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9.03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2. 2009.07.26 도반의 즐거움
  3. 2009.07.22 힘 있는 대장부로 살라
  4. 2007.12.12 목을 베는 것과 봄바람을 베는 것



이제 막 연초록의 잎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고
연초록의 새순들이 나무위로 내려앉으며,
노오란 생강나무와 분홍빛 진달래가
외롭던 산에 생기로운 벗이 되어주고 있다.

순간 파도처럼 산야를 스쳐지나가는
거샌 바람소리가 내 마음에 노크를 한다.
법당 풍경소리와 함께 바람에 부딪치는 낙엽소리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마음에 피어나는 봄꽃을 느낀다.

산은, 나무는, 꽃들은, 또 지난 해 땅에 떨어졌던 썩어가는 낙엽들은
이렇게 때때로 내 안에 생기로운 도반처럼 다가와 노크를 하곤 한다.
바람의 소리, 낙엽 소리, 물소리, 풍경소리들은 모두
내 안의 관조(觀照)의 빛을 일깨우는 우주의 경책소리처럼 들린다.

바람이 불어 와 대지를 스치고, 낙엽과 나무를 스치며, 내 뺨을 스치는
그 상서로운 느낌, 소리, 그것들을 가만히 느껴보고 있노라면
그 순간 내 마음은 표현할 수 없는 고요와 평안이 깃든다.

아직 바람은 차다.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창 밖으로 빗방울 소리가 대지를 적신다.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찬 바람을 느끼며
조근조근 낙엽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아,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은 내 몸은 하늘하늘 미묘한 설렘과
알 수 없는 적요, 가득함, 맑음, 밝음, 편안함, 차분함
같은 것들 속에 내맡겨져 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지금 여기’의 찰나로 돌아 와 보라.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며, 도반이며,
신이고 붓다 그 자체이다.

한번 내 존재를 가지고 실험 해 보라.
어떤 상황 속에서든 좋다.
바로 그 상황, 지금 이 순간의 그 상황이 바로
신을 만나고, 붓다를 친견하며, 내 안의 깊은 존재를 만날 수 있는 때다.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내 삶에 있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잠시 답답한 일이 있거나, 복잡한 생각들이 있거나,
대인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이 있거나,
회사 일로 인한 괴로움이 있더라도
언제든 잠시 한 생각 돌이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면
우린 무엇을 기다릴 것도 없이 직접 평화로운 정원에 도달할 수 있다.

왜 절에 가서 다리를 꼬고 앉아 참선을 시작해야만
고요와 평온과 삼매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아무런 괴로움이 없을 때만
우리 마음은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하는가.

우리 존재의 본래 속성은
지극한 평화로움과 고요함이며 깨어있음이다.
그러나 그 속성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과 만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어려운 일인가.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있기만 하면 되는데...

에크하르트 톨레는 그의 책 ‘고요함의 지혜’에서 말하고 있다.

“지금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한 순간밖에 없지 않은가?
삶은 언제나 '이 순간'이 아니던가?
이 한 순간, 즉 지금이 내가 도망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며,
나의 삶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오직 하나이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는 나는 어디에 있든 편안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편안하지 않다면
나는 어디를 가든 마음속에 불안이라는 짐보따리를 지고 간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
우리는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편안하다.
그것이 회사 사무실이 될 수도 있고, 꽉 막힌 도시의 차 안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바쁜 업무 중에 잠시 만나게 되는 짧은 순간일 수도 있고,
일이 안 풀리는 순간, 회사를 살리느냐 망하게 하느냐 하는 중요한 순간일 수도 있고,
직장 상사에게 꾸중을 듣는 순간, 동료들과 대화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순간이든 우리는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되는,
‘지금 이 순간’을 100% 존재하며 살아나가는 것을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을 묵묵히 지켜보고 바라보는 것이다.

아무리 편한 순간일지라도 마음이 ‘지금 여기’에 있지 않으면
그 마음은 평화가 아닌 번뇌요 복잡스런 순간이지만,
아무리 정신 없고, 큰 문제가 생겨난 순간일지라도
그 순간 마음이 ‘지금 여기’에 머물러 깨어있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바로 직접 그 자리에서 본연의 지혜를 보게 될 수 있다.

책에서는 또 말하고 있다.

“지금에 감사하고 지금에 경의를 표하라.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중요한 구심점이 될 때
삶은 여유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지금의 그 어떤 현실에도 경의를 표하라.
부처님께 예경하고, 신께 나아가 기도하듯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신께, 붓다에게 감사와 찬탄과 찬양과 경의를 표하라.
‘지금 이 순간’의 신을, 부처를 우리는 언제나 ‘지금’ 만날 수 있다.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지금을 사는 것이 삶의 구심점이 될 때
삶의 모든 문제들은 부처의 방식대로, 신의 방식대로,
지혜의 방식대로 여유롭고도 평화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모든 문제가 풀리는 그 진리의 열쇠가 바로 ‘지금 여기’다.



톨레는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삶에 대한 책임도 회피하는 것이다.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그러함'에
마음으로 반대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지금과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다.
삶과 조화를 이루겠다는 뜻이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매우 혁신적인 정신 수행이 있다.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을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안에서든 밖에서든 말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는 것은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고 온전히 살아내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인생 전체에 대한 직무유기이며 삶에 대한 회피이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 한가지는
오직 내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일이지,
미래를 위한 준비도 아니며, 목표 달성도 아니고, 노후 준비도 아니며,
진급도, 합격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온전히 느끼고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의 일체 모든 상황과 인연과 환경을
완전히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긍하며 반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것을 관하는 것,
그것은 곧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최선이며
언뜻 보기에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최고의 혁신적인 수행법이다.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순간과 다투려고 하지 말라.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상황을 통째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관하라.
내 앞의 삶과 투쟁하지 말고, 상황을 바꾸려 들지 말고,
지금 이 순간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 번뇌, 고민, 상황들일지라도
그것과 씨름하고 이겨내려 애쓰고 다투려 들지 말고
그저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다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가만히 비추어 보라.

신경쓰지 말라.
왜 이렇게 생각이 많고 번뇌가 많은 것이냐고 탓할 필요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 자연스러운 내면의 번뇌들을
나쁜 것으로 몰아붙이며 그것을 없애려고 애쓰는 내 다툼의 행이다.

내 안에서 혹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시비를 붙일 것도 없고, 탓할 것도 없다.
다만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고 다만 묵연히 지켜보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경계에 내 마음을 포개지 말라.
안팎의 경계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판단치 말라.
그저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인연따라 모든 것은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매 순간 순간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매 순간 순간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
그것이 수행과 정진, 마음공부의 핵심이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인생이 경이로움을, 존재가 신비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이 부처요 신의 나툼이 된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는 순간
나도 세상도 우주도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하루에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깨어있음의 빛을
지금 이 순간에 비추라.
그 빛이 지금을 비추는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지,
언젠가 있을 성도(成道)의 때란 없다.

계속해서 톨레는 말한다.

“불자들은 늘 알고 있던 진리였지만
최근 물리학자들이 과학적으로 밝혀낸 것이 있다.
이 세상에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이다.
겉모습 밑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만물은 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개체는 ‘지금 이 순간’이 취하는
특정한 형태를 준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긍정하는 순간 나는 생명의 지혜와 힘과 조화를 이룬다.
그 때 비로소 나는 이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일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별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이요, 상의상관성이다.
이 세상에는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사물도 없고,
아무 이유없이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건도 없다.

우주적인 전체의 진리성이
다만 ‘지금 이 순간’에 특정한 사물로 혹은 사건으로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말해 우주적인 진리성, 불성, 법신, 진리의 당체가
‘지금 이 순간’의 존재, ‘지금 이 순간’의 사건이라는 모습으로
끊임없이 내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며 번뇌들도
법신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이며,
내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며, 환경, 상황, 문제들 또한
불성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그 모든 일도, 사건도, 사물도, 사람도,
모두가 다 법신 진리의 나툼이며, 온 우주의 드러남이며,
부처의 시현이고, 신의 현현으로써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시공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란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모든 상의상관적인 연기법의 진리가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이며,
우주적인 전체성 속에서 법신불의 향기가 화신으로 나투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
‘지금 이 순간’을 느끼며 관하고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생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존귀하며,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행이요 수행이다.

‘지금 이 순간’이 부처이며 신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본질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의 전체이다.
끊임없이 놓치겠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그것이 수행자의 길이요 참된 삶의 길이다.



Posted by 법상




오늘
늘 보아왔던 분이었고,
또 마음 속에서
감사한 도반으로 또 스승으로
그렇게 바라보며
이따금씩 마음 나누며 지내던 분에게서
또다른 면모를
나와 참 많이 닮은 면모를 보았다.

나는 그동안
그 분의 수행이나 삶에 대해
조금은 먼 거리에서 바라보며
이런 분이 같은 일을 하며 함께 살고 계신다는 것이
늘 감사하고 고맙고 그랬었다.

그런데 오늘 조금 깊이 대화를 나누어 보았더니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들이
많이 닮아있고,
또 내 가슴에 담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담고 계시는 것을 보고 참 행복했었다.

참 좋은 도반을 만난 것 처럼,
오랜 도반을 찾은 것 처럼.

자연에 대한 생각들도 그러하고,
수행에 대한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공동체, 농사, 대자연, 산, 바람, 구름,
그런 관심사에 대한 견해에서부터,

읽으신 책 중에
내게 몇 권을 이야기 해 주시며
추천해 주시는데
그 책들 모두가
나도 똑같이 읽었던 책들이었음을 알고는
뭐랄까 참 감사한 동질감 그런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산만 생각하면
또 자연의 변화를 바라보면
설레고 내 안에서 향기가 날 것 같은 그런 느낌에서부터
지리산에서의 기억들
뭐 그런 자자른 추억들까지
똑같은 마음으로 공유할 수 있었다.

지리산 자락 작은 마을,
혹은 강원도 어딘가 호젓한 둥지에서
작은 땅 일구며
욕심을 최대한 줄여가면서
자급자족하고
최소한의 필요로써 살아가면서

농사도 짓고
마음공부도 하고
도반들 만나 차도 한 잔 나누고
새벽과 저녁
해뜨고 해질 때 기도를 하고
뭐 그렇게 살고 싶노라는 생각에서부터...

참 많이 닮아있는
그런 도반을 만났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충만했겠나.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고 행복이다.

또한 동일한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도반을 만난다는 건
그건 참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참 장한 인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 인연에게 무언가를 바랄 것은 없다.

그저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마음밭 일구며
살아가고 있는 도반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
다만 그것이 힘이 되는 것이고
고마운 것이다.

사실 내 마음을 나누면서
함께 공유하면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한 그런 도반이 곁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하고 힘 나는 일인가.

얼마전에도
고향에 갔을 적에
내 오랜 친구 한 녀석과
같은 꿈, 같은 마음에 대해 공감하며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것 같다.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한 마음을 품고 살면
비슷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

마음에
따뜻함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품고 살면
그런 사람을 만나고
그런 에너지를 만나고
그런 환경을 만나게 되는 것 처럼...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난 될 수 있다면
내게 처한 상황을 긍정하려고 노력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사하게 받아들이려고...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느낀다.
이 세상에는
긍정 아닌 경계는 그 어디에도 없음을...

다 긍정하면
다 좋은 경계다.

긍정적이라는 것
그것처럼 좋은 삶의 방식이 있을까.

매사에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긍정하며 산다는 것
그건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행하기 어려운 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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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수행자는
힘이 있습니다.

내면의 힘이
당당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에
삶의 그 어떤 경계라도
쉽게 수행자를 뒤흔들 수 없습니다.

입시철이 다가오거나,
진급철이 다가오거나,
이런 저런 어려운 일이 닥치면
백일 기도다 뭐다 해서 열심히 기도하시는 분들이 봅니다.

이런 때를 계기로
진실된 마음 내어 기도를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 세속적인 바램(욕망)들로 인해
마음 공부를 할 수 있는 인연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기도의 의미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입시기도나, 진급기도 같은 기도는
그 목적이 '합격'이나 '진급'에 있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명확히 하고 정진을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입시기도나 진급기도를 할 때
합격하기 위해서, 진급하기 위해서 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낙방을 하게 되었을 때
낙담을 하고 괴로워 하고
부처님을 원망하고 스님을 원망하며
심지어는 종교를 바꾸겠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먼저 백일기도를 시작할 때
명확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합격하고 진급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입시며 진급이라는 경계 앞에서
당당해 지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점 말입니다.

좋은 결과를 바라는 마음에서
백일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에도 내 중심을 잃지 않고
당당하고 겸허하게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
그만큼 내 마음공부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수행 정진을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백일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처음에는 꼭 합격하고 진급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기도를 시작하셨는데
한참을 정진하다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 지고
까짓 결과야 어떻게 되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노라고 말씀들 하
십니다.

기도 정진을 올바로 하게 되면
당연히 이런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정진을 하면 잡는 마음, 바라는 마음에서,
놓는 마음, 수용하는 마음, 당당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기도 정진은 내 그릇을 키우는 일입니다.
그릇이 큰 사람은
합격을 못 하더라도, 진급 못 하더라도
크게 휘둘려 괴로워 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만큼 그릇이 큰 것이지요.

그러나 그릇이 작은 사람일수록
결과에 크게 얽매여 세상 이제 다 산 것 처럼,
바라던 결과가 아니면 더 이상 다른 길은 없는 것처럼,
그렇게 꼼짝달싹 못 하고 괴로워 합니다.

부처님은
합격시켜주시는 분이 아니시고,
진급시켜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 이렇게 단순하고 당연한 진리를 외면하는 것입니까.

합격이며 진급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지요.
내가 공부한 만큼, 내가 열심히 산 만큼
온당한 결과를 받는 것이
그것이 수행자로서 당당한 노릇 아니겠습니까.
인연법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불자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입시며 진급철이 오면
백일기도를 하고 스 님들께서도 백일기도를 시키시는 이유는
그만큼 업장을 소멸시키고,
그릇을 키우도록 하기 위함이며,
마음공부를 시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백일기도를 지극한 마음으로 하게 되면
무조건 합격을, 진급을 한다기 보다,
내 안에 있던 불합격에 대한, 탈락에 대한 조급한 마음이 녹게 되고,
그런 평온한 마음은 내 마음을 밝은 쪽으로 몰아갑니다.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 보다는 밝은 마음을 가지는 편이
법계를 더욱 밝게 울릴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또한 지극하고 간절한 기도는
나를 변화시키고 법계를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명확한 인과응보까지 다 덮어 버릴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 간절함이 내 안 뼛속까지 깊이 파고들어 자성부처님을,
또 우주 법계를 울려퍼져 법신부처님을 감동시킬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명확한 진실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 기도한다고 무조건 합격하고 진급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온당한 진리를 말이지요.

기도 정진을 지극한 마음으로 하게 되면
그만큼 업장이 녹게 되고,
또 내 마음공부가 익어가며 그릇이 커져
어떤 결과에도 크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당당한 마음자리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백일기도의 목적인 것이지
합격이, 진급이 목적인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힘이 있다고 서두에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힘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는 데에도 힘이 있어야지요.

그 힘이라는 것은
내면에 중심이 딱 잡혀
그 어떤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꼭 합격해야만 할 것 같고,
꼭 진급해야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고,
그 길이 아니면 세상 어찌 살아가나 걱정스러울 것이지요.
이 길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그 한 생각 때문에
때로는 비열하고 치사한 짓 까지
차마 밝히기 어려운 야비한 짓까지 서슴지 않기도 하지 않던가요.

이 길 아니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바로 그 마음을 놓아 버릴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그래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 수 있도록
어떤 결과 속에서도, 어떤 상황 경계 속에서도
당당하고 평화롭게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렇기에 수행자는 당당합니다.
아무리 높은 직장 상사 앞에서라도,
심지어 내 목줄을 잡고 있는 진급 심사위원 앞에서라도
언제나 당당하고 떳떳한 자기 중심을 잡고 살 수 있는거예요.

세상의 겉에 드러난 껍데기에
자기의 영혼까지 팔아서는 안 됩니다.
내 양심까지, 내 맑은 영혼까지
세속적인 가치에 다 빼앗겨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 힘겹고, 답답하고, 마음대로 잘 안 됩니다.
마음대로 안 되니 세상아니겠습니까.
그렇더라도
우리는 우리 중심까지 잃고 헤매여서는 안 됩니다.

입시철이 다가오고,
진급 때가 다가오면 더욱 열심히 정진하세요.

합격하게 해 달라고,
진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진급을 하든 떨어지든
내 안에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기를,
당당하게 결과를 받아들이고 감사할 수 있기를,
그렇게 큰 마음, 큰 사람일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나
당당하게 사십시오.
힘 있는 대장부로 사시기 바랍니다

bH7Ua3i2YJVPGFtVh6Ucdy1EgkEtUrc6nVyX9d3q96U,



Posted by 법상



[사진 : 북한산 진관사]

옛 사람의 글을 읽다가
승조스님의 죽음 앞에 읊은
한 자락의 게송이
가슴에 짠한 울림을 가져다 줍니다.

수많은 경전을 역경하신 구마라집 문하에
승조(僧肇)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본래는 노장사상에 심취하였었는데
뒤에 유마경을 읽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불교에 귀의하신 분입니다.

워낙 명성이 뛰어나
불교계 뿐 아니라 세간에서 또한 크게 숭상받았는데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의 모함도 받게 되었고
왕이 부하로 만들려고 협박을 하기도 하셨지요.

특히 이 승조 스님을 탐낸 진나라 왕 의희는
스님을 퇴속시켜 자신의 부하로 만들려고
갖은 희유와 협박을 다 하였습니다.

"스님께서 속인으로 돌아와 재상이 되면
천하의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니
부디 짐의 청을 저버리지 말라"

그러나 스님은
"재상이 다 무엇이고 천하가 다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 법에서 볼 때는 모두가 부질없는 꿈 속의 일일 뿐입니다.
나는 무상대도를 얻어 만 중생을 이익되게 할 것입니다."
라며 단번에 거절하여 버렸습니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진왕은 승조스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승조스님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사형이 집행되기 전 칠을 동안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꿰뚫은 보장론을 저술하며
죽음을 앞에두고도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번역하는데
몰두하였습니다.

곧 형틀에 올라 칼로 목을 베이는 참수형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태연하게 게송 하나를 읊었다고 합니다.

四大元無主
五陰本來空
將頭臨白刀
猶似斬春風

"사대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원래 주인이 없고
다섯 가지로 모여진 이 몸은 본래부터 비었도다.
장차 흰 칼날이 내 목을 자를 것이나,
이는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을 뿐이다."


마치 봄바람을 칼로 베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