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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때는 들리는 것만 있게 하고,
볼 때는 보이는 것만 있게 하고,
생각할 때는 생각만 있게 하라.

『아함경』



들을 때는
오직 들리는 것만 있게 하라.

볼 때는
다만 보기만 하고,
생각할 때는
다만 그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하여 비추어 보라.

어떤 것을 행할 때
다만 그것만을 행하라.

하나를 할 때는
오직 그 하나만을 우직하게 행하라.
오직 그 자체에 온 힘을 기울이고,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에너지를 쏟으라.

청소를 할 때는 다만 청소만 하고,
밥을 먹을 때는 다만 밥만 먹으라.
오직 지금 이 순간 행하는 것이
내 삶의 최종적인 목표가 되도록 하라.
내 삶의 창조적인 작품이 되도록 하라.

또 다른 목표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지 말라.

밥 먹고 나서
빨리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밥을 먹지 말고,
깨끗해지기 위해 청소를 하지 말라.
다만 지금 이 순간 밥 먹는 일이며, 청소하는 일
그 자체가 유일한 삶의 목적지이다.

명상과 수행의 길은 쉽고도 단순하다.
‘그것을 할 때는 오직 그것만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길이다.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온갖 생각과 분별을 하고,
청소를 할 때도
빨리 해 놓고 다른 일을 하려고 한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라.
언제나 다음 순간의 목적 달성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허망하고 소비하고 만다.

끊임없이 바람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뛰고 달린다.
한 가지 목적을 달성했더라도 만족은 잠시 뿐이고,
또 다시 헐떡이며 뛰고 달릴 또
다른 목적을 설정한다.
죽을 때 까지 또 다른 목적을 향해 뛰고 달리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주소가 아닌가.

수행이란
바로 그 미래를 향한 헐떡거림과 달리기를 쉬고,
바람과 목적에서 놓여나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깨어있음이란
모든 바람과 욕망과 목적을 놓아버리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누리고 만끽하는데 있다.

모든 우리의 행위에 완전히 집중하여
오직 그것을 100% 행하는데 있다.

모든 것을 행할 때는
오직 그것이 내 삶의 전부가 되라.
그것을 행할 때는 오직 그것만 있게 하라.
다른 그 어떤 것도
지금 이 순간 목적이 될 수 없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우(愚)를 범하지 말라.
‘지금 여기’에서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그것이야말로 내 삶의 최종의 목적지다.

매 순간 순간 목적지에 도착해 있으라.
수행자에게는 매 순간이 완성이요, 매 순간이 목적이고,
매 순간이 열반의 즐거움이다.
 







Posted by 법상
TAG 아함경




외로움의 의미를
생각해 보셨는지요.

외롭다는 것은
내가 나를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나와 조금 더 가까워 진다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은 고개를 치켜들고 찾 아와
혼자있음의 고요를 방해합니다.

외로움은
가진 것이 없을 때 찾아옵니다.

아무것도 없 을 때,
내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우린 외로움에 눈물을 흘립니다.

외로움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혼자 있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외로움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외로움이란 느낌이 없다면
우린 쉽게 혼자 있을 수 있을 것입 니다.
그랬다면
아마 보다 많은 수행자들이
깨우침을 얻었을 지 모릅니다.

외로움이란 느낌 때문에
우 린 그 느낌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자꾸 밖으로 무언가를 찾아나섭니다.

혼자 있으면
도대체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TV를 켜든가,
비디오를 빌려 보던가,
사람들 많은 곳을 방황하던가,
아련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그런 일들 때문에
오랜만에 맑게 텅 비어지려던 내면은
다시 금 물들어 꽉 채워지게 됩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로움 그 속으로 들어가
온전히 느껴보고 하나 될 때,
우린 조금씩
내면의 참나와 마주할 수 있습니다.

늘상 밖으로 치닫는 사람은
내면이 헛헛하지만,
혼자 있음 을 즐기는 수행자는
맑은 향기가 충만합니다.

혼자 있어도
당당하고 초연합니다.

무언가 함께 할 때 당당한 것,
많이 가지고 있을 때 행복한 것,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마는
수행자는 아무것도 없이 홀 로 있을 때도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혼자 있어
외로움을 온전히 느끼는 것!
그것이 내 영혼을 맑혀 줄 것입 니다.

외로움 속에서
혼자 있음! 그 속에서
우린 가장 순수해 질 수 있습니다.

혼자인 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내면은
조금씩 참나에게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으려 하지 말고
법을 믿어라.
사람은 변함이 있지만
법은 변함이 없다.

믿었던 사람이
남들로부터 비난을 당하면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파계 하면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면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의지처를 잃게 된다.

법을 믿지 않고 사람을 믿으면
그와 같은 허물이 생긴다.

[잡아함경]의 말씀입니다.
불법 을 믿을 것이지
스님을,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변하는 사람을 믿으면
사람 이 변할 때
내 마음도 함께 흔들리게 됩니다.
중심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오직 법을 믿고 부처님 을 믿으면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습니다.

금강과도 같은 굳은 믿음이란
그 대상이 사람에 있지 않고
법과 부처님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철스님이 파계를 하고,
원효스님이 속세로 돌아가고,
법 정스님이 대사찰을 소유하고,
원성스님이 결혼을 하고,
법상스님이 큰 죄를 지었더라도

내 마음의 중심은
한 치 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스님들이 타락하고,
절이 청정함을 잃더라도
내 마음 공부는
한 치의 흔 들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자성부처님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을 일이지
사람을 등불로 삼아선 안 될 일입 니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할 일이지
승등명(僧燈明)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고락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우둔한 범부들이 느끼는 감정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
감정적으로 더 예민할 수도 있다.

다만 지혜로운 사람 은
즐거움을 만나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괴로움에 부딪쳐도
그것 때문에 공연히 근심을 더하지 않아
괴로움과 즐거움 의 감정에 구속받지 않고
그 모두를 버릴 줄 알아
감정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울 뿐이다.

[잡아함경]

지혜로운 수행자라고
괴로움과 즐거움의 감정이 없다거나
늘 여여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경계를 만나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똑같습니다.

다만 어리석은 중생은
올바로 관찰하지 못하기에
그 감정에 마음이 머물 러 휘둘리지만,
지혜로운 수행자는
즉한 순간 관하여 깨어있기에
그 감정에 마음이 머무르지 않으며
바로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경계에 닦쳐
욱! 하고 올라오는 마음은 같지만,
그 감정에 머무르느냐
빨리 놓아버리느냐가 다른 것입니다.

바로 관하면
쉽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빨리 놓아버리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절에 오며
좋은 일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나 쁜 일들은 부처님께서 다 거두어 주시고
늘 즐거운 일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부처님 앞에서 당당해 져야 합니다.
떳떳해 져야 합니다.
'내가 지은 것 모두 내가 받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진실된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내 앞에 펼쳐진
일 체의 모든 경계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다 이유가 있기에, 원인이 있기에 나온 것입니다.
짓지 않은 것은 절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안팎의 일체 모든 경계를
다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수행심입니다.

불교 교리 의 핵심을 연기법, 인과법이라 말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 말합니다.
큰스님네들은 연기와 공을 실천키 위해
'마음 을 비워라'
'놓아라' 고 이야기 합니다.

어떻게 해야 연기, 공을 실천할 수 있고
어찌 해야 비울 수 있 습니까.

모두를 버리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진정 비우는 것인가요?

비운다는 것은
공을 실 천한다는 것은
연기를 실천한다는 것은

내 앞에 펼쳐진 일체 모든 경계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합 니다.

지을 때는 선도 악도 모두 닦치는대로 지어놓고
받을 때 되어선 좋은 것만 받겠다고 하니
중생심이란 얼마나 교활 합니까.
괴로움은 받기 싫은데
지어 놓았으니 지은대로 자꾸 나오게 되고
그걸 받지 않으려고 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내 앞에서 당당해 지세요.
있는 그대로 모두를 받아 들이세요.

나는 수행했으니
나는 기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괴로움이 비켜갈 것이란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나요.
진정한 수행자라면
괴로움, 즐거움 이 모두를
다 받아들일 준 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당히 싸워 몽땅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수행 많이 한다고
괴로움이 비켜가 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수행심으로 괴로움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괴로움 없는 이가 아니라
괴로움에 얽매 이지 않는 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괴로움의 과보가 왔을 때
싫다고 비켜가면 그만인 듯 하지만
도리어 더 큰 과보가 되어 언젠가 내 앞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법계의 이치입니다.

그렇기에
다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경계를 다 녹여 내셔야 합니다.
내 안에서 다 녹여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용광로라 고 하지 않던가요.
그 어떤 경계일지라도 나의 참생명 주인공 속에
몰록 놓고 나면 다 녹아들게 되어 있습니다.

까 짓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그 어떤 경계가 두려움을 몰고 온다 해도,
묵묵히 관찰하고
다 놓고
다 비우고
다 받아들 이세요

나의 참생명은
무엇이든 다 녹일 수 있는 부처님 이십니다.



Posted by 법상




[사진 : 법주사]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은
집착하지 말고 다 버려라.
내 것이 아닌 것을 모두 버릴 때
세상을 소유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이가
뒷동산에 있는 나뭇잎을 가지고 간다고 했을 때
왜 나뭇잎을 가졌느냐고 그와 싸우겠는가.

수행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아서
자기 소유가 아닌 물건에 대하여 애착을 버려야 할 것이니
버릴 것을 버릴 수 있어야 마음이 평온하다.

[잡아함경(雜阿含經)]



본래부터 ‘내 것’이 어디에 있는가.
‘나’라는 존재 또한
잠시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무상한 존재인데,
하물며 ‘내 것’이라고 붙잡아 두고 집착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뒷동산의 나뭇잎이 어찌 ‘내 것’일 수가 있으며,
땅에 금을 그어 놓고 돈을 지불한다고
어찌 ‘내 땅’일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의 오만한 생각일 뿐.

이 세상에
내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일체의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완전한 거지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온 것에 대해서까지
억지로 다 버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기 소유물들의 특성을 알 필요는 있다.
내 소유물들은 인연 따라 잠시 나를 스쳐갈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잠시 보관하면서 인연 따라 쓸 뿐이다.

잠시 스쳐가는 것들을 스쳐가지 못하게
‘나’라는 틀 속에 가두게 되면
나를 중심으로 우주적인 에너지는 정체되고 만다.

세상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이 끝없는 우주를 여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들의 목적은 끊임없는 여행에 있지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데 있지 않다.
바로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
여행길 위에서 잠시 들른 간이역일 뿐이라는 것을.
그 어떤 것도 종착역으로써 나에게로 온 것은 없다.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지.

그러니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시했다 하더라도
사실은 보시가 아니라 그저 가야할 곳에 갔을 뿐인 것이다.
그것이 그것의 다음역이었던 것이지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준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주고 받았다는
그 생각이 바로 집착이다.
Posted by 법상




[사진 : 법주사]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이
갖가지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이 된다.
온갖 것에 대해 취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훗날 마음이 편안하여 마침내 근심이 없어진다.

[화엄경]

자기 마음에 드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탐심을 끊어버리기 위함이다.

자기 마음에 거슬리는 것에
성내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진심을 없애기 위함이다.

어리석은 말에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치심을 끊기 위함이다.

수행은 집착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지혜의 연마이다.

[잡아함경]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독이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이다.

이는 모두 ‘나’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것이니,
내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탐욕을 끊는 공부이고,
내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성냄을 끊는 공부이며,
실체적인 어떤 ‘나’가 있다는 생각을 비우는 것이
어리석음을 끊는 공부가 되는 것이다.

이같은 탐진치(貪瞋痴)의 뿌리는
한마디로 아상(我相), 아집(我執)에 있다.
‘나’라는 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내 것이다’라는 소유욕이 일어나고,
나의 소유물이 없으면 곧 나도 없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처럼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집착과 소유욕을 버리는 것이
탐심의 뿌리를 뽑는 첫 번째 수행이다.

두 번째로 ‘내가 옳다’는 생각에 집착하므로
내 생각과 어긋나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화를 내게 된다.

내가 옳다는 것은 너는 틀리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모든 다툼과 성냄의 씨앗이다.
사실 그 어떤 생각도 전적으로 옳거나 그를 수 없다.
다만 서로 다를 뿐이지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주는 것
이것이 진심의 뿌리를 뽑는 두 번째 수행이다.

그리고 셋째로 이 모든 뿌리에 있는 생각인
‘내가 있다’고 하는 착각이 바로 어리석음 곧 치심이다.
나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생겨난 비실체적이고 연기적인 존재임을 바로 알고
나에게 집착하지 않는 것이
치심의 뿌리를 뽑는 세 번째 수행이다.

수행이란 이렇듯
‘나’에 집착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지혜를 연마하여
탐진치 삼독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다.
Posted by 법상




우주적이고 다차원적인 연기 - 상의상관성

이상에서와 같이 연기법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나거나 또는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다른 모든 존재와 여러 원인,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 그렇기에 정신적, 물질적 모든 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을 ‘관계성의 법칙’, ‘상의성의 법칙’ 혹은 ‘상의상관성’ 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연기법에 대해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텐데, 부처님 당시에도 코티카라는 제자가 연기에 대해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며 사리푸타에게 좀 더 쉽게 설명해 달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답변하는 장면이 『상응부경전』12:67에 나온다.

벗이여! 여기 두 묶음의 갈대단이 있다고 하자.
이 갈대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가 있다.
즉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는 것이며,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 묶음의 갈대단 중 어느 하나를 치운다면 다른 갈대단도 쓰러지고 만다.
이처럼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는 것이며,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비유지만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연기법을 아주 쉽게 비유해 주고 있다. 두 묶음의 갈대단이 서로 의지해 있을 때 그 중 하나를 치우면 나머지 갈대단도 쓰러지는 것과 같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관계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도움을 주면서 상의상관적으로, 관계성으로 서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말은‘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 ‘저것’이 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는 말도, ‘이것’이 사라지는 결과로서 ‘저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함으로 생성 및 소멸되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서로가 서로를 돕고 도움 받는 긴밀한 연기적, 상의상관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결국 ‘이것’과 ‘저것’은 따로 따로 떼어 내서 생각할 수 없는 동체이며, 한생명이고, ‘이것’은 ‘저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고, ‘저것’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이것’과 ‘저것’ 그 어느 것도 실체적인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닌, 인연따라 생겨난 무아(無我)인 것이다. 무아이면서 인연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이고,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기에 공(空)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A와 B 사이의 연기성은 곧 B와 C 사이의 연기에서도 발견되며, 다시 C와 D 사이에서도, 또한 C와 A, D와 A, D와 B 사이에서도 발견되고 이러한 관계는 E, F, G...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온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에게로까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퍼져간다.

이처럼 온 우주의 일체 모든 존재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다른 모든 존재의 생성을 돕고 소멸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물론 어떤 한 존재의 생성과 소멸은 좁게는 근본적인 원인과 직간접적인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 것이지만 조금 더 연기의 시야를 넓혀 시공간으로 확장시켜 보면 이 우주 법계 전체가 한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관여되어 있다. 즉 이 우주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이 우주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한 가지 원인이 한 가지 결과를 발생케 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우주적인 다차원적인 원인으로 인해 하나의 존재가 생기며, 하나의 상황이 생겨나는 것이다. 서양 과학은 단일한 원인이 단일한 결과를 일으킨다고 믿었지만, 동양적인 불교적인 사고방식은 이처럼 전체적이고 우주적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다른 존재에 영향을 끼치면서 동시에 다른 존재의 영향도 받고 있는 것, 나아가 인간이 우주에 영향을 끼치면서 동시에 우주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 이러한 존재와 존재 사이의 서로 의존하고,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을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운명도 우연도 신의 뜻도 아니다

이러한 연기법에서 본다면, 어떤 한 존재가 생겼다거나, 어떤 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단순한 존재의 발생이나 사건이 아니라, 온 우주적이고도 전체적인 무한한 인연관계 속의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인 인생관에 반해 보통 세상의 또 다른 견해로는 모든 것이 운명이나 숙명이라는 운명론이나, 모든 일이나 존재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으며 그저 우연일 뿐이라는 우연론이나, 일체 모든 것은 신이나 브라만이 만들었다는 유신론적인 사고방식이 공존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에도 가장 주목을 끌었던 인생관이 바로 운명론과 유신론, 그리고 우연론이었다. 『중아함경』제3권을 살펴보자.

세상에는 극복해야 할 세 가지 그릇된 견해가 있다. 지혜 있는 사람들이 파벌을 만들어 서로 주장을 달리 하지만 인생에 있어 아무런 소득이 없다. 어떤 것이 셋인가. 첫째는 ‘사람의 모든 일은 일체가 다 숙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요, 둘째는 ‘사람의 모든 일은 일체가 다 신이 만든 것이다’는 주장이며, 셋째는 ‘모든 일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우연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만약 사람의 모든 일을 일체가 다 숙명에 의한다거나, 신이 만든다거나, 아무 인연도 없는 우연이라면,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분별하며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현실의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인간이 책임질 일은 하나도 없고, 선악의 구별도 없게 된다. 저들의 주장에 맞서 나는 연기법(緣起法)을 깨닫고 중생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운 선택에 의해 자기를 만들어 가는 길이다.

이러한 세 가지 주장은 시대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종교며 사상, 철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주요한 인생관들이다. 그러나 숙명론이나 운명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 내 자신이 스스로 내 운명을 개척해 갈 수도 없고, 내 삶을 바꾸어 갈 수도 없으며, 무조건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숙명이라 생각하고 체념하고 포기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대한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이런 사람들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내 운명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 무슨 일만 생기면 사주팔자를 보러 점집에 가고, 무속인들을 찾아 가 운명을 점치는 일 밖에 없다. 그것 외에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 한 가지도 내 스스로의 의지대로 해 나갈 수 없다. 오늘날도 툭 하면 연례행사처럼 점집을 찾아다니고 무당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사람이 바로 숙명론이나 운명론에 갇혀 스스로의 주체적인 삶을 포기하고 내 정신을 점쟁이에게 바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내 안의 오롯한 중심이 나를 이끌고 가도록 해야지 점이나 사주팔자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에서 ‘사람이 점쟁이가 되어서 많은 사람을 그릇되게 꾀어 재물을 구한다면, 이 죄로 말미암아 지옥 속에서 한없는 고통을 받아야 하고, 지옥 생활이 끝난 다음에는 그 죄로 인해 악업의 몸을 얻고 태어나 계속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고 했고, 『숫타니파타』에서는 ‘온갖 점을 치는 일이나 해몽, 관상 보는 일을 완전히 버리고, 길흉화복의 판단을 버린 수행자는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갈 것이다’라고 했다.

운명이나 숙명에 속박되어 있는 사람은 어차피 잘 되도 숙명이고 못 되도 숙명이기 때문에 삶을 개척해 나가고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없다. 이런 사람일수록 게으르고 나약한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기 쉬우며, 스스로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숙명 탓이나 남 탓, 나라 탓, 정치인 탓, 부모 탓만 하지 자기 스스로의 삶에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아무런 인연도 없고 원인이나 조건도 없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는 사람 또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 세상이 단순한 우연일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선도 악도 다 소용없고, 선하게 사는 사람과 악하게 사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말인가. 잘 살고 못 하는 것도 다 단순한 우연이란 말인가.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우연이라면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음행을 하는 등의 삿된 행위들 또한 우연일 뿐 잘못된 행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연론을 믿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 어떤 윤리적인 의식도 없을 것이고, 막행막식을 하면서도 아무런 인과응보가 없다고 생각할 것 아닌가. 또한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모든 것이 우연이니 의지를 일으킬 것도 없고, 세상을 선하고 살고자 애쓸 것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고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의 의지는 없고 오직 신의 뜻만 있다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오직 신의 가호나 은총만을 바라게 될 것이 아닌가. 이 또한 도둑질이나 살생이나 음행 등의 악행을 하더라도 그 또한 신의 뜻이라고 믿을 것이 아닌가. 여기에도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고 오직 신의 뜻만 있다고 믿는다면 이런 신관은 위험하다.

이러한 세 가지 잘못된 견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설하고 계신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와는 달리 연기법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이 100% 보장되고, 자신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으며, 행복에의 가능성, 깨달음에의 가능성을 스스로 성취시켜 나갈 수 있다. 또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도록 함으로써 인과응보의 윤리적 가르침으로도 손색이 없다.

또한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저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상의상관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너와 나의 차별이 없고, 너를 의지하여 내가 있고, 너로 인해 내가 있으며,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으로 연결된다는 동체대비의 자비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자비정신은 곧 보시와 나눔의 정신으로 이어져 모두 함께 풍요로운 세상의 밑거름이 된다.

이처럼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평등하며, 둘이 아니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로 말미암아 내가 존재한다는 바탕에는 ‘나’라고 내세울 그 어떤 실체성을 부여하지 않으므로 ‘나’중심의 이기적이고 아집에 물든 삶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

이상에서 본 것 처럼 불교의 연기법은 우연론도 아니요, 신의 뜻도 아니며, 숙명론도 아니다.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 모든 존재며 사건들이 서로 서로 깊은 연관관계 속에서 꽃피어나는 한바탕 신명나는 잔치다. 그 어떤 존재도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존재도 진리에서 떨어진 채 홀로 소외를 느끼지 않는다. 진리는 결코 사람을 버리지 않고, 소외시키지 않는다. 누구나 이 한바탕 신명나는 잔치에서 자기답게 자신의 몫으로 아름답게 꽃피어나도록 되어 있다. 이 연기의 장에서 모두는 한 가족이며, 벗이고 정겨운 친구다.
Posted by 법상




욕심이란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하여
애착하고 좋아하며 생각하고
물들어 집착하는 것이다.

또한 귀는 소리를, 코는 냄새를, 혀는 맛을
몸은 감촉을 접촉하여 그것을 만날 때
애착하고 즐겨하며 생각하고 물들어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대상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거나 태어나지 않았거나
언제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써
존재하는 자연일 뿐이니
우리가 항상 보고 듣는 사물 그 자체가 욕심은 아니다.

이 세상의 갖가지 대상에 대하여
보고 들으면서 느끼고 생각하여 분별하는 것이 우리의 욕심이다.
대상에 대하여 일어나는 집착심을 잘 다스리는 것이
욕심과 집착을 벗어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길이다.

[잡아함경]


눈으로 사물을 볼 때,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혀로 맛을, 몸으로 감촉을 느낄 때,
또한 생각으로 온갖 번뇌를 일으킬 때,
바로 그 순간 집착이 생겨난다.

눈귀코혀몸뜻이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과 법을 만날 때,
바로 그 순간을 잘 비추어 보고 다스려야 한다.
모든 집착과 번뇌 분별들은 바로 그 순간 일어난다.

눈이 대상을 봄으로써 좋고 싫음을 일으키고,
귀로 칭찬이나 비난을 들음으로써 좋고 싫은 번뇌가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집착과 번뇌 분별의 시작이 바로
우리 몸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이 세상의 여섯 가지 대상을 만날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접촉점을 잘 살펴야 한다.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을 만날 때,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지, 어떤 분별이 일어나는지,
어떤 집착과 욕망이 일어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잘 살피고 지켜보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관찰하면
다만 주관이 대상을 만날 뿐,
더 이상 분별과 집착은 일어나지 않는다.

귀로 어떤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순식간에 그 말에 대해 좋거나 나쁘다는 분별을 하곤 한다.
바로 그 순간, 말과 귀의 접촉점을 잘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귀로 말을 듣는 순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그 말은 중립적인 말일 뿐이지 좋거나 싫은 말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좋거나 나쁜 어떤 극단으로 몰고 가려는 습성이 있다.
이 나쁜 습성의 치료약이 바로 알아차림이다.

눈귀코혀몸뜻의 대상에 접촉하여 일어나는
분별과 집착을 잘 관하여 다스림으로써
욕심과 집착을 벗어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수행의 길이고, 명상의 길이다.
Posted by 법상



어리석은 범부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게 되면 좋다거나 나쁘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범부들은 자기의 감정에 포로가 되어 집착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감정을 갖더라도 그것의 포로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은 두 번째의 화살을 맞는다고 말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두 번째의 화살을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잡아함경]





이를테면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여 욕을 하고 시비를 걸어 올 때
그것은 첫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 한마디에 휘둘리고 괴로워할 이유가 무엇인가.
어리석은 사람은 욕을 들음으로써 괴롭고,
연이어 그 괴로운 감정에 포로가 되어
오랫동안 그 욕 한마디에 집착하므로 또 한 번 괴롭다.

그러면서 온갖 화를 일으키고, 복수를 생각하거나,
똑같이 되갚아주려는 성냄을 일으킴으로써
몇 번이고 괴로운 화살을 연거푸 맞는다.
이것은 두 번째 화살 뿐 아니라
세 번째, 네 번째 화살을 연이어 맞는 격이다.

첫 번째 화살은 인연 따라 생겨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두 번째 화살부터는 내가 그 현실에 대한
좋고 나쁘다는 판단 분별을 일으키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즉 두 번째 화살부터는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니,
무엇 때문에 내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내
스스로 만든 고통에 빠져 괴로워해야 하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돈을 빌려가고 형편상 갚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첫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이지만,
그로인해 그를 원망하고, 욕하면서 몇 날 몇 일을 괴로워한다면
그것은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연거푸 맞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갔더라도
그것은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것이다.
이미 마음이 떠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애써 증오하거나, 복수하려 하거나, 잊지 못하면서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맞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두 번째 화살부터는 그 작자가 나다.
전혀 만들어 낼 필요가 없는 것을 내 스스로 만들어 낸 것 뿐이다.
내 생각, 내 분별, 내 판단이 연이은 수많은 고통을 가져왔다.
생각을 잘 관찰하고, 분별과 판단작용을 잘 관하면
두 번째 이후의 화살들을 맞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생각과 분별은 첫 번째 화살에 이은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만들어 내는 창조자이니
생각과 분별을 관하고 비우라.
지켜봄과 관 수행이야말로
빗발치는 화살을 막는 유일한 방패가 될 수 있다.



[사진 : 법주사]
Posted by 법상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 연기법 강의(3)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 연기법 강의(2)
2007/11/09 - [불교교리강좌] -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다 - 연기법 강의(1)
세계는 한 송이 꽃 - 우주가 나를 돕는다

『지구를 치료하는 법』이라는 책에 보면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예를 볼 수 있다. 책에 의하면 1950년대 보르네오 섬의 어떤 마을에 말라리아가 크게 유행했을 때 말라리아 모기를 없애기 위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DDT를 뿌렸다고 한다. 모기는 모두 죽고 말라리아는 사라졌다. 그런데 그 후 여러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민가의 지붕이 너덜너덜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민가의 지붕에 살던 말벌이 DDT로 인해 모두 죽고 굼벵이를 먹이로 하던 말벌이 사라지자 굼벵이가 크게 번식하여 갈대로 이엉을 엮은 지붕을 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양철판 지붕으로 바꾸었지만 열대지방의 맹렬한 소나기인 스콜이 양철지붕을 때리는 소리에 주민들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DDT로 인해 수많은 벌레가 죽고 죽은 벌레를 먹은 엄청난 양의 뱀 또한 죽었다.

그 뱀을 고양이가 먹었는데 먹이사슬이 올라갈 때마다 DDT 농도가 농축되어 고농도 DDT를 섭취한 고양이들도 잇따라 죽어갔다. 고양이가 사라지자 쥐들이 극성을 부렸고, 쥐가 증가하자 다른 전염병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곤경에 빠진 WHO에서는 그 해결책으로 14,000마리의 고양이를 낙하산에 매달아 하늘에서 뿌렸다는 다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먹이사슬 전체에 혼란이 일어났는데 그 근본원인을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 보다는 당장에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를 뿌렸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단편적인 견해이며, 일차원적인 접근이고,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일어나고 소멸된다는 연기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결과인가.

이처럼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의존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일어나면 그로인한 다양한 ‘저것’들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어 있고, 또 그 ‘저것’들은 또 다른 제2, 제3의 ‘저것’들을 무수히 만들어 낸다. 연기를 모르면 그 근본 원인이 ‘이것’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제3, 제4의 ‘저것’들에서만 문제를 밝혀내고자 애쓰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지구나 우리 생활 속의 모든 일은 여러 가지 다른 일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의 작은 한 가지 구성원이 사라지면 곧 그것과 연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수많은 존재들이 사라지거나 직간접적으로 위험에 놓이게 되며, 결국 그것은 사람의 목숨까지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정신적 물질적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존, 공생의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 자연과 자연, 개인과 전체가 서로 서로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로써 공생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연의 한 개체가 파괴된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자연의 한 부분을 오염시킨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몸을 오염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그 어떤 현상일지라도 A의 결과는 B라고 하는 단편적이고 직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접근하면 그 현상에 대한 온전한 통찰이 어렵다. 모든 존재며 현상들은 어느 것 하나 전체적이며 우주적이고 연기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어떤 한 가지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중층적이고 무량하게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그 한 가지 일에는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를 피우는 데에도 온 우주가 동참하고 있다. 한 겨울의 얼어붙은 땅을 뚫고 피어나는 봄 꽃 한 송이에도, 한여름 우거진 녹음이며 쏟아지는 장대비에도, 가을철 아름다운 단풍과 이어지는 첫 눈의 설레임에도 크고 작은 온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연기적인 대 화합의 오케스트라를 장엄하게 연주해 줌으로써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면서 내 발을 씻어주는 생생한 현실 속에도 달의 인력이며 수 억 광년 떨어진 별의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

꽃 한 송이는 그저 단순한 꽃 한 송이가 아니라, 연기적으로 온 우주가 함께 피워낸 꽃이요, 온 우주의 숨결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나도 단순히 내가 아니라 온 우주의 반영이며, 우주적인 진리가 나로써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하나, 행동 하나 하나가 낱낱이 온 우주로 퍼져나가고 있고, 온 우주와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공존 공생하고 있다. 온 우주가 더불어 나를 살려주고 있고, 나를 돕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너’를 돕고 있다. 이처럼 온 우주가 한 송이 연꽃이요 평화로운 한 가족이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만공스님의 일갈도 이 같은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나온 깨침의 언어인 것이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어리석은 자들은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인 줄을 모르고 있어.
그래서 나와 너를 구분하고,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다투고 빼앗고, 죽이고 있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라.
흙이 있어야 풀이 있고,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

남편이 있어야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부모가 있는 법.

남편이 편해야 아내가 편하고,
아내가 편해야 남편이 편한 법.
남편과 아내도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이요,
이웃과 이웃도 한 송이 꽃이요,
나라와 나라도 한 송이 꽃이거늘,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을 바로 지니면 세상은 편한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참 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중생심에서 보면 나와 너, 남편과 아내, 이웃과 이웃, 나라와 나라, 내 종교와 네 종교, 인간과 자연 등 수많은 분별이 작용하여 ‘나’, ‘내 것’ 이라는 이기와 아집을 형성하지만, 연기적으로 보면 너가, 이웃이, 타인이, 다른 나라가, 다른 종교가, 자연이, ‘나 아닌 것들’이 모두 ‘나’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나’‘내 것’‘내 종교’‘내 나라’ 때문에 온갖 시비와 분별, 욕심과 전쟁 등을 초래하지만 연기적 시각에서는 그 모든 것이 동체적인 모습으로 한 뿌리, 한 몸, 한 가족일 뿐이다. 거기에서 온 우주와 나를 다르게 보지 않는 동체대비의 자비가 싹튼다. 이기는 사라지고 참된 사랑이 움튼다.

이러한 연기법의 상호의존관계에서 볼 때, 그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 말을 잘 살펴보면 이 속에는 그 어떤 존재도 실체적인 자아가 있지 않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인간도 인간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도 자연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인간과 자연은 공존, 공생의 관계이며, 그 둘은 모두 인연에 의해 존재하므로 비실체적인 것이다. 즉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는 무아(無我)인 것이며, 공(空)인 것이다.

그렇듯 일체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뗄 수 없는 연기적 동체(同體)의 존재요, 서로가 독자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비실체적 공생의 존재이며, 그렇기에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일체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자기 몸처럼 아껴주고 도와주며 존중해주는 자비를 실천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연기적인 삶의 기본 원칙은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의상관의 연기법과 그렇기에 그 어떤 존재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실체적 자아를 내세워 이기심을 축적할 수 없다는 공과 무아와 아집의 소멸, 그리고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되는 필수불가결한 한생명이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한 가족과 같은 따뜻한 사랑과 자비로써 대해야 한다는 자비사상이 되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사진 : 범어사]
* 범어사를 참배하고 일주문을 내려오는데
하마비 옆에서 엿을 파는 엿장수 처사님이
지나가는 신도님들과 관광객들을 붙잡아 놓고서는
새들이 손바닥에 올라와 모이를 먹는 모습을
흥겹게 보여주고 계셨다.
모두들 신기해 하고 즐거워하는 모습.
처사님이 오랫동안 모이를 주다보니
이제는 새들도 해치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아챈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해침 없이 공존하는 순간의 고마움!!



마음이 탐욕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들이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탐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한
무거운 짐을 벗을 수는 없다.
짐을 지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병이요,
짐을 벗어버리는 것은 최상의 즐거움이니
무거운 짐을 버릴지언정 새 짐을 만들지 말라.

[증일아함경]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가장 무거운 짐이
탐욕의 짐이다.

탐욕의 짐은 짊어지는 만큼 병이 되고,
벗어버리는 만큼 즐거움이 된다.

길을 걷는 나그네에게 짐이 많다면
그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인생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짐이 없어야 호젓하고 가벼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지혜로운 이는 삶의 길 위에서
항상 무거운 짐을 버리고 버리며 살지만,
어리석은 이는 항상 새 짐을 만들고,
쌓고 또 쌓기에 여념이 없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짐을 늘리려고 애쓰며 사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이다.
가진 짐이 많으면 부유하고 행복하며 자랑스럽지만
가진 짐이 없을수록 부족하고 가난하며 부끄럽다고 여긴다.

그러나 참된 공덕은 짐이 없어 가벼운 삶에 있다.
인류의 모든 성인들은 공통적으로 가난하여 짐이 없었고,
그렇기에 삶이라는 여행길에서
가볍고도 자유로운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보면 짐이 많은 사람이 부자이고,
짐이 없는 사람이 가난한 것 같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짐이 많은 사람이 가난하고,
짐이 없을수록 부자가 되어 떠난다.

짊어진 짐이 없을수록 부처님 땅에 가까워지고,
짊어진 짐이 많을수록 저 깊은 지하 세계의 지옥과는 가까워진다.
짐이 없어야 홀가분하게 높이 높이 천상계로 오를 수 있지,
짐이 많으면 가라앉고 또 가라앉아 저 지옥의 끝까지 가게 된다.

내 탐욕의 짐은 얼마인가.
이미 쌓아 놓은 짐과 쌓기 위해 발버둥치는 짐은 과연 얼마인가.
그 모든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가라.

Posted by 법상




[사진 : 범어사]

욕심은 더럽기가 똥덩이 같고,
밑 빠진 그릇 같으며,
무섭기가 독사와 같고 원수와 같아 위험하며
햇볕에 녹는 눈처럼 허망하기 그지없다.

욕심은 예리한 칼날 위에 묻어있는 꿀과 같고,
화려한 화장실에 칠해진 단청과 같으며,
화려한 병에 담긴 추한 물건 같으며,
물거품처럼 허망하여 견고하지 못하다.

[증일아함경]


욕심같이 더럽고 추하며 허망하고 위험한 것은 없다.
그러나 욕심같이 겉포장이 잘 되어있는 것도 없다.

욕심은 예리한 칼날 위에 묻어있는 꿀과 같아
잠시 달콤할지 모르지만 혀를 베는 결과를 얻고,
화장실에 칠해진 단청과 같아
겉만 화려하나 속은 더럽고 추하여 냄새가 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욕심의 구린 냄새를 알지 못하고
화려하게 포장된 겉모습에만 빠져든다.
그것이 곧 내 혀를 베고, 내 몸을 베며,
내 존재의 뿌리를 잘라 내리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욕심이 지금 당장에 아무리 큰 기쁨을 가져다 줄 지라도
그 끝은 추하며 고통스럽다.
당장의 기쁨을 위해 곧 다가올 삶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욕심의 실체를 여실히 들여다보라.
욕심에 얽매여 있는 나의 모습을
한 발자국 뒤에서 전체적으로 지켜보라.
과연 나는 어떤 욕심에 빠져있는가.

똥덩이 같고, 밑 빠진 그릇 같으며,
독사와 같고 원수와 같으며,
물거품처럼 허망하여 견고하지 못한
욕심의 실체를 확연히 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욕심의 덧에 걸리고 만다.

그렇다고 욕심을 없애 버리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욕망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욕망을 다루는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다.

욕망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전 과정을 깨어있는 관찰로써 온전히 이해해야 할 어떤 것이다.
욕망을 전체적으로 이해했을 때
그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혀를 베는 칼날’의 의미를 바로 볼 수 있다.

나에게는 어떤 욕심이 일어나고
머물다가
사라지고 있는가.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