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7.12.11 바라밀다 심경
  2. 2007.12.11 마하 반야
 

바라밀다 심경


바라밀다(波羅蜜多)


 바라밀다는 범어로 ‘파라미타(Paramita)’라고 합니다. 그 뜻은 ‘도피안(到彼岸)’, ‘도무극(到無極)’, ‘사구경(事究竟)'' 등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자세하게는 ‘바라’가 ‘저 언덕[피안]’, ‘밀다’가 ‘건넌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그 뜻을 풀이하면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요. 이를 앞의 ‘마하반야’와 함께 번역하면, ‘크나큰 지혜로 피안의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 ‘저 언덕’이란, 피안(彼岸)으로 정토(淨土), 불국토(佛國土),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이 언덕’이라 함은 차안(此岸)으로 우리가 사는 이곳 사바세계를 말하며 다른 말로 예토[穢土]라고도 부릅니다. 조금 다른 의미로 살펴본다면 이 언덕과 저 언덕이 모두 내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곳, 저 곳 하여 나누어 놓은 듯 하지만 실은 이 언덕은 어리석어 무명에 휩싸인 ‘거짓 나’이고, 저 언덕은 깨달아 밝아진 ‘참나’를 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라밀다의 뜻은 ‘이 사바세계에서 저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거짓 나의 삶에서 참나를 깨쳐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는 다시말해 “‘나’ 중심의 삶[我執, 我相]에서 ‘나 없음’의 삶[無我, 眞我]을 깨쳐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예토’라고 하면, 흔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말하는데 모든 것이 혼탁하고 오염되어 있는 탁한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봅시다. 우리는 육신[身]으로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청정하지 못한 음행을 하는 등의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입[口]으로는 온갖 거짓말과 이간질을 일삼고, 삿된 분별심에 빠져 진실치 못하여 꾸미는 말을 하며, 거친 욕설 등을 일삼고 살아갑니다. 또, 생각[意]으로는 탐욕에 빠져 오욕락을 즐기기 위하여 과다한 욕심을 부리고, 조그만 일에도 불끈 화를 내며, 어리석은 삿된 사량심으로 온갖 악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짓고, 탐진치(貪瞋痴) 삼독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오염된 이 땅을 ‘사바세계’ 즉 예토라 하여 『반야심경』에서는 ‘이 언덕[차안(此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언덕[피안(彼岸)], 즉, 정토(淨土)란 어떤 세계를 말하는 것일까요? 정토란, 우리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이 청정하여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이상(理想) 세계를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부처님의 세계, 열반 해탈의 경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언덕으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마하반야의 배를 타고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큰 지혜의 배를 타야만 건너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배를 불가에서는 ‘반야용선(般若龍船)’으로 상징화하고 있습니다. 사십구재를 지낼 때, 오색 띠가 달린 작은 배를 들고 봉송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배가 바로 반야용선, 즉, 큰 지혜로 부처님의 세계로 영가를 데려다 줄 수 있는 배인 것입니다. 이 반야용선의 뱃머리에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타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야할 부처님의 세계까지 길을 인도해 주시므로, ‘길을 인도하는 왕’이라는 의미의 ‘인로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반야용선은 수많은 무명중생을 모두 태워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대승(大乘), 즉, ‘큰 탈 것’이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방편설법을 다시 정리해 보면, 육도윤회의 세계인 이 언덕이 있고, 부처님의 세계인 저 언덕이 있으며,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향하는 수행자의 세계가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십법계(十法界)라고 부르는데, 이는 우리들이 사는 인간계를 포함해 우리가 윤회하는 세계인 차안예토[차안-생사윤회의 경지]인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여섯 세계와[6], 피안정토[피안-해탈열반의 경지]의 세계인 부처님의 세계[1]가 있으며, 차안인 이 언덕에서 피안인 저 언덕에 이르기 위하여 수행하고,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수행 과정에 있는 세계, 즉,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세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3] 여기에서 성문, 연각, 보살에 승(乘)을 붙인 이유는, 반야용선을 타고[乘] 간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성문이나 연각승은 소승의 수행방법이며, 보살승은 일체 중생을 함께 배에 태워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해 주는 대승의 수행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이르는 방법, 파라미타, 바라밀다의 방법에도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렇듯 바라밀다의 방법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공부하는 수행자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목적은 ‘바라밀다’가 되어야 한다는 점은 같다고 하겠습니다. 바라밀다를 향한 보리심의 횃불을 밝혀들고 우리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바라밀다 공부를 시작합시다. 그 공부가 바로 반야심경의 공부입니다.


심경(心經) 


 마지막으로, ‘심경’은 ‘핵심이 되는 경전’이란 뜻입니다. 범어로 ‘흐릿다야 수트라(Hridaya-Sutra)’라고 하는데, 그 뜻은 ‘마음의 경’, ‘진수(眞髓)의 경’, ‘심장(心臟)의 경’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심경이라고 하면, 흔히 ‘마음의 경’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심(心)을 마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불교에서는 ‘진수(眞髓)’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모든 경 중에서 일체의 요의(要意)를 모은 것, 다시 말해, 핵심이 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600권이나 되는 방대한 반야부 경전에 속하는 하나의 경전이지만, 단순히 반야부 경전의 하나이기보다는, 반야부 경전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가르침만을 모아 간결하게 정리해 놓은 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경’ 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전체 제목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정리해 볼까 합니다. 전체의 뜻은, ‘위대한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길을 설한 핵심 되는 경전’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혜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의 제목에서 가장 중심 되는 말은 바로 ‘반야’입니다. 지혜! 이것이야말로 괴로움 속에서 생사 윤회하는 우리들을 피안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만 ‘지혜, 반야’ 라고 하지 않고, ‘위대하고 크나큰 지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마하반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마하반야’를 통해서, 작게는 우리에게 당면한 일체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고, 나아가 깨달음의 저 언덕에 오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마하반야’를 통해서 일체 괴로움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가 바로 ‘바라밀다’입니다. 요컨대, 마하반야를 통해 바라밀다에 이르게 하는 소중하고도 핵심 되는 가르침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인 것입니다.


 이제부터 경전의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됩니다. 『반야심경』은 다른 경전들에 비해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논문이나 사설, 또는 그저 간단한 글을 보더라도, 글이라면 보통 서론, 본론, 결론으로 그 구성이 나뉘어져 있게 마련입니다. 그처럼, 경전에도 대부분의 경전에 공통되는 나름대로의 구성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이라는 구조입니다.

 서분이라고 하면, 보통 ‘육성취(六成就)’라고 하여, 이 경이 설하여지게 된 연유를 여섯 가지로 나타내고 있는 부분으로, 일반적인 글에서 본다면 서론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육성취는 신성취(信成就)[여시], 문성취(聞成就)[아문], 시성취(時成就)[일시], 주성취(主成就)[불], 처성취(處成就)[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등], 중성취(衆成就)[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 등]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요즘 사용하는 말로, 육하원칙(六何原則), 즉, 언제[When], 어디서[Where], 누가[Who], 무엇을[What], 어떻게[How], 왜[Why] 라고 하는, 소위 글 쓰는 5W-1H 원칙과도 흡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정종분이 있는데, 이 부분이 바로 본론으로서, 모든 부처님의 교설이 전개되는 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유통분은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정종분에서 설하신 교법을 제자에게 부촉하여 후세에 널리 유전(流轉)되도록 하기 위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반야심경』은 다른 경전과는 그 구조가 약간 다릅니다. 『반야심경』은 앞뒤 서분과 유통분을 생략하고 바로 본론인 정종분이 시작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60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경을 260 자로 간추린 경전이기 때문에, 핵심만을 간추리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이처럼 『반야심경』은 대승불교 ‘반야’의 진수만을 뽑아놓은 경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일체고액  (0) 2008.03.08
개공  (0) 2008.03.08
오온  (1) 2008.01.10
관자재보살 행심바라밀다시 조견  (0) 2008.01.09
바라밀다 심경  (0) 2007.12.11
마하 반야  (0) 2007.12.11
Posted by 법상
 

마하 반야


 경전(經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경의 제목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경의 제목에는 그 경이 설하고자 하는 중심 사상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는 경의 제목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하(摩訶)

 ‘마하’는 범어로 ‘Maha’라고 쓰는데, 이는 발음만 그대로 따온 것일 뿐, 한자로는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마하’의 뜻은, ‘크다, 많다, 뛰어나다’는 의미로서, 우리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의 크고 많다는 개념을 훨씬 초월하는 절대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 세계의 분별심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군가를 보고 ‘저 사람은 키가 크다’고 했을 때, 우리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의 키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170, 180, 혹은 190정도를 키가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딱히 어느 정도를 큰 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 못 먹고 크던 때 큰 키와 지금 큰 키의 기준도 달라졌을뿐더러, 같은 180cm의 키라고 해도 일반적으로는 크다고 느끼겠지만 농구선수들 사이에서는 작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크다, 작다’라고 했을 때 이것은 단지 상대적인 분별심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크다, 작다' 혹은 '많다, 적다', '지혜롭다, 어리석다'라고 느끼는 등의 모든 분별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 짧을 수도 길수도 있을 뿐,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무엇을 보고 크다, 작다고 하겠습니까? 이처럼 고정된 것이 없기에 인식의 극단을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분별은 단지 주위의 환경[인연]이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일 뿐인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 혼자 무인도에 살았다면, ‘내가 크다・작다, 잘났다・못났다, 똑똑하다・어리석다’분별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즉, 큰 사람이 있으니 그에 비교되는 작은 사람도 있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다른 말로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연(緣)하여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는 이 법계는 바로 상대적인 세계, 연기의 세계입니다. 이처럼 일체가 상대적으로 돌아가는 상대의 세계에서, 이 경의 제목에는 재미있게도 ‘마하’라는 절대 개념이 붙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마하’는, ‘절대적으로 크고 많고 뛰어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것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큰 것, 즉 일체를 초월하는 절대적으로 큰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절대적으로 크고, 많고, 뛰어나다는 것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기에 일체의 모든 상대 개념을 초월합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일체의 모든 상대적인 것과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둘이 아니므로 대비할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가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상대이기 때문에 절대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하’라는 수식어가 경의 앞에 붙어 있는 것은 단순한 문자의 표현이 아니라, ‘최고의 경지, 부처님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하’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좀 더 자세하게 세 가지 의미로 나누어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 첫째는 ‘크다(大)’의 의미로 이는 우주, 허공, 삼천 대천 세계, 수미산 등을 부를 때 쓰여지는 공간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으며, 둘째는 ‘많다(多)’로 팔만 사천, 항하사(恒河沙), 미진수(微塵數) 라는 불교 용어에서 지극히 많음을 표현하는 수식어로 양적인 개념으로 쓰여지고 셋째는 ‘초월하다, 뛰어나다, 탁월하다’의 뜻으로 불변, 진실, 수승(殊勝)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처럼, ‘마하’의 의미는, 감히 우리 범부의 눈으로 자로 재듯이 재어 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처음 중국에 불경이 전해질 때, 그 뜻을 번역할 단어가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단어로 번역하면 의미가 변질될 것을 우려해 ‘마하’라는 말을 발음 그대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괜히 기존에 있던 어설픈 단어로 사용했다가는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인해 의미가 한정되어질 수 있음을 경계한 까닭입니다


반야(般若)

 ‘반야(般若)’라는 말은 범어로 ‘프라즈냐(Prajna)’ 라고 하며, 팔리어로는 ‘판냐(panna)’라고 합니다. 반야는 바로 팔리어 ‘판냐’의 음역어로서, 마하와 같이 그 발음만 따서 옮긴 또 다른 예입니다. 이 또한 ‘마하’에서와 같이 그 의미가 퇴색됨을 우려해 따로 번역하지 않고 ‘반야’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야’ 또한 우리 범부의 사량(思量)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일 것입니다.

 반야를 굳이 번역한다면 ‘지혜(智慧)’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지혜가 아니라, ‘최고의 지혜, 즉 깨달음에 이르신 부처님의 밝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부처가 아닌 범부중생으로서 어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단어이겠습니까? ‘지혜’와 비슷한 단어로, ‘지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지혜’와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계산하고, 암기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극대화된 것이 ‘지식’이라 한다면, ‘지혜’는 이러한 범부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는 머리를 굴려 생각하고 분별하는 일련의 행위에 대해서 오히려 버리고 비울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이 ‘머리 굴리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지혜’라고 하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관조반야(觀照般若)’인데, 이것은 일체의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정견(正見)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제법(諸法)의 실상, 즉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고정된 바 없이 비춰 보는 지혜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오직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아 현실 세계의 모습을 여실히 깨달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실상반야(實相般若)’로 이는 제법의 실상 그 자체,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의 모습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보는 자와 보여지는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는 자가 보이는 현실 세계, 우주와 하나가 되어 버릴 때 이것이 바로 실상반야인 것입니다. 이러한 실상반야를 우리가 올바로 깨달아 바르게 비추어 보게 되면, 이것이 바로 관조반야(觀照般若)인 것입니다. 셋째는 ‘방편반야(方便般若)’로 이것은 문자반야(文字般若)라고도 불리는 것으로서, 이상의 실상반야와 관조반야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일체의 모든 경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반야는 아니지만, 반야지혜를 이끌어 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방편이 되는 것이므로 반야라고 합니다.

 이상 삼종의 반야는 부처님의 지혜인 깨달음의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한 세 가지 단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흔히 우리가 부처님의 지혜라고 일컫는 것은 진리의 당체(當體)인 실상반야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해서, 실상반야를 체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계를 밟아가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경전을 읽고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방편반야, 즉 문자반야입니다. 이렇게 방편반야로 공부를 한 뒤에는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 실천이 바로 관조반야입니다. 관조반야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편견, 고정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실천 수행법입니다. 이렇게 방편반야로 부처님의 법을 이해하고, 그 후 관조반야를 실천했을 때 나타나는 진리의 실상이 바로 실상반야인 것입니다.

 ‘반야’의 힘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 힘은 평등, 절대, 무념(無念), 무분별(無分別), 비움의 경지일 뿐 아니라, 반드시 상대의 차별 현상을 관조(觀照)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단순히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현명함이나 지식이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모습에 대한 ‘눈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야’의 성취는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는 일이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행복을 성취하는 길이고, 사회의 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며, 해탈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반야심경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일체고액  (0) 2008.03.08
개공  (0) 2008.03.08
오온  (1) 2008.01.10
관자재보살 행심바라밀다시 조견  (0) 2008.01.09
바라밀다 심경  (0) 2007.12.11
마하 반야  (0) 2007.12.11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