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여여하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뛸 때,
괴롭다거나 행복하다거나 하고 올라올 때,
나태한 마음이나 급한 마음이 올라올 때,

마음의 고요를 방해하는
한 치의 움직임이라도 있을 때라면
그 때가 바로
업식의 불길이 치솟을 때입니다.

차를 몰고 가면서
급한 마음에 속도를 올리게 되고
빨간 신호등에 조바심과 성내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면
이미
우리 마음은 업식의 불길에 크게 휩싸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면서
떨리고 두근 두근 거린다거나,
부담을 느낀다거나
만나기 싫은 마음
혹은 너무 보고픈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업의 불길이 장난을 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해 나가면서
급한 마음이 앞선다거나,
꼭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거나,
가슴에서 뜨거운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다거나,
목표를 성취한 이후의 행복감에 빠져 있다거나
이런 것들 또한
내 안의 업의 불길이 치솟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급한 마음, 서두르는 마음은
가장 경계해야 할 수행의 재료라 생각하세요.

마음이 급하고, 서두르게 되는 이유는
바라는 바가 크기 때문이고,
바라는 바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크기 때문이며,
‘꼭 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기 때문이고,
마음이 미래로 먼저 가 있기 때문이며,
지금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알아차림을 놓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급하고 조바심이 나는 순간,
업의 불길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휩쓸어 버립니다.

급한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해 나가면
그 일은 자연스럽고 여여한 흐름이 되지를 못합니다.
여법한 일과가 되지를 못하고,
업의 불길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조급한 마음이 앞서게 되면
빨리 빨리 성취하려는 섯부른 욕심 때문에
그 사이 삿된 마장이 끼기 쉽고,
그로인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삿된 쪽으로 흘러갑니다.

바라는 바 욕망이 없다면
아무런 서두를 일도 마음 급할 일도 없습니다.
그냥 한가로이 노닐 뿐입니다.
마음은 늘 휴식 중이며,
한낮 나른한 오후의 여유로움을 평화로이 즐기고 있음입니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언제나 여유롭고 한가해야 합니다.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여유롭게 한가로이 온전히 일을 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조금 느리게 살면
느림, 그 자체만으로도 큰 공부가 됩니다.
느려지면 저절로 나를 비추어 볼 수 있게 되고,
일을 하는 순간 업의 불길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차를 타고 운전을 할 때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가 있지만,
마음이 급하고 조바심 날 때가 있게 마련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격이 급해
그리 바쁜 일이 없는데도 저도 모르게 차를 빨리 몰고 갑니다.

빨리 가려는 그 마음은
업의 불길입니다.

본래 자리 텅 빈 우리 마음은
바쁠 것도 없고, 성급할 것도 없습니다.
바쁘게 갈 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속도를 조금 줄여 보세요.
그리고 가고 있음을 온전히 느껴 보세요.
지금 이 순간을 좀 더 챙겨 보시란 말이지요.

속도를 늘이나 줄이나
삶의 속도는 늘고 주는 법이 없습니다.
진리의 속도는 빠르고 느리고가 없습니다.

마음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내 안에 어지러운 마음, 번잡한 마음,
그리고 바라는 마음, 욕심내는 마음만
자꾸 늘어갈 뿐입니다.

차 속도를 줄이듯
삶의 속도도 조금씩 줄여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수행의 속도도 조금 줄여 놓으세요.

오고 갈 곳이 없는 이 텅 빈 법계 속을
아무리 속도를 낸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우리의 감각에만 속도가 있는 것이지
내면의 본래 뜨락에는 속도가 있지 않습니다.

조금 느리게 여유로운 마음을 내면,
우리의 속 뜰은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여여해 질 수 있습니다.

급한 마음에 일을 하면
업의 불길에 휩쓸리기 때문에 일을 그르치기 쉽지만,
조금 바쁘더라도
느긋한 여유로움으로 일을 하게 되면
자연스런 법계의 흐름을 타고
순리대로 일을 풀어 나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여유로우세요.
마음을 턱 놓고 살면
지금 이 순간 그리 바쁠 것이 없습니다.

바쁘고 급하다는 것은
바라는 것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고,
욕심과 집착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며,
그만큼 놓고 비우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 놓고 가는데
바쁠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지금 이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자성불 여여한 존재입니다.

자꾸 어디를 가려하고,
자꾸 무엇을 찾으려고 하시는지요.
그리 급하게 어디를 가고 계신가요?

우리가 바라는 일은
이미 다 이루어져 있으며,
찾고자 하는 것은
내 안에 이미 다 갖추어져 있고,
급하게 가고 있는 그 목적지는
다름 아닌 ‘지금 여기’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가고 오고도 없고,
나고 죽고도 없으며,
성취되고 말고도 없습니다.

그저 지금 이대로
여여하고 텅 비어 있거늘
바쁜 걸음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빨리 걸어도 ‘그 자리’이며,
천천히 걷는다 해도 여전히 ‘그 자리’이고,
그냥 가만 있어도 언제나 ‘그 자리’일 뿐입니다.

지금 이 자리,
자성불 본래 자리
이 자리가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자리이며,
그렇게 찾으려고 애쓰던 자리이고,
급하게 뛰어 다다르려 했던 바로 그 자리인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가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발걸음을 멈추세요.
조금 천천히 가도 늦지 않습니다.

우린 언제나
도착지에 여유로이 머물러 있거든요.
그런데 분별을 지어
또 다른 도착지를 자꾸 찾으려 하니 답답한거지요.

그만 가세요.
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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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아침에
예불을 올리고
좌선을 합니다.

좌선을 하기 전에
잠시 마음나눔의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모든 분들이 똑같습니다.
그냥 이렇게 법당에 앉아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똑같지를 못합니다.
어두운 마음으로 앉아있는 사람,
오늘 할 일에 대한 부담감으로 앉아 있는 사람,
요즈음의 안 풀리는 일상에 대한 무거운 마음으로 앉아있는 사람,

또 군인 법우들은
내가 지금 군대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무겁게 다가오기 때문에
온전히 앉아있을 수가 없기도 합니다.

사실은
모든 이들이
지금 이 순간 똑같이 앉아있습니다.

이렇게 앉아있는 데는
다른 분별이 붙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앉아있을 뿐이지요.

'누가'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 '어디에''왜'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있는 그 순간 집중하고 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장도 아니고,
주부도 아니며,
자식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어려운 일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도 아니고,
힘겨운 군생활하고 있는 군인도 아니고,
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앉아있을 뿐입니다.
아무런 분별이 없어요.
바로 그 순간이 부처님을 친견하는 순간이 됩니다.
깨달음을 체험하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바로 그 순간
우리는 온전한 평화로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마음을 모아 집중하며
이 순간을 느끼는 데에는
다른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이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평화로움과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마음 속에
어제 일에 대한,
요즈음의 일상에 대한,
또 오늘의 일이며 내일의 일에 대한,

일에 대한 스트레스며,
사무실 업무에 대한,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식 걱정이며 대학, 취직, 진급에 대한질투, 시기, 노여움, 다툼, 욕
심 등의 마음에 대한
온갖 번잡한 마음을 붙잡고 앉아 있게 되면
그것은
좌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마음 모아 관찰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똑같이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 때문에
지금 마음 집중하기가 어렵고,
미래에 올 두려운 일 때문에
지금 좌선이 잘 안 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과거나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의 문제입니다앉아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의 모든 시공에서의 문제입니다.

앉아서 평화로울 때 처럼
움직임 속에서,
무수한 일의 스트레스 속에서,
번잡한 출근 길의 정신없음 속에서,
사람들과의 부딪김 속에서,
우리는
바로 그 순간에 온전한 평화로움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그냥 다 놓아버리고
그 순간이 되어 느끼기만 하면 됩니다.
온전히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처럼 우린 누구나
지금 이 순간 평온을 느낄 수 있고,
자성부처님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나 미래에 짊어지고 있는 것들만 놓으면...
그래서 이 순간에 깨어있을 수 있다면
그 순간이 부처님을 친견하는
가장 좋은 때가 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어느 때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순간
직업도, 스트레스도, 두려움도,
온갖 나에게 붙여진 이름들도,
이를테면 부모, 자식, 사장, 직원, 친구, 수행자 등등하며,

온갖 과거로부터 짊어진 모든 이름, 모양, 아상들이며
오지도 않은 미래에 기대하고 있는 모든 것들까지
다 놓아버리고
온전히 지금 여기에서
이 순간에 집중하여 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충분하다기 보다
아니...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번쩍 열리는 깨달음을 구한다면
천리 만리 길을 잘못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환상에 젖은 깨달음은
그 자체로써 마장인 것입니다.

멀리서 찾지 말고,
엄청난 무언가를 찾지 말고,
아주 소박하지만
아주 미세하지만
그래서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더 어렵다고 하겠지만
이 순간의 아주 작은 평화는
너무 크기 때문에 작게 느껴지는 평화로움인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의 육근이 바깥으로 끄달리는감각적인 행복만을 추구해 오다 보니
이 작지만 온전한 행복을 느끼는데 익숙하지 않을 뿐입니
다.
크고, 웅대
하고, 엄청난...
그런 깨달음을 구하려 하지 마세요.
부처님의 밝은 미소는
아주 소박하게 다가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잠시 동안이라도 모든 번뇌일랑 다 놓아버린 채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관찰해 보세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에
가만히 집중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작은 평화로움 한 자락...
아주 미세한 속 뜰의 본래 향기가...
느껴지시는지...








Posted by 법상


제 23, 정심행선분
마음 집중의 수행으로 보리를 얻으라


淨心行善分 第二十三
復次 須菩提 是法平等 無有高下 是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卽非善法 是名善法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란 여래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한 법일 뿐이다.”

정심행선이란 깨끗한 마음이란 선을 행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의미다. 그러나 앞서 6분 정신희유분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선법이란 악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선한 법이 아니라 ‘지혜로운 주의’ 즉 ‘지혜로운 마음 집중’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심이란 깨끗한 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뜻하고 있다. 무상정등정각의 완전한 깨달음이야말로 깨끗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심행선은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마음 집중의 수행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이 더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이다. 그렇기에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이라 하는 것이다. 진리의 법에는 그 어떤 차별도 발 붙일 틈이 없다. 높고 낮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선하고 악하다거나, 크고 작다거나, 잘나고 못났다거나, 나고 죽는다거나, 나아가 어리석고 지혜롭다거나, 중생과 부처라거나, 생사와 열반이라는 개념조차 방편으로 이름 붙여진 개념일 뿐 진실한 법의 바탕에서는 그 모든 차별이 대 평등의 용광로 속에 녹아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을 보라. 모든 것이 차별과 나뉨이 세상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높고 낮은 구분을 두어 차별하고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수능시험을 보더라도 전국의 모든 수험생을 일등부터 꼴지까지 등수로써 높낮이를 매겨 차별하고, 기업도 대학들도 무슨 무슨 평가의 틀에 따라 등수를 매겨 세계에서 몇 위의 기업인지, 대학인지를 가늠하곤 한다. 그것이 이 사회의 차별된 어리석은 현실이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들 모두가 직장에서 서열에 의해 등수가 매겨지고, 점수화되어 관리되고, 나아가 먹거리들 또한 어떤 틀에 맞춰 몇 등급인지가 정해진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수많은 잣대와 기준을 정해놓고 그 틀에 따라 높고 낮은 차별을 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게 높고 낮은 틀을 정해두고 그 결정에 따라 사람들의 등수가 정해진다. 또 그 등수에 따라 사람들 서로간에 차별이 일어나고 불화와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그런 높고 낮은 차별이 이 사회를 좌지우지 흔들고 있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서로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투쟁하고 싸우고 심지어 국가간 인종간에는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제 이 사회는 사랑과 자비의 장이 아닌 무한 경쟁과 투쟁의 장이 되어버렸다.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면 곳 낮은 계층으로 떨어지고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야만 보다 높은 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회의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크기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 우위를 점할 것인가에 달려있고, 반대로 괴로움의 크기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 열등에 놓여있는가에 있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 상대적 박탈감이란 무엇인가. 바로 높고 낮음을 나누는 차별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어리석음에 기인하는 이 차별이 모든 세상의 괴로움을 몰고 왔고, 세상의 모든 사랑과 자비를 빼앗아갔다.

그러나 여기 부처님 말씀을 들어보자. 법이라는 것, 진리라는 것은 그렇듯 높고 낮음을 차별하는 거기에 있지 않고 대평등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높고 낮음을 차별하지 않는 만인, 만생명 대평등의 가르침 속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최상의 깨달음은 나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차별 뿐 아니라 사람과 동식물, 사람과 자연간의 높고 낮은 차별의 마음이 지금 이 세상을 극단적인 환경 악화로 인한 멸망 위기까지 몰고 왔다. 신과 인간도 차별되어선 안 되고, 인간과 동식물도, 인간과 자연도 차별되어선 안 된다.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이 세상은 완전한 하나의 생명이요, 온전한 법이고 불이고 신으로써 대평등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 평등의 가르침,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만이 이 세상을 완전한 평화의 땅으로 만들 수 있고, 우리를 완전한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데려가 줄 수 있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란 여래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한 법일 뿐이다.”

높고 낮은 차별이 없어 대 평등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온 존재가 차별이 생기는 것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그것은 바로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 ‘나’라는 상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상을 내세우기 때문에 너와의 차별이 생겨난다. 나와 너의 차별이 생겨남으로써 나아가 우리나라와 남의나라, 인간과 자연, 중생과 부처 등의 모든 부가적인 차별들이 연이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모든 차별의 원인은 바로 아상에 있다. 아상을 타파하면 나와 너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높고 낮은 차별도 생길 수 없다. 내가 있어야 나를 더 높이고 상대를 낮추고 싶으며, 내가 높아졌을 때 오는 기쁨도 누릴 수가 있는 것인데, 나라는 아상이 소멸되고 나면 내가 남보다 더 높아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와 남이란 차별이 없다면, 그래서 나와 남이 서로 둘이 아닌 한생명이란 자각이 있다면 나와 남 사이를 높고 낮게 나눌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높고 낮은 차별 없이 일체만유, 만생명이 대평등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일체의 선법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는 구마라집의 한역의 의미로 보자면 착한 법을 닦는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지만 이를 착한 법으로 본다면 이 또한 악한 법에 상대되고 차별되는 선한 법이기에 이 또한 높고 낮은 차별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산스크리트 원전의 본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법의 산스크리트 원전의 본래 의미는 ‘지혜로운 마음 주의집중의 가르침’ 즉 ‘마음 집중’의 수행을 말한다고 했다. 그러니 여기서 이 문장을 해석해 보면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이 일체의 마음 집중 수행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이해해 보면, 이 법 즉 진리의 가르침은 높고 낮음도 없이 대 평등이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높고 낮음 없는 대 평등의 가르침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타파에서 온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일체 상의 타파는 마음 집중의 수행을 통해 온다. 그러니 다시 돌려 말하면, 높고 낮음 없는 대평등의 진리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마음집중의 수행을 통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일목요연한 가르침이 바로 금강경이다. 왜 불교의 가르침이 무차별이요 무분별인지, 무아이며 무아상인지, 왜 대평등인지, 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해야 하는지, 그 실천방법이 무엇인지, 그 모든 것을 분명하게 정리해 보여주는 분이 바로 정심행선분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다시 부처님은 자비로운 우려의 말씀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났더니 ‘아! 그러면 마음 집중의 수행만 하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마음집중’의 수행에 집착하고 있을 중생들을 위해 선법 즉 마음집중의 수행 또한 그 이름이 마음집중의 수행일 뿐 거기에 집착할 어떤 고정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말은 마음집중의 수행, 구체적으로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이라는 수행을 실체화하거나, 절대화하여 그 어떤 정해진 ‘수행법’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도 이름 뿐인 것이지 거기에도 빠지면 안 된다. 요즘 위빠사나니 관수행이니 정념, 사띠, 알아차림, 비추어 봄, 깨어있음 등 마음 집중의 수행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칫 그 말에도 집착하여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짚어주고 있는 부분이다. 위빠사나라는 수행법을 공부하는 수행자들과 간화선을 공부하는 수행자 혹은 염불이나 진언, 독경이나 절 수행 등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는 수행자들이 요즘도 많이 있는데 때때로 어떤 수행법이 더 우수한가를 놓고 왈가왈부하면서 자신의 수행법이 더 우수함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된다. 이런 다툼도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대평등의 법을 거스르는, 높고 낮은 차별심에서 나왔으며, 나아가 어떤 한 수행법에 집착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런 우려를 위해 부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해 금강경에서 말하고 계신 것이다. 선법도 선법이 아니니 이름이 선법일 따름이다. 즉 마음집중이란 수행도 마음집중 수행이 아니니 다만 이름이 마음집중의 수행일 뿐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부처님 열반 후 2천 5백 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금강경의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이처럼 분명하고 자비롭다.

높고 낮은 일체의 차별심을 거두어 대평등으로 향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어찌 수행법의 높고 낮음을 논할 것인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모든 수행법은 다만 방편에 있어 서로 다를 뿐이지 그 본질은 높고 낮음이 없는 대평등의 마음 집중 수행법에 다름 아니다. 즉 위빠사나도 간화선도 염불도 참선도 진언도 독경도 절 수행도 그 모든 수행도 모두 그 중심은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에 있다. 염불하는 수행자가 마음을 염불에 모아 주의집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과 번뇌를 일으킨다면 그것이 어찌 염불수행일 수 있겠으며, 절 수행자가 몸과 마음에 마음을 주의 집중하지 않고 몸만 일어났다 앉았다 한다면 그것이 어찌 수행이 될 수 있겠는가. 절을 하면서 마음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 수행이 아니라 단순한 다리운동에 불과할 것이고, 염불하면서 마음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입 운동이고 소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간화선도 마찬가지다. 화두를 의심하며 그 의심에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분별하고 따지거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면 어찌 그 사람을 화두 수행자라 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모든 수행법의 본질이 바로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인 것이다.







Posted by 법상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법상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도솔, 중에서... (예스24, 50%할인 특가중, 4,750원)






Posted by 법상






[고양 흥국사 연못에 비친 종각]

선택하지 말라.
분별하고 차별하지 말라.
우리의 삶을 가만히 바라보면
끊임없는 선택과 분별의 연속이다.

단 한 순간도 선택을 멈춘 적이 없다.
선택하지 않으면 세상을 살 수 없을 것 같다.
바보가 될 것 같다.
매 순간 순간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선택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란 점은 좀처럼 생각지 못하고 있다.
선택이 우리를 괴롭히며,
선택이 우리를 어리석음으로 몰고간다.

우리는 생각한다.
보다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순간 순간 보다 올바로 선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며,
공부하고 자료를 찾으며 온갖 정보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 모든 배움들은 이제 다 놓아버릴 때가 되었다.
모든 분별과 차별, 그로인한 '선택'은 삶에 대한 근원적인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선택받지 못한다.
한 가지를 옳다고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그른 것이 되어 선택받지 못하고 만다.

그러면 우리 삶은 둘로 나뉜다.
옳고 그른 것, 맞고 틀린 것으로 나뉜다.
그렇게 둘로 나뉘면 반드시 그 중 하나는 좋고 하나는 싫어진다.
보통 사람들은 그 가운데 좋은 것은 선택하여 내 것으로 가지려 하고
싫은 것은 선택하지 않은 채 버려두거나 혐오하고 심지어 파괴시키고 죽이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좋고 싫은 것으로 나누는 것,
그것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본 진리의 관점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혼란과 분열, 시기와 질투 그리고 전쟁을 가져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은 더욱 더 좋고 싫은 것을 나누게 되고,
점점 더 사물을 비뚫어지게 보게 된다.
한 쪽으로 치우친 시선으로 보게 된다.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잃고 만다.

항상 우리의 답변은 둘 중 하나다.
좋거나 싫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그러나 어찌 항상 좋을 수만 있고, 옳을 수만 있는가.
어찌 항상 싫을 수만 있고, 그를 수만 있겠는가.

흔히 '저 사람 어때?' 하고 물으면 그 답변은 늘
'괜찮아' 혹은 '별로야'이거나,
'좋은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거나하는 둘 중 하나의 답변이 돌아오곤 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둘 중 하나의 견해로 규정지어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거나 하는
둘 중 하나로 나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판단 자체가 그 사람에 대한 온전치 못한 편견을 불러올 뿐이다.

'나쁜 사람이야', '성격이 별로야'란 평가를 들었다고 치자.
그러면 분명 우리 마음에는 그 사람에 대한 '나쁘다' '별로다'라는 편견이 자리한다.
그런 치우친 견해로 상대를 판단하게 된다.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나 자비를 베풀었더라도 마음 속에는
'혹시 무언가 또다른 나쁜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된다.
좀처럼 그 편견을 깨기란 쉽지 않다.

모든 나뉨과 판단과 분별 그리고 선택이란 것이 이와 같다.
좋게 보는 것도 본질적이지 않고
나쁘게 보는 것도 본질적이지 못하다.

어떤 한 가지를 좋고 보고 나면 그 모든 것이 좋아진다.
또 한 가지가 나빠지면 모든 것이 싫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면이 다 좋아보이지만,
한 번 미운 사람은 하는 행동이 다 미워보이지 않는가.

좋고 싫은 색안경이 있는 이상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우리 마음은 더욱 더 비뚫어지고 분열 될 뿐이다.

보다 본질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선택하지 않는 일이다.
판단하지 않는 일이다.
선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만 보기만 하라.
판단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그 어떤 해석도, 분별도, 선택도 하지 말라.
그랬을 때 치우침 없는 정견의 시야가 열린다.
좋고 나쁜 양변에 갇히지 않은 무분별의 맑은 견해가 생겨난다.

누가 나에게 욕을 했다고?
시험에 진급에 떨어졌다고?
아이의 성적이 나쁘다고?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원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고?
실패를 했다고?

그것이 뭐 어쨌단 말인가.
그 사실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그 사실, 그 상황에 대해
이런 저런 좋고 나쁜 분별을 갇다 붙인 것일 뿐이다.

대그룹 입사 시험에 떨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 사실은 항상 두 가지를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시험에 떨어져서 그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에 또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의 상황 가운데 우리는 보통 전자를 선택함으로써 괴로운 상황으로 몰고가곤 한다.
그러나 왜 그 선택만을 고집해야 하는가.
그 선택에만 갇혀 있어야 하는가.

보다 창조적이고 주체적이며 긍정적이고 영적인 사람이라면
시험에 떨어졌다는 그 사실에 아무런 판단이나 선택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둘 중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분명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었다.
다만 내 스스로 '반드시 이렇게 되야 한다'고,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고 고집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고집과 집착이 나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다.

어떤 한 가지 상황에 대해 이런 저런 판단과 해석을 가하지 말라.
판단하고 분별하고 차별함으로써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선택하지는 말라.
그 어떤 상황도 전적으로 좋은 것이라거나 전적으로 나쁜 것이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상황을 보고 내 마음이 좋은 것이라 선택하고,
나쁜 것이라 선택했을 뿐인 것이다.

실패가 왜 반드시 나쁜 것이기만 한 것인가.
그로인해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을 수도 있고,
그러한 몇 번의 실패로 인해 내적인 힘이 쌓였을 수도 있으며,
과거의 악업을 소멸시킬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의 때였을 수도 있고,
때때로 실패가 훗날 생각해 보면 더 큰 성공을 위한 정말 필요한 기초작업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어떤 판단도 버리라.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하지 말라.
선택 없이 그 상황 자체를 무분별로 받아들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라.
큰 틀에서 삶을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

그것이 바로 업을 뛰어넘는 길이다.
업에 얽매이지 않고 업에 구속되지 않는 길이다.
악업과 죄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다.

어떤 한 사람을 보고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하지 말라.
'능력있는 사람'이라거나 '능력없는 사람'이라거나 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습관을 버리라.
마찬가지로 어떤 한 상황을 보고 좋다거나 나쁘다고 판단치 말라.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고,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사람도, 상황도 그것 자체는 완전한 무분별이다.
완전 중립이다.
다만 그 사람에 대한, 그 상황에 대한 해석이
모든 문제를 가져올 뿐이다.

모든 분별을 버리라.
모든 차별과 선택을 버리라.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라.

선택없이 분별없이 다만 바라보기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을 대상으로 힘겨운 투쟁을 버리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 온갖 혼란과 분열을 가져오지 않아도 되며,
우리 삶을 괴롭히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다.

선택하지 말고 다만 바라보라.
분별하지 말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Posted by 법상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법상 (무한,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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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긴건 달라도
마음만은
밝은 빛을 꿈꾸는 도반이랍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러나 만일 그대가
현명하고 잘 화합하며
행실이 올바르고 영민한 동반자를 얻게 되 면
모든 재난을 극복할 수 있으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걸어가라.'

라던 [숫타니파타]의 말씀처럼
우린 함께 밝은 한줄기 빛을 기다리는
영원한 도반
영민한 동반자입니다.

도반과 함께 맞이하는
설레는 새벽처럼

도반과 함께
어둠을 깨치고
깨달음의 밝은 빛을 보려합니다.

누구든 먼 저 깨달으면
그 깨침을 나누기로 한
그 옛날 밝은 수행 도반의 그것처럼

우리도...
그런 밝은 도반입니다.

도반의
구도의 길에
아침 햇살이 떠오릅니다.

언젠가 다가올
깨침의 밝은 빛처럼
그렇게 우 리 앞을 환히 비춰줍니다.




그냥...
바라볼 일입니다.

바라보면...
급한 마음 여유로 와 지고,
복잡한 마음이 고요해 지고,
산란한 마음은 평온해 집니다.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은
비로소 깊은 휴식을 가집니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근심과 긴장에서 자유로워 집니다.

쉽게 성내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너그러워지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인격을 만들어줍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으며 여유로와 집니다.

부드럽고 정갈 한 마음을 갖게 하고,
밝은 마음으로 삶을 긍정하게 되며,
겸손하여 하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 으며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고,
자기 중심 잡힌 삶을 살게 됩니다.

모든 판단에서
핵심을 간파할 수 있는
바른 견해(정견)을 만들어 줍니다.

바라볼 때
비로소 잊고 있었던
인생과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바 라보는 순간이
깨어있는 순간이고,
열반의 순간이 됩니다.

오직...
바라보기만 할 뿐
깨달음을 위해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바라보기 수행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고 평화롭게 하며
궁극에 밝은 깨달음을 가져 다 줄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걱정이 생기고,
사랑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생긴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으면
걱정도 두려움도 없다.

사랑은 미움의 뿌리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 고,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법집요송경]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데도 방법이 있습니다.
무조건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하 는 방법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잘 사랑하는 방법은
집착을 두지 않는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집착하 여 잡아두는데 있지 않고,
놓아주는데 그 아름다움이 있는 법입니다.

사랑하되 집착하지 않으면
만나거나 헤어지거 나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전재로 한 사랑이 아닌,
미움의 뿌리로서의 사랑이 아닌,
맑은 사랑을 하자는 겁니 다.

물론 밉다는 마음에 집착해서도 안됩니다.
사랑과 미움에 집착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 못 만나도 괜찮 고,
미워하는 사람 만나도 괜찮은 것입니다.

사람 사는 일상이란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아야 하는 것입 니다.
턱 놓고 살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도리가 나옵니다.

...

얼마전 김제동이 금강경이라고 인용하면서
위의 구절을 이야기 했었는데요,
사실은 법집요송경, 그리고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이랍니다.

또 하나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하는 내용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하는 내용이었지요.
이것 또한 금강경이 아니라
숫타니파타라는 오래된 불교경전의 가르침입니다.




될 수 있다면
아침에 일어남과 동시에
'알아차림' 할 수 있어야 합 니다.

하루에 얼마를
깨어있는 시간으로 사는가!
알아차리고 살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처음엔 알아 차림이
마음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그냥 휘둘려 살아온
동안의 삶이 습으로 눌러 앉았기 때문입니다.

내 주위 를 돌아보세요.
내 눈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을 찾는 겁니다.

그리고는
'관(觀)'이란 단어를 몇 개 만들어,
눈 가는 곳마다 붙여놓는 것입니다.

적어도
눈이 머무는 잠깐의 동안 만큼은
깨어있을 수 있 을 것입니다.

'관'이라는 글자가 보이면
다른 모든 분별이며
일어나는 마음을 다 놓아버리고,
순간 집 중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면 되겠지만,
연습이 안 된 초보 수행자라면
호흡을 관찰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에
마음을 집중해 보는 것입 니다.
온전히 알아차리면서
하던 일을 계속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알아차림이 끊어지겠지만,
고개를 들면
또다시 알아차릴 수 있으니
그래도 좋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수행,
바라보기 수행,
마음 집중의 수행,
깨어있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
분명
조금씩 달라지는 나 를 볼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이제 막 연초록의 잎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고
연초록의 새순들이 나무위로 내려앉으며,
노오란 생강나무와 분홍빛 진달래가
외롭던 산에 생기로운 벗이 되어주고 있다.

순간 파도처럼 산야를 스쳐지나가는
거샌 바람소리가 내 마음에 노크를 한다.
법당 풍경소리와 함께 바람에 부딪치는 낙엽소리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마음에 피어나는 봄꽃을 느낀다.

산은, 나무는, 꽃들은, 또 지난 해 땅에 떨어졌던 썩어가는 낙엽들은
이렇게 때때로 내 안에 생기로운 도반처럼 다가와 노크를 하곤 한다.
바람의 소리, 낙엽 소리, 물소리, 풍경소리들은 모두
내 안의 관조(觀照)의 빛을 일깨우는 우주의 경책소리처럼 들린다.

바람이 불어 와 대지를 스치고, 낙엽과 나무를 스치며, 내 뺨을 스치는
그 상서로운 느낌, 소리, 그것들을 가만히 느껴보고 있노라면
그 순간 내 마음은 표현할 수 없는 고요와 평안이 깃든다.

아직 바람은 차다.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창 밖으로 빗방울 소리가 대지를 적신다.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찬 바람을 느끼며
조근조근 낙엽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아,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은 내 몸은 하늘하늘 미묘한 설렘과
알 수 없는 적요, 가득함, 맑음, 밝음, 편안함, 차분함
같은 것들 속에 내맡겨져 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지금 여기’의 찰나로 돌아 와 보라.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며, 도반이며,
신이고 붓다 그 자체이다.

한번 내 존재를 가지고 실험 해 보라.
어떤 상황 속에서든 좋다.
바로 그 상황, 지금 이 순간의 그 상황이 바로
신을 만나고, 붓다를 친견하며, 내 안의 깊은 존재를 만날 수 있는 때다.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내 삶에 있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잠시 답답한 일이 있거나, 복잡한 생각들이 있거나,
대인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이 있거나,
회사 일로 인한 괴로움이 있더라도
언제든 잠시 한 생각 돌이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면
우린 무엇을 기다릴 것도 없이 직접 평화로운 정원에 도달할 수 있다.

왜 절에 가서 다리를 꼬고 앉아 참선을 시작해야만
고요와 평온과 삼매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아무런 괴로움이 없을 때만
우리 마음은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하는가.

우리 존재의 본래 속성은
지극한 평화로움과 고요함이며 깨어있음이다.
그러나 그 속성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과 만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어려운 일인가.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있기만 하면 되는데...

에크하르트 톨레는 그의 책 ‘고요함의 지혜’에서 말하고 있다.

“지금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한 순간밖에 없지 않은가?
삶은 언제나 '이 순간'이 아니던가?
이 한 순간, 즉 지금이 내가 도망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며,
나의 삶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오직 하나이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는 나는 어디에 있든 편안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편안하지 않다면
나는 어디를 가든 마음속에 불안이라는 짐보따리를 지고 간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
우리는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편안하다.
그것이 회사 사무실이 될 수도 있고, 꽉 막힌 도시의 차 안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바쁜 업무 중에 잠시 만나게 되는 짧은 순간일 수도 있고,
일이 안 풀리는 순간, 회사를 살리느냐 망하게 하느냐 하는 중요한 순간일 수도 있고,
직장 상사에게 꾸중을 듣는 순간, 동료들과 대화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순간이든 우리는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되는,
‘지금 이 순간’을 100% 존재하며 살아나가는 것을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을 묵묵히 지켜보고 바라보는 것이다.

아무리 편한 순간일지라도 마음이 ‘지금 여기’에 있지 않으면
그 마음은 평화가 아닌 번뇌요 복잡스런 순간이지만,
아무리 정신 없고, 큰 문제가 생겨난 순간일지라도
그 순간 마음이 ‘지금 여기’에 머물러 깨어있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바로 직접 그 자리에서 본연의 지혜를 보게 될 수 있다.

책에서는 또 말하고 있다.

“지금에 감사하고 지금에 경의를 표하라.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중요한 구심점이 될 때
삶은 여유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지금의 그 어떤 현실에도 경의를 표하라.
부처님께 예경하고, 신께 나아가 기도하듯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신께, 붓다에게 감사와 찬탄과 찬양과 경의를 표하라.
‘지금 이 순간’의 신을, 부처를 우리는 언제나 ‘지금’ 만날 수 있다.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지금을 사는 것이 삶의 구심점이 될 때
삶의 모든 문제들은 부처의 방식대로, 신의 방식대로,
지혜의 방식대로 여유롭고도 평화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모든 문제가 풀리는 그 진리의 열쇠가 바로 ‘지금 여기’다.



톨레는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삶에 대한 책임도 회피하는 것이다.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그러함'에
마음으로 반대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지금과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다.
삶과 조화를 이루겠다는 뜻이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매우 혁신적인 정신 수행이 있다.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을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안에서든 밖에서든 말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는 것은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고 온전히 살아내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인생 전체에 대한 직무유기이며 삶에 대한 회피이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 한가지는
오직 내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일이지,
미래를 위한 준비도 아니며, 목표 달성도 아니고, 노후 준비도 아니며,
진급도, 합격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온전히 느끼고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의 일체 모든 상황과 인연과 환경을
완전히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긍하며 반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것을 관하는 것,
그것은 곧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최선이며
언뜻 보기에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최고의 혁신적인 수행법이다.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순간과 다투려고 하지 말라.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상황을 통째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관하라.
내 앞의 삶과 투쟁하지 말고, 상황을 바꾸려 들지 말고,
지금 이 순간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 번뇌, 고민, 상황들일지라도
그것과 씨름하고 이겨내려 애쓰고 다투려 들지 말고
그저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다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가만히 비추어 보라.

신경쓰지 말라.
왜 이렇게 생각이 많고 번뇌가 많은 것이냐고 탓할 필요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 자연스러운 내면의 번뇌들을
나쁜 것으로 몰아붙이며 그것을 없애려고 애쓰는 내 다툼의 행이다.

내 안에서 혹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시비를 붙일 것도 없고, 탓할 것도 없다.
다만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고 다만 묵연히 지켜보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경계에 내 마음을 포개지 말라.
안팎의 경계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판단치 말라.
그저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인연따라 모든 것은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매 순간 순간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매 순간 순간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
그것이 수행과 정진, 마음공부의 핵심이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인생이 경이로움을, 존재가 신비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이 부처요 신의 나툼이 된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는 순간
나도 세상도 우주도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하루에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깨어있음의 빛을
지금 이 순간에 비추라.
그 빛이 지금을 비추는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지,
언젠가 있을 성도(成道)의 때란 없다.

계속해서 톨레는 말한다.

“불자들은 늘 알고 있던 진리였지만
최근 물리학자들이 과학적으로 밝혀낸 것이 있다.
이 세상에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이다.
겉모습 밑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만물은 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개체는 ‘지금 이 순간’이 취하는
특정한 형태를 준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긍정하는 순간 나는 생명의 지혜와 힘과 조화를 이룬다.
그 때 비로소 나는 이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일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별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이요, 상의상관성이다.
이 세상에는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사물도 없고,
아무 이유없이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건도 없다.

우주적인 전체의 진리성이
다만 ‘지금 이 순간’에 특정한 사물로 혹은 사건으로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말해 우주적인 진리성, 불성, 법신, 진리의 당체가
‘지금 이 순간’의 존재, ‘지금 이 순간’의 사건이라는 모습으로
끊임없이 내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며 번뇌들도
법신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이며,
내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며, 환경, 상황, 문제들 또한
불성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그 모든 일도, 사건도, 사물도, 사람도,
모두가 다 법신 진리의 나툼이며, 온 우주의 드러남이며,
부처의 시현이고, 신의 현현으로써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시공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란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모든 상의상관적인 연기법의 진리가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이며,
우주적인 전체성 속에서 법신불의 향기가 화신으로 나투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
‘지금 이 순간’을 느끼며 관하고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생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존귀하며,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행이요 수행이다.

‘지금 이 순간’이 부처이며 신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본질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의 전체이다.
끊임없이 놓치겠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그것이 수행자의 길이요 참된 삶의 길이다.



Posted by 법상





언제나 어느 때나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사실을 기억하라.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아무런 고통이나 근심도 없다.

만약 어떤 문제나 걱정거리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겉에 드러난, 나를 치장하고 있는 껍데기에서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것은 갑옷처럼 단단하며,
혹은 어떤 특정한 유니폼처럼 그것을 입고 있는
나를 규정짓고 내가 바로 그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내가 입고 있는 유니폼이나 겉옷이나 껍데기에 속지 말라.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 껍데기는 이를테면
내 성격이라고 해도 좋고,
내 몸, 육신이라고 해도 좋고,
내 느낌, 욕구, 생각, 견해, 집착일 수도 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나’라고 규정짓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성격이 나이며, 몸이 나이고,
내 느낌이나, 내 생각, 내 견해, 내 욕구가 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 모든 문제며 근심 걱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바로 알아야 한다.



나 자신의 본질에 있어서는
언제나 아무런 문제도 걱정도 없다.
다만 문제가 있고, 근심 걱정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내 성격이나, 몸이나,
느낌이나, 생각이나, 욕구 따위에서 생겨난다.

그것들이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문제들이
곧 ‘나의 괴로움’이라고 착각하고,
그런 괴로움들에 일일이 관여하고 결박당하며
꽁꽁 묶여 꼼짝달싹 못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내가 누구냐고 했을 때
나의 성격을 내세우곤 하지만,
성격이 어찌 결정적인 나일 수 있겠는가.
성격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내가 살아 온 환경 속에서,
또 나의 경험 속에서 인연 따라 만들어 진 것일 뿐이다.
만약 다른 경험과 환경이 나에게 주어졌다면
나의 성격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또 언제라도 지금의 내 성격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매 순간 순간 성격은 변화에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언제나 성격은 현재진행형이며 종착역에 이를 수 없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어느 한 순간을 선택해 그것이 ‘나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 그것을 나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면 몸뚱이가 나인가.
이 몸 또한 다만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어제의 내 몸과 내일의 내 몸은 전혀 다른 몸일 수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이 발견해 낸 진리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고 있는 느낌들이 나인가.
느낌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변한다.
어떤 특정한 경험 속에서 느낌이 규정되어지기도 하고,
똑같은 조건 속에서도 느낌은 달라질 수 있다.

욕구도, 생각도, 집착도, 관념이나 견해들도
그것이 ‘나’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지,
그것들이 나일 수는 없다.

인연 따라 욕구도 집착도 생겨나고,
인연 따라 온갖 생각이나 관념, 견해들도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제 있던 욕구가 사라지고 오늘은 또 다른 새로운 욕구가 생겨나기도 한다.
어제의 깨지지 않을 것 같던 관념들도
새로운 어떤 조건에 의해 완전히 깨지면서
전혀 새로운 관념과 신념에 의해 무장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조건 따라, 상황 따라 끊임없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면서
생성소멸을 반복할 뿐이다.
거기에 어떤 변치 않는 결정적인 ‘나’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껍데기들을 ‘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굳게 믿으면서 거기에 죽고 살며, 거기에 내 삶의 모든 것을 건다.
그것들이 근심 걱정에 시달리면
나도 따라서 근심 걱정에 시달리고,
그것들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인 양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성격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격에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성격과 나는 동일인이 아니다.

그것을 내가 풀려고 애쓰지 말라.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니 상관하지 말고, 개의치 말라.
그냥 내버려 두라.
내버려 두되 다만 있는 그대로 살펴 보고 관찰하라.

성격이 만들어 낸 문제들을 내가 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성격이 만들어 낸 문제를 내가 다 풀 수는 없다.
하나의 문제를 풀었더라도 그것은 끊임없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고,
그렇게 하다가는 끊임없이 성격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을
뒤치다꺼리는 일로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을 소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나에게 주어진 이 한 생이 아깝지 않은가.
나에게는 나 자신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삶의 몫이 있다.
모든 존재들에게는 존재에게 주어진 본연의 물음이 있고,
해결해야 할 자신만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누구인가’ 하고 나 자신을 찾는 일이고,
그 일을 풀 수 있는 해결책은 관찰자가 되는 일 밖에 없다.

인격이 만들어 내는 문제,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 등
그 모든 다른 문제들을 다 놓아버리고,
다만 관찰자가 되어 주시하고 지켜보는 일,
그것이 바로 본연의 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근본 목적이요,
모든 수행의 시작이자 끝은 지관(止觀), 정혜(定慧)의 두 축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를 보자.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에 일일이 다 관여하면서
몸에게 휘둘릴 필요도 없다.
몸도 성격과 마찬가지로 내가 아니다.
다만 몸이 움직이며 어떤 일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내가 할 일은 다만 관찰하고 주시하는 일일 뿐이다.

예를 들어 몸에 감기 몸살이 왔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은 다만 인연 따라 육체와 이 세상 사이의
어떤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그것은 흡사 때때로 폭풍우가 몰아치고, 태풍이 오는 것 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몸이 나라고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병적인 현상이 되고 만다.
그러면서부터 몸에 문제가 생겼다고 안달하고
괴로워하며 내 마음까지 괴롭히곤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만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서
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다만 주목하고 주시하면 된다.
감기 몸살이 아주 멀리서 일어나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자연현상이라 생각하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감기 몸살과 나 자신 사이에
객관적인 넓은 공간, 먼 거리를 만들라.
혹은 감기 몸살이 다만 영화 속에서 어떤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관객이 되어 지켜보라.

다른 나와 동일시하고 있던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다.
욕구가 일어나고, 생각이 일어나고,
집착이나 관념이 생겨날지라도
그것과 나 사이에 먼 공간을 만들어 지켜보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와 상관 없이 일어나는 어떤 현상을 다만 지켜보듯이,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장면들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관객처럼 내 삶의 연극을 다만 지켜보라.

내 삶의 모든 문제는
나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근심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다만 그 모든 일들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아주 멀리에서 나와 상관 없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듯이
그러나 흥미롭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주시하기만 하면 된다.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다만 문제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라고 가면을 쓴 가짜들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가짜에 속지 말라.
껍데기에 속지 말라.

내 몸, 내 성격, 내 느낌, 내 생각, 내 관념, 내 욕구...
이 모든 것들에 ‘내’라는 ‘나’라는 수식을 빼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문제들에 휩쓸리지 말라.
그 모든 문제며 근심걱정들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만 가짜가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다.

그것들은 다만 내가 바라볼 것들이지,
나 자신의 실체가 아님을 기억하라.

흥미로운 영화를 보듯
내 삶의 연극을 지켜보라.



[사진 : 범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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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2장 깨어있음

21.
깨어있음은 영원의 길이며
깨어있음에 나태한 것은 죽음의 길이다.
바르게 마음을 관(觀)하여 깨어있는 사람은 영원히 살지만
마음이 집중되지 않아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죽은 것과 같다.

22.
이러한 진리를 온전하게 깨달아
항상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는 수행자는
그 깨어있음 속에서 법열(法悅)을 누린다.
그는 언제나 성스러운 깨달음의 길 위에 서 있다.

23.
언제나 굳은 의지력으로 깨어있음의 명상을 수행하며
매사에 주의 깊은 자각으로 평화와 선정을 성취하나니
이러한 현자는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마침내 저 자유로운 열반에 이르게 된다.



깨어있음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삶의 방식이요 영원한 동반자다. 삶 속에서 매 순간 순간 깨어있다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삶을 100% 완전하게 살고 있다는 뜻이다. 깨어있는 순간은 영원히 사는 순간이지만, 깨어있지 못한 순간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 뿐. 그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깨달음이 거창한 어떤 것이거나, 수행을 통해 결과적으로 얻어야만 하는 성취지향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모든 순간에 일어나며,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 깨달음이 완성된 순간만 깨달음이 아니라, 마음을 바로 집중하여 현재를 관함으로써 깨어있는 자에게는 모든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 된다. 그는 순간 순간 깨어있음 속에서 법의 즐거움을 누린다.

삶은 매 순간 완성되어 있다. 모든 순간이 완벽하다. 그 어떤 깨달음의 달성과 성취를 위해 미래로 달려가는 일은 수행이 아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이 곧 깨달음이며, 깨어있음의 순간이 바로 내 삶의 최고의 순간이요, 완성된 순간임을 바로 아는 지혜가 깨달음을 찾는 불가의 오래된 방법이다.

깨어있음이란 마음을 과거나 미래로, 혹은 다른 어떤 장소로 뛰어다니게 하지 않고 오직 ‘지금 여기’라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몸과 마음을, 느낌과 생각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의 핵심이다. 다만 관하되 분석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만 보는 것, 그것이 바로 깨어있음의 수행이다.

끊임없이 삶을 관하라. 몸과 마음을 관하라. 처음에는 마음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관하려고 하면 계속해서 마음이 이리저리 원숭이처럼 날뛸 것이다. 과거로 갔다가 미래로 갔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갔다가, 미워하는 사람에게로 갔다가, 끊임없이 날뛰느라 한 순간도 마음을 고요히 지켜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더라도 굳은 의지력을 가지고 마음을 관하라. 흩어진 마음을 다시 모아 지금 여기로 돌아오라. 의지력과 주의 깊은 자각으로 삶을 관하는 깨어있음의 순간이 길어지다보면 조금씩 깨어있는 순간의 평화와 고요를 나아가 선정과 삼매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는 모든 속박과 번뇌에서 벗어나 마침내 저 자유로운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코삼비국의 왕비인 사마와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종을 통해 전해듣고 깨어있음의 수행을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국왕의 다른 왕비인 마간디야가 사마와띠를 질투해 부처님과 불결한 내통을 한다거나, 왕을 독살하려 한다거나 하는 등의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왕비의 궁에 불을 질러 사마와띠를 죽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세 번에 걸친 마간디야의 음모와 살해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마와띠는 죽기 직전까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집중의 관수행을 통해 깨어있음을 지켜나갔고, 죽음의 순간에도 불길에 휩싸인 궁 안에서 당황하지 않고 이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며 깨어있음의 좌선수행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결국 죽음 직전에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었다.

사마와띠의 죽음을 안 국왕은 마간디야의 짓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발뺌할 것을 알고 ‘아, 이제야 안심이다. 그동안 사마와띠가 나를 죽이려 하여 공포에 떨었는데, 누군가가 이런 왕의 근심을 알고 대신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이 일을 한 사람과 도운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어 큰 보상을 하겠다’고 묘수를 썼다. 이에 마간디야와 그의 친척들이 궁으로 몰려들어 자신의 소행임을 밝히자 왕은 그들을 모두 처참히 죽여 버렸다.

이러한 사건이 세상 뿐 아니라 비구스님들 간에도 화제가 되자 부처님께서 사마와띠와 그 궁녀들이 왜 불에 타 죽게 되었는지 그녀들의 전생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전생에 왕비와 궁녀로 물놀이를 갔다가 따뜻한 불을 쬐고 싶어 근처의 작고 허름한 초막에 불을 붙였는데, 마침 그 초막이 왕의 존경을 받는 빳쩨까붇다라는 수행자가 선정에 들어있었다가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왕비와 궁녀는 그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면 큰 벌을 받을까봐 아예 빳쩨까붇다를 화장시켜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보에도 불구하고 사마와띠는 이번 생에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어있음의 수행을 의지력을 가지고 꾸준히 했기 때문에 죽는 순간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렇기에 사마와띠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위의 게송을 설하셨다.

이처럼 깨어있는 수행자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깨어있음 속에서 법열을 누리고, 마침내 저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열반에 이른다.



Posted by 법상
방하착(放下着), 놓아버림

연기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실체적이거나 고정되게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은 다만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존재도 존재가 만들어내는 현실도 모두가 인연 따라 잠시 만들어졌다, 머물고 변화하며 결국에는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우주는 성주괴공하고, 존재는 생주이멸하며, 인간 또한 생노병사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연기적인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붙잡을 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잠시 내게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 것’으로 붙잡는다. 내 것이라고 붙잡아 집착하고 나서는 인연이 다해 그것이 소멸될 때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언젠가 떠날 것이 분명하다면 붙잡아 집착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붙잡는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이 어쩌면 끊임없이 내 것으로 붙잡아 집착함으로써 ‘내 소유’를 늘려 나가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붙잡을 것이 없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붙잡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괴롭다. 붙잡는 것은 결국 괴로움을 남길 뿐이다. 그렇지만 도저히 붙잡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집착에서 온다. 허망하여 꿈같고, 신기루 같으며, 환영 같은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집착하고 붙잡으려 하는데서 모든 인간의 괴로움은 시작된다.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집착을 놓으라. 내 것으로 붙잡으려는 모든 소유와 집착의 대상을 해방시켜 주라. 행복은 집착을 놓아버리는데서 온다.

연기법이 끊임없이 설하고 있는 사실이 바로 집착할 것이 없다는 자각이다. 인연 따라 잠시 생겨난 것을 내 것이라고 붙잡으면 남는 것은 괴로움 뿐이다. 연기적인 삶이란 방하착이요, 집착을 버리는 삶이다. 인연 따라 잠시 생겨난 것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뿐이니, 오면 오는대로 받아들이고 가면 가는대로 받아들이되,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도록 놓아줄 수 있어야 한다. 인연 따라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인연 따라 가면 가는 대로 받아들이라. 온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간다고 슬퍼할 것도 없다. 세상 모든 것은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가는 것일 뿐이다.

오고 가는 모든 것을 허용하라. 내 존재 위를 잠시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 내버려두되 어떻게 오고 어떻게 머물다가 어떻게 가는지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라. 지켜보았을 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난다. 지켜보았을 때 본래 머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상 모든 것들이 나를 스쳐 흘러갈 수 있도록 나를 활짝 열어주라. 세상의 모든 여행자들이 잠시 왔다가 몸을 쉬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도록 자비로운 객사(客舍)가 되어 주라. 세상 모든 존재가 잠시 들러 쉬었다 떠날 수 있는 간이역이 되라. 내게 와서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말라. 종착역으로써 나에게 오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 그 어떤 존재도 나에게 종착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모든 것은 잠시 머물다가 떠날 뿐이다. 그것을 거역하지 말라. 잠시 왔다가 가야할 때가 되면 떠나게 내버려 두라. 수행자에게 방하착, 놓아버림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을 여의는 축복 같은 선물이다.




관, 깨어있는 관찰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연기법이라는 이치를 깨닫게 되셨는가. 이 세상이 상의상관적으로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깨닫게 되셨을까.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철저한 관찰, 관조(觀照)에 있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세상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치우침 없는 관찰에 있다. 이 세상의 이치를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치우침 없는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관행(觀行)이 필요하다. 뒤에서 팔정도와 사념처에서 별도의 설명이 있을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간단한 소개만을 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연기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지만 설명만으로는 연기법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실천할 수도 없다. 연기법이 그대로 내 삶의 방식이 되고, 내 삶이 고스란히 연기법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알음알이나 지식만을 가지고는 부족하다. 연기법에 관한 몇 백 권의 책을 낸다고 해도 읽는다고 해도 연기법을 깨닫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연기법을 깨닫기 위해서는 철저한 수행이 필수적이다. 불교적인 깨달음, 연기의 깨달음은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천 수행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걱정하지 말라. 불교의 수행이라는 것은 고도의 정신적인 능력이 있는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실천되어질 수 있는 고난이도의 고행이나 묘기가 아니다. 아무리 똑똑한 지식인들이라도 한 발조차 내딛지 못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무리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자일지라도 성큼 성큼 앞서갈 수도 있다. 연기법을 깨닫기 위한, 지혜에 대한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바로 관(觀)에 있다. 관 수행이야말로 나와 내 밖의 우주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을 가져다 준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러나 이것은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내식대로 왜곡해서 보고 편견과 선입견을 투영해서 본다. 똑똑한 지식인일수록 오히려 현실을 바라볼 때 자기가 알고 있는 온갖 지식과 견해라는 색안경으로 투영해서 보기 쉽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는 사람, 순수한 사람일수록 왜곡해서 볼 내 안의 견해와 판단이 없다. 옳고 그른 것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자기만의 가치관이 뚜렷하거나, 세상 일을 판단해 낼 수 있는 가치판단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만의 생각과 견해에 빠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편견과 선입견, 지식과 아집이야말로 이 공부에서 버려야 할 첫 번째 것들이다.

아무런 편견과 선입견도 없이, 순수하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라. 난생 처음 바라보는 것처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옳고 그르다거나, 선악이라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을 비워버리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한 번도 지켜본 적이 없는 것처럼 내 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내 마음과 느낌, 감정들을 지켜보라. 세상에 처음 태어나 첫 호흡을 내쉬는 갓난아이처럼 천진한 비춤으로 호흡을 지켜보라. 나와 내 밖의 세상이 어떻게 마주치며, 접촉하고, 느끼고, 흘러가는지 다만 바라보기만 하라.

바라보는 것에 그 어떤 이름도 붙이지 말라. 관 수행이라거나, 위빠싸나라거나, 지관이니 정혜(定慧)니 하는 모든 이름을 지워버려라. 관 수행을 통해 연기법을 깨닫겠다는 생각도 놓아버리라.

내가 수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 이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는 바람, 수행이 잘 되고 있다는 혹은 잘 안 된다는 모든 착각을 버리라. 그리고 다만 분별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바라보기만 하라. 바라봄, 깨어있는 관찰, 알아차림, 지켜봄, 비추어 봄, 관, 주의집중, 마음모음, 그 어떤 용어에도 걸리지 말고 다만 바라볼 때, 연기가 드러난다. 온 존재가 연기를 이해하게 된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