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마음...
착한마음은 무엇일까?

착함이 깃드는 마음,
우리가 행하며 살아가야 하는 마 음

그 착한마음을 알려드립니다.

착한마음으로 사시길...

善의 心所(마음이 있 는 곳)

1. 믿음(信) :
마음이 청정하며
객관 세계를 비롯한 모든 대상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고 확 신을 갖는 것.

마음이 청정해야 믿음이 생깁니다.
모든 대상을 확신한다는 것은 모든 대상과 내가
둘이 아님 을 믿는 것입니다.
모두가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임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 마음이 첫번째 으뜸가는 착한마음입니다.

2. 방 일하지 않기(不放逸) :
선법(善法)을 수행하며
항상 올바른 일에 정진하여 방일하지 않는 것.

선법이란 착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선한 일상을 실천함에는 게으름이 있어선 안됩니다.
방일이란 게으름입니다.
부지런한 마음, 게으르지 않는 마 음이
착한마음의 씨앗입니다.
다시말하면
게으름 또한 하나의 나쁜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 피해만 안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란 말입니다.
부지런함도 착한마음입니다.

3. 경안(輕安) :
몸 과 마음을 경쾌하게 하고
안정을 지속하는 것.

수행자는 늘 경쾌하고 고요합니다.
경쾌하다는 말은 늘 즐겁고 밝다는 말입니다.
수행자는 나날이 환한 마음이라야 합니다.
경쾌한 가운데 고요함과 안정감이 깃듭니다.
나날이 좋은날 이란 이런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여한 마음입니다.
여여한 마음이 착한마음입니다.

4. 사(捨) :
마 음이 침체하거나 요동하지 않고
평등하게 하며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하는 것.

친하고 친하지 않음 이 없어야 수행자입니다.
모든이를 대함에 평등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마음에 모든 분별을 쉰 마음이기 에 그렇습니다.
일체 분별을 다 놓은 마음이기에 그렇습니다.
평등심이야말로
참으로 착한마음입니다.

5. 자 기 부끄러움(懺) :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자신의 죄과가 있다면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

과거에 얽매이지 않음이
진정한 참회의 시작입니다.
이미 지난 잘못은 참회로써 턱 놓아버릴 일입니다.
한번 참회하여 놓아버리고 나면
또다시 끄집어 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온전한 '참' 의 마음입니다.
스스로 부끄러움이 있다면 그 마음이 참회입니다.
자기 부끄러움이 착한마음입니다.

6. 남 부끄러움(愧) :
이는 타인과 사회에 대하여
잘못을 반성하고 항상 부끄럽게 생각하 는 것.

타인의 잘못이 내 잘못입니다.
사회의 허물이 내 허물입니다.
대상은 그대로 내가 됩니다.
상대와 내가 둘 이 아님을 진실로 깨닫고,
상대의 잘못도 내가 참회해야 합니다.
그렇게 모두가 하나되어 참회하는 마음
그 남부끄러운줄 아 는 마음이 착한마음입니다.

7. 탐욕이 없음(無貪) :
이미 얻은 재산에 지나치게 탐착하지 말고
앞으로도 과욕을 내지 않는 것.

얻은 재산은 얻은 재산이 아닙니다.
얻었다는 마음이 없어야 무탐의 마음입니다.
인연따라 잠 시 이리로 온 것일 뿐,
잠시 갈 인연따라 갈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욕심없는 마음입니다.
과욕의 과보는 부자가 아닌 가난입 니다.
탐욕이 없어야 참으로 부자가 됩니다.
욕심없는 마음이 참으로 착한마음입니다.

8. 성냄이 없음(無瞋) :
사람을 비롯한 모든 유정(有情)들에게
자비로써 대하고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

성내는 이유는 세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래 성낼 것 없는,
꿈같은 세상, 신기루 같은 세상을 바로 본다면
성낼 것도 없 습니다.
마음 온전히 관하고 있으면
세상을 온전히 관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성낼 상황은 있을지언정
성낼 마음은 쉬게 됩니다.
잠시 성내더라도 화나는 마음의 성냄이 아닌
자비로운 성냄이 될 수 있습니다.
성내야 하니 내는 성냄 말입 니다.
화내지 않는 마음이 착한마음입니다.

9. 해치지 않음(不害) :
마음을 착하고 어질게 하며
다른 사람에게
손해와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

무외시는 참으로 아름다운 보시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고,
손해와 괴로움 을 주지 않는 일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역지사지란 말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고 볼 일 입니다.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마음
그 마음이 착한마음입니다.

10. 부지런함(勤) :
이는 善을 수호하고 과실 을 없애며
옳은 일에 두려워하지 않고 정진하며
진리 탐구에 근면하는 것.

선법에 방일힘이 없어야 하지만,
진리에 또한 방일함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닦으며
과실을 없애고
진리의 실천에 정진의 끊을 놓쳐선 안됩니 다.
적극적인 삶의 자세야말로
착한마음입니다.




어떤 법우님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함께 읽어보고 싶어 이렇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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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것을 알려면 -

류 시 화


만일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해 서 알고자 한다면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한다.

나무를 바라보면서

' 이 나무에 봄이 왔 다 '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당신이 바라보는 그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양치식물의 꼬불거리는 잎사귀와

검은 줄기가 되어야 하고,

잎사귀들 사이 작은 침묵 속으 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을 충분히 갖고

그 잎사귀들이 꺼내 보이는

평화로움을 만질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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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딴에는
끄집 어 내어 본다고
줄줄이 글을 써 내려가는데...
쓰고보면 늘상 어지럽고 정신없이 느껴집니 다.

이 절제된 글을 읽으며
어쩜 이 짧은 글에
이 쉬운 말로써
아름다움과 깊이를
한꺼번에 담아낼 수 있었는가
하 는 마음이 납니다.

"
어떤 것을 알고자 한다면
그것이 되어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 사이의 작은 침 묵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들이 꺼내보이는 평화로움을
만질 수 있어야 한다...
"

참으로
'어떤 것'과
참으로 하나될 수 있어야
그것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린 산과 하나될 수 있는 마음 을 지녔고,
들녁과 햇님과
작은 물풀과도 하나될 수 있는
넓고도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지니 고도
우린 그저 '나'만을 고집하니
그들을 조금도 느껴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참으로
어떤 것과도 하나되 기 위하여...

그것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되어 보아야 합니다.

느낌이든,
마음이 든,
어떤 대상이든...

그것과 하나되기 위하여...
온전한 동체대비를 느끼기 위하여...

*** 경주 대왕암을 내려다 보고 있는
감은사지 석탑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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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괴로워한다.
이생에서 ‘악한 짓을 했구나’ 하고 괴로워하며
내생에서 지옥에 떨어져 그 괴로움은 더욱 커진다.

18.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기뻐한다.
이생에서 ‘착한 일을 했구나’ 하고 기뻐하며
내생에서 좋은 곳으로 가고 그 기쁨은 더욱 커진다.


한 번 악행을 하고 나면 그 악행은 업습(業習)으로 자리잡는다. 업이 되어 언젠가 갚음인 보(報)를 가져오지만, 보를 가져 오기 이전에 습(習)으로 먼저 자리잡으면서 나를 따라다닌다. 한 번 악행을 하면 그것은 악한 습, 악한 습관의 흔적을 남긴다. 습관이라는 것이 한 번 할 때는 어려워도 한 번 습관이 들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그 습관대로 행동하게 되지 않는가. 악행이 바로 그렇다. 악행의 습은 또 다른 악행을 부르고 그 다음부터는 아주 쉽게 습관적으로 악행을 범하게 된다. 그 뿐 아니라 그렇게 습관들어진 악행은 이번 생을 넘어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악행이 위험한 것이다. 그냥 잠재되어 있다가 다음 생이나 그 다음 생 어느 때인가 그 갚음인 결과만 남기면 좋겠지만 이 악행은 결과를 남기기 이전에 우리 몸과 마음에 습으로 베이고 스며드는 것이다.

데바닷다의 반역사건은 부처님의 생애에서도 눈여겨 볼 아주 유명한 대목이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사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을 세 번이나 살해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악인의 전형이다. 데바닷다는 마가다국의 태자인 아자타삿투를 부추겨 아버지인 빔비사라왕의 왕위를 찬탈하게 할 뿐 아니라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이렇게 왕의 권위를 등에 업은 데바닷다는 부처님께 이제 불교의 승가를 자신에게 맡기라고 요구하기에 이르지만 부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럴 수 없다고 하신다. 이에 수치심과 복수심을 느낀 데바닷다는 부처님을 세 번 해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자객을 보내어 살해를 시도하였지만 오히려 자객은 부처님께 감화되어 부처님의 제자가 되며, 두 번째는 영취산에서 지나가는 부처님께 바위를 굴림으로써 부처님의 엄지 발가락에 상처를 입힌다. 세 번째로 코끼리에서 술을 먹여 부처님께 돌진케 하지만 달려오던 코끼리들은 부처님의 앞에 이르자 고개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게 된다.

이뿐 아니라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더욱 훌륭한 스승임을 드러내기 위해 부처님의 계율보다 훨씬 강화된 다섯 가지 계율을 제시한다. 비구는 숲에서만 생활하며, 신도의 공양 초청해 응해서도 안 되고, 쓰레기로 버려진 천으로만 가사를 만들어 입어야 하고, 나무뿌리나 무덤 사이에서만 생활할 수 있으며, 생선이나 고기는 전적으로 못 먹도록 해야 한다는 다섯 가지의 계율을 제시하였지만, 부처님은 이에 반대를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데바닷다는 자신의 강화된 계율에 찬동하는 몇몇 젊은 비구를 이끌고 떠나 새로운 교단을 만들고자 했으나 이들 또한 사리불과 목건련의 교화에 다시 승가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를 안 데바닷다는 중병에 걸려 쓰러졌고, 뒤늦게 부처님을 만나고자 부처님께로 향했으나 결국 부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길가 연못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아비지옥에 떨어져 더 큰 고통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괴로워한다. 이생에서 ‘악한 짓을 했구나’ 하고 괴로워하며 내생에서 지옥에 떨어져 그 괴로움은 더욱 커진다.”라고 설법하셨다.

이에 반해 재산가의 셋째 딸로 태어난 수마나는 부모님께 배운대로 스님들께 정성스럽게 탁발 공양을 올려 드리면서 수행에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틈나는 대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는데, 결국 수마나도 결혼도 못 한 채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러나 수마나는 죽음을 앞두고도 정신을 흩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사대 오온에 마음을 잘 집중시킴으로써 죽음 직전에도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을 지녔고, 죽은 뒤에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기뻐한다. 이생에서 ‘착한 일을 했구나’ 하고 기뻐하며 내생에서 좋은 곳으로 가고 그 기쁨은 더욱 커진다.”고 설법하셨다.

악행을 한 사람은 이번 생을 살면서 온통 악행으로 인한 업습에 이끌려 계속해서 악업을 짓게 되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평안하지 않으며,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업에 따라 고통의 지옥에 빠질 수밖에 없으나, 선행을 한 사람은 이번 생에도 즐겁고 죽음 직전에도 평화로우며 죽은 뒤에도 항상 즐거운 곳에 난다.
그래서 처음 한 번의 악행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처음 한 번의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번의 악행은 연이어 악행을 불러오지만, 초심의 선행은 연이어 계속되는 선행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에게 이익이 될 지라도 그것이 악행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행하지 말 것이며, 아무리 나에게 손해가 되고 이익이 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선행이라면 반드시 저질러 실천해야 할 것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놓아버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지혜와 복덕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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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근심한다.
그는 두 생에서 모두 근심 걱정한다.
악행은 늘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16.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기뻐한다.
그는 두 생에서 모두 기뻐한다.
선행은 늘 그를 따라다니며 평안을 준다.


악을 행하면 악의 흔적이 남고 악의 업장이 남고 악의 습관이 남는다. 악한 행위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악의 기운을 남기게 된다. 그렇기에 악을 행하게 되면 내 안에 악의 기억과 악의 습관이 남아 있으므로 그 다음에도 선보다 악을 행할 확률이 높아진다. 한 번 해 본 것은 그 다음에는 더 쉽기 때문이다. 더 쉽고 때로는 자동적으로 그렇게 튀어나온다.

똑같은 상황에서 선으로 반응을 하거나 악으로 반응을 하는 것은 내 의지이지만, 한 번 반응한 것은 고스란히 내 안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만다. 그러한 선악의 반응들이 하나 둘씩 계속 이어지게 되면 그 흔적은 습관처럼 굳어지고 만다. 습관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선의 습관은 계속해서 선을 만들어내고 악의 습관은 계속해서 악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잘난 척 하기 좋아하는 사람,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을 만났다고 치자. 그 때 우리의 반응은 둘 중 하나이기 쉽다. 첫째는 그 자랑을 받아주며 칭찬해 줄 수 있고, 둘째는 잘난 척 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 쏘아붙일 수도 있다. 전자의 반응을 보인 사람은 이제 뒷날 똑같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그 자랑을 받아주며 칭찬해주기 쉽다. 아니 그것이 더 쉽다. 몸에 한 번 기억되었고, 습으로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로 기분 나쁘게 반응한 사람은 다음에 똑같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그런 사람이 꼴보기 싫고 밉상으로 느껴지기 쉽다. 그리고 또 다시 그런 상황을 만난다면 그 때부터는 자동적으로 반응이 튀어나온다. 그러면서 선은 또 다시 수많은 선을 불러오고, 악은 또 다시 수많은 악을 불러오게 된다. 전자의 반응을 한 사람은 끊임없이 칭찬해 줄 일이 생기고, 후자의 반응을 한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꼴보기 싫은 사람이 생겨난다.

화나 성냄도 마찬가지다. 내가 시킨 일을 잘 못하는 아랫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잘 다독이면서 오히려 격려해 주고 자비롭게 가르쳐 줄 수도 있고, 화를 내며 이것 밖에 못 하느냐고 면박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반응들은 고스란히 우리 안에 흔적을 남기고 업습(業習)을 남긴다. 전자의 사람은 그 다음에도 화나는 상황에서 자비롭게 대처하는 것이 더 편해지고, 후자의 사람은 그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화를 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업습이다. 업은 이처럼 습관처럼 굳어져 선은 더 큰 선을 부르고, 악은 더 큰 악을 부른다.

그래서 선을 행한 자는 이번 생에서도 기뻐하지만 다음 생에서도 기뻐하고, 악을 행한 자는 이번 생과 다음 생에서 모두 근심 걱정에 시달린다. 선행과 악행은 언제나 그를 따라 다닐 수밖에 없다. 선행과 악행은 고스란히 내 안에 흔적을 남기고 업습을 남기기 때문이다.

선업은 선의 과보를 남기고 악업은 악의 과보를 남기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선업을 한 번 짓고 나면 그 다음에도 습관적으로 선업을 지을 확률이 높아지고, 악업을 짓고 나면 그 다음에서 악업을 짓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는데 있다. 한 번 지은 과보를 한 번 받으면 그만이지만, 업습이라는 것은 고스란히 우리 안에 습관처럼 흔적을 남기니 그것이 문제다. 그 습관은 이번 생 뿐 아니라,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선업은 이생에서 내생까지 끝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며 평안과 기쁨을 주지만, 악업은 이생에서 내생까지 끝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며 근심 걱정을 불러온다.


돼지잡이를 55년 동안 해 온 백정 춘다는 돼지를 평생동안 살생한 업을 지음은 물론, 성격도 잔인했으며 착한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그 결과 죽음에 이르러 손이 돼지발처럼 안으로 오그라들면서 죽기 전 7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겪었다고 하고, 죽은 뒤에도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반면에 담미까라라는 한 재가신자는 평소 계행(戒行)을 잘 지키고 덕이 많으며 늘 보시를 생활화하였고, 무엇보다도 수많은 비구스님들의 탁발을 위해 항상 공양 준비를 해 주었으며, 14명이나 되는 아들과 딸들 또한 부모님의 덕을 보고 배워 계행과 보시를 실천하였으며 늘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지혜로운 삶을 살았다. 이런 결과 대장장이 춘다의 죽음과 상반되게도 담미까라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는 밤낮으로 비구스님들이 찾아 와 독경해 주었고, 죽을 때도 천상의 신들이 내려와 마중해 주었고, 죽음 이후에도 도솔천에 태어났다고 한다.

이처럼 이번 생에 행한 선행과 악행은 고스란히 죽을 때까지 이어지고, 죽음 이후에도 그 결과가 다음생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의 선행이 중요한 것이고, 한 번의 악행이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그 한 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습관을 만들어내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다. 항상 깨어있으면서 내가 어떤 행을 하고 있는지를 늘 지켜보아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악업을 만들어내길 즐겨하는지, 선업을 만들어내길 즐겨하는지 잘 지켜보아야 한다. 한 번 만들어 낸 선업은 또 다른 선업의 씨앗이지만, 한 번 만들어낸 악업은 또 다른 악업을 부르기 때문이다.

화낼 상황에서, 악업을 지을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자비롭게 대해보라. 자비로운 방식으로 자비로운 말씨로 상대방을 향해 선업의 씨앗을 퍼뜨려 보라.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그래서 연습하고 습관화해 보라. 한 번, 두 번 선행과 자비가 이어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훨씬 쉬워진다. 똑같은 화날 상황에서 두 번째, 세 번째, 또 그 다음으로 갈수록 훨씬 자비롭게 대응하기가 쉬워진다. 벌써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선행으로 이생과 내생에서 계속해서 기쁨을 누릴 것인가, 악행으로 이생과 내생에서 언제까지고 근심과 걱정을 안고 갈 것인가.



Posted by 법상




[쌍계사]

나쁜 짓을 멀리하고 선행을 쌓아라.
좋을 일을 하는데 게으르면
마음은 저절로 나쁜 짓을 즐기게 된다.
혹시라도 나쁜 짓을 했다면
그것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노력하라.
악이 쌓이는 것은 괴로움을 남기게 되고,
좋은 일이 쌓이는 것은 즐거움을 남기게 될 것이다.
[소부경전]



보통 사람들은
나쁜 일 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나는 나쁜 일은 하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자위하곤 한다.

그러나 좋은 일에 게으른 것도 나쁜 일이다.
좋은 일을 하는데 게으르면
마음은 저절로 나쁜 짓을 즐기게 되기 때문이다.

나쁜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삶을 살지 말고,
좋은 일을 애써 행하는 것으로써 삶을 살아가야 한다.

선(善)은 때가 되었을 때 행하는 것이 아니다.
많이 벌고, 많이 모아 놓은 후에
그 때가서 크게 베푸는 것이 아니다.

천원이 있는 자 백원을 베풀고,
만원이 있는 자 천원을 베풀면 되는 것이지,
훗날 몇 백만원, 몇 천만원, 몇 억을 벌어
그 때가서 크게 베풀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고 말에 불과하다.

천원이 있을 때 베풀지 못하면
수천억이 있어도 베풀 수 없다.

선이란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저질러 행하는 것이다.
선에는 과거나 미래가 없다.
과거에 이미 베풀었던 선에 매이거나,
미래에 앞으로 베풀면 되겠지 하는 생각은 선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실천되어지지 않은 선은
선이 아닌 악의 씨앗이다.
지금 여기에서 선을 베풀지 않으면
마음은 저절로 악을 즐기기 때문이다.

선을 저질러 실천하지 않는 마음은
악을 연습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선에 게으른 것, 그것이 바로 악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행하지 않으면
마음은 저절로 악을 즐기게 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행할 수 있는 선은 무엇인가.
거창하고 대단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행할 수 있는 작고 소박한 선,
바로 그것이 온 우주가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