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복지무비분
복과 지혜를 비교할 수 없다


福智無比分 第二十四
須菩提 若三千大千世界中 所有諸須彌山王 如是等七寶聚 有人持用布施 若人 以此般若波羅蜜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他人說 於前福德 百分 不及一 百千萬億分 乃至算數譬喩 所不能及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서 제일 큰 산인 수미산왕만한 칠보들을 가지고 널리 보시한다 하더라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이나 이 경의 네 글귀로 된 한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에 비하여 앞의 복덕은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의 일 또는 그 어떤 산술적 비교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복지무비란 복과 지혜를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복과 지혜는 함께 닦아가야 할 중요한 수행의 요소지만 세속적인 복을 짓는 일을 출세간의 지혜를 닦는 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의미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서 제일 큰 산인 수미산왕만한 칠보들을 가지고 널리 보시한다 하더라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이나 이 경의 네 글귀로 된 한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에 비하여 앞의 복덕은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의 일 또는 그 어떤 산술적 비교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네 글귀로 된 한 게송이란 금강경의 사구게를 말할 수도 있겠고 나아가 부처님 진리 말씀 가운데 진실로 어느 한 구절 만이라도 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것이 다 다른 듯 보이고, 경전도 수없이 많으며, 교리도 수없이 많고, 수행법도 복잡 다단하게 느껴지며, 스님들의 설법을 듣고 수많은 절에 다녀 보더라도 처음에는 다 다른 얘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어렵고 복잡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다 보니 불교를 배우려면 공부할 것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방편이 많은 것이지 그 근본은 복잡하지가 않다. 그 근본은 하나다. 그래서 불교 공부를 하다보면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어렵고 복잡해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정리도 안 되고 하다가 어느 순간 그 근본을 비춰보게 되면 일순간 그 모든 복잡하던 것들이 하나로 정리가 되고 귀일이 된다. 그 본질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구게라는 것의 상징적인 의미도 바로 그 근본, 본질을 꿰뚫고 있는 부처님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사구게, 즉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이 담긴 사구게를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 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사구게를 받아서 그 말만을 읽고 외우고 남에게 전달해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이해도 없이 깨달음도 없이 공허한 말만 골백번을 외우면서 남에게 전달해 준다면 그것이 어찌 큰 공덕이 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사구게를 받아 지닌다는 뜻은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사구게의 진리를 온전히 내 깊은 정신 안에서 깨달아 환히 체득이 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야 단순히 받는 것이 아닌 받아 내 존재 안에 지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온 존재로써 받아 지녀 깨달아 알고 입으로는 늘 읽고 외우며 남에게 그 깊은 의미를 온전히 전달해 줄 수 있다면 그 공덕이야말로 온 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공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내 존재 안에서 깊은 깨달음으로 받아 지닐 수 있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 온전히 전해 줄 수 있다. 내 스스로 사구게의 깊은 이해와 깨달음이 없다면 어찌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수 있겠는가. 이렇듯 내 스스로 깊이 깨닫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사구게의 본질적인 진리를 깨닫게 해 줄 수 있다면 이 공덕이야말로 한량 없이 크다. 크고 작은 분별을 넘어서서 대 평등으로 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삼천대천세계에서 가장 큰 산인 산중의 왕, 수미산왕 만큼 큰 칠보를 가지고 널리 보시한들, 그런 물질적인 보시가 어찌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사구게 법의 보시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 세계 1등 가는 기업 회장이 수천억의 물질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물질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시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이 얼마나 큰 보시이겠는가. 그로인해 수많은 사람들은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며, 물질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큰 공덕이란 말인가. 그러한 보시의 공덕으로 그 사람은 앞으로 있을 수많은 윤회의 기간 동안 끊임없이 부유하게 태어날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과보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유위의 공덕은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물질적으로 부유하면 그만큼 가난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삶의 의미들을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면 그만큼 스스로 우쭐해지거나 교만해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계속해서 대 그룹의 회장으로 윤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고통을 모두 소멸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많은 부자들을 보라. 그들이 돈이 많고 가진 것이 많을 지언정 가진 물질의 양만큼 마음도 풍요로운가. 오히려 물질이 많아지면 그 물질에 휘둘리는 일이 많아지고 되려 소유당하는 측면이 많아진다. 그 재산을 계속 유지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 재산에 이끌리면서 일평생을 재산을 지키는데 에너지를 써야 할 것인가. 가까운 우리의 재벌들을 보더라도 그들의 삶이 행복과 평화와 여유와 고요함이라는 본질적인 삶의 미덕과 그리 가까워 보이지 않는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수행을 한다거나, 기도를 한다거나, 홀로 고요한 시간을 가진다거나,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다거나, 집착과 욕망을 지켜보고 비운다거나 하는 그런 본질적인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을 것이다. 그 시간을 가진 재산을 지키는데 다 소비해야 할 지 모른다.

설령 백 번 양보 해 그렇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스스로 윤리와 정신을 잘 지켜나간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나고 죽고 병드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부자라도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니 어떠한가. 물질적인 부유함, 물질적인 보시의 과보는 이렇듯 유위의 복에 불과한 것이다. 물질적인 보시의 공덕이 우리를 생사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한다. 참다운 내면의 깨어있는 정신을 세워주지는 못한다. 물질적인 보시의 과보는 물질적인 풍요일 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앞서 말했듯이 물질적인 과보는 오히려 우리에게 정신의 풍요를 앗아가게 하는 빌미를 제공할지언정 물질적인 풍요가 정신적인 풍요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어떠한가. 아무리 칠보로써 삼천대천세계의 가장 큰 산인 수미산왕만큼을 보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깨달음으로 이끌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혜가 구족되어 있는 사구게를 온전히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연설해 주는 그 공덕은 나와 남을 깨달음으로 이끌고, 완전한 내적인 평화로 이끌어 줄 수 있다. 그러한 사구게의 깨달음은 물질적인 풍요보다도 더 큰 정신적인 풍요를 가져다 준다. 사구게의 깨달음과 정신적인 풍요는 곧 내 것과 네 것이라는 분별을 없애주기 때문에 ‘내 것’이 많아지는 물질적인 풍요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 삼천대천세계가 전부 나와 둘이 아니요, 전부 내 것일 수 있는 무한한 절대 풍요를 가져다 준다. 그 사람에게 물질적인 많고 적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고 죽는 것이며, 내 것을 늘리는 것이며, 세속의 그 모든 욕망과 집착 그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니 어찌 물질적인 보시를 사구게를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연설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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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일체동관분
일체를 하나로 보라


一切同觀分 第十八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肉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天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恒河 所有沙數 佛世界 如是 寧爲多不 甚多 世尊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肉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天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慧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法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佛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불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에 대해 여래가 말한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항하의 모래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하나의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고, 그 모든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부처님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를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체동관(一切同觀)이란 삼라만상 일체 모든 것을 둘로 나누지 않고 한성품으로 관찰하여 본다는 뜻이다. 그렇게 차별하여 나누지 않고 한성품으로, 한바탕으로 보는 눈이 바로 부처님의 오안(五眼)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오안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을, 또 중생들의 마음을 차별하여 나누어 보지 않고 한바탕, 한생명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오안으로 일체를 동관하여 알 수 있는 이유는, 항하의 모래알 수만큼의 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며, 즉 그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라는 삼세의 어떤 마음도 고정된 실체가 없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처님은 오안의 눈으로 일체를 동관함으로써 모든 중생의 마음을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肉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육안이 있습니다.”


육안이란 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눈을 말한다. 육신의 눈으로는 과거나 미래의 것도 보지 못하고, 공간적으로 다른 장소의 것 또한 보지 못하며, 눈을 가리기만 해도 보지 못한다. 육신의 눈으로는 다만 빛의 도움을 통해 내 눈 앞 사물의 모양과 색깔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들 평범한 중생이 가지고 있는 눈은 오안 가운데 바로 첫 번째 눈인 이 육안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한다. 여기에서 모든 갈등과 시비와 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생겨나곤 한다. 그러나 여래에게는 이 육안 뿐 아니라 천안, 혜안, 법안, 불안 등의 또 다른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여기에서는 오안 가운데 첫 번째인 육안을 모든 중생들처럼 부처님 또한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天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천안이 있습니다.”


두 번째 눈, 천안에서부터는 평범한 인간계의 사람이나 축생들이 가지지 않고 있는 눈이다. 천안은 말 그대로 하늘의 눈, 천상세계 신들의 눈으로 인간의 육안을 넘어 시공을 초월하는 눈의 기능이 있다. 천상 신들은 육신이 없기 때문에 육신에 걸리지 않는다. 육신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막힘이 없다. 그러니 천안이란 공간에 걸림이 없는 눈이며, 이 곳에서 어느 곳이든 볼 수 있는 눈을 말한다. 또한 천상 신들은 그 종류에 따라 인간계의 몇 백년이 그 하늘의 하루인 경우가 있는 것 처럼 시간적으로도 인간계에서와 같은 틀에 갇혀 있지 않다. 그렇기에 천안은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어 과거와 미래에 있을 생사의 모양을 미리 알 수 있는 눈이기도 하다.

[지도론]에서는 ‘천안으로 보면 땅에서부터 하지(下地)의 육도와 중생 제물(諸物)을 본다. 가까운 것이나 먼 것이나 큰 것이나 작은 것 등 모든 사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이 천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수행(修)에 따라 얻어지는 것으로 인간계에 태어나 선정을 닦고 수행을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천안이 있고, 다른 하나는 과보(報)에 따라 얻어지는 것으로 색계의 하늘에 태어나 스스로 천안을 얻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慧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法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법안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혜안으로 말 그대로 지혜의 눈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지혜’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혜안은 지혜의 눈이고, 법안은 법의 눈이며, 불안은 부처님의 눈이라고 한다면 간단하게 끝나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도무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일체 모든 존재의 본바탕에 있는 본질, 불성, 참성품을 깨달아 아는 지혜로, 삼독심 등 일체 모든 번뇌가 사라져 근본불교에서 말했던 무상, 무아, 고, 중도, 연기의 이치를 밝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 눈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같은 근본불교 아라한들이 지니고 있는 눈이다.

성문은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음성을 듣고 수행하는 수행자를 뜻하며, 스스로 깨닫기 보다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야 비로소 수행할 수 있는 제자를 말한다. 이에 비해 연각은 독각(獨覺)이라고도 하며, 성문과는 달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를 말한다. 이 두 수행자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서 대승불교에서 강조되고 있는 보살은 자리이타의 정신으로 자신의 깨달음 보다 중생구제에 더 큰 원력을 세움으로써 원력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성불도 뒤로 미룰 정도의 굳은 서원을 가진 수행자를 말한다.

혜안은 바로 성문과 연각 수행자, 즉 자신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이들의 지혜의 눈을 말하고, 법안은 보살 수행자, 즉 자신의 깨달음 보다는 중생구제에 원력을 세운 이들의 눈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그동안 성문과 연각 등 혜안을 구족한 아라한을 소승이라고 폄하하면서 법안을 구족한 대승의 보살승을 완전한 이상적 수행자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사상이 나와 너를 나누지 않고, 생사와 열반을 나누지 않으며, 중생과 부처를 차별하여 나누지 않는 가르침을 볼 때 자신의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른 아라한을 소승이라고 폄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아라한의 입장에서는 나의 깨달음이 곧 온 우주 법계의 깨달음과 둘이 아니다. 나라는 한 생명은 곧 온 우주 법계의 전체 생명과 둘이 아니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며[一卽一切多卽一], 한 티끌 속에서도 시방세계를 담을 수 있다[一微塵中含十方]고 한 법성게(法性偈)의 게송을 생각해 보라. 한 사람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한 사람의 소승이 자신만의 깨달음을 위해 수행한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 법계의 깨달음이며, 전체 생명이 함께 깨달은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혜안을 구족한 아라한은 자신의 깨달음을 통해 모든 생명의 모든 중생의 깨달음을 실현해 보인 사람이다. 아라한의 지혜인 혜안을 통해 일체 모든 생명과 존재를 깨닫게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육조스님도 금강경 해설에서 ‘반야바라밀의 진리가 능히 삼세의 일체법을 낸다고 여기는 것을 혜안이라 한다’고 했다. 즉 하나의 진리가 삼세의 일체법을 내기 때문에 애써 삼세 일체법을 다 깨닫겠다고 나설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진리 그 하나를 깨닫게 되면 일체 모든 법을 깨닫겠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혜안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혜안이란, 지혜의 눈으로써, 진리의 세계에서 모든 중생들이 결국 하나임을 보는 것이며, 무분별의 세계에서 모든 분별상들을 하나로 회통하는 것이고, 하나가 곧 전체임을 깨닫는 것이며[一卽一切], 이치가 곧 현상계와 둘이 아니게 걸림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理事無碍法界], 공의 세계에서 색이 하나임[空不異色]을 일체동관하는 눈인 것이다.

반대로 법안을 구족한 대자대비의 보살은 일체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을 통해 자신 또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이다. 일체 모든 중생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곧 내가 깨닫지 못한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일체 모든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신도 완전한 깨달음의 향기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즉 보살은 법안을 통해 일체 모든 존재의 깨달음이 곧 나의 깨달음임을 실천하는 수행자인 것이다. 육조스님의 해설에 보면 ‘일체 불법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여기는 것을 법안이라고 한다’고 했다. 즉 일체 불법은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들 내면에 본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보살은 그 모든 중생들의 본래 갖추어진 불법을 일깨워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대자대비의 법안을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법안은, 자비의 눈으로써,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에서 곧 진리를 보는 것이며, 분별상의 세계에서 무분별의 진리를 보는 것이고, 전체가 곧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며[多卽一], 현상계와 현상계가 둘이 아니게 걸림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事事無碍法界], 색의 세계에서 공이 하나임[色不異空]을 일체동관하는 눈인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佛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불안이 있습니다.”


불안은 말 그대로 부처님의 눈이다. 부처님의 눈은 소승에도 대승에도 치우침이 없으며, 하나에도 전체에도 치우치지 않고, 부처에도 중생에도, 아라한과 보살에도, 생사에도 열반에도, 색에도 공에도 치우침이 없는 완전한 무차별, 무분별의 눈이다.
불안은 모든 중생들 개개인 속에서도 깨달음을 보며 깨달음 속에서 다시 중생들의 삶을 본다. 그렇기에 깨달아 부처가 되어도 구제할 중생이 없고, 중생을 다 구제하면서도 하나도 구제하는 바가 없다. 차별상 속에 무차별이 있고, 또한 무차별 속에 차별로써 무한히 나툴 수 있다. 전체가 곧 하나이며 하나가 다시 전체를 품고, 현상계와 진리계라는 나뉨을 뛰어넘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이 색과 다르지 않고,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임을 동관한다. 일체 모든 나뉨들을 거두어들여 동관하는 눈이 바로 일체동관의 부처님의 눈, 불안인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에 대해 여래가 말한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항하의 모래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하나의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고, 그 모든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부처님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를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항하의 모래의 비유는 법계의 세계가 한량없이 많으며, 그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그 많은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로 드신 것이다.
여래는 모든 국토의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다 안다.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그 모든 중생들과 그 많은 중생들의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부처에서 나왔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부처와 마음과 중생 이 셋은 다르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 그 나온 곳이 서로 다르지 않다. 일체를 한성품으로, 한바탕으로 관해 본다는 것, 일체동관한다는 것이 바로 그 의미다. 일체가 둘로 셋으로 천으로 만으로 갖가지로 나누어 볼 수 없으며, 돌이켜 관해보면 한성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한량없이 많고, 그 많은 사람들이 쓰고 사는 마음 또한 팔만사천을 넘을 것이지만 그 모든 마음, 그 모든 중생은 모두 한바탕에서 나왔다. 나뭇가지며 잎사귀들은 한없이 많고 다양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다 뿌리가 근원이 되어 나왔듯이, 이 세상의 모든 중생과 중생의 마음 또한 나온 곳은 하나다. 그 하나를 이름하여 부처라고도 하고, 불성, 신성, 하늘, 주인공, 일심, 본래면목, 어머니 대지, 도, 깨달음 이라고도 하는 것일 뿐, 그러나 어느 하나를 고정지어 이름을 명명해주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는 그 모든 곳은 하나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중생들의 마음이야 얼마나 많고 다양하고 복잡하며 상황따라 경계따라 인연따라 끊임없이 오고 가는가. 그러나 그 모든 마음이 저마다 실체가 있어서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인연이 오느냐에 따라 그 인연에 응하여 한 마음이 일어나고, 하나의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며, 또한 그 인연이 다함에 따라 자연스레 그 마음은 소멸되는 것이다. 육신도, 마음도, 생각도, 번뇌도, 업(業)도 모두 인연따라 잠시 왔다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는 것일 뿐이다. 그 어떤 것에도 고정된 실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듯 실체가 없이 인연따라 오고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인 것이다. 마음이라고 명명한 이름이 있을 뿐이지 마음의 실체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일체 모든 마음도, 물질도, 업도 수도 없이 내고 들이지만 그것을 내고 들이는 본 바탕은 허공과도 같은 한성품이요, 여래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여래가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모를 수 있겠는가.

바다가 물결을 모를 수는 없다. 물결은 제각기 인연따라 다 다르지만 결국 물결 또한 바다의 한 모습일 뿐인 것과 같다. 물결은 수도 없이 많은 인연을 만나 수도 없이 다양한 물결의 모습을 만들어내지만 그 물결의 바탕은 바다이지 별도로 물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별도로 물결의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물결의 성품은 바다일 뿐이다. 물결은 실체가 아니다. 다만 물결이라 이름 지었을 뿐, 그 근본은 바다다. 그러니 어찌 바다가 물결을 알지 못하겠는가.


그 까닭은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이라고 했다. 마음은 그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모두가 꿈과 같고 환영과 같으며 그림자와 같고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그 까닭은 바로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과거의 마음을 쓰면서 살아온 적이 없고, 또한 미래의 마음을 쓰면서 살아 온 적도 없다. 오직 우리가 쓸 수 있는 마음은 순간 순간이었을 뿐이다. 즉 과거라고 생각하고 미래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만이 있을 뿐이지 실제로 과거나 미래의 마음은 본 적도 직접 써본 적도 없다. 과거에 쓴 마음도 사실 그 때는 그 순간이었지 결코 그것이 과거의 마음이 아니었다. 과거나 미래라고 하는 것이 본래 없다. 다만 우리가 과거다, 미래다, 현재다 하고 이름지어 놓았을 뿐이지 우리는 늘 순간을 살고 있었을 뿐이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시간이 흐른다는 개념을 만들어 놓고는 우리 스스로 그 개념에 얽매여 과거 때문에 걸려서 괴로워하고 미래 때문에 걸려서 괴로워할 뿐인 것이지 본디 시간이란 개념 또한 텅 비어 공할 뿐이다. 오직 순간 순간 즉(卽)한 상황만이 있을 뿐 우리에게 시간은 없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그건 그냥 지어놓은 이름일 뿐이다.

과거라고 애써 이름지어 놓았지만 그 실체가 있는가. 과거를 살아 본 적이 있는가. 과거는 지나가지 않았다. 과거가 내 앞에 지나갔던 그 때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우리가 과거를 살아와 지금이라는 현재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순간 순간을 살아왔을 뿐 과거를 살아온 적은 없다. 과거는 텅 비었다. 실체가 없다. 백 번 양보 해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과거는 지나갔다. 과거의 마음은 이미 사라졌다.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마음을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는 없다. 과거라는 개념 자체가 말 그대로 개념이고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과거의 마음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말장난일 뿐이다.

미래 또한 실체가 없다. 미래라는 이름이 있을 뿐. 도대체 그 누가 미래를 본 적이 있단 말인가. 미래에 가 본 적도 미래를 살아 본 적도 없다. 백 번 양보해 아마도 언젠가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고 한들 그것은 언젠가 있을 예정일 뿐 현존인 것은 아니다. 예정이라는 것은 꿈이라는 말이고 환영이라는 말이며 물거품이란 말과 무엇이 다른가.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오지 않은 것이다. 실존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미래가 오는 순간은 이미 그것은 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내일이 있을 지 없을 지 그걸 어찌 알겠는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나를 살게 한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이었지 결코 과거도 미래도 아니었다. 그렇듯 미래라는 것이 텅 빈 환상일 뿐인데, 어디에서 미래의 마음을 찾을 것인가. 미래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이렇듯 과거도 미래도 텅 빈 비실체적 관념일 뿐, 다만 이름일 뿐이다. 그러니 과거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없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 우리는 과거나 미래를 살 수 없고 오직 순간의 현재를 살 뿐이니 현재의 마음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현재의 마음이 무엇인가. 현재의 마음은 순간 순간 인연따라 상황따라 조건따라 찰나로 생했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찰나로 멸하는 것일 뿐이다. 마음이 저 혼자 실체가 있어 만들고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현재라는 찰나 또한 마음은 없다. 본 바탕은 오직 무심(無心)이다. 본래 아무것도 없는 바탕에 인연의 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치면 인연에 따라 마음이 잠시 움직일 뿐이다.

자 이 사람의 일상을 보라. 아침에 동이 틈과 동시에 자연스레 일어나 자연스럽게 씻고 밥 먹고 출근을 한다. 그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해가 뜨니 내 눈도 떠졌고 눈이 떠지니 일어나 씻었으며 배가 출출하니 밥을 먹었을 뿐이다. 그건 애써 억지로 마음을 찍어 눌러 한 행위가 아니다. 다만 무심에서 무위(無爲)로 한 것일 뿐이다. 자연의 이치대로, 자연스럽게 함이 없이 한 것이다. 그런데 출근을 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차를 몰고 출근을 하는데 앞에 차가 끼어드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안에서 화가 치민다. 불같이 마음이 일기 시작한다. 화나는 마음으로 욕도 하고 싸움도 건다. 분한 마음을 잡을 수 없다. 출근해서도 마찬가지다. 쌓인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괴로운 마음이 생겨난다. 그로인해 하루 종일 기분이 상하고 답답하다.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진다. 그러다가 또다시 직장 상사에게 칭찬을 받고 일에 대한 포상을 받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진심은 사라지고 즐거운 마음이 생겨난다. 진심은 더 이상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리고 이제 남은 마음은 행복감이다. 그러다가 또 다른 상황을 만나면 그 상황에 따라 괴롭고 즐겁고, 외롭고 들뜨고, 수도 없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우리 마음이 이와 같다. 일상에서는 다만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일반적일 때, 별 일이 없을 때 우리 마음은 없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본래 마음이고 본성이다. 본래 우리의 최초는 텅 빈 무심이었고 무위였으며 무작(無作)이고 무주(無住)였다. 그러나 조건이 생겨날 때 자연스럽게 우리 마음도 함께 일어난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독자적이지 않고 조건적이다. 평상심은 조건과 상황을 만나면 그 상황에 따라 온갖 마음을 만들어 낸다.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조건이고 상황이다. 마음 안에서 스스로 온갖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조건과 상황에 따라 잠깐 그 상황에 맞는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다. 그렇듯 마음엔 실체가 없다. 현재에 일어나는 이 마음조차 고정된 실체가 없는 상황과 조건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 상황이 지나고 나면 그 마음도 사라지고, 다음 상황이 올 때 또 다른 마음이 생겨난다. 그렇게 조건에 따라,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디에서 현재의 마음을 찾겠는가. 그 마음은 실체가 아니다. 환영처럼, 꿈처럼, 물거품처럼 파도쳤다가 사라져갈 뿐인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마음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 과거의 마음에도 현재의 마음에도 미래의 마음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 마음이 없는데 어디에 집착할 것인가. 집착할 주체도 없고 집착의 대상도 없다. 일으킬 마음도 없고 집착할 마음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일으켜 마음에 집착한다. 그러니 우리가 괴롭다, 혹은 즐겁다, 외롭다, 슬프다 하는 그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또한 그런 마음에 스스로 얽매여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모습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과거에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지금까지 붙잡고서는 그 과거의 마음에 얽매이고 집착하며 괴로워하는 일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먼저 분별하고 계획하고 상상하고 추측하면서 거기에 울고 웃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또한 현재에 주변 상황에 따라 실체없이 찰나생 찰나멸하는 마음에 휘둘리는 것은 또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이 모두가 마음 없음, 무심의 도리를 어기는 데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 모두가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는 금강경의 이치에 어두운 데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공연히 마음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공연히 스스로 그 마음에 빠지고 집착하며, 또한 공연히 그 마음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다가 그 마음이 다하면 아쉬워하고 서글퍼하는 이런 어리석고도 공허한 일들이 우리 삶에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아니 일어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그러니 우리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금강경에서는 바로 그 점을 올바로 볼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마음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은 다 개시허망일 뿐이며, 마음 그 자체도 없다. 오직 무심만이 이 허공같은 세상에서 환히 빛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마음 없음. 무심의 이 도리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무심하게 모든 일을 다 하면서도 무심하여 걸림 없을 수 있어야 한다. 본래 없던 마음을 애써 만들어내어 그 만들어 낸 것에 한껏 휘둘리다가 수행을 통해 그 마음을 없애고 비워야 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무심이었음을 보면 된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닦을 것이 없다고 했다. 본래불이라고 했다. 깨닫고자 하거든 공연히 수행하고 마음을 닦고자 할 것이 아니라 본래 마음 없는 도리를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까닭은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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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이상적멸분
상을 떠나면 적멸이다


離相寂滅分 第十四
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 世尊 佛說 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 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 淸淨 卽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 希有功德 世尊 是 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世尊 我今 得聞 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佛告 須菩提 如是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希有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 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說 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 節節支解時 若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應生嗔恨 須菩提 又念 過去於 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若心有住 卽爲非住 是故 佛說菩薩心 不應住色布施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如來說 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須菩提 如來 是 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思語者 不異語者 須菩提 如來所得法此法 無實無虛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 入闇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 有目 日光 明照 見 種種色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 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卽爲如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無量無邊功德


그 때 수보리가 이 경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아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慧眼)으로는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경전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해지면 곧 실상(實相)을 깨달을 것이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같은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고, 중생상과 수자상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림을 당했을 적에 내게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과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에 내가 옛적에 사지를 마디마디 베이고 잘렸을 때 만일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여래가 과거에 오백 생애 동안 인욕 성인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더라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지니,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하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즉 머무름 아님이 된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응당히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한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상적멸은 말 그대로 상을 떠난 바로 그 자리가 적멸의 자리라는 뜻이다. 상을 깨는 것이 적멸 즉 실상이며 깨달음의 자리라는 말이다. 사실 부처님 가르침이 무량하며 그 방편이 무한하다고는 하지만 쉽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상을 깨라’는 한 가르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진리는 다양하게 표현되어질 수 있다.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방편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는 상을 여읨으로써 깨달음 즉 적멸에 이르는 방편의 가르침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분에서는 지금까지 13분까지 이어오며 설해 왔던 가르침에 대한 일종의 정리와도 같은 느낌이 드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상적멸분으로써 그동안의 가르침을 정리해 보자.


그 때 수보리가 이 경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아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慧眼)으로는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경전입니다.



불교 공부를 해 오던 분들 가운데는 여기 이렇게 수보리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수보리 뿐이 아니다. 누구든 어둡고 막연했던 삶에 대해 어리석었다가 밝은 진리의 가르침을 듣고 나면 환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 맑은 신심을 일으켜 이 공부를 해 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눈물을 흘려 보았을 것이다.
보통 눈물이라는 것이 슬플때나 기쁠 때 나오기도 하지만, 진리의 감동에 젖어 온몸으로 흘리는 눈물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온다. 그동안 온통 상에 물들어 세상을 왜곡해서 보고, 분별 판단 시비하여 걸러 보았다 보니 우리 마음에 온갖 때가 끼고 녹이 슬어 좀처럼 상 이전의 맑고 순수한 본래심을 보지 못한다. 그렇게 어리석게 살다가 상을 여읜 진리의 자리에 대한 법문을 듣고 난다면 누구든 상 이전의 본래 자리에서부터 감로가 샘솟듯 온몸의 감동이 눈물로써 나오곤 하는 법이다.

또한 법문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할 때, 마음이 텅 빈 상태에서 모든 상이 잠시 떨어져 나가고 고요해 지면서 온통 상으로 둘려 쌓였던 탁한 마음이 잠시 적적한 세계를 맛보게 되는 순간 우리는 온 존재로써 감동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감동은 눈물로써 표현되곤 한다.
그런 눈물은 애써 감출 것이 아니다. 법문을 들을 때건, 수행을 할 때건, 내면의 깊은 곳에서 눈물이 흘러나올 때는 오직 그 눈물에 내 온 존재를 맡겨라.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것도 없고, 눈물을 억지로 닦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몸과 마음의 떨림과 흐르는 눈물과 하나가 되어 함께 흐르라. 눈물이 스스로 멈출 때 까지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해 보려는 의도를 버리고 그저 눈물과 하나가 되어 흘리기만 하라.

그 눈물은 눈이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인연에 따라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아플 때, 혹은 너무 기쁜 일이 있을 때, 그런 온갖 종류의 인연이 내게 다가올 때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인연 따라 흘리는 눈물은 실체가 없어 공하다. 인연이 다하고 나면 눈물도 메말라 버린다. 기쁜 일이 가고 일상으로 되돌아오면 눈물은 멎는다.
그러나 진리의 눈물은 다르다. 그것은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며, 진리가 온 존재로써 일치되어지는 작은 경험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업장(業障)이 소멸되는 눈물이며, 진리의 발견에 대한 귀의(歸依)의 눈물이고, 본래의 존재로 회귀하려는 귀향(歸鄕)의 눈물이다.

그렇다고 그 눈물을 붙잡아 두려 할 것은 없다. 그냥 내버려 두라. 흐르는 눈물에 또 다른 의미를 덮씌우거나 붙잡고자 하면 그것은 또 다른 어리석은 상을 만드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한 눈물을 흘리고 난 뒤에 오는 그 선명함과 가볍고 적멸한 느낌을 애써 반복하여 경험하고자 하는 집착을 버려라. 눈물을 흘리고 난 뒤에 오는 그 맑은 느낌도 스스로 맑다느니, 업장 소멸의 느낌이라느니 하고 분별을 붙이고 나면 되려 어두워지게 될 것이다. 그저 아무런 분별도 붙이지 말고, 스스로 대견하다고 느끼지도 말고, 좋아하면서 붙잡고자 하지도 말고, 왜 이럴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품지도 말고, 다만 그냥 내버려 두고 지켜보라. 다만 그 눈물과 하나가 되어 흘리기만 하라.
또한 왜 난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것일까, 왜 난 깊은 체험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혹은 왜 난 수행 중에 온갖 경계를 한번도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등의 분별 또한 턱 놓아버릴 일이다. 어떤 사람은 수행을 조금만 해도 금새 삼매에 든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조금만 기도를 해도 금새 눈물이 흘러 나오며 깊은 감동을 느낀다는데, 나는 아무리 기도하고 수행을 하더라도 눈물은 커녕 그 어떤 감각적인 느낌도 없고, 환희심도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서로 다를 뿐이다. 수행 중에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이 좋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눈물을 탓하지 말라. 눈물을 많이 흘리고, 정진 속에서 부처님을 본다거나 아름다운 환상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놓아버릴 뿐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마장이 될 뿐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금강경 법문을 듣고 나니 수보리의 온 존재는 저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흘러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도무지 이런 법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진리를 들었다는 그 사실이 수보리의 온 존재를 강렬한 눈물로써 휘감고 있다. 어떠한가. 당신의 존재에서도 눈물이 흐르는가. 앞의 13장 동안에 정진해 왔던 금강경의 가르침이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는가.
우리는 그동안 온갖 상에 얽매여 맑은 눈이 가려져 버렸다. 본래의 텅 빈 시선에 온갖 어둡고 탁한 것들이 잔뜩 끼어 버렸다. 수보리는 그동안 얻어 들었던 가르침으로 인해 지혜의 눈이 열렸지만, 수보리의 혜안으로 보더라도 지금의 이 가르침은 희유하고 희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찌 찬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리의 가르침을 만나거든 수보리와 같이 찬탄하고 또 찬탄하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찬탄의 연주가 온 우주 법계에 까지 울려 퍼지게 하라. 찬탄하는 것 자체가 그대로 중요한 수행이 된다. 찬탄은 법계를 울리고, 또한 내 안의 본래 자성을 일깨운다. 찬탄의 소리는 그대로 진언이 되고, 다라니가 되어 안팎을 진리의 향기로 수놓을 것이다.
여기서 수보리가 지금까지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간 소승의 견해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대승의 가르침을 이제야 비로소 바로 보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이라는 의미는 이 금강경의 가르침만이 가장 수승하며 소승의 다른 가르침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오랜 기간 동안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곧게 전해져 내려오다가 부파불교를 거치면서 왜곡되고 퇴락해 가는 기존 불교의 삿된 부분을 타파하고자 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만큼 당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즉 당시의 소승불교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 즉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을 원하는 대중의 소망이 컸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점, 삿된 점을 파하고 바른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가 바로 대승이며, 대승의 기본이 되는 경전이 반야경인 것이다. 물론 이 금강경은 반야경 속의 작은 경전이며, 동시에 반야경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경전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소승불교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리 자체를 포함시켜 소승불교는 잘못된 것이고, 대승불교는 훌륭한 것이라거나 하는 분별도 어리석은 것일 뿐이다. 고려시대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많이 타락하고 퇴락해 갈 때 이러한 잘못된 불교를 바로잡고자 새로운 불교결사로써 정혜결사가 이루어 졌다고 해서 고려의 불교 가르침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인 것과 같다.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부파불교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해 오던 부파의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고 곡해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을 타파하고 바른 가르침을 세우기 위해 반야경, 금강경의 가르침이 나타나고 그로인해 부처님의 오롯한 정법이 다시금 새롭게 출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해지면 곧 실상(實相)을 깨달을 것이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설해오신 이 가르침을 얻어 듣고 그 가르침을 믿는 마음이 청정해 진다면 그 사람은 곧 실상을 깨달을 것이며, 이 사람은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이라고 했다. 이 가르침, 즉 사상을 비롯한 일체의 상을 여의는 이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맑아지면 곧 실상을 깨닫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체 상을 여의게 되면 좋다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등의 일체 모든 시비 분별을 쉬게 된다. 시비 분별이 없다면 좋다고 더 집착하여 잡으려 할 것도 없고, 싫다고 미워하여 버리려 할 것도 없게 된다. 일체의 모든 상에 대해 잡으려 하지도 않고 버리려 하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고요한 적멸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좋은 것(시비분별)을 더 붙잡아(집착) 두려고 하고, 그래서 그것을 ‘내 것’(아집)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 원인은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아상) 내가 있으니 ‘내 것’을 더 늘리고 싶고, ‘내 것’을 더 늘리려다 보니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집착이 일체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과정 때문에 사람들은 괴로움에 허덕이고 아파하는 것이다. 그러니 반대로 그 모든 근본 원인이 된 ‘나’라는 ‘아상’만 여의게 된다면 일체 모든 괴로움은 소멸되고 만다. ‘나’라는 아상이 없어지면 ‘내 것’을 늘리려는 마음을 여의게 되고, ‘내 것’을 늘리려는 마음을 여의게 되면 자연스레 ‘집착’도 사라지며, 모든 집착이 사라지면 자연스레 좋고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분별심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어느 한 가지 상도 내세울 수 없는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상’을 깨달을 것이라고 했는데, 실상을 깨닫는다는 말은 따로이 실상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깨닫는다는 뜻이 아니다. 상이 본래 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실상이다. 상을 여의게 되면 일체 그 어떤 상도 남지 않게 되는데 그것을 이름 붙여 실상이라고 방편으로 표현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라고 했다.

다시말해 실상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상이라는 이름을 방편으로 붙였을 뿐이지 실상이라는 상은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상이라는 표현에 어떤 모양을 짓고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벌써 실상에서 벗어나 있다. 실상은 그 어떤 상도 아니기에 실상일 수 있는 것이다. 흡사 이 말은, 불성은 그 어떤 상도 아니기에 불성일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 보통 사람들은 불성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느냐고 질문을 하곤 한다. 그 질문에는 ‘내가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어떤 불성이라는 모양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즉 불성이라는 상을 어떻게 만들어 둘 것인가 하는 마음으로 불성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는 말이다. 그랬을 때는 그 어떤 답도 내려줄 수 없다. 불성은 허공과 같다거나, 거울과 같다거나 억지로 방편으로 그렇게 표현은 해 줄 수 있겠지만 어찌 불성을 어떤 모양, 어떤 상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불성이란 일체의 상을 여의었을 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 없는 자리가 바로 불성이며 실상이기 때문인 것이다. 깨달음이 어떤 모양이냐고 묻는다면 도무지 대답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모양 없는 모양을 어찌 모양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어떠한가. 실상을 깨달았을 때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이 말도 방편일 뿐이다. 실상을 깨달아, 일체 모든 상을 여의었다면 공덕이라는 것도 방편의 말일 뿐이지, 별도로 공덕이 있을 리 없다. 일체의 상을 여읜 마당에 어찌 공덕이라는 또 다른 상이 붙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무량한 공덕이라거나 하지 않고, ‘희유한 공덕’이라고 했다. 공덕은 공덕인데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거나, 어떤 보상이나 대가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듯 억만장자가 되는 보상이 따른다거나, 능력과 외모, 성격 등이 출중해 진다거나 하는 그런 공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체의 상을 여의어 실상이 밝게 드러나면 그 어떤 공덕도 없다. 아니 공덕이라는 방편을 쓸 필요조차 없어진다. 그냥 여여부동하며 성성적적하여 어떤 한 법도 일으킬 것이 없어지고, 어떤 한 말 조차 붙일 틈이 없어진다. 그야말로 텅 비어 충만할 뿐이다. 그렇기에 공덕이라는 말의 표현을 빌릴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희유한 공덕’이다. 아무런 시비를 붙일 것도 없고, 아무런 비교나 판단이나 집착이나 욕망도 일어나지 않으며, 나와 너를 나눌 것도 없고, 잘살고 못산다거나, 잘나고 못났다거나, 아름답고 추하다거나, 좋고 나쁘다거나, 행복하고 불행하다거나 하는 일체의 모든 분별상들을 다 비워버렸기 때문에 둘 중 어떤 한 가지 좋은 쪽을 택해 많이 얻게 되는 그런 공덕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좋고 나쁜, 양 극단을 초월한 절대의 평화만이 있음도 없이 있을 뿐인 것이다. 좋다거나, 잘났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행복하다거나 하는 그런 상대를 가진 좋은 쪽의 공덕이 아닌 그러한 일체 모든 양 극단을 뛰어넘은 ‘희유한 공덕’이 있다는 말이다. 즉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희유한 좋음’이 있고, 긍정 부정 양 극단을 뛰어넘는 ‘대 긍정’이 있으며, 공덕있음과 공덕 없음을 뛰어넘는 ‘희유한 공덕’이 있다는 말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같은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고, 중생상과 수자상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살아 계실 때라면 직접 부처님으로부터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 듣고 지닐 수 있겠지만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같은 경을 신해수지(信解受持)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께 진리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 중에서도 아라한이 되지 못한 자는 수도 없이 많았거늘 어찌 오는 세상 미래세에 이러한 희유한 가르침을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지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해수지하는 것도 희유할진데 미래세에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희유한 사람일 것인가.

앞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렇더라도 물론 올바로 믿어 이해하고 받아지니는 희유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만을 인연지은 것이 아니라 수 억겁동안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지으며 가르침을 듣고 공부하여 실천한 까닭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신해수지 하는 희유한 사람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사람에게 아상은 더 이상 아상이 아니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 또한 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을 여의는 이 가르침에 있어 깨달음이란 오직 ‘상을 여의는 것’이며, 부처님이라는 것은 오직 ‘상을 떠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적멸(寂滅)이란 이상(離相)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아주 중요한 이 경의 핵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한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이것이다. 오직 상을 떠나는 것, 오직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이 우리에게 주는 화두요 깨우침이다.

일상 속에서 우린 얼마나 상에 얽매여 살고 있는가. ‘나’라는 것이 본래 없는데 다만 인연따라 거짓으로 만들어진 육신을 보고, 또한 눈귀코혀몸뜻을 보고 그것이 ‘나’라고 얼마나 고집하며 얽매여 살고 있는가. 상을 떠난 관점에서 보면 ‘나’와 ‘너’를 가를 것도 없으며, 인간과 자연을, 신과 인간을, 인간과 우주를 나눌 것도 없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나’라는 상을 짓고, ‘너’라는 상을 지으며, ‘우주’라는, ‘자연’이라는, ‘신’이라는 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왜 나와 너를 갈라놓고 내가 너보다 더 부자가 되려고, 내가 너보다 더 유명해지려고, 내가 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는가. 왜 부와 가난이라는 상을 만들어 놓았으며, 높고 낮음을 만들어 놓았으며, 아름답고 추함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거기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는가.

꽃은 꽃대로 완전한 진리의 나툼이며, 나무는 나무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공기는 공기대로 저마다 온전한 진리의 인연 따른 나툼임을 모르고, 그들을 갈라 놓고 등수를 매기며, 좋고 나쁜 것을 골라내야만 하는가. 사람 또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농부는 농부대로,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이는 가난한 이대로 저마다 온전한 자신으로써의 나툼이 있건만 스스로 너와 나를 비교하고 분별하며, 비교 우위와 비교 열등에 목숨 걸고 소중한 인생을 낭비해야 하는가.
그래놓고 그렇게 만들어 놓은 상에 스스로 얽매여, 좋다거니 싫다거니 개념을 붙여 놓고,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개념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렇게 만든 개념에 빠져 좋은 것은 더 못 가져서 안달하고, 싫은 것은 떼어내지 못해서 안달하는 이런 어리석은 일을 왜 계속해서 하고만 있는 것인가.

이 모든 문제는 오직 ‘상을 여의었을 때’ 끝난다. 상을 여의었을 때 실상이 드러난다. 상을 여읜 것이 바로 적멸이며,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어찌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르침은 그동안 우리가 배워왔고 익혀왔던 세상의 가르침과는 거꾸로 가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보다 많이 소유하고, 보다 많이 배워 익히며, 보다 ‘내 것’을 많이 쌓는 것에서 찾아 왔다. ‘나’라는 상을 만들어 놓고 ‘내 것’을 많이 채우는 것이야말로, ‘나’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며 삶의 의미라고 생각해 왔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나’를 드러내고자 돈을 벌고, 명예를 높이며, 학벌과 재력과 권력을 쌓아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라는 이름 석자를 더 많이 알릴 수 있고, 나는 더 유명해질 수 있으며, 나는 더 높아질 수 있고, 결국 그러한 ‘나’라는 아상이 강화될수록 우리는 더욱 더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굳게 믿어왔다. 그것이야말로 내 행복의 조건이고, 진리에 입각한 삶이라고 여겨왔다.
그렇게 아상을 높이려는 내 삶의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잠시 쉴 새도 없이 달려오기만 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만 쉬는 것 같아 도무지 쉴 수가 없다. 쉬다보면 남보다 뒤쳐질 것 같고, 남보도 더 적게 소유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남들보다 더 못난 사람이 될 것이고, 더 뒤쳐진 사람이 될 것이며, 더 불행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도 쉴 수가 없다. 나는 늘 바쁘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늘 바쁘고, 남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한 숨도 쉴 수 없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자위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렇게 내 삶의 전부를 걸고 달려왔던 이 길, 이 길만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 길. 지금 이 길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가르침과 만난 것이다. [금강경]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있다. 그 길은 참된 진리가 아니며,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데려다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는 ‘나’라는 것은 본래 없고, 다만 인연따라 생겨난 것이기에 텅 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다’ 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으며, 그렇기에 ‘내 것이다’라고 할 만한 소유도 실제는 내 소유가 아니고, ‘내가 옳다’고 여겨왔던 내 사상, 견해, 생각에 대한 것 또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목숨 걸고 가지려고 애써왔던 그 모든 소유의 일들이 모두 헛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라고 할 만 한 것이 없는 마당에 ‘내 것’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양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이 상이 아니라는 것을 올바로 볼 수 있을 때 여래를 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왔던, 내 삶의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달려왔던 이 모든 것이 다 텅 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고 까무라칠 일인가. 언뜻 들어보면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고, 놀랄만한 일이며, 겁나는 일인가. 지금 금강경의 이 가르침은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나’라는 상을 높이려고 살아왔던 나의 삶 자체를 모두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내가 집착하고 있는 일체 모든 것이 다 실체가 없으니 다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일체를 다 놓아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다 비우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당황스런 말인가. 그동안 쌓고 쌓느라 얼마나 많은 생을 소비해 왔는데, 얼마나 애써왔는데, 이제와서 다 놓아버리라니, 다 비워버리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그래서 보통 사람이라면 처음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들으면 놀라고 두려워하며 겁내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놀라고 겁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실체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제와서 다 비워버리라니, 다 허망한 것이라니 얼마나 억울하고 두려운 일인가.
그런데 이러한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희유한 사람이겠는가. 그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이니 셋 넷 다섯 부처님에게만 선근 인연을 지으며 공부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고 수행을 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한 번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는 것 만으로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

제일바라밀이란 무엇인가. 구마라집은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이라 번역했고, 현장은 최승바라밀(最勝波羅蜜)이라 번역을 했다. 일반적으로 제일바라밀은 육바라밀 가운데 첫 번째인 보시바라밀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구마라집 번역의 제일바라밀이 첫 번째 바라밀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인데, 산스크리트 원전을 직접 번역하신 각묵스님은 이것이 구마라집 번역의 한문 해석만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해석이 나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장은 최승바라밀은 다름 아닌 반야바라밀이라고 부연설명하고 있으며[如來說最勝波羅蜜多 謂般若波羅蜜多], 각묵스님은 ‘산냐를 극복하라는 이 가르침이야말로 최초기부터 세존께서 고구정녕히 설하신 것이고 그 정신을 바로 전해 받은 이 경이야말로 최고의 바라밀, 최고의 가르침, 불교의 핵심이라는 말로 이해한다’고 함으로써 제일바라밀을 ‘최고의 바라밀’ 즉 ‘최고의 가르침’, ‘불교의 핵심’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최고의 가르침은 바로 ‘상을 깨는’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야말로 반야바라밀이다. 즉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약견제상비상]이 가르침이야말로 반야바라밀, 즉 지혜로써 저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는 궁극의 깨달음을 설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니 각묵스님의 최고의 바라밀이라는 의미나 현장스님의 반야바라밀이라는 의미나 크게 다를 것은 없다고 본다.

또한 구마라집 번역의 보시바라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로 보자면 동일 선 상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금강경에서는 상을 타파하는 것이 주된 가르침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설법의 대상이 주로 보살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앞서 말한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주된 서원인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그 중에서도 하화중생의 관점에서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이롭게 하는 보시를 예를 들어 상을 타파할 것을 설하고 있다.
즉 보살이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자 원을 세워 실천하지만, 보살에게 ‘내가 중생을 교화한다’거나, ‘내가 중생에게 가르침으로써 베풀고 있다’ ‘나는 법보시를 행하고 있다’는 등의 ‘내가 보시한다’는 아상이 있다면 그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아상’의 틀을 깨고 나오지 못한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문장의 제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라 해석하거나, 최고의 바라밀이라 해석하거나, 혹 보시바라밀이라 해석하더라도 큰 금강경의 문맥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면 다시 경전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은 일체의 상을 타파한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했기 때문에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다’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즉 제일바라밀이라는 것, 혹은 최상의 바라밀, 반야바라밀, 보시바라밀이라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림을 당했을 적에 내게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과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에 내가 옛적에 사지를 마디마디 베이고 잘렸을 때 만일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여래가 과거에 오백 생애 동안 인욕 성인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더라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일체의 상을 타파한 사람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했으므로 이러한 가르침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반야바라밀에도 집착하지 않고 보시바라밀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인욕바라밀에도, 육바라밀에도, 나아가 부처님의 그 어떤 가르침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지만 그 모든 가르침을 집착함이 없이 다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또 제일바라밀에 이어 또 하나의 비유로써 인욕바라밀을 들고 계신다.

인욕(忍辱)이란 어떤 괴로움이라도 잘 참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억지로 참는다거나, 마음 속에 꾹꾹 눌러 놓고 쌓아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참된 인욕이란 참되 참는다는 생각마저도 다 소멸된 참음이다. 참는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참는 나’가 있다는 말이다. 즉 ‘나’라는 아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참음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 완전히 소멸되고, 일체의 상 또한 모두 소멸된 가운데 참는 것을 말한다.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라고 했다. 인욕바라밀이라고 말하면서 인욕바라밀을 행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인욕바라밀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인욕바라밀을 행하는 자는 ‘내가 인욕바라밀을 행한다’는 상이 없다. 그러한 수행자에게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에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계실 때, 고요한 숲 속 나무 아래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마침 그 나라의 왕인 가리왕(歌利王)이 사냥을 나와 있었다. 가리왕이 산 중에서 사냥을 하다가 잠을 자고 깨어 보니 함께 온 시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때 함께 온 시녀들은 나무 밑에 앉아 선정에 들어 있는 인욕선인을 발견하고는 그 모습이 너무나 청정하고 고귀해 보여 친견하고 예를 올리고 있던 차였다. 이 광경을 본 가리왕은 질투심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말하기를, “어찌 방자하게 남의 여색을 탐하는가” 라고 하니, 선인은 답하기를 “나는 여색을 탐하지 않습니다. 나는 인욕을 닦는 수행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얼마나 인욕을 잘 하는가 두고보자’ 싶은 마음에 인욕선인의 코를 베고, 팔을 베고, 다리를 베면서 사지를 갈기갈기 잘라 놓고는 “네놈이 이래도 화가 나거나, 원망하는 생각 없이 참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었다.

이에 인욕선인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거늘 어찌 화를 내거나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인욕 선인은 육신이 ‘나’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육신이 베이고 잘림을 당하였지만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억지로 참아 가슴 속에 화를 담아 둔 것이 아니라 청정한 인욕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것은 화를 낼 ‘나’가 없으며, 원망할 ‘나’가 없다는 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의 인욕선인으로 사지를 찢기고 베일 때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지만, 부처님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에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육신이란 다만 인연의 모임에 불과한 것이다. 밥과 반찬이 내 앞에 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먹는다는 인연에 따라 밥과 반찬이 인연따라 내가 된 것일 뿐이다. 밥과 반찬이 나로써 윤회를 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대소변으로 빠져 나가거나, 땀으로 빠져 나갔다면 그것은 다시금 인연따라 대지로 돌아간 것이다. 이와같이 일체의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은 인연따라 잠시 우리 몸으로도 변했다가, 흙으로도 변했다가, 나무로도 변하고, 꽃으로도 변하는 것일 뿐, 어느 한 모습을 가지고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과 하나가 있을 때 그것을 칼로 자르면 우리는 화를 내지 않는다. 사과는 그저 사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과를 내가 먹고 사과가 우리 몸의 살로 변했다고 치자. 그랬을 때 칼로 살을 자르면 우리는 화를 내고 원망할 것이다. 그것은 ‘내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그 몸이 ‘내 것’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다만 사과가 변한 것에 불과하다. 내가 먹은 것이 내 몸으로 잠시 변화하여 인연따라 나툰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내 몸을 칼로 그었을 때 괴롭거나 화를 내려거든, 사과를 칼로 자르거나, 나무를 칼로 자를 때도 똑같이 화를 내고 원망해야 할 것 아닌가.

어디 인욕선인 뿐이겠는가.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금강경을 번역하신 구마라집의 문하에 승조(僧肇)라는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승조스님은 워낙 명성이 뛰어나 불교계 뿐 아니라 세간에서 또한 크게 숭상받았는데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의 모함도 받게 되었고 왕이 부하로 만들려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이 승조스님을 탐낸 진나라 왕 의희는 스님을 퇴속시켜 자신의 부하로 만들려고 갖은 희유와 협박을 다 하였다.

"스님께서 속인으로 돌아와 재상이 되면 천하의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니 부디 짐의 청을 저버리지 마시오"

그러나 스님은

"재상이 다 무엇이고 천하가 다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 법에서 볼 때는 모두가 부질없는 꿈 속의 일일 뿐입니다. 나는 무상대도를 얻어 만 중생을 이익되게 할 것입니다."

라며 단번에 거절해 버렸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진왕은 승조스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승조스님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사형이 집행되기 전 칠을 동안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꿰뚫은 보장론을 저술하며 죽음을 앞에 두고도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번역하는데 몰두하였다. 곧 형틀에 올라 칼로 목을 베이는 참수형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태연하게 게송 하나를 읊었다고 하니 다음과 같다.

"사대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원래 주인이 없고(四大元無主)
다섯 가지로 모여진 이 몸은 본래부터 비었도다.(五陰本來空)
장차 흰 칼날이 내 목을 자를 것이나,(將頭臨白刀)
이는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을 뿐이다."(猶似斬春風)

마치 봄바람을 칼로 베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아! 이 금강경 가르침이야말로 감히 범인으로써는 범접하기 어려운 광대한 기상과 깨달음을 담고 있는가.

이처럼 세상의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은 다만 인연따라 끊임없이 모양을 변화시킬 뿐,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다. 내가 죽어 다음 생에 개나 돼지로 태어났다고 치자. 그러면 이번 생의 내가 나인가, 다음 생의 개나 돼지가 나인가. 또 그 다음 생에는 천상에도 태어날 것이고, 또 그 다음 생에는 지옥으로도 태어날 것이며, 어떤 생에는 여자 몸을 받았다가 또 어떤 생에는 남자 몸을 받게 될 것인데, 어느 한 때를 콕 찝어 ‘나’라고 고정지어 말 할 수 있겠는가. 어느 것도 ‘나’가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변화하기만 할 뿐.

이와같이 부처님께서는 과거 오백 생 동안 인욕 선인이 되었을 때에도, 수없는 생을 윤회하고 육신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한 번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지니,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무상정등정각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마땅히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보리심을 일으키되 일체의 상을 떠나서 일으켜야 한다. 일체의 어떤 상에도 얽매임 없이, 집착함이 없이, 머무름이 없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보리심을 일으킨다. 수많은 이들이 다 깨달음을 추구하며, 위없는 대 보리를 증득하고자 수행하고 정진하며 또 보시하고 있다. 지혜와 복덕을 얻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리심을 일으킨 수행자라 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상에 머무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깨닫고자 하는 보리심을 일으키긴 하는데, 거기에 또 ‘나’를 내세우게 된다. ‘내가 깨닫겠다’ ‘내가 보리를 이루겠다’ 하는 아상에 머물러 깨달음을 추고하곤 한다. ‘내가 깨달아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행복을 이루겠다’거나, ‘내가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구제하겠다’거나 하는 등 깨닫고자 하는 주체를 ‘나’라는 상에 꽁꽁 묶어 두곤 한다.

혹은 부처라는 상을 만들어 두고, 진리라는 모양을 만들어 두고, 내가 깨달아 가야 할 이상향을 마음 속에 설정하여 모양을 만들어 두고는 그 길로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진리는 없다. 그런 부처는 없다. 어떤 모양을 가진 진리, 어떤 상을 가진 부처는 없다. 모양을 짓고, 개념을 붙이며, 생각하는 그 속에는 결코 진리도, 부처도 있지 않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상에 머물러 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키되, 그 어떤 상에 머물러 보리심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참된 구도자의 길이 아니다. 수행자는 일체 모든 상을 다 타파할 수 있어야 한다. ‘나’라는 상도, 부처라는 상도, 진리라는 상도, 참나라거나, 불성이라거나, 주인공, 진아, 본래자성, 본래불 그 어떤 말을 가져다 붙일지라도 그것이 다 방편인 줄 알아야지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고 머물러서는 안 된다.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켜야 한다.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라고 했는데, 색성향미촉법이란 다시말해 우리 인간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 육근의 대상, 즉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을 말한다고 했다. 다시말해 ‘나’라는 주관이 접촉하여 만날 수 있는 일체의 외계 대상을 말한다. 바로 이 육근과 육경의 가르침은 근본불교에서부터 줄곧 중요한 생활 법문으로 이어져 온 중요한 가르침이기에 다시한번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 몸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게 마련이다.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고,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색이란 눈에 보이는 대상인 빛깔과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즉, 우리는 바깥 대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는지에 마음이 머물길 좋아한다. 사람을 만나더라도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고, 못난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가. 그래서 좋은 사람은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쓰고 집착하면서 싫은 사람과는 떨어지지 못해 안달한다. 그렇게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이 사람들의 일상이다. 그러나 몸이라는 것도 어떤가. 사람의 몸은 그저 똥주머니일 뿐이라는 선지식의 말씀이 있다. 그야말로 이 몸이라는 것은 온갖 오물 같은 오장 육부와 모든 것들을 집어넣어 놓은 똥주머니일 뿐이다. 좀 비위 상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몸 속의 모든 내장 기관들을 다 끄집어 내 보라. 그것이 어디 예쁘고 좋을 것이 있겠는가. 얼굴이 예쁘다는 것도 눈코입 중 어느 하나가 조금만 살짝 옆으로 옮겨 달렸더라면 못난 얼굴이 되지 않았겠는가. 이 몸뚱이라는 것, 외모라는 것도 다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몸을 받을 것일 뿐이다.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에 따라 이 똥주머니의 생김새도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몸에 집착할 것이 무엇인가. 100년도 못 살다가 대지의 지수화풍으로 돌아갈 육신이거늘 어디에 집착해 내 것이라고 단정 짓고 소유할 수 있겠는가.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낸다는 것이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낸다. 칭찬이나 비난을 들을 때 울고 웃으면서 우리는 그 소리(聲)에 많이 휘둘린다. 칭찬을 들으면 좋아하고 비난을 들으면 싫어하기 때문에, 칭찬은 더 듣고 싶어 안달이고, 비난은 듣기 싫어 안달이다. 그러나 칭찬과 비난이라는 소리 또한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다만 소리일 뿐이지 않는가. 인연따라 잠시 칭찬도 들을 수 있고 비난도 들을 수 있는 일인 것이지, 칭찬을 들었다고 내가 정말 칭찬받을만한 실체적인 무엇이 되는 것도 아니고, 비난을 들었다고 스스로가 비하되거나 못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말에, 소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말에 휘둘린다는 것이 얼마나 짐승스러운가.

또한 냄새에, 맛에, 감촉에, 생각의 대상인 법에 우리는 늘 휘둘리면서 산다. 늘 그러한 육근의 대상에 이끌려 자기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고, 그 중 좋은 데 탐심(貪心)을 내며 집착하고, 싫은 것에는 진심(嗔心)을 내며 미워하곤 한다. 그러나 좋고 나쁜 것이 본래 없다. 그 어떤 육근의 대상도, 그 어떤 색성향미촉법이란 대상도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꿈처럼 나툴 뿐이다. 우리가 집착할 그 어떤 실체도 아닌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니 치심(癡心)이 들끓어 마음을 머물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탐심, 진심, 치심이란 삼독심(三毒心) 생겨나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이 본래 텅 비어 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다. 바른 지혜만이 탐진치 삼독심을 끊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일체의 상을 타파하는 길이다. 일체의 상이 타파될 때 삼독심이 소멸하며 그 어떤 집착의 대상도 없게 된다. 그래야 자유롭다. 어디에도 걸림 없이,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고 집착할 것 없이 자유롭게 휘적휘적 삶의 길을 내딛게 될 수 있다.

여기서 이와 관련된 달마스님의 파상론의 말씀을 좀 더 들어보자.

“수행을 성취하자면 여섯가지 도적을 쫓아 버려야 하는데, 눈의 도둑을 쫓아 버리자면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들리는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며,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하고,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맛에 탐미하지 않으며, 법다운 말만을 해야 하고,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고, 마음의 도적을 조절하자면 무지를 극복하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

달마스님은 여섯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들어오는 그 각각의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이 가장 큰 도둑이며, 도적이라고 하고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향기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며, 마음으로 분별하는 등 이 모든 우리 몸의 기관들은 바깥의 대상들 즉 육경, 색성향미촉법을 끊임없이 얻어 가지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 시도 평화로울 날이 없이 대상을 탐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물질(色)을 탐하고, 귀로 좋은 말(聲) 듣기를 원하며, 코로 좋은 향기(香) 맡기를 바라고, 혀로 맛(味)에 탐닉하고, 몸으로 좋은 감촉(觸)을 탐하며, 마음으로 온갖 분별을 일으켜 생각(法)을 지어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섯의 도둑 때문에 우리는 늘 고요하지 못하고 탐내며 성내고 어리석은 것이다. 여섯 기관으로 좋은 것을 탐내다가(貪心) 얻지 못하였을 때 화(嗔心)를 낸다. 이처럼 여섯 기관의 도적에 휘둘려 여섯 대상이 텅 비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는 그 마음이 바로 어리석음(癡心)인 것이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이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항복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육근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들을 잘 관(觀)하여 들고 나는 그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할 것이다.

눈의 도둑을 몰아내려면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에 좋고 나쁜 분별을 짓고 좋으면 애착하여 붙잡으려 하고, 싫으면 증오하여 버리려고 애를 쓰니 색이라는 경계에 휘둘려 마음을 번뇌로 몰아가는 것이다.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귀로 들려오는 그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아서 칭찬이든 비난이든 그 어떤 좋고 나쁜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 칭찬에 집착하여 자꾸 듣고자 애쓰지도 말고 칭찬을 들었다고 쉬 들뜰 것도 없으며, 비난을 들었다고 번뇌에 휩싸여 내 중심을 잃고 헤매어 서도 안 된다.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 향기에 분별하면 곧장 눈귀코와 몸뜻도 함께 분별을 일으켜 온갖 집착을 만들어 낸다.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먼저, 맛에 탐미하여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야 한다. 맛에 탐함이 많으면 때를 구분하지 못하여 시도 때도 없이 먹게 되고, 그리하여 그 탐심이 뱃속을 채우게 되어 몸을 어지럽히고 그로인해 정신이 혼미해져 마음에도 헤를 입힌다. 또한 입을 잘 관하여 법다운 말만을 해야지 생각난다고 다 입 밖으로 내 놓게 되면 사람이 실없어 지고 공허해 진다. 늘 입을 잘 다스려 침묵을 지킬 일이고 말을 할 때라면 몇 번이고 관하여 법다운 말을 어렵게 꺼낼 일이다.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 자칫 감촉에 집착을 하게 되면 음탕한 행과 삿된 행으로 온갖 신업을 짓게 된다. 몸의 행동을 늘 잘 관하여 어떤 행동에도 감촉의 욕망에 휘둘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마음의 도적을 잘 조절하자면 수행을 통해 어리석은 마음을 잘 극복하고, 관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아야 한다. 늘 경계따라 올라오는 마음을 잘 관하여 그 마음이 신구의(身口意)로 어떻게 퍼져 나가는 지 잘 살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십이연기에서는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라는 지분으로 설명하고 있다. 명색(名色)이란 색성향미촉법 육경(六境)을 말하며, 육입(六入)이란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을 말한다. 육입이 명색을 촉(觸)할 때 수(受)가 일어나고 수는 곧 애(愛)를 불러오며 애는 취(取)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촉이란 육근과 육경이 접촉하는 것을 말하며, 수는 느낌, 감정을, 애는 애욕, 취는 집착을 말한다. 이렇게 어려운 용어를 써서 그렇지 쉽게 말하면,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여섯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각각 눈으로는 빛과 모양을, 귀로는 소리를, 코로는 냄새를, 혀로는 맛을, 몸으로는 감촉을, 뜻으로는 뜻의 대상인 법을 만날 때(촉) 좋고 싫은 느낌을 가져오고 그 느낌의 결과 애욕(애)을 일으키며 그것이 결국 집착(취), 취착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즉 위에서 말한 비유에서와 같이, 사람이 육근 중 안근인 눈(육근)으로 예쁜 사람(육경)을 볼 때(촉) 좋은 느낌(수)이 일어나고 연이어 애욕이 생겨나고(애) 그 결과 그 사람에게 집착(취)하려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이런 집착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인이 이와같은 육근과 육입의 접촉으로 인해 생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금강경에서는 육근을 가지고 육경을 접촉하되, 육경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육근이 있는 이상 육경을 접촉하지 않을 수 없고 접촉하게 되면 느낌과 애욕, 집착이 연이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육경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면 십이연기의 중간 단계에서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요소를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 더 쉽고 실천적인 부분으로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수, 애, 취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색성향미촉법 육경을 만날 때 색에도 머물지 않고,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겠는가.

그 해답을 부처님께서는 정념(正念)에 두셨다. 즉 잘 관찰하고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바로 깨어있는 마음으로써 잘 관찰함으로써 육경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눈이 대상을 볼 때,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코로 냄새를 맡을 때, 혀로 맛을 볼 때, 몸으로 접촉할 때, 뜻으로 헤아릴 때 항시 육근과 육경을 또 육근과 육경의 접촉을, 그 접촉에서 오는 느낌을, 그 느낌에서 오는 애욕과 집착을 마음을 모아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근본불교의 사념처(四念處)에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 네 곳을 잘 관하라고 하고 있다. 즉 육근이 머물러 있는 신념처, 즉 우리의 몸과 몸의 감각기관을 잘 관하라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로 육근과 육경이 만날 때 일어나는 수념처, 즉 느낌, 감정을 잘 관하라는 것이다. 셋째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경계를 관하며, 넷째로 법에 대한 관찰을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깨어있는 비춤으로 관하게 되었을 때, 색에도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 여섯가지 도적인 육경을 잘 경계하여 이 도적들이 우리를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이 여섯가지 기관, 육근을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성의 외곽이 튼튼하고 병사들이 두 눈 뜨고 깨어 있게 되면 함부로 도적들이 성을 뛰어 넘을 수 없지만, 병사들이 잠 자느라 깨어있지 못하게 되면 쉽사리 도적이 성을 침범하듯, 우리 몸의 여섯 기관을 잘 관하여 깨어있는 마음으로 지켜봄으로써 여섯가지 대상이 여섯 기관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도 여섯 도적을 항복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하라고 연이어 법문하고 계신다.

"만약 마음을 거두어 내면을 관찰하고 밖의 대상의 일을 밝게 깨달아 잘 관조할 수 있다면 탐진치 삼독심을 완전히 끊을 수 있고, 밖에서 들어오는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막을 수 있다. 그러면 많은 공덕과 갖가지 장엄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요. 진리에 이르는 많은 길을 낱낱이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머지 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

여섯 도적을 잘 관조함으로써 삼독심을 끊고 온갖 공덕을 성취하며 머지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수행의 관건은 바로 이 여섯 감각기관인 여섯 개의 문을 잘 관조함으로써 여섯 도둑들이 들어오는 것을 잘 막아내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하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구마라집의 해석본에는 없지만 연이어 산스크리트 원본에서는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라고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경전에서는 법을 진리 혹은 존재로 번역하고 있다. 제법무아에서의 법은 존재를, 삼법인에서 법은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 어떤 법이라도 마찬가지다. 제법무아에서 보듯이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어 무아이고 텅 비어 있는 공 그 자체이다. 그러니 일체 그 어떤 존재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비존재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을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진리에도 진리가 아닌 것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어디에든 마음이 머물 곳을 정해 두면 그것은 집착이고 상에 얽매이는 것일 뿐이다. 진리에도 머물면 안 되고, 부처에도 머물면 안 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일체 그 어떤 것에도 머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 그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간에 이 마음은 집착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집착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대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여기, 무집착에 있다. 금강경에서 상을 타파하라는 것도 상에 얽매여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때문이며, 근본불교에서 제법무아, 제행무상, 일체개고의 삼법인을 설한 것이며, 사성제를 설한 것 또한 집착을 타파토록 하기 위함이다. 선불교에서 방하착(放下着)하라는 말 또한 집착을 놓으라는 말이고, 인류의 모든 성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인 ‘마음을 비우라’는 것 또한 일체 모든 애착과 집착을 비우라는 말인 것이다. 집착이 없으면 어디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아 자유롭다. 집착이 없으면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도 사라지며, 내것과 네것을 나누는 분별도 사라진다. 집착이 없으면 베풀어도 베풀었다는 상이 생겨날 수가 없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집착 없음에 있다. 즉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이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이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즉 머무름 아님이 된다.

마음이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고 했는데, 사실 마음이 머물러 있다는 것도 사실은 머무름이 아니다. 본래적인 진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디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고, 머물 주체가 없으며, 머물 곳이 없거늘, 어디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머물러 집착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집착할만 한 것도 없다. 집착이라는 것 또한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꿈에 집착한다고 하지만 실은 꿈을 깨고 보면 집착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집착한다고 생각하지만 환상으로 환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환상은 환상일 뿐 실체가 될 수 없다. 꿈 속에서 집착하고 아파할 수는 있지만, 그래서 그 꿈 속에서는 죽을 것 같고 아파 미치겠지만 꿈을 깨고 보면 그것이 실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금새 깨달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집착했지만 사실은 집착이 아닌 것이다.

연극의 주인공은 사랑하고 아파하며 집착하고 그 연극 속에서 필요한 모든 마음을 다 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은 연극일 뿐 실제가 아닌 줄 알기 때문에, 사랑하고 아파하며 집착하지만 마음이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집착 없이 집착하고 집착 없이 사랑하며, 집착 없이 아파하고 즐거워하고 있을 뿐이다.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뿐이다.
사실은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집착 없이 살고 있다. 머물러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머무름 없이 살고 있다. 그렇기에 선지식 큰스님들께서는 깨닫고 보니 깨달을 것이 없고, 닦을 것이 없으며, 집착을 버릴 것도 없고, 무언가 끊어낼 번뇌가 없다고 하셨다. 이미 다 이룬 부처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생노병사에 얽매여 고통받고 있지만, 사실은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가 꿈 속에서 일어나는 것 처럼 환상이고 꿈이며 신기루와 같은 것임을 보신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이룰 것이 있는가. 우리는 이 자체로써 이미 다 이룬 부처이며,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입장에서 본다면, 더 이상 깨달을 것도 없고, 무언가를 구할 것도 없으며, 수행해서 진리를 깨닫겠다는 것도 다 허망한 말일 뿐이다. 깨닫고자 노력하고 애쓰는 그 자체가 벌써 어긋나 있는 것일 뿐이다. 이미 우리는 본래부터 부처였으며, 본래 다 깨달아 있던 것이다. 본래부터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고 있었으며, 집착 없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머무름 있다는 것도 사실은 머무름 아닌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응당히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보시도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 것이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 보살이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할 수 있겠는가. 보살은 보살도를 실천하며,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하화중생하지만, 스스로 보시한다는 생각이 없다. 스스로 보시를 하면서도 보시한다는데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다.
이 몸(색)에 집착하여 이 몸을 더 편히 하겠다는 생각이라거나, 이 몸이 깨달음을 이루자거나, 내가 널리 보시하여 일체 중생을 구함으로써 큰 복덕을 누리자거나 하는 그런 색에 머무는 보시를 하지 않는다. ‘나’에 집착하고, 육신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보살은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하지도 않는다. 그 어떤 일체 육근의 대상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름이 없다. 보다 좋은 소리를 듣겠다거나, 보다 좋은 향기와 맛과 감촉이나 법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름이 없다.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함으로써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보살 스스로는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보시하겠다는 상이 없다. 나와 너라는 상대 개념이 없으며, 좋고 싫다는 분별도 없고, 중생과 부처라는 차별이 없고, 생사와 열반이라는 생각 또한 텅 비어 공적할 뿐이다.
보살은 어떤 한 생각도 일지 않는다. 무심(無心)일 뿐이다. 마음으로 무언가를 행하거나, 마음으로 깨닫고자 하거나, 마음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마음 자체가 없다. 일으킬 마음도 없고, 닦을 마음도 없으며, 깨달을 마음 또한 완전히 텅 비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보살의 광대무변하고 원만한 일체 중생을 향한 무분별의 보시이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상을 타파하라고 했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 일체 모든 상이 개시허망이므로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것도 없다. 타파할 상이 없다. 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공연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가운데, 중생들이 홀연히 꿈처럼 망상을 일으켜 상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 낸 상 또한 상이 아니다. 상이라고 분별을 일으켰을 뿐이지 그것은 상이 아니다. 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스스로 그 상에 빠지고 걸리며 집착을 일으킴으로써 울고 웃고 해 왔지만 여전히 상은 생겨난 적도 없고 소멸된 적도 없다.

다만 저 혼자서 상을 만들고 깨고 그러면서 상을 만들었을 때는 중생이라고 생각하며 상을 깨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상을 깨버린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이름 짓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중생이 수행을 통해 열반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이 만들어 낸 공일 뿐이고, 망상일 뿐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중생도 마음도 부처도 이 셋은 서로 차별이 없다고 했다. 중생이 마음을 닦는 과정을 통해 부처를 이룬다는 것 자체가 공한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중생이고 무엇이 마음이며 무엇이 수행이고 무엇이 부처인가. 다 꿈 속의 일일 뿐이다. 다 신기루이고 물거품이며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중생이 따로 없고 부처가 따로 없다. 부처님께서 지금까지 설하신 상이라는 것, 중생이라는 것은 다만 방편일 뿐이다. 홀연히 상을 만들어 내, 그 상에 갖히고 집착해 있는 자신을 중생이라고 하여 얽매이니까 ‘그게 아니다. 상이 상이 아니다. 무릇 모든 상이 다 허망한 것이다. 상이 상이 아님을 볼 때 부처를 볼 것이다. 중생도 중생이 아니며 부처도 부처가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을 뿐이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고 있지만 도무지 오리무중일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상이 그렇게 많고 두터우며 지중하다. 온갖 망상과 번뇌가 하늘을 찌르며 수미산을 덮는다. 그러니 어찌 이러한 부처님 말씀에 금새 신심을 일으키고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가만히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제는 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했다가 또 상도 상이 아니라고 하시고, 중생이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가 중생도 중생이 아니며 부처도 부처가 아니라고 하시니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 쯤 되니 번뇌가 깊고, 두터운 상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은 의심이 든다. 부처님 말씀에 대한 의문이 들고 의심이 든다. 도대체 저 말이 참말이란 말인가. 실다운 말이며 여법한 말인가. 거짓말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왜 저렇게 이랬다 저랬다 하시면서 서로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온갖 부처님 말씀에 대한 의심이 들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고 말씀하신다.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여래는 참된 말만을 하는 이다. 거짓된 말을 하지 않는다. 또한 실없이 이유없이 말씀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말씀만을 하신다. 온갖 다량한 상에 얽매여 있는 복잡 다단한 중생들에게 얽매여 있는 다양한 상을 깨뜨려 주기 위해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씀만을 하실 뿐이다. 그 부처님의 모든 말씀은 여법하다. 법에 합당하며, 진리로 이끄는 말씀만을 하고 계신다. 그렇기에 거짓된 말일 수가 없다.

우리 생각에는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을 하시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을 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부처님께서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이 필요했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보살이 스스로 하화중생을 하며 중생을 구제하면서 아주 작게나마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내가 보시한다’는 상을 내고 있음을 보시고, 그에 응해 상에 머물러 보시하지 말며, 보시한다는 마음을 일으킴도 없이 보시해야 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언뜻 금강경의 설법을 보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보인다. 이 말씀을 했다가 갑자기 저 말씀을 하는 듯 보이고, 이 설법을 하시다가 왜 갑자기 다른 말씀을 하시는가 싶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설법이 응병여약의 대기설법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근기에 맞춰, 온갖 중생의 근기에 맞춰 그때 그때 필요한, 그때 그때 그 사람의 마음상태와 근기, 상황과 일어난 온갖 생각들을 비추어 보시고 그에 합당한 여법한 법문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보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일지 모르지만, 마음을 모아 금강경에 집중하여 공부해 보면 위없는 부처님의 지혜에 그만 깊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이상에서와 같이 설법을 하고 나면 이 즈음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의 극단에 치우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옭고 그르다거나, 좋고 싫다거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등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어찌 전적으로 옳거나 그를 수 있는가. 어떻게 절대적으로 좋거나 싫을 수 있단 말인가. 삶의 그 어떤 모습도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것이다. 삶에는 정답이 있지 않다. 정답일수도 오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렇게 분별하고 시비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말씀도 어느 쪽이 맞느냐 하고 둘 중 하나를 골라 그 하나를 불법이라고 못박으라고 독촉하곤 한다.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다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불생불멸이고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이라고 하면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생이면 생이고 멸이면 멸이지, 또 불생이면 불생이고 불멸이면 불멸이지 불생불멸은 무엇인가 하고 따지고 든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말 해 놓으면 어찌할 것은가. 그 사람은 그 옳다고 배운 한 쪽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옳다고 느끼며 상대는 틀리다고 몰아붙일 것이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리다고 느끼기 때문에, 상대와 다툴 일이 생기고 싸울 일이 생겨난다. 이에 따라 나 또한 괴롭다. 어느 한 쪽에 고집함은 결국 고통을 부를 뿐이다. 그런데도 왜 애써 둘을 서로 나누어 놓고 그 중 하나만을 고집하고 집착하려고 애쓰는가.

왜 불자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빠져 불교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가. 불교만이 진리고 불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틀에 빠지면 타종교 신자와 싸울 수 밖에 없고 그로인해 나는 고통당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도 부처님의 이런 열린 가르침이 불법을 수행하는 이들에게는 당연스레 받아들여지다 보니 불법으로인해 전쟁이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어떤 종교는 그 종교만이 진리라는데 치우치다보니 얼마나 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종교만이 진리라고 고집하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곧 옳고 그른 것을 가져오고 그러한 시비는 다툼과 전쟁을 불러오며, 그로인해 우리는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은 종교전쟁으로 아파했으며 고통당해야 했는가. 인류의 전쟁 가운데 상당한 부분이 종교로 인한 전쟁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내 것만이 옳고, 이것만이 진리다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참된 종교도 참된 진리도 될 수 없다. 참된 진리가 아닐 뿐 아니라 그것은 전쟁을 부르고, 살상을 부를 뿐이다. 이제 올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올바로 볼 정견의 지혜의 안목이 있어야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온전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불교는 그런 종교이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종교. 어디에도 고집하지 않는 종교. 불교 그 자체에도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종교이다. 진리에도, 법에도, 부처에도,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갈 수 있고, 그 어떤 종교와도 열린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그 어떤 진리의 모습들도 다 감싸안고 받아들일 수 있다. 혹 외도들과도 마땅히 대자비심이 바탕이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것은 불교 그 자체에도 고집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불법의 위대함이다. 불법의 치우침 없는 진리성을 대변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말하고 있다. ‘여래가 얻은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이 얼마나 광대무변한 걸림 없는 대자유의 설법인가. 도무지 이런 말은 진리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는 그동안 금강경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왔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의 분별, 시비하는 습관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도 어느 한 쪽에 기울고 말 것이다. ‘역시 금강경의 가르침은 참된 것이구나’ ‘이 진리야말로 실다운 것이구나’ 하고 감동하거나, 혹 또다른 사람은 ‘도무지 금강경은 알 수가 없구나’ ‘실다운 것이 아닌 헛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일체 모든 상도 상이 아니라 하고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하니 ‘불법은 다 허망한 것이구나’ ‘불법이란 다 헛된 것이구나’ 하고 생각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두 가지 차별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실답다고 생각하는 그 치우친 생각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헛되다고 생각하는 그 치우친 생각에서도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금강경의 가르침, 불법을 실답다고 생각하면 그 외의 다른 것은 실답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불법이 실답다는 그 견해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러한 견해는 곧 옳다는 편견을 불러오고, 그것은 집착을, 또한 그 가르침에 대한 집착은 다툼과 고통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헛되다는 치우친 생각 또한 그르다는 편견을 불러옴으로써 그릇되다는 집착과 편견으로 인해 다툼과 고통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두 가지 모두 치우친 견해일 뿐이고, 고통을 불러오게 될 뿐이다.

또한 선악(善惡)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보통 선악을 나누어 놓고 선은 좋은 것이니까 취해도 좋고 악은 나쁜 것이니까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의 설법일 뿐이다. 본질에서 본다면 선악이 서로 나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선에 치우치더라도 고통받고 악에 치우치더라도 고통받게 된다는 그 끝은 변함이 없다. 선에도 머물지 말고 악에도 머물지 않을 수 있어야 선악을 초월해 대 자유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실답다는 데 머무르지도 말 것이며, 헛되다는 데 머무르지도 말라고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을 통해 끊임없이 보살의 보시에 대한 상을 놓아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승의 보살은 거의 깨달음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이제 보살에게는 그 어떤 번뇌도 그 어떤 괴로움도 거의 다 사라졌다. 업(業)이 거의 다 소멸되었다. 그렇기에 보살은 업에 의해 태어나지 않고 원(願)에 의해 태어난다. 업생이 아닌 원생이다. 깨달음에 들기를 잠시 뒤로 미루고 일체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하화중생의 원이 모든 보살을 보살이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렇기에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보다는 중생을 교화하여 열반에 들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다. 아니 거의 깨달음의 입구까지 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필요가 없다. 언제든지 열반에 들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일체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는 대비중생의 원력만이 보살을 지금 이 중생계에 묶어 두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보살에게는 오직 하나의 서원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겠다’ ‘일체중생에게 보시하겠다’는 한 가지 서원 밖에 없다. 그러나 서원 또한 일종의 욕심이다. 그러나 그 욕심은 중생들의 욕심처럼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욕심이 아닌 일체 중생을 향한 이타의 승화된 욕심이다. 승화된 욕심이지만 여전히 중생계에 남는 이유가 되는 욕심이다. 여전히 부처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언제든지 다시금 중생계로 떨어질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다시금 시비 분별의 세계에 물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 보살들의 이타적인 서원이 이기적인 욕심으로 바뀌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 전체에 걸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에게 설법하고 있다. 어떤 법에도 머물러 보시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중생을 구제하고 중생을 위해 보시하면서도 내가 보시한다는 상을 일으키지 말라는 당부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자비심이다. 한 두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부모님께서 어린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타이르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여 이야기 하듯 부처님께서도 보살에게 똑같은 법을 계속해서 설하고 있다.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일순간 어두워질 것이다. 밝은 깨달음의 마음이 소멸하고 곧장 어두운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으로 떨어질 것이다. 보살이 일체 중생을 위해 교화하고 보시하지만 자칫 보시한다는 한 생각에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보살은 곧장 어두워질 것이다. 곧장 무명, 치심(癡心)에 물들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계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염려하고 계신다.
그러나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이 그 밝음은 유지될 것이다. 그 광명은 한없이 중생계에 빛을 놓을 것이다.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다음 세상에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운다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다. 부처님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진리 그 자체, 진리의 당체인 법신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법을 향하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법으로써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 우리 마음 안의 진리를 다 알고 다 보시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운 사람은 스스로 공덕을 성취한다는 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다. 만약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더라도 스스로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바라는 마음으로 경전을 읽고 외운다면 그 사람에게는 공덕이 없다.

달마대사가 양무제에게 그 많은 절을 짓고 불전에 보시를 했더라도 그것은 어떤 공덕도 있지 않다는 말과 같다. 스스로 절을 짓고 보시했다는 상에 얽매이고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은 어떤 공덕도 없다. 그러나 일체 모든 공덕을 놓아버릴 때 일체 모든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일체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릴 때 일체 모든 것이 다 잡힌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완전히 놓아버릴 때 깨달음은 오며, 갖고자 하는 일체 모든 소유욕을 포기할 때 일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 ‘나’라는 울타리를 완전히 비우고 놓아버릴 때, 완전한 나, 전체의 나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법상

 

금강경과 마음공부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법상 (무한,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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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여법수지분
여법하게 받아지니라.


如法受持分 第十三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佛告 須菩提 是經 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 所說法不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須菩提 諸微塵 如來說 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見 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 三十二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 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須菩提 若有善男子 善女人 以恒河沙等 身命 布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 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아 지니면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마땅히 이 이름대로 받아지니라. 그 까닭은 무엇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진리를 설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미진(微塵)을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미진을 여래는 미진이 아니라고 말하느니 이것은 이름이 미진일 뿐이다. 여래가 말하는 세계 또한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이란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목숨을 바쳐 보시했다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더 많으니라.”


  여법수지분은 이 경의 이름과 이 경을 어떻게 여법하게 수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의 이름을 밝혀주셨지만 그 이름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하시면서, 이 세상의 가장 작은 미진에서부터 이 세상에 이르기까지 또한 나아가 부처님의 거룩한 상호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은 다 집착할 것이 없고, 머무를 것이 없음을 설함으로써 다시한번 금강경의 무집착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이렇듯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가르침은 일체의 모든 상을 타파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 어떤 티끌도, 세상도, 부처도, 경전의 이름도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일체 상의 완전한 타파의 자리에 깨달음은 드러남 없이 드러난다. 여기에 이 경의 위대함이 있다. 그래서 세세생생 모래수와 같은 수의 목숨을 바쳐 보시하는 것 보다 이 가르침 하나만을 받아 지녀 설하는 것이 더욱 큰 공덕이 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아 지니면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마땅히 이 이름대로 받아지니라.


지금까지 들어 온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수보리는 한없는 감동과 환희에 휩싸였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이러한 말 없는 위대한 말을 듣고 수보리와 같은 깊은 제자가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금강경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러나 금강경을 이렇게 표현했을 때 그 표현은 위대하지 못하다. 그 표현으로써 위대한 것이 아니라 가르침이 담고 있는 그 깨우침의 깊이는 말이 가져다 주는 의미를 초월하여 위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수보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지으면 좋을지 묻고 있다. 일체의 모양을 타파하고, 상을 버리도록 이끄는 이러한 가르침, 일체의 그 어떤 이름에도 집착함이 없도록 일깨워주는 이러한 가르침에 도리어 또 다른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얼핏 생각했을 때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름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지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름을 깨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모순 속에는 무한한 ‘방편’과 ‘자비’가 녹아있다.

앞서도 누누이 언급하고 있지만 말이란 그 자체가 모순이다. 부처님 말씀도 논리적으로 따지려 들거나, 말 그 자체를 가지고 옳고 그른 진위를 가리려고 한다면 한마디 말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모순이고 잘못일 수 있다. 그렇듯 말이란 온전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말을 하지 말 것인가? 아무런 언어도 사용하지 말고 오직 침묵하기만 할 것인가. 그렇다.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이미 단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고 항상 사용되어져 오고 있다. 본연의 침묵의 가르침은 항상 법계에 가득하다. 다만 그 침묵의 소리 없는 소리를 우리가 듣지 못할 뿐, 침묵의 법문이 사라진 적은 없다. 그러한 침묵의 말 없는 가르침은 항상하고 있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듣지 못한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침묵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말을 들을 수 있고,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혹자는 그러한 침묵의 가르침이면 되었지 왜 애써 어리석은 이들을 일깨우고자 하는가 하고 묻는다. 그것은 바로 ‘자비’ 때문이다. 지혜의 본질은 자비에 있다. 아니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니다. 지혜가 충만하면 자비 또한 똑같이 충만하다. 그러니 자비를 베풀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음을 얻은 이는 당연하게 자비를 실천하게 된다. 고통 받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일깨우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나왔다.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이들을 위해 법을 설하는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말’이라는, ‘언어’라는 방편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수보리는 질문을 하고 있다. 부처님께 ‘자비’와 ‘방편’을 열어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마땅히 자비와 방편으로써 답을 하고 계신다. 이름을 타파하고 깨뜨려야 한다는 이 가르침에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계신다. 이러한 부처님의 모순은 자비에서 나온 것이다. 그 수단으로, 그 방편으로 사용된 것이 우리들 중생들이 좋아하고 이해하기 쉬워하는 ‘말’이고 ‘언어’인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자비와 방편으로 이름 붙여 준 이 경전의 제목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다. 즉, 금강과도 같은 반야바라밀을 설한 경이란 의미다. 금강과도 같이 견고하여 깨어지지 않는 ‘반야바라밀’을 설한 가르침이 바로 금강경이다. 이렇게 방편과 자비로 반야바라밀 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셨지만 어리석은 많은 중생들은 또 다시 ‘반야바라밀’이라는 경의 이름에 집착하고 얽매일지 모른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이라고 말씀해 주시고는 그것이 방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해 주고 계신다. 다시말해 반야바라밀이라는 이 이름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며 다만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반야바라밀이라고 여래가 설한 것 그것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여래는 다시 설한다. 그래서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이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에 속지 말라. 반야바라밀이라는 그 말 속에, 반야바라밀경이라는 그 경전 속에만 어떤 특정한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지 말라. 몸으로는 나쁜 짓을 하면서 입으로 반야바라밀이라고 외운다고 해서 나쁜 업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어리석은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신격화하지 말라. 반야바라밀이라는 이 단어에 어떤 특별한 기운이 있고 신비로운 힘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지혜롭지 못한, 반야바라밀 답지 못한 이해이다. 반야바라밀이란 이 이름에도 얽매이거나 집착하면 안 된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많은 금강경 수행자들이 특히 눈여겨 볼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이들은 다만 금강경 독송을 마음을 쉬기 위한 방편으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금강경이라는 이 경전 자체에, 이 글귀 자체에 그 어떤 신비로운 힘이나, 수행력 같은 것이 담겨 있기 때문에 금강경 독송만 하면 그 어떤 특별한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믿는 다면 이는 금강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금강경이기 때문에 금강경을 독송하고 공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금강경을 공부하고 독송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금강경’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이 말은 흡사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의 가르침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불교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는 말과 같다. 불교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고, 금강경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금강경은 그 어떤 진리라도, 부처라도, 고정되게 집착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로써의 기능을 잃고 만다는 완전한 무집착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옛 스님들께서는 염불을 하든, 다라니를 하든, 어떤 경전을 독송하든, 아니면 하늘천 따지를 하든, 가나다라마바사를 하든 마음만 집중하고 비우며 그 순간 깨어있을 수 있다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방편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준엄한 말씀이시다. 중요한 것은 금강경 그 자체가 아니라, 금강경을 통해 이를 수 있는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혹 스승들께서 어떤 분은 ‘아미타불 염불’이 최고라고 하시고, 또 어떤 스님은 ‘금강경 독송’이 최고라고 하시고, 또 어떤 분은 ‘간화선’만이 우리를 진리로 이끈다고 하시고, 또 다른 스승은 ‘위빠싸나’가 최고라고 했다면 그것은 모두 자비와 방편으로 행한 말씀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그 한 가지 수행법이 절대적인 것이니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고, 그것에만 집착하라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란 말이다. 다만 그 한 가지 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퇴전심이나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고 자신이 택한 그 수행법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정진해 나가라는 경책인 것이다. 그러니 금강경 그 자체에도, 반야바라밀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경문의 말씀처럼,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하면서 반야바라밀이 아님을 온전히 알게 될 때, 그 때 비로소 반야바라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이란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혜이며, 어떤 이름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혜이고, 일체의 모든 고정된 집착에서 벗어난 지혜이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기에 진정으로 반야바라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진리를 설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이렇듯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셨고, 그 가르침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이름지어주셨다. 그러나 그 이름에도 집착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나아가 여기에서는 ‘진리를 설했다’는 상마저도 버리도록 이끌고 있다.
부처님께서 진리를 설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벌써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에 갇히게 되고 만다. 부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설법은 설법이 아니다. 그렇기에 설법일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설하셨지만 단 하나의 진리도 설하신 바가 없다. 함이 없이 행한 것이다. 진리를 설하고도 그 설한 진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리석은 중생은 실천해야 할 계율이 있고, 들어야 할 설법이 있지만 깨달은 여래는 행하는 바가 그대로 계율이고, 설하는 말이 그대로 진리가 된다. 여래는 스스로 법을 설한다는 생각이 없다. 그저 함이 없이 행하고 있을 뿐이다. 인연따라 이렇게 설하기도 하고 저렇게 설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선(善)을 행하도록 이끌기도 하고, 선악을 다 놓도록 이끄시기도 한다. 때로는 공(空)을 설하고, 또 때로는 유(有)를 설할 수도 있다. 아무런 걸림 없이, 아무런 분별 없이 이렇게도 행하시고, 저렇게도 행하시지만 그것은 그대로 진리의 행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들의 입장에서는 선을 행하라는 설법을 하셨다고 생각하고, 선악을 다 놓으라는 설법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한쪽에서는 선을 애써 행하게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선을 행하는 것도 아니라고 고집하면서 선악도 다 버려야 한다고 고집을 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어리석은 분별지(分別智)다. 사람들은 그것을 설법이라고 이름 붙인다. 부처님께서 설해주신 법문이고 그것이 경전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리고 나서 이 경전이 더 좋은 경전이네, 저 경전이 더 좋은 경전이네 하고 다툰다. 이 법문이 옳으니 저 법문이 옳으니 하고 분별한다.

부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한편으로는 그 어떤 종류의 실체도 있을 수 없는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셨다. 무아와 진아(眞我), ‘나 없음’과 ‘참나’, 얼핏 보기에는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불성에 어떤 모양을 정해 두거나, 실체화 시키거나, 상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불성을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그랬을 때 불성은 없다. 그러나 불성이 불성이 아님을 바로 알았을 때 그 때 온전한 불성은 드러난다. 모든 존재는 불성이 있다. 그러나 무아이다. 고정된 실체로써의 ‘나’가 없다. ‘나’가 없는데 어찌 불성이 있는가. ‘나’가 없기 때문에 불성, 즉 ‘참나’가 있을 수 있다. ‘참나’를 ‘나’와 같은 어떤 존재로, 어떤 모양으로, 어떤 실체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참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참나에 집착하지 않았을 때 참나는 있다. 불성에 집착하지 않는 이에게 불성은 있다. 즉 불성이 불성이 아닐 수 있을 때 참된 불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불성에 집착하게 되면 더 이상 불성은 없다. 그것은 불성이 아니다. 윤회하는 주체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무아이다. 윤회하지만 무아인 것이다. 여기에 무슨 모순이 있는가. 참나와 무아 사이에 그 어떤 모순이 있는가.

이름에 집착하지 않았을 때는 그 어떤 혼란도, 그 어떤 모순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온통 모순 덩어리다. 불교의 역사가 3,000여 년을 이어져 내려오면서 아직까지 논쟁의 불씨가 되는 것이 바로 윤회와 무아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가 도대체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말에 얽매이고 있기 때문이다. 윤회는 윤회가 아니기에 윤회이고, 무아는 무아가 아니기에 무아라는 그 깊은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말에 속지 말라. 윤회가 옳은 것인가, 무아가 옳은 것인가 하고 다투지 말라. 어리석은 이에게는 다 틀리지만 충분히 지혜롭다면 그것은 아무런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어떠한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법도 법이 아니지만, 깨달은 이의 입장에서는 법 아닌 것도 그대로 법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 혹은 ‘진리’의 테두리에 가두지 말라. 어떤 말로써든 그 ‘언어’ 속에 가두지 말라. 언어 속에 가두게 되면 끊임없는 논쟁과 다툼만을 만들게 될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설한 바 없다’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실 때 까지 끊임없이 법문을 들려주셨지만 단 한 말도 설한 바가 없다. 설했지만 설한 바가 없다.
어리석은 이는 설했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설한 것이 아니다. 그저 물 흐르듯 흘렀을 뿐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 오면 초록이 물오르고, 가을에는 단풍이 지며, 겨울이 되어 호젓하게 잎을 떨굴 뿐이다. 계절은 끊임없이 설법하고 있고, 대자연은 끊임없이 설법하고 있지만 그것은 말로 표현되어질 수 없다. 그것이 말로 표현되어지면 논쟁을 낳는다. 그 무한한 설법 속에서도 설한 법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참된 설법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본래 설해 질 진리가 없다. ‘진리’라고 이름 붙일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런데 어찌 진리를 설할 수 있단 말인가. 설해질 진리도 없으며, 그 진리가 설 땅도 없다. 이 세상이라는 곳 또한 완전히 텅 빈 공화(空華)일 뿐이다. 이 세상은 텅 빈 한 송이 꽃이다. 또한 그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 세포들, 미진들, 티끌들 또한 모두가 텅 비어 있다.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고, 어떤 말로 설해질 수도 없다. 진리도 없고, 세상도 없으며, 미진도 없다. 그것이 바로 법이고 진리인 것이다. 법도 없고 진리도 없는 것이 법이고 진리이다. 그래서 다음 게송에서는 삼천대천의 세계와 미진 또한 텅 빈 공일 뿐, 그 이름이 세계이고 미진일 뿐, 그 어떤 실체도 없다는 설법이 이어지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미진(微塵)을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미진을 여래는 미진이 아니라고 말하느니 이것은 이름이 미진일 뿐이다. 여래가 말하는 세계 또한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


삼천대천세계가 텅 빈 공이고, 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티끌들, 미진들이 실체가 없는 텅 빈 공일 뿐이다. 다만 그 이름이 미진이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 그 실체는 없다. 그러니 그 세계의 진리 또한 텅 빈 것이며, 이름이 진리일 뿐인 것이다.

삼천대천세계란 이 우주를 말하는 것이고, 미진이란 그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티끌을 말하는 것이다. 즉 가장 크고 가장 작은 그 모든 존재계가 다 텅 빈 공일 뿐임을 밝히고 있다. 다만 이름이 미진이고 이름이 세계일 뿐,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고 물거품과 같은 가유(假有)에 불과할 뿐이다. 거짓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거짓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인연 따라 잠시 일어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뿐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인연으로 말미암아 소멸된다.

이 세상 속의 ‘나’라는 존재 또한 실제 내가 아니다. 나를 나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인 것이다. ‘나’라는 존재 또한 인연따라 잠시 만들어진 가유일 뿐이다. 내 몸뚱이 또한 내가 지은 인연, 즉 업에 의해 이번 생에 잠시 이렇게 인연화합되어 만들어졌을 뿐이다. 이번 생 인연이 다하면 짐승으로 다시 태어날지,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지 누가 알겠는가. 전생에 남자로 태어났다가 이번 생에 여자로 태어나고 다음 생에 짐승으로 태어났다면 어떤 한 모습을 가지고 ‘나’라고 콕 찝어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내가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사람 모습으로도 태어났다가, 짐승의 모습으로도 태어나고, 부자의 모습으로도, 가난한 모습으로도, 잘생긴 모습으로도, 못생긴 모습으로도 태어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인연의 나툼일 뿐, 고정된 실체는 없다.

이번 생에 많이 베풀고 살았다면 부자의 인연을 받아 태어날 것이고, 술을 많이 먹고 지혜의 종자를 끊어버린 사람이라면 다음 생에 어리석은 바보가 되어 태어날 것이며, 입으로 욕이나 거짓말을 많이 한 사람은 목소리가 나쁘게 태어나게 될 것 아닌가. 그렇듯 인연따라 이런 모습으로도 저런 모습으로도 나투는 것이지, 어떤 한 과정이 ‘나’의 실체인 것은 아닌 것이다. 물을 한모금 먹으면 물이 나로써 나투게 되고, 땀을 많이 흘리면 땀으로 빠져 나가게 마련이고, 그것은 또다시 수증기로도 강물로도 무엇으로도 나툴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삼라만상의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그와 같다. 그러니 무엇을 가지고 ‘미진’이라고, ‘세계’라고, ‘나’라고 이름 지을 것인가. 나아가 무엇을 가지고 ‘깨달음’이라고, ‘진리’라고, ‘여래’라고 이름 지을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다 꿈이고, 신기루일 뿐이다. 하물며 여래의 32상호를 가지고 여래라고 이름지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이란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이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최소의 단위인 미진도, 나도, 모든 것들이 다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일진데, 부처라는 것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32상이란 부처의 거룩한 모습의 특성을 말한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부처의 모습을 가지고 부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부처는 상 없음을 이름한다. 깨달음에는 그 어떤 모양도 이름도 실체도 없다. 그럴진데 어찌 부처에게 32상이란 특별한 상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육신으로써 부처를 볼 수는 없다.

부처를 어떤 특정한 모습이라거나, 특정한 성격이라거나, 특별한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고자 하지 말라. 사람들은 보통 부처님은 이럴 것이다, 큰스님은 이럴 것이다라고 하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큰스님의 성격은 자비로울 것이고, 한없이 어린아이처럼 맑을 것이며, 성품은 온화하여 말도 없을 것이고, 큰스님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늘 가부좌하면서 좌선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라는 등의 온갖 모양을 규정짓곤 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그런 모양에 있지 않고, 성격에 있지도 않다. 어떤 모양에, 어떤 외모에, 어떤 성격에 부처님을 가두지 말라. 그 어떤 틀에도 가두지 말라. 틀에 갖힌 것은 더 이상 진리일 수 없다.

부처는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으며, 사람같을 수도 있고, 짐승같을 수도 있으며,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고, 티끌일 수도 있으며, 하늘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가능성도 활짝 열어두라. 어디에도 가두려 하지 말라. 갇힌 것은 부처가 아니다. 깨달음이 아니다.

큰스님들을 보더라도 어떤 분은 한없이 자비로우시지만, 또 어떤 분은 사천왕처럼 엄하고 무섭기도 하지 않은가. 말이 많을 수도 있고, 말이 적을 수도 있으며, 걸음이 빠를 수도 있고, 걸음이 느릴 수도 있다. 어떤 특정한 모습이 수행자의 참모습일 것이라고 스스로의 틀을 만들어 두지 말라. 그렇게 되면 갇히는 건 자기 자신이다. 부처는 중생이 만들어 놓은 틀에 갇히지 않는다. 다만 갇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래서 참된 수행자란 누구를 닮고자 하는 이가 아니다. 부처를 닮고자 하거나, 큰스님을 닮고자 하거나 하는 그런 이가 아니다. 참된 수행자는 ‘자기답게’ ‘나 자신’으로써 살아가는 자다. 자기 자신답게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고,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야말로 가장 진리답게 사는 길이다. ‘누구처럼’ 살고자 하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목표치가 있고,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내가 있기 때문에, 그 간격만큼 마음은 괴롭고 무겁게 마련이다.

오직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어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갈 수 있다. ‘다른 사람처럼’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완전한 만족이 있을 때 깨어있을 수 있고 그 깨어있음이란 ‘자기답게’ 사는 방식 속에서 나온다. 그것은 어떻게 정해진 길이 아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저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하는 길이 있으면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괴로움이 동반된다. 그러나 나답게 사는 것은 아무런 노력을 필요치 않으며 매우 자유롭고 걸림이 없다.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처럼’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부처님처럼 사는 길이 될 수 있다. ‘부처님’처럼 살지 말고 ‘나’ 자신으로써 살아가면 된다.

그러니 어떠한가. 부처님의 외형적인 모습인 32상 80종호를 닮고자 애쓸 일이 무엇인가. 32상 80종호가 부처인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32상으로 모습을 바꾸고자 애쓴 분이 아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32상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 아니다. 부처는 부처라는 상도 없고, 32상이라는 상도 없다. 다만 32상이란 우리들 중생들이 부처를 바라보고 스스로 상을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32상이란 중생들의 시선이지 부처의 시선이 아니다. 부처가 32상을 갖추게 된 것은 그것이 갖춘것이 아니라 그저 아무런 걸림 없이 ‘자기답게’ 산 결과다.

부처님은 그저 자신의 길을 걸었을 뿐이다. 애써 32상을 갖추고자 애쓴 적도 없고 또한 특별한 상을 버리려고 애쓴 적도 없다. 그저 아무런 상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을 뿐이다. 부처님은 ‘누구처럼’ 살고자 전혀 애를 쓰지 않는다. 과거 연등부처님이 훌륭하셨으니 그 분처럼 살아야지 하고 생각한다거나, 스스로 부처님처럼 거룩하게 살아야겠다는 등의 생각이 없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써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상을 만들어 놓았고, 불상도 만들어 놓았으며, 32상 80종호도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참된 부처님의 모습은 법신(法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법신이란 어떤 특정한 모습이 아니다. 특정한 모습 없음을 일러 법신이라 부른다. 다시말해 법신이란 진리의 몸이란 뜻으로 특정한 모습이 없는 온 우주법계, 삼라만상의 모든 모습을 부르는 이름이다. 내 모습도 법신이며, 산과 들도, 하늘과 바람도, 짐승이며 하늘사람도 모두가 법신이다. 저마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완전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이 모두 법신이다. 그래서 온 우주 법계에 법신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단 하나, 사람들만이 ‘남들처럼’ 살고자 애쓴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나툰 법신 부처님을 버리고 다른 사람처럼 살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사람들만이 열등감과 우월감, 잘나고 못난 분별로 인해 괴로운 것이다. 나무가 꽃을 닮지 못했다고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며, 하늘이 땅을 보고 우월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다만 사람들만이 어리석은 분별심으로 비교, 판단에서 오는 괴로움을 감당하고 산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법신이 되라. 법신 부처님으로 살아야지 왜 어리석은 중생으로 살 것인가. 누구든 ‘나답게’ 사는 사람은 법신불로 사는 것이다. 법신부처님이 나로써 온전하게 나툴 수 있도록 나의 모든 것을 몽땅 부처님께 맡기고 가라. 완전하게 내맡기고, 완전하게 바치며,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법신부처님의 향기가 내 안에서 피어오른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목숨을 바쳐 보시했다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더 많으니라.”

일체는 텅 비어 있다. 세계도, 미진도, 나도, 부처도 다 이름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가 나타나고 사라짐도 다만 인연에 따를 뿐이고, 미진도 나도 부처도 모두가 인연의 가합에 의해 이루어지고 사라질 뿐이다. 그 어떤 것도 다만 이름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이름하여 진리라고 하고, 그러한 진리를 깨달은 자를 부처라 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고 죽는 것 또한 인연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지, 그것이 괴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슬프고 괴로운 마음은 어리석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다. 봄이 와 꽃이 피다가 꽃이 지고 여름이 온다고 해서 봄은 죽고 여름이 살아났다고 할 것인가? 봄이 죽어서 괴롭고 여름이 태어나서 즐겁다고 할 것인가?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면서 강물은 죽고 바다는 살았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강물이 바다로 윤회했다고 할 것인가? 그런 것들은 다 이름일 뿐이고 모양일 뿐이다. 어떻게 이름지어도 좋지만, 어떻게 이름 짓더라도 옳다고 할 수도 그르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다’라고 고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고, 머무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이 많은 수의 목숨을 나고 죽고 반복하면서 목숨으로써 보시했다고 한다면 그 복덕은 어떠한가. 내 소유의 물질로써 보시하더라도 그 복덕은 많을 것인데, 하물며 내 목숨을 바쳐 보시하였다면 그 복덕은 무량할 것이다. 앞서 말했던 칠보로써 보시하는 복덕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목숨으로써 보시한다는 것은 벌써 나고 죽는다는 분별 속에서의 보시이다. 내 삶을 바침으로써 보시한다는 것 그것은 생사법에 빠져 있는 보시이다. 그것은 참된 무위의 함이 없는 보시가 되지 못한다. 본래 생사가 둘이 아니라면 생을 사로 바꿈으로써 보시할 것이 무엇인가.

차라리 생사가 본래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것이야말로 참된 보시가 될 수 있다. 세상도 없고, 미진도 없으며, 나도 없고, 부처도 없다면, 열반도 없고, 생사도 없다. 바로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가장 온전한 보시이다. 본래 보시할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참된 무주상보시가 된다. 그 사실을 깨닫는 지혜야말로 복덕과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혜와 복덕은 하나다. 지혜가 복덕이고 복덕이 지혜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게송이 바로 이 금강경의 사구게이다. 그러한 지혜로 우리를 안내하는 게송이 바로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왜 애써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수의 목숨을 바쳐 보시해야 하는가. 그 공덕은 유위의 공덕이 될 뿐이다. 그러나 생사가 본래 없으며, 보시할 것도, 보시할 사람도, 보시 받을 사람도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량한 복덕이 될 수 있다.

생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 한 가르침이라도 올바로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수도 없이 많은 생을 윤회하였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이만 많이 먹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간을 많이 흘려보냈다는 사실이 그대로 나를 보다 더 깊이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도 없이 윤회하며 생사를 반복했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은 커녕 업만 자꾸 쌓아왔다면 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은 억겁의 세월을 허비하며 지낸 것이다. 그 사람에게 깨달음의 빛은 날로 줄어갈 것이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단 한 가르침이라도 올바로 믿고 받아지녀 남을 위해 연설해 준다면 그 공덕이 더욱 수승하다. 수도 없이 많은 생을 목숨 바쳐 보시하고, 수많은 물질로써 보시하고, 칠보로써 쌓아 보시한들 그것은 단 한 가르침을 올바로 수지하며 남을 위해 연설해 주는 공덕에는 미치지 못한다. 유위의 복은 쌓는 공부지만, 무위의 공부는 놓아가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선이라도, 아무리 많은 복이라도 쌓는 것 보다는 놓아버리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선을 쌓고자 애쓰지 말라. 복을 짓고자 애쓰지 말라. 아무리 선을 행하고 복을 지어 봐야 유위의 복이고, 유위의 업일 뿐이기에 그것은 결국 채우는 공부 밖에 되지 못한다. 아무리 선이라 할지라도 채우는 것은 근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놓아버리는 것이다. 본래 공한 줄 알고, 본래 실체가 없는 줄 알며, 본래 그 어떤 상도 상이 아닌 줄 알아 다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놓는 공부는 복덕이라는 유위를 뛰어넘는 무량복덕이 되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제 2, 선현기청분
수보리가 가르침을 청함.

善現起請分 第二
時 長老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而白佛言 希有世尊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請 當爲汝說 善男子善女人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唯然 世尊 願樂欲聞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과 함께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쪽 어깨에 가사를 수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공경스럽게 두 손 모아 합장하여 예를 올렸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희유한 일입니다.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모든 보살들이 불법을 잘 전하도록 부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처럼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며, 모든 보살들에게 잘 부촉하고 있느니라. 내가 그대를 위해서 말하노니 잘 들으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이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그대에게 설하리라. "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기쁜 마음으로 듣고자 합니다."


선현기청분은 말 그대로 선현이 가르침을 청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선현이란 수보리를 말한다. 산스크리트 원문은 ‘수부티’(Subhuti)로 나와 있는데 그 이름이 가진 의미를 보면 ‘착한 존재’ 혹은 ‘잘 나타내 보인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의미로 옮기면 ‘선현기청분’이란 제목에서처럼 ‘선현’이 되고, 본문에서처럼 원어의 발음만 따서 ‘수보리’로 옮길 수도 있다. 본문에서 구마라집은 주로 수보리로 옮기고 현장은 선현으로 옮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그 때 그 때 제자들의 간청에 의하여 설법을 하고 계신다. 많은 경전에서 제자들의 이름이 언급되는 이유도 이처럼 제자들이 부처님께 궁금한 것을 여쭙고 그에 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금강경에서는 장로 수보리가 가르침을 청하고 그에 답변하시는 모습을 부처님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난 존자가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과 함께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쪽 어깨에 가사를 수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공경스럽게 두 손 모아 합장하여 예를 올렸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수보리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해공제일이라 불린다. 해공제일이라는 말은 공의 이치를 가장 밝게 깨달았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시허망’, ‘여몽환포영’ 등 공의 이치를 열어 보이고 있는 금강경의 법문을 청하는 제자가 해공제일인 수보리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수보리는 해공제일에서도 알 수 있듯 공의 이치에 밝은 분이며, 아라한과를 증득하신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수보리의 행동 하나 하나 또한 앞의 법회인유분에서 밝힌 것처럼 온전히 깨어있는 행동이며, 이미 도착한 이의 궁극의 순간 순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부처님의 평범한 일상을 가만히 묘사함으로써 부처님의 깨어있는 행을 보여준 것처럼, 여기에서도 아난은 수보리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까지 세심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장로 수보리 또한 부처님과 똑같이 좌선에 들어있다가 공양 때가 되어 가사와 발우를 수하고 부처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 사위성으로 들어가 탁발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와 공양을 마치시고 가사와 발우를 걷으신 뒤 발을 씻고 부처님 곁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다. 부처님 곁에서 이러한 부처님의 깨어있고 온전한 모습을 지켜보던 수보리는 부처님에 대한 한없는 감사와 경이로움을 느끼면서 그 순간 한생각 떠오르는 질문이 있었다. 그리하여 수보리는 아주 천천히 마음을 관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한 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한없는 공경스러움으로 합장하여 법을 청하는 예를 올린다.
어쩌면 이 질문은 수보리 개인만의 질문이 아닐 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해공제일인 수보리는 이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제자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제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위의 모든 도반들의 마음을 읽고 그 의문을 대신해 질문하기도 한다. 자신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도반들이 궁금해 하고 있는 점을 모두를 대신해 부처님께 사뢰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또한 바른 제자는 질문이 떠오른다고 답을 구하는 마음에 미리부터 얻어 들을 답변에 마음이 먼저 가 있지 않다. ‘어떤 답을 주실까’ 하는 조급한 마음이 없다. 온전히 깨어있는 행으로써 천천히 일어나기만 하고, 가사를 입기만 하며, 합장 공경을 하고, 질문 할 뿐이다. 이 모든 순간 수보리는 철저하게 깨어있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희유한 일입니다.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모든 보살들이 불법을 잘 전하도록 부촉하십니다.

늘상 보아오던 부처님의 일상이지만, 또한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이지만 수보리는 그러한 겉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이면 깊이에 한없는 지혜와 자비로움으로 충만해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경이로움과 희유함을 느끼고 있다. 겉 모습으로써의 부처님이 아니라 온 우주 법계에 두루 미치고 있으며 그것 자체가 되어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 한없는 지혜로움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이렇게 많은 어리석은 중생들을 하나같이 잘 보살펴 주시고 자비로써 감싸주시는 모습에 희유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수많은 보살 수행자들을 잘 보살피고 이끄시며, 또한 그들에게 내 수행의 완성으로 끝내지 말고 세상의 일체 모든 어리석은 중생들을 밝은 가르침으로 안내할 수 있도록 부촉하고 계시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즉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길로 들어선 모든 수행자들을 밝은 깨달음으로 안내하시며, 또한 그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고, 감싸주시며 거두어 주고 계신다.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호념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수행자들에게 또한 당부하여 부촉하고 계신다. ‘내가 너희들을 밝은 깨달음으로 안내하겠노라. 너희들을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잘 보살피고 감싸주며 호념하겠노라. 그러나 이러한 여래의 호념 아래에서 너희들은 너희 자신의 깨달음만을 위해 수행하여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너희들처럼 보리심을 발한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니, 아직 보리심을 발하지 않은 많은 어두운 중생들을 위해, 내가 너희를 호념하듯 너희들도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하며 잘 감싸주고 호념해야 할 것이다.’ 바로 수보리는 이러한 부처님의 호념과 부촉을 보면서, 부처님의 무량수 무량광 끝없이 펼쳐지는 자비로움에 경이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수보리 또한 이러한 부처님의 보살피심과 호념하심 속에서 이렇게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었으며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처님께 수보리는 어떻게 해서든 은혜에 보답을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누구의 도움을 바라는 분도 아니고, 은혜에 보답을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을 수보리는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 보답할 수 있는 길이 도저히 없는 것인가! 그것은 단 한 가지 부처님께서 수많은 보살들을 잘 보호하시고 깨달음으로 이끄셨던 것처럼, 제자들 또한 아직 보리심을 발하지 않은 수많은 중생들을 위해 부처님의 그것과 똑같은 자비로움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호념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만이 수보리와 또 다른 수많은 보살들이 부처님의 은혜로움에 보답하는 길이다.
부처님의 마음과 제자들의 마음은 이와 같이 서로 하나가 되어 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간절히 부촉하시며, 제자들 또한 부처님의 부촉에 마땅히 흔연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그런 마음은 이미 둘이 아닌 마음으로 이심전심 통하여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모든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한없는 자비로움과 보호하심에 한없는 감사를 해야 하고, 또한 그러한 부처님의 호념에 보답하는 길은 스스로 밝게 깨닫는 길과 모든 중생들을 섭수하는 일인 것이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너희들 스스로 밝게 깨달으라는 말씀을 생략하고 제자들에게 모든 중생들에게 법을 잘 전하도록 부촉하시는데 중점을 두신 이유는 지금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는 제자들 상당수는 이미 아라한과를 증득하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미 아라한과를 증득한 이든, 아니면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든 모든 이들을 부처님은 하나같이 잘 호념하고 계시며, 또한 모두에게 부촉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의 의미는 모든 보살 수행자들을 상구보리로, 깨달음으로 잘 이끌어 주신다는 의미이며, ‘모든 보살들이 불법을 잘 전하도록 부촉하신다’는 의미는 모든 보살 수행자들에게 하화중생을 잘 실천하시도록 이끌어 준다는 의미인 것이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우리 모든 수행자들에게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부촉하고 있는 것이다. ‘내 마땅히 너희 수행자들을 호념할 것이니 너희들은 나의 호념 아래에서 열심히 닦고 정진하여 위로는 깨달음을 증득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을 섭수하여 깨달음의 길로 안내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계신 것이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처럼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며, 모든 보살들에게 잘 부촉하고 있느니라. 내가 그대를 위해서 말하노니 잘 들으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이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그대에게 설하리라. "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기쁜 마음으로 듣고자 합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녀인’이란 마땅히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수행의 길로 들어선 모든 보살들이란 의미다. 여기에서는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란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 구마라집의 번역에서는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현장의 번역에서는 ‘발취보살승’으로 번역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무상정등정각으로, 이는 ‘더 없이 높고, 비길 데 없는 바른 깨달음의 마음’이란 의미로, 한 마디로 말하면 발보리심이라 할 수 있다. 즉, ‘보리’가 깨달음을 의미하니, 발보리심은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킨’ ‘깨닫겠다는 마음을 일으킨’이다. 현장 번역의 발취보살승이 범어의 원본의 의미와 좀 더 가까운데, 이는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범어 원본과 현장, 구마라집의 번역을 보았을 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이라는 것은,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이라고 해석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좀 더 쉽게 해석해 본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더 없이 높고 비길데 없는 바른 깨달음’이니 ‘최상의 올바른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했다는 말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발심한’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남자 선녀인이란 ‘부처님께 귀의한 사람’ 혹은 ‘불자’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불법에 귀의한 남자와 여자를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선남자와 선녀인’이란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보살의 길에 들어선 수행자들로, 여기에서는 첫째, 이미 깨달음을 얻은 보살의 의미와 둘째로, 아직 깨닫지는 못하였지만 초발심이라도 보리심을 발한 모든 수행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두 가지 모든 종류의 수행자들의 나아갈 길에 대한 해답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금강경의 가르침은 두 가지 수행자 중 전자의 의미, 즉 이미 깨달음을 얻어 보살이 된 수행자들을 주로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제자들도 있으며, 수보리처럼 이미 깨달음을 얻은 제자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보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지만 보리심을 발한 모든 수행자들을 위해 질문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처럼 깨달음을 얻었지만 열반적정의 저 언덕으로 가버리지 않고 이 언덕에 남아 하화중생의 발원을 가진 보살들을 위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수행자는 모두 상구보리(저 언덕) 하화중생이라는 공통된 발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발원의 성취를 위해 현재 이 언덕에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두가지 수행자 모두에게 중요한 법문으로 다가온다.

수보리는 부처님의 호념과 부촉을 찬탄하면서 이렇게 묻고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선남자 선녀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수행해 나가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이 질문이 바로 선현기청의 내용이며, 이에 답변을 하는 부처님의 말씀이 바로 금강경의 본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수행자는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고, 수행하며, 다스려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이야 말로 보리심을 발한 모든 보살 수행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물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구마라집의 번역에서는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는지’ 다시 말해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만 나오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의 물음은 생략되고 있는데 범어 원전에서도 등장하고 현장의 번역에서도 ‘수행’으로 번역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말과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 하는 의미가 비슷하기 때문에 생략하지 않았나 싶다.
이 부분을 해석할 때 보통 항복받는다는 의미가 선뜻 와 닿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는데, 항복받는다는 의미는 ‘마음이나 생각을 잘 다스려서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 정도로 이해할 수 있으며 쉽게 말해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로 해석할 수 있다.

불교 수행을 흔히 ‘마음공부’라고 이야기를 한다. 결국 이 세상 그 무엇이라도 화엄경의 말씀처럼 마음에서 나왔으며 이 마음이 세상을 짓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또한 어리석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이 마음을 잘 다스려 본래 마음자리를 되찾는 것이 마음공부의 핵심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날뛰는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지, 또한 잘 머무르기 위해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 어떻게 이 마음을 항복받고 다스려 나가야 하는지가 불교 수행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깨달았지만 이 언덕에서 하화중생의 발원을 실천하고자 하는 보살들에게 있어 어떻게 하면 저 언덕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다스려 이 언덕에서 중생을 교화할 수 있는지, 이 언덕에서 깨달은 마음과 교화 하겠다는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무르는지, 어떻게 하면 이 언덕에서도 다시는 퇴전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고 수행해 갈 수 있는지, 저 언덕으로 향하고자 하는 마음을 어떻게 항복받고 다스려 발원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른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를 칭찬하시면서, 수보리의 말을 그대로 긍정하고 수보리의 질문에 답변을 하시고자 하면서 선현기청분은 끝을 맺게 된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