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아바타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아주 인상 깊었던 대사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제이크 설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여주인공 네이티리가 했던 말이다.
 “어머니 대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다만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지”


이처럼 진리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고, 안팎의 차별이 없다. 다만 균형을 맞출 뿐이다. 누군가의 돈을 훔쳤다면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 것이다. 그 때 우주법계는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훔친자에게서는 앗아가고, 빼앗긴 자에게는 되돌려 주는 작용을 만들어 낸다. 욕을 했으면 욕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고, 사랑하면 사랑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 사이에는 이처럼 정확한 균형이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우주가 하는 일이며, 진리가 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로 칭찬해 주고, 찬탄해 주어 보라. 무엇이 돌아오겠는가. 칭찬과 감사와 찬탄이 돌아온다. 칭찬해 주는데 욕이 돌아올 일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법칙도 이와 같다.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느냐에 따라 무엇이 다시 내게로 들어올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감사함을 느낄 때 더 많은 감사할 일이 찾아오고, 불만을 느낄 때 더 많은 불만스러운 일이 찾아오며, 화를 내보내면 화낼 일이 들어오고, 만족하면 만족할 일들이 생기고, 무시하면 무시 받을 일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의 에너지는 언제나 균형을 맞출 뿐이다.

불교의 업보(業報)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업보의 법칙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사이의 법칙인데, 나라는 존재인 육근이 무엇을 내보냈느냐에 따라 육경이라는 외부의 세상이 어떤 보를 끌어당기느냐 하는 법칙을 말한다. 이러한 업보의 법칙이 바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이치인 것이다. 즉 누군가가 돈을 훔쳐갔다면 우주는 얻은 자와 잃은 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처럼 업보라는 삶의 균형의 이치에서 본다면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다. 업이 곧 보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낼 생각보다는 더 많이 얻고 바라며 가지려고만 한다. 내보내야만 들어온다는 우주의 평등한 이치를 모른 채 내보내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나누고, 베풀고, 보시하며, 내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고, 얻고, 빼앗고, 성취하고, 쌓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한창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이 유행을 했지만 그것은 우주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 가운데 ‘내보내는 것’보다 ‘받는 것’에 중점을 둔 표현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열광을 얻어냈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나에게서 나가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 더 관심이 많지 않은가. 그러나 끌어당기는 것에 중점을 두면 끌어당겨질 것에 대해 바라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그 의도가 순수해 지기 어렵다. 보시를 할 때도 바라는 바 없이 하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의 중점은 끌어당겨질 것이 아니라 내보낼 것에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보다 ‘내보내는 법칙’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무엇이 끌어당겨 질 것이냐를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사랑으로 다만 내보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무언가를 끌어당길 필요 없이 모든 존재는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 부족하면 끌어당겨서 더 채워야 하겠지만 완벽하다면 넘쳐나는 풍요를 내보내고 나눌 수 있다. 끌어당김은 목표 지향적이고 미래 중심적이지만 내보내는 것은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문제이고 더욱이 지극히 실천적인 수행의 방향이다.

 매 순간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태어나서 죽는 그 날지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고 보시하며 나누었는가? 내가 내보낸 것들로 인해 세상은 얼마나 밝아졌는가? 세상이 밝아질 때 곧장 내가 밝아지는데 성공한 것이다.











Posted by 법상

 

 

 

두려워하지 말라.

진실은,

두려워 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두려워할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우리 스스로 두려움을 만들어 낼 뿐!

 

이 우주의 근원의 에너지는

언제나 사랑이요, 무한한 자비다.

실체라는 말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 말을 써야 한다면,

우리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자비와 사랑이라는 말 뿐일 것이다.

 

자비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우리라는 존재의

근원적 실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 파장은

오직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신도,

그 어떤 염라대왕이거나,

그 어떤 진리의 다르마도,

당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분들은,

성스러운 붓다며 신은,

우리 나약한 인간들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벌을 주기 위해

온갖 지옥을 만들어 내거나,

온갖 고통을 만들어 내거나,

인간을 단죄하기 위한

온갖 다양한 틀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이 두려움에 떨어야 할

그 어떤 장치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답지 못한 인간,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

신을 믿지 못하는 인간,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

온갖 악행을 일삼는 인간,

성적으로 타락한 인간,

그 어떤 최악의 인간들을 처단하고 벌주기 위해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무시무시하며,

두려움에 벌벌 떨 만한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이는

그런 지옥을, 지하세상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일 뿐!

오직 인간의 생각일 뿐!

인간의 욕심일 뿐!

 

부처는

다만 무한한 자비 그 자체이며,

신은

무한한 사랑 그 자체일 뿐이다.

 

그 분들은

인간을 단죄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의지도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은, 붓다는

오직 순수한 사랑일 뿐!

단죄하는 분이 아니다.

 

방편으로

계율을 율법을 지키라고,

죄를 짓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는 하셨을 지언정

그것을 어겼을 때

벌하기 위한

그 어떤 특단의 조치도 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시다.

 

다만 그 모든 인간의 악행들을

아무런 판단도 없이 지켜보실 뿐!

 

그 분들의 시선에서는

악행, 선행이라는 차별이 없다.

다만 사랑으로 지켜보실 뿐이다.

 

선악을 넘어선 분이

선악을 구분지어 놓고

그 가운데 악을 행한 자만을 단죄하고

선을 행한 자를 선물주기 위해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고,

우리 멋대로 지어낸 신에 대한, 절대자에 대한

바람이고 환상일 뿐이다.

 

신은, 붓다는, 절대자는

아무런 판단도 없이

일체 모든 이들을 위해

다만 오직 사랑과 자비만을 준비해 두고 있다.

 

아니 신은, 붓다는, 이 우주는

그 자체가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의 의식 속에는

지옥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고통도 있으며,

무시무시하고 소름돋는

최악의 지옥이 있다.

 

가짜로 있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인연 가합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누가 만들어 냈는가?

 

그렇다.

신이 만들어 낸 것이거나,

붓다가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내었다.

 

가짜로.

생각으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생각은 에너지를 갖는다.

생각이 바탕이 되어 삶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렇게 창조된 가짜 세상일지라도

그것은 인간들에게 마치 진짜 같이 느껴진다.

 

고통도 진짜고,

지옥도 진짜고,

모든 것이 진짜처럼 생생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의 진실은,

그 모든 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없다.

오직 사랑만이 있고,

오직 무한한 자비와 연민만이 있을 뿐!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이 창조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말고

삶을 사랑하는데 마음을 쏟으라.

두려워할 것이 없는 본연의 사랑이라는 세상에

생각으로 두려운 것들을 창조해 내지 말라.

 

세상이 당신에게 알려준,

종교가 당신에게 알려준,

사람들이, 선생님들이, 종교인들이 당신에게 알려 준

원죄에 속지 말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었다.

삶은 두려워할 무엇이 아니다.

죽음 또한 두려워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이다.

무한한 아름다움이며, 무한한 지고의 기쁨이다.

 

죄를 지으면 지옥 간다고 했던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계율을 범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지 말라는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죄의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신이 우리를 단죄한다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심판을 한 뒤 몇몇은 지옥으로 던져버린다고?

계율을 어기면 지옥에 간다고?

 

지옥은 없다.

죄 또한 없다.

그렇기에

두려워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항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이 없고, 죄 또한 없다면

잘못을 저질러도 되고,

악행을 저질러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물론 상관이 있다.

물론 지옥에 떨어진다.

큰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준비해 둔 것이거나,

부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니며,

더욱이 그 곳은 실체적인 곳이 아니다.

 

똑같은 상황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천상을 경험하게 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연봉 3,000만원이 괴로움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한없는 즐거움이지 않은가.

 

배가 터지도록 부른 사람에게

자장면 곱빼기는 고통을 가져오지만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그것은 천국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고통을 받지만

그 고통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지옥에 떨어지지만

그 지옥은 실체적인 어떤 영역에 신이 만들어 둔

절대적인 영역이거나, 절대적인 곳이 아니라

다만 스스로 만들어 내고

스스로 그 곳에 빠져 괴로워하기로 선택한 그런 곳이다.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지옥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지옥을 생각으로 만들어내어

그곳에 떨어지면 어쩌지?

죽고 나서 지옥에 가는 건 아닐까?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함으로써 있지도 않은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말라.

 

우리가 두려움에 떨면

그 두려움으로 인해

두려운 세상을 창조한다.

지옥에 가게 될까봐 걱정 근심을 한다.

 

누구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는 지옥에 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그 두려움이 지옥을 창조해 낸다.

 

그러니 두려움에 떨지 말라.

두려움으로 인해 지옥을 창조해 내지 말라.

두려운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죄의식이 죄를 만든다.

 

마음 속에

지옥을 품지 말고,

두려움을 품지 말고,

죄의식을 품지 말라.

그것을 품음으로써 그것을 창조하지 말라.

 

대신에

마음 속에

무한한 사랑을 품으라.

무한한 동체대비의 자비로움을 품으라.

 

신은 무한한 사랑이며,

붓다는 무한한 자비로움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죽음을 사랑하라.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오히려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죽음은 경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삶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래를 두려워하는 대신,

지은 죄를 두려워하는 대신,

삶을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라.

 

삶도 죽음도 경이롭다.

그 둘은 둘이 아니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아무리 달려갈지라도,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쓸지라도,

혹은 아무리 도달하려고 애쓸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뿐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 자신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주어진 삶을 사랑하라.

다가올 미래를 사랑하라.

진리를, 신을, 붓다를 사랑하라.

 

오직

다만

사랑이기만 하라.

 

두려움도,

고통도,

죄의식도,

근심 걱정도,

지옥도,

죽음도

모두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

사랑 안에 녹아내리게 하라.

 

본래부터 그것은 없던 것이고,

가짜일 뿐이니,

진짜로 가짜를 품어 안으라.

 

사랑할 때,

사랑이 창조된다.

아니 본래 사랑이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언제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을 향해 도착할 뿐이다.

 

영적인 진보,

수행의 완성,

그것은 곧 잊고 있었던 사랑을 되찾고,

사랑이라는 근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숭고한 귀의(歸依)의 여정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사랑과 하나될 것이다.

무한한 자비로움을 체험할 것이다.

 

두려움이라고 불리우는

가짜에 속아오던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사랑과 자비의 파장으로 춤출 것이다.









Posted by 법상






불교에서는 운명이나 숙명 대신에
스스로의 삶을 내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다는 인과(因果), 업보(業報)론에 기초하고 있다.
누구나 물론 전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자기만의 삶의 모습을 갖고 태어난다.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살 것인지,
어느 정도의 학벌과 능력과 외모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얼마 정도의 행복을 누리다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에 대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정해진 업력(業力)을 받고 태어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떤 배우자를 만날 것인지,
어느 정도의 대학이나 학벌을 가지게 될 것인지,
어떤 회사에 취직하여 어느 정도까지 진급을 하게 될 것인지,
어떤 인연을 만나서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받게 될 것인지,
언제 어떤 병이나 사고로 얼마만큼 고통을 겪게 될 것인지,
돈과 재산은 어느 정도를 벌어 쓸 수 있을 것인지,
그렇게 살다가 언제쯤 몇 살 쯤 죽어갈 것인지,
그런 것들에 대한 삶의 윤곽이 전생의 업식(業識)에 의해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전생의 업을 그대로 받을 것이니
이번 생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절대 그 업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것도 인생 일대의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말로 행동으로 생각으로 행하는 행위이다.
전생, 또 오랜 전생을 이어오며 지어왔던 온갖 행위들이
지금 내 안에서 기본적으로 이번 생을 어떻게 펼쳐나가게 될지에 대해
결정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정의 원인은 내 과거의 행위에 있다.
내 과거의 온갖 행위들에 의해 내 현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가.
결론은 내 현재의 행위에 따라 또 다시 내 미래가 바뀔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자신의 마음에 따라,
자신의 욕심과 집착의 크기에 따라,
자신의 마음공부와 수행과 기도의 정도에 따라,
내 삶은 언제든지 180도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달라질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 삶은 그 괘도를 수정해 나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일 있을, 내년에 있을 내 삶의 괘도가
내 행위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되어지고 있다.

그것을 운명이나 숙명이라고 이름 짓지 않고
업(業)이라고 이름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운명이나 숙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반해
업이라는 것은 언제고 바꿀 수 있으며,
바꿀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순간순간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오늘 힘겹게 살아가는 소년 소녀 가장을 만나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고,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 주었다면
바로 그 한 번의 행위가
1년 뒤 파산할 지 모르는 업연을 2년 뒤로 늦춰줄 수도 있다.

이웃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과 벗을 찾아가 위로해 주고,
지혜로운 삶의 길을 안내 해 주었다면,
이번 생에는 있지도 않았을 선지식 스승과의 인연이 생겨날 수도 있다.

오늘 부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마음을 비우며
그동안 가지고 있던 욕심과 집착을 말끔히 비워냈다면
다음 달에 닥칠지 모를 급성 위장염이나 위암 판정이
10년 쯤 뒤로 늦춰지게 될 수도 있다.

오래도록 마음속에 응어리 져 있던
미워하는 원수에 대한 불같은 화를 다스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를 해 주었다면
몇 달 뒤에 닥칠지 모를 홧병이 소멸될 수도 있다.

필요하다고 그 때 그 때 사 들이고,
여유가 있다고 아끼지 않고, 절약하지 않았던 삶의 습관이
10년 뒤에 올 퇴직을 1년 뒤로 앞당길 수도 있고,
나보다 못난 사람,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한 마디의 말이
지금의 내 높은 지위를 1년 빨리 끌어내릴 수도 있다.

어디 그 뿐인가.
파리나 모기, 풀벌레와 작은 곤충들의 생명을
별 생각 없이 죽이거나 괴롭혔다면
그것은 내 명(命)을 몇 년씩 앞당기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산을 함부로 깎고, 나무를 함부로 베는 행위로 인해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폭풍우가 내가 사는 지역을 강타했을 때
바로 내가 사는 집이 무너지고, 내 터전이 깎여나갈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행위에 따라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업은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불교의 제행무상이라는 이치에 따르면
그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업이라는 것 또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매일 매일 달라지고 지속된다는 것은
받아야 할 업의 과보 또한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구의 삼업,
신구의 삼업을 돌이켜 보라.
매일 매일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어떤 행위를 해 왔는가를 놓치지 말고 살피라.

삼업에 대한 일기를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삼업 일기장’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뉠 것이다.
첫 번째 단락은 몸의 행위를, 두 번째는 입으로 쏟아낸 말의 행위를
세 번째는 마음에서 일으킨 온갖 생각의 행위들을 적는 것이다.

몇 일, 몇 주, 몇 달 동안 삼업의 일기장을 쓰다 보면
업의 일정한 패턴을 살피 수 있을 것이다.
주로 어떤 악업을 많이 짓고 있는지,
어떤 선업들을 많이 행하고 있는지,
복은 얼마나 짓고 있는지, 죄는 얼마나 짓고 있는지,
탐욕에 따른 행위가 많은지, 성냄에 따른 행위가 많은지,
다양한 업의 패턴을 살펴보면
이제부터 내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것이다.

물론 전생부터 이어 온 내가 모르는 업들은 제쳐두더라도
삶에 대한 획기적이며 경이로운 성찰이 찾아 올 것이다.



업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선한 것들의 종류와 악한 것들의 종류가 있다.

말로써 하는 구업을 지을 때도
칭찬을 하거나, 조언을 해 주거나, 진리를 설해 주거나,
따뜻한 격려를 해 주는 등의 선을 베푸는 행위가 있을 수 있고,
비난을 하거나, 욕설을 하거나, 이간질을 하거나, 꾸며낸 말을 하는 등의
악을 행할 수도 있다.

마음으로써 하는 의업 또한
마음 속으로 미워하거나, 성내거나, 욕심내거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등의 악한 것들이 있고,
사랑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내며,
소박, 정직, 지혜, 나눔 등의 아름답고 선한 것들도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행하는 거의 모든 행위는
선하거나 악한 쪽으로 향한다.
선한 쪽으로 우리의 업을 펼쳐내는 것,
바로 거기에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열쇠가 담겨 있다.

업을 변화시키는 첫 번째 가장 큰 행위가 바로
보시 행이다.

선을 행하는 것,
내 것을 나누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업을 뛰어넘는 최고 단계의 실천 수행이다.

월급에서 일정부분을 떼어 내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해 사용하는 것,
또한 진리와 지혜를 많은 이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 전법하는 것,
필요가 아닌 욕망으로 많은 물건을 사들이기 보다는
꼭 필요한 것들만 소박하게 구입하여 쓰는 것,

내 것이 아니라고, 소모품이라고, 돈이 넉넉하다고 낭비하기보다는
물 한 방울이라도 아껴쓰고 근검 절약하는 것,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두려움을 주지 않아
나를 만나는 모든 이들이 평안을 느끼도록 하는 것,

이러한 작지만 분명한 한 가지 보시의 행이
내 앞에 펼쳐질 앞으로의 삶을 하나 하나씩 바꾸어 간다.
이러한 이타적인 업의 행위야말로
내 삶을 바꾸고, 내 미래를 바꾸는 결정적인 요소다.

두 번째로 운명을 뛰어넘는 요소가 바로 수행이다.
마음에 욕망과 집착을 비우고,
번뇌와 아상을 놓고 비우는 삶,
그것이야말로 업을 뛰어넘는 비결이다.

내가 잘났다는 생각, 내가 옳다는 아집을 놓아버리는 것,
내 소유와 내 물건이라는 소유욕을 놓아버리는 것,
모든 판단과 분별을 쉬는 것,
시비 분별을 끊고 올라오는 모든 생각들을 묵묵히 지켜보는 것,

좌복을 깔고 앉아 좌선에 드는 것,
경전을 공부하고, 독경하며, 지혜의 말씀을 사유하는 것,
매일 아침이나 저녁으로 108배 절 수행을 하는 것,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명호를 염불하거나 다라니, 진언을 독송하는 것,

이러한 작지만 분명한 지혜를 닦는 비움의 수행이
내 앞에 펼쳐질 앞으로의 삶을 하나 하나씩 바꾸어 간다.
이러한 자리적인 청정한 수행이야말로
내 삶을 바꾸고, 내 미래를 바꾸는 결정적인 요소다.

이치가 이러할진대
점을 보고, 사주팔자를 보며, 운명과 관상을 본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가.

사주팔자를 보며, 운명을 점치는 것은
이미 주어진 업을 더욱 강화시켜
더 이상 내 스스로 업을 변화 발전시킴으로써
업의 뛰어넘을 수 있는 본연의 무한한 능력을 축소시키고 만다.

사주를 점쳐 볼 바로 그 시간에 차라리
‘일체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소멸되고 평안하소서 안락하소서 행복하소서’
라는 자비의 게송을 읊는 것이 더욱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더욱 지혜로운 방법이다.

운명을 거부하는 것은 모든 고의 시작이며,
운명에 순응하는 것은 평범한 수준이지만,
운명을 스스로 바꾸고 개척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수행자가 가야 할 당당한 삶의 길이다.

어제와 오늘, 조금 전과 바로 지금의
나의 선한 행동, 나눔의 행동, 사랑의 행위, 깨어있는 행위가
내일 있을 괴로움을 몰아내고,
다음 주에 있을 병고를 없애주며,
다음 달에 있을 퇴직을 막아주고,
내년에 있을 이혼을 없애주며,
몇 년 뒤에 있을 단명의 업을 소멸시켜 줄 수 있다.

반대로 오늘 내가 행한 악행이
내일 있을 괴로움을 다음 순간으로 앞당기고,
다음 주에 있을 병고를 내일로 앞당기며,
다음 달에 있을 퇴직을 다음 주로 앞당기고,
내년에 있을 이혼을 다음 달로 앞당기고,
몇 년 뒤에 있을 단명의 업을 내년으로 앞당길 수 있다.

미래가 불안한가,
노후가 불안한가,
그 모든 불안을 해소시킬 유일한 탈출구는
바로 지금이며,
그 불안을 소멸시키는 약이 바로
사랑이 담긴 선행이며, 자비로운 나눔과 보시에 있다.



나눔과 비움, 보시와 수행, 복과 지혜,
이 두 가지의 실천이야말로
모든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삶의 길을 보여주는
유일한 진리의 나침반이 될 것이다.

혹 나는 공부에는 재능이 없다거나,
부유함은 나와는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체념한다거나,
내 운명은 어차피 진흙탕 속이라고 좌절하거나,
내 주제에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라고 주저하거나,
나 같은 악행을 많이 한 사람이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염려하거나,
내 삶은 포기와 좌절과 절망 뿐이라고
주어진 운명을 비관하지는 않았는가.

아직 비관할 때가 아니다.
절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니 그런 운명도, 그런 때도 없다.
이 세상에 정해진 운명이란 어디에도 없다.

언제든 마음을 돌이켜 ‘지금 여기’에서 시작한다면
수북이 쌓인 마른 풀이 성냥불 하나에 불타 없어지듯이,
수백 년 동안 어두웠던 동굴이 불빛 하나에 환히 밝아지듯이
어제의 모든 죄업은 일시에 소멸될 수도 있다.

내 삶은 내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다.
내 운명은 내 스스로 개척한다.
업이라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내 스스로 그 업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매 순간순간 업을 뛰어넘을 수 있는,
업을 경이롭게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지혜와 복덕이 담긴 행위를 해 나가고 있는가.
마음을 비우고, 소유를 나누는 비움과 나눔의 행위를 해 나가고 있는가.

작은 비움 하나가,
작은 나눔 하나가,
내 삶의 변화시키고 진화시킬 수 있다.

작은 비움,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
싫어하던 내 외모를 받아들이는 것,
기분 나쁘던 사람을 이해해 주는 것,
욕심 내던 것을 하나씩 포기해 가는 것,
집착하던 사람을 놓아주는 것,
혹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는 것,
아껴쓰고 절약하는 것,
소박하고 청빈하게 사는 것,
꼭 필요하지 않으면 사지 않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견해를 놓아버리는 것,
편견과 선입견을 비우는 것,
옳다 그르다는 생각들을 묵묵히 관하는 것,
매일 아침 절 수행을 하는 것,
염불, 독경, 진언, 좌선 수행을 하는 것,
때때로 주말에 가족이 함께 주말 템플스테이에 참여하는 것,
큰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
불경이나 불서를 가까이 하는 것,
마음을 관하는 것,
이러한 작은 비움들이
내 운명을 변화시키고 내 업을 바꾼다.

작은 나눔,
이웃을 보고 안부를 나누고 인사를 나누는 것,
지나치던 어린 아이에게 미소를 보내는 것,
직장의 청소부 아주머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
버스 기사 아저씨께, 톨게이트의 매표원 아주머님께 캔커피 하나를 드리는 것,
아내가 차려 준 밥상과 반찬에 칭찬세례를 퍼 붓는 것,
아들의 좋지 않은 성적에 웃으며 격려해 주는 것,
친구의 고민을 내 일처럼 들어주는 것,
나를 만나는 사람에게 나로 인한 불편함이 없게 해 주는 것,
남들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봉사하는 것,
내 집과 이웃 집 앞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것,
주말에 가족이 함께 고아원을 방문하는 것,
TV에 나오는 불우이웃을 위한 ARS에 때마다 전화하는 것,
매월 일정액의 보시를 행하는 것,
경전이나 지혜의 책들을 보시하는 것,
부처님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
이 세상을 향해 ‘고통이 소멸되고 평안하소서 안락하소서 행복하소서’라고 축원하는 것,
이러한 작은 나눔들이
내 운명을 변화시키고 내 업을 바꾼다.

이러한 나눔과 비움의 실천이
언젠가 있을 내 인생의 온갖 재앙들을 물리치고,
언젠가 있을 내 인생의 온갖 행복들을 더욱 더 몰고 온다.



[사진 : 승주 선암사]










Posted by 법상




[사진 : 인도 맥그로드 간지에서 만난, 인도에서 만났던 가장 예쁜 소녀^^]



내보내는 것이 들어오는 것이다

돈으로 보시를 하면 내 돈이 나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리 많은 돈을 보시를 해도
언젠가 그 돈은 분명히 다시 들어오게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로 칭찬해 주고, 찬탄해 주어 보라.
무엇이 돌아오겠는가.
칭찬과 감사와 찬탄이 돌아온다.
칭찬해 주는데 욕이 돌아올 일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법칙도 이와 같다.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느냐에 따라
무엇이 다시 내게로 들어올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언제나 영적인 균형을 맞추는
대평등의 일들만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이 우주의 운행 법칙이다.

나에게서 나간 것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언제나 다시 내게로 들어온다.

내가 상대방을 괴롭히면
상대방과 나와의 에너지는 불평등하게 되고
우주는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상대방이 나를 괴롭힐 일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욕을 하면
욕을 얻어먹을 일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주의 조화로운 작용이다.

예를 들어 직장상사가 직원을 욕하고 괴롭혔다 치자.
그러면 우주적인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다.
상사는 화를 풀었지만 직원은 괴롭힘을 당했다.
상사는 +에너지가 되었지만 직원은 -에너지가 되었다.
둘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직원이 어떻게든 다시 상사를
욕하고 괴롭힐 일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불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설사 이번 생에 두 사람이 다시 못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에너지의 불균형은 남기 때문에
두 사람은 다음 생에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
에너지의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교적인 표현으로는 인연이고 업보인 것이다.
‘저 사람과는 악연인가봐’라고 할 때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다음 생에는 반대로 직원이 직장상사로 태어나고
상사가 부하직원으로 태어나게 된다.
상사는 에너지의 불균형을 균형 있게 맞춰야 하기 때문에
우주적인 작용으로써 이상하게 그 부하직원만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사가 부하직원을 괴롭히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만남과 상황을 주선하는 것이 바로 우주법계고,
아바타에서 말한 에이와고,
불교에서는 불성이라고, 기독교에서는 신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인디언들은 어머니 대지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무엇이라고 부르든 상관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주는 이와 같이
대 평등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을 언제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세상이 불평등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차원의 진리에서 보았을 때
이 우주는 지극히 평등하며
언제나 완전한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진행된다.

아주 쉽게 누군가에게 욕을 해 보라.
무엇이 되돌아오는지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사랑하고 칭찬하면
사랑받고 칭찬받을 일들이 생겨난다.

감사함을 느낄 때 더 많은 감사할 일이 찾아오고,
불만을 느낄 때 더 많은 불만스러운 일이 찾아오게 된다.
감사를 내보내면 감사가 들어오고,
화를 내보내면 화낼 일이 들어오며,
만족하면 만족할 일들이 생기고,
무시하면 무시 받을 일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우주의 평등하게 균형을 맞추는
영적인 작업인 것이다.
이처럼 우주의 에너지는 언제나 균형을 맞출 뿐이다.
그것은 우주의 작용, 혹은 법칙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작용을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함이 없이 그저 균형을 맞출 뿐이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면
자연은 균형을 맞추려고 기상이변 등을 일으켜
본래적인 자연의 상태로 되돌아 가려고,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사람도 몸을 함부로 다뤄 탁한 에너지가 몸 안에 쌓아면
감기몸살 같은 형태를 통해 내보내줌으로 인해
우리 몸의 자정작용, 균형작용을 돕는다.

이 우주 전체와 그 안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존재는
언제나 이와 같이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에너지가 흐른다.


삶의 균형을 맞출 뿐

일전에 보았던 아바타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제이크 설 리가
에이와에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을 때
여주인공 네이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에이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오직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지”

우주법계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오직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다.
진리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고, 안팎의 차별이 없다.
다만 균형을 맞출 뿐이다.
에너지의 불균형을 없애는 일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돈을 훔쳤다면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 것이다.
그 때 우주법계는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훔친자에게서는 앗아가고,
빼앗긴 자에게는 되돌려 주는 작용을 만들어 낸다.
욕을 했으면 욕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고,
사랑하면 사랑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 사이에는
이처럼 정확한 균형이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우주법계가 하는 일이며, 진리가 하는 일인 것이다.

한창 유행처럼 번지던 ‘시크릿’에서는
이러한 진실을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무엇이든 내가 내보내는 것이 끌어당겨 지는 것이다.
생각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나,
불교의 화엄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
혹은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서
마음먹은대로 세상에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다는 말이
모두 이러한 법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법칙,
즉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라는 것은
언제나 증명되고 있다.

우주는 이처럼 다만 우리가 내보내는 것을 들어오게 할 뿐이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는다.

우주의 본질에는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른 것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에서, 판단과 분별에서 옳고 그름이 생겨나는 것이지
우주법계에는 그런 차별이 본래부터 있지 않다.
다만 내보내는 것을 분별 없이 들여보낼 뿐이다.


내보내는 것에 중심을 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낼 생각보다는
더 많이 얻고 바라며 가지려고만 한다.
내보내야만 들어온다는 우주의 평등한 이치를 모른 채
내보내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나누고, 베풀고, 보시하며,
내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고, 얻고, 빼앗고, 성취하고,
쌓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우리가 이 우주를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내보내는 것에 있다.
진실은,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란 사실이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이 곧 나에게로 들어올 것이다.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는 곧 무엇을 받을 것인가와 같은 말이다.
무엇을 나누고 베풀 것인가가
곧 무엇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짓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들어오는 것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가,
내보내는 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로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보내는 것 뿐이다.
내보내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지만
들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우주법계의 의지일 뿐이다.

즉 우리가 우리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들어오는 것이 아닌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더 크게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엄밀이 말하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우리는 오직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내보낼까,
나눌까, 베풀까, 보시할까, 회향할까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을 뿐이다.

들어오는 것에는 아예 관심을 갖지 말라.
들어오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법계의 소관일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니!


내보내는 것과 업보(業報)

불교의 업(業)사상도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어떤 업을 지었느냐에 따라 어떤 과보를 받는지가 결정된다.
업에 따라 보(報)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업을 지었느냐가
곧 어떤 것을 내보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몸과 말과 생각으로
무엇을 이 세상에 내보냈느냐에 따라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업보의 법칙이라고 말해지는 이 법칙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사이의 법칙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육근이 바로 나 자신이고
육경이 외부의 대상을 말하는 것이니
나와 세상 사이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육근이 즉 내가 무엇을 육경으로 내보냈느냐에 따라
육경은 보를 보내주는 것이다.
그래서 육근은 업을 짓고 육경은 보를 받는다.

우리가 업을 지으면 그에 따른 보를 받는다는 이 업보의 이치가
바로 내보내는 것을 필연적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법칙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업보의 법칙이
바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우주의 이치인 것이다.
우주는 언제나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
업보라는 어떤 사상을 만들어내려고 애쓴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악행을 함으로써 악업을 지으면
둘 사이의 에너지는 불균형을 이루게 되고,
그 때 우주는 그 불균형을 균형과 조화로써 맞추기 위해
당연하게 과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업보니, 인과니 하는 것이 바로
이 우주법계의 대 평등성, 균형과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육근은, 즉 우리는 오직 업을 지을 뿐이지
어떤 ‘보’를 받는지까지를 결정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보’라는 것은 ‘다르게 익어간다’는 의미로,
육근이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우주법계에서는 어떤 과보를 받을지를
천편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온갖 정보, 업력, 인연 등을 총괄적으로 따져
‘보’를 최종적으로 보내주는 것이다.

우주법계는 총체적이고,
시공을 초월한 전체적인 관점에서 판단한 뒤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언제 받아야
그나마도 그 사람에게 영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즉 우주법계는 ‘보’를 받을 때
항상 자비와 사랑의 바탕에서
그러한 결정을 바로 그 때 내려주는 것이다.

이렇듯 우주 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위한,
우리를 돕기 위한 자비와 사랑의 관점에서
순리롭게 행하는 바 없이 무위(無爲)로써 일을 행한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업을 지었느냐에 따라
어떤 보를 받느냐가 결정된다는 큰 틀은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과보를 받는 것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법계에서 어떤 과보를 언제 받을지를 결정한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떤 과보를 받을까가 아니라,
어떤 복을 받을까가 아니라,
어떤 업을 지을까, 어떤 복을 지을까,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어떤 행위를 할까,
즉 어떤 것을 이 세상으로 내보낼까 하는데 있는 것이다.

‘나는 매 순간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기로 예정된 것이니
들어올 것에는 신경도 쓰지 말고,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놓아버리고
오직 내보내는 것에만 마음을 모으라.


책 ‘시크릿’과 영화 ‘아바타’와 불교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바타에서 말한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과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
그리고 불교의 업보, 인과응보의 법칙은
모두 같은 진리를 다르게 표현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나 자신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나를 중심으로 내가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다.
시크릿의 표현으로 하자면
내보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끌어당기는 것인 것이다.

아바타에서는 이것을 전체적인 이치로써 설명하고 있다.
즉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우주는, 에이와는,
불성은, 신성은 언제나 내보낸 것을 다시 받게 함으로써,
즉 내보낸 것을 끌어당기게 해 줌으로써
균형을 맞춰주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표현에 의하면
내가 업을 지음으로써 과보를 받게 될 수밖에 없다는
인과응보, 업인과보, 업보의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아바타에서 말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
업인과보의 법칙 등은 전체적인 진리를 표현한 말이고,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은
내보내는 것 보다는 ‘받는 것’에 중점을 둔 표현이며,
불교의 업사상은
받는 것 보다는 ‘내보내는 것’에 중점을 둔
실천적인 표현인 것이다.

우리가 시크릿에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사람들은 나에게서 나가는 것보다
나에게로 들어오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내가 짓는 업(業)보다는 받을 보(報)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시크릿에서는
돈도 끌어당길 수 있고, 인간관계도, 건강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끌어당길 수 있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설명되어지고 있다.
물론 무엇을 내보냈을 때 끌어당겨질 수 있는지도
설명되고는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점은
내 바깥에서 무엇이 들어올 것이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에 있다.

직접적으로 우리의 의지로써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놓고 보았을 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끌어당기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내보내느냐에 있다.

끌어당기느냐에 중점을 두면
끌어당겨질 것에 대해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기에
그 의도가 순수해 지기 어려운 점이 있다.

보시를 할 때나, 선을 행할 때도
바라는 바 없이 하라고 하지 않는가.
내가 보시를 하면 많은 돈이 끌어당겨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면
그 보시는 큰 결과로 이어질 수 없다.
그 보시의 행위 자체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가진 풍요를 누리고, 만족함으로써
부유함이 끌어당겨진다고 할 때라도
끌어당겨질 미래의 결과를 마음에 두고
풍요를 누리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며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끌어당김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의 중점은 끌어당겨질 것이 아니라
내보낼 것에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보다 ‘내보내는 법칙’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내보내는 것이 곧 끌어당겨지는 것이라는 법칙에.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끌어당김의 법칙을 말했을 때에 비해
당황스러워 한다.
우리는 내보내기는 싫고 끌어당기는 것은 좋아한다.
끌어당긴다는 표현이 우리의 욕심을 더 충족시켜주며,
우리를 달콤하게 유혹하기 쉽다.
그렇기에 ‘내보내는 법칙’에 대해 실망감이 들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내보내는 것이 곧 끌어당겨지는 것이다.
현재 속에 미래가 있다.
우리는 다만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만 생각하면 된다.

무엇이 끌어당겨 질 것이냐, 들어올 것이냐를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투명하게, 이타적으로, 사랑으로
다만 내보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주적인, 불성과 영성에서 보내주는,
에이와의 무한한 에너지, 힘이 거기에 붙게 될 것이다.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
바로 거기에 이 모든 법칙을
내가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운행시킬 수 있는
힘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오늘은 또 무엇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화와 증오와 미움과 욕설과 질투와 탐심과
집착으로 얼룩진 에너지를 세상으로 보내지는 않았는가?
그것은 곧 내가 내보낸 것이기에 곧 내가 받을 것이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 아내에게 자식에게 바라지 말라


아내에게 바라는 마음을 내보내지 말라.
자식에게 좋은 성적을 바라고, 좋은 성격을 바라지 말라.
그저 내가 먼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남편이 되어 줌으로써 좋은 남편의 모습을 내보내고,
좋은 아버지의 모습을 내보내 주라.
그러면 내가 내보낸 것과 일치하는
좋은 아내, 좋은 자식이 딸려 올 것이다.
내보내는 것이 들어오는 것이니.

아내에게 내조를 잘 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결국 아내가 내조를 못 한다는 것을 내보내는 것이 아닌가.
내조를 잘 하기를 바랄 때 우리는 우주를 향해
‘내조 못하는 아내’라는 메시지를 내보냄으로써,
결국 지금 보다 더 내조 못하는 아내를 과보로 받게 될 것이다.

자식에게 좋은 성적을 바란다는 것은 결국
자식의 나쁜 성적으로 인해
실망스럽다는 마음을 내보내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정확히 그것이 다시 들어 올 것이다.
자식의 성적이 더 나빠지기를
우주법계에 요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대로에 만족하고 감사해 하라.
만족과 감사를 내보내라.
아내의 부족한 부분을 보고 그 점을 지적함으로써
‘부족한 아내’라는 부정적 에너지를 내보내지 말고,
그래도 잘 하는 부분을 보고
그 점에 감사해 하고 만족하는 마음을 내보냄으로써
아내에게 감사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라.

정확히 바로 그 만족스러운 점, 감사한 점이
내보낸 만큼의 크기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아내가 달라지겠지 하는
끌어당겨질 것을 미리 마음에 두고 행해선 안 된다.
끌어당김의 법칙이 아닌 ‘내보내는 법칙’에 마음을 쏟을 때
그 힘은 더욱 투명해지고 순수해져 우주법계의 힘이 붙을 것이다.

자신의 월급에, 연봉에 불만이 있는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연봉에 대한 불만을 내보내지 말라.
돈에 대해 작다는 불평어린 마음을 내보내면
우주는 고스란히 적은 돈을 되돌려 줄 것이다.
그러나 작은 월급일지라도
그 돈으로 인해 행복해 하고, 감사해 하고,
풍요로운 마음을 내보낸다면
우주법계는 고스란히 그 돈으로 인한 풍요로움을
더 많이 만들어 보내 줄 것이다.

당신이 회사 사장이라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사원들에게 혹은 고객들에게
적은 이익을 되돌려 주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회사가 부자가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회사가 부자가 되는 것, 더 많은 돈을 버는 것,
그것은 정확히 끌어당기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끌어당겨질 것, 부자가 될 것에 대한 마음은 완전히 비워버리라.
그리고 내보내는 것에만 집중하라.
즉 사원들에게 회사가 번 이익을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어 주라.
안철수 연구소의 안철수 사장은 아무런 조건 없이 회사의 지분을
자녀들이 아닌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나.

또한 고객들에게 돈을 끌어당기려는 마음을 버리고,
다만 고객들에게 무엇을 나눌 수 있을지를 고민하라.
고객들에게 어떤 것을 베풀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라.
무언가를 얻을 생각 없이 다만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고,
내보내 줄 것에 마음을 집중할 때
바로 우주법계의, 에이와의, 불성이며 신성의
사랑과 자비의 한량없는 힘이 붙을 것이다.


먼저 자신에게서 시작하라

자신의 삶에 전적으로 만족하라.
전적으로 감사를 표명하라.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라.
그것은 곧 자신의 삶에 무한한 만족스러운 일들과
감사할 일들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전적인 사랑을 보내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감사를 느끼는 자에게
무엇이 흘러나오겠는가?
또한 반대로 자신을 억압하고, 미워하고, 자괴감을 느끼며,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서 무엇이 내보내지겠는가?

아름다운 것, 지혜로운 것, 사랑과 자비, 만족과 감사와 같은
진리의 덕목들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그것이 되어야 한다.
먼저 자신부터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며,
만족하고, 예뻐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끌어당겨질 것이 아닌
내보낼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끌어당겨질 것, 받을 것, 얻을 것에 집중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은 아직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부족하니 바깥에서 무언가를 끌어옴으로써
나를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언제나 완전하고 완벽하다.
삶은 언제나 풍요롭다.
지금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한다면
미래의 그 어떤 순간에도 만족은 없다.

반대로 나 자신이 꽉 차 있어서 흘러 넘친다면 어떻겠는가?
나 자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감사와
풍요로움과 만족이 넘친다면
애써 외부에서 무언가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내 안에 자가발전소가 있어서
무한히 생산할 수 있는 자력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엇을 바깥에서 바라겠는가?
그 사람은 바깥에서 무언가를 끌어오려고 하기 보다는
내 안에서 생산한 것을 바깥으로 나누어 주고, 내보내 주고,
베풀어 주는데 더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

매 순간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주의 깊게 살펴보지 못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주의 한 마음이 내보내는 것들로 인해
힘겨워할 일이 생길 것이다.

하루를 정리하며 매일 밤 ‘내보낸 일기’를 적어 보라.
오늘 하루 무엇을 내보냈는가를 돌이켜 보라.
물질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내보낸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마음으로 내보낸 것이 없는지도 주의 깊게 살피라.
신업과 구업이 중요하지만 의업이 더없이 중요한 것처럼
마음으로 무엇을 세상에 내보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야말로
‘내보내는 법칙’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무언가가 내게 끌어당겨지기를 바라지 말라.
무엇을 얻을까, 벌까, 가질까를 생각지 말라.
무엇을 내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라.

내가 태어나서 죽는 그 날까지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고 보시하며 나누었는가?
내가 내보낸 것들로 인해 세상은 얼마나 밝아졌는가?
세상이 밝아질 때 곧장 내가 밝아지는데 성공한 것이다.







Posted by 법상




[사진 : 지리산 천은사]

‘내게는 업보가 닥치지 않으리라’고
작은 악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방울물이 고여서 항아리를 채우나니
작은 악이 쌓여서 큰 죄악이 된다.

‘내게는 업보가 오지 않으리라’고
작은 선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방울물이 고여서 항아리를 채우나니
조금씩 쌓은 선이 큰 선을 이룬다.

[법구경]



아무리 작은 악업을 짓더라도
그 업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를 불태운다.

작은 악업의 결과가 미미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다보니
당장에는 비켜갔으리라고 안심할지 모르지만
방울물이 모여 항아리를 채우는 듯
그러한 작은 악이 모여 언젠가는 분명한 큰 재앙으로 온다.

아무리 작은 업이라도
언젠가는 분명한 결과를 받는 법.

지금 몸이 건강하다고,
지금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지금 집안이 화목하다고,
지금 나의 행복이 충분하다고
현재에 안주하여 작은 선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훗날 내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누가 알겠는가.

막상 역경과 고통에 처했을 때
그 때, 대비하려면
이미 늦다.

행복할 때, 만족스러울 때를
더욱 조심하여
이 행복이 언젠가 소멸될 것을 알아
더 많은 복을 지을 일이다.

행복하다는 것은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뜻하니
복을 다 받고 나면
복의 창고는 곧 비고 말 것이다.

그러니 지혜로운 이는
행복할 때를 더욱 조심한다.

그렇다고 괴로울 때
삶을 포기하지도 말라.
기왕 이렇게 된 것
악행을 일삼고 스스로를 더욱 괴롭혀서는 안 된다.

불행하다는 것, 괴롭다는 것은
오히려 과거의 죄업을 받고 있는 것이니
사실은 불행한 때가
업장을 녹이는 소중한 순간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이는
행복한 때가 오히려 위기이고,
불행할 때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인과를 깨달아,
순경에 거만하지도
역경에 좌절하지도 않으며
언제나 조화로운 중도를 지킴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지켜 나간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