다 소멸시킬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이다.
경전을 통해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도 만일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 이유는 응당히 악도에 떨어질 만한 전생의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곧 소멸될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하자. 이 금강경을 열심히 서사하고 수지독송하며 위인해설한다고 하자. 금강경을 늘 수지독송하며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 분명 이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진리 속에서 숨쉬고 있으며, 진리 안에서 환희심과 기쁨에 넘쳐 있을 것이다. 매일 금강경을 사경하고 7독씩 독경 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금강경을 공부하고 수행하며 남을 위해 해설해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 사람들은 ‘내가 금강경 수행을 열심히 하니까 좋은 일들만 많이 생길 것이다’ 라거나,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는데 나쁜 일이 설마 일어나겠어?’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이만큼 수행하니까 그만한 보상은 따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뒤따른다. 그리고 그 보상은 내 관점에서 내가 좋은 쪽의 일들이 많이 일어나 주고, 나에게 나쁜 일들은 일어나지 않고 비켜가기를 바라는 쪽으로 생각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좋은 일’ ‘나쁜 일’이라는 것은 ‘내 생각’일 뿐이다. 내 생각에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일 뿐이지 법계(法界)의 생각이거나, 진리의 생각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돈도 잘 벌리고, 남들에게 칭찬도 많이 들으며,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진리의 견해가 항상 ‘내 생각’과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지 말라. 진리의 생각은 다를 지 모른다. 물론 진리 또한 그러한 내 생각과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도울 수도 있다. 그리고 물론 때때로 기꺼이 그렇게 해 주곤 한다. 기도하는 자의 밝고도 간절한 서원(誓願)은 법계를 감동시킬 수 있기 때문에 분명 진리의 세계에서는 수행하는 자의 원을 듣고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법계의 견해는 당장에 ‘내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이란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우며, 좋고 나쁜 두 가지를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좋은 것을 선택하는 데에만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계에서는 좋고 나쁨이 없는 대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법계에서 수행하는 자의 원을 들어주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좋은 쪽일 수도 있지만 나쁜 쪽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분명 그것은 대긍정을 위한 일시적인 나쁨이란 말이다. 법계란 늘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무분별(無分別)의 진리만을 나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경전을 독송하고 금강경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도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열심히 수행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기며 미워하고 심지어 욕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길까?’하고 괴로워할 것이다.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해 그런가’ 싶기도 할 것이고, ‘수행을 해도 별 소용 없구나’ 싶기도 할 것이며, 때때로 ‘이 수행이, 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리석은 중생들의 마음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당장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만 좋은 일인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계의 입장은 다르다.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좋은 일이 다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인과응보의 이치, 업보의 이치를 관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근원적인 ‘좋은 일’ 다시 말해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대 긍정의 진리를 나투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수행을 열심히 하는데도 사람들이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전생의 업에 대한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전생에 내가 지은 업을 언젠가는 받아야 할 터인데, 금강경 수행을 열심히 할 때 받음으로써 그 업은 금강경의 밝은 광명에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금강경 독경을 열심히 하는데도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것은 업이 녹느라고 그러는 것이다. 업장이 소멸되느라 그러는 것이란 말이다.

수행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면 마땅히 악도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아야 할 것인데, 다행히도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수행공덕으로 가볍게 남의 업신여김을 당하는 정도에서 그칠 수 있는 것이다. 악도에 떨어질 만한 업장을 과거에 지어 놓았다면 그 결과를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업이란 반드시 그 과보를 받아야 녹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업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수행하는 사람은 업보를 받지도 않고 나쁜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인과응보를 모르는 어리석은 이의 얄팍한 이기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악도에 떨어질 만한 악업을 지었지만, 이렇게 금강경 밝은 가르침을 얻어 듣고 수지독송하게 되면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정도로 그 과보를 받음으로써 업장을 말끔히 소멸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소멸될 것이고 전생의 죄업이 모두 소멸되어야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업장이 무겁게 남아 있는데 어찌 깨달음과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이처럼 진리는 항상 무량수 무량광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절대 긍정의 차원에서 모든 일을 진행시킨다. 당장에는 욕을 얻어먹거나, 남의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나쁜 일이 일어나는 듯 해 보여도 사실은 그것이 ‘능히 내 업을 맑히는’, ‘능정업장(能淨業障)’의 길임을 이 분에서는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금강경 수지독송의 공덕이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는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수행을 시작하면서 더욱 마장(魔障)도 많이 생겨나고 자꾸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능정업장, 업장을 능히 맑히기 위한 법계의 배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100일 기도를 시작했는데 오히려 기도하지 않을 때보다 더 좋지 않은 일들이 자꾸만 생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기도의 힘으로 업장을 녹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셈이다. 가만히 놔둔다면 지옥에 떨어질지 모르는 업장을 기도 중에 오는 온갖 마장을 받아들이고 내 안에서 기도로써 녹임으로써 맑게 해탈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자는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당당히 가야할 길만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사사로이 눈앞의 좋고 나쁨을 따져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란다면 대장부의 걸림 없는 지혜의 길이라 할 수 없다. 참된 지혜는 좋고 나쁨을 초월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하는 구도자는 굳게 믿고 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좋고 나쁜 그 모든 일이 모두 다 진리의 길이며, 부처님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끌기 위한 길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당당해 진다. 완전히 내맡기면 자유로우며 걸림이 없다.

사사로운 ‘나’를 놓아버리고, 내 안의 참나, 내 안의 자성 부처님께 일체 모든 것을 완전히 내맡기고 살아간다면 우리 앞에 놓인 그 어떤 경계나 그 어떤 역경과 괴로움 조차도 즐거운 대 긍정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수행자의 힘은 이와 같은 마음에서 온다. 이 같은 대 긍정의 마음, 대 수용의 마음, 대 신심의 마음에서 오며, 나를 놓아버리고 내 안의 본래자리에 완전히 믿고 맡기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 정도의 마음이 수행자의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얼마나 걸림 없고 자유로울 것인가. 그 어떤 일이 우리를 휘두를 수 있으며,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이처럼 금강경 수행자의 길은 당당하고 훤칠하며 걸림 없는 지혜의 길이다.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 겁 전의 과거를 생각해 보니 연등부처님 뵙기 전에도 팔만 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어 헛되이 지냄이 없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과 내지 어떤 산술적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아승지(阿僧祗)란 도무지 산수(算數)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한량없이 많은 수를 뜻하며, 겁(劫)이란 마찬가지로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시간을 말한다. 나유타(那由他) 또한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숫자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승지처럼 무량한 수를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다시말해 부처님께서는 과거 연등부처님 뿐 아니라 그 이전에도 무량한 시간 동안 무량한 수의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되 헛되이 보내지 않았을 만큼 그 공덕이 무량하신 분이다. 한 부처님께만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더라도 그 공덕이 한량없을 터인데, 무량한 세월동안 무량한 부처님께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었으니 그 공덕이 얼마나 셀 수 없이 많을 것인가. 이 비유는 그만큼 부처님의 공덕이 많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부처님께서 한량없는 세월동안 한량없는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어 섬긴 그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산술적인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만큼의 더욱 무량한 공덕이 있다는 말씀이시다. 다시 말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야말로 도무지 말이나 그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는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렇게 금강경 수지독송의 공덕을 크게 말씀하시고 찬탄하는 이유는 금강경이라는 경전에 그 어떤 상을 두고 절대시하거나 금강경만 독송하면 모든 공덕을 다 얻는다는 등의 그런 단편적인 말씀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금강경이란 ‘아상을 타파하는 가르침’이며, ‘완전히 아상을 깨고 참나를 발견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불법의 대의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가르침을 수지하고 독송해야 한다는 말이다. 수지란 완전히 체득하여 그 가르침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며, 독송이란 그러한 깨달음의 바탕 위에서 그 가르침을 끊임없이 읽고 외움으로써 보다 완전히 체득하며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일은 곧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인 것이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유위의 공덕도 깨달음이라는 무위의 공덕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무궁무진한 산술적인 비유로 그 공덕을 표현하더라도 그것이 유위의 공덕인 이상 그 어떤 수학자의 비유라도 무위의 공덕에는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는 공덕을 내가 다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아마도 금강경을 처음 공부하는 이들은 이와 같은 금강경의 표현을 보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것이 한량없는 세월동안 한량없는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는 것에 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또 앞서 말했듯, 형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공덕이 동서남북과 네 간방과 위아래의 가히 생각할 수 없는 허공과도 같이 셀 수 없다고 하시는가. 처음 금강경을 공부하는 이들은 똑같이 하는 말이 너무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뿐인가. 금강경에서는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원동력이 되었던 ‘나’를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또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 되었던 욕심과 집착을 다 버리고 일체 중생을 위해 보시하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 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러한 가르침에 어찌 마음이 혼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여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위에서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말씀하셨지만, 아직도 모자란 것이 있으신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전부 다 말한다면 아마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부처님께서는 말이라는 것이 진리를 전부 담을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신다. 그렇기에 그렇게까지 말로써 수지독송의 공덕을 표현하시고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다 말한다면’ 이라는 표현으로 여전히 말로써는 다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 계신다. 무위(無爲)는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함이 없는’ 무위이기 때문에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 말로써 표현하는 순간 벌써 어긋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방편을 빌리지 않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표현하고 계시는 것이다.

계속해서 부처님의 당부는 이어진다.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헤아릴 수 없다. 이렇게 금강경을 해설하고는 있지만 이 해설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해설 속에 금강경의 뜻이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면 벌써 어긋나고 만다. 이 경은 그 뜻을 가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은 머릿속으로 헤아린다고 헤아려 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수지독송이라는 수행을 통해, 즉 완전한 내적인 깨달음으로써 수지하고, 그러고 나서도 끊임없이 독송함으로써 완전히 가르침이 나와 하나가 될 수 있을 때만이 그저 체험되어지고, 하나되어지는 것이지, 이 경은 뜻을 헤아린다고 헤아려 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실천과 수행만이 그 뜻과 하나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완전히 나를 놓아버리고 아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으로써 내가 곧 전체가 되었을 때 그 때 이 뜻이 그대로 내가 되고 전체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뜻을 헤아릴 ‘나’라는 주체가 완전히 소멸해야지만 이 뜻은 전체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 뜻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 뜻을 헤아리는 ‘나’가 있는 이상 이 뜻은 여전히 이해되지 못한다.

과보(果報)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수지독송의 과보는 깨달음이라거나, 무량한 복덕이라거나 하는 등의 원인과 결과로써의 어떤 과보를 생각하겠지만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완전한 무(無)이다. 완전히 무이기 때문에 완전히 전체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도 없기 때문에 한량없이 많을 수 있는 것이다. 과보가 있다면 그것은 셀 수 있는 것이며, 있고 없음의 틀 안에 갇힌 과보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유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 과보를 헤아리는 순간 이미 그 과보는 참된 과보일 수가 없다.

과보를 받을 ‘나’가 없어졌을 때, 내가 받을 ‘과보’ 또한 완전히 공(空)하다. ‘나’가 없다면 내가 받을 과보 또한 어디에 붙여 둘 것인가. ‘나’만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항상 무량한 과보로써, 무량한 복덕으로써 충만한 곳이다. 이 세상은 항상 부처님의 무량한 광명으로 충만한 곳이며, 무량한 복덕이 넘치는 곳이다. 아니 광명 그 자체이며, 복덕 그 자체이고, 부처 그 자체인 것이다. 다만 거기에 광명을 받으려는 내가 있고, 복덕을 누리려는 내가 있으며, 부처가 되려는 내가 있는 이상 참된 광명도 복덕도 부처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아상을 완전히 타파했을 때, 그 자리가 금강경 수지의 자리가 되며, 그 때 헤아릴 수 없는 뜻도, 헤아릴 수 없는 과보도 그대로 하나로 어우러져 광대한 법해(法海)를 이룰 것이다.




Posted by 법상




모든 존재는
나와 연결되어 있다.
그저 피상적으로 조금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직접적이고도 가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너와 내가 서로 통해 있다는 것이고,
너의 문제가 곧 내 문제라는 것이며,
세상의 문제가 곧 내 문제라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하나의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 일은 결코 작지 않다.
그 하나의 사건에는 무수히 많은 존재가,
나아가 이 우주법계가
크고 작은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중에도 내가 만나는 존재, 나와 마주하는 존재는
특별한 어떤 인연의 힘을 가지고
나와 특별한 끈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특별한 인연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그 존재는, 그 사건은, 그 사물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내 인생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일들이,
내 인생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그 모든 사람과 존재들이
모두 내 내면에 있는 어떤 것들이다.

나의 내면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외적으로 투영되어 나올 수가 없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내면과 외부가 둘이 아니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가,
내 안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이 외부의 어떤 대상을 끌어당기게 되고
그럼으로써 내면의 어떤 문제가
겉보기에는 외적인 어떤 문제인 것처럼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외적으로 투영되어 나오는 문제 또한
나와 전혀 관련이 없던 것이
투영되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즉 나와 전혀 관련 없는 사람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나와 인연이 있었던,
과거 전생의 어느 시기에 나와 인연이 있었던,
혹은 업의 관계, 빚진 관계, 원수 관계,
복을 베푼 관계, 사제관계, 부자관계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빚어진 업과 인연의 인다라망과 같은
복잡한 사슬 속에 놓여 있던 어떤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즉 내 안에 화의 업이 올라오게 되면
과거 전생의 화와 원수관계 등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 혹은 물질이나 존재들이
내 안의 화라는 직접적인 원인(인연 중에 ‘인’)에 의해
우주법계의 인연법으로써 내 앞에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 안에는 무수히 많은 인과와 업,
그리고 무수히 많은 생각과 기억과 관념들이 가득하다.
이번 생에서 만들어 낸 것들은 대개 기억과 관념으로 투영되어 존재하고,
지난 생에서 만들어 진 것들은 업이라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번 생의 것이든 지난 생의 것이든
우리가 분명히 인지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극히 드물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형성하면서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우리 앞에 나타난 어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우리는 그 원인을, 그 무수히 많은 원인을 다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원인은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무량수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부처님만이 분명히 환히 볼 수 있지,
가섭존자 조차 낱낱이 살펴 알기 어렵다고 했다.

심지어 매 순간 순간 우리 주변에는
1500만 비트의 정보가 발생하는데 반해
우리가 자각할 수 있는 정보는 고작 15비트에 불과하다고
호오포노포노에서는 밝히고 있다.

이것을, 업의 차원에서 본다면
1500만 비트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그 몇 백배, 몇 천배 이상의 복잡다단한 인과의 그물코가
우리 삶의 현장에 매 순간 놓여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타고 가던 차를
뒤의 차량이 와서 접촉사고를 냈다고 치자.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앞차와 뒤차만의 인과관계인 듯 보인다.
그러나 업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 단순해 보이는 하나의 사건 속에는
수백 수천만가지 이상의 엄청난 인과가 얽혀 있고,
수많은 존재와 존재들, 사람과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

만약 이 두 차의 운전자가 병원에 갔다면
병원의 의사 간호사와도 연결되어 있으며,
집의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이 모두 함께 걱정을 할 것이고,
병문안을 와야 할 것이고,
병문안을 오느라고 또 차를 타고 와야 하고,
음료수라도 사 와야 하니 슈퍼마켓에도 들러야 하고,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면 다른 것을 했을 그 시간에
그 모든 사람들이 병문안 오기 위해 시간을 비웠어야 할 것이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밥 한 톨이 내 앞에 오기까지
우주 법계가, 수백 수천만 이상의 사람들, 존재들이
밥 한 톨 먹는 것을 도왔다는 연기법의 이야기에서처럼
마찬가지로 수백 수천 수만가지 이상의 온갖 존재들이
이 접촉사고 하나와는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차사고가 난 두 당사자는
우연으로 그런 접촉사고가 났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고 속에는 어떤 식으로든
내 안의 어떤 부분이
상대방 안의 어떤 업의 부분과 절묘하게 바로 그 순간에 만나서
그런 사고를 만들어 낸 것이다.

왜 하필이면 앞차가 5초만 빨리 왔어도
그냥 지나갈 수 있는 교차로에서 멈춰서게 되었으며,
왜 하필이면 뒤차의 운전자가 바로 그 순간에
주의가 흐려져 앞에 서 있는 차를 못 보고 그냥 들이받았겠는가?

그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차원에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업과 인과의 차원에서의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좋고 나쁘고의 차원을 넘어 서 있다.

직장에서 상사가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는 바람에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는 상황을 가정 해 보자.
이 또한 상사와 나 사이에, 또 수많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일어난 법계의 일인 것이다.

그로인해 그 상사는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어졌을 수도 있고,
그래서 오후에 있을 일의 성과가 좋아졌을 수도 있으며,
그로인해 나는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빠져서
직장 동료들에게도 화를 내고, 집에 와서도 뾰로통 해 있으며,
오늘 했어야 할 일들을 다 끝마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상황은 단순히 그 상사와 나, 둘 만의 일이 아니다.
그로인해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 일들을 생각해 보라.
그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새롭게 연결되어져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해 낸다.

회사의 부장이 과장에게 화를 냈다는 그 하나의 사실,
그로인해 그 부서에 그 과에 분위기가 하루 종일 냉랭했고,
그 탓에 부하직원 한 명은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아 조퇴하려고 했다가
눈치보느라 조퇴도 못 하고 꼼짝 없이 회사에 갇혀 있는 바람에
병이 더 심해 져서, 저녁에 쓰러질 수도 있다.

그 하나의 상황은
크고 작은 수많은 또다른 상황들을 만들어 낸다.
사실 그 하나의 상황은
이 모든 사람, 상황들까지도 감안한 법계의 치밀한 계획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한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하나의 사건이나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내 앞에서 그 문제가 발생했다면,
나와 연관되어져서 그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것은 나와는 상관 없는 ‘그 사람들’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것은 내 밖의 문제라고 생각되어지겠지만,
사실은 나와 연결된 문제이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사실은 ‘내 문제’인 것이다.

법계의 계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깊고 더 세세하며 더 치밀하다.
수많은 업과 기억과 생각과 수많은 정보들을
법계에서는 분명하게 보고 분명하고도 치밀한 계획으로
그 문제를 바로 그 순간에 바로 그 자리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와 연관된 사람들 또한
모두가 그 문제와 연관된 나름대로의 내면의 문제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인 것이다.
그 문제와 관련된 어떤 문제가 있는 사람들만
그 문제 주변에 모여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혹은 내 삶 속에서 목격하는
그 모든 일들은
모두가 나와 직간접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그 문제가 내 외부의 문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내 문제 아래에 놓여 있는 문제란 뜻이다.

내가 목격하는 모든 문제는,
내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
제3자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와 관계된 문제이며,
나아가 바로 ‘내 문제’라는 것이다.

내 안에 없는 것들은
결코 내 밖으로 투영되어 나오지 않는다는
법계의 이치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면의 투영이다.
내 문제요, 내 책임이다.

그것은 또 다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에게서 나온 문제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문제나 고민을 가지고 올 때
그 고민을 들어 주고 답을 내려 주지만,
우리 내면에는 그것이 ‘네 잘못’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것은 ‘너의 문제’이고 나는 그 문제를 상담해 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그의 문제이기도 한 동시에
‘나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내 안에 어떤 문제가 없다면
그 사람이 그 문제를 나에게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풀어가야 할 우리 공동의 과제가 된 것이다.

왜 그런가?
세상은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그 사람이 나에게 상담을 하려 왔겠는가?
나와의 공유된 업이,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상대방의 고민을 들으며
사실은 내 안의 업을 닦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문제를 치유해 준다는 것은
곧 내 안의 문제를 치유한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큰스님들께 상담을 하고 온 신도님들 중에는
특별히 큰스님께서 답을 주신 것은 없는 것 같은데,
다녀오고 났더니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거나,
병으로 아파하던 환자가
큰스님을 친견하고 났더니 낫기 시작한다거나 하는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 가능한가?
큰스님과 심리상담가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상담가들은 상대방의 문제를 상대방의 문제로 보고
상대방이 어떻게 치유를 하면 될지를 알려주는데 반해,
수행자의 방식은
상대방이 가져 온 문제를 상대방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바로 내 문제라고 생각함으로써
내 닦을거리라고 받아들인다.

상대방과 나 사이에는 연기법이라는 법칙으로써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그를 나에게 이끌었으며
그와 내가 만나는 순간 그 문제는 더 이상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나 자신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상담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
내 안에 어떤 업장, 어떤 문제가
저런 고민을 가진 상대방을 내 앞에 오게 했는가?

물론 그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원인이 되는 이유는 한두가지가 아니며,
한 두 생에 걸친 원인이 아닌 몇 생에 걸친
수많은 업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거나,
수백 수천가지 이상의 크고 작은 인연들이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얽혀 있을 수도 있고,
조금 더 나아간다면
사실 그 원인은 이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 수백 수천 수만가지 이상의
우주 법계와 연결되어 있는 전체적 연결고리를
어떻게 우리 중생의 눈으로 다 볼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1500만 비트의 정보 중에서도
고작 15비트만을 인식하는 우리가,
수억만 종류 이상의 업과 인과의 소식을 어떻게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부처님께서만 아실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것은 그 모든 원인은 내 안에도 있다는 사실이고,
그렇기에 내 안에 있는 그 원인을 닦고 비움으로써
상대방과 연결되어 있는 공업이 함께 닦여지면서
상대방과의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 의식이나 법회에서 행하는
축원의 비밀이다.
스님들이 축원을 해 준다고
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물론 가장 직접적이고 빠른 방법은
자기 자신이 직접 닦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와 인연지어진 스님께서
마음을 비우고,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축원을 해 준다면
당신의 마음 닦은 그 힘이 법계를 울리고
나와 연결되어진 내 안의 업도 함께 변화를 맞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수행자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서 가능하며
실제로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이
이러한 마음 마음, 발원과 기원의 힘들에 의한 것들이 많다.

이상에서 공부한 이 이치는
결과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내가 만나는 모든 경계, 사건, 문제, 사람들은
사실은 온전히 내 문제며, 내 책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상대를 탓할 일은 하나도 없다.
상대를 바꾸려고 애쓰지 말라.
그 문제를 상대의 문제로 돌리고,
그 잘못을 상대방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상대방이 바뀌기를 바뀌는 한
그 문제의 본질은 흐려지고 만다.

그 문제를
내 내면이 투영된 ‘나의 문제’요, ‘나의 책임’이라고
자각하면서
나 자신으로 돌아올 때,
그 문제는 이제 본격적인 열쇠를 스스로 찾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관하고,
나 자신의 내면을 닦아갈 때
나와 연결되어 있는
상대방의 문제, 내 밖의 경계들이 닦여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제를 바깥 탓으로 돌리지 말라.
내가 그 문제를 인식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그것은 내 문제요, 내 숙제다.

내 안에서 그 문제를 풀라.
내 안에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
정치문제, 경제문제, 사회적인 각종의 문제들, 부정부패들,
환경문제, 가정문제, 아들문제, 남편문제,
이 모든 문제들은 사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내 문제’다.

내 문제가 풀리고 나면
내가 사는 세상이 청정해진다.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해 진다는 경전의 말씀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때때로 사회 변혁을 꿈꾸는 사회운동가들이
자기 자신의 변혁은 등안시 한 채,
부정부패로 얼룩지고 탐욕으로 점철된 시대를 나라를 개혁하고자 하지만
마음 같이 사회가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그로인해 자신 안에 화를 키우고,
사회에 대한 불신과 미움과 증오를 키우다가
오히려 자신 몸에 병도 나고,
자신의 마음이 미움과 증오로 얼룩지곤 하는 것을 본다.

사회를 변화시키고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선결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변화이며,
자기 자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내가 변하면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변한다.
세상은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법계로 언제나 청정해 있다.
다만 내 마음이 오염되고 물들어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이라는 필터로 걸러서 본 나의 세상도 오염되어 있을 뿐이다.

깨닫고 보니
이 세상은 본래부터 깨달아 있었다는 말이 있다.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특별히 구제해야 할 중생은 없다는 말도 있다.

내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
이 우주는 동시에 함께 깨어난다.
내 업장을 닦고 소멸시키는 순간,
이 우주도 함께 어둠을 닦아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문제를
바깥으로 돌리지 말고,
내 문제로 보고
나 자신을 닦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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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