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온'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8.31 느낌으로 명상하기
  2. 2008.01.10 오온



[여수 흥국사]



불교 수행의 주안점은
'느낌'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모든 느낌을
바로 보고 닦아낼 수 있을 때
업식(業識)을 더 이상 짓지 않을 수 있는 밝은 길이 열립니다.

우리 몸에서 느낌을 일으키는 곳은
육근(六根)이라 하여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눈, 귀, 코, 혀, 몸, 뜻 이렇게 여섯 가지입니다.
이를 주관계의 감각기관이라 하며 이는 다시
객관계의 여섯가지 대상, 즉 육경과 접촉을 일으키게 됩니다.
육경이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뜻의 대상 이렇게 여섯가지입니다.

바로 이 여섯가지 주관계의 감각기관, 육근에서
그 대상인 여섯가지 객관계의 대상 즉 육경을 접촉할 때
느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느낌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고수(苦受), 낙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싫은 느낌, 좋은 느낌, 좋지도 싫지도 않는 느낌(무관심) 이렇게 말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교설이며 우리가 몇 번이고 주목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 세가지 느낌에서
삼독심(三毒心)이 나오며 각종의 분별작용과
나아가 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삼독심이란 탐내고(貪心), 성내고(嗔心), 어리석은(癡心) 마음으로
우리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무명을 의미합니다.

좋은느낌(樂受)을 계속 일으키고 싶은 마음에서
탐심(貪心, 탐냄, 애욕)이 생기며,
싫은느낌(苦受)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진심(嗔心, 성냄, 화냄)이 생기고,
본래 좋고 싫음이 나누어 있지 않은 무분별의 느낌에
'좋은느낌' '싫은느낌' 하고 분별하고 나눔으로 인해
치심(癡心, 어리석음, 무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각기관, 우리 몸에서
느낄 수 있는 이 모든 '느낌'들은
어느 하나 빼 놓지 않고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탐진치 삼독심의 원동력이 바로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삼독심이 원인이 되어
각종의 분별(識)과 행위(業)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중생인 이유, 윤회하는 이유,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느낌을 잘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탐진치 삼독심을 소멸하는 것을 일컬어
열반(涅槃)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말해 삼독심의 소멸, 즉 무명의 소멸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길, 열반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육근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느낌들을 닦아가는 것이 바로 수행의 핵심이라 할 것입니다.
눈으로 색을 바로보고, 귀로 소리를 바로듣고, 코로 냄새를 바로 맡고...

그렇다면 바로 본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로 본다는 것은 세 가지 느낌을 통해 따라 일어나는
삼독심을 일어나지 않도록 차단해 버린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세 가지 느낌이 일어날 때 부수적으로 따르는
탐냄, 성냄, 어리석음을 그 앞 단계 즉 느낌의 단계에서 녹여버리는 것입니
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시시해' 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2,500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가르침으로
사념처 혹은 요즘 말로 위빠싸나라고도 이름합니다.

싫은 느낌, 좋은 느낌,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를 꼬집었다고 했을 때
싫다라는 느낌을 일으키기 전에
그 꼬집었다는 느낌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싫다는 느낌을 일으키면 연이어
진심, 즉 성내는 마음이 따라 일어나게 되고
성냄의 마음은 곧 다툰다던가 싸운다던가 나쁜 마음을 가지는
그 어떤 의지적 행위, 즉 업을 쌓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쉽게 말해 왜 꼬집냐고 상대에게 화를 내고(진심)
화내는 마음에 상대를 미워하고(의업) 욕하며(구업)
다시 꼬집거나 싸우는(신업) 등의 행위(업)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업으로 인해[인(因)]
상대는 또 다시 나를 미워하게 되며[과(果)]
나중에 그 어떤 행위로써 또다시 나를 괴롭힐 것입니다.[응보(應報)]
이번 생에 나를 괴롭히지 못하고 죽으면
반드시 다음 생에까지 나를 따라와 그 원한을 갚고자 할 것입니다.
짓고 받음의 도리, 인과응보의 도리는 철두철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윤회인 것입니다.

이렇듯 이렇게 일으킨 한 번의 싫다는 느낌이
끊임없는 분별을 일으켜
삼독심이며 업과 윤회의 원동력이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꼬집는 순간
'왜 꼬집을까' '아파 죽겠다' '이게 죽을라고...' 하는
분별을 일으키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지켜봄의 힘이 커지게 되면
꼬집는다는 그 자체에 그 어떤 싫다는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음을
바로 볼 수 있게[정견(正見)] 될 것이며
그 느낌에 내가 흥분해 대응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몰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올바로 지켜보기만 하면 내면에서
저절로 저절로 그렇게 되어질 것입니다.

꼬집는다는 그 자체는 고(苦)도 락(樂)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연화합의 현상 그 자체일 뿐입니다.
꼬집는다는 그 자체에 어떤 고락이란 실체가 있다면
상대방을 꼬집을 때도 내가 아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실체가 없기에
인연따라 상황따라 대상에 따라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한 것입니다.
나를 꼬집으면 아프고, 내 자식이나 부모를 꼬집어도 어느정도 (마음이)아
프지만
전혀 모르는 상대를 꼬집으면 안 아프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상대를 꼬집으면 아프기보다 즐거울 수도 있는 것입
니다.
꼬집는다는 그 자체에 어떤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올바로 지켜본다면 느낌에 노예가 되질 않게 됩니다.
그저 하나의 현상으로 지켜볼 뿐
그로인해 마음에 그 어떤 분별을 일으키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꼬집는다는 그 마음은
나에게 괴로움을 줄 수도 없으며
또다른 업을 짓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좋은 느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
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거나 키스를 했을 때(觸) 좋은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 좋은 느낌을 지속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해
우린 애욕과 탐심을 일으키며,
그로인해 계속 만나고 싶다거나(의업) 또 키스하고 싶다(신업)에서
나아가 결혼하고 싶다, 사랑한다(구업)고 말하는 등의
각종 의지적 작용, 즉 업을 낳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 결과 상대에 대한 애욕이 생기며
애욕은 집착으로 한 걸음 내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한다는 마음만을 간직한 채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되면
다음 생에서까지 그 업식으로 인해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업이 생기고 윤회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직 지켜봄에 머물어야 합니다.

다만 지켜볼 때는
그저 '지켜볼 뿐'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할 뿐'입니다.
절대 그 외의 다른 분별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순간 순간 지켜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 머물러야 합니다.
지금 여기를 놓지고 나면 이미 그 느낌은
닦이지 못한 채 과거나 미래로 멀어질 것입니다.

주관인 육근이 객관인 육경과 촉(觸)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순간을 놓치면 이미 우리의 마음은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 말하는
다음 단계인 느낌(受), 갈애(愛), 집착(取)을 지나
한없는 번뇌와 고를 동반하여 새로운 존재를 낳는
윤회의 사슬에 묶이게 될 것입니다.

십이연기란 생노병사 괴로움과 윤회의 원인을
일어나는 단계별로 살펴본 교설인데
쉽게 말해 이 열 두가지 단계를 밟아 인간이 윤회하며
괴로움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십이연기의 어느 한 가지 단계를 소멸하면
열 두 가지의 모든 지분이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십이연기란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입니다.
느낌수행은 이 가운데 수(受, 느낌)의 단계에서
느낌 그 자체를 닦음으로써
다음의 지분인 애, 취, 유, 생, 노사... 로의 흐름을
미리부터 소멸시켜 버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정신적인 분류인
오온(五蘊)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색, 수, 상, 행, 식 이라는 다섯가지 가운데
정신적 분류인 수, 상, 행, 식 중
'수(受, 느낌)'를 닦아내는 수행인 것입니다.
'수'를 닦음으로써 수에 연이어 일어나는 상, 행, 식의
각종 정신 작용 또한 소멸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느낌(수)이 일어나니 마음속의 분별(식)이 일고
그에따라 의지작용(행)이 일어나며
그 인연으로 표상작용(상)을 일으키기에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함으로써 지혜(여실지견)가 일어나고
그에따라 어리석은 분별, 행위, 표상작용 또한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행동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할 뿐' 이 되어야 하며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수많은 다른 분별을 일으키려는 순간
다시금 '할 뿐'으로 돌아와
순간을 온전히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이나 밝은 수행자들과 우리네 중생들이 다른 점은
바로 이 점, 즉 느낌 다스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부처님이라고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육근과 육경이 있는 한 두 가지가 촉(觸)하게 마련이고
촉이 있는 한 느낌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느낌을 올바로 관찰함으로써
느낌 다음 단계인 애욕, 집착 등으로 마음을 넘겨보내지 않습니다.
느낌 그 자체를 온전히 관찰함으로써
번뇌로 연결되는 것을 능히 막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한 좋은 예로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범부들이나 수행자나 모두 세가지 느낌을 일으킨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범부들은 싫은느낌이 일어날 때
괴로움에 빠져 슬퍼하다가 점점 혼미해지느니라.
그것은 마치 첫 번째 화살을 맞고 다시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과 같으니,
그에 비해 수행자는 싫은느낌을 받아도
비탄에 빠지거나 슬퍼하며 혼미해지지 않느니라.
나는 그것을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다시 말해 꼬집힘을 당해서 오는 아픈 느낌이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것이라면
수행자는 마땅히 그 싫은 느낌을 올바로 관찰하고 다스려
더 큰 괴로움과 번뇌가 되도록 마음을 진행시키지 않음으로써
그저 흘려보냄으로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풀려 '싫은 느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도 고수, 락수, 불고불락수를 모두 느끼지만
그 느낌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을 앞두시고 열병에 걸리셨을 때의
그 괴로운 감각을 수행으로 닦아가신 것을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꼬집혀 싫은 느낌과 함께
두 번째 화살인 온갖 번뇌를 일으킵니다.
즉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 욕하고, 함께 꼬집고, 증오하는 등의
온갖 또 다른 업식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방법,
즉 경계를 맞아 탐진치 삼독심을 일으키지 않는 방법,
윤회의 원동력인 업식을 일으키지 않는 방법,
좋고 싫은 그 어떤 느낌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방법,
그 방법이 바로
지켜봄의 수행인 것입니다.

방하착 수행이 '집착'을 놓아버리는 수행이라면
오히려 관수행은 그 이전단계인 '느낌'에 대해 관함으로써
애초부터 갈애며 집착이 생겨나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수행이라 할 것입니다.
물론 집착 이전 단계인 느낌 또한 놓아버릴 것이며
이미 일으킨 집착이라도 있는 그대로 관하게 되면
초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놓음이 바로 관이며 관이 바로 놓음 수행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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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오온(五蘊)이라고 하면 일체 현실의 세계를 다섯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또한, 인간을 다섯 가지 요소로 나눈 것이기도 합니다. 이 오온을 특별히 인간에 적용시켜 말할 경우 오취온(五趣蘊)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에 대하여 고정적인 자아[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취]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오온개공에 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오온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근본불교에서의 오온무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온의 ‘蘊(Skandha)’은 ‘모임’이라는 뜻으로, 때로는 음(陰)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일체의 현상세계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모임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온은 좁은 의미로 볼 때 인간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일체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일체의 구조를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인데, 색은 현상계의 물질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며, 수상행식은 정신세계의 총체를 네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분류법은 물질보다는 정신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분류법입니다. 특별히 오온설은 물질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서 무상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정신은 실체적이며, 영원하다고 믿고 그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법한 교설입니다. 그러므로 오온은 물질보다 정신을 더 자세하게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오온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색온(色蘊)

 색이란 빛과 모양을 가진 물질을 의미하며, 인간에게 있어서는 육체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색은 네 가지의 요소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사대(四大)라고 하며,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를 말합니다. 지(地)라는 것은 우리의 몸에서 뼈, 손톱, 머리카락, 살 등 딱딱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우리가 죽을 때 모두 땅[地]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게 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수억 겁을 윤회한 이 땅의 이 모든 자연, 흙, 나무, 등이 모두 과거, 또 그전 과거에는 나의 몸이었을 수 있는 것이며, 지금 나의 몸 또한 백 년 내지 이백 년 후면 다시 처음 나왔던 그 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육신, 지(地)는 일체세간의 지가 인연을 만나 우리의 몸을 잠시 이루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내 앞에 떨어진 흙 한 줌, 나무 한 토막이 과거나 미래의 어느 순간 나의 몸을 이루는 내가 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올바로 보지 못하기에 우리는 이 육신에 집착합니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몸은 그렇게 아끼며 집착하지만, 자연에 대해서는 내 몸처럼 아끼고 잘 가꾸지 않는 것이 우리네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색(色)이 항상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이 몸뚱이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 뿐 아니라 대지 위에 있는 나무, 돌, 광석들은 모두 항상하지 않습니다. 현대과학은, 모든 물질은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 하나가 모두 플러스, 마이너스의 스핀 운동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세포 하나하나가 죽고 새로 생기기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우리의 몸이 전혀 새로운 세포로 변화되는데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색온은 무상한 것, 항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2)수온(受蘊)

 수란 감수작용(感受作用)으로 느낌, 감정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그리고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입니다. 즐거운 감정과 괴로운 감정, 그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을 말합니다. 우리의 주관적, 내적인 감각기관인 육근(六根)과 그것에 상응하는 외적인 대상인 육경(六境)이 서로 만날 때, 이러한 세 가지의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안근(眼根)[눈-모양]으로 색을 바라볼 때, 예컨대 우리가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 좋다는 감정이 생기며, 징그러운 해골을 보던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볼 때, 싫다는 감정이 생깁니다. 그러나 무심코 지나다니는 사람을 멍하니 지켜볼 때처럼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근(耳根)[귀-소리]으로 무언가를 들을 때, 즉, 욕을 듣던가 꾸지람을 들으면 싫은 감정이 생길 것이며, 칭찬을 들으면 좋다는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비근(鼻根)[코-냄새], 설근(舌根)[혀-맛], 신근(身根)[몸-접촉], 의근(意根)[뜻-생각]들도 이러한 세 가지의 감정을 나타내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러한 수온(受蘊)의 감정은, 그때그때 인연이 생함에 의해 잠시 나타났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비근[코]으로 나쁜 냄새를 맡고 나서도 잠시 후, 혹은 다른 장소로 이동함으로써 다시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의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생각이 들다가도 과거의 좋지 않았던 일을 회상하며 순간 기분이 나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수온의 세 가지 감정도, 색온(色蘊)의 그것과 같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순간순간 변해 가는 것들입니다.

 이와 같이, 수온의 감정이 무상한 것임을, 그리고, 그 감정에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아 거짓임을 안다면, 좋고 나쁜 감정에 얽매여 괴로워하는 우(愚)를 범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그 일에 마음을 꽁꽁 묶어 두고 괴로워하며,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한없이 들뜬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이 두 가지 감정 모두가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알아 거기에 얽매이거나 회피하는 두 가지 모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수행자의 바른 행이라 하겠습니다. 기분 나쁜 마음과 좋은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그 경계에 처했을 때, ‘이 감정은 실체가 아니다’라고 관(觀)함으로써 어느 정도 자유로와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온 또한 항상하지 않는 무상한 것입니다.


(3)상온(想蘊)

 상은 개념, 또는 표상(表象) 작용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대상에 대하여 식별하고, 그 대상들에 이름을 부여하는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당의 부처님을 뵙고, ‘아! 저 분은 부처님이시구나!’ 하고 개념을 만드는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것에 대하여 상을 짓는 것을 말합니다. 무언가를 보면, 우리는 이전에 우리가 이름지어 놓은 것을 되살리어 기억 속에 개념지어 놓은 것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예컨대, 머리를 깎고, 회색 먹물 옷을 입은 분은 스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스님’이라고 이름짓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은 고정 불변한 것일까요? 우리들은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에 빠져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없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 일체 대상에 대한 표상, 이름들은 우리가 그렇게 정해놓은 것이지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한글을 만들 때, 하늘, 나무, 스님, 꽃, 집, 절, 아버지, 자식 등의 개념을 대상에 접목시켜 이름 붙인 것 뿐이란 말입니다.

 이렇듯 상을 짓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항상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자신의 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4)행온(行蘊)

 행이란 ‘형성하는 힘’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히 인간의 의지작용이나 욕구 등을 가르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작용, 행위로 인해 업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로, 행은 수, 상, 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을 총괄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기억, 상상, 추리 등의 정신작용을 말합니다.

 우리들은 몸으로, 입으로 행동하기에 앞서 정신적인 의지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온으로 인하여 우리들은 선한 행위, 악한 행위 - 여기에서 선하다, 악하다는 판단은 상온에 해당한다 -를 하며, 그러한 선, 악이라는 판단에 따라 윤리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업이 되는 것인데, 이렇게 업을 짓게 하는 것이 바로 행온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작용은 우리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상에 기초한 선악이라는 개념작용 등에 의지하여 생기게 마련입니다.

십이연기에서는 무명에 의해 행이 생긴다고 했는데, 상온에 대한 무명, 다시 말해 ‘항상한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행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온 또한 무상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기반인 상온이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5)식온(識蘊)

 식은 일반적으로 분별, 인식 및 그 작용을 말합니다. 그러나 직접 대상을 판단하고 인식하는 작용을 하는 것은 상온의 작용이고, 식온은 다만 대상을 상이 생겨나기 전(前) 단계까지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의(注意) 작용정도라 하면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해, 눈앞에 책 한 권이 있을 때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난 것을 인식하는 작용을 말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이상에서 이야기 했던 각각의 다섯 가지 온에 대하여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컨대, 입안에 사탕이 하나 들어왔다고 할 때 무언가가 들어왔음을 아는 것이 바로 ‘식온’이며, 전의 기억, 사탕이라는 것에 대한 이전의 표상작용에 의해, ‘아하! 사탕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 ‘상온’이고, 달고 맛있다는, 다시 말해, 좋은 느낌이 바로 ‘수온’의 작용이고, 맛있으므로 빨아먹는 행위, 그리고 더 먹고 싶어서 다른 사탕을 찾는 행위, 다른 사탕을 찾아 먹는 행위 등이 바로 ‘행온’의 작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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